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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이방인들의 할례에 대한 논쟁 15:1-5

비록 하는 일들이 순풍에 돛 단듯 기분좋게 진행된다해도 안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혀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지상에 천국이 존재했었다면, 그곳은 분명 그 당시의 안디옥 교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조차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뛰어난 사역자들간의 평화가 파괴되었고 분열이 초래되었음을 보게 된다.

(1) 그들 사이에서 발생한 하나의 새로운 교리는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할례와 의식법에 복종할 것을 의무화한 것이다(1절).

1) 이 교리를 강요한 자들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안디옥을 방문한 이유는 그곳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사령부인 동시에 이방인 개종자들의 총집결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거기서 세력을 확보할 수만 있었다면, 모든 이방인 교회들을 점거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한가지 결점이 있다고 하면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또다시 무지해지거나 그릇된 교육을 받지않도록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2) 그들의 기본 입장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였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품고 있었다.(21:20). 그들은 그 율법의 권위 속에서 양육받아 왔기때문에 그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것의 권위가 신성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교육을 통한 편견은 일순간에 극복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묵인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그 율법에 얽매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방인 개종자들도 동일한 의무를 지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칙과 법칙으로 가르침으로써 자신의 행동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든 행동을 나쁜 것으로 결론지으려는 괴퍅스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었던 그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졌던 메시야관 즉, 그가 유대민족의 편에서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들의 기대가 전혀 어긋나자 그들은 실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방인들 사이에 받아들여져서 그들 가운데에 그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실현되어 비록 다른 방법으로서이긴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강대한 유대인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설사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 그릇된 사상을 지닌 자들이 그 왕국을 확장시킨다는 명목으로 악한 수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이 할례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즉 만일 너희가 우리의 생각과 방식대로 따르지 아니한다면, 너희는 정녕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지옥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무리 선량한 신자라도 구원을 얻지못하면, 구원 자체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

(2) 바울과 바나바는 이 종파 분열적인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2절). 그들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교리에 결코 승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서 그의 진리가 배척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가 의식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세례를 위주로 삼았을때,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적인 어버이로서 그들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찌기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이 위험천만한 그릇된 사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치가 취하여졌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및 그들과 함께한 몇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3절).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예루살렘에 의뢰한 것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친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왔으며 또한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그곳 교회로부터 그러한 지시를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사람을 파송하는 것이 매우 적절한 조치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은(24절) 사실이었으나, 그곳의 사도들로부터 그러한 지시를 받은 사실은 결코 없었다. 또한 이 사건을 예루살렘에 의뢰한 또다른 이유는 이러한 교리를 교육받은 자들이 '예루살렘의 장로와 사도가' 그같은 교리에 반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경우, 그 유대인들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밖의 이유는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는 하나의 쟁점에 관해 자문 받는데에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가장 적합한 상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결정이 그 논쟁을 종결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4) 이러한 사명을 띠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3절). 이처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입장에 선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들은 그들의 여정에서도 선한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또한 그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면서 모든 형제들에게 기쁨을 안겨다준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해 선포하였다. 복음의 전파는 커다란 기쁨의 사건이며, 또한 기쁨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족에 속한 모든 형제들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가족으로 들어오게 될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족을 그 자녀의 수가 증가된다고해서 결코 가난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천국에는 그 가족 모두에게 충분한 양식 재물이 있다.

(5)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4절). 그들의 친구들이 그들에게 베푼 성대한 환영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극진한 사랑과 우정을 표하면서 그들을 영접했다. 그들도 예루살렘의 친구들이 베푼 극진한 환대에 보답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했으며 이방인 세계에서 수행한 목회활동의 성공담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오가면서 심고 물을 주었다. 그러나 이 모두에서 그들은 자라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꺼이 고백할 수 있었다.

(6) 여기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할례 주장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이 일어나 말하되(5절). 그 반대 입장에 선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복음에 대하여 지나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복음에 의해 얽매여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에는 통치자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그를 믿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를 믿게 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신실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일순간에 완전히 제거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후에 신자가 된 바리새인들도 지난날의 타성에 어느 정도 젖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아닌 일부의 사람들이 그러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Ⅱ. 이방인 복음 전도에 대한 회의 소집 15:6-21

우리는 여기서 이 사건에 관하여 소집된 회의 장면을 보게 된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6절). 그들은 이 문제를 경솔하게 판결하지 아니하고 심사숙고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이 문제의 내막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며 또한 반대파의 진술을 청문할 기회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이 교회에 발생했을 때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함께 참석한 중대한 회의에서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 설정이 내려졌음을 보게 된다. 즉, 거기서 그들은 서로의 사상을 이해하고 상호간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베드로의 연설(6-11)

그는 이 회의의 신실한 일원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신상 발언을 피력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찬반 논쟁이 야기되었으며, 그러한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연설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양측의 연설을 들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섰다.

(1) 베드로는 오래 전에 이방인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이 위임받은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사도들 중에 한사람을 택하셨는데 내가 그 택함을 받은 장본인이다. 이는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음이라(7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참된 삶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을 기뻐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참조.행 11:18) 그런데 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들은 이방인들이 강제로 할례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2) 베드로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1:15-17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선물받은 자들이 곧 그의 백성들임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된 징표로서의 성령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나 우리를 분간치 아니하셨도다(9절). 즉, 비록 그들이 이방인들일지라도 우리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보좌로 환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형제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정하셨던 조건 이외에 그 어떤 조건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이제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믿음을 통하여 정결해졌으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데 합당한 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방인들이 우리의 정결 의식법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9절). 모든 성도들의 신앙은 똑같이 고귀한 것이며, 값진 효과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들간에 신앙적인 차이가 있다해도 서로를 결속된 공동체로 생각해야 한다.

(3) 베드로는 모세 율법의 의무에 이방인들을 복종시키려는 선생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절). 여기서 베드로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다 확실한 성령의 은사에 의해 이미 정해진 일들을 문제삼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다음의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계시는가? 혹은 하나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정하지 아니한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며, 그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그 제자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오셔서 속박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해방시킨 사람들을 다시 노예로 삼으려 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이제 이 교사들이 유대인들에게서조차 벗겨주신 멍에를 다시 이방인들의 목에 씌우려고 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위법행위였다.

(4) 유대인 사도들은 할례가 구원받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시사한다(11절).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10절). 할례받은 우리나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 모두 구원을 받게 된다.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유대인들의 구원받는 방법과 이방인들의 구원받는 방법이 각각 별개의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모세의 율법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가? 또한 왜 우리는 우리와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빼앗고 그것만을 강요하는가?

2. 바나바와 바울이 발언한 내용(12)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12절). 그들의 이 발언은 전에 안디옥 교회에서도 행한 것으로(14:27) 이곳 예루살렘 회의에서 제차 행해졌다. 그리고 이 발언이 여기서 행해진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하나님께서 율법 없이도 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시인하셨음을 보여주셨다.

(1) 그들이 설명한 내용 :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설명했으며, 자연계의 기적들을 통해 그들의 설교가 확증된 것과 은혜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들의 복음전파가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입장을 옹호해 주셨는데 그들에게 그 이상의 무슨 변호가 필요했단 말인가?

(2) 그들의 말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 : 온 무리가 조용히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기된 모든 논쟁들 중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더 주의 깊게 경청했던 것 같다. 자연 철학과 의학에서 실험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서도 은혜의 말씀에 대한 최고의 해설은 은혜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관한 설명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사실을 선포한 자들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야 할 것이다.

3. 회의에서 행한 야고보의 연설(13-21)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일어났다. 여러 사역자들의 말을 청문하는 것은 진실의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다.

(1) 야고보는 참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13절). 즉 우리 모두는 형제요, 이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신자들을 괴롭혀서는 안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2)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에 관한 베드로의 진술을 언급한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14절) 그 이방인들 중의 첫 열매가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소견을 밝혔다. 즉, 이방인의 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며, 이방인들을 방문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교는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방문하여 구원하셨을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까지도 방문하여 구원하셨던 것이다. 이방인들의 개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셨듯이 오늘날에는 이방인들을 택하신다.

(3) 야고보는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확증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예고되었으므로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15절).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예언자들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관하여 다소간 언급하였다. 메시야가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어야 한다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피하고 보다 불명료해 보이는 하나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것은 아모스 9:11,12절에 기록된 예언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메시야 왕국의 건설(16절) :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 장막은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수세대 동안 다윗 가문의 왕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그 장막을 재건하시어 그 폐허된 잿더미속에서 하나의 불사조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야 비로소 이 예언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윗 가문에서 탄생하심으로써 뒤늦게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윗의 장막으로 불리워 질 수 있다. 이 장막은 때때로 매우 비천하고 황폐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건되어 활기를 되찾고 살아날 것이다.

2) 이 일으킴의 결과로써 이방인을 오게함(17절). 이는 그 남은 사람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가시적 교회밖에 남아있던 남은 자들에게도 주를 찾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주를 찾기 위해 오게 될 것이다.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이 말은 야고보가 첨가한 것이다)찾게 하려 함이라. 주의 이름이 그들에게 선포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도 그들을 그의 백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들의 일치된 관점에서 '그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들'이라고 본문에 기록되었다. 이제 이 약속은 성취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행하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언행은 일치하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결합하는 것과 이를 위해 행해진 모든 일들은 다음의 두가지 사실에 기초한다.

첫째, 이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모든 도구들을 사용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매우 흡족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이다.

(4) 야고보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에 귀결시킨다(18절).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말씀하셨으며, 그의 영원하신 경륜속에서 그것을 예정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행하시든 간에 미리 계획하고 정하신다. 그는 자신이 정한 것은 무엇이나 행하실 뿐만 아니라(그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월등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목표나 방책은 좌절되거나 무산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자신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이미 결정된 것이다. 우리의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신다. 우리는 근시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가련한 피조물들이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들이라해도, 그들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사소한 부분적인 것이며 그것마저도 전혀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지속에 분명한 확실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5)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19절). '내 의견에는'이란 말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권위적 입장에서가 아닌 조언자의 입장에서 말함을 뜻한다. 그의 견해는 이러하다.

1)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의식법 준수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야고보 자신은 이방인을 극진한 친절로써 대할 것이며 그들을 괴롭히거나 동요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그들을 결코 강요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야고보 자신은 이방인을 극진한 친절로써 대할 것이며 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불확실한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초심자들을 실망시키거나 동요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먼저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깊이 느끼게 할 때, 그들은 만족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유대인들을 가장 불쾌하게 하는 몇가지 문제들에 관해서는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낫다.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다음의 두가지 사항만 절제한다면 유대인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소한 것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유대인들의 감정을 격분시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야고보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이 두가지는 나쁜 것으로 항상 금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하도록 신중하게 경고했으며, 그들이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하지 말 것과 특히 그들의 제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또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이 죄악에 대한 바울의 경고는 얼마나 맹렬하고도 강압적인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개종후에도 그들 사이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된다고 지적했으며, 더욱이 이방인의 사도들이 그러한 사실을 묵인하고 있음을 공박하였다. 이제 야고보는 유대인들이 이러한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방인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에 대하여 공적으로 경고 받아야 할 것을 충고하였다.

둘째,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경고했다. 이 두가지 경고는 모세율법 이전부터 금지된 것이다.

(6) 야고보는 자신이 경고하게 된 이유를 제시한다. 즉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의식법의 거룩한 명령에 길들여져 왔으므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러한 제의적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21절). 모세는 그들에게 계속 설교되었고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도록 요청되었다.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들은 '회당에서 안식일날' 읽혀졌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세의 율법에 따라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예로부터 행하여져 오던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에 대한 존경심을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다. 이러한 관습이 모든 성에서 행하여져 왔으므로 이같은 율법의 요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설사 그들이 그러한 율법의 요구에 거부감을 느낀다해도, 그들을 비난한다거나 그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무시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하며 그들과 절충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처럼 사도 야고보는 양자 모두를 기쁘게 하며 격분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절충하는 중재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Ⅲ.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 내용 15:22-35

우리는 여기서 회의 내용의 결과를 보게 된다. 야고보의 조언은 공동의 재가를 얻게 되었다. 이방인 개종자들의 편에 선 사역자들을 통해 편지가 발송되었으며, 이 서신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항거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파송될 대표자의 선택(22)

(1) 그들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22절) 이 결정은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합의를 본 것이다. 그들이 자매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대해 관심을 표시한 것은 그 교회의 처한 상황을 분명히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대표 사절단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동반시킨 것은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귀향을 보다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이러한 조치는 그들이 전달하는 서신의 공신력을 더할뿐 아니라, 일부의 반대가 예상되었으므로 그 메시지가 지닌 공신력을 더욱 강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었다. 또한 이 조치는 성도들의 교제를 유지하고 수효는 많아도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취해졌다.

(2) 그들이 파송한 사람들은 우편배달이나 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로서 형제들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 사절들은 바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였다.

2. 예루살렘 회의의 견해를 통보하는 서신의 작성(23-29)

(1) 이 서신의 서문은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작성되었다(23절). 이 서문에는 사도들의 겸손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그들이 장로와 형제들과 일치하여 이번 문제에 대해 조언했던 자들에게 위임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했음을 알 수 있다(마 23:8). 그들이 보여준 존경심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먼저 문안 인사를 보냈으며 그들을 '이방인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그들에게 친교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러분은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형제입니다." 이제 이방인들은 같은 지체에 속한 동료 상속권자들로서 격려를 받고 형제로 불리워져야 한다.

(2) 유대주의적인 교사들에게는 냉정하고도 가혹한 비난을 하고 있다(24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그들이 우리의 추천을 받고왔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에게 모세의 법을 강요하게 하는 그러한 명령을 결코 그들에게 내리지 않았다. 그 거짓 교사들은 "너희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신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전하는 자들을 신뢰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세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자들때문에 여러분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쓸데도 없는 하찮은 말로써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교회는 자기 말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해 왔던가!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혼을 파괴했고 혼돈시켰으며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것을 허물어뜨렸다.

(3) 이 서신의 전달자들에게 대한 영예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첫째,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증언 : 그 유대주의적인 교사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일을 망쳐놓았다고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교로 전향시키지 않고 기독교로만 개종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바울과 바나바'이다. 때로 고위층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칭찬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자들이었다(26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였다. 이처럼 신실한 고백자들을 불신실한 설교자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둘째, 유다와 실라에 대한 추천 :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25절)로서 회의에 참석하여 모든 논쟁을 청문한 사람들이며 '그 일을 말로 전할 자들'(27절)이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글과 말로써 동시에 전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4)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금지 사항을 지시하고 있다.

1) 이 금지 사항의 내용은 야고보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우상의 제물도 먹어서는 안되며 그것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해야만 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금지령은 익히 알려져 있다. 또한 그들은 피를 마셔도 안되었으며 목매어 죽은 것이나 혹은 피를 완전히 제거치 않은 것도 먹어서는 안되었다. 그들은 음행의 죄를 범한 사람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행위이므로 이런 문제로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2) 이 지시를 전함에 있어서 그들은 권위있게 자신들의 결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이 성령과 우리에게 가한 줄 알았노니'란 말은 그 지시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우리에게 적절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어떤 점이 자신들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성령께서 보시기에 좋았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렇게 지시했던 것이다. 그들은 넘치는 온유함과 부성애적인 관심으로 그 결의 내용을 전달한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부담을 안겨다 주기를 꺼려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너희에게 더이상의 아무런 짐도 부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삶을 시작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과중한 짐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이 실망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외에는 어떠한 짐도 부과하지 않는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무로 정하신 필요한 의무만을 부과해야 한다. 그들은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낼 권한을 갖지 못하며, 다만 그리스도의 법이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살펴야할 따름이다. 그들은 그 지시를 위반할 경우에 있을 저주를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지킬 경우에 주어질 좋은 결과를 말함으로써 그들의 지시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29절). 이 말은 매우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적절한 유머였다. 진실된 사도들의 태도는 거짓 교사들의 태도와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거짓 교사들이 의식법을 강요한 태도는 단호하고도 명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권했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온유하고 정중하게 말한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즉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예와 평화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3. 서신의 전달(30-35)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가. 그들은 용무를 마치자 더이상 예루살렘에 체류하지 않고 곧장 돌아왔다. 그들은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달하였다(30,31절). 그러므로 그 모인 무리들은 자신들에게 금지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다(31절).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의식법의 멍에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할례의 강요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로써 이방인 개종자들은 용기를 얻어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었다. 이제 교회의 평화는 회복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파송된 생소한 사역자들 즉 유다와 실라를 맞아들여 그들의 설교를 전해 들었다(32절).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32절). 바울과 바나바의 연속 설교를 듣던 사람들도 유다와 실라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사역자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는 교회에 유익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형제들에 대한 사역자들의 임무가 무엇인가를 관찰해 보자.

첫째, 그들을 확신시키는 일이다. 즉,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결의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을 인내하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즉, 그들을 깨우쳐 선한 일을 하게 하며 그렇게 살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형제들을 위로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로가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기쁨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감명을 얻을 수 있는 말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들이 전해야만 하는 말은 몇마디 말로써 요약될 수 있지만, 그들이 많은 말을 사용한 것은 교회의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나서 예루살렘 사역자들은 돌아갔다(33절). 그들은 안디옥에 얼마동안 머물러 있다가 그곳 형제들로부터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돌아갔다. 실라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실라는 안디옥에 머물러 있기로 택했던 것이다(34절). 그가 왜 안디옥에 머물러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과 바나바는-이방인의 전도가 그들의 주된 임무였지만- 당분간 안디옥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안디옥은 모든 지역에서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중심 도시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안디옥에서의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들의 주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곳에는 같은 일을 위해 수고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그 많은 일꾼들을 볼때 안이하게 쉴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일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열정적인 유익한 활동을 통해서 자극 받아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Ⅳ.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 15:36-41

우리는 여기서 두 사역자 즉 바울과 바나바와의 개인적인 다툼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잘 마무리되었다.

(1) 여기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가서 이방인들에게 행한 그들의 사역을 재정비하고 그것을 새롭게 진행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제 안디옥은 그들에게 안전하고 조용한 항구가 되었다. 바울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재정비하고 회복하고자 그곳에 입항하였음을 상기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바다로 여행을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임무가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상기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하였다. 본문의 '수일 후에'라는 말은 그의 활동적인 정신이 자신의 임무를 떠난 상태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그의 담대하고도 용감한 정신 역시 위험을 떠나서는 오랫동안 있을 수 없었다.

1) 바울은 오랜 친구이자 동역자인 바나바에게 이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간에 도울 수 있는 길이 많다. 그러므로 솔선수범하여 도움을 주고받아야 할 것이다. 군인은 혼자서 출전할 수 없는 법이다.

2) 누구를 위하여 방문이 계획되었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씨뿌린 들판을 가서 보자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절)는 것이었다. 바울은 모든 신자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성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그 뿌려진 복음의 씨앗에 물을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방문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드린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듯이, 우리의 복음전파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3) 어떠한 목적으로 이 방문이 계획되었는가?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절). 바울은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볼 목적으로 그들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회복기의 환자를 방문하여 그 병의 쾌유와 재발을 막는데 적절한 조치를 내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들의 방문 목적을 살펴보자.

첫째, 그들이 어떤 정신상태로 살고있으며 어떤 영향을 받고있는지,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둘째,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이 기뻐하면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 그들이 울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울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2) 조력자 문제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일치하지 못했다.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그의 조카 요한을 그들과 함께 데려가기를 원했다(37절). 그가 요한을 데려가기 원한 이유는 그의 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편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 반성해야 하며, 친척에 대한 편애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바울은 바나바의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다(38절). 바울이 요한을 부적격자로 단정한 것은 전에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그들을 떠나 그들과 함께 사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행 13:13). 그는 그들의 임무를 착수하려는 순간,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두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성실하게 약속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러한 사람에게 영예로운 과업을 맡기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최소한 요한이 더이상의 수련을 받기까지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한번 속이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3) 이 불일치는 분열로까지 확대되었다. 결국 그들은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간의 흥분이 과열되어 그들은 피차 갈라서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팽팽한 대결로 맞섰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한심하고도 교훈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1)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자신들 역시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이 두 훌륭한 인물들의 고백(행 14:15)은 이제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필자는 그 논쟁에 있어서(이러한 경우에 흔히 그렇듯이) 양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논쟁으로 치열하게 대립한 것과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서로 양보하지 아니한 것도 양자의 잘못이었다. 제 삼자가 그 논쟁에 개입하여 그 과열된 분위기를 중재하지 못했다는 것이 유감스런 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결점을 핑계 삼아 자신의 혈기와 열정을 변명하는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비난을 자제하는 것과 그들을 중재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회개는 우리들 자신이 엄격히 반성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자비는 우리가 타인에 대해 공정한 입장을 지녀야 함을 가르친다. 이 모든 일에 흠없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므로 우리는 그 분을 본받아야 한다.

2) 비록 선량하고 현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화가 야기된다 해도,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같은 예수 안에서 결합되고, 같은 성령 안에서 성결된 자들조차도 견해와 주장이 다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도래할때야 비로소 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3) 이러한 의견 충돌은 종종 분열의 파국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믿지않는 유대인들의 박해나 믿는 유대인들의 속임수에 의해서도 결코 분열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 사이의 의견 충돌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다.

(4) 그러나 이 불미스런 사건은 좋은 결과로 맺어졌다. 사도들이 당한 고난과(빌 1:12) 심지어 그들간의 분쟁 사건이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더욱 촉진시켰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하나님은 만일 그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모르신다면 그러한 불행한 일들을 허락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1) 이로써 그들은 더많은 장소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바나바는 다른 장소 즉, 구브로로 항해 하였는데(39절), 그곳은 그들이 전도활동을 시작한 장소였으며(행 13:4) 그의 고향이었다(행 4:36). 반면에 바울은 다른 방향을 택하여 그의 고향인 길리기아로 떠났다(행 21:39). 그들은 각각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셨다.

2) 이로써 이방인 복음전파에 더많은 일손들이 동원되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은 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당했었으나, 후에는 매우 유능하고 성공적인 일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실라가 새로운 일꾼으로 채용되었다.

(5) 그밖에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입장을 지지했던 것 같다. 바나바가 조카와 함께 구브로로 항해하였는데, 그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그곳을 떠날 때, 그는 주님의 은총을 비는 형제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바울 자신과 그의 전도여행의 성공을 위하여 공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또한 그들은 그의 모든 활동 중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였다. 항상 훌륭한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2) 그러나 후에 바울은 더많은 시련을 통하여 성숙한 마가에 대해 좋은 견해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낼 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책망해야 할 사람조차도 적당히 책망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후에 좋은 평판을 얻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망받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절제함으로써, 그들의 신실성이 증명될 때 우리는 그들의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책망받아야 할 자들이라도 후에 더욱 신실한 자로 입증된다면 우리도 그들의 과거를 잊고 그들을 기쁘게 받아들여 용서하며 그들을 호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바울이 기꺼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41절). 사역자들은 믿지않는 자들을 개종시키는 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을 확신시키는 일에도 고용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해설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 ( 15 )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과 믿는 자의 수가 더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이 전하여지고, 복음으로 이룬 공동체가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지며, 그로 인하여 믿는 자들이 많아지는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관심을 끈 것은 교회에 나타나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교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1. 안디옥에서의 논쟁

1)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듣고 기쁨이 가득했던 안디옥 교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갈등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갈등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는 교회들이 유대적 기원을 갖고 있었고, 또 예루살렘 교회 자체도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번져 나가는 일을 감독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 전도는 미처 예상치 못한 규모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사실만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윤리적 수준을 지키는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하듯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였을 것입니다.

a.모세의 법(레12:3)

b.그릇된 할례관(갈6:13)

2) 예루살렘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들과 심한 변론을 했지만, 결국 이 문제는 교회의 최고 책임자들 수준에서 해결할 문제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두사람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흩어진 교인들이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곳 교인들은 이방인 선교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바리새인 중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a.교회의 분쟁(고후12:20)

b.변론(딤후2:23)

 

2. 예루살렘 회의

1) 베드로의 의견

본문의 회의는 '예루살렘 공회'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방인 신자들도 교회의 같은 지체로 인정해야 할지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모임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증인으로 초청되어 참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그들과 똑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밝힌 후,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참석자들에게 이방인들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고넬료의 집에서 최초로 복음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으셨고, 유대인들에게 내리신 성령을 똑같이 내리셨으므로 하나님이 지우시지 않은 짐을 이방인에게 지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마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최근의 전도여행을 말하며 베드로의 의견을 지지했습니다.

a.하나님의 공평(롬2:11)

b.하나님을 시험함(시106:14)

2) 야고보의 결론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다른 유대인의 관습을 부과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금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울러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질지도 모르는 불안과 불만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양심상 거리낌 없이 새로 가입한 이방인 신자들을 맞이할 조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의 고기나, 피를 완전히 빼지않은 고기 등 유대인들이 꺼리는 특정 음식을 삼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에 관한 율법의 규정에 순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판단을 구약 성경 암9:11-12절을 인용함으로써 뒷받침했습니다. 야고보가 인용하는 성경은 그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a.우상의 제물(겔4:14)

b.음행(고전10:8)

 

3. 사도들의 편지

예루살렘 공회의 동의를 얻은 야고보의 결론은 그가 제안한 몇 가지 대안들과 함께 편지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를 선출해 편지의 내용을 확증하고 설명하여 전달토록 했습니다. 이 편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서 유대에 내려와서 할례를 주장하던 자들에게 그런 일을 할 권한을 준 일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성령의 뜻에 따른 것으로 확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그 내용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낌 없는 사귐을 갖게 했고, 이 문제가 해결되자 그들은 새로운 각오로 봉사와 증거의 사역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a.짐을 지우지 아니함(계2:24)

 

4.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

수일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얼마 전에 세워진 구브로와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했고, 바울은 마가가 지난번 버가에서 돌아갔던 일을 기억하면서 그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두사람은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도여행이 두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가 자기와 관점을 같이할만한 사람임을 발견하고 새로운 여행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a.'예' 라(고후1:19)

 

결론

본장은 교회가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려 할 때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을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 핵심

15:1-21

이방인 신자들의 할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예루살렘 공의회에 관한 기록이다.

예루살렘 공의회(15:1-29)

‘예루살렘 총회’라고도 한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 회의로서 이방인 신자들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 신자가 꺼려하는 제사 음식과 음란한 행위만은 삼가도록 권하기로 결의했다. 그러고 나서 이방인 교회에 대표자들을 파송해 총회의 결의 사항을 공식 통보했다.

 

 # 묵상

유대인들의 구원관 ( 15:1 )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원관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던 이 행위는 언약 공동체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하나의 징표일 뿐인데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할례 문제로 인한 논란 해결 ( 15:2-11 )

당시 안디옥 교회에서는 할례 문제로 많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의 핵심을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 얻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과 변론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변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 초대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베드로의 단호한 설명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역설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거져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이 은혜에 동참하는 자만이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할례는 복음의 핵심을 이끌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야고보의 권면 ( 15:15-20 )

야고보가 제시한 말씀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고, 남은 사람들과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암9:11, 12). 이는 장차 메시야가 다스리는 세상이 도래할 것과, 그날에 유대인과 구원받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참예하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뜻하며 음행은 성적 부도덕이나 부정한 결혼을 뜻하고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은 피가 흥건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며 단지 유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타협책일 뿐입니다.

바울의 제안 ( 15:36 )

바울은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말씀전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가 제1차 전도여행 때 전도했던 사람들을 다시 방문하여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 더불어 말씀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제의는 지도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늘 진솔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지도자야말로 이 세대가 필요로하는 진정한 사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 15:37, 38 )

이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낙오한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이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마가는 바울의 제1차 여행시에 낙오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신뢰할 수 없었으나, 바나바는 개인적으로 마가와 가까웠고 그를 믿었기에 한번의 실수를 용서하기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결별은 더많은 전도자들을 파송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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