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이고니온에서의 바울의 전도 14:1-7

1. 이고니온에서의 복음전도(1)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듯이 신앙고백자들의 추방은 그 씨앗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두 사도는 비록 안디옥의 유대인들로부터 가혹한 대접을 받았지만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는 일에 기분이 저하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때문에 전체를 정죄하는 일은 삼가야 하며 또한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사람이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사도가 서로 협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단합심과 상호간의 애정을 입증하기 위해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

2. 그곳에서 거둔 사도들의 복음전도의 성공(1)

두 사도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1절). 이 헬라인들은 물론 이방인들이다. 복음은 이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앞 장(13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복음이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에게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뒤로 처질만큼 그들의 우선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며 다만 이방인들이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으므로 이들 양자는 아무런 차별없이 함께 교회로 들어오도록 용납된 것이다. 그곳에서 행한 사도들의 전도방식 속에는 매우 특출한 어떤 요소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은 '그들이 말하니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전한다(1절). 이것은 사도들이 매우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그리고 온화하고 애정이 넘치는 자세로 전도했음을 입증한다. 그들이 말한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그대로 청중들의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담대히 말하였으므로 청중들은 '하나님이 진리로써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그곳에서 직면한 사도들의 복음전도에 대한 반대(2)

불신앙의 유대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최초의 화근거리였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2절).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미친 복음의 감화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영접이 몇몇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거룩한 질투를 유발시켰듯이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자극이 사악한 질투를 유발시켰다.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자극에 의해 복음의 감화를 받지못한 이방인들은 사도들을 괴롭히는 도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말로써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종시키려는 자들과 개종한 자들에 대해 심술궂고 악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선한 사람들에게 악감을 품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험담을 퍼붓고 해로움을 끼치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그들의 악의(惡意)에서 기인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들이 이방인의 마음을 '성가시게 굴었다'고 해석한다. 즉 이 말은 그들이 이방인들을 계속 치근거렸다는 의미이다. 박해자들의 도구로 쓰이는 자들의 생리는 계속 치근대는 개 같은 것이다.

4. 그곳에서의 사도들의 계속적인 임무 수행과 하나님의 돌보심(3)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1)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했다. 이방인들이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대해 악감을 품고 있었으므로' 혹자는 그들이 추방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오래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 사도들은 초심자들에 대한 악의를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들의 일을 수행하는데에 정진하였다. 그들은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하였다. 여기서 무엇이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추호도 자신을 의존하지 않았으며 주안에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

(2)그리스도는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대로 사도들과 함께 일하신다. 그는 반드시 자신의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제시하신다. 복음은 은혜의 말씀이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신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 은혜의 말씀의 증거가 되신다. 그는 우리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시키셨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들에 관하여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3절). 하나님의 신성한 은혜의 능력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더 큰 기적을 행하셨듯이, 그들은 자연계의 기적을 행하였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하는 동안 주님도 그들과 함께하셨다.

5.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성내 무리의 분열(4)

본문은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라고 전한다(4절). 이 복음전도 사업은 매우 널리 알려졌으므로 성내의 무리들 각자는 그것에 대한 찬반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립을 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노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예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눅 12:51-23).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여 그의 조처에 응했더라면, 모두가 합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일단 일치점을 찾지 못하면 그 간격은 바다처럼 넓어지게 된다. 온 성이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는 일부분이나마 천국으로 가는 편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복음의 전도가 분열을 야기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파멸로 이르는 물결에 자신을 맡겨 떠내려가는 것보다 그 흐름을 역류하여 헤엄치는 분리자가 되어 백해를 받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6. 사도들에 대한 적들의 공격(5)

사도들에 대한 적들의 적대감은 마침내 폭력적인 불법행위로 돌발하였다. 그 음모자들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원들이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상호 원수지간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대적하는데에는 연합하였다. 이와같이 만약 교회의 적들이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해 연합한다면, 교우들도 역시 교회의 보존을 위해 연합해야 하지 않을까?

그 음모의 내용 : 그들의 계획은 두 사도를 능욕하여 망신시키며 그 다음에 그들을 돌로 치려는 것이었다.

7. 사도들의 구원(6,7)

사도들은 자신들에 대한 그들의 음모를 눈치채고 도피하였다. 그들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불명예스런 도피가 아니라) 명예로운 퇴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폭풍우속에서도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안식처를 마련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도 해야할 일을 발견하였으며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은 애써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성읍들로 가서 그곳과 그 근방에 복음을 전하였다. 사역자들이 박해를 당할때에 장소를 포기해야할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Ⅱ. 두 사도들의 루스드라에서의 복음전도 14:8-18

(1)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기적을 통하여 날때부터 불구였던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였다.

1) 그 가난한 앉은뱅이의 가련한 처지(8절) : 그는 발이 허약하여(말 그대로) 발을 쓰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그렇게 되어 이제까지 한번도 걸어 보거나 서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2) 치유에 대한 그의 기대(9절) : 그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대단한 감화를 받았다. 바울은 그의 영적분별력에 의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앉은뱅이의 인상에서 그의 치유에 대한 기대를 목격했을 것이다. 본문은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절)라고 전한다.

3) 그의 완치(10절) : 치료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본 바울은 말씀으로 그를 치유하였다. 바울은 주위의 사람들을 주목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치유의 기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 앉은뱅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본문에 '그가 앉았다'(8절)고 언급된 것은 그가 구걸하기 위해 앉아있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네 스스로 힘을 내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이 말을 얼마나 고맙게 받아들였겠는가하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본문에는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10절)고 전한다. 즉 그는 똑바로 설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리저리 걸어다닐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영적 불구상태를 치유받은 자들은 반드시 거룩한 환희로 가득차서 뛰어다니고 거룩한 대화를 나누기위해 걸어다님으로써 자신들이 치유받은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2) 이 치유가 백성들에게 끼친 감명 : 그들은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비록 그리스도는 숱한 기적을 행하시고도 유대인들의 가장 극심한 경멸로부터 피할 수 없으셨지만, 여기서 사도들은 이 한가지 기적의 역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실로 위대하고 영예로운 인물들로 부각되었다. 백성들은 사도들을 신으로 여겼다. 그들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절)라고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신들이 이 지상세계를 방문했다는 그들의 황당무계한 설명과 충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들이 자신들을 방문할만큼 자신들이 충분히 자랑스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생각을 곧장 실천에 옮겨 자신들의 신들에게 붙이는 호칭을 사도들에게 적용했다(12절).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 즉 쥬피터로 칭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신으로 여기려 한다면 그를 자신들의 신들 중 제일인자로 삼는 것이 용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허매, 즉 머큐리라고 칭했다. 머큐리는 신들의 사자였다. 그들이 바울을 그렇게 부른 이유는 그가 '그중에 말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제사장은 곧 그들에게 제사할 준비를 하였다(13절). 쥬피터 사원은 그 성의 수호자이자 보호자로서 정문6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 사원의 제사장은 백성들의 이러한 외침을 듣고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쥬피터가 몸소 그들 중에 나타났다면, 제사장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영예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제물을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한가지 기적의 역사를 통해 즉시 신격화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제물로 바칠 소를 가져왔고 또 그 제물을 장식하기 위하여 화환을 가져왔다.

(3)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간신히 모면하였다. 수많은 이방 세계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며, 신적 영예를 누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영예가 부여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알고 거룩한 분노를 발하였다.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듣고 옷을 찢고(14절). 우리는 사도들이 백성들로부터 비방을 당할때 자신들의 옷을 찢었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동요됨이 없이 그 비방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들을 신격화하여 그들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때, 그들은 그것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사도들은 그 일을 저지하려고 애썼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도로 선택하심으로써 그들을 충분히 영예롭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제왕의 영예나 신들의 영예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제사를 어떻게 저지하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들은 그러한 말을 듣자 곧장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 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영예를 기대하면서 가만히 서있지 않고 오히려 그 무리들 속에 뛰어들어감으로써 그 제사에 대한 거부의 의사를 명백히 표명하였다. 사도들은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어찌하여 여러분이 우리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느냐'고 외치면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1)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가 우리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영예를 돌린다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 영예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불과할뿐만 아니라 그것도 죄많고 고통에 가득찬 인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신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2) 우리의 가르침도 그와는 정반대이다. 너희가 섬기는 신들을 멸해야할 우리가 어떻게 그 신들 중의 하나가 되겠는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15절).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을때에는 그들과 상관없는 숭배를 반박할 설교를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만을 전파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할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자연 종교가 가지는 오류를 시정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이방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숭배한 신들과 그 신들에 관한 그들의 모든 예배의식은 헛된 일 즉 쓸모없고 불합리하고 무익한 짓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했다.

둘째, 그들이 돌이켜 섬겨야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생명이 없는 형상들을 숭배했었다. 그 형상들은 전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숭배할 것을 권고받고 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셋째, 이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요 모든 존재의 권능의 원천이시라는 점이다. 그는 천지와 바다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셨다. 우리는 너희와 모든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곧 참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너희에게 명한다.

넷째, 세상은 하나님의 인내의 은혜를 입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우상숭배를 보시고도 오래참으사 그들을 멸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16절). 그 신들에 대한 너희의 섬김은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세상에 보내셨으므로 만약 너희가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분은 결코 이전처럼 너희를 참으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알려질 한 계시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 너희는 더이상 우상숭배와 같은 헛된 일로 용서를 받지못하며 반드시 그들로부터 돌아서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으신 것은 우리가 건방져지도록 방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회개케하려 하심이었다. 우리가 무지할때 저지른 잘못은 우리가 좀더 깨우쳤을 때의 잘못을 결코 감싸주지 못한다.

다섯째,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시정을 직접 받지 않았을때에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형편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17절).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17절). 즉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증거외에도 그들의 주변에 널린 일반적인 섭리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죄의 일부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모든 변명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관한 다른 증거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증거하지 않은채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안내자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으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으셨다. 일반적인 섭리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한다. 비와 결실의 계절은 결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모든 힘들은 우리에게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한다. 하늘이 우리에게 비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유익함을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통하여 반드시 자신을 증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함을 증거하시는 것보다 그의 선하신 사례들을 베푸시는 것이 그의 칭호에 대한 우리의 존경을 일으키게하는 보다 풍부하고 유력한 증거들이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이 곧 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섭리의 선하심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례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용할 양식이므로 사도들은 이 사실을 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신가를 보여주고 있다.

①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주심으로써 선을 행하신다. 우리는 비로인하여 마실 물을 얻고 또 그 비는 대지를 적신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는 비를 마시듯이 우리가 먹는 음식도 비를 필요로 한다. 그는 우리에게 비를 주심으로써 또는 결실기를 주신다. 하나님의 모든 일반적인 섭리가운데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는 최선의 방법은 뇌성과 같이 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하늘로부터 비를 주시고 또 결실기를 주시는 선하신 분으로 생각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게 대하게하려 함이었다.

②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신다.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인일뿐만 아니라 관대하신 분이시다. 그는 음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되 단순히 필요한만큼만이 아니라 풍족하고도 맛있는 다양한 종류로 채워주신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도 살던 이방인들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셨다. 그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까지 먹는 것으로 가득찼다. 이러한 것들로는 영혼을 채울 수 없으며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해야만 한다. 음식으로 우리는 살 수 있고 기쁨으로 우리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음식과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음식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또한 우리는 사랑과 감사로 충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백성들의 행동을 만류하는데 성공하였다(18절).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18절). 그들은 간신히 백성들의 그러한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자 백성들은 그들을 신격화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할 것은 이러한 영예를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이러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Ⅲ.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당한 고통 14:19-28

1.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던 경위(19,20)

그들은 주 연사인 바울이 바나바보다 그들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성나게 했으므로 바나바는 제쳐두고 바울에게 덤벼들었다. 백성들이 바울에 대해 격노한 경위를 살펴보자. 유대인들이 안디옥에서 왔다(19절).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사도들에게 대하여 격노하도록 조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얼마나 지속적이었는가를 살펴보자. 그들은 복음이 어떠한 곳에서든 발붙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백성들의 분노가 이 야만스러운 유대인들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달했는가를 살펴보자. 폭도로 돌변한 그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그런 후에 그가 죽은 줄로 알고 그를 성밖에 끌어내쳤다. 인간들의 악을 제어하기란 무척 힘든 반면, 인간들의 악을 부추기는 것은 매우 용이한 일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세속적인가를 살펴보라. 한 때는 사도들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대우하던 자들이 이제는 그들을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오늘 호산나라고 찬양하고서 내일은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자들과 같다. 즉 오늘은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이 내일은 그들을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란 바람과 같이 돌변하기 쉽다. 바울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된 경위를 살펴보자. 그가 성밖으로 던져졌을때 제자들이 그를 둘러섰다(20절). 그곳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루스드라에서 제자가 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초심자들은 바울이 쓰러질때에도 그에게 순종할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을 지키려는듯 그를 둘러섰으며 또한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곁에 둘러 서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비록 그들이 죽음의 목전까지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는한 결코 죽지않을 것이다.

2. 사도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 경위(20-25)

백성들이 아무리 바울에게 돌을 던진다해도 그를 그의 사명에서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를 성밖으로 내쳤지만(19절) 그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그들에 대한 박해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유익한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으라는 하나의 암시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루스드라를 떠났다.

(1) 그들은 더베에서 새 땅을 일구었다. 다음날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을 떠나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21절). 더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언급이 없다.

(2) 그들은 돌아가면서 전에 복음을 전했던 곳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즉 그들은 더베에서 충분히 거한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다시 되돌아갔다(21절).

첫째,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초심자들은 동요하기 쉽고 조그만 일에도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사도들은 초심자들에게 와서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은총이니 그 안에 굳게 거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초심자들이 이 은총 안에 거할때 그리스도를 놓칠 위험성이 전혀 없으며 그를 붙잡음으로 얻는 것과 같은 유익을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초심자들이 어떠한 시련에 봉착하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그리스도께서 주신다는 사실과 그들이 어떠한 손해를 당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풍성히 보상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이 말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초심자들의 마음속에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이 일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심어진 나무는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의 임무는 죄인들을 일깨우는 것과 성도들을 일깨우는 것과 성도들을 튼튼하게 세우는 일이다. 참된 확신은 영혼의 확신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총뿐이다.

둘째, 사도들은 초심자들이 계속 믿음 안에 거할 것을 권고하였다. 곧 그들은 초심자들을 격려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인내는 그들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주지시켰다. 믿음 안에 계속 거하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또한 필히 그들은 종종 그렇게 하도록 권고를 받아야 한다.

셋째,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사실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 거하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혹자는 그러한 환난이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과 염려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본문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환난에 직면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일은 이미 예정되어진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할 박해를 감수해야만 하며 그것을 모면할 길은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모든 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이름을 내맡겼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기는 비용을 계산했을 때 올바로만 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환난은 그리스도 군대의 지휘관들의 운명이다. 너희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가 섬기신 이상 섬김을 요구하시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평신도들에게 그들 이상의 섬김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가 많은 환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환난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견뎌내야 할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 나라 안에서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하여 나아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해 면류관을 얻게되는 것도 사실이다.

넷째, 사도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사도들은 두번째 방문시에 그들을 고정된 사역자의 지도아래에 둠으로써 하나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므로 개교회는 치리자들과 당회장을 세우게 되었다. 교회를 관장하기 위해 개교회들은 필수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한두 명 정도 세워야 한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준수하고 준행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활동한 자들이었으며 사역의 사명을 위해 엄숙하게 따로 세움을 받았다. 이 장로들이 봉사의 직책을 맡게 된 것은 선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 믿음 안에서 세워져야할 필요가 있으며 그 속에서 장로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다섯째, 사도들은 금식 기도로써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였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때라도 그들에 대한 사역자들의 관심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그들의 신앙에서 결핍된 것을 완전케 할 필요가 있다. 믿는 자들은 극진히 돌보는 사역자들을 필연적으로 그들을 주님께 의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반드시 자신을 주의 보호에 의탁해야 하며, 그들의 사역자들도 그들을 주의 보호에 맡겨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을 주께 의탁하게 된다. '그들이 믿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그분께 의탁하는 자들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의 기도의 능력을 배가하기 위해 금식기도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친구들과 작별할 때의 가장 훌륭한 인사는 그를 주님께 부탁하고 그들이 주님과 함께 거하도록 당부하는 것이다.

(3) 사도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다. 안디옥을 출발한 그들은 비시디아를 경유한 밤빌리아 지방에 도착했다. 그 지방의 중심지는 그들이 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버가였다(행 13:13절). 이제 그들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곳에 다시 도착했다(25절).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출발하여 밤빌리아의 한 성읍인 앗달리아로 내려갔다. 그들은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으나 가는 곳마다 후에 설립될 교회의 기초를 놓기 위해,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면 엄청나게 증가할 씨앗들을 심어놓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26-28)

그들은 마침내 처음 파송을 명령받았던 장소인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였다. 그들은 앗달리아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안디옥에 이르렀다(26절)

(1) 그들이 안디옥에 오게된 이유는 그곳이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안디옥의 형제들은 그들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룬 일에 대해 마땅히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이 형제들의 기도를 통해 도움을 받았듯이 그들의 칭찬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사도들은 안디옥의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여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27절) 그들은 교회을 함께 모았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보고했다.

첫째, 사도들은 자신들의 노고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보고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고하고(27절).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만 전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계획하고 행하실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공하도록 역사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사역자들의 설교없이도 무엇이든지 이루실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은총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둘째,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거둔 그들의 노고의 열매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문을 통하지 않고도 결코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믿음의 문을 여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에 대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이로써 복음은 널리 전파되었고 더욱 그 광채를 발했다. 하나님께서 여신 이 문을 닫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3) 당시 그곳에서의 처신 : 거기서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8절). 그들이 이곳에 오래 체류한 이유는 적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곳의 동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 해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의 전도 사역 ( 14 )

바울과 바나바의 여행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보이셨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케 했습니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했고, 성도들을 믿음에 온전히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해 증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안디옥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1. 이고니온에서의 바울

1) 두 사도의 증거

이고니온에 온 두 사도는 여전히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설교가 너무나 영향력이 있어서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두 사도는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며 표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힘있게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안디옥에서처럼 성공적인 사역이 계속되었습니다.

a.유대인의 회당(약2:2)

b.은혜의 말씀(고전1:23-25)

2) 두 사도의 피신

그러나 성공적인 사역가운데도 다시 반대의 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악감을 품은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있는 사실은 원어에 나오는 3절의 접속사 '그러므로'입니다. 이것은 2절의 반대가 복음 전파를 위해 좀더 나은 기회를 제공했음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의미로는 그 반대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되어서 더나은 복음 전파로 이끌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후자가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 성내에는 무리가 두 부류로 나뉘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을 좇는 자와 두 사도를 좇는 자들이었습니다. 관원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로 피신했습니다.

a.순종치 아니하는 자들(롬15:31)

b.피신(마10:23)

 

2.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1) 쓰스와 허메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으로부터 약 29km 떨어진 동남방에 위치한 로마의 식민지요, 군사의 요충지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이 이적으로 인해 그 도시의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Hermes), 바나바를 쓰스(Zeus)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쓰스 신전의 제사장들은 그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오해를 해명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그 신들 중 위엄있는 통치의 신 제우스로 여기고, 바울은 그 신의 대변자 헤르메스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a.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행3:2)

b.바울을 신으로 봄(행28:6)

2) 바울의 설교

루스드라 사람들로서는 만일 그들이 신이라면 마땅히 희생 제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예배를 위한 준비는 이 선교사들이 말리기 전까지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알아듣지 못하는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곧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그 일을 막았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행동을 말리면서 자기들도 유한한 사람이며,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하시는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의 사자일 뿐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들에게 적절한 메시지로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그 주민들에게 그들이 살고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땅을 기름지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를 하나님이 주시며 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식물도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선교활동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함으로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a.인간에게 제사함(단2:46)

b.살아계신 하나님(살전1:9)

 

3.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바울

1) 바울이 당한 환난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신으로 숭배하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을 돌로쳐서 죽은 줄로 알고 끌어다가 성밖에 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않았고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를 향해 선교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남동쪽으로 96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더베는 로마 속주 갈라디아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였고, 두 사람은 이때 여기까지밖에 여행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나서 방향을 북서쪽으로 바꾸었습니다. 더베에서 바울은 그들이 왔던 길을 되밟아 가며 최근에 방문했던 도시들을 지나가면서 어린 교회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그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되돌아가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a.돌로 침(고후11:24-6)

b.의인의 환난(벧전2:24)

2) 안디옥을 향하여

바울의 고향 다소는 더베에서 불과 16여 마일 떨어졌으나, 두 사도는 최근에 세운 교회들을 견고히 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권면과 약속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권면의 내용은 많은 고난에 대한 예언이었고, 약속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후자는 분명히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교회뿐 아니라 조직에 있어서도 지도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서 자기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이 장로들은 회당에서 온 성경에 정통한 유대인이었습니다. 회당의 장로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왔던 길로 돌아가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차례로 방문했고, 안디옥에서 버가를 거쳐 항구도시 앗달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안디옥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일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셨음을 보고했습니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갔고 하나님께서 문을 여사 그들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a.장로들을 택하여 세움(딛1:5-6)

b.믿음의 문을 여심(골4:3)

 

결론

이렇게 해서, 그들은 몇달 전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 떠났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램시(Ramsay)는 이 1차 여행이 2년 4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감격케 했을 것은 이방인 교회로서 모교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 핵심

14:1-18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일대에서 전도한 기사이다. 루스드라에선 앉은뱅이 치유 사건과 관련해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숭배하려한 소동이 있었다.

 

# 묵상

루스드라에서의 바울 사역 ( 14:8-10 )

바울은 그곳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걷게 하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신앙적 자세 ( 14:11-18 )

바울의 이적을 본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고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허메라 부르며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에게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고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악을 두려워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처럼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안디옥 사역 ( 14:27, 28 )

안디옥에 온 바나바와 바울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주신 것을 알리고 제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와 바울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자기들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셨음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은 두 사도의 모습은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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