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호와의 진노와 그 결과에 대한 슬픔 3:1-20
이 장의 표제로 시편 102편의 표제인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게 그 근심을 여호와앞에 토하는 기도'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한탄한다.
(1)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점을 한탄하였다. 바로 이것이 이 쓰디쓴 고통의 원인이다(1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그는 이것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잘라내버리려는 칼이 아니고 고쳐주시려는 매이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는 그들에게 현재는 슬프지만 결국은 유익한 것이 된다. 이 매로인하여 우리는 고난당할 것을 예기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고난이상의 것을 볼수 있다면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진노는 당연한 것을 확실히 알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선지자 자신이 흑암중에 행하게 된것을 한탄하였다. 흑암은 고난과 혼란을 의미한다. 이것이 한탄하는 이유이다(2절).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않게 하셨으며. "그가 설명할수 없는 사건의 사슬로 나를 묶으사 내가 두려워하는 흑암으로 이끄시고 바라는 광명으로는 행하지 못하게 하시는도다." 나를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같게 하셨도다(6절). "무덤같이 어두운 곳에 완전히 잊혀져 버린 사람처럼 만드셨도다."
(3)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적으로 나타나신 점에 대해 한탄하였다. 손을 돌이켜 자주자주 나를 치시도다(3절). "그는 내가 깨달을때까지 '종일토록 나를 치셨도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73:14). 하나님께서 손을 돌이켜 치실때 우리는 그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돌이키시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되는 시험에 빠진다.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은밀한 곳의 사자같으사(10절). "곰과 사자같이 심판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니 어느 길로 가더라도 내가 안전하지 못하도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12,13절). "그로 인하여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도다."
(4) 유다의 상태는 나이 많아 노쇠한 사람으로 비유된다(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피부는 늙어서 시들어졌고 내 뼈는 꺾어졌나이다." 나를 쓴것으로 배불리시고(15절). 쓴것이란 지금 받는 고통의 쓰라림을 의미한다. "그는 내 음식속에 '조약돌'을 섞어 놓으셔서 '내 이를 꺾어' 놓으셨도다(16절). 또한 그는 애통하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혹자는 '재로 나를 먹이셨도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5) 선지자는 도망할 길을 도무지 찾을수 없었다(15절). 나를 에우셨으며. 포위된 성을 향하여 요새나 포대를 쌓듯이 그를 에우셨다. 열려진 한 길마저도 완전히 메워졌다. 하나님은 담즙과 쑥으로 사방에서 그를 둘러 싸셨다. 그는 초조하고 애가 타서 도망할 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못하고 지치기만 하였다(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그는 극악한 범죄자처럼 이중으로 차꼬에 묶였으니 '그의 사슬이 무겁게' 되었다. 하나님은 또한 '다듬은 돌을 쌓아 그의 길을 막으셨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뚫을수 없는 석벽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첩경을 굽게'하셨다. 그가 여기저기 다녀보았으나 여전히 제자리였다. 이렇게하여 하나님은 '그의 길로 치우시게' 만드시고 그의 목표를 꺾으셨다. 또한 '그 몸을 찢으시며 그로 적막하게' 하셨다. 그의 영혼의 위안거리를 모두 박탈하신 것이다.
(6)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귀를 막으셨다(8절).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내가 간절히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셨도다." 때때로 하나님은 심지어 '주의 백성의 기도'에도 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80:4). 기도가 응답되는 위로를 얻지못하는 경우는 실로 통탄할 일이다.
(7) 이웃이 그의 고통을 조롱거리로 삼는다(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도다. 모든 사악한 자들이 조롱했다. 그들은 공적인 심판과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픔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8) 그는 구원받기를 포기하려 한다. "하나님은 내게서 평강을 빼앗아 가실뿐만 아니라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도다(17절). 그리하여 나는 '복을 잊어버렸도다.' 복을 받아본지 오래되어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않도다. 이제 슬픔과 노예 생활에 익숙하여져서 기쁨과 자유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도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18절). "나는 더이상 하나님을 내 지주로 의지할수가 없도다. 나의 하나님은 무정하기조차 하도다."
(9) 고통을 생각할때마다 슬픔이 되살아나고 과거에 대한 회상은 과거의 번성했던것 만큼이나 쓸쓸하다(19,20절). 나의 고통과 죄악, 즉 나의 고통과 그 고통이 있게한 죄악이 '고초와 재난' 중에 있는 '쑥과 담즙'이다. 고난의 잔을 쓴 잔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포위당했을때의 고통스럽던 기억을 계속 간직하고는 시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결코 잊을수 없었다(시 137:1,5).
Ⅱ.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위로 3:21-36
여기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이 개이기 시작한다. 즉 본문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시온에서 애통하던 자들이 조금씩 즐거움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망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찢긴채로 있다. 선지자는 여기서 완전히 찢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회상'한다. 그것은 소망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이다(21절). 중심에 회상한즉. 어떤 역본에는 '내 마음을 돌이켜본즉'으로 되어있다.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에 돌려 주실때까지 잊혀진 상태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마음을 돌이켜본즉 소망이 있나이다. 그것이 저희가 자꾸 절망으로 빠져드는 것으로부터 지켜 주나이다."
(1) 현재의 상황은 좋지않지만 더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인하여 고난을' 당하나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진멸되지' 않는다(22절).
1) 그들은 끊이지않는 자비를 깨달았다.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불타는 떨기나무 같아서 진멸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린바 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는 않으며'(고후 4:9) 진멸되지 않고, 은과 같이 용광로에서 제련을 받을지언정 찌꺼기같이 버려지지는 않는다.
2) 그들은 이 끊이지않는 자비의 근원을 깨달았다. 여호와의 자비와...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은 다하지 않는 자비의 샘이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로인하여 재앙을 받는다면 벌써 오래전에 진멸되었을 것이나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다.
(2) 그들은 비록 깊은 고통중에 처해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언약의 신실성을 체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는다고 여러번 불평했었다(참조. 애 2:17,21). 그러나 이제 스스로를 바로잡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 여호와의...긍휼이 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의 긍휼은 진실로 무궁하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자신의 긍휼하심을 닫아버리신 것같이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의 자비는 강물같아서 결코 마르지않고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23절).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새롭게 경험한다.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드러내시며'(습 3:5). 우리의 위안거리가 끊어진다해도 하나님의 긍휼은 끊이지 않는다.
2)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비록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하다.
(3) 하나님께서는 현재나 앞으로도 그의 백성들에게 풍족한 행복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있는 모든 것과 자유, 생활, 심지어 생명 그 자체를 잃는다해도 하나님께 대한 나의 관심은 잃지 않으리라."
2) "내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잃지않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족하도다. 나의 고난을 상쇄시키고 나의 잃어버린 모든 것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것을 나는 소유하고 있도다."
3) "이것이 내가 의지하는 바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를 맡기리라."
(4)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그를 믿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될 것이다(25절).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기도로 '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를 구하는 것이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말할수 없는 위로와 만족이 될 것이다). 그 구원이 올것을 바라고 오기를 기다림에 있어서 우리는 고요하고 잠잠한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지 말고 그 처분을 묵묵히 따라야 한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5) 고통은 사실상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견디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 사이에 고통을 받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27절). 사람이 젊었을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많은 젊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선지자는 이 포로생활의 멍에가 그들에게 유익이 될것이며 또한 이렇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멍에는 고통의 멍에를 의미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때에 이 멍에를 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멍에는 그것을 지지 않는다면, 길들여지지 아니한 황소와도 같이 교만하고 방종해지기 쉬운 자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면 젊었을때 지게되면 유익이 되는 그 멍에는 언제 매게 되는가?
1) 그때는 우리가 고통중에 잠잠히 있을때이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그렇게 앉는 이유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영혼과 교제를 나누며 모든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운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2) 그때는 우리가 고통중에 겸손히 참고있을 때이다.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은 그 멍에로인해 유익을 얻는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표시로 손을 입에 댈뿐만 아니라, '죄를 기억하고 슬퍼한다는 표시로 그 입을 티끌에 댄다'는 것이다. 죄로인해 진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비록 입을 티끌에 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소망을 품고 기뻐할 것이다.
3) 그때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온유해지고 그들을 용서해주려는 마음을 지니게될 때이다(30절). 우리 주 예수께서 이 일에 모범을 보이셨다. 곧 그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신' 것이다(사 50:6). 남들의 비난과 멸시를 참을수 있으며, 욕을 욕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갚지않는 사람들은 그 멍에를 매는 것이 유익하며 자기에게 영적인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그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신때를 따라서 적절한 위로를 주실 것이다(31,32절). 우리는 다음 사실로인해 고난을 견디어낼수 있다.
1) 우리가 버렸을때에라도 아주 끊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함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로잡은 것이지, 의절할 것은 아니다.
2) 우리가 한동안 아주 끊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진짜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함이다.
3) 우리가 어떤 슬픔에 빠져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이 그 안에 계심을 인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슬픔이 잠깐이라는 것을 확신할수 있다(벧전 1:6).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슬퍼하도록 만드신 사람들에게도 긍휼과 위로를 많이 주심을 인함이다. 그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해주실 것이다(호 6:1).
5)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와 다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 우리의 자랑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함이다.
(7)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신 것은 거룩하고 지혜로운 뜻을 위함이다. 그는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33절).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즉 '본심에서'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니다.
1) 그는 우리가 그렇게 만들지않으면 결코 고통을 내리시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선한 것이기 때문이며, 만일 우리에게 쓰라림을 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만하고 또 필요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2) 그는 죄인의 죽음이나 성도들의 불안함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 그는 피조물중 어떤 것이라도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이 고통스러워하시고,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영혼이 슬퍼하신다.
3)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실때조차 그는 자비를 지니고 계시다. 그가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면' 하물며 그의 자녀들에게는 어떠하시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찌푸리시고 그 손에 매가 들려있는 것을 볼때에도,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로 세우실때에, 사람들을 그 손이나 또는 그 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불의함과 잘못을 기뻐하지 않으신다(34-36절). 하나님의 백성은 두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는데, 이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신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1) 사람들이 무력으로 짓밟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셨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갇힌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허락지 않으신다. 이미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정의를 가장하여 피해를 준다면, 즉 '사람의 재판을 굽게하여'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하고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여' 잘못된 판결과 거짓 재판을 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실을 지켜 보고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다(35절).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 말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의를 굽게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그와 같이 행한 사람들을 엄하기 질책하실 것이다.
Ⅲ.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야하는 의무 3:37-41
(1)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에게 내려진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39절). 살아있는 사람은...어찌 원망하랴. 하나님의 주권과 우주적인 섭리로부터 선지자는 이런 결론을 이끌어냈다. 어찌 원망하랴. 포로로 고통받고 있는 자들은 고통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고통을 받는데' 어찌 원망할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다같은 죄인이다. 그리고 우리 죄로인하여 당연히 받아야할 고통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받아야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지 말자.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 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우리도 그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죄를 일깨워주고 하나님께 돌아와 편히 쉬도록 만들려는 것이다(40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조사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를 조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조사할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막연한 소망으로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어떤 특정한 한단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즉 바라는 목표와 생활 철학, 그리고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판단할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중에 빠졌을때가 바로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때이다(학 1:5). 그럼으로써 앞날을 위해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그치는 것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따져서 그들을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할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행위를 조사해야만 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전에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그를 버린후에는 전과 같이 잘된 적이 없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기도할때에는 마음도 같이해야 한다. 흡사 우리의 말에 영혼을 쏟아 붓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어야' 한다. 기도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하듯이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시 25:1).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영히 거하기를 원하는 영혼은 자주 기도함으로써 그쪽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로 나아갈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Ⅳ. 다시 한번 고통을 호소함 3:42-54
선지자는 살아있는 사람은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으나 이제 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1) 그들은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점을 고백한다(42절).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죄를 '범죄함과 패역함'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 부르는 것이 아니다.
(2) 그들은 현재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한다.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아주 없을수는 없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시에 대해 불평한다.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42절).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43절).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벽이 있다고 불평한다.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매장되어 완전히 덮여지고 잊혀진 사람처럼 가리우셨나이다." 또한 그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44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그 구름은 너무 두꺼워 우리 기도는 그안에서 잊혀졌나이다."
2) 그들은 이웃들의 비난에 대하여 불평한다(45절). 우리를...진개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만일 그들이 스스로를 천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원수들도 그들을 그렇게 만들수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원수들이 그들에게 행한 파괴에 대하여 불평한다(47절).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51절).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48절). 원수들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할때까지 쫓아왔다(53절).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들은 구덩이 혹은 무덤에 던져진 자처럼 되었고 돌로 무덤문을 막았던 관습대로 '그 위에 돌이 던져졌다.' 원수들은 유다를 죽어 매장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의 멸망은 물에 빠져죽는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했다(54절).
4) 그들은 슬픔과 두려움이 너무 과하다고 불평한다(48,49절). 이것은 51절에 또다시 강조된다.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성읍과 나라가 황폐하게 된것을 보면 볼수록 슬픔이 더하여지는구나."
5) 이런 슬픈 불평들 속에 한가지 위로가 될만한 말이 나온다(50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하늘로부터 자비롭게 살피시는 눈길 하나로 모든 것이 바로될 것이다. 그들은 눈물을 그치지 않은채로 계속 기다렸다. 여호와께서 살펴보시기 전에는 그들 눈에 눈물을 닦아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Ⅴ.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얻는 위로 3:55-66
선지자 예레미야는 믿음과 두려움과 소망사이에서 갈등하였다. 그러나 믿음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세가지 면에서 선지자와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구름이 너무 두꺼워 기도가 상달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44절). 그들은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죽은 자들 사이에 홀로 살아있는 사람처럼 '주의 이름을 불렀다'(55절).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56절). 그가 자기 기도를 '탄식'이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기도중에 하나님께 탄식하고 그와 함께 호흡한다. 기도는 거듭난 사람의 호흡이다. 탄원함으로 자비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찬양함으로 내뱉는다. 이것은 영적생활의 증거이면서 또한 그것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셨다(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하여. 우리는 믿음의 눈을 통하여, 우리가 순종의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나아오심을 볼수 있다.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3)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셨다(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전지하심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59절). "내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으나 큰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저희가...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그들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노리개로 삼았듯이, 나의 불행을 조롱거리로 삼았나이다. 그들이 내게 행한 것같이 자신들도 받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손을 폄같이 주의 손을 그들에게 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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