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22절)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1~4장이 그 형식상 만가(elegy)로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면, 본장은 죄에 대한 시인, 현재의 고통에 대한 호소, 회개의 촉구를 마친 시인이 다시금 백성의 대표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시라 하겠다. 문장 구성을 보면 전반부는 현재 처한 고통의 호소이고(1~18절), 후반부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그 사랑의 풍부함을 확신, 의지하며 미래의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이다(19~22절). 본장은 각 절이 두 부분씩으로 나뉘어서 서로 호응하는 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1절]
2~18절까지 계속되는 호소의 서론적인 언급이다. 유다 민족은 이제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부도 영광도 명예도 더 이상 유다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환난을 당할 때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활화산처럼 피어올라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곤 하였던 것이다(삿 3:15~25; 삿 4:1~24; 삿 10:6~16). 고난 중에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도의 위대한 특권이다. 진실한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을 거두게 하며 고통의 탄식을 바꾸어 감사의 찬양이 되게 한다.
[2절]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여기서 '기업'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서 여호수아 시대에 마침내 정복되었던 것이다(창 12:1; 창 13:14~17; 수 21:43~4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범죄함으로써 이 축복의 땅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은 둘 사이의 약속이며, 한 쪽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 그 축복은 무의미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이룰 수가 없는데 이것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히 6:13~7:28). 요컨대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으므로, 매순간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3절]
기근과 살상(殺傷)으로 많은 고아들이 생긴 것을 말한다. 또한 유다의 버림받은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4절]
물이나 나무 등의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값비싼 대가를 대적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은 유다의 절박한 민생고를 잘 나타내 준다.
[5절]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유다는 하나님께 대하여 강퍅하여 목을 곧게 하였다(출 32:9).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목이 눌리게 되었다.
[7절]
유다가 그들의 죄의 대가 뿐 아니라 조상의 죄 값까지도 치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가중된 처벌이라는 악순환을 낳는 것이다.
[8절]
종들. 바벨론의 하급 관리를 말한다. 극도로 교만했던 유다가 이제는 하찮은 사람들에게까지 억압당하는 처절한 징계를 받는다.
[11절]
시온의 순결성은 항상 '처녀 시온'으로 불리운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은 극단적으로 더럽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마음의 순결을 버리자 그들의 육체와 환경이 더렵혀지도록 내버려 두셨다(롬 1:24).
[13~14절]
어린 소년까지 부당한 노역에 시달리며 나이 먹은 노인까지 수모를 겪어야 하는 민족적 비애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방인들에 의한 압제였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수반하였다.
[16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지금까지의 끔찍한 고통에 대해 절규한 것은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한 긍정, 즉 자신의 죄에 대한 통렬한 고백을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결론적 부분이다. 죄에 대한 회개는 구원의 호소와 구원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연결 승화된다.
(19~22절)
마지막 간구 - 유다의 참상을 고백한 저자는 이제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기도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현명한 판단에 근거하여 드려지는 믿음의 기도인 것이다.
[19절]
저자는 암울한 순간적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좌를 생각하며 소망을 얻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바뀌며 세상의 풍속도 변화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는다(히 13:8). 그러므로 유다를 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그는 굳게 믿는 것이다.
[21절]
주께로 돌이키소서.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관계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간구하고 있다. 지금 유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의 기도인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회개는 인간이 하지만 회개하도록 겸손과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구원의 전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22절]

본절이 부정적인 고백으로 보이기 때문에 공적인 낭독에서는 먼저 22절을 읽고 다음에 21절을 읽는 것이 관례였다. 저자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의혹을 표하지는 않았다. 다만 본절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현재의 참경을 조속히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역설적 호소가 담겨 있다.

 

# 해설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1~18절)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한 유다의 황폐와 포로 생활의 고뇌, 치욕, 낙망 등이 죄에 대한 통렬한 고백으로 연결된다. '우리' 즉 회중(會衆)의 이름으로 고백된 이 회개는 구원에 대한 호소로 이어지며 마침내 이 탄식의 애가를 유다의 회복이라는 믿음과 사랑의 시로 승화시킨다.

마지막 간구 (19~22절)

선지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 곧 자신의 고통과 유다의 환난과 세계의 아픔을 하나님께 겸손히 내어놓고 간구한다. 특히 21절은 본서 전체의 요절로서 구원을 이루는 회개가 인간적인 결의 때문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구원론의 핵심이다.

 

# 핵심

1~22절

바벨론 침공으로 인한 유다의 황폐함과 포로 생활의 비참함을 묘사하며, 유다의 회복을 위해 마지막으로 간구하는 대목이다.

 

# 묵상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는 노인 (14절)

성문 앞은 공중 집회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재판을 송사하기 위해서 노인, 곧 마을의 장로나 유력한 자들이 성문 위에 올라 앉아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룻 4:1~6). 그러므로 본문에서 노인이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한다는 것은, 그곳을 바벨론 사람들이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재판권을 상실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에서 떨어진 면류관 (16절)

보통 면류관은 영광, 명예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면류관이 머리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크나큰 치욕을 당했다는 것으로, 여기서는 나라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해서 진정한 면류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옛적 같게 해 달라는 간구 (21절)

여기서 옛적이란 출애굽 등의 구원 사건 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맺어질 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고 그의 백성으로서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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