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으로보는 성경 - 시편 ②
매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다
시편 기자는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대부분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시편 기자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희로애락 가운데 역사하신다.
시편의 표제
총 150개의 시편 중에서 116개가 히브리어 본문상의 표제(제목)을 가지고 있다. 표제가 없는 시편은 모두 34개다. 제1권(1~41편)에서 4개(1, 2, 10, 33편), 제2권(42~72편)에서 2개(43, 71편), 제4권(90~106편)에서 10개(91, 93~97, 99, 104~106편), 제5권(107~150편)에서 18개(107, 111~119, 135~137, 146~150편)가 그렇다.
시편의 표제어가 담고 있는 정보
시편에서 '다윗의 시'(미즈모르 레다비드)라는 표제어가 들어 있는 시편은 전부 73개다. 일부 시편은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 다윗의 저작설이 입증되기도 한다. 예컨대 예수님은 시편 110편(막 12:36)을, 사도들과 바울은 2편(행 4:25~26), 16편(행 2:25~28), 32편(롬 4:6~8), 69편(롬 11:9~10), 110편(행 2:34~35)을 다윗의 작품으로 인용한다.
사실 시편에는 창조, 하나님의 언약, 출애굽, 율법, 약속의 땅, 예루살렘 성전, 바벨론 포로 생활, 예루살렘 귀환 등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사건들이 담겨 있다. 이런 주제들 틈에서 다윗의 인생이 강렬히 조명되어 있는 것이다. 시편에서 다윗의 입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시편 22~41편은 모두 '다윗'과 관련된 표제를 지니고 있다(표제가 없는 33편은 32편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상당수의 시편이 다윗과 역사적.신학적으로 동반자 관계에 있는 셈이다.
22편(22:1~31)
탄원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중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들어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게 아닌가 하는 절망 속에 상실감으로 신음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결국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여호와가 하신 일을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사할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있는데 악기를 동반해 연주하는 가사 있는 노래일 것이다. '인도자를 따라'도 모호하지만 음악적 암시를 담고 있는 단어다. 히브리어 어원에 따르면 '승리를 주신 분', '영생을 가지신 분'을 향한 노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얠렛사할'은 문자적으로 '새벽의 암사슴'을 의미하는데, 암사슴의 특정한 소리나 행동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나 연주 형식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23편(23:1~6)
찬양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표현한 대표격의 시편이다. 여호와는 자기 양 떼를 이끄시는 목자로서, 자기 백성을 이끌고, 보호하고, 회복시켜 주고, 기름 발라 치료해 주며, 영원히 자기와 함께 거하도록 집으로 인도하신다. 유목민 출신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양으로, 여호와를 목자로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예수님도 죄인들을 향한 자신의 긍휼을,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쓰는 신실한 목자에 비하신 바 있다(눅 15장). 다윗도 목동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들을 치던 시절에 이 시편을 지었다는 타당성 있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한다.
24편(24:1~10)
찬양시. 여호와의 창조 사역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해, 여호와의 법궤가 성소에 안치되는 장면으로 마치는 시편이다. 형식 면에서는 묻고 답하는 구조다. 즉,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지 묻고, 성결한 삶을 살며 여호와를 찾는 자라고 답한다. 또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고 묻고, 전쟁에 능한 만군의 여호와시라고 답한다. 현대 유대교에서는 회당에 토라 두루마리를 안치할 때 이 시편을 낭송한다.
25편(25:1~22)
탄원시. 히브리어 원문은 각 절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형식과 내용 면에서 관련 있는 시편 34편과 함께 언급되곤 한다. 시편 기자는 '젊은 시절' 저지른 죄와 허물로 생겨난 원수들 때문에 말년에 대가를 치르게 된 듯하다. 그래도 한결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26편(26:1~12)
찬양시. 시편 기자는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호소하고, 자신을 살피고 시험해 달라고 청한다. '주께서 계신 집', '무리 가운데'라는 표현이 성전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가리킨다면, '손을 씻고', '제단에 두루 다니며'라는 표현에서는 성전 제의를 짐작할 수 있다.
27편(27:1~14)
찬양시. 26편과 내용이 이어진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여호와가 자녀를 보호하신다는 시편 기자의 확신과 신뢰가 드러난다. 여호와가 '빛'이요 '구원'이시므로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앞은 원수들에게서 여호와가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을, 뒤는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되리라는 신뢰를 다룬다.
28편(28:1~9)
찬양시. 시편 기자는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여호와만이 힘과 방패라고 고백한다. 현대 유대교에서 기도를 위한 최소 인원인 13세 이상 남성 10명을 셀 때, 28편 9절을 이용한다. 이것이 히브리어 열 단어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인구 조사 때문에 징계를 받은 다윗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숫자로 세지 않는 것이다(삼하 24:10).
29편(29:1~11)
찬양시. 여호와의 위대하신 능력을 '많은 물'의 소리에 비유하며 하나님 백성이 복받을 것임을 강조한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10절)라는 것은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악한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원천적인 모형이 그려진 시편이다.
30편(30:1~12)
찬양시.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어처럼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의 열심에 헌정된 시편이다. '스올'이 기록된 시편으로도 유명하다. 여호와는 시편 기자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노염은 잠깐이지만 그의 은총은 평생'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분이다. 여호와께 받은 은혜를 묘사하는 장면은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성소에 안치하면서 온 힘을 다해 춤추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11절). 현대 유대교에서는 이 시편을 이방인이 더럽힌 성전을 회복했던 역사적 사건(하누카)을 기념하며 낭송한다.
31편(31:1~24)
탄원시.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견고한 반석이나 산성' 등으로 묘사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에 의지해 원수들의 공격을 견뎌 내고 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는 현대 유대교에서 저녁 기도문의 일부로 사용되며, 잠자리 기도문으로도 사용된다.
32편(32:1~11)
찬양시. 지혜시.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있다. '마스길'은 히브리어로 '지혜자', '학자' 등을 뜻하는데, 지혜를 깨닫는 내용이 있어서 이런 표제어가 붙은 듯하다. "복이 있도다"(1절)는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되는 시편 1편을 연상시킨다. 전반부(1~5절)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후반부(6~11절)는 하나님이 바른길로 인도해 주심에 대한 신뢰를 담고 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죄와 허물에 대해 깊은 절망을 느끼는 한편, 이 죄와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면 사함받을 수 있다는 확신도 강하다. 바울은 값없이 베푸시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시편 32편을 인용했다(롬 4:6~8). 현대 유대교에서는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이 가장 절박해지는 대속죄일(일곱째 달 열째 날)에 낭송한다.
33편(33:1~22)
찬양시. 감사시. 표제가 따로 없지만, 앞 편 마지막 절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32편과 연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구원받은 이들이 부르는 감사의 찬양이다. 여호와는 온 땅을 다스리시며, 모든 거민을 굽어살피신다. 특히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고 살피신다. 따라서 정직한 자들은 그분 앞에서 자기 마음을 숨길 것 없이 오로지 여호와를 찬송해야 한다. 군대와 군마가 모두 헛되며 오직 여호와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에, 우리 마음도 그분을 즐거워해야 한다.
34편(34:1~22)
찬양시.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표제가 매우 구체적이다. 애굽의 왕을 '바로'(파라오)라 칭하듯이 블레셋의 도시 국가 왕들은 '아비멜렉'이라 통칭한다. 여기서는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를 말한다. 다윗의 인생사 중에서도 적국에 몸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체해야 했던 때만큼 비참하고 두려웠던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삼상 21장). 다윗의 일생이 낱낱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도 이스라엘에 생동감 있게 전해졌을 것이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12절). 시편 기자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서도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그분께 구원받기를 바랐다.
35편(35:1~28)
탄원시. 시편 기자는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쫓기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가 믿는 것은 여호와의 심판이다.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건지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경험한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11~16절).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대항해 위증하고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하나님은 이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시편 기자의 기도를 그의 품에 돌려주셨다(13절).
36편(36:1~12)
찬양시. 표제에 있는 다윗의 이름에 '여호와의 종'이 덧붙여졌다. 시편 기자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해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성전에 도피처를 마련했을 수도 있다(7~8절). 그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하늘과 공중까지 이르고 의와 심판이 산과 바다와 같다고 노래한다. 이런 대구 반복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시편 특유의 형식이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절)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와 관련해 중요한 교훈을 던지는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37편(37:1~40)
찬양시. 지혜시. 히브리어 원문은 1~2절씩 대구를 이루며 알파벳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5절)처럼 시편보다 잠언에 어울릴 듯한 구절도 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11절)는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인용하신 구절이다(마 5:5). '어떻게 악인이 형통할 수 있는가?'라는 인류의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한 구약의 고전적인 답변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기에 의인은 설사 넘어진다 해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이 붙으시기 때문이다. 의인은 절대 버림받지 않으며 의인의 자손은 걸식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호와가 행하시는 의다. 그러니 지금 악에서 떠나 의를 행해야 한다. 아무리 악인의 세력이 커도 무성한 나뭇잎이 말라 없어지는 것처럼 결국 그들은 사라져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38편(38:1~22)
탄원시. '다윗의 시'라는 표제에 '기념하는'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졌다. 70편은 비슷한 표제어를 '기념식에서'로 옮기고 있다. 두 시편 모두 하나님께 신속한 구원과 회복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전반부(1~11절)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시편 기자의 고통을, 후반부(12~22절)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청하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다룬다. 그는 줄곧 성한 곳이 없어 지치고, 감당할 수 없는 짐에 눌리며, 종일토록 슬퍼하다가 간신히 하나님께만 부르짖는다. 이런 인생이 기억해야 할 것은 여호와만이 구원이시라는 것이다(22절). 이 시편을 다윗 인생에 투영한다면 아마도 생의 말기에 해당할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억울하게 고난을 당했던 다윗은 말년에는 자신의 죄악 때문에 집안 내부의 살인과 반란을 겪어야 했다.
39편(39:1~13)
탄원시. 표제에 나오는 '여두둔 형식'은 헤만과 더불어 다윗 시대 찬양 사역자였던 여두둔(대상 16:42)이 만들어 낸 음악적 형식을 의미한다. 건강 회복을 바라는 마지막 구절을 근거로 이 시편을 병상에서 부르는 노래라 하기도 한다. 이 시편은 병마의 원인이 죄라고 보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따라서 주님이 죄를 사해 주시면 그가 질병에서도 고침을 받을 것이다. 그의 일생은 주 앞에서 없는 것과 같고, 인생은 그림자와 같을 뿐이지만 그는 계속해서 주님께 죄 사함을 간구한다. 비록 나그네처럼 떠도는 인생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40편(40:1~17)
탄원시. 감사시. 시편 기자는 조울증이 의심될 정도로 희비의 감정 사이를 극적으로 오간다. 1~10절만 보면 한 편의 찬양시로 손색이 없다. 그는 여호와를 기다린 끝에 구원을 경험하고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러나 11절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탄식하며 여호와께 보호를 간청한다. 수많은 재앙이 그를 둘러싼 데다가 머리털보다 많은 죄에 낙심한 것이다. 13~17절은 시편 70편과 일치하는 절망의 애가다. 이런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잘 다듬은 유려한 기도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기감정을 솔직히 토로하는 게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기본자세다.
41편(41:1~13)
시편 기자는 병상에 누워 있다. 원수는 그에 대한 악담을 멈추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도 배신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므로 원수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 주님이 그를 영원히 붙드시기 때문이다. 다섯 권으로 이뤄진 시편 중 제1권 마지막 시의 마지막 절 끝에 '아멘 아멘'이 붙어 있다. 이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 - 인자와 진실
히브리어 '헤세드'와 '에메트'를 일반적으로 번역하면 '사랑'과 '진실'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은혜'와 '진리'로 옮긴다(요 1:14). 바울이 성도에게 촉구하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도(엡 4:15) 이 두 개념을 의미한다. 지혜 추구를 촉구하는 잠언도 '인자와 진리'가 떠나지 말게 하라고 충고한다(잠 3:3).
'헤세드'는 '다함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자기 아들을 세상에 주실 만큼 깊었다고 묘사한다(요 3:16). '에메트'는 '명확한 진실'로, 조금의 회색 지대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선과 진리의 영역이다. 꾸미고 가감할 필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실체다. 이 둘은 함께 있을 때 온전해지는 특징이 있다. 사랑으로만, 혹은 진실로만 기울어서는 안 된다.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진실이 함께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발휘될 것이다.
통일적 구성의 관점에서 시편 읽기
시편 1권(1~41편)을 중심으로
김창대 / 안양대학교 구약학 교수
시편은 많은 성도가 사랑하는 책이다. 어려운 신학적 주제를 논하기보다 삶의 체험과 고뇌, 기쁨과 찬양을 수록하고 있어 독자들이 쉽게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 전체의 시들이 어떤 통일적 메시지를 가지고 수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 오늘날에는 시편의 시들이 무작위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최종 배열자의 신학적 의도 아래 일괄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구성되었다는 견해가 점점 지지를 얻고 있다. 확실히 통일적 구성의 관점에서 시편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숲을 바라보게 하며, 시편 전체의 통일적 메시지를 포착하도록 돕기 때문에 시 감상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1권은 시편 전체를 조망하는 가이드
통일적 구성의 관점에서 시편 전체를 바라보면, 시편은 5권으로 구성되었고 시편을 여는 1편은 율법이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편 전체를 마치 모세 오경처럼 읽도록 의도했다는 증거다. 또한 시편 전체의 메시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편이 언제 최종적으로 배열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시편 안에 수록된 시들의 저작자들은 다윗, 모세, 아삽, 고라 자손 등 다양한 시기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시들이 지금의 위치에 최종 배열된 시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자에서 돌아온 포로 후기다. 이 점은 포로 후기 상황을 언급하는 시들을 통해 입증된다(시 126: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런 구성 속에서 시편 1권(1~41편)은 시편 전체를 조망하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특별히 시편 1~2편은 1권의 서론이자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기능한다. 시편 1권이 복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복으로 끝난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1:1; 41:1). 결론적으로 말해, 시편 1권은 포로 후기에 복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교훈하기 위해 수록된 것이다. 시편 1편은 진정한 복을 누리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1:2)하는 자라고 명시한다. 여기서 율법을 즐거워하여 묵상한다는 것은 율법을 마음에 새긴다는 뜻이다(40:8 참조).
진정한 복을 교훈하는 시편 1권
그렇다면 누가 율법을 즐거워하여 마음에 새길 수 있는가? 시편은 아무 자격도 없는 자를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 것을 깨달은 사람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께 사랑으로 반응하기 위해 그분의 율법을 마음에 새긴다. 즉,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죄인이고(38:4)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비천한 존재임을 직시한 사람이(39:5)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마음에 율법을 새긴다는 설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복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해 그분의 뜻(율법)을 자발적으로 행하려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그분과 교제하는 특권과 기쁨을 주신다. 이런 기쁨은 진정한 복이기 때문에, 이 복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4:7), 더 나아가 시편 1권은 이런 교제의 기쁨을 인간의 '생명'이라고까지 선언한다(16:11). 그래서 나중에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은 즐거움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119:92).
결국 시편 1권은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교훈한다. 그런 사랑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기쁨을 가진 사람은 환난 가운데서도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를 경배한다(5:7). 따라서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 자세다. 그러므로 시편 15~24편은 성소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교제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말과 마음의 묵상을 올려 드리라고 촉구한다(19:14). 이어서 25~37편은 마음에 율법을 새겨 하나님과 교제의 기쁨을 나누는 사람을 온유한 자로 정의하고,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는 축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37:11).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며 교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출처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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