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고난 시에 행할바에 대한 묵상 39:1-6
다윗은 여기서 고통당했을때의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회고하고 기록한다.
(1)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였다. 우리는 죄지으려는 유혹을 받을때는 언제나 지금 막 지으려고하는 특별한 죄에 대해 전에 서약했던 엄숙한 맹세를 회상해야 한다.
1) 그는 자기가 전에 행동을 조심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기억한다(1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하였도다. 우리는 행동을 조심하겠다고 결심했으며 항상 그 결심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2) 그는 자기가 혀로 범죄치 아니하겠다고 특별히 서약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으로 죄짓기 않기를 바라는만큼이나 쉽지않은 일이다. 그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떠오르면 손으로 입을 막아 눌러서 그 생각이 더이상 입밖으로 나가지않게 하려고하였다. 내가 내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조심하는 습관은 머리에 씌우는 굴레와 같다. 행동에 있어서의 조심성은 그 굴레를 쥐고있는 손과 같다. 그는 사납고 해를 끼치는 다루기 어려운 개에게 입마개를 씌우려고 하였다. 즉 단단히 굳은 결심에 의해서 더러운 말이 입술에서 쏟아져나가는 것을 막고자했던 것이다. 그는 악한 자들과 함께 있을때는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기회를 주는 말을 조금이라도 할까봐 주의하곤 하였다.
(2) 그는 이러한 서약에 따라서 자기 혀에 재갈을 먹이고자 매우 고심하였다(2절).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그러나 그가 '선한 말조차' 하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할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그의 약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말할수 없었기때문에 아무말도 하지않으려고 했고, 그 결과 극단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3) 그는 말을 적게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많이 또한 더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픈 곳을 싸매어 둠으로써 고름만 더 생기게 했을 뿐이다. "나의 근심이 더 심해졌고 내마음이 내속에서 뜨거워졌도다"(2,3절). 그는 혀에 자갈을 먹일수 있었으나 열정을 억제할수는 없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이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행의 원인을 곰곰히 생각하느라고 고민하는 것은 곧 불만의 불에 기름을 쳐서 더욱더 맹렬히 타오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어되지 않는 격정의 해악을 방지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불평스러운 생각을 제거해야 한다.
(4) 그가 마침내 말하였을때 그것은 적절한 행동이었다. 내가 나의 혀로 말하니. 여기서 그가 이렇게 행한 것은 그의 좋은 취지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으로 처리한 자신의 잘못을 고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는 전에는 선한 말도 발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런식으로 잠잠히 있으려고 하지않는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로하여금 인생의 짧음과 불확실함, 그리고 죽음이 가까이 오고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하사. 그는 '여호와여 나로 내가 얼마나 오래살지, 그리고 언제 죽을지를 알게하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여 나의 종말을 알게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여호와여 내게 종말을 생각하고(신 32:29) 그것에 관해 더욱 깊이 알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내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그것은 의인의 시련의 상태에 대한 훌륭한 종결이다. 악인들에게 그것은 모두 쾌락의 종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멀리있는 것으로 생각할때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필요한 준비를 뒤로 미루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이 참으로 짧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있는 힘을 다해서 할뿐만 아니라 가능한 빨리하게 될것이다.
2) 그는 인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묵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유로 내세워, 그를 인생의 짐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며 인생을 통해 할일을 속히 하도록 자신을 격려한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넓이만큼 되게하시매(5절). 그것은 네 손가락의 넓이, 곧 작고 일정한 치수로서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이므로 언제나 볼수 있는 치수인 것이다. 우리는 그 수를 계산하는데 산술적인 기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손가락 끝이 곧 그 크기이며 따라서 그것은 모두 합해도 한손 넓이밖에는 안된다. 우리의 생애는 짧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곧 '우리의 날수가 저에게 있는' 것이다. 모든 시간을 합해도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몫의 시간이야 더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세상에서의 사람의 일생이란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나은 삶을 확보해두는 것이 지혜이다. '모든 사람은 모두 헛되다'(이렇게 해석할수도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새사람에게 관련된 것외에는 확실하고 영구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이 절의 끝에 주목을 요구하는 기호로서 '셀라'라는 말이 부기되었다. "모든 사람이 헛되다는 이 진리를 생각하고 적용할 시간을 갖기위해 여기서 멈추고 잠시 쉬어라"는 표시이다. 죽을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사람의 헛됨을 증명하기위해 그는 여기서 세가지 사실을 언급한다(6절).
첫째 우리의 기쁨과 명예가 헛되다는 것이다. 진실로 각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사람이 당당히 혹은 즐거이 걸어다닐때라도 헛되다).
둘째, 우리의 슬픔과 염려가 헛되다는 것이다. 헛된 일에 분요하며. 종종 우리가 근심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의 공상의 산물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언제나 무익하다.
셋째, 우리의 근심과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재물을 쌓기'위해 많은 수고를 하지만 그 재물은 이리저리 흩뿌려지지 않으면 아무쓸데가 없어 밭고랑속에 있는 거름더미와 같을 뿐이다.

Ⅱ.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탄원 39:7-13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눈과 마음을 하늘로 향한다. 피조물안에서 확실한 만족을 얻지못할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안에서 그리고 그와의 교제안에서 찾아야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망을 맛봄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된다.
(1)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지(7절) : 그는 세상것에서 행복을 찾기를 단념하고 이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즉 "감각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이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변함없는 건강과 번영을 기대할수 없고 어떠한 관계에서도 변함없는 즐거움을 기대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가 이세상에서의 우리의 생존기간만큼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행복과 만족을 취한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2) 하나님과 그 거룩하신 뜻에 대한 그의 복종(9절) :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즉 "이 일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의 지정을 따라 발생한 것이니이다." 우리는 모든 사건에 대해 누가 그 일의 도구로 쓰였든지간에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곧 여호와의 행사다"라고 말할수 있다.
(3) 하나님께 대한 그의 소원과 기도.
1)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수치를 당하지않게 해주시기를 바람(8절) : 그는 앞에서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라고 기도하고(10절) 여기서는 '나를 모든 죄과에서', 곧 내가 진 죄책과 내가 받아야 마땅한 형벌에서 '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또 그는 '나로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악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함으로써 자신들의 지혜를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할때 사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장 현저하게 내보이는 것이다.
2) 그가 현재 지고있는 짐에서 속히 해방될수 있도록 그의 고통을 제거해주시기를 바람(10절) :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그의 병은 그의 정신이 약해지고 그의 기력이 고갈되고 몸이 여윌정도로 심했다. 우리의 방책과 행동은 우리 자신에게 근심을 일으킨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막대기로 매를 맞는다. 비록 죄악의 멍에가 '하나님의 손에 묶였을'지라도(애 1:14) 그 막대기는 우리 죄악의 멍에이다. 하나님의 견책은 사람이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신다. 어떤사람들은 좀이, 손가락에 눌려 죽는 좀처럼 쉽게 파멸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욥 4:19). 다른사람들은 좀이, 서서히 의복을 쏘아서 망치듯이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우리를 고갈시키고 소멸하는 하나님의 견책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는 고통으로인해 자신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고통이 그에게 내려진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이제 그 고통으로인해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랐다. 여호와여 내가 눈물을 흘릴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12절).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 친자녀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신 주께서는 그들이 눈물을 흘릴때 잠잠히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인해 그는 기도하였다. 고통은 기도를 불러 일으키기위해 보내진다. 그 고통으로인해 그는 세상을 단념하고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되었다. 이제 그는 여기서 더욱더 그의 모든 선조들처럼 자신을 이세상에서는 집이 없고 이곳을 지나 다른 곳으로, 즉 보다나은 곳으로 여행해 가는 '거류자와 객'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국에 이를때까지는 결코 자신이 본향에 이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3) 그는 집행을 조금만 더 늦춰달라고 기도한다(13절). 나를 용서하사(즉 나를 이 병에서 일으켜 편안하게 하사), (죽음으로인해 이세상에서) 내가 떠나 없어지기전에 내가 살아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몸과 마음에 기력을 되찾을수 있도록 하소서. 내가 좀더 평온하고 냉정한 정신을 차려 또다른 세상을 위해 보다 잘 준비할수 있도록 하소서."

# 핵심
39:1-13
인생의 허무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개인적인 체험을 담은 시편이다. 표제의 여두둔은 다윗이 공예배를 인도하도록 임명했던 성가대 대장가운데 한사람이다(대상 16:41; 25:1-3).
목적없는 소유의 헛됨(39:6)
우리는 물질을 가져야하는 이유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선한 일에 사용하는 청지기로서의 본분을 망각한채 단순히 재물을 쌓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허망한 일이다. 그럴경우에는 인간이 재물의 노예로 전락할뿐 아니라 탐욕으로인한 다툼만을 일삼게 된다.

# 묵상
인간이 살아가야할 방법 ( 39:1-6 )
인간은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겸손히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헛되고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땅에서 노력한 일들의 무상함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돌아와 삶을 정리하는 자세로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허탄한 변론 ( 39:2 )
다윗이 악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변론하지 않은 이유는 불의한 악인에게 변호하는 것이 허탄하고 무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악인의 훼방앞에서 잠잠히 침묵하며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 39:6 )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아야하는 이유는, 인생은 아침안개(약4:14)처럼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곧 인생무상을 절실히 깨달은 시인은 땅에서 머리를 들어 하늘에 소망을 둔 것입니다. 이 성화된 신앙자세는 인생무상을 깨닫고도 죄악중에 머무는 생활과 대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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