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국가의 불행에 대한 탄원 74:1-11
이 시는 '마스길'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그 뜻은 교훈을 주기위한 시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고난을 당하던 시대에 교훈을 주기위한 의도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이 당한 재난을 탄원하고 있다(1절). 그리스도는 십자가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 구약교회도 여기에서 똑같이 부르짖는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그들은 현재의 암울한 처지에서 벗어나기를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좌절당할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을때 하나님도 그들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1절에 나타나는 간언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어찌하여...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이 말은 "어찌하여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볼수 있을정도로 진노를 발하시나이까"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유로 내세운다. "우리는 '주의 치시는 양'이므로 이리들이 양들을 위협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목자가 어찌 자기의 양에게 진노를 발하겠나이까? 우리가 주를 찬미하는 '주의 회중'임을 기억하소서. 우리는 주변의 족속들보다 더많은 찬양과 경배를 드렸나이다. 우리는 '주의 기업의 지파'이나이다. 또한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우리에게 있지 않사오니이까? 그곳은 특별히 주께서 기뻐하시는 거처이며 소유지이며 저택이 아니니이까? 우리는 주께서 처음 한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많은 기적을 베푸사 '옛적부터 얻으신 주의 회중'이며 노예상태에서 구속을 받은 '주의 기업'이나이다. 주여 그런데 이제 주를 존귀하게 여기고 주께서도 그토록 귀히 여기셨던 한민족을 버리시겠나이까?" 구약교회도 이러함을 볼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았기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않을 것이라는 더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간청을 하고 있다. 주의 발을 드십소서. 이 간청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주께서 속히 오셔서 황폐해진 주의 성소를 고쳐주시옵소서. 그렇지않으며 주의 성소를 영원히 고칠수 없게될 것이나이다."
(2) 그들은 원수들로부터 받은 폭행과 학대를 호소하는데 그중에서도 성소와 회당에 관련된 것만을 호소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었기때문에 '주의 성소'로 불렸다(7절). 원수들은 이 성소에서 사악한 행동을 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경멸하고 하나님께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그 성소를 파괴하였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4절).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겸손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던 곳에서 그들은 큰소리를 치며 희롱을 했던 것이다.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세웠으니. 그들은 군기를 성전에다 세웠다. 하나님과 그의 권능에 대한 이 무모한 도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사람들은 교만하여 '성소의 조각품'을 파괴하였다(5,6절). 그러므로 혹자는 이 구절을 "저희는 마치 삼림에서 도끼를 높이 쳐드는 사람과 같이 보이나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와같이 교만한 태도로 성소의 조각품을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나무꾼이 숲에서 나무를 벨때처럼 아무 주저함도 없이 성소의 벽에 장식되어 있는 값진 조각품들을 부수어버렸다. 그들은 또한 성소를 불지르고 '땅에 엎기'까지 했다(7절).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에 불을 질렀다(대하 36:19). 그리고 거룩한 산 시온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밭처럼 파헤쳐졌을때 로마의 군인들의 성전의 '돌 하나도 돌위에 남겨'두지 않았다(마 24:2). 그는 회당과 선지자의 학교가 황폐해진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그들은 이와같이 외치면서 성전뿐 아니라 모든 예배 장소와 예배자들을 진멸했다. 저희가 이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3) 이 모든 재난의 피해가 더악화된 것은 그들이 아무런 구제책도 갖고있지 않았고 또한 그 재난의 결과를 예측할수도 없었기 때문이다(9절). "우리는 원수들의 기가 성소에 세워진 것을 바라보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어서'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환난을 당하며 언제 이 환난이 끝나게될지 말해주는 자가 없나이다."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환난을 당하겠나이까?"라고 묻지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능욕을 당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고 원수들을 진멸하기위하여 손을 뻗지 않으시나이까?"
Ⅱ. 이스라엘을 격려하기 위한 간구 74:12-17
다음 두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회중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준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12절).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탄원인 동시에 그들이 지닌 믿음과 소망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옛날'을(77:5)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을 기대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예로부터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행하신 여러가지 일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런 일들을 그들로하여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할 용기를 주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실때 그들앞에서 홍해를 가르셨다. 이것은 모세나 그가 가진 지팡이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바다도 가르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인들 못하시랴.
2)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진멸하셨다. 바로는 '악어'와 같고 애굽 사람들은 난폭하고 잔인한 '용들'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권세를 꺾으시고 마침내 그들을 홍해에 빠뜨려 죽게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처음약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그의 왕국을 이기실 것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하나님의 처음약속이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섭리로 채움을 입어 그들로하여금 광야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곤경을 극복할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3) 바위로부터 물을 내시고 또 바위로 물을 올리시는 능력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변경시키셨다(15절). 바위를 쪼개사 큰물을 내시며. 이것은 결코 잊혀지지 말아야한다. 즉 우리는 바위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 바위에서 나온 물은 신령한 음료수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그는 물을 다시 바위로 바꾸어 놓으셨다.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그는 특히 요단강이 언덕위로 넘쳐흐르는 시기에 그 요단강을 말리셨었다. 이러한 일들을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압박을 받고있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하시겠는가.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연의 하나님이시다(16,17절).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도록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시간의 주관자이시다. 아침 햇살을 비추시고 어두움의 장막을 치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주께서는 땅의 경계를 정하시고 지역마다 다른 기후를 주셨나이다. 이는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이루시고 한대지방과 열대지방을 두셨기 때문이나이다. 또한 주께서는 연한과 그 시절이 끊임없이 반복되게 하셨나이다." 천체의 공전과 자전을 통하여 처음으로 자연의 법칙을 세우사 여전히 그 법칙을 지킬수 있는 권능을 지닌 하나님께서는 분명 구원과 멸망의 권세도 갖고계시다. 낮과 밤에 관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도 성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그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대해 맺은 언약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대해 맺은 언약만큼이나 확실하게 지켜질 것이다(창 8:21).
Ⅲ. 구원을 위한 간구 74:18-23
이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원수를 치시고 현재 당하고있는 고난을 종결시켜줄 것을 교회의 이름으로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1) 박해자들은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들이다. "주여 그들은 우리를 능욕하는데 그치지않고 언제나 직접 주를 비난하며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18절). 이 시편 기자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비난에 아무런 응답도 할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저들에게 응답해 주시옵소서.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고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가 아닐수 없다. '하나님은 없다'하는 일이 어리석은 것처럼(14:1)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다. 아마도 그들은 신앙과 성스러운 것들을 경시하는 시대에는 현명한 자들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불경스런 생각들을 발설하지않도록 자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을 큰소리로 떠들고 다닌다. 그러므로 이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탄원하고 있다.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마소서(23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한다고해서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편 기자와 같이 그의 영광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그가 우리를 변론해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2)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들이다. 그들은 악한 자들의 박해를 받았다(19절).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참하나님을 전혀 알지못하는 갈대아 사람들의 땅은(비록 그곳이 학문과 예술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진정 흑암의 땅이 아닐수 없다. 그땅의 거민들은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슴지않고 잔인한 행동을 했다. 참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보편적인 인간성마저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 시편 기자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자들의 무리가 '주의 멧비둘기'를 삼키려 한다는 탄원을 하고 있다(19절). 교회는 순결하고 온유한 비둘기와 같다. 그 비둘기는 고난을 당할때 슬픔에 잠기나 끊임없이 성실과 사랑을 좇는 멧비둘기인 것이다. "주께 성실하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한 주의 멧비둘기를, 악한 자들의 수중에서 건져내 주시옵소서. 주여, 당신께 의지하는 약한 자를 도우시는 것은 주께 영광이 될 것이나이다. 주가 맺으신 언약을 그들에게 지키지 않으시겠나이까? 주여 우리에게 임하사 주의 이름을 찬양하려는 자들을 구하시고 주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들을 진멸하소서."
# 핵심
74:1-23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 당시의 아삽이 아니라 그의 후손가운데 한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편은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그 역사적인 배경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회당(74:8)
회당의 기원을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바벨론 포로기 동안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본문에 ‘회당’으로 번역된 말은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이외의 각처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위해 모였던 장소들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 묵상
하나님 절대주의 신앙 ( 74:1-10 )
시인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고 있는 재난의 근본적인 성격과 결과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대적을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을 믿었고 탄식과 불평속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당신의 자녀로 택해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처절한 절규의 배경 ( 74:4-8 )
본 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과 유다가 황폐되었을때를 배경으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된 영혼이 부르짖는 처절한 절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후 거룩한 예배처인 성전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등 소란을 피웠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승리와 지배를 상징하는 자신들의 군기를 성전에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였습니다.
시인의 기도목적 ( 74:21 )
시인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요청을 거절하지 말아줄 것과 바벨론의 침공과 그들의 극심한 수탈행위로 말미암아 궁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후 그 벅찬 감격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기도한 목적은 결국 주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곧 시인은 개인적인 요구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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