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롯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성경을 읽은 분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흉년을 만나므로 살 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 갔었다. 거기서 그는 하마터면 아내를 빼앗길뻔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아내를 도로 찾았고 생명도 건졌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찾아 시험에 빠진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므로 애굽왕 바로를 통하여 그에게 많은 물질을 주셨다. 창13:1-2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쌔...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했음을 본다. 은금만 아니었다. 많은 종들도 데리고 나왔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생활이 얼마나 풍부하였는지는 그가 318명의 식객(군인 혹은 종)을 거느리고 있있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창14:14참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물질을 주시되 풍성히 주셨다. 아! 그러나 슬프다. 아브라함에게는 또 다른 근심이 닥쳤다. 그것은 물질의 풍부로 오는 근심이었다. 창13:7에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그들의 소유가 많아서....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땅에 거하였느니라" 했는데 아브라함과 롯사이에는 그만 물질의 풍부때문에 오히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큰 근심이요,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을 얼마나 사랑하였던가.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때 자기의 아내와 더불어 오직 롯만을 데리고 떠났었다. 이 한가지만 보아서도 그가 롯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알 수 있다. 롯도 그 삼촌을 그렇게 따랐고 순종했었다.

사실 롯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었다. 할아버지 데라보다도 먼저 죽었다(창11:27~28).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를 아들같이 여겼을 것은 물론이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때에 그 나이는 벌써 75세였다고 했다(창12:4). 그렇게 늙도록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있어 롯은 말이 조카이지 사실은 아들과 다름이 없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롯은 어디를 가나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했었다.
그랬건만 이제 싸움이 생겼다. 더구나 이방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같이있는(창13:7 하) 그 앞에서 피차에 다툼이 생겼다. 이 얼마나 창피한 비극인가. 이방 사람들의 앞에 하나님의 택한 가정의 집안 싸움이 벌어졌으니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으랴! 사실 [은금]이란 말이 성경에 여러번 나오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은 그 맨 첫번째이다.
은금이란 말이 나올때 그곳에 싸움이란 말이 따라나왔다. 은금이 있는 곳에 싸움이 따르다니! [육축]이란 말도 창세기 1장에서 그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한번 나온후(창1:25) 지금 비로소 나오는 말이다. 물론 [풍부]라는 말도 처음 나온다. 은금과 육축이 풍부한 그곳에 화평이 아니라 싸움이라면 물질이란 자칫하면 얼마나 추악한 것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물이란 그 소유자들을 많은 근심으로 찌르는 것을 볼 수 있다(딤전6:10).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그 재물때문에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롯도 아브라함과 같은 재물의 복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육축을 기르기 위한 풀밭을 놓고 저들의 사환들은 서로 다투게 됐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롯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롯과 작별하기 위하여 그를 불렀다. 창13:8~9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말이었다. 이 얼마나 슬픈 선언이었던가.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롯의 태도를 보라.
창13:10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본즉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더라" 이것은 롯이 요단뜰을 바라볼때의 흡족한 마음을 묘사한 말이다. 그는 네가 원하는 어느 곳이든지 자유로 택하라는 그 말에 그 마음은 만족했다. 여기 여호와의 동산같다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기름진 동산같다는 말이다. 본래 고대 히브리인들은 가장 훌륭한 것, 가장 큰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할때는 흔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렸다.
호렙산, 시내산, 헬몬산 같은 큰 산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산"이라 했고, 큰 나무는 "여호와의 나무"라고도 했다(시104:16).

롯은 요단뜰을 바라볼때 마음이 흡족했다. 옛날 에덴 동산도 네 줄기의 물 근원이 있었다. 롯이 바라본 그 땅도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애굽 땅과 같다"고도 했다.
이로써 롯의 마음은 아직도 애굽에 있었음을 본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돌아온후 다시는 애굽을 사모한 흔적이 없었으나 롯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옛날 출애굽에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사모한 것과도 같았다(출16:3). 롯은 그 푸른 풀밭, 기름진 동산, 그러나 그속에 썩어져가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창13:13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했음을 본다.
그러나 혈육의 인간 롯은 그런 죄악에는 무관심이었다. 그렇게도 관영한 소돔의 죄악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것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로써 롯은 아직도 안목의 정욕을 따라가는 세속적 신자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롯도 아브라함 같이 택함을 입고 부름을 받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그림자임에는 틀림없다. 결코 불신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롯을 가리켜 이상하게도 의인이라 했다. 그 말은 곧 그도 택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혈육의 성도였다. 신령한 것에는 눈이 어두운 성도였다.

우리는 각자 자기를 반성하며 생각해 보자. 그는 먼저 푸른 요단을 바라보았다. 다음은 탐심을 따랐다. 자기를 그처럼 사랑하던 아브라함에 대한 의리도 버렸다. 결국은 소돔에 장막을 치고 아주 주저앉아 버렸다. 이것은 롯이 택한 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다. 세상의 물질을 보고 탐심이 생길수는 있다. 그러나 곧 돌아서야 한다. 롯과 같이 거기에 앉아버리지 말아야 한다.
자, 그후 롯은 어떻게 되었던가? 곧 불의 심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먼저 징계하시는 법이다. 롯에게도 먼저 징계가 있었다. 창세기 14:1이하에 보면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이 인근의 네 왕들과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 땅을 쳐왔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은 약탈됐고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혔다. 롯도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의 처자도, 재물도 다 빼앗겼다.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였다(창14:12).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318명의 자기의 사병을 거느리고 원수들을 쫓아갔다. 생명을 걸고 싸웠다. 자기를 버리고간 그 롯을 위하여 드디어 롯도 구원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부녀들과 다른 사람들도 도로 찾았다(창14:14~16). 자, 이때에 롯은 아주 소돔을 떠났어야 했었는데 무엇에 그렇게도 연연하여 거기에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는 말인가. 그 풀밭이 그렇게도 아까왔고 애굽땅 같이 기름진 그 땅이 그렇게도 좋아서 차마 버릴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불심판을 받게될 때에야 비로소 도망쳐 겨우 구원을 얻게 되었다. 롯의 아내는 롯보다 더 한층 세속적이었다. 그는 불타는 소돔을 떠나는 것을 그처럼 아쉬워하다가 마침내 아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남편이 잘못 믿으면 아내라도 잘 믿었어야 할텐데 그는 그 남편보다도 더했으니 무슨 소망이 있었겠는가. 롯은 구원을 얻었으되 겨우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이었다. 말세의 성도들도 롯과 같이 구원은 얻되 불가운데서 겨우 얻는 구원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고전 3:12~15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했음을 본다.

말세에 롯과 같은 성도들이 많을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세상으로만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잘못 갔더라도 곧 돌이켜야 할 것이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때에 놓치지 말아야 한다.
롯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가 되는 징계로써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더 사랑하던 자의 결과가 어떠함을 롯에게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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