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후의 노아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전장까지는 노아의 훌륭했던 점들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이 그렇게 의로왔던 노아에게도 실수가 있었다. 그는 그만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몸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의 두아들 셈과 야벳은 그 하체를 보지않으려고 옷을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 아버지의 하체를 가리웠다.(창9:23). 이것은 그에게 큰 실수였다.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대로 보면 사람이 벌거벗어 하체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출애굽기 20:26에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드러날까 함이라" 했음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번제단에 올라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번제단의 층계를 오를 때에 사람들이 그 아래서 그의 하체를 볼까 두려워서였다.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의복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20:17에도 "누구든지 하체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그러기에 모세까지도 번제단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던 것은 그들의 의복이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출애굽기 28:42에 보면 "너는 제사장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하신 말씀을 본다. 제사장들은 특별한 고의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하체를 가리우기 위해서였다. 하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요, 욕된 일이었나 하는 것은 합2:15~16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만 노아가 하체를 드러내 보였다. 그원인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술! 노아의 실수의 근원은 술에 있었다. 성경에 술이란 말이 맨처음 나온 곳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술이란 말이 처음 나온 거기에 당시의 의인이라고 했던 노아의 실수의 기록이 같이 했다. 그가 술을 어떠한 동기로 마셨던간에 그 결과는 부끄러운 실수였다. 어떤 주석가들은 노아를 동정하여 하는 말이 그가 술취한 것은 그만 술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고 처음 마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벌써 술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음을 보아 술이 어떠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술이란 말이 처음 나오지만 술은 벌써 죄악이 관영했던 홍수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안다. 노아가 술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연령이 많아 혼미해져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라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홍수 후에 그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하는 말로 보아 그는 홍수후 곧 농업을 시작한 그 초기에 그런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홍수를 겪은 것이 600세 때(창9:29)였으나 그의 죽음이 950세(창9:29) 였음을 생각할때 그가 늙어 혼미해진 때라고는 생각 되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포도주의 그 달콤한 맛에 유혹되어 마시고 또 마셨던 것으로 본다.
술! 이 얼마나 흉악한 괴물인가. 술 있는 곳에 사람의 실수와 타락이 있다. 그러므로 잠언의 기자는 술을 보지도 말라고 했고(잠23:31하), 또 말하기를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려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찌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자 같을 것이며...." 했음을 본다. 사실 아랍 지방이나 팔레스틴 지방은 물이 귀한 곳이기에 포도주나 독주는 옛날부터 그들간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일상적인 음료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성경은 도처에서 술을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는 노아의 실수의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사람은 누구나 자칫하면 범죄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때 그만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노아에게서 발견한다. 그는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며 방주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그만 하나님께서 금하는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창9:2). 그러나 그는 그만 그 자신조차 다스리지 못했다. 자기를 다스려 일평생을 경건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가지의 원수가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즉 마귀와 세상(세속주의)과 자기의 정욕이라고 했다(약4:1-7). 그런데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정욕이다. 세상은 피하여 벗하지 않으면 되고(약4:4), 마귀는 대적해 싸우면 된다(약4:7). 그러나 정욕은 그렇지 않다. 많은 기도와 수양이 필요하다. 일평생 싸워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연조에도 관계가 없다. 노아는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이기고 심판을 이긴 사람이다. 그럼에도 자기의 정욕을 완전히 이기지는 못했다.
2. 또 하나의 교훈은 승리 후에 오는 실패이다.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는 거의 전부가 노아의 신앙의 승리의 기록으로 꽉차있다. 그러나 9장 끝무렵부터는 (20절이하) 그의 실패의 기록이다. 그가 한번 실패한 그후에는 성경에 특기할 만한 그의 기록이 없다. 창9:28에 보면 그후라는 기록 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의 후반의 350년의 생활의 기록을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것은 크게 섭섭한 일이다. 그의 350년이 공란으로 지나친 것은 그의 후반기의 생애가 크게 볼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노아의 실수를 우리의 거울로 삼고자 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 하신 말씀대로 노아의 실패의 기록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만일에 이 성경이 성령의 지도로 결코 노아의 실수를 기록치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문인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기록함에 있어 그 끝을 실수로 맺을수 있을 것인가.
창세기 9장은 분명히 홍수의 심판후 인류의 새 출발을 기록한 장이다. 창9:1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을 받으며 인류는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이 새 출발과 같이 인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로 시작됐다. 아! 슬프나 이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홀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설 수 없다는 큰 교훈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악한 존재로 알아서 서로의 실수를 용서하며 덮어주며 도와주어야 한다. 보라! 노아의 실수를 비웃고 비방한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어찌 되었으며, 야벳과 셈은 어찌 되었던가.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고, 그것을 슬퍼하며 덮어준 야벳과 셈은 큰 복을 받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엄숙히 다음 성경을 읽어야 한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9:25)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하시기를 원하노라" (창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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