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는 그리스도

예수는 사단의 세력을 꺾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시어 사랑과 정의 그리고 생명으로 통치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에게 속한 자들이기에 어느 상황에서도 겁낼 필요가 없으며, 도리어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주가 이미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 예수는 우리에게 확신과 위안의 힘을 제공하는 분이시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사실 빌립보서의 여건상 기뻐할 일이 별로 없다. 빌립보서의 객관적 상황을 볼때 바울은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빌립보 교회는 핍박과 분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전제로 '주 안에'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는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의 축복을 주시는 만유의 통치자이시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불안하고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주권을 확립하고 그의 구원을 이루어가신다. 우리는 그런 분께 붙잡혀 있다. 그분께서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품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은 불안과 두려움을 상기시키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이 우리를 안고 있기에 우리는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2. 예수의 신성을 인식

 

빌2:9-11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 하늘의 천사들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예배할 것을 말한다. 사45:23은 야훼만이 이런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주이시며 그분만이 온 우주 만물의 경배를 받을 수 있다. 이 말은 예수의 신성, 예수의 하나님됨, 하나님의 이름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 존재의 이름은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구약에서 야훼에 관한 말들을 거리낌없이 예수의 관한 말로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맥락에서는 분명히 야훼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서 주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1:10인데, 여기서 시편102:25에 나오는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야훼에 관한 말씀이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되어지고 있다. 곧 우주 창조에까지 참여한 분으로 예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와 하나님의 차이를 성경은 분명히 유지하고 있다(빌2:9-11). 온 우주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예배하게 하였는데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이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자 관계로 설정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예수는 아들이라 칭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윤리적 상황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여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기를 서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백은 순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윤리적 상황에서 쓰이는 칭호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라는 예수의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교회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문제와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행동을 규제케 할때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즐겨쓰는 '주안에서'라는 말의 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빌립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거기도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다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한마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주 안에서 한마음이 되라는 소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들이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들로서 스스로 주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재점검하며,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히 한마음이 될 수 있다. 주는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결단에 최종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주권에 일치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4. 중생(衆生)

중생은 믿는 자들에게 책임있는 생활을 시작하게 해준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함으로써 믿는 자들은 그에게 복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효력을 발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빌2:12). 그리고 의롭다 인정됨에는 성화의 체험적인 면이 뒤따라야만 한다. 또한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확실히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중생을 통하여 이미 본질과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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