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22절)
예루살렘의 황폐가 주는 교훈 - B.C. 586년 포악한 이방인의 발 아래 처참하게 짓밟힌 예루살렘의 폐허 현장에서 피묻은 목소리로 절규하며 비탄의 노래를 부르는 예레미야의 육성이 본서 1절부터 터져 나오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 함락의 원인과 과정, 그 후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았다. 예레미야서는 선지서, 즉 예언서이고, 본서는 비탄시(悲歎詩)인 점에 유의하라. 예레미야는 여기서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북받치는 슬픔과 두려움, 구원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비록 시편의 시들에 비해 분량이 긴 장편시이기는 하지만 시편의 비탄시들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시 55:1~23절). 본장은 모두 22절로 되어 있는데 1~11절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예루살렘 파괴의 상황을 묘사하며, 12~22절은 보다 주관적으로 예루살렘 백성의 슬픔을 토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선지자는 애가를 불러야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는다.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드디어 심판이 내렸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예표적 경고가 된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택한 백성들의 수도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땅, 또는 신약 시대의 복음 운동의 출발지로서 심지어는 천국의 모형으로까지 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 준다. 예루살렘이 이토록 완전히 파괴되고 그 백성은 모두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먼저 회개하여 하나님의 예루살렘 회복 약속에 의지하며, 새로운 구원과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를 징계하시기는 하지만 결코 영원히 심판하시지는 않는다(렘 31:3; 말 3:6; 히 13:8).
[1절]
슬프다. 이 말의 히, '에카'는 '어떻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재난을 당한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의미이다. 본절은 예루살렘 파괴의 고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과거의 영광스러운 지위와 오늘날의 지위를 세 가지로 대조 제시하고 있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행복을 기억할 때 더욱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안락에 탐닉할 것이 아니라 항상 시련의 때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절]
밤새도록 애곡하니. 잠자는 것을 잊어버린 채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은 극에 달한 슬픔의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친구도...원수가 되었도다. '친구'는 예루살렘과 동맹을 맺었던 애굽,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를 가리킨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여러 이방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다가 위기에 처하자 유다를 배신하고 말았다(호 2:7).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제한적 존재인 인간은 가변적이어서 절대적인 신뢰를 줄 수가 없다. 이처럼 철저히 패배한 경우에도 우리의 편에 서 주실 분은 오직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뿐이시다.
[3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유다 백성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열방에 거하여. 열방 중에서 구별되었던 백성(민 23:9)이 열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요 14:27)을 외면해 버린 그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강을 외면해 버린 죄인의 자업자득인 것이다.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까지 도달했다는 시적 표현이다.
[4절]
예루살렘 파괴의 결과 중 하나인 신앙 생활의 단절을 의미한다. 과거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시온의 대로가 이제는 고요하기만 할 뿐이다. 외적 종교 축제의 금지는 내적 신앙의 기쁨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에 그들이 습관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징계로 이제는 강제로 그 신앙 생활이 폐지되어 신앙 생활의 기본적 자유조차 박탈된 것이다. 처녀들이 근심한다는 것은 절기 때마다 하나님께 찬양하던 처녀들이 시름에 잠겨 있는 것을 말한다.
[5절]
본절에서 저자는 유다가 당하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그들의 죄에 의한 것이라고 밝힌다. 사건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으로,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현재의 파멸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유다의 패전으로 인하여 유다가 이방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인들이 더 선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의 때를 자신의 영적 성공을 향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6절]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힘없이 달림 같도다. 사슴은 본래 빨리 달리나 제대로 먹지 못한 사슴은 비척거릴 수밖에 없다. 성도들도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능력과 은사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7절]
파멸하는 날에. 과거의 영광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수치를 배가할 뿐이다. 언제나 승자는 최후에 웃는 자이다.
[8~9절]
유다의 죄악과 그 결과를 기술하며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하고 있다.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유다의 죄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긴 영적 간음죄임을 말한다(호 3:1).
[10절]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소를 훼파하고 성전의 보물들을 탈취해 간 사건을 말한다(대하 36:17~19).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더럽혀진다는 것은 형식적 신앙에 철저했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두려운 일인 동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다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성소나 성물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신성시하였는데(렘 7:1~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식적 신앙을 징계하셨다.
[11절]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기 전후의 심각한 기아 상태를 보여 준다. 바벨론 군대는 B.C. 587년 1월부터 1년 반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안의 음식이 핍절되게 하였는데 성이 무너진 이후에도 식량 사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12~22절)
예레미야의 중보 의식 - 이 부분에는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여기서 유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과 동일시하고 있으며(2:14, 18),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보 의식(中保意識)은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고귀한 제사장적 신앙이다.
[12절]
없는가...있는가. 본절,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패망을 무슨 구경거리인 듯 바라보는 이방인들에게 '도대체 너희가 이런 철저한 패망을 당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음으로써 유다의 패망이 전무 후무한 끔찍한 것임을 강조하는, 소위 수사 의문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패망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선지자가 고백하고 있는 점이다. 선지자의 이 고백은 패망의 모든 원인이 모두 다 자신의 죄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러한 진노의 채찍은 사랑의 표현임을 암시하고 있으며(삼하 7:14; 히 12:5~13), 이를 통해 선지자는 이방인들의 자만을 오히려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13~15절)
예루살렘에 임한 징계 - 다음 여섯 가지 표현은 현재 유다의 고통이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징계로서 전혀 거역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시고, 그물을 베푸시며, 곤비케 하셨고, 죄악의 멍에를 묶으셨으며, 소년들을 부수셨고, 유다를 술 틀에 밟으셨다. 그러나 이는 유다의 죄에 대한 징계이지 결코 유다 자체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회개한 자는 누구나 사랑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물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 22:12).
[14절]
내가 당할 수 없는 자. 유다를 향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 제국을 가리킨다.
[15절]
술 틀에 밟으셨도다. 저자는 유다인들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를 술 틀에서 넘치는 포도즙에 비유함으로써, 처참한 광경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16절]
눈물은 각성한 성도들의 한 특징으로서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원인이 된다(시 51:17). 내 영을 소성시킬 자. 하나님을 의미한다. 멀리 떠났음이로다. 이는 하나님 당신이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잠시 중단되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신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의 은혜의 교제에 합당한가 부적당한가이다.
[17절]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역사를 섭리하시지만 그의 주권은 전우주에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징계의 도구로 이방인을 사용하실 수 있었다.
[18절]
여호와는...거역하였도다. 예레미야는 눈앞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의로우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징계(懲戒)가 부당한 것이 아니라 유대의 불순종으로 인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회개의 촉구는 구원과 더 큰 축복의 지름길이다.
[19절]
사랑하는 자. 애굽, 시리아, 모압, 암몬 등 유다가 의지해 왔던 나라들을 가리킨다.
[20절]
돌아보옵소서. 이제부터 예레미야는 보다 직선적으로 구원을 호소한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구원을 호소하기에 앞서 자기 죄를 고백한 것을 보았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환난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태도로서, 환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순복하고, 겸손히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21~22절]
1장의 끝에서 시인은 비탄에 빠진 자신을 조롱만 할 뿐 그 누구도 도와주는 자가 없는 현실에 새삼 경악하면서 하나님에게만 매달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처절한 환난을 당하면 좌절하거나 낙심하고 말지만 성도는 이렇듯 끝끝내 더 큰 구원을 기대하며 희망의 기도를 올리고 있음에 유의하라. 실제 본서도, 그리고 시편의 많은 비탄시들도 비탄과 고뇌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호소나 간구, 확신으로 끝나고 있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 일차적으로는 역사적으로 유다의 원수들을 심판할 날, 이차적으로는 전우주를 심판할 여호와의 날<욜 서론, 여호와의 날>을 가리킨다.
# 해설
예루살렘의 멸망 (1~11절)
1절에서 세 번씩이나 거듭되는 '본래'와 '이제'라는 두 단어는 이전 예루살렘의 영화로운 모습으로부터 멸망으로 인한 현재의 비참한 상황 속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인도하며, 폐허의 한 복판에서 절규하듯 터져나오는 선지자의 첫 육성을 대하게 한다. 히브리어로 '에카'라 발음되는 본문의 첫 단어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절박한 물음과 함께 파란 만장했던 선지자 자신의 생애에 대한 회한의 탄식을 담고 있다. 예언는 성취되었다! 눈물과 탄식으로 쏟아져 나왔던 예레미야의 말들은 피와 울부짖음으로 화하여 무너져 내리는 예루살렘에 휘몰아쳤던 것이다. 동맹국들은 그들을 배신하고 등을 돌렸으며(2절; 왕하 24:2)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고,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기근으로 인한 심각한 핍절만이 폐허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슬픔 중에서도 선지자는 파멸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비극의 궁극적 요인인 '죄'(5절)를 지적함으로써 회개를 통한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선지자의 슬픔 (12~19절)
앞 단락이 3인칭으로 묘사된 데 비해, 본문은 1인칭을 써서 예루살렘의 비극을 선지자 자신의 고통과 합치시킨다. 이는 유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중보 의식을 보여 준다(14, 18절). 한편 선지자는 그의 거룩한 슬픔에로 우리 자신을 부르고 있다(12절). 무릇 이 초대에 응한 자만이 본서의 마지막에 진설된 은혜의 기쁨(5:21)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호소 (20~22절)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징계의 결과임을 파악한 선지자는 중보의 기도로 죄를 고백한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며 그의 첫 번째 애가를 마무리한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21절)은 회복에 대한 명백한 근거로서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신앙의 회복과 난관의 극복을 제시하고 있다.
# 핵심
1~22절
예루살렘 멸망의 비극을 슬퍼하며,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호소하는 첫 번째 애가이다.
포도주 틀 (15절)
포도를 압착하여 포도주를 만드는 용구(사 63:2). 포도를 밟아 짜는 압착통과 거기에서 흘러 내리는 액즙을 받는 수용통이 달려 있었다. 압착통은 자연석을 파서만든 60cm 깊이의 장방형 구덩이로서, 포도 열매를 넣어 밟아 짰다. 여기서 흘러 나오는 액즙은 깊이 1.2m가량의 수용통으로 들어갔는데 수용통의 용적은 압착 통의 반 정도였다.
# 묵상
예루살렘 함락 이후 (1~7절)
예루살렘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함락 당했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원래 유다인들은 생각하기를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변에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예루살렘만은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이방 국가가 외면했으며, 거민들은 곤욕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유다를 술틀에 밟으신 하나님 (15절)
예루살렘의 황폐한 모습을 설명한 예레미야는 이제 이 황폐케 된 예루살렘으로 인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는 본문의 말씀은, 유다를 철저히 파멸시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포도를 술틀에 넣고 밟아 그 포도즙을 짜내듯 예루살렘 사람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 주어 짓밟히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 (19절)
'사랑하던 자', 즉 '친구'는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적 우방이며 동맹국이었던 애굽, 모압, 에돔을 가리킵니다(2절). 멸망 직전 시드기야 왕은 애굽과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동맹국들은 돕지 않고 오히려 신의를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했습니다(호 2:7).
주께서 반포하신 날 (21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이란 바로 주께서 죄악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선언하신 날을 가리킵니다. 즉 '여호와의 날', '말일'이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이는 하나님께서 대적의 죄악에 보응하시며 심판하실 날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원수들의 반응 (21절)
주께서 예루살렘에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한 그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스라엘에 대적해 온 에돔, 모압 족속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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