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1~66절)
예레미야의 비탄과 구원을 기도함 - 다섯 장 중 가운데 장인 3장은 22절씩으로 끝나는 다른 장들과는 달리 그 세 배인 66절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각 시행이 알파벳 순으로 연결된 것은 똑같다. 본장은 간결하고도 운율적인 표현으로 본서 중에서 시적인 성격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예레미야는 본문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전면에 부상하여 자신의 주관적 심경을 토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저자인 예레미야를 가리키는 동시에 고난당하는 자기 민족을 대표하고 있는 대명사이다. 저자는 민족의 고통을 바로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나'는 하나님의 정죄나 연단으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있는 오늘날의 성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3장은 41절을 기준으로 전.후반부로 나눌 수 있고, 전.후반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유다 백성의 참상에 대한 묘사(1~18절), 절말 중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믿으며 희망을 가지는 미래 지향적 믿음(19~41절)을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는 현재 느끼는 고통의 호소(42~54절), 원수의 파멸과 백성의 구원에 대한 기도(55~66절)를 노래하고 있다. 비탄시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는 이 시는 여러 면에서 시편의 비탄시들과 비교된다(시 55:1~23). 특히 거듭 강조하지만 처절한 현실의 고통에 대한 호소가 절실한 만큼 구원에 대한 강력한 기원과 여호와 유일 신앙 의식이 강건함에 유의하라. 고난은 범죄 이후 끝없이 타락하려는 죄성을 품은 인간에게 신앙 각성을 주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신 8:5~10; 벧전 1:7).
[1절]
1~18절까지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서론으로, 2~17절에 이르는 모든 재난들이 바로 여호와의 노하신 매인 것을 밝히고 있다.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1~18절 사이에는 '나'를 의미하는 단어가 27회나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바로 고난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레미야서와 본서를 동시 고찰해 볼 때, 비록 저자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징계를 예견하기는 하였으나 막상 고통의 실체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었음을 알 수 있다.
[2절]
흑암에 행하고. 빛과 어둠은 흔히 번영과 재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다(욥 12:25; 암 5:18~20). 본문은 영적, 환경적으로 암울한 유다 민족의 처지를 묘사한다.
[4절]
극심한 고통과 근심에 잠겨 있는 저자가 육체적, 영적 쇠약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유다의 쇠약해진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5절]
담즙은 쓴 것, 혹은 곤란, 고통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본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과 수고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인데,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을 듯이 보이는 유다의 비극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6절]
저자의 비감(悲感)은 극에 달하여 이제는 자신을 죽은 자로 비유하고 있다(시 88:5). 그가 느끼고 있는 흑암은 더 이상 소망이 존재하지 않는 무덤 속의 암흑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자가 죽은 지 오래 된 것 같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그의 절망 상태가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한편 19~41절의 미래 지향적 신앙이 이 모든 상황을 이기고 저자에게 희망을 준 사실을 기억할 때 신앙의 실체와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
[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고대 아시아인들은 죄수를 사면 팔방으로 밀폐된 방에 가두곤 했다. 저자도 이러한 고문을 당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는 그러한 곤경에 빠져 있다고 느끼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도 정신적으로 사면 초가의 숨막히는 상황에 둘러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유다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그는 죄수와 같이 취급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사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멍에와 짐을 나타내는데, 이 사슬은 예수 앞에 나아왔을 때만 벗겨지는 것이다(마 11:28~30).
[8~9절]
저자는 환난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그 응답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만(마 7:7~11), 징계나 연단을 위하여 기도의 응답을 늦추실 때도 있다. 다듬은 돌 매끄럽게 깎은 돌. 이러한 돌로 벽을 쌓으면 그 견고함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빈틈 없이 죄인의 진로를 차단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10~13절]
심판자이신 하나님 -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시 유다를 살상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맹수의 발톱과 용사의 화살과도 같이 그의 백성에게 치명상을 입히신다. 세상의 맹수를 만나도 두려운데 우주의 창조자가 징계자가 되셨으니 그 얼마나 두려운가. 또한 세상 끝날 심판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심판자로 대면한다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허리. 원어는 콩팥으로, 치명적인 급소를 의미한다.
[14절]
위에서 나타난 고난의 결과를 보여 준다. 고통은 극심한데, 위로하는 자는 없고 오히려 동족의 멸시만이 그를 향하고 있다(1:21).
[16절]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돌이 섞인 음식을 먹다가 이가 상한 것을 나타내며 이 역시 절망을 암시하는 말이다. 재. 슬픔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삼하 13:19; 욥 2:8).
(19~41절)
회개로 말미암는 소망 - 극심한 절망의 탄식은 이 부분에서 미래에 대한 찬란한 희망과 믿음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깊은 한숨과 탄식을 토하다가 과거에 그들을 인도하시며 자비를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21절) 힘을 얻는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면서(22절) 이 고통이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니며(33절), 자기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39절).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게 하는 회개의 능력을 실증해 주고 있는 본문은 본서 중 가장 주옥 같은 부분에 속한다.
[19절]
앞 부분에 나타난 모든 고통의 표현들을 총괄한 것이다.
[21~22절]
중심에 회상한즉. 예레미야가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를 깊이 있게 묵상하였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 이것 때문에 저자는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롬 3:10~12). 진멸되지 아니함. 1~18절의 절망적 고통이 큰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징계하시기는 하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재삼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23절]
아침마다. 이 말은 결국 매일매일, 즉 매순간을 의미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매순간 느끼고 있다. 성실. 하나님의 사랑은 큰 동시에 성실하며 가장 믿을 만한 것이다.
[24~26절]
22, 23절에 나타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주관적 신앙 고백이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신 32:9; 렘 10:16). 잠잠히 기다림. 극한의 고통 속에서 탄식하고 부르짖던 사람의 지친 심령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는 고요해지고 잔잔해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격정이 지나가고 난 후의 고요함 속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희망의 메시지를 음미하고 있다.
[27절]
저자는 절망을 넘어서서 고난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난은 젊음을 보다 완숙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즉 저자는 고난을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고난관이다(슥 13:9; 벧전 1:7).
[28~30절]
하나님의 훈련에 대하여 취해야 할 자세 - 그것은 조용히 순복할 것(28절)과 완전히 낮아질 것(29절)과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적대자에 대하여 대항하지 말 것이다(30절; 1:5; 2:16).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입이 땅에 있는 티끌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라는 의미로서 완전한 복종에 대한 상징적인 명령이다.
[31~32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참아야 할 이유 - 그 징계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도 매를 드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의 죄가 컸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렘 44:4~6). 하나님의 징계는 일시적인 것이며 나의 성숙을 위한 것이다(히 12:11~13). 징계가 큰 것은 그의 긍휼히 여기심이 크기 때문이다.
(33~36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 -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형통하며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신다(창 1:28~31). 그는 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억눌리고 소외되어 아파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그의 공의로우심과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35~36절]
유다가 패전국의 백성으로서 부당한 재판과 억울한 송사 등의 비참한 대우를 받았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7~39절)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 저자는 33~36절에서 인간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설명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축복 뿐만이 아니라 고통과 환난도 주장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37, 38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신 32:4; 사 30:18; 슥 9:9).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처럼 변덕을 부리시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사랑을 주시나 인간의 죄가 그분의 거룩성에 위배되므로 필연코 징계하시는 것이다.
[39절]
근본적으로 고난은 죄로 인하여 온다. 이것을 깨달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오직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에 달려 있다(요일 1:9).
[40~41절]
이 부분에서 저자는 위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유다 백성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행위를 조사하고. 회개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것이 회개의 근본 정신이다. 즉 회개란 인간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42~47절]
본서 전면에 거듭 반복되는 내용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유다의 고통을 다시 한번 표현하고 있다. 평안한 상태에서 이 글을 읽으면 다소 중복되는 내용으로 진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 그 냉혹한 참상을 체험한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이를 거듭거듭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31, 32절과 모순되는 것 같으나 이는 범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군축하시며. '따라 잡으시며'라는 의미이다. 진개. 버려진 물건, 티끌을 말한다(고전 4:13).
[48~50절]
고난을 통한 회개 - 42~47절에서 예루살렘의 참상을 거듭 밝힌 바 있는 선지자는 동족의 고난을 보고 또다시 눈물짓고 있다. 한편 이를 다시 말한 것은 끔찍한 고난을 당한 저자가 이를 계기로 회개의 각성을 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패망의 끔찍한 참상, 이에 대한 1차적 반응인 슬픔, 깊은 각성을 통한 2차적 반응이 회개와 더욱 성숙한 신앙이 본서의 기본 패턴을 이루고 있다. 3장의 후반부 42~66절도 전반부와 동일한 패턴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1~66절 주해에서 밝힌 바 있다.
[51절]
성읍의 모든 여자. '여자'는 히, '벤'으로서 처녀를 가리킨다. 저자는 혼인도 하지 못하고 고난을 겪는 유다의 딸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있다. 이 말은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52~54절]
예레미야가 겪은 고난 - 저자 자신이 겪은 수난이 기술되어 있다. 53절은 시드기야 왕의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빠진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렘 38:5, 6).
(55~63절)
구원에 대한 간구 - 저자는 다시 유다 민족의 대표로서 그들의 구원을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며(56절), 그의 생명을 속하셨으며(58절), 이미 그의 상황을 감찰하셨다고(60절) 고백하고 있다. 한편 원어로 볼 때 이는 과거형인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일어난 일로 간주하는 선취적(先取的)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55절]
심히 깊은 구덩이.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심각한 재난이나 깊은 영혼의 고뇌를 말한다.
[57~58절]
저자는 본절에서 고난 중에 있는 자가 회개 기도하였을 때 위로와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기본 주제이다.
(59~66절)
이방에 대한 보응을 구하는 기도 - 유다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이방 세력들의 범죄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방인들은 심판 도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심판자의 위치에 서서 유다를 심히 핍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심판 도구로 심판을 수행하면서 그 자신이 범죄함으로 심판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은 이를 고발하면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 호소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행하면 그것은 범죄이다. 복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민 31:1~3; 신 32:35; 잠 20:22).
# 해설
선지자의 비탄 (1~18절)
유다의 처절한 환난에 대한 예레미야의 체험적인 고백이 '쓴 것', '조약돌', '재' 등으로 형상화된다(15~18절). 이것들은 선지자의 모든 소망을 빼앗아 버리기에 충분할만큼 엄청난 고통이었다(18절). 그럼에도 그 무엇이 선지자로 하여금 슬픔과 애통의 극한을 견디며 이 처절한 애가를 짓게 하는가. 이 비밀을 우리는 그의 탄식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의 소망 (19~39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인식을 정점으로(22, 23절) 극심한 절망과 탄식이 눈부신 희망과 믿음으로 극적 전환을 이룬다. 25~39절은 이러한 인식의 총체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밀도 있게 짜여진 한 편의 찬연한 지혜의 시를 이룬다. 고난을 통한 죄의 인식과 고백, 회개를 통한 더 높은 신앙으로 성숙하는 것은 본서 전반에 걸쳐 흐르는 핵심 주제이다.
회개 요청 (40~54절)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회개의 능력에 의지하여 백성들에게 속히 회개할 것을 간원하는 선지자의 눈물이 예루살렘의 참상을 씻어내려는듯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예레미야, 그는 자신의 몸을 유다의 고난과 애통의 뚜렷한 상징으로 내놓은 눈물의 선지자요, 탄식의 선지자였다.
구원과 보응에 대한 간구 (55~66절)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으며(56절), 자신의 생명을 속하셨고(58절), 자신의 상황을 감찰하셨다고(60절) 고백한다. 이러한 그의 선취적(先取的) 신앙은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주는 바,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회개하는 자에게 능히 위로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다(시 34:18; 사 57:15).
# 핵심
1~66절
유다의 처참한 환난으로 인한 비탄과 절망 가운데서도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희망과 믿음을 담고 있다.
애3장의 문학적 양식 (1~66절)
본장의 애가는 히브리어 원문상 한 연당 3구절씩, 총 22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연의 세 구절은 동일한 히브리어 자음으로 시작되는 두운법으로 구성되었고, 각 연의 머리글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된다. 이와 같이 정교한 답관체 형식은 애가에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인의 전통적인 문학 양식이다.
# 묵상
예레미야의 고난 (1~9절)
고난은 어느 누구도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아니라 멸망과 심판을 예언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당시의 반바벨론 정책을 지지하는 왕과 그의 방백들에게 친바벨론 노선을 취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에 반민족주의자로 간주되어 비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의 말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고소, 고발되었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롱당한 예레미야 (14절)
당시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조롱했던 까닭은 그가 여러 가지 이상한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지 그릇을 깨거나 나무 멍에를 목에 걸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다가오고 있는 심판을 경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참선지자인 그를 비웃었습니다.
중심에 있는 소망 (21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본문의 말씀은, 내외적인 상황을 보면 전혀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유일한 소망은 여호와께서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나 진멸치는 않으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존재 자체가 그의 백성들의 미래를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성실하심이 크신 주님 (22~23절)
본문에 언급된 자비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그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긍휼은 이 자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주의 크신 성실하심을 고백한 것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이 인간의 타락과 불신으로 인해서 파기될 지경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깨어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실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죄악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즉시 돌이켜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취할 태도 (40~41절)
사람이 고난 가운데 처했을 때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며,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즉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손을 드는 것은, 외형만 기도의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대로 행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예레미야의 적대자들 (52~54절)
무고한 예레미야의 대적이 된 자들은 바로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 셀레먀의 아들 유갈, 마기야의 아들 바스훌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여 백성을 두렵게 하였다 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원래 물을 저장하는 창고였으나 물이 없었을 때는 감옥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주께 간구하는 예레미야 (59~66절)
본문은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믿는 예레미야의 간구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감찰하시고 신원하실 것을 간구하였고, 또한 여호와 백성들을 고난에서 구원하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모해하고 조롱함으로써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마시고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를 구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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