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과 양심

[디모데전서 1장 12절~20절]
12절 -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절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절 -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절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절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8절 -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절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절 -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의 구조는 몸과 혼과 영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영 자체는 볼 수 없고 만질수도 없지만 영의 기능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능(Communion), 둘째로 직관의 기능(Intuition), 셋째로 양심의 기능(Conscience)입니다.
영은 양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영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에 민감해야 하고 양심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음성과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결코 바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보다 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이러한 양심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믿음과 양심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믿음이 없이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선한 양심이 없이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믿음을 갖는 비결 중의 하나는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딤전 1:10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전 3:21절에서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 2:15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했고, 마 6:22절에는 "마음의 눈"이라고 했는데, 이 마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양심의 눈인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양심이 밝지 못한 것은 마음의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첫째, 도덕 생활의 나침반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큰 선물이 있는데 하나는 이성이요, 또 하나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배의 나침반과 같아서 바른 도덕 생활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생활을 하면 마음이 기쁘지만 양심을 거스리면 아무리 외부환경이 좋아도 괴롭고 불안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매를 맞고 핍박을 받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평안하고 기뻐했지만, 가룟 유다는 양심을 거스리고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먹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집 짓고 잘 산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워 결국 돈을 성전 뜰에 던져 버리고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법정은 혹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양심의 법정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양심이 도덕생활의 나침반인 것을 알고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고 양심이 거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께 찾아와서 이러한 고백을 하더랍니다. 몇 년 전에 처남하고 물건을 사고 추첨권을 받았는데 처남이 자신의 추첨권을 자기에게 맡겨 주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연히 추첨 결과를 보니까 가지고 있던 추첨권에 재봉틀이 걸렸는데 자기 것이 아니라 처남의 추첨권에 걸렸더랍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재봉틀을 볼 때마다 마음이 늘 괴로웠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죄가 회개가 되어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제서라도 그 재봉틀을 처남에게 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게 바른 도덕생활의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하여 양심을 거스릴 때, 마음에 책망을 받고 두근거리고 괴롭고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를 따라 바른 길을 갈 때에는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오는 법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줄 때 자기는 무죄하다고 손을 물에 씻었으나 양심은 괴로웠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암몬 사람에게 죽게 내어줄 때 양심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의 소리,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정욕의 소리가 더 크면 양심의 소리를 못듣습니다. 욕심의 소리가 더 크면 양심의 소리를 못듣습니다. 마치 전화를 받을 때 라디오 소리나 전축 소리가 크면 그 말이 들리지 않듯이, 정욕과 욕심의 소리가 너무 강하게 소리치면 양심의 소리를 못듣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다. 다윗왕은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못듣고 비도덕적 행위를 감행했습니다.
양심은 도덕 생활의 나침반입니다. 고로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살 때에 보다 바른 도덕적인 생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영음을 듣게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의 기능은 양심과 합작할 때 그 기능을 보다 잘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성령을 좇아 생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양심의 영음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악을 행하리이까?"하고 그 죄악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일로 도리어 요셉은 감옥에 들어갔으나 마음은 늘 평안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으려면 양심이 면도날처럼 예리해야 합니다.
성화(聖火)의 제일은 양심의 소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바로 듣고 따르는 자가 참으로 신령한 자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잘 하고 말씀의 지식이 많다 하여도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진정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여자가 부흥회 때 회개를 하는데, 새벽기도를 5년 동안이나 나오면서 고무신은 한 켤레밖에 안샀더랍니다. 닳아질만 하면 다른 사람의 새 것과 몰래 바꿔 신고 또 닳아질만 하면 다른 신과 바꿔 신었는데 그러면서도 새벽기도는 5년 동안 빠지지 않고 잘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생활이었겠습니까?
양심이 마비되면 신령한 생활이 위선적인 것에 불과하며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그 믿음도 헛 것이고 그 인격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주가 많고, 인물이 잘났다 하더라도 양심이 무디어진 사람은 어디에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양심이 정죄하면 하나님도 정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양심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1: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듣게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은 배가 파선해서 침몰하듯이 그의 신앙도 인격도 파선하고 마는 것입니다.
양심의 창문을 통하여 하늘의 신령한 광채가 영혼 속에 들어가 성도 여러분들의 전(全) 존재를 빛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긴밀하게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믿기 전보다 예수믿고 나서 괴로움이 더 많은 것은 예수믿고 거듭나게 되면 죽었던 양심이 살아나서 깨닫지 못했던 많은 죄를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죽은 사람은 양심도 죽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은 확신을 가져야 영혼이 소생케 되고 양심이 깨어나 하나님과 영교할 수 있습니다.
히 9:14절에 보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죽었던 양심이 살고 직관이 소생합니다. 직관이란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영적으로 직접 아는 것입니다. 양심과 직관은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송사를 받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되고 직관이 하나님과 접근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이 책망하는 일은 즉시 중단해야 하고 죄를 저질렀으면 즉시 회개하고 자복하여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양심이 괴로운데도 그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게 되면 그 사람은 완전히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받음으로써 언제나 양심에 송사받을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머리숙일 때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즉시 자복하고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아야지 그렇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백번 예배드려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 속에서만이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끊임없는 교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양심에 알려진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퍅한 양심, 위조된 양심, 마비된 양심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언제나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기울이며 거기에 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계속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양심과 논쟁하지 말라.
양심은 영적 직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하나님의 뜻에 좇아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정죄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나 지식으로 아무리 합리화시켜도 양심은 잠잠하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 옳은 것은 옳다 하지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쟁을 펴가며 양심을 달래 보아도 양심은 논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은 곧이 곧대로 나가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양심을 향해서는 설복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합리화가 불가능합니다.
무엇을 훔치고 양심이 괴로운 것을 달래기 위해 그걸 가지고 구제 사업에 썼다 하더라도 그 훔친 양심의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설명은 이성을 만족시킬 수는 있어도 양심은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며, 지적이며, 좋은 일같이 보여도 양심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의 논리를 초월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착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해도 양심이 소리치면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미워하고 알아주지 않고 핍박하고 오해를 해도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는 평안하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인데 예수님를 잘 믿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느날 새벽기도에 나와서 은행에서 돈을 훔쳤다고 울며 불며 회개를 하더랍니다. 내용인즉 은행에서 돈 만원을 찾는데 내어주는 돈을 세어보니까 100원짜리가 100장이 되어야 하는데 101장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101장이면 다시 세어 보던가 해서 정말 1장이 더 왔으면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을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대로 받아들고 왔답니다. 양심이 괴로운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와서 세어 보니까 남긴 뭐가 남습니까? 잘못센 것이었습니다. 실제 훔치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도둑질한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애통하며 회개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소나 양이나 사람을 다 진멸하라 하셨는데, 살찌고 탐스러운 짐승과 왕 아각도 살려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변명하며 합리화하기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말씀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양심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기면서 어떻게든 합리화시키려 하고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과는 논쟁해도 안되고 합리화시켜도 안됩니다.
사울은 기름진 제물과 번제의 숫자로 양심의 영음을 잠잠케 해보려고 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피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그대로 귀를 기울여 듣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할수록 더욱 예민하게 들리는 것이 양심의 소리입니다.
바울은 행 23:1절에서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행 24:16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바른 신앙 생활, 신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양심을 통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그 예리한 양심에 그대로 따를 줄 알아야 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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