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전한 복음의 순수성이 주는 교훈은(살전 2:5)?

복음을 아첨의 말로 하지 않았음 -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음 - 속과 겉이 다른 자세를 가지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음 -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복음을 증거했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을 대하는 목회자의 자세는(살전 2:7-10)?

유순한 자로서 유모가 자녀를 기르는 심정으로,
권위자로서가 아닌 사랑이 담긴 유순한 마음으로,
복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랑으로,
거룩하고 옳은 흠없는 행위로 말미암아 복음을 더럽히지 않고 교회를 실족시키지 않는 자세로 성도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유대인 속에 잠재해 있었던 죄의 결과는(살전 2:15, 16)?

자신들에게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능멸하고 구속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복음 증거자들의 복음 사역을 훼방한 죄.
이들은 죄를 상습적으로 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가 극도에 달한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을 면류관은(살전 2:19)?

의의 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약1:12), 기쁨의 면류관(살전2:19), 불멸의 면류관(고전9:25), 영광의 면류관(벧전5:14), 자랑의 면류관(살전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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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의 중심 사상은(살전 1:1)?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요, 참되신 분으로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는 신론과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기독론과 환란 속에서 기쁨을 주신다는 성경론과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구원론과 그리스도 재림시 나타날 현상인 종말론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란을 이길 수 있었던 방법은(살전 1:6)?

성령에 의한 기쁨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환란을 극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환란을 당할때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성령을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요17:22).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들은 뒤 행해야 할 일은(살전 1:9, 10)?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우상을 버렸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복음을 들은 자는 신앙의 전인격적인 회심과 더불어 죄된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과 충성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열매를 거두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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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살로니가 교회

1) 데살로니가
마게도니아의 주요 항구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라고 이름 붙였다. B.C.167년 마게도니아가 네부분으로 분할되었을때 데살로니가는 둘째 구역의 수도가 되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이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이지역에서 이단들과 끊임없이 대항했으며,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칠 때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을 따르는 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기존의 유대인들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들 유대인들은 폭도들을 동원하여 교인들의 지도자들을 고발하였다.

2)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개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상황은 대체적으로 경건하고 헌신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전지역의 교회들 가운데 모범적인 교회였다(살전1:7). 그러나 바울을 따르던 부유한 부인들의 불신자인 남편들을 중심으로 바울을 반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바울은 이들과 대적하기보다는 이들에게 자신이 스스로 천막을 지어 팔며 흠 잡을 만한 일을 행한 적이 없음을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이해시키려 했다(살전2:9).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있으면서도 그곳의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이교(이단의 가르침)에서 만연하던 종교적인 음란의 위험에 처해 있었고(살전4:3-8), 특별히 비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후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일상 생활은 소홀히 여기며 종교적인 집회로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났다(살전4:10-12). 또 세례를 받은 후에 친구를 잃은 사람들과 예수를 알기 전에 먼저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에 대해서 교인들이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일단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론

1) 재림
재림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시오신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히9:28과 벧후1:16에서 나타난다. 헬라어로는 '임재' 또는 '도착'이나 '도래'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던 parousiva(파루시아) 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죽음에 대하여 파루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위로하고 있으며, 이 본문이 역사속에서 '휴거'설의 근거가 되어왔다. 더불어 바울은 이 파루시아가 임박했음을 강조한다(살전4:15,17 ; 살후 2장). 그러나 바울도 차음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바울 서신 이후에 쓰여진 사도행전과 공관복음서에는 재림의 지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 묵시 문학적 종말론
내용 면에서 예언적 종말론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예언적 종말론보다 훨씬 현학적이며 하나님의 초월적인 모습이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이세상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죄악된 이세상은 파괴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세상의 종말은 랍비들의 사색과 계산의 대상이 되어 비밀리에 전해지게 되었다. 미래에 관한 과거의 예언들이 재해석되어 새시대에 관련된 이론과 숫자에 의한 상징적 표현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구약성경의 기본적인 신앙과 종말론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새나라를 세우리라는 믿음은 계속 되었다.

3)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에 관한 가르침
예수의 종말론적인 가르침은 대부분 갈릴리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대 민족간의 묵시적인 희망의 맥락에서 주어졌다. 예수의 첫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될 날이 임박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백성들 사이에서 곧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막1:14,15). 이는 단순한 종말론의 한 이론의 반복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힘이 이미 예수의 말씀을 듣는 자들 사이에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선포이다. 또한 예수는 세례 요한과 자신의 시대를 구분했다(눅16:16).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 가운데 현존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밝히심으로부터 예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하는 것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백성들 안에 현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예수는 아직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한 모습을 알고 있었고, 그것의 완성이 언젠가 도래할 그 날의 다시 오심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막13:32 ; 눅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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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난다. 본문은 바로 구속사의 마지막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바울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또한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뿐만이 아니라 혼탁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잘못 알고있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에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고자 한다.

1.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살전5:1-11)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죽은 성도의 부활(살전4:13-18)이 있게된 다음의 사건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바울은 마24:1-25:46의 기록을 반영하여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과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어떻게 임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1) 준비되지 못한 자에게 갑자기 임하는 재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밤에 도적같이 임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24:43)을 상기할 것과 그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패역한 자들, 즉 영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홀연히 임하는 멸망으로 다가올 것이다(살전5:1-3). 이와 반대로 성도들, 특별히 영적으로 깨어 준비된 자들에게는 결코 돌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지 않는다(살전5:4,5)고 바울은 말하였다. 따라서 성도들은 재림의 시기를 모른다고 방관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준비해야 될 것이다.

2) 재림의 때를 준비하는 영적 지혜로움
재림의 시기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재림의 당사자인 예수님도 알지 못하신다고 하였다(마24: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재림의 의미나 준비보다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재림의 시기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를 소망중에 기다리며 깨어서 근신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종말을 기다리는 구체적인 성도의 생활(살전5:12-22)
바울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먼저 수평적인 사회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남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중요한 덕목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중요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 그리고 소위 신앙 생활 3대 강령이라 일컫는 것은 무엇인가?

1) 바람직한 관계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바르게 되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이웃과의 바람직한 관계는 먼저 영적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이웃간에 사랑과 겸손으로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살전5:12-15).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신앙 생활의 3대 강령인 항상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을 대표적으로 들고 있다. 이리하여 바울은 구체적으로 성도들이 재림을 준비하며 실천해야 될 항목들을 예시해 놓았다.

2) 이웃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면 된다라는 안일한 의식에 빠지기 쉬운데 바울은 오히려 이웃과의 관계를 더 강조하였다.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과 화평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 자칫 신앙 생활이 이웃과의 관계가 배제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며 바른 성도의 삶이란 이웃과 하나님, 이 두관계가 모두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앙 생활의 3대 강령(살전5:16-18)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고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

3. 마지막 기도와 인사(살전5:23-28)
바울은 이제 이 서신을 마치면서 몇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기도와 인사를 하고 있다. 바울이 서신의 끝맺는 말에서 다시 한번 재림에 대해서 말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그리고 복음 사역을 하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 끝으로 바울은 본 서신을 회람하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바울의 지체의식
바울은 다시 한번 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 가운데 바라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사도의 몸이지만 일반 성도들과의 지체의식을 공유하려는 바울의 공동체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신을 회람하라고 한 이유는 동시에 보다 많은 성도가 읽어서 신앙적인 각성을 할 수 있기를 바래서였지 단순히 인간적인 동기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2) 기도 가운데서의 성도의 사귐
바울은 본 서신을 마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라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당부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겠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직접 복음전파 사역에 헌신하지는 못할지라도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사역을 돕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종말론만큼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혼돈되고 오염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종말론을 오도하여 현실의 삶을 벗어나게 해서 도피적인 신앙 생활을 추구하는 수없이 많은 이단, 사이비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확실하게 못박아 놓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준비되지 못한 자에게는 엄청난 멸망의 날이 될 것이므로 깨어서 이웃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될 것을 강조하였다. 흔히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역사의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영적으로 깨어 준비하는 성도에게는 오히려 종말이 새세상의 출발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말을 소망하여 깨어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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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바른 성(性)의 개념과 그리스도인의 태도
오늘날을 흔히 성(性)의 개방 시대라 일컫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 간에는 자유 분방하게 성적 결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마치 서구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렇게 무분별한 성관계로 21세기의 흑사병이라는 에이즈(AIDS)가 만연하여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1) 성(性)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주신 선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며,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요구이다. 따라서 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성에 대한 악용과 오용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특히 근친 상간, 수간, 동성 연애 같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함은 물론이고 파괴 행위로 간주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 성을 귀하게 여기며, 순결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임을 알자.

2) 남녀의 결혼을 통한 성관계
성관계는 남녀의 결혼, 즉 부부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녀로 각각 창조하신 후에 일정한 연령이 되면 둘이 한몸이 된다고(마19:5,6)성경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결혼을 통해 인격적인 결합과 동시에 육체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에 의한 성관계는 단순히 정욕의 발산이 아니라 완전한 인격 도야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다.

3) 종족 보존을 위한 성관계
종족 보존은 단순히 자식을 낳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성취이다. 성관계의 목적은 출산(창1:28)과 사랑(잠5:15-19)에 있다. 동물들에게도 종족을 위한 성이 있지만 인간과는 근본이 다르다.

4) 그릇된 성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은 인간에게 건전한 성을 주셨지만 인간들은 이것을 자신의 육적 쾌락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성적으로 부패한 소동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다(창19:24-29).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성적인 타락도 가증되었는데, 간음(신22:22-29), 수간(신27:21), 매춘(신23:17), 근친 상간(레18:6-18), 동성 연애(롬1:26,27) 등을 통해 인간의 정욕을 채우려고 했다. 이런 인간의 타락에 대해 하나님은 육체와 영혼을 파멸(고전5:1-5)의 길로 이끌며, 변태적 성행위는 반드시 죽음(레20:13-16)으로 이어지는 심판을 가하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결혼한 합법적인 부부 사이의 성관계가 아니면 어떠한 이유로도 합법화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임을 알아야 한다. 즉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성관계는 남녀 간의 인격과 삶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2.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살전4:11,12)

1) 생활 속에서 건전한 정신을 갖는 의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불안한 정신 상태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주님의 재림은 조용한 마음과 일상 생활에 열심을 다하는 태도로 기다려야 한다.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생활 속에서 더 정진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평안한 삶을 영위할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2) 자신의 일을 담당할 의무
바울은 "자기 일을 하고"(살전4:11)라고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여 오히려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 의무이다.

3)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의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모든 일손을 놓고 방황하였다. 이런 교인들에 대해 바울은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고 권면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에게 일하는 사명을 부여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3. 실천이 없는 성도는 교회의 짐이 됨

믿음이라는 것은 내적인 것이다. 따라서 외적으로 표출될때 이것을 믿음의 실천이라고 한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4)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신다. 과연 실천없는 믿음이 교회나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성도의 믿음 실천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봉사의 실천은 믿음의 외적 표현이다. 이러한 실천이 이루어질 때 성도는 성도답게 교회는 참교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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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문화나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생각이 바뀐다 해도 그의 문화나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자신의 문화나 습관까지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결단과 각오가 필요하게 된다. 초대교회 성도 중에서 헬라권 문화에 젖어 살았던 이방인 개종자들도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나 관습,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따라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이런 것들이 오늘날도 복음과 문화라는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재림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관심과 바울의 답변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결한 생활(살전4:1-8)
초대교회 당시 헬라 문화권의 이방인 개종자들 중에는 회개했다 할지라도 구시대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도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성결한 생활을 위해 제일 먼저 버려야할 것으로 무엇을 지적하였나? 그리고 성도들이 마땅히 성결해야 되는 이유로 바울은 무엇을 들었나?

1) 버려야될 것들
개종은 했지만 아직도 옛생활을 버리지 못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은 음란한 성적 생활을 버릴 것을 제일 먼저 촉구하였다(살전4:3). 그리고 성도들이 마땅히 성결해야 하는 이유로 종말적 심판에 대비할 것과 성도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셔서 그들을 초청하였다는 것을 바울은 들고 있다.

2) 성결한 성도의 삶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켰다. 그러나 실질적인 생활에서는 옛날에 좇던 습관들이나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가진 이후에 아직도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좇고 있지는 않는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겠다. 특히 종말적 심판에 대비하기 위해서 어떤 모습으로 삶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의 모습이 우리 삶 가운데 얼마나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거룩한 성도로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형제 사랑과 근면(살전4:9-12)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헬라 문화의 성적 난잡함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적 문란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 행하고 있었던 생활의 항목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왜 근면과 노동에 대해서 강조하며 권유하고 있는가?

1) 교회의 덕을 위한 형제 사랑
다른 어떤 항목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형제 사랑을 잘 지켜나가고 있었다(살전4:9). 그 소문이 마게도냐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특별히 노동과 권면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한 무절제, 무위도식을 배격하고 불신자들에게 덕을 지키고, 교회의 덕을 세우며, 신자 개인의 바른 삶을 유지해야 함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살전4:11,12)

2) 서로 돌아보며 사랑해야 할 것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무엇보다 형제 사랑에 힘썼다(살전4:9). 오늘 우리는 믿음의 형제인 교회의 권속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용납하고 사랑하는지 돌아보고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보이는 형제를 힘써서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잘못된 종말론으로 생활이 방탕해지고 무절제해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절제하고 바른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재림과 성도의 부활(살전4:13-18)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제기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성도를 '잔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 이 죽은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다시 부활하게 되는 부활의 근거는 무엇인가?

1) 잘못된 재림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의 재림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것은 바울이 전해준 종말 사상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잘못된 재림관을 가진 성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로 인해 많은 의심과 잘못된 추측들이 나돌았다. 특히 죽었던 성도가 재림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한 논쟁점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죽었던 성도가 재림 때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롬6:3-11).

2) 부활의 소망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재림에 대한 의문과 관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전혀 없는 불신자와 같이 죽음을 비통해 하고 절망해 하지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겠다. 또한 우리는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소망하며 살아가야할 것이고 현세의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영광의 주가 오시는 날을 소망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

잘못된 가치관이나 습관은 한번 형성되면 쉽게 바꾸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하고 악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좋은 습관이나 가치관보다는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들을 빨리 익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잘못된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 마치 가죽 부대에 새술을 담아 놓은것 같은 어색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해 주었고 또한 잘못 알고 있는 성도의 부활의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항상 바른 진리 안에서 바른 교훈을 받아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아울러 바른 영적인 지도자의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뿌리를 박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바른 길로 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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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살로니가전서 1-3장의 개요

1) 1장의 개요
본 장은 발신자의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와 수신자인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한 문안 편지이다.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언급된 이유는 이들이 바울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에 함께 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전했다. 즉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는 태초 전에 이미 구원받도록 정해졌다는 확신 때문이다.

2) 2장의 개요
본 장은 바울 자신의 변호적인 입장이 2장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1절-16절까지는 발신자들이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자신들의 삶에 대한 변호이다. 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데살로니가와의 작별로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변호로 나타나고 있다.

3) 3장의 개요
1절-5절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낸 바울의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탄식하면서, 디모데를 그리로 보내고 자신은 외롭게 아덴에 머물기로 결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로 디모데를 보낸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데살로니가인들을 굳게하기 위함이며, 둘째, 격려하기 위해, 셋째,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6절-10절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해 긍정적인 보고를 디모데가 바울에게 전해 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새로운 용기와 격려가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항상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11절-13절은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든지 이루어지지 않든지 그들에게 사랑이 넘치도록 채워 주심으로 데살로니가인들의 믿음이 굳세게 되며 장차 주님의 심판 날에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소원을 표현하고 있다.

2. 기도

1) 일반적인 기도와 개념과 종류
일반적으로 기도라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와 교통하는 행위를 이룬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기도란 '간청한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성도와의 대화'를 뜻한다. 이런 기도의 종류로는 먼저 공적 기도와 사적 기도로 분리할 수 있다. 그리고 성문 기도와 자유 기도, 통성 기도와 묵상 기도,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2) 기도에 관한 제견해
로빈슨(Robinson)은 "우리는 기도할때 인격적인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기 위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유한한 관계속에서 세상이 우리들과 마주칠때 절대자의 요구에 우리들의 마음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도의 생활은 주변의 환경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의탁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3) 존재의 근거에 의한 신비적 경험인 기도
영은 현상적인 것이 아닌 신비적인 경험인 것이기 때문에 기도, 예배 등도 신비적인 체험에서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닌 모든 개념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다.

4)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때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가능하다.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질때 받아주시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태초 전에 우리를 선택해 주심에 대한 확증이며, 매일 자신의 새로운 결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5) 기도는 응답이다.
첫째, 응답 기도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이루어진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둘째, 응답 기도는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셋째, 응답 기도는 고백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대속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직접 위대한 대제사장에게 고백하는 것이다.(요일1:9). 넷째, 응답 기도는 경배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경배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사랑이 포함된 경배가 필요하다. 다섯째, 예배와 고백과 경배의 결과는 찬양이다. 역사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여섯째, 응답 기도는 감사이다. 죄로 죽을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죄에서 건지신 구원의 사역에 감사해야 한다. 일곱째, 응답 기도는 헌신적 생활이다. 예수님의 헌신은 기도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성도들도 기도를 통한 헌신적 삶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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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지도자가 부재한 경우에 백성들 스스로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념과 이상을 지켜 나가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동체나 사회가 자신들의 신념을 굳건히 지켜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결단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런 맥락에서 보면 크게 칭찬받을만한 교회였다. 영적인 지도자인 사도 바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에도 몇가지 어려움은 있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의 승리를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였다.

1. 박해를 이기는 교회에 대한 칭찬(살전1장)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안 인사를 하면서 은혜라는 헬라식 표현과 평강이라는 히브리식 인사 방법을 같이 사용하였다. 바울은 왜 이 두 말을 같이 사용하였나? 또한 살전1:7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어떤 것들이 구체적으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런 본이 되는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바울은 어떤 모습으로 칭찬하였는가?

1) 동역자의식과 신앙의 승리
바울이 문안 인사에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서로 다른 두가지의 인사 방법을 같이 사용한 것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 의식과 사도로서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굳건한 믿음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렸는데 이것은 죄인을 회개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지도자가 없으므로 인해 환난과 핍박이 극심하나 그 시련을 이겨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 전파에 힘쓴 것에 대해 바울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다고 칭찬하였다. 바울은 실로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사랑과 관심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였다.

2) 진정한 신앙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문안하였다(살전1:1). 오늘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데서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겠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우리는 누구에게 믿음의 본이 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겠다.

2. 전도 회고와 교회에 대한 감사와 재방문의 소망 피력(살전2:1-16)
바울은 과거에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전도한 것을 회상하고 있다. 바울이 왜 다시 한번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전도한 것을 회상하고 그것에 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나? 또한 데살로니가 전도를 회상하며 과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보여준 친절과 진실한 태도에 대해 바울은 감사하고 있는데 바울은 어떤 자세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나?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감사드린 것과 아울러 복음을 대적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것이 임할 것이라고 하였나?

1) 반성의 계기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을 전도한 것을 회상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아 과거에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반성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또한 과거에 바울은 인간적인 동기나 인간적인 방편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였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사명감과 아울러 형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전도자에게는 사명감과 아울러 복음을 받아들일 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복음 전파를 대적했다는 것은 단순히 복음 전파자 만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대하36:16)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신앙인의 동기
바울은 인간적인 동기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였다(살전2:4). 오늘 우리는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그리고 살전2:7,8의 모습처럼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바울처럼 사명감도 전도 대상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가 돌이켜보아야 겠다.

3. 성도와 사도간의 끝없는 교제(살전2:17-3:1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였다(살전2:17).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나? 재방문하고 싶어하는 바울은 대신 디모데를 보내는데 디모데를 파송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디모데는 돌아와서 어떤 보고를 하였으며 바울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1)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 재방문의 소망은 한번 전도한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바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준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성숙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한 바울의 표현에서 우리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자부심과 기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디모데를 대신 파송한 동기와 목적은 바울의 재방문 소망이 여러번 차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대신 디모데를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바울이 전한 복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살전3:2-5). 디모데가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으며, 바울은 기뻐하였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였다(살전3:11-13).

2) 진정한 성도간의 모습
몸은 떨어져 있으나 기도로써 서로 교통하며 관심과 사랑으로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도간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형제, 자매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바울의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처럼 우리는 전도하여 새로 나온 신자들이 교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전도한 사람에 대해 계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심어 주었고 자라나게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머무르지 못하고 결국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애정 어린 눈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와 계속적인 교제를 나눔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단순히 인간적인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신앙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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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모데

1) 생애
경건한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양육을 받은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만나 개종하고 그의 동역자로 일생을 헌신하였다(행16:1). 바울은 스스로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의 참아들'로 생각했다(고전4:17 ; 딤전1:5). 디모데의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으며, 어머니 유니게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서 그를 만나 동행했으며, 아덴과 고린도를 거쳐 에베소에 갔다가 함께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데살로니가를 비롯한 여러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으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통의 편지를 통하여 교회의 목회를 위한 여러가지 조언을 남겼다.

2) 디모데 전·후서
디모데를 수신자로 하고 있는 이 두통의 편지는 디도서와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세편지는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이 편지들의 목적이 암시되어 있다. 즉 전체 교회의 지도자가 개인 교회의 지도자에게 목회와 관련된 충고와 조언을 하는 서신임을 나타낸다. 이 서신들은 교회 내의 직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점으로 보아 2세기 초에 소아시아 교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특별히 디모데 전·후서에서 관심을 갖는 부분은 성직자의 조심스러운 선택과 권위의 문제와 이단에 대한 경고이다.

2. 실라

1) 바울과의 전도여행
실루아노라고 바울 서신에서 등장하는 실라는 처음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유다라고 하는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전해 주기 위하여 보내어졌다. 그후 실라는 바나바가 마가의 문제로 바울과 갈라지면서 전도 여행의 동행자가 되어 바울 2차 전도 여행에서부터 함께하게 된다(행15:40). 갈라디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빌립보에서 함께 옥고를 치루었으며,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실라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적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의 후기 서신들에서 실라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볼때 고린도에서 갈리오 사건을 겪은후 바울은 떠나고 실라는 남아 있었는데, 이것이 바울과의 마지막 관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실라의 문서 활동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낸 편지인 데살로니가에 쓴 편지에는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공동 집필자인 것처럼 나타난다. 한편 일반적으로 실라의 대표적인 문서활동은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벧전5:12)라고 본문에서 암시하듯이 베드로가 첫번째 편지를 쓸때 그 기록자의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실라는 바울과의 동력이 끝난 뒤에도 베드로전서와 관련이 있는 본도와 갑바도기아로 가서 계속적인 사역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고린도

1) 역사와 사회적 상황
중요한 상업 도시로써 로마의 식민지인 아가야 영토의 수도였다.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년)과 고린도 전쟁(B.C.395-387년)의 격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했으나. B.C.3세기에 아가야 동맹의 주축이 되어 로마에 항거했다가 B.C.146년 로마의 집정관 뭄미우스에게 함락되어 도시가 완전히 황폐화 되어 거의 1세기에 걸쳐서 잿더미인 채로 버려져 있었다. 그후 B.C.44년에 율리우스 시이저에 의해서 재건되어서 그를 기념하여 고린도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항구 도시로써 수많은 다양한 인종들이 섞였고, 그에 따라 여러가지 이방의 종교들이 창궐하는 가운데 아데미를 도시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특별히 이방신을 섬김에 있어서 그 음란함으로 인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타락의 극치에 이른 도시였다.

2)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편지
바울이 떠난후 고린도의 상황이 좋지 못함을 소문을 통해 듣게 되었고, 특히 글로에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전1:11).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는 편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내용은 주로 고린도 교인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대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편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가 보내어진 이후에 새롭게 변한 상황, 즉 영지주의 이단과 고린도 교회 안에서의 파당 문제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보낸 몇가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하여 다시 편지를 쓴 것이 지금의 고린도전서라고 한다. 디도를 통해서 이 편지가 전달된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했으나 크게 환영받지 못했고 별로 기쁜 만남이 되지 못했다. 그후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비난하는 무리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고 또 지나친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을 보고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방문 때의 일을 서로 화해하고 자신의 사도권을 변화했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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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와 기록연대

1) 저자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이 기록한 서신이라고 하는 확실성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전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다른 서신들보다 교리적 성격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본 서신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사상을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서 본 서를 바울의 저작이 아닌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본 서신은 바울의 저작임이 확실하다. 그것의 근거로는 몇가지가 있다. 먼저 본 서신 자체가 바울로부터 보내어진 것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살전1:1). 또한 본 서신에 등장한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근거에 비추어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때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어휘가 분명히 바울이 사용한 어휘라는 것,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일관되는 사상, 초대교부들의 증언이 바울의 저작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2) 기록연대
사도행전 16-18장까지 나타난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의 노정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이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장소들과 일치한다. 또한 살전1:1의 문안 기록으로 미루어 볼때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할 당시 실라는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실라는 제2차 전도 여행시에 바울과 동행했었지만 1차나 3차 여행 때에는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이 본 서가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중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구체적인 시기로 보면 주후 51-5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2. 기록 목적과 기록 장소

1) 기록 목적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부터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가져온 소식은 대부분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몇몇 좋지 못한 소식도 있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의 영향을 감소시키려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위로와 신앙적인 지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이 서신의 기록 목적은 바울 자신의 인격과 동기에 대한 비방 운동과의 정면적인 대결(살전1,2장), 디모데가 가져온 반가운 소식에 대한 바울의 기쁨과 감사의 표현(살전3장), 그리고 시련받는 자들을 격려(살전3:3-5), 성결한 생활과 성실한 삶을 강조, 재림 때의 죽은 자들의 장래에 대한 바른 이해(살전4:13-15)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 재림에 대한 바른 준비 등을 가르치려고 한 것에 있다.

2) 기록 장소
본 서신의 기록 장소로는 대게 고린도로 추측하고 있다. 그것의 근거로는 행18:1-5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나아갔는데, 그때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로부터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디모데의 도착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때 고린도에 있었으며, 본 서신도 거기에서 기록된 것이 확실하다.

3. 주제와 특징

1) 주제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할때 염두에 두었던 여러가지 목적에 비추어 볼때 본 서신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하며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본 서신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로한 사건들을 다룬 본 서신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염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됨을 다루고 있다. 그리하여 본 서신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 안에서 자라남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합당한 성결한 생활을 영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 특징
본 서신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갖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의문과 염려에 대해 바울이 답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재림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서신은 재림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쓰여졌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교훈과 묵시 문학적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본 서신은 성결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깨어 근신해서 빛의 거룩함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며,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할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4. 내용구성

바울의 첫번째 서신이며, 종말론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은 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칭찬과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으며 신앙적인 권고와 성결된 생활의 교훈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본 서신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과 염려(살전1-3장)에서는 박해를 이기는 교회에 대한 칭찬(살전1:1-10)과 전도 회고와 교회에 대한 감사와 재방문의 소망 피력(살전2:1-16)과 성도와 사도간의 끝없는 교제(살전2:17-3:13)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경건한 생활(살전4장)에서는 성결한 생활(살전4:1-8)과 형제사랑, 근면(살전4:9-12)과 재림과 성도의 부활(살전4:13-18)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살전5장)에서는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살전5:1-11)와 종말을 기다리는 구체적인 성도의 생활(살전5:12-22)과 마지막 기도와 인사(살전5:23-28)로 되어 있다.

5. 본 서가 주는 의미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이 가장 먼저 쓴 서신이다. 특히, 먼저 쓰여진 데살로니가전서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종말론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어느 시대나 바른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바른 영적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단 사설이나 혼합주의적 신앙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오늘날 혼탁한 사회와 혼합주의적 신앙이 팽배해져 가는 현실에 많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 바울이 없는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른 신앙을 지켰다. 그러므로 잘못된 종말론의 영향으로 심히 혼란스러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의 편지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잘못된 종말론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서 데살로니가전서는 바른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올바른 생활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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