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빌라도의 심판 15:1-14

1. 우리 주 예수께 대한 효과적인 기소를 위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논(1)

그들은 새벽에 이 일로 모였다. 그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매우 서둘렀다. 악한 사람들이 지칠줄 모르고 부지런히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마지못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을수 없다.

2. 빌라도에게 그리스도를 죄수로 넘겨줌(1)

그들은 예수를 결박했다. 그리스도께서 결박되신 것은 우리가 속박을 받더라도 그 속박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며 바울과 실라처럼 속박을 받으면서도 찬송할수 있게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결박된 예수님과 함께 결박된 것처럼 종종 주 예수님의 속박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성의 거리로 끌고가서 멸시를 받도록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날밤에 얼마나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지 충분하게 상상할수 있다. 그들은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멍에가 되었던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왕인 그리스도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3. 그리스도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이 심문에 대해 그리스도는 "네 말이 옳도다. 내가 바로 그들의 메시야다"라고 말씀하셨다.

4. 그리스도를 탄핵하는 조항과 고소를 당한 그리스도의 침묵(3-7)

대제사장들은 몸소 밀고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여러가지로 고소'(3절)했으며 그리스도를 곤경에 몰아놓는 증거를 제시했다(4절). 악한 제사장들은 대체로 가장 악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것이 더좋으면 좋을수록 타락할때는 더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을뿐 아니라 소란까지 피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무대답도 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5절). 빌라도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변호하도록 촉구했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바랬으나(4절) 그리스도는 여전히 아무대답도 하지않고 묵묵히 서 계셨다(5절). 그래서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침묵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빌라도에게 명백한 답변을 하셨다(2절).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소하는 자들과 증언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원치않으셨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악의에 넘친 잘못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 자신도 그들의 잘못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고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훌륭하게 말씀하셨듯이 훌륭하게 침묵을 지키셨던 것이다.

5. 예수를 풀어주기 위하여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보인 제안(8-10)

그것은 명절이 되면 죄수 한명을 특사로 석방시켜 주는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8절).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주었음을 알고 있었다(10절). 그들이 성난 이유가 그리스도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때문이었다는 것은 쉽사리 알수 있었다.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호소하여 제사장들로부터 안전하게 그리스도를 구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일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석방시키라고 요구하면 빌라도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석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라바라는 또 다른 죄수가 있었다. 그는 무리들의 관심을 끌었던 사람으로서 무리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던것 같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바라바보다 더많은 지지를 받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6.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무리들(11-14)

모든 무리가 하나같이 격분하여 그리스도를 특별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아우성쳤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석방시키라는 무리의 아우성을 보고 매우 놀랐다(11절). 빌라도는 그가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반대하고자 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12,13절). 그러나 빌라도는 무리들의 요구에 반대하여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다시 질문했다. 그들은 그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않고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아우성쳤다. 그때 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이 빌라도에게 다음 두가지 영향을 끼칠것을 확신했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아우성이 매우 크면 빌라도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죄를 범했음을 믿게 할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빌라도는 그리스도가 온세상이 싫어하는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를 나쁘게 말하고 그를 없애려하는 것은 사단의 일반적인 술책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비곡직에 따라 사람들과 사물들을 판단해야지 한나라에 퍼져있는 일반적인 명성이나 소문으로 인한 편견에 치우쳐선 안된다.

둘째로 빌라도는 무리들이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무리들이 기뻐한다는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비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빌라도는 비록 무리들의 아우성에 좌우되어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했다고 믿을만큼 우둔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죄할만큼 사악했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로 죽으셔야 했기때문에 빌라도는 그 희생 제물을 격분한 많은 무리들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Ⅱ. 형장으로 가시는 예수 15:15-21

(1)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악한 뜻을 만족시키려고 그리스도를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15절). 비록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하여 그리스도에게 먼저 채찍질했으나 그때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고 말았다. 죄없는 자에게 채찍질한 것을 확신할수 있었던 사람이 점차로 그 죄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확신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눅 23:16).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죽으셔야 했기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리셔야 했으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그의 피를 흘리셨던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고통스럽게 죽으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가장 큰 공포를 느끼시며 죽으셨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 죽음을 정복하셨을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수치스럽게 죽으셔야만 했다. 그 죽음은 노예들이나 가장 비열한 악인이 당하는 그러한 수치스런 죽음이었던 것이다. 십자가와 수치는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장 심한 비난과 치욕을 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만족을 이루셨다. 그러나 이것도 가장 심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극악한 점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시며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 저주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여 낙인이 찍힌 것이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나무에 달리셨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죽음의 비난과 저주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2) 빌라도는 로마 군인들의 장난기를 만족케하려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내주어 능멸을 당하시게 했다(16-19).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온군대를 모아 뜰안으로 가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꾸며 능멸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능멸하는지를 보라.

첫째로 그들은 "왕들은 자주색 옷을 입어야겠지"라고 희롱하면서 예수께 자색 옷을 입혔다.

둘째로 그들은 "왕들은 면류관을 써야겠지"라고 희롱하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웠다. 밀짚이나 목피로 만든 면류관을 씌워도 그들이 희롱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가시 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워 찔림을 당하는 아픔까지 느끼시게 했다. 그리스도는 그가 쓰시기에 합당한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우시기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써야할 가시 면류관을 쓰셨던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왕들에겐 신하의 문안이 있어야겠지"라고 희롱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18절)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문안까지도 흉내냈던 것이다.

넷째로 왕들은 통치의 표로 그 손에 홀을 갖고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모방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도록(마 27:29)했다. 주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실제로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는 이 로마 군인들과 같은 자들인 것이다.

다섯째로 신하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때는 그 왕에게 입을 맞추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대신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다.

마지막으로 왕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신하의 예를 모방하여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희롱을 하며 꿇어 절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멸하면서 이런 행동을 했으며 서로 웃고 야단들이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의 옷이 아니라 남의 옷을 입고 조롱을 당하신 것은 그가 그 자신의 죄때문에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뒤집어 쓰신 죄는 바로 우리의 죄이며 그가 당하는 수치는 바로 우리의 수치인 것이다.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으면서 그 영혼의 무릎을 꿇지않는 자들은 여기에서 보이는 로마 군인들의 행동처럼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3) 정해진 시간이 되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서 처형장으로 끌고갔다(20,21절). 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하여금 예수님 대신 예수님이 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했다. 그는 아무생각도 없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갑자기 우리에게 십자가와 같은 고난이 엄습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일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매우 다루기 힘들고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이라도 그 십자가를 졌던 시몬은 성경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복음은 그 구레네 사람 시몬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

 

Ⅲ. 십자가에 못박히심 15:22-32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장소(22)

그곳은 골고다라 하는 곳으로 번역하면 해골의 곳을 뜻한다. 이곳은 평범한 처형장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죄인들과 다를바 없이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못박히셨던 것이다.

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시각(25)

그 시각은 제 삼시였다.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에 따르면 제 삼시는 곧 아침 아홉시경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좀 늦은 시각이었다. 그들은 바로 그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때 받았던 모욕(23,24,26-32)

(1) 사형당하기로 된 죄수에게는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줄 포도주에 몰약을 탔으므로 포도주의 맛은 썼다.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맛보시긴 했어도 그것을 마시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그는 그 포도주의 쓴맛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마심으로써 그 효과를 얻으려하시지는 않으셨다.

(2)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의 옷들은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에게 사례로 주어졌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24절). 이와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즐거워했다.

(3) 그들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26절)고 쓴 죄패를 씌워 놓았다. 이 죄패에는 아무런 죄목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의 주권만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빌라도는 이 글을 통해 좌절당한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모욕을 주려고했거나 아니면 더할나위 없이 선한 왕을 섬길 자격이 없는 백성으로서의 유대인들에게 모욕을 주려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포하시려 한 것이다. 가야바가 자기의 한 말을 알지 못한 것과 같이 빌라도도 그가 쓴 말의 참뜻을 모르고 있었다(요 11:51).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볼때마다 그의 머리 위에 그가 왕이라고 쓰여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27절). 예수님은 셋 중에 가장 악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하여 그 죄인들과 교제를 나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던 점은 그 일을 통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해 좋은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이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어야'(사 53:12)한다고 예언되었다.

(5) 구경꾼들은 예수님의 불행을 보고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모욕했다. 예수님의 불행을 보고 그를 모욕한 구경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살펴보자.

첫째로 '지나가는 자들'(29절)까지 그를 모욕했다. 그들은 몹시 예수님을 조롱했을뿐 아니라 그를 몹시 증오하며 분개해 했다. 분명 대제사장들이 비꼬았던 말을 듣고 그들도 사용했을 것이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9,30절). 그들은 이런 말로써 예수님을 모욕했던 것이다.

둘째로 대제사장들까지 그를 모욕했다. 대제사장들은 사람가운데서 취했으며(히 5:1,2) 사람을 위하여 임명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아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수 없도다'(31절)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할수만 있다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요구했다(32절).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아야만 그를 믿겠다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모욕했다(32절).

 

Ⅳ. 예수님의 죽음 15:33-41

여기서 나타나는 설명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다.

(1) 세 시간 동안 온땅에 어두움이 임했다(33절). 유대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써 오는 표적'(막 8:11)을 구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한다는 뜻의 표적을 받았던 것이다. 그 나라에 이미 왔으며 또 오게될 것은 어두움의 표적이었다. 이 표적이 그들에게 암시했던 것은 그들이 평화로울때 소유했던 모든 것은 이제 그들의 눈으로부터 숨기워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어두움의 권세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은 어두움의 일인 것이다.

(2) 이 어두움의 때가 가까워지자 우리 주 예수님은 영혼의 고통을 당하시고 크게 소리지르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34절). 이 어두움이 뜻하는 것은 사람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고 있었을때 그를 덮었던 현재의 구름이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있었을때 하나님의 도움도 끊겼다는 것을 뜻하기 위하여 태양 빛으로부터도 부인을 받았다. 그는 이것을 어떤 것보다도 더 한탄하셨다. 그의 제자들이 그를 버렸을때에도 그는 제자들이 그를 버린 것에 대해 한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자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탄하셨던 것이다.

첫째로 그 이유는 이 일이 그의 영에 대해 상처를 주었으며 또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이유는 특히 예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죄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나타난 이 징조들은 때때로 희생 제물을 태우기위하여 보내졌었던 하늘의 불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는 것을 상징했다. 하나님이 죄인으로 말미암아 흡족히 여기지 않았을 경우 그 죄인에게 떨어질 불은 제물 위에 떨어져 하나님이 흡족히 여기셨다는 표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 불은 이제 그리스도에게 떨어졌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 대해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라고 했다. 그러나 죄인들의 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또 다른 것이다.

(3) 그리스도의 기도가 곁에 섰던 자들에 의하여 조롱을 받았다(35,36절).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엘리 엘리'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마가는 이 말을 아람어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말한것뿐 아니라 그 말의 뜻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했다. 그때 그들가운데 한사람이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게(36절) 했다. 그들이 이 일을 한 것은 예수님에게 더 모욕을 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일을 했던 사람에게 이 일을 하도록 지시를 내린 자가 누구든 그는 예수님을 더 비난했을 것이다. 그는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만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지 않는다면 엘리야도 그를 버린 것으로 생각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다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다(37절).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큰 소리를 지를수도 없을뿐 아니라 말조차 나오지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심령에 힘을 부어 주신다면 말이 나올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큰 소리를 지르신후 실제적으로 죽으셨다. 그 이유는 그의 영혼이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이 영의 세계로 떠나자 그의 육신은 호흡이 끊어져 흙덩어리와 다를바 없게된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 위에서 운명하신 바로 그 순간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38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첫째로 이 사건은 믿지않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큰 두려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그들의 교회와 국가가 오래지않아 초토화된다는 전조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사건은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큰 위로를 주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우리에게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새롭게 살 길'(히 10:19,20)을 열어주는 희생을 뜻하기 때문이다.

(6) 처형을 감독하던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했다(39절). 그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납득시켰던 한가지 사실은 그리스도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그리스도에게 모욕을 준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이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알아보자.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할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참되며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이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을때 하늘이 그에게 얼마나 영광을 돌렸는지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이다. "분명 이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을 받는 자가 틀림없다"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심한 고난과 모욕을 당했을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권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공언된 것이다.

(7)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며 섬기던 선한 여자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다(40,41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감히 나타나지 못했다. 여자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리서서 슬픔에 차 있었다. 이 여자들가운데 이름이 기록된 여자들도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중에 하나였다. 그 여자가 위로를 얻을수 있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능과 선하심 뿐이었다. 그 여자는 일곱 귀신들린 병을 앓다가 그리스도의 권능과 선하심에 의해 병고침을 받았었다. 그 여자는 그것이 감사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를 섬겼던 것이다. 마리아도 그곳에 있었는데 그 여자는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였다. 이 마리아는 글레오바 곧 알패오의 아내인 동시에 동정녀 마리아의 자매이기도 했다. 이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굳이 잔치에 참석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위하여 갈릴리로부터 왔던 것이다. 이제 보좌 위에 앉게될 것으로 생각했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자 그 여자들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크게 출세할 것을 기대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아마도 몹시 실망하게될 것이다.

 

Ⅴ.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 15:42-47

여기서 대하게 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장사되는 내용이다.

(1) 어떻게 그리스도의 시체를 달라는 부탁이 이루어졌나(42-44절). 그리스도의 시체는 로마 당국이 처분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언제 그리스도의 시체를 달라는 부탁이 이루어졌으며 어째서 그리스도의 시체를 그렇게 서둘러 장사지냈나. 이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때에(42절). 유대인은 어느 절기일보다도 안식일을 더 열심히 엄수했다. 그러므로 이 날이 비록 어떤 절기일이라해도 안식일에 더 종교적인 비중을 두어 그 달을 절기일보다 안식일 전날로 준수했을 것이다. 안식일 전날은 곧 안식일을 위한 예비일이었다. 우리는 하루전날 안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안식일의 결실을 맺으며 다음 안식일을 준비하는 일에 한 주간을 배당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시체를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누구였나. 그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는 여기서 인격적이고 신중한 성품을 지닌 '존귀한 공회원'으로 불렸다. 그는 바로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더훌륭한 특성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의 특권을 통해 얻는 유익을 바라는 자들은 자진하여 그리스도의 주장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일을 할수 없었을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세워 이처럼 필요한 봉사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갔다. 비록 요셉은 그것이 얼마나 대제사장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그 일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요셉도 아마 좀 두려워했을 것이다.

3)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놀랐다.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는지 안죽었는지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죽은 것처럼 속여 그 몸을 산채로 십자가에서 내리게 하는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부하인 백부장을 불러 그리스도께서 '죽은지 오래냐'(44절)라고 물었던 것이다. 백부장은 빌라도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신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운명하셨는지를 주목해 봤었기 때문이다(39절). 빌라도는 그 의문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산 채로 장사되었다고 말하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리라는 진리를 헛되게 하는 구실을 주지않으려는 것이었다. 종종 그리스도의 진리는 이와같이 그 원수들에게서도 확증을 얻게 된다.

(2) 어떻게 그리스도의 시체가 장사되었나(45-47절). 빌라도는 요셉에게 그리스도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그가 원하는대로 할수 있도록 위임했다.

1) 비록 시체를 싸는 일에 사용할 세마포는 낡은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할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리스도의 시신을 싸기위하여 새로운 세마포를 샀다.

2) 그리스도의 시신이 비록 온몸에 상처투성이고 야위었지만 요셉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시신을 내린뒤 값진 보물처럼 세마포로 쌌다.

3) 요셉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놓은 바위속에 판 무덤에 그리스도의 시신을 넣어두었다. 이 돌무덤은 요셉의 소유였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었을때 아무런 땅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묘실만은 갖고 있었다. 이 돌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덤을 성도들의 피난처로 만들기위하여 죽으셨던 것이다.

4) 요셉은 돌을 굴려 무덤문에 놓았다. 요셉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것이 유대인의 장사하는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5) 몇몇 선한 여자들이 그리스도의 시신을 장사하는 곳에 참석하였으며 안식일이 지난 뒤에 그의 시신에다 기름을 바르러 오기 위하여 예수 둔 곳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그 할일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위대하신 중보자이시며 새 계명을 주신 분인 예수께서 장사되자 그의 무덤은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몸인 교회에 관하여 갖게될 관심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장사된 것을 명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장사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우리에게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일수 있게하며, 어두움의 때를 만날 경우 즉시 만들어야할 편안한 안식처가 되도록 해야한다.

 

# 해설

십자가 수난과 죽음 ( 15 )

본장에는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에게 잡힌 예수님은 새벽에 빌라도에게로 호송되었습니다. 유대인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수 없었기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의 힘을 빌어 예수님을 처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로부터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1. 로마 총독 빌라도

1) 빌라도의 심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에 의해 재판을 받고 사형이 확정되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한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시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이어서 여러가지를 물었으나 주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시자 빌라도는 이를 기이히 여겼습니다.

a.유대인에게는 사형권이 없으므로(요18:31)

b.강포함(눅13:1)

2) 바라바를 석방시키라고 함

당시 로마에는 명절때 총독의 결정에 따라 죄인들 중 한명을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는 이 관습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바라바와 예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대제사장들로부터 충동을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시기와 왜곡된 신앙 양심은 예수님을 증오하였을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a.살인한 바라바(눅23:19)

b.의인을 사형하고 살인자는 놓아준 불의의 재판(행3:14)

3) 십자가형을 언도함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하자 예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라는 성난 무리의 외침을 들은 빌라도는 자신이 그들의 마음을 바꿀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군중들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한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당시의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하고 탐욕적인 인간으로 사악한 양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무죄를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언도했습니다.

a.군중 심리에 휩쓸림(행19:32).

b.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것임(막15:15).

 

2. 십자가의 수난

1) 예수님을 희롱함

온군대를 회집한 로마 군병들은 우선 주님께 당시 왕들이 입던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능멸의 절정으로써 꿇어 절하였습니다. 그후 십자가에 못박기위해서 예수님을 끌고 나갔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자는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직접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과 구레네 시몬이 번갈아 졌습니다. 드디어 골고다라는 장소까지 이르렀습니다.

a.예수를 모욕함(마27:30)

b.예언의 성취임(사50:6)

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골고다에 이르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주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병들은 주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그리스도를 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a.해골이라하는 곳(눅23:33).

b.예언을 이루고자 지심(시22:18)

3)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말로 형언할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으로 부르짖을때 그 곁에 선 무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외치며 그 결과를 보기 위한 천박한 호기심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라는 곁에 선 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끝내 큰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a.최악의 처지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빌2:8)

b.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하심(눅23:46)

 

3. 예수의 죽음

1) 백부장의 고백

예수의 운명과 함께 성소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을 차단하고 있던 죄의 담을 허물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참조, 엡2:14).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군중 심리에 들떠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할때 그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고요히 주목하고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a.백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로마 군관(행21:32)

b.예수같은 의인은 인생 중 없음(롬3:10)

2) 충성된 여인들이 지켜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실때 충성된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운명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은 아닐지라도 은밀한 가운데 그리스도께 헌신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늘 자기와 함께하도록 하기위해 택하신 제자 이상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공생애 기간에 그리스도를 만난 그야말로 제자 중의 제자들입니다(참조, 요15:27). 이름없이 주님께 헌신 봉사하던 이들이 있었기에 주님과 사도들의 복음 사역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a.그리스도를 섬길 것(요12:26)

b.무덤까지 확인함(막15:47)

3) 무덤에 장사됨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공회원으로서 부자이며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새로 산 세마포로 싸고 자기를 위해 새로 마련한 무덤에 정성껏 장사지냈습니다(참조, 마27:60). 이로인해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이시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참조, 사53:9).

a.산헤드린 공회원(눅23:50).

b.성도의 옳은 행실(계19:8).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수난당하시는 주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빌라도의 행위를 통해 악한 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진리를 외면하는 자들은 모두 빌라도와 같은 악한 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악한 자의 행위를 멀리하고 선한 자의 행위를 본받도록 해야 합니다.

 

# 핵심

15:1-32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유대 군중의 폭동을 우려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상황에서도 구약 예언대로 온갖 조롱을 당하셨다.

빌라도(15:1)

A.D. 26-36년에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한 제5대 로마 총독. 유대인 억압정책을 편 그는 로마에 대항한 열심당원들을 색출, 처형했다. 바라바(15:7)는 이때 체포당한 열심당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빌라도는 과격한 성격과 포악한 행동으로 폭동을 야기했고, 그 결과 A.D. 36년에 로마로 소환당했다. 하지만 이런 그도 죄없으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였다(마 27:24).

 

# 묵상

바라바의 석방 ( 15:8-15 )

해마다 유월절이 돌아오면 죄인 중에 한사람을 풀어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죄가 없는 사람으로 알고있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했으나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선동된 사람들이 바라바를 요구하자 그것을 거절하면 민요가 날까 두려워하여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주게 됩니다. 이처럼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사형시킨것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조롱과 모욕 ( 15:16-20 )

먼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서 그 머리에 씌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초입니다. 이 고초의 사랑이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었고, 그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했습니다. 또한 온 군중 앞에서 주님은 희롱과 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처형 장소 ( 15:22 )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으로써 일반적으로 흉악범이 처형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골고다에서 죽으셨으나 진짜 죄인은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골고다는 죄인을 처형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대속이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번제단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 ( 15:29 )

이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하신 말을 비웃어 이르는 말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에 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조롱하게 됩니다. 한편,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전이 성도들 자신이라고 지칭하면서 그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3:16).

찢어진 성소 휘장 ( 15:38 )

지금까지는 1년에 한번,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가 휘장으로 나뉘어져 있어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수 있었으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 믿는 자들은 모두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사를 드리던 구약시대가 지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속받았음을 기뻐하며 이를 선포하는 신약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성도의 몸이 곧 성전으로써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고전3:17), 휘장으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모습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 앞에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38절).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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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옥합을 깨뜨린 여인 14:1-11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예를 대하게 된다.

1.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베푼 친절(3-9)

여기서 볼때 예루살렘성 안팎에도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친구들이 몇명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흡족하게 할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시지 않았다.

(1) 여기에 있는 한 친구는 매우 친절해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비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계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동료들에게 우울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2) 다른 친구가 있었는데 그도 매우 친절하여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실때에 '매우 값진 향유를…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었다'(3절).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바칠만한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선한 여인이 그리스도께 존경을 바친 특별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에게 붓기에는 너무나 값비싼 옥합이었다고 생각할수 있을 것인가? 주목할만한 것은 그 여인이 그리스도의 머리에 그 향유를 모두 붓고자 한 점이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그 옥합을 깨뜨렸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으로 영광을 받아야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애정을 표현하는 값진 향유를 그에게 드릴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 그 모든 것을 드려야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여야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상 받아야할 이 일을 더나쁜 뜻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다. 인색하지 않게 관대히 베푸는 것을 낭비적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수 있었겠다'고 변명했다(5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범한 자선을 베푸는것 때문에 주 예수님께 특별히 베푸는 경건한 행동을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변명도 되지않을 것이다.

2) 우리 주 예수님은 나타난바와 같이 목적했던 것보다 이 일을 더좋은 뜻으로 해석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일을 큰 사랑과 큰 믿음의 행동으로 인정하셨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절).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셨는지 또 그가 그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때마다 스스럼없이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들의 관을 준비하고 장례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런 일을 인정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적이 없었지만 그가 고난을 받으러 그곳에 가실때에는 그러한 모습을 취하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머리에 향유를 부으시지 않으셨지만 그는 단지 자신의 장사를 위해서 그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3)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여인의 훌륭한 신앙심을 칭찬하셨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9절).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옥합을 깨뜨린 이 선한 여인은 보상을 받았다. 그 여인은 그녀의 수고도, 향유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그 일로 말미암아 값진 향유보다 더좋은 이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은 영광을 얻게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대적들이 품고있던 적의(1,2,10,11)

(1)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의논하였다(1,2절). 유월절이 이제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서 그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다. 첫째로 그의 죽음과 고난은 더욱 공개되어야 했다. 둘째로 원형으로써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모형인 유월절 양에 대한 목적을 충족시켜야 하셨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이 희생되고 또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사건이 기념되는 바로 그때에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적들이 얼마나 간악했는지를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잠잠케하려 했을뿐 아니라 그의 모든 선행들로 인하여 그에게 보복하고자 했다. 그들이 얼마나 교활했는가를 보라. 민요가 날까하노니 명절에는 말자(2절). 그들은 백성들이 자극을 받고 그리스도를 구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칭송만을 구했던 그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분노와 불만을 두려워했다.

(2)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 일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10,11절).

1) 유다가 제안했던 것은 그들이 두려워했던 민요를 일으키지 않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가 그들에게 협조할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비위를 맞춘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친구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야비한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모든 불순종의 자녀들을 통해 역사하는 영은 그들이 서로서로를 도와 악을 도모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2) 유다가 꾀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넘겨준 대가로 돈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유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욕망은 바로 탐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아마도 유다는 처음부터 그 탐욕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던것 같다. 그때 그는 회계를 맡게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이며 그 자신도 진심으로 돈 다루기를 좋아했던것 같다. 그러나 이제껏 돈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랐던 그는 그리스도의 원수들로부터 돈을 얻었기때문에 그를 배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3) 그는 돈을 얻게되었으므로 그의 약속을 이행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의 유혹에 빠지지않도록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할 필요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악을 행하게 하는 의무는 무익하며 피해야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뿐 아니라 우리의 법에 있어서도 하나의 규칙이 되는 것이다. 악을 행하게 하는 의무는 그 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에 대한 회개를 못하게 구속하는 것이다. 죄의 길이 얼마나 내리막 길인지를 보라. 곧 사람들이 죄의 길에 빠지면 멸망에 이를때까지 계속 죄의 길을 가야만 한다.

 

Ⅱ. 성만찬 제정 14:12-31

(1)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날밤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드셨다(12-20절). 이처럼 우리는 다가올 고난이 염려스러워도 거룩한 계명을 지켜야 한다.

1) 그리스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지켰던 통상적인 절기일에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그날은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잡는 날(12절)이었다.

2) 그리스도는 그가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예비했던 곳을 찾도록 제자들에게 그 방법을 일러주셨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킬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13,14절). 분명 예루살렘성의 거주자들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이럴때 빌려줄만한 객실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가운데 한 객실을 사용하셨다. 아마도 그는 제자들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자신이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깨끗한 심령 곧 정결한 물로 씻겨진 곳에 머물리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그곳을 지정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기로 되어있는 곳에는 물동이가 그보다 먼저가야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예비된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드셨다. 예수께서 일상적인 식사를 하실때에는 검소하게 풀밭에 앉아 식사를 하셨다. 그러나 거룩한 절기를 지켜야할 경우 예수께서는 가능한한 가장 좋은 객실을 얻어 그 절기를 경축하곤 하셨다.

4)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셨다. 만일 그리스도가 열두 제자와 함께 오셨다면 비록 자기의 선생인 그리스도를 넘겨주기 위하여 궁리하고 있었다해도, 그때에 유다는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내용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20절). 즉 그는 그리스도와 다른 제자들로부터 의심받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서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유다의 악한 생각을 알고 계셨지만 그를 그 자리에서 쫓아내지 않으셨다. 그것은 아직 공개될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셨다(21절).

1) 제자들은 자기 선생과의 교제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곧 자기를 잃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인자가 팔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가 팔린다면 그에게서 듣게될 다음 소식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21절).

2) 제자들은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되어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중에 한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18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기쁨을 깨셨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할수만 있다면 유다의 양심을 자극하고 그로 하여금 그의 악을 회개하도록 일깨우며 멸망의 가장자리에 있는 그를 돌이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드러나는 결과를 보면 그 경고에 가장 관계가 있었던 그가 경고를 듣고도 가장 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그 경고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비통해하기 시작했다. 이 유월절 만찬에는 쓴 나물(민 9:11)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19절)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서로를 경계하기보다는 자신들을 더욱 경계했다. 가장 좋은 것을 바라는 것(고전 13:5-17)이 사랑의 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형제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많은 죄가 있음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있으므로 우리 자신에 대하여 올바르게 판단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신뢰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명 "저는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내니이까'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 알아보자. 첫째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팔 자는 너희가 아니고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20절)라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의 마음이 불편하게 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계속하여 그의 계획을 수행했다해도 그것은 칼날 위에서 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21절)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다는 그의 선생이 자기가 팔려야만 할것에 대해 자주 말해왔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 자신을 자위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팔려야한다면 분명 하나님은 그일을 행하는 유다에 대해 비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유다에게 그는 더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진정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못박혀 죽임을 당한 것은 법없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였던 것이다(행 2:23).

(3)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식을 제정하셨다(22-26절).

1) 성찬식은 유월절 만찬이 끝날무렵에 제정되었다. 그들이 이미 유월절을 위해 희생된 어린양이 흡족히 먹었으므로 성찬은 육신을 위한 식사를 하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다. 성찬은 영혼만을 위한 음식이므로 육신을 위해 마련된 음식은 매우 적은 것이다. 그것은 표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족하다.

2) 성찬식은 그리스도 자신을 본보기로 제정되었다. 성찬식은 이미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몸소 성찬식을 제정하여 실시하셨다.

3) 성찬식은 축복과 사례로 제정되었다. 일반섭리를 통해 주시는 은사에 대해서도 축복하며 사례함으로써 받아야하는데 하물며 특별은총을 통해 주시는 은사야 더욱 말할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축복하시고(22절) 사례하셨다(23절).

4)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떼심으로 자기를 상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는지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는 포도의 즙으로 만든 포도주를 가리켜 새 언약의 피라고 불렀다. 피에 대하여 자주 언급되었는데 그의 귀한 피는 우리의 구속의 대가로 치른 것이다. 그 피는 언약의 피로 불려지는데 그 까닭은 은혜의 약속이 하나의 언약이 되었으며 유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피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즉 '많은이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흘려지는 것이다(히 2:10).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녔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와 같이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어린양의 피의 그 옷을 씻어 희게 하게'(계 7:9-14)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의 약속은 아직도 샘물처럼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이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다면 어째서 나를 위해선 그의 보혈을 흘리지 않으시겠는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 즉 이방인의 죄인들뿐 아니라 죄인들의 괴수를 위해서까지 보혈을 흘리셨다면 어째서 나를 위해서는 그 보혈을 흘리지 않으시겠는가?

5) 성찬식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얻은 그 은혜를 우리에게 양도하는 징표이었다. 그래서 그는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그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22절).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시며 그것을 마시라고 명하셨다(23절).

6) 성찬식은 천국의 행복을 목표로하여 제정되었으며 그 행복에 대한 기대와 보증으로, 또한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쾌락과 기쁨을 제거하도록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25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7) 성찬식은 '찬미하는 것'(26절)으로 끝났다. 그리스도는 백조같이 아름다운 노래로 이 찬미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기 바로전에 이 노래를 부르셨다. 아마도 그 노래는 그가 자주 부르셨던 것으로 보이는 시편 113편에서 118편에 이르는 내용가운데서 불려졌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달빛을 받으며 베다니로 돌아오실때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셨다(27-31절). 그들은 찬미하고 곧 나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 음식을 먹은날 밤에 집을 나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사자의 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자장이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했기 때문에 승리자로서 그 검을 받으시려고 의도적으로 떠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죽음의 사자를 피했으나 그리스도는 도리어 그를 정복하셨다.

1)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가 고난을 받을때 모든 제자들이 그를 떠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7절). 그리스도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계셨지만 제자들을 그의 식탁으로 초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훗날에 죄에 빠질 것이 두려워 성찬식에 나오는 것을 꺼려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럴 위험이 더 커질수록 부지런하고 양심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하여 우리 자신을 더 강하게 지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그들은 그리스도가 시험을 당할때 늘 함께있었다. 비록 때때로 그를 공박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닥쳐올 폭풍의 힘이 너무 컸으므로 그들은 닻을 모두 내리고 있었지만 난파될 위험에 빠지게 된 것이다. 목자가 죽으면 필시 양들도 흩어지게 된다. 즉 양의 온 무리가 목자의 죽음을 괴로워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다시 모여 그의 의무를 수행하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28절).

2) 그리스도는 특별히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는 그들이 감람산으로 나갔을때 유다(유다는 그들 몰래 가버렸다)를 남겨놓고 갔다고 생각해 볼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랑해야할 이유가 전혀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나쁜 상태에 처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보다 더 나아지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우리는 마땅히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① 베드로는 자기만은 다른 제자들처럼 그렇게 나쁜 행동을 하지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29절)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시험을 받는다해도 그 시험을 홀로 견딜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비록 아무도 그리스도 곁에 남아있지 않는다해도 자기만은 그리스도 곁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고자 하는 것은 타고난 본능인 것이다.

②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나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버리겠지만 베드로는 그를 한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곧 일어날 것이다. 오늘 이밤 닭이 두번 울기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30절). 즉 너는 나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처럼 부인할 것이다.

③ 베드로는 자기가 한 약속을 그대로 고수하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절)라고 말했다. 분명 그는 그의 말대로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유다에게 그가 자기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때 유다는 이와같은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유다는 계획적으로 죄를 범했지만 베드로는 아무 생각없이 순간적으로 죄를 범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시험을 받고(갈 6:1) 범죄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부인한 것은 나쁜 행동이었다. 만일 베드로가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주여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당신을 부인하지 않게 지켜주소서"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에 대해 너무 과신했다. 내니이까라고 말했던 자들이 이제는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 안심했다. 그러나 고난을 견딜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Ⅲ.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14:32-42

그리스도는 이제부터 고난을 받기 시작한다. 또한 그 고난은 가장 고통스러운 영혼의 고난부터 시작된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1) 그리스도는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셨다(32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내가 조금 더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있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최근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요 17).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아가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에게 물러나있으라고 명하신다.

(2) 그리스도는 조용히 기도하러 가실때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33절). 그들 셋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세 제자는 기꺼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을수 있다고 가장 많이 자랑하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이 14장에서 자랑했고 야고보와 요한은 10:39절에서 자랑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 세 제자들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고뇌를 당하고 있는지 곁에서 바라보게하여 그들이 한말에 대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그들을 데리고 가셨던 것이다. 가장 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그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민감해지도록 제일 먼저 시험을 받는 것이 좋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극심한 동요를 일으키셨다(33절). 그는 심히 놀라기(이 말은 마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시작했다. 그 말은 '아브라함에게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던 것'(창 15:12)과 같은 어두움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그때 그에게 있었던 그런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면서도 티끌만큼의 혼란이나 부정한 일에 빠지지 않으셨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는 그런 것들에 빠질수 있는 부패한 본성이 그에게는 전혀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물속에 찌꺼기들이 가라앉아 있다면 그 물은 고요하게 있을 동안에는 깨끗한 상태로 있지만 한번 흔들리게 되면 구정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도 이와같다. 그러나 깨끗한 유리잔에 담긴 순수한 물은 아무리 흔들어도 계속 순수한채로 남아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심하게 동요되셨다 할지라도 이와같이 순수한 마음을 지키셨던 것이다.

(4) 그리스도는 이런 동요에 대해 고민하셨다(34절). 그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처럼 슬퍼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그 때문에 고난받아야할 죄인들의 악의를 잘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그 죄인들로 인해 노하게 되신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그들에 의해 손상되고 위험에 빠진 인간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지니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우리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그는 우리의 보증인인 동시에 우리의 대표자로서 율법의 저주를 떠맡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죽음을 맛보셨으며(히 2:9) 잔속에 담긴 찌꺼기까지 마셔버리셨다. 그는 그 잔의 모든 쓴 것을 맛보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고난을 받으시며 우리를 위해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음의 이유들로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1)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각성하도록 하신다. 우리는 죄가 주 예수님에게 얼마나 선명한 인상을 주었는지를 알면서도 그 죄를 좋아하거나 가볍게 여길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죄가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할수 있을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그 죄에 대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아야 할까?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하여 그렇게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여야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신다. 어느때라도 우리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될 정도라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고통을 받으셨으며 제자는 그 스승보다 더크지 못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슬픔을 감수하심으로써 그 슬픔의 고통을 제거하셨을뿐 아니라 그 슬픔을 가치있게 하여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셨는데, 아니 오히려 그 슬픔을 승화시켜 그 슬픔으로 위로를 얻게하셨는데 우리는 어째서 그 슬픔을 회피하려고만 하는가? 축복받은 바울은 슬픔에 차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했던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와 함께있기를 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있으라'(34절)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에 대하여는 단지 '너희는 여기 앉아있으라(32절)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보다 이 세명의 제자들에게 더많은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여기 머물러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6)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셨다(35,36절). 그는 땅에 엎드리어(35절) 기도하셨다. 바로 얼마전에도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요 17:1) 기도하셨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민하고 계셨기때문에 땅에 엎드리셨던 것이다. 즉 한 인간으로서 그의 고난을 면하고자 '될 수 있는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35절) 간구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아바 아버지(36절)라고 하신 말씀을 대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이 말은 아람어로써 아버지라는 뜻을 갖고있다. 그것은 슬픔속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이 그 말을 얼마나 강조하셨으며 또 우리로 하여금 그 말을 강조하게 하려 하셨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36절).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리라고 기대할수 없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때 우리는 그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도 마땅히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위한 중보자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5절).

(7) 그리스도는 그가 기도하는 동안 잠에 빠져있던 제자들을 깨우셨다(37,38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그를 찾지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셨다. 그들이 이와같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것은 더나아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게될 징조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주 최근에 제자들을 칭찬하셨었다. 그것은 비록 그들에게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시험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최근에 그리스도를 버리지않겠다고 약속한바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언짢게 했을까? 그리스도는 특히 베드로가 조는 것을 보시고 그를 책망하셨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있을수 없더냐(37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밤새도록 자기와 함께 깨어있을 것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단지 한시간만을 요구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과중한 임무를 맡기지도 않으시며 또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도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책망하시듯이 그의 책망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충고와 위로를 주신다. 그리스도가 여기서 그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매우 현명하고 신앙적인 충고였다.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38절). 그리스도께서는 고민하고 계신데 잠에 빠져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분발하여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힘을 얻지않음으로써 그들은 더 그릇되이 행동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져버리고 달아났던 사실에 명백히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매우 친절하고 다정한 변명을 해주셨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절). 이 말씀은 곧 "너희가 마음으로는 기꺼이 깨어있기를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깨어있을 수 없도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육신은 약하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너희는 쓰러지게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우리는 깨어 기도하고자 애써야하는 것이다.

(8)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셨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39절). 그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세번째의 기도를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말아야 될 것'(눅 18:1)을 가르친다. 비록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속히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되풀이해야 한다. 바울은 사단의 사자인 가시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때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처럼 세번 주께 간구하고 나서야 평안한 응답을 받았다(고후 12:7,8). 우리는 두번 세번 찾아와서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으로 받게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더빨리 나타나기도 하고 더늦게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9)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찾아오시기를 반복하셨다(40-42). 이처럼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가 졸고 있을때에도 끊임없는 관심을 쏟아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번째로 제자들에게 오셨을때에도 여전히 저희가 자는 것(40절)을 보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보라.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영혼에 대해 얼마나 장애가 되는지를 보라. 두번째로 제자들을 찾아온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전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40절). 자다 일어난 혼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혹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로 그들에게 오셨을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자고 싶은대로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41절). 이 말은 마태복음에는 나타나 있지않다. 그러나 그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닐 것이다. "너희가 깨어있으라는 경고를 충분히 들었으나 그 경고를 따르지 않았다. 이제 때가 왔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리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1절)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Ⅳ. 배신당하신 예수 14:43-52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께서 대제사장들에 의해 파송된 자들에게 잡히시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예수께서 먼저 영혼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시작하여 나중에 육신의 고난을 받으셨던 것이다.

(1) 우리 주 예수님을 잡으려고 극악무도한 무리들이 고용되었다.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43절). 이 폭도들의 인도자는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였다. 매우 훌륭하고 진실해 보이는 신앙고백이 치욕적이고도 돌이킬수 없는 배교로 끝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무리들을 보내 악한 일을 하게 했다(43절).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를 환영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메시야가 세상에 오자 그를 배척했으며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3) 유다는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것으로 그를 배신했다(44,45절). 그는 예수를 랍비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이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마 23:7) 때문에 그는 예수를 전보다 더 존경하는 것처럼 "랍비여"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기만했다. 이런 거짓된 존경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를 배신했던 것이다.

(4) 파송된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결박하고 그를 죄인 다루듯 했다.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46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난폭하게 다루어 결박했던 것이다.

(5) 베드로는 자기의 선생을 보호하려고 그의 곁에 있다가 폭도 중의 하나를 칼로 상하게 했다(47절). 그는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머리를 베려고 했으나 잘못 휘둘러 단지 그 귀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 더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없애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싸움에 이긴다.

(6) 그리스도는 그 무리들에게 그들이 자기를 결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신다(49절). 그 어리석은 일이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아무죄도 없는데 그들은 그를 강도나 되는 것처럼 잡으러왔다. 그는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던 것'이다. 만일 그가 악한 생각을 가졌다면 어느때라도 그 악한 생각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는 좋은 결실을 맺었기때문에 좋은 나무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그가 강도나 되는 것처럼 그를 잡으러 왔는가?

2)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처럼 그를 은밀히 잡으러왔다. 그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요 3:20) 행악자가 결코 아니었다. 이처럼 한밤중에 그리스도가 물러나있는 곳까지 그를 찾아온 것은 그들이 야비하고 비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3)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정부에 대항하여 무장이나 한것처럼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에 이 소란을 피웠다. 첫째로 그들은 노한 무리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무장하고 온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다른 무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격분하도록 했다.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를 잡으러 옴으로써 무리들에게 그가 위험하고 사나운 사람으로 나타나게 했다.

(7) 그리스도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의뢰함으로써 이 모든 치욕적인 대우를 감수하셨다(49절). "내가 혹독한 대우 받았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49절).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극히 적은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는 것을 견딜수 없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구약성경의 밭에 감추인 참 보화 곧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8) 이 일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렸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0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지않겠다고 매우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라도 시험을 받으면 무슨 행동을 하게될지 모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눅 22:28)이라고 말씀하여 큰 위안을 받으셨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당하시는 가장 큰 시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할때 그것이 주님에게 얼마나 슬픈 일이었을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처럼 고난받으며 또 모든 무리들이 고난받는 그들을 외면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위험에 빠졌을때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버렸다'(딤후 4:16)고 말했다.

(9) 이 소란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51,52). 다른 복음서에는 이 구절들의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기위하여 그를 따라왔던 한 청년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 그에 관한 설명을 주목해 보자.

1) 그 청년이 얼마나 놀랐으면 예수의 고난을 보고자 잠자리에서 나왔을까? 이렇게 무장한 무리들은 큰 소란을 피우지 않을수 없었다. 이 소동이 그 청년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그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보기위하여 그렇게 서둘렀다. 그래서 그는 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베홑이불만을 두르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렸지만 그 청년은 그가 무슨말을 할지 듣고 싶었을뿐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지 보고싶어서 계속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2) 그 청년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할 위험에 처했을때 그가 얼마나 놀랐으면 다시 집으로 도망했겠는가? 제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갔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신이 옷도 입지않고 홑이불을 두를 정도로 특별히 무장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안전하게 그리스도를 따라갈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이 잡았던 '베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던'(52절)것이다. 이 구절은 제자들이 그들의 손에 잡힐뻔 하다가 얼마나 간신히 모면했는지를 보이기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들의 선생이 그들에게 가졌던 관심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그들을 지킬수 없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요 18:8)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알수 있다. 이 구절을 또한 믿음과 양심때문이 아니고 단지 호기심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Ⅴ. 공회의 재판 14:53-65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리스도가 심문을 당하시고 재판을 받으시며 유죄로 입증된 뒤 선고를 받으셨던 내용이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최근에 죄가 있든 없든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유대민족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판단했던 사람이다(요 11:50). 그러므로 그는 편파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다(53절). 비록 한밤중이었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은밀하게 모여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럴 정도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잡힐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2) 베드로가 멀리서 좇아왔다(54절). 그러나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왔을때 그는 하속들과 함께 앉았다. 대제사장의 집 뜰 안에 불을 피워놓았던 장소는 베드로에게 적절한 곳이 못되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들도 베드로가 함께있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못되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었기때문에 시험을 받게된 것이다.

(3) 그들은 호의나 돈을 얻으려고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 증거를 매우 열심히 했다(55,56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행악자와 같이 취급하여 결박했었다. 그러나 그를 결박한 이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소할만한 아무런 증거도 갖고있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씌우려면 그를 칠 증거를 찾아야했던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율법에 의해 위증(신 19:16,17)하는 자를 처벌할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세상의 의원들이 오히려 혼란케 하고, 화평과 평등을 지켜야할 자들이 오히려 그 화평과 평등을 왜곡시킬때가 바로 '여호와여 도우소서'(시 12:1)라고 부르짖을 때인 것이다.

(4) 그리스도는 성전에 대하여 위협하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내용들 때문에 마침내 기소되었다(57,58절).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증거도 일치되지 않았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59절). 그들의 증거는 중대한 죄목으로 고소할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서로 의견의 일치조차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증거가 사형선고를 내릴만한 죄목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기소하지 못하였다.

(5) 그들은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을 고소하도록 요구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대답도 없느냐(60절).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고소할수 있는 어떤 증거를 얻어 그를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이 거만한 대제사장이 우리 주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건방지고 경멸적인 태도를 지녔는지 쉽사리 생각해 볼수 있다. 그러므로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종종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본보기를 보이시기 위하여 잠잠하고 아무대답도 아니하셨던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중상과 거짓 송사를 받았을때 인내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이 송사로 죄를 입게 될때(사 29:21) 우리의 변호가 오히려 비난을 더하게 되지않도록 신중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이다.

(6)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 질문을 부인하지 않고 시인하셨다(61,62절). 대제사장은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그들에게 그의 재림을 약속하셨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2절). 이 말씀은 "지금 이렇게 비천하게 보이는 인자를 너희가 곧 보고 그 앞에서 떨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와같은 말씀이 그 공회를 놀라게 해서 적어도 그들가운데 일부는 재판을 반대하거나 저지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이 법정에서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을때 로마 총독이 두려워하여 재판을 연기시켰었다(행 24:25).

(7)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자 대제사장은 그에게 불경죄를 선고했다(63절). 그리고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 사울이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아(삼상 15:27, 28) 찢은 것이 자신의 왕위가 박탈당하는 의미를 지녔다면 가야바가 자기 옷을 찢은 것은 더욱더 그의 제사장직이 박탈당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죽었을때 장막이 찢어져 모든 사람에게 제사장직이 허용된 것과 같은 것이다.

(8) 그들은 그리스도가 불경죄를 범했기때문에 중대한 죄를 범했다는 것에 동의했다.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64절). 산헤드린 공회에도 그리스도의 친지들이 꽤 있었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통고를 받지못했을 것이다.

(9) 그들은 그리스도를 능욕하고 조롱했다(65절). 일부 제사장들은 그들의 근엄해야할 입장도 망각하고 하속들을 거들어 죄인으로 정죄된 그리스도를 희롱하였다. 그들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일을 그들의 오락으로 삼았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능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해야할 것이다.

 

Ⅵ. 베드로의 부인 14:66-72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내용이다.

(1) 베드로의 부인은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오면서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멀찍이 좇아왔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쉽사리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만다.

(2) 베드로의 부인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동석했기 때문에 야기되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함께있는 것이 훨씬더 위험하다는 것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죄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 그 시험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였기때문에 받은 것이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절). 이 사람은 그 당이라(69절).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70절). 어떤 사람이 사투리로 말한다면 누구라도 그의 출신지를 알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그의 말투로 도전을 받았으나 단지 어리석은 자라는 조롱을 당할 처지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주장은 때때로 잃는 것이 너무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주장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생각해 볼때 그 시험은 두려워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은 비자만이 어쩌다가 베드로에게 눈을 돌리고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 비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필요가 없었다.

(4) 베드로의 죄는 매우 컸다. 베드로는 결국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다. 그때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인정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종 자신의 고난에 대해 그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셨었다. 그러나 고난이 닥치게되자 베드로는 마치 전에는 그와 같은 고난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 고난에 대해 매우 놀라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고 우리들에게 둘러싸였을때 베드로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가 홀로 남아 멸시를 받고 능욕을 당하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며 그와의 관계를 시인하지 않았다.

(5) 베드로의 회개는 매우 빨리 이루어졌다. 그는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으며 그의 세번째 부인은 가장 나쁜 죄가 되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세번째 부인을 했을때 그리스도를 저주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부인을 확고히 하기위하여 맹세까지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닭이 두번 울었으며 베드로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그의 선생이 그에게 한 경고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다. 닭이 두번 울었을때 벌어진 특별한 상황은 그 경고의 말씀을 더욱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경고를 생각하고는 울음을 참을수 없었던 것이다. 마가가 베드로의 감독하에서 이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마가가 이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죄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그의 슬픔은 보다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는데에 주목하고 있다. 겸손해진 베드로는 그 슬픔이 과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또한 자신이 아무리 슬퍼해도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을 돌이킬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죄가 자꾸 생각나서 울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겸손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 해설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수난 ( 14 )

본장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와 마리아의 향유 부음, 가룟 유다의 배신, 유월절 만찬, 베드로의 헛된 약속,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심문당하신 내용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본장에는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 대비되어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인간적인 모습이 각각 묘사되고 있습니다.

 

1. 유월절 만찬

1) 악인과 선인의 행위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을 기념하는 귀한 절기를 앞두고 대제사장과 유대 교권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일 것을 모의하려고 모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또한 민요가 날까하여 명절에는 말자고 일단 주님을 체포하는 것을 보류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인들과는 대조되는 사건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식사하실때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머리털을 풀어 주님의 발에 흘러내린 향유를 적셔 그 발을 씻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당신에게 향유를 부은 것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행위를 매우 칭찬해 주셨습니다.

a.힘써 고소한 자들(눅23:10)

b.비싼 향유(요12:3)

2) 유다의 반역과 만찬 준비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위해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주겠다는 유다의 제안은 대제사장들에 의해 즉시 받아들여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유대 교권자들과 모의를 한후 배신의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 즈음에 예수님은 두명의 제자에게 성내에 들어가서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서 그 집주인을 만나 유월절을 예비할 처소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염려와는 달리 주님은 세심하게 유월절 만찬 장소와 내용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a.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마26:14)

b.유월절을 예비함(마26:19)

3) 최후 만찬의 밤

예수님은 날이 저물자 열두 명의 제자를 데리시고 예비된 만찬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는 자리에서 당신만 알고 계셨던 유다의 배신을 비로소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니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을 향하여 '나와 함께 그룻에 손을 넣은 자'가 당신을 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다에게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사라진 이후 주님은 그가 나지않았으면 좋았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구원과 영생에 관한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성만찬은 오늘날 교회에서 진행되는 성찬식의 기원이요, 모범이 됩니다.

a.예수께서 제정하심(마26:26)

b.피로 세우신 새 언약(눅22:20)

 

2. 수난당할 것을 아심

1) 감람산으로 가심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보내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버림받게될 일과 제자들이 당신을 떠나게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살아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배신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버리지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가 오늘 밤에 닭이 두번 울기전에 세번이나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예수가 습관을 좇아가신 산(눅22:39)

b.모든 땅으로 흩어짐(행8:1)

2) 기도하시는 예수

겟세마네 산에 이르신 주님은 세 제자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에게 당신이 기도하실 동안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심정을 알리시고 그들과 떨어져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때 얼마나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셨던지 하늘로부터 천사가 와서 주님을 도와야할 정도였습니다.

a.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곳(마26:36)

b.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예수(마26:39)

3) 체포되신 주님

간절하게 기도하신 주님은 잠든 제자들을 깨워 수난의 때가 온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셨으나 피하려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당신앞에 닥치는 수난의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의 수난은 무리들의 급습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흉악한 폭도를 잡을때처럼 검과 몽치로 무장하고 무리를 지어 겟세마네로 들이닥친 것입니다. 드디어 주님은 체포되셨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포박했다고 묘사했습니다.

a.제사장과 장로들의 충동을 받는 자들(마27:20)

b.거짓에서 나온 입맞춤(잠27:6)

 

3. 교권자들의 악행

1) 도망친 제자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 파송된 무리에게 체포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미 알고계셨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를 당한 상황에서 보인 제자들의 도망행위는 매우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a.지옥 자식들의 행위임(마23:15)

b.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질 것임(막14:27)

2) 악인들의 모의

주님께서 체포되어 끌려가신 곳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이었습니다(참조, 요18:13). 주님의 체포 소식을 들은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명절의 즐거움도 잊은채 신속히 모였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되어지는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대제사장과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증거케 하였습니다.

a.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시27:12)

b.비밀히 올무 놓기를 의논함(시64:5)

3) 사형을 판결함

거짓 증인들의 증언이 서로 합하지 않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님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그동안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주님은 이 질문에 즉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더나아가 주님은 당신의 존재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은 분통을 터뜨리면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무리들은 주님을 참람한 말을 한 자로 정죄하고 사형에 해당된 자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형이 언도된 후에 사람들은 갖가지 모독을 하였습니다. 그 주변에 있던 베드로까지 자기를 알아본 자들에게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부인하였습니다.

a.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시110:1)

b.백성을 충동하여 적대감을 갖게 함(마26:65)

 

결론

우리는 본장에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마리아의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자세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최고의 헌신을 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4:1-11

예수님을 죽이려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의, 한 여인의 기름 부음,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그분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시사한다.

향유(14:3)

구약 율법에는 거룩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관유와 향품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출 30:22-38).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는 것이 유대인들의 풍습이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 여인이 그 머리에 나드 기름을 부은 것도 이런 연유이다. 나드는 향이 그윽해 옥합에 담아 잘 보관하면 수백년 동안이나 향기가 보존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원료가 주로 히말라야 산맥에서 생산되었으므로 매우 비쌌다.

다락방(14:15)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 ‘다락방’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선 세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평평한 지붕 위에 건축한 일반적 ‘다락방.’ 둘째, 2층의 큰 방. 셋째, 마당보다 약간 높게 돋군 곳에 마련한 별실. 대개 대문과 마주보는 곳에 자리한 이 별실은 비교적 시원하므로 집주인은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했다고 한다.

공회(14:55)

식민지의 자치를 허용한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유대의 최고 행정기관은 산헤드린이다. 총 71명의 공회원들은 의장인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 백성의 원로인 장로들로 구성되었다. 산헤드린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의 중앙의회였으므로 주로 율법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유대 최고 통치기관이었던 만큼 로마 당국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행정과 사법도 관장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만큼은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산헤드린 산하에는 각 지방의 유대인 공회들이 있었다.

 

# 묵상

예수님을 잡으려는 모의 ( 14:1, 2 )

명절 곧 유월절과 무교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므로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때 예수님을 잡아죽이면 민요가 날까 두려웠기때문에 명절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잡기로 모의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메시야 혹은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 14:3-9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음에도 이 여인은 미리 그것을 알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즉, 이 여인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를 칭찬하셨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의 이 선행을 말하여 이 일이 기념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친 여인의 희생과 사랑은 모든 제자들 위에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성만찬 의식 ( 14:22-25 )

최후의 만찬시에 제정된 의식으로 이후 기독교는 예배시에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하시고 피흘리신 것을 기념하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리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새로운 언약, 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는 약속이 다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담 ( 14:29-31 )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예수님을 버리지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닭이 두번 울기전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고 결국 그는 세번 부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 자신의 욕망 ( 14:36 )

예수님의 인간적 소망은 십자가 고난을 피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을 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뜻대로 할수 있는 신적 권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체포시 제자들의 행동 ( 14:50-52 )

이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했던 장담과는 정반대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청년은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그 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면서도 위험이 닥쳐오자 모두 도망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령충만하지 않는한, 주를 담대히 따를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순서 ( 14:53-65 )

종교 재판

안나스의 예비 심문(요18:12-14).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비공식 재판(마26:57-68).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공식 재판(마27:1, 2).

민사 재판 - 빌라도의 1차 심문(마27:11-14).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눅23:8-12).

빌라도의 2차 심문 및 최종 판결(마27:15-26).

예수님은 종교법정과 일반법정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죄목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죄가 없으신 분임을 입증해 줍니다.

자기 옷을 찢은 대제사장 ( 14:63 )

‘네가 찬송받을 자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때 예수께서 그렇다고 대답하시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즉,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거짓 메시야라고 생각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이 메시야라고 말씀하시자 그것을 신성모독 행위로 간주하여 애통과 분노의 표시로 자기 옷을 찢은 것입니다. 이처럼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 빛을 알지못하고 그를 영접치도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회개 ( 14:72 )

베드로는 닭이 울자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시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인해 통곡했던 것입니다. 이로인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양을 맡기실때도 전혀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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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13:1-4

(1) 그리스도의 많은 제자들은 거대하게 보이고 오랫동안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들을 얼마나 쉽게 우상화했던가?(1절) 그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이르기를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1절)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갈릴리에서 이와같은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좋은 곳을 떠나지마소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실제로 정결치 못하고 외관만 화려한 것을 얼마나 쓸모없이 여기셨던가?(2절)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때가 가까이 왔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절). 그리스도는 귀한 영혼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슬피우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들을 아주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 웅장한 성전에서 나가셨을때 하나의 웅장한 건물이 황폐케 될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신 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거의 아무관심도 없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부분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을 수리할 소망이나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게' 되면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3) 다가올 일들과 그때를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런 일인가?(3,4절) 우리는 우리의 의무보다도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더알고 싶어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들만이 남아서 이 교훈에 관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더많은 설명을 들었을때까지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베다니로 가셨을때 그는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아계셨다.' 그러므로 네 명의 제자는 성전이 황폐케 된다고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리스도께 종용히 묻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마도 그리스도는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다른 제자들도 그의 말씀을 듣도록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즉 무리로부터 떨어져 있을때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의 질문은 곧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일들이 일어날지 혹 안일어날지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고 그 일이 얼마나 굉장한 방법으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이르소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4절)라고 말했던 것이다.

 

Ⅱ. 재난의 때 13:5-1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양심에 주의를 주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사건들에 관하여 꼭 필요한 경고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1) 그들은 이제 곧 일어날 미혹자와 사기꾼에게 속지않도록 주의해야 한다(5,6절). 그래서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6절)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참그리스도를 거부한 뒤부터 그들은 많은 거짓 그리스도에 의해 속아왔다. 그 거짓 그리스도들은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않도록 주의하라(5절).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할때 스스로 주의하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2) 그들은 재난의 때를 알리는 전쟁 소식을 듣고 놀라지않도록 주의해야 한다(7,8절). 전쟁으로 인해 나라들이 다른 때보다 더 어수선해지고 황폐해지는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이제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평온했던 때 세상에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떠나자마자 곧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8절).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문을 들을때에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그 소문을 듣고 놀라지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일이 있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이런 일로 두려워 말라 너희는 이런 일에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이런 일로 인한 어떠한 손상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혹을 경시하며 그 유혹에 빠지지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반대를 경시하며 그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말세에 대한 징조로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끝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7절). 이런 전쟁들이 말세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이런 전쟁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마치 최악의 형벌을 내리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전쟁에 대한 소문이 들리더라도 두려워말라. 그것은 그 전쟁들이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심한 재난이 닥칠 것에 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재난으로 말미암아 가장 혼란에 빠졌을때에도 하나님의 보호와 마음의 평정을 누리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할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지않도록 주의해야 한다(9-13절). 예수께서는 재차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9절)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비록 너희가 전쟁의 칼을 네 이웃보다 더 잘 피했다해도 안심하지 말라.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많이 공의의 칼을 받게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하므로(행 14:2) 외적인 번영을 바라다가 스스로 속지않도록 주의하라. 너의 언행에 주의하라.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볼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이 각오해야 할 고난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것'이며 그 고난은 심할 것이다! 미움을 받는다는 것(13절)은 민감한 사람에겐 슬픈 일이다. 적의를 품고있는 사람들은 화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죄를 범했거나 그들이 나쁜 생각을 했기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미움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장 가깝게 지내면서 보호를 구하여야할 자기들의 친척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것이다. 그들의 교회지도자들도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9절) 너희를 율법을 범하는 사람으로서 40대씩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의 변절로 말미암아 교회가 교회의 가장 좋은 동료들을 배척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관장들과 임금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대적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제국의 반역자로 몰아 죽일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저항해야 한다.

2) 그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위로해야할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그들이 소명받은 일은 계속 수행되고 번영하게 될 것이다(10절).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할 것이니라(10절). 복음의 소리가 온 사방에 퍼져야할 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은 그들이 비록 짓눌리고 억압을 받을지언정 복음은 그럴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스스로 복음의 목적을 성취하여 승리를 얻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② 그들의 고난은 그들의 소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명을 촉진시킬 것이다.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9절). "그 고난이 너희를 범죄자로 데려온 사람들앞에서 복음을 전파할수 있는 기회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니면 본문에 기록된대로 그 고난은 그들 곧 재판관들과 집행관들을 대적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와 천국에 관한 증거가 된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면 그 복음은 우리를 위한 증거가 될 것이다. 다시말해서 복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며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복음은 심판날에 우리를 대적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③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왔을때 그들은 하늘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11절). "그 말이 즉흥적이라고해서 잘못 말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지 말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11절). 우리가 열심히 그리스도를 섬길때 우리는 성령의 도움에 의지할수 있다.

④ 하나님은 드디어 모든 사람을 새롭게 하여 주실 것이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 인내는 영광을 얻는다. 여기에서 언약된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구원보다 크며 영원한 축복이 되는 것이다.

 

Ⅲ. 말세의 징조 13:14-23

한편으로 로마 제국에 반역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적이 되었다(살전 2:15). 이제 이 본문에서 우리의 이후로 4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닥칠 유대인의 멸망에 대해 예고하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1) 여기서 그 멸망에 관해 예언된 내용은 무엇인가?(15-20절).

1) 로마군이 유대땅을 급습하여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다. 로마군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던 그리스도를 가증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가증한 것을 그들에게 가져오셨다. 이 로마군은 있어서는 안될 곳 즉 예루살렘의 안팎에 서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이 접근해선 안될 곳이었다. 영광이 떠나버린 곳에 죄가 발생하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있어서는 안될 곳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서있게 된 것이다.

2) 로마군이 유대나라에 들어오면 그 나라를 떠나지않고는 어디에서도 안전하지 못하며 떠나는 것도 가능한한 신속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 경보를 듣고 될수 있는대로 빨리 도망가야할 것이다. 만일 그가 '지붕위에 있으면서'(15절) 로마군이 오는 것을 보았다면 그는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하는 동안 로마군의 급습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밭에 있다면 그는 있는 그대로 도망가야 하며 '겉 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아야 한다'(16절). 만일 그가 자기 생명을 구할수 있다면 비록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구할수 없다해도 그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가 가난해졌다해도 죽지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3) 그때에는 아이밴 여인과 젖먹이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이 큰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날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17절). 그것은 아이밴 자들이 남들처럼 신속하게 움직이거나 서둘수 없기 때문이며 또 젖먹이는 자들은 그 갓난 아이들을 내버리고 가야할지 아니면 그들과 함께 가야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가장 즐거웠던 것이 가장 짐이 되는 때가 종종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그들이 겨울에 도망가게 된다면 매우 고난을 받을 것이다. 비록 고난을 받는 것외에 아무런 구제책이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모든 여건이 완화되기를 바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사정들이 어려울때 우리는 그 사정들이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

4)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그런 파괴와 황폐함이 있을 것이다.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9절).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잔인하게 유대인들은 서로를 멸망시키고 로마인들도 모든 유대인들을 멸망시켰다. 만일 그들의 전쟁이 좀더 계속되었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자비를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날들을 감하셨던 것이다. 많은 특별한 사람들은 거센 폭풍이 가라앉음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그 날들이 감하여진 것은 그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대다수의 보호받은 사람들은 그 보호받은 사람들가운데 그리스도를 믿었던 소수때문에 더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야 10:22절에는 남은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한 언약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과 그들의 기도에 분명 응답해 주실 것이다(눅 18:7).

(2) 제자들은 그 멸망에 관하여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14,21-23절)

1) 그들은 그들의 생명의 안전을 위하여 신속히 움직여야 한다. 유대나라가 침략당하고 예루살렘성이 공격받는 것을 볼때 더이상 생각하거나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14절). 너희는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볼때 그 배에서 나와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의 영혼의 안전을 위하여 대비해야 한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보라 저기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1절).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22절).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날 것이며 그들을 전파할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할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할 것이다. 그들은 아주 교묘한 위장을 하여 진보적이고 열성적인 많은 신앙인들과 이제껏 아주 잘 참아온 많은 신앙인들을 미혹케할 것이다. 그들은 할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하려할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해서 제자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너희는 삼가라(23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인내의 확신과 배교에 대한 조심은 서로 서로를 잘 지켜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겠지만 그들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3절). 이 말은 곧 "너희가 미리 무장되도록 내가 미리 경고했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Ⅳ.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 13:24-27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가리키는것 같다. 제자들은 질문을 하는 중에 잘못된 토대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성이 파괴되어 세상끝(마 24:3)이 온다는 말을 듣고 동요하였다. 이는 마치 성전에 세상에서 존재하는 동안만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잘못된 토대를 고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예언하셨다.

첫째로 세상의 현조직과 구조의 최종적인 붕괴를 예언하셨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절).

둘째로 심판날에 심판자가 되실 주 예수의 가시적 모습을 예언하셨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절).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택함을 받은 자들을 모으신다는 것을 예언하셨다.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모으리라(27절). 그들은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자리가 놓여있는 곳에서 가장 먼 땅끝으로부터 불리워질 것이며 하늘끝까지 나아오게 될 것이다.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그가 속박의 가장 먼 지경에서부터 언약의 가장 먼 지경에까지 있다해도 안전하게 옮기워질 것이다.

 

Ⅴ. 그 날을 예비하라 13:28-37

우리는 여기서 이 예언적인 설교에 대한 적용을 접하게 된다.

1. 예루살렘성의 멸망에 대한 적용(28-31)

예루살렘성의 멸망이 곧 임할 것을 각오하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을 알라(28,29절). 그때에 유대나라가 전쟁에 휘말리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미혹되며 로마인들의 노여움이 유대인들에게 임할 것이다. 진정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다가올 악한 날에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 다음 세대는 살아서 그것을 보게될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그리고 이 멸망의 날이 임박하여 눈으로 볼수 있게된 것만큼이나 그 일도 확실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제자들을 놀라게 하려고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목적을 선포하는 것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절).

2. 세상끝에 대한 적용(32절)

그 일이 언제 올지 묻지말라. 그것은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사람에게나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 그 시기에 대해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들이 모르는 일도 있을까? 원시 기독교 시대에는 이 본문에 근거하여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모르는 일도 있었다고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모르는 일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영혼이 슬픔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어떤 일도 모를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구세주 안에 머물고있는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의 인간적인 영혼과 교통하고 있었으므로 때때로 그의 인성이 몰랐던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52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 지혜가 자라갔다고 한 것이다.

3. 깨어 기도하는 것에 대한 적용(33-37)

이것들이 너희의 의무다. 너희는 주가 오리라는 생각을 잃게 하는 모든 것에 주의하라. 언제라도 너희가 당황하지않도록 그가 올 것에 대비하여 깨어있으라.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할수 있기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얻도록 기도하라. 왜냐하면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언제올지도 모를 그 일에 대해 매일 준비되어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는 끝으로 비유를 통하여 이 일에 대해 설명하신다.

(1) 우리의 주님은 먼 곳으로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우리가 책임져야할 일을 맡기셨다(34절). 그는 먼 여행길에 나서는 사람과 같이 지상에 있는 집을 떠나셨다. 그가 그 종들에게 각 사무를 맡기실때 어떤 자들에게는 그 나무를 통할하는 권한을, 다른 자들에게는 그 사무를 담당하는 임무를 주셨다.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은 그 권한안에서 임무도 부여받은 것이다. 그것은 가장 큰 권한을 지닌 자들이 가장 많은 임무를 맡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주님은 임무를 맡긴 사람들에게도 그 임무를 처리할만한 권한을 주셨다. 그는 마지막 작별을 하시면서 그가 돌아올때 그에게 문을 열어줄 준비가 확실하게 되어있도록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명했다. 이와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을때 그의 모든 종들에게 해야할 일을 남겨 놓으셨다. 모든 사람들이 일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2) 우리는 우리 주님이 되돌아오시기를 기대하면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35-37절). 그것은 우리 주님이 다시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집주인과 같이 그의 종들을 평가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언제 오실는지 모른다. 이 비유는 살아있거나 이미 죽은 모든 사람이 받을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다할때 주님이 특별히 우리에게 재림하시는 것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시대의 삶은 저 세상의 삶에 비교하여 밤 그것도 어두운 밤과 같다. 우리는 그 밤과 같은 삶속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의 젊은 시절에 오실지 중년기나 노년기의 어느때에 오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어가기 시작하므로 어떤 것을 기대할때 곧 죽음도 함께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언제 오시든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가 잠에 빠져있거나, 우리 자신속에 안주하고 있거나, 경제를 소홀히 하거나, 그가 오지않을 것이라고 말하려 하거나 그 분과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시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의무는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37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곧 "내가 이 세대가운데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시대에 걸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흠없이 깨끗하고 화평한 가운데서 발견되도록 깨어있어 나의 재림을 기대하고 그것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 해설

종말에 관한 그리스도의 교훈 ( 13 )

본장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있을 사건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예언하신 후에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마지막날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예언을 감람산에서 하셨기때문에 사람들은 감람산 강화라고도 합니다.

 

1. 마지막 날

1) 성전 멸망을 예언하심

한 제자가 성전의 외형이 웅장하고 거대한 것을 보고 예수님께 그 성전을 바라보신 느낌이 어떠하신가를 물었습니다. 제자의 질문에 접한 주님은 질문의 의도와는 달리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음모, 탐욕,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강도의 굴혈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은 파괴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이 결여되고 주님께서 관계하지 않는 건물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a.성전에서 나가실때 제자가 물음(마24:1)

b.다 무너뜨리울 것임(마24:2)

2) 마지막때의 징조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주님께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그 징조는 어떠한거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징조에 대하여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세에 나타날 종교적 현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국가간의 분쟁이 심화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각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세에 나타날 우주적인 재난을 뜻합니다.

a.주의할 것(마24:4)

b.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임(마24:11)

3)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함

예수님은 성도들이 공회와 회당에서 핍박을 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공회와 회당에서 수난을 당하는 것은 종교적 핍박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게되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여러가지 환난이 성도에게 밀어 닥치지만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그후에 세상의 종말이 오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환난 중에 처할때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때 성령께서 자유로이 역사하셔서 할말을 지시하십니다. 주님은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질뿐만 아니라 배반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인자가 가까이 온 줄을 알 것(마24:33).

b.회당에서 채찍질하고 구박함(마23:34).

 

2. 대환난에 대처하는 방법

1) 세상에 애착을 두지말라

마지막때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전혀 예기치 못한때에 시작됩니다. 지붕 위에서 환난을 만난 사람은 곧바로 피신을 해야지 집안으로 물건을 가지러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가 집안으로 물건을 가지러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본인의 재산이나 소유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이 다가올때 재물에 욕심을 내어 되돌아가는 자들은 롯의 아내와 같은 형벌을 받게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것과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거기에 애착을 보인다면 그것으로 마지막날 화를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a.지붕은 구경하는 장소(삿16:27)

b.소유물로 생명을 바꿀수 없음(욥2:4)

2) 주님께서 환난의 날을 감하심

환난의 날이 겨울이 되지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그 날은 전무후무한 대환난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환난의 날에는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위해 그날들을 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환난의 날을 감하심은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살피는 방법입니다. 성경 어느곳을 보더라도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어떠한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여기서 택한 백성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가리키나 그리스도 이후에는 모든 성도들이 포함됩니다.

a.형벌의 날(눅21:22)

b.은혜로 구원을 얻음(엡2:5)

3) 거짓 무리들을 경계하라

마지막날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통해 택하신 백성을 미혹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여지는 것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단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유혹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미혹의 날들을 미리 가르쳐주신 것은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시기 위함입니다.

a.많은 사람을 미혹케 함(마24:5)

b.미리 일러둠(요13:19)

 

3. 재림에 대한 자세

1) 예수의 재림

자연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초림때와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존귀와 위엄을 지니신 모습으로 온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에게 동시에 임합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믿지아니한 악인들을 의인들가운데서 갈라내어 심판을 받게 합니다. 이때 주님은 성도들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상을 내려주십니다(참조, 벧전5:4;계22:12).

a.하늘 구름을 타고(마26:64)

b.그 천사들과 함께 오심(마16:27)

2) 무화과나무의 비유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상태가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것을 통하여 시대를 분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때를 분별할수 있듯이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주님께서 반드시 재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진리의 말씀은 영원불변하며 반드시 성취됨을 알아야 합니다.

a.징조를 가리키는 가지와 잎(마24:32)

b.인자가 문 앞에 이름(마24:33)

3) 깨어 있으라

주님은 재림의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는데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까지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날과 그 시기를 알지못하므로 주의하여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종말의 섭리에 대한 성도의 긴장이 풀어지는 일처럼 위험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경에 예고된 종말의 징조를 분별하고 경계하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a.뜻밖에 임할 것임(눅21:34)

b.잠에서 깰 때가 되었음(롬13:11)

 

결론

우리는 주님께서 본장을 통해 말씀하신 재림에 관한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이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떠한 핍박이 있을지라도 낙심하거나 쉽게 동요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3:1-23

세상 종말의 징조와 환난에 대한 예언이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A.D. 70)으로 일차 성취되었지만 예수님 재림때 완전 성취될 것이다.

 

# 묵상

성도가 생각해야 할일 ( 13:3-37 )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자신의 행위, 의인에 대한 주님의 약속과 지혜롭고 선한 말, 장래의 일과 계획, 하나님의 일과 주의 재림, 영적인 일과 자신의 영적 생활, 거짓없는 믿음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주님의 일을 해야할 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를 바로보고 마지막을 내다보며 대비하는 자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또한 미혹당하지 말아야 하며, 더나아가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지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도우시는 성령 ( 13:11, 12 )

제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회로 끌어다 넘겨줄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할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으므로 제자들은 흩어진 곳곳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구원을 전파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 ( 13:14 )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곧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우상의 형상을 가리킵니다. 이 우상이 감히 서지못할 곳인 성전에 서게되는 것이 마지막날의 징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로마의 신들이 성전에 섰었던 주후 70년 전후에 성취되었습니다.

종말의 날에 속지 말아야 할 성도 ( 13:21-23 )

성도들은 종말이 다가왔을때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는 말에 속지말아야 합니다.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이라도 미혹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역시 종말의 날에는 마귀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주의 성도들을 미혹시키려 달려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사람일수록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속입니다.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 ( 13:33-36 )

성도는 주의 재림을 확신하고(욥19:25), 미혹받지 말고 오직 복음을 전파하며(마24:14), 세상에 대해 미련을 버리며 깨어있어야 합니다(마25:13). 그리고 충성된 삶을 살며 환난을 참아야 하고(눅21:9), 정결하게 살며, 두려워하지 말고(살후2:1-3), 모이기에 힘쓰며, 근신하고 기도해야 하며(벧전4:7), 회개하고 기다리며 주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계22:20).

깨어있어야 할 이유 ( 13:37 )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그리스도 자신도 알지못하고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실 신랑을 영접하기 위해 깨어 근신하며 기름을 준비하였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도하며 성령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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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포도원 농부의 비유12:1-12

이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어떻게 복음교회를 세우고자 하셨는지에 대해 비유로써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어떻게 유대교회를 폐할지에 대해 비유로써 보여주시기 시작한다.

(1) 유형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임대받은 포도원을 소유하게 된다(1절). 따라서 포도원을 임대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포도원 임대료를 내게 되어있다. 교인들은 바로 하나님의 소작 농민들이다. 그들은 선한 지주를 두었기때문에 싼 값에 땅을 얻고 죄를 범하지 않는한 그 땅위에서 잘살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포도원을 세로 주신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정당한 소작료를 낼것을 기억케 하신다(2절).

(3)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모든 시대에 걸쳐 얼마나 가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3-5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구약교회의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3절). 그것은 나쁜 일이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자 그들은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여(4절) 더욱 나쁜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악의 절정에 이르러 그들을 죽이고 말았다(5절).

(4) 선지자들을 학대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학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6-8절).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일반적으로 주인의 사랑을 받는 자가 그 주인을 섬기는 자들에 의해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6절). 그러나 그들은 그를 공경하는 대신 그가 상속자라는 이유때문에 그를 미워했다(7절). 그들은 그에게 더욱 격분했으며 자기들만이 모든 관심을 받기위하여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유업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잡아죽여 포도원 밖에 던졌던 것이다.

(5) 그렇게 죄된 수치스런 행동은 두려운 파멸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9-12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9절).

1) 그는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할 것이다. 그들이 그의 종들과 그의 아들을 죽였을때 그는 그들을 진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일은 예루살렘이 황패케 되었을때 성취되었다.

2) 그는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이 말씀은 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러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음으로써'(골 1:6) 성취되었다. 좋은 결과를 얻을 것으로 우리의 기대를 모았던 사람들에게서 나쁜 결과를 얻었다고해서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나쁜 결과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좋은 결과를 맺을수도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대한 그들의 반대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10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시 2:6)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온세상 사람들이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임을 보고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12절). 그들은 이 비유의 거울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다. 첫째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잡아 그를 즉시 죄수로 만들고자 했다. 즉 그들이 그렇게 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방금 말씀하신 그것을 이행하려고 했던 것이다(8절). 둘째로 아무도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잡지못하도록 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다. 이같이 그들은 그리스도를 공경하지도 않았으며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예수를 버려두고 가벼렸다'(12절). 만일 인간이 확실한 진리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의 편견은 더 완고해질 뿐이다. 만일 복음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아니라면 그 복음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다(고후 2:16).

 

Ⅱ.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12:13-17

우리는 이 본문에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한 합법성의 문제로 그리스도가 시험받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1) 산헤드린 공회에서 보낸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었다(13절).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의 자유를 위하여 아주 사소한 것까지 다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면 무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록 선동하려 했을 것이다. 헤롯 당원들은 로마의 권세를 위하여 사소한 것까지 아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가이사에게 세금내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실 경우 총독을 선동하여 그리스도와 대적하게 할 것이다. 다른 일에는 서로 다투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하여 연합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2)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해결해 주기를 바랬던 것처럼 가장했다(14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높은 신분에 속한 사람으로 대하며 그에게 아첨하였으며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길에 대해 가르치고 진리의 길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이와같은 신분에 속한 선생들은 평정과 선을 지키기 위한 규율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웃거나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신은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며 당신은 참되시고 올바른 방법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진리안에서 하나님의 도에 대해 가르쳤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충고는 거절했다.

(3) 그들의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것이었다(14절).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알고 싶어 한것은 단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질문의 어느쪽 답을 택하든간에 그를 비난할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그리스도에게 위탁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질문을 정중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대해 판정해주기를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 전혀없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알고 싶어하는듯이 보이는 것이다.

(4) 그리스도는 그 질문의 의도를 깨달으시고 그들의 올무를 피하셨다(15-17절). 그리스도는 그 외식함을 아셨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려해도 의식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은폐될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금으로 도금한 질그릇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한다는 것을 아셨기때문에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기위하여 지혜롭게 행하셨다. 그래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용하는 돈이 로마의 화폐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 로마 화폐의 앞면에는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져 있었고 그 뒷면에는 가이사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수 있다.

첫째로 가이사는 공공이익을 위하여 그들의 돈을 요구할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화폐의 유통이 마치 샘처럼 그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가이사는 그들의 양심까지 요구할수 없으며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불평하거나 분쟁하지 말고 세금을 내라.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한테 세금을 바치는 일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듯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신중한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아무도 하나님에게 자신을 바치고 기도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믿을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재치있는 설교를 칭찬하면서도 설교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Ⅲ. 부활에 대한 논쟁 12:18-27

그 당시의 합리주의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이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을 공박한다. 그들은 완고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회의주의자들이고 불신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목적 또한 그리스도의 교훈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활과 영의 세계와 사후의 상급과 처벌이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부인했던 그 위대하고 근본적인 진리들을 세우고 또 입증하는 일을 하셨기때문에 그들은 그의 교훈을 난처하게 하려고 했다.

(1) 여기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난처하게 민들기위하여 취한 방법을 보라(18-23절). 그들은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해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여 질문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일곱 형제가 연속해서 한 여인의 남편이 되는 사례를 상상하여 말했다. 아마도 사두개인들은 이 질문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비웃고자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흔히 하나님의 율법과 규율을 비방한다. 그들의 목적은 부활에 대한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의 세계가 존재할 경우 그 세계는 현재와 같은 세계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에 대한 교리는 부활을 당하여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소유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아니면,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풀수 없는 난제로 인하여 모순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교도들이 진리를 얼마나 교묘하게 손상시키고 있는지를 보라. 그들은 그 진리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그 진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사두개인들이 아닌 것처럼 그 진리를 인정하는척 했다. 그들은 부활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부활에 관한 교훈을 듣고 싶어하는 것처럼 인상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꾀했던 것은 그 부활교리에 대해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들이 그 결점을 지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교도들과 사두개인들의 공통적인 술책은 그들이 건방지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그 결점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2) 여기서 이 진리를 명백히 드러내어 확증시키려고 그리스도가 취한 방법을 보라(24,25절).

1) 그리스도는 사두개인들이 오해하고 있으며 성경에 대해 무지하다고 책망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24절). 그들이 이 일을 깨달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다.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들은 성경속에서 그들의 문제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말씀의 의미를 깨닫지않고 오히려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때문에 성경도 알지못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모든 계시 신앙의 원천이며 터전이 되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바로 오해를 막는 가장 좋은 방지책이다. 진리 곧 성경말씀을 지키라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지킬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교리를 이 문제에 적용하지 않고 오히려 부활의 진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유때문에 그 진리를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봄이 다시 돌아오는 속에서(시 104:30), 밀알이 썩어 다시 살아나는 속에서(요 12:34),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던 백성이 다시 번성하는 속에서(겔12-14),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는 속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가 부활하는(엡 1:19,20)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며 이 하나님의 권능은 그와 같은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거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라고 말했다(빌 3:21).

2) 그리스도께서는 참빛 안에서 부활을 당할때의 상태에 대한 교리를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반대를 완전히 물리치신다. 사람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25절).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때에 그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감각적인 이세상의 일을 통해 영적인 세계를 판단할 경우 우리 스스로가 끝없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위에 부활교리와 부활을 당했을때의 의로운 자들에 대한 축복교리를 확립하신다(26,27절). 그리스도는 성경에 호소하여 '너희가 모세의 책…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26절)고 반문하신다. 방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가시나무 떨기에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고 하신 말씀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곧"나는 과거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현재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로 인하여 비록 아브라함이 죽었다해도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아브라함의 생전때와 같은 형태로 계속되어야 하며 그것이 이처럼 진지하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죽은 사람의 분깃이며 행복이 되고 또 영원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을수 없게 된다. 첫째로 아브라함의 영혼은 몸과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며 활동한다. 둘째로 이런 이유때문에 언젠가는 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제 그 문제 전반에 대해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린다.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런 책망을 당연히 들어야 한다.

 

Ⅳ. 서기관과의 변론 12:28-34

우리는 여기서 서기관 중 한사람에 대한 기록을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아주 공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 주의를 기울였고 또 그리스도께서 아주 합당하게 대답 잘하신 줄을 알았다.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기위하여 질문하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지식을 개선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1) 그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다(28절). 그는 순서에 있어서의 첫째 계명을 말한 것이 아니라 중대성과 위엄에 있어서의 첫째 계명을 말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 중요한 가운데서도 더 중요한 계명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계명이란 종교적인 의식보다도 도덕적인 교훈을 말하므로 우리는 그 도덕적 교훈들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그의 이 질문에 대해 명백한 대답을 주셨다(29-31절). 자기들의 의무에 관하여 전지하게 교훈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공의로 인도하시며, 그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신다.

1)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클뿐 아니라 진정 모든 계명을 내포하고 있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0절)는 것이다. 이 계명이 영혼을 지배하는 원리가 될때 모든 다른 의무도 실행할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영혼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중생한 영혼에게 가장 큰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이 지배하는 원리가 되지 못할때 선한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속에 있는 보좌를 차지하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게 될 것이다. 이 원칙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어떤 계명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마가복음에서 우리 구주는 이 계명의 토대가 되는 가장 큰 교리적 진리를 먼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29절).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유일한 주시라면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그와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으므로 어떤 대적도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영혼속에 있는 보좌를 차지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된다.

2) 모든 계명 중에 둘째로 큰 계명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31절)는 것이다. 우리는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행함으로써 이 계명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보다 더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웃도 우리와 같은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 이웃이 동료 그리스도인이며 함께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라면 그 의무는 더욱 강해진다. '우리는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 2:10). 한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의 계명안에서 모든 율법이 이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 계명들에 대해 순종하면 당연히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순종하게 될 것이다.

(3) 그 서기관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했다(32, 33절).

1) 그 서기관은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칭찬했다. 그는 '선생님이여 옳소이다…당신의 말씀이 참이니이다'(3절)라고 말했다. 그런데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참되며 옳다"고 고백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사기꾼처럼 핍박했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동의하고 그 말씀이 참되다는 인을 쳐야한다.

2) 그 서기관은 그리스도의 답변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주 곧 우리 하나님의 유일한 주시라'(29절)는 교리를 인용하셨었다. 그는 이 교리에 동의했을뿐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대적들을 모두 배척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서 마음속의 보좌를 마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규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또한 이 계명을 설명하시면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어야 하는만큼 지성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애정이 싹트도록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과 재능을 쏟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그 서기관은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며'(33절) 하나님에게 더 열납될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서기관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 구주의 뜻에 기꺼이 동의했다. 곧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물과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 서기관이 한 말을 흡족해 하시고 그 서기관이 자신에게 질문한 가장 큰 계명을 실행하도록 용기를 주셨다(34절).

1) 그리스도는 그가 그토록 잘 깨닫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 그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그것을 더욱 기뻐하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대부분 경솔한 대답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해 오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서기관은 지혜있게 대답했던 것이다. 즉 그는 빈틈이 없으며 그의 판단은 편견에 치우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방식을 인정하는 자로서 대답했으며 그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사고해왔던 사람이었다.

2) 그리스도는 그 서기관의 믿음이 더욱 향상되었음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영광의 나라를 말한다.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빛을 잘 이용하고 그 빛이 이끄는데까지 따라가는 사람들에겐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밝은 곳으로 인도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서기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통해 그 서기관에게 암시해 주신 것을 그 서기관이 깨닫고 복음의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도 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묻지 않았다고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지만' 그 나라로 결코 오지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배우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묻기를 부끄러워했고 트집을 잡고자했던 사람은 묻기를 두려워했다.

 

Ⅴ.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 12:35-40

(1) 그리스도는 무리들에게 서기관들의 설교가 얼마나 빈약하고 결점이 많은지를 보여주시며 또 구역성경에서 발생하는 난제를 해결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주신다.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는 한 예를들어 말씀하셨는데 이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예는 마태복음과 같이 그렇게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1) 그들은 백성들에게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35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옳았다. 백성들은 서기관들이 가르치는대로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목회자보다는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인용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가운데 진리의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그리스도를 시 110:1절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내 주'라고 했는지 백성들에게 말할수 없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 말이 그들의 조국에 영광이 될 메시야에 관한 것이라고 가르쳤었다. 즉 그들은 그를 왕족의 한 사람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주가 된다는 것을 주의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만일 다윗이 어떻게 그를 주라고 불렀는지에 대해 어느 누가 항의한다면 그들은 그 항의에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진리를 전파할수 있는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주의하라. 이제 이 말은 자기들의 무지함이 노출된 서기관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즐겁게 듣고 있었다'(37절). 그들은 그리스도가 전파하는 것을 듣고 놀랐으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그와 같은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백성들의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그 음성과 전달 방법속에는 위풍당당하고 매력적인 힘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던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백성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를 믿고 따르는 기색을 발견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기쁘게 들었으나 그의 목을 잘랐던 것처럼 이 백성가운데 몇몇 사람들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쳤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이 서기관들에게 속아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다(38-40절). '예수께서 가르치실때에 가라사대… 서기관들을 삼가라'(38절)고 하셨다.

1) 서기관들은 높은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것은 그들이 왕이나 재판관처럼 긴 옷을 입고다녔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옷을 입고다니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와 같이 긴 옷을 입고다니기를 좋아했던 것은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기의 제자들로 하여금 허리에 띠를 띠고 다니게 하셨던 것이다.

2)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선하게 보여졌다. 이는 그들이 기도할때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오래 기도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신경을 썼다. 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기위하여 외식으로 기도했다.

3)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을 인정하게되며 그들을 모르는 사람들일 경우엔 그들을 존경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그들은 재산을 모으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기까지 했다. 그들은 경건한 얼굴을 보임으로써 자기들의 부정을 감추려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장 악한 자로 생각되지 않기위하여 애써 가장 선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했다. 긴 기도가 이처럼 몇몇 사람들에 의해 악용되지만 긴 기도를 겸손하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나 이처럼 경건의 모습을 가장하고 죄를 범하면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죄악의 대가도 두배로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다고 말씀하셨다.

 

Ⅵ. 과부의 헌금 12:41-44

이 내용이 마태복음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나와있다. 그리스도께서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가난한 과부에 대해 칭찬하시는 내용이다.

(1) 성전에는 자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헌금함이 있었다. 그것은 자선사업과 경건생활이 매우 적절하게 병행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사도행전 10:2, 4절에서처럼 기도와 구제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구제받아야할 사람이 나타났을때 그에게 즉시 도움을 줄수 있도록 이를 얻는대로 저축(고전 16:2)하는 것이 좋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그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다(41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41절).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경건생활과 구제생활에 얼마나 공헌하는지 주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구제생활에 있어서 후하게 주는지 인색하게 주는지를 주시하고 계시며, 또 경건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 경건한 것인지 단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에 불과한지 주시하고 계신다.

(3) 그리스도께서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 것을 보셨다(41절). 부자 가운데서 여러 부자가 관대하게 많이 넣는 것을 보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풍족하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풍족히 주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들도 남들에게 풍족히 주기를 기대하실 것이다.

(4)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은 한 가난한 과부가 있었다(42-44절). 그런데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녀를 몹시 칭찬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로 제자들을 불러다가 과부의 행동을 주의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그 과부가 연보를 따로 떼어놓을수 없는 형편에 있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녀의 연보는 그녀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넣은 모든 연보보다 과부의 연보가 더많다고 생각하셨다. 그것은 부자들이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44절)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가난한 과부를 비난하려 했을 것이다. 왜 그녀는 자기 자신의 생활도 궁핍하면서 남들을 위해 연보를 내고 있는가? 가정부터 구제가 되어야 한다. 이 과부를 나무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 과부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을 배워야 한다. 첫째로 구제는 대단히 좋은 일이며 주 예수님을 몹시 기쁘게 하는 일이다. 비록 주위의 사정에 비추었을때 전혀 신중치 못한 행동을 하였다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그 구제를 호의적으로 받으실 것이다. 둘째로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이라도 그 적은것 가운데서 구제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고자 할때 곤란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몸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셋째로 자선사업은 장려되어야 한다. 비록 그 자선사업이 악용된다해도 그것이 우리가 자선사업을 해서는 안될 합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넷째로 비록 우리가 적은것 밖에 자선을 베풀수 없다해도 그리스도는 그 적은것 조차 받으실 것이다. 그는 소유한 것에 따라 요구하는 분이지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다. 두 렙돈이라도 올바른 마음으로 내면 두 파운드를 내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두 렙돈은 이십배의 효과를 얻게될 것이다. 다섯째로 우리가 마게도냐 교회처럼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자선을 베풀면 칭찬을 많이 받게된다. 그 마게도냐 교회에서는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였던 것이다'(고후 8:2, 3). 그러므로 아무리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다른 길을 준비해 주신다는 것을 신뢰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감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 해설

교권자들을 책망하시는 그리스도 ( 12 )

본장에서 예수님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의 잘못, 종교와 정치의 다른면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과 바로 다음장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합니다.

 

1. 포도원 농부의 비유

1) 출타한 주인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이는 가나안정착 이후 왕정이 수립된 다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지양되고 왕들과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을 맡긴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백성의 지도자를 세우셨음을 알수 있습니다(참조, 롬13:1;벧전2:13-17).

a.청지기의 주인(눅16:3)

b.육체의 상전(엡6:5-6)

2) 농부들의 악행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외국으로 떠난 주인은 수확기가 되어 그 종들을 보내어 얼마간의 소출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여러가지 형태로 핍박하였습니다. 주인은 최후로 자신의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생각하여 아들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 타국에 간 주인이 그의 아들을 보내자 농부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상속자가 왔으니 죽이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죄의 본질을 찾을수 있습니다. 모든 죄의 본질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 자신이 높아지려는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진리를 배울수 있습니다.

a.알지 못하는 때(마24:36)

b.열매로써의 소출(민13:27)

3) 분노한 주인

악한 농부들의 극악한 행동에 분노한 주인이 어떻게 할것인가는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므로 주님께서는 듣는 자들에게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로부터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어서 시118:22-23절의 말씀을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등 교권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뜻을 곧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주님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 악한 농부들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a.채찍질함(행5:40)

b.상속자(마11:27)

 

2. 예수께 나아와서 질문함

1) 세금 문제로 변론함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이 자기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알고 그분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인하여 포기하고 대신 사람을 보내어 주님의 말씀을 책잡도록 했습니다. 산헤드린 대표자들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들은 헤롯당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금 문제를 들고나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질문은 가하다고 할수도, 불가하다고 할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롭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음모를 분쇄했습니다.

a.악의가 가득한 자(롬1:29)

b.행악자(잠6:17-19)

2) 부활 문제로 변론함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책잡고자 했던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이 실패하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나아와 그분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은 후손없는 미망인에 대한 형제의 결혼 규례를 근거로하여 질문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우회적이며 교활한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먼저 지혜로우신 책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못하므로 오해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때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심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셨습니다.

a.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님(신6:16).

b.납세는 백성의 의무(삼상8:15).

3)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변론하는 것을 지켜본 서기관 중 한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선의의 질문에 신6:5절과 레19:18절을 각각 인용하여 두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해서 신앙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을 사랑안에서 통괄했습니다.

a.주를 향한 선한 뜻(왕상14:13)

b.이웃 사랑의 계명(마22:39)

 

3. 칭찬받는 자와 책망받는 자

1) 예수 그리스도와 다윗

예수님께서는 교권주의자들 앞에 다윗의 시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가 되시기도 하고 다윗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약 성경 시100편을 인용하여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메시야로 이땅에 오셨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결국 주님은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며 곧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고 어떠한 종교적 직분을 가진 자라고 할지라도 구원이 없음을 알리셨습니다.

a.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음(행13:22)

b.다윗에 비유된 그리스도(시89:19-20)

2) 위선적인 서기관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 그리고 회당의 상좌와 잔치에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적인 위선자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도 그 말씀을 준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더욱 중한 판결을 받게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에 가치를 두는 영적 지도자나 인본주의 생활이념으로 살아가는 자는 외식과 위선에 빠질수밖에 없습니다.

a.스스로 속임(렘49:16)

b.화가 있음(마23:13)

3) 칭찬받는 과부

예수님께서는 연보궤를 대하여 앉아 쉬시면서 무리들의 연보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이 넣는 것과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대조를 통해서 거짓된 경건과 참된 경건을 대조시켰습니다. 주님은 많은 헌금을 드린 부자는 도외시하시고 적은 헌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은 그 액수가 비록 보잘것없었으나 그것은 그녀의 전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a.가장 많이 넣은 것임(막12:43)

b.하나님을 기쁘시게 함(고후9:7)

 

결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사건을 통해 헌금을 드리는 성도의 자세에 관해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2:1-12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사건으로 인해 그분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려 들었다. 본문은 이처럼 완악한 자들에게 임할 진노의 심판을 교훈한 ‘악한 농부 비유’이다.

비유(parable, 12:12)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유사한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쉽게 전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로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그분이 사용하신 비유의 방법으로는 단순한 은유나 직유(마 23:27), 격언이나 속담(2:21,22), 우화나 짧은 이야기(12:1-9) 등이 있다.

 

# 묵상

포도원 비유 ( 12:1-9 )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악한 농부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 등의 교권주의자들을, 그리고 종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합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올바로 경작하지 못했으며 또 이것을 올바로 돌이키기 위하여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후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 자신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금에 대한 논쟁 ( 12:13-17 )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세금 문제를 들고나와 예수님을 시험했을때, 예수님은 세금도 내야하지만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정치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걸고 넘어지려는 저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라는 두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고, 세상 나라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삶에 있어서도 충실해야만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생활속에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잘 구별하여서 우리가 바쳐야할 모든 봉사와 감사와 영광을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의 논쟁 ( 12:18-27 )

부활 이후의 결혼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한 사두개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며 하늘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부활 이후의 결혼 문제로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심중을 아시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므로 그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 ( 12:28-34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기타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레19:18; 신6:4, 5). 모든 율법은 이 두 가지를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른 이웃 사랑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으며(레19:17), 범죄치않도록 권면하고 보복하지 않으며(레19:18), 원망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잠14:21), 도움을 주고 후히 대접하는 것입니다(마7:12).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며(눅1:58), 하나님께 하듯이 사랑하고 덕을 세우며(롬15:2), 기회 있는대로 선을 베풀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요일3:18), 외모로만 사랑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약2:8).

삼가야 할 행위 ( 12:38-40 )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 등입니다. 이는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경건한 체하는 당시 서기관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므로 외식하는 자들은 장래에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 12:41-44 )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헌금했으나 한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즉, 부자들은 재물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자기 재산의 일부만을 드렸던 것에 불과하지만 그 과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활을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차이때문에 과부의 헌금은 하나님께 열납되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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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루살렘 입성 11:1-11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적들의 권세와 악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셨다. 그래서 그는 자기 얼굴을 감추려는 사람처럼 예루살렘 성으로 몰래 숨어들지 않으셨다. 둘째로 그는 다가오는 고난을 생각하면서도 실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셨다. 그는 공개적일뿐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1) 이 승리의 진군은 외적으로 매우 초라했다(7,8절). 그는 나귀 새끼를 타셨던 것이다. 또한 이 나귀 새끼 역시 빌린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린 배를 타고 물위로 다니셨고 빌린 다락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드셨으며 빌린 무덤에 장사되셨고 빌린 나귀를 타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신세지는 것이나 필요시에 빌리러 가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도 빌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전혀 화려한 장식을 꾸미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나귀 새끼 등에다 그들의 겉옷을 걸쳐 두었고 예수께서는 타셨다(7절). 또한 사람들이 할수 있었던 모든 일은 초막절때에 행하곤 했던 것처럼 길위에 자기 겉옷과 나무가지를 펴는 것이었다(8절). 이것들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지위를 취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2) 이 승리의 진군은 내적으로 매우 위대했다(1-4, 9-11절). 그리스도께서는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제자들을 보내심으로써 멀리 떨어져있는 사물들에 대한 그의 인식력과 인간들의 의지를 다스리는 그의 권능을 보여주셨다(1-3절). 그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2절)를 타심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보여주셨다. 나귀 새끼를 타시면서 그리스도는 아마도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와 같은'(욥 11;12) 인간들의 심령을 통치하시는 그의 권능의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하셨던것 같다. 그들은 그 나귀 새끼를 두 길이 만나는 곳에서 데리고 왔다(4절).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두 길이 만나는 곳에서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신 것은 그 앞에 두 길이 있기때문에 그릇된 길로 갈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러 오신 자신의 목적을 보이시기 위함인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로부터 호산나라는 기쁨의 찬양을 받으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로 하여금 호산나를 부르게 할 마음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1)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환영했다. "그렇게 무수히 약속되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대되었던 그 오시는 이가 복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의 환호와 최고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 그는 복되신 구세주이시며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신다. 또한 구세주를 보내신 하나님께 찬송할지로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하는바가 잘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한 나라, 곧 '주의 이름으로' 오는 나라인 그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10절)를 소유하고 계시다고 믿었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는 그 나라가 주님의 권세로 오기 때문이었다. "그 나라는 계속 정복을 하고 또 정복할 것이다. 그 나라에 번영이 있을지로다. 모든 행복이 그 나라에 따르리라." 그렇게 관심과 환영을 받으면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의 모습을 둘러보셨다. 모든 것을 둘러보셨으나 이때 예수께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날 밤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시고 다음날 아침 필요한 개혁을 몸소 행하려고 생각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을 그 즉시 셈하시거나 몰아내시지 않는다해도 그것들을 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성전에서 모든 것에 대해 유의하신 그리스도는 저녁때가 되자 베다니에 있는 한 사람의 집으로 가셨다.

 

Ⅱ. 두 가지의 부정적인 사건 11:12-26

1.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그리스도의 저주(12-14)

예수께서는 아침에 일할때가 되자 되돌아오셨다. 그는 자신의 일에 너무 열중하셨으므로 아침도 드시지 않은채 베다니로부터 나오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12절). 예수께서는 푸른 잎사귀가 무성하여 열매가 많이 달려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한 무화과나무로 가셨다. 그러나 그는 잎사귀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셨다. 그는 무화과를 딸때가 가까웠으므로 무화과가 달려있기를 바라셨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무화과나무에는 잎이 무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무화과나무를 본보기로 징계하려 하신 것은 나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세대의 사람들에 대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셔서 '그 열매를 구하셨으나 얻지 못하셨던'(눅 13:6,7) 유대교회에 대한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나무위에 어떤 선고를 내렸는지 들었기때문에 이 나무를 주시했다.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나온 저주의 소리는 축복의 소리만큼이나 주목을 받고 명심해야 된다.

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몰아내심(15-18)

시장하셨음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오신뒤 곧바로 성전으로 가셨으며 전날 눈여겨 보셨던 악습들을 개혁하시기 시작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그릇된 비난처럼 성전을 파괴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성전을 정결케하려고 오신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15절). (그런데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면서 예수께서 돈에 보다 걸맞는 장소인 땅에다 그 돈들을 던져버리셨다.) 또한 그는 아무런 반대도 없이 그 일을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그 악습을 묵인하고 원조하며 돈을 벌었던 사람들의 양심속에서도 옳고 선한 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흔히 부패를 추방하고 악습을 정화하는 일이 우려한 것보다 더 간단한 일로 입증되면 열성적인 개혁자들에게 상당한 격려가 될 것이다. 종종 주저하며 시도한 일이라도 기대이상으로 성공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셨다(16절). 유대인들은 성전에 거대한 회당이나 이방인의 뜰이나 도로나 일반 통로들도 만들지 않고 또한 성전으로 어떤 곡식단도 들고오지 않는 것이 성전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에 대한 좋은 예를 제시하셨다. 즉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17절)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집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집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성전을 처음 지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는 성전이 다음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다. 첫째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희생 제물인 소와 비둘기를 몰아내신후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다시 지정하셨다. 둘째로 성전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만민에게도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셨던 초기에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시면서 책망하셨던 것은 단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다'(요 2:16)는 단 한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신다. 기도할때 헛된 세상적인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했던 자들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과부의 소유를 탈취하는데에 정신을 빼앗기고도 그것을 가장하려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자들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이다.

(4)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이 일을 보고 심히 화가 났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였으나 그리스도가 곧바로 자기들의 의자를 내던지고 자기들까지 내쫓을까하여 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겼다는 것과 그가 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율법에 맞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지지를 받았던 그리스도께서 시도하지 못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화해할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세와 위엄을 지탱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3.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19-26)

보통때와 같이 그리스도는 평온하게 '성 밖으로 나가'(19절) 베다니로 가셨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지나갈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20절).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20절).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저주보다 더 심한 저주는 없었으나 그 저주의 결과는 더 심하게 나타나서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던 것이다. 만일 아무 열매도 맺지못할 것이라면 그 무화과나무는 사람을 속이는 어떤 잎사귀도 내지말아야 하는 것이다.

(1) 제자들은 이 일로 어떤 영향을 받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놀라서 말하기를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절)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저주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여 잎이 무성한 월계수처럼 자라던 나무를 말라버리게 했 다. 그런데 이 일은 제자들에게 매우 기이한 일로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그 무화과나무가 순식간에 말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 무화과나무가 그리스도를 거절하자 그리스도께서도 나무를 거절함으로써 초래되었다.

(2) 이 일에 대해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준 좋은 교훈 : 그리스도의 교훈이 좋은 까닭은 그 교훈들을 따를 경우 이 말라버린 나무조차도 결실이 많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교훈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22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명령의 권능을 찬양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기있고 적극적인 믿음이 어째서 그들의 기도에 놀라운 권능을 불어넣는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통해서라면 가장 큰 어려움도 극복될뿐 아니라 반드시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2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또한 그것들을 주시는 권세를 지니신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그대로 되리라(24절). 또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그대로 되리라(23절). 이제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일에 적용될 수 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사도들과 최초의 복음전파자들에게 부여되었던 기적의 신앙에 적용될 수 있다. 둘째로 이 말씀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되었던 신앙의 기적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신앙이 우리를 의롭게 해줄뿐 아니라(롬 5:1) 산과 같은 죄들을 제거하며 그것들을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이다. 또한 그 신앙은 우리의 심령을 정결케하며(행 15:9) 산과 같은 우리의 타락을 제거해 준다. 믿음으로 세상이 정복되고 사단의 맹렬한 공격은 잠잠해지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나 여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

2) 여기에서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교훈외에 승리의 기도에 요구되는 조건이 첨가되었다. 그 조건은 곧 우리가 아무 대가없이 용서해주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서서 기도할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25절). 우리는 기도할때에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의 적과 우리에게 해를 끼쳤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우리는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마 5:23,24).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우리는 지름길로 달려가 즉시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25절). 그 이유는 용서가 부족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데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기도할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대해 가지는 하나의 큰 목적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세주는 이를 거듭 주장하셨다. 그 이유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 그의 큰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Ⅲ. 예수의 권세에 대한 시비 11:27-33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그의 권세에 관하여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시험받는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시며' 무리를 가르치고 계실때 그에게 왔다. 성전 뜰에 있는 화랑은 걸어다니며 가르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이와 그를 궁지에 빠뜨릴 목적으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28절)라고 물었다.

(1) 그들은 어떻게 이 질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좌절시키고 당황케하려고 했는가? (28절) 만일 그들이 무리들 앞에서 그리스도는 합법적인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닐뿐 아니라 정당한 권세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들은 무리들에게 그의 말을 들어선 안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질문을 통하여 그들의 완고한 불신앙에 대한 마지막 구실을 찾으려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직권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어떤 흠을 찾아내려고 결심한 것이다. 이 질문은 진정 흠을 찾아내려고 결심한 것이다. 이 질문은 진정 행정가나 목회자로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마련해야 할 문제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이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2) 그리스도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들을 좌절시키고 당황케 하셨나? (30-33절). 그리스도는 '요한의 세례를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30절)고 질문하여 그들을 당황케 하셨다. 이 질문으로 그들의 질문을 해결하시므로써 우리 구주께서는 그의 교리와 세례가 요한의 것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암시하고 계시다. 그것들은 모두 복음의 왕국을 소개하려는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성향을 지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지금 이 질문을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 만일 그들이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장 그들에게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와같이 말하는 것을 견딜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견딜수 없는 일은 그들의 양심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2) 만일 그들이 요한의 세례는 사람에게로서 나왔으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폭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해치려할 것이다. 악한 신하뿐 아니라 악한 지배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육신의 비열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제 그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몰랐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함으로써 억지로 가장한 수치스러운 후퇴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지혜로 행하신 것을 정성껏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아야할 것이다(벧전 2:15). 둘째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명령적인 요구에 대한 대답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 시키셨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33절). 그들은 더이상 대답을 들을가치도 없으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실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한 예수께서 행하신 그러한 기적들을 행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해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 11 )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사건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입성 첫날 성전을 둘러보셨습니다(참조, 슥9: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만연되어 있는 인간의 위선과 탐욕, 허영과 자기 중심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숙청하기 위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1) 나귀를 끌고오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야로서, 왕으로서의 입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때에 제자 둘을 보내셔서 사람이 타지않은 나귀를 끌고오라고 하셨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서로 인접한 마을이었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약2.5km거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 최후의 사역을 위하여 메시야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은 곧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a.예루살렘 앞 곧 동펀 감람산(슥14:4)

b.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눅19:29)

2) 나귀 새끼 위에 펼쳐진 겉옷

제자들은 주님이 시키신대로 나귀 새끼를 끌고왔습니다. 그 나귀는 아직 어느 누구도 타보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의도하신대로 모두 순종하게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끌고온 나귀 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걸쳤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겉옷을 벗어 펴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참조, 왕하9:13). 예수님은 분명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보좌 대신 나귀 새끼에 앉으셨습니다. 그 위에 양탄자 대신 제자들의 허름한 겉옷을 깔았습니다. 그러한 메시야의 모습은 그가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으로도 오셨기 때문입니다.

a.모든 것이 다 여호와의 것(시24:1)

b.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마21:4)

3) 환성을 들으면서 입성하심

나귀 새끼를 타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추종하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으며 나뭇가지를 꺾어 주님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입성을 알리는 그들의 아우성은 왕께 대한 찬송이었으며, 장엄한 영접은 백성들의 뜨거운 눈물과 정감어린 사랑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환호를 끊임없이 외쳐댔던 것입니다. 많은 백성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우선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가를 돌아보셨습니다.

a.큰소리로 외침(계7:10)

b.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21:9)

 

2. 성전 정화와 무화과나무

1)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베다니에 나오신 예수님은 매우 시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으신 무화과는 열매가 없이 잎만 무성하였습니다.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주님은 저주하셨습니다.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주님의 저주를 면치 못했듯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 또한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a.금식하신 후에 주리심(마4:2)

b.과실을 항상 맺어야(요15:16)

2) 성전에서 악행하는 자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성소와 제사장의 뜰, 그 다음 이스라엘의 뜰 그리고 여인의 뜰, 그 다음 이방인의 뜰로 그 구조가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방인의 뜰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전에 들어오신 주님은 우선 매매자들과 환전자들을 성전뜰에서 내어쫓으셨습니다. 주님의 의분은 바로 타락한 성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분노라고 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성전 정화와 그 교훈은 당시 도처에서 모여든 경건한 순례자들에게 큰 호응과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a.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마26:61)

b.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심(마21:12)

3) 뿌리가 마른 무화과나무

제자들은 다음날 아침 주님께서 앞서 저주하신 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전날 주님의 명령의 결과임을 기억한 제자는 베드로였다고 마가는 증거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과 튼튼한 뿌리의 생명력은 결국 주님의 말씀의 힘에 굴복되고 말았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실에 대한 제자들과 베드로의 경이에 대해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김(마21:20)

b.버림을 당함(히6:8)

 

3. 기도하는 자의 자세

1) 의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이 인간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온전한 기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즉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건과 환경을 지배하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신뢰하여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넘치도록 해야합니다.

a.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롬4:18)

b.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고전13:2)

2) 믿음과 화목

예수님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어떤 문제의 해결을 놓고 기도할때 응답받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즉 기도의 응답을 받는 길은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믿음의 관계를 논한후 이제 기도와 화목의 관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끼리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형제와 불화하는 자가 하나님께 온전한 기도를 드릴수는 없는 일입니다.

a.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임 (마7:8)

b.용서해야 용서를 받음(눅6:37)

3)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논쟁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그분의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며,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예수의 권세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을 향하여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에게로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답변을 하지 못하자 예수님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a.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함(막14:1)

b.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김(마21:26)

 

결론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열매없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때가 아직 멀었다고 안심하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귀히 여기고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핵심

11:1-11

본장부터 15장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한주간 동안 고난당하신 기사이다. 그분이 슥 9:9절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식 선포하신 사건은 수난 주간 첫째날(일요일)에 일어났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11:15)

예루살렘 성전뜰에 시장이 형성된 것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이다. 세계 도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드리기 위해 멀리서부터 제물을 갖고오는 일이 힘들자 상인들이 성전의 ‘이방인 뜰’에서 소와 양, 비둘기 등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제사장과 결탁하면서 부정이 자행되었다. 제사장들은 상인의 매매 행위를 허용하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고, 상인들은 제사장의 묵인아래 폭리를 취했다.

 

# 묵상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 11:1-7 )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나귀는 겸손과 순종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고 예언했습니다(슥9:9). 나귀 자체는 큰 가치가 없으나 주님을 위해 쓰여졌다는것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맺는 삶의 비결 ( 11:12-14 )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하고(마13:8), 자신을 희생하며(요12:24), 그리스도안에 거하고(요15:1-8), 성령안에 거해야 합니다(갈5:22, 23). 또한 기도하며(골1:9, 10), 연단받고(히12:11), 하늘의 지혜를 받으며(약3:17), 영적으로 성장함으로 인해 열매 거두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벧후1:5-7). 이와같이 성도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에 대한 분노는 외식하며 형식적으로 믿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있으면 경건의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 11:15-17 )

이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이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전은 만인이 기도하는 곳이나, 당시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곳까지 들어와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행위는 당시 제사장들에 대한 정면 도전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제자들은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나’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논쟁 ( 11:27-33 )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를 물음으로써 그들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자신들도 대답할수 없는 문제에 닥치자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이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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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이혼에 대한 말씀 10: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으셨다. 그것은 가나안 전체가 주님이 전도하시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가나안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셨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시돈 가까이 있는 서쪽 변경에서 계신지 얼마후에 동쪽의 유대 해안지방에 계신 것을 보게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순회전도는 태양의 일주와 같았다. 그것은 곧 태양의 빛과 열이 어느 것에 의해서도 가려지지 않는 것과 같다.

1. 다시 모여드는 무리들(1)

무리들이 그에게 다시 왔으므로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가르치셨다. 그는 전례대로 행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셨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병고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무리들을 다시 가르치셨다. 기독교 교리가 아주 풍부한만큼 배워야될 교리는 훨씬더 많아진다. 그리고 우리의 망각이 아주 심한만큼 우리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2. 바리새인들과의 쟁론(2-12)

(1) 이혼에 관한 그들의 질문 : 그들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절)라고 물었다. 그들은 그를 시험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기회를 찾으려고 그 문제를 제안했던 것이다. 목회자들은 충고받는 것처럼 가장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않도록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2)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 그리스도는 대답 대신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3절)라고 반문하셨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이 질문을 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증거하고 그가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3) 특별히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공정하게 설명하는 바리새인들 : 그리스도께서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고 묻자 그들은 모세가 다만 사람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다'(신 24:1)고 시인했다.

(4)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 : 주님은 그가 전에 이와같은 문제에 대해 말했던 가르침에 일치하는 대답을 하신다. 그 가르침은 곧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라'(마 5:22)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설명한다. 첫째로 모세가 그의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단지 '너희 마음의 완악함'(5절) 때문이다. 둘째로 그 유래를 통하여 결혼제도에 대해 밝힌 모세의 설명을 이혼을 반대하는 이유를 제공하여 결국 이혼을 금지시키고 있다. 모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곧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아담은 자기의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것은 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창 2:24; 막 10:7)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관계의 밀접성뿐 아니라 영구성을 나타낸다. 그 관계의 결과는 바로 그들이 둘일지라도 하나가 되어 한몸이 되는 것이다(8절).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합은 침해되어선 안될 신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 결혼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매어놓은 결합은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

(5) 이 문제에 관해서 제자들과 조용히 말씀을 나누시는 그리스도(10-12절) : 제자들이 복음의 비밀에 관해서뿐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에 관해서 그리스도와 개별적인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제자들만이 누릴수 있었던 유리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혼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율법외에는 이 사적인 대화와 관련된 것이 여기선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며 본처에게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이에 덧붙여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하는 것'(12절)이라고 말했다. 지혜와 은혜, 경건과 사랑이 마음을 지배할때 그것들은 육신의 마음에 대해 무거운 멍에가 될 수 있는 그런 명령들도 편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Ⅱ.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심 10:13-16

어린아이들을 잘 대해주는 것은 친절하고 다정한 성품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런 성품은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을 맡기는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스스로 약하고 어리석으며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무익하게 생각하는 어른들에게도 용기를 준다.

1.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나온 어린아이들(13)

그 어린아이들이 어떤 육체의 병을 고쳐야할 필요가 있었는지 혹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을수 있는 연령이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그 어린아이들의 영혼에 가장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축복이 그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선하게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어린아이들을 만져주도록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왔다. 그것은 그들이 부모로서 그 어린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말할수 없거나 그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수 없었을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릴수 있다. 그리고 그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은혜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믿을수 있으며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대한 언약도 믿을수 있다.

2.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로 데려오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격려(14-16)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내쫓는 것을 보시고 매우 언짢아 하셨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14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라도 그들이 자기에게 스스로 나오는 사람이나 그 자녀를 데리고나오는 사람을 무시한다면 몹시 화를 내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여' 자기에게 그들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어린아이들은 호산나를 부르며 은혜의 보좌에 나오도록 환영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사람들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것을 선포하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인정하고 축복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15절)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와 유모와 선생님에게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 영향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호기심이 많고 아이들처럼 배우며 배우는데 있어서도 아이들처럼 믿어야 한다. 아이와 같은 마음은 하얀 종이 같아서 원하는대로 그 위에 쓸수 있다. 우리의 마음도 축복받은 성량의 펜에 대해 하얀 종이처럼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다스림을 받듯이 우리도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지혜와 보호에 의존하고 부모가 이끄는대로 따르며 부모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취한다. 우리도 이와같이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겸손히 맡기고 편안히 그에게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를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아이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주셨다.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절).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만져주도록 간구했지만 그는 그보다 더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곧 그는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셨다. 그는 자기의 팔로 양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품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시므온의 팔에 안겼던 적도 있었다(눅 2:28).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이들을 안으시며 부담스러워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는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의 분깃에 따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들에겐 행복한 일이 아닐수 없다.

 

Ⅲ. 부자와 천국 10:17-31

(1) 그리스도와 젊은사람 사이에 희망찬 만남이 이루어진다(17-21절). 마태복음 19장 20, 22절에는 이 마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청년이라고 언급되었는데 누가복음 18:19절에선 관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그리스도에게 달려왔다. 그는 근엄하고 위풍당당한 관원의 신분을 염두에 두지않고 진지하고 끈덕진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급한 사람처럼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이 위대한 선지자와 상담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므로 그 기회를 놓치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는 무리에 둘러싸여 길로 나서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왔다.

3)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간직했던 큰 가치와 존경심 그리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열망의 표시로써 그의 앞에 꿇어 앉았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복종하려는 사람처럼 무릎을 굽혔다.

4) 그의 질문은 진지하고 중요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절). 그는 영생을 얻는 것이 가능한 일로 생각했으며 그것이 우리 앞에 놓여져있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제공된 것으로 간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선을 얻는 일에 대해 묻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그는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시 4:6)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는 의무를 행할때 얻는 행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이 질문은 매우 진지했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간절하게 묻기 시작할때에 비로소 구원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질문은 적격자에게 요구되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이 질문에 대답할수 있는 분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는 먼저 천국에 이르는 길을 만들고 그 다음 그 길을 알릴 목적으로 천국에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특색은 영생을 보여줄뿐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질문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선한 목적으로 요구되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25절에서 한 율법사가 나쁜 의도로 이와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그리스도께서 살피시는 것은 사람들의 선한 말이 아니라 그들의 선한 뜻이다.

5) 그리스도는 청년의 신앙을 도와줌으로써 그의 이 질문에 친절히 응하셨다. 그는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그 말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뜻을 품도록 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한분외에는 아무도 선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에선 하나님(God)이란 말이 선(good)이란 말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스도는 더 나아가서 그의 실천을 명하셨다. 계명을 지키라(19절). 그리스도는 모세의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여섯 계명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여섯 계명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제 5계명은 특별히 기억되고 준수되어야할 것으로 이 본문에서 마지막에 놓였는데 그것은 나머지 계명들을 모두 지키도록 하려는 것이다.

6) 그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드러날 정도로 크게 범한 적이 없었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가망이 있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0절). 그는 자기가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이웃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수치스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었던 그 청년은 영생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다.

7) 그리스도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그 길을(렘 50:5) 묻는 이 젊고 부유한 사람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와 이 청년 사이에 슬픈 이별이 생긴다.

1) 그리스도는 그 청년을 시험하기 위한 명령을 하셨다. 그는 진실로 그 명령에 열중할까? 그를 시험해 보라.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내놓을 마음이 있을까? 그에게 이제 최악의 조건을 알려주라. 만일 그가 이 조건에 따르지 않으면 그로 하여금 그의 요구를 포기하게 하라. 그래서 마지막도 처음과 같이 선하게 하라.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어'(21절) 그들의 옹호자가 되라. 모든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한다. 세상 재물은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도 우리와 함께 그의 상속자가 되도록 명령하신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분깃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러질수 있도록 가장 어렵고 힘든 봉사를 하며 천국에서 보상을 받기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마음이 있을까?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거나 잃었거나 투자했던 모든 것을 보상하기에 충분한 보물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믿을까?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는 전력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믿을수 있으며 기꺼이 미래의 왕관을 기대하고 현재의 십자가를 질수 있을까?

2) 그는 이 명령을 듣자 떠나가버렸다. 그는 '이 말씀을 인하여 슬퍼하였다'(22절). 그는 더 쉬운 조건으로 그리스도를 따를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다시말해서 그는 영생을 붙들수도 없었고 세상의 재물을 붙들수도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조건을 따를수 없었기때문에 정중한 그로서는 아무런 핑계도 대지않고 근심하며 가버렸던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는 말씀의 진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그가 재물을 붙잡고 있는동안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근심하여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정한 값으로 그것을 살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신다(23-31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말을 완화하여 어려움을 없애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다. 그는 그 청년이 부자이며 관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기의 제자가 되도록 설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가 가겠다면 가도록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을 아무도 붙들지않기 때문이다.

1) 이 세상의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어려움 : 그 이유는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재물을 떠나도록 설득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① 그리스도는 여기서 이 사실을 역설하신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절).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많은 시험들을 당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때문에 그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시면서 친히 이 사실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그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곧 그들이 재물을 가졌기때문에 위험이 생긴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그 재물을 신뢰하기때문에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상의 재물에 대해 이와같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올바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해도 그 재물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극복할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재물을 쉽사리 내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 적은 재물에 열중한다면 그것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떼어놓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하신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이나 문이 보통 바늘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낙타가 등에 실은 짐을 풀지않고는 통과할 수 없을만큼 그 문이 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기꺼이 세상 재물로 된 짐을 풀어놓으며 신앙의 의무를 겸손하게 따르지않는한 그는 짐을 풀지않은 낙타가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듯이 천국에 이를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약대라고 번역한 말은 때때로 밧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과 비교해 볼때 부자는 한 가닥의 실과 비교되는 밧줄과 같으며 그 밧줄은 그 밧줄이 풀어지지 않는한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는 이와같이 자기 재물을 풀어놓아야만 한 가닥씩 바늘귀를 통과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단지 땅에다 닻을 내리는 일에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② 이 진리는 제자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24절).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는가 하니(27절). 그들은 구약에서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약속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선을 행할 기회가 훨씬 더많은 것으로 알았기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것이다.

③ 그리스도께서는 부자들에게도 부자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장벽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말하여 제자들의 의혹을 만족시킨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수 있느니라(27절). 곧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부자가 구원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2) 이 세상의 재물을 적게 소유하고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적은 재물을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놀라운 구원 : 베드로가 자기와 다른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던 일에 대해 언급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과 관련하여서 곧바로 이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라고 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잘했다. 너희는 상을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와 같이 적은 재물을 버린 자나 이 젊은 부자처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 많은 재물을 버린 자는 모두 보상을 받을 것이다."

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은 손실은 매우 클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위하여 버릴 세상 재물에 대해 일일이 이름을 들어 말한다. 이 본문에선 집이 첫째로 언급되었고 마지막으로 전토가 언급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주해야할 집과 자기의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전토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친족 곧 아비와 어미,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광야와 같이 되겠지만 이들과 그리스도 가운데 어느 한편을 단념해야할때, 우리는 어떤 피조물보다도 그리스도와 더가까운 관계를 맺어야함을 잊지말아야 한다. 선한 사람의 성실성에 대한 가장 큰 시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합법적인 것, 즉 그의 의무에 대한 그의 사랑과 마찰이 생길때 일어난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을 단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비와 형제와 아내를 단념하는 것, 다시말해서 그가 사랑해야만 할 그의 친지들을 단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렇게라도 해야한다. 순교자가 되게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큰 목적이다.

② 그러므로 그 유익도 클 것이다. 그들은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전토를 백배나 받을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은 그의 모든 손실을 충분하게 보상받음으로써 넘치는 위로를 받게된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체적 쾌락을 누그러뜨리는 성령의 위로를 백 배로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에선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내용이 부가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었을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자들이 되지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세에 영생을 받게'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백 배의 보상을 받는다면 그들이 더많은 것을 기대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적은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은 덤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을뿐 아니라 실제보다도 더많은 것을 말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먼저 부름을 받았다해도 그들 뒤에 올 또 다른 제자들이 부름을 받아야하며 그들이 제자들보다 나아질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많은 것이다.

 

Ⅳ. 자기의 고난을 예언하심 10:32-45

1. 자기 자신의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언(32-34)

(1)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담대하신지를 살펴보자.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다(32절). 이전보다 더 때가 가까웠으므로 그는 서둘러 가셨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절박한 위험에 빠지고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고서 걱정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던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될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장서서 가시는 것을 보면 용기가 생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으므로 그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너무도 기운차고 활발하게 가시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용기와 성실성을 보고 놀라게 된다.

(2)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얼마나 겁쟁이들이었는지를 보라.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32절). 그러므로 그들의 선생님의 용기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3)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취하셨는지 보라. 그는 이전보다 문제를 더 호전시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에게 자기의 당한 일을 다시 말씀해 주셨다. 그는 자기가 당할 극심한 고난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이와같이 담대하게 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도 그의 극심한 고난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 이제는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는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가 당할 고난의 결과는 그 자신에게 영광스러울 것이며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할 고난의 방법과 특징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보다 이 마가복음에서 더 풍부하게 예언되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을 향하여 악화되어가는 모든 여건에 대해 정확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와같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맞으려 가셨던 것이다.

2. 두 제자의 야심적인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35-40)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내용은 마태복음 20:20절에 기록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하다. 단지 마태복음에서는 두 제자가 그 어미를 통해 그들의 요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마가복음에선 그들이 스스로 그 요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리스도가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큰 용기를 사용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그 용기를 남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에게 그와 같이 끝없는 요구를 하고자 하는 괘씸하고 주제넘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절)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가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하시도록 그에게 맡기는 것이 우리로서는 훨씬 더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많은 것을 베풀어주실 것이다(엡 3:20).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인 약속을 하는 방법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6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간청을 부끄러워하도록 그 간청을 계속 말하게 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분명 왕이 될 것이며 그가 왕이 되면 그의 사도들은 장관들이 될 것이므로 그들 가운데 한 사도가 기꺼이 제일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며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다음 자리에 앉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해 보이거나 탁월해지는 것보다 선한 것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과 근시안적 생각은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뜻은 곧 우리가 고난당할 것을 준비하고 그 고난에 대한 보상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할지 알기위하여 지혜와 은혜를 얻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될 가장 좋은 방법을 그가 제공해 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3. 이 일을 보고 불쾌감을 보였던 다른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경고(41-45)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41절). 그들은 각자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으므로 예수께 그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던 두 제자에게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나머지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의 야심을 보고 불쾌감을 나타냄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그리스도는 그들이 야심을 갖지않도록 경고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겸손의 본보기를 말해주기 위하여 여느 때와 같이 그들을 '불러다가 이르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신다.

(1) 세상의 지배권은 일반적으로 남용되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절).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궁리하고 노리는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자기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좌하는 신하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얻으려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세상의 지배권이 교회에서까지 허용되어선 안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43절). 그리스도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너희가 다스리게 될 사람들은 목자의 보호를 받는 양과 같아야 한다. 그것은 그 목자들이 양들을 돌보고 꼴을 먹이며 그들의 종으로서 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스리게 될 사람들이 몰이꾼의 명령을 받는 말과 같아선 안된다. 몰이꾼은 그 말들을 혹사시키고 때리며 그들로부터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크고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4절). 진실로 크고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 가장 유익한 사람들은 이후에 가장 영광을 받게될뿐만 아니라 지금도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예로 취하시고 섬김을 받으려하거나 시중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Ⅴ. 바디매오를 고치심 10:46-52

이 사건은 마태복음 20:29절이하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 단지 마태복음에서는 두 소경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18:35절에서는 한 소경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두 소경이 있었다해도 한 소경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한 소경의 이름이 여기에 나오는데 그는 바디매오 곧 디매오의 아들로 불리웠다.

(1) 이 소경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46절).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자선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 그 소경은 구원을 위해 소리질렀다(47절).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행은 곧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 소경에게 용기를 주었다(48절, 49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셨기' 때문이다. 머물러 섬으로써 좋은 결과를 낳을수 있을때, 그 머물러 서는 것이 우리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곁에 있으면서 처음에 그 소경을 막았던 그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알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49절). 우리를 오라고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대는 우리의 소망을 크게 북돋아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바를 얻게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은 그 가련한 사람은 떨어진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50절). 그는 자기를 넘어뜨릴 위험이 있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방해할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 나올 사람들은 자기 자부심의 옷이나 긴 옷에서 얽매이기 쉬운 죄(히 12:1) 등은 모두 내던져야 한다.

(5) 소경이 간구했던 특별한 은혜는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51절). 그렇게되면 그는 자기의 생계를 위하여 일할수 있으며 더이상 남의 신세를 지지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6) 그 소경은 이 은혜를 받았다(52절). 그의 눈이 열렸던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던 것은 그의 끈질긴 외침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때문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의 믿음으로 하여금 역사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얻은 은혜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저가 곧 보게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완전히 치유되었으며 더이상 안내할 사람이 필요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즉 보게되자 그는 예수를 좇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적인 치유를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일단 치유를 받으면 우리는 계속 그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따르게할 아름다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본다.

 

# 해설

올바른 신앙을 가르치심 ( 10 )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갈릴리 사역(1-8장)과 은둔 사역(9장), 그리고 베레아를 중심으로 하는 본장이 마가복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는 이혼에 관한 논쟁과 영생에 관해서 묻는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과 제자들의 무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이혼에 대해 가르치심

1) 이혼에 대한 질문과 대답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무리로 인하여 말씀을 가르치실때에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하여 율법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이미 알고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하여 질문한 것뿐입니다. 모세의 이혼법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통념과는 달리 주님은 사람들의 완악함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혼법이 제정되었다는 주님의 견해는 변할수 없는 진리입니다.

a.율법은 죄를 알게하는 것(롬7:7)

b.마음을 강퍅하게 말라(시95:8)

2)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때 처음 남자를 창조하시고 그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인 아담과 하와는 창조와 동시에 부부가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두 인격체가 하나로 연합된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써 생물학적으로는 종족의 번식과 그 영속화를 도모하는 한편,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적 존재로써의 동물적 삶을 초월하는 도덕적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소명이므로 사람이 임의로 이혼할수 없는 것입니다.

a.연합하여 한 몸을 이룸(창2:24)

b.음행을 막기위해서(고전7:2)

3) 이혼과 재혼은 금지 사항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창조의 원리는 불변의 원리이므로 가령 이혼증서를 써주었다해도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승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맺은 부부관계는 불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혼은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간음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외에 이혼하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참조, 마19:3-8). 그리고 재혼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재혼도 금하셨습니다.

a.혼인을 귀히 여기라(히13:4)

b.간음은 자기를 더럽히는 행위임(레18:20)

 

2.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

1) 어린이를 축복하심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주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를 주님은 책망하시고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더나아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용납하고 내게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19:14)

b.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심(고후13:13)

2) 참된 헌신을 요구하심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때 한 청년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며 관원이었습니다(참조, 마19:22;눅18:18). 예수님은 청년에게 십계명 중 지켜야할 도덕적 계명들을 지켰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청년은 그런 것들을 어릴때부터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후에 주님은 그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준 후에 당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헌신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자신의 많은 재물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였습니다.

a.있는 것을 다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막10:21)

b.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함(눅12:15)

3) 올바른 물질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간 청년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그가 부자라는 신분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 대신 물질을 두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재물은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물질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은 삶에 있어서 단지 수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a.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함(잠27:24)

b.모든 것을 더하심(마6:33)

 

3. 주의 뜻대로 살라

1) 수난을 예고하심

올바른 물질관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난에 관하여 세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수난에 관한 예언은 앞서 말씀하신 두 예언보다 더욱 자세하면서도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듯이 우리는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올지라도 이겨내야 합니다.

a.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결심하심(눅9:51)

b.당할 일을 다 아심(요18:4)

2)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 야고보와 요한은 장차 임하게될 주의 영광 중에서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요구에 대해 주님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추구해야 위대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a.정욕에 의한 구함(약4:3)

b.스스로 종이 되라(고전9:19)

3)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심

주님의 일행이 여리고를 지나가실때에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주님을 부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이 외면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솔직한 답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때 흔히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고침을 받은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a.앉아서 구걸하는 자(요9:8)

b.주여 저를 도우소서(마15:25)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재물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한 청년의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이와 유사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그것을 멀리하는 결단을 내려야 주님을 따를수가 있습니다.

 

# 핵심

10:1-16

갈릴리 사역을 마친 예수께서 유대 지방에서 사역하실때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책잡으려 이혼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그분은 결혼이 신성한 제도이자 하나님의 축복임을 강조하면서 결혼의 열매라 할수 있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다.

바리새인(10:2)

바리새파의 회원. 바리새인(Pharisees)이란 ‘분리된 자’, ‘구별된 자’란 뜻으로 그들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의식적 부정을 멀리한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바리새파는 마카비 시대에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킨 하시딤(Hasidim)의 분파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 발전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를 유대교 창시자로 존중했으며, 모세 율법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한 자신들의 유전(tradition)도 동일한 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때문에 인본주의적 율법 해석의 폐단을 지적한 예수님을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다.

 

# 묵상

이혼을 금하신 예수님 ( 10:1-12 )

모세는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이혼을 허락하면서, 이때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혼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한 몸이 되게 해주신 것이며, 이혼이란 그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사람이 마음대로 둘로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하심으로써 이혼이란 절대 불가한 일임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바로 간음 행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소유인 하나님 나라 ( 10:13-16 )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요, 기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이 보이지않는 사실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소유라고 한 것입니다.

영생의 조건 ( 10:17-31 )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으려는 자들은 실패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바쳐서 이웃을 사랑하지않고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준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결과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슥4:6).

부자와 하나님 나라 ( 10:23-25 )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부자는 종종 재물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 세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자의 복 ( 10:28-31 )

예수님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부모, 전토 등을 버린 자는 똑같은 것을 백 배나 받되 핍박과 함께 받으며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보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힘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난 예고 ( 10:32-34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죽음을 당하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요청 ( 10:35-40 )

영광의 날, 즉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할때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들의 모친이 예수님께 이 일을 간청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오히려 세상이 주는 영광과 명예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리고 길가의 소경 바디매오 ( 10:46-52 )

그는 지나가시는 분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계속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을 듣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멈추지 않았기때문에 고침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만이 우리를 온갖 올무에서 구원받게 해줄 수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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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수님의 변모 9:1-13

1.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제 가까이 임하고 있다는 예언(1)

예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와서 그것이 보여질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 임할 것이며 그 반대 세력을 물리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있는 사람중 일부가 살아있을 동안 임할 것이다. 그 나라를 볼때까지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2. 그 나라의 실례가 된 그리스도의 변모(2-13)

그리스도의 이 변모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을 한지 엿새 뒤에 일어났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고난이 자발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십자가의 거리끼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제자들에게 그의 영광을 보이신다.

(1) 그리스도의 변모는 높은산 꼭대기에서 일어났다. 구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변모된 것은 다볼산 꼭대기라고 한다.

(2)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증인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 등의 수효에 알맞게 지상에서 증거하게 될 세 사람이었다.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특별한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일부 제자들도 다른 제자들보다 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품안에 머물고 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첫째 제자가 되었으며 요한은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 이 영광을 증거한 마지막 증인이 되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고 기록했으며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내용을 기록했다(벧후 1:16-18).

(3)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저희 앞에서 변형되셨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인간의 몸에 영광을 나타내시면 그들의 몸이 얼마나 많이 변화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의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다.

(4) 이 영광중에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려고 나타났다. 모세와 엘리야가 살던 시대는 서로 시간적인 차가 크지만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하늘나라에서 그 차이는 아무런 문제도 안된다. 다시말해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5)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대화를 들으면서 받았던 큰 기쁨이 베드로에 의해 표현된다. 그는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5절)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변화되고 또 모세및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해도 그는 베드로가 자기에게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위가 높아지면 자기 친구들과 거리를 두게 되지만 참된 신앙인들은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에게로 담대하게 나아갔다. 하늘에서 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에도 베드로가 한마디 말을 할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베드로가 한 말은 곧 이것이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절). 은혜를 사모하는 영혼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좋기때문에 그와 함께 산에 머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만일 모세및 엘리야와 함께있던 산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서 영광을 받은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다음 사실을 주목해 보라. 베드로가 이 산에 머물고 있는동안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하는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다른 제자들은 그들을 몹시 만나고 싶어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때 다른 사람들을 잊기 쉽다. 베드로가 대중의 유익보다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더 원했던 것은 그의 약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초막 셋을 따로 짓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초막 하나만 있어도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화합을 이루며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 모순되는 것이 있다해도 그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히 무서워했으며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6절).

(6)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심을 증거한다.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7절).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다른 두 사람을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말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자신의 초막을 지으셨다. 구름은 바로 그들을 위한 초막이었던 것이다. 구름이 저희를 덮었던 그때 구름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정하시고 수락하셨던 것이다.

(7) 그 광경이 사라졌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8절). 오직 예수님만이 세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변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별한 기쁨과 위로는 떠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 끝날까지도 항상 그리스도의 일상적인 모습을 대하며 또 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세상에서 거듭되는 잔치를 기대하지 말라.

(8)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9절)이 일을 비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겸손하신 까닭에 그 겸손의 모습과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어떤 일로도 공공연한 주목을 받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와같이 침묵을 지키게 한것은 또한 그들의 자랑을 예방하는데에도 유익한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의 발전을 남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받는 것은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지만 그의 자랑을 막는 일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2)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당황했다. 그리고 그들을 당황하게 한 또다른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1절)라고 물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떠나고 없으며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다. 서기관들은 그들에게 엘리야를 기다리라고 가르쳤으나 그 예언의 참뜻은 엘리야와 같은 정신과 권능을 지닌 사람을 기다리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엘리야에 관한 예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주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고 성경에는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인자에 대해서도 그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해야 한다고 기록되었다. 서기관들이 너희에게 이와같은 내용을 말하지 않았어도 성경에는 그것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너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것만큼 이것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엘리야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려 하는 것은 이미 엘리야가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조금만 생각하면 너희는 내가 누구에 관해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는 바로 기록된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던 사람이다"(12,13절). 언약된 참 메시야뿐만 아니라 참 엘리야가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다려선 안된다. 그는 이미 와서 세상에 머물렀고 자기에 대해 '기록된'대로 행하였다.

 

Ⅱ.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9:14-29

우리가 이 본문에서 다룰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내용이다.

(1) 그리스도가 자기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그들이 곤경에 처해있는 것을 발견하셨다(14,15절).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영광을 받았다해도 그는 지상에 있는 자기의 교회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는 남아있던 제자들이 당황하여 좌절할때 시기적절하게 오셨다. 그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맞이했으나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서기관들은 마치 자기들의 세상을 만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는 것'을 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귀환이 제자들에게는 확실히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었으며 서기관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일은 온무리가 (예수를 보고) 심히 놀랐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다시 오는 것을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가 문안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왜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았을때 그렇게 심히 놀랐을까? 아마도 그의 얼굴에는 특별한 어떤 것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피로한 모습 대신 놀라울만큼 활기있고 밝은 모습이 나타나 그것이 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2)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던 사건이 그리스도에게 맡겨졌다(16-18절). 그리스도는 서기관들에게 묻기를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지금 다투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했다. 이 물음에 대해 서기관들은 아무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자들도 아무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경우는 그들이 위안을 받고 이제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에게 맡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 사건에 대해 공개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의 아들은 벙어리 귀신이 들려서 발작을 일으킬때에는 말을 못하게 되며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아 발작을 일으키게 하면 그를 거꾸러뜨려 그의 몸이 거의 다 찢어질 정도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또한 입으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발작은 그 즉시 사라졌지만 그동안의 발작으로 인하여 그 아이는 너무 허약해서 파리하여 갔으며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둘째로 제자들은 그에게 어떤 구원도 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적당한 때에 올 수 없었나이다. 선생님, 그런 까닭에 제가 제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3) 그리스도께서 온 무리들을 책망하셨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9절). 그는 그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로 불렀으며 그들과 함께있으며 참는데 지친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내가 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가운데 얼마나 있으며 또 얼마나 그들을 참아야 하리요"라고 탄식하는 소리다.

(4) 그리스도에게 왔을때의 그 아이는 정말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 상태를 슬프게 묘사했다(20,21절). 그 아이는 그리스도를 보자 경련을 일으켰다. 그 귀신이 그 아이를 괴롭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 귀신이 그리스도에게 반항하여 이 아이를 고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도 아주 힘든 일이며 상대가 그리스도일지라도 그 아이로부터 떠나지않고자 했던것 같다.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렸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이 병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처럼 보인다. 이 병은 그 아이가 어릴때부터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병은 아이의 사정을 더 비참하게 했으며 그만큼 치료는 더 어려웠던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쳐주시도록 그 아이의 아버지는 증세를 설명한다(22절).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지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태복음 8장 2절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지에…하시면 이란 조건을 달아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이 불쌍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선의에 자신을 맡겼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거든 이란 조건을 달았다.

(6) 그리스도가 그의 간청에 대해 답변하신다(23절). 네가 믿을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는 잠잠히 계시면서 그의 신앙이 약하다는 것을 간파하신다. 자기의 아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온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무엇을 하실수 있거든이란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그에게 반문하시면서 그가 자기의 신앙에 대해 자문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실망을 신앙의 부족 탓으로 돌리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네가 믿을수 있거든'이라고 반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친절하게도 그의 소원을 강화시키려고 모든 일이 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대함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이 매우 강조되며 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주 많은 일이 약속된다. 그리스도께서 "네가 믿을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감히 믿을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믿을수 있다면 우리의 완고한 마음은 부드러워지며, 우리의 영적인 병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약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견딜수 있을 것이다.

(7)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 불쌍한 사람은 신앙을 고백한다(24절).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당신께서는 내 아들의 병고침이 나의 신앙부족으로 방해받지 않게 하리라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이다. 그는 자기가 좀더 확실하게 그리스도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도록 은혜를 바라는 기도를 덧붙인다. 그리하여 그는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했다. 믿음없는 것을 한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도록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 충분히 베풀어주실 것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말은 곧 "나의 신앙이 부족한 것을 당신의 은혜 즉 우리의 약함을 완전케하는 힘으로 구해주소서"라는 것이다.

(8) 아이는 병고침을 받는다.(25-27절). 그리스도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더이상 걱정하지 않게 하시면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이제 그리스도가 그 아이를 어떻게 치유하셨나 살펴보자.

첫째로 이 더러운 귀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령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곧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 아이에게서 발작을 일으키는것뿐 아니라 결코 경련도 다시는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실 경우 그는 그를 효과적으로 치료해 주신다. 사단은 귀신들린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나갔다가 스스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귀신을 내쫓으면 그 귀신은 다시는 그에게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둘째로 그 더러운 귀신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그 귀신은 더욱 격분하여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것 같이 되었다'(26절).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고 했던 것이다.

셋째로 그 아이는 어떻게 완전히 치유되었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는데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빨리 붙잡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힘있게 붙드셨으므로 그가 일어나 완전히 회복되었던 것이다.

(9)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유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28,29절). 제자들은 자기들이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 그리스도에게 조용히 묻자옵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고 말씀해 주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항상 쉽게하려고 해선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극복해야할 일을 말씀 한마디로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Ⅲ. 제자들의 헛된 야망 9:30-40

(1)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예언하신다(30-32절).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30절).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해야할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그는 제자들이 다가올 시험을 준비하도록 제자들과만이 기꺼이 대화를 나누셨다. 그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리라'(31절)고 했다.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을 해야할 사람들이 자기들을 구속하시며 구원하시려고 온 인자에게 이와같이 악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말씀하셨을때 항상 자기의 부활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씀들은 아주 쉬운 말이었으나 그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에게 묻기를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말에 대해 묻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그 말의 뜻을 모르고 있었다.

(2)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제자들을 책망하신다(33-37절). 그리스도가 가버나움으로 왔을때 그는 제자들에게 조용히 물으시기를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33절)고 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가던 도중에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특별히 우리가 쟁론한 것은 모두 다시 지적을 받을 것이며 또 우리는 그 쟁론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게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모든 쟁론 가운데서도 누가 우월한지에 관해 쟁론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아셨을 것이다. 그 우월성에 관한 것이 이 본문에 나타난 토론의 주제였다. 그것은 곧 누가 크냐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의 우선권을 바라고 그것에 관하여 쟁론하는 것만큼 그리스도 왕국의 두 가지 큰 법인 겸손과 사랑에 위배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는 항상 이와같이 나쁜 생각을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와같은 잘못을 감추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히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 말의 뜻을 묻지않았던 것처럼 자기들의 교만을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이러한 잘못을 고쳐주시고자 했으므로 제자들과 엄밀하고 충분한 대화를 나누려고 앉으셨다. 그는 자기에게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로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보다는 그들의 지위를 낮추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둘째로 더많은 일과 겸손을 행하는 기회를 얻고 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외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높은 지위를 얻을수 없다.

셋째로 가장 겸손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장 온유해질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37절)라고 하셨다. "겸손하고 온순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내가 인정하고 지지하는 그런 사람들이며 그것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제자들이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한 일에 대해 요한이 그리스도께 설명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것을 금한 까닭은 그가 그들의 무리에 끼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나이다'(38절)라고 말했다. 그런데 요한의 설명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나타난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신앙고백을 하지도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별난 일처럼 보였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바람처럼 원하는대로 활동한다면 어째서 그가 사도들과 같은 외적인 소명을 받지않았다고 하여 그리스도로부터 그런 권세를 받을수 없었겠는가? 아마도 그와 같은 사람들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유형교회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람이 사도들과 합류하여 그리스도를 따르지않고 계속 사도들과 떨어져서 행동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을 따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들을 따르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것이 무엇인지 전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 일이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사람이 자기들처럼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 한 그가 자기들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 사람들은 전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우리처럼 정당하게 행하지않는 사람들은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리 그들이 흩어져 있다해도 그들이 그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아신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일로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39절)고 하셨다. 선을 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소 결점이나 변칙적인 모습이 있다해도 선하거나 선을 행하는 것이 금지되어선 안된다. 그점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가리워진다해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했다(빌 1:18). 그리스도는 그런 일이 왜 금지되어선 안되는지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해 주신다. 첫째로 우리는 기적을 행할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둘째로 종교단체가 다르다해도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사단과 대항하여 싸우기로 동의했다면 서로서로를 같은 편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와 바알세불의 상반된 입장에 대해 크게 논쟁하시면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비록 우리와 함께 있지않아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반대하지 않기때문에 그들을 우리 편으로 생각해야 한다.

 

Ⅳ. 죄에 대한 경계 9:41-50

(1) 그리스도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제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41절).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하여 물 한그릇을 주면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이며 행복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란 곧 그리스도의 가족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그 가족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몸의 지체들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가난한 자들이 고통을 당할때 그들을 구제하는 일은 선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그 선행을 인정하시고 그 선행에 대한 상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친절을 베푸는 일은 그 친절을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 관심을 쏟고있는 사람이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따르지않더라고 그들을 반대하고 방해해선 안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간주해야 하며,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 사람들이라해도 그들을 격려해주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운 말씀을 하신다(42절).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 그리스도인들을 슬프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을 행하지 못하게하거나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을 실족케하는 사람의 형벌은 매우 무거울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신다(43-50절).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방해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모든 일을 피하는데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들이라고해도 우리는 그것들에서 손을 떼어야만 한다.

1) 우리 자신의 손이나 눈이나 발이 우리를 실족케하는 경우, 즉 우리가 애착을 갖고있는 부패한 것이 눈이나 손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경우를 전제로 하였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 죄가 되거나 그 죄가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손을 떼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와 선한 양심을 버리든지 해야한다고 생각해 보라.

2) 그런 경우에 빠졌을때에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손과 발이 범죄케 하거든 그 손과 발을 찍어버리며 가장 애착이 가는 욕망이 범죄케 하거든 그 욕망을 극복하고 그것을 억제하라. 쾌락을 주는 우상은 혐오의 대상처럼 내던져버리라. 부패된 부분은 전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제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3) 이렇게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육신의 정욕을 억제해야 한다. 죄를 버림으로써 우리가 현재에는 마치 절름발이나 불구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해도 영생을 얻기위해선 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바쳐야할 것이다. 죄를 버림으로써 절름발이가 되고 불구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표적이 되고 그 나라에서 영광의 상처가 될 것이다.

4) 이렇게 하지않으면 위험을 당하게 된다. 이 문제는 죄가 죽거나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할 것이다.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려고 멸망에 대한 말이 이 본문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되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8절). 죄인 자신의 양심의 비난과 책망은 바로 자신을 괴롭히고 죽지않는 구더기이다. 그리고 죄와 더러워진 양심을 붙잡게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을 말한다. 그 불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에 그 진노가 임하는 자에게는 두려운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필로(philo)는 말하기를 악한자의 형벌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은 그 뜻이 상당히 어려우며 해석자들도 그 뜻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49절). 그리고 모든 제물에 소금이 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속에 소금을 갖고있어야 한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모든 제물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단에 올려진 음식이기 때문에 소금으로 쳐져야 한다고 정해져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것이 육신으로 불리듯이 하나님의 제물이 되기위하여는 소금으로 쳐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롬 12:1)로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산 제사가 열납되도록 우리는 소금으로 쳐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속에 은혜의 향기를 가져야만 한다. 은혜의 소금을 지닌 자들은 그들이 은혜의 소금을 지녔다는 것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들이 자기 자신속에 소금을 지녔다는 것은 곧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살아있는 원리가 있어서 그것이 모든 부패한 성품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여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골 4:6; 엡 4:29), 우리의 입에 부패한 고기를 넣는 것만큼이나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 이 은혜로운 소금은 죄의 허망함으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지켜주듯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리스도의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하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다. 우리는 이 은혜의 소금을 지녀야할뿐 아니라 항상 그 소금의 맛과 향기를 간직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50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소금으로 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게될 것이다. 그들이 즐겨왔던 쾌락은 불같이 그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약 5:3). 이것은 분명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이 될 것이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려운 경고를 아는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자.

 

# 해설

변화산 사건과 기도의 중요성 ( 9 )

본장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지 엿새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을 예수님께서 추방하신 기적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논쟁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자에 관한 교훈과 믿는자를 실족케하는 자에게 형벌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변화산 사건

1) 변형되신 예수

수난에 대한 교훈후에 주님은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주님은 그 모습이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세상의 방법으로는 모방할수 없는 완전한 변형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지니신 본질로써 거룩하심과 순결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후에 엘리야와 모세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고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로 더불어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a.처음으로 제자 삼은 자들(막1:17-20)

b.용모가 변화됨(눅9:29)

2) 하나님의 음성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의 변형과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에게 신적 세계에 대한 황홀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구름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는 나의 아들이므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되심에 있어서 그 근거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하며 그분께 충성해야 합니다.

a.여호와의 임재(출19:9)

b.하늘로써 소리가 남(막1:11)

3) 제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심

산을 내려오시는 도중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산 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자신이 부활할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님의 변화하신 것과 같은 신비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야 사상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죽으신후 다시 살아나신 다음에 변화하셨던 사건을 알리는 것이 타당하였습니다.

a.이 일을 아무도 알지못하게 하라(막5:43)

b.부활 후에야 깨닫게 됨(요2:22)

 

2. 변화산에서 하산하심

1)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부활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엘리야에 대해서 주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 예고를 하신 까닭입니다. 주님은 엘리야의 예언이 세례 요한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음과 그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한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엘리야와 메시야의 고난 예언을 조화롭게 가르치신 주님은 엘리야 즉 세례 요한이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a.그리스도 앞에 옴(막1:2)

b.먼저 와야할 엘리야(마17:10)

2) 제자들이 못고친 아이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서 하산하셨습니다. 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변론 중에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슨 일로 변론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남은 제자들에게서 생겨진 사건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없음에 대한 탄식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못고친 아이는 간질병자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귀신들려 고통받는 자기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그 아이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셨습니다.

a.믿음이 적은 연고(마17:20)

b.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함(막9:29)

3) 수난에 대해 말씀하심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면서 또다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야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후 승천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a.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함(막9:12)

b.드러내놓고 말씀하심(막8:32)

 

3. 죄를 멀리하라

1) 예수님의 실물 교육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가버나움으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노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제자들의 논쟁을 아신 주님은 어린이를 안으시고 겸손에 관한 교육을 하셨습니다. 어린이는 우리로 하여금 권세나 부귀를 얻도록 하는데 있어서 극히 무력한 존재이며, 도리어 우리의 연민과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겸손을 교육하기 위해 어린이까지 동원하신데서 주님의 지극한 열심과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a.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요2:25)

b.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짐(마23:12)

2) 금하지 말라

요한은 주님께 당신을 따르겠다는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편협된 사고와는 달리 주님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성도가 성도를 인정하고 그를 대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크신 은총으로 보상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a.서로 화목하라(막9:50)

b.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마6:24)

3) 범죄치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방해하며 성도의 영혼을 지옥에 이르게 하는 죄에 대하여 엄격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사실 죄란 것은 매우 파괴적인 권세이므로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여기서 죄는 손, 발, 눈 등의 육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로써 응답하지 않을때 결국은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a.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수는 없음(눅17:1)

b.몸을 쳐서 복종시켜라(고전9:27)

 

결론

주님의 가르침을 확실히 깨닫지못한 제자들이 노중에서 누가 크냐고 쟁론한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명예를 추구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자기를 낮추고 종의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교만과 불손함을 제거하고 겸손한 성도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핵심

9:1-13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수난 예고로 인해 당황하며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소망을 안겨주었다.

변화산 사건(9:2-8)

예수님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건은 성육신, 대속 죽음, 부활, 승천과 더불어 그분 생애의 5대 사건으로 꼽힌다. 이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예수님이 구약 율법과 예언을 완전 성취하실 메시아임을 의미한다. 또한 그분의 옷이 광채가 나며 희어졌음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나타냄과 아울러 십자가 수난을 당할지라도 부활하실 것임을 예고한다.

 

# 묵상

예수님의 변형 ( 9:1-8 )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위해 이 사건을 마련하셨습니다.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자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으며, 죽음을 경험한 자입니다. 엘리야는 구약 예언의 대표자이며,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했고(왕상18:30),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으며, 죽지 않고 승천한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율법과 예언의 완성자이시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한 자이고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보이신 분이며, 죽은 후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나타나신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한 자 ( 9:12 )

먼저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알려진 엘리야는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와서 그의 오셨음을 알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적인 귀와 눈이 멀어 그가 오리라고 예언된 제2의 엘리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과 서기관의 변론 ( 9:14-18 )

제자들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기때문에 서로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앞의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의 메시야이며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셨음을 보여주는 변화산에서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믿음이 없어서 귀신을 내어쫓지 못하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는 제자들의 초라한 모습이 대조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사의 선물을 주셨으나 우리가 하나님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은사는 쓸모가 없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도 은사가 필요할때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를 자랑만 할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고침 ( 9:20-27 )

그 귀신들린 아이는 아버지의 믿음때문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을 고치지 못했던 제자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능력도 의심하여 ‘할 수 있거든 병을 고쳐달라’는 식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의 믿음때문에 그의 아들은 구원을 받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리에서 쟁론한 제자들 ( 9:33-35 )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왕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날에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주장하다가 다툰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 ( 9:35-37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서로 큰 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의 큰 사람이란 바로 사람을 섬기는 자이며 어린아이까지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예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못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인격까지도 인정하고 그들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섬김의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대상24:3). 섬김은 하나님의 명령이며(마4:10), 주님께서는 그 모범을 보이셨습니다(마20:2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 주님과 함께거하기 위해서는 섬기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요12:26).

서로 화목해야할 성도 ( 9:50 )

소금은 자신을 희생하여, 즉 자신을 무(無)로 만들어 그 맛을 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속에 소금을 두라고 하신 것은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화목을 도모하라는 의미입니다. 화목이라는 맛을 위하여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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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사천 명을 먹이심 8:1-9

우리는 전에 이 본문에 나오는 기적과 유사한 내용을 본 마가복음(6:35)에서 살펴보았으며 마태복음(15:32)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적에 대해 살펴본바 있다.

(1) 우리 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그리하여 마가복음 기자는 '큰 무리가 있어'라고 기록했다(1절). 자기들의 지도자들보다도 더 정직하며 참된 지혜를 갖고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존경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천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가깝게 지냈다. 그리스도의 이런 행동은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생명과 은혜를 얻기위하여 그에게 나오도록 용기를 주었다.

(2)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12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와같이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면서 그가 그들에게 해산하라고 말씀하실때까지 그를 떠나겠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참된 열심이 있으면 힘든 일을 하더라도 힘들게 여기지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격언가운데는 "검은 빵과 복음은 맛있는 음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경멸하는 태도로 바라보던 천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동정심과 다정한 마음으로 바라보셨다. 그러므로 그가 주로 생각하시는 것은 '저희가 나와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12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손해를 보거나 고난을 당한다해도 그는 그 어려움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보상되도록 배려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동정심이 어느 정도인지 다음 내용을 주목해 보라.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3절). 그는 또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리들이 그리스도께서 전파하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때 비록 우리는 모르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위로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결코 무리들을 굶긴채 집으로 보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말을 올바로 섬기는 사람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인의 의심은 간혹 그리스도의 권능을 크게 나타내는 계기가 된다.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에서 떡을 얻어 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야할지 상상도 할수 없었다.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행동하시는 시기는 사정이 가장 급박해졌을 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들이 떡을 위해서 자기를 따르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먹을 것이 완전히 떨어져 그들을 집으로 보내게 될때가 되서야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던 것이다.

(5) 그리스도는 사정이 극히 악화되었을때에만 자기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행동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빵을 위하여 자기를 따르지않도록 그들이 매우 굶주렸을때에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을 떠나게 했다.

(6) 그리스도는 헤아릴수 없을만큼 관대하시다. 그것때문에 그리스도는 이와같은 기적을 다시 행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새롭게 우리가 필요로하는대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전에 행했던 기적에서 그리스도는 그가 지닌 모든 떡, 곧 다섯 개를 이용하여 오천 명이나 되는 그의 손님 모두를 먹이셨다. 그리스도께서 '떡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고 말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떡 일곱 덩어리를 취하여 사천 명을 먹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현재 있는 것을 사용하여 최선의 것을 만들도록 가르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7)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나누어줄 충분한 떡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8)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행동을 함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을 먹이셨다. 그리스도의 양은 양 무리 곁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참되게 먹이는 것이다.

 

Ⅱ. 하늘로써 오는 표적 8:10-21

그리스도는 여전히 장소를 이동하며 돌아다니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달마누다 지방에 들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힐난을 받게되어 선을 행하시지도 않고 다시 배에 올라 그곳을 떠나셨다(13절).

1.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의 요구를 물리치심(11-14)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힐난할 목적으로 그에게 나아왔다.

(1) 그들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그들에게 베풀었던 표적들이 충분하지 않다는듯이 그에게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요구했다. 그들은 그를 시험하여 이 표적을 요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이 표적을 베풀어주실 소망을 가지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질문을 통해 자기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또 그들의 불신앙을 가장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2)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그는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셨다(12절). 그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슬퍼하면서 상당히 큰 신음소리를 냈을 것이다. 죄인들이 이처럼 스스로 불행을 초래하고 자기 자신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어떻게 거절하셨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그는 그들에게 이 요구에 대해 충고하신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란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고 그 복음과 동반하여 어떤 표적도 나타나게할 가치가 없는 세대를 뜻한다. 그러나 이 세대는 또한 병고치는 일을 통해서 그들에게 매우 풍성히 주어졌을뿐 아니라 현저히 드러났으며 자비로 가득찼던 표적을 받았던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이 표적을 구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둘째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구에 대답하기를 거절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는 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상대도 못되는 것처럼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그들을 떠났다. 그들이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심한 망상속에 빠져있는 그들을 떠나신다.

2.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경계(15-21)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해 보라.

(1) 무엇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셨나 살펴보자.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 마태는 이 말에 '사두개인의 누룩'을 첨가시켰고 마가는 헤롯의 누룩을 첨가시켰다. 어쨌든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표적에 만족하지않고 그들이 궁리해낸 다른 표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룩을 주의하라 너희가 본 기적으로 확신을 가지라"고 하셨다.

(2) 제자들은 이 주의를 어떻게 오해했나 살펴보자. 본문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이때 배를 타고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없었다(14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말의 뜻이 무엇인지 서로 의논하고나서 그말에 대해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면서 다투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배로 긴 여행을 해야하는데 떡 한 덩어리밖에 없는 것은 너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비난하게 만든다. 이 문제로 인한 그들의 걱정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마음을 알고있으며 또 그들이 책망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18절)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는 다시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 "너희는 얼마나 어리석고 둔한 사람들인가! 너희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줄 때와 그 뒤 곧 바로 일어난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를 기억지 못하느냐. 또한 너희가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는지 기억지 못하느냐?" 이러한 그리스도의 책망을 듣고 그들은 그 사실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은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고 또 한번은 일곱 바구니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떡 다섯 덩어리와 일곱 덩어리를 불어나게 했던 자가 떡 한 덩어리는 불어나게 할 수 없다는듯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한 덩어리의 떡으로 역사를 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고 의심했던것 같다. 그들은 마치 주님이 떡의 수효가 많고 적음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처럼 의심했지만 주님께서는 떡 한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이 떡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에 베풀었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충분히 먹였을뿐 아니라 먹고 남기까지 했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상기시킨 것은 적절한 조치였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선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경우 그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신을 매우 크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참된 의도와 의미를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과 선에 대해 알고 보았던 것을 깨닫거나 기억하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염려와 불신에 압도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잊고 그를 믿지않을 때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그 제자들에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혹독하게 책망해야 한다.

 

Ⅲ. 소경을 고치심 8:22-26

본 복음서의 기자인 마가만이 소경을 고친 일에 대해 기록했다.

(1)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였다(22절). 이 구절에는 그 소경을 데리고온 사람들의 신앙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소경 자신은 다른 소경들이 병고침을 위해 보였던 열심과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경우 그들의 동료와 친척들은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그들에게 손대시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이 소경을 데리고 나가셨다(23절). 그리스도는 그의 친구들에게 그를 데리고 나가도록 명령하지 않았다. 그는 몸소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그를 데리고 나가셨다. 불쌍한 눈먼 소경이 그처럼 훌륭한 안내자를 만났던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만일 그가 이 일을 은밀히 하고자 했다면 그는 그를 어느 집이나 여관 방으로 데리고가 그곳에서 그를 고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소경이 눈을 뜨게될 때 좁은 거리보다는 넓은 들판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전망을 볼수 있도록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던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소경을 고치셨다(24, 25절). 그리스도께서는 소경을 고쳐준 일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표적을 사용하셨다. 곧 그는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23절). 그리스도는 그 소경을 다른 소경들에게 했던 것처럼 한 마디 말씀으로 고칠수 있었으나 이런 방법을 취하여 매우 약했던 그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 또 그의 불신을 극복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를 원하셨다.

둘째, 보통 그리스도께서 병고치는 기적을 행할때와는 달리 치유되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그리스도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23절). 그러자 그는 우러러 보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24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외에는 달리 사람과 나무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는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으며 자기와 하늘사이에서 한 사람이 나무처럼 서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그의 시력이 곧 완전하게 회복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의 일을 반쯤 해놓고 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완전한 시력을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고 그에게 다시 우러러 보도록 명했다. 그러자 그는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25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런 방법을 취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어느 한 방법에 매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병을 고쳐주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동일한 목적을 이루시기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인 신앙으로 그 섭리를 따를수 있다. 둘째로 이 방법은 그 소경의 신앙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아마도 이 소경의 신앙은 처음에 매우 약했으나 나중에는 힘을 얻고 결국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이 방법을 통해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이 어떻게 그의 은혜를 받고 회복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지식이 혼동이 되어 그들은 나무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지만 아침 빛이 점점 밝아져 완전히 밝은 대낮이 되면 그들은 만물을 밝히 보게 되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고친 사람에게 명하신다(26절). 그 지시는 곧 '벳새다 마을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라'(이 부분은 한글개역 성경에는 없음-역주)는 것과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금한 것은 마을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볍게 여길때 그 은혜를 다 잃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가 모자라게하여 그들이 누리는 특권의 가치를 알게하신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가치들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평화에 속한 일들을 보려고하지 않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이 그것을 보게하지 않으신다.

 

Ⅳ. 베드로의 고백 8:27-38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가 전파한 많은 교훈과 그의 기적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잠시 쉬면서 이 모든 일들이 무슨 뜻을 갖고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요 20:31).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으로부터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이심을 증거한다(27-30절). 그 모든 사역을 눈으로 본 그의 제자들은 여기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우리가 사람들의 판단을 받는 것은 아주 하찮은 일에 불과하지만 종종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말하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것에 유익이 된다기보다는 우리의 결점을 듣기위한 일에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2)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한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숭고한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정도의 말이었다. 그들이 비록 진실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이 사기꾼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를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28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자라는 것에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3) 제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그들 자신의 느낌에 대해 예수님에게 말했다. 제자들로부터 사람들의 의견을 들은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하나의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자주 약속되고 오랫동안 기대되었던 메시야를 말한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있으며 또 이 사실을 가까운 시일내에 전파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증거가 완전히 성취되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파할만한 자격이 완전히 구비될때까지 당분간 그들은 이 사실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이 모든 기적들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없애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이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고 정복자가 되심을 확신케 한다(31-33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견딜 수 있었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한다고 가르치셨다. 비록 그들이 메시야는 세상의 한 왕이라는 통속적인 오류를 극복하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가 곧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으로 기대했던만큼 그릇된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과 반대되는 전망을 이야기하신다. 곧 그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영광을 받는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하며 하늘에 오르사 더이상 세상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셨다(32절). 그는 이것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으며 애매한 표현을 써서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태연하게 아무 두려움없이 말씀하시어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태도로 그것을 듣도록 하셨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한다는 것을 알았을뿐 아니라 그것을 그 자신의 행동으로 이루게 했던 분으로서 뚜렷하게 그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2) 베드로는 그의 말씀을 반대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했던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많이 나타냈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자기의 안전을 위한 열심때문이었지 그 말씀의 뜻을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를 붙들었다는 것은 그를 멈추게해서 그의 길을 방해하려는듯이 자기의 팔로 그를 붙들고 그를 껴안는 것을 말한다(혹자는 그 말을 이와같이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않다면 베드로는 그를 몰래 곁으로 모시고 가서 그에게 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가장 적은 권세를 가진 자의 말이 아니고 가장 큰 애정을 가진 자의 말이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이 자기에게 허물없이 대하도록 허락하셨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너무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반대를 꾸짖으셨다. 그는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셨다(33절). 그리고 그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같이 심한 책망을 들었던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최근에 가졌던 신앙만큼 자기의 사랑에 대해 칭찬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것 같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는 우리의 정신자세를 알고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의 정신자세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했다. 가장 힘센 적들도 질병과 죽음은 물론이고 바람과 파도와 마귀들까지 순종하고 복종케하는 그리스도를 이길수는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방지될수도 있는 순교로만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단의 멸망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곧 우리의 구원의 선장인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서 완전케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계획을 측정하려 하면 그 인간의 지혜는 매우 어리석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된다.

둘째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특징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그 왕국을 영적이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에 속한 것들과 앞으로 누릴 삶보다는 현세에 속한 것을 더많이 생각했던것 같다.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영광과 그 왕국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는 것은 매우 큰 죄가 되며 많은 죄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흔히 범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곧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일에는 지혜롭지 못하고 사람의 일에만 지혜롭다".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그 일을 회피하면 그것은 결국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모든 기적들은 어떤 대가를 치른다해도 우리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한다(34-38절). 그리고 그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확신시키는 것들일뿐 아니라 그의 계획을 설명해 주는 것들이기도 하다. 또한 이 모든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에게 맡겼던 많은 사람들의 괴로워하는 몸을 고쳐주셨던 것처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눈먼 것과 귀먹은 것과 저는 것과 문둥병에 걸린 것과 각종 질병 및 귀신들린 것을 고쳐주시고자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위대한 의사라는 것을 믿을수 있고 또 우리로 그의 환자가 될수 있도록 기록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본문의 내용을 듣도록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고쳐주시기를 기대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이 내용을 알고 생각하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1)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육신의 안일에 빠져선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34절)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려하지 말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계속 그리스도를 좇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환자가 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교훈과 책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2)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육신의 생명을 지킬수 없을때조차도 그들은 결코 육신의 생명을 위해 염려해선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에 의해 그를 따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일까? 우리가 생명 그 자체보다 그리스도에 의한 유익을 선택할 수 있을지 조용히 생각해 보자. 마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과 종들을 유혹할때 그는 가장 나쁜 것은 숨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어렵고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전에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가장 나쁜 것을 안다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양자를 모두 공평하게 놓았을 경우 그를 섬김으로써 얻는 유익이 그를 섬기다 생기는 좌절을 충분히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된다(35절).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후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부인함으로써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그는 그 목숨과 영생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역경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 즉 진실로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할 것이며 말할수 없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자기들의 왕과 나라를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원호해 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보상이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얼마나 큰 보상이 되겠는가?

②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그리스도를 부인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절). 후퍼(hooper) 주교는 순교하기 전날 밤에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쓰고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달다"고 말했다. 죄 안에서 세상을 얻는 것이 죄로 인한 영혼의 멸망을 메울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제 목숨을 구원하고 온 천하를 얻기위하여 무슨 일을 하며 그 결과는 어떤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절). 그리스도의 주장이 이 세상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이게 되는 것은 그 불리한 조건이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에 의해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나 장소는 그리스도가 살던 시대와 장소처럼 특별히 더 죄가 많다. 그와 같은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주장은 배척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주장을 순종하는 사람들은 비난과 멸시를 받고 어디서나 조롱과 욕설을 듣게 된다. 그리스도의 주장이 의로운 주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해도 그리스도의 주장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맺고있는 관계를 부끄러워 한다. 그들은 빈축을 사고 멸시받는 것을 견딜수 없기때문에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장이 현재 보잘것 없이 하찮게 나타난만큼 밝고 빛나게 드러날 날이 올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가 당하는 멸시를 함께 나누려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영광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 해설

갈릴리를 중심한 사역 ( 8 )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전후해서 발생한 사건들의 기록입니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의 무리를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악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수난을 말씀하신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사천 명을 먹이심

1)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각처를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원근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데가볼리 지역에서 삼일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삼일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의 이러한 사정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a.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심(마9:36)

b.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심(막6:34)

2) 축사하시는 예수

예수님은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양식임을 아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하셨습니다.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놓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베푸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셨습니다. 주님은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축사하신 떡과 생선을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a.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심(마26:26)

b.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마14:19)

3) 풍성히 먹고도 남음

주님께서 축사하신 떡과 생선은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전체 무리의 수에 비해 가지고 있는 떡과 생선은 지극히 적은 양이었으나 주님께서 축사하신 이후에 약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 무리들은 부족함없이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으시며 풍성히 인간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없는 가운데서도 있게 하실 수 있으나 그들에게 있는 것을 통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a.나눠주심(요6:11)

b.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둠(마15:37)

 

2. 악인들을 경계하라

1)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인생들의 고통을 떡과 고기로 해결해 주신 주님께서는 군중을 흩으신후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힐난과 시험은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보신 주님께서는 마음속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적, 메시야적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하여 주님이 보여주신 표적은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 없습니다.

a.장로들의 유전을 따름(마15:1-3)

b.여러 가지 일로 힐문함(눅11:53)

2) 누룩을 경계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표적 요구를 거부하신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교훈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거기서 발생하는 독선과 위선이었습니다. 헤롯당의 누룩은 권세와 부귀를 추구하는 세속주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이 누룩들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순수한 신앙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헤롯과 같은 것들을 버리고 순수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a.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해야(마16:6)

b.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해야(마16:11)

3) 소경을 고치시는 예수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곳은 벳새다입니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로써 주님은 이곳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 벳새다에 도착하시자 사람들이 소경 한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은 벳새다 마을밖으로 소경을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침과 안수로 치유하시고는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소경에게 물으셨습니다. 이에 소경은 자기의 눈이 치유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a.눈이 어둡게 됨(왕하6:18)

b.눈들이 밝아짐(마9:30)

 

3. 주의 길은 고난의 길임

1) 베드로의 신앙고백

예수님 당시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관점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각기 달랐지만 거기에 일치되는 것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제자들로부터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또한 자신의 신앙 대상으로 믿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a.빌립보 지방(마16:13)

b.그리스도(요4:25)

2) 수난을 예고하심

베드로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주님께 그와 같은 처참한 일이 닥쳐서는 안된다고 말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엄히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a.능욕을 당함(막10:34)

b.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음을 당함(막9:31)

3) 주를 따르는 자의 각오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어야할 모든 자들에게 자기 부인의 길과 십자가의 길을 교훈하시고 복음을 위한 순교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숨의 귀중함을 가르쳐주시면서 더나아가 영적인 생명에 대한 소중함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귀히 여길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더욱더 귀히 여기고 주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a.모든 것을 버려야(막10:28)

b.주와 함께 죽어야(딤후2:11)

 

결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표적을 지향하는 삶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표적을 보기 원하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기초되고 말씀에 의해서 세워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8:1-26

오병이어 이적에 이은 칠병이어(七餠二魚) 이적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고,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을 미혹해 진리에서 이탈케하는 저들의 잘못된 교훈을 제자들에게 경계시키셨다.

 

# 묵상

칠병이어의 기적 ( 8:1-9 )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간의 영적 기갈뿐 아니라 육적 괴로움도 해결해주시고(마11:5),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마28:18). 즉 인간의 진정한 만족은 이 땅에서가 아닌 천국에서 주어지며(요6:26),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생명의 떡으로 성도의 영혼을 채워주실 것을 암시합니다(요6:35).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긍휼이 무궁하심을 나타냅니다(엡2:4). 또한 예수님만이 인간의 모든 필요에 참 만족을 주신다는 것과(마6:33)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이기도 하시며 만유의 주이심을 가르쳐줍니다(롬3:29).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사흘동안 그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기진할까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동정심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즉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의 배후에는 항상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 8:15-21 )

누룩은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보다는 율법과 장로의 유전을 더 중시하며 그들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헤롯의 누룩은 당시 헤롯이 지배국인 로마 제국에 빌붙어 권력을 잡고 유대인들을 압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벳새다 소경 치유 ( 8:22-26 )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나가 눈에 침을 뱉고 두번 안수하심으로 치유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은 처음에는 사물이 희미하게 보이다가 두번째는 정확히 보였는데, 이는 다음에서 나오는대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두번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고백는 것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고백과 베드로의 고백 차이 ( 8:27-29 )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고백했으나 베드로는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마16:16절에 보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지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 8:33 )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다가오는 수난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이를 만류하였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꾸짖으셨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바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의 일이란 그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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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의식적인 율법에 대한 논쟁 7:1-23

그리스도가 오신 커다란 목적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의식적인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었으며, 더나아가서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의식적인 율법과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덧붙여놓은 의식적인 율법을 철저히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논쟁을 했던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 왔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들은 우리의 구세주와 갈릴리에서 논쟁하기 위하여 팔십 내지 백 마일이나 되는 길을 왔던 것이다.

1. 장로들의 유전(3,4)

장로들의 유전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식사하기전에 손을 씻게 되어 있었다. 이 유전은 청결한 관습으로써 그안에는 어떠한 해로움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유전을 종교처럼 받들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개입시켜 모든 사람들이 파문을 당하지않도록 그 유전을 지키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을 장로들의 유전으로 지켰던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킨 것에 대한 설명을 대하게 된다(3,4절). 첫째로 그들은 그들의 손을 부지런히 씻었다. 둘째로 그들은 특히 식사하기전에 씻었다. 그것은 그들이 축복을 간구했던 떡을 먹기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한다는 규율 때문이었다. 그렇지않으면 그들은 부정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왔을때 특별히 조심하여 손을 씻었다. 그 시장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는 집합장소를 뜻한다. 그래서 그 시장은 스스로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일부 이방인들이나 부정을 저지를 유대인들이 올수 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랍비의 규율이란 곧 만일 그들이 아침에 손을 잘 씻으면 그들은 하루의 첫번째 일을 한 것이며 또 그들이 홀로있게 될 경우 그 효력은 온종일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을 만나러 나갔다 돌아오면 손을 씻을때까지 그들은 먹거나 기도해선 안된다. 넷째로 그들은 손을 씻는 일외에도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일을 해야하며 또 그들이 식사를 했던 탁자까지도 씻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씻도록 지정된 의식이 많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제도를 지키듯 그들 자신이 만들어놓은 부와 규정을 첨가시켜 그들이 준수해야할 의식을 강요했다.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행한 일(2)

제자들은 율법과 일반적인 관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정한 손 곧 씻지아니한 손(2절)으로 떡을 먹었던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유전을 준수하여 바리새인들의 비위를 맞추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씻지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었다. 여기에 나타난 제자들의 의가 아무리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해도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나은 것이다(마 5:20).

3. 이 일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취한 공박(5)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선생인 그리스도에게 제자들을 송사하여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조사하고 그들이 그 규율을 따르도록 명령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이 우리가 하는대로 하지않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던 것이다(5절).

4.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변호(6-23)

이 변호를 통해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신다.

(1) 그는 이 의식을 부과한 권세에 관해 바리새인들과 쟁론하신다. 그러나 그는 무리를 불러 이르셨던 것처럼(14절) 이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무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을 선동하여 도당을 만들려는 것처럼 보이지않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관련된 사람들을 책망하여 그 권세에 대해 말씀하셨다.

1) 그는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관례를 준수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면서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가장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가장하나 실제로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7절). 그들은 그들의 모든 종교의식을 형식적으로만 실행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거짓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실뿐만 아니라 그들도 그 헌신으로 아무런 유익을 얻지못하기 때문이다.

2) 그는 바리새인들이 장로들과 통치자들의 이야기와 권고를 신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책망한다. 그들은 교훈을 위하여 사람의 유전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법을 강요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살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 교회법에 순응했는지 안했는지에 따라 그들이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했다. 그들은 본질을 고려하기보다는 건방지게도 의식을 첨가시켰으며 잔과 주발을 씻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이 '사람의 계명을 지킨다'(8절)고 덧붙여 말씀하신다. 미신은 끝이 없는 것이다.

3) 그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일'과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한일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이 더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해도 그들의 규율이 이를 묵인하는 일에 대해 책망하신다. 부과된 유전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보다 근본적인 의무에는 별로 열심을 보이지않는 일이 너무 많은데 이것이 바로 유전들의 해로운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렸던 것'이다(9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며' 심지어는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13절). 그들은 율법을 설명하고 그것을 강요하도록 위임을 받았지만 그 권세를 빙자하여 율법을 위반하고 율법의 구속력을 해체시켰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일에 관련된 특별히 나쁜 일의 예를 말씀해 주신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뿐 아니라 자연의 법을 통해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명령했으며,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10절)고 말씀하셨다. 만일 부모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 자녀들은 힘이 미치는 데까지 부모를 편안히 모셔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부모를 굶주리게 하는 사람은 더욱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들은 그가 부모에 대한 이런 의무를 지키지않아도 된다는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만일 그의 부모들의 생활이 궁핍해질때 그 부모를 도울 방법이 있으면서도 도울 마음이 전혀없다면 그가 고르반 곧 성전의 금과 제단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여도 그의 부모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부모들이 그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면 그는 그 부모들에게 이 고르반에 대해 말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할 것이다. 그는 마치 이 악한 맹세에 대한 의무를 지켰기때문에 부모를 섬기는 의무를 지키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일에 대한 결론을 맺으면서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13절)고 하셨다. 사람들이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유전을 만들어 놓으면 어디서 그 유전을 멈출 것인가? 그들은 그런 의식을 따르는데 이와같이 열심을 냄으로써 처음에는 그들의 유전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다루는데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유전과 반대될 경우 하나님의 계명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이 의식의 근거가 되었던 원리에 관해 무리들에게 가르친다. 그는 이 부분에 관한 설교를 공개적으로 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무리들을 다시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14절). 이 말씀은 일반 사람들이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들이 들은바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릇된 관습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가 무리들의 생각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더러운 것에 관한 것으로써 우리들도 범하기 쉬운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를 더럽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음식이 밖에서 들어와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둘째로,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 우리 가운데서 나오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다. 우리의 악한 생각과 정욕,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들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지 이들 이외에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씻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3) 그는 무리들에게 말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설명해 주신다.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17절).

1)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우둔함을 책망하시며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18절)고 하셨다. 그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깨달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으신다. 이 말은 오히려 "너희가 이것도 깨닫지 못할만큼 신앙이 약하냐"라고 묻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비유속에 담긴 진리를 알고 그것을 믿도록 그들에게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해야할만큼 우리를 더럽힐 수 없다. 그것은 배에 들어가서 영양분은 체내에 흡수되고 더러운 것은 체외로 배설되기 때문이다.

② 그러나 우리의 마음, 곧 악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때 사람을 더럽게하므로 종교적인 의식을 요하는 것이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21절).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나와 모든 악을 일으킨다. 더러운 샘이 더러운 물을 내듯이 악한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온다. 마태복음처럼 이 마가복음에서도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몇가지의 특별한 내용들이 상술되어 있다. 곧 마가복음에는 없으나 마태복음에는 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 증거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마가복음에선 마태복음에 포함된 것보다 일곱 가지의 죄목이 더 첨가되었다. 그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탐욕이다. 이 탐욕이란 말은 복수형으로 쓰였으며 세상의 부와 육신의 만족을 더얻으려는 무절제한 욕망을 뜻한다. 둘째로 악독인데 이 악독은 악, 증오, 악의, 악을 행하려는 욕망, 악을 기뻐하는 것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속임이다. 이 속임은 악이 더욱더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수행되도록 그 악을 감추고 숨기는 것을 뜻한다. 넷째는 음탕으로써 바울이 책망하는 불결함과 우매한 말을 뜻하며 또한 음란과 희롱에 찬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흘기는 눈이다. 이것은 시기심과 탐욕의 눈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때 인색해하거나 또는 그들이 누리는 선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는 교만인데 이 교만은 자기가 남보다 높다는 생각때문에 자기 자신을 남보다 높이고 남들을 비웃음과 경멸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곱째는 광패이다. 이 말은 뻔뻔스러움과 경솔함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이말을 특별히 허영심에 찬 자랑으로 이해하고 있다. 적극적인 죄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써 제일 먼저 놓인 것이 악한 생각이라면 소극적인 죄의 원천으로써 마지막으로 놓인 것은 광패함이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악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린다. 하나는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곧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모든 악한 것이 사람을 더럽게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합당치 못하도록하며 양심을 혼탁하게 한다는 것이다.

 

Ⅱ. 수로보니게 여인 7:24-30

(1)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자신을 숨기신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분인지를 보여준다(24절).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받았던만큼의 환영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갈릴리를 떠난 것은 곧 그가 대중의 환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는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경으로 가셨는데 그곳에선 그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다. 드러내는 때가 있듯이 물러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드러냈던 것만큼 자신을 자진해서 드러내려 하지않던 이방인들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꺼이 드러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를 보여준다(25-30절). 그가 비록 그 지방에서 병고치는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았어도 그는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의 일을 행하러 오셨던것 같다. 그는 자신을 숨길수 없었다. 그것은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둘수 있을지 모르나 태양은 그럴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너무 잘 알려져서 어느 곳에서도 오랫동안 숨겨질 수 없었다.

1) 고통과 근심속에 빠져있는 가련한 여인이 그리스도에게 한 간청 : 그 여자는 이방인인 헬라인으로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엡 2:12)이었다. 그 여자는 수로보니게 족속으로써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귀신들렸다. 그녀의 간청은 첫째로 매우 겸손하고 절실하며 끈질겼다. 그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렸다. 그리스도는 가련하게 떨고있는 영혼이 자기의 팔에 그 영혼 자체를 맡길만한 담력과 확신은 없지만 자기의 발앞에 엎드릴 경우 결코 어느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둘째로 그 여자의 간청은 매우 특별했다. 곧 그 여자는 자기가 원하던 것을 그리스도에게 말씀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에게 그가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26절) 간구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간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그가 사단의 세력, 곧 그들의 영혼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깨뜨리도록 하는 것이다.

2) 이런 간청에 대한 그리스도가 주신 실망 : 그는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고 하셨다. 이 말은 곧 기회가 닿는대로 유대인을 위하여 유대인에게 모든 기적을 행할 것이며 유대인들에게 주려고 계획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 곧 하나님의 백성과 비교하여 개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주지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으르렁거리며 괴롭히려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때때로 가련한 간청자의 신앙이 강하다는 것을 아실 경우 그 신앙을 시험하여 그 신앙이 신장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 한 그의 말씀은 이방인에게도 남겨둔 자비가 있으며 그것을 나누어 줄때가 멀지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에 식상하기 시작했으며 그들가운데 일부는 그가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바라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음식을 천시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남긴 음식은 이방인들의 잔치를 위하여 쓰여질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한 그 여자의 대답 :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여자의 뜻과 반대되었지만 그 여자는 이 말씀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하여 자기에게 유익이 되도록 한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주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것은 옳소이다마는 개들에게도 빵부스러기조차 거절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상아래 한 장소가 허락되어 언제든지 빵부스러기를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나이다. 제가 구하는 것은 빵 한 덩이나 한 조각이 아니고 단지 빵부스러기에 불과하오니 그 빵부스러기조차 거절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나이다". 그 여자의 이 말은 곧 그 여자가 들은대로 유대인들이 병고침의 기적을 풍부하게 받은 것에 비하면 그 여자에게 베푸는 병고침은 빵부스러기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최근에 오천 명을 동시에 먹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뒤에 베푸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개들을 위해 남겨놓은 약간의 빵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간청에 대해 베푸신 허락 :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절)고 하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약한 마음으로 의심하지 말고, 기도의 효험을 얻을때까지 기도하도록 격려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한 말씀은 될지어다라고 한 말과 다름없이 효과적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여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기 때문이다(30절).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도 사단을 정복하실 수 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딸이 아무런 동요나 흥분도 일으키지 않고 매우 조용하게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딸은 자기가 아주 깨끗하게 나왔다는 것을 자기 어머니와 기뻐하려고 자기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누워있었다.

 

Ⅲ. 귀머거리를 고치심 7:31-37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무셨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료해 주셨을때 그는 그곳에서 해야할 일을 다했으므로 갈릴리 호수로 다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 호수로 곧장 가지않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돌아가셨는데 이곳은 대부분 요단강과 접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병을 고쳐주시는 이야기를 대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내용이다. 그것은 곧 귀먹고 어눌한 자에 관한 이야기다.

(1) 그 병자의 처지는 애처로왔다(32절).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귀먹은 자를 데리고왔는데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는 전혀 대화를 나눌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얻는 기쁨과 유익을 상실한채 살아왔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일이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일에 전혀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청각을 보호해주셔서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도록 해주신 것과 우리에게 말할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 이 가련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온 그들은 그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그를 치료해 주도록 간구한 것이 아니고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처지를 살피셔서 기뻐하시는대로 그에게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2) 그의 병고침은 엄숙하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면에서 전례없던 일이었다(33-37절).

1)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다(33절). 보통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실때 공개적으로 나타내셨는데 이 경우에는 은밀히 행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외에는 아무도 보지않는 곳에서 선을 행하도록 하자.

2) 그리스도는 이 병을 치료할때 보통때보다 더 의미심장한 행동을 취하셨다. 첫째로 주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다. 둘째로 주님은 그의 손가락에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으며 이렇게해서 그의 혀맺힌 것을 풀어주셨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그를 고칠수 있는 근거가 전혀 될수 없고 단지 그의 신앙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해주려는 표적에 불과했다.

3) 그리스도는 하늘을 우러러보셨다. 이런 동작을 통해 그가 뜻했던 것은 그의 병고침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결과로 들을수는 없어도 볼수 있는 그 병자에게 구원을 위해 하늘을 바라보도록 지시했다.

4) 그리스도는 탄식하셨다. 그것은 그가 기적을 행하는데 어떤 어려움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해서 인생들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냈으며 몸소 그들의 허약함에 감동되어 고통으로 번민하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했다.

5) 그리스도는 '에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열리라는 뜻이다. 열리라고 한 말씀은 귀와 입에 모두 적용이 된다. "귀가 열리고 입술이 열려서 그가 자유로이 듣고 말하게 하라"는 뜻이며 그 결과는 응답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처음으로 듣고 말할수 있는 순간부터 자기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눈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수 없다. 이제 이 병고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권세에 대해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6)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복음의 효력에 대한 실례가 된다. 불쌍한 죄인들에 대한 복음의 위대한 명령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에바다 곧 열리라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귀를 열어주시며 기도와 찬양을 드리도록 입을 열어주신다.

6) 그리스도는 이 일을 비밀로 지키도록 명령했으나 이 일이 널리 전파되어 소문이 퍼졌다. 그가 '저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36절)고 하신 것은 그의 겸손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미덕을 밝히거나 적어도 남들이 그 미덕을 밝혀주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에 기뻐해야 하지만 그 선을 알리는 일을 기뻐해선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이 알려지도록 하기전에 그들은 열심을 내어 이 일을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솔직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알렸기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불순종의 행동이라기보다는 경솔한 행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을 알린 사람들이나 들은 사람들은 모두 심히 놀라게 되었다(36절). 이 일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사람들은 '그가 잘 하였도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37절).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무런 악도 행치않았을뿐 아니라 많은 선을 행했으며 아무 대가없이 무료로 선한 일을 잘하였다고 증거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잘하셨기 때문에 그를 헐뜯으려는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 해설

결레에 관한 논쟁 ( 7 )

본장에서는 인간들이 만든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을 따르고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의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음식을 먹은 일에 관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공박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구약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반박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본장은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과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유전과 하나님의 말씀

1) 장로들의 유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떡을 먹는 것이 주님의 결점을 찾고자 애쓰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식사를 하기전 손을 씻을때 복잡한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손 씻는 일은 위생적인 청결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고 의식적인 정결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통해 생겨난 규칙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된 형식주의에 빠지게 했습니다.

a.사람에게서 나온 것임(마15:9)

b.외식적인 소행임(마23:25)

2) 외식하는 자들

장로들의 유전을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식사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을 공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을 계명과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보는 유대 교권자들의 과오를 공격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정결의식 자체를 비난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본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의식주의에 치우쳐 버린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주님은 엄하게 꾸짖으신 것입니다.

a.불완전함(딤전1:4)

b.망령됨(벧전1:18-19)

3) 율법을 왜곡함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율법은 명령이며 의무이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유전에 의해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율법중 부모 공경에 대한 율법을 예로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해야될 당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공양을 거부하는 방편으로 고르반 제도를 사용한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할 하나님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위하여 이용되셨습니다.

a.부모에 대한 자녀의 악행(잠13:1)

b.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신5:11)

 

2.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

1)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패역한 길로 나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다시 불러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부르시던 하나님의 인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대의 학자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사요, 신학자요, 종교 지도자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a.참된 하나님의 뜻(마7:21)

b.사람의 유전은 헛된 것임(막7:7)

2) 사람을 더럽히는 것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무리들에게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과 그 삶이 죄로 오염되고 더럽혀지는 원인은 바로 타락한 인간 본성 때문이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율법을 파기하신 것이 아니라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식물이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입니다.

a.사람의 마음(렘17:9)

b.음란(겔23:37-38)

3) 비유를 해석하심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앞서 말씀하신 비유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모든 식물을 가리킵니다. 즉 식물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하여 죄인으로 만들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나 의는 모두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부패하면 생활과 행위도 부패하게 되고, 마음이 깨끗하면 선한 생활과 행위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께서 본문에서 예를 드신 모든 악은 도덕적인 부정입니다.

a.입으로 들어가 뒤로 버려짐(마15:17)

b.만물이 다 정함(롬14:20)

 

3. 믿음을 보시는 예수

1) 예수께 나아온 여인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이 두로는 지중해 동쪽 해안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땅에서 멀지 아니한 시돈의 남쪽 32km지점에 있는 성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경에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가셔서 아무도 모르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그 어느 곳도 알아내어 몰려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수로보니게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a.항구 도시임(겔27:3)

b.두로와 시돈 사람을 헤롯이 노여워함(행12:20)

2)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심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 상태를 알아보시기 위해 매우 냉정한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라고 취급한데 대해서도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스러기라도 먹을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간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a.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임(막7:26).

b.슬퍼하며 드리는 간구임(왕하4:27).

3)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심

두로 지경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로 가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가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대시는 방법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결과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신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주님의 경계와는 달리 널리퍼졌고 사람들은 놀라움과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a.은밀히 행하시려고(막7:36)

b.자연 만물도 순종하는 명령임(마8:26-27)

 

결론

본장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만든 유전을 중요시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모든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7:1-23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유전’에 관한 신학 논쟁이다.

고르반(7:11)

하나님께 구별해 바친 ‘헌물’을 말한다. 이것은 제사장의 분깃이나 성전 관리 비용과 같은 종교적 용도외에는 달리 사용할 수 없었다. 완악한 유대인들은 이 법을 악용해 부모공양의 의무를 회피했다. 즉 부모가 경제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도 ‘내 재산은 고르반입니다’라고 선언하고선 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 묵상

사람의 교훈과 하나님의 계명 ( 7:1-8 )

여기서 사람의 교훈은 손을 부지런히 씻지않으면 먹지 말것과,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뿌리지않으면 먹지 말것을 교훈하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외에도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어야 하는 정결 규례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그분만을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인들 중에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례에 얽매여 그것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르반 ( 7:11 )

당시 이스라엘은 채권자가 빚진 자에게서 빚을 빨리 받아내고자 할때에 채무자에게 ‘고르반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빚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고르반이란, 제물이란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바친 것이므로 다른데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봉헌의 맹세를 악용하여 부모를 섬기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더러운 것 ( 7:14-23 )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못하나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모든 식물은 배로 들어갔다가 뒤로 나오는 것이므로 깨끗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속, 곧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인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바른 뜻을 깨우치게 하며 올바로 해석해 주시는 율법의 완성자(마5:17)이심을 알지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함구령 ( 7:36 )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어 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신 다음 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거나 소경을 눈뜨게 하는 등의 이적 행위는 오직 메시야만이 하실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은 곧 그가 메시야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 곧 카이로스가 되기전에 자신이 메시야임이 알려지기를 원치않아 이를 은폐하셨던 것인데, 이를 ‘메시야의 비밀’(Secret of Messiah)이라고 부릅니다.

 

 

출처 : 비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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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수님과 그의 고향 사람들 6:1-6

(1) 그리스도께서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신다(1절). 그 나사렛에는 그의 친척들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적이 있었다(눅 4:29). 그러나 그는 그들을 다시 방문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매우 이상하리만큼 호의적으로 그들의 변화를 기다리고 계셨다.

(2)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2절). 안식일에는 그리스도가 본을 보여주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한다.

(3) 고향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매우 존경스럽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대단히 지혜롭게 말씀하셨고 둘째로 그는 권능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전파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두 가지 큰 증거들을 인정했다. 그 두 가지 증거란 곧 하나님의 권능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혜로 말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행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해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4) 그들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기에 골몰했다(3절). 이 모든 지혜와 이 모든 권능을 하잘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고 말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목수의 아들이라고 비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마가복음에선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고 말하며 더 심한 비난을 했던 것을 나타내고자 한것 같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종의 모습을 취한 분으로서 자기를 낮추셨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게으름을 몰아내고 세상에서 할 일을 찾도록 가르치신다. 젊은 사람들에게 빈둥거리는 습관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 유대인에게는 이에 알맞는 좋은 관례가 있다. 곧 학자가 되고자 하는 유대의 젊은이들은 바울이 장막짓는 일을 한 것처럼 어떤 기술을 익혀 필요할때에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천대를 받는 직공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기의 손으로 노동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격려코자 했다. 그러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보통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했던 또 한 가지는 그의 친척들이 비천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 고향 사람들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형제들과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우리가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알고 있지 아니하냐'고 말했던 것이다(3절). 그러므로 그들이 그의 교훈을 듣고 놀랐다해도(2절) 그의 신분때문에 기분이 상했으며(3절) 이런 이유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런 경멸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알아보자(4-6절).

1) 그리스도께서는 그 경멸을 부분적으로 변명하셨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자기 친척과 자기집)외에서는 존경을 받지않음이 없느니라(4절).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편견을 극복했지만 말씀의 사역자들이 낯선 사람들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것만큼 자기 고향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한 일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친숙했던 일로 말미암아 경멸을 받고 또 그들보다 낮은 신분에 있다가 성공하게 되자 시기심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가축을 개들에게 맡기면서도 자기들의 영혼을 영적 아버지인 인도자들에게 맡기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그들이 그를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선한 일을 베풀어 주셨다. 즉 그리스도는 악하고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하셔서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셨다'(5절).

3)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곳에서 행했던 큰 권능을 자기 고향에서는 행할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들가운데 팽배했던 불신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불신이 전능자의 손을 매어놓은 듯한 이상한 표현이다. 그는 어디서나 행했던 많은 기적을 그곳에서도 행하려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풀려는 영광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를 믿지않고 경멸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흐름을 막고 또 자신들의 문에 빗장을 지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4) 그리스도는 '저희의 믿지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6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백부장(마 8:10)이나 사마리아의 여인과 같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고 놀라신 것외에는 어디서도 놀라신 것을 볼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고향 사람들인 유대인의 불신을 보고 그리스도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모두 촌에 두루다니시며 가르치셨다'(6절). 만일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선을 행할수 없다면 비록 촌에서라도 선을 행할수 있는 곳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구가 많은 도시보다 시골 부락에서 더좋은 환영을 받는 것이다.

 

Ⅱ. 사도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심 6:7-13

1.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는 권세를 열두 사도들에게 위임하심(7-11)

이제까지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어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의 발앞에 앉아 그의 교훈을 들었으며 또 그의 기적을 보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줄수 있는 것을 받아왔고, 가르칠수 있는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열두 제자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지식을 얻기위하여 학원에서만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그들이 현재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성취한 것이 과거에 성취했던 것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해도 그들은 장차 일을 하여 더욱 향상되도록 준비되어야 했다. 이제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그들을 둘씩둘씩 보내셨다. 그런데 마가는 이점에 유의하였다. 그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낯선 곳으로 갔는데 그것은 그들이 낯선 사람들가운데 있게될 때 서로서로 동료가 되도록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마음을 격려해주며 또 서로서로를 돕게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격언으로써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말씀 사역자들에게 서로 연합하며 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라고 가르치신다.

둘째,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7절). 그는 그들이 마귀의 왕국을 공격하도록 위임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세를 주어 마귀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내쫓도록 하셨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그들에게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양식이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8절)고 하셨다. 그러나 그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고 명하셨다(눅 22:36). 그것은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심이 처음보다 감소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음 복음을 전파하러 나갔을 때보다 더험한 때를 만나며 더나쁜 대접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이 지팡이는 싸울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가복음에선 '지팡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때의 지팡이는 여행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그런 지팡이를 말한다. 그들은 신만 신고 가야했는데 이 신은 슬리퍼와 같이 발바닥 밑에만 가죽이 깔려있으며 끈으로 얽어매게 되어있다. 또한 그들은 가능한 한 가장 간편하고 검소한 차림의 옷을 입고 가되 두벌 옷도 가져선 안된다.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지시하여 그들이 어떤 곳으로 가든 그곳을 떠날때까지 그들이 처음 본거지로 삼았던 집에서 계속 유하라고 했다.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10절). 곧 "너희는 심부름꾼으로 왔으므로 충분한 환대를 받도록 하라. 그리고 너는 처음 너를 초대한 집으로 들어가 그집 사람들이 너를 짐으로 생각지 않는다고 믿을 정도로 너희의 친구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다.

다섯째,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매우 준엄한 선고를 내린다. 어는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11절). 애굽의 먼지(출 9:9)처럼 그 먼지는 그들에게 재앙으로 변할 것이며, 그 진노의 날에 그들이 받을 저주는 소돔성의 저주보다 더 참혹할 것이다.

2. 위임받은대로 순종하는 사도들의 행동(12,13)

그들은 스스로 매우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고 또 그의 힘에 의지해서 아브라함처럼 어디로 가야할바를 모르면서도 나아갔다.

(1)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 :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라(12절).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려했다. 복음 전파자들이 꾀하는 위대한 계획과 복음 전파로 성취될 위대한 목적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그들이 새로운 심령과 새 길을 얻도록하는데 있어야 한다. 사도들은 이상한 의견을 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가야한다고 말해 주었다.

(2)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 :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라고 주신 권세는 헛된 것이 아니며 그들도 그 권세를 헛되이 받지않고 잘 활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칠수 있었다'(13절).

 

Ⅲ. 세례 요한의 죽음 6:14-29

1. 우리 주 예수에 관한 사람들의 엉뚱한 생각(15)

그리스도의 고향 사람들은 그의 초라한 친속들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위대한 모습을 전혀 믿을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리가 아닌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믿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이 기다렸던 엘리야라고도 했고, 구약의 선지자 중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했으며, 또 옛선지자 중 하나와 같이 새로 일어난 선지자라고도 했다.

2. 우리 주 예수에 관한 헤롯의 견해(14, 16)

헤롯은 주 예수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분명히 세례 요한이다(14절). 내가 목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16절). 이러므로 그가 더 큰 권세를 가지고와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14절).

(1) 헛된 신앙을 가지면 공상이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난 선지자라고 말했으며 헤롯은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때 죽은 자 가운데서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나 능력을 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하거나 있을수 없는 일로 생각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사실이 아니었을때는 곧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에 관한 그 생각이 사실이 되었음에도 그 생각은 완강히 반박되고 부인되었다. 진리를 기꺼이 믿으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잘못된 생각과 공상에는 가장 잘 빠진다.

(2) 하나님의 뜻에 대적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승리자로 생각할때조차 좌절감을 느끼게될 것이다.

(3) 죄의식은 죄의식 그 자체외에는 죄를 고발하거나 고문하는 어떤 사람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롯왕은 '내가 못베인 요한'이라고 말했으며 그일에 대한 공포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다. 헤롯왕은 요한이 살아있을 동안에도 요한을 두려워했었는데 요한이 죽은 지금 요한을 열 배나 더 두려워했다. 인간은 유령과 귀신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공포로도 시달림을 받을수 있다.

(4) 구원을 얻게하는 회심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강한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공포가 있을 수 있다.

3. 세례 요한을 죽이는 헤롯(17-29)

(1) 헤롯이 얼마동안 세례 요한에 대해 가졌던 높은 평가와 존경심 : 이 기사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20절).

1)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였다(20절). 사람은 선한 사람들, 특히 선한 사역자들을 매우 존경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그들속에 선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여전히 악한 사람일 수 있다. 첫째로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완전히 선한 사람이 되려면 공의와 거룩함이 겸비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대할때엔 거룩함이 겸비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대할때엔 거룩함이 필요하고 인간을 대할때엔 공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헤롯은 요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때문에 요한이 의롭고 거룩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의와 거룩함이 없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통하여 그 사실을 식별할 수 있다. 셋째로 헤롯은 그 때문에 요한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존경했던 것이다.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2) 헤롯은 요한을 주목했다. 다시말해 헤롯은 요한에게서 칭찬할만한 것을 주목했으며 요한에 관한 것들을 들으면서 칭찬할만한 것은 칭찬했다. 그러므로 헤롯은 요한의 언행을 분명하게 주목했던 것이다.

3) 헤롯은 요한의 설교를 들었다. 그것은 매우 겸손한 태도였다.

4) 헤롯은 요한이 설교를 통해 그에게 가르쳐준 많은 것들을 행했다. 헤롯은 말씀을 듣는 자일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나마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계명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않는한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5) 헤롯은 요한의 말을 달게 들었다. 외식자도 말씀을 들을때는 순간적인 기쁨을 느낄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8:13절에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때에 기쁨으로 받으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2) 헤롯에게 그의 허물을 말해주는 세례 요한의 성실성 : 헤롯은 책망하면서 그에게 분명히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않다'(18절)고 말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헤롯이 요한의 가르침대로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떠날수 없었던 헤롯의 죄였다. 그가 왕이라해도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했던것 이상으로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헤롯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위험하며 헤로디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더욱더 위험한 일이었지만 요한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는 주의 일꾼들은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3) 헤로디아가 이일로 요한에게 품었던 악의 :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19절). 요한을 죽일수 없게 되자 헤로디아는 그를 옥에 가두게 했다(17절). 예언을 존중하는 척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직 부담스럽지 않은 것만을 따른다. 그것도 그 예언이 그들의 죄와 전혀 상관이 없을때에만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죄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이,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고 영원히 저주를 받는 것보다 더 낫다.

(4) 요한의 목을 베려는 음모 :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21절). 왕의 생일에는 궁정 무도회가 벌어지게 된다. 생일 잔치를 장엄하게 빛내기 위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공개석상에서 춤을 추고 또 헤롯은 그녀의 춤에 매혹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왕이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 심지어 '내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리라'는 엄청난 약속을 했음이 분명하다. 이 약속은 반드시 맹세로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롯은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가 주리라'(23절)고 말했던 것이다. 어머니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았던 헤로디아의 딸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했다. 그리고 그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가지고 놀수 있는 예쁜 물건처럼 소반에 담아 헤로디아에게 갖다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헤로디아는 시간을 더이상 지체하거나 놓치지않고 세례 요한의 머리를 얻게되었던 것이다. 결국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이 구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앉은 자들이 함께 있을동안 즉시 세례 요한의 목을 베게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다음과 같이 가장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약속을 하지않았다면 그는 온 세상을 내준다해도 그를 처형하게 하지 않았을 것처럼 보였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26절). 그는 후회와 가책도 없이 이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양심은 본래 사람들이 쉽사리 죄를 짓게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자기가 한 맹세의 의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너무 경솔하게 이루어졌으며 또 아무리 약속이라도 그에게 불의한 일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죄로 가득찬 맹세는 뉘우쳐져야 하기때문에 실행되어선 안된다. 만일 헤롯이 헤로디아의 음모를 몰랐다면 그가 이 처형을 서둘러 행한 것은 단지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흥을 돋구려는 목적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그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하는것 때문에 스스로 그들의 노예가 된다. 그래서 왕은 시위병 하나를 집행관으로 보냈다. 포악한 독재자들은 집행관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내린 가장 잔인하고 불의한 명령에 언제든지 복종하도록 한다.

(5) 세례 요한을 처형한뒤 헤롯의 사악한 궁정은 온통 승리감에 도취되었으며, 세례 요한의 머리는 그 여아의 선물이 되어 그녀에 의해 그녀의 어미에게 전해졌다(28절). 그러나 세례 요한을 따르던 경건한 무리들은 온통 비탄에 젖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였다'(29절).

 

Ⅳ.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6:30-44

1. 그리스도께서 파송했던 사도들의 귀환(30)

사도들이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을 설명하려고 예수께 왔다. 그들은 예수께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했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와 관련된 것중 예수께서 하신대로 행하는 것이외의 어떤 것도 행하거나 가르쳐선 안된다.

2. 제자들이 피로를 풀도록 하려는 그리스도의 친절하신 배려(31, 32)

이르시되 너희는 한적한 곳에 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31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막 돌아왔을때 요한의 제자들도 그들의 주인인 요한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왔던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가운데 공포에 질린 사람도 있고 피곤에 지친 사람도 있음을 아시고 적당한 위안을 제공해 주신다. 즉 피곤한 사람들에게는 휴식을 주고 놀란 사람들에게는 피난처를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와서 '잠간 쉬어라'라고 말씀하셨던가!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일하는 종들이라도 항상 주님의 일에 긴장하며 지낼수는 없다. 그들의 몸은 얼마동안의 휴식과 안정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몸을 위해서 계시기때문에 몸의 구조를 고려하시어 몸의 휴식뿐만 아니라 정신의 휴식도 허락하시는 것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을 한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휴식을 취할수 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가 그 제자들에게 베푼 다정한 배려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따로' 불러내신다. 만일 그들이 휴식을 취해야한다면 그들은 따로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쾌적한 시골의 대저택으로 초대하신 것이 아니고 한적한 곳으로 초대하셨다. 배를 말씀전하는 장소로 사용했던 그리스도께서 한적한 광야를 휴식처로 삼으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단지 잠간 쉬도록 부르신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잠깐 숨만 돌리고 다시 일하러 가게하시는 것이다. 넷째로 이와같이 한적한 곳에서 잠간만 쉬어야할 이유는 오고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을 적당한 시간으로 배정하고 그대로 지키면 아무리 많은 일이라도 매우 쉽게 처리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오고가면 작은 일이라도 상당한 노력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사람들이 계속 오고가므로 배를 타고 갔다. 배를 타고 물로 가는 것은 육지로 가는 것보다 힘이 훨씬 덜든다. 그래서 그들은 비밀리에 떠났던 것이다. 매우 공적인 인물들은 가끔 홀로있고 싶어한다.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부지런함(33)

그들은 그들의 부지런함때문에 책망을 받거나 되돌아가라는 명령도 받지않고 오히려 환영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좋은 태도때문에 저질러진 과실은 이 과실이 좋은 애정으로 인해 비롯되었다면 쉽사리 용서받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고을로부터 그리스도를 따르기위하여 그들의 가정과 일터 및 그들의 직업과 일상 업무를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배를 타고 바다로 가셨지만 그들은 도보로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만 매달렸다. 그들은 도보로 달려와 서두른 결과 제자들보다 먼저 갔다. 한적한 곳이라도 그들은 꼭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리스도가 계신곳에는 한적한 광야도 천국으로 변한다.

4.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베푼 환대(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쾌한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 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34절). 이때 그들은 양처럼 잘 순종하고 유순한 것처럼 보였던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목자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마태복음에 기록된대로 그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셨을(마 14:14)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만든 양식(35-44)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청중들을 자기의 손님들로 관대히 맞으시고 그들에게 놀라운 환대를 하셨다. 그러므로 이일은 진정 하나의 기적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1) 제자들은 무리를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소서(35, 36절). 제자들이 이와같이 그리스도에게 제안했으나 무리들이 스스로 떠나려했던 내용은 발견할수 없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리들을 해산하는 것이 무리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좋은 일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갈망하는 마음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좋은 일을 더많이 하며 또 더오래 지속시킨다.

(2)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들 모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절). 우리에게 무례를 범했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들이 먹을 양식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광야로 가지고 온 떡은 그들이 겨우 먹을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것조차 무리들과 나누어 먹게 하시고자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환대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한 영적인 양식때문에 그를 따랐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양식도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셨다. 의무를 지키며 나가는 길은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길인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길이기도 하다.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신뢰를 받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께 성실한 어떤 종의 기대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시절을 좇아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 많은 종들을 새롭게 하셨다.

(3)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행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 명령을 거절했다. 제자들은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시도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해놓은 계획때문에 그리스도의 큰 목적을 어지럽게 해놓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줄 그의 양식을 그들이 더 귀중하게 여기도록 그들의 어리석음을 미리 알게하려 하셨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무리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으며 그것이 그들의 식단이었다. 이것 가지고는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먹기에도 부족했지만 그들은 이것조차 나누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의 식탁에 초대받는 것을 보지만 이 본문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직접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저녁을 먹이시는 장면이다.

첫째, 그들이 나눈 음식은 평범한 것이었다. 진수성찬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얻는다면 산해진미를 먹지 않는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하신 약속은 그가 그들을 먹이리라는 것이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그 손님들은 질서정연하였다. 그것은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하시니'(39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았기'(40절)때문이며 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셋째, 음식에는 축복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시키지않고 홀로 축사를 하셨다(41절). 그리고 이 축사의 효력으로 떡이 이상하리만큼 불어났으며 물고기도 마찬가지로 불어났다. 그래서 그들의 수효가 오천 명이 이르렀으나 그들이 다 배불리 먹었던 것이다(42-44절). 그리스도는 위대한 치유자로서 오셨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먹이시는 위대한 양육자가 되기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는 그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만한 충분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빈 손으로 보내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충만하게 채워질 것이다.

넷째, 제자들은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에 신경을 써서 그것들로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떡이 충분하도록 명령했지만 그는 이일로 우리에게 낭비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Ⅴ.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 6:45-56

1. 무리를 해산시키심 (4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다'. 사람들은 흩어지기를 싫어했다. 이제 그들은 훌륭한 저녁 식사를 했기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는데 서두르지 않았다.

2. 그리스도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심(46, 47)

그리스도는 기도하셨다. 그는 기도를 중시하셨으며 자주 기도하셨고 또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도록 격려하시기위하여 홀로 기도하셨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그가 하나님과 홀로있을 때외에는 홀로있을 기회가 없다.

3. 바다에서 곤경에 빠진 제자들(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저었다'(48절).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의 제자들을 해외로 파견하실때 그 제자들이 당하게될 고난의 본보기였다. 교회는 종종 사나운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와 같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섬기지만 우리에게 해가 되는 바람과 조수를 만날수도 있다. 그러나 폭풍을 만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들을 중재하시는 그들의 주인이 거룩한 산에 계시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4.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49-52)

주님은 가능한 한 가장 애정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제자들을 도우시려고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그들을 찾아오셨다.

(1) 그리스도는 '밤 사경 즈음에' 즉 새벽 세 시가 지나서야 오셨다. 자기 백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방문이 더오래 지연되더라도 그는 결국 오실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걸어서 오셨다. 바다는 지금 거센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그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어떠한 어려움도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나타내는 은혜를 방해할 수는 없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가장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헤쳐나가려 하실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셨다'(48절).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지나치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나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가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4) 그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놀라서 그를 유령으로 생각했다.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50절).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의 환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환영을 보고 당황하거나 놀라는 경우가 있다.

(5)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제자들에게 알려서 그들을 격려했으며 또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할 때까지 그분을 알 수 없다. 여기서 내니라고 한 말은 나는 너희의 주인이며 너희의 친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안에 계시며 또 우리와 가까운 곳에 계시다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폭풍속에서도 안심하고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계시다면 비록 구름과 흑암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해도 우리는 족히 안심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그들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처럼 그의 음성을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강제로 체포하려고 온 사람들에게 '내로라'라고 말하셨을때 그들은 그말을 듣고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요 18:6). 그러나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자기를 좇으려오는 사람들에게 내로라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힘을 얻어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6) 그리스도께서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셨다'(51절). 제자들은 그 주인과 함께있어야 편안하다. 그가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자마자 바람이 그쳤다. 바람은 갑자기 그쳤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는 것을 듣지는 못했지만 이와같이 바람이 멈추었다면 우리는 그 고요함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게된다. 다시말해 그 고요함은 바로 그리스도가 배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7) 그들은 이제껏 그들에게 일보다 이 기적을 보고 더욱 심히 놀랐다. 그래서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왜 제자들은 모두 이 일에 놀라게 됐을까? 그것은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시던 일에 대해 그 합당한 가치를 부여했다면 그들은 이 일을 보고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떡을 불렸던 사건이 그가 물 위로 걸어온 것만큼이나 큰 권능을 드러내신 사례였기 때문이다. 마치 전에 일어난 일과 전혀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현재의 사역에만 우리가 도취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전에 행하신 사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5. 그리스도 일행을 매우 환영하는 게네사렛 사람들(53-56)

그 게네사렛 땅의 사람들이 곧 예수를 알고(53절) 또한 그가 가는 곳마다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행했는지 알았다. 또한 그들은 그가 한 장소에서 잠시 동안만 머물렀던 것을 알았기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왔다.' 병고침을 받으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냉대받을 염려가 없었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마다 수많은 병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지나가는 길에다 병자를 놓아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보다는 단지 병고침을 받으려는데 애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말씀의 사역자들이 사람들의 육체적인 병을 고칠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영적인 병보다도 육신의 병에 얼마나 더많은 관심을 지녔는지를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 해설

예수의 전도 여행 ( 6 )

본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 중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시지만 고향 사람들에 의해서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여 복음전도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기록되었습니다.

 

1. 예수와 제자들의 복음 사역

1)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시는 예수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은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고지대의 아래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주님께서 유년 시절부터 공생애 시작전까지 생활하신 곳입니다. 또한 이곳에는 주님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날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옛날 직업을 들추어내며 그 가정의 내력과 환경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않고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할수 없으셨습니다.

a.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눅2:3-4)

b.나사렛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을 가르치심(마13:54)

2) 열두 제자들의 전도 사역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모든 촌에 두루다니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훈련시키신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그들에게 전도인들이 갖추어야할 자세와 전도 여행시의 지침을 일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전도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성경은 회개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부릅니다(참조, 고후7:10).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으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a.열두 사도(막3:14-15)

b.두 사람이 수고하면 좋은 상을 얻을수 있음(전4:9)

3) 두려워하는 헤롯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과 제자들을 통한 복음전도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예수의 이름이 각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소문은 헤롯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헤롯은 헤롯 대제와 그의 부인 말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를 지배한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헤롯이 들은 시기는 그가 세례 요한을 살해한 직후였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자신이 목베었던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여 더욱 두려워하였습니다.

a.의인 세례 요한을 두려워함(막6:20)

b.요한의 목을 벤 죄책감 때문에 두려워함(막6:16)

 

2.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심

1) 주님 곁에 몰려드는 군중

제자들은 자기들이 경험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놀라운 일들을 아뢰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한적한 곳으로 가는 것을 본 무리들이 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곳마다 몰려오는 무리들로 인하여 제대로 쉴 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은 그들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같이 보셨습니다.

a.진리를 찾아 헤매는 무리(막6:34)

b.참 가르침을 갈망하므로(마5:1)

2) 무리들을 가르치시는 예수

예수님을 보기위해 광야에 나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으며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 자신안에서 나오는 권세있는 메시지였습니다.

a.빈 들(마14:15)

b.온 천하에 다니며 전도해야 함(막16:15)

3) 무리들이 배불리 먹음

이윽고 때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냥 보낼수 없는 무리들을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말에 떼를 지어 사람들을 앉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의 양이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a.인간들에게는 굶주림이 있음(막8:1-2)

b.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심(창1:29)

 

3.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

1) 예수께서 기도하러 가심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흥분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이런 군중의 동향에 동조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교권이나 헤롯왕의 박해와 무분별한 군중의 환영을 피하셔서 홀로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목적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기도에 힘쓰신 것처럼 성도들도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a.참된 통치자가 없는 백성들이므로(왕상22:17).

b.자기 이익만 도모함(사25:11)

2)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심

산에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께서는 늦은 저녁에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셨습니다. 배 젓는데 따른 제자들의 고통을 보신 주님은 그들을 구하러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신 때는 밤 사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그것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두려워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움대신 평안을 주셨습니다.

a.바다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시107:24)

b.그리스도의 이적은 놀라운 것(마12:23)

3) 게네사렛 사람들

예수님께서 타신 배는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습니다. 주님께서 게네사렛에 오셨다는 소문은 신속히 퍼졌습니다. 그것은 그곳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그 소식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그 계신 곳으로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나오는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이 닿아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그들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a.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곳(눅5:1)

b.예수에 대한 소문(마4:24)

 

결론

고향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건을 우리는 본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와같은 일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나태하고 해이해진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새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6:1-13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심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핍박당하심으로써 마침내 대속사역을 성취하실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므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셨다.

헤로디아(6:17)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그녀는 안티파스나 빌립 1세의 조카였음에도 빌립 1세와 결혼해 살로메를 낳았다. 빌립의 집을 방문했다가 헤로디아를 만난 안티파스는 그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고, 서로 결혼하기 위해 본처와 남편과 이혼했다. 이때 세례 요한이 그들의 부정을 정죄하자 앙심 품은 그녀는 그를 죽일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살로메를 앞세워 목적을 달성했다(19-28절).

벳새다(6:45)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신 곳이 갈릴리 바다 북동쪽의 ‘벳새다’ 부근 들판이었다(눅 9:10-17). 이곳은 일명 ‘벳새다 율리아스’로 불린것 같으며, 그 완악성으로 인해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건너편 벳새다는 어디인가? 역사가 요세푸스는 요단강 서편의 가버나움 부근에도 ‘벳새다’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빌립과 안드레, 베드로가 이곳 출신이었을 것이다(요 1:44).

 

# 묵상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 6:4 )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요4:44). 구약의 선지자인 예레미야 역시 그의 고향 아나돗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렘11:18-23).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라고 말하며 멸시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부정하게 취급하며 예수님의 출생을 문제삼아 복음을 믿지않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에서는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제자의 파송 ( 6:7-13 )

파송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면하시기를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 전대의 돈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신만 신고 두벌 옷도 가지지 말며,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유하며, 만약 그들을 영접치 않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나갈때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파송은 갈릴리 사역 중에 행해진 일이며 이 일로 인해서 복음이 확장되었을뿐 아니라 제자들의 현장 실습이 효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 6:17-29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했으나 헤롯은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고, 또 의로운 말을 했기때문에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계략에 넘어가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후에도 마음이 편치 못해 전전긍긍하여 예수님의 출현을 세례 요한의 부활로 오해하기까지 했습니다. 본서 기자인 마가가 이 사건을 소상히 기록한 것은 세례 요한의 순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전조가 됨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 6:30-44 )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명이 먹었으며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 세상의 왕은 아니십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천국복음이 가져다 주는 풍성한 복을 상징하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 배불리 먹고’라는 구절의 의미 ( 6:42 )

이 말은 이적의 목적이 단순히 육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있지않음을 가르쳐주며, 수고와 노력의 참 의의를 망각하고 나태해지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경고해 줍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되 세상의 욕정까지 채워주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 6:54-56 )

예수님은 복음전파외에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병자, 여기서는 죄인을 고치는 의사로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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