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그리스도인의 공동 의무 (3:1-8절)

바울은 디도에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의무에 관해 지시했었다. 이제 그는 디도에게 그들의 공동 의무에 관해 지시할 것을 명한다. 사역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기억나게 해 주는 사람들이다. 의무를 망각하게 되면 대개 유혹에 넘어지기가 쉽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해 일깨워 주며 기억나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1. 성도들의 의무(1,2절)

 1)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1절), 여기서 '권세 잡은 자들'이란 곧 사회의 모든 지배자들을 말한다. 성도들은 합법적이며 정당한 것 안에서 그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한다. 기독교는 마치 왕들과 세상 권력자들의 권리에 편견을 가지고 선동과 파당을 일으켜 합법적인 권세에 대항하는 것처럼 대적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져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다스리는 정부에 대해 마땅히 복종하고 순종함으로 스스로 본을 보여야 할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2)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든 우리 자신들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우리 이웃에 관한 것이든 상관 없이, 어떤 기회건, 어떤 종류의 선이건 주어지는 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선한 일 없이 단지 해롭지 않다거나 혹은 선한 말, 선한 의도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선을 행할 기회를 얻으려 하지만 말고 찾으라. 이것을 온 마음에 지녀라."

 3)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2절), 만일 유익한 말을 한 마디도 할 수 없거든 불필요하게 악담하느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는 데서 즐거움을 취하려 한다든가 어떤 일을 악화시켜서는 안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좋은 결과를 낳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불쾌한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악은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는 것인만큼 큰 해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할 죄이다. 그 이유는 이 죄에 한번 빠져들게 되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나 하늘에서의 복된 공동체에 합당치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이것을 멀리할 것을 기억하게 하라."

 4) 다투지 말며(2절), 이는 손으로든 말로든 "싸우지 말며"라는 뜻이다. 다툼과 분쟁은 인간의 정욕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그것에 빠져서는 안되며 마땅히 억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이것에 대해서도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5) 관용하며(2절), 이는 곧 "온순하고 공정하며 올바르고"라는 의미이다. 즉 나쁜 의미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또한 때때로 화평을 위해서 다소 엄격한 의를 누그러뜨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6)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2절). 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온유함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말과 행위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범사에 온유함을'이라는 말은 모든 기회,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단지 벗들을 향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온유한 마음과 태도는 온화한 신앙을 가져다 준다. 온유함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상급이 되는 것이다.


2. 성도들이 의무를 행하여야 할 이유(3-8절)

 1) 성도들의 이전 상태 : '우리도 전에는'으로 시작하는 3절 이하의 말씀이 그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1) 어리석은 자요, 이는 참된 영적 이해가 없는 것, 하늘나라의 일에 대해 무지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많은 어리석음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들을 최대한으로 용납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순종치 아니한 자요, 이는 완고하고 굽힐 줄 모르며 말씀을 거역하는 자라는 말이다. 어리석음과 불순종은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연적인 것이든 계시된 것이든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3) 속은 자요, 이는 곧 방황하는 자를 뜻하는 것으로 진리와 거룩함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인간은 본성을 잃어버린 자이다. 인간은 약하다. 따라서 사탄의 궤계에 의해서 넘어지기 쉽다. 사단은 인간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항시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

   (4)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락을 즐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예속이나 노예 상태의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것이 죄의 종들의 비참한 상황이다. 하나의 정욕은 그들을 한 길로 몰아 그렇게 한다. 그들을 유혹하는 정욕은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나 그 유혹에 복종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타락의 종들이 되고 만다.  

   (5) 악독으로 지낸 자요, 악독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려 하는 자이며 또 그것을 기뻐하는 자이다. 그렇게 시기와 불평하는 것에서부터 빈정댐이 나오며 많은 악이 그곳에서부터 생겨나게 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자연 상태 가운데서 살았을 때 지었던 죄들이라고 하겠다.

   (6) 가증스러운 자요.

   (7) 피차 미워한 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성도들의 의무요 행복이듯이 피차 미워하는 것은 죄인들의 불행인 것이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불행의 때가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그러한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해 보다 온유하고 부드럽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2) 성도들의 현재 상태 : "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나 공로로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한다." 바울은 다시 우리를 구원케 해주는 것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4-7절).

   (1) 우리 구원의 원 주재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만물이 새 창조 가운데 속하게 되고 타락했던 인간이 생명과 행복을 회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시작하시고 아들이 경영하시며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신다.

   (2) 구원의 동기와 발생 : 거룩한 박애, 즉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그것이다.(4절).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이것이 이유이자 동기이다. 원인은 인간 안에, 즉 인간의 불행과 비참 안에 있다. 그러한 불행을 가져오는 죄는 동정보다는 오히려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멸하시기보다는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셨다. 그는 자비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3) 구원의 방법 :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 은혜가 복음 안에서 비쳐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타내실 때에,' 사랑과 은혜의 나타나심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큰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4) 잘못된 동기의 제거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5절), 의로운 행위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꼭 있어야 하나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행위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긴 하나, 공로에 따라서 천국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과 모든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사이며 그의 사역이다. 시작하는 것도, 점차 이뤄가는 것도, 그리고 영광 중에 그 일들을 완성시키는 것도 모두 그로부터 있게 되는 것이다.

   (5) 형식상의 구원 근거 : 본문에 나타난 대로 중생 혹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은혜와 거룩함이라고 하는 새로운 원리가 퍼져나가 행해지자,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새로운 사고, 새로운 소망, 새로운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그시작한 것은 때가 되면 확실히 완성될 것이므로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되었다. 우리는 먼저 지금 중생함으로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한 근거 위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완전히 구원받게 될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할 것은 질이 아니라 정도일 것이다. 은혜는 영광이 시작되기만 해도 그것이 은혜인 반면에 영광은 은혜가 그 온전함에 이를 때에야 영광이다.

   (6) 세계라고 하는 외적인 상징과 표적 : 중생의 씻음, 중생 자체는 내적이며 영적이나 그것은 세례라고 하는 성례식에 의해서 외적으로 표시되고 증거된다. 세례는 상징적이며 예표적으로 구원하는 것이며, 구원을 증거하는 곳에 합당하게 사용 되어진다. 이 외적 표적과 증거를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이며 또한 외적 씻음으로 다 된 것인 양 여기지 말라. 세례 안에서 증거된 언약은 유익과 특권들을 줄 뿐만 아니라 의무들을 부여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의무들이 전혀 염두에 없다면 유익이나 특권들을 기대하는 것 역시 무익한 것이다.

   (7) 성령의 새롭게 하심, 이는 가장 주요하게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원의 섭리에 있어서 적용하시고 이루시는 일은 특별히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난 것이며 성령에 의해서 소생함을 받고 성화되며, 또한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힘을 얻으며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그를 구하고 그의 거룩한 행동을 제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그를 바라고 행하면 그도 우리를 주장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사역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고 반대하고 거역한다면 그는 그역사들을 거두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을 근심케 한다면 그는 우리를 완전히 떠나실 것이다.

   (8)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방식 : 인색하게 주시거나 모자라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풍성하게 주신다.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6절), 율법 아래 있을 때보다 복음 아래 있을 때 성령의 더 큰 은사를 부어 주신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성령을 소유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이후에는 보다 더 큰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 그때에 조명, 외적 부르심, 고백, 그리고 일반적인 믿음 등의 공통적인 은사와 또한 믿음, 소망, 사랑 등의 공통적인 은사가 아주 풍성히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은사들에게 참예할 수 있어야 하겠다. 성령이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졌다 할지라도 그대로 흘려 보내고 메마른 채로 남아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복음 아래서 은혜와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한마디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인색하지 않으시다.

   (9) 모든 것을 가져오게 하시는 분 : 즉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6절), 모든 것은 그를 통해서 즉 구주가 되신 그를 통해서 온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를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입었는가? 우리는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안에서 더욱 더 성장하며 진보해야 할 것이다.

   (10) 우리가 이상과 같은 새로운 영적 상태를 얻게 된 이유, 즉 의롭게 됨과 후사와 영생의 소망에 대하여 :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7절). 의롭다 하심은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사면이며 또한 믿음에 의해서 얻게 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의로운 자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나 그리스도의 희생과 의의 중재로 말미암아 믿음에  의해 붙잡은 바 된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동기와 발상은 은혜에 의한 것이며, 그 구속의 적용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본래의 의로움과 순종이라고 하는 행위 안에서 그것의 열매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에 대한 열매가 되며, 우리의 관심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증거가 되고, 또한 삶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의 출발이 되며 부분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져오게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그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그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우리가 영생의 후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영생은 약속 안에서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영생을 믿게 하시며 영생의 소망을 가져와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의 후사가 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영생을 가까이 가져다주며 영생에 대해 확고한 기대를 할 수 있게 해 줌으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해준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신자가 위대한 후사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로 너무나 많은 유익을 경험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시대에 그들이 우리와 같이 같은 은혜의 참예자가 되기를 우리가 바라기 때문이다.


3. 선한 일의 필요성(8절)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고는 곧바로 선한 일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의 유익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8절). 그것은 반드시 실행할 수 있는 믿음이어야만 한다. 성도들은 단지 때때로가 아니라 항상 선한 일을 힘쓰도록 애써야 한다.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란 말을 다음에 살펴 보게 되는 무익한 문제들이 아닌 '이 선한 일들' 혹은 '이것의 가르침'으로 말하기도 한다.

 

Ⅱ. 디도에게 주는 여러 지시와 문안 (3:9-15절)

가르치는 데 있어서 디도가 피해야 했던 것과 이단에 대한 처리 문제 및 그 외의 몇 가지 지시에 대하여.


1. 가르치는데 있어서 피해야 할 것을 말함(9절)

무익하고 어리석은 변론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또한 족보 이야기도 그러하다. 어떤 경우들에 있어서 특별히 메시야되신 그리스도의 혈통에 대해서 성경의 성취를 찾아보는 등의 합당하고도 유익한 변론은 마땅히 있게 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오랜 혈통을 자랑하면서 단지 영화만을 족한 것으로 여기고 허영심을 만족케 하는 모든 것을 디도는 어리석고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잘 대처해야 했다.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당시 모세의 의식과 절기를 주장하며 교회 안에서 그것들을 계속 지키려고 했던 자들이 있었다. 디도는 이런 자들을 지지해서는 안되었으며 그들을 피하고 반대해야 했다.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 말은 율법에 대해 다투는 것들뿐 아니라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들은 가르침으로 경건을 세우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며 오히려 경건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사역자들은 선하고 유익한 것을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그 반대되는 것을 또한 피하고 배격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성도들로 하여금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른 교훈을 사랑하며 받아 들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2. 이단자를 처리하는 방법(10,11절)

교회 안에 이설들과 이단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울은 계속해서 디도에게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지시하고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10절). 곧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하라. 그래서 만일 그가 돌아서게 되면 다시 그를 형제로 여겨라. 그러나 만일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를 무리에서부터 내쫓아라"라는 말씀이다. 훈계에 의해 돌이키지 않은 채 자기들의 죄와 허물 가운데 완고한 자들은 부패하여져 스스로 정죄한 자들이다. 진짜 이단은 참으로 악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것은 부패한 것이며 그릇된 것으로 이는 너무 황폐해져서, 다시 수리하고 세우기가 불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든 건물에 비유한 것이다. 진짜 이단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돌이키는 일이란 매우 드물다. 경우에 따라서는 판단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의지의 완고함 때문에 그러하다. 가장 중대한 과실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고통과 인내가 따를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훈계받아야 하고 교훈받아야 하며 권면을 받아야 한다. 계속되는 부패에 대해서 교회는 그런 부패한 자를 엄하게 다스림으로 교회 자체의 순수성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그러한 징계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범죄한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효력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3. 바울의 계속되는 지시 (12,13절)

 1) 디도는 아데마나 두기고가 그의 직무를 대신하러 그레데로 오자마자 곧바로 니고볼리로 바울을 만나러 가야 했다. 우리는 '아데마'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며 두기고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바울은 두기고를 가리켜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충심으로 섬기는 일에 적합한 자였다.

 2) 디도에게 보내는 또다른 개인적인 권고는 바울이 함께 전도 여행 중에 있는 친구 둘을 보내겠으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그들이 아무 것도 궁핍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세나는 교법사로 지칭되고 있다. 아볼로는 신실하고도 뛰어난 사역자였다. 그들에게 해야 할 일들을 맡기고 그들의 사역과 여행길을 돌보아 주는 일은 신앙에 합당하면서도 필요한 봉사였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열매 없는 자가 되기 않게 하기 위하여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자(14절). 기독교는 열매 없이 고백만 하는 종교가 아니다. 단지 해를 끼치지 않는다거나 악을 피하는 것으로서는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하며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학자들은 14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 사람들로 정직한 수고와 사역을 행하기를 힘쓰게 하여 그들 자신들과 그 자족들을 예비케 하라. 이는 그들로 세상에서 무익한 짐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그들에게 안이한 교훈을 주는 것으로 생각지 말게 하라.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14절). 아는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 기대는 삶이 아닌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열매 맺는 것을 배우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4. 문안과 강복으로 글을 맺음(15절)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와 더불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늘 마음을 두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 것이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15절:한글 개역 성경에는 '아멘'이 없음-역주). 이것이 바울의 바램이며 또한 기도였다. 은혜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바라고 구해야 할 중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선한 모든 것이다. '아멘'은 기도를 끝맺는 말로써, 그렇게 되어졌으면 혹은 그렇게 되어지리라는 바램과 소망을 나타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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