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남편들과 아내들의 의무 3:1-7
(1)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기혼 여성들이 그들의 그리스도교의 개종을, 자신들의 이교도 남편들이나 혹은 유대인 남편들로부터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여러 가르침을 말한다.
1) 아내들의 의무.
① 순복하라. 이러한 공손한 행위는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거나 아내들의 본이 되는 행실을 보는 것외에는 달리 말씀의 진리된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불신 남편들을 설복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즐거이 하는 '순복' 그리고 애정있고 공손한 존경은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자기들의 남편에 대해서, 그들이 선하건 악하건 관계 없이 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사람들을 설복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 외에 선한 행실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② '두려워하라' 혹은 존경하라.
③ 정결한 행위로써 하라. 악한 자들은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의 행위를 엄격하게 지켜보는 자들이다. '정결한 행위'는 그들로 복음을 믿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④ 몸을 치장하기보다는 마음을 더 치장하도록 하라(3절). 여기서는 세 가지의 치장이 금해지고 있다. '머리의 꾸밈'을 금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에 대개 음탕한 여자들이 행하던 것이다. '금을 차는 것'을 금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는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우아한 옷에 대해서 금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그들의 모든 외적인 처신이 자신들의 신앙과 조화를 이루도록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 몸의 외부를 치장하는 것은 종종 매우 지나치게 성적일 수가 있다. 창녀의 옷차림이 결코 정결한 그리스도인 여성에게 어울릴 수는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에게 더욱 훌륭하고 아름다운 치장을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4절).
첫째, 치장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음에 숨은 사람. 즉 이는 "너희의 몸보다 너희의 영혼을 치장하고 아름답게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둘째, 치장품에 대해서 지시하고 있다. 그것들은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이어야 한다. 몸의 치장품은 사용하는 가운데 닳아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더 오래 지닐수 있는 것으로 몸의 치장품보다는 더욱 뛰어나고 훌륭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가장 훌륭한 치장품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인 것이다. 거칠고 신앙에 반대하는 남편에 대해서 아내의 신중하고 온유한 처신만큼 그를 설복시키기에 적절한 방법은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그자의 심령을 바르게 명하고 지시하는 데 있다. 외식자의 행위가 그쳐질 때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시작되어진다. 내적 인간의 차질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주된 치장품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침착하고 고요하고 안정한 심령은 남자나 여자에게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가져다 준다.
2) 베드로는 실례를 들어서 자신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① 하나님을 믿었던 옛날의 거룩한 부녀들을 실례로 말하고 있다(5절). "너희에게 주어진 의무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전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했던 부녀들이 행했던 것들이다."
②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랐던 사람들로부터 실례를 들고 있다. 6절은 만일 너희가 믿음과 선행에 있어 그녀를 본받는다면 '너희는 그의 딸이 된 것이다'라는 말이다. 아내들이 남편들에 대해서 순복한 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 거룩한 부녀들이 행해온 의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 대해서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되 두려움이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듯이 행해야 한다.
(2)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말한다.
1) 특별한 것으로 '동거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의무를 아는 현명하고 건실한 남자들답게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씀이다(7절). 또한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하였다. 즉 아내에게 합당한 존중과 신뢰를 베풀고 그를 믿는 것을 말한다.
2) 그 이유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아내는 남편과 동등하다. 그들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피차 화합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서로를 위한 그들의 기도는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
Ⅱ. 고난 가운데서 단합하고 인내할 것과 선으로 악을 대할 것을 권고함 3:8-15
(1)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있어서와 실제적인 애정,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있어서 모두가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마음이 될 수는 없다할지라도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형제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곤궁 가운데 있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그리고 모든 자에게 예의 바르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2)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원수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친다.
1) "그들이 너희를 욕할 때 너희는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이 너희에게 악한 말을 할 때 너희는 그들에게 좋은 말을 하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너희를 부르셨기 때문이며, 또한 너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우리에게 욕하는 대신 축복할 것을 명하고 있다(마 5:44). 우리는 우리를 향해서 욕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위해서 기도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그에게 영광스러운 특권일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어려운 의무를 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이 다툼 많고 온전치 못한 세상에서 위로가 될만한 행복된 삶을 위한 뛰어난 훈계(10절) : 그 내용은 시편 34:12-14절의 말씀이 인용된 것이다. 현세적인 이익을 신앙의 동기나 격려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다.
*신앙 생활의 실행 : 특별히 혀를 바르게 통제하는 것은 인생을 안락하고 번영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신실하고 악의 없고 신중한 혀는 이 세상을 평화롭고 안전하게 지내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평화가 주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이 거부되어질 때에라도 그것을 구하고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악의 없고 인내심 있는 행위가 원수들의 잔인함을 초래케 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12절).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주님은 사악한 핍박자들에게 사람들보다 더 강한 대적자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의로운 백성들을 향해 특별한 관심과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계신다.
4) 이러한 끈기 있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처신이 더욱 권고되고 있다. 이것은 고난을 막는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13절). "대체로 너희처럼 결백하고 유익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해하는 아주 극악무도하고 사악한 자들이란 그리많지 않다." 그러나 만일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 그것은 너희의 영광과 복이 될 것이라고 했다(14절). 즉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이 너희를 치기 위해서 하려고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공포심을 가지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너희 원수들의 격노나 힘에 대해서 크게 염려할 것도, 신경쓸 것도 없다"라는 의미이다. 항상 선을 따르는 것은 해로운 길로 들어서지 않는 최상의 진로이다. 의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예이자 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들의 위협이나 격노를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도리어 사람들에 대해 두려워 하는 대신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됨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15절). "이 원리가 너희 마음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을 때 다음으로 사람들에 대해 할 일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은 온 세상에 대해서 방어하는 무기가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의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독교를 위해 예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어리석음이나 환상에 의해서 행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의 믿음의 이러한 고백들은 '온유와 두려움으로' 행해질 수 있어야 한다.
Ⅲ. 선한 양심과 선으로 인한 고난 3:16,17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은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이 아니고서는 결코 확고하게 지지될 수 없다. 양심이란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보존되어질 때 선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행'이란 곧 거룩한 삶이다. "너희 양심과 선행을 잘 살피라. 그러면 사람들이 거짓으로 너희를 악행자라고 비방할지라도 너희는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낙담하지 말라. 왜냐하면 비록 너희가 너희 원수들로 인해서 어려운 가운데 처해있다 할지라도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악한 자들의 모략과 비방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도 역시 그처럼 취급당했다. 거짓된 비난은 대개 그 비방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선을 행하는 것이 때때로 선한 사람을 고난가운데 처하게 하듯 악을 행하는 것 역시 악한 자를 고난가운데 떨어뜨릴 것이다. 만일 선한 사람들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그렇게 가혹하다면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Ⅳ. 그리스도를 본으로 말함 3:18-20
(1)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이 인내에 대한 논증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이생의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이유는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18절). 우리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경우에 있어서 의인이신 그가 불의한 자들을 위해서 고난 당하셨던 것이다. 죄를 알지 못하시는 이가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신 공로와 완전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율법적인 희생 제물은 단 한번 드려졌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완전히 없이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복된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는 그의 인성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영으로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것을 각오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가 완전하게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셨다면 철저하게 죄인된 우리가 어찌 고난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가 단번에 고난 당하시고 영광에 들어가셨다면 우리가 어찌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으로부터 옛 시대의 본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제 긍휼의 제물을 맞이하였다. 즉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은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1) 전파자 : 그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19절).
2) 듣는 자들 : 베드로는 그때의 그들을 적절하게 옥에 있는 영들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실 때에 실제로 옥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이 사람들의 죄 : 그들은 불순종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과 오래 고통하심으로부터 더욱 중하게 되었다.
4) 사건의 결과 : 그들의 육체는 멸하여졌다. 그러나 순종하고 믿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서 구원을 얻었다. 비록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기다리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침내 끝나게 될 것이다. 즉 헛되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항상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가장 좋은 길이거나 가장 현명한 길, 혹은 가장 안전한 길은 아니다. 여기서는 방주 안에 있는 여덟 명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Ⅴ. 세례와 그리스도의 권세 3:21,22
노아가 물 위에 있는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세례에 의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 받을 것을 예시해 주는 것이다.
(1) 베드로는 구원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물로써 씻어내는 외적 의식이 아니다. 세례는 그 안에 확고한 선한 양심의 신실한 대답이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의 효력은 공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존한 것이다. 바르게 받아들인 세례 의식은 구원의 수단이자 약속이 된다.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21절). 합당한 선한 양심과 선행 없이 세례에 외적으로 참예하는 것은 아무도 구원해 주지 못한다.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 있어야만 한다.
(3)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것에 대해서 나아간다(22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깊은 낮아지심 뒤에 그와 같이 영화롭게 되셨다면 성도들은 고난으로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 잠시의 고난 뒤에 올 놀라운 기쁨과 영광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께 순복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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