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유대교화 하려는 유혹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 3:1-3

 

빌립보 교회가 비록 신실하고 번창해가는 교회였다 할지라도 유대교화 하려는 교사들에 의해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행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1절). 우리가 신앙으로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 신앙을 고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될수록 더욱더 우리는 주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달가운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주를 멀리하게 될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2)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거짓교사들을 조심할 것을 경계시킨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1,2절). 사역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친 것이 성도들에게 안전하고 유익된 것이라면 조금도 수고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때때로 똑같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항상 어떤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은 방종한 호기심이라고 하겠다. '개들을 삼가고'를 생각해 보자. '개들'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고백하는 자들에게 대해 악의를 가지며 그들을 향해 짖어대고 그들을 물어뜯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는 반대되는 선행을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할례받은 것으로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손할례당"이라 부른다.

(3)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3절).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육체 의식과는 반대로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기독교는 신앙적인 예배의 모든 의무에 있어서 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믿음의 사역에 있어서는 마음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이제 본체가 왔으므로 그림자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해야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의식과 외적인 행위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 즉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의 자랑 뿐 아니라 우리의 신뢰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근거된 것이다.


Ⅱ.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함 3:4-8

 

바울 사도는 여기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자의 본으로써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하고 있다.

(1)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으로서 자랑할만한 자이었음을 보여준다(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도 더욱 그러하리니(4절). 바울은 어떤 유대인보다도 자랑할 것을 많이 가진 자였다. 다음 몇 가지를 들어보자.

  1) 그의 타고난 특권 : 그는 개종자가 아니었으며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5절의 '이스라엘 족속이요'가 이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 즉 부모 대대로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그의 조상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이 없었다.

  2) 그는 그의 언약과의 관계로서도 자랑할 수가 있었다. 즉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것'이다.

  3) 그는 학식으로 자랑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아들'이었다(행 23:6).

  4) 그는 흠 없는 생활을 한 자였다. 6절의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가 이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율법에 써있는 대로의 외적인 준수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결코 율법을 어긴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도 비난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5)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가 이를 보여준다. 그는 비록 자신이 알지 못하고 열성을 내었던 것이었다 할지라도 매우 진지한 가운데서 행했던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의를 세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7절). 이것은 "만일 그것들에 집착하게 됨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잃게 된다면 나는 내 자신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손실자로 여겼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어떤 것을 떠나라고 빌립보 성도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이 떠나게 된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절).

  1) 바울은 후에 그가 무엇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서 곧 경험을 그리스도를 주로 알고 믿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 지식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었다. 그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는 자연에 관한 모든 지식과 진보된 인간의 모든 지혜를 능가하는 풍성하고도 탁월한 고상함이 있다.

  2) 바울은 그가 어떻게 유대인과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특권들을 포기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라는 그의 표현은 신성한 승리와 고상함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기서 '무엇이든지 다'란 그가 앞서 말한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문이 있을수도 있겠다. 즉 "그가 과연 계속해서 같은 마음을 지속했겠느냐"라는 질문이다. 이는 바울은 현재 시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는 8절의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라는 말씀이 보여주듯이 항상 그와 같이 행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된 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겪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특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겼을 뿐 아니라 배설물, 즉 개들에게 던져 주는 찌꺼기로 여겼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보다 덜 가치있는 정도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와 비교 되어질때 바울에게 있어 가장 경멸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Ⅲ. 바울 자신의 선택의 문제를 서술함 3:9-16

 

바울이 붙잡은 것은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였다.

1. 그리스도를 붙잡음(9,10)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두었다.

  (1)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다. 마치 상을 얻으려는 경주자처럼, 항구에 당도하려는 항해사처럼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자 했다.

  (2) 그는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했다(9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가 없으면 망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위해 마련된 의가 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는 곧 "나의 외적 율법 준수와 선행이 나의 죄악들을 속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율법적인 의가 아니라 복음적인 의미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정하신 의다"라는 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가져다주기 위해 정해진 수단이다.

  (3)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10절). 여기서 그리스도를 안다함은 그를 믿는다는 말이다. 즉 이는 경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의롭게 된 것만큼이나 자신의 성화된 것을 자랑하였다.

  (4)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다.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 죽게 될 때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때 세상은 우리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2. 바울 사도는 만족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하늘나라에 둠(11-16)

11절의 말씀이 이 같은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노니.

  (1) 하늘나라의 행복은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불리우고 있다. 즉 그는 이 부활을 얻고자 했다. 그때에는 불의한 자도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에 참예치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성도들의 기쁘고 영광스러운 부활은 권능에 의지한 부활로 불리우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부활은 진정한 부활이 되어질 것이지만 악한 자들의 부활은 단지 두 번째 사망으로 이어지기 위한 무덤에서 일어나는 부활일 뿐이다.

  (2) 바울 사도는 이 기쁜 부활에 대하여 크게 강조했다. 그는 마치 빌립보 성도들이 그것을 잃어버려 그것에 미치지 못하게 될 위험에 처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혹시 미치지 못하게 되지나 않나하는 거룩한 두려움은 인내하게 하는 가장 고상한 수단이다. 바울 사도는 결코 자기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 그것을 얻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그것을 얻고자 했다.

   1) 그는 자신을 불로 안전한 시련의 상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긴다. 12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현재 자기들의 상태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만일 바울이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13절). 자기가 충분히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거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진실로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더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2) 바울 사도는 이러한 확신 가운데서 생활했다. 12절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절). 그것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으심으로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행복이 되며 구원이 된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잡으심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는 계속해서 더욱더 많은 것을 잡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좇아갔다.

   3) 바울 사도의 목표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4절). 우리가 하늘나라에 더욱 적합한 사람으로 되어가면 되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향해 힘있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곧 그것은 우리가 모든 행위 가운데서 목표로 해야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수고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늘나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어지는 것이다. 즉 그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를 우리의 집으로 얻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다음의 15절과 16절의 말씀을 권고해 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한 분으로 삼고 그 안에서 자기들의 마음을 저 세상에 두는데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규례로 살며 같은 마음을 품도록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전부로 삼는다면 우리의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서로서로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된 문제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이는 "너희는 서로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가 지금 너희의 구심점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너희의 집이 되는 하늘나라에서 곧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이는 "너희가 견해를 달리하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더 좋은 이해를 주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다. 이는 "너희가 이르게 된 곳에서 너희는 함께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또한 너희가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나은 조명이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Ⅳ. 악한 자들에 대한 경계와 자신의 본을 따를 것을 권고함으로 글을 끝맺음 3:17-21

 

1. 악한 자들을 경계할 것을 권고함(18,19)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악한 교사들의 본을 따르지 말라고 조심시킨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8절).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려지나 실상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고백보다 그들의 행함이 더 잘 증거해 준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경계의 말씀에 거의 유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들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만일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미 했던 말일지라도 다시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인 자들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그들의 신은 자기들의 배다. 그들은 육욕적인 욕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자들이다. 향락주의자들은 선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의식을 자기들의 욕망에 바친다.

   2)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에게 흠과 수치가 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

   3)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한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적하는 일을 행한다. 그들은 땅의 일을 사랑하며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을 본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바울은 우리에게 그들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4)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다. 그들의 걷는 길이 즐겁게 보일지 모르나 그들의 마침은 죽음과 지옥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 종국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2.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면함(17,20,21)

바울 사도는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본으로서 제시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7절). 바울은 20절에서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참작하여 자신을 설명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가 이것을 보여 준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들이 이 땅에 살고 있을 동안일지라도 그들의 시민권을 하늘에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의 집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집에 있으며 또한 그가 곧 가게 되기를 바라는 하늘나라에 있다.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지는 자들과 교제를 가지며, 자신의 시민권을 하늘에 두고 있는 자들과 사귐을 갖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바울을 통해 제시된 하늘의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기대는 이러하다.

  (1) 우리는 하늘로서 구원하시는 자를 기다린다. 20절 말씀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가 이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가 그곳으로부터 재림하실 것을 기대한다.

  (2)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우리는 그곳에서 복되고 영화롭게 되어질 것을 기대한다. 21절의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가 이것을 보여준다. 한 영광이 성도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의 때에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몸은 가장 좋은 처지에 있을 때에라도 '낮은 몸' 즉 비천한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21절) 되어진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능력에 의해서 부활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견고한 부활의 믿음을 가지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확신케 해주는 성경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영화롭게 된 실례이듯이 우리의 부활도 또한 그렇게 되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구원자의 왕국의 모든 대적들은 완전히 정복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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