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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다메섹 도상의 사울 9:1-9
우리는 스데반 이야기에서 이미 사울에 관하여 두세 번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사울, 즉 "구한다"라는 뜻이며 로마식 이름으로는 바울, 즉 "작다"는 뜻이다. 그는 로마의 자유시 갈릴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그 자신은 그 도시의 자유민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토박이 유대인이어서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불렀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 그는 먼저 다소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에덴에서도 잠깐 배웠다. 그리고나서 그는 신학과 유대 율법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의 선생은 가말리엘이었다. 바울은 비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수공업(천막 짜는 기술)도 배웠는데 그것은 학자가 되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1. 그의 악행(1,2)
그는 회심하기 전까지는 매우 사악하였으며 기독교와는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다. 다른 점에 있어서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즉 도덕적으로는 결함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핍박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1)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적개심과 분노(1절) :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1절). 핍박받은 사람들은 주의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주의 제자들이라는 그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던 것이다. 핍박이란 위협하고 죽이는 것이다. 위협으로 핍박할 때 그 위협은 영혼을 파괴하고 공포에 떨게 한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으며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당연하게 여겼다. 독을 지닌 짐승이 독을 뿜어대는 것처럼 그가 내뿜는 숨결은 기독교인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에게 죽음의 입김을 내뿜었다.
(2) 그는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에 대해서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평안히 지낸다는 것을 알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방해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1절) 다메섹으로 가도록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2절). 대제사장은 이렇게 열렬히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젊은 핍박자는 그 노인보다 더 열성적으로 핍박하는 것 같았다. 이 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교화된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도 7배나 더한 지옥의 자녀가 됨이 증명되었다. 대제사장들은 다메섹 회당에서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있는지, 이 이단에 동조하는 자가 있는지 심문할 권리를 그에게 주었다. 만일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즉각 예루살렘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할 것이었다. 본문에서 기독교인은 그 도를 좇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2절). 그리스도가 길이시므로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종교 문제에 관한 그들의 권위에 있어서 모든 회당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사울은 사면을 받거나 최소한 동정이라도 받아야할 여성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죄인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모두 압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울이 핍박을 시작하려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은 그에게서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셨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시키어 새롭게 하시며, 아무리 큰 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심치 말자. 왜냐하면 바울 같은 사람도 은총을 얻었기 때문이다.
2. 갑작스런 변화(3-9)
갑작스럽고 놀라운 변화가 그에게서 일어났다.
(1) 그 시간과 장소 :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3절).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1) 그는 여행 중이었으므로 노상에 있었다. 회심의 역사는 교회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노상에서 홀로 여행하던 중에 새롭게 된다. 성령의 바람은 임의로 불기때문에 우리는 어디서든 성령과 만날 수 있다.
2) 그는 여행 목적지인 다메섹 가까이에 있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될 그는 이방인의 나라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3) 그는 다메섹의 기독교인을 핍박하려는 계획을 속행하기 위해 사악한 길을 가고 있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은총은 죄인들이 가장 악해졌을 때 역사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이 더욱 영광 받으시게 된다.
4) 그의 잔인한 포고령이 집행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
첫째, 아나니아가 말한 것처럼(13,14절) 그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다메섹의 가련한 성도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신실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때로는 핍박자들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둘째, 그것은 또한 사울 자신에게도 대단한 은총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행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을 막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본문에는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7절에 보면 즉 예수께서 이 빛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이 빛은 홀연히 그를 비추었다.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영혼에게 자신을 표명하실 때는 대개 갑작스럽고 경이로운 때가 많다. 그리고 그는 무한한 축복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영접하신다. 그 빛은 하늘에서 온 빛이었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는 달랐다(행 26:13). 왜냐하면 그것은 대낮에도 볼 수 있는 빛이었기 때문이다.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사방에서 비추었다. 악은 어둠 속에서 영혼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빛 가운데서 영혼을 찾아오신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창조될 때에 그러했듯이 이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도 맨 처음 오는 것은 빛이었다.
(3) 주께서 사울을 사로잡으심 :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4절). 그와 마찬가지로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땅에 엎드렸으나(26:14) 섭리는 그에게만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빛이 그를 둘러싼 것에서 사울에 대한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영혼에게 겸손하게 자기를 내보이셨다. 그러므로 그들 또한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를 위한 한 단계이다. 그리스도께서 명예롭게 하시고자 하는 자는 보통 처음에는 낮은 자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들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
(4) 사울에 대한 책망 : 그는 그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그만이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있던 자들은 소리는 들었으나(7절)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행 22:9).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4절).
1) 사울은 하늘로부터 빛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음성도 들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말없이 모습만 나타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모든 이름보다 그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며, 나타난바 된 것은 그가 말씀하실 것을 위한 준비로써 계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은 음성을 들었다. 믿음은 듣는 것을 통해 생긴다. 그가 들은 음성은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들을 때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 음성 외에는 마음 깊이 도달한 음성이 없다.
2) 그가 들은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① 그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사울아 사울아' 하고 두번씩이나 들렸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죄를 자각하도록 함이며 이 말씀을 한 분에게 항거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말씀하실 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것처럼 그 교훈과 약속 가운데 우리 이름을 삽입시키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하고 반복한 것은 복되신 예수께서 그와 그의 회심에 온유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절박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부르듯이 그를 부르셨다.
② 사울에 대한 책망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사울은 성도가 되기 전에 그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했다. 이제 그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 자신 속에 있는 악을 보게 되었다. 죄에 대한 겸손한 인식은 죄에서 구원받은 첫걸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정당화했던 특별한 죄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가 지은 죄는 핍박이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것은 애정이 넘치는 충고였다.
첫째, 죄를 지은 자 : "그것은 바로 너다. 너는 훌륭한 학문과 교양을 갖추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으므로 충분히 생각한다면 핍박의 어리석음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보다도 네가 더 나쁘다."
둘째, 그가 죄를 지은 대상 : "그것은 나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너로 인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는가?"
셋째, 죄의 종류와 그 실행 : 그것은 핍박이었으며 바로 이 때도 그는 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악을 계획하는 것은 악을 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넷째, 그에게 주어진 질문 : "왜 너는 그 일을 하는가?"
㉠ 그것은 호소하실 때도 그의 제자들이 핍박당할 때처럼 그렇게 호소하지 않으셨다. 죄인들의 죄는 주 예수께 대단히 근심스러운 짐이 된다.
㉡ 그것은 확신에 찬 어조였다. "왜 그렇게 했느냐?"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에게 왜 그렇게 했는가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죄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자신이 가난하고 힘없고 어리석은 사람들만 핍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계속 모욕해왔던 대상이 바로 하늘에 계신 분임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며 성도들에 대적하여 행한 것도 그리스도 자신을 대적하여 행한 것과 같다.
(5) 사울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5절)
1)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질문한다. 주여, 뉘시오니이까(5절).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신다면 우리는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 죄에 대한 자각은 죄가 양심에 비추어질 때 모든 변명과 자기 정당화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심판관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했던 그가 그리스도를 그의 주라고 말하고 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하는 질문은 적절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고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이 시작될 때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대답하셨다.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자신을 은혜롭게 계시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 예수의 이름은 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을 기꺼이 망각 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 이름을 하늘로부터 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나는 구세주 예수라', 또는 '나는 나사렛 예수라'(행 22:8). 사울은 그를 모독하고자 할 때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영혼을 깨우치고 겸손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울에 대하여 주님은 부드럽게 책망하셨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없음) 가시채를 걷어찬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막대기로 얻어 맞을 때 더욱더 반항하는 사람은 가시채를 걷어 차는 사람인 것이다.
(6) 결국 사울은 자신을 주 예수께 드렸다(6절)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오셨을 때의 그의 상태 : 그는 떨었다. 복되신 성령으로 인해 되찾게 된 강한 확신은 각성한 영혼을 떨게 만든다. 그는 새 세계를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놀랐다.
2)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답변 : '주여,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한글개역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없음).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진지한 요청이다. "당신은 나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게 용서와 평화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영혼 속에서 시작되고 있는 선한 역사의 증거이다.
둘째, 주 예수의 통치와 지시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한 은혜스런 말이었다. 이로써 그의 영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커다란 변화가 그의 의지 속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 의지를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신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 이 말씀은 그에게 더많은 교훈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첫째, 그는 아직 그 교훈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하면서 행한 일을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그가 해야할 일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하늘에서 음성이 드린 것으로 보아 그는 지금까지 행한 것처럼 행할 수는 없었다. 그가 수행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그 자신과 같은 사람에 의해서 그가 할 일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의 수준에 맞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
(7) 그의 동료 여행자들은 이 일에 전혀 감화 받지 못하였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말을 못하고 섰더라(7절). 그들은 당황한 사람들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7절). 그들도 빛을 보았으며 그 빛에 깜짝 놀랐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회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없이는 어떠한 외적 수단이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영혼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바울이 한 것처럼 "주여 뉘시오니이까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소리는 들었으나 그가 누구와 말하는지, 그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도우러 온 사람들은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 증인이 되었다.
(8) 이 사건 후의 사울의 상태(8,9절) :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명령하셨을 때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번쩍이던 빛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해 가려던 그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죄인이 되어 다메섹으로 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음식을 전폐하였다'(9절). 그는 암흑 속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영혼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마음 편히 먹고 마실 수가 없었다.
Ⅱ.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보내심 받음 9:10-22
사울이 그리스도의 발아래 인도되어 '주여, 내가 어찌하오리까' 하고 고백한 후 놀라운 역사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앞에 인도된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이를 확신하는 자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1. 아나니아에게 내리신 명령(10-12)
본문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그를 돌보아 주라는 명령을 받는다.
(1)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인 아나니아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쫓겨온 사람이 아니라 다메섹 태생의 제자였다. 22:12절에 보면 그에 대하여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2) 그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은 이러이러한 집에 가서 '다소의 사울'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의 이름을 부르셨다(10절). 그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10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11절)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받고 있는 그의 백성을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는지를 매우 잘 아신다. 그는 그들에게는 하늘의 친구가 되시며 그들이 어느 거리에 있는지 어느 집에 있는지, 심지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잘 알고 계신다.
(3) 아나니아가 가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
1) 사울이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는 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따라서
첫째, 13, 14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나니아는 사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한글개역 성경에는 '보라'가 생략됨)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는 진심으로 회개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라'는 그것의 확실성을 입증한다. 또한 그것은 그것이 뜻밖의 사건임을 의미한다. "보라,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사울이 기도한 일이 정말 이상한 일인가? 그는 바리새인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전에 하던 방식과는 다르게 기도하고 있다. 그때는 기도문을 외우는데 불과했으나 지금은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 사람이 숨쉬지 않고 살 수가 없다. 숨쉬지 않는다면 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은총도 없다.
둘째, 아나니아는 지체없이 그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가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사울은 죄를 자각하고 있었다. 죄에 대한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그가 해야할 일을 더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6절). 그러므로 사울은 자기를 지도해 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2) 사울이 환상 중에 그런 사람이 그에게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니아가 그에게 가는 것은 그의 환상에 대한 응답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였기 때문이다(12절).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2절). 이제 바울이 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으며 기도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또 환상은 그의 기대를 고무시켰고 그로 인해 아나니아가 더 환영받을 수 있었다. 영적인 의사와 그의 환자가 동석하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를 위하여 본문에는 두번의 환상이 나타난다.
2. 아나니아의 거절(13-16)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기를 거절했다.
(1) 아나니아는 사울이 악명 높은 핍박자라는 것을 호소한다(13, 14절).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13절). "사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나이다. 그가 다메섹에 온 것은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위함이니이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한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4절). 여기서 아나니아는 왜 거부하였는가?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또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는 것은 과연 안전할까? 아나니아 자신이 스스로 이런 고난을 자초한다면 그는 무분별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에게 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
(2) 그리스도께서는 아나니아를 설득하신다(15,16절). "그는 택한 나의 그릇이니 즉시 가라. 너는 그를 겁낼 필요가 없다." 그는 복음이란 보물을 담아둘 그릇이었다. 그는 질그릇에 불과했으나(고후 4:7) 선택받은 그릇이었다.
1) 그는 탁월한 봉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 앞에 전해야 한다." 사울은 기수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왕들 앞에 그리고 그 아그립바와 가이사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 또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2) 그는 특별한 고난을 받기 위해 택해졌다(16절).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절). 핍박자였던 그가 이제 핍박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그를 위하여 극도의 고난을 받게 된다. 그것은 담대하고 용감한 정신을 가진 병사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는 즉시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받아야 하는가를 그에게 알려준다고 해서 그리 용기가 꺾이는 것은 아니다.
3. 아나니아가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사울에게 감(17,18)
그는 처음에는 사울에게 가는 것을 거절했으나 자기 주장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어려움이 제거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고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꺾고 착수하는 것이다.
(1)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다(17절).
1) 아나니아가…그에게 안수하여(17절).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에게 폭력의 손길을 뻗치려 왔으나 오히려 바로 그 제자가 사울에게 치료의 손을 내밀게 되었다.
2)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다. 사울이 비록 하나님의 모독자이며 그 자녀의 핍박자이긴 하나 아나니아가 그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아들로 형제로 받아들이심을 의미한다.
3) 아나니아는 사울의 보증인이 되었다.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그 상처받으신 손으로 치료하신다. 그 빛이 너를 눈멀게 하였으나 주께서는 나를 보내어 너를 다시 보게 하셨다." 징벌은 이제 끝나고 주님께서는 그를 치료하신다.
4)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가 시력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보증했다.
(2) 아나니아는 자기의 임무가 좋은 열매를 맺은 것을 알았다.
1)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울에게 좋은 결과가 이루어졌다. 아나니아의 말이 떨어지자 사울은 시력을 회복함으로써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사울은 회복됨으로써 구속의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18절).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 치유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기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그의 회복을 의미했다. 즉
첫째, 회개치 않은 상태의 어둠에서의 회복이었다. 그리스도는 종종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눈이 멀어서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이제 복음을 깨달음으로써 바리새인적인 소경에서 구원받았다. 회개케 하는 은총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이방인 가운데 보내져 해야할 일이며 그전에 우선 자기 자신이 그것을 체험해야 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현재의 어둠의 공포에서 회복되었다. 이제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정의의 태양이 그의 영혼 위에 떠올랐다.
2) 사울은 그리스도께 복종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의 은총에 자신을 맡기었다. 사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핍박을 중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전적으로 봉사에 헌신하였다.
4. 사울에게서 맺은 열매(19-22)
사울 안에서 시작된 선한 역사가 놀랍게 속행되었다.
(1) 그는 건강을 회복하였다(19절). 그는 계속 3일을 금식하여서 그로 인해 매우 허약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회복되었다.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여 지니라(19절). 주님은 육체를 귀히 여기시므로 육체의 건강을 지키시어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업에 쓰시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돌보신다.
(2) 그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는 얼마전 까지도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나 이제는 사랑과 우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섬겨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3)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절). 그는 그리스도로 충만하였으며 그의 안에 있는 성령이 그를 강권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전했던 곳은 유대인의 회당이었다. 그곳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교리를 전하고 그의 제자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그들이 가장 애호하던 회당에서 사울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자기가 기독교인임을 고백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는 전도자가 된 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기쁘심을 입은 자요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하였다. 사울의 전도로 사람들은 어떤 감화를 받았는가(21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21절). 누가 감히 그가 그리스도를 전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기적은 사람의 육체에 일어나는 기적을 무색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처럼 변화된 마음을 주는 것은 그에게 방언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다.
(4) 사울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반대하던 자들을 당황하고 놀라게 만들었다(22절). 그는 더욱 능력있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경건함도 더욱 강해졌다. 그는 복음을 수호하는데 더욱 담대해졌고 결의가 굳어졌다. 그를 낙담케 하는 비난들, 즉 이전에 그가 핍박자였음을 비난하는 새친구들의 비난과 그를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이제의 옛친구들의 비난들이 많았지만, 그는 힘을 더 얻었다(21절).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22절). 그는 그들을 침묵하게 했고 수치를 느끼게 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회심시키기 위한 도구였으며 다메섹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도구였다. 그런데 본래 그는 복음을 궤멸시키려고 그곳에 갔던 것이다.
Ⅲ. 사도들이 사울을 인정함 9:23-31
누구나 본문에서 바울의 아라비아 여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그 일이 그의 회심 직후에 있었노라고 그 자신이 우리에게 말해준다.(갈 1:16,17).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노라'(갈 1:16,17). 그는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회심 후의 3년을 지냈는데 그때 본문에 기록된 일이 일어났다.
1. 바울이 곤경에 처함(23-25)
다메섹에서 바울은 곤경에 빠졌으며 겨우 죽음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였다.
(1) 위험의 정도(23절) :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바울은 매우 주목할만한 이탈자였으며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불리한 증거가 되었다. 24절에는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그리스도는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할 것인가'를 바울에게 보여 주셨다(16절). 사울은 기독교인이 되자마자 전도자가 되었고 전도자가 되자마자 수난자가 되었다. 보통 하나님의 은총이 큰 곳에는 그와 함께 시련도 강하게 역사한다.
(2) 그의 탈출 경위 :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 계고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24절). 제자들은 밤에 그를 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25절). 이 사실을 바울 자신이 고린도후서 11:33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2. 예루살렘에서의 곤경(26-30)
바울은 달아나서 처음 도착한 예루살렘에서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26절). 이때 예루살렘으로 간것이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18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 예루살렘 여행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쌔'(갈 1:18). 그러나 나는 이 여행이 바울이 말하는 그 여행 이전에 행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28,29절의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말하며 변론하니'라는 구절로 보아 15일간의 체류만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여행일 수도 있다.
(1)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두려워 했다(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26절). 그는 가는 곳마다 그 자신을 멸시받고 핍박받는 백성의 하나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낯선 이로 대하였고 그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 바울을 두려워했다. 유대인들은 그를 포기하고 핍박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부하고 꺼려했다.
1) 그러한 의심의 원인 :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26절). 그들은 그가 단지 제자인 체할 뿐 사실은 간첩이나 첩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과 교제하고자 하는 자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의심이나 지나친 신뢰를 피하기 위해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다 실수하는 것이 의심하다가 실수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이다.
2) 사태의 진전(27절) :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27절). 본문에는 바나바가 어떻게 그 일들을 알고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떻든 바나바는 바울을 신뢰하였고 사도들에게도 그를 신뢰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2) 사울의 적들은 사울을 아주 경계했다.
1) 그는 제자들과의 교제를 허락받았다.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울이 그리스도의 승리의 기념품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사실은 몹시 화가 치미는 일이었다(28절).
2) 그는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이 일은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시켰다(29절).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29절). 헬라화한 유대인, 혹은 헬라파 유대인은 그를 가장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전에는 바울이 이들의 한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그와 변론을 벌였으나 당연히 사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를 열렬한 신앙의 핍박자로 만들었던 타고난 민첩함과 열성적인 정신이 그를 불굴의 신앙 수호자로 만들었다.
3) 이것이 그를 생명의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죽이려고 힘쓰거늘(29절). 그러나 이 모의도 사전에 알려졌고 이일로 승리자를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인 배려가 취해졌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라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30절). 예루살렘에서 피하여 간 그의 고향 다소에서 그는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그곳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하늘로부터의 지시이기도 했다.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갈 22:17,18)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15절).
3. 교회의 상태(31)
교회에는 이제 자유와 평화의 서광이 비취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 평안하여(31절). 사울이 회개하자 그가 선동하던 자들도 조용하게 되었다. 교회가 평안하였다. 폭풍우 후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것은 그들이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고 다음 핍박에 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 축복된 휴식시간을 선용하였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가장 거룩한 신앙을 확립했다. 그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했으므로 모든 사람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신앙 안에서 신실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살았다. 그들은 주님의 길만 걸으며 노래 부르며 나아갔다. 그들은 고통과 환난의 때뿐만 아니라 휴식과 번영의 때에도 성령의 위로에 의지하며 그것에 근거하여 살았다. 그들이 '주를 경외함으로' 걸을 때에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였다. 조심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유쾌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어 그들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수가 더 많아지니라. 때때로 교회는 환난 중에 더 증가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다면 지존자의 성도들은 지쳐서 더이상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때의 교회의 평안이 또한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Ⅳ. 애니아의 병을 고침 9:32-35
1. 베드로의 방문(32)
베드로는 새로 설립된 교회들을 방문하였다(32절).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행하였다. 한 사람의 사도로서 그는 한 교회에 안주하는 목회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주님처럼 언제나 돌아다녔으며 선을 행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활동의 거점은 예루살렘성이었으며 거기서 그는 투옥 당하기도 했다(행 12:4). 그는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모두 성도라고 불리운다.
2. 베드로가 애니아의 병을 고침(33,34)
애니아의 상태는 아주 비참했다. 그가 중풍병으로 상위에 누워지낼 정도로 극심하였고 8년이나 누워있던 것으로 보아 고질적인 병이었다. 병자 자신이나 주위의 사람들 모두 그에 대하여 포기한 것 같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환자를 택하신다. 이 불쌍한 사람처럼 우리가 연약해졌을 때 그는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 주신다. 그의 치료는 아주 놀라웠다(34절). 베드로는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의지하였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34절). 베드로는 치유가 그리스도의 행위와 업적임을 선언하며 그가 즉시 나을 것을 장담한다. 즉 "그가 너를 낫게 하시리라"가 아니고 "그가 너를 낫게 하시니"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치료였다. 즉 "너를 편케 하리라"가 아니라 "너를 온전케 하리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스스로 노력하라고 명하였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절).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므로 우리에게는 일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전해졌으니 우리는 일어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써야만 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너의 자리는 이제 병상의 자리가 아니라 휴식의 자리이다."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다. 그는 즉시 일어났던 것이다.
3. 이 사건의 영향(35)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35절). 그들은 모두 기적의 진실을 확인하였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기적적인 치료임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주께로 돌아갔다. 즉 주 예수께로 돌아왔다. 그들은 자청해서 그의 다스림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구원을 얻게 되었다.
Ⅴ. 다비다의 소생 9:36-43
본문에는 베드로가 행한 다른 기적, 즉 다비다가 소생하게 된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1. 다비다의 성격과 생사(36,37)
그녀는 욥바에서 살았다. 이름은 히브리어로 다비다였으며 헬라어로는 도르가였다. 둘 다 암사슴을 의미했다. 그녀는 자선 사업에 뛰어난 제자였다. 그녀는 그녀의 신앙을 선한 행실로 입증하였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 그녀는 열매가 가득 달린 나무와 같았다. 말로만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다비다는 실천가였지 수다장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선행에 뛰어났는데 경견한 일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에게 흘러나오는 자비롭고 유익한 일을 행함에도 역시 뛰어났다. 그녀는 그녀가 낸 구제금 뿐만 아니라 그녀가 행한 자선으로 칭찬받을 만했다. 재산이 없어서 자선금을 낼 수 없는 사람도 그들의 손이나 발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선을 행할 수 있다. 반면에 부자이면서도 자선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그 자선이 선한 척을 해도 결코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는 그녀가 선행을 행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녀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했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범적인 제자의 생활이며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이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유익한 삶도 끝나게 되었다.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37절). 그녀의 친구와 친척들이 관습에 따라 '시체를 씻어' 수의를 입혀서 '다락에 뉘었다.'
2. 친구들이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냄(38)
그녀의 기독교인 친구들은 베드로에게 즉시 그들에게 와달라고 사람을 보냈다(38절). 욥바에 있던 제자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있으며 거기서 그동안 앓고 있던 애니아를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했다(38절). 그들은 의사를 불러오기에도 너무 늦었으나 베드로를 불러오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3. 베드로의 태도(39)
베드로는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갔다(39절). 이 위대한 사도는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신실한 사역자는 모든 사람의 요구에 응하는 일에 싫증을 내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시체가 다락에 눕혀져 있고 과부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1) 죽은 자에게 경의를 표할 때는 엄숙하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다비다에 대한 칭찬은 그녀 자신의 덕목처럼 말이 아닌 행실로 나타났다.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절). 주인의 등뒤에서 그들에게 옷 입혀준 사람을 욕할지도 모를 게으른 마부들에게 화려한 제복을 입히는 것보다는 노쇠한 과부들에게 필요한 옷을 입히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선은 진실로 위대한 것이며 곧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비다는 어떤 방법으로 구제를 하였는가? 그녀는 가난한 과부들을 위하여 직접 속옷과 겉옷을 지었다.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사 58:7)이 참으로 훌륭한 자선이다. '네 몸을 덥게 하라'(약 2:15,16)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녀의 친절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인 감사의 표시 : 그들이 '속옷을 다 내어 보였다'(39절). 그들이 받은 친절을 공개함으로써 그 친절을 최소한으로라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몰염치한 사람이다. 구제를 받은 사람은 구제를 행한 사람들처럼 구제받은 사실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겉옷과 속옷을 보여줌으로써 도로가는 그녀의 구제뿐만 아니라 그녀의 근면도 칭찬 받게 되었다.
(2) 본문에서 과부들은 그녀와의 사별을 몹시 슬퍼하였다. 과부들은 울면서 베드로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하여 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의 수고와 일에서 이제 쉼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위하여 그처럼 훌륭한 부인을 다시 얻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운 것이었다. 그들은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녀가 행한 선행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들을 떠나갔고 그것이 그들의 슬픔이었다. 과부들이 베드로 옆에 서서 운 것은 베드로가 그들을 동정하여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곤 했던 그 죽은 자를 회복시켜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병들었을 때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병들어 죽게된 사람이라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4. 그녀가 소생하게 된 경위(40,41)
(1) 먼저 이 일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40절). 그리하여 베드로는 허영이나 허례가 될만한 것은 모두 물리쳤다.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왔으나 베드로는 구경시키지 않았다.
(2)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애니아를 치료할때는 암시적인 기도를 했지만 이 위대한 역사에는 그가 직접 하나님께 종이 복종하듯이 무릎을 꿇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
(3) 말씀을 통하여, 곧 소생케 하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기도한 후에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주의 이름으로 말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고 그녀는 생명을 얻어 죽음으로 닫혀졌던 눈을 떴다. 그녀는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40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녀의 소생을 환영하며 그녀에게 그녀가 지금까지 제외되어 있었던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 다시 속하게 됨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였다(41절).
5. 이 기적의 영향(42,43)
(1)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42절).
(2) 이 기적의 사실을 온 욥바 사람이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이 일을 염두에 두지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로 말미암아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계획된 기적이었다.
(3) 베드로는 이곳 욥바에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42절). 그곳에서 그에게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을 알았으므로 다른 곳으로 보냄을 받을 때까지 그는 여러날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 머물렀다. 비록 베드로가 바닷가에 있는 가난한 피장의 집에 이름없이 묻혀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귀한 임무를 맡기셨던 것이다.
# 해설
개종된 바울 ( 9 )
어떤 사람들은 사울의 개종을 오순절 이후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믿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어, 이 일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택한 그릇,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1. 사울의 회심
1) 핍박자 사울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멀리 전파되고 있는 동안 사울은 교회에 계속해서 가혹한 핍박을 행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울의 증오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으로 당연히 스데반을 산헤드린 앞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도 지도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의 성도들을 열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약 일년간 계속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개종 후 선교를 위해 열심을 내는 것처럼 개종 전에는 그의 열심있는 성격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a.성도를 미워하는 이유(요15:19)
b.잘못된 열심(빌3:6)
2) 예수님을 만난 사울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회개하였습니다. 다메섹에는 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회당도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메섹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고 이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가는 그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땅에 엎드려졌고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질문에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응답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사울은 자기가 핍박해 온 예수가 지금 하늘에서 자기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심히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성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시고 행할 것을 알릴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일어났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길을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도하면서 사흘 동안을 금식했습니다.
a.그리스도의 음성(계1:15)
b.바울을 부르심(갈1:1)
2. 사울을 찾은 아나니아
1) 아나니아의 문안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온 사람이 아니라, 원래 다메섹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왜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사울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 그에게 메시지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지시받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건넨 '형제 사울아'라는 첫마디는 이전에는 박해자였던 그를 이제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사귐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사울은 다시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울은 곧 세례를 받고 사흘만의 금식을 끝냈습니다.
a.아나니아(행22:12)
b.영적 형제(히2:11)
2) 이방인의 사도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왕들을 포함한 무할례자들을 위한 사도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도 사역하였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의 증거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 예언의 부분적인 성취가 바울의 고난의 열거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참조, 고후11:23-27).
a.선택된 사람(고전1:27)
b.의인의 고난(롬8:17)
3.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사울
1) 다메섹에서의 전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울은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각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일은 사울의 선교 여행상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20절에서는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배운 첫번째 교훈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주 예수가 메시야라는 진리를 전하는데 있어서 그의 신학적인 훈련을 매우 유리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힘있게 예수님을 전했고, 다메섹의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a.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함(딤전1:15)
b.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함(행22:22)
2) 제자들과의 사귐
사울은 원래 다메섹의 교회를 핍박하려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믿는 자들과 연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이 복음 사역에 가담했으나, 믿는 자들은 그를 신뢰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다메섹에서는 아나니아가 필요하듯, 예루살렘에서 그는 바나바가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바나바를 통하여 사울의 회심을 확신했고, 사울을 자기들와 함께 머물도록 허락했습니다. 거기에서도 사울은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그의 고향 다소로 보냈습니다.
a.바나바(행4:36-37)
b.성도의 교제(요일1:7)
4. 베드로의 기적
베드로는 유다 근방의 순회 선교에 참여하여 룻다로 갔습니다. 룻다에서 그는 8년이나 침상에 누워있던 중풍병자 애니아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기적적인 치유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욥바에서는 다비다라는 한 사랑스러운 여제자를 죽음에서 살렸습니다. 이 다비다는 가난한 자의 구제로 유명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도착하자, 울고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도르가 즉 다비다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기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었음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는 또한 다음 사역의 준비를 위해서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a.그리스도의 능력(마9:6)
b.죽은 자를 살림(막5:41-42)
결론
한사람이 주께 헌신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짐을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됩니다. 사울의 회심이 그러합니다. 그 자신이 유대교에서 훈련받았던 많은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선교를 준비시켰고, 그가 철저하게 주님을 대적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를 맞아들인 공동체의 결단과 열려있는 모습입니다. 사울이 소중하듯이, 그 공동체도 더욱 귀한 것입니다.
# 핵심
9:1-18
주님이 이방인의 사도로 삼기 위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불러 회심시키신 기사이다.
성령 충만(9:17)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인해 큰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과 연관된 것이므로 상대적이며 반복되는 사건이지 누구에게나 영구히 지속되는 상태는 아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나태해 있는 동안에는 성령충만을 체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한 첫째 비결이 성령충만이므로,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 묵상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울 ( 9:1, 2 )
그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남녀를 무론하고 잡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사울 편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거짓 선생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기위해 예루살렘 동북쪽에 있는 다메섹을 택했는데, 다메섹은 유대인의 이동이 많아 회당이 세워진 곳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을 피해 도망한 그리스도인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사울을 회개시키고 부르심 ( 9:1-9 )
예수 그리스도는 헬라 학문과 문화에 익숙한 사울을 부르시어 회개케 하심으로 이방 선교에 문을 여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울을 은혜로 부르시어 만나주셨습니다. 이는 순교자 스데반이 증인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부르심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되 직접 부르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도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15) 당시 세계는 알렉산더의 식민지로 헬라의 식민지였습니다. 순수한 유대주의적 사고로는 헬라의 문화권을 선교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에게 사명을 주신 예수님 ( 9:15 )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사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 9:17 )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의 눈을 낫게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써 사울의 눈은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사울은 자신이 박해하던 사람들과 동역자가 되었으며, 아나니아는 바울의 회심에 대한 훌륭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에서의 사울 ( 9:22 )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인 박해자로 소문난 사울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는 그의 변화된 모습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어려움 ( 9:23, 24 )
유대인들은 갑자기 돌변한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후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즉, 사울의 전도는 유대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기회를 장차올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호기로 삼았습니다.
바나바의 사역 ( 9:26, 27 )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과 그가 복음 전한 일을 증거했습니다. 바나바는 관대하고 포용적인 사람이었으나 후에는 마가에 대한 문제로 인해 생긴 바울과의 의견 대립으로 전도여행 중에 결별하기도 했습니다.
욥바에서의 베드로의 사역 ( 9:36-40 )
욥바에서 베드로 사도는 도르가라 불리는 여제자 다비다를 죽음에서 살려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후 시체에게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게 기도함으로써 다비다를 살린 것입니다. 다비다는 특별히 선행과 구제의 생활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신실한 제자였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께 겸손히 간구하면 주님께서 그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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