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자각과 고백 139:1-6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계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비단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조그마한 움직임까지도 전혀 숨길수 없는 것이다.
(1) 다윗은 위의 사실을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아뢴다. 하나님앞에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고백할때에 우리는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게된다.
(2) 다윗은 이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다윗은 '주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아신다'고 하지않고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신하들로부터 '왕의 마음은 헤아릴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었다(잠 25:3). 하지만 절대적 주권앞에서는 전혀 그럴수 없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은 세밀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감찰하신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여호와여 주께서는 내가 어느곳에 가서 무슨일을 하는지 다 아시나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게 속한것 모두를 꿰뚫고 계시나이다. 내 동작의 작은것 하나 곧 쉬기위해 앉는다든지, 일하기위해 일어서는 것까지 모르시는 일이 없나이다. 집을 나설때에는 무슨 목적으로 어느곳에 가는지, 돌아오는 길에는 어떤일을 하는지 다 알고계시며 심지어는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못하는 생각까지 다 아시나이다." 여기서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신다함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 기억조차 할수 없는 사소한 것까지도 다 알고계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하늘 높은곳에서 감찰하시되 사람 마음에 숨겨진 뜻을 다 아신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33:14). '주께서 나의 길을 감찰'하신다함은 조그마한 행동 하나라도 철저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해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나의 눕는 것을 아시오니'란 표현은 하루일을 끝내고 한가한 시간에 그날의 일과를 돌이켜보고 침상에 누우려고 생각한 것까지 아신다는 것을 뜻한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옳지못한 말이나 무익한 외침까지도 완전히 알고계시다. 때때로 이 말씀은 '내 혀의 말이 없을때에도 주는 그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왜냐하면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말과 같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5절). 우리가 어느곳에 가더라도 여호와께서 감찰하시며 따뜻한 손길로 지켜 보호해주신다. 한마디로해서 하나님은 각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까지 완전히 아시는 분이신 것이다.
(4) 다윗은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에 대해 새삼 감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우리는 아무리 힘써 노력을 해보아도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감찰하사 모든 사정을 아시는 것인지 깨달을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얻은 지식도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조차 모른다.
Ⅱ. 자신의 조성자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함 139:7-16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모든 행적까지 완전히 아신다는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 이렇게 믿지않을수 없는 이유는 여호와의 눈길이 항상 다윗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세상 어느곳에나 계시는 분이라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아실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늘과 땅이란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개념인데 오직 창조주 여호와는 천지에 충만하다 하였다(렘 23:24). 하나님은 천지 모두를 아시며 지배하시고 그가운데 충만한 분이다. 그러므로 이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에따라 움직이게끔 되어있다. 또한 인간은 제아무리 몸부림을 쳐보아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다른곳으로 갈수가 없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 기도는 신령한 영이신 하나님을 떠날수 없다는 점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나님은 신령한 영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수 없으니 하나님도 모르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소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하고 외쳤던 것이다(일찌기 세네카는 "그대가 어느곳에 가더라도 바로 그곳에서 신을 만나게 되리라"고 말했었다). 다윗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장소를 예로들면서 그곳에 가더라도 자신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될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첫째, 하늘을 그 예로 들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는' 여호와여 주와 함께 그곳에 머무는 일이 영원한 축복이 되나이다."
둘째, 다윗은 자기가 '음부' 곧 스올에 내려갈 경우로 또하나의 예를 삼았다. 스올이라함은 땅아래 깊은 곳, 즉 땅의 중심을 뜻하는 용어로 이해되어 왔다. 할수 있는한 깊숙이 땅을 파고 그곳에 숨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실책이다. 때로는 여기 사용된 음부란 용어가 죽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곧 우리가 모든 생명있는 것과 인연을 끊어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수 없다는 뜻이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백성이 환난을 당해 어려움을 겪을때에도 주의 의로우심과 권능이 함께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세상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외딴곳을 예로 들었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기서 새벽날개란 아침햇살로 인한 광채(이를 가리켜 해의 '광성'이라고 부른 일도 있다. 말 4:2)를 말하는데 이는 아무것도 따르지 못할정도로 빨리 퍼진다. 바로 이런 광채와 같이 빠른속도로 날아가 외따로 떨어져있는 섬구석 또는 이땅의 구석에 가서 숨는다해도 그곳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만날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갈수 있는 곳까지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더이상 가서는 안될때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그 손으로 붙드시므로 나는 주의 품을 떠날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부터 우리를 숨겨줄수 있는 휘장은 존재하지 않는다(11,12절).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할지라도. "아무리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나를 숨기지못하고 단지 스스로 속이고 있음을 깨닫게될 뿐이니이다. 어두운 밤의 장막이라해도 새벽날개보다 나를 더 잘 숨길수는 없나이다." 인간이 꾸며낸 거짓가면이나 변장술이 아무리 교묘하여도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빛을 비추실때 어떤행위도 감출수 없는 것이다.
(2) 자기가 곧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 손으로 기관차를 만든 이가 그 움직임을 모를까닭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기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아시는 것이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이 고백은 여호와께서 은밀한가운데 자기를 만드셨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욥 10:11). 뿐만아니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장부를 지으신 것이 지극히 의로운 처사임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속에 감취어져 있다. 그런데 육체로 인간의 영혼을 가리우신 이가 곧 하나님이시니 그가 원하실때는 언제라도 본질을 드러나게 하실수 있는 것이다. "나를 지으신 여호와께 감사하나이다. 나의 부모는 오직 도구의 구실을 하였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다.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결국 이세상의 모든 일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계획된 것이다. 우리는 실로 '신묘 막측'하게 지으심을 입었다. 산 성전인 우리의 몸은 각부분의 배합이 기가막힌 조화를 이루어 저절로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여호와께서 인간을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전'에 신령한 지혜로 가득한 주의 책에 기록된바를 따라 인간의 모든 지체를 이루어주신 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라 하겠다.
Ⅲ.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기대함 139:17-24
이 부분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는 교훈을 여러면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우선 다윗은 경이로움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평생에 끊임없이 지켜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17,18절). 다윗을 잘아시는 하나님은 그를 항상 생각해주셨고, 그 생각은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모든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그백성을 위해 선하심을 베푸시려고 늘 감찰하신다(렘 31:28). 우리를 위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실로 무한하다. 따라서 그결과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거나 예상할수 있는정도를 넘어 훨씬더 좋은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이 베푸시는 여호와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크고 다양한지 제대로 알수가 없다. 내가 깰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 고백은 여호와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는 가운데 평안하고 안락하게 하룻밤을 보냈다는 감사의 뜻을 나타내준다.
(2) 다윗은 여호와께서 전지하시다는 교훈에 근거를 두고 악인의 종말은 틀림없이 멸망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그동안 어떤행악을 벌여왔는지 모두 아시므로 낱낱이 헤아려 그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악인들이 감히 맞서려했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저들을 징벌하신 것이다(20절).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악인들은 '주의 원수'이며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함'으로써 공공연히 적대감을 나타낸다. 어떤사람들은 이 내용이 외식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기도 한다. "외식하는 자는 주의 원수로서 언제나 경건한태도를 가장하고 하나님에 대해 악한 말을 하나이다. 저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며 거짓맹세를 세우곤 하나이다."
(3) 다윗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결코 그대들과 친교를 맺거나 우정을 나누지 않을지니 나를 방종케 할수 없으며 멸망의 수렁으로 몰아넣지도 못하리라." 또한 다윗은 그들을 몹시 싫어하였다(21,22절). "여호와여 주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므로 나를 위해서 증거해주실수 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아니하나이까. "내 마음이 주를 사랑하는 연고로 저들을 미워하오며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악한 소행을 보는 것을 견딜수 없어 하나이다." 내가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저들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모습을 보건대 종국에는 분명히 멸망을 받을수밖에 없으리니 슬픈 마음으로 탄식하게 되나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 애통해야 한다.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이 고백은 곧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다(101:3).
(4) 다윗은 자기가 순전한 마음을 잃지않도록 지켜달라고 여호와께 호소한다(23,24절). "여호와여 주의 종은 이제 죄의 길로 행하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멸망으로 향하는 기운이 남아있거든 나로 그것을 보게하시고 완전히 근절케 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주여 내가 악한행위를 결코 용납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 핵심
139:1-24
본시편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지혜, 전지하심, 무소부재하심, 창조주로서의 권능 등을 높이며, 그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을 감히 대적하려는 원수들의 무모함을 비웃는다.
# 묵상
하나님을 의뢰해야할 이유 ( 139:1-24 )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의뢰해야할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 안 계신데 없는 하나님의 편재성, 창조자 하나님의 전능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 ( 139:1-5 )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모든 생각, 감정, 행동, 입술의 표현까지 감찰하시고 아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앞에서 그 어떤것도 숨길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와 같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늘 자신의 언행심사(言行心思)를 살피시는 하나님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과 신독(愼獨)의 정신을 가지고 경건과 거룩에 힘써야할 것입니다(시17:3).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 ( 139:13-16 )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주님이 자기를 조직하셨고 장기들을 만드셨는데 그 놀라운 행사를 자기 영혼이 잘알고 있을뿐더러 또한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굴러다니는 돌맹이처럼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생명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잘못된 풍조에 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온전하게 되는 길 ( 139:23, 24 )
시인은 자신이 온전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내면을 깊이 살피시고 온전하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initiative)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맡겼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인생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잠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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