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메시야의 임재와 구속 63:1-6
이스라엘의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승리가 얻어진다. 이승리는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훼파되어졌을때 승리감에 도취하였고(시 137:7), 온힘을 다하여 대적을 피해 에돔으로 도망쳐오는 유대인들을 멸절시켰던(옵 1:12,13) 에돔 족속에 대한 승리이다. 바벨론이 멸망될때 그들도 셈을 치루게된 것이다. 에돔에 대한 이승리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에 대해 얻은 유사한 승리들의 한 예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에 대해 획득한 승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피뿌린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는 자를 보게된다(계 19:13). 이승리에 대한 표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수 있다.
(1) 정복자에 대하여 찬미하는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1,2절). 이것은 교회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선지자의 질문이다. 그는 피흘린 전장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한 강한 영웅을 보고, 담대하게 두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그정복자는 누구인가. 그는 에돔에서 돌아오는 정복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정복자는 군인으로서 피와 얼룩으로 더럽혀진 영광스러운 의복을 입고 있다. 그는 그정복자가 겁에 질리거나 지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큰능력으로 걷고' 있음을 본다. "이 자가 누구뇨?"라는 이질문은 아마도 "당신은 우리편인가, 아니면 우리 대적의 편인가?"라는 뜻이라고 하겠다.
2) 또다른 질문은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뇨'라는 것이다. "이수고와 위험의 표적들을 남기고 있음을 보건대 너는 얼마나 어려운 일을 행하였는가?" 이와같은 위엄을 지닌 분이 '포도즙틀을 밟는' 그러한 비천한 노예의 일을 수행하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 그정복자가 하는 감탄할만한 대답이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1) 그는 구세주이시며 의를 말하는 자이시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모든 말은 선을 낳을 것이다. 그는 '구원하기에 능한 자'이시다. 그러므로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하실수 있다.
2) 그는 자기가 어찌하여 이같이 핏빛으로 나타났는지를 말한다(3절).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① 그는 오로지 그자신의 힘으로 순전하게 승리를 쟁취하신다(3절). 그러나 구원을 받게된 그의 백성들은 연약하고 무력하다. 그들은 낙심가운데 있으며 불안해하고 어떤 일을 도모할 마음도 없다(5절).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주는 자도 없으므로. 압제자들에게 대항하여 고레스와 연합할 용기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었다.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피조물의 힘이나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자신의 팔, 곧 만군의 주 여호와의 신에 의하여 구원이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다른 조력자들이 엎드러질때라도 도와주실수 있다. 바로 그때야말로 그가 도우시는 때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완전하게 적용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혼자 싸우심으로 승리를 얻으셨던 것이다. 그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셨으며 혼자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자'에게 승리하셨다(골 2:15). 그가 흑암 권세와 싸우러 가셨을때, 그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쳤었다.
② 그는 순전히 그자신의 열의로 이전투에 참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압제받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구원을 행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압제하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노하셨기 때문이며, 바벨론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교만과 잔인성, 그리고 그들이 그의 백성에게 가한 위해에 대해 노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한 거룩한 열망과 그 둘다에 대하여 행해지는 사단의 대담한 기도에 대한 거룩한 분개로, 우리의 구속사업을 이루셨다. 그는 그의 대적과 자기 백성의 대적들을 치시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내 원수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4절). 그는 자기 백성과 구원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모든 자들에 대하여 열정을 갖고 계셨다.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그해는 그들을 구속하기로 정해진 해이다. 그는 이백성들에 대하여 참으로 큰기쁨을 가지고 말한다. 그들은 그의 구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소유이며 그에게 소중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의 구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들을 구속한 자라고 부른다. 마치 이미 구원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구원이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③ 그는 그들 모두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실 것이다. 많은 일이 이미 벌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홍의를 입고' 나타나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그리스도 세력이 파멸할 당시에는 굉장한 유혈이 있다는 것을 읽게된다(계 14:20;19:13). 그렇지만 예언의 말투로 미루어봐 이부분이 영적으로 이해될수 있을진대 본문의 말씀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 63:7-14
본문에서 선지자는 그의 교회에 대한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처사를 인지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장의 마지막 끝부분과 다음장에서 선지자는 성벽위에 있는 파수꾼으로써, 현재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는 교회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1)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내 베푸신 선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감사가 나온다(7절).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말한다. 원문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자비과 긍휼을 복수형으로 말할정도로 하나님의 자비의 샘들은 그렇게 풍성하다. 선지자는 그의 '찬송을 말한다'. 즉 그의 긍휼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또는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선하심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고 가족적인 범위에 있어서 생명과 경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향유한 자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누린 자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그가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인지 그근원을 추적해 보라. 그것은 우리의 공로를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긍휼을 따라, 그많은 자비를 따라서' 온것이다.
(2) 이스라엘이 한민족을 이루게된 이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스라엘에 대한 자비로운 조처들이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게 인도하여 내셨을때,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을때 이같이 말씀하셨었다.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그들은 저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모르는체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들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는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으니' 그후에도 매번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 그로하여금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행하게 한 원리는 '그사랑과 그긍휼'에 있었다. 이것이 본문에서 기이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이렇게까지 그는 그들을 동정하시며 그들에게 가해진 해를 마치 자기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출 3:7). 그는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마치 자기가 고통받는 것같이 여기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의로 고통받게 하시지 아니하신다(애 3:33). 만일 그들이 스스로 겸비케된다면 그는 그들의 환난에 동참하실 것이다. 자애로운 부모들이 병든 자녀들에게 하는바와 마찬가지이다. 원문의 이말씀은 다음과 같이 읽을수도 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는 고통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큰환난에 처해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변경되었다. 따라서 그고통은 대단히 경감되고 자비와 균형을 이루게 되었기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놀랍게 유지하였으며 끝까지 잘견디어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성도들의 환난은 고통이 아니라 치료약이다. 성도들은 환난을 빛이라고, 곧 잠시동안만 비추는 빛이라고 일컬을수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에게 이러한 환난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고(9절). 하늘에서 가장 높은 천사, 심지어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천사라고 할지라도 이 심부름을 행하도록 보내심을 받기에는 너무 크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소자의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 자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마 18:10). 그렇지만 이말씀은 그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영원하신 말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천사(출 23:20,21)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 그는 언약의 사자이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신이다(말 3:1). 그는 하나님앞의 사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을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난다. 영원한 구원을 이루실 그분은 먼저 현세적인 구원을 이루셨다. 그는 단지 그들을 저희 속박에서 구원하셨을뿐만 아니라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다.' 그들이 열방들과 행한 전쟁에서도 그는 그들의 편에 서셨었다. 비록 그들이 투정을 부릴지라도 그는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다(행 13:18).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하였다.' 그들은 믿지못하고 불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자녀들의 배은망덕한 반역은 그의 성신을 근심하게 하였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자신의 보호를 철회하셨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친구이었던 하나님께서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 광야에서, 그리고 후에는 가나안에서 차례차례로 심판을 내리셨다. 죄는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었으며 사랑과 자비이셨던 그를 진노케하였다. 죄인들은 자의로 친구인 그를 버렸다. 이말씀은 특히 우상숭배와 다른 죄들로인하여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는 중에 그들에게 임한 저 재난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때에 그는 '옛적 날을 추억'하였다.
1) 이말씀은 백성의 추억이나 하나님의 추억으로 이해될수 있다.
① 먼저 백성의 추억으로 해석할수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이(한사람으로 지칭되어져서) 옛적 날을 추억하여' 물었다.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말한 모든 기이한 일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가 어디계시뇨? 그가 우리를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실수 있지 아니한가? 엘리야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뇨? 우리 열조들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뇨?" 그들의 열조들은 진노를 유발하는 백성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었다. 만일 그들이 그에게로 돌아온다면 왜 그를 발견하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저희의 포로생활에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한 기도에서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청원으로 이용한다(51:9,10).
② 한편 하나님의 추억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그는 친히 아브라함과 맺었던 자신의 언약, 그옛적 날들을 기억하셨다(레 26:42). "지금보다 더가치없고 벌을 받아 마땅한 저희 열조를 위하여서도 나타났던 내가 어찌하여 지금 너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법하다. "나는 이전에 그들을 구원하였었도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였도다(잠 19:19).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더이상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삿 10:13).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이논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나는 이전에 그들을 구원하였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도 구원할 것이라."
2) 이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청원으로 해석하든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해석하든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일, 특히 홍해를 건너 그들을 인도해내신 일을 상기시켜 주고있다. 그는 '모세의 오른손'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해내셨다. 그리고 이적을 행하는 지팡이가 그의 손에 있었다. 그들을 먹인 자가 모세가 아니었듯이 그들을 인도한 이도 모세가 아니었다(요 6:32).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양무리들의 소유주이셨다. 모세는 오로지 그의 손안에 있는 목자였다. 수고와 인내로 단련되었고, 또한 그의 장인 이드로로부터 양을 지키는 일에 훈련을 잘받았기 때문에 양을 돌보기에 적합한 목자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한 예표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신을 두심으로' '여호와의 신이' 그들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섭리로뿐만 아니라 은혜로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다. 그는 그들을 홍해를 통하여 안전하게 인도해내셨다. 그는 '그들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셨다'(12절). 그렇게하여 그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을뿐만 아니라 양쪽으로 벽을 세워 보호해 주었다.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서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하신(13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만들어주신다면 그는 평탄하고 반듯한 길을 만들어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안전하게 쉴곳으로 인도하셨다.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조심스럽게 주의하여)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광야로 나아갈때 그들은 매번 안식처를 제공받았었다(14절). 그리고 마침내는 가나안 땅에서 안식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신이 약속에 따라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팔로, 즉 용맹하고 힘센 팔로 그일을 행하셨다.
Ⅲ. 하나님께 대한 간청 63:15-19
다음장 끝부분까지 계속되어지는 이기도는 애정에 넘치면서도 끈질기게 간청하는 기도이다. 이시기는 포로생활 시기로 측정되어진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있었듯이 기도도 있었다. 그것은 곤경의 때를 이겨내도록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었다. 몇몇 훌륭한 성경해석가들은 이기도가 더욱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마침내 배척받고 로마인들에게 멸망한 유대인들의 하소연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1)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이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보옵소서(15절).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곧 그의 영광이다. 하늘은 그의 거처이며 그의 영광의 보좌이다(17절). 돌아오시옵소서. "우리를 향한 주의 길을 변경하시옵고 자비로 돌아오소서. 그리고 우리로하여금 주의 은혜로우신 존재와 더불어 있게하소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그들을 떠나시는 것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가 그들에게 돌아오시는 것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2) 그들이 하나님께 하는 하소연이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려두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시키지 아니하신다고 불평한다(17절). 이는 기이한 하소연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혹자는 이말을 불경건한 타락한 자들의 말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이 그들의 잘못된 길을 질책하였을때에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자기들의 죄를 하나님께 전가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발하셨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것을 저희 백성의 불신앙과 회개치않는 강퍅함을 한탄하는 자의 말로 보는편이 더타당할 것이다. 저희를 사악하게 만든 이가 하나님이라고 기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것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의 길에서 떠난' 것을 인정하였다. 저희 '마음이 강퍅해져 주를 경외하지 않게'되었음을 시인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탈선의 원인이었다. 주를 경외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의미할수 있다. 그들이 여기에서 큰불행과 무거운 짐처럼 불평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죄가운데 버려두시며 주의 길을 떠나도록 허용하시고 그의 은혜를 정당하게 회수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여 주를 경외하지 않게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찌하여 이같이 행하셨나이까?"라고 물을때, 그것은 그에게 잘못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혹심한 심판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셨으며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10절). 이것은 정당한 판결에 의해서였다. 곤경과 환난은 많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하였다. 그들의 환난은 그들의 시험, 곧 그들가운데 많은 자들에게 있어 극복하기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다.
2) 그들은 자기들이 대적들에게 버려진바 되었다고 호소한다(18절).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그들은 대적들이 저희 자신의 집과 성읍을 짓밟았다고 하소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유린한 것에 대하여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이로인하여 곧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셨으며 그들이 가장 귀히 여기던 위안이 되는 것들이 약탈당했기 때문이다.
(3) 자비와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가 이어진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여주시곤 하시던 자비로운 긍휼을 간청하였다(15절). 기도에 있어 가장 설득력있는 논증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취하는 것들이다. 무한히 지혜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열성이 식어질리 없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약해질리 없다. 그렇게도 번번히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기억되었었는데 이제 그것이 잊혀졌겠는가? "주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진노하심으로 이제 그쳤나이까?" 그런 일은 결코 있을수 없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되심을 이유로 내세운다(16절). "주의 지극한 자비는 그치지 않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자비이기 때문이니이다." 무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아버지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아들이 존귀할지라도 그가 알지못한다'(욥 14:21).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우리 육신의 아버지들이 영원한 사랑으로 일컬어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불멸의 아버지, 항상 우리를 알고계시며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는 아버지는 오로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나이다. 그이름에 의해서 우리는 주를 알고 인정하게 되리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우리를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을정도로 타락하였고 변절되었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버지되시는 여호와께로 이제 달려가나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버렸으며 야곱은 그의 아들 르우벤의 상속권을 박탈하였으며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다'(호 11:9).
3)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인이셨음을 이유로 청원하였다. "우리는 주의 종들이오니 우리가 할수 있는 섬기는 일에 대한 권한을 주께서 가지고 계시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의 왕이나 이방 신들을 섬겨서는 아니됨을 알고 있사오니 주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우리는 '주의 산업인 지파들'이니이다. 주의 종일뿐 아니라 주의 소작인이온데 이같이 능욕받도록 주께서는 내버려 두시겠나이까?"
4) 그들은 약속의 땅의 즐거움과 성소의 특권을 잠시동안 밖에 향유하지 못했음을 하소연하였다(18절).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가 단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 포로생활까지가 단지 열네 대에 불과하였다(마 1:17). 가나안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게한다는 약속과 비교해볼때 그것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창 17:8).
5) 그들은 저희의 땅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이방인들임을 이유로 내세워 호소하였다. "주께서는 결코 그들을 다스리지 않으셨으며 그들은 주께 복종하지도 않았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을 짓밟도록 내버려두시겠나이까?"
# 핵심
63:1-6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예언이다. 이심판은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63:16)
옛언약하에서 하나님과 그백성의 관계가 부자관계로 정립된 경우는 많지않다.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창조주나 언약의 주라는 관점에서 이해했으며, 아버지라는 관점으로 이해했던 적은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언약하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개념이 확고해졌다(마 6:9).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직접 부를수 있게되었고(롬 8:15), 하나님은 자녀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자상하신 아버지로 묘사된다(마 7:11).
# 묵상
붉은 의복 ( 63:2, 3 )
의복이 붉게 되었다는 말은 옷에 피가 묻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가 격렬한 전투를 치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포도즙틀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주의 종은 백성들의 죄악을 위해 사단의 세력과 홀로 무서운 싸움을 치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속하시기위해 십자가위에서 선혈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의복은 구속의 은총을 나타내고 있는 메시야의 성의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이 되신 하나님 ( 63:10 )
그이유는 이스라엘이 주의 성신을 근심케하는 죄악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자비를 모독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을 모독당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에서 대적으로 돌아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엡4:30).
주는 우리 아버지 ( 63:16 )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예임을 자랑했습니다(마3:9).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그들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을 은총으로 구해내실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살아계신 진정한 아버지이십니다(말2:10). 그렇기때문에 선지자는 조상들의 도움을 바라지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만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으니 그분께 구하는 자는 승리하며 풍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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