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바스훌의 핍박과 그대가 20:1-6
1. 바스훌의 부당한 반감(1,2)
바스훌은 예레미야에게 부당한 반감을 가졌으며 그반감대로 행하였다(1,2절). 바스훌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역시 마찬가지로 제사장인 예레미야를 비호해야 마땅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여호와의 제사장이었으므로 여호와의 제사장들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렇지만 이 제사장은 오히려 핍박자 노릇을 하였다. 바스훌은 '임멜의 아들'이었다. 즉, 그는 제사장들중에서 열여섯째 반차에 속했다. 다윗이 이 반차들을 맨처음 정하였을때, 임멜이 그선조이었던 것이다(대상 24:14).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이 바스훌은 21:1절에 언급되는 동명의 인물과 구분된다. 그 바스훌은 다섯째 반차에 속하는 자인 것이다. 본문말씀의 이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었다. 아마도 그는 단지 짧은 기간동안만 유사장이었을 것이다. 즉,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동안에만 성전의 유사장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가 예레미야의 큰대적이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것을 듣기위해 그와 함께 도벳의 골짜기로 갔던 무리들가운데 속했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보다 그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뜰에서 예언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된다(1절). 그가 예레미야의 이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그리고 그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뜰에서 유사장인 자기 허락도 없이 감히 설교했다는 사실을 참을수가 없었다. 예레미야에 대해 극도로 격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행하였다.
(1) 그는 예레미야를 '때렸다' 손으로, 혹은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로 그를 쳤다. 아마도 그것은 단지 예레미야를 치욕스럽게 만들고자한 일격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일을 처리한 방법은 불법적이었다. 먼저 대제사장과 다른 제사장들이 협의하여 예레미야의 신임을 심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들은 한낱 허울뿐인 형식에 불과했다. 옳든그르든 관계없이 예레미야는 쓰러뜨려져야만 했다.
(2) 그는 예레미야를 '차꼬에 채웠다.' 그는 그렇게 하기를 밤새내내 계속하였으며 그것도 공공 장소에서 즉 '베냐민의 윗문'에서 그리하였다. 그문은 여호와의 집안에, 아니면 곁에 있었으며 아마도 예루살렘성과 성전사이를 드나드는 통용문이었을 것이다. 바스훌은 이와같은 방법으로 예레미야를 징계하여 그를 경멸받게하고자 의도하였다. 그렇게하여 예레미야가 예언할지라도 그예언이 중시되어지지 않게하려는 속셈이었다.
2. 하나님의 의로우신 노여움(3-6)
하나님께서는 바스훌에 대하여 공의로이 노여워하셨다.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놓아주매(3절). 이제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그에게 전해준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풀어주었을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에 한말씀을 넣어주셨다. 만일 바스훌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말씀에 가책을 받을 것이었다.
(1) 바스훌은 자기 잘못을 지적해주고 백성들가운데의 자기 명성을 손상시킬것 같은 자를 잠잠케 만듦으로써 스스로의 지위를 확고히하고자 의도하였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비록 선지자가 잠잠케되더라도 자기자신의 양심이 항상 그를 편치 못하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확증으로 그는 한이름을 부여받을 것이다. 곧, '마골밋사빕', 다시말하여 '사방으로 두려움', 혹은 '주변에 공포'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는 사방이 두려움으로 싸여 절망가운데 처해있는 사람을 말하는 잠언적인 표현으로 보여진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며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한다. 바로 바스훌이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된 것이었다(4절). 보라 내가 너로 너…에게 두려움이 되게하리니. "그리고 너 자신의 상상이 너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리라."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자기 잘못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않는 자들은 양심으로부터 그것을 듣게될 것이다. 양심은 곧 저희 자신의 가슴 곳에 있는 질책자인 것이다. 내가 너로…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하리니. "너 자신이 너무도 큰공포를 풍기기때문에 너의 모든 친구들은 네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할 것이라."
2) 그의 친구들이 모두 그를 실망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이던 가인같이 비참하게 살게하실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일찍이 가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계속하여 놀라게될 것이며 이러한 물음의 대상이 될것이다. "무엇이 이사람을 그렇게 끊임없는 공포속에 있게하는가?" 그러면 이와같이 답해질 것이다. "그것은 예레미야를 차꼬에 채운 것에 대해 벌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라." 그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어야할 그의 친구들은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의 눈이 '그것을 볼 것이다.'
3) 그는 하나님의 보응하심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될 것이다(6절). 그와 그의 모든 친구들도 일반일 것이다. 바스훌의 운명은 이와같이 암담하였다.
(2) 바스훌은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파멸을 저지하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예레미야의 명성을 실추시킴으로써 그의 예언을 땅에 떨어지게할 심산이었다. 6절 말씀에 나타난바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 선지자로 자처하고 백성들에게 그들이 평강하리라고 말하였던 듯하다. 그는 '거짓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이 자기의 예언과 상반되는 까닭에 그를 대적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었는가?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자기가 했던 예언을 고수하고 있다.
1) 나라는 파멸할 것이다(4절). 내가 온유다를 바벨론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땅은 오랫동안 하나님 자신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소유를 느부갓네살왕에게 이전하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그나라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그거민들을 처분할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서 피하여 도망할수 없을 것이다.
2) 도성역시 마찬가지로 훼파될 것이다(5절). 바벨론왕은 성안에 있는 모든 값진 것들을 바벨론으로 탈취하여 가져갈 것이다. 그는 그들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던 모든 군수 물자들을 빼앗아 오히려 그들을 거꾸러뜨리는데 사용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그모든 소득', 곧 그들의 모든 상품과 교역품들을 다 탈취하여 가져갈 것이고, '그모든 귀물', 즉 그들의 좋은 집들을 약탈하고 그가구들을 빼앗아갈 것이다. 그는 국고를 뒤져서 왕관의 보석들은 물론 '유다왕들의 모든 보물'을 가져갈 것이다.

Ⅱ. 예레미야의 호소와 충실성 20:7-13
선지자는 여기에서 예전같지 않게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내부적으로 동요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나타나는바는 예레미야가 바스훌이 큰위해를 가한 순간에 흉중에 은혜와 부패사이의 갈등을 겪고있었다는 사실이다.
(1)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가해진 부당한 일에 대해서 서글프게 하소연하고 있다.
1) 그들은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조롱하였다(7,8절).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예레미야는 이같이 멸시받고 조롱받았는가? 그것은 오로지 그가 맡은바 임무를 충실하게 열심히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8절). 그들은 그의 설교외에는 그에게서 조롱할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을수 없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하여 내가…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그들이 그를 조롱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에 대해서였다.
① 그가 설교하는 태도이다. 대저 내가 말할때마다 외치며. 그는 언제나 생생한 감정으로 말하는 설교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시작하는 까닭에 그는 항상 진지하게 말하였다. 그는 크게 외치며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생동력있는 설교자들은 부주의하며 믿지않는 청중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② 그가 설교하는 내용이다. 내가…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그는 그들이 서로간에 강포히 행하고 피차를 멸하는 것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징벌로써 강포와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라고 예언하였다. 전자에 대해서 그들은 그가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조롱하였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 기우에 빠져있다고 조롱하였다. 이것으로만도 그들의 악은 이미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하소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 그는 음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의 파멸을 꾀하였다. 그는 단지 나약한 사람으로 조롱거리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악한 사람, 정부에 대한 위험인물로 비방받고 모략당하였다(10절). 그러나 보다 간교하게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① 그들은 그의 등뒤에서 악담을 하였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혹자는 "수많은 마골밋사빕"이라고 읽는다) 간접적으로 들었나이다." 거기에는 바스훌과 같은 자가 많이 있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백성들의 마음가운데 사방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경계심을 조성하는 자, 그리하여 현 정부하에서 그들로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만들어 반역을 꾀하게 충동하는 자로 규정지었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이일을 어떻게 꾸몄는지 살펴보라.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즉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하여 아주 나쁜 말로 고소하자. 그리하여 그로하여금 통치자의 미움을 받게 하자. 그리고 설사 그계획이 잘못될지라도 우리는 재차 그일을 시도할 것이라. 그것을 널리 퍼뜨리자. 그리고 자꾸 덧붙이자."
② 그들은 그의 면전에서는 그에게 빌붙었다. 이는 그를 고소할만한 근거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 나아온 정탐꾼과 같이 행하였다(눅 11:53,54;20:20). "우리는 그에게 친근하게 접근하여 그가 어떤 반역적인 말을 하도록 꾀일수 있으니, 그러면 우리가 그를 이기게 되리라. 그리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던 것에 대해 원수를 갚을수 있으리라."
(2)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시련중에 받은 유혹이 언급되고 있다.
1) 그는 자기를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과 다투고자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7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미혹하시므로(한글개역에는 '권유하시므로'-역주) 내가 미혹되었나이다"(한글개역에는 '그권유를 받았나이다'-역주). 이것은 예레미야의 어리석음과 부패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자기보다 앞서왔던 선지자들이 어떻게 박해받았었는지, 그리고 더나은 대우를 기대할만한 하드의 이유가 없음을 익히 알고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온땅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를 대적하여 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었다(렘 1:18,19).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실족지않게 하기위하여 그들이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게될지 말씀해주셨다(요 16:1,2). 그러나 본문말씀은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권유를 받았나이다'라고 읽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이렇게 읽을때 그다음에 계속되는 말씀과 완전히 부합된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임무를 위임받는 것을 매우 망설였었다. 그는 자기의 나이가 아직 어리며 그사명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권하시고 그가 가야만한다고 말씀하셨다(렘 1:6,7).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이일을 맡기시고는 어찌하여 내편을 드시지 않나이까? 내가 스스로 이일을 맡았다면, 내가 조롱당하여도 당연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이일을 맡기셨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하여야 하나이까?"
2) 그는 자기가 맡은 일을 그만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부분적인 이유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 너무도 많은 역경에 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었으며, 또다른 이유는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화되고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악화되고 분을 자아내게 하였기 때문이었다(9절).
(3)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맡은 일을 충실히 고수하였고 하나님을 기쁘게 의지하였다.
1)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무를 계속하도록 자기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심을 깨달았다. "내가 다시는 그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성급히 말하였었나이다. 내 심중에 전해야할 말이 있더라도 억눌러 내뱉지않으리라고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침'을 알았나이다. 그것은 내부에서 타올라서 밖으로 나가야만 했나이다. 그것은 도저히 소멸될수 없었나이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내게 근심과 고통이 되었나이다. 그래서 내가 시원해지기 위해서는 말을 발해야만 했나이다"(시 39:2,3;욥 32:20). 예레미야는 설교를 금하는 일이 이내 답답하게 되었고 스스로 견딜수 없었다. 충성된 목회자들에게 있어 입이 봉해지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그들의 확신은 이내 사실로 드러나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전파가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고해도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임'이기 때문이다(고전 9:16).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계심을 확신하였으며, 그것으로써 그의 대적들의 모든 궤계는 능히 물리쳐질 것을 확신했다(11절).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이기자' 하나이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오니 그들이 나를 이기지못할 것이오며 형통치못할 것이니이다. 나는 그들을 무시해 버릴수가 있나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니이다(참조. 롬 8:31).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계셔서 나로하여금 중한 짐을 질수 있게 하시나이다. 주는 나와 함께계셔서 그들을 두려움으로 치시며 그들을 이기시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싸우심을 보게될때는 제아무리 가공할만한 대적들도 초라하게 여겨진다(느 4:14). 예레미야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그들이 나를 쫓아도 내살을 먹지 못하리이다(시 27:2).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무력한 악의와 허사로 돌아간 궤계로인하여 '큰수욕을 당할' 것이니이다."
3)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의로운 심판관이 되어주시기를 호소하며 자신의 소송에 대해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한다. 의인을 심리하시는 분은 또한 마찬가지로 불의한 자도 심리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분이기때문이며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말과 행실에 대하여 오류가 없는 판결을 내리실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12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정과 그공과를 완전하게 아시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위임한 소송을 그앞에서 펴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로부터 그것을 아시고자 하시며, 우리가 세세히 그것을 아뢰도록 허락하시는데 이는 그가 감동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감화받게 하기 위함이다.
4)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려고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크게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한다(13절). 그는 기쁨에 겨워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그영광을 돌리도록 청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기에서 그가 이 대화를 시작한때와 비교하여 큰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구름은 걷혀졌으며 그의 불평과 하소연은 모두 잠잠해졌고 감사로 바뀌어졌다. 이복된 변화를 만든것, 그의 탄식을 찬양으로, 그의 두려움을 승리의 개가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믿음의 역동하는 힘이었다. "그는 이전에 내가 환난중에 있을때 나를 구하셨으며, 이제는 바스훌의 손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하여 또 건지시리로다(고후 1:10). 그는 이와같이 핍박받을때에 떨어지게 되는 저 죄의 위험으로부터 내영혼을 구하실 것이라."

Ⅲ. 생일을 저주하는 예레미야 20:14-18
본문말씀이 의미하는바는 무엇인가?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가?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그토록 기쁘게 말했던(13절) 그가 이렇게 비감에 젖어 '내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이라고 말할수 있는가(14절)? 본문말씀은 그가 새로운 시험에 빠졌다기보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회복하였던 저 이전의 시험, 차꼬에 채워져있었던 동안의 혼란했던 동요상태를 언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은혜로인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을때 그치열했던 투쟁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할수 있으며 우리의 말대로 우리에게 행하지않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할수 있다.
(1) 시험중에 선지자는 어떠한 말을 하였는가?
1) 그는 곤고한 중에 욥이 하였던 것과 같이(욥 3:1) 자기 생일을 저주스러운 날로 낙인찍었다.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지옥에 있는 가룟유다는 그러한 원을 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지만(마 26:24) 땅위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그런 소망을 품을 이유가 없다. 이는 어떠한 사람도 자기가 긍휼의 그릇이 될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선한 사람이라면 말할나위도 없다.
2)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생남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여 주었던 자를 저주하였다(15절). 그는 매우 혹심한 저주를 내뱉고 있다(16절). "그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아니하신 성읍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었으면, 그사람으로 아침에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침략한 대적들이 포위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하였더면, 그리고 낮에는 그들이 승리로인하여 떠드는 소리를 듣게하였더면, 그리하여 그로 끝없는 공포속에 살게 하였더면…."
3) 그는 자기가 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음을, 곧 그의 첫호흡이 마지막 호흡이 되지않았으며 이세상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질식되지 않았음을 화내고 있다(17절).
4) 그는 자기가 지금 당하고있는 재난이 이 격정에서 비롯된 소망들을 충분히 정당화시킬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18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곧 내가 숨겨져 있던 곳, 미움받지도 않았으며 안전하게 어떠한 악도 알지못한채 지내던 곳에서 나와서 이모든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고 학대받기를 계속하며 나의 인생을 고난으로 허비하고 날려보내는고?"
(2) 우리는 이말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이말은 우리가 따라서 모방하도록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배우도록 기록되었다.
1) 인생의 허무함과 거기에 수반되는 헛수고를 주목하라.
2) 죄많은 정욕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을 주목하라. 정욕을 제멋대로 행하도록 방치할때 그것은 얼마나 이치에 닿지않는 말을 하는가. 어느날을 저주하고, 또한 전한 소식으로인하여 소식 전한 자를 저주하다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마음이 뜨거울때에는 입에 자갈을 먹이도록 하라(시 39:1,2)

# 핵심
20:1-6
여호야김왕때의 제사장인 바스훌이 예루살렘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내용이다.

# 묵상
바스훌 ( 20:1-6 )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박해한 대표적인 유사장입니다.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구타하고 그를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습니다. 바스훌이란 이름은 ‘형통하다’라는 뜻이고, 여호와에 의해 새로 붙여진 이름인 ‘마골밋사빕’이란 ‘사방에 두려움이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그가 바벨론 포로가 되고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그는 주전 598년경 제2차 포로때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언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레미야 ( 20:9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선포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고 그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그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불이므로 그말씀을 들은 자는 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전하고 외치는 것이 자신의 해야할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비방한 주변의 악한 무리 ( 20:10-13 )
예레미야는 박해와 조롱을 받는 자신의 처지를 견딜수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흠없는 예레미야에게 조그마한 흠이라도 발견되면 고소하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당시에 복음을 전하기가 힘들고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애가 ( 20:14-18 )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일과 자신의 태어남을 알린 사람을 저주하며, 자신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쩌다가 태어나서 이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신의 인생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같은 애가는 역설적으로 모든 인생들의 공통된 노래입니다. 우리는 역경가운데서 오히려 찬양을 할수 있습니다. 역경을 넘어선 자만이 순경(順境)의 진정한 참의미를 알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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