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 18:1-10
여기에서 선지자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심받고있다. 이는 설교하기위함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기위함, 아니 이미 준비되어진 설교를 인수하기 위함이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2절). "그리고 어떻게 토기장이가 일하는지 주목하여 보라. 내가 거기에서 은밀한 속삭임으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너는 거기에서 백성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게되리라." 그래서 선지자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갔다(3절). 그리고 어떻게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지' 관찰하였다. 거기에서 토기장이는 어떤 한형태로 만들려고 의도했던 진흙덩어리가 너무 딱딱하게 굳어있거나 그안에 돌이 들어있거나 하면, 혹은 그의 '손에서 파상하면', 즉각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행하였다. 이처럼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보다 자명하게, 보다 손에 잡힐듯이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성경의 비유를 해설하는 방법을 알게된다면 이 세상사나 문제들을, 사람들을 개심시키기위해 보다 적절히 선용할수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가 일하는 것을 주의깊게 관찰하는동안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파해야할 중대한 두가지 진리를 그의 심중에 두셨다.
(1) 하나님께서는 감히 더불어 다툴수 없는 권세와 항거할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는 이 권세와 능력으로써 그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에 합당한대로 열왕과 열국들을 이루고 만드신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6절). 하나님께서는 진흙에 대하여 토기장이가 가지는 것보다도 더분명한 주권을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고 계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는 진흙에게 단지 그형태만 주는반면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본질과 형태 둘다를 얻고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감히 다툴수 없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자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진흙이 토기장이와 더불어 싸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불합리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이 기뻐하시는대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용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매우 쉬운 일이다. 손을 한번 뒤집거나 녹로를 한번 돌림으로써 진흙의 형태는 아주 달라져서 그릇이 되기도 하고 아무런 형태를 갖지못하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와같이 우리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열국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욥(욥 12:23)에 의해서 이비유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그리고 시편(시 107:33이하)기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또한 욥기34:29절과 비교해 보라. 만일 토기장이의 그릇이 한가지 용도에 못쓰게 된다면 다른 용도로 쓰여지게될 것이다. 자비의 기념비들이 되지못한다면 공의의 유적들은 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흙으로 지으셨다(욥 33:6).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손안에 들어있는 진흙이다(사 64:8).
(2)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인자라는 철칙에 의거하신다. 그는 주권을 행하시는중에 은총을 베푸시며 절대로 전횡적인 권세로 징벌하시지 않으신다. 심판을 받는중에 우리는 그심판이 우리의 죄로인한 것임을 확신할수 있으며 전민족적인 회개는 심판이 더이상 계속되지않도록 중지시킬 것이다(7,8절). 만일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나라를 지켜주는 울타리를 뽑으리라, 그나라를 풍요케해주던 과일나무들을 뽑으리라. 그 강력한 요새들을 파하리라. 그리하여 포도원이나 성읍이 훼파되듯 그나라가 멸망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하자. 이경우에 있어 만일 그민족이 저희의 죄를 회개하고 생활방식을 혁신한다면,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그들에게로 돌아서실 것이다. 죄악에서 진실로 회개하고 개심하면 징벌의 재앙을 결과적으로 방지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되었을때 그가 새로이 진흙그릇을 만들수 있듯이, 그처럼 수월하게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민족을 그들의 파멸에서 일으키실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나오실때 만일 그것을 중단시키는 그무엇인가가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죄이다(9,10절). 죄는 하나님과 한민족 사이를 이간시키는 주요인이다. 죄는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을 받지못하게 하며 우리의 기도가 결실을 거두지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죄는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들을 철회시킨다(호 7:1).

Ⅱ. 유다 백성의 우매함 18:11-17
본문말씀은 이장의 앞부분에서 제시된 일반적인 진리를 유대 민족에게 적용시킨다.
(1) "그러므로 이제 너는 그들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 하노니. "섭리의 모든 작용이 확연하게 너희의 멸망을 향해 진행되고 있느니라."
(2)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개혁함으로써 자신을 만나라고 그들을 청하시며, 그렇게하여 그들에게 더해질 두려운 심판을 피하라고 권면하신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려고 계획하신 재앙들을 스스로 철회하실수 있게하라. 그러면 녹로위의 진흙그릇같이 너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하던 섭리의 방향이 즉시 그형태를 달리하여 너희에게 유익한 결과를 낼것이라."
(3)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완악함과 그들의 외고집적인 거부를 예견하신다(12절).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구원받는 것조차도 포기할수 있노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리라'고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라. 선지자가 더이상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라는 구속아래서 지내지 않으리라." 그들은 구속받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지만, 사람이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은 종중에서도 최하급의 종인 셈이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에 담겨있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 혁신되기를 싫어하는 터무니없는 우매함을 질책하신다(13절). 너희는…열방중에 물어보라. "하나님의 계시도, 말씀도, 선지자들도, 그어떠한 혜택도 받지못했던 자들에게까지 물어보라."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니느웨 사람들도 이같은 경고를 받았을때 악한 길을 돌이켰었다. 그런데도 '처녀 이스라엘'은 회개를 무시하며 반항하고 있다. 양심과 섭리가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 이스라엘은 친히 저희와 정혼하신 하나님께 대해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처녀 이스라엘은 스스로 그에게서 떨어져나갔으며 그에게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있다. 고의적으로 회개치않는 것은 가장 그릇된 자살행위이다. 즉, 그것은 '심히 가증한 일'이다.
(5)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두가지로 그들의 우매함을 말씀하신다.
1) 죄 그자체내의 본질적인 우매함이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위하여 하나님을 버렸다(14,15절). "목마른 길손이 어찌 눈(雪)을 버려두고 떠나겠느냐." 그눈은 녹아서 레바논의 산에서 흘러내린다. 그리고 '들의 반석'을 지나 깨끗하고 맑은 수정같은 개울로 흐른다. "목마른 길손이 이것을 지나치겠느냐? 그리고 어떤 더러운 웅덩이 물이 있었으면 더좋겠다고 생각하겠느냐? 혹은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여름 복중에 버려진바 되겠느냐." 사람이 더위와 갈증으로 시달리다가 원기를 소생시켜주는 차가운 개울을 만나면, 이를 마음껏 즐길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읽을수도 있다. "여행하는 길손이 평탄하고 평평한 나의 들을 떠나겠느냐? 그리고 거칠고 험한 바위 투성이 길을 택하며, 엄청나게 쌓여서 통과할수 없게된 레바논의 눈길을 택하겠느냐? 혹은 알지 못하는 낯선 찬물을 택하고자 흐르는 물을 버리겠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잊고(15절), 터진 웅덩이를 취하고자 생수의 근원을 버렸도다. 저희가 외양만큼 실속이 없으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도 못하는 우상, 곧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으로 정해진 '그옛길을 버렸다. 그길은 모든 성도들이 행한 길이었으며, 그러므로 저희의 여정의 목적지에 이르는 바른 길이었고 안전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옛길로 나아가도록 권고받았을때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했었다(렘 6:16). 그들은 곁길을 선택했었다. 그길은 대로였으나 왕의 대로가 아니라 닦지 아니한 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의 길이었다.
2) 그죄의 유해한 결과에 있어서의 우매함이다.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그들의 땅으로 치소가 되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저희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의 땅으로 지나는 자마다 한마디씩 하게될 것이다. '놀라서 그머리를 흔들' 것이다. 어떤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고 어떤이들은 가련하게 여길 것이며 또다른 어떤이들은 일찍이 온땅들의 영광이었던 나라가 황폐하게된 것에 의기양양해 할것이다.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그들의 땅이 황폐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고가 계속되고 있다(17절). 내가 그들을 그 원수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것이며. 이동풍은 맹렬하고 사나운 바람이다. 그들의 불행을 극에 달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재앙을 당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웃으신다면 능히 견딜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고 노여움을 나타내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제멋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게 된다.

Ⅲ. 박해자의 악의와 선지자의 기도 18:18-23
선지자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도록 그자신의 문제들을 거론한다.
1. 박해자의 공통된 수법(18)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박해자들의 공통적인 수법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예레미야를 대적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의하기위하여 함께 머리를 맞댔다. 그리하여 그가 이미 말한바에 대하여 복수를 하고 장차 그의 입을 막고자 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이는 예레미야 자신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전한 말씀에 대해서도 대적하는 것이다.
(2) 여기에서 그들은 마치 교회에 대하여 굉장히 열심인 척하였다. 그들은 만일 예레미야를 이전처럼 설교하도록 내버려두면 교회가 위험에 처하게된다고 말하였다. "오라, 우리가 은밀히 그를 쳐부수자. 왜냐하면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입에 진리의 법이 있을(말 2:6) 것이기 때문이라. 우리는 거기에서 율법을 찾으리라. 율법에 따르는 규례들의 집행도 제사장의 수중에 있다. 율법이건 규례의 집행권이건 제사장들에게서 억지로 빼앗을수 없도다." 그들이 교묘히 빗대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의 두가지 사항이었다.
1) 예레미야는 참된 선지자일수 없으며 자칭 선지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는 제사장들에게서 위임받은 적이 없으며 다른 선지자들과 협력하여 의견을 같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2) 그의 예언의 내용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일수 없다. 왜냐하면 그예언은 때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렘 5:31)이 백성을 속인다고(렘 14:14) 질책하였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놀랄 것이며 깜짝 놀라리라'(렘 4:9)고,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을'(렘 8:9,10) 것이라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잔뜩 취하게 되리라고(렘 13:13) 예언했었다.
(3) 그들은 예레미야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위하여 그들이 할수 있는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4)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위해 그들은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주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아무말에도 주의치 말자. 왜냐하면 옳건 그르건 관계없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의 말로 간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5) 그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예레미야의 입을 다물게 하고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23절). "나에게 맞서는 그들의 모든 계략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니이다. 그들은 귀중한 생명을 사냥하는 자들이니이다."
2. 박해받는 자의 공통된 구원(렘 19-23)
박해받는 자의 공통된 구원은 무엇인가. 예레미야가 취한 태도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아볼수 있다. 그는 즉시 기도로써 하나님께 호소했다.
(1)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서 살피시도록 의뢰한다(19절). 그들은 예레미야가 한 말을 한마디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않았고 그의 하소연을 받아들이려고 하지않았다. 또한 그의 불만족에 어떠한 주의를 기울이려고도 하지않았다. 그러자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소서'라고 그는 말한다. "나와 더불어 다투는 자들의 소리를 들어보소서. 그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소란한지, 그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거짓되고 악의에 차있는지 들어보소서. 그리고 판단하사 그들로하여금 저희 자신의 입으로 심판을 받게하시며 그들의 혀가 한말이 저희 자신에게로 떨어지게 하옵소서."
(2)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그들의 비열한 배은망덕을 하소연한다(20절).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 "그리고 그러한 것이 어찌 벌을 받지않을수 있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의 악에 대하여 선으로 내게 갚지 아니하시겠나이까?"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그들은 야비하고 비겁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예레미야의 생명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다. 그웅덩이 둘레에는 울타리도 없었다(시 119:85).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큰선을 행하였는가. 내가…주의 앞에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그는 그들을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앞에 있었다. 하지만 자기 하나님을 잊은 자들이 자기들의 최상의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일찍이 다윗이 그같은 처지에 처했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비통해했다(시 35:13;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나이다.' 이와같이 죄인들은 크신 중보자를 대적하고 있다. 그의 피가 하늘에서 그들을 위하여 대언하고 있는동안에 죄인들은 땅에서 그를 새로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를 적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선지자에게 위로가 된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그처럼 악의로 대하였더라도 자신은 그들에게 해야할 도리를 다했다는 양심의 증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3)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빈다. 이것은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분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21-23절).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1) 그들의 가족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굶주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2) 그들이 '칼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멸절되기를 기도한다.
3) 전쟁의 공포와 파멸이 부지불식간에 그들을 습격하여 경악이 그들을 사로잡기를, 그렇게하여 그형벌이 그들의 죄에 대한 보응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22절).
4) 그들이 그들의 죄과대로 다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들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이었다.
5)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곧 그들의 파멸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따라서 행하도록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였다. 그는 예언의 영의 감동하심으로인하여,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임하고있는 파멸을 앞서 예견하고 이같이 기도할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할수가 없다. 우리 주님은 가르침을 통해서나 모범을 통해서나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 핵심
18:1-12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회개의 기회를 저버린 유다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우상숭배(18:15)
허망한 신이나 사람 혹은 그밖의 물체를 형상화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금지시키셨다(출 20:4,5). 우상은 헛되고 무가치한 것으로서, 이를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탐심도 우상숭배라고 규정한다(골 3:5).

# 묵상
토기장이와 진흙 비유 ( 18:1-12 )
본문은 토기장이와 진흙비유에 대한 기록입니다. 토기장이는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진흙은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킵니다. 이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그뜻대로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토기장이와 진흙으로 비유한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발견할수 있습니다(사29:16).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질적차이와 하나님의 섭리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레바논의 눈 ( 18:13, 14 )
레바논은 항상 눈으로 덮여있어 여행자들은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로 해갈을 합니다. 따라서 이표현은 변할수 없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자연은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그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을 잊고 허무한 것에 분향하는 심히 ‘가증한 일’을 범했습니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우상숭배의 죄악성을 지적할때에 사용되는 전문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요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처럼 있을수 없는 일을 행했습니다.
‘옛길’과 ‘곁길’ ( 18:15, 16 )
분문은 옛길과 곁길에 대한 상징적인 비유로서의 내용입니다. 옛길은 아브라함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여호와신앙, 즉 모세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곁길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에서 벗어나서 이방종교의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길은 좁은 길이지만 조상들이 이미 걸어간 길이요, 닦아놓은 길입니다. 그러나 곁길은 넓은 길이나 닦지않은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옳은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옛길은 복이요 영생의 길이지만, 곁길은 저주요 멸망의 길입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 18:20 )
예레미야는 주의 분노를 유다에게서 돌이키려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선지자는 다만 하나님과 사람들을 중재하기위해 수고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않으면 심판을 면치못한다고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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