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포로될 유다 17:1-4
백성들은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범한 죄는 무엇인지' 물었었다(렘 16:10).
(1) 기소된 내용이, 즉 사실과 죄과가 죄인들에게 완전히 입증된다. 그들은 무죄를 주장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과가 그들자신의 양심에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그죄들은 온세상에 명백하였다(1,2절). 그것은 가장 읽기 쉽고 가장 지워질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하나님앞에 기록되어 있으며(신 32:34) '금강석끝 철필로 기록되어' 있다. 즉,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새겨져 있다. 죄인들의 죄는 사함받기전에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판에 새겨져' 있다. 마음에 새겨진 것은 지워질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그들의 죄과를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의 제단뿔' 이상의 다른 것을 더들먹일 필요가 없다. 단 위에는 그들이 우상에게 제사지내기 위하여 흘린 피가 뿌려져 있었다. 저희의 이웃들이 저희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며 저희 자식들은 자기들이 어렸을때 부모들이 데리고 갔던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기억할' 것이다(2절). 저희 마음속의 편견은 아직도 우상들을 강하게 향하고 있으며, 그들의 우상에 대한 애정을 감소시키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채찍에 의해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단뿔에 새겨졌다.' 그들은 자기 이름을 우상에게 내어주고, 밧줄로 동이듯 자신을 우상에게 묶었던 것이다.
(2) 기소된 내용이 이같이 증명됨으로써 판결이 확정되고 선고가 인준된다(3,4절). 그들의 재화는 강한 자의 손안에 들어갈 것이다. 예루살렘은 '들에 있는 하나님의 산'이다. 예루살렘은 평야 한가운데 있는 산위에 축성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저 부유한 도성의 '모든 보물로 노략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너희가 나의 산(온땅이 그의 산이었다, 시 78:54;신 11:11)을 죄로인하여 산당으로 변모시켰으며 높은 메위에서 너희 우상을 섬겼도다(2절). 그러므로 이제 그것들은 네 온지경에서 노략을 당하게될 것이라." 그들은 저희의 기업들과 결별하게 되며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가게될 것이다(4절). 죄는 우리의 위안을 훼방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회개하면 소유권을 다시 회복하게될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너희가 내 노에 불을 지피었도다. 그것이 너무도 맹렬하여 마치 영영히 탈듯하도다."

Ⅱ. 세상을 의지하는 죄 17:5-11
선지자의 설교전부가 다 예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실천적인 것에 대해서도 설교하였다.
(1) 환난에 처해있을때 피조물들을 의뢰하고 그들에게서 구원과 성공을 기대하는 자들이 반드시 만나게될 낙담과 괴로움에 대해서이다(5,6절). 그렇게하는 '그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즉, 비참하게될 것이다). 이는 그가 상한갈대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죄된 죄는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아' 그것에 계속 집착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팔이시다(사 33:2). 이죄에는 참으로 악한 점이 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다. 인간을 의뢰하는 자들은 아마도 저희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있다. 물통에 담긴 물만 바라보는 것은 곧 그것을 끌어온 샘을 잊는 것이며 따라서 화를 불러 일으킨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같기' 때문이다. 그는 황폐한 땅의 산물인 애처로운 떨기나무처럼 기력이 없고 쓸모없으며 무가치할 것이다. 그의 위안되던 것들이 다 엎드러질 것이며 그는 기력이 없어지고 낙심하여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짓밟혀질 것이다.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못하고' 좋은 일을 나누어 가질수도 없게 된다. 시간은 바뀌어도 그들은 변함없으며 '광야 간조한 곳에 거하게' 될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추수하여 수확을 거두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의 열매를 맺을수도,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구원에 이르는 복된 열매를 거둘수도 없다. 그들은 '건전한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2)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 곧 가장 불안정한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풍성한 만족에 대해서이다(7,8절). 우리에게 요구되어진 의무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곧 그의 은총을 우리가 바라는 선으로 삼고 그의 능력을 우리가 기대하는 힘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같은 것이다. 그는 가장 좋은 땅에 큰배려로 심기워진 선택된 나무와 같다. 그는 '그뿌리를 뻗치는' 나무와 같아서 요동치않고 서있으며 강변에 그뿌리를 뻗침으로 풍부한 수액을 빨아 올릴수가 있다. 하나님을 자기 소망으로 삼는 자들은 평안하며 계속하여 안정과 마음의 평정을 즐긴다. 이와같이 심기워지고 이와같이 물주어진 나무는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한여름의 찌는듯한 열기에도 아무런 해를 입지않을 것이다. 또한 가뭄이 와도 충분히 유지될수 있을정도로 그뿌리로부터 수분이 잘 공급된다. 그들은 항상 '그잎이 청청하며' 결코 시들지않는 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융성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 기쁠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내적인 평강과 만족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비가 오지않는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가 그 자체내에 씨앗을 가지듯, 그렇게 수분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샘을 소유하고 있는한, 물동이가 깨질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힘과 은혜를 얻는 자들은 '결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3) 인간의 죄로 가득찬 마음과 항상 그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이다(9,10절).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한낱 연약한 존재에 불과할뿐 아니라 거짓되고 속임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이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듯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거기에 있으리라고 의심조차 해본적이 없는 그러한 악이 있다.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에 있는 '마음', 즉 인간의 양심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다. 그마음은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르고 만물을 거짓되이 꾸민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보지 아니하신다고 스스로 마음으로 다짐할때에, 이점에 있어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수많은 생각에 있어서 마음은 거짓된 것이다. 만일 다른 기능들의 잘못을 수정해주어야할 양심 그자체가 거짓을 낳는 장본인이며 미혹으로 이끄는 주모자라면 그상태는 참으로 악화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수가 없으며 시험의 때에 무슨 일을 행할지도 알수가 없다(히스기야도 그러했으며 베드로도 그러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알수 없으므로 그들을 의뢰할수가 없다. 마음에 어떠한 악이 있든지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10절). 그리고 그가 그마음에 대하여 이러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각각 그행위와 그행실대로 보응하기' 위함이다.
(4) 정당치 못하게 취득한 부에 수반되어지는 저주에 대해서이다(11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그가 그 부를 자기 소망으로 삼지만 결코 그기쁨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망령되고 거짓된 혀로 재물을 얻은 자는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며 '나는 실로 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부가 저희에게서 작별하게될 것이다. 은혜를 얻은 자들은 필경에 지혜로운 자들로 판명될 것이며 죽어서 그은혜의 위로를 받되 영원히 누리게될 것이다(잠 1:20). 그러나 세상적인 재물에 저희 행복을 두는 자들은 종내에는 그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되나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이것은 알을 품으나 그것을 부화시키지는 못하는 자고새와 같다. 그알들은 깨어지거나(욥 39:15) 내버려질(사 10:14) 것이며 혹은 썩게될 것이다. 부자는 재산을 모으기위하여 온갖 수고를 다하며 알을 품듯이 심사숙고하지만 그것으로는 어떠한 위안이나 만족을 결코 얻을수 없다.

Ⅲ. 하나님을 의지하는 선지자 17:12-18
선지자 예레미야는 개인적인 묵상의 시간을 갖고 홀로 하나님과 있기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 곧 자기 백성가운데 계시의 종교를 두시고 거룩한 규례로써 그들을 존귀케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인정한다(12절).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특별하신 임재를 나타내셨다. 백성들은 그곳에서 주권자에게 경의를 표했고 환난중에는 그곳을 피난처로 삼아 도망해 들어갔었다. 그곳은 그들의 지성소이었다. 그곳은 거룩하신 보좌, 하나님의 보좌이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으로 불리워지는데 그왕은 이스라엘의 왕을 일컬을뿐만 아니라 온땅의 왕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곳은 세계의 왕성으로 마땅히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시부터' 그러했다. 예레미야가 여기에서 이말을 언급한 것은 다음 두가지 의미중 하나이다. 즉, 그들의 땅에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청원이거나, 아니면 그들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그백성의 죄가 더중하다는 의미이다.
(2) 그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배역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망당하도록 버리신 일에 의로움을 인정한다(13절). 그는 이일이 공평한 일이라고 하나님께 아뢴다. "이스라엘가운데 주께 의지하는 자들에게 소망하신이시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들로 수치스럽게 하소서"라고 혹자는 읽는다. 그렇게 읽으면 선지자의 이말은 그들이 참회함으로 수치를 느끼게 해주시도록 그의 은혜를 구하는 탄원이 된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곧 내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자는 사실상 하나님을 떠나는 자이라."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선지자에게 돌아오는 자로 일컬어지는 것(렘 15:19)과 같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들은 진토중에 쓰여진 글자처럼 곧 지워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터진 웅덩이'를 취하기위하여 '생수의 근원(즉, 샘물)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인 것이다.
(3)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치료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한다. 여호와여…나를 고치소서…나를 구원하소서(14절). 그는 갖가지 요인들로인해서 심령에 상처를 입었었다. 그는 도리를 분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해를 입었었다. 그는 이청원을 보다 강력하게 하기위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탱할수 있도록 붙들어주시면 우리는 살게될 것이다. 그가 보호해주시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2)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이구절은 "주는 나의 찬송이 되시리이다"라고 읽을수도 있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면 주는 그영광을 받으시리이다."
(4) 그는 자기가 말씀을 전파한 백성들의 불신과 불경에 대해 하소연한다. 그는 충실하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보내신 분에게 어떤 대답을 돌려드리게 되었는가?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15절;사 5:19). 그들은 선지자를 조롱했으며 그가 말한 내용이 참됨을 부인했다. "만일 네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면 그말씀이 어디있느냐?" 그말을 무시하고 그것에 도전했다. "전능하신 하나님더러 마음대로 해보시라고 여쭈어라.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시라고 해라. 우리는 끄떡도 하지않을 것이라. 그림으로 그려진 사자가 보기에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과연 무슨 해를 끼칠수 있겠느냐."
(5) 그는 자기가 소명받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음을 하나님께 호소한다(16절). 그는 자기 일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되기는커녕 그는 맡은바 직분으로인하여 경멸과 위해를 받는 자리에 있게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나이다. 나는 내 일을 팽개쳐 버리지 않았나이다." 예레미야는 그런 목자였다. 어떠한 사람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많은 어려움과 좌절에 부딪쳤었건만 그는 요나처럼 도망가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심부름을 더이상 못하겠다고 그임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백성들에게 애정을 가졌었다. 비록 백성들이 그를 학대했을지라도 그는 그들을 가엾게 여겼다.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날은 실로 예루살렘에게는 무서운 재앙의 날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날이 오지않았으면 하고 바랐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목자들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오히려 죄인들이 돌이켜 살수 있게되기를 바라야 한다. 예레미야는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다. 만일 그가 그처럼 혹독하게 책망하지 않았더라면 백성들의 환심을 살수도 있었건만 그는 받은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고자 하였다.
(6)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정해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소명으로 맡겨주신 그일을 기꺼이 수행할수 있게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청한다. 그는 여기에서 두가지 것을 바라고 있다.
1) 그는 자기가 위임받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17절).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그는 이렇게 간청한다. "주는 나의 소망이시니이다. 그러므로 내게 두려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오니 내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2) 그는 자기가 보내어진 곳의 백성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용기를 갖고자 하였다(18절). 그를 핍박하는 그들은 마땅히 그를 환대하고 격려해야할 자들이었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하여금 자신들의 완악함을 부끄러이 여기게 하옵소서. 그렇지않으면 경고된 심판을 결국에 그들에게 집행하소서. 나로하여금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의무를 배반하게 하지 마옵소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 그는 기도한다.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이는 그들에게 재앙이 임함으로써 저나라에 재앙이 임하는 것을 방지할수 있다는 희망에서 나온 것이다.

Ⅳ. 안식일 성수 17:19-27
본문말씀은 안식일성수에 관한 설교이다. 안식일에 관한 이메시지는 아마도 요시야왕 재위시절에 그가 착수했던 개혁사업을 촉진시키기위해 주어졌던것 같다. 이메시지는 먼저 뜰문, 곧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에서 선포되어져야 했다(19절). 맨먼저 그들에게 저희의 의무를 말해주어야 했다. 만일 안식일이 거룩히 구별되지 않는다면 유다를 다스리는 귀인들은 책망을 받아야 했다. 이는 분명히 그들이 저희의 의무를 이행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또한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그메시지를 선포해야 했다. 이것은 중대하고도 전체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1) 안식일은 어떻게 거룩히 구별되어져야 하며 그에 관해 율법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21,22절). 그들은 안식일에 모든 세상적인 일을 중지해야 한다. 그들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서 성안으로 들어와서도, 나가서도 아니되었다. 농부가 곡식 짐을 지고 들어와서도 아니되었으며 거름을 지고 나가서도 아니되었다. 상인들이 상품이나 물건을 지고 드나들어서도 아니되었다. 안식일에 거리나 길에 짐을 실은 말이나 수레, 마차가 있어서는 아니되었다. 그날에 짐군들은 손님들을 기다려서도 아니되었고 종들은 땔감이나 양식을 날라서도 아니되었다. 그날은 안식하는 날이었으며 꼭 필요한, 부득이한 경우이외에는 일하는 날이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즉 그날을 하나님의 존귀를 위해 성스럽게 지키고 그에 대한 봉사와 예배로 보내야하며 세상적인 일은 제쳐두어야만 한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온전함을 요구하는, 그리고 온전히 행하기에 합당한 그일에 전념할수가 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 시간중에서 자기 몫으로 떼놓으신 그것을 그에게서 훔친다면 너희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되기 때문이니라. 영혼으로하여금 안식일 날에 이세상 근심걱정을 지게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에게 새로이 부과된 법이 아니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한' 것이니라."
(2) 안식일은 어떻게 더럽혀지고 있었는가(23절). "너희 열조들은 안식일을 성수하도록 명령받았었으나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명령들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명령에 대해서도 '그목을 곧게하여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안식일이 경시되어진 곳에서는 모든 신앙이 눈에 띄게 감퇴하기 마련이다.
(3) 만일 그들이 안식일성수를 주의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시고자 어떤 축복을 예비해두고 계셨는가(24-26절). 궁정이 번성할 것이다. 대를 잇은 왕들과 '판단의 보좌'에 앉은 다른 방백들은 '예루살렘 모든 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병거와 말을 타고 입성하게될 것이다. 도성이 번창하게될 것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영원토록 사람들이 거하게될 것이다. 그리하여 경고된바와는 달리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끊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라는 융성해질 것이다. '유다 성읍들과 베냐민 땅'은 수많은 거민들로 가득하게될 것이며, 풍요가 넘치고 평화로이 살아가게될 것이다. 종교가 백성들중에 흥할때에야 그백성은 진정으로 번성한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와같은 것이 안식일성수의 결과이다. 신앙생활의 그런 부분이 지켜질때 다른 여러가지 범주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모든 신앙의 조류들은 안식일이라고 하는 둑을 지키며 흐르는가 아니면 무시하는가에 따라 깊이가 있거나 얕거나 하게된다.
(4) 만일 그들이 안식일에 대한 불경을 계속하여 고집한다면 어떠한 심판을 각오해야만 했는가(27절). "이일에 있어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에도 계속하여 모든 문들을 개방한다면, 그리하여 그날에 불필요한 출입들이 있게된다면,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의 법으로 명한 것을 파기하고 그날을 다른 날과 똑같이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성문에 불을 놓으시리라는 것을 알라." 죄를 몰아내고 백성들을 저희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불러들이는데 사용되지 않는 성문들은 불에 타 마땅할 것이다.

# 핵심
17:1-18
유다의 근본적인 죄와 부패한 마음을 지적하고, 그것과 대조되는 참구원의 길을 밝힌다.
죄의 보편성(17:9,10)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김으로써,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의를 상실했다(롬 3:10,23).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길보다는 이기적이고 악한 길로 나아가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와같이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꿀수 없다. 유일한 치유책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마 5:8).

# 묵상
사라질수 없는 유다의 죄 ( 17:1-4 )
유다의 죄는 금강석끝 철필로 기록되었고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뿔에 새겨져있으므로 도저히 사라질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사후에까지 영원히 남게됩니다(요5:29; 계20:12). 이죄는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서만 씻겨질수 있습니다(벧전1:18, 19). 유다의 멸망은 죄를 회개치않고 끝까지 버티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유다의 죄와 벌을 거울삼아 작은 죄도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가에 심기운 나무 ( 17:6-8 )
사막의 떨기나무는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권력을 삼고 그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광야 건조한 곳, 사람이 살지않는 곳에 살며 쉽게 불타버리고 꺾기워집니다. 그러나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더위와 가뭄에도 끄떡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쉽게 멸망당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영원히 복을 받습니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 ( 17:9 )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않으므로 사람의 눈을 속일수 있으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며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의 눈은 속일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악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속에서 나오는 것이 악하고 더럽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가 흙에 기록되는 이유 ( 17:13 )
흙에 기록된다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계20:15), 다만 흙에서 낳아 흙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떠난 것은 생수의 근원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므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그이름이 영원히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 대조됩니다(빌4:3).
안식일 성수 ( 17:21-27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경우 유다 왕조의 왕위가 끊어지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이 번영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안식일을 준수할때에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계속 제사지낼수 있도록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준수치 않을때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말것입니다. 그외에도 안식일을 준수할때에는 여러가지 복을 받을 것이나 그렇지 않을때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켜야만이 참된 안식을 누릴수 있으며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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