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귀환에 대한 약속 30:1-9
(1)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고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깊이 숙고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그말씀을 읽을때, 보다 그것이 주의할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말씀들을 한데 모아 묶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많은 다른 말씀들을 거기에 더추가하실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다가올 세대, 곧 그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게될 세대를 위하여 그말씀을 기록해야 했다. 그는 그것들을 '편지에'가 아니라 '책에' 기록해야 했다. 이는 기록보관소에 보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한 본문의 예언도 기록되어야만 했다. 이는 이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 읽혀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조상들을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가 되리라는 것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롬 11:28). 왜냐하면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 포로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시며, '그들을 그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할 것'이고, 그렇게하여 그들로하여금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레미야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지시받고 있다. 곧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바로 그러한 말씀들이다(4절).
1)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현재 처하여있는 당혹함과 갈대아인들이 그들에게 행하였던 온갖 침략들을 지금도 여전히 당하고 있는듯이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5절).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즉 위험의 경고를 듣고 외치는 공포의 소리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평안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었다.' 전쟁터에 있는 남자들까지도 조국의 재난에 어쩔줄을 몰라함으로, 해산하는 여자와 같이 보일 것이다. 즉, 고통이 그들에게 극심하게 이르렀고, 그들은 그고통을 피할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6절).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심판의 날이 여기에서 큰날로 일컬어지고 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욜 2:31;유 1:6). 이와같은 날이 결코 이전에는 없었을정도로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멸망은 우리 주님께서도 비할데 없이 큰사건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마 24;21).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큰 곤난중에 처하게되는 슬픔의 때이다. 야곱의 환난의 때라함은 포로생활의 전시기를 말한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재난을 복된 결말로 종식시키라고 확언하셨음을 기록해야 했다.
① 야곱의 환난은 끝이날 것이다.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② 야곱을 곤고하게 만들던 자들이 더이상 그에게 해를 끼칠수 없게될 것이다(8절). 그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멍에를 꺾어버리며. "그토록 무겁게 짓누르고 너를 심히도 고통스럽게 하던 멍에가 꺾어지리라." 내가 네 줄을 끊으리니. "너를 다시 자유하게할 것이며 평안하게 하리라. 그들이 다시는 너희 소유나 수고로 자신들을 부요케하지 못하리라."
③ 하나님의 자비는 그들이 다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게됨으로써 종국적으로 성취된다(9절). 때가 이르면 그들은 환난에서 구하여냄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마음을 주시고 아울러 심길 기회를 주심으로 그들을 준비시키고 그자격을 구비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은' 것은 하나님을 섬기게하려 함이라(눅 1:74,74). 그들은 저희 자신의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포로생활 시절에 그러했던 것과 같이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이끌려지지도, 강요받지도 않게될 것이다. 그들은 저희의 '왕 다윗을 섬길' 것이다. 그러한 통치자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때때로 그들위에 세우실 것이다(스룹바벨처럼). 여기 이말씀에는 보다더 큰의미가 있다. 갈대아 역본은 이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읽고 있다. 즉, "그들이 메시야(혹은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저희의 왕을 복종하리라." 유대인 해석가들은 그리스도에게 이말씀을 적용한다. 포로생활에서 귀환하면서 시작된 이약속은 메시야시대까지 이르를 것이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었기때문에(마 22:42) 그들의 '왕 다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이름으로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였다(마 20:31,32).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고 종종 말해진다(행 3:26;13:23,33). 여호와를 저희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림받도록 스스로를 그에게 내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듯 아들에게도 영광을 돌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보자이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을 받은 자들은 또한 멍에도 져야하는 것이다.
Ⅱ. 구원과 치유에 대한 약속 30:10-17
포로생활을 하고있는 유대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귀중한 약속들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다. 주께서 그들을 흩으셨던 것이다(11절). 그리고 그들에게 이모든 일을 행하셨다(15절). 이일을 행하신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과 같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절).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판결에 따라 징계할 것이나 결코 마땅히 받아야할 벌에 비해 과중되이 징책하거나 견뎌낼수 없을만큼 심하게 벌내리지 않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죄를 발견하실때 더욱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며 그 '죄악의 큼'을 인하여 징책하신다(14,15절).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애종으로서 의도하신 징계를 그백성들과 다른 사람들은 적의의 행위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그를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징계하는' 이로 간주하였다(14절). 실로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나치게 가혹히 다루시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는 것같이 여겨졌다. 욥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혹히 대하시며 자신의 상처를 깊게 하셨다고 불평한바 있다.
(2) 그들의 친구들이 그들을 버렸다(13절). 만일 우리가 비난을 듣게된다면, 우리는 친구들이 변호해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혹 우리가 아프게 되면, 혹은 괴로운 일을 당했거나 상처를 입게되면, 우리는 친구들이 곁에서 동정을 베풀며 사정에 따라서는 치유를 받도록 도와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대적하여 치실때에 누가 감히 그들을 도울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고 구원의 손길이 닿지못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네 상처를 고칠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12절).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15절). 그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슬픔은 치료할 약이 전혀 없으므로 경감될 징후는 조금도 보이지않고 오히려 더욱더 굳어져 가는듯이 보인다. 이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멸시의 대상이 된다(17절). "그들이 너를 쫓겨난 자, 멸망받도록 버려진 자라고 할것이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고 일컬으리라." 이제 모든 것은 황폐하게 되었다. 전에는 시온에 거했었으나 지금은 포로가 된 백성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쫓겨난 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시온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찾지않으며, 그들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들도 없다.
(3) 이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하신때에 그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듯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증해 주신다. 내가 너를...구원하리니(10절).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11절).
2) 비록 그들이 저희의 본향에서 멀리 떨러져 있을지라도, 즉 그들이 '원방에, 포로된 땅에' 있을지라도 구원이 그들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자손들을 그곳에서부터 구하여낼 것이다(10절).
3) 비록 지금은 그들이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지만, 때가 이르면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며, 안전하고 평안하게 되어 그들을 '두럽게할 자'가 아무도 없게될 것이다(10절).
4) 비록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있는 그열방들은 멸망하게 될지라도, 그들 자신들은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다(11절). 내가 너를 흩었던 그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교회가 때때로 매우 침체된 상태에 빠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진멸하시지는 아니하신다(10,18절).
5) 비록 하나님께서 공의로 그들을 징책하실지라도, 그는 자비로이 그들에게로 되돌아 오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때가 이르면, 그들의 죄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6) 비록 그들의 대적들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권세를 부숴뜨리실 것이다(16절).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그들을 먹는 자들 전부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포로가 되며 그들을 약탈하는 자가 약탈을 당하게' 될때가 올것이다.
7) 비록 그상처가 치유될수 없을듯이 여겨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낫게하실 것이다(17절).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하리라.
(4) 그들은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받고있다. 왜냐하면 이귀중한 약속은 두려움과 슬픔, 둘다를 무마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 내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도 말라." 그들은 아무런 소망도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아니되었다(15절).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그것은 '네 죄를 인함이라'(14,15절). 그러므로 슬퍼한 것이 아니라, 대신 회개해야만 한다.
Ⅲ. 재건과 번영에 대한 약속 30:18-24
그들의 재난의 시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가 주어지리라는 약속이 계속되고 있다.
(1) 도성과 성전이 중건될 것이다(18절). '야곱의 장막들'과 '그 거하는 곳들'은 사람들에게 포로됨이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거처가 중건되고, 하나님께서는 '그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그곳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공의의 본보기가 되어왔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때, 예루살렘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다.' 비록 황폐해진 산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언덕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 '성읍으로 무더기를 만드시는'(사 25:2) 그분은 그기쁘신 뜻대로 다시 무더기를 성읍으로 만드실수 있다. 그궁궐(성전, 곧 하나님의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것이며. 다시말해서 그궁궐은 옛모양대로 다시 세워질 것이다.
(2) 신성한 절기들이 다시 엄숙하게 거행될 것이다(19절). 그성읍과 성전과 야곱의 모든 거처로부터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나오리라.'
(3) 백성의 수효가 많아지며 증가될 것이다. 그들은 '쇠잔치 아니하겠고 비천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히려 열방중에 탁월한 민족이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케하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구원받을 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은 곧 교회의 영예이다. 원로원에는 성실한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며 성도의 회중에는 신실한 예배자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4) 그들은 선한 통치다. 아래 다스려지는 축복을 받게될 것이다(21절). 그 치리자와 판관들이 '본족에서 나올 것이다.' 즉 저희 자신의 민족 출신들일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이방인 혹은 원수들의 다스림을 받지않게될 것이다. 그통치자는 그들중에서 나올 것이며. 그는 백성들과 함께 포로생활의 고통을 나눴던 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말씀은 우리의 통치자요, 왕 다윗(9절)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운데서 나오신 분이다. 그리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형체를 지니신 분이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하므로. 이말씀은 다음 두가지로 해석될수 있다.
1)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말씀이리라는 해석이다. "내가 그들을 내게로 가까이 이끌어 예전과 같이 성전에서 나를 섬기게 하리라. 그리고 '내 백성'(22절)으로서 나와 언약관계에 있게 하리라."
2) 통치자에 대한 말씀이리라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단수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통치자가 직무를 맡도록 합당하게 부름받을 것이며 매사에 하나님과 상의하도록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질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더나아가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케 한다.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합당한 사역과 직무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받으시는 대제사장으로서 그는 우리의 이름과 입장을 대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같이 중보자들로서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기름부으셨으며, 자신이 기뻐하는 자로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그리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이일을 수행하였다.
(5) 그들은 저희 열조가 맺었던 언약에 따라서, 다시금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될 것이다(22절).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그리고 우리를 그의 백성이 되게하시는 것은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행 15:14).
(6) 그들의 대적들은 그날수가 계수되어 멸망받을 것이다(20절).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는'(시 105:15) 일은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게될 것이다. 23절과 24절 말씀은 앞에서도 나온바 있다(렘 23:19,20). 앞에서의 이말씀은 이스라엘중에 있는 사악한 위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이었거니와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사악한 위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에서 항거할수 없는 회리바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통 회리바람은 잠시동안만 나타나며 금방 그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여호와의 진노는 계속되는 회리바람이다. 그리하여 그 의도하였던바 목적을 이룰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는...뜻한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그의 진노의 목적은 그의 사랑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완벽히 성취될 것이다. 즉 그는 그 '마음의 뜻한바를 행할' 것이다.
# 핵심
30:1-24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이 성취될 것을 예언함으로써 위로와 소망을 준다.
자기 산(30:18)
히브리어 ‘텔’은 ‘흙더미’(KJV-her own heap) 혹은 ‘폐허’(NIV-her ruins)를 뜻한다.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다의 성읍들이 파괴되어 폐허더미가 된것을 가리킨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지명에 ‘텔’이란 말이 복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많이 볼수 있는데, 그것은 성읍의 폐허가 묻혀있는 언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 묵상
책에 기록할 하나님의 말씀 ( 30:2 )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구원의 말씀을 적어 70년후의 새세대에게 전하라는 뜻입니다. 70년이전의 세대들은 멸망과 재앙의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장차 유배지인 바벨론에서 태어날 세대들은 심판과 재앙가운데서 태어났으나, 그들의 미래에는 구원과 위로가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와 상처의 치유자 ( 30:10 )
아무도 인간의 죄를 제거하거나 그것으로인한 상처를 치유해줄수 없습니다. 다만 한분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라고 하는 질병을 고치실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애쓰는 인간의 노력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죄는 스스로 해결할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의롭게 할수 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 30:12-17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중하고 수다함을 인하여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곧 그들을 치유하여 그들의 상처를 낫게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깊을지라도 하나님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송사에서의 변호자 ( 30:13 )
유다의 송사를 변호해줄 자가 없다는 본문의 말씀은, 유다가 그 죄악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게 되는데, 이때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만 있지 그들을 변호해줄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들 역시 믿는다고 하면서도 알게모르게 짓는 죄악때문에 늘 하나님앞에 피소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변호할 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는 방법 ( 30:21 )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실때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납지 않으셨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일지라도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은 그의 백성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앞에 나아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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