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을 다시 찾은 야곱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그리워 하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앞으로 형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먼저 사람을 보냈다. 그때 형 에서는 벌써 야곱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지 400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떠났다. 이 보고를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의 모든 종들과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어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면서 하 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성경에는 그의 기도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며 네 씨로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이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기도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크게 응답해 주셨다. 과거에 그의 외삼촌 라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야곱을 해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동시켜서 그를 해하지 않게할 뿐만 아니라 에서가 야곱의 목을 안고 울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창33:12에 보면 기적적으로 마음이 녹아진 에서는 야곱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떠나 가자, 내가 너희 앞잡이가 되리라" 했다. 그러나 야곱은 굳이 그것을 사양했다. 창33:13~14에 보면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며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했다.
이 말을 들은 에서는 다시 그러면 자기의 종 몇사람을 그들의 인도자로 남겨둘 것을 말했으나 야곱은 그것까지도 사양했다. 야곱이 그처럼 다 사양한 이유는 그가 말한 그대로 하나의 겸손한 사양으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형을 떠나 보낸후 전혀 길을 달리했다. 창 33:17에 보면 야곱은 길을 돌려 숙곳이란 곳에 이르렀다. 에서가 사는 세일은 먼 남쪽에 있는 땅이요, 숙곳은 북쪽에 있다. 얍복강 북쪽이다. 얍복강을 건너온 야곱은 발을 돌이켜 북쪽을 향하여 건너온 강을 다시 건너 뒤로 물러갔다. 천천히 세일로 가겠다고 했으나 그의 발길은 반대 방향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야곱은 고향 땅과 아버지 이삭이 사는 곳으로 가지않고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렸을까? 아무래도 그는 자기의 형 에서가 사는 곳 가까이 가기를 상당히 꺼린것 같다. 그는 차마 아직도 살아계신 자기의 아버지 이삭을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 아마도 옛날의 자기의 죄를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이 불안했고 그의 발걸음은 그렇게 무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현실적으로는 그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다가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다고 했으니 먼 길을 걸을 수도 없었던 줄 안다.
창 33:17에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했다고 했다. 숙곳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의 부러진 육신의 상처도 치료한 줄 안다. 집을 지었다고 했으니 수년간은 거기에서 병을 치료하며 지냈을 것이다.
본문 창33:18에 보면 그후 그는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렀다고 했다. 여기 [평안히]란 말은 [건강한 몸으로]라는 뜻이 있는데 그가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렀을 때는 그의 몸도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을 가진 말인줄 안다. 세겜성이라고 하는 곳은 숙곳 서쪽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써 거기에서 그는 땅을 사고 자리를 잡았다. 성경에 읽은대로 거기에서 그는 어린 자녀들을 키우면서 10여년 동안 산 것으로 안다. 10세 전후의 어린 자녀들은 벌써 20대를 넘어섰다. 이제 혈기에 넘치는 그의 자녀들은 그곳에서 그만 무서운 살인사건을 일으키게 됐다. 살인사건의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 이방 여자들과 섞이었다가 그만 그곳 하몰 왕의 아들 추장 세겜의 연애를 받아 몸이 더럽혀졌다는 말과 또 뒤이어 청혼이 있었다는 말을 야곱의 아들들이 듣고 심히 분히 여겼다.
드디어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이 전부 할례를 받아 누워있는 기회를 타서 그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려워 했다. 본문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한 말이 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집이 멸망하리라"고 하면서 심히 당황해 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기록을 읽으면서 자연히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야곱에게 왜 이러한 큰 환난과 근심이 또 있게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야곱의 모든 환난은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하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야곱과 요셉을 비교해 볼 때 그 아들 요셉도 많은 환난을 겪은 사람이다. 그러나 야곱의 환난과 요셉의 환난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른다. 셩경에 나타난대로 본다면 요셉의 허물과 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반대로 죄를 짓지않고 깨끗이 살고자 했기 때문에 많은 환난을 겪기도 하고 감옥에도 갇혀야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자기의 형들을 위해서 찾아갔지만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처럼 요셉의 환난은 자기의 죄로 온 징계가 아니라,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생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고난은 마침내 큰 영광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환난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도 요셉을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본다면 야곱은 어디까지나 허물많은 우리 성도들의 그림자로 보아도 좋을 줄 안다. 이러한 원칙 밑에서 우리는 이제 야곱이 다시금 크게 근심하여 두려워할수 밖에 없는 그러한 환난을 당하게 된 이유를 성경에서 쉽게 읽을수 있다.
그러면 이제 그가 세겜에서 10여년 세월을 살고 있을때 그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창35:2에 보면 그가 큰 환난을 당했을때 자기의 가정 식구들을 불러 하는 말이 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의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라고 했다. 여기에서 보면 야곱은 그때까지도 자기 집의 우상을 청산하지 못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야곱의 감화가 그 가족들에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가 이미 30여년전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갈 때에 환상중에 하나님의 크신 보호를 체험하고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서약한 말이 있다. 창28:20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의 후일 역사를 보면 그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는 다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30여년 동안 그와 같이 했다. 그 소원대로 먹을 양식을 주되 풍성히 주셨고 입을 옷을 주셨고 또 평안히 가나안까지 돌아오게도 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했는가? 자기의 서원대로 한가지도 실천한 것이 없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지마는 아직도 그의 가정에서는 우상을 청산한 흔적이 없었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을 실천한 흔적도 없고, 벧엘에서 돌기둥을 세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가나안 땅에 돌아온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그때까지도 벧엘을 찾아간 일도 없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징계가 있게 된것은 당연하 일일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중하게 받고도 그것을 보답할 줄 몰랐다. 자기가 위급할 때는 하나님의 찾으며 서약도 했으나 평안해질 때는 그 은혜를 모두 잊어버린 사람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얍복강에서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고 천사에게 맞아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는 울며 간구하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잊어버렸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야곱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하여 [디나 사건]을 겪게 한 줄 안다. 사실 그 때에 야곱의 영혼은 깨어 났다. 깨끗이 잊어버렸던 옛날의 벧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기 식구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우상을 제하고 몸을 정하게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이제 벧엘로 가자. 거기에서 나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자"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후 그는 진정 회개하고 그의 생활은 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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