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거쳐 부활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20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로마서 6장 4절]
4절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언젠가 제가 부흥회 인도 기간 중에 저녁에 빨간 이불을 덮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빨간 미등을 켜 놓고 기도하고 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방금 빨간 이불이 하얀 이불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불을 켜 보니 분명히 빨간 이불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빨간 등을 켜고 빨간 색을 보면 하얗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빨간 색을 통해 빨간 색을 볼 때 희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 죄없는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얻고 부활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곡식이 죽기 싫다고 그대로 있으면 실상 죽은 것이요,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어 다시 사는 것처럼 죽음은 죽음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 속에 들어갔는데 산불이 났습니다. 사방에서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산불에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부터 새롭게 사방으로 불이 퍼지고 자기는 불타버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은 죽음으로 정복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역설적인 진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가지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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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어야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죽지 않고는 결단코 부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거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 죽었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새롭게 되어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죽은 것처럼 믿고 살아야 하고 또한 예수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믿고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온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죽었다가 산 자처럼 모든 사물을 전과는 달리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분토와 같이 여기며 살 수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복음만을 전파하다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만을 위해 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분토는 원어 성경에 보면 똥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 죽고 난 후에 세상 것을 똥과 같이 여긴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존전에 서게 될 때 세상 것은 도무지 사모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행복은 하늘나라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생활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자같이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6: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언젠가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청년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생각납니다. 그는 훈련이 얼마나 힘든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목사님 설교 중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라는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나서 고된 훈련에 임할 때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훈련에 임하고부터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훈련일지라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관후보생을 줄여 사후생이라고 부르는데 자기는 그 의미를 바꾸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우리 성도들은 모두 과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 수가 없고,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옛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지식 많고 착하고 재주가 많아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속해 있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을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새 사람의 생활은 순간순간 믿음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것처럼 살아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 사람의 생활, 즉 성화된 생활은 순간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이 풀어지면 죄악된 옛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죠지 뮬러 씨는 말하기를 "나는 어느날 죽었다. 죠지 뮬러에 대해서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에 불평하고 실망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칭찬을 듣는다고 우쭐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몸이 됨으로써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말씀을 명심하고 믿음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것으로 그치는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죽은 후에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산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로마서 6:13절에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드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날마다의 삶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맡김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2. 많이 죽어야 남을 많이 살립니다.

"죽으면 한 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 줄 압니다.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린다는 말은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내가 희생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위해 우리가 많이 희생하는 삶을 살 때 다른 많은 사람이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 인해 물이 갈라졌고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마자 요단강이 합쳐져서 더 이상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제사장들이 죽음 한가운데 굳게 버티고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교역자들이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려면 우선 자신의 존재가 희생되고 죽어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역자들이 부흥되는 교회 목사의 설교를 흉내도 내고 꿈도 크게는 가지는데,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어지는 생활은 닮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될 것 같으면서도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죽음을 거쳐야 부활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많이 죽을수록 남을 많이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로 자신을 여기고 생활하여 자신도 온전히 살고 남도 많이 살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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