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고린도후서 6장 1절~2절]
1절 -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절 -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새해를 시작한지 벌써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어떻게 생활해 오셨는지요. 최선을 다해 주어진 시간들과 환경들을 선용하셨습니까. 우리에게는 때마다 해야할 일과 붙잡아야 할 일이 있는데, 우리는 자주 그것들을 지나쳐 버리고 놓쳐 버림으로써 아쉬움을 남길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한달밖에 지나지 않은 올 한해의 시간 속에서도 벌써 그러한 아쉬움이 많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에게 실로 유익하고 좋은 기회들이 왔음에도 그것을 놓쳐 버렸다면 그것은 진정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고기 통을 옆에 놓고,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고기를 낚아서는 10인치짜리 자로 재서 그 자보다 큰 것은 바다에 도로 놔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 그 큰 물고기를 왜 놔줍니까'라고 물었더니 '우리집 후라이팬의 크기가 10인치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큰 놈은 필요없어서 도로 놔줍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성공과 축복의 기회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으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 엄청난 기회가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지만, 그것을 붙잡지 못해서 별 볼 일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로 우리는 항상 중요하고 유익한 일들이나 기회들을 놓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될 기회들은 무엇일까요.

1. 성공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를 다 주시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리석게도 그것에 대해 무심해서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가 그러한 성공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람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8:3절에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다 주위 여건이 훌륭해서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출생하셨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겠느냐"고 비웃을 만큼 시골 동네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분은 단 몇 백리 밖에도 나가보지 못했으나,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생을 무명옷을 걸치고, 구두도 신지 않고 맨 발로 다닌 분이지만, 6억이 넘는 전인도 사람은 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람,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주위 여건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됨됨이에 달려 있고, 인격에 달려 있으며 그 사람의 노력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성과 재능을 다 주셨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역이 나쁘거나, 가정 환경이 나뻐서 성공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발밑에 있는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란의 골칸다(Golcanda) 다이아몬드 광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옛날, 이곳에 농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그 농장을 팔아가지고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다이아몬드가 많이 나온다는 모래 백사장을 사가지고 다이아몬드를 찾으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패가망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농장을 산 주인은, 어느날 검은 돌틈에서 이상하게 광채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검사해 보니까, 질 좋은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는 그 농장을 발굴하여 다이아몬드 광산을 만들어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성공하는 장소를 따라 찾아다니지 말고 지금 현재에 있는 그 장소,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남의 성공만 바라보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의 영광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자는 자신의 발밑에 있는 성공을 발견하고 이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부지런하고 충성하면서 최선을 다할 때,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충성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성공을 이루는 중요한 관건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손안에 있는 적은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가 남편은 죽고, 빚은 많아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을 때,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부르짖어 호소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말씀했습니다. 그 과부는 겨우 기름 한 병이 있다고 고할 때, 그것을 가지고 빈 병을 많이 빌려서 문을 닫고 부으라고 할 때, 빈 그릇이 기름으로 다 채워져서 빚을 갚고 잘 살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내가 가진 것이 크든지 작든지, 많든지 적든지, 그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천명 이상의 군중을 이적으로 배불리 먹이실 때도 하늘에서 떡과 생선이 뚝 떨어지게 하는 방법을 쓰시지 않고 한 소년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그것을 근거로하여 그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면서 노력할 때 그 사람이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축복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삭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큰 복을 빌어주려고 할 때, 야곱이 먼저 별미를 해가지고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들어가서 축복을 몽땅 받았습니다. 후에 늦게 들어온 에서는 축복받을 기회를 놓쳐버리고 통곡하며 나갔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뒤로 미루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복받을 일을 자꾸만 해야 합니다. 갈 6: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받을 씨를 많이 심으면 복의 열매가 나타나는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대로 그 기회를 포착해서 축복받을 행동을 해야 됩니다. 주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할 기회가 올 때, 그것이 축복의 기회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결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자기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던 귀한 것을 엘리야가 내어 놓으라고 할 때, 참으로 야속하고 잔인한 요청이었지만 한끼 덜먹고 굶어 죽을 셈치고 순종했더니, 3년 6개월 비가 내리지 않는 흉년기간 동안 내내 밀가루 통의 밀가루가 마르지 않았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에게는 마지막 있는 것까지 바쳐야 할 때가 축복받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예전에 부산 모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한 훌륭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김모 집사님이 점심시간에 말씀하기를, 일년 전 부흥회 할 때 그 교회 사택 건축 헌금을 위해 사료상을 하는 김 집사님이 있던 돈 50만원을 몽땅 챙겨서 바쳤더니, 부흥 강사님이 천배나 축복해 달라고 기도를 해주더랍니다. 이 젊은 엘리트가 얼마나 순수한 믿음을 가졌던지 그 축복을 아멘으로 받고, 천배나 주실 줄 믿었답니다. 그런데 12월이 다가도록 천배는 커녕 열배도 주시지 않아서 계속 믿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커피점에서 차를 마시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을 하는데 '그거 건질 수는 없을까 그 많은 밀이 썩는 날에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오염 되어서 다 버릴텐데...'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어보니까, 밀을 수천톤 싣고 들어오던 무역선이 예인선을 기다리다가 안오니까, 그 큰 배가 안내없이 해운대 앞바다로 들어오다가 암초에 부딪혀 배가 파손됨으로써 그만 바다에 몽땅 밀을 쏟아버리고 배만 수리해 갔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김 집사님에게 지혜를 주셔서 남들은 해수욕장 오염될 것을 걱정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김 집사님은 그것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돈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부산 시장, 경찰서장, 보험회사 사장을 찾아가서 '해수욕장이 오염 되면 큰일이니 내가 건지게 허락해 주십시오' 했더니, 허가장을 써주더랍니다. 그래서 배 한척에, 잠수부를 동원해서 건지기 시작하니까,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도 우..하고 덤벼들더랍니다. 그래서 허가장을 내보이고 손도 못대게 하고 건지기 시작하는데, 대략 건져도 한달은 걸려야 다 건지겠고 그것은 최소한 5억원어치 이상이 된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또한 그 말을 듣고 있던 그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하루 건졌는데 벌써 300만원이나 십일조를 했고, 김 집사님이 찾아와서 저금통장과 도장까지 맡기면서 전도비건, 선교비건 하나님 사업에 필요한 대로 찾아서 쓰라고 하더랍니다.

그로부터 일년 후에 그 교회 목사님이 찾아오셨길래 '그 김 집사님 잘 있느냐'고 했더니, 그 김 집사님이 더 큰 수지맍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뭐냐고 했더니, 제주도에 원목을 싣고 오던 큰 배가 풍랑을 만나서 제주 해안에 원목을 다 쏟아버렸는데, 그것을 원산지보다 더 싼 값에 사서 밀보다 더 큰 돈을 벌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축복받을 일을 자꾸하면서 먼저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면 하나님은 반드시 현세와 내세에 크게 갚아 주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시간과 몸을 바쳐 봉사하는 것도 다 복받는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부디 축복의 기회가 올 때 놓치지 말고, 미루지 말고 포착하는 복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축복을 받고 잘 살아도 그것은 모두 전관석화와 같이 눈깜박할 사이에 지나가고 사라져 버리고 말지만,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엄청난 기회를 놓쳐 버리면 영원히 도망칠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형벌의 불못에 던지워져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눅 16:19~31절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음부의 고통 중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로를 내려보내서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음부의 고통에 대해 증거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그곳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서 충분히 들을 수 있다고 대답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사실 그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사람을 통해, 서적을 통해, 방송을 통해, 그밖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원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구원받지 못한 자의 비참함이 경고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고 거부함으로써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지만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이 이를 거절하고 또한 제한적인 삶의 시간으로 인해 그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고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라고 간곡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실로 구원받을 때, 은혜받을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기회를 끝내 놓친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비참한 불못의 형벌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현재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할지라도 그것은 순간에 불과할뿐 구원의 기회를 놓친 자들에게는 영원한 고통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주어지는 구원받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기회를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구원의 복음, 영생의 말씀을 간절히 전해주는데도 무감각하게 들어 넘기거나 거짓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아직 예수님을 참으로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 영접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교회에 다니는 이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을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6)고 했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했습니다. 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했습니다. 지금 곧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으시길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값진 피를 흘려 마련해 놓으신 귀중한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또 이미 구원받은 성도님들은 어찌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이 구원의 기회를 붙잡도록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히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회를 적절하게 베푸십니다. 성공의 기회, 축복받을 기회, 가장 중요하게는 구원받을 기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공과 축복과 구원의 문제는 결국 그 주어지는 기회를 우리가 얼마만큼 최대한으로 선용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 모두 그 기회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최선을 다해 붙잡고 선용함으로써 성공과 축복과 구원을 이루는 지혜로운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아 메 -

 

 

 

직분을 맡은 자의 올바른 자세

[고린도후서 4장 1절~10절]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절 -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절 -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절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절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절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금년에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직분을 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 직분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은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해나가리라 믿습니다.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직분에 임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올 한해 동안 내내 변함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크든 작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어떤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런 일입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의를 이루는 귀한 영적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직분을 맡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먼저 직분의 영광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능히 감당해 내는 데 필요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한 직분에 대한 불성실한 감당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의 화를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직분을 맡은 우리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일까요?

1. 낙심하지 맙시다.
본문의 1절에서 먼저 바울은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직분을 감당할 때에 가장 많이 찾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낙심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는 요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예기치 않은 시련, 세상의 유혹과 핍박, 심지어는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도모하다 발생하는 성도간의 사소한 다툼이나 불화까지도 우리를 낙심케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경우까지도 생각해서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요 14:1절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빌 4:13절에서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시 34:6절에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하였고, 마 11: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였으며, 고후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듯 죄인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능치 못할 일이 없게 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주님이 계신데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낙심하십니까.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인생의 모든 짐을 짊어 주시며 우리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시는 주님이 계신데 왜 낙망하십니까.

이제 이런 주님을 생각하고, 바울이 롬 12:12절에서 말했듯이 환난 중에도 남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걸음을 하나 하나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적극적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 16:9절 말씀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부끄러운 일을 버립시다.

다음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2절에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간혹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직분을 맡았으면서도 깊이 감추어진 부끄럽고 악한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품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은밀성으로 인해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까지 속일 수 있겠습니까. 수 7:1절의 아간의 경우를 보십시오. 또 행 5:1~11절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하나님을 속이려 했지만 속이지 못하고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은밀한 중에 있는 죄와 부끄러운 악습을 벗어 버립시다. 사단은 은밀한 중에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력히 유혹하지만, 그때 바로 우리에게 의로운 새 언약의 직분을 맡겨주신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심을 생각하고 유혹을 강력히 물리치는 우리가 됩시다.

만약 직분을 맡은 우리가 부끄러운 죄와 악습을 버리지 못한 채 지낸다면 우리는 온전히 직분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 결국 보다 많은 영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될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냅시다.

또한 바울은 5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전파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 직분을 부여받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 돌리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그 직분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고 높이는 일만을 하십니까 혹 그 일을 하다가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함께 높이려 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빌 3:3절의 바울의 표현대로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들이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 안에서 의로운 직분을 맡은 자입니다. 이러한 직분자답게 어떠한 환난과 시험, 역경 속에서도 낙망하지 맙시다. 그리고 숨겨진 부끄러운 일을 버리고 양심에 꺼릴 것 없는 떳떳한 사람이 됩시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전파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영광과 존귀가 돌아가게 합시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서 맡겨진 귀한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는 복된 생활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 아 멘-

제목 : 더 큰 세상을 열어가는 지혜 (공재영 목사님)

[고린도후서 1장 15절~22절]
15절 -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절 -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절 -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절 -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절 -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절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절 -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절 -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는 자신이 축복된 자리에 있다고 보는 사람과 축복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축복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며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이 축복이라면 이것은 사람으로 대접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은혜가 분명함에도 지금 고통의 자리 때문에 그 은혜의 자리가 소용없다고 한다면 사람이 세워질 수 있는 자리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이 넘는 공생애를 마치시는 시점에 마지막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려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의 발을 붙잡고 한 사람씩 손으로 씻겨주시고는 그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순서가 베드로에게 왔을 때에 베드로는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보여주신 자리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사는 성도가 받고 사는 은혜가 얼마나 큰 혜택의 자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자리에 있을지라도 담대하게 세우는 큰 세상을 소유한 자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큰 혜택과 큰 세상을 열어가는 지혜를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만 하는 세상을 살아가지 맙시다(18).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의 자리에는 은혜의 자리에서 입혀주는 특별한 혜택의 자리가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를 일컬어 서로가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은혜를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열어야 하는 믿음의 세계가 무엇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성의 복인 것입니다. 이 관계성의 복이 확실할 때에 큰 세상이 열려지게 되어 담대하게 자신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성의 복이 닫혀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것만 보면서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혜택의 자리를 무시하게 되고 함께 세워진 것을 불행하게 보는 작은 세상의 주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자리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환경이 허락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자신의 진실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거짓이라고 하여 닫아버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믿어주실 것이라고 하며 변함없이 품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리에 찾아오는 갈등은 하나님이 믿어 주시는 삶이 사람에게서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이때 더 큰 세상을 열어가는 지혜는 나를 향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을 믿게 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예라고 겉으로 말하면서 속으로 아니요 라고 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주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품으시고 더 큰 세상을 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증거하기를「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6,7)」라고 하신 것입니다. 높으신 분이 낮은 자에게 오실 때에는 낮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낮은 자를 높여주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자리에 오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세상을 알게 하는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지혜가 자신의 삶 속에 자족하는 은혜를 받게 하고 자신의 진실을 왜곡되게 하거나 묻어버리지 않게 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장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열어주시려고 예수님은 나사렛 시골 예수가 되었고 죄인 예수가 된 것입니다.

2. 삶을 세워주는 힘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19).
하나님이 사람의 자리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 주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일을 알게 하시려고 선포하신 자리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은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 세워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 자리를 성경이 증거하기를「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세워주는 힘의 근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을 슈퍼맨의 자리에 세우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 환경에서 담대하게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잘 적응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복되게 세우는 자리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일도 감당하게 됩니다. 그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사도 바울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처럼 좋은 자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세워주시려는 자리를 성경이 증거하기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고 하신 것입니다. 이 자리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이, 어린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공을 굴리는 것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값을 치를 수 있어야 열려짐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세워주시려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 담보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담보물이 큰 것일수록 누리는 복이 큰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나를 위해 주신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세상을 품고 견고하게 세워지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3. 나의 존재가 약속의 증거물인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20).
성경이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로 세워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기를「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고 했고,「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4,7)」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기를「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9)」고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의 자리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예배)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시50:5)」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값을 치르시며 우리를 부르셔서 약속의 증거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 자리를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세워주신 것입니다.「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라(사43:4)」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우연히 태어났다거나 숫자 하나 채우려고 이 세상에 세워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복된 것임을 고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우리의 삶을 닫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를 힘 있게 세워주는 것은 나를 위한 변호자가 있을 때입니다.「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관계이며 피로 값을 치러서 맺어진 약속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자리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증거물로 자신을 세울 수 있을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열려지는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는 결코 같은 세상에서 세워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큰 세상을 열어가든지 아니면 더 작은 세상을 열어가든지 둘 중에 하나의 세상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세상 곧 우리로 하여금 자랑스럽게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이루는 지혜는 예수님을 삶 속에 받아들이며 고백할 때에 성령님이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실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리만을 바라보지 말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물인 것을 믿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더 큰 세상의 복을 누리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제목 : 고난의 언덕 (이동원 목사님)

[고린도후서 1장 3절~7절]
3절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절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절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절 -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절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십자가의 신학"과 "번영의 신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식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대조적인 신학입니다. 이 두 신학은 정반대 모습의 순례자를 낳게 됩니다. 천로역정의 "고난의 언덕" 앞에 선 두 가지 유형의 순례자들은 누구입니까?

1. 편하지만 "굽은 길"을 선택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존 번연은 이 길을 택한 대표적인 순례자들의 이름을 허례와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편한 길을 선택하지만 그 길의 이름은 위험과 멸망이었습니다. 또 다른 순례자는 겁쟁이와 불신입니다. 그들은 위험한 일들을 만나는데 어떻게 길을 갈 수 있냐며 출발점으로 역주행하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고난을 직면하기에 너무 게으른 순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이런 겁쟁이나 불신의 순례자들이 과연 없을까요?

2. 험하지만 "곧은 길"을 선택한 순례자입니다.
그가 바로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가 고난의 언덕에 도달했을 때 좁은 문에서부터 이어 온 길은 분명히 가파른 고개 길과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묵묵히 험한 길을 선택합니다. 그가 선택하자마자 고개 자락에 시원하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을 발견하고 갈증이 사라지도록 물을 마시게 됩니다. 존 번연은 이 대목에서 위로와 안식의 은혜 중에도 방심치 말아야 할 경고를 남깁니다. 깜빡 졸음에 빠진 크리스천의 모습을 말합니다. 순례의 여정에서 방심으로 말씀을 상실하고 영적인 잠에 드는 것은 누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 다시 언덕길을 오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언덕길은 결국 우리를 시온의 영광, 새 예루살렘의 왕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신앙의 길을 완주하는 성도들은 결국 고난과 위로를 통해 궁극적인 소망을 붙잡게 된 이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구원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Ⅰ. 완고한 죄인들에 대한 사도의 엄한 경고 13:1-6

 

1. 완고한 죄인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1,2)

그는 엄하게 행함에 있어 다급하게 하지 않았으며 한번 두번 경고를 하였다(1절).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첫번째 서신과 두번째 서신을 통해 권고하였는데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권고하였다(2절). 우리는 잘못한 우리의 형제에게 그의 잘못됨을 알게 하기 위해 여러 번 찾아가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 엄하게 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경고와 위협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언제나 참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2. 그가 그처럼 엄해야 했던 이유(3-6)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의 사도직을 문제삼게 하는 것이 거짓된 교사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그들은 약하여지지 않았고 확고하고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3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4절).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했으며, 특별히 세상을 기독교로 개종시키시는 그의 은혜의 능력을 증거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기독교를 확증해 보라고 말한다(5절).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다면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신 증거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스스로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확증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가 버리운 자 되지 않은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다(6절). 우리는 우리가 믿음 가운데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 시험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우리 자신을 확증해야 한다.'

 

Ⅱ.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사도의 기도 13:7-10

 

1.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사도의 기도(7)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데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사도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이유(7-10)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장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옳은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좋은 평판을 듣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가 그들에게 가게 될 때에 그들로 결코 책망받을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8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도는 그들이 벌할 권이 전혀 없게 될 것이다(9절). 9절이 나타내는 바는 곧 비록 우리가 핍박과 멸시로 인해 약해져 있다 할지라도, 너희가 옳게 행하는 가운데 인내하며 강하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한, 우리는 그 환난을 기쁘게 견딘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는 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원했다(9절). 그는 그들이 죄를 멀리할 것을 원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은혜 안에서 성장할 것을 원했다. 이것이 그가 이 서신을 쓰게 된 큰 목적이었다.

 

Ⅲ. 결론 13:11-14

 

1. 고별사(11-13)

  (1) 그는 그들에게 여러 유익한 권고를 하고 있다. 온전케 되며(11절). 혹은 '사랑 안에서 서로 굳게 결합하며' 라는 의미라고도 하겠다.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들과 화평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도 더욱 화평함을 가지게 된다. 그는 그들에게 평안 가운데서 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즉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사랑의 관계가 멀어지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2)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한다(11절).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평강 가운데 사는 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는 평강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실 것이다.

  (3) 그는 그들에게 서로 문안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와 함께 있는 자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다(12,13절).

2. 사도의 축복(14)

이것은 매우 장엄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매우 부지런해야만 한다.



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보여주신 은혜와 섭리에 대한 언급 12:1-10

 

1.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은혜에 대한 이야기(1-6)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이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 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었다'(2절). 이 일이 있었던 때를 우리가 말할 수 없다면, 이 일이 어떤 '방법'으로 일어났었는지는 더욱 말할 수 없다 하겠다. 이 셋째 하늘은 낙원으로도 불리운다(4절). 사도는 자신이 셋째 하늘, 혹은 낙원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적법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는 겸손한 태도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1절). 겸손했기에 그는 '14년 동안'이나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을 억제하는 데서 그의 겸손이 다시금 나타나고 있다(6절). 고도로 진보하는 중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스스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자들은 높아질 것이다.

2.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7-9)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의 체험을 전할 때에, 자기를 겸손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명심해야 한다.

  1) 사도는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로 고통을 받았다(7절).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심한 육체적인 고통 혹은 질병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어쨌든 육체에 있는 가시로 당분간 바울이 큰 고통을 당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쓰신 가시관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고 있는 육체의 모든 가시를 깨끗케 해주시며 편케 해주실 것이다.

  2) 이 일의 목적은 사도를 겸손케 하기 위해서였다(7절).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분은 우리에게서 교만을 가리우실 것이며, 또한 우리를 자고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육체에 있는 이 가시는 사단의 사자로 일컬어지는 것인데, 사단은 이것을 선한 목적이 아닌 나쁜 의도로 보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던 것이다.

  3) 사도는 이 고통스러운 가시의 제거를 위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였다. 첫번째 기도나 혹은 두번째 기도에 응답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매달리며 간구해야 한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환난은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까지 우리에게 계속될 것이다.

  4)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절).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지만, 그 기도에 대해 항상 응답하시는 것은 아니다. 즉 그는 때때로 진노로 응답하시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사랑하시므로 거절하시기도 한다. 육체에 있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은혜는 다음 두 가지를 나타낸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며 위로하기에 족하다.

   둘째,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질병을 적절하게 치유하실 것이다.

3.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를 이용함(9,10)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9절). 그리고 그는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들을 기뻐하였다(10절).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의 족함과 능력을 나타내시는 적절한 기회들이었다. 우리 자신이 약해질 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된다.

 

Ⅱ.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사도의 처신과 염려 12:11-21

 

1. 그들이 바울을 변호하지 않았음에 대한 그의 책망(11,12)

그들은 그로 하여금 억지로 자천케 한 것이다(11절). 특별히 그들은 그에 대해서 좋게 평할만한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선한 사람들의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명성을 지키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좋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늘 겸손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여기 이 위대한 사도에게서 나타난 겸손에 관한 본을 보라. 그는 비록 진리에 있어서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 그들에 대한 그의 처신과 애정 어린 의도(13-21)

그는 자신이 지나간 세월 동안 그들에게 짐이 되어 오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13절). 아울러서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가게 될 때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14절). 그는 그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필요한 노력을 면하게 해주었다. 양을 돌보지는 않고 양털로 옷을 만드는 것만을 목적하는 자들은 돈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며 선한 목자가 못된다. 그는 그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하고 또 자신까지 허비하고자 했다(15절).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소모하는 양초와도 같이 재물과 자신 모두를 소모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감하지 않았다(15절). 그는 스스로 짐이 되지 않고자 주의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자들도 그러하도록 했다. 그는 그들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사람이었다(19절). 그는 자신의 의무를 피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죄를 책망하는 일에 신실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20절). 신실한 사역자들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엄한 책망들로 인해 공적이나 사적으로 실족케 되는 경우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 가운데서 비방하는 죄를 보게 될 것으로 인해 심히 근심하였다. 이것이 가장 큰 굴욕이며 슬픔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마음을 가진다(21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그러한 형제들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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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자천한 것에 대한 바울의 사과 11:1-4

 

사도는 자천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한다(1절). 교만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겸손한 사람에게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거짓 사도들의 침투에 의해 타락되어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2,3절). 그는 '하나님의 열심히 그들을 위해 열심히 내었다.' 그는 '그들을 한 남편에게로 시집보내기'를 원했다. 아울러 그는 그들을, 거짓 교사들로 인해 타락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서가 아닌 순결하고 흠이 없고 신실한 처녀로서, 즉 '정결한 처녀로서 중매하고자' 했다.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게 자신을 변호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전파된 것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4절). 만일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전파되어 받아들인 것이 오직 한 예수, 한 영, 한 복음인 것을 알았다면, 무슨 이유로 그들은 자기들을 믿음 가운데로 돌이키게 한 바울을 무턱대고 미워하였던 것일까?

 

Ⅱ. 사도 바울이 다른 사도들이나 거짓 사도들과 동등한 점 11:5-15

 

(1)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동등하다(5절). 그는 이 사실을 매우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줄 생각하노라'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는 아주 적극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말한다. 또한 그는 겸손히 자신의 개인적인 약점을 인정하고 있다. 즉, 자신이 말에는 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6절). 그러나 그는 '지식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2)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거짓 사도들과 동등하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훌륭한 친구였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는 그들에게 값없이 복음을 전파했었다(7-10절). 그는 그 자신이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았다'고 말한다(8절). 그래서 그는 그들에 대해서 요구하고 또한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으며 도리어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 이유를 알린다. 그것은 그가 그들을 사랑하지 아니함(11절) 때문이 아니라 비방자들을 피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부하게 할 기회를, 혹은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어떤 사람이 세상의 궤계로 자신을 비난하게 할 기회를 주지 않고자 했다(12절).

(3) 거짓 사도들은 궤휼의 역군으로 비난받고 있다(13절). 또한 그들은 사단의 일꾼임에도 불구하고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 위선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사단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될 때 그러하다. 사단이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어두움의 나라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도 가장할 수 있듯이 또한 그 악령은 자신의 도구들로 하여금 똑같이 행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15절).

 

Ⅲ.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사도의 계속적인 언급 11:16-21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16절).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대개 교만한 마음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어리석음의 표시이기도 하다(17절).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주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반적으로 명하신 것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겸손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행해야 할 바라고 하겠다. 아울러서 모든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행하셨다는 사실을 신중히 말할 필요가 있다(18절). 그러나 그는 나중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듯이,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였다. 19절의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라는 말씀은 곧 "너희가 지혜로운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누가 너희의 뺨을 친다거나 너희를 속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너희 앞에서 안하무인격으로 뽐내는 것을 기꺼이 용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와 같은 상황들에 관한 것이라면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다.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21절).

 

Ⅳ. 사도 바울이 겪은 수고와 고난에 대한 서술 11:22-34

 

(1) 그는 그의 나면서부터의 특권에 대해 말한다(22절).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 즉 이방인과 전혀 결혼한 적이 없는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2) 그는 또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언급한다(23절). 그들은 그의 사역의 풍성한 증거들을 보았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23절).

(3) 그는 주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단한 고난을 당한 것을 내세운다(23절). 사도는 자신이 비상한 사역자임을 증거하고자 했을 때, 자신이 대단한 고난을 겪었다는 것으로 증명한다. 결박과 감금은 바울에게 친숙한 것이었다. 그는 '세 번 파선했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었다'고 말한다(25절). 그는 가는 곳마다 위험 가운데 처했다. 그가 육로로 여행하게 되거나 혹은 해로로 항해하게 될 때면 그는 강도의 위험에 처해야 했다. 그 자신의 동족들은 그를 죽이려고 찾았으며 이방인들 또한 그에게 친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서 그는 위험을 느끼며 지내야 했다. 그가 도시에 있게 되거나 혹은 광야에 있게 되거나 상관없이 여전히 그는 위험 가운데서 지냈다. 그는 공언된 대적들에 의해서 뿐 아니라 스스로 형제라 하는 거짓 형제들에 의해서도 위험을 겪어야 했다(26절). 그는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27절). 그는 마치 이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자 같았으며, 그 세대의 재앙을 다 짊어진 자 같았다. 사도로서 그에게는 또한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있었다(28절). 그는 마지막으로 이것이 그에게 가장 무거운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29절). 그는 약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애타했다. 심지어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서까지 그는 애정을 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명예로 여겼다(30절). 그는 마치 전에 잊혀진 듯한, 한 장소에서 당한 그의 고난 중 특별한 대목을 언급한다. 그것은 그가 회심했던 곳 다메섹에서 있었던 위험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당한 큰 위험이자 난관이었으며 그 이후 그의 삶은 그러한 어려움으로 점철되어간 것이었다. 사도는 이상의 말들을 엄숙한 맹세로 확고히 한다(31절).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그가 말하는 모든 진실을 아시고 그가 행하는 모든 것과 하나님을 위해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아신다는 것은 선한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된다.

Ⅰ. 바울의 영적 권위 10:1-6

 

(1) 그는 매우 온화하고 겸손한 태도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한다(1절). 극심한 비방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는 온화함을 보이고 있다. 이 대사도는 또한 자신을 얼마나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가!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고 겸비하고'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적들은 그를 얕보고 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경우에도 혹독하게 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2절). 그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 대해서 담대히 대하거나 그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기를 구하고 있다.

(2) 그는 자신의 사역의 능력과 비방자를 벌할 능력을 주장한다.

  1) 그의 사역의 능력(3-5절). 사역의 일은 싸움이로되 진실로 육체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영적인 목적을 위해 영적인 대적들과 싸우는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들이 곧 무기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복음의 방법은 외부적인 힘이 아니며 강력한 설복이다. 사람들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들의 의무에 의해서 설복되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있는 죄와 사단의 권세들에 의해서 복음에 대한 어떠한 반항이 있게 되지만, 이 권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통한 복음에 의해서 무너지게 된다.

  2) 비방자들을 벌할 수 있는 사도의 능력이 주장되고 있다(6절). 비록 사도가 온유함과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Ⅱ.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사도로서의 권위 10:7-11

 

그는 "너희는 외모만 보는구나. 그런식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인가?" 라고 말한다. 바울은 외모에 있어서는 비천하고 초라했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종 거짓된 외모가 있다.

1. 그리스도와 바울의 관계(7)

이제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치를 따져가며 이야기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가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많은 사람이 용납된다. 따라서 서로 서로가 많이 차이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차이점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 가운데 있는 차이점들은 많이 극복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를 판단하고 멸시하는 자들에 대해서 스스로,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 없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듯이 우리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변론해야 할 것이다.

2.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도로서의 바울의 권세(8-11)

그것은 주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를 대적한 자들이 정당하게 받은체 했던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자랑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8절). 그의 권세의 성격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계획이 큰 소리나 화난 편지들로 그들을 놀라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면서 자기의 권세를 말하고 있다(9절). 사도는 순종하는 자들을 놀라게 할 생각이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그의 대적자들로 하여금, 그가 자기의 사도적인 능력을 사용함으로 자신의 권세가 차므로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11절).

 

Ⅲ. 거짓된 교사들이 하듯이 자신을 옳다고 하거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거절함 10:12-18

 

(1) 사도는 거짓된 교사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옳다고 하는 것을 거절한다(12절).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 자신들을 칭찬하는 잘못된 방법을 취하고 있었음을 솔직하게 비추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도달한 위치로 인해서 만족해했으며 자신들을 자랑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나 은혜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결코 그것으로 인해 마치 우리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양 우리 자신들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사도는 그러한 무가치한 사람들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2)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 보다 좋은 규범을 세워놓고 있다(13절). 그는 자기의 분량의 한계를 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남의 수고를 가지고 자랑하였다.

(3) 그는 다음과 같은 규범에 따라 행했다(14절). 그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의해 오게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이 규범에 따라 행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따라 그들을 자랑함에 있어 '남의 수고를 가지고' 자신의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다(15절).

(4) 그는 자신이 온전히 이 규범을 준수했다고 밝힌다. 그의 소망은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또한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것이었다.

(5) 그는 마치 자신이 자랑을 너무 많이 하기나 한 것처럼 자기를 억제하는 듯이 보인다. 그는 자기를 자랑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17절). 특별히 사역자들은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만 한다. 사역자들은 자기들의 일이나 성공으로 인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18절). 모든 아첨 중에서 자기 아첨이 가장 나쁘다. 우리 자신을 칭찬하거나 내세우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인정이 우리의 최상의 칭찬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Ⅰ. 자선을 강조한 바울의 입장 9:1-5

 

(1)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일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 더이상 계속해서 쓸 필요가 없었다(1절). 그는 모든 선한 일에 대한 그들의 원함과 이 선한 일을 그들이 1년 전에 시작했던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 성도들의 열심을 자랑했으며 이것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했던 것처럼 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들이 잘 시작했으므로 계속 잘 진행하려 했을 것이다.

(2) 그는 그들에게 디도와 다른 여러 형제들을 보내는데 이는 이 때맞춘 통보와 함께 그가 그들에게 이르렀을 때 그들로 하여금 이미 준비를 완전히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어떤 일을 하도록 했을 때 그들에게 시간을 주어야만 한다. 또다른 이유로는 혹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을 보게 됨으로 그가 그들에 대해 자랑했던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3,4절). 마게도냐인들 중 몇 사람이 그와 함께했던 것 같다. 따라서 만일 연보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이미 말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케 될 것이다.

 

Ⅱ. 연보하는 일에 대한 올바른 자세 9:6-16

 

(1) 연보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합당한 지시를 한다. 그것은 아낌없이 해야 한다. 추수 때에 좋은 결실을 기대하는 자는 씨를 뿌릴 때 아낌없이 뿌려야 한다. 그것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해야 한다(7절). 다른 선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연보하는 일도 생각하고 계획함으로 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자유롭게 해야 한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7절). 사람들은 이따금씩 그들에게 연보할 것을 끈덕지게 요청하는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내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와 같이 내는 것은 그들로부터 쥐어 짜여지거나 강요당하기 때문에 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억지로 내게 되면 그 사람들이 한 것을 망치게 하는 것이 된다.

(2) 연보하는 일을 실행함에 있어 좋은 격려를 한다.

  1) 그들은 연보하는 일로 인해 결코 손해보는 사람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바 된 것은 결코 손해본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땅에 뿌려진 귀중한 씨가 손해되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싹이 트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뿌리는 자는 많은 것으로 그것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6절).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행하는 사람이 과연 손해를 보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능히 우리의 연보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신다(8절).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할 이유가 없다. 그는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 그것의 명예는 계속되며 그것의 보상은 영원하다. 연보하는 자들로 손해를 당하는 자들이 아닌 이득을 보는 자들이 되도록 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본문 10,11절에 나와있다. 그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이시며 우리로 일년 먹을 풍족한 양식뿐 아니라 장래를 위해 다시 심기에 넉넉할만큼 땅의 넘치는 소산을 주시는 이시다.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먹을 양식' 즉 생활의 능력을 위한 것이었고 '심을 것을 주시기를 원한 것' 즉 더욱 계속해서 선을 행할 수 있기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하기 위해서 의의 열매를 더하여 달라는 것이었다(11절). 연보하는 일은 결코 우리를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우리를 부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적합한 수단이다.

  2) 그들은 결코 손해보지 않는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유익을 얻게 된다(12절).

  3)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이 된다. 복음에 따라서 잘 생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한 이 증거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모든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13절).

  4) 도움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함으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을 하고자 한다(14절). 이것이 가난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기에, 그것은 종종 부한 자들의 유익에 큰 보탬이 된다. 끝으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찬양으로 이 모든 문제를 종결짓는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향한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로 말하고 있다.

Ⅰ.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에 동참할 것을 권고함 8:1-6

 

(1) 사도는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의 좋은 본보기를 들어 고린도 성도들이 선한 자선 사업에 참여해 줄 것을 권고한다.

  1) 그는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마게도냐 교회들의 관대함을 알게 한다(1절).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큰 은혜이며 은총이다.

  2) 그는 마게도냐 사람들의 사랑을 칭찬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곤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이들을 구제하는데 동참하였다(2절). 그들이 시련 가운데서도 풍성한 기쁨을 잃지 않았을 때 그들은 관대함에 있어서도 풍성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서 없는 가운데서도 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매우 많이 즉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렸다. 힘대로 했을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했다. 그들은 자원하여 했다(3절).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그에게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구하도록(4절) 간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진실한 신앙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5절). 그들은 먼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연보를 드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보다 더나은 헌신은 없다. 만일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지 않는다면 자선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 것이다.

(2) 사도는 디도가 그들에게 가서 연보를 모으도록 권함 받았다고 그들에게 말한다(6절). 디도는 이미 이 일을 시작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성취하도록 권함받은 것이다. 매우 선한 어떤 일이 매우 훌륭한 방편으로 이미 잘 이루어져 가고 있는데 혹 그것이 계속 진행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성취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 될 것이다. 자선 사업은 종종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종사케 해서,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부탁하여 그들로 기꺼이 기부할 마음이 나게 할 때 가장 잘 성사되곤 한다.

 

Ⅱ. 이 의무에 대해 계속해서 촉구함 8:7-15

 

(1)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이 많은 은혜와 은총의 풍성한 것을 숙고하도록 권하며 아울러서 이 사랑의 일에 대해서도 그들이 뛰어날 것을 권한다(7절). 그는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선한 일을 하도록 설득함에 있어서 다른 선한 일들로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일이 있게 될 때 그러하다. 우리가 은혜를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이 돌려지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비취는 것은 온당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면 고린도 성도들에게 풍성했던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 이는 그것이 뿌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풍성한 사람들은 다른 은혜들 뿐 아니라 선한 일들에 있어서도 풍성할 것이다. 그들의 믿음에 '말'이 추가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데 있어서 미흡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의 말과 함께 지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근면에 풍성했다. 큰 지식과 말을 잘 구비한 사람들이 항상 가장 근면한 그리스도인들인 것은 아니다. 말을 아주 잘 하는 사람들이 항상 가장 훌륭한 실행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사역자들을 사랑하는 일에 풍성하였다. 이제 사도는 그들이 이 모든 선한 일들에,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이 은혜를 또한 풍성히 더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일어날지도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8절). 내가 뜻만 보이노니(10절). 그는 그의 뜻만 보이고자 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많은 선한 일, 그러면서도 자주 우리의 의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급박하고도 불가피한 명령에 의해 부딪치게 될 때가 있다.

(2) 또다른 논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에서 취해지고 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9절). 그의 가난하심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고 하셨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새 언약의 축복에, 그리고 영생의 소망에 부요케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

(3) 또다른 논증은 이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자원했던 마음에서 취해지고 있다. 그들이 자기들이 시작했던 것을 성취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었다(10,11절). 참으로 좋은 목적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좋은 열매를 기대하게 하며 보기에도 즐거운 한창 만발한 꽃과 꽃봉오리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실행들이 없다면 그것은 헛된 것이며 대수로운 것이 못된다. 사람들이 선한 일을 목적하고 또 실행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받으실 것이며 자기들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그들을 거절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단지 좋은 목적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결코 옳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4) 또다른 논증은 이 세상 것들의 분배와 인간사의 변덕스러움으로 취해지고 있다(13-15절). "풍족한 가운데 있는 자들로 부족한 가운데 있는 자들을 공급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다. 우리가 상호간에 서로 공급함으로 평균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부족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나누어 준 실례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15절의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이것을 보여준다.

 

Ⅲ. 이 일에 함께 수고한 사람들을 칭찬함 8:16-24

 

(1) 그는 그들에 대해서 간절함을 가진 디도를 칭찬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함께 언급되어져 있다(16절). 하나님께서 우리나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 할 마음을 주셨다면 이것도 감사의 원인이라고 하겠다. 그는 디도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17절).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자선을 요청하는 일이 감사할만한 직책으로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직책이다.

(2) 그는 디도와 함께 보냄을 받은 또다른 형제를 칭찬하고 있다. 이 사람이 누가였으리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는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18절)로 칭찬되고 있다. 또한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은 자로 칭찬되고 있다(19절). 이 일은 필시 바울 자신의 요청에 의해 되어졌던 듯 싶다.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20절).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를 비난할 기회를 주지 않고자 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21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주 앞에서만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우리는 비판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난할 말을 찾으려 하는 이들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그는 또한 또다른 형제를 칭찬한다. 이 형제는 아볼로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누구였든간에 바울이 그를 여러 가지 일에 여러 번 시험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4) 그는 그들 모두에 대한 일반적인 선한 특성으로 글을 맺는다(24절).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관대함을 보이도록, 즉 이 교회의 사자들과 교회들 자체에 그들이 풍성한 사랑의 증거와 사도가 그들을 대신하여 자랑한 것에 대한 증거를 보이도록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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