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 안의 보배, 심히 큰 능력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4장 1절~12절]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절 -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절 -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절 -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절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절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절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절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절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절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절 -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절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은 오직 진리를 나타내며, 예수가 주이심을 전파합니다. 예수를 위해 종 된 우리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입니다. 이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합니다. 바울 일행이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1~6절)
새 언약의 일꾼은 복음의 가치를 알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이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속임수로 행하며, 말씀을 혼잡하게(왜곡되게)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오직 진리만을 전했다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명확하고 쉽게 전달하는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신인 사탄이 그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지 않으면 '망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성도를 섬기는 종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영광과 은혜, 진리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 바울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나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 계속해서 머무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2.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 (7~12절)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아는 빛을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두셨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보배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사망이 역사할수록 더욱 선명해집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그 상황에서 헤어나려 했다면 이미 죽음에 넘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고, 그럴 때마다 그의 몸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더욱이 사망이 그에게 역사할 때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역사했습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심히 큰 능력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의 능력을 동반합니다.
* 바울이 많은 고난을 통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인가요? 질그릇같이 연약한 내 삶에 큰 능력의 보배이신 주님을 모실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요?

오늘의 기도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직분에 합당하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인 제가 세상에 굴복당하지 않음은 능력의 주님이 제 안에 계시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보배, 예수님의 생명과 빛을 지닌 자답게 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영적 무지와 편견을 벗고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라

[고린도후서 3장 12절~18절]
12절 -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절 -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절 -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절 -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절 -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절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절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완고한 이스라엘 자손은 지금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지만,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영으로 인해 거울을 보듯 주의 영광을 보고,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수건 (12~15절)
완전한 것이 오면 일시적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해 율법을 받은 일로 모세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출 34:29), 모세는 백성이 자기 얼굴의 일시적 영광에 주목하지 않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 수건은 영적 무지와 편견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복음의 영광은 영원하고 완전하기에 가릴 필요가 없으며, 도리어 소망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리석고 완전한 영광이신 그리스도가 왔어도 율법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여전히 율법에 매여 율법의 정죄 아래 살았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복음)의 그림자일 뿐 참형상이 아닙니다(히 10:1).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참된 영광을 가로막는 영적 무지와 편견을 버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 모세 얼굴의 수건은 왜 그리스도 안에서 더는 필요 없나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기에 버릴 수 있는 일시적 영광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2. 주의 영으로 주의 형상을 닮다 (16~18절)
영적 무지와 편견의 수건은 주님께로 돌아갈 때 벗겨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곧 새 언약 안에서는 모두가 얼굴에서 수건을 제하고 주님을 대면하듯 주님의 영광을 직접 보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사모할 때 점점 주님과 같은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화해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성화의 삶에서 영화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얼굴의 광채로 반사했듯이, 성도는 영광의 주님을 대면하고 그 분을 닮아 가며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의 영, 곧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은 진리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영입니다.
*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아름다운 변화는 무엇인가요? 내 삶이 주님의 형상과 영광을 닮아 가고 있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기도
'예수님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 원합니다. 지금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세상 것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날마다 말씀 안에서 주의 거룩한 형상을 보고 닮아 가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복음 사역,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

[고린도후서 3장 1절~11절]
1절 -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절 -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절 -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절 -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절 -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절 -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절 -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절 -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절 -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절 -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절 -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천하거나 추천서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곧 바울의 편지요,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아닌 영으로써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의의 직분으로, 영원한 영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1.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1~5절)

복음 사역자를 보증하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서를 받지 못했다며 바울의 사도직을 불신했습니다. 그러나 종이로 된 추천서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증거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진 것은 바울을 통해 복음이 성도들 마음에 잘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으로 사역했고,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법을 그들 마음 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이로써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바울 사역의 열매였습니다. 복음 사역자의 자격증은 바로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회심하고 변화된 한 영혼, 한 영혼입니다.

*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나요? 복음 사역자에게 성령의 능력과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새 언약의 일꾼 (6~11절)

새 언약(복음)은 옛 언약(율법)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습니다.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론합니다. 새 언약의 직분은 '영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는 사람을 죽게 하지만(롬 3:20; 7:9), 영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여 사람을 살립니다(롬 8:3~4, 11). 또한 새 언약의 직분은 '의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하지만,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게 합니다(롬 3:21~26). 마지막으로 새 언약의 직분은 '영광의 직분'입니다. 율법의 영광은 없어질 것이나 새 언약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의와 영광을 선물하는 새 언약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무엇이며, 새 언약의 직분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나는 주님이 맡겨 주신 양들에게 새 언약의 직분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오늘의 기도

문제 많던 고린도 성도들을 바르게 세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능한 일이었음을 봅니다.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교회 지도자와 동역자 모두가 율법이나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으로 사역을 감당하며, 영광스러운 변화를 누리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복음의 향기, 복음의 승리

[고린도후서 2장 12절~17절]
12절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절 -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절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절 -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절 -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절 -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디도를 만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해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 그리스도의 향기
복음 전도자는 연약할지라도, 복음은 항상 승리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길 고대했지만 만나지 못하자 고린도 교회 상황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살아 있는 능력을 믿기에 문제 해결을 기대하며 마게도냐로 갑니다(12~13절,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난 이야기는 7장 5절 이후에 기록됨). 복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참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복음)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란 승전(勝戰)의 향기로, 이는 로마 군대의 개선 행진을 연상시킵니다. 결국 복음이 세상을 정복하고 이길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입니다.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고, 사람에 따라 생명의 향기도 되고 사망의 향기도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복음의 승리를 확신함으로 내가 포기하지 말고 복음을 전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용서와 사랑으로 새로워지는 공동체

[고린도후서 1장 23절~24절]
23절 -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절 -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린도후서 2장 1절~11절]
1절 -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절 -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절 -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절 -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절 -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절 -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절 -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절 -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절 -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절 -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절 -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에 다시는 근심 중에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넘치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씁니다. 바울은 모두를 근심하게 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으니 이제는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1.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 (1:23~2:4절)
사랑은 항상 모든 결정의 기초여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아끼기에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의 대적자들과 옹호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는데 바울의 방문으로 갈등이 더 커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방문을 연기한 것입니다.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 '많은 눈물'이란 표현은 고린도 성도들의 갈등과 반목에 마음 아파하는 바울의 깊은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영적 자녀들과 기쁨으로 대면하는 것은 사역자에겐 축복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본래 계획만 고집한다면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은 것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내가 잠시 더 기다릴 일은 무엇인가요?

2. 그를 용서하라 (2:5~11절)
관용 없이는 공동체의 화평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문제를 일으켜 근심을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진심으로 서로 용서하고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친히 용서와 화해의 본을 보여 주셨으며, 바울 역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 앞에서' 끝없이 용서하는 삶을 살고자 애썼습니다. 허물이 있는 성도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 됨을 흔드는 사탄의 계책을 물리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는 명령에 순종해 화평을 이루어 갈 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습니다(마 5:9).

* 바울은 문제를 일으켜 근심을 끼친 사람을 어떻게 대하라고 권면하나요? 공동체에서 내가 허물을 용서하고 용납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잘못된 태도와 언행으로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비난하는 대신, 진정 그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게 하소서. 그가 잘못을 돌이키고, 지체들이 그를 용서함으로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진실함으로 행하고 성령을 따르는 삶

[고린도후서 1장 12절~22절]
12절 -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절 -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절 -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절 -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절 -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절 -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절 -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절 -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절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절 -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절 -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습니다. 그들을 방문하는 계획은 육체의 지혜가 아닌, 미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는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 치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1. 거룩함과 진실함을 변호함 (12~14절)

거룩함과 진실함은 사역의 기초입니다. 부정직함과 세상 술수로는 복음을 바르게 전할 수도, 영혼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을 연기한 일을 전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모든 일을 하나님 은혜로 행했기에 양심에 거리낌 없음을 변호합니다.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한 것'은 하나님 앞에 떳떳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실한 태도로 행할 때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상대방을 부분적으로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거룩함과 진실함은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보상받을 것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떤 태도로 행했다고 고백하나요? 양심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사역 태도는 어떠한가요?


2. 모든 것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15~22절)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행할 바를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쳐 다시 고린도를 들렀다가 유대로 향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변경하자 변덕스럽다며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예"와 "아니오"의 설명으로 서술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순종한 결과로 고린도에 가지 못했다고 변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예"로 순종하신 모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예"를 따라 순종하도록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할 때 가장 합당한 길로 행할 수 있습니다.

* 바울이 본래 세운 계획을 바꾸었지만 이것이 변덕스러운 변경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저의 모든 말과 행함에 거룩함과 진실함이 있게 하소서. 오해와 충돌이 있을 때에 제 뜻을 관철하려 애쓰는 대신 미쁘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하소서.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나 긍정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고난의 시련, 하나님의 위로

[고린도후서 1장 1절~11절]
1절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절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절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절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절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절 -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절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절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절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절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절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배경 이해하기]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의 음행과 분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린도전서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가 궁금하여 급하게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지만,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이 방문에서 돌아온 후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편지 하나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담겼기에 ‘눈물의 편지’(고후 2:4)라고 부르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디도를 통해 듣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간에 순종과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바울은 남아 있던 두 가지 과제, 구제 헌금과 거짓 사도 문제 해결을 계획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구제 헌금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또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사도라 사칭하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구제 헌금을 독려하며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거짓 사도들 문제를 해결하고자 편지(고린도전서)를 보낸 지 약 6개월 만에 다시 편지(고린도후서)를 보냅니다. 이 편지는 사도권 변호를 통한 성도들과의 관계 회복(1~7장),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구제 헌금 장려(8~9장), 사도권 변호와 거짓 사도들 문제 해결(10~13장)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관찰과 묵상]
1.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오해와 비방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서두에서 자신의 직분을 무엇이라 기록하나요?(1~2절)

바울은 자신이 받는 오해와 편견에 관해 변호하기에 앞서 편지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됨을 분명히 합니다.
고린도후서는 복음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설명보다는 고린도전서와 더불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점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 방안을 권면하는 상황적 서신입니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에서 급하게 보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은 1~2절의 인사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먼저 사도성 변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권위 회복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강하게 변호합니다.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한 말들, 그리고 이 서신에서 하려는 말들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한 말임을 강조합니다. 권면을 받는 대상은 광범위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라는 기록을 통해 문제가 고린도 지역 전반으로 확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했고, 이 문제가 속히 해결되어 성도들 가운데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인사말에 담아 전합니다.  
적용과 나눔
교회 안에서 오해와 편견으로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요?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특별히 드러내는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까지 한 말들과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물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의 권위 회복이 무엇보다 우선하고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도자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됨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성에 의문을 표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를 나무라거나 공격하는 말 대신 자신의 사도성을 진지하게 드러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사도이기에 그들 모두를 축복하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선포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떤 오해와 비방을 받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말보다는 그들까지도 품고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충성스런 주의 종입니다.

2. 바울 일행이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되나요?(3~7절)
바울은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땅히 하나님께 맡기고 찬송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감사의 글에서 ‘위로’라는 단어를 10회나 사용하며 강조합니다. ‘위로’는 ‘괴로움을 어루만져 잊게 해 주는 것, 또는 수고를 칭찬하여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에는 전화위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6절에서 환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의 역사가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임할 것을, 7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력할 때 하나님의 위로의 역사를 통해 승리할 것을 선포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함으로 고난을 뚫고 나아가자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하나님의 역사를 신뢰함으로 헤쳐 나아가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을 아시아에서 겪었던 경험을 언급하며 강조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시아에서의 경험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겪은 어려움이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의 역사를 나누고 감사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적용과 나눔
어떤 고난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누군가를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약 1:13~14). 하나님은 성도들을 시험하시는 분이 아닐뿐더러 시험받을 때에 피할 길을 주십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라 해도 자기 욕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고난과 역경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고난을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고난을 온전히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해결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참된 위로가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딤전 4:4). 성도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언제든지 고난을 선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그 고난마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구나 인생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환난과 고난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겼고, 그때마다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크신 사랑과 위로를 주시고, 그 고난을 넘어설 힘과 용기와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고난이 크면 하나님의 위로 또한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만을 주시는 분이며,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사역을 감당하면서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 원망하지 않고, 주님의 위로를 구하게 하소서. 고난 속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영혼을 살리는 사명에 끝까지 충실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환난을 이기게 하시는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1장 1절~11절]
1절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절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절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절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절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절 -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절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절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절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절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절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며,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 중에 그분께 받는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 일행이 극심한 고난을 당함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을 기도로 도우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합니다.

1. 고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1~7절)
고난이 크면 하나님의 위로 또한 큽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로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위로를 고난 중에 있는 고린도 성도들도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성도는 인생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내적으로 더욱 견고해지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나아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경험합니다.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고난에 처한 지체들을 더 잘 위로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위로'가 '환난'과 '고난'보다 훨씬 많이 나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환난이 아닌 위로이기에, 항상 고난보다 하나님의 위로가 큽니다. 환난과 위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견고한 자세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 바울이 고난과 환난 중에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최근에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위로는 무엇이며, 누구에게 나누면 좋을까요?

2.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8~11절)
고난은 '하나님 의지하기'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겪었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롬 5:3~4).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 바라고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영적 전쟁 최전방에 서 있는 복음 사역자에게 중보 기도는 든든한 힘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중보 기도에 힘입어 자신의 은사를 더욱 잘 펼쳐서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중보 기도로 인한 사역의 열매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 감사 제목이 됩니다.
* 하나님이 바울 일행에게 극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우리 공동체와 내가 중보 기도로 도와야 할 사역자는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도대체 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라며 한탄만 했는데, 제가 겪는 고난이 다른 이를 위로하고 살리는 약재료가 됨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죽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구원의 주님만 의지하오니, 이제 넘치는 위로와 소망으로 저를 붙드시고 건지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날마다 새로워지는 신앙이 되려면

[고린도후서 4장 16절~18절]
16절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절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절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인도의 어느 선교사가 주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힌두교(Hinduism)를 믿던 소녀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이 선교사는 그 하염없이 흐느끼는 소녀를 붙들고 무슨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소녀의 대답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그토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하여 우는 것입니다' 하면서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들은 선교사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러한 감격과 처음에 믿던 신앙의 열과 성이 마비되었을까 하면서 자신의 무감각해진 신앙과 마비된 신앙의 감각을 안타까와 하면서 회개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참된 신앙은 어디까지나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 안에서 생명의 약동하는 신앙은 항상 새로운 은혜의 체험과 감격의 연속이어야 하고 또 날마다 그 영이 새로워지도록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엔 생수가 나왔으나 지금은 말라버린 그런 샘터가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나환자 수용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한 나환자들이건만 어찌나 감사해 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던지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건강과 깨끗한 피부에 대해 다시 새로운 감사와 감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 속의 고기가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깊은 은혜의 바닷속을 헤엄치며 살지만 아무런 감격도 감정도 없이 메말라 버린 심령으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런 상태를 원치 않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감격과 감사와 체험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러한 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이나 심령이 주안에서 모두 이러한 새로움이 함께 있어지기를 먼저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우리의 숨이 거두어지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로움의 연속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나로 새롭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의 육체는 늙어가지만 그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쳐 파도치는 감격 속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을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만 새로워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지는 존재라고 하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에 들어가면 언제나 제단의 불이 피어 오르는데 하루라도 꺼지지 않고 늘 제단의 불은 붙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또 진설병도 한 번 만들어서 제단에 차려 놓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떡을 구워서 차려 놓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의 심령도 날마다 새롭고 뜨거운 감격 속에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감정적인 신앙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다 메마르고 마비되면 그것은 더욱 위험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격스러운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신앙이 죽었거나 어딘가 병들은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권태기가 오면 서로가 보기 싫어지고 싸우게 되고 심한 경우엔 이혼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가 된 우리 성도들 사이에 이렇듯 처음의 사랑과 감격이 식어지지 않게 날마다 새로워지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책망하신 말씀도 첫사랑을 버린 것을 깨닫고 회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진정 처음 사랑의 그 뜨거운 감격과 감정을 잊어버리면 에베소 교회와 같이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 3:14절 이하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경고한 말씀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주님은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를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살인 강도나 창녀나 죄인 취급을 당하는 세리들 같은 사람들과 오히려 가까이 해서 그들을 구원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지만, 선(善)의 중간 지대를 걷는 사람, 회색적인 신앙인인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은 제일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자들은 마음밭이 길바닥과 같이 굳어지고 무감각해져서 말씀의 씨앗이 자라지도 못하고 생명이 약동하지도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 3:13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해짐을 면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뻣뻣해지고 주님에 대한 감격과 감동이 사라지면 그 상태는 신앙이 병들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순간 순간 새로워지고 참되고 생명이 넘쳐나야 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자원하는 제물과 또 하나는 새로운 마음과 감격 속에서 정성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헌금이나 감사 헌금은 자유롭고 새로운 감격 속에서 드려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이지 억지로 작성해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날마다 새로운 감격 속에서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은 날마다 새롭고 뜨겁게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사랑하지도 아니하고 감사와 감격도 상실하면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의 환경을 뒤집어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롬 12: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 51: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노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이 있고 신앙도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날마다 새로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는지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지난 일을 돌아보거나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사 43:18절이하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시고 또 우리가 새로워지길 원한다면 과거의 일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대게 마귀에서 붙잡힌 사람들을 보게 되면 과거의 실패나 부정적인 요소를 쉽게 털어 버리지 못하고 오래 간직하고 있다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이 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지나간 일만을 생각하게 하고 성령은 앞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것을 기억하고 마귀가 던져주는 과거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일을 쉽게 버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날의 자신의 삶이 잘되었든지 못되었든지 성공을 했든지 실패를 했든지간에 깨끗이 잊어버리시고 새 기분으로 새롭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도 빌 3:13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순간 순간 순종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는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또 내 이성과 계산으로는 안맞는 것 같이 생각되어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지면 죽음이라도 각오하고 마치 베드로가 주님을 보고 물 위로 뛰어든 것과 같이 과단성 있는 순종적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늘의 은사를 받고 능력을 받았어도 날마다 더욱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힘쓰고 사모하면서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희생할 각오를 갖게 될 때 하나님은 그에게 큰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매순간이 순종적인 결단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안일무사하며 형식주의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가 없고 새롭고 발전적인 신앙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직 늘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음성에 민감하여 거기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더 생생히 하나님을 만나며 신앙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3. 날마다 반성하며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는 향상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여 잘못을 버리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할 줄 아는 심령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39:23절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했듯이 우리의 기도도 매일 이와 같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대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곡하지 아니하고 노래를 해도 춤추지 아니하는 무감각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선지는 내 백성의 얼굴이 금강석과 같이 되고 바윗돌 같아서 죄를 짓고도 얼굴을 붉힐 줄 모른다고 탄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는 또 외치기를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조그마한 잘못을 저질러도 가책을 느끼고 회개할 줄 알아야 날마다 새로운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만과 고집과 아집이 다 깨어지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뻣뻣한 고집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여 날마다 회개치 않음으로써 날로 강퍅해져가는 심령에게 실패와 고통과 환난의 맛을 보게 하시면서까지 그가 교만과 고집을 꺽고 회개함으로써 새롭고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4.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이어져야 합니다.
새롭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람의 결심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옛 것을 새롭게 하고 관념적인 것을 실존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항상 그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고,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고 항상 타올라서 언제나 젊고 싱싱한 성도, 새롭게 변화되고 발전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겔 36:26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항상 사모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앞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 속에서 승리와 성공과 축복된 삶이 연속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약할 때 강해지는 이유

[고린도후서 12장 1절~10절]
1절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절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절 -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절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절 -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절 -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절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절 -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절 -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절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성경 말씀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참 많습니다. 즉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모순 같이 보이는 진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죽고자 하면 산다, 주는 자가 복이 있고 풍부해진다는 등 역설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모두가 참된 진리인 것입니다.
그 중에 '약할 때 강해진다'는 진리도 하나의 역설적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을 겪고 깊은 기도의 생활 끝에 발견한 영적 체험이며 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또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니라' 그러므로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힘을 주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적적으로 만나본 후 많은 병자를 신유의 은사로 고치고, 심지어 유두고와 같은 청년은 바울이 밤늦도록 설교할 때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행 20:9) 살려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자신의 몸에 가지고 있는 사단의 찌르는 가시 즉 어떤 고질적인 병을 제거해 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병은 고쳐 주시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으로 응답해 주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도 많고 본 것도 많고 체험한 바도 많기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교만 마귀에게 넘어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육체를 찌르는 고통의 가시를 뽑아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느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깨닫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곧 '자기가 약하다고 느낄 때 곧 강해진다'고 하는 깊은 역설적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약할 때에 온전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느낄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극은 약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스펼젼(Spurgean)목사님이나, 미국의 무디(Moody) 같은 분들이 그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그 비결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무능함과 부족함을 깊이 깨닫고 죽도록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어 달리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스펄젼 목사님은 설교하러 강단에 서기 전에 하나님께 '거룩한 무질서'(holy disorder)를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짜임새 있는 조직적인 예배 순서나, 설교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유 자재로 인도하시는 가운데 능력있는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과 결핍과 부족을 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큰 계시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축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나,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부족한 종이 하나님의 큰 축복 가운데 끊임없이 부흥하는 교회를 이끌고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는 비결도 바로 나의 약함과 결핍을 깨달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약함과 무능함을 깨닫는 만큼 거기 비례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은 다 자기의 약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지라도 끊임없이 자기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 가운데 거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요하게 되고, 존귀한 자리에 처한다고 해서 자기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머지않아 비참한 지경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함을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복받을 사람입니다.
이에 마 5:3절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25절에 보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고, 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6-29)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약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여러 가지 고통의 가시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약함과 비천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어떤 이는 바울과 같이 질병으로, 어떤 이는 가난과 궁핍으로, 어떤 이는 사업의 실패로, 어떤 이는 슬픔으로, 어떤 이는 어쩔 수 없는 육체의 한계를 통해 가시가 찌르고 괴롭히듯 고통을 당하지마는, 이 모든 것이 곧 자기의 약함과 비천함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 안에 머물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어떤 이유로 약할 때에 강해질 수 있습니까?

1. 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므로 강해집니다.
자기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지 않습니다.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을 때, 전지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멀어지면 열매도 맺을 수 없고, 살수도 없는 것처럼 자신도 심히 연약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절망이 없는 축복 가운데 살수가 있습니다.
스펄젼(C.H.Spurgean) 목사님은 말하기를 '내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내게 어떤 대가가 돌아오더라도 내 자신의 가장 비참한 지경을 사실대로 알고자 간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을 깨닫고 절망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큰 은혜를 받을 사람입니다.
축복을 많이 받고 존귀한 위치에 처해서라도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야말로 계속 축복을 누릴 사람입니다.

2. 약할 때 겸손해지므로 강해집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육체에 가시를 주사 약함을 계속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 수 없고, 교만한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사단의 비참한 종은 되어도 하나님의 귀한 종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는 축복을 얻습니다. 겸손한 자가 크고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고로 겸손이야말로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을 느낄 때 겸손해지게 되고 이 겸손이 바로 강해지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40년간 광야의 길을 걸으며 고생하게 하셨습니다. 강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겸손하게 된 그들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 말입니다.

3. 약할 때 부드러워지므로 강해집니다.
사 64:8절의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진흙과 같습니다. 그런데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질그릇을 만들 때 흙이 부드러워야 원하는 대로 아름답고 귀한 그릇을 만들지 단단하면 못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귀하고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고통의 가시로 찔러서까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함을 알고 부드럽게 되도록 하십니다. 부드럽지 못한 흙, 길가나 돌작밭 같은 곳에서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연약한 나무만이 될 뿐이므로 우리도 연약함을 깨닫는 중에 부드러운 마음 밭을 갖게 하사 많은 열매를 맺는 견실한 나무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궁중에서 자라고 배우면서 강한 사람으로 자처할 때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도망자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저 미디안 광야로 망명해 가서 40년 동안 양무리를 치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깨닫고 부드럽고 온유한 자가 된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능력있는 지도자, 크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종 모세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4. 약할 때 기도하게 되므로 강해집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은 기도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법인데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절감할 때 더욱 간절하고 힘있게 하게 됩니다.
출 2:23절에 보면 "여러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연약함과 절망을 느낄 때 기도하게 되고 그 기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축복을 가지고 자신에게 응답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늘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강력한 생활을 하려면 자신의 연약함을 느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자가 되어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진정 여러분들 모두 약할 때 강해지는 은혜를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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