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 서와 유다서의 정경성(正經性)에 관한 문제

유다서와 본 서는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언급하는 것이 좋다. 먼저 신악성경에서 이 두서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상정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에 있어 베드로후서는 평범한 내용의 전개와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쳐 강조하며, 유다서는 고발적이며 단조로운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또한 두서신서는 묵시 문학으로 종말론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16세기에 이르러 성경에 관한 정경성 문제가 대두되었을때 이 두서신서 역시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 칼빈(John Calvin:1509-1564)과 에라스무스(Erasmus;1466-1536) 등은 결론적으로 두서신서를 정경으로 인정은 하고있지만, 애매 모호한 표정이다. 특히 루터(Martin Luther;1483-1546)와 같은 경우는 '9월의 언약'(September Testament, 1522)이라는 부록에 유다서를 첨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카제탄(Cajetan)과 외콜람파디우스(Oecoampadius)는 정경에 가까운 제2의 권위에 속한다고 분류하고 있다.
아마 신약성경 중에서 베드로후서만큼 오랜기간을 두고 정경성 문제에 관한 논쟁이 지속된 것이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제롬에 의하면 베드로전서에 비교해 볼때 문체상 많은 상이점이 있는 이유로 인해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본 서는 다른 성경과는 달리 동방에서 먼저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모습은 초기곱트 번역과 헬라어 파피루서72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오르게네스는 라틴어 번역을 믿을수 있다면 정경으로 인정할 수 있으나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고 한다. 오르게네스 이외에도 아다나시우스, 그레고리(Gregory),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등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몹수에스티아(Mopsuestia), 데오도르(Theodore) 등은 본 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A.D.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수리아 교회등지에서는 6세기 초까지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두서신에 대해 오늘날에도 많은 의심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즉 다른 신약성경과 비교해 볼때 우수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 기독교 신앙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루터는 복음의 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두서신서는 영적인 능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비평의 와중에서도 두서신서에 대한 일정한 의의를 둘 수 있다. 즉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재림,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것들이다.

2. 수신인과 수신지

본 서의 수신인과 수신자는 베드로전서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벧후3:1)라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나에 흩어진 나그네"(벧전1:1)이다. 그런데 여기서 흩어진 나그네는 일시적인 체류자나 방랑자들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베드로가 이런 나그네까지 포함한 이유는 이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를 사도행전에서는 최초의 교회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로 팔레스틴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함과 아울러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3. 저술 동기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외압과 내부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이다. 또한 바리새파인들은 기독교를 유대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베드로전서는 옛계약과 새계약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반(反)유대화에 역점을 두고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인용과 거짓 교사들에 관한 저주를 설명하고 있는점이 유다서와 대동소이한 점이다.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이런 차이점은 바로 역사적인 시대의 변화를 암시한다. 로마의 쇠퇴와 더불어 헬레니즘 사상의 보급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마저 신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올바른 가르침을 위해 본 서를 기록한 것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서론

 

교회의 위기는 성도의 신앙적 삶의 위기에서 기인된다.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각 개인의 삶의 정황이 곧 교회의 형편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는 외적인 박해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침서인 반면 베드로후서는 이단 사설로 인한 교회의 내적 위기에 대한 경계서이다. 성도 각 개인이 거짓 교사와 거짓 교설에 물들어 반성서적인 신앙을 지닌다면 교회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2. 저자 문제

1) 가장 의심받는 본 서의 저자
신약성경 중 본 서처럼 저자의 진위 문제에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본 서는 2,3세기경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를 사도 베드로가 쓴 것으로 인정했으나 베드로후서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리겐(Origen)도 마찬가지로 제2서신서는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을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했다. 20세기의 학자들(진보적)은 거의가 베드로후서를 위작으로 보며, 신약성경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되어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서와 후서의 전혀 다른 주제의 차이, 또 문제의 차이와 표현이 전서는 매우 고상한 반면 후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그 다음 유다서와 내용이 많이 중복되었다는 점과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언급한 점(벧후3:4) 그리고 신앙의 조상들(사도)이 이미 잠들었다고 언급한 점과 교회가 늦게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본 서가 2세기경 어느 무명인에 의해 위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2) 베드로 사도가 저자인 증거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들이 오히려 사도 베드로만이 본 서의 저자임을 대변해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분명히 '시몬 베드로'(벧후1:1)라고 자신을 밝혔다.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벧후1:16-18). 이는 베드로 자신이 아니면 증거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다음 문체나 어휘가 틀린 것에 대해서는 전편이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후편은 베드로 스스로 쓴 것이기에 헬라어의 수준이 다르고 문체가 다른 것으로 본다. 또 유다서를 인용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사'들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들로 말하며 미래 시제로 표현했고, 유다서는 현재 시제로 말했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어휘나 내용이 전서와 1/6이 일치한다. 이는 전서나 후서가 같은 사람이 쓴 것임을 반증한다. 그리고 권위있고 단호하게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의 영감적 권위(정경성)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벧후3:16), 이는 사도 베드로 외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몇몇 사례만 볼지라도 본 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만일 본 서가 베드로가 쓴 것이라면 전서의 집필 시기인 주후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68년경 사이일 것이다. 벧후1:13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때 본 서는 순교 직전인 67-68년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장소도 마지막 활동 무대였던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대상과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판도에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벧후1:1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이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이미 기독교의 모든 진리 체계를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다(벧후1:12). 그들은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이미 알고있고 그의 가르침에 진지한 열의와 사모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본 서를 기록했을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이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1:15)는 말대로이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벧후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한다.

5. 주제

'신앙적인 참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이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된다. 끝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8)고 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식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다(벧후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의 참지식, 참지혜가 본 서의 강조점이다.

6. 내용 구성

1. 참된 지식의 의미(1장)
2. 거짓 지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경계(2장)
3. 참지식과 거짓 지식을 따르는 자들의 미래(3장)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제목 : 위험한 성경해석 (고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14절~18절]

14절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절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절 -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절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절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1. 주 재림때 약속의 목자는 계시록 2, 3장에 약속된 모든 것을 받음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된다

  - 요한복음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약속의 목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 이만희 왜 약속의 목자인가?
  - 계시록 2, 3장의 약속이 어떻게 이만희에게 갔는가?
  - 이만희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된다면 예수님은 무엇인가?


2. 누구든지 약속의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주님께 올 자가 없다.
  - 이만희가 아니면 주님께 올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바울도 베드로도 주님께로 가지 못했는가?
  - 이만희는 정말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가?


3. 계시록 2, 3장에 약속한 모든 것이 이긴자에게 있으니 신앙인들이 이외에 어디로가서 구원을 받겠는가? 이는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 이 무슨 삼척동자도 웃을 수 밖에 없는 황당한 주장인가?
  - 성경이 증언하는 핵심교리는 오직 하나 신앙인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단은 항상 애매모호한 단어를 쓰면서 사람들을 호도한다.


4.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듯이 (요5:43, 요14:9~11) 오늘날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는 진리의 성경이 함께 하시는 약속의 목자 안에 주께서 함께 하신다.(요14:16~26)
  - 진리의 성령은 약속의 목자에게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마가 다락방 120 성도도 다 성령충만했다.
  -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는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이다.


5. 이를 받지도 믿지도 않고 핍박하는 자는 하나님의 소속이 아니다. 이를 인해 심판이 있게 되고, 심판때는 자기 행위에 따라 성경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 천국 또는 지옥 불못으로 가게 된다. (계20장) 그러나 인맞은 영적 새 이스라엘 열두지파 144,000명의 제사장들과 흰무리(백성들)는 낙원인 천국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
  - 신천지에 들어가서 이만희를 약속의 목자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협박성 발언으로 공포감을 조성한다.
  - 이만희 믿고 따르다가 그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 점점 늙어 가는데

 

  1) 성경에 약속의 목자라는 것은 없다. 이만희가 약속의 목자도 아니다. 이만희가 이긴자도 아니다. 그는 짝맞추기, 비유풀이라는 저급하고 원칙없는 성경해석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이단에 불과하다.
    - 성경에는 비유풀이, 기적, 설교, 신앙고백의 4가지로 각 상황에 따라 해석하는 원칙도 다르다.
    - 신천지는 모든상황을 그럴듯한 짝맞추기식 비유풀이로 가르친다.
  2) 신천지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일단와서 성경을 공부해 보세요 라거나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군요 라는 말로 회피하려 한다.
    - 신흥이단은 요한계시록을 파고 든다. (자기네식 짝맞추기 풀이가 편해서)
    - 이단들은 사도바울의 서신들을 회피한다. (로마서 외면- 오직 예수로만 구원 받는다. 교주들이 위태로와서)
    - 불신자보다 신자에게 접근한다.
    - 구원의 조건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2> 그들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 오직 예수님 한분만이 구원을 주신다.
    - 오직 믿음과 은총만이 구원이 이른다.
    - 성경 해석을 못해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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