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호와의 진노와 그 결과에 대한 슬픔 3:1-20

 

이 장의 표제로 시편 102편의 표제인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게 그 근심을 여호와앞에 토하는 기도'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한탄한다.

(1)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점을 한탄하였다. 바로 이것이 이 쓰디쓴 고통의 원인이다(1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그는 이것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잘라내버리려는 칼이 아니고 고쳐주시려는 매이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는 그들에게 현재는 슬프지만 결국은 유익한 것이 된다. 이 매로인하여 우리는 고난당할 것을 예기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고난이상의 것을 볼수 있다면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진노는 당연한 것을 확실히 알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선지자 자신이 흑암중에 행하게 된것을 한탄하였다. 흑암은 고난과 혼란을 의미한다. 이것이 한탄하는 이유이다(2절).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않게 하셨으며. "그가 설명할수 없는 사건의 사슬로 나를 묶으사 내가 두려워하는 흑암으로 이끄시고 바라는 광명으로는 행하지 못하게 하시는도다." 나를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같게 하셨도다(6절). "무덤같이 어두운 곳에 완전히 잊혀져 버린 사람처럼 만드셨도다."

(3)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적으로 나타나신 점에 대해 한탄하였다. 손을 돌이켜 자주자주 나를 치시도다(3절). "그는 내가 깨달을때까지 '종일토록 나를 치셨도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73:14). 하나님께서 손을 돌이켜 치실때 우리는 그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돌이키시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되는 시험에 빠진다.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은밀한 곳의 사자같으사(10절). "곰과 사자같이 심판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니 어느 길로 가더라도 내가 안전하지 못하도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12,13절). "그로 인하여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도다."

(4) 유다의 상태는 나이 많아 노쇠한 사람으로 비유된다(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피부는 늙어서 시들어졌고 내 뼈는 꺾어졌나이다." 나를 쓴것으로 배불리시고(15절). 쓴것이란 지금 받는 고통의 쓰라림을 의미한다. "그는 내 음식속에 '조약돌'을 섞어 놓으셔서 '내 이를 꺾어' 놓으셨도다(16절). 또한 그는 애통하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혹자는 '재로 나를 먹이셨도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5) 선지자는 도망할 길을 도무지 찾을수 없었다(15절). 나를 에우셨으며. 포위된 성을 향하여 요새나 포대를 쌓듯이 그를 에우셨다. 열려진 한 길마저도 완전히 메워졌다. 하나님은 담즙과 쑥으로 사방에서 그를 둘러 싸셨다. 그는 초조하고 애가 타서 도망할 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못하고 지치기만 하였다(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그는 극악한 범죄자처럼 이중으로 차꼬에 묶였으니 '그의 사슬이 무겁게' 되었다. 하나님은 또한 '다듬은 돌을 쌓아 그의 길을 막으셨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뚫을수 없는 석벽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첩경을 굽게'하셨다. 그가 여기저기 다녀보았으나 여전히 제자리였다. 이렇게하여 하나님은 '그의 길로 치우시게' 만드시고 그의 목표를 꺾으셨다. 또한 '그 몸을 찢으시며 그로 적막하게' 하셨다. 그의 영혼의 위안거리를 모두 박탈하신 것이다.

(6)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귀를 막으셨다(8절).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내가 간절히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셨도다." 때때로 하나님은 심지어 '주의 백성의 기도'에도 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80:4). 기도가 응답되는 위로를 얻지못하는 경우는 실로 통탄할 일이다.

(7) 이웃이 그의 고통을 조롱거리로 삼는다(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도다. 모든 사악한 자들이 조롱했다. 그들은 공적인 심판과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픔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8) 그는 구원받기를 포기하려 한다. "하나님은 내게서 평강을 빼앗아 가실뿐만 아니라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도다(17절). 그리하여 나는 '복을 잊어버렸도다.' 복을 받아본지 오래되어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않도다. 이제 슬픔과 노예 생활에 익숙하여져서 기쁨과 자유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도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18절). "나는 더이상 하나님을 내 지주로 의지할수가 없도다. 나의 하나님은 무정하기조차 하도다."

(9) 고통을 생각할때마다 슬픔이 되살아나고 과거에 대한 회상은 과거의 번성했던것 만큼이나 쓸쓸하다(19,20절). 나의 고통과 죄악, 즉 나의 고통과 그 고통이 있게한 죄악이 '고초와 재난' 중에 있는 '쑥과 담즙'이다. 고난의 잔을 쓴 잔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포위당했을때의 고통스럽던 기억을 계속 간직하고는 시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결코 잊을수 없었다(시 137:1,5).

 

Ⅱ.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위로 3:21-36

 

여기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이 개이기 시작한다. 즉 본문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시온에서 애통하던 자들이 조금씩 즐거움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망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찢긴채로 있다. 선지자는 여기서 완전히 찢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회상'한다. 그것은 소망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이다(21절). 중심에 회상한즉. 어떤 역본에는 '내 마음을 돌이켜본즉'으로 되어있다.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에 돌려 주실때까지 잊혀진 상태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마음을 돌이켜본즉 소망이 있나이다. 그것이 저희가 자꾸 절망으로 빠져드는 것으로부터 지켜 주나이다."

(1) 현재의 상황은 좋지않지만 더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인하여 고난을' 당하나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진멸되지' 않는다(22절).

1) 그들은 끊이지않는 자비를 깨달았다.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불타는 떨기나무 같아서 진멸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린바 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는 않으며'(고후 4:9) 진멸되지 않고, 은과 같이 용광로에서 제련을 받을지언정 찌꺼기같이 버려지지는 않는다.

2) 그들은 이 끊이지않는 자비의 근원을 깨달았다. 여호와의 자비와...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은 다하지 않는 자비의 샘이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로인하여 재앙을 받는다면 벌써 오래전에 진멸되었을 것이나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다.

(2) 그들은 비록 깊은 고통중에 처해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언약의 신실성을 체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는다고 여러번 불평했었다(참조. 애 2:17,21). 그러나 이제 스스로를 바로잡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 여호와의...긍휼이 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의 긍휼은 진실로 무궁하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자신의 긍휼하심을 닫아버리신 것같이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의 자비는 강물같아서 결코 마르지않고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23절).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새롭게 경험한다.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드러내시며'(습 3:5). 우리의 위안거리가 끊어진다해도 하나님의 긍휼은 끊이지 않는다.

2)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비록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하다.

(3) 하나님께서는 현재나 앞으로도 그의 백성들에게 풍족한 행복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있는 모든 것과 자유, 생활, 심지어 생명 그 자체를 잃는다해도 하나님께 대한 나의 관심은 잃지 않으리라."

2) "내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잃지않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족하도다. 나의 고난을 상쇄시키고 나의 잃어버린 모든 것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것을 나는 소유하고 있도다."

3) "이것이 내가 의지하는 바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를 맡기리라."

(4)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그를 믿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될 것이다(25절).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기도로 '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를 구하는 것이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말할수 없는 위로와 만족이 될 것이다). 그 구원이 올것을 바라고 오기를 기다림에 있어서 우리는 고요하고 잠잠한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지 말고 그 처분을 묵묵히 따라야 한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5) 고통은 사실상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견디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 사이에 고통을 받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27절). 사람이 젊었을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많은 젊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선지자는 이 포로생활의 멍에가 그들에게 유익이 될것이며 또한 이렇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멍에는 고통의 멍에를 의미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때에 이 멍에를 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멍에는 그것을 지지 않는다면, 길들여지지 아니한 황소와도 같이 교만하고 방종해지기 쉬운 자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면 젊었을때 지게되면 유익이 되는 그 멍에는 언제 매게 되는가?

1) 그때는 우리가 고통중에 잠잠히 있을때이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그렇게 앉는 이유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영혼과 교제를 나누며 모든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운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2) 그때는 우리가 고통중에 겸손히 참고있을 때이다.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은 그 멍에로인해 유익을 얻는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표시로 손을 입에 댈뿐만 아니라, '죄를 기억하고 슬퍼한다는 표시로 그 입을 티끌에 댄다'는 것이다. 죄로인해 진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비록 입을 티끌에 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소망을 품고 기뻐할 것이다.

3) 그때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온유해지고 그들을 용서해주려는 마음을 지니게될 때이다(30절). 우리 주 예수께서 이 일에 모범을 보이셨다. 곧 그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신' 것이다(사 50:6). 남들의 비난과 멸시를 참을수 있으며, 욕을 욕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갚지않는 사람들은 그 멍에를 매는 것이 유익하며 자기에게 영적인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그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신때를 따라서 적절한 위로를 주실 것이다(31,32절). 우리는 다음 사실로인해 고난을 견디어낼수 있다.

1) 우리가 버렸을때에라도 아주 끊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함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로잡은 것이지, 의절할 것은 아니다.

2) 우리가 한동안 아주 끊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진짜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함이다.

3) 우리가 어떤 슬픔에 빠져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이 그 안에 계심을 인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슬픔이 잠깐이라는 것을 확신할수 있다(벧전 1:6).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슬퍼하도록 만드신 사람들에게도 긍휼과 위로를 많이 주심을 인함이다. 그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해주실 것이다(호 6:1).

5)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와 다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 우리의 자랑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함이다.

(7)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신 것은 거룩하고 지혜로운 뜻을 위함이다. 그는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33절).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즉 '본심에서'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니다.

1) 그는 우리가 그렇게 만들지않으면 결코 고통을 내리시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선한 것이기 때문이며, 만일 우리에게 쓰라림을 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만하고 또 필요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2) 그는 죄인의 죽음이나 성도들의 불안함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 그는 피조물중 어떤 것이라도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이 고통스러워하시고,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영혼이 슬퍼하신다.

3)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실때조차 그는 자비를 지니고 계시다. 그가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면' 하물며 그의 자녀들에게는 어떠하시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찌푸리시고 그 손에 매가 들려있는 것을 볼때에도,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로 세우실때에, 사람들을 그 손이나 또는 그 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불의함과 잘못을 기뻐하지 않으신다(34-36절). 하나님의 백성은 두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는데, 이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신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1) 사람들이 무력으로 짓밟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셨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갇힌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허락지 않으신다. 이미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정의를 가장하여 피해를 준다면, 즉 '사람의 재판을 굽게하여'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하고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여' 잘못된 판결과 거짓 재판을 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실을 지켜 보고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다(35절).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 말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의를 굽게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그와 같이 행한 사람들을 엄하기 질책하실 것이다.

 

Ⅲ.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야하는 의무 3:37-41

 

(1)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에게 내려진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39절). 살아있는 사람은...어찌 원망하랴. 하나님의 주권과 우주적인 섭리로부터 선지자는 이런 결론을 이끌어냈다. 어찌 원망하랴. 포로로 고통받고 있는 자들은 고통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고통을 받는데' 어찌 원망할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다같은 죄인이다. 그리고 우리 죄로인하여 당연히 받아야할 고통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받아야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지 말자.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 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우리도 그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죄를 일깨워주고 하나님께 돌아와 편히 쉬도록 만들려는 것이다(40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조사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를 조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조사할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막연한 소망으로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어떤 특정한 한단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즉 바라는 목표와 생활 철학, 그리고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판단할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중에 빠졌을때가 바로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때이다(학 1:5). 그럼으로써 앞날을 위해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그치는 것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따져서 그들을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할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행위를 조사해야만 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전에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그를 버린후에는 전과 같이 잘된 적이 없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기도할때에는 마음도 같이해야 한다. 흡사 우리의 말에 영혼을 쏟아 붓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어야' 한다. 기도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하듯이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시 25:1).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영히 거하기를 원하는 영혼은 자주 기도함으로써 그쪽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로 나아갈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Ⅳ. 다시 한번 고통을 호소함 3:42-54

 

선지자는 살아있는 사람은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으나 이제 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1) 그들은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점을 고백한다(42절).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죄를 '범죄함과 패역함'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 부르는 것이 아니다.

(2) 그들은 현재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한다.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아주 없을수는 없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시에 대해 불평한다.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42절).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43절).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벽이 있다고 불평한다.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매장되어 완전히 덮여지고 잊혀진 사람처럼 가리우셨나이다." 또한 그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44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그 구름은 너무 두꺼워 우리 기도는 그안에서 잊혀졌나이다."

2) 그들은 이웃들의 비난에 대하여 불평한다(45절). 우리를...진개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만일 그들이 스스로를 천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원수들도 그들을 그렇게 만들수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원수들이 그들에게 행한 파괴에 대하여 불평한다(47절).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51절).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48절). 원수들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할때까지 쫓아왔다(53절).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들은 구덩이 혹은 무덤에 던져진 자처럼 되었고 돌로 무덤문을 막았던 관습대로 '그 위에 돌이 던져졌다.' 원수들은 유다를 죽어 매장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의 멸망은 물에 빠져죽는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했다(54절).

4) 그들은 슬픔과 두려움이 너무 과하다고 불평한다(48,49절). 이것은 51절에 또다시 강조된다.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성읍과 나라가 황폐하게 된것을 보면 볼수록 슬픔이 더하여지는구나."

5) 이런 슬픈 불평들 속에 한가지 위로가 될만한 말이 나온다(50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하늘로부터 자비롭게 살피시는 눈길 하나로 모든 것이 바로될 것이다. 그들은 눈물을 그치지 않은채로 계속 기다렸다. 여호와께서 살펴보시기 전에는 그들 눈에 눈물을 닦아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Ⅴ.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얻는 위로 3:55-66

 

선지자 예레미야는 믿음과 두려움과 소망사이에서 갈등하였다. 그러나 믿음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세가지 면에서 선지자와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구름이 너무 두꺼워 기도가 상달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44절). 그들은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죽은 자들 사이에 홀로 살아있는 사람처럼 '주의 이름을 불렀다'(55절).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56절). 그가 자기 기도를 '탄식'이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기도중에 하나님께 탄식하고 그와 함께 호흡한다. 기도는 거듭난 사람의 호흡이다. 탄원함으로 자비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찬양함으로 내뱉는다. 이것은 영적생활의 증거이면서 또한 그것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셨다(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하여. 우리는 믿음의 눈을 통하여, 우리가 순종의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나아오심을 볼수 있다.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3)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셨다(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전지하심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59절). "내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으나 큰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저희가...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그들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노리개로 삼았듯이, 나의 불행을 조롱거리로 삼았나이다. 그들이 내게 행한 것같이 자신들도 받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손을 폄같이 주의 손을 그들에게 펴소서."


Ⅰ. 하나님의 진노하심 2:1-9

 

본문에는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 야곱과 이스라엘의 상태,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상태에 대하여 매우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놓여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점이다. 즉 그가 '진노하사' 그들을 치신 것이다.

(1)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기뻐하사 자신을 친구처럼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교회에 대해 진노하사 자신을 원수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랑으로 징치하시는 것은 쉽게 견딜수 있으나 사랑으로 책망하시는 것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맹렬한 불이...야곱을 사르셨도다(3절). 하나님이 진노하사 이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이 불이 붙은 것은 그들의 죄이다. 하나님은 인자한 아버지같아서 자녀들이 화나게 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스스로 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수 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가 되셨다. 아니면 적어도 '원수같이' 되셨다(5절). 그는 '원수같이 활을 당기셨다.' 또한 그는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시사' 그들을 향하여 칼을 뽑아 겨누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 백성들의 원수는 아니시다. 심지어 진노하실때에라도 하나님은 노하심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신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같이 되신다. 그때에는 그들에 대한 모든 섭리가 외견상으로는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화평케하시는 분으로서 이 불화를 제거하셨다.

(2)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빛났고 열방중에 뛰어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두운 구름으로 가리우사 그 얼굴을 보지못하게 하셨다.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1절). 이 구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구름도 아니요, 성전을 덮어서 영광을 나타내셨던 구름도 아닌, 짙고 어두운 구름을 의미한다. 혹은 홍해에서 애굽인들 쪽으로 향했던, 구름이 이제 그들을 향해있는 것이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하나님은 '오른손을 거두시사' 닥쳐오는 재앙을 그들이 피하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오른손을 거두셨는데, 여로보암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손을 마르게 하셨는데 그 손으로 대적들과 맞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3) 이전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은 견고하고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사 그것들을 '삼키셨다.' 그것들은 철저히 파괴되어 흡사 삼키운 것처럼 되었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5절). 그것들은 당당하고 견고하며 부요하고 잘 보호되고 있는 성읍들이었으나 삼키워진바 되었다. 그는 거처만 파괴하신 것이 아니고 요새까지도 모두 파괴하셨다.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다하셨도다. 의지할 것들이 모두 떠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의 근심과 애통은 더욱 더하여졌다. 이 점은 7-9절에 다시 한번 강조된다. 여호와께서...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의 담이되사 막아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왕궁의 벽이라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황폐하게 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날이 오면 그는 '줄을 띠어'(측량줄을 의미한다).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신다. 그 줄까지만 파괴되고 더이상은 안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4) 이전에 그들의 국가는 매우 융성하여 그 근처의 힘의 균형은 그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반대로 되었다.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2절). 그들이 먼저 우상숭배로 스스로를 욕되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러운 자로 취급하셨다. 왕과 방백들은, 이전에는 그 신분이 훌륭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신분을 범하기 힘든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게 되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기' 때문이다(6절). 여호와께서 '왕과 방백들을 열방가운데' 있게하사 그들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기셨다. 그들은 이전의 명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죄인들과 같이 가장 비천하게 취급당하였다. 죄로인하여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그들을 낮추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 이전에 그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중에 임재의 표시를 남겨 놓으셨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해주었던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이 사라졌다. 언약궤는 그룹들 사이, 속죄소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가장 거룩한 징표였다(대상 28:2;시 99:5;132:7). 그곳은 쉐키나가 안식하는 곳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다. 언약궤는 갈대아인의 수중에 떨어지는 수난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물들이, 그가 떠나가시면 무슨 거치를 지니고 있겠는가? 하나님과 그의 왕국은 발등상이 없어도 존립할수 있다. 거룩한 직분에 봉사하던 자들은 '처녀 시온의 장막'을 기뻐하였었다(4절). 그들은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었었다'(참조. 애 4:7).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살육되었고 '그들의 피는 희생 제물에' 섞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성막이었다(이는 성막에서 예배할당시 그것을 하나님의 전이라 부른 것과 같은 논리이다, 시 27: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헐어버리셨다'(6절). 그는 성막의 말뚝을 뽑고 지탱하는 줄을 끊으셨다. 그것은 더이상 하나님의 성막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모독할때 그들에게서 성막을 빼앗으심은 당연한 결과이다.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7절). 성소는 죄로 물들어있었다. 죄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미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전에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14)고 까지 하셨던 자기 성소마저도 미워하시는 것이다.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6절). 혹자는 이 말이 성전뿐만 아니라 공회당과 선지 학교까지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원수들이 불살랐었다(시 74:8). 절기와 안식일은 주의깊게 기억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시온가운데서 절기나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제 시온은 파괴되어 안식일과 다른날의 구별이 없어졌다. 매일매일이 슬픔의 나날이었으며 모든 절기는 잊혀졌다. 제물을 거룩히 구별하던 제단도 버려졌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들의 제사를 받지도 아니하시고, 그 제사로인해 영광을 받지도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7절). 제단은 여호와의 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먹이시지도 않고 그들과 같이 먹지도 아니하실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와 율법사들을 가지는 축복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사이에는 율법이 없어졌다(9절). 백성들은 더이상 그것을 읽지 않았고 서기관들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게되었다. 율법이 기록되어있던 돌판은 언약궤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은 율법책을 박탈당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였고 여호와께로 오는 묵시를 경멸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이상 선지자와 묵시를 받지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Ⅱ. 시온의 슬픔 2:10-22

 

본서가 애가로 불리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것은 에스겔의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던것 같은 완전한 슬픔의 표현이다(겔2:10).

(1) 그들의 슬퍼하는 모습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1) 항상 당당한 제복을 입고 다니던 재판관들과 행정관들이 그 옷을 벗고 애통하는 자의 옷을 입었다. 장로들은 이제 더이상 다윗의 집의 보좌인 재판석에 앉지않고 땅에 앉았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할말을 잃고 '잠잠히' 앉아있었다.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2)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항상 쾌활하던 그들은 이제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3) 선지자 자신이 애통하는 자의 한 본보기가 된다(11절). 눈이 눈물에 상하며. 그는 더이상 울수 없을때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예레미야 자신은 이웃들에 비하여 한결 나은상태이며 오히려 전에 그 백성에게 당하던 때보다 훨씬 편한상태였다. 백성들의 멸망이 자신의 구원이 되겠지만 그는 공공의 유익에 신경을 쏟아 개인적인 유익은 묻어버렸다. 그는 흡사 자신이 이 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라도 된듯이 '백성이 패망한' 것을 애통해하였다.

(2)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18절). 혹자는 이것을 쓰라린 고통의 외침이라고도 하나, 그들 대부분은 고통중에서 진실한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성벽위에 서있는 파숫꾼(사 62:6)이 원수들이 포위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거나 성벽의 무너짐(성이 함락된후 약 한달뒤에 무너졌다) 때문에 처녀 시온으로 하여금 애곡하게 하라." 오랜후에 느헤미야도 같은 이유로 애통하게 된다(느 1:3,4).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끊임없이, 쉬임없이 애통하게 하라." 스스로 쉬지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하지 말지어다. 이 재앙은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슬픔의 원인도 자주 생길 것이다. 즉 새로이 슬퍼할만한 일들이 밤낮으로 생길 것이다. 그들은 점차 무감각해질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이 완전히 낮아지고 온유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에 고통을 더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슬픔의 원인에 대하여 설명한다.

1)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 하나님은 얼마전에 심한 가뭄으로 식량 부족을 일으켜 그들을 바로 잡으셨었다(렘 14:1). 그리고 이제 그들을 엄중하게 포위하시사 기근을 극한 상태까지 몰아 넣으셨다. 따라서 어린자녀들이 어미의 품에서 굶어 죽어갔다(11절). 이것은 19절에 다시 반복된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자녀. 자기 어미의 손에 죽어서 먹히운 어린아이들도 있었다(20절). 이와 비슷한 사건이 사마리아가 포위당했던 때에도 있었다(왕하 6:29).

2) 많은 사람들이 칼에 살육당하였다. 칼은 갈대아인들같이 잔인한 원수들 손에 있을때에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그들은 연령을 가리지 않고 아이나 노인이나 모두 죽였다. 그 칼날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똑같이 '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21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은 매우 가혹하다. 주께서...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이유는 그의 영혼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시기 때문이다.

3)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았다(14절). 예레미야는 오래전에 이 사실을 알고 애통해하였으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렘14:13).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그는 이 말을 애가에도 삽입하였다. 그들의 묵시는 모두 그들 자신의 공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꾸며낸 그 묵시가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백성들이 그들을 세웠고, 그들이 말해야할 바까지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자기들의 마음에 합당한 선지자로 만들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말해주고 그들의 죄를 보여주어 회개하게 함으로써 멸망에 이르지 않게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은 만일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사랑과 그들의 지원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만일 백성들의 죄악을 없앨수 있었다면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 이웃이 그들을 조롱했다(15절).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 고작 이것이냐?(시 50:2) 어찌하여 이제는 온전히 추하게 되었느냐? 아름다움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5) 원수들이 그들을 정복하였다(16절). 예루살렘에 대하여 좋지않게 생각하던 이들은 이제 그들의 '입을 벌렸다.' 아니 '입을 넓혔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경멸하고 모욕하는듯이 '비소하고 이를 갈았다.'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이것은 우리가 행한 일이고 우리가 얻은 것이라. 이제 저들은 모두 우리의 소유물이라."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아! 이것을 얼마나 가지기를 원하였던가."

6) 이 모든 일로보아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키신 것처럼 보이셨다(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대하여 정하신 일들은 실상 그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은 결과를 보면 알수 있을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범하면 어떠한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 말씀해 주셨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그 율법을 범하였기때문에 이미 선포하신 것을 집행하셨을 뿐이다. 이는 레위기 26:16절이하와 신명기 28:15절에 의한 것이다.

(4) 그들은 이 슬픔을 치료하기 위한 위안을 구했는데, 그 위안이 여기에서 처방되어진다. 그들은 위안을 구하였다(13절). 선지자는 이런 경우에 그들에게 말할 적절하고도 수긍될만한 어휘를 고르려고 애쓴다.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친구를 위로할때 우리는 그가 당한 경우가 그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함으로써 위로하려고 애쓴다. 그런 경우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에는 그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으로 비교하여 너를 위로해 주랴.' "어느 성, 어느 나라가 너와 비교할만한 고통을 받고 있겠느냐. 아! 그런 곳과 그런 슬픔은 아무데도 없도다. 왜냐하면 너만큼 존귀함을 입었던 곳이 없기 때문이라." 우리는 친구들에게 그 상황은 그리 절망적이 아니고 쉽게 치유될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전혀 희망이 없다. 그 이유는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를 파괴하는 경우, 육지는 원상태로 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더 파괴된다. "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인간의 어떤 지혜나 능력으로도 그와 같이 부서지고 흩어진상태를 고칠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통상적인 강장제를 투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여기에 처방된 치료방법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이끌어내어 회개하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그 상황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19절). 그 기도는 즉시 시작해야 하며 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과 절망에서 일어나 '밤초경에 부르짖도록' 하여라. 남들이 잘때에 너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그 자비하심을 끈질기게 구하라. 밤의 4경중 초경에, '네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 물쏟듯 하여라.' 마음을 열어놓고 자유롭고 완전하며 성실하고 진지하게 기도함으로 네 처지를 하나님께 모두 펼쳐놓아라.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 그를 향하고 '네 어린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이 불쌍한 양무리가 무엇을 했겠나이까'라고 말하라"(20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며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과 당신이 택하신 야곱의 자손이 아니니이까? 여호와여 저희의 상황을 살피시사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Ⅰ. 예루살렘의 슬픔 1:1-11

 

(1) 예루살렘이 당한 참극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1) 그들의 사회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본래는 거민이 많던 성읍이 적막해졌다(1절). 이 성읍은 그 백성으로 가득차 있었고 또다른 나라 백성들도 자주 찾아와 그들과 더불어 유익한 교역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홀로 '적막히 앉아'있게 되었다. '지혜가 소리쳐 부르던' 성의 주요한 거리는 이제 더이상 그렇지 못했다. 이제는 과부같고. 신랑되는 왕은 이제 가버렸다. 그 성의 하나님은 얼굴을 돌이키셨다. 이제 그 성은 아이들을 잃어버린 과부처럼 고독과 슬픔가운데 버려졌다.

② 주권을 가지고 있던 성읍이 이제는 속국이 되어버렸다. 본래는 '열국중에 크던 자'여서 어떤 나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고 어떤 나라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나라들은 선물을 보내왔고 어떤 나라들은 조공을 바쳤었다. 그 성은 실로 '열방중에 공주'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우방들을 다 잃고 '적막히 앉았을'뿐만 아니라 자유도 잃고 '조공드리는 자'가 되어버렸다. 그 성은 처음에는 애굽에, 그리고 이제는 바벨론에 조공을 드리게 되었다. 죄를 짓는 백성은 적막하게 될뿐만 아니라 노예가 되어버린다.

③ 즐거움에 가득차 있던 성읍이 이제는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쁨의 성읍으로서 모든 지파들은 여호와앞에서 기쁨을 누리기위해 그곳으로 갔었다. 그 성은 온세상의 기쁨이었으나 이제는 침묵과 고독속에 '밤새도록 애곡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쉬고있는 한밤중에도 그 성은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성의 '머리는 물이 되고 눈은 눈물 근원'이 되어 낮이나 밤이나 눈물만 흘리고 있다(렘9:1).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④ 열방중에서 구별되었던 그 백성들이 이제 '열방에 거하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히 선택된 백성들이었으나 이제는 뒤섞이고 말았다(3절). 유다는...사로잡혀 갔도다. 그들은 약속되었던 땅으로부터 적국, 즉 하나님과 그 언약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들중으로 옮겨져 '평강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린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5절). "다음 세대의 시가 될 자녀들이 끌려감으로 그 땅은 상속자가 없어 황폐하게 남아있도다." 자기들의 땅에서 동족들과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강제로 이국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해 본다면 현재 받고있는 은혜에 더욱 감사해야할 것이다.

⑤ 항상 남을 정복하기만 하던 백성들이 이제는 정복당했다.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치쳤도다(3절). 그 백성들은 어쩔수 없이 '대적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빠져나갈 길이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이다(7절). 어느 곳에서나 그들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원수가 형통하게' 되었다(5절).

⑥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시사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이웃 나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백성들이 이제는 멸시를 받게되었다(8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업신여김이여. 이제 그들은 자신의 죄로인하여 업신여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9절). 죄는 사람에게 치욕을 안겨준다.

⑦ 풍요로운 땅에 거하던 백성들이 이제 양식이 없어서 죽게되었다(11절). '그 모든 백성이' 낙담과 절망의 '탄식'을 한다. 이제 그 땅에는 '식물이 진하게' 되었다(렘 52:6). 따라서 포로생활중에 그들은 음식물을 얻기위하여 많은 수고를 해야했다(참조. 애 5:6).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11절). 어떤 역본에는 '생명을 다시 얻기위하여'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거의 쓰러질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2) 그들의 종교적인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① 종교적인 절기는 더이상 준수되지 않았다(4절).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그 길은 잡초로 뒤덮혔다. 엄숙한 절기들이 무시되고 모독당했다(사 1:11,12). 그러므로 그들에게 종말이 닥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같이 '모든 성문도 적막'하여졌다. 그 문은 제사를 드리러온 신실한 자들이 서로 만나곤 했던 곳이다.

②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그들은 성전이 황폐하게 된것을 탄식하였다. 찬양이 탄식으로 바뀐 것이다. 시온이 한창 번성할때에는 '소고치는 동녀중에 가객과 악사'가 있었으나(시 68:25) 이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처녀들이 근심하며...곤고를 받았도다. 즉 시온의 모든 거민이 다 이전의 장엄한 집회를 회상하며 슬픔에 잠겨있다. 그들에게는 '이 치욕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습 3:18).

③ 그들이 경건하게 제사드리던 장소가 모독당했다(10절).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그 성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중 아무리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라할지라도 제사장이외에는 들어갈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은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약탈하기 위하여 함부로 떼지어 들어간 것이다.

④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혹은 예배에 사용되던 값비싼 물건들이 이제 대적들의 노략물이 되었다(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이 보물들이 무엇인지는 이사야 64:11절에서 찾아볼수 있다. 거기서 이사야는 정선이 불에 타는 것을 탄식하면서 '즐거워하던 곳이 황무하여 진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보물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기쁨을 주던 것으로, 법궤와 제단, 기타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기념하는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들은 이제 깨어지거나 옮겨졌다. 즉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간' 것이다(6절). 처녀 시온의 아름다움은 거룩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되었을때 처녀 시온의 아름다움도 없어진 것이다.

⑤ 거룩한 날이 조롱을 받았다(7절). 대적은 보고 그 적막함을 비웃도다. 대적들은 이 백성이 7일중의 하루를 안식으로 삼은 것을 비웃었다. 당시 이방 시인 쥬베날은 유다인들이 시간의 7분의 1을 손해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웃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돈을 주고 사야할지니 이는 7일중 하루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식일이 만일 마땅히 지켜진다면 일주일중 다른 어떤 날보다도 훨씬 유익한 날로 바뀔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안식일을 지켰다고 말하자 대적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그가 너희를 이 고통속에 버려두지 않았느냐?"

⑥ 지금 당하고 있는 상황은 이전에 누리던 것과 정반대였다(7절).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즉 어둡고 음침한 날에 옛날의 영화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비하심을 보이지 않으심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알게 해주신다.

(2)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은 예루살렘의 죄에 있었다.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5절). 여호와께서는 '저의 죄가 많으므로'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심한가? 그들의 죄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참조. 렘 30:14). 그들은 매우 사악하였다(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은 고의로, 즉 계획적으로 범죄하였다. 이전에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로인하여 특권을 누리던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은 '놀랍게 낮아졌다'(9절). 이전에 악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압박받게 되었다(3절).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그들중의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였고 특히 갈대아 역본에 따르면 히브리 노예들을 핍박하였다. 이것이 이 재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렘34:11).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예루살렘은 그 거민들의 죄의 구렁텅이에서 뒹굴게 하였다.

(3) 예루살렘의 친구들은 모두 그릇되고 동정심조차 없었다.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2절). 저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같도다(6절). 첫번 경고가 울리자마자 그들은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흡사 꼴을 먹지 못하여 전혀 힘이 없는 사슴같았다. 이웃들은 전혀 이웃답지 못했다. 돕는 자가 없고...위로할 자가 없도다(7,9절). 아무도 동정해 주거나 슬픔을 달래주지 않았던 것이다.

(4) 비로소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동정어린 긍휼하심만 바라고 있다.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9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절). 우리가 짐에서 벗어나 편안해질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선히 여기시는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Ⅱ. 환난중에 하나님을 찾음 1:12-22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교회가 슬픔을 당하는 중에도 그 재앙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인식한다. 그 손은 공의의 손이다.

(1)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교회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여 말한다. 그녀는 모든 구경꾼들에게 호소한다. 내게 임한 근심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12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와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 빠질때 흡사 자기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쉽다. 만일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같이 섞어서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면 아마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오 주여 원래의 내 고통을 돌려주시옵소서."

(2) 예루살렘은 고통을 주는 도구들 너머로 그 고통을 만드신 분을 본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12절). "여호와께서 진노의 날에 내게 대하여 노를 발하사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구나." 교회는 지금 열에 들떠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13절). 또한 그물에 엉키어 있는것 같다. 그 그물은 빠져나오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더 엉켜 들어가는 그물이다. 그녀는 적막한 광야에 있는 자처럼 되었다.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나는 더이상 나아갈수 없으며 의지할 것이 없나이다." 그녀는 멍에를 멘 자처럼 되었다. 그 멍에는 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통의 멍에였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14절). 그리스도의 계명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마 11:30). 그러나 우리가 범죄함으로 묶인 멍에는 무겁고 힘들다. 양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하여 우리를 묶는다. 그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이 우리에게 멍에를 씌우사 묶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멍에를 풀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의 손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용사를 없는것 같이 여기시는' 분이시다(15절). 그 성은 또한 술틀에 밟힌 자처럼 되었다. 하나님이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그녀는 원수들의 손에 붙여진바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당할수 없는 자의 손에 붙이셨다'(14절). 여러번 야곱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야곱을 침공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이는 야곱이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3) 예루살렘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고만 있는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어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12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너희들이 그토록 무관심하게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너희 이웃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에게는 아무관계가 없단 말인가?"

(4) 예루살렘은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한다(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내가 '밤새도록' 울어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구나." 시온이 두손을 폈으나(17절). 이것은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절망의 표시이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구원해 줄수 있는 유일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이 멀리 계실때 성도들의 영혼이 쇠약해지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옮겨졌으므로 전혀 예루살렘을 도울수 없게 되었다. 자신을 돌볼수도 없는 그들이 어찌 예루살렘을 돌볼수 있겠는가? 그 성의 기쁨과 희망이었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다(18절). 친구들 역시 그 성을 실망시켰다. 어떤이들은 도울 뜻이 없었고 어떤이들은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녀, 곧 그 성은 도움을 바라며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었다'(17절). 그녀는 우상들을 사랑했고 애굽과 앗수르를 믿었으나 그들은 그녀를 기만하였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선두에 나서서 사람들을 지도했어야 했으나, 굶주림으로 '기절하였거나'(19절) 또는 '소성시킬 식물을' 찾아 구걸에 나섰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이 있고(20절). 원수들은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죽였다. 집에는 사망같은 것이 있나이다. 원수들로 온통 에워싸여져 있음으로 양식 조달이 끊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적들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원한을 몹시 품고있던 에돔과 암몬족속으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차비가 되어있었다.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21절).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즉 자기의 죄가 이러한 재앙을 받을만하다고 인정하였다. 그토록 무겁고 단단하게 매어져있는 멍에는 바로 자신의 '죄악의 멍에'였다(14절). 이는 곧 자신의 채찍으로 자기 자신을 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불의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8절). 또한번 반복하여 고백한다.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20절). 죄에 대하여는 아무리 나쁘게 말하여도 충분치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에 대하여 가장 나쁘게 말하여야 하고 심지어 '패역' 곧 가장 큰 패역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슬픔중에 가장 큰슬픔이어야 하며 그것은 영혼을 움직여야 한다.

(6) 예루살렘은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 이 두가지 측면으로 호소한다.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그녀는 원수들이 그녀에게 행한 해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한다(21,22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사 예언에 기록되어 있는 그날을 이르게 하시어 내 원수들을 나와같이 만드시고 지금 내손에 있는 진노의 잔이 그들의 손으로 옮겨가게 하시옵소서." 이것은 "정해진 날이 이르게 하소서"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그리고 곧이어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저희 모든 악을 주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들의 죄를 인하여 저희에게도 행하시는 날이 빨리 오게하소서." 이 기도는 대적들과 연합하려는 모든 생각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여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교회에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반드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이루시라고 기도할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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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2절)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1~4장이 그 형식상 만가(elegy)로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면, 본장은 죄에 대한 시인, 현재의 고통에 대한 호소, 회개의 촉구를 마친 시인이 다시금 백성의 대표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시라 하겠다. 문장 구성을 보면 전반부는 현재 처한 고통의 호소이고(1~18절), 후반부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그 사랑의 풍부함을 확신, 의지하며 미래의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이다(19~22절). 본장은 각 절이 두 부분씩으로 나뉘어서 서로 호응하는 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1절]
2~18절까지 계속되는 호소의 서론적인 언급이다. 유다 민족은 이제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부도 영광도 명예도 더 이상 유다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환난을 당할 때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활화산처럼 피어올라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곤 하였던 것이다(삿 3:15~25; 삿 4:1~24; 삿 10:6~16). 고난 중에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도의 위대한 특권이다. 진실한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을 거두게 하며 고통의 탄식을 바꾸어 감사의 찬양이 되게 한다.
[2절]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여기서 '기업'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서 여호수아 시대에 마침내 정복되었던 것이다(창 12:1; 창 13:14~17; 수 21:43~4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범죄함으로써 이 축복의 땅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은 둘 사이의 약속이며, 한 쪽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 그 축복은 무의미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이룰 수가 없는데 이것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히 6:13~7:28). 요컨대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으므로, 매순간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3절]
기근과 살상(殺傷)으로 많은 고아들이 생긴 것을 말한다. 또한 유다의 버림받은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4절]
물이나 나무 등의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값비싼 대가를 대적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은 유다의 절박한 민생고를 잘 나타내 준다.
[5절]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유다는 하나님께 대하여 강퍅하여 목을 곧게 하였다(출 32:9).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목이 눌리게 되었다.
[7절]
유다가 그들의 죄의 대가 뿐 아니라 조상의 죄 값까지도 치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가중된 처벌이라는 악순환을 낳는 것이다.
[8절]
종들. 바벨론의 하급 관리를 말한다. 극도로 교만했던 유다가 이제는 하찮은 사람들에게까지 억압당하는 처절한 징계를 받는다.
[11절]
시온의 순결성은 항상 '처녀 시온'으로 불리운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은 극단적으로 더럽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마음의 순결을 버리자 그들의 육체와 환경이 더렵혀지도록 내버려 두셨다(롬 1:24).
[13~14절]
어린 소년까지 부당한 노역에 시달리며 나이 먹은 노인까지 수모를 겪어야 하는 민족적 비애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방인들에 의한 압제였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수반하였다.
[16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지금까지의 끔찍한 고통에 대해 절규한 것은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한 긍정, 즉 자신의 죄에 대한 통렬한 고백을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결론적 부분이다. 죄에 대한 회개는 구원의 호소와 구원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연결 승화된다.
(19~22절)
마지막 간구 - 유다의 참상을 고백한 저자는 이제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기도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현명한 판단에 근거하여 드려지는 믿음의 기도인 것이다.
[19절]
저자는 암울한 순간적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좌를 생각하며 소망을 얻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바뀌며 세상의 풍속도 변화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는다(히 13:8). 그러므로 유다를 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그는 굳게 믿는 것이다.
[21절]
주께로 돌이키소서.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관계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간구하고 있다. 지금 유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의 기도인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회개는 인간이 하지만 회개하도록 겸손과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구원의 전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22절]

본절이 부정적인 고백으로 보이기 때문에 공적인 낭독에서는 먼저 22절을 읽고 다음에 21절을 읽는 것이 관례였다. 저자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의혹을 표하지는 않았다. 다만 본절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현재의 참경을 조속히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역설적 호소가 담겨 있다.

 

# 해설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1~18절)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한 유다의 황폐와 포로 생활의 고뇌, 치욕, 낙망 등이 죄에 대한 통렬한 고백으로 연결된다. '우리' 즉 회중(會衆)의 이름으로 고백된 이 회개는 구원에 대한 호소로 이어지며 마침내 이 탄식의 애가를 유다의 회복이라는 믿음과 사랑의 시로 승화시킨다.

마지막 간구 (19~22절)

선지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 곧 자신의 고통과 유다의 환난과 세계의 아픔을 하나님께 겸손히 내어놓고 간구한다. 특히 21절은 본서 전체의 요절로서 구원을 이루는 회개가 인간적인 결의 때문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구원론의 핵심이다.

 

# 핵심

1~22절

바벨론 침공으로 인한 유다의 황폐함과 포로 생활의 비참함을 묘사하며, 유다의 회복을 위해 마지막으로 간구하는 대목이다.

 

# 묵상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는 노인 (14절)

성문 앞은 공중 집회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재판을 송사하기 위해서 노인, 곧 마을의 장로나 유력한 자들이 성문 위에 올라 앉아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룻 4:1~6). 그러므로 본문에서 노인이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한다는 것은, 그곳을 바벨론 사람들이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재판권을 상실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에서 떨어진 면류관 (16절)

보통 면류관은 영광, 명예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면류관이 머리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크나큰 치욕을 당했다는 것으로, 여기서는 나라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해서 진정한 면류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옛적 같게 해 달라는 간구 (21절)

여기서 옛적이란 출애굽 등의 구원 사건 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맺어질 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고 그의 백성으로서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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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2절)
예루살렘의 참상 - 본장은 비탄시의 요소를 모두 갖춘 3장보다는 현재 고통의 끔찍한 참상의 생생한 묘사에 주력한 1, 2장과 더 유사하다. 1, 2장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여러 고통 중 특히 극심한 기아(신 28:48, 53, 57; 사 9:18~21; 욜 1:17~20)의 고통을 강조하고, 이 모든 재난의 1차적 책임을 정치.종교 지도자에게 돌린 점 등이라 하겠다. 4장의 문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극심한 기아의 고통(1~10절), 지도자들의 책임과 그들의 비참한 상황(11~16절), 구원의 유일한 방도인 회개(17~22절).
[1절]
금이...변하였으며. '금'과 '정금'에 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택함받은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성전과 그 장식품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본문은 유다 백성이 세력을 잃은 것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라면 성전의 영광이 훼손된 것을 의미한다. 성소의 돌이...쏟아졌는고. 이것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그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그 돌들을 각처에 흩어버린 사실을 가리킨다(왕하 25:9, 10; 렘 52:12, 13).
[2절]
시온의 아들들은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 그들의 위세(威勢)는 천하에 드높았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그들의 위치는 보잘 것없는 항아리와 같은 처지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앙 상태에 따라 흥망 성쇠를 거듭했다는 것은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으로서(삿 3:7~14; 삿 4:1~3; 삿 6:1~10) 성도들에게 행복의 능력이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교훈해 준다.
[3절]
타조는 알을 낳기만 하고 보호하거나 기르지 않는 습성을 가진 새인데, 유다 백성이 혹독한 기근으로 인해 자녀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것을 타조에 비유하고 있다. 환경이 사람을 동물보다 못하게 만드는 비참한 상황이다.
[4절]
젖먹이와 어린아이들은 항상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나 전화(戰禍)의 참상 속에서 유다 백성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5절]
유다의 과거와 현재가 날카롭게 대조되어 있다. 이 극명한 대조 속에서 성도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이유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이 대조는 훗날 천국과 지옥으로 갈릴 자들의 태도를 연상케 해준다(눅 16:19~27).
[6절]

소돔은 음란과 더러움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어 멸망한 도시로(창 19:1~28; 유 1:7), 음란과 죄악의 대명사 같은 도시이다. 그런데 유다의 죄가 이 소돔의 죄악보다 더 크다고 한다. 이것은 유다의 죄악의 정도가 한계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들의 죄악의 성격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영적 간음죄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7절]

존귀한 자. 이것은 '나실인'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바쳐진 자'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유다 백성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그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서 기인한 것임을 나타낸다.

[10절]

4절에서처럼 자녀를 소홀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잡아먹게까지 되는 끔직한 광경은 죄악의 결과와 그로 인한 징벌이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파괴하였음을 보여 준다.

[11절]

시온에...지대를 사르셨도다. 시온 성을 남김 없이 그 터전까지 파괴하셨다는 뜻이다. 한편 예수도 훗날 시온성의 파괴를 말씀하시며 이 세상의 종말적 파괴를 이중적으로 예언하신 바 있다(마 24:1~51).

[13절]

저자는 예루살렘 패망의 원인을 1차적으로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책임이, 그리고 백성의 입장에서는 바른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기억하며<렘 22:1~7, 지도자의 책임>, 그리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는 인간 지도자의 뜻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시민 불복종의 의무가 백성에게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롬 서론, 시민 복종과 불복종의 한계>.

[14절]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지도자들이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권력을 가지고 무고히 의인을 살상한 것을 뜻한다.

[15절]

부정하다는 외침은 문둥병자가 사람들의 접근을 방지하려고 외치는 외침인데(레 13:45) 그들의 영적 더러움이 마치 문둥병자와 같았다는 것이다.

[16절]

저희가...아니였음이로다. '저희'는 이방인을 말한다. 백성들을 잘못 인도한 자가 이방인에게 능욕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17~20절)

유다의 멸망 이유 - 유다의 구체적 멸망 이유 중 하나로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인을 의지한 죄와 그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방인들과 외교 관계를 가진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인들만 의지한 것이 죄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도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좇아,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자도 어리석은 자요, 하나님을 안 믿고 자신의 힘만 의지하는 자도 어리석은 자이다.

[17절]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눈이 상함이여.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향할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성경에는 영의 눈의 방향을 잘 둔 경우와 잘못 둔 경우의 실례들이 제시되어 있다(창 3:5, 7; 시 19:8; 사 2:11).

[19절]

산꼭대기에서도...광야에서도. 그 어디서도 휴식과 구원을 발견할 수 없는 절망 상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상태에서도 최후 심판이 임하기 전이면 그 언제라도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희망이 있다(겔 18:21). 최후 심판 후에는 절망 상태만이 영원할 것이다.

[20절]

콧김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호흡이 생명에 중요하듯이 국가에 있어서도 왕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나온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가 저의...하던 자로다. 인간 왕을 의지한 과거의 소위(所爲)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깊이 자조(自照)하며 기막혀 하는 표현이다.

(21~22절)

지금껏 현재의 절망에 절규하던 선지자의 목소리는 극적으로 희망의 목소리로 바뀐다. 성경은 저주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용서와 구원의 약속으로 끝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은 최후까지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을 약속하시며, 끝내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용서의 역사에서 거듭 깨달을 수 있다.

[22절]

형벌이 다하였으니. 이 세상에서의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는 이처럼 분명히 정해진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최후 심판 후 죄인을 향한 진노는 무한할 것이다.


# 해설

기근으로 인한 고통 (1~10절)

네 번째 애가(4장)는 1, 2장과 같은 시적 구조를 지니는 바, 선지자는 터질 듯한 감정을 답관체라는 한정적이고 형식적인 틀 속에 얽어놓음으로써 그 감정의 기폭을 조절하며, 절제되고 정선된 용어로써 진행시킨다. 본문은 렘 21:9절에서 예언된 것으로 마치 죽음과 함께 동거하는 듯한 공포의 나날이 기근의 참상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최후의 심판을 향해 죄악을 그 머리에 쌓고 있는 자들에겐 심각한 경고이다.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11~16절)

모든 재난에 대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지워지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버리고 소경처럼 방황했으며(마 15:14), 권력으로 무고한 의인을 압제했고(14절) 마치 문둥병자처럼 영적으로 썩어 문들어져 있었다(15절). 결국 이들이 이방인의 능욕거리가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16절).

구원의 길 (17~22절)

유다의 구원은 이방(애굽)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헛된 구원을 의지하다가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본문은 유다에 임한 하나님의 징계가 바로 그들의 잘못된 선택의 길을 꺽으심이며, 불신앙의 벽을 헐어내시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 핵심

1~22절

유다 백성에게 임한 재난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구원의 길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애 4:1절의 "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는 견해,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 예루살렘 성전과 그 장식품들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 있다. 본절 하반절에 "성소의 돌"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 묵상

제사장들의 악행 (11~16절)

예레미야는 유다가 그와 같이 비참한 현실을 당하게 된 원인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백성들에게 거짓된 말을 전하고 주어진 권한을 남용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당시 제사장들은 의인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의인이 되도록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계시를 지켜야 할 그들이, 오히려 의인을 핍박하고 살해하였으며 도덕적,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필연적이었고 제사장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의 멸망 이유 (17~20절)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인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관계를 갖는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인만 의지하는 것이 죄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좇아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콧김 (20절)

'콧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 숨, 호흡' 등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백성들의 콧김이란 곧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가리킵니다. 왕을 코의 숨결이라고 본 것은, 왕에 의해서 백성들의 생존이 보증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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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66절)
예레미야의 비탄과 구원을 기도함 - 다섯 장 중 가운데 장인 3장은 22절씩으로 끝나는 다른 장들과는 달리 그 세 배인 66절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각 시행이 알파벳 순으로 연결된 것은 똑같다. 본장은 간결하고도 운율적인 표현으로 본서 중에서 시적인 성격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예레미야는 본문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전면에 부상하여 자신의 주관적 심경을 토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저자인 예레미야를 가리키는 동시에 고난당하는 자기 민족을 대표하고 있는 대명사이다. 저자는 민족의 고통을 바로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나'는 하나님의 정죄나 연단으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있는 오늘날의 성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3장은 41절을 기준으로 전.후반부로 나눌 수 있고, 전.후반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유다 백성의 참상에 대한 묘사(1~18절), 절말 중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믿으며 희망을 가지는 미래 지향적 믿음(19~41절)을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는 현재 느끼는 고통의 호소(42~54절), 원수의 파멸과 백성의 구원에 대한 기도(55~66절)를 노래하고 있다. 비탄시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는 이 시는 여러 면에서 시편의 비탄시들과 비교된다(시 55:1~23). 특히 거듭 강조하지만 처절한 현실의 고통에 대한 호소가 절실한 만큼 구원에 대한 강력한 기원과 여호와 유일 신앙 의식이 강건함에 유의하라. 고난은 범죄 이후 끝없이 타락하려는 죄성을 품은 인간에게 신앙 각성을 주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신 8:5~10; 벧전 1:7).
[1절]
1~18절까지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서론으로, 2~17절에 이르는 모든 재난들이 바로 여호와의 노하신 매인 것을 밝히고 있다.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1~18절 사이에는 '나'를 의미하는 단어가 27회나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바로 고난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레미야서와 본서를 동시 고찰해 볼 때, 비록 저자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징계를 예견하기는 하였으나 막상 고통의 실체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었음을 알 수 있다.
[2절]
흑암에 행하고. 빛과 어둠은 흔히 번영과 재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다(욥 12:25; 암 5:18~20). 본문은 영적, 환경적으로 암울한 유다 민족의 처지를 묘사한다.
[4절]
극심한 고통과 근심에 잠겨 있는 저자가 육체적, 영적 쇠약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유다의 쇠약해진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5절]
담즙은 쓴 것, 혹은 곤란, 고통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본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과 수고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인데,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을 듯이 보이는 유다의 비극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6절]

저자의 비감(悲感)은 극에 달하여 이제는 자신을 죽은 자로 비유하고 있다(시 88:5). 그가 느끼고 있는 흑암은 더 이상 소망이 존재하지 않는 무덤 속의 암흑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자가 죽은 지 오래 된 것 같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그의 절망 상태가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한편 19~41절의 미래 지향적 신앙이 이 모든 상황을 이기고 저자에게 희망을 준 사실을 기억할 때 신앙의 실체와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

[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고대 아시아인들은 죄수를 사면 팔방으로 밀폐된 방에 가두곤 했다. 저자도 이러한 고문을 당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는 그러한 곤경에 빠져 있다고 느끼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도 정신적으로 사면 초가의 숨막히는 상황에 둘러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유다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그는 죄수와 같이 취급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사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멍에와 짐을 나타내는데, 이 사슬은 예수 앞에 나아왔을 때만 벗겨지는 것이다(마 11:28~30).

[8~9절]

저자는 환난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그 응답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만(마 7:7~11), 징계나 연단을 위하여 기도의 응답을 늦추실 때도 있다. 다듬은 돌 매끄럽게 깎은 돌. 이러한 돌로 벽을 쌓으면 그 견고함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빈틈 없이 죄인의 진로를 차단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10~13절]

심판자이신 하나님 -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시 유다를 살상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맹수의 발톱과 용사의 화살과도 같이 그의 백성에게 치명상을 입히신다. 세상의 맹수를 만나도 두려운데 우주의 창조자가 징계자가 되셨으니 그 얼마나 두려운가. 또한 세상 끝날 심판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심판자로 대면한다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허리. 원어는 콩팥으로, 치명적인 급소를 의미한다.

[14절]

위에서 나타난 고난의 결과를 보여 준다. 고통은 극심한데, 위로하는 자는 없고 오히려 동족의 멸시만이 그를 향하고 있다(1:21).

[16절]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돌이 섞인 음식을 먹다가 이가 상한 것을 나타내며 이 역시 절망을 암시하는 말이다. 재. 슬픔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삼하 13:19; 욥 2:8).

(19~41절)

회개로 말미암는 소망 - 극심한 절망의 탄식은 이 부분에서 미래에 대한 찬란한 희망과 믿음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깊은 한숨과 탄식을 토하다가 과거에 그들을 인도하시며 자비를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21절) 힘을 얻는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면서(22절) 이 고통이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니며(33절), 자기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39절).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게 하는 회개의 능력을 실증해 주고 있는 본문은 본서 중 가장 주옥 같은 부분에 속한다.

[19절]

앞 부분에 나타난 모든 고통의 표현들을 총괄한 것이다.

[21~22절]

중심에 회상한즉. 예레미야가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를 깊이 있게 묵상하였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 이것 때문에 저자는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롬 3:10~12). 진멸되지 아니함. 1~18절의 절망적 고통이 큰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징계하시기는 하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재삼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23절]

아침마다. 이 말은 결국 매일매일, 즉 매순간을 의미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매순간 느끼고 있다. 성실. 하나님의 사랑은 큰 동시에 성실하며 가장 믿을 만한 것이다.

[24~26절]

22, 23절에 나타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주관적 신앙 고백이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신 32:9; 렘 10:16). 잠잠히 기다림. 극한의 고통 속에서 탄식하고 부르짖던 사람의 지친 심령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는 고요해지고 잔잔해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격정이 지나가고 난 후의 고요함 속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희망의 메시지를 음미하고 있다.

[27절]

저자는 절망을 넘어서서 고난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난은 젊음을 보다 완숙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즉 저자는 고난을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고난관이다(슥 13:9; 벧전 1:7).

[28~30절]

하나님의 훈련에 대하여 취해야 할 자세 - 그것은 조용히 순복할 것(28절)과 완전히 낮아질 것(29절)과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적대자에 대하여 대항하지 말 것이다(30절; 1:5; 2:16).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입이 땅에 있는 티끌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라는 의미로서 완전한 복종에 대한 상징적인 명령이다.

[31~32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참아야 할 이유 - 그 징계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도 매를 드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의 죄가 컸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렘 44:4~6). 하나님의 징계는 일시적인 것이며 나의 성숙을 위한 것이다(히 12:11~13). 징계가 큰 것은 그의 긍휼히 여기심이 크기 때문이다.

(33~36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 -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형통하며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신다(창 1:28~31). 그는 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억눌리고 소외되어 아파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그의 공의로우심과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35~36절]

유다가 패전국의 백성으로서 부당한 재판과 억울한 송사 등의 비참한 대우를 받았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7~39절)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 저자는 33~36절에서 인간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설명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축복 뿐만이 아니라 고통과 환난도 주장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37, 38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신 32:4; 사 30:18; 슥 9:9).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처럼 변덕을 부리시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사랑을 주시나 인간의 죄가 그분의 거룩성에 위배되므로 필연코 징계하시는 것이다.

[39절]

근본적으로 고난은 죄로 인하여 온다. 이것을 깨달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오직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에 달려 있다(요일 1:9).

[40~41절]

이 부분에서 저자는 위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유다 백성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행위를 조사하고. 회개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것이 회개의 근본 정신이다. 즉 회개란 인간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42~47절]

본서 전면에 거듭 반복되는 내용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유다의 고통을 다시 한번 표현하고 있다. 평안한 상태에서 이 글을 읽으면 다소 중복되는 내용으로 진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 그 냉혹한 참상을 체험한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이를 거듭거듭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31, 32절과 모순되는 것 같으나 이는 범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군축하시며. '따라 잡으시며'라는 의미이다. 진개. 버려진 물건, 티끌을 말한다(고전 4:13).

[48~50절]

고난을 통한 회개 - 42~47절에서 예루살렘의 참상을 거듭 밝힌 바 있는 선지자는 동족의 고난을 보고 또다시 눈물짓고 있다. 한편 이를 다시 말한 것은 끔찍한 고난을 당한 저자가 이를 계기로 회개의 각성을 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패망의 끔찍한 참상, 이에 대한 1차적 반응인 슬픔, 깊은 각성을 통한 2차적 반응이 회개와 더욱 성숙한 신앙이 본서의 기본 패턴을 이루고 있다. 3장의 후반부 42~66절도 전반부와 동일한 패턴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1~66절 주해에서 밝힌 바 있다.

[51절]

성읍의 모든 여자. '여자'는 히, '벤'으로서 처녀를 가리킨다. 저자는 혼인도 하지 못하고 고난을 겪는 유다의 딸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있다. 이 말은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52~54절]

예레미야가 겪은 고난 - 저자 자신이 겪은 수난이 기술되어 있다. 53절은 시드기야 왕의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빠진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렘 38:5, 6).

(55~63절)

구원에 대한 간구 - 저자는 다시 유다 민족의 대표로서 그들의 구원을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며(56절), 그의 생명을 속하셨으며(58절), 이미 그의 상황을 감찰하셨다고(60절) 고백하고 있다. 한편 원어로 볼 때 이는 과거형인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일어난 일로 간주하는 선취적(先取的)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55절]

심히 깊은 구덩이.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심각한 재난이나 깊은 영혼의 고뇌를 말한다.

[57~58절]

저자는 본절에서 고난 중에 있는 자가 회개 기도하였을 때 위로와 구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기본 주제이다.

(59~66절)

이방에 대한 보응을 구하는 기도 - 유다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이방 세력들의 범죄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방인들은 심판 도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심판자의 위치에 서서 유다를 심히 핍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심판 도구로 심판을 수행하면서 그 자신이 범죄함으로 심판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은 이를 고발하면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 호소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행하면 그것은 범죄이다. 복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민 31:1~3; 신 32:35; 잠 20:22).

 

# 해설

선지자의 비탄 (1~18절)

유다의 처절한 환난에 대한 예레미야의 체험적인 고백이 '쓴 것', '조약돌', '재' 등으로 형상화된다(15~18절). 이것들은 선지자의 모든 소망을 빼앗아 버리기에 충분할만큼 엄청난 고통이었다(18절). 그럼에도 그 무엇이 선지자로 하여금 슬픔과 애통의 극한을 견디며 이 처절한 애가를 짓게 하는가. 이 비밀을 우리는 그의 탄식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의 소망 (19~39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인식을 정점으로(22, 23절) 극심한 절망과 탄식이 눈부신 희망과 믿음으로 극적 전환을 이룬다. 25~39절은 이러한 인식의 총체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밀도 있게 짜여진 한 편의 찬연한 지혜의 시를 이룬다. 고난을 통한 죄의 인식과 고백, 회개를 통한 더 높은 신앙으로 성숙하는 것은 본서 전반에 걸쳐 흐르는 핵심 주제이다.

회개 요청 (40~54절)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회개의 능력에 의지하여 백성들에게 속히 회개할 것을 간원하는 선지자의 눈물이 예루살렘의 참상을 씻어내려는듯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예레미야, 그는 자신의 몸을 유다의 고난과 애통의 뚜렷한 상징으로 내놓은 눈물의 선지자요, 탄식의 선지자였다.

구원과 보응에 대한 간구 (55~66절)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으며(56절), 자신의 생명을 속하셨고(58절), 자신의 상황을 감찰하셨다고(60절) 고백한다. 이러한 그의 선취적(先取的) 신앙은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주는 바,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회개하는 자에게 능히 위로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다(시 34:18; 사 57:15).

 

# 핵심

1~66절

유다의 처참한 환난으로 인한 비탄과 절망 가운데서도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희망과 믿음을 담고 있다.

애3장의 문학적 양식 (1~66절)

본장의 애가는 히브리어 원문상 한 연당 3구절씩, 총 22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연의 세 구절은 동일한 히브리어 자음으로 시작되는 두운법으로 구성되었고, 각 연의 머리글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된다. 이와 같이 정교한 답관체 형식은 애가에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인의 전통적인 문학 양식이다.

 

# 묵상

예레미야의 고난 (1~9절)

고난은 어느 누구도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아니라 멸망과 심판을 예언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당시의 반바벨론 정책을 지지하는 왕과 그의 방백들에게 친바벨론 노선을 취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에 반민족주의자로 간주되어 비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의 말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고소, 고발되었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롱당한 예레미야 (14절)

당시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조롱했던 까닭은 그가 여러 가지 이상한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지 그릇을 깨거나 나무 멍에를 목에 걸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다가오고 있는 심판을 경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참선지자인 그를 비웃었습니다.

중심에 있는 소망 (21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본문의 말씀은, 내외적인 상황을 보면 전혀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유일한 소망은 여호와께서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나 진멸치는 않으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존재 자체가 그의 백성들의 미래를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성실하심이 크신 주님 (22~23절)

본문에 언급된 자비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그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긍휼은 이 자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주의 크신 성실하심을 고백한 것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이 인간의 타락과 불신으로 인해서 파기될 지경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깨어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실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죄악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즉시 돌이켜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취할 태도 (40~41절)

사람이 고난 가운데 처했을 때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며,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즉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손을 드는 것은, 외형만 기도의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대로 행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예레미야의 적대자들 (52~54절)

무고한 예레미야의 대적이 된 자들은 바로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 셀레먀의 아들 유갈, 마기야의 아들 바스훌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여 백성을 두렵게 하였다 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원래 물을 저장하는 창고였으나 물이 없었을 때는 감옥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주께 간구하는 예레미야 (59~66절)

본문은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믿는 예레미야의 간구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감찰하시고 신원하실 것을 간구하였고, 또한 여호와 백성들을 고난에서 구원하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모해하고 조롱함으로써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마시고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를 구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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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2절)
심판에 대한 예레미야의 탄식 - 본장의 구조는 1장과 비슷하다. 1~10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11~22절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저자의 탄식을 묘사하고 있다. 1장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였다면, 여기서는 비교적 추상적으로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장 역시 슬프다라는 말로 시작되어 전체적으로 비탄에 젖은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본장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 규명으로서, 그것이 군사력의 약화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주께서, 여호와께서라는 말이 각각 3회씩 사용되었었는데 이것은 엄위하신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주도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 준다. 결국 본장은 비극적인 현실의 결과만을 보지 말고 눈을 돌려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심판의 원인 자체를 제거해야 함을 교훈한다.
[1절]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우셨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구름이 덮었다고 하여 태양이 없어진 것은 아니며 다시 태양이 드러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연상시키며(사 14:12) 이는 유다에게 임할 중한 심판을 나타낸다. 극에 달한 영광일수록 거기서 떨어지는 아픔은 처절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영광과 수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고 높은 위치에 있을 때 교만하지 말며 낮은 처지에서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등상. 발을 올려 놓을 수 있는 발판을 가리킨다(사 6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의미한다.
[2절]
야곱의 모든 거처. '야곱의 초장들'이라는 의미로서 이 말은 '유다의 견고한 성', 곧 요새와 대조적으로 쓰였다. 따라서 본절은 백성들의 일반 거주지나 군대가 주둔하여 방어하는 곳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말한다. 즉 유다 전역에 걸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3절]
맹렬한 진노.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분노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그만큼 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사랑은 유다의 영적 음행을 방관하지 아니하셨다(출 20:5; 호 4:12, 13).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뿔'은 강한 힘과 세력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자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권력, 권위, 부요, 아름다움 등을 철저하게 파괴하셨다.
[4~5절]
여기서 하나님은 유다를 공격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유다의 대적 바벨론의 군사들이 취한 무섭고도 잔인한 행동 속에서 시인은 대적의 배후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수없는 경고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마치 대적과 같은 모습으로 그의 백성을 징계하신다(사 30:9~14).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성도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시기 위한 것이다(히 12:5).
[6~7절]
하나님께서 유다의 종교적 제도와 의식적 신앙을 모두 폐기하시는 장면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처소이며, 성소는 하나님께서 '나의 영원히 쉴 곳'(시 132:14)이라고 부르셨던 곳이다. 유다는 성막이나 성소 또는 각종 절기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원천인 하나님은 망각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추구하고 안 보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곧 망각하는 인간의 종교적 무지를 단호히 배격하는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는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과 거룩한 의식이나 성물이 형식화되면 오히려 참된 신앙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저희가...하였도다. '저희'는 바벨론 군대를 가리킨다. 전에는 절기의 날에 찬양과 음악으로 가득하였던 여호와의 전이 지금은 이방 군대들의 연회와 떠드는 소리로 더럽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8~9절]
파괴된 예루살렘 성의 침상이 묘사된다. 줄을 띠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확한 측량줄을 가지고 심판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그의 심판은 공의로운 것이며 엄격한 기준에 의한 것이다.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이와 같은 무생물의 의인화는 예루살렘이 넘치는 비통함을 잘 드러내 준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유다는 택한 백성이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기에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었다(삼상 3:1). 하나님의 침묵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영적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10절]
장로는 지도자들을, 처녀는 힘없는 백성들을 가리킨다.
[11~12절]
B.C. 589~587년에 있었던 바벨론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 중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왕하 25:1~3). 당시 성내는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죄악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오열을 토하고 있다.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유대인들은 감정의 근원이 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극도의 고통 때문에 감정이 마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말한다. 혼이 떠날 때에...어디 있느뇨 하도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먹을 것을 찾는 어린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비극은 죄와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경고해 주는 교훈적 사건이다. 세상 끝날의 심판도 정식적, 영적 차원의 고통은 물론 이처럼 분명한 육신의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신 11:28; 삼상 12:15).

[13절]

예루살렘의 비극은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참상이 너무나 크고 이 비극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14절]

본절은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에 대해 공박하고 있다<겔 33:6, 종교 지도자의 책임>. 유다의 수난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이 선지자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죄악을 경고하기는커녕 거짓된 평안을 선포하여 백성으로 멸망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렘 8:8~12). 여기서 영적 지도자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말세가 가까울수록 거짓 선지자들이 많아질 것을 경고하셨다(마 24:24).

[15~16절]

이 부분은 유다의 참상에 대하여 이웃과 원수들이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성도들이 실족하여 곤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손상을 입으며 악한 세력들은 즐거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도가 그러한 비웃음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고 스스로 교훈을 삼는다면 오히려 큰 신앙 성숙의 기회가 될 것이다(삼하 16:5~14). 지나가는 자는 유다의 주변 국가들을 말한다. 예루살렘이 강성하였을 때 그들은 그 성을 흠모했으나 성이 멸망하자 이제 그들은 지난날의 융성을 들추어 내면서 비웃고 있다. 이처럼 세상 인심은 표변한다. 이는 세상이 속보다는 겉만을 보며, 자기 자신만을 위하며, 최종적 끝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하도다. 유다의 원수들은 유다의 멸망이 자기들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유다를 징계하는 막대기로 사용하셨을 뿐이며 막대기는 용도가 사라지면 꺾어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성도는 하나님의 1회용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적인 것이다. 또한 성도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때에는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협력자로서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시는 사랑과 능력은 오직 주께만 있으니 도구로 쓰인 자들이 자랑하거나 교만할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17절]

본절은 이와 같은 비극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예전에 모세는 여러 번에 걸쳐 이스라엘의 패역과 불순종에 대하여 경고하며 예언하였던 것이다(레 26:23~29; 신 4:25~31; 신 28:15~68; 신 31:29).

[18~19절]

암담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의 방법으로서 기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할 것과 쉬지 말고 기도할 것과 밤중에 기도할 것과 마음을 다하여 기도할 것을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환난이 극심할수록 성도는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다시 싸매시며 성도의 통회하는 부르짖음을 결코 오래 방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눅 18:1~8). 눈물을 강처럼 흘릴찌어다. 회개의 기도를 촉구하는 표현이다. 밤 초경에...부르짖을찌어다. 자는 것도 제쳐놓고 깊은 기도에 몰입하라는 의미이다. 네 마음을...물 쏟듯 할찌어다. 온 마음을 집중하여 깊은 기도를 드리라는 뜻이다.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20~22절]

하나님을 향한 호소 - 본서는 다섯 장의 각각 독립된 연작시(連作詩)라 할 만하다. 2장의 말미도 1장과 마찬가지로 여인이 자기 아이를 먹고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상황의 열거와 더불어 즉각적 구원을 외치는 내용으로 끝맺고 있다. 여기서 애가는 애가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기도로 끝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슬픔과 탄식으로 끝내지 말고 희망의 기도로 끝내야 할 것이다.

 

# 해설

하나님의 심판 (1~10절)

바벨론의 맹렬한 공격과 잔인한 살육을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면서 선지자는 대적의 배후에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명백하게 증거한다. 성전 파괴와 공중 예배의 중단(6~10절)은 하나님 자신의 아픔과 슬픔, 치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속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방관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은 어느 때에나 거두어질 수 있을 것인가!(출 20:5; 호 4:12).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11~19절)

지도자들의 무책임에 의분을 터뜨리며(14절), 원수들의 조롱에 수치를 느끼면서도(15, 16절) 선지자는 유다의 참상이 고쳐질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13절).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비유할꼬'(13절)하며 탄식하는 선지자의 눈물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눈물을 본다(마 23:37, 38). 선지자는 눈물과 회개의 기도만이 암담한 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18, 19절).

긍휼에 대한 호소 (20~22절)

여인이 자기 아이를 잡아먹고,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살상되고, 늙은이와 젖먹이들이 길거리에서 칼날에 엎드러지는 등 거침없이 열거된 이 끔찍한 상황들은 무엇보다 즉각적인 구원에 대한 간절한 호소를 내포하는바, 선지자는 이를 통해 죄의 파괴성을, 그로 인한 심판의 참혹성을 깨닫게 하는 한편, 그 죄와 회개에 대한 각자의 책임 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현재의 절망에서 벗어나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한다.

 

# 핵심

1~22절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 예루살렘을 향한 두 번째 애가가 시작되는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바벨론의 공격을 통해 생생히 묘사된다.

 

# 묵상

자기 제단을 버리신 여호와 (7절)

본문의 이 말은 여호와께서 적들에게 성전 파괴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전 파괴, 제사 금지, 적들에 의한 성전 모독 등이 적들의 신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일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성전과 제사를 통해서 맺어졌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패망에 대한 탄식 (11~16절)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패망으로 인한 슬픔을, 눈이 눈물에 상하며 창자가 끓으며,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기가 막힐 처지와 원수들의 조롱을 묘사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역할 때문에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실 말씀의 기근 때문에 굶주리며 상한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현실을 보고 예레미야와 같은 탄식과 슬픔, 긍휼을 가지며, 하나님 때문에 소망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 (17절)

이는 율법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는 저주나 위험을 말합니다(레 26:14; 신 28:15~19). 또한 포로기 이전의 심판 예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일이며 계획하신 일이라면, 이는 그 고난이 제거될 날이 있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른 유다의 멸망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소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 속에 있는 것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타락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 study
(1~22절)
예루살렘의 황폐가 주는 교훈 - B.C. 586년 포악한 이방인의 발 아래 처참하게 짓밟힌 예루살렘의 폐허 현장에서 피묻은 목소리로 절규하며 비탄의 노래를 부르는 예레미야의 육성이 본서 1절부터 터져 나오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 함락의 원인과 과정, 그 후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았다. 예레미야서는 선지서, 즉 예언서이고, 본서는 비탄시(悲歎詩)인 점에 유의하라. 예레미야는 여기서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북받치는 슬픔과 두려움, 구원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비록 시편의 시들에 비해 분량이 긴 장편시이기는 하지만 시편의 비탄시들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시 55:1~23절). 본장은 모두 22절로 되어 있는데 1~11절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예루살렘 파괴의 상황을 묘사하며, 12~22절은 보다 주관적으로 예루살렘 백성의 슬픔을 토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선지자는 애가를 불러야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는다.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드디어 심판이 내렸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예표적 경고가 된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택한 백성들의 수도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땅, 또는 신약 시대의 복음 운동의 출발지로서 심지어는 천국의 모형으로까지 제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 준다. 예루살렘이 이토록 완전히 파괴되고 그 백성은 모두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먼저 회개하여 하나님의 예루살렘 회복 약속에 의지하며, 새로운 구원과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를 징계하시기는 하지만 결코 영원히 심판하시지는 않는다(렘 31:3; 말 3:6; 히 13:8).
[1절]
슬프다. 이 말의 히, '에카'는 '어떻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재난을 당한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의미이다. 본절은 예루살렘 파괴의 고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과거의 영광스러운 지위와 오늘날의 지위를 세 가지로 대조 제시하고 있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행복을 기억할 때 더욱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안락에 탐닉할 것이 아니라 항상 시련의 때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절]
밤새도록 애곡하니. 잠자는 것을 잊어버린 채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은 극에 달한 슬픔의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친구도...원수가 되었도다. '친구'는 예루살렘과 동맹을 맺었던 애굽,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를 가리킨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여러 이방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다가 위기에 처하자 유다를 배신하고 말았다(호 2:7).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제한적 존재인 인간은 가변적이어서 절대적인 신뢰를 줄 수가 없다. 이처럼 철저히 패배한 경우에도 우리의 편에 서 주실 분은 오직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뿐이시다.
[3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유다 백성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열방에 거하여. 열방 중에서 구별되었던 백성(민 23:9)이 열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요 14:27)을 외면해 버린 그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강을 외면해 버린 죄인의 자업자득인 것이다.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까지 도달했다는 시적 표현이다.
[4절]
예루살렘 파괴의 결과 중 하나인 신앙 생활의 단절을 의미한다. 과거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시온의 대로가 이제는 고요하기만 할 뿐이다. 외적 종교 축제의 금지는 내적 신앙의 기쁨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에 그들이 습관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징계로 이제는 강제로 그 신앙 생활이 폐지되어 신앙 생활의 기본적 자유조차 박탈된 것이다. 처녀들이 근심한다는 것은 절기 때마다 하나님께 찬양하던 처녀들이 시름에 잠겨 있는 것을 말한다.
[5절]
본절에서 저자는 유다가 당하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그들의 죄에 의한 것이라고 밝힌다. 사건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으로,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현재의 파멸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유다의 패전으로 인하여 유다가 이방인들에게 지배를 받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인들이 더 선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의 때를 자신의 영적 성공을 향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6절]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힘없이 달림 같도다. 사슴은 본래 빨리 달리나 제대로 먹지 못한 사슴은 비척거릴 수밖에 없다. 성도들도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능력과 은사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7절]

파멸하는 날에. 과거의 영광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수치를 배가할 뿐이다. 언제나 승자는 최후에 웃는 자이다.

[8~9절]

유다의 죄악과 그 결과를 기술하며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하고 있다.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유다의 죄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긴 영적 간음죄임을 말한다(호 3:1).

[10절]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성소를 훼파하고 성전의 보물들을 탈취해 간 사건을 말한다(대하 36:17~19).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더럽혀진다는 것은 형식적 신앙에 철저했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두려운 일인 동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다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성소나 성물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신성시하였는데(렘 7:1~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식적 신앙을 징계하셨다.

[11절]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기 전후의 심각한 기아 상태를 보여 준다. 바벨론 군대는 B.C. 587년 1월부터 1년 반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안의 음식이 핍절되게 하였는데 성이 무너진 이후에도 식량 사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12~22절)

예레미야의 중보 의식 - 이 부분에는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여기서 유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과 동일시하고 있으며(2:14, 18),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보 의식(中保意識)은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고귀한 제사장적 신앙이다.

[12절]

없는가...있는가. 본절,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패망을 무슨 구경거리인 듯 바라보는 이방인들에게 '도대체 너희가 이런 철저한 패망을 당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음으로써 유다의 패망이 전무 후무한 끔찍한 것임을 강조하는, 소위 수사 의문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패망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선지자가 고백하고 있는 점이다. 선지자의 이 고백은 패망의 모든 원인이 모두 다 자신의 죄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러한 진노의 채찍은 사랑의 표현임을 암시하고 있으며(삼하 7:14; 히 12:5~13), 이를 통해 선지자는 이방인들의 자만을 오히려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13~15절)

예루살렘에 임한 징계 - 다음 여섯 가지 표현은 현재 유다의 고통이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징계로서 전혀 거역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시고, 그물을 베푸시며, 곤비케 하셨고, 죄악의 멍에를 묶으셨으며, 소년들을 부수셨고, 유다를 술 틀에 밟으셨다. 그러나 이는 유다의 죄에 대한 징계이지 결코 유다 자체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회개한 자는 누구나 사랑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물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 22:12).

[14절]

내가 당할 수 없는 자. 유다를 향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 제국을 가리킨다.

[15절]

술 틀에 밟으셨도다. 저자는 유다인들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를 술 틀에서 넘치는 포도즙에 비유함으로써, 처참한 광경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16절]

눈물은 각성한 성도들의 한 특징으로서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원인이 된다(시 51:17). 내 영을 소성시킬 자. 하나님을 의미한다. 멀리 떠났음이로다. 이는 하나님 당신이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잠시 중단되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신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의 은혜의 교제에 합당한가 부적당한가이다.

[17절]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역사를 섭리하시지만 그의 주권은 전우주에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징계의 도구로 이방인을 사용하실 수 있었다.

[18절]

여호와는...거역하였도다. 예레미야는 눈앞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의로우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징계(懲戒)가 부당한 것이 아니라 유대의 불순종으로 인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회개의 촉구는 구원과 더 큰 축복의 지름길이다.

[19절]

사랑하는 자. 애굽, 시리아, 모압, 암몬 등 유다가 의지해 왔던 나라들을 가리킨다.

[20절]

돌아보옵소서. 이제부터 예레미야는 보다 직선적으로 구원을 호소한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구원을 호소하기에 앞서 자기 죄를 고백한 것을 보았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환난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태도로서, 환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순복하고, 겸손히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21~22절]

1장의 끝에서 시인은 비탄에 빠진 자신을 조롱만 할 뿐 그 누구도 도와주는 자가 없는 현실에 새삼 경악하면서 하나님에게만 매달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처절한 환난을 당하면 좌절하거나 낙심하고 말지만 성도는 이렇듯 끝끝내 더 큰 구원을 기대하며 희망의 기도를 올리고 있음에 유의하라. 실제 본서도, 그리고 시편의 많은 비탄시들도 비탄과 고뇌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호소나 간구, 확신으로 끝나고 있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 일차적으로는 역사적으로 유다의 원수들을 심판할 날, 이차적으로는 전우주를 심판할 여호와의 날<욜 서론, 여호와의 날>을 가리킨다.

 

# 해설

예루살렘의 멸망 (1~11절)

1절에서 세 번씩이나 거듭되는 '본래'와 '이제'라는 두 단어는 이전 예루살렘의 영화로운 모습으로부터 멸망으로 인한 현재의 비참한 상황 속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인도하며, 폐허의 한 복판에서 절규하듯 터져나오는 선지자의 첫 육성을 대하게 한다. 히브리어로 '에카'라 발음되는 본문의 첫 단어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라는 절박한 물음과 함께 파란 만장했던 선지자 자신의 생애에 대한 회한의 탄식을 담고 있다. 예언는 성취되었다! 눈물과 탄식으로 쏟아져 나왔던 예레미야의 말들은 피와 울부짖음으로 화하여 무너져 내리는 예루살렘에 휘몰아쳤던 것이다. 동맹국들은 그들을 배신하고 등을 돌렸으며(2절; 왕하 24:2)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고,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기근으로 인한 심각한 핍절만이 폐허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슬픔 중에서도 선지자는 파멸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비극의 궁극적 요인인 '죄'(5절)를 지적함으로써 회개를 통한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선지자의 슬픔 (12~19절)

앞 단락이 3인칭으로 묘사된 데 비해, 본문은 1인칭을 써서 예루살렘의 비극을 선지자 자신의 고통과 합치시킨다. 이는 유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중보 의식을 보여 준다(14, 18절). 한편 선지자는 그의 거룩한 슬픔에로 우리 자신을 부르고 있다(12절). 무릇 이 초대에 응한 자만이 본서의 마지막에 진설된 은혜의 기쁨(5:21)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호소 (20~22절)

예루살렘의 멸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징계의 결과임을 파악한 선지자는 중보의 기도로 죄를 고백한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며 그의 첫 번째 애가를 마무리한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21절)은 회복에 대한 명백한 근거로서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신앙의 회복과 난관의 극복을 제시하고 있다.

 

# 핵심

1~22절

예루살렘 멸망의 비극을 슬퍼하며,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호소하는 첫 번째 애가이다.

포도주 틀 (15절)

포도를 압착하여 포도주를 만드는 용구(사 63:2). 포도를 밟아 짜는 압착통과 거기에서 흘러 내리는 액즙을 받는 수용통이 달려 있었다. 압착통은 자연석을 파서만든 60cm 깊이의 장방형 구덩이로서, 포도 열매를 넣어 밟아 짰다. 여기서 흘러 나오는 액즙은 깊이 1.2m가량의 수용통으로 들어갔는데 수용통의 용적은 압착 통의 반 정도였다.

 

# 묵상

예루살렘 함락 이후 (1~7절)

예루살렘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함락 당했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원래 유다인들은 생각하기를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변에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예루살렘만은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이방 국가가 외면했으며, 거민들은 곤욕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유다를 술틀에 밟으신 하나님 (15절)

예루살렘의 황폐한 모습을 설명한 예레미야는 이제 이 황폐케 된 예루살렘으로 인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는 본문의 말씀은, 유다를 철저히 파멸시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포도를 술틀에 넣고 밟아 그 포도즙을 짜내듯 예루살렘 사람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 주어 짓밟히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 (19절)

'사랑하던 자', 즉 '친구'는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적 우방이며 동맹국이었던 애굽, 모압, 에돔을 가리킵니다(2절). 멸망 직전 시드기야 왕은 애굽과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동맹국들은 돕지 않고 오히려 신의를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했습니다(호 2:7).

주께서 반포하신 날 (21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이란 바로 주께서 죄악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선언하신 날을 가리킵니다. 즉 '여호와의 날', '말일'이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이는 하나님께서 대적의 죄악에 보응하시며 심판하실 날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원수들의 반응 (21절)

주께서 예루살렘에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한 그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스라엘에 대적해 온 에돔, 모압 족속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회복을 비는 눈물의 간구

[예레미야애가 5장 1절~22절]
1절 -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2절 -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3절 -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4절 -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5절 -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6절 -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절 -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절 -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9절 -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절 -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11절 -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절 -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절 -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절 -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15절 -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16절 -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17절 -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18절 -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19절 -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절 -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절 -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절 -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 주제별 목록 작성
유다 백성들이 처한 상태
1절 : 치욕을 당하는 상태
2절 : 기업과 집들이 외인에게 돌아감
3절 : 아버지 없는 자식의 외로운 상태
5절 : 뒤쫓는 자가 목을 누르는 상태
8절 : 종들에게 지배당하는 상태
10절 : 굶주림으로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게 된 상태
11절 : 대적에게 욕을 당함
16절 : 면류관이 떨어짐(언약 백성의 영광을 상실함을 의미)

* 도움말
1. 굶주림의 열기(10절) : 마치 온몸과 모든 내장을 태워버릴 것 같은 처절한 배고픔을 뜻한다.
2. 청년들이 맷돌을(13절) : 당시 맷돌질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유다의 고급 인력이 노예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3. 크시니이다(22절) : 원어적으로 ‘강함, 힘’을 의미하며, ‘아주 강하게 힘쓰다, 도에 넘치도록 열심이다’라는 뜻이다.

* 말씀묵상
1.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와 치욕을 살펴보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1절). 오직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기업이 외인에게 돌아가고 아버지 없는 고아같이 되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으로 고통받아야 했으며 부녀들은 바벨론의 침략자들에 의해 수치를 당했고 장로들은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조차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스라엘 원로들의 재판권이 없어졌고 청년의 즐거운 노래도 사라졌습니다(2-18절).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정상적인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굴욕과 수치를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2.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영원한 왕이신 여호와께 그의 주권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전제로 회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시면 그들이 주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도하는데, 이는 회개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고백입니다(21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아니고는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탄식으로 기도를 끝맺습니다(22절).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고도 탄식으로 끝을 맺는 선지자의 기도에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같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기도자들의 이러한 기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이 처한 상태를 나타낸 내용을 찾아 살펴보십시오(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선지자가 회복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무엇입니까?(21절)
* 깊은 묵상
1.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께는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2. 여러분은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제공:프리셉트

황폐함 속의 소망

[예레미야애가 4장 11절~22절]
11절 -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12절 -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13절 -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절 -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15절 -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6절 -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17절 -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18절 -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19절 -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20절 -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21절 -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22절 -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 주제별 목록 작성
예루살렘 함락 당시의 참상(2)
11절 : 시온성의 완전한 파괴
14절 :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피 묻은 옷을 입고 방황함
16절 : 제사장과 장로들을 높이거나 대접하지 않음
20절 :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왕)가 함정에 빠짐
22절 : 많은 백성이 포로 됨

* 도움말
1. 부정하다(15절) : ‘더럽다, 불결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나병환자처럼 행하는 것으로, 나병환자는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라고 외침으로써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혹시 모를 병의 전염을 예방하였다.
2. 우리의 콧김(20절) : 콧김이란 ‘호흡’이라는 뜻이며, 호흡은 ‘생명’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의 생명처럼 귀한 존재인 ‘우리의 왕’을 가리킨다.

* 말씀묵상
1.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죄악으로 인한 황폐
예루살렘이 불에 타서 황폐화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예레미야는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백성들에게 교훈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여 욕심을 추구했고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하는 가증한 죄악을 일삼았습니다(13절).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셨고, 그들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하게 되며 그 옷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는 부정한 자가 되었습니다(14절). 그들은 이방인들에게서조차 부정한 자로 취급받는 수치를 당했으며,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흩어짐을 당하고 다시 권고하심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5-16절).

2. 황폐함 속의 소망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멸망당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헛된 것을 의지하며 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17절).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였다가 바벨론 왕의 분노를 샀고,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비참하게 진멸당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에돔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21-22절).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 국가임에도 바벨론과 함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을 징벌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에돔 족속에 대해 죄를 물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또한 회복, 즉 바벨론의 포로가 된 지 칠십 년 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대적에 대한 심판과 함께 성취될 것입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예루살렘 멸망의 참상에 대한 내용을 찾아 목록으로 작성해보십시오(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에돔의 심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메시지 참조)
* 깊은 묵상
1. 오늘날 교회 안에서 리더십의 부재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은 무엇입니까?
2. 여러분은 어려움과 환난에 처했을지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해보십시오.


제공:프리셉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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