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인들의 문제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견책함으로 다루어 주고 있다. 단 이와 더불어 격려와 위로도 잊지 않고 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바울 스스로가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양무리에게 경건하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를 본 장에서 배울 수 있다.

1. 바울의 기도 요청(살후3:1-5)
바울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시다. 자기에게 주께서 맡긴 양무리(데살로니가 교인)에게 겸허하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단 양무리에게 바라는 바도 있다. 바울은 무엇을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무엇을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기원하는가?

1) 양무리를 위한 기도
바울이 양무리들에게 기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첫째, 복음 사역의 성공이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 또한 바울과 같은 동역자에 의해 되어지며 이에 기도 지원이 필요하게 된다. 두번째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보호를 위해서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어디서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그들의 목숨까지도 위태롭다. 바울 또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고후11:23-33). 복음과 자신들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면서도 또 바울은 양무리들을 격려한다(살후3:3).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양무리들이 자신이 명한 것을 지킬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형(행하고)과 미래형(행할줄)을 쓴 것은 바울이 확신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양무리들을 대해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또 양무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기를 기도한다(살후3:5).

2)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
요즘 교회에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다. 그리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것을 자랑하는 교회도 많다. 어떤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의 사역을 자랑하기도 하고 선교사가 잘못하였을 경우에는 문책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파송한 선교사를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 사역을 위해, 또 문화가 다르고 이질적인 기후와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안전과 보호와 건강과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2. 규모 있는 삶(살후3:6-15)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원 중에 재정을 잘못 이해하여 규모없이 사는 이들을 바울은 엄하게 꾸짖고 있다. 꾸짖는 바울의 권위는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일만 만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규모없이 행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 올바른 길을 가르치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적인 권위로 엄히 명하고 있다(살후3:6). 사도의 권위는 주님의 권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행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내린 저주 이후 인간은 수고하여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유대인 격언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가 있다. 생존을 위하여 때로는 자아 실현을 위해서도 우리는 노동하여야 한다. 살후3:11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의 의미를 존 낙스(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는 '자신의 일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바울은 출교시키라고 명하지는 않고 있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그들 스스로 바른 길을 가도록 교회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2) 열심 있는 삶
'일'의 의미는 생존권 확보와 자아 실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게으른 자에 대해서 엄히 꾸짖고 있다. 6일간 열심히 일하고 안식일에 쉬는 것이 주의 뜻이다. '일'은 이렇게 주의 뜻이요, 계명이며 실제적으로도 우리를 생존케 한다.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해주며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더 나아가서 나태함과 죄의 유혹에서 건져준다. 그러므로 행여 잘못된 재림 사상으로 나태함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가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태도이다.


3. 주님의 은혜(살후3:16-18)
바울은 편지의 끝맺음을 맺으면서 축복과 기도를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친필로 문안한다는 말을 삽입하였다. '친필로 문안한다'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1) 평강을 주심
바울은 주께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였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도 모든 인류의 공통된 소망이다. 평화는 주님이 함께 하실 때만 얻을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친필로'라는 의미는 고전16:21, 갈6:11, 골4:18에서도 나오며, 이는 이 서신에 바울의 권위를 더하는 것을 의미하여 악한 자들이 편지를 날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영원한 평강
우리 인사말에 '안녕하세요'가 있다. '안녕', 즉 어떤 의미에서는 '샬롬'(평화)과 같다. 많은 나라 인사말에 '평화', '안녕'은 들어 있다. 그만큼 인류의 보편적인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이 '안녕', '평화'는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

바울은 목자로서 따뜻함과 엄격함과 겸허함 그리고 권위를 갖춘 분임을 알 수 있다.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면서 자신의 양무리(데살로니가 교회)를 견책도 하고 격려도 하고 중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겸허히 기도를 요청한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그 스스로 본을 보여 주셨다(살후3:9).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삶으로 인도한다. 올바른 종말 사상으로 인생을 열심있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함을 배운다. 사도요 목자인 바울에게서 참다운 삶의 모범을 배우며, 이 모든 기초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하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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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제국
일개 도시 국가였던 로마가 그 세력을 갈리아, 스페인, 북부 아프리카, 헬레니즘 왕국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반 전부터였다. 공화정에 의한 정치를 하던 로마 제국은 강력한 율리우스 케사르의 세력이 나타나자 그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의 조카이자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 제도의 형식을 보존하면서 실제적 권력을 장악하면서 전 지중해 지역에 평화를 주기 시작했다.

1) 로마의 종교
그들의 종교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로마 헬리니즘 세계의 '시민종교'라 할 수 있는 가족의 신을 섬기는 종교가 있었고, 둘째, '신비주의 종파'를 들 수 있겠는데, 풍요를 기원하는 신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철학적 지혜를 추구하여 인간의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추구해가는 형태를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신민으로 인식하였고, 로마는 신적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제국 도시가 신들과의 언약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여신 로마를 숭배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신과 같은 황제를 숭배하도록 하였다.

2) 철학
로마와 헬레니즘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운동에서 생긴 것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철학적 자조에 근거한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과 등이 나타났다. 에피쿠로스 학과에서는 정신적 혼란이 없는 상태를 최고선으로 여겼는데 생활 속에서 자기 억제를 그 특징으로 갖는다. 이들의 종교는 혼란과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 되는 것을 최고선으로 보았다. 즉 로고스(정체)와 내적인 본질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2. 적그리스도

 

일명 '불법의 사람'(살후2:3)이라고도 한다. 적그리스도에 관한 문제는 초대 기독교의 종말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에 대한 연구가 1895년 보우세트(W.Bousset)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로마 멸망후 유대인 가운데서 나타나 자신의 신적 지위를 선포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종교를 세울 것이다. 그는 단 지파 출신의 유대인일 것이다(창49:17 ; 신33:22 ; 렘8:16). 엘리야가 나타나 그를 탄핵할 것이며, 그는 고통 중에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삼년 반 동안 다스릴 것이다. 참된 신자들은 그가 요구하는 그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고 광야에서 피난처를 찾을 것이며, 적그리스도는 그곳까지 그들을 추적해 올 것이다. 그들이 거의 멸절될 위기에 처하게 될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그를 없이하실 것이다. 라고 보우세트는 밝히고 있다.

3. 탈무드

1) 탈무드의 형성 배경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생활의 규례, 성서 해석, 현자의 충고 등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수록되어 있는 일종의 율법서이다. 이 책의 형성 시기는 대략 에스라 시대부터 6세기까지 약 천년에 걸쳐 기록된 책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구전으로 계승되었다가 기록의 필요성을 느껴 편집하게 되었다. 선조들의 지혜를 수록하여 후대에 남기고 장차 받게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삶의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 탈무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서 못지 않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2) 탈무드의 역본
탈무드는 팔레스틴 탈무드와 바벨로니아 탈무드로 나누는데 이들은 형식과 언어 등이 상이하게 다르다.
① 팔레스틴 탈무드
팔레스틴 탈무드는 '서방 아이들의 탈무드' 혹은 '예루살미'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주로 세포리스와 가이사랴 학파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것이 형성되던 시기는 로마의 지배하에서 박해를 받던 시기로 구전되던 것을 급하게 편집한 관계로 부족한 점이 많다.
팔레스틴 지역에 전승되던 것들을 '요하나 벤 나파하'가 수집·정리하여 편집했다는 설이 있다.
② 바벨로니아 탈무드
바벨로니아 탈무드는 유다와 미쉬나에 관한 토론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세속적이며, 종교적인 랍비들의 모습과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본을 처음 시도한 자는 '압바 아리카'이다. 이후 라브 아쉬는 할라카와 학가다의 많은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하여 그의 제자인 라비나 바르후나가 이것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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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가 바로 오시는줄 알고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혼돈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재림의 과정을 설명하고 또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바울이 구하는 것(살후2:1-3)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재림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은 잘못된 점을 시정하기를 바라고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바울의 방법은 무엇인가? 잘못된 가르침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바울은 그럼으로써 무엇을 명하고 있는가?

1) 흔들리지 않는 믿음
우선 바울은 그들에게 '형제들아' 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가족적인 애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바울은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럼으로써 잘못을 시정받을때 느낄 수 있는 불쾌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게 해주었다. 바울은 주의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와 과정에 대하여 그리고 재림을 바라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하여 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태도에 대하여 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가르침은 평안한 가운데있는 믿는 자들을 흔들어 놓고 속이기까지 한다. 바울이 원하는 성도의 신앙은 요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믿음가운데 굳게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도는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즉 바울은 미혹에 빠지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2) 평안한 믿음
잘못된 가르침은 우리를 흔들어 믿음에서 멀어지게 한다. 한동안 잘못된 재림 사상으로 전국이 떠들썩 했던 기억이 새롭다.
참된 신앙이란 냄비처럼 들끓고 식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가운데의 평안함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하며, 또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여 올바로 가야 하겠다.

2.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멸망(살후2:3b-12)
재림 때에 일어날 현상들을 바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말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요한계시록의 가르침이 서로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언급한 재림의 때, 그 순서는 어떠한가?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왜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시는가? 이에 대해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때 어떻게 해석되어졌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1) 주님의 재림 때

주님의 재림의 때 그 순서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그 다음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전에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막는 세력이 있다. 적그리스도가 활동한 뒤에는 그리스도가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신다. 적그리스도는 교만하여 기적을 일으키고 속이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주후 40년에 가이우스(Gaius Caesar) 황제 동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섰을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났을 것이다.(막13:14). 그러나 그때도 아직 재림의 때는 아니었다. 부르스(F.F.Bruce)는 바울의 생각에 살후2:7의 막은 자를 로마 제국 또는 황제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복음의 대적자인 유대인의 훼방을 로마 제국의 법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스의 말대로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2) 깨어있는 신앙
시대마다 적그리스도와 막는 자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루터(Luther)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최근에는 고르바초프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신앙인이 있었다. 재림의 때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려운 날을 준비하는 신앙인들은 깨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격려(살후3:13-17)
다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애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해 준다.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가? 감사 조건은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1) 자기 확신을 가지게 함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보다도 주님이 더욱 사랑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어 자기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 감사 조건으로는 선택하여 구원을 얻게하신 것이다. 이에 상하(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가정과 믿음(진리를 믿음)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부주의 하고 방탕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더욱 성결하게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야 한다. 이에 대한 결과로 주의 영광을 얻게되는 것이다(살후2:14). 이를 위해서 사도들이 전한 바를 지켜야 한다(살후2:15). 이에 대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있다(살후2:17).

2) 구원에 이르는 삶
우리가 이세상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인내로써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우리를 택하여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잘 감당하여 성결된 생활을 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행여 종말이 온다고 하여, 또 택하심을 받았다 하여 느슨해지거나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갈때 우리는 주의 영광을 얻게 된다.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분명히 있다(살후2:3-12). 역사상 재림의 시기를 놓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동에 빠지기도 하고 미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이 장에서 우리에게 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성결된 삶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다. 행여 종말 사상으로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기대감으로 빚어진 상실감은 치료하기가 더욱 힘들다. 잘못된 재림 운동으로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잃어버린 상처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치유하는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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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의 서신을 주목해 보면 대체로 두가지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즉 바울의 서신들 중에는 기울어가는 형편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경고나 훈계의 편지도 있고, 또는 매우 잘 성장해가고 있는 교회들에게 한없는 지혜의 권면들을 들려주는 서신도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은 후자의 경우로써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교회이다. 사도 바울이 이 교회를 높이 평가했고, 또 실제로 그럴만했던 것이 당대의 그 어떤 교회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특히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믿음은 날마다 더욱 생동감있게 성장했으며, 그 활동에 있어서 왕성한 성취력을 보였다. 그리고 꾸준하게 흔들림없는 견고함으로 성장하는 믿음을 가졌다(살후1:1-3). 또한 이 교회에는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살후1:3)하였다. 즉 실제적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분열은 없다고 하지만 성도들 간에 보이지않는 내적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간에 사랑을 견고히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가는 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의 인내로 견디면서 성장하는 신앙을 가져야 함을 알게해 준다. 또한 뒤의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잡으려고 달음질쳐야 할 것이다.

2. 재림의 의미(살후1:7-10)

주님은 이세상에 다시 오신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확실성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재림이 주는 의미는 불신자들에게 있어 주의 오심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신 그분을 거절하였다. 이 재림을 통해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완악한 고집에 따라 그들 위에 선고된 저주를 의로운 심판장으로부터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서 그때에는 긍휼이 거절당한 그들에게 '어린양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주의 오심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다 준다. 그들은 주께서 구속해 주시는 사람을 가지고 찾아오셨을때 그분을 영접한 자들이다. 또한 주님께서 심판하러 오실때 자기의 소유된 백성들을 영접하실 것이다. 이런 관계 때문에 그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간절한 열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은 사악한 자들에게 공포와 멸망이지만, 그의 성도들에게는 기쁨에 찬 기다림이다.

3. 바울의 중보기도(살후1:11,12)

살후1:11,12에 사도 바울의 중보 기도하는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모든 기도의 제목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헌신적으로 살피는 모습을 대할 수 있다. 바울은 사악한 자들을 징벌하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마지막 날에 이르러 영광에 참여할 것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간구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을 향해 중보기도를 한 것을 세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매우 성결한 자들로 여겨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은혜를 변치않는 것으로 굳게 의지하며 오직 이를 염두해 두고 있다.
②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치있는 자들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시고 의롭게 만드신 성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4. 부르심의 결과

① 우리의 본성이 고귀해진다(고후3:1;벧후1:4). 거룩함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면모이다. 그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는 부르심의 은혜로써 온전한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②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롬1:6 ; 요일3:1).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귀한 영적 존재가 된다.
③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 가운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롬8:28).
④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이 허락된다(엡1:18 ; 빌3:14 ; 벧전3:9).
이 축복은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축복이다.
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열매이다(롬9:11 ; 딤후1:9). 즉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에 합당한 자녀답게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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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에 보내는 두번째 편지의 이 첫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읽어보면, 살후 1장이 한문장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잡한 문장 구성이지만 바울은 자신의 뜻을 단락없이 한문장으로 분명히 전하고 있다. 살후1:3,4과 살후1:11,12은 첫번째 편지(살전)을 바탕으로 썼고 살후1:5-10은 자신의 가르침을 새롭게 쓰고 있다. 감사와 기도가 가르침 양끝에 있음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애정을 느끼고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우리의 자랑(살후1:1-4)
살전의 서두와 살후의 서두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에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교훈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내용과 자랑은 무엇이며 살전의 감사와 자랑과는 어떻게 다른가?

1) 바울과 감사와 자랑
인사말을 볼때 살후1:1은 살전의 인사말과 흡사하고 살후1:2은 다른 바울 서신의 인사말과 흡사하다. 이것을 두고 혹자는 바울의 권위를 이용한 위조된 편지라 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말크센조차도 인사말 자체로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며 오히려 바울이 그의 권위로 쓴 편지라 하였다.
또 감사의 강도가 다르다. 살전1:2에서는 '감사하고'(thanks=NIV)라고 하였으나 살후1:3에서도 '감사할지니'(ought always to thank)라고 감사가 강조되고 있다. 자랑함의 주체도 살전1:8에는 소문의 주체가 주변의 교회였으나 살후1:4에서는 자랑함의 주체가 '우리'(바울 일행) 이었다. 감사와 자랑의 내용도 살전 1장의 내용 요약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첫번째 편지로 인한 혼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첫번째 편지를 상기시켜 주고 몇가지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데살로니가에 대한 애정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2) 예수님의 권면과 자랑
예수님도 부활시에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아침 식사에 초대함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감싸주었다(요21장). 바울 또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기 전에 자신의 애정을 확인,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지혜이다. 진실한 애정이 있을때 그 권면과 꾸짖음 자체가 사랑과 위로로 시작됨을 배운다.

2. 강림하는 그날(살후1:5-10)
이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전 성도가 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가치는 있는가? 그날이 불신자에게는 왜 무서운 날인가? 그리고 인내하는 성도들에게는 왜 영광의 날이 되는가?

1) 심판의 날
심판의 날은 핍박자와 핍박을 받는자 모두에게 임하게 되어있다. 핍박을 받는 자들이란 하나님 나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가 진정 가치있다면 그 가치로 인한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치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자들은 고난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날은 분명히 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믿고 기꺼이 고난을 받은 자는 그날에 안식을 얻고 영광을 얻게 된다(살후1:7,10). 그러나 거부하고 오히려 믿는 자들을 핍박한 이들은 그에 대한 보응으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된다(살후1:6,8,9).

2) 인내의 신앙
안이숙 여사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를 읽어보면 안이숙 여사가 감옥에 있을때 여사를 몹시도 괴롭힌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인내로써 참은 여사에게 감옥에 있던 여죄수들은 모여들었다. 심판 날이 아닌 현세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인내로써 이겨내어 영광을 얻은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하물며 심판의 날에 있을 안식과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핍박과 환난을 인내로써 참아야 할 것이다.

3. 바울의 기도(살후1:11,12)
바울은 살후1:5-10에서 교리적인 가르침을 적은 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기도의 내용과 목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살후1:3,4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처해있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 기도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기도의 근거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영광
기도의 내용 중 첫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하는 기도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기위해서는 구별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모든 선을 기뻐함 가운데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함과 기뻐하심이란 그의 백성인 우리를 향한 것이라고 메튜 헨리는 지적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을 가질때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채워주심을 의미한다. 기도의 목적은 먼저 주 예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얻게하고 또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영광을 얻게하는 것이다. 이 일은 그날(심판때)에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든 기도의 근거도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2) 교인들을 위한 기도
바울의 보편적 기도를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문자 그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멘'으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

첫번째 편지의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새롭게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이지만 이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심판날 모두 주님 앞에 서야함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거부한 자는 형벌에, 주님을 믿고 성결된 삶을 인내하며 살아간 자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이세상의 어려움을 인내로써 살아가야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할때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우리도 영광을 얻을 것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저작권에 대한 문제

1) 바울 저작설을 반대하는 입장
데살로니가전후서에는 그리스도 재림관과 정서적인 어조에 있어서 그리고 바울과 교회간의 관계가 다르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바울 저작설을 의심하게 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먼저 학자들은 후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교리를 전서와 비교해 볼때 문구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순된다고 논하고 있다. 전서에서는 주의 날이 임박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날은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기 때문에(살전5:2) 신자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살전1:9,10). 그러나 후서에서 기자는 주의 날이 금방 임하는 것이 아니라 때와 기한이 지난 후에야 있을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3,4). 또한 비평가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전서에서는 격려하며 위로한(살전4:1,2,9-12 ; 살전5:1-11) 반면에 후서는 명령을 했다(살후2:1-4 ; 살후3:6,12-14). 또한 전서에서는 기쁨과 감사와 온유함이 중심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나 후서에서는 충성의 감정과 감사의 표현이 포함되어 있지만 부드러운 감정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 많은 비평주의 학자들은 데살로니가후서가 사도 바울의 저작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2) 바울 저작설을 주장하는 입장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두서신의 반대되는 견해는 엄밀히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도 볼 수 있는 피상적인 모순에 비취어 생각해 볼 수 있다(마24:6,23-26 ; 눅12:35,40). 즉 예수께서는 생각하지 못한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어떤 표적을 보더라도 아직 끝은 아니므로 미혹되지 말 것을 권고 하셨다. 바울은 그의 회심자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줄 해석자로서 예수로부터 받은 전통위에서 그의 신학을 수립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선교 초기에 당한 혹독한 박해 기간 동안에는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위로를 줄 필요가 있었기에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또한 전서와는 달리 후서에서의 명령하는 단호한 태도가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정중하고도 온유한 메시지가 교회 안의 많은 신자들에 믿음의 확신을 주었지만 일부 무질서하고 열광적으로 행동하는 교인들도 있다는 소식을 그후에 듣게 되었다면 이러한 유해한 신자들에게 과감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서가 전서와 같이 매우 기쁘며 온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전서의 훈계의 글을 무시하고 무질서하게 생활하는 신도들에게는 부드러운 감정의 온화한 글이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항상 동일한 어조로 편지를 썼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2. 기록한 상황

이 서신에서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바울과 그 교회 사이에 이루어진 의사전달 상황에 대해 무지한데에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에 대해 보고를 받았음이 분명하나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보고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가 디모데의 개인적인 방문 후의 보고에 의존해서 기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살전3:1-8) 누구에 의해 전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후 디모데 방문 후에 바울에게 어떤 익명의 전달자가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와서 말을 전했다는 것과 이에 답해서 바울이 두번째 서신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때 개종자들이 겪고 있는 핍박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래서 주의 재림시에 있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핍박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형벌을 강조하며 그 서신의 전체적인 침체된 분위기를 설명하는데 다소 비통한 언어로 설명한 것 같다. 따라서 데살로니가후서는 이 교회의 상황에 대한 두번째 보고에 대한 응답으로써 세가지 목적을 가진다. 첫째, 박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믿음에 굳게 서도록 신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며, 둘째, 재림에 선행되어야 할 사건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 주의 날이 임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정정시키는 것이다. 셋째, 규모없고 난잡한 생활에 대해서 애정이 넘치는 엄한 훈계로 교회를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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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교회는 옛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세가지 문제로 인해 위기를 겪게 된다. 외적인 박해, 이단 사설의 침투 그리고 교회 스스로 나태에 빠지는 일이 그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더 심화가 된고로 사도 바울이 더 큰 목소리로 교훈과 깨우침과 경책을 하는 내용으로 쓴 서신서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서는 전서와는 달리 엄중한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본 서는 종말의 시대에 사는 현대 신앙인들의 그릇된 신앙의식을 교정해 주는 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저자 문제

본 서의 저자가 사도 바울이라는 사실을 초대교회는 의심없이 인정했다. 그와 같은 분위기는 19세기까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몇몇 비평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론을 들고 나왔다. 첫째, 살후2:3의 '불법은 사람'은 주후 60년 이후 네로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당시 사람들은 네로 황제가 죽지 않고 부활했다는 신화를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본 서는 바울 시대 이후 타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둘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주제가 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신학적인 시각이 상반된다는 점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을 삶의 종국적인 소망과 기쁨으로 삼는 것을 권고하는 반면 후서에서는 오히려 재림이 관한 기대나 소망을 억제하는 듯한 내용으로 일관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 서는 전서와 동일인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비평가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반박한다. 먼저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은 네로 부활의 신화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의 종말 예언부터 등장하는 말세의 악한 존재를 배경으로 한 것이며(단7:25 ; 단11:36 ; 사14:13)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성경의 종말론의 보편적인 주제임을 상기시킨다(요일2:18 ; 계13:6,7). 셋째, 전서와 주의 재림에 대한 자세가 다른 이유로는 재림에 관해 열광주의적인 자세를 지닌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으며 그들로 인해 교회가 무질서의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기에 열광적, 신비주의적인 재림주의자들을 경계한 것임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비평가들의 추측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며, 본 서가 일찍이 초대교회로부터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정경으로 인정 받아왔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의 저작권의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3. 기록 연대와 수신자 문제

1) 기록 연대
전통적으로 본 서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시기에 고린도에서 기록 되었으며, 그 시기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후 10개월 지나 기록한 것으로 본다. 즉 주후51년 후반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몇몇 진보적인 비평가들은(Baur, Daridson, Ewald) 먼저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살전5:1에서 바울이 더 이상 쓸 것이 없다는 내용, 후서보다 전서에서 문제들이 평정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 등을 들어 후서가 전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에는 확실한 확증이 없다. 전후서의 내용을 비교해 볼때 전서가 초기의 것이라는 증거를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수신자 문제
전서와 다름없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전체 구성원을 향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역시 근대 비평학자 몇명은 이의를 제기했다. 하르낙(Harnack)은 후서가 유대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점을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내 유대인 성도가 그 수신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한 교회내의 어느 특정 그룹에만 따로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외에 슈바이처(Schweitzer)는 본 서가 본래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인데 데살로니가 지역에 보존되어 있다가 그 지역 교회로 보낸 것으로 오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 역시 본 서와 전서사이의 개연성, 즉 재림에 관한 그릇된 자세를 교정하려는 일관적인 내용이 수신자가 전서처럼 데살로니가 교인 전체임을 증명해 준다.

4. 기록 목적

전서의 상황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사회로부터 당하는 박해가 더 심화된 듯하다. 그래서 일부 신자들은 매우 낙심해 있고 일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할 신천신지를 삶의 전 소망으로 삼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신자들 가운데는 도피주의, 체념주의,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생겨나 교회의 직분에 대한 사역을 외면하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한채 오직 재림의 시기에 연연하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박해받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시에 받을 보상을 상기시키고, 재림의 시기에 열중하는 자들에 대해 이단에 미혹될 것을 경계하며, 무위도식하고 현실 도피적인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본분과 책임을 다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오늘 현대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는 미신적, 극단적 종말론에 대비한 신앙 지침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5. 특징

본 서 역시 전서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제로 삼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서가 주의 재림을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소망임을 강조한 것에 반해 본 서는 재림받을 신앙의 전 내용으로 오해하는 열광주의 자들의 열기를 냉각시키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전서는 비교적 위안과 칭송과 격려로 구성된 반면 본 서는 훈계, 명령적인 내용이 많다. 특히 재림의 시기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후임을 깨우치는 내용은 본 서만이 지닌 종말 신학의 큰 특징이다(살후2:1-12). 그리고 주의 재림이 가까워 왔을지라도 사회인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온당한 것임을 교훈함으로써 종말 시대에 지녀야할 신앙의 참자세에 대한 기독교적 종말론의 귀중한 모범을 제시해 주고 있다.

6. 내용 구성

① 재림으로 인한 영광의 보상(살후1장)
② 재림 진리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그 결과(살후2장)
③ 재림을 기다리는 온전한 삶의 자세(살후3장)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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