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I. 비스가 산상의 모세 34:1-4
1. 산을 오르는 모세(1)
모세는 하늘을 향해 위로 올라가서 비스가 산정상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은 그가 죽을장소로 정해진 곳이었다(32:49,50). 당시 이스라엘은 모압평원의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명령에 따라 모세는 그평지에서 느보산의 정상인 비스가에 이르렀을 것이다(1절). 비스가란 그렇게 우뚝솟음, 또는 탁월함을 일컫는 보통명사이다. 비스가 정상까지 모세는 "아무 도움없이 홀로" 등정해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측컨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마치고 여호수아, 엘르아살을 비롯한 몇몇 동지들과 숙연한 작별을 고했던것 같다. 어쩌면 이들이 산발치에까지 배웅하러 나왔었겠지만 모세는 아브라함이 다른산에서 자기종복에게 말했듯이 올라오지 말라는 권고를 그들에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라. 나는 저곳으로 가서 죽으리라." 비스가 산정에 홀로 올라가는 그의 행동은 다음 두가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1) 자기가 죽음도 기꺼워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기가 죽을자리를 알고 결코 그것을 피하지않고 그자리에 이르기위하여 기꺼이 가파른 산을 올라갔다.
(2) 자기가 자신의 죽음을 승천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영혼, 착한사람의 영혼은 육체를 남기고 위로 올라간다(전 3:21). 하나님께서 그종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실때는 이와같이 "올라와서 죽으라"는 소환장이 내려오는 것이다.
2. 땅을 굽어봄(2-4)
자신이 결코 그땅을 밟아보지 못하게된 지상의 가나안을 살펴보기 위하여 모세는 다시 이땅을 내려다 본다. 그렇지만 이제 즉시 그는 믿음으로 대망하고 있는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1) 비록 그가 비스가 꼭대기까지 홀로 올라갔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성부께서 그와 함께계셨기 때문이다(요 16:32).
(2) 보다나은 나라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품고있는 모든 즐거운 기대는 하나님의 은혜덕택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영'과 더불어 '지혜의 영'도 주시며, 사물과 더불어 그것을 볼수 있는 눈도 주신다.
(3) 그는 멀리서 가나안을 바라보았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장래의 상태의 지복과 영광에 대하여 은혜를 통해서 멀리서 바라보듯 한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말씀과 규례는 비스가 산정이 모세에게 주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4) 그는 그것을 보기만했지 결코 누릴수는 없었다. 장차있을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스런 것들, 그왕국의 발전과 확장 그리고 융성한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듣고 그사실을 내다볼수는 있으나 그러한 사실들을 목격하기까지 살것 같지는 않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후세대들이 그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바랄뿐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5) 가나안은 임마누엘의 땅이었다(사 8:8). 그래서 그는 그땅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축복을 보았던 것이다.

Ⅱ. 모세의 죽음 34:5-8
1. 모세의 죽음(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죽어. 광야의 그수많은 역경을 뚫고 나왔음에도 목적지인 가나안이 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은 모세자신에게 있어서 큰괴로움이었다. 그러나 "그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일을 그렇게 원하신다면 그는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1) 여기에서 그는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는 그가 선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모든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대단히 쓸모있고 유용한 인물로서 여호와의 종이라 칭함을 받고있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광야를 통과하도록 이끄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2) 그런데도 그는 죽는다. 그의 경건도 그의 유용함도 죽음의 손길을 면케할수 없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수고에서 쉬고 그보상을 받으며 다른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세상에서 더이상 그를 섬기지 않고 떠날때 그들은 더훌륭하게 그분을 섬기기위하여 그리고 '주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섬기기위하여 가는 것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다. 글자 그대로는 '여호와의 입에서'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입술의 입맞춤으로"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종들은 할일을 모두 마쳤을때 그주인에게 순복하여 마침내 죽어야하는 법이며 그주인이 그들을 부르러 사람을 보낼때면 기꺼이 본향으로 돌아와야 한다.
2. 그의 장례(6)
하나님께서는 자기종들의 시신을 돌아보신다. 그들의 죽음이 가치있듯이 그들의 주검도 가치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검과 함께 언약은 기억되어야 한다. 모세는 '벧브올 맞은편' 계곡에 묻히게 되었다. 영혼이 하나님곁에서 안식하고 있다면 그몸이 어디에서 쉬든지 그것은 큰문제가 못된다. 우상숭배의 성향이 깊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민족의 위대한 기초자요 아버지인 모세의 사체를 봉안하여 절하는 일이 없도록 그 구체적인 지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3. 그의 나이(7)
(1) 그의 수명은 노령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나이는 120세에 이르렀는데 이는 비록 그의 선조들의 나이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당시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은 나이였다. 모세의 생애는 사십년을 단위로 세등분할수 있다. 그 첫 사십년동안 그는 왕족의 일원으로 바로의 궁궐에서 편하게 위엄을 부리며 살았으며 두번째 사십년동안은 미디안광야에서 가난하고 소망이 없는 목자로 생활하였다. 세번째 사십년동안 그영예와 권세에 있어서 여수룬의 임금과 같이 생활하였으나 심려와 수고로 대단히 힘이 들었던 생활을 하였다.
(2) 그는 늙어서도 건강을 누렸다. 그의 눈은 침침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이삭과 야곱의 눈은 쇠했었다. 창 27:14;48:10).
4. 모세를 위한 애곡(8)
애통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으며 그들이 곡을 한 기간은 '삼십일'이었다. 그러나 모세를 위하여 울고 애곡하는 기간이 끝났다는 사실은 비록 우리의 손실이 대단히 클지라도 무한정 슬퍼해서는 안되며 시간이 되어 치유가 될때까지 그상처를 견디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기뻐하며 하늘나라로 가기를 소망한다면 왜 굳이 애곡하면서 무덤에 가려고 한단 말인가?

Ⅲ. 모세의 탁월성 34:9-12
여기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 대하여 매우 명예스런 찬사를 아끼지않고 있다. 두사람은 모두 찬사를 받고있는데 이는 받아 마땅한 것이다. 두사람 모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1) 여호수아는 소명받은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자격을 매우 잘 구비하고 있는 사람으로 칭찬받고 있다(9절).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국경지역까지 이끌고와서 율법으로는 아무것도 온전케 될수 없다는 사실을(히 7:19) 나타내기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남겨놓은 채로 죽었다. 율법은 사람을 그에 대해 판결하는 광야로는 인도하지만 안식과 안정된 평안의 가나안으로는 인도하지 못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것을'(롬 8:3) 우리를 위하여 하는것은 여호수아(즉 우리주 예수, 여호수아는 그의 예표이다)를 위해 예비된 영예인 것이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안식 즉 양심의 신령한 안식과 천국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이 위대한 과업에 대한 여호수아의 소명을 분명히 하기위하여 두가지 사실이 동시에 발생하였다.
1) 하나님께서 그를 그일에 적합케 만드셨다.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9절). 한사람의 장수에게 있어서 지휘능력은 용기와 함께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요소이다.
2)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가 그에게 그사명을 이양하였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모세는 자기의 후계자가 될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그를 불러내어 맡기시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할수 있는 자격을 그에게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2) 모세도 칭송을 받는다(10-12절).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 그는 실로 매우 위대한 인물이었다. 특히 두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① 그는 하나님과 친밀하였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신 자요. 그렇게해서 그도 하나님을 알았다(참조. 민 18:8).
② 자연세계에서 그는 영향력과 권능이 있었다. 그가 애굽에서 바로앞에서 행하였던 심판의 기적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앞에서 행하였던 자비의 기적들은 그가 하늘의 친밀한 총애를 누린 자요, 이땅 위에서 나타내 보였듯이 그러한 일을 할수 있는 비상대권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임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는 모세보다 더 사랑해야 할만한 자가 없었으며,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보다 더 두려워해야할 자가 없었다.
2) 그는 구약의 다른 어떤선지자들보다 더 큰자였다. 물론 그들역시 하늘에 큰세력이 있고 지상에 큰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중 어느누구도 이 위대한 인물에 필적할수 없으며 모세가 했듯이 하늘로부터 받은 직권을 증명하고 행사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는 구절로 미루어보아 모세에 대한 이칭찬은 그가 죽은지 오랜뒤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는 율법을 수여하시고 유대교회를 만들고 형성시키셨지만 선지자들로는 단지 소소한 꾸지람이나 지시, 처방, 예언 등을 주셨던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중 최후의 선지자는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훈계로 끝을 맺고있다(말 4:4). 그리스도께서도 종종 모세의 글에 호소하셨으며 모세가 멀리서 그리스도의 시대를 바라보았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얘기해던 증인임을 보증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의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히 3:5,6). 모세의 역사는 모세를 모압평원에 장사지낸 것으로 통치기간을 끝맺는데 비하여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주님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도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편에 앉아계신 구주예수의 통치와 평강이 끊임없이 임할 것을 확신한다.

# 핵심
34:1-12
모세의 죽음과 장사를 기록하고, 생전에 행한 모세의 업적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모세의 사망기사를 쓴사람은?(34장)
모세의 사망기사를 쓴사람은 아마 눈의 아들 여호수아(9절)인 듯하다. 성령의 인도와 영감에 따라 여호수아가 존경하는 스승의 죽음과 장사에 관한 기록을 첨가하고 책의 말미에 유창한 찬사를 첨부했을 것이다. 어떤저자의 책의 말미에 그의 사망기사가 삽입되었다고해서 그의 저작사실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상당수의 보수주의 학자들도 사망기사는 모세가 쓴것으로 보지않고 있다.

# 묵상
모세가 얻은 복 ( 34:1-4 )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 전역을 바라보는 복을 받았습니다. 아론처럼 모세도 가나안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곳의 풍요함과 아름다움을 눈으로 목격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세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천국의 아름다움과 풍요를 미리 맛보는 복을 얻었습니다.
모세의 장례 ( 34:5-8 )
모세는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모압땅에서 죽었지만, 이는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안식을 의미합니다. 그의 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그릇된 숭배의 여지를 없애고 올바른 신앙의 대상으로 향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리스도의 좌우편에서 엘리야와 함께 하늘나라의 비밀을 논의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마17:3).
모세의 후계자 ( 34:9 )
앞에서 이미 예정된대로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안수함으로써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여호수아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모세 ( 34:10-12 )
모세가 이렇게 위대한 선지자라고 불리워진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기때문이며(10절),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모세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11, 12절). 그렇지만 성도들은 모세보다 더위대한 우리의 사도요,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해설
모세의 최후 ( 34 )
신34장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임종을 기록한 장입니다. 모압평지에서 감동적인 율법설교를 마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채 최후를 마쳐야 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모세가 남겼느냐 하는문제를 제기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두가지로 생각할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창조의 기사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자신의 죽음에 관한 기사도 썼을 가능성입니다. 둘째,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같은 사람이후에 이모세의 죽음기사를 첨부했을수도 있습니다. 이가운데서 어떤가능성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대명제에는 위배되지 않습니다.
1. 모세의 죽음
1) 모세의 죽음
모세는 최후의 유언적 축복을 마친후에 모압평지에서 느보산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의 온땅을 모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땅이 바로 과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땅임을 상기시키셨습니다(참조, 창12:1-3).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그곳까지 들어가지는 못할 것을 다시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입구까지 인도하는 일이 그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할일을 다했으므로 모압땅에서 죽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죽음은 우리성도들에게 있어서 사명이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성도들을 이땅에 보내어 생을 살게하신 것은 반드시 주어진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사명을 다할때에 죽게될 것이고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어떤일에서든지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a.자기백성에게서 거부되어 미디안으로 도망한 모세(출2:15)
b.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와 만나를 제공하는 모세(출16:13-15)
c.제사장들에게 기록된 율법을 맡김(신31:9,26)
2) 묘지를 알지못함
모세는 모압평지에서 죽었고 벧브올 맞은편 모압땅에 있는 어느골짜기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묘지를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1500년쯤후에 유다서의 기자는 이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유다서 기자가 말하는 그이유는 하나님께서 장사지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어 모세의 시체를 인간이 알지못하는 어떤곳에 장사지낸 것입니다(참조, 유1:9). 그이유는 모세의 묘지가 사람들의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혹은 변화산사건에서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사람이 엘리야와 모세였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죽음없이 승천한 사람이고 예수님역시 그렇게 승천하실 분이라면 모세도 그런 특이한 몸이 아닐 것인가 말입니다. 다시말해 모세의 무덤이 밝혀지지 않고 천사장 미가엘이 그의 시신을 가지고 마귀와 시비한 것은 그가 부활체로 승천했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a.엘리사의 묘실에서 기적이 일어남(왕하13:21)
b.유다의 선한 왕들만이 다윗성 열왕의 묘실에 매장될수 있음(대하24:16)
3) 모세를 위하여 애곡함
모세가 죽은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평지에서 30일간을 애곡했습니다. 광야생활 40년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애굽을 물리치고 출애굽한 감격적인 사건때에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슬픔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죽을때 그의 나이 일백이십세였으나 그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다고 하는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모세가 아직 죽을때가 안되었는데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모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은데 대해 하나님의 징벌로 죽음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광야생활동안 자기의 부모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반역사건으로인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던 사건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시한번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결심은 가나안입성과 더불어 시작되는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용기와 믿음을 더해주었을 것입니다.
a.슬퍼하는 모든자들이 애곡에 참여함(삼상25:1)
b.애곡이 영영한 희락으로 바뀜(사35:10)
c.베옷을 입고 애곡함(창37:34)
2. 모세에 대한 회고
1) 후계자 여호수아
모세는 죽기전에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고 여호수아에게는 여호와의 지혜의 신이 충만했습니다. 과거 모세의 지도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가나안정복에 나설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인도하셨듯이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정복의 역사를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어느시대에나 하나님은 적절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a.가나안을 정탐하러간 여호수아(민13:1-3)
b.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민27:18-23)
c.이스라엘 모든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한 여호수아(수19:51)
2) 위대했던 하나님의 선지자
신명기를 마감하면서 신명기의 기자는 모세에 대해 회고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던 자요,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위엄을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행하던 자였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말하기를 모세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모세보다 나은 선지자는 우리의 영원한 중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중요한 한시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셨습니다.
a.선지자의 선포는 은혜와 구원을 내포함(벧전1:9-12)
b.이스라엘의 파수꾼(겔3:17)
결론
신34장은 모세의 최후를 기록하면서 아울러 이제 새로운 시작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를 통해 전개될 가나안 정복전쟁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한지도자의 죽음으로 중단되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생활 가운데서도 한지도자의 교체와 같은 일로인해 교회전체가 갈등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전하여 함께 나아가자고 권면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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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땅의 분배 48:1-30
열두지파 간에 그땅을 나누는데에 관한 간단한 방법이 주어진다. 이와같이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점을 볼수가 있다.
(1) 이것은 여호수아시대에 땅을 분배했던 것과는 전혀 틀리다. 이것은 그신비함이 많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문자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새로운 방법을 접하게 된것이다.
(2) 처음 가나안땅을 분배할 당시에는 마지막으로 분배받았던 단지파가(수 19:40) 여기서는 제일 처음 분배받는다(1절).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때, 섭리를 베푸실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3) 앗수르왕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간 열지파와 오랜후에 바벨론으로 잡혀간 두지파 모두가 이 환상속에서 각자의 기업을 분배받는다. 우리는 이것이, 복음교회가 세워져 확장해나가는 것에서 또한 성도들이 새로운 언약의 특권을 확실하게 즐기는데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이특권은 성도들 각각이 누리기에 충분할뿐 아니라 그들 모두가 누리기에도 충분하다.
(4) 환상중에 땅을 분배하는 가운데 모든지파는 하나님의 지정하심으로 각자의 몫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업을 분배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인정할뿐만 아니라 묵묵히 따라야만 한다. 그리고 그분배가 우리에게 가장 합당하다는 것을 믿고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시 47:4).
(5) 각지파들은 인접해 있다. 그러므로 지파의 경계는 곧 다른지파의 경계가 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통치아래서 교회와 성도간의 교제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와같이 그들은 여럿이지만 하나였고, 거룩한 사랑과 서로 도움으로써 하나로 뭉쳐야만 하였다.
(6) 르우벤지파의 기업은, 전에는 요단건너 멀리 있었지만 이제는 유다 다음에 놓여있어서 성소로부터 두번째에 위치한 지파가 되었다. 왜냐하면 '르우벤은 탁월치 못하리라'(창49:4)고 일컬음을 받았던 그잘못이 이제 벗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7) 성소는 그들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북쪽으로는 일곱지파가 있었고 그주위에 레위인과 왕과 도성의 분깃이 있었으며 그남쪽으로 다섯지파가 있었다. 성소는 왕국의 심장부에 있어야 하며 따라서 그렇게 되었다.
(8) 성소가 있는곳에 제사장들도 있었다. 이 드리는 거룩한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10절).
(9) 시련기에 하나님께 신실하였던 이땅에서 제사장의 몫을 가졌다(11절). 이땅으로 사독의 자손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사독의 자손중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라함은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자기를 확실히 구별하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때에도' 그릇하지 않았으며 다른 '레위사람이 그릇할'때에도 그렇게하지 않았던 자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10)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에게 할당된 땅은 결코 양도나 매각을 할수 없었다. 그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14절). 일단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다른용도로 바꾸어 사용하는 일은 신성모독이다.
(11) 성읍과 그근방을 위하여 지정된 땅은 '속된 땅'이라고 불리웠다(15절). 이는 일상적인 땅이라는 의미이다. 성소와 비교해 본다면 그곳은 '속된 땅'에 불과하다.
(12) 그성읍은 정확히 정방형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성의 들'도 같은 모양이었다(16,17절). 첫번째 땅의 분배시 레위인의 성읍이 이러했었다. 이것은 이세상 어느성읍에서도 문자그대로 성취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읍인 복음교회의 아름다움과 안정성에 관한 것이라고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3) 이전에 예루살렘의 거민은 주로, 그곳을 분깃으로 받았던 유다와 베냐민지파 사람들이었던 반면에 이제는 그 '성읍에서 역사하며' 직무를 갖고있는 자는 '그땅을 기경할'수 있었다(19절).
(14) 성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읍에서 공공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영예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들을 위하여 땅이 정해졌고 '그땅의 소산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의 양식'이 될것이다(18절).
(15) 왕은 자신의 높은지위에 맞추어 스스로의 분깃을 가졌다(21절).
(16) 성소의 한쪽편으로 붙어있는 기업은 유다지파가 가졌으며 다른쪽으로 성소에 붙은 기업은 베냐민지파가 분배받았다. 이것은 다른 열지파들이 곁길로 나갈때에도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떠나지않았던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이었다.

Ⅱ. 성읍의 새이름들 48:31-35
성소에 경배드리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지어진 성읍에 관하여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성읍은 아무데서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워지지 않고 그땅도 가나안이라고 불리워지지 않는다.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성읍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볼수 있다.
(1) 그성읍의 출입구와 전체면적에 대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35절). 그러나 이규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것들도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2) 문들의 수효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성에는 모두 열두개의 문이 있었는데 각방향으로 세개씩 있었고 열두지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사도요한의 계시에서도, 새예루살렘에는 열두문이 있는데 각방향으로 세개씩이고 각문들 위에는 이스라엘자손 열두지파의 이름들이 쓰여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계 21:12,13). 어느쪽에서나, 어느지파에서부터 오더라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자유로이 들어갈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자들에게 하늘왕국을 활짝 열어놓으셨던 것이다.
(3) 이성읍에 붙여진 이름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것과 같이 평화의 터라는 의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지 않고 원래의 의미인 '여호와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의미로 불리우고 있다(35절). 이것은 다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1) 포로들은 돌아온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시고 자기들중에 거하신다는 확실한 증표를 갖게된다는 것이다.
2) 복음교회도 이와같이 그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데, 이전에 임재하시던 것처럼 쉐키나로서가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때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떤영혼이라도 그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은혜의 원칙을 갖고 있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고 진심으로 말할수 있을 것이다.
3)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말은 특히 하늘의 영광과 축복이 거기 있다는것을 암시한다.

# 묵상
48장의 중심내용 ( 48:1-29 )
본장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장차 회복될 팔레스틴땅의 영토분배에 관한 것입니다. 즉 회복된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왕국에 영원히 정착하도록 그들에게 땅을 분배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여호와께 바쳐진 거룩한땅과 왕의 기업을 중심으로하여 북쪽에 일곱지파가 그리고 남쪽에는 다섯지파가 각각 자리를 잡게됩니다. 이예언은 결국 포로로 끌려간 유다백성들의 본토회복에 대한 약속을 강력하게 시사해줍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잃은자를 다시 찾으시는 목자와도 같은 분이십니다.
레위인의 분깃 ( 48:13, 14 )
레위인은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분깃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땅은 그들의 것이지만 하나님께 거룩한 땅이기에 관리를 매우 주의깊게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읍주변 땅의 용도 ( 48:16-20 )
본문은 예루살렘 성읍주변 땅의 용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땅은 농사를 짓기위한 경작지입니다. 여기서 자라는 식물들의 소출은 무엇보다 성전의 예물을 위해 충당되었고, 또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의 식량이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노동의 중요성과 땀의 가치를 일러주는 교훈적 의미를 갖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는 땅의 식물을 먼저 하나님께 드릴줄 아는 신앙훈련적 성격이 강하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런삶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왕의 기업의 위치 ( 48:21, 22 )
두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팔레스틴 왼쪽땅 왕의 기업은 지중해와 접해있고, 팔레스틴 오른쪽땅 왕의 기업은 요단강과 접해 있었습니다. 이는 곧 팔레스틴 좌우 변방지역을 말합니다. 이렇게 왕의 기업이 좌우 변방지역에 위치한 것은, 왕이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왕이란 직책은 매우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직책에 상응하는 의무와 사명도 무겁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땅 분할방법 ( 48:29 )
본문은 이스라엘의 땅 분할방법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땅 분할방법은 제비뽑기였습니다. 이는 성경이 없던 당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잠16:33).
여호와 삼마 ( 48:35 )
이말은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과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오시사 함께 교제하며 거룩한 친교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친교하는 자야말로 복되고도 존귀한 자라 할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런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해설
새땅의 분배 ( 48 )
유다의 죄악과 멸망, 그리고 이방나라의 멸망을 예언한뒤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내용들이 에스겔서의 흐름이었습니다. 본장은 이러한 에스겔서의 마지막장으로, 회복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할 새땅의 분배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새땅은 모든지파에게 균등하게 분할되며 그가운데에는 거룩한땅이 있고 왕을 위한 분깃과 성읍이 있습니다.
1. 각지파의 분배
1) 빠짐없는 분할
이스라엘은 솔로몬이후에 두개의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진 그 두나라입니다. 그중 북이스라엘은 일찌감치 버림받아 멸망하였고 유다는 나중에 멸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유다나라에 속했던 유다와 베냐민지파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이 그 두지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때문에 차별을 두지 아니하시고 선택된 모든자를 마침내 빠짐없이 구원하십니다.
a.같은 삯을 주심(마20:8)
b.확실한 구원(요10:28)
2) 균등분할
옛언약하에서 가나안땅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영도하에서 가나안을 점령한뒤 각지파에게 땅이 분배될때 어떤지파는 많이 받고 어떤지파는 적게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새땅에서는 그러한 불균등이 없습니다. 새땅에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모든지파가 동등한 분깃을 받습니다. 이것은 새땅에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동일한 구원, 동일한 은혜를 받을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그열매에 따라 받을 상급은 다릅니다.
a.누구든지 믿으면 받는 영생(요3:16)
b.일하는대로 받는 상급(고전3:8)
3) 영생의 기업
에스겔서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새나라를 건설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이면에는 보다더 중요한 이차적 예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의 포로된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장이 말하는 새땅은 성도가 받을 영생의 기업을 상징합니다. 모든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함께 영생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a.항상 기뻐함(살전5:16)
b.본향을 사모(히11:16)
2. 거룩한 땅
1) 하나님 중심사회
새땅은 북쪽으로는 하맛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애굽시내에 이르기까지의 요단서편 땅입니다. 이땅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게 분배되되 그가운데는 거룩한 땅으로 남겨집니다. 즉 예루살렘땅은 거룩한 땅으로 남겨지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땅 가운데에서도 한가운데 땅은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지도록 남겨집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따라서 이사실로 볼때 새땅은 하나님께서 모든것의 중심이 되는 사회입니다.
a.성막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출40:34)
2) 제사장들의 몫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지는 땅의 일부와 그 위부분은 제사장들과 및 레위인들을 위한 분깃으로 주어집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일을 주업으로 하기위해 땅을 분배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바쳐진 지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전념해야 했기때문에 다른지파 사람들처럼 일상의 수고를 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수고를 하는 지파의 사람들로부터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이렇게 볼때 일반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직업에 충실하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전파에 전념하되, 일반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생계를 담당하는 것이 옳습니다.
a.일꾼이 받을 마땅한 몫(마10:10)
b.복음사역자의 생활권 보장(고전9:9)
3) 공동사회를 위한 장소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질 거룩한 땅아래에는 성읍과 성읍기지가 세워질 땅으로 남겨집니다. 성읍과 성읍기지란 12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공동으로 모여 활동할 장소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성읍은 열두개의 문을 가지되 열두지파의 이름이 각문에 새겨집니다. 한편 새땅에 이와같은 성읍과 성읍기지가 세워진다는 것은 새땅에서는 반목과 질시로서가 아니라 화합과 협동으로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이 조화롭게 살아갈 것을 암시해 줍니다.
a.협력해야할 지체(고전12:25)
b.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3)
3. 왕을 위한 땅과 성읍출입구
1) 왕을 위한 영원한 분깃
유다와 베냐민지파 사이에는 거룩한 땅이 남겨집니다. 거룩한땅 한가운데에는 성소가 세워지고 그위쪽은 레위인을 위한 기업으로 주어지고 그아래쪽은 성읍과 성읍기지를 위한 땅으로 제공됩니다. 한편 성소 좌우편의 땅은 왕의 기업으로 주어집니다. 이 왕의 기업으로 주어지는 땅은 여호수아의 분배때에는 없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땅에서 왕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는 이유는 왕이 기업을 가짐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지 않게하기 위함입니다.
a.이스라엘 방백들의 강포(겔34:4)
b.공의를 행해야할 권세자(롬13:4)
2) 만백성의 나라
옛언약하에서의 이스라엘나라는 기본적으로는 모든 이방나라에게 개방적이었지만 형식적으로는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회중에 들어올수 있었으나 그것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새언약하에서는 사라집니다. 즉 이제 하나님나라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개방되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 있습니다.
a.다 내게로 오라(마11:28)
b.누구든지(요1:12)
3) 여호와 삼마
성읍에는 출입구가 열두개 있습니다. 각문에는 열두지파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이성읍의 이름은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을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땅에서 이스라엘 모든지파와 함께하십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거하시며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과 떨어져사는 사람이 단한사람도 없이 모두 하나님안에 거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a.함께하시는 하나님(계21:3)
b.열두지파의 이름(계21:12)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이세상의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옛언약의 땅과도 같지 않습니다. 그나라는 영원하며 복되고 공평합니다. 오직 온전하신 하나님만이 주관자되시며 그안에서 모든백성이 하나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온전히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면 이땅에서도 그축복을 누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것을 맡기며 그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이땅에서부터 하늘의 복을 누리며 새땅에서는 영원한 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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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거룩한 물의 환상 47:1-12
에스겔의 환상중에서 이부분은 신비하고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예언은 스가랴 14:8절의 생수에 관한 예언을 설명해 준다.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그리고 이예언은 사도요한의 계시중에 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과도 관계가 있다(계 22:1). 전자는 완벽한 은혜인 영광과 기쁨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후자는 이미 시작된 영광으로서의 은혜와 기쁨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이물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발원하여 주변의 국가들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성령의 은사와 전능이 함께 퍼져나가, 그로인하여 복음은 더욱 멀리 퍼지고 복된 열매를 맺을수 있었다.
(1) 이물의 발원(1절) :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즉 전의 우편으로부터 물이 나오는데 그곳은 '제단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2절에는 '물이 그우편에서 스미어 나온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라고 기록된 예언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사 2:3). 이예언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 이물을 온세계에 전할수 있게됨으로써 성취되었다. 우선 그들은 성전에서 이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야만 했다(행 5:20). 그들은 복음을 온세계에 널리 퍼뜨려야 했으나 이일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눅 24:47). 그리스도는 성전이시다. 또한 그는 문이시다. 그에게서, 즉 창에 찔린 그의 옆구리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오로지 그를 믿음으로써 그에게서 나오는 생명수를 받을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는자의 받을 성령'인 것이다(요 7:38,39). 이물의 근원은 땅위에 있지 않다. 이물은 문지방 밑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생명의 근원은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취었기 때문이다(골 3:3).
(2) 이물의 진행과 증가 : 그물은 '동으로' 진행되어 갔다(3절). 즉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갔다(8절). 선지자와 그를 인도하시는 자는 거룩한 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그물줄기를 따라갔다. 그들은 약 일천척을 따라 내려간후에 그물줄기를 건너 깊이를 재어보았다. 그때 물은 '발목에' 찼다(3절). 그리고나서 그들은 건너편 둑을 따라 일천척을 더내려간 후에 다시한번 깊이를 재어보았다. 두번째에도 그들은 쉽게 건널수가 있었다. 그물은 '무릎에' 찼던 것이다(4절). 그들은 일천척을 더내려가서 건너보았다. 세번째는 물이 그들의 허리까지 찼다. 물이 허리에 오르고. 그러자 그들은 일천척을 더내려가서 네번째로 건너기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불가능하였다. 그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5절).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하라.
1) 성소에서 나오는 물은 시내같이 흐르는 물이지 연못같이 고인물이 아니다. 영혼에 작용하는 은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완전에 도달하기까지는 계속 진행할 것이다.
2) 그물은 증가하는 물이다. 이 시내는 끊임없이 흐르고, 가면갈수록 점점더 불어날 것이다. 복음교회가 처음에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미약했지만 점차로 발목에 이르고 무릎에 이르게 된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성령의 은사는 쓰면쓸수록 증가한다. 그리고 아침햇살이 점점더 밝게 비추이는 것처럼 은혜도 점점 증가한다.
3) 이물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에겐 유익이다. 이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지켜보라. 심령속에 은혜가 역사하시는 과정을 지켜보라. 에스겔이 여기서 하듯이 축복의 성령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중의 몇몇은, 발목에 차는 물처럼 매우 이해하기 쉽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또한 어떤것들은 좀더 어려워서 무릎에 차는 물같기도 하고 또 어떤것은 우리의 이해한계를 아주 뛰어넘어 도저히 깨달을수 없는것도 있다. 그러나 도저히 그밑바닥을 찾아내지 못할때 바울처럼 물가에 앉아서 그깊음을 찬양해야 한다(롬 11:33).
(3) 이 강의 확장 : 이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바다에 이르리니. 이물은 사막으로 흘러 남동쪽에 있는 사해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고 북동쪽에 있는 디베랴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며 또 일부는 서쪽에 있는 대해로 흘러가기도 한다(8절). 생수의 강이 사방으로 흘러나가리라는 이예언은 복음이 유다와 사마리아의 온지경에 널리 전파되었을때 성취되었다. 그후 복음은 주변의 나라들로 퍼졌고 심지어 이방의 섬들마저도 그복음을 깨우쳤던 것이다.
(4) 이 강의 치유능력 : 이물은 바다로 흘러들어가 소돔의 유황못에 이를지라도 그 '바다의 물을 소성시킬' 것이다(8절). 그래서 그바다는 달고 건강에 좋은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복된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변화는 대단히 큰것으로 사해의 물을 동산의 샘물로 변화시킬만한 것이다. 복음은 말하자면 엘리사가 던져넣은 소금과 같은 것이다(왕하 2:20,21). 이세상에 의사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약으로 복음을 주셨다. 그강물은 이르는 곳마다 모든 것들을 소성시킬 것이다(9절). 이물은 생명수인 것이다(계 22:1,17).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이세상에 오셨고 그목적을 이루고자 복음을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은 죄인들을 다시 살리시며, 살아있는 성도들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 이세상의 모든것들은 그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었다. 그러나 그결과는 받아들이는데에 따라, 그리고 각심령이 얼마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5) 이 강에 살고있는 많은 고기들 : 그안에 살고있는 각양의 생물들이 발견될 것이다(9절).
(6) 강둑에 있는 나무들 :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7절). 그것들은 먹을수 있는 '실과나무'이며 그실과는 '끊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실과'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12절). 그잎이 시들지 아니하며...그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본문의 환상은 사도요한의 환상과 비교해 볼수 있다(계22:2). 거기서는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 생명나무는 '달마다 실과를 맺고 그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나무의 잎사귀는 상처를 위한 약재료로 쓰이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선한 그리스도인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 그들은 약한자를 북돋아 주고 심령이 상한자를 싸매어 준다. 그들의 쾌활함은 약처럼 좋은 것이다. 그잎사귀들은, 뿌리에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줄기에도 수액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시들지않을 것이다. 또한 각나무는 매달 실과를 맺을 것이다. 이는 열매를 맺을수 있게하는 요인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같이 특별하게 실과를 맺을수 있는 이유는 '그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덕분인 것이다.

Ⅱ. 가나안땅의 경계 47:13-23
이제 기업분배에 관한 사항이 나온다. 본문에서 가나안땅은 확실히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신 것이었다(14절). 내가...맹세하여 이땅으로 너희열조에게 주마 하였었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열조에게 하신 자신의 맹세를 잊지 아니하셨다. "내가 이땅을 주기로 맹세하였으니 그것은 분명히 네게 기업이 되리라." 여기서 그 '지계'가 정해진다. 기업의 지계를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그땅이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지리라고 기록되었는데 요셉은 두지파로 계산되었다. 이는 열둘을 만들기위한 것이었다. 레위지파는 성소에 수종들기 위하여 따로 세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분깃도 성소에 속해 있었다(13,21). 너희는 피차없이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14절). 그들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녀를 낳아 가족을 이룸으로써 그백성들을 돕는 '외인'들도 원래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같이 여기고 이스라엘 지파중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다(22,23절). 이것은 분명히 복음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의 분리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앞에서 동등하게 되며 그리스도안에서 한몸이 되어 '차별이 없게'될 것이다(롬10:12).

# 핵심
47:1-23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에 관한 환상을 설명하고,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경계와 이방인의 땅의 상속에 대해 기록한 내용.
소금땅(47:11)
사해지역에 우기가 닥치면 바닷물이 넘쳐 진펄과 개펄의 낮은지역을 덮는다. 여기에 고인물은 곧 증발하고, 소금기운만 남게된다. 염분이 많은 이런땅에는 결코 생물이 살수 없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완악한 자들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교훈한다(슥 14:17-19).

# 묵상
물의 근원 ( 47:1 )
물은 여호와의 전의 문지방밑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이 생명수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발원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네강물이 온세상을 적셨듯이 이제 새롭게 지어질 새성전에서 흐르는 물이 모든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 그들의 영혼을 영원히 살리게 하는데, 그물은 바로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4:10; 7:38).
점점 많아지는 물 ( 47:3-5 )
천사가 일천척을 척량할때마다 물이 점점 깊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4천척 되는곳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차고 넘치게됨을 볼수 있습니다. 이는 성소에 좌정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축복이 점점 풍성해지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이 많아져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엘 선지자가 말일에 하나님께서 그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예언한것 역시, 이생명수가 많아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것을 소성케하는 물 ( 47:8, 9 )
성전에서 흘러내린 이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생물과 바다가 소성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새로지은 성전에서 나오는 생생한 활력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모든사람과 피조물 및 자연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신음하고 있습니다(롬8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고 하는 생명수를 마시는 자는 모두 죽음에서 해방되어 참자유와 영생을 얻게됩니다.
어부가 서는 강가 ( 47:10 )
이는 사해와 같이 죽은바다도 이물이 흘러들어가면 고기들이 풍성한 어장이 되고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그물치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라는 뜻을 지닌 성읍으로, 사해 서쪽해안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네글라임은 ‘두마리 송아지의 샘’이라는 뜻을 지닌 성읍으로 사해의 북서해안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이 어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징합니다. 메시야를 고대하는, 사해와 같은 이세상에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파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역시 제자들로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는 죽은세계에 생명수인 복음을 전파함으로 그들을 소생시키는 일에 앞장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 해설
은혜의 바다와 약속의 땅 ( 47 )
에스겔서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장을 차지하는 본장은 성전척량과 제사규정에 관한 전장들의 내용과는 달리 성전에서부터 발원하여 하나의 강을 이루고 마침내 바다를 이루어 만물을 소생케하는 은혜의 바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내용과 아울러 마지막부분에서는 마지막장에서 마무리되는 새땅의 경계와 분배내용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1. 계시의 점진성
I) 원시복음
에스겔 선지자는 천사에 의해 이끌리어 성전에서 발원하는 샘물을 일천척마다 척량하매 점점 깊어져 나중에는 사람이 능히 건너지못할 큰물이 되는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이내용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점진적으로 드러난 나중에는 하나님의 나라백성이 수없이 많아질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아담이 범죄한후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속사역에 대한 계시는 일시에 계시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암시되다가 역사가 흐를수록 명확해졌다는 말입니다. 첫 희미한 계시는 아담의 범죄직후에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a.뱀과 여자의 후손(창3:15)
b.가죽옷을 지어주신 하나님(창3:21)
2) 메시야 예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들, 그리고 출애굽사건들도 메시야를 통한 인류구속의 계시들입니다. 선지시대에 이르면 그와같은 구원계시가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더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건이나 상징에서 더나아가 분명한 언어로 말해진 것입니다. 예를들면 사7:14;사53장의 내용, 미5:2절 등의 내용들이 그러한 메시야예언의 진수들입니다. 이예언들을 통해 인간은 메시야의 출현, 곧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웠음을 보다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a.처녀잉태(사7:14)
b.하나님나라의 왕(겔34:23)
3) 메시야출현과 재림
원시복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언급된 메시야출현의 예언은 마침내 성취되어 하나님의 구원자되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오심으로써 계시는 완전히 드러납니다(참조, 요1:1-18).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하나님의 구원은 다시오실 메시야에 의해 완성됩니다. 이모든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셀수 없는 무리가 됩니다(참조, 계7:9).
a.죄에서 구원할 자(마1:21)
b.말씀이 육신이 되심(요1:14)
2. 신앙의 단계
1) 어린아이의 신앙
점점 깊어지는 성전에서 발원한 강의 환상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계시의 점진성 및 하나님나라의 확대로 해석할수 있지만 개인의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각개인의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될수 없고 한술에 배부를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성숙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단계는 이제막 새로태어난 어린아이의 단계입니다. 이때에는 발목에 차는 물에서 노는것과 같이 얕는 은혜의 수준에서 삽니다.
a.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간 요한(행13:13)
b.젖을 먹는 어린아이(히5:13)
2) 청년의 신앙
물이 허리이상 차오르는 곳에 있게되면 거동이 불편해집니다. 초신자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했다고하나 아직 육신의 지배를 더많이 받아 신앙의 활동보다는 육적인 활동을 더자유롭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 육신의 것을 버리고 영적인 세계로 더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육적인 활동은 둔해지고 영의 활동이 자유로워집니다. 육적인 욕망과 영의 행동이 주거니받거니 싸울때 우리는 그상태를 청년기의 신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a.영육의 싸움(롬7:23)
b.육신의 생각은 사망(롬8:6)
3) 성숙한 신앙
에스겔은 마침내 머리끝까지 침몰되는 깊은강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과 죄성이 완전히 활동을 하지못하고 이제 온전히 하나님께 생명을 내어맡겨 놓고 은혜가운데 영적인 삶을 사는단계를 말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목표로하는 도달점은 바로 이단계입니다. 이단계에 이르면 이르는자 자신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생수를 아직 그은혜의 바다로 들어오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공급하는 위치에 서게됩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참조, 엡4:13)에 이르기까지 은혜의 바다 깊숙한 곳까지 헤엄쳐가야할 것입니다.
a.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람(엡4:15)
b.예수의 좋은 군사(딤후2:3)
3. 새땅의 경계와 분배
1)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는 돌연적이고 임시적인 곳이 아닙니다. 그나라는 하나님께서 인류가 범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범죄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도록 하시기위해 예비하신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입니다. 이나라는 인류초기부터 약속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나라는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도래합니다.
a.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
b.낙원(눅23:43)
2)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눔
새땅의 분배방식은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지파의 분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실로 하나님나라의 모든 통치주권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한한 인간의 뜻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오직 홀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통치만이 법으로 있어 나라가 완벽함을 유지합니다.
a.주께 속한 주권(대상29:11)
b.절대주권(단4:17)
3) 이방과 함께 거할땅
본문에 보면 새땅은 이스라엘 백성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분깃이 주어질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언약, 곧 신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이 복음의 빛을 공유함으로 함께 하나님나라의 일원이 될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구원이 모든 만민에게 개방될 것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a.땅끝까지(행1:8)
b.모든 믿는자에게 주시는 구원(롬1:16)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드러나 확장된 시기에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큰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명확히 드러난 구원을 놓치지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아들였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성숙한 신앙의 단계를 향해 달려가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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