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고 전하는 말이 더 유익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3절~25절]
13절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절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절 -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절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절 -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절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절 -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절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절 -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절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절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절 -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절 -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방언을 들어도 뜻을 알지 못하면 덕 세움을 받지 못하기에, 남을 가르치는 데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말이 낫습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이고 예언은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예언은 마음의 숨은 일을 드러내 믿지 않는 자도 주님께 경배하게 합니다.

1. 공 예배와 방언 (13~19절)
그리스도인은 자기 중심적 관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에게는 유익하지만, 공동체에는 덕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무익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지만 공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합니다. 만약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가르침으로 구성되는 예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진행된다면, 누가 감사를 고백해도 다른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이 더 낫습니다.
* 묵상 질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교회 지체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내가 깨달은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가르치나요?

2. 불신자들과 방언 (20~25절)
교회는 공동체뿐 아니라 밖에 있는 이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자를 늘 염두에 두고,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방언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복음의 문을 막는 결과를 초래하거나 그 은사를 모르는 사람들의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만약 공 예배에서 방언을 하면, 방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불신자들이 보고 미쳤다는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공 예배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말을 써야 합니다. 책망과 판단으로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 뜻을 깨닫게 하는 예언을 통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인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은사를 사용할 때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20절)
* 적용 질문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아직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게 하시고, 방언을 하는 것으로 믿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않게 하소서. 성령의 은사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절~12절]
1절 -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절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절 -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절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절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절 -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절 -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절 -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절 -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절 -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절 -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절 -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지만, 예언은 사람에게 말해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따라서 방언은 자신을 위하고 예언은 교회를 위합니다. 교회에서 방언만 말하면 서로에게 외국인이 될 뿐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신령한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1. 방언보다 예언을 (1~5절)
은사는 사랑의 관점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되, 무엇보다 사랑을 추구하라고 강조합니다. 은사 중에 특히 방언과 예언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조언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며,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권면하고 위로하기에 교회 전체의 덕을 세웁니다. 바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도 소중한 은사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방언에는 통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남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이 은사 사용의 핵심입니다.
* 묵상 질문
방언보다 예언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나의 은사를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요?

2.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6~12절)
방언으로는 아무 좋은 내용을 말해도 그것을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기에 선한 영향과 변화를 실제적으로 주기 어렵습니다. 언어는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을 때에 의미가 있고 순기능을 발휘합니다. 바울은 만약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알아듣게 말하지 않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특히 공 예배에서는 소통과 교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 예배 시간에 설교자가 방언을 사용한다면, 청중은 얼마나 답답하고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듯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서로를 낯선 외국인으로 만들 뿐입니다. 교회에서는 소통이 가능한 말로 풍성한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상대방이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요?
* 적용 질문
친밀하게 교제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성도들은 무엇을 사모하고 구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저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신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무뎌진 신앙생활 속에서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을 주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온 교회가 하나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절~13절]
1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절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모든 지식과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어떤가요?(1~2절) 구제와 희생, 사랑의 관계는 어떠한가요?(3절)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모든 영적 비밀과 지식을 알고 태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희생 제물로 드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방언이란 인간이 사용하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은 하늘의 신비스러운 언어를 의미합니다. 한편 아무 생각 없이 쳐 대는 꽹과리는 날카로운 불협화음일 뿐입니다. 이렇게 땅과 하늘의 모든 언어를 아름답고 논리 정연하고 유창하게 구사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적 비밀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며, 지식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나 인식을 의미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와 같은 영적 비밀과 지식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태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서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I am nothing)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구제는 참으로 가치 있고 보람되고 위대한 일입니다. 자기 몸을 불살라 드리는 것 또한 순교로서 최고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영웅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구제와 희생도 사랑 없이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허영심이나 명예심 때문에,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애국심이나 휴머니즘 때문에, 천국에 가기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은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 말과 지식, 은사와 믿음의 능력, 헌신과 희생 등 이 모든 일에 사랑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지 나누어 보세요.
우리는 많은 사람 앞에서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의 말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말대로 살지 않는 위선자라면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발심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적인 비밀과 지식을 알고 태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사람에게 경외심을 갖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길 기대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전히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을 칭송하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서 치명적인 인격적 결함을 발견하고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말과 지식과 믿음과 희생의 기초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2. 사랑의 특징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4절)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마 11:29; 빌 2:5 참조)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례하게 행하며 이기적이며 성내길 잘하며 악한 것을 생각합니다(5절).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래 참고 온유하기는커녕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성을 잘 내고 심성이 악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은 타고난 기질이 아닙니다. 본래 인간은 거칠고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말구유에 누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의 죄를 그 몸으로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좇을 때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래 율법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배우고자 몸부림을 쳤을 때 온유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본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자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변화되었을 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고 범사에 양들의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벧전 5:3).

*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서로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고 나누어 보세요.
어린아이는 생각하고 말하고 깨닫는 것이 미숙하고 유치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특히 그렇습니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나이나 신앙 경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사랑이 저절로 생겨 나는 것도 아니요 교회 직분에 따라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노력하며 배워야 하는 신앙 덕목입니다. 나이가 들고 신앙 경륜이 쌓여도 여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미숙하고 유치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경쟁하고 시기하고 감정적이고 자기 자랑을 일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과거의 일을 버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로마서 8:31~3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조건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누구라도 조건 없이 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수준입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당시 고린도 교회 문제의 원인 중 하나는 영지주의의 영향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영적 지식을 통해 극상의 존재인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완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신학은 결혼과 같은 문제에서도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불완전한 육체 안에 갇혀 감옥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어차피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영적인 지도를 받기 위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7:1). 이들은 또한 성령의 은사를 중요시했습니다. 특히 방언과 같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영적 능력을 내세우는 일로 경쟁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은사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것이 공동체의 균열을 불러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 긴 은사론을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결론은 각각의 은사는 모두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은사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었습니다.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죄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실패하고 연약한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내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그러면 인생의 모든 얽매임에서 해방되어 참자유를 경험하고, 내 삶이 처음부터 하나님 은총 가운데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신비를 경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기
- 그럴듯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영적인 지식으로 과시하지 않게 하시고, 진실하고 온전한 인격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 아무 조건 없이 저를 받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오래 참아 주며 온유함으로 대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모든 지체를 위해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

[고린도전서 12장 22절~31절]
22절 -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절 -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절 -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절 -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절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절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절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절 -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절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절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함은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해 몸에 분쟁이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두가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은사대로 여러 사람을 세우시니, 우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1. 몸 가운데 분쟁이 없도록 (22~26절)
몸의 지체에는 서열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각 지체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자발적으로 보완해 줍니다. 만약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무시하고 비하한다면 '누워서 침 뱉기'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 몸에서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요긴합니다. 하나님은 천한 지체에 귀중함을 더하시고, 추한 지체가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하심으로 온몸을 고르게 하십니다. 이로써 어느 한 지체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한 몸의 특징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분쟁은 미성숙함의 표시입니다. 교회에서는 우열이나 귀천이 없이,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어떤 점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까요?

2. 다양한 직분과 은사의 유익 (27~31절)
직분과 은사는 자기 자랑이나 과시가 아닌, 봉사와 섬김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을 주셔서 바른 진리 위에 서도록 인도하십니다. 아울러 '능력과 병 고침과 돕고 다스리며 각종 방언 말하는 은사'를 주심으로 공동체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방언의 은사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은사 중 제일 마지막에 방언을 언급하며, 다른 은사들과의 균형을 유지하라고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특정 은사만 부각하거나 고집하면 곤란합니다. 또한 은사는 경쟁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은사를 최대한 존중하며 더불어 사역할 때, 공동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 묵상 질문
교회에는 어떤 은사와 직분이 필요하며, 그 역할과 목적은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내게 주어진 은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연약한 지체에 대해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무시하고 '내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와 교제하는 일을 외면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말씀하실 때 즉시 순종해 그를 찾아가게 하시고 제 안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부어 주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한 몸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체

[고린도전서 12장 12절~21절]
12절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절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절 -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절 -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절 -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절 -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절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절 -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절 -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몸 하나에 지체가 여럿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사람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몸이 되어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십니다.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을 이루니 눈이 손더러,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 할 수 없습니다.

1. 한 몸, 많은 지체 (12~16절)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양하지만 혼란스럽지 않고, 통일되어 있지만 획일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몸은 늘 여러 지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지체는 자신이 한 몸에 붙어 있는 일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많은 지체가 유기적으로 협동할 때, 한 몸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만약 발이 손은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귀가 눈은 아니므로 몸에 붙지 않았다고 우긴다고 해서 사실이 달라지나요? 비록 각기 다른 모습과 성격과 특징을 가졌더라도 모든 지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몸의 일부입니다. 모든 성도는 한 성령을 통해 다스림받으며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연합해 힘써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어야 할까요?
* 적용 질문
한 몸의 지체로서 어떻게 공동체를 섬겨야 하나요?

2. 쓸데없는 지체는 없다 (17~21절)
하나님은 나를 우월한 존재가 아닌, 유일한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대치(代置) 불가능한 고유의 소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만약 지체가 전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기능만 한다면, 과연 몸은 제구실을 할 수 있을까요? 온몸의 지체가 모두 눈이면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원하시는 뜻대로 각각의 지체를 우리 몸에 골고루 두셨습니다. 누구도 다른 지체에 대해 쓸데없다고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 혹시 나와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셔서 공동체 안에 두신 지체를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 묵상 질문
만일 모두 같은 지체뿐이라면, 몸은 어떻게 될까요?
* 적용 질문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전체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몸으로 섬기는 일을 꺼려 하는 지체들을 마르다와 같이 속으로 비난하고 정죄했음을 회개합니다.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구원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교회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다양한 은사로 유익 얻는 성령 공동체

[고린도전서 12장 1절~11절]
1절 -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절 -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절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 -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 -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절 -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절 -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절 -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절 -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만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습니다.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는 한 성령이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 다양한 은사로 유익 얻는 성령 공동체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일하신 성령께서 성도에게 각기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주시고, 특별한 임무와 역할을 맡기십니다. 비록 사역과 직분은 다를지라도, 한 성령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모두 같은 목표와 같은 비전을 위해 존재합니다. 성도는 개인의 이익과 성취를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재능과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서로 간의 차이는 풍성함을 위해 존재합니다. 각기 다른 성품과 은사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상승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 묵상 질문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주어지나요?
* 적용 질문
성령께서 내게 나누어 주신 것은 무엇이며, 나는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있나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서로 기다려 주고 배려하는 공동체

[고린도전서 11장 27절~34절]
27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절 -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절 -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절 -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절 -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절 -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절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절 -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에 죄짓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핀 후에 떡과 잔을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은 것은 주의 징계로,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먹으러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야 합니다.

1. 먼저 자기를 살피라 (27~32절)
그리스도인은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주와 하나가 됩니다.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살핀 후에 주의 떡과 잔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죄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지은 죄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들 사이에서 지은 죄를 모두 포함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먹기에만 급급했던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성만찬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죄를 지은 셈입니다. 성만찬에 앞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 묵상 질문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살피고 분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교회 안에서도 끼리끼리 지내고 있지 않나요? 한 몸 된 지체로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서로 기다려 주라 (33~34절)
만찬을 나누는 것은 하나 됨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는 것이 옳습니다. 서로 기다린다는 것은 어느 한쪽만의 이익을 위하지 않고 모두를 위하는 길입니다. 모두를 기다린다는 것은 먼저 먹는 욕심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먼저 온 자는 나중 온 자를,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할 때 이 식탁은 진정으로 주님의 식탁이 되고, 교회는 진정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며, 성도의 모임은 경건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교회야말로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세상과 같은 잣대로 정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 묵상 질문
교회가 누구에게든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적용 질문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먹거나 일하려 할 때 무엇을 감수하고 배려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빠르게 입으로 정죄하지 않게 하소서.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죄를 자복하게 하시며, 범사에 하나님의 온유한 성품대로 행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본질과 목적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1장 17절~26절]
17절 -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절 -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절 -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절 -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절 -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절 -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절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절 -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절 -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절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린도 교회에 파당이 있고 주의 만찬을 올바로 대하지 않자 바울이 이를 강하게 책망합니다. 떡은 주님의 몸이요 잔은 주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주님이 명하신 대로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을 기념하며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1. 분쟁거리가 된 주의 만찬 (17~22절)
고린도 교회의 갈등은 주님을 기념해 만찬을 나누는 일에서도 발생합니다. 성도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었는데, 이때 늦게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거나 각자 가져온 것을 나누지 않고 먼저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와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대개 늦게까지 노동해야 하는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기에, 이는 교회에 여러 당파를 만들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주의 만찬을 나누는 목적은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인데, 도리어 교회를 갈라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나무랍니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정당할 리 없습니다.
* 묵상 질문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도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 적용 질문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처리할 때, 꼭 지켜야 할 원칙들은 무엇인가요?

2. 주의 만찬의 의미 (23~26절)
바울은 주의 만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시 강조합니다. 주의 만찬은 예수님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의 피와 몸을 함께 나눈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나누는 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임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갈라진다는 것은 주님의 몸이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몸을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분파로 나뉘어 상대편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은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 적용 질문
공동체가 나뉘지 않고 하나 되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거나 양보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세상에서 부와 명예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은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한 관계로 저희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
1절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절 -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절 -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절 -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절 -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절 -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절 -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절 -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절 -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절 -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절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절 -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절 -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절 -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절 -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절 -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머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를 위해 지음받았기에 권세 아래 있는 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1. 예배 때 여자들의 복장 (1~10절)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 중 하나는 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예배 중에 기도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의 복장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의 복장이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남자는 예배 중에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지만, 여자는 머리를 무언가로 가려야 합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여인들은 남자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들도 머리에 쓰는 것을 거부한 듯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그리스도-남자-여자로 이어지는 질서를 내세워 설명합니다. 즉, 여자는 남자와 다르므로 머리에 뭔가를 쓰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맞다고 결론 내립니다. 머리를 가리는 것은 여자가 권세 아래 있다는 표를 머리에 두는 것입니다. 결국 남자는 머리를 가리지 않음으로써, 여자는 머리를 가림으로써 하나님 아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남녀평등이란 어떤 것일까요?
* 적용 질문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려는 내 행위나 습관이 방종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2. 교회의 질서를 위해 (11~16절)
남자와 여자는 다 주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고, 남자는 여자에게서,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습니다. 둘은 동등한 관계지만 각자의 본성이 머리에 대해 인식을 달리합니다. 즉, 남자의 긴머리는 부끄럽지만 여자의 긴 머리는 영광이 됩니다. 따라서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만큼은, 관례에 따라 복장 지침을 지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남녀의 수직적 관계나 어느 한쪽의 우월함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교회 질서를 위해 복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유보해 달라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교회의 질서를 위해 내가 양보하거나 절제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교회의 규칙은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도우셔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주시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큐티)

영혼 구원을 위해, 주님 영광을 위해!

[고린도전서 10장 23절~33절]
23절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절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절 -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절 -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절 -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절 -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절 -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절 -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절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절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절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먹어야 합니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가 차려준 것도 묻지 말고 먹되, 누가 제물이라 일러 주면 그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많은 이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1. 덕을 세우는 삶 (23~24절)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장 큰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들이 다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유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고 교회 전체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유익을 구하는 대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있는 자신만 생각한다면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한다면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묵상 질문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덕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연약한 자들의 믿음에 혼란을 주거나 걸림돌이 될 만한 나의 습관이나 행동, 언어생활은 무엇일까요?

2.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 (25~33절)
시중에 파는 고기나 불신자가 차려 놓은 고기는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대로 먹으라고 말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다고 언급한다면 남을 위해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이의 믿음과 양심을 실족시킬 수 있는 일은 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면, 그것으로 비방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기준으로 한다면, 결코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영혼 구원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 공동체에서 함께 실천해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제 유익을 위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늘 살피고 돌아보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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