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보답과 보응 4:1-3

 

구름기둥과 불기둥같은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애굽인들에게는 괴로운 날이 될 것이요, 하나님을 따르는 신실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즐거운 날이 될 것이다. 날이 이르리니. 곧 예수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날이 이른다는 것이다.

(1)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기를 거스려 배반하는 자들을 태워버리시는 불이다. 그의 오시는 날은 '풀무불같이 탈' 것이요 진노의 날, 맹렬한 분개의 날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성품에 대해 완전히 알고 계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아시고, 모든 사람의 행동도 아시며, 사악하게 행하는 자들도 간파하신다. 그들은 이 불에 그루터기같이 될 것이요, 살라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것은 그들 스스로가 이 불에 타기 쉬운 물질인 그루터기이기 때문이며,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불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삼켜버리는 불앞에 그들 자신을 찔레와 가시나무같이 두는 것이다(사 27:4,5).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악을 행한 유대인들에게 공포와 정죄를 말씀하실때 이루어졌다. 그때 그는 장로들의 유전의 찌꺼기를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더한 부패한 해석들을 태워버리시고자 땅위에 불로 오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유대나라도 말살되고 말았다. 이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즉 우리의 구주께서는 그날들이 '형벌의 날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눅 21:22). 이 말씀은 확실히 심판의 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또한 그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자들을 기쁘게 해주시는 빛이다(2절). 주를 경외하고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비와 위로가 여기에 준비되어 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다가오는 그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맑고 밝은 날이 될 것이요, 땅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소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소알이 평지의 성들로부터 은혜롭게 구별되어졌을때 그 지경위에 솟아오른 해는 특히 주목할만하다(창 19:23). 사람들이 두려움으로인해 실족할때에는 그들의 구속이 가까웠음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머리를 들게하여야 한다(눅 21:28). '의로운 태양'을 통해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에 적용되어졌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 그는 '사람들의 빛'(요 1:4)이시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태양처럼 사람들의 영혼에게도 빛이시다. 태양이 없이는 세상이 토굴감옥이 되고 말듯이 '그리스도의 얼굴' 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이는 인간세계 그 자체도 암흑이 되고말 것이다. 그는 '의의 태양' 즉 의로운 구주이시다. 의로움은 때때로 자비 혹은 온화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다정한 자비였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그의 사람이 미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영광스럽고 환영받는 일출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을 태양처럼 밝히실뿐만 아니라 병들어 앓고 있는 세상을 고치시기 위해서도 오셨다. 유대인들에게는 "태양이 떠오르면 질병들도 줄어든다"는 격언이 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사로, 또한 위대한 약으로 세상에 오셨다. 즉 길르앗의 향유와 의사가 되신다(렘 8:22). 땅위에 계셨을때 그는 '백성중에 모든 약한 것과 모든 병든 것을 고치시는' 선을 행하면서 마치 태양이 돌듯 순회여행을 계속하셨다. 그가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의 질병을 고치시려고 세상에 오신 위대한 뜻의 한 예이다. "고침을 받은 자들이 일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너희도 나가야할 것이라." 감옥수들이 빛을 보고 자유를 얻기위해 그들의 토굴감옥에서 나오듯이 사람의 영혼은 죽을때에 그들의 몸에서, 부활때에 그들의 무덤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너희도 마찬가지로 성장해야할 것은 건강하고 자유롭게 회복되어졌기 때문이라. 너희는 지식과 은혜로 지혜를 얻고 선하게 되어진 사람들은 그 은혜로인해 보다 지혜롭고 보다 선하게 된다. 그들의 성장은 빠르고 강하고 알맞게 자라난 '외양간의 송아지들'에 비교되어 진다. 혹자는 '너희는 나가야 할 것'이라고 읽는 대신에 '너희는 너희 자신들을 감동시키거나 기쁨으로 뛰게 해야할 것이며, 외양간의 송아지들이 마치 넓은 들에 놓아졌을 때처럼 들떠서 떠드는 것같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읽는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원수들에게 승리하게 될 것이다(3절).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신자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을때,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부패한 욕망과 열정들을 억제했을때,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이 사단을 그들의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실때, 그때 그들은 '악인을 밟을' 것이다. 성도들의 개가는 모두 하나님의 정복에 기인하고 있다. 즉 그들이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것이다.

 

Ⅱ. 메시야의 선구자 4:4-6

 

이 부분에는 엄숙한 결론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복음이 시작되기까지는 예언의 영에 의한 지시를 더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다음 두가지 사항이 요구되고 있다.

(1)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정중히 경의를 표하고 있어야 한다(말 4:4). "내 종 모세의 율례를 기억하고 내가 호렙에서 그에게 명한 율법에 따라 행하도록 해야하니라." 모세가 명예스럽게 언급되었다. 말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의 종 모세'라고 그를 부르신다. 의로운 자는 영원한 기억속에 남아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또한 명예스럽게 언급되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율법을 '명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였고, 우리를 위해 명하셨기때문에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대한 유익을 기대한다면(히 8:10),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특히 그들중에서도 영구한 책임을 지고자 작정한 자들에게 부과된 명령을 지켜야 한다. 양심의 임무는 우리로 율법을 기억하도록 명령하는 일이다. 우리가 지식에 있어서 상당한 진척을 가져왔을때에라도 우리는 여전히 실제적인 신앙의 주요원칙들을 지켜야하며, 그 원칙들로써 신앙을 유지하도록 결단을 내려야한다. 선지서들과 계시록을 연구하는 자들도 모세의 율법과 4복음서를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언은 얼마동안 교회에서 끝이 났으며, 예언의 영도 복음이 시작될때까지는 되돌아오지않으므로 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즉 그들은 그 규례들과 약속들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수 있으며, 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수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과 그의 복음의 선포와 그의 왕국의 설립을 기대해야 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난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익을 기대해야 했다. 그것을 지키고 잘 사용하면 그 유익을 보다 더 받게될 것이요 넘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계속해서 기대해야 하며 그것의 시작을 선지자 엘리야의 출현에서 찾아야 한다(말 4:5,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눅 16:16)로서 그것들을 새벽별이 나타나기까지 다만 교회의 빛으로 계속 이어졌다. 유대의 박사들은 그 선지자를 아합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예언한 엘리야의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한다. 곧 엘리야가 메시야의 선구자가 되기위해 다시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중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와 동일 인물로 보지않고 그와 같은 영을 가진 또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요한이 바로 오게 되어있었던 그 엘리야라는 것을 아주 잘 안다(마 7:10-13, 보다 명확히 표현되기는 마태복음 11:14절에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그리고 10절에도 같은 사람으로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노니'). 엘리야는 아주 엄격한 사람이었고 죄를 책망하는데 담대한 사람이었다. 세례요한도 엘리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동일한 영과 능력을 힘입어 회개와 개혁을 외쳤다. 세례요한은 임박할 진노와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키에 대해 말하면서 공의로운 경고와 함께 피할 길도 알려주었다. 이 키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타작마당을 깨끗케하시는 도구이다. 마태복음 3:7,10,12절을 보라. 세례요한은 '아비의 마음을 그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하여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눅 1:16,17). 요한에 관해 약속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그가 죄와 불신앙의 억센 분출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일을 회복하기 위해 그가 오는 것'이라고 불리운다(마 17:11).

2)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교리를 전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양심을 깨우쳤다.

3) 그는 자녀들에 대한 아비들의 마음을 그리고 아비들에 대한 자녀들의 마음을(혹자는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께와 그들의 의무로 돌린 것이다.

4) 따라서 그는 그들을 모두 하나님께 인도하며 구속함으로써 서로 더욱 단단히 묶이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한마음'과 '한영혼'(행 4:32)을 지닌 충실한 시민들이 되게 하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할 것이다. 그곳은 사랑이 넘치며 모든 증오가 사라지는 나라일 것이다. 유대나라는 그들의 불신앙과 회개하지 않음으로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로 채찍질하시려고 하지만 아직 한번더 그들을 시험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도록 보내심을 받아 그들로하여금 회개하게 함으로써 혼돈을 막고자 한다.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씀이 저주인 것을 주목한다. 그것은 축복과 더불어 오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반드시 영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반면에 신약의 마지막 말씀은 축복중에서도 가장 귀한 축복의 말씀으로서 그 축복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시켜야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축복으로 무장시키시든지 해서 위에 언급된 저주에 대항하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Ⅰ.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 3:1-6

 

본장의 첫구절은 불경건한 무신론자들, 곧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던 자들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 보인다. "그가 여기 계시니라. 그는 바로 문가까이 계시니라. 오랫동안 고대되었던 메시야는 곧 나타나실 것이라. 그리고 그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임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라."

(1) 메시야앞에 올 세례요한에 대해 예언되었는데, 이 세례요한은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예언했었다(사 40:3).

1) 그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세례요한은 그의 사역을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았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키고 고침을 받게한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사자였기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보았던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이다. 그는 백성들을 그들의 아비인 아브라함에 관한 자신감(그들은 구세주 없이도 아브라함으로 만족할수 있다고 생각한다)으로부터 떼어놓고, 메시야가 이제 가까이에 와계심을 알려주는 것으로 '내앞에서 길을 예비할 자'가 되었다.

(2) 메시야 자신이 오실 것에 대해 예언되었다.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세상을 버리셨다고 너희가 생각하는 그 '공의의 하나님'이 임하실 것이라. 오랫동안 '오실 자'로 불리워졌던 그 메시야가 이제 곧 오시리라."

1) 그는 아도나이(Adonai) 곧 '주님'이시다. 세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기반이요 기초로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마 28:18), '만유의 주'(행 10:36)가 되신다.

2) 그는 '언약의 사자' 혹은 '언약의 천사'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평화를 중재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천사'로서 그의 중재에 의해 언약이 체결되고 제정되었다. 그 언약은 우리 모든 사람의 '구원이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바'(히 2:3)가 되게 한다. 그는 '언약의 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사 '언약의 사자'가 되셨다.

3) 그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며 바라고 있던 '저희의 구하는 자' '저희의 사모하는 자'이시다. 그를 찾고 기다리는 가운데 그들은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대했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눅 2:25,38).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그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 마음의 바라던 이가 되신다면 그는 또한 우리 마음의 기쁨이 되실 것이다.

4) 그는 '홀연히 오실 것이다.' 그의 오심은 가까우며, 우리는 족장들이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된다.

5) 그는 '그의 전에 임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 성전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그의 전 '그의 아버지의 집'(요 2:16)이다.

(3) 그가 오시는데에는 위대한 목적이 있었다(2절). 그는 그들이 찾는 분으로, 비록 그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오시지 않고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통해 생명을 얻게하려고 오신다할지라도,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할 것인가.' 심지어 그가 육신을 입고 계실때조차도 그에게는 아무도 그의 변하신 모습을 증거하고자 그 앞에 설수 없을정도로 영광과 권능의 빛이 발산되었다. 유대의 박사들은 그가 오시는때에 이스라엘에게 있을 큰환난이 메시야의 고통과 슬픔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광석을 녹여 금과 찌꺼기를 가려내는 '연단하는 자의 불'과 옷을 비벼서 얼룩을 빼어내는 '표백하는 자의 잿물' 같으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밝히고자 곧 '여러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려'(눅 2:35)고 오셨으며, '손에 키를 들고'(마 3:12) 귀중한 것과 하찮은 것을 가려내려고 오셨다.

1) 복음은 선하게 되려고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할 것이며, 그들에게 그것은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다(3절). 그가...연단하여 깨끗케하는 자같이 앉아서...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즉, 그는 그들의 마음속을 성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불로 금과 은을 깨끗이 하듯이 그들을 깨끗케 하실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성령과 불로(마 3:11), 곧 불과 같이 일하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로운 재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즉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돌아와 봉헌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열매가 선하게 될 나무를 선하게 하실 것이다.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4절). 그 헌물은 그들이 토색한 것이나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왔을때처럼 더이상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지 않고 열납될 것이다. 메시야는 그들가운데 은혜를 내리시사 그들의 헌물을 열납하실 것이다. 그가 그들을 정결케 하고 연단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꺼이 받으실만한 그러한 제물을 드릴 것이다. 메시야는 그들을 중재하심으로 그들을 열납될 수 있게 만드신다.

2) 복음은 사악함을 계속 고수하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을 거스리는 증거임이 드러날 것이다(5절).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한 그들의 패역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다. "너희는 그가 계시는 곳을 알게될 것이며, 너희의 두려움과 혼란을 인하여 그 사실을 알게될 것이라. 왜냐하면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가까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심판받기 위해 나아와야 하는 죄인들은 영적인 사악한 일을 다루는 '술수하는 자'요, 육체의 욕망속에 빠져있는 '간음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를 증인으로 불러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거짓 맹세하는 자'요,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하고 '과부와 고아'를 짓누르는 압제자이다. 이 모든 것의 주원인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것'에 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4) 이 모든 것에 대해 인준하신다(6절).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악행들(5절)에 대한 심판이 속히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변역지 아니하시는 주앞에 실행되고야 말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그의 언약에 신실하셨음을 인하여 그가 변치않는 하나님이심을 말할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행동에서 거짓되었고 변덕스러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변하시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고로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한다.'

 

Ⅱ. 규례를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 3:7-12

 

하나님은 하나님 섬기기를 버린 세대와 하나님의 것을 강탈한 세대의 사람들과 변론하신다.

(1) 그들은 그들의 주에게서 달아나 그가 그들에게 행하려고 주신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7절).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그들로하여금 돌아와 회개하도록 하신 은혜로운 제안은 무엇인가.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의 직책으로 너희가 충실을 기할 곳으로 돌아오라. 길을 잃은 여행자같이 자기네의 군기를 가지고 도망친 군인처럼, 자기의 남편을 떠난 불실한 아내처럼 돌아오라. 내게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도 돌아가서 너희의 당한 심판을 옮기고 너희를 두렵게 한 자들을 막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돌아온다는 대답은 얼마나 까다로운가? "그러나 너희는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너희 자신의 마음을 서로 멸시하며, 너희가 가진 확신마저도 지워버리면서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그들은 이 말을 그들의 흠에 관해 말하는 것이요, 그것들을 고치려고 요구하는 모욕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고지식함과 유한성, 영적 상태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대해 무지하였으므로 그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안에 계속 거하려는 굳은 결심을 했던 것이다.

(2) 그들은 주의 것을 도적질했고 그의 물건을 사취했다. 그들은 약탈과 신성모독과 극악한 강도행위로 고발받을 자리에 처해있다.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사람이 어찌 감히 무례하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단 말인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폭력을 가한단 말인가"라고 이해한다. 또 다른 학자는 "어찌 사람이 그분을 제한하거나 똑바로 세운단 말인가"라고 읽기도 한다. 백성들은 '범죄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빼앗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예를 빼앗고, 그를 섬기는데 쓰도록 바쳐진것 중에서 빼앗으며, 그에게서 그들 자신을 빼앗고, 안식일을 빼앗으며, 그들의 종교가 유지되도록 지시된 것, 곧 그들의 재산중에서 하나님께 바쳐야할 것을 바치지 아니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라고 묻는다. 그것은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그들은 그것들을 더럽혔고, 제사장들은 그것들중에서 속여 빼앗고도 그들의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물들을 가져오는대신 도리어 토색한 것과 저는 것, 병든 것 등 쓸모가 없는 것들을 가져왔다. 이것때문에 그들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9절). 하나님은 불순한 기후로 그들이 기근과 결핍을 당하도록 벌하셨다. 혹은 땅의 소산들을 먹어치우는 곤충들로 그리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식량부족으로 그들을 벌하셨기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뿐이라고 핑계를 댔다. 그리고 이제 빈궁해졌기때문에 십일조와 헌물들을 가져올 형편이 못 된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따를 경우 심판을 옮기리라는 약속하에 이점에 대해 개혁하도록 재촉받았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너희의 집에 곡식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제단에 올릴 것으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최대한도까지 지켜 충분한 십일조를 가져와. 먼저 하나님을 섬긴후에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여는지 안여는지를 보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표현은 비유적인 것으로 위로부터 오는 모든 선한 선물은 이때로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풍성함을 따라 그들에게 넘치도록 부으실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갑작스런 풍성함은 '하늘문을 여신다'(왕하 7:2)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그 문들은 '복을 붓도록' 열려졌으며 그 복은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어졌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마음을 고친 죄인들과 화목하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약함과 우리의 바라는바가 적음으로인해 우리는 그것들을 넉넉히 받지는 못한다. 그들의 땅의 실과가 메뚜기와 모충에 의해 다 먹히운 까닭에 하나님은 이제 그 심판을 옮기시고자 한다(11절). 그들이 기근의 질책을 당했던 반면, 이제는 모든 나라가 그들을 복된 자라고 부를 것이다.

 

Ⅲ. 하나님앞에서 사악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 3:13-18

 

(1) 하나님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는 뻔뻔스러운 자들을 성난 눈으로 주목하신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그러한 말들은 그들의 교만과 오만 그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제와 통치아래 있는 것을 경멸하면서 멸시하는 어조로 교만스럽게 완악한 말을 하였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그런것 때문에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나이까?"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을 부인할수 없음에도 그것을 다만 가벼운 문제로 처리해버렸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혹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헛되니, 즉 그는 헛되이 아무 목적도 없이 힘쓰는바 단지 수고할뿐이므로 그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도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앞에' 몹시 엄숙하고 비탄에 잠겨 슬프게 혹은 우울하게 행하였고 우리의 영혼을 괴롭혔으나 아직도 우리는 나아진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규례를 단지 형식적인 의식으로 지켰음에도 그 규례들을 지켰다고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계속하여 그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쁨으로 그를 섬기도록 그리고 그앞에서 즐겁게 행하도록 요청하셨음에 반하여 그분앞에서 '슬프게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미신에 의해, 하나님 섬기는 것을 그들에게 노역과 고된 일이 되게 했으며 그런후에 그것을 힘든 봉사라고 불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고, 그럼에도 여전히 가난과 곤경속에 처해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사두개인들의 잘못과 연관이 있다. 그들은 내세를 부인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사실 어떤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악함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15절). 죄인들의 외적인 번영은 마치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경건으로 그 손이 약해지는 것(시 73:13)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악함으로 그 악한 자의 손이 강해지는 경우와 같다. 잠시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의 활에 맞을 하나의 표적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볼 것이며, 그 괴롭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인도하여 시험하는 자들'을 볼 것이다.

(2) 진정한 경건에 대해 그렇게 큰 경멸과 부패가 있었던 부패하고 타락한 세대에도 하나님께 대한 성실과 열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지혜의 근본이 되고 모든 종교의 근원이 되는바 '여호와를 경외하였고,'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였으며, 그의 권세에 복종했다. 모든 세대에 때때로 적은 수이긴 했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은 자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생각하였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섭리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것에 대해 묵상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경외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피차에 자주 말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함께 모였고, 그들은 아무리 불의가 만연하는때에라도 서로간의 사랑이 밀납같이 냉담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진척시키고자 서로서로 친절히 말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거룩함을 위해 서로 이해하며 말했다. 불의한 자가 대담하고 뻔뻔스러울때에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기를 갖고 스스로 각성한다. 즉 '무죄자는 사곡한 자를' 거스리게 된다(욥 17:8). 종교가 잘못 전하여졌을때, 그 종교의 지지자들은 그들이 할수 있는한 그 종교의 명망을 유지하고자 했다. 유혹하는 자들이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 조심성없는 영혼들을 속이기에 바빴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서로서로의 손들을 강하게 하는데 부지런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뒤를 밀어주셨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을때, 예수께서는 귀기울여 들으셨고 그들과 동행하셨다(눅 24:15). 여호와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16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봉사를 기억하시며 '잘하였도다. 네가 주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애통하는 자들의 눈물과 탄식도 책에 기록하신다(시 56:8). 하나님에 대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 말해진 어떤 말도 그것이 꼭 보답되도록 반드시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장차 그의 영광을 그들과 나누실 것을 약속하신다(1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출애굽기 19:5절에서 쓰인 단어)를 삼을 것이요. 혹자는 '나의 정한 날'을 '내가 행하고자 뜻하고 말한 것을 이루고 행할 그날'이라고도 읽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석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다(사 62:3). 하나님이 그의 보석들로 꾸미실 날이 오고 있다. 그것들은 그때까지 던져져 있던 진토속에서와 흩어져 있었던 모든 곳으로부터 모아질 것이다. 그는 이제 그의 은혜를 그들과 나누심을 약속하신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이 말은 보통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시 103:13) 아끼심을 의미한다. 자식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들이어야 하고, 새로운 탄생에 의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종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게으름으로 훈련시키시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의 원리로부터 즐거움과 기쁨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느헤미야는 그가 많은 선을 행하였을때, 아직 '땅위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선을 행하고 죄는 짓지않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기도하기를 '주여,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옵소서'(느 13:22)라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런 자비를 보여주실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하여 세상의 자녀들과 구별되어질 것이다(18절).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에 차이를 두지않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말하는 너희는 그리고 '그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14절)고 말하는 너희는 너희의 잘못을 알게 되고야 말 것이라." 이것은 예루살렘과 유대교회와 나라가 로마에 의해 멸망할때, 믿는 유대인들과 불신앙을 고집한 자들 사이에 생긴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거나 그를 섬기지않는 자들이다. 이 세상에서는 종종 '의로운 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분별하기가' 힘들다. 추측컨대,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한 바른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음으로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이 아님이 판명될 것이며, 반면에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기때문에 우리생각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었다고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최후의 심판때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모든 사람의 성품이 완전하여지고 완전히 드러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사람이 그때에는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나타내고 그의 위장된 모습은 벗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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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정도를 벗어난 제사장직 2:1-9

 

앞장은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말 1:6)에서 볼수 있듯이 제사장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가져온 것을 드렸을 뿐이라고 변명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보다 나은 교훈을 베풀었더라면, 그 백성들은 그만큼 더나은 제물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허물이 제사장들에게 돌아오고 있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1절).

(1) 하나님께서 거룩한 지파 곧 그가 임무를 주신 지파와 맺으신 언약이 열거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4절). 이는 그 언약을 확고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때 레위의 자손들(특히 아론의 자손들)로 알게할 것은 '하나님이 레위와 맺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그를 경외하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그 언약으로 사람들의 영혼에 생명과 평강을 가져다주는 신앙이 유지되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사장에 대한 이 언약은 영적인 제사장들인 모든 믿는 자들과 맺은 은혜의 언약에도 해당된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영원한 평강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이 세상 및 오는 세상속에서의 모든 행복을 보장해 준다. 이 언약은 모든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다른 지파들로부터 구별되면서 맺어졌다. 생명과 평강의 이 큰축복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곧 레위에게, 아론에게, 그리고 비느하스에게 주신 언약속에서 계속되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스라엘을 위한 용도라는 잇점으로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다. 혹자는 5절을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주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지않고 레위인들이 그 언약을 받기위한 조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본다.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함이라. 이 결과로 그들 곧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들'은 그 생명과 평강의 언약의 사자들이 되었고, 언약의 중재자가 아닌 단지 사자 혹은 대리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강의 조건을 다루도록 쓰임을 받게 되었다. 제사장들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입'이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7절). 제사장들은 그 지식을 백성들에게 감추지 말고 그들을 위해 지켜야 한다. 성직자들은 지식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단지 지식을 가질뿐만 아니라 기회가 있을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할 것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인 그 제사장들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

(2) 제사장의 직무에 있어서 수많은 전임자들의 충성과 열심은 그들이 그런 존경할만한 조상들보다 더 퇴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언급되어졌다. 여러 성경가운데서 선한 제사장(6절)은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있었고, 또 담대했다.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이는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진리는 법이요, 명령을 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로써 다스리신다. 그는 '하나님앞에 행하도록' 택함을 받은 제사장같이 사셨다(삼상 2:30). 그는 평강과 '공평으로' 하나님과 함께 행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을 불의에서 돌이키셨고,' 하나님은 놀라운 결과로 그의 진력에 보답하셨다. 그는 많은 영혼이 사망에서 구원되도록 도우셨다. 이전에 그를 알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 제사장이 바르게 될때에야 많은 사람이 바르게 될 것이다.

(3) 언약을 위반한 제사장들에게 격한 책망이 내린다. 당시에 많은 부패한 것들이 유대인들의 교회로 몰래 들어왔는데 잡혼, 이방인을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도록 용납하는 것, 그리고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 등 모두 제사장들이 부주의하고 신실치 못하였기 때문에 들어왔다.

1) 그들은 그 규례를 범했다.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9절). 그들 자신도 그 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다른이들이 그것들을 지키도록 해야할 그들의 본분도 행하지 않았다.

2) 그들은 백성들의 신임을 저버렸다.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그들은 저들의 직무를 마치 그것이 다만 그들의 배를 채우고 위대해지기 위해서 계획된 것처럼 관리하고 있었을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백성들의 신뢰를 저버린 또다른 예는 그들이 '율법을 행할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한 것'(9절)이다. 율법을 행할때에 그들은 자기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여 그들을 용인하였다.

3) 그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도와주어야할 사람들의 영혼에 악영향을 끼쳤다. 너희는...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4)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로 책망받을때, 그들은 그것을 듣지않으려 하였다.

(4) 하나님께서 이 제사장들에게 심판을 내리셨다. 그들은 안위를 잃었다(2절). 너희의 복을...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그들은 선을 행함으로 만족하게 되는 그들의 일에 위로를 가지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백성들의 신용마저 잃었다(9절).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레위의 언약을 파했을때, 그들은 그것에 의해 그들 스스로 천해졌을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눈에서조차 비열해졌다.

(5) 그들에게 진노의 판결이 내려졌다(2,3절). 그러나 그것은 조건부이다. 너희가 만일 마음에 두지...아니하면. 이 말씀속에는 "만일 너희가 마음에 둔다면 하나님의 노가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니 너희 스스로 복을 받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복을 주지도 못할 것이라. 이제까지의 너희의 풍부함은 너희에게 재앙이 될 것이고, 너희는 너희 자손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 땅의 결실도 그들에게 더이상 복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너희가 심은 낟알은 땅속에서 썩을 것이라." 또한 그것은 그들이 선포한 말씀의 씨앗으로도 이해될 것이다. "더이상 헛된 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의 분향은 내게 가증스러운 것이니라."

 

Ⅱ. 잡혼과 이혼 2:10-17

 

부패한 행동은 참으로 부패한 행동원리의 결과요 산물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서로 거짓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거짓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1) 일반적으로 그들은 '각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고' 있었다(10절). 자기의 하나님에게 거짓말하는 자가 그 친구에게 진실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여기서 정죄받고 있는 두가지는 이방나라들의 여자들을 취한 것과 그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취한 아내들을 학대하고 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둘 다 그들이 거룩한 언약을 어긴 것이었다. 그들은 그 언약으로 명백하게 금지한(신 7:3) 이방부녀자들과 결혼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조건, 곧 이방인과 섞이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선조들과 맺은 언약이었고, 그 민족을 통합시킨 대헌장이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옳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 '한 하나님의 지으신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의 자손'이다. 이것은 여기서 유대민족을 가리킨다. "한 아버지, 곧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들이 그들 스스로 "우리는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자만에 빠졌던 것이다. 한 하나님의 지으신바가 아니냐. "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한 백성을 이루게 하셨으며 우리들로써 한민족을 이루게 하셨을뿐만 아니라 우리가운데 생명을 넣으사 다른민족들과 구별하신 것이 아니냐? 따라서 그것이 우리도 우리의 인격의 존엄을 어쩔수 없이 유지하도록 해야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인접하고 있는 나라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졌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성물'(렘 2:3)이었으나 그들은 이방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그 거룩함을 더럽혔고, 그 영예를 티끌속에 던져버렸다. 유다는...이방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11절). 그 해로움은 그 여자가 이방나라의 딸이었다는 것보다 이방신의 딸이었다는 것에 있었다. 그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셈하신다(12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여호와께서...끊어버리시리라. 이 일이란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는 거룩한 나라로부터 끊어져버렸고, 하나님은 실제로 그를 끊어버리시되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끊어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더이상 그들을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라고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도 만일 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다면(우리가 에스라 10:18절에서 많은 제사장들이 그러했던 것을 찾아볼수 있은 것처럼), 하나님의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류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제정하신 결혼언약을 경멸함으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취한 아내들을 학대하고 내버렸던 것이다(말 2:13). 그들은 자기들의 아내에게 마땅히 해야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실정을 다른 어느사람에게도 감히 알리지 못한 그 아내들은 하나님께 호소하였고,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였다.' 우리가 섬기는 그 선한 주님은 그의 단을 눈물로 가리우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노래들로 꾸미실 것이다. 배우자들이 왜 거룩한 사랑과 기쁨속에서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주어진 이유는 바로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벧전 3:7).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아내들을 불실하게 다루었다(14-16절). 그들은 아내들에게 그들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의 아내에게만 합당한 애정의 나눔을 첩들에게서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내들에게 이혼증서를 주어 인연을 끊어버렸고 내쫓아버렸다. 이 모든 것에서 '아내들은 그들의 옷으로 학대를 가려야 했다.' 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학대했지만, 아직 다른사람들이 보는앞에서는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체 했다.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사이에 여호와께서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여호와께서는 너와 그녀사이의 결혼언약에 증거자가 되셨느니라.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께 너의 신실과 충실에 간하여 호소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녀는 너의 아내, 너의 것, 너의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며, 세상에서 네게 있는 모든 친척들중 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네가 그 사람에게 굳게 결합하기 위해 다른사람들과는 맺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녀는 너의 어려서의 아내로 너의 애정의 가장 강렬하던 시기에 네 사랑을 받던 사람이니라. 너의 젊은시절 한때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그 정도 나이가 들어 경멸하거나 싫어하지 말라. 그녀는 너의 동반자로서 오랫동안 너의 염려와 슬픔과 기쁨을 너와 더불어 나누어 온 자니라." 그 아내는 남편에게 한 사람의 종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간주된다. "그녀는 너의 언약의 아내로 그녀가 신실을 지킬때 너는 그녀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며, 그것이 생명의 언약인고로 너는 그녀를 떠나 방탕해서는 안되느니라." 남자와 그 아내는 그들의 생애의 끝까지 사랑과 평화안에서 함께하여야 하고, 서로간에 다툼이나 갈라섬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함께 묶으셨다(15절). 여호와는...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곧 한사람 아담을 위해 한사람 하와를 지으셨으니, 아담은 결코 '그녀가 다른사람으로 투기케 말아야' 하며(레 18:18), 다른사람을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도록 그녀를 내버려서도 안된다. 아담은 한 돕는 자와 어울리도록 계획되었으므로 한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만일 그가 그런 자를 보다 더많이 구했더라면 그는 그 돕는 자를 만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무엇때문에 한남자를 위해 한여자만을 취했는가? 그것은 '경건한 자손, 곧 하나님의 자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자손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야 하며, '각 남자는 그 자신의 아내를 갖되' 율법에 따라(고전 7:2) 단 한사람만을 취하여야 한다. 그들은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안에서 살아야했으며, 하나님의 규례인 거룩한 결혼안에서 태어나는 어린아이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자손으로 만들어야 했고, 잔인한 짐승들같게 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기에 힘쓰는 자를 몹시 불쾌해 하신다(16절). 이 모든 점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추론되었다(15절).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지켜 어려서 위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 말은 16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2) 이 모든 부패한 행실을 낳게한 그들의 행동원리들은 얼마나 부패했는가! 그것의 근원을 추적해 보라(17절).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자신들의 부패하고 사악한 행실들로 그들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조차도 싫증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거룩한 하나님이 되심을 부정했고, 뻔뻔스럽게도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유도 없이 죄인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번영한다는데서 끌어낸 사악한 결론이다(참조. 말 3:15).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일반적으로 묘사되어 온 것처럼 그분이 그리 엄하지 않으신 분이라고 여기고서 하나님을 '대체적으로 그들 자신과 같은 한 분'이라고 말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행할 따름이라. 그는 우리를 보시지도 않으며, 우리를 존중하시지도 않는도다"고 그들은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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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 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경고'라는 제목을 가진 이 선지자는 다음의 사실들이 암시되어 있다.

첫째, 이 경고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따라서 노래와도 같이 자주 반복되어 선언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것에 부담을 느끼고 책망을 받을 자들이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그들에게 하나의 짐이 되어,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한 그들을 망하게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경고'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졌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셨고, 이제 다시 한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내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고는 말라기에 의해, 곧 말라기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본 절들에서 그들은 배은망덕의 죄로 책망받고 있다.

(1)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품고 계신 큰 애정을 단언하신다(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어떻게 돌연히, 이렇게 다정하게 그 말씀을 시작하신다. 이 한마디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요약하신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모든 은총의 근거를 자신의 사랑에서 찾아내시는 것같이, 자기를 거스린 그들의 모든 죄의 근거도 그의 사랑을 멸시한데에서 찾아내신다. "우리는 쇠하고 헐벗었으며, 포로가 되었는데 어떤 점에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단 말이니이까?"

(3)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음을 입증하셨다. 혹자는 그들의 질문을 "주는 무슨 이유로 우리를 사랑하시나이까?"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나 그 사랑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한 대가에 불과하다는 것, 곧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에서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혈족이 아니었느냐.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사랑에 대한 어떤 보상이 있다면 당연히 에서도 그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에서를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였노라."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 사이에 차별을 두셨다. 에서는 야곱의 형제, 곧 쌍둥이 형이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9:13절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나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이 말씀은 야곱이 언약속에 들어와 있는 반면, 에서는 거절당하였음을 보여준다. 에서는 공정하게 미움을 받았으나 야곱은 값없이 사랑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 에돔족속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적이 될 것이다.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3절). 그의 산은 세일산이었고 그것이 '그의 산업'이었다. 갈대아 군대가 세계의 대부분을 휩쓸 당시 에돔도 파괴를 당했다(사 34:6,11). 그들이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을 보고 개가를 올렸던 것만큼 똑같은 공포의 잔이 그들의 손에 놓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야곱의 지경들은 훼파되었으나 재건되었다. 반면 에돔의 지경들은 결코 재건되지 않았다. 의로운 자의 고난은 그 끝이 잘 될 것이요, 고통에서 회복될 것이며, 그들의 슬픔또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의 고난은 에돔의 멸망같이 될 것이다(4절). 에돔족속의 헛된 소망에는 의지할만한 약속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헐벗게 된 것은 사실이며 있을 법한 일이라. 고칠수도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와 무너진 곳을 일으켜 세우리라.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회복되리라"고 말한다(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은 히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고 직접 여리고를 건축한 것(왕상 16:34)처럼 재빠르게 일어선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는 일어설 것"이라고 했어도, 만군의 여호와는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지역을 일컬어 구제할수 없을만큼 죄로 가득한 나라인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을 백성'이라 할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이 결코 개혁되어지지 않을 것이듯이 그들의 멸망도 결코 복구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2) 이스라엘족속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적이 될 것이다. "에돔족속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백성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목도하고 그의 사랑에 대한 너희의 의심을 버리게 되리라. 왜냐하면 '너희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과 지경에서 여호와께서 크시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에돔 지경이 여전히 황폐한채로 남아있을때 이스라엘 지경은 복구되고 짐승과 사람들이 그곳에 살게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음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영광이 된다.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실때 우리는 그를 크게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를 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Ⅱ.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 1:6-14

 

말라기 선지자는 여기서, 제사장들이 비록 백성들을 책망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스스로 재판관이라고 여기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을 오히려 문책한다.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6절).

(1)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기대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들은 그 아비를 공경하나니. 그것은 그가 아비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말씀하시기전에 이미 본성적으로 자녀들의 마음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종은 주인에 대한 의무가 스스로의 서약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의무를 주인을 공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요 종들인 제사장들은 그를 두려워하지도 공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원래 백성들에게 아비요 주인들이었고, 그렇게 불리워지도록 기대되었다(삿 18; 마 22:7,10).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와 주인을 잊었고, 그에 대한 임무도 잊었다. 우리의 아버지이며 주인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때 우리는 그를 힘있게 공경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아비를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면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와 주되신 이에게는 더욱 그리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히 12:9).

(2) 제사장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경멸하였는가. 그들은 엘리의 아들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께서 몹시 싫어하시는 제물들'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과 규례를 경멸했다. 이에 대해 7절과 12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성물을 귀히 여기지 않았을뿐 아니라 그것들을 사악한 목적에, 곧 그들의 자만과 탐욕과 사치를 위하여 악용하기도 했다. 이와같은 행위는 그들이 보편적으로 범하던 죄였다. 이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입증하고자 하나님께 도전하기도 했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7절). 그들의 변명은 곧 그들의 공격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는 그들의 말은 그들의 거만함과 완악함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범죄로서도 마땅히 비난받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해 왔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보여주신다.

첫째, 그들은 말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다. 그들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7절)'고 마음에 말했으며, 또한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다'(12절)고 말함으로써 어떤 상보다도 더 하나님의 상을 무시했다. 진설병이 놓여있는 성전의 상 혹은 여기서 상으로 불리우는 번제단은 그들을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그들 자신의 상과 그들의 귀인들의 상에 비교할때 경멸할만한 것이었다.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을 경멸히 여길 것이라(12절).

둘째, 그들은 그들의 말과 일치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다. 그들은 어떠한 것이든, 심지어는 매우 보잘것없고 열등한 것일지라도 제물로서 합당한 것이라고 여겼다. 모든 제물에는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가져오게 되어 있으나 그들은 '더러운 떡'(학 1:7)을 가져왔다. 그들이 바친 짐승들은 율법이 흠없는 것으로 제물을 삼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8절) 들이었으며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13절) 등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들이었다. 혹자는 제사장들이(7절) 모욕적으로 말한 것이 8절에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너희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제물로 눈먼 것을 드린다해도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 역시 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도다." 만일 우리가 무지하게, 이해없이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는 눈먼 것을 제물로 가져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주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또는 냉담하고 무딘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우리는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오는 셈이 된다. 만일 우리가 외적인 예배의식만을 치중하여 그 예배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저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안에 숨어있는 헛된 생각과 방심속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토색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모독이며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도 엄청난 해악과 손상을 끼치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들은 대가를 받은 일 이상의 것은 결코 하려하지 않았다. 제사장들가운데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성전문을 닫는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을 아주 고된 것으로 여겼다(13절).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그들은 그들의 직분을 힘들고 귀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3)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 그들에게 훈계하시며 변론하신다.

1) 그들이 이런식으로 땅의 임금에게 모욕을 주겠는가? "너희가 나에게 드린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이제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것이 공물로 바칠 것이든 선물로 바칠 것이든 그것을 그가 기뻐하겠느냐?"

2) 그들은 이러한 제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것을 너희의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13절). 만일 그 사람이 의로운 상태에 있지도 거룩한 상태에 있지도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도 그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아벨을 받으시고 그후에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3) 그들은 이같이 제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면서 백성들을 중재할때 어떻게 하나님을 설득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4) 그들이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안락하게 살도록 돌보아주셨고 그들이 임무를 기쁘게 잘 수행할수 있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셨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한 제사장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9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원컨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하나님을 구하라. 너희 죄에 대해 스스로 낮추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받는 모든 책망들은 바로 '너희가 이같이 행한'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니다."

(5)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을 깨우치시려고 자신의 결심을 선포하신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고 경멸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크고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될 것이라(11절). 그들이 더럽힌 그런 세속적인 의식들 대신 신령한 예배 방법이 시작되어 확립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수소와 염소의 피와 기름대신에 분향(이것은 시편 141:2; 계 8:3절에 나타난 기도와 찬미를 의미한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한구석에 있는 작은 백성들인 유대인들 가운데서만 그가 예배와 섬김을 받아오신 것 대신 모든 곳에서 경배되고 섬김을 받을 것이다.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나라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언어로 그 일들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큰 개혁의 분명한 예보인데, 이 개혁으로서 이방인들 곧 '나그네들과 외국인들'이었던 그들이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감을 허락받게 되었다. 모욕적이고 조심성없는 경배자들은 '떼 가운데 수컷'을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으로' 여호와께 드린다.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으나 제사장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여 하나님보다 더 관대한체하고 있었다. 그들은 속이는 자들로서 거짓과 사기술로 하나님을 대한다. 그렇게 속이는 자는 또한 위선자이기도한데 그들은 자기를 기만하며 자멸하는 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저주를 받는다. 복을 기대하나 저주가 내려질 것이다. 이교도들이 우상에 불과한 그들의 신들을 존중한 것에 비해 유대인들이 유익하고 참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이교도들보다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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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6절)
주의 날에 대한 약속 - 히브리어 성경(M.T)에서는 3장과 4장을 구분하지 않고 이 부분을 3:19~24절로 분류했다. 한편 말라기의 여섯 번째 설교의 연속으로 주어진 이 부분은 앞 부분(3:13~18)이 심판받을 악한 자를 대상으로 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대상으로 기록했다. 즉 교만한 자와 악인의 최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1절)한 후 의인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을 전제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율법을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절]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은 3:15절에서 일시적으로 번영하던 죄인들을 심판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증명하는 날이다(시 37:1~10). 그리고 풀무의 불은 뿌리와 가지까지 남기지 않고 다 태우는 심판의 불을 상징한다(시 50:3; 단 7:10; 고전 3:1; 벧후 3:7~10). 그렇지만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살리신(단 3:19~27)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심판 중에도 성도들을 살려 내실 것을 약속한다.
[2절]
의로운 해. 스스로 빛나는 태양이시며 또한 빛의 근원이신(시 19:4~6)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치료하는 광선. 그리스도의 수많은 사역 중에서도 각종 병든 자들의 육체적 질고를 치료하신 것과 무엇보다도 죄인들의 영혼을 구속하신 사실을 상징한다.
[4절]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즉 율법이다(갈 3:24). 이와 같이 호렙산에서 주신 율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혈통적이고 영적인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다(신 5:3). 또한 하나님께서 율법을 모세에게 위탁하여 청지기와 종을 삼은 것은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하고 준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깨우쳐 준다(신 4:1~14)<신 28:58, 모세 율법의 이해>.

[5절]
선지 엘리야를...보내리니. 모세에 이은 엘리야의 등장은 변화산에서 예수와 함께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케 한다(마 17:3; 막 9:4). 이는 엘리야와 유사한 심령과 능력을 가졌던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다(눅 1:17; 요 1:21, 25). 한편 본절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 예수에게서 성취되기 때문에(마 5:17, 18)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욜 2:15) 마땅히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지키며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6절]
세례 요한(마 11:10; 막 1:2~5)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돌이켜 그 조상들의 경건과 신앙을 본받도록 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눅 1:16).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하나님의 저주를 면하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 핵심
1~6절
최후 심판 날이 임할 것과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보낼 것을 약속하시는 내용이다.

# 묵상
의인에 대한 약속 (1~6절)
기념책에 기록되며, 특별한 소유가 되는 복을 받고, 심판날에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어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할 것을 강조하시는데, 이러한 권면은 끝까지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선구자인 엘리야 (5절)
이는 세례 요한을 지칭합니다. 즉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언한 것으로, 이로써 구약 전체를 종결함과 동시에 신약과의 연결 고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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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절]
내 사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사 4.:3)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다(마 11:10; 막 1:2~5; 눅 1:76). 홀연히(히, 피트옴; suddenly)란 '곧'(immediately)이 아니라 '갑자기' 또는 '생각하지 않은 때에'(unexpectedly)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주와 언약의 사자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렘 31:31~33; 히 12:24).
[2절]
그의 임하는 날. 이 날은 아모스(암 5:20)와 스바냐(습 1:15, 16)가 예언한 '여호와의 날'로서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이지, 결코 구원의 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죄지은 자는 그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환난과 고통의 날이기 때문이다<욜 서론, 여호와의 날>. 그리고 이와 같은 심판은 이미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되었고(요 3:18, 36; 요 9:39; 요 12:31),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롬 14:10~12; 고후 5:10; 계 20:11~15).
[3절]
깨끗케 하는 자. 심판의 그리스도는 깨끗게 하시는 분이다. 이는 보좌에 않으신 심판의 주께서 '소멸하는 불'이시며(신 4:24), 각 사람의 공력을 불로 시험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고전 3:10~15). 뿐만 아니라 심판의 그리스도는 주의 백성들의 더러워진 옷을 깨끗하게 세탁하고, 희게 표백하는 분이기 때문이다(계 6:11; 계 7:9, 14). 한편 레위 자손은 실제적인 레위 자손인 제사장들만을 가리키지 않고 왕 같은 제사장들인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가리킨다(벧전 2:9, 10).
[4절]
옛날과 고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던 과거의 시대를 뜻하는데, 아마도 모세의 시대(사 63:9, 11; 호 11:1)나 다윗의 시대(암 9:11)를 염두에 둔 것 같다.
[5절]
내가...임할 것이라. 본절은 네 번째 설교가 시작되는 2:17절에서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질문하며 여호와를 괴롭게 한 자들에게 주어진 대답이다. 한편 말라기는 여기서 모세의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이스라엘을 부패시킨 일곱 가지의 죄악을 열거하는데, 특히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의 죄악은 여섯 가지 죄악의 근원이 된다. 이는 모든 범죄 행위의 배후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인간적인 교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7~12절)
하나님의 부르심 - 말라기의 다섯 번째 설교이다. 말라기는 여기에서 경건한 헌물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밝히며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까닭은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기 때문이라고 깨우쳐 준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며 이에 대한 약속(출23:25; 시 81:16; 사 30:23; 마 6:33)을 하셨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축복 받을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현실화시키지 못한다(욜 2:12, 13).
[7절]
돌아오라(히,슈브)는 말은 '회개'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특별히 행동의 변화(욥 6:29; 렘 34:15), 악에서 돌이킴(렘 15:7; 렘 18:8), 하나님께 돌아옴(호 6:1; 호 7:10), 회개하는 것(사 6:10; 사 10:22; 렘 3:7, 12; 렘 4:1; 렘 5:3) 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첫걸음은 언제나 회개인데(눅 15:17~20) 이러한 회개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뒤따른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구와 '너희들이 회개할 경우 풍성한 은혜를 다시 부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권고를 무시하고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반문할 정도로 영적으로 둔감해 있었다.
[8~9절]
십일조와 헌물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멸시하며 도적질하는 범죄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은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하여(민 18:24, 28), 그리고 고아들과 과부들과 나그네들을 위하여(신 14:29)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의무였다<민 18:21~32, 십일조; 고후 9:1, 헌금에 대하여>. 이러한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이지만(신 14:29), 거절할 때에는 징계와 저주를 촉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징벌은 하나님께서 내린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10절]
나의 집에 양식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개혁하기 전에는 레위인들과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이 양식의 공급을 받지 못하여 흩어진 경우도 있었다(느 13:10). 그리고 하늘 문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으나(신 11:17; 신 28:12; 왕하 7:2, 19), 불순종하는 자들을 심판할 때도 하늘 문이 열렸다는 표현이 쓰였다(창 7:11; 사 24:18).
[11~12절]
황충을 금하여란 토지의 소산이 풍부할 것(학 2:19; 슥 8:12)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표현이다. 한편 '황충'(히, 에켈; eating)은 먹어 치우는 자를 뜻하기도 하므로 실제적인 황충 뿐만 아니라 밭의 소산을 해치는 모든 파괴자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3:14~4:6절)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 - 임박한 심판을 준비하도록 경고하는 말라기의 마지막 설교이다. 말라기는 이전에도 반복하여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적이 있다. 즉 말라기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며 불공평하다는 그들의 잘못된 사고를 비판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이들의 불평에 대하여 초기에는 약하게 반응하셨으나 그들의 패역함이 점점 커졌기 때문에(1:10; 2:17; 3:13) 급기야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당시 이들의 그릇됨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잘못 설정된 데 있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반드시 현세에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잘못된 인과 응보적 사고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영원한 삶과 관계된 것으로서 꼭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3절]

완악한 말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강퍅한 말로서 바로(출 4:21)처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강퍅해진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2:17절에서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여호와를 괴롭게 했던 그들의 말처럼 하나님을 대항하며 무시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14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이러한 탄식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히 11:6, 24~27), 오직 이 세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나오는 불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고 외치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고 선언한다.

[15절]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없는 것 같은 현실을 비관하는 외침이며 어리석은 인간의 교만이 가득 찬 태도를 규탄하는 절규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일시적인 악인의 번영과 교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악(잠 21:4)이기 때문에 결국 영원한 사망을 초래할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롬 6:23; 약 1:15).

(3:16~4:6절)

심판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이름이 기록된 기념책(3:16~18)과 의인과 악인이 맞이하게 될 종말(4:1~3), 그리고 여호와의 날(4:4~6)에 대해 기록된 이 부분은 종말적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서 구약 전체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신약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대심판과 새 예루살렘(계 19~22장)에 대한 묘사와 상응 관계를 이룬다.

[16절]

기념책(book of remembrance)이란 인간의 말과 행위를 기록한 책으로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될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책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한다(출 32:32; 시 56:8; 시 69:28; 사 65:6; 단 7:10; 눅 10:20; 계 20:12).

[17~18절]

나의 특별한 소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의 날(슥 14:7; 마 24:36; 행 1:7)이 오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 곧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하나님을 섬긴 의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특별한 소유'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명칭(출 19:5, 6)으로 '기업의 백성'(신 7:6) 또는 '보배로운 백성'(신 26:18)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베드로가 외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대열에 서게 된 성도들을 의미한다(벧전 2:9, 10).

 

# 해설

하나님의 부르심 (7~12절)

심판 예언에 이어 불성실한 십일조로 대표된(8, 9절)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십일조의 준수(10절)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말라기의 다섯 번째 설교이다(7절).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첩경이며 축복의 근원임을 본문은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회개 촉구는 말라기 이전의 여러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맥을 같이함과 아울러 예수의 선포와 직결되며 복음 전파의 핵심(행 3:19)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 (3:13~4:6절)

마지막 설교로서 악인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생생한 필치로써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본문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출현을 예언함으로써 본서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종결하는 동시에 신약과 완벽한 연결점을 제공하고 있다.

 

# 핵심

6~15절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원인은 신실하게 순종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을 속인 데 있음을 지적하면서, 굽힐 줄 모르는 백성들의 패역함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 (6절)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분만의 절대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삼상 15:29; 약 1:17).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다시 말해서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고 영원토록 보존하신다고 하는 구속 계획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에 따른 것이므로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 묵상

메시야께서 오시는 목적 (1~3절)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자 곧 메시야가 임할 것을 예언하는데 그 목적은 레위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은 모든 성도를 가리키며, 정결케 함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결을 통한 성화 운동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법 (7~12절)

말라기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적 표시이며,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십일조와 헌금은 온전한 믿음, 자발적인 헌신의 의지와 기쁨과 감사로 드려야 합니다.

헌금의 자세 (8절)

즐겁게(고후 9:7), 수시로(고전 16:2), 정한 대로(고후 9:7), 욕심이 없이(마 10:8), 넘치도록 채워 주심을 믿고(고후 8:3), 사욕이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롬 12:8), 정한 때를 맞추어서(고전 16:2), 자원함으로(고후 9:7), 은밀하게 드려야 합니다(마 6:3).

패역한 자들과 경건한 자들 (13~18절)

패역한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헛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지만 반드시 임할 것을 믿고 서로 격려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날은 패역한 자들에게는 멸망의 날이지만 경건한 의인들에게는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나의 특별한 소유 (17~18절)

이 말은 언약의 백성, 즉 '이스라엘의 명칭'인 '기업을 이어받을 백성'(신 7:6), '보배로운 백성'(신 26:18)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 다시 말하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고 의인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구속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된 성도를 말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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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9절)
제사장들에게 임하는 저주 - 두 번째 설교의 계속이다. 이 부분에는 앞장에 이어 불경건한 제사장들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의 경고(1~4절)와 더불어 이상적인 참 제사장의 모델이 제시된다(5~9절).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2:10~3:15)하기에 앞서 먼저 종교 지도자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은 신앙 공동체가 바로 정립되는 데 있어서 지도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제사장들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이(마 15:14)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말씀을 전하셨던 것이다. 또한 당시 제사장은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레 4:3) 제사장의 죄가 곧 백성의 죄가 됐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회개는 개인의 차원을 벗어난 민족적인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각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특권을 가졌으므로 이 거룩한 신분(벧전 1:5, 9)을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함은 물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겔 33:6, 종교 지도자의 책임>.
[1절]
이같이 명령하노라. 원문에는 '이러한 명령'(히, 하미츠와 하쪼트; this decree)이란 명사로 되어 있다. 이는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간접적으로 권면하는 교훈(instruction) 또는 경고(waming)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직접 내린 강력한 명령을 뜻한다.
[3절]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역본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축복의 손을 거두신다(70인역). 하나님께서 그들의 팔을 못쓰게 하신다(JB, NEB).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씨를 거두신다(KJV).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을 끊어 버리신다(RSV). 그러나 본절은 결국 이러한 모든 뜻이 암시된 재담적(才談的)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서 등을 돌려 축복을 거두시겠다는 징계의 강한 선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4~6절]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명령(1절)하신 까닭은 그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 즉 계명과 율법은 언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과 평강의 언약으로 불리는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레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인 아론의 가문을 통하여 세운 제사장 직분에 그 강조점이 있다. 한편 레위는 디나 사건(창 34:25, 26)으로 시므온과 더불어 저주를 받아 흩어졌지만(창 49:5~7), 그들이 이와 같은 복을 받은 까닭은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 때에 하나님 편에 섰고(출 32:26~29), 발람의 바알브올 사건 때에 레위 지파 출신의 비느하스가 헌신했기 때문이다(민 25:10~1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신에 따라 레위 지파와 언약을 맺으셨고 제사장들의 신앙 상실기에 다시 한번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7절]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란 명칭이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학 1:13)처럼 여기에서는 제사장에게 주어진다. 그 까닭은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가르치고 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할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레 10:11; 신 17:9~11; 신 33:8~10). 그러나 제사장들은 호세아 시대(호 4:6)처럼 율법을 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와 거리가 멀었다.
(10~16절)
백성들의 죄 - 말라기의 세 번째 설교이다. 말라기는 여기에서 가정 생활의 타락을 개탄하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고 계심을 강조한다. 즉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전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자와 결혼함으로 타락하고 있음을 경고하며(10~12절), 이스라엘 백성이 맹약한 아내를 버리는 것을 경고한다. 여기에서 전자는 '열조의 언약'(10절)을 어긴 것이고, 후자은 인간과의 굳은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이러한 백성들의 죄는 신실하지 못한 것을 추구함으로써 야기되는 것인바 앞 부분에 나오는 제사장들이 레위의 언약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약을 충실히 지키시는 성실하신 분인바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가 된다(민 23:19; 고전 1:9; 딤후 2:13; 히6:17; 히 10:23).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할 뿐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믿음 또한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10절]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은 동의 대구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바 곧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신 32:6; 사 43:1). 이는 인간이 모두 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였으므로 상호간에 사랑의 논리가 지배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은 자기 형제에게 배신과 반역을 일삼고 열조의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 된 백성의 위치를 저버렸다.
[11절]
궤사와 가증한 일의 대표적인 것은 우상 숭배자와 결혼하는 일이다. 이러한 잡혼은 하나님께서 구별한 백성들이 이방화되어 타락하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한 까닭은 종족의 순수성이 아니라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인 것이다.
[13~14절]

어찜이니이까. 이와 같은 반문은 이스라엘의 남편들이 동족인 아내와 이혼하고 이방인 여인과 결혼하고서도 아직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하는 오도된 신앙관을 가졌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다운 인간 관계의 회복과 죄로부터의 결별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깨달을 수 있다.

[15절]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 언약을 지키지 않고 자기 아내에게 배신과 거짓을 행한 남편들의 행위가 잘못된 까닭을 밝혀 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를 위하여 하와 이외에 다른 여자를 만들지 아니하셨고 그 둘이 한 몸을 이루도록 하는 결혼을 통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으려 하셨던 것이다(창 2:24; 마 19:4~6; 엡 5:31).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고 교훈하시며 이혼의 불법성을 지적했던 것이다<고전 7:25~38,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16절]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 아내를 악으로 덮는 자, 자기 옷으로 악을 덮어 숨기는 자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히브리 개념상 옷은 부부 관계를 상징하기 때문에(롯 3:9; 겔 16:8)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내를 사랑의 옷으로 덮지 않고 학대로 옷을 삼아 덮는 자를 미워하심을 강조한다. 특별히 말라기가 세 번째 설교를 마치면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고 반복한 것은 성적 타락의 원인이 심령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7계명을 해석하시면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교훈하신 내용과 일치한다.

(2:17~3:6절)

하나님의 심판 - 말라기의 네 번째 설교이다. 특별히 여기서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17절)는 말씀은 가정 생활의 타락과 부부의 이혼을 책망한 세 번째 설교의 결론인 동시에 네 번째 설교의 서론이다. 또한 메시야의 오심과 그 이전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 즉 세례 요한이 올 것이 예언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는 오실 메시야가 심판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제사장과 일반 백성들의 악행이 반드시 소멸될 것이라는 강한 경고이다.

[17절]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여호와를 괴롭게 한 말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며 무시한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 여호와께서 행악자를 선히 본다는 것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시편 기자(시 73:1~16), 예레미야(렘 12:1), 하박국(합 1:2~4) 등이 외친 탄식이고, 험한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부딪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고 깨우쳐 준다. 그리고 다윗도 행악자의 형통함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라고 권면한다(시 37:1~10).

 

# 해설

제사장들에게 임하는 저주 (1~9절)

앞 단락과 함께 두 번째 설교를 이루는 부분이다. 불경건하고 죄악 된 제사장들에게 수치스런 심판 선언(1~3절)이 내려진 근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책무를 저버린 데서 비롯된다(4~8절). 제사장들의 그릇된 행위는 도리어 백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실태였다(9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백성들의 죄 (10~16절)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자와 결혼함(11절)으로써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출 34:16; 신 7:3, 47절)을 거역하고 부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을 얻기 위해서 맹약한 아내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파렴치한 죄악(14~16절)에 빠져 있음을 규탄한다. 특히 15절은 결혼의 중차대한 의의를 시사하는데, 비록 본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결혼 문제에 국한시켰을지라도 사회의 기본적 구성 요소인 가정에서 노골화된 죄악상을 통해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전반적 죄악상(3:5)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 (2:17~3:6절)

17절은 타락한 이스라엘의 완악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바, 세 번째 설교(10~16절)의 결론인 동시에 네 번째 설교(2:17~3:5)의 도입부라 하겠다. 이어서 심판자이신 메시야의 도래와 역사하심 그리고 그 이전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올 것임을 예언한다(3:1~3). 그리고 바로 이날이 '여호와의 날'로서 죄악 된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한다(5절). 한편 불의한 세력이 창궐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현실에 대한 의문은 예레미야나 하박국 등에 의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렘 12:1; 합 1:2~4).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에 대한 신앙을 유지한 채 답답한 심경을 호소한 것인데 반하여, 본문의 백성들은 철저한 불신과 냉소주의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대조적이다.

 

# 핵심

1~9절

진리와 정의로 백성을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이 그 본분을 저버렸으므로 질책을 받는다.

말 2:15절의 바른 번역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 에하드 아솨'는 '그러나 그가 그들을 하나로 만들지 아니하셨느냐'(NIV, NKJV)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2:14절에 언급된 남편과 아내를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창 2:24절 ("남자가...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에 명시된 대로, 일부일처제를 세우신 하나님의 신성한 결혼 제도를 주지시키는 내용이다.

 

# 묵상

백성들의 두 가지 죄악 (10~16절)

이방인과의 결혼과 이혼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과의 잡혼으로 우상을 섬기는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또한 조강지처를 버리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과의 신성한 약속인데 결혼의 언약을 깨뜨리고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범죄입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하지 못했으며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악을 행하면서도 그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결국은 자멸로 빠질 수밖에 없음을, 역사가 남겨 준 교훈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궤사와 가증한 일 (11절)

우상 숭배자나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잡혼은 하나님께서 구별한 백성이 이방화되어 타락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하신 이유는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들 (16절)

이혼하는 자와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입니다. 여기서 '옷을 가리운다'는 말은 부부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학대로 옷을 가리운다'는 말은 , 아내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미워하며 남편의 의무를 불성실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상징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나 가정은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임을 알고 사랑과 희생, 봉사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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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5절)
하나님의 사랑 선포 - 말라기의 여섯 설교 중 첫 번째 설교이다. 그는 이어지는 여러 설교에서 세부적인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책망을 기록하였다. 즉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무엇보다도 이를 먼저 불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말라기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의 증거로 에서의 후손인 에돔의 비참한 운명을 기록한다. 즉 이스라엘은 에돔과 다름없는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사랑으로 지금껏 보호하셨음을 상기시켰던 것이다(신 4:37; 호 11:1). 사실 오늘날 성도들도 행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불신자보다 특별히 더 뛰어난 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의해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행동은 율법에 입각한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의 은혜에 감동해서 움직여지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이하에 나오는 여러 가지 말라기의 질책도 이러한 상태까지 성숙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신앙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1절]
말라기로(히, 베야드 말라기; by the hand of Malachi)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증거할 도구로 말라기를 사용하시되 기계적이 아니라 지(知), 정(情), 의(意)를 지닌 인격체로서 사용하셨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말라기의 단순하고 효과적인 문답 형식의 문체와 그 자신의 하나님과 백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율법에 대한 뛰어난 식견 등이 본서 요소 요소에 드러나 보인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발하실 때 대부분 인간을 통해서 할 뿐 아니라 그 개인의 개성과 경험을 사용하시되 오류없이 자신의 뜻을 전달하셨다.
[2절]
사랑하였노라...사랑하셨나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즉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스룹바벨 성전도 완공하였고 황폐한 환경도 복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한 것임을 망각하고 오직 형식적인 종교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사랑'(히, 아하브)이란 70인역에서 헬, '아가페'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을 세우신 근본적인 동기가 조건없는 사랑임을 의미한다(신 7:7, 8; 신 10:15; 렘 31:3).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행위와 상관 없이 그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주셨던 선택의 사랑이고, 언약의 사랑이고, 주권적 사랑이다(창 25:23; 롬 9:7~13).
[3절]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미워하다'(히, 사네)란 선택의 사랑에 반대되는 말이다. 즉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증오심이 아니라 교리적 의미에서 유기(遺棄; reprobation)를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소홀히 여긴 망령된 행실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지만(창 25:29~34; 히 12:16, 17), 야곱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악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의 산업을...붙였느니라. 이와 같은 에돔의 멸망은 예레미야(렘 25:21), 요엘(욜 3:19), 오바댜(옵 1:5, 8, 9, 15, 16, 18)에 의해서도 이미 선포된 내용이다. 특별히 오바댜는 에돔의 멸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은 역사상 여러 번 멸망의 위기에서 다시 재기했으나 에돔은 이스라엘과 달리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멸망된 후 영원히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다.
[4절]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에돔의 자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멸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복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욥 12:14; 사 22:22; 계 3:7).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돔을 저주하신 까닭은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에돔이 그 형제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겔 35:2~7). 특별히 에돔을 '악한 지경'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에돔을 저주하신 까닭이 바로 그들의 악행 때문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에돔의 운명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라는 말씀, 곧 택한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다.
[5절]
지경 밖에서. '밖에서'(히, 메알)는 위에서(upon), 넘어서(over, from upon)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경을 에돔과 같이 버리지 않고 회복하여 그 '위에서'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1절과 연관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 옮겨갈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언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1:6~2:9절)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과 탄식 - 말라기의 두 번째 설교로서 형식적인 제사만을 일삼는 제사장들의 타락에 대한 책망과 하나님의 탄식이 선포되어 있다.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하고 거짓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흠 있는 제물과 병든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이와 같은 가증한 행위의 배후에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며 보이지 않는 것보다 현실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심성이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사탄이 신앙이 약한 자를 총동하여 일으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회피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회복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신앙의 필요성을 이러한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 부분에는 흥왕하게 될 신약 교회의 모습도 예견되어 있다.

[6절]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타락한 제사장들을 책망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밝혀 준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부자(父子) 관계이다(충 4:22, 23; 신 32:6; 사 1:2; 호 11:1, 2).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계시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렘 50:19,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비유>.

[7절]

더러운 떡. 진설병(출 25:30; 레 24:5)이나 소제의 제물인 무교병(레 2:4)을 가리킨다.

[9절]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본절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더 이상 그들 위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8절의 결론이다. 하나님은 가식적인 행위를 미워하신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취할 행동은 회개와 긍휼하심에 대한 감사이다(삼상 15:22; 시 51:16, 17; 사 1:10~17; 욜 2:12~14; 약 4:6; 벧전 5:5, 6).

[10절]

성전 문은 번제단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요 10:1~3), 오직 하나뿐이다. 그런데 원문에는 복수(히, 델라타임)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겔 41:23, 24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 문이 두 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번제단으로 들어가는 그 문은 실제로 닫을 자가 없고 닫아서도 안 되는데, 제사장들은 헛된 제사만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제사장들의 출입을 금하도록 그 문이 닫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13절]

12절이 7절의 반복인 것과 마찬가지로 본절은 8절의 경고를 다시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인한 봉사는 큰 기쁨과 위로를 주지만 그것이 상실될 경우 봉사는 참으로 괴롭고 힘들다.

[14절]

서원하는 일. 5대 제사 중 화목제 가운데 하나인 서원제의 제물은 흠 없는 수컷을 드리도록 되어 있다(레 22:18~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다인들은 흠 있는 수컷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이는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를 속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했다(행 5:1~10).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므로 인간은 그분에 대하여 항상 성실로 임하여야 한다.

 

# 해설

머리말 (1절)

성전 재건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이 임하지 않자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율법에 대한 무시 현상을 나타내었다. 이때 부르심을 받은 말라기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고 고난이 계속되는 원인이 바로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고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설 것을 촉구하는 데에 있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2~5절)

말라기의 첫 번째 예언은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확증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의 통치의 섭리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사랑을 재인식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주권적 선택과 에서와 그 후손 에돔에 대한 멸망의 예고를 대조시켜 보여 주고 있다.

제사장들의 죄 (6~14절)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말라기 선지자는 먼저 백성들의 지도자인 제사장들의 병들고 흠 있는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불경한 마음과 형식적 제사에 치중한 죄악을 고발했다(7, 8, 13절). 제사장들의 이 같은 태도는 하나님보다 제물을 더 사랑하는 데 근거한 것이다. 언약 공동체 내에서 제사장이 차지하는 역할이 중대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지워진 책임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눅 12:48). 한편 11절은 13, 14절과 대조되며 율법주의의 종식과 아울러 흥왕하여질 신약 교회의 모습을 예견한다(행 19:20).

 

# 핵심

1~5절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실례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말라기 (1절)

B.C. 5세기 말경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되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말라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지 약 1세기가 지나는 동안 안일과 형식과 타성에 젖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1:3~5). 느헤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 묵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6절)

부자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이스라엘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계시합니다(출 4:22, 23; 신 32:6). 또한 주인과 종의 관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경외의 대상이십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의 죄악(6~14절)

그들은 합당치 못한 제물을 드렸고, 불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행하고도 하나님 앞에서 전혀 죄를 깨닫지 못하며 동일한 범죄를 반복했습니다. 이와 같이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제사장이 범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타락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원제 (14절)

화목제 가운데 하나로서(레 7:15, 16), 제물은 흠 없는 수컷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은 흠있는 수컷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를 속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므로, 인간은 정직과 성실을 다하여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말라기 4장 1절~6절]
1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절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절 -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절 -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절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절 -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주제별 목록 작성
여호와의 날
1절 : 용광로 불 같은 날 /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는 날
2절 :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공의로 치료받는 날
3절 :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을 밟을 날
4절 : 하나님의 법(율례와 법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날
5절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예비하러 보냄을 받을 날

* 도움말
1. 지푸라기(1절) : 히브리어 ‘콰쉬’는 ‘마른 풀, 지푸라기, 그루터기’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마른 풀같이 살라져서 뿌리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불태워져 버릴 것임을 선언하신다.
2. 호렙(4절) : 호렙은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 산이 자리 잡고 있는 산맥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말씀묵상
1. 패역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먼저 제사(예배)를 멸시함으로써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고(1:1-2:9)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열조가 하나님과 맺은 “성결의 언약”도 깨뜨렸습니다(2:10-12).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혼인의 언약”을 깨뜨리고(2:13-17)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축복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3:7-18).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면할 수 없었고, 참담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2.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이 저주를 당하는 상황을 방치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일깨워 주셨고, 그들에게 깨어진 언약을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깨진 언약을 회복할 수 없음을 아시고 “언약의 사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깨어진 언약의 파편들을 모으고 꿰매서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신다는 예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서에서 메시아가 “언약의 사자”로 계시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실 것이며, 언약의 사자를 통해 깨어진 모든 언약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크고 두려운 날에 하나님의 이름이 크시다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적극적인 헌신의 자세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받을 축복까지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말라기서를 통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언약을 회복하시는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십시오(1-5절).
2. 여호와의 날에 악인들과 의인들은 각각 어떻게 됩니까?(1-3절)
* 깊은 묵상
1.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명령문’을 찾아보십시오. 이에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은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겠습니까?
2. 여러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제공:프리셉트

언약의 사자가 임하리라

[말라기 3장 1절~15절]
1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절 -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절 -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절 -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절 -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절 -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7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절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절 -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절 -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3절 -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절 -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절 -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 주제별 목록 작성
언약의 사자
1절 : 길을 준비하는 사자 뒤에 임하실 분 / 이스라엘이 구하는 ‘주’ /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
2절 :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고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분
3절 : 금과 은을 연단하는 것과 같이 레위 자손(제사장들, 성전의 일꾼들)을 깨끗하게 하실 분 / 레위 자손들로 하여금 여호와께 공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실 분
5절 : 그 언약의 사자는 곧 여호와임 / 거짓과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증거하시는 분
6절 : 변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 도움말
1. 언약의 사자(1절) : 왜 말라기서에 등장하는 메시아는 “언약의 사자”로 계시되는가? 그 이유는 말라기서가 언약을 깨뜨리는 범죄를 다루고 있으며 언약 소송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는지를 지적하시고, 그 언약을 어떻게 회복하실지를 약속하신다.

* 말씀묵상
1. 언약의 사자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고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킬 언약의 사자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언약의 사자가 이 땅에 와서 행할 일은 우선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죄의 청산입니다. 언약의 사자는 제사장 족속인 레위 자손을 연단하고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2-3절).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4절).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장애가 되는 점쟁이들(점치는 자들)을 멸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곧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는 자,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5절). 이는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및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반영한 예언입니다.

2. 언약의 회복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고(8-9절) 참다운 신앙의 유익성을 무시했음을 고발하셨습니다(14-15절). 하나님이 인간들을 고발하는 목적은 이전에 아브라함과 맺은 축복의 언약을 회복하고 그들에게 그 언약의 복을 베풀기 위함이었습니다(12절). 본문에 따르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회복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비결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결국 유익하다는 것을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적극적인 헌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7-12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주관자요, 구원자이심과 복의 근원이 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자가 마땅히 받는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복을 받고 또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자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을 회복하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언약의 사자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십시오(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언약의 사자가 이 땅에 임하여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 예언에 따르면 언약의 사자로 오신 예수님께 기대할 수 있는 은혜는 무엇입니까?(2-5절)
* 깊은 묵상
1. 여러분은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것이 헛되다”라고 생각하며 낙심한 적이 있습니까?
2. 여러분은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며 십일조를 온전히 드립니까?


제공:프리셉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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