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하신 방법은(삼상 4:3)?

언약궤를 통한 상징적 현현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눈으로 보이는 상징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을 통해 진정한 현현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언약궤의 유래 과정은(삼상 4:4)?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증거로 이어져 왔음.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역사요, 예언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비로소 그 언약과 예언은 성취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예표하던 언약의 완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에게 알려진 여호와의 능력은(삼상 4:7, 8)?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분으로 이방인들은 여호와께서 화를 주시는 신으로 생각했음.
이방인이라 함은 하나님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지 않는 패역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능력을 아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사단과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두려워했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언약궤가 힘을 발하지 못한 이유는(삼상 4:10)?

이스라엘의 득죄와 하나님의 침묵 때문.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백성이 형식적으로 여호와의 궤를 멘다고 능력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불신한다면 우리의 형식적인 신앙 생활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엘리가 언약궤의 향방에 대해 심히 염려한 이유는(삼상 4:13, 18, 19)?

빼앗긴 언약궤가 이방 나라에서 유린당하는 일을 염려했기 때문.
신성, 지혜, 능력의 상징인 언약궤를 빼앗기게 된 사건은 이스라엘의 주권이 침해되는 것과 거의 흡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오류에 빠질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득죄한 자의 말로는(삼상 4:17, 18)?

목숨이 달아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김.
아담때부터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심판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무시한다면 같은 결과를 낳을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와 이스라엘의 영광과의 관계는(삼상 4: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궤는 곧 이스라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주 안에 거해야 함을 말씀하셨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해야만이 여호와의 영광에 이를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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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의 특징은(삼상 3:1-10)?

하나님을 모르고 주의 가르침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하고,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며,
의와 불의를 분별치 못하고,
참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잠잠해진 당시 상황이 주는 암시는(삼상 3:1)?

하나님의 진노를 잉태하고 있는듯한 이 침묵은 온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일종의 벌(사64:11)이요, 죽음의 선고와도 같습니다(시28:1).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된 인내가 엿보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충실한 종을 보내시기 위해 의도적인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무엘에게 반복된 행동을 시키는 엘리의 태도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삼상 3:4-9)?

반복된 소명의 확인을 위해 엘리가 일부러 취한 명령임.
하나님은 당신이 쓰시고자 하는 자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거기에 응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유는 잘못된 만용에서 비롯된 소명의식이거나 소명을 경히여기는 사람들의 잘못 때문입니다(마22:1-5).


사무엘 시대의 특징은(삼상 3:13)?

종교적 - 제사 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사회적 -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란했고,
가정적 - 부모의 통제력 부족으로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을 하지 못했고,
국가적 - 백성들을 다스리는 통제력이 부족했으며,
영적 -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우셨습니다.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는 죄는(삼상 3:14)?

택함받은 자가 하나님의 길을 거스리고 훼방하는 죄.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 특히 사명받은 자가 성령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고 타락의 길로 빠지는 것은 심각한 죄악으로써 결국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직접적인 말씀은 어떻게 전달되었나(삼상 3:21)?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그 입술과 삶 속에 직접 드러내 보이심.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의 임재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는 것으로 대언하는 자나 듣는 자가 감각적인 확신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출처 : 갓피플

한나의 기도 속에 나타나셨던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삼상 2:1-10)?

인간의 행동을 일일이 살피시고(삼상 3절),
죽이기도 하시고(삼상 6절),
살리기도 하시며(삼상 7절),
가난하게도 하시고(삼상 7절),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시고(삼상 9절),
악인을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고(삼상 9절),
여호와의 대적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0절).

 
한나는 교만한 자에게 무어라 경고하는가(삼상 2:3)?

교만과 오만을 버리고 모든 지식의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고 가르침.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책하시고 벌하십니다(시119: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남으로 겸손한 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한나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삼상 2:6-9)?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세계를 그 위에 세우신 최고의 전능자로 고백함.
한 신앙은 말과 혀로써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삶의 깊이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은(삼상 2:1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과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
기름부음 받은 자는 구약에서 선지자요 신약에는 사도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협력자(고전3:9)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사람들로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라는 토대를 놓은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이 해야 하는 주요 임무는(삼상 2:11)?

제사 의식에서의 봉사와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 두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것임.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로서 스스로 산 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각자가 직접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범한 죄는(삼상 2:12-17)?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손상시키고 욕심대로 갈취하여 결과적으로 제사를 방해한 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반드시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아버지 엘리가 이들에 대한 신앙 교육을 소홀히한 비참한 결과입니다.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한 내용은(삼상 2:20)?

하나님 앞에 드린 사무엘 외에 후사를 주셔서 행복한 가정이 꾸며지기를 축복했음.
축복이란 풍성하고 건강한 미래를 약속하는 한편, 불행한 자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베푸는 것으로써(잠11:26)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을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득죄한 엘리 아들들의 행태가 주는 교훈은(삼상 2:22-25)?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칠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므로 결국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함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손상을 입히고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떼놓는 것으로써 자애로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배은망덕이라 할수 있습니다(사64:7).

 
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에 저주를 내리신 이유는(삼상 2:30-36)?

경건한 제사 제도를 유린하는 아들들의 행악과 그들을 다스리지 못한 엘리의 무능 때문.
하나님의 저주는 완고한 백성과 거짓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패역한 왕들에게 내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저주의 한 가운데에도 주의 햇살같은 소망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능력을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저주를 이긴다는 것입니다(롬12:14; 골3:13).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선별 기준은(삼상 2:35)?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살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견고한 집에 있을 것.
하나님은 우리 중에 사명자를 세우실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참된 터를 두고 끝까지 수난의 길을 걸으며 죽음까지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고난의 종을 부르십니다.

출처 : 갓피플

실로에서 엘가나가 드린 경배의 의미는(삼상 1:3)?

하나님께 대한 엘가나의 겸손과 사무엘의 출생을 준비토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
하나님은 모든 일에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도 신앙의 선조들의 기도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응답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엘가나에게 두 아내를 허락하신 이유는(삼상 1:2)?

첫 아내의 불임을 극복하려는 엘가나의 인위적인 방법을 잠시 묵인하셨기 때문.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불임의 극복은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만이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출23:26; 신7:14).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은 자식을 낳는 일만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덕을 생산해 내는 업적을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가 주는 교훈은(삼상 1:10, 11)?

온 몸과 온 심령을 다 바쳐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함.
인간이 살아갈때 순간순간 닥치는 고통을 기도함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간절한 탄원에 응답하시므로 믿는 자에게 희망을 주십니다(눅7:9).


한나의 기도 모습이 술에 취한 것으로 표현된 이유는(삼상 1:14)?

한나의 불임을 죄의 결과로 알았던 엘리가 한나의 읊조리는 기도를 불건전한 도취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렘5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교도와의 타협의 위험을 피하기위해 서로 포도주를 끊으라는 권고를 자주 했었기 때문에 엘리의 이와같은 충고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중보자의 사명은 무엇인가(삼상 1:17)?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요구와 죄의 심판과 약속을 전하는 것.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항상 중보자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며 인간들이 자신과 함께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새로운 계약의 중보자(히9:15)로 세우시어 우리를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이름이 뜻을 지니고 명명되는 까닭은(삼상 1:20)?

단순히 붙인 명칭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자가 이루어 놓는 역할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
구약 성경에서는 보통 출생때 갖게되는 이름이 그의 활동이나 장래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중간에 이름이 바뀌는데 이것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마음이 거듭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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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의 떠남'의 의미

1) 개인에게 하나님의 능력 공급이 중단됨
구약 시대 성령 사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즉 여호수아에게 지혜를(신34:9), 사사들에게 특별한 힘을(삿3:10; 삿6:34) 그리고 선지자들을 감동하사 말씀을 전할수 있게 한것(겔2:2; 느9:20)같이 사울에게도 성령께서 이스라엘 왕으로서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계속 공급하셨던 것이다(삼상11:6). 그런데 이와 같은 성령의 능력은 영구히 지속되지 않았다. 사울의 경우처럼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고 범죄하셨을 경우 하나님이 그 능력을 거두어 가신다. 이같은 사실은 삼손에게도 발견된다(삿16:20).

2) 신약 시대의 성령사역과 구별됨
구약 시대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조력하는 것이었으며, 개개인의 구원 서정과 관련된 활동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에 따라 어떤 개인에게 성령이 임했다가도 그 계획이 성취되면 언제든 떠나셨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성령은 각 성도들 안에 내주하셔서 그들의 보혜사로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며 능력을 공급하사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셨다. 그리고 한번 개인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성화(Sanc-tification)의 길로 인도하사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성령의 떠남은 개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된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개인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삼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표현이다.

2.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렸다고(삼상18:10)했다. 여기서 악신은 인간을 도덕적, 영적으로 악하게 만드는 사단의 영(evil spirit)을 가리킨다.

1)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
하나님이 직접 악한 신을 부리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신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단은 타락한 천사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천상에서 내어쫓김을 당하였다(계12:9). 그리고 할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며 인간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때문에 사단이 어떤 활동을 하고자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그 목적을 성취시킬 수 없다.

2) 사단의 활동을 묵인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 사단의 활동을 묵인하여 주시는가?
첫째, 타락한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때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다(롬1:28). 이럴때에 인간은 자신의 죄악된 본성에 따라 모든 불의를 추구하게 된다. 이때 사단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여 그가 속히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지도록 한다. 사울의 경우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사울이 다윗에 대한 극도의 시기심에 불타있을때, 악신이 역사하여 다윗을 살해하도록 살인 의지를 심어준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미성숙 상태에 있을때 그들을 연단하실 목적으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시기도 한다(삼하24; 욥1:6-12).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이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보여주시고, 스스로 그 시험에 빠지지 않고 말씀에 따른 선한 길로 나오게 하신다(고전10:13).

3. 히브리인의 인사법

1) mwlv(샬롬)
히브리인이 가장 즐겨쓰는 인사말은 '샬롬'이다. 이는 '평안, 번영'이란 뜻으로 단순히 사회적 관습에 따라 타인의 건강이나 안녕을 묻는 인사말 이상의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말은 상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기원하는 축복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창43:29; 삿6:12).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보다 깊은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평화를 믿음 안에서 누리도록 기원하는 축복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 것이다(마10:12, 13; 롬1:7; 갈1:3). 나아가 은혜와 평강이란 말도 신약에서 종종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 사실을 강조하는 인사말이다(롬5:1).

2) 그 밖의 인사법과 그 의미
① 땅에 엎드려 절함(창18:2; 42:6) : 웃 사람에 대한 존경, 문안.
② 목을 어긋맞기고 입맞춤(창33:4; 눅15:20) : 형제간 우애, 매우 반가움.
③ 몸을 껴안고 입맞춤(창29:13; 행20:37) : 감격적인 만남, 형제간 우애.
④ 발이나 땅에 입맞춤(시2:12; 눅7:45) : 경의와 복종.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6장부터는 사울과 다윗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대조를 이룬다. 사울은 점점 쇠퇴하고 다윗은 많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입지가 굳건히 되어 감을 볼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다윗과 사울을 비교하여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과 성취로 이어져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새로운 왕 다윗(삼상16-18장)
사울과 다윗은 대조된 모습으로 그들의 첫 만남을 시작한다. 이때에 사울은 악신이 들려 고통 가운데서 폐위된 상태였고, 다윗은 왕으로 지목되어 성신의 감동으로 평화로운 상태였다. 여기서 다윗의 등장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것과 어린 다윗이 믿음으로 골리앗을 이긴 사건과는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인류의 구원자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시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외모보다 중히 여기심으로(삼상16:7), 장차 나타날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성격을 계시하고 계신다(마1:1).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셨다(골2:12).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며 그의 통치는 압제와 귄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평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사26:1-7). 요나단은 다윗의 모습 속에 왕권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찾을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윗에게 관대함을 보일수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과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를 병고치는 의사나 물질을 부어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주님이시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지금도 우리 곁에서 영적인 힘을 제공하시는 분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한다면 객체나 주변인으로 살기보다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2. 다윗의 도주(삼상19-26장)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지목되었으며, 그분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올려 세우기보다 사울에 의해 잔혹한 추적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왕인 다윗이 받는 고난과 역경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삭막한 도주와 추적의 과정 속에서 요나단과의 눈물 어린 우정과 약속을 어떤 의미로 부여하고 있는 것인가? 25장에서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 나발과는 다르게 다윗을 후대하고 있는데 이런 아비가일의 태도는 과연 무엇 때문인가?

1) 다윗의 고난과 승리
다윗은 많은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서 실제로 편히 머리둘 곳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런 도주와 고난은 그가 왕으로서 다스릴 자신의 땅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마8:20)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은 십자가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영광이었다. 그는 갈채와 대관식을 치룬 왕이 아니시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백성을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이와 같이 다윗은 결국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의 역경 후에 승리를 얻게될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다윗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아비가일의 고백 속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삼상25:28).

2) 성도의 고난과 영광
모든 성도들은 뜨거운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기쁨을 안고 가는 디아스포라처럼 이 죄된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을 인내하고 약속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 많은 죄악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다윗을 통해 이런 교훈을 배워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고난받으신 후에 영광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도와주시면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삶은 슬픔과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인한 기쁨과 평화의 삶이다.

3. 버림과 회복(삼상27-31장)
사울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왕으로서 그들의 전부를 의탁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울을 죽게 하시고 다윗은 적군의 위치에 있게 하셨다. 과연 이런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며, 이런 사울과 다윗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는 어떤 분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통치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때 다윗은 땅에 대적으로 있었으며(삼상27장), 사울은 미약해져 마술의 힘을 의존하려 하였다(삼상28:3-25). 결국 하나님은 이런 사건과 사울의 죽음을 통해 인간 중심의 통치의 최후와 그들이 의지하던 자에게 당하는 좌절을 가르치고 계신다. 오직 백성을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통치가 사울의 종말과 연결되어 있듯이 예수그리스도의 통치 역시 창3:15의 말씀과 같이 사단의 패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단을 누르시고 그의 통치를 회복하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고, 사단의 세력은 영원한 불꽃에 던지워질 것이다(계 20-22장).

2) 우리의 통치자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성되지 않은 현실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울과 같은 통치자를 세우기에 분주하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마저도 입술의 고백과는 다르게 자기의 의지와 세상의 정욕을 그들의 통치자로 세우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명예를 위해서 윤리와 양심을 손쉽게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윗처럼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삶을 하나님이 지배하시도록 마음의 자리를 비워드려야 할 것이다.

사울의 통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대성과 개인적 이기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다윗의 등장은 이런 불순종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을 알리는 서곡으로 제시되었다. 아담에게 비롯된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은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불순종의 벽을 무너뜨리시고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 선포에 순종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이스라엘의 건기 기후

이스라엘에서 건기(健期)란 대개 4-9월경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밀을 추수하는 시기인 4월 중순에서 6월 중순경은 대단히 건조하여 팔레스틴 전역에 약간의 구름과 이슬이 있긴 하지만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이때가 이렇게 건조한 이유는 인도양으로부터 불어오는 계절풍 때문이다. 그런데 본래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계절풍에는 다량의 습기를 함유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으로 불어오는 계절풍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방을 거쳐서 구브로(Cyprus) 섬 쪽으로 지나가는 동안 습기를 다 잃어버리고 매우 건조한 바람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모래 먼지와 건조한 더위를 약 50일간 계속해서 몰고오기 때문에 이를 아라비아어로 '함신'이라 말한다.

2. 왕명을 범한 요나단

사무엘상 14장에는 단식 명령을 범한 요나단을 사울 왕이 처형하고자 했을때 하나님이 민의(民意)를 통해 막으신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요나단은 왕명을 범한 자로서 마땅히 응분의 징계를 받았어야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이 사울을 막으신 이유

1) 부지중(不知中)에 범죄한 자는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이 사실은 모세 율법에 잘 나타나 있다. 레5:1, 5, 6에 따르면 무심중(無心中)에 자신이 맹세한 것을 범하였을 때는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왕명을 부지중에 범하였다 할지라도 그 죄를 뉘우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왕의 권위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규정하고 있는 원리라면 왕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같은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왕으로서의 권위의식에 도취되어 부지중에 왕명을 어긴 요나단을 처형하려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 왕을 막으시고 요나단을 살려주신 것이다.

2) 통치자의 사악한 행위는 하나님이 막으신다
사울이 요나단을 처형하려 했던 것은 얼핏보기에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에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한번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으며(신23:22, 23; 시15:4), 사울은 그 율법에 따라 자기 맹세를 성실히 수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나단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죽으려고 했던 것이다(삼상14:43). 그러나 사울의 맹세나 단식 명령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울의 맹세로 단식령을 선포할 즈음에는 이미 요나단에 의해 블레셋이 거의 격퇴된 뒤였다. 그뿐 아니라 전쟁의 막바지로써 적을 추격해야할 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울은 전쟁의 공로를 혼자 독차지하기 위한 욕심으로 금식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삼상14:16-23).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블레셋을 끝까지 추격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말았고, 굶주린 백성들이 짐승을 피체로 잡아먹는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삼상14:32-34). 이처럼 사울은 자기의 권위를 자기 욕심에 따라 불의하게 사용하였을뿐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하고 심지어는 전쟁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요나단조차 죽이려 했다. 따라서 이같은 사울의 사악한 행위를 하나님이 민의를 통해 막으셨던 것이다.

4.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

1)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사
사무엘상 15장은 하나님이 제사 자체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제사를 요구하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제사라는 외적인 형식에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제사를 통해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라는 형식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임을 알수 있다. 즉 감사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깨끗한 마음을 원하신다(삼상15:22; 시50:14; 사1:16). 따라서 그러한 마음이 없을때 하나님은 결코 제사를 받지 아니하신다(렘6:22).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도 그들로부터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순종하는 것을 원하셨다(렘7:21-26).

2) 제사 형식의 중요성
제사에 있어서 제사의 내용, 즉 예배자의 순종하는 마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제사의 내용 못지않게 형식 또한 중요하다.
제사 형식의 중요성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과 만나는 교제의 통로로써 중요하다. 인간은 죄인이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제사 제도를 허락하셔서 그것을 통하여 죄씻음 받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둘째, 예표론적 의미에서 중요한데 구약 시대 제사 형식은 곧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용서를 받을수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게 되는가를 이해하게 해준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사울은 비록 실패한 통치자로 대표되고 있지만 왕으로서의 등극과 실패의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깨닫게 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사울과 베냐민 지파와의 관계, 사울의 삶의 태도 그리고 왕으로서의 직무 수행 모습으로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울의 통치(삼상9-11장)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 가장 미약한 지파였다(삼상9:21). 그런데 이런 지파 가운데서 왕을 선택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는가? 그리고 그런 연약한 지파 가운데서 선출된 사울과 그의 불순종과는 어떤 관계성을 갖고 있는가? 더욱이 사울은 삼상9:21에서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라는 겸손한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 고백과 빌3:8, 9에서의 바울의 고백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1) 작은 자를 통한 역사
베냐민 지파는 원래 호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창49:27). 그러나 삿20:46-48에 나오는 내전으로 약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미약한 지파 가운데서 왕을 선출하심으로 겸손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사울은 순종과 겸손의 자세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처음 겸손한 고백(삼상9:21)과는 상반적으로 교만한 모습으로 전환하여 인간의 모순적인 모습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다메섹 변화 이전에는 교만한 고백을 하였지만(행9:1) 후에는 자신을 가장 미약한 자로 고백하게 된다(빌3:8, 9). 하나님은 이런 바울을 당신의 적합한 일꾼으로 인정하셨다.

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위 사실들을 통해 교훈하는 바는 하나님은 세상의 강하고 지혜있는 자들을 사용하시기보다는 세상의 지혜에는 둔한 감각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겸손히 살아가는 자를 사용하신다(고전1:26-31)는 진리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 이 시대는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하는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다.

2. 사무엘의 설교(삼상12장)
사무엘상 12장은 사무엘의 고별 설교로써 사울 왕의 등극 기사와 실패 시작 기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면 저자는 이런 설교를 그 위치에 기록함으로써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6절에서 17절까지의 설교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임할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1)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
사무엘상 저자는 사무엘의 설교를 통해 왕정 체제의 의도가 인간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2인칭 인칭대명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데(삼상12:6-8), 특히 13절은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셨는데,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직접 깨닫지 못하고 징벌이 있은 이후에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본능적인 지식을 부여하시고, 특히 그의 백성에게는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확실히 계시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 속에 당신의 백성이 있다면 그들을 징계하시고 당신을 깨닫게 하신 후에 그의 상처를 치료하실 것이다(호6:1).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과 함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순수한 자세일 것이다(삼상12:20).

3. 버림받은 사울(삼상13-15장)
1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위급함을 본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림으로 왕위가 옮겨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삼상13:13, 14).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제사에 지각한 사무엘에게 더 큰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오히려 징계를 받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14장은 13장부터 시작되는 사울의 실패와 버림의 사건 가운데 용맹스런 왕자 요나단을 등장시킴으로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는 특이하게 베냐민 지파 사울의 집안에서 그것도 부자지간에 서로 다른 신앙이 제시되고 있다. 이런 대조를 통해 저자는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1) 사울의 불순종
사울은 모든 압제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잊고 인간적인 좌절에 빠져 제정분리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대상24:6)을 어기고 위기의식에 치우친 나머지 대신 제사를 드리는 잘못을 행하였다. 이것은 어떤 상황속에서 하나님보다 자신과 인본주의를 따르는 불순종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울의 불순종과는 상이하게 요나단의 확실한 신앙은 타락한 공동체 속에서도 경건한 신앙을 지켜가는 신앙인의 모습과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하고 있다.

2) 상황과 신앙
우리는 사울의 잘못된 행동은 쉽게 정죄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적용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 역시 사울과 같이 위급하고 두려운 상황에 처할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나의 이성과 경험을 통한 판단이 앞서게 된다. 만일 우리에게 두렵고 힘든 상황이 닥친다면 우리는 먼저 과거에 나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되새기고 그분이 하신 말씀에 굳건히 서서 언제나 함께하심에 확신을 가져야할 것이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좀더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성화되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대표자로서 당시 이스라엘 상태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과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우리의 실수와 과오를 발견하고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정도(正道)를 늘 확인하는 자세를 지녀야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모든 책임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부르셨으며 또한 우리에게도 순종의 삶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인식한 우리라면 그분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몸짓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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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 가문의 몰락

엘리는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으로서 제사 제도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던 혼란스러웠던 사사 시대에 공식적인 대제사장 가문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삼상1:3). 이러한 제사장 가문이 심한 부패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몰락하게 된 것이다. 엘리 가문의 몰락은 다음의 3단계로 이루어졌다.
① 제1단계 : 블레셋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이 크게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기던 때에 엘리와 그의 두아들 홈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엘리 자부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엘리의 뒤를 이어 형식적으로 그의 증손인 아히둡이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으나(삼상14:3), 실질적으로는 사무엘이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삼상2:35).
② 제2단계 : 사울 왕에 의한 85인 놉 제사장 학살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이 당시 학살된 제사장 아히멜렉은 이가봇(삼상4:21)의 아들, 즉 엘리의 증손자였다(삼상22:17-19).
③ 제3단계 : 솔로몬 왕 재위시 아비아달의 대제사장직 파면으로 이루어졌다(왕상2:27). 따라서 아비아달은 아론의 4남 이다말의 후손인 엘리 가문의 마지막 제사장이 되었고, 이후부터는 아론의 3남인 엘르아살 자손인 사독 가문만이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여 그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었다(출28:1; 민25:13).

2. 왕정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1) 왕정 요구 허락에 대한 오해
첫째, 이스라엘은 이전까지는 신정(神政) 체제였고, 하나님은 이같은 신정 체제만을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정 요구에 대한 허락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라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자유주의 학자들은 어차피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는 계시지 않았고, 단지 종교 특권 계급이 정치를 독점하다가 체제가 백성들에게 거부당하자 할수 없이 왕정 체제로 바꾸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어난 갈등을 이런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2) 왕정 요구 책망 이유
하나님은 결단코 형식에 얽매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신정 체제든 왕정 체제든 그 체제보다는 하나님을 제일로 생각하는 사고 방식을 원하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왕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악한 마음을 책망하셨다(삼상8:7). 그리고나서 왕정의 폐단을 충분히 일깨워준 후에(삼상8:11-18) 체제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일깨워주시기 위하여 백성들의 왕정 요구를 허락하신다.
그런데 이 당시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들 마음속에 있었던 죄악을 깨닫게 되었다(삼상12:6-25). 또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하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은 왕정 체제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가 있을때를 대비하여 왕정에 관한 율법을 주셨다(신17:14-20).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왕정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정을 충분히 수행하실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정도 결국 하나님을 대신한 대리 통치이기 때문에 신정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왕정을 요구할 때에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열방과 같은 인본주의적 왕정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된 것이다.

3. 블레셋 족속

1) 명칭
블레셋 또는 블레셋 사람이란 명칭은 그 어원을 셈어(semit-ic)에서 찾을수 없다. 다만 라메세스 3세 당시의 이집트 기록에서 그 어형을 찾을 수 있는데, 프르스트(prst)이다. 그것은 곧 라메세스 3세 통치 8년에 이집트를 침공했던 바다 백성(sea peoples)을 가리키던 말이다. 또 앗시리아 문헌에서도 찾을수 있는데, 해양 민족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ytvlp(필라스티)와 tvlp(팔루스투)이다. 아무튼 블레셋은 블레셋인들이 차지했던 가나안 서남부의 평야 지대, 곧 블레셋족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의 팔레스틴이란 지명도 이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2) 기원
블레셋 족속의 기원은 정확히 규명된 것은 없지만 성경은 갑돌(caphtor) 출신으로 언급하고 있다(렘47:4; 암9:7).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B. C. 1550-1200)말엽에 헷족속을 멸망시켰으며, 시리아 북부 연안 지방을 휩쓸어 버린데 이어 라메세스 3세 통치 기간중에 이집트를 공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의 사가들은 블레셋족의 원정을 B. C. 200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지중해 동부 연안과 유럽 남동부 지역의 민족 대이동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저지당하자 대규모로 팔레스틴 해안 지역으로 건너와 그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아브라함 당시(B. C. 2166-1991)부터 블레셋 족속이 팔레스틴에 거주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창21:32,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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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은 사무엘의 출생과 사역을 통해 다윗 왕국의 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상대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와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써의 다윗 왕국 사이에 사무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본 연구에서는 사무엘의 출생이 맞고있는 시대적 의미와 그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무엘의 등장(삼상1-3장)
성경에는 서두로 족보를 기록하는 책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역대기와 마태복음이다. 이처럼 책 서두에 족보나 출생 기사를 기록함은 그것이 그 책 전체에서 어떤 주제나 배경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무엘상의 사무엘 부친의 족보 기록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2장의 한나의 기도는 사무엘에 대한 감사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내용을 담고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기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3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세번씩이나 듣지 못하는 사무엘의 영적 둔함을 기록하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1) 사무엘을 통한 회복의 예고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대상6:33,34)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풍조 속에서도 성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집안이었다(삼상1:1-3). 그리고 이런 시대에 사무엘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해 한나는 찬양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삼상2:1-10). 그녀가 사무엘의 출생에 대한 감사보다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사무엘의 출생이 이스라엘 구원과 하나님의 영적 회복의 시대의 서곡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전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도래하며(삼상2:4, 9, 10),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복되는 세계이다(삼상2:6-8). 그리고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진 시대적 상황을 대제사장의 영적 둔함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국 사무엘이 그의 음성을 듣도록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될 것임을 예고하셨다(심상2:19-21).

2) 현대의 그루터기
거짓과 우상 숭배가 팽배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은 경건한 남은 자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뤄나가시듯이 오늘의 패역한 시대 속에서도 신실한 소수의 성도를 통해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신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부르심 앞에 우리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고 사무엘처럼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2. 사무엘의 통치(삼상4-7장)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던 법궤마저 빼앗기고 만다. 반대로 우상을 섬기던 블레셋은 대승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셨으며, 또 그 시대와 예수님 초기 시대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1) 회복의 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신 것은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법궤만을 중요시하는 형식적인 신앙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삼상4:3).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최초로 의지하던 법궤마저 버림으로써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음을 인식하게 되었다(삼상4:21, 22).
그러나 하나님은 법궤의 귀환과 더불어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하셨다(삼상6:10-17).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시고, 회개와 신앙의 결단을 하게 하셨다(삼상7:3, 4).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빼앗긴 땅을 블레셋으로부터 회복시키심으로 진정한 구원의 회복을 위한 모형을 제시하셨다(삼상7:12-17). 사무엘의 외침이 다윗 왕국을 위한 서언이라면 세례 요한의 외침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서곡이라 할수 있다(요1:29-33).

2) 형식과 순종
법궤를 신성시하고 형식에 매여 살면서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오늘의 성도들은 예배 의식을 신성시한 나머지 삶을 통해 봉사하는 덕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어떤 외형적인 것을 하나님 뜻보다 우선하고 하나님과 멀어질때는 하나님은 그것을 깨뜨리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실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의 경고를 통해서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우상들을 놓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자 결단해야할 것이다.

3. 왕정의 시작(삼상8장)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한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모세를 통해 그와 같은 약속을 하셨으며(신17:14-20), 사무엘의 아들들이 악을 행하였기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삼상8:1-3).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을 보시고 당신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는데, 이것은 신명기의 약속과 어긋나지 않는가?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합리한 요청이라면 하나님은 이것을 거절하셔야지 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기로 결심하셨는가?

1) 왕정 승낙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왕은 이방 나라의 왕과는 다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다윗 왕이며, 더 나아가서는 만유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는 통치자가 아닌 독립적인 판단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줄 왕, 즉 세속적인 기준의 왕을 요구한 것이다(삼상8: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세우시기로 한것은 그 왕으로 인해 고난당함으로써(삼상8:10-18),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심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다.

2)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상대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반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소원을 요청할 때가 있다. 이런 잘못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에 응답하시는 것과 같은 결과들을 종종 보게 된다. 예를들어 부정한 방법으로 물질을 얻었을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물질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가 의지하던 물질은 사라지게 된다. 결국 그는 하나님만이 변치않는 분임을 깨닫고 그에게 돌아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암담한 상황에서도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계시기에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제시함으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신다. 특별히 하나님은 사무엘처럼 '작은 자'들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를 두려워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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