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으로보는 성경 - 에스겔 ②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겠다고 선포하신다. 예루살렘이 음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 민족을 좇아간 예루살렘의 죄악은 창기의 음란함에 비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철저히 멸하실 뿐 아니라, 멸망 이후 아무도 이를 슬퍼할 이가 없는 형벌까지 내리신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에 이를 알린다.
심판받는 예루살렘(14:1~24:27)
예루살렘이 받을 중한 벌(14:1~23)
위기가 닥치자 이스라엘의 장로들, 즉 지도자들이 선지자를 찾아온다.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우상 같은 죄악의 걸림돌을 치우는 대신 손쉬운 해결책을 얻기 위해 선지자를 찾은 것이다. 여호와는 이들이 결국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거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불법을 행하는 나라에 네 가지 중한 벌, 즉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칼과 전염병을 내리실 것이고, 노아와 다니엘과 욥 같은 의인이 간구해도 이를 돌이킬 수 없다고 경고하신다. 하지만 네 가지 중한 벌이 예루살렘에 임해 사람과 짐승이 끊어질지라도 그 재앙을 피해 살아남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비유(15:1~17:24)
여호와는 선지자를 통해 예루살렘이 무엇과 같은지 말씀하신다. 첫째, 예루살렘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다(15장).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불 속에 던져 땔감으로나 쓸 뿐이다. 둘째, 예루살렘은 음녀와 같다(16장). 음란한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선지자의 언어는 낯이 붉어질 정도로 적나라하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순결한 처녀로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왕비 같던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길거리에 나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주었다. 아무하고나 자고, 화대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관계한 대가로 돈까지 내준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예루살렘이 거짓 신들에게 자신을 내주고, 하나님 대신 다른 나라들을 의지하며 그들과 동맹한 사실을 지적하는 비유다. 특히 애굽과의 동맹은 매우 부적절한 성관계로 비판된다(16:26). 하나님이 이처럼 거칠고 적나라한 언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백성이 이를 듣고 충격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악한지 깨닫기 원하셨다. 예루살렘이 받을 음행의 대가는 결국 죽음이다(16:40). 하지만 끔찍한 음녀 예루살렘에게도 소망은 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자기 죄를 직시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이다. 셋째, 예루살렘은 백향목에서 꺾인 가지가 옥토에 심겨 자라난 포도나무다(17장). 백향목은 다윗 왕가이고, 그 가지 끝은 여호야긴 왕이다. 백향목에서 가지를 잘라 낸 첫 번째 독수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다. 꺾인 가지에서 자라난 포도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이 보좌에 앉힌 시드기야 왕이다.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두 번째 독수리는 시드기야가 원조를 청한 애굽 왕이다. 그런데 두 번째 독수리는 포도나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풍, 즉 바벨론의 군대를 불러들여 포도나무를 완전히 말라 버리게 한다. 하지만 이 비유에도 소망의 여지가 있다. 하나님은 백향목 가지를 다시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실 것이다. 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된다. 이것은 바로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로,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왕을 상징한다(렘 23:5).
에스겔에 나오는 비유들
예루살렘의 죄악상(18:1~19:14)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오는 파멸을 경고한다. 그런데 이 파멸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이 불행은 부모의 죄 때문이고 자신들은 무고하게 대가를 치른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선포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죄를 범하는 영혼만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선지자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하나님이 기대하신다고 전한다.
한편 백성의 죄악에는 고관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고 성읍을 부수는 젊은 사자와 같다. 또 물가에 심겨 처음에는 무성했지만, 결국 뿌리가 뽑혀 마르고 불에 탈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다.
예루살렘 멸망 예언(20:1~24:27)
때는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7년(시드기야 왕 7년) 다섯째 달 열째 날이었다. 앞서 언급된 날짜(8:1)에서 열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장로들이 선지자에게 와서 여호와의 뜻을 묻는 것은 국난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도 사람들을 보내 바벨론 군대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물은 바 있다(렘 21:1~2). 선지자는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애굽을 나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모든 악을 행하고 스스로 미워하게 된다. 한편 선지자는 백성이 자신을 모호한 비유나 들어서 말하는 사람으로 조롱한다고 한탄한다(20:49). 선지자가 하나님 명령대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데도, 무지하고 완악한 백성은 선지자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대적들이 예루살렘에 행할 일을 상세히 말씀하신다. 특히 화살을 흔들거나 희생 제물의 간을 살피는 바벨론의 관습까지 내다보신다(21:21). 하나님은 바벨론 왕과 군대를 사용하셔서 예루살렘에 정의를 행하실 것이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이 이런 심판을 당하게 된 이유, 즉 그들의 죄악을 상세히 나열하신다. 특히 선지자와 제사장과 고관들의 죄가 크다.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성이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끝내 찾지 못하셨기에 결국 모두 위에 진노의 불을 쏟기로 하신다(22:30~31).
한편 예루살렘의 멸망은 행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는 것과 비슷하다. 선지자는 사마리아를 오홀라로, 예루살렘을 오홀리바로 부른다. 오홀라는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며 자신을 더럽혔고, 아우 오홀리바는 형보다 더한 음욕과 간음으로 앗수르 사람은 물론 애굽과 바벨론 사람과도 음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간통한 여인을 무리가 돌로 쳐 죽이는 것처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 드디어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9년 열째 달 열째 날,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둘러싼다(24:1; 왕하 25:1).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시며, 에스겔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하나는 양 한 마리를 잡아 가마에 넣고 무르도록 삶는 내용의 비유다. 양의 피는 땅에 묻는 대신 바위 위에 두시는데, 이는 그들이 무죄한 피를 흘렸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또 양의 고기와 국물과 뼈를 모두 태운 후 가마를 달궈서 그 놋을 소멸하려 하나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들의 죄가 그처럼 극악하다고 하신다.
이어서 하나님은 기뻐하는 것을 빼앗겨도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그날 저녁 에스겔의 아내가 죽지만, 그는 말씀의 표징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도 애도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곧 입을 열고 말하게 되리라 약속하신다.
에스겔이 보여 준 상징적 행위와 그 의미
출처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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