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요나의 불평 4:1-4

 

(1)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다투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요나가 니느웨백성들에게 단지 진노의 메시지만을 전했으며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나는 그들이 자비를 얻은 것을 싫어하였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이든 기뻐할수 있어야 하며 또 비록 설명할수 없다할지라도 묵묵히 따를수 있어야 한다. 그는 니느웨백성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에 대해 노할정도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었다. 요나가 견지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명예에 관한 문제였다. 우선 그는 자기 나라의 명예로인해서 질투하였다. 니느웨의 회개와 개혁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돌이키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회개한 이 이방사람들에게 베푸신 은총은 유대민족에게는 좋지못한 징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의 명예로인해 질투하였다. 즉 만일 니느웨가 사십일내에 멸망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거짓선지자로 여겨질 것이며 따라서 오명을 쓰게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과 다투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자 그는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말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2,3절).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것은 매우 섣부른 기도였다. 불만을 품게되자 그의 부패한 마음이 은혜를 누르고 고개를 쳐들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스스로 은혜를 얻기를 구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비로인해 다른사람이 은혜얻는 것을 불평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니느웨로 가도록 처음 명령을 받았을때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간 것에 대해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고국에 있을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즉 "만일 내가 니느웨에 가서 선포하게 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고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리라고 내가 미리 예견하지 않았나이까?" 자신의 사역이 성공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요나는 얼마나 이상한 부류의 인간인가! 모든 성도가 기쁨과 찬양의 제목으로 삼고있으니 매우 기묘한 일이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다"는, 하나님의 속성중 가장 영광된 것이 그의 불완전한 속성이기나 한듯이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감정에 못이겨서 죽기를 구했다(3절). 여호와여 원컨데 이제 내생명을 취하소서. "만일 니느웨를 살리고자 하신다면 주의 말씀과 내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느니, 또한 이스라엘의 영광이 이방사람들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 그는 마치 하나님께는 은혜가 충분치못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충족시킬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이와같이 말하였다. 그가 선한 목적을 위해 살아야할때 삶을 포기한채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이었다. 우리가 할일은 생명의 사역을 행함으로 기꺼이 죽을 준비를 갖추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취해 가시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그에게 내어맡기는 것이다.

(2) 이처럼 격분해 있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당연히 책망하신다(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온화하게 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보라. 이는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유순한 대답으로 분노를 식게하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네가 합당하냐?"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수 있어야 한다. 분노가 치밀때마다 이런 점검을 해보라. "그처럼 쉽사리, 그처럼 자주, 그처럼 오래 성내는 것이 합당한가? 그리고 내 자신을 격분가운데 내어둔채 홧김에 다른사람들에게 그런 욕설을 퍼붓는 것이 합당한가?"

 

Ⅱ. 박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4:5-11

 

요나는 여기서 자기의 불만을 고집하고 있다.

(1) 우리는 여기서 요나가 니느웨의 운명에 대해 부정적인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는 성밖으로 나가 혼자 앉아 잠잠히 있었다. 이는 니느웨백성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5절). 이제 사십일이 다 차고있거나 아니면 다찼을 것이다. 따라서 요나는 니느웨가 무너지기를 혹은 색다른 어떤 심판이 니느웨에 임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히 나무로 '초막을 지었다.'

(2) 이와같이 요나가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그의 피난처와 휴식처를 마련해 주셨다(6절). 요나는 그의 초막에 앉아서 밤의 냉기와 낮의 열기에 짜증을 내고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고집센 아이에게 하듯이 그를 측은히 보셨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박은 입이 넓은 식물로 갑자기 자라나서 그의 초막을 덮었다.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즉 육체의 원기를 회복시킴으로 마음의 곤고를 더 잘 극복케하기 위해서였다. 혹자는 기껏해야 박넝쿨은 미약한 그늘밖에 안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 박넝쿨이 바르게 사용되면 백향목보다 더 가치있게 될수가 있다. 조그만 장난감이 때때로 박넝쿨이 요나에게 했듯이 골난 어린아이를 달래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기위해서 준비하신 이 박넝쿨을 갑자기 없애셨으며, 따라서 그는 다시 괴로움을 겪게되었다(7,8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박넝쿨은 나자마자 그 다음날 시들어버렸다.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들도 이처럼 꽃과 같아서 생기자마자 곧 쇠하여진다. 작은 것이 그것을 시들게하였다. 즉 뿌리에 있는 작은 벌레가 큰 박넝쿨을 죽게한 것이다. 보이지않고 식별할수 없는 어떤것이 그 일을 행하였다. 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요나의 박넝쿨을 따게하지 않으시고 벌레를 보내셔서 그것을 씹게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박넝쿨의 필요를 절감하게 하시기위해서 바람을 준비하셨다(8절). 그것은 '뜨거운 동풍'으로써 태양의 열을 강하게 요나의 머리로 날려보냈다. 이와같이 가련한 요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에 드러나게 되었다.

(4) 이것은 요나로하여금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8절). "만일 박넝쿨을 죽게하실 것이라면 박넝쿨과 함께 나도 죽여주소서."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불평거리가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은 곧 드러날 것이며 가능하다면 치료도 될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그를 책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와 담론하셨다. 네가 이 박넝쿨로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9절). 하나님의 곤고케하시는 섭리가 우리에게서 친척, 재물, 즐거움이 되는 것들을 앗아간다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할수 있어야하며 하나님께 성내지 말아야한다. 즉 그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비교적 적은 손실, 다시말해서 그늘의 손실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히 우리의 불만을 잠잠케 해주는 것을 박넝쿨이 없어진다할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계시다는 사실이다.

(6) 요나는 유별나게 자신의 격노와 불만을 정당화시켰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9절). 감정이 격해지게 되면 양심마저 무시된채, 요나가 여기서 했듯이 잘못된 판단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 즉 짜증으로 자신이 죽게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7) 그는 니느웨를 구원한 것에 대해 불평하였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요나 자신의 입으로 그를 심판하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요나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바른정신을 되찾았으며 감정이 가라앉았으리라고 생각할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쟁론하셨다(10,11절).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즉 "너는 이 박넝쿨이 시들다니 얼마나 측은한가라고 하였도다. 그런데 내가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는가? 네가 아깝게 여기는 박넝쿨은 하나지만 내가 불쌍히 여기는 니느웨거민들은 무수하니라." 두살 이하의 아이들만 십이만 명이나 될정도로 니느웨는 인구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니느웨에는 죄를 짓지않은 자들이 아주 많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니느웨의 죄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니느웨가 무너진다면 그들 모두가 니느웨 전체의 재난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바라볼때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랴?" 하나님께서는 또한 니느웨에 많은 육축이 있음을 주목하였다. 동물의 생명이 식물보다는 훨씬 귀한 것이니만큼 요나가 박넝쿨을 아까와 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 육축들을 불쌍히 여기고 아까워할 이유가 더욱 많았다.

2) 요나가 관심을 가진 박넝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자라게 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니느웨사람들은 그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으신 자들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으며 따라서 그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이유가 더욱 많았다.

3) 요나가 아까워한 박넝쿨은 갑자기 자란 것으로 가치가 덜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밤에 나온 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니느웨는 오래된 성읍으로 오랜세대가 살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쉽사리 포기할수 없는 곳이었다.

4) 요나가 아까워한 박넝쿨은 '하룻밤에 망하였다.' 즉 그것은 시들었고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니느웨의 귀중한 영혼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한 영혼이 온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영혼이 많은 박넝쿨보다 더욱 귀한 것은 틀림없다. 이후에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며 전에 성냈던만큼이나 이제는 매우 기뻐하였을 것이다. 요나는 자신이 성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었으나 그것을 입증할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야함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셨다. 따라서 그 사실은 자비를 바라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 이와같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편협된 영혼과 원리를 가진 자들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자신들과 또한 자기들과 같은 길을 걷는 자들에게만 국한시키려하는지에 대하여 깨닫게될 것이다. 즉 만유가운데 한 주가 계시는데 그는 자기를 찾는 모든자에게 풍성히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만방에서, 즉 이스라엘에서 뿐만아니라 니느웨에서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들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될 것이다.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자는 하나님께 자비를 얻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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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나의 선포 3:1-4

 

(1) 요나에게 사명이 주어졌으며 그는 기꺼이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완전히 화해하셨다. 그에게 다시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그의 이전의 불순종을 사유하신다는 증거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1절). 그가 바다에 내던져지고 다시 그곳에서 나온뒤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오셔서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요나야 이제 니느웨로 가겠느냐?" 요나는 다시 신뢰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우리가 우리를 배반한 자를 대하듯이 말씀하실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법으로 처리하는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할지라도 우리는 다시는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그에게 임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실때는 모든 것을 잊으시며 그가 용서하시는 자를 다시 자기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전상태로 화목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는 것은 곧 그가 우리와 화목하다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된다. 요나는 하나님과 화해하였다. 즉 이제는 하늘이 보여준 것에 대해 피하려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순종하기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불평도, 쟁론도 하지 않았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3절).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아주 먼길이었고 또 추측컨대 전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이었으나 그는 곧바로 니느웨로 갔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여행길로 행했던 것이다.

(2) 그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니느웨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았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2절). 요나는 그 당시 이방세계의 중심도시였던 니느웨로 보냄을 받았다. 이는 이방의 어두운지역에 계시의 빛을 비추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소돔과 고모라, 두로와 시돈이 은혜의 방편을 갖기만 했었더라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계셨다(마 11:;21,23). 또한 하나님께서는 만일 니느웨가 은혜의 방편을 갖고있다면 그들이 회개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방편을 주기위하여 요나를 보내셨던 것이다. "가라, 가서 내가 네게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니느웨사람들에게, 그들의 악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보수하심이 그들위에 임하리라는 것을 말하라." 이것은 요나가 전하기 싫어하여 다시스로 도망쳤던 말씀이었다. 이제 두번째로 그 말씀을 대면함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위를 맞추거나 혹은 더 잘 전하게 하기위하여 그 말씀을 변개시키지 않으신다. 요나는 처음 선포하도록 명령받고 응하지 않았던 그 말씀을 선포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실 것이며, 그가 니느웨에 있게될때 예언의 영이 그에게 임하심으로 계속해서 지시를 주실 것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힘이 되었다. 요나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가야만 하였다. 때때로 제독들이 멀리 해외로 파견될때 바다로 아주 멀리 나가기까지 명령서를 개봉하지 못하곤했는데 요나도 그와 같이 니느웨로 가야만 했으며 거기에 도착한뒤 지시를 받게되었다.

(3) 요나는 신실하고 담대하게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가 니느웨에 갔을때 그는 그곳이 삼일 길이나 되는 극히 큰 성읍인 것을 알았다(3절). 히브리어로는 "하나님께 큰 성읍"이라는 뜻이므로 '극히 큰 성읍'이라는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니느웨의 광대함은 주로 그것의 규모에서 드러난다. 즉 니느웨는 바벨론성보다도 훨씬더 컸으며 디오도루스 시클루스가 "사람이 지은 것중 가장 큰 성읍"이라고 말할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성읍이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조금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지시대로 곧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요나가...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것이 그의 메시지의 목적이었다. 요나는 니느웨성읍이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즉각적인 강타에 의해서, 즉 지진이나 불에 의해서 또는 소돔처럼 유황불에 의해서 무너지리라는 것을 외쳤고 그들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고를 받은 그들이 겸비하게 되어 자신의 행위를 고침으로 경고된 멸망을 피할 것인지를 보시고자 오랫동안 기다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더 기다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사십일은 심판을 연기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오랜기간이나 회개하고 돌이켜야할 불의한 백성에게는 짧은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기한이 정해졌다는 것은 온갖 가능한 확증과 함께 그 경고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는 사실을 확신케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Ⅱ. 니느웨 성읍의 회개 3:5-10

 

(1) 여기에 임박한 멸망을 경고함으로 니느웨를 회개시키고 돌이키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나타나고 있다. '심판때에 니느웨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니느웨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회개하지 아니함과 완고함을 정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말과 행사에 능한' 것으로 알려진 많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다. 반면에 니느웨에는 단 한명을 보내셨다. 게다가 그는 낯선 사람이었으며 몰골이 초라했고 또한 긴여행 후인지라 육체도 약해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한 반면에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아니하였다. 요나는 단지 한말씀만을 전파했으며 어떤이적이나 표적을 행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를 한 반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완고하였다. 요나는 단지 진노와 멸망을 경고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그가 그들에게 만일 회개하게 되면 자비를 얻게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는 것을 찾아볼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이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를 계속 거부하였다. 니느웨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즉 그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에게 전파한 말씀을 신용하였다. 그들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한분 계시며, 자기들이 그분께 죄를 범했고, 임박한 멸망에 대해 그들에게 주어진 경고도 그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었다. 또한 그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만일 그들이 경고받은 죄에서 돌이킨다면 경고된 진노도 돌이켜지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 경고의 말을 자기들의 왕에게 전하였다. 어떤이들은 그 당시 니느웨왕이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였다고 생각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궁정에서가 아니라 니느웨의 거리에서 선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러나 니느웨왕에게 소식이 들어갔다. 공공의 평안을 혼란케하는 자로서 요나를 고소하는 그런 소식이 아니라 하늘의 메시지가 전하여졌다. 이는 공공의 안녕을 염려하는 이들에 의해 행해졌다. 왕은 겸비의 본을 보였다(6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때 '보좌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그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된 죄에 대한 근심과 수치때문이었다. 그는 제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조복을 벗었는데 이는 강포와 악행을 금하고 공의를 행하는데 자신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인해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자신의 보좌와 조복이 빼앗긴바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왕까지도 참회자의 의복을 입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왕이 굵은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니느웨백성이...무론대소하고 굵은베를 입은지라(5절). 육체적인 고행만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굵은베를 입고 재에 앉는다할지라도 그것이 전부이면 단지 장난에 불과하다(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마음이다. 사 58: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애통할 것과 굵은베로 허리를 동일 것을 요청하실때, 우리는 내적인 슬픔을 외적으로 표현함으로 최소한 장식물을 치우는 것으로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우리의 몸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 큰 성읍 전체를 통틀어 범국민적 금식이 행해졌다(7-9절). 정해진 날에는 '사람이 짐승이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아야' 했다. 더욱이 '물도 마시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곤고케해야 했는데 이는 죄에 대한 슬픔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매우 곤고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금식과 애통외에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하여야했다. 이는 금식은 육체로하여금 영혼이 기도하는 일을 돕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할때 우리는 견고한 믿음과 경건하고 헌신적인 열정으로 힘써 부르짖을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뿐 아니라 생활의 혁신과 변화를 가질수 있어야 한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그들은 부당하게 취한 것을 돌려주어야 했으며 그들의 악행을 보상하여야 했다. 죄때문에 금식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죄에서 떠나 금식할수 있어야만 한다. 이 금식은 선포되자마자 경건하게 지켜졌다(9절). 그들은 자기들이 회개하고 돌이킬경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 대하여 내리신 선고를 취하하실 것이라고 소망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때 온갖 선한 것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진노를 방지하는 기도를 할때 우리는 온갖 악한 것을 방지하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요나는 그들에게 소망을 가질것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가운데서 그런 것을 말해줄 선지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하신 성품을 가지고 계시며 인간에 대해 자비하시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사실로부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하여주시리라는 소망을 갖게되었다. 그들은 감히 단정을 짓지는 못하나 또한 절망하지도 않은 것이다.

(2) 여기에 회개하는 니느웨백성들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가 나타나고 있다(10절). 하나님이...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죄를 속하기위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린 따위에 대해 일절 찾아볼수가 없다. 하나님의 희생제물은 상한 심령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백성들과 같이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아니하신다. 그는 그러한 자들을 지지하시며 존귀히 여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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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의 기도 2:1-9

 

하나님과 그의 종 요나는 분노가운데서 결별했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요나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즉 그는 자기 직무를 피하고자 다른나라로 도망쳤던 것이다. 이제 화해가 하나님편에서 시작되고 있다. 앞장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을 보았다. 즉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를 구원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본장에서 우리는 요나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자기 직무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된다.

(1) 그가 기도한때(1,2절) : (그때) 요나가...기도하여 가로되(한글 개역에는 '그때'가 빠져있음-역주). 즉 고난중에 있을때 죄의식을 가지고 그는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심으로 구원의 소망을 품게 되었을때 그는 기도하였다.

(2) 그가 기도한 장소 : 물고기 뱃속에서. 어떤 장소든 기도하기에 적합치 않은 장소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 던지시든 우리는 하늘을 향해 길이 열려져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믿음으로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어디로가든 제단을 지니고 다니는 셈이다. 그 제단은 제물을 거룩케하며 자신은 산 성전이 된다. 사람들이 우리로 서로 교제하지 못하게 할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는 할수 없을 것이다. 요나는 현재 바다 밑바닥에 떨어졌으나 깊음중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3) 그가 기도한 대상 : 그 하나님 여호와께. 전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쳤으나 이제는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에게로 돌이키고 있는 것이다.

(4) 그의 기도의 내용 : 그는 곤경에 처했을때 하나님을 향한 자기 마음의 변화와 그리고 그의 흉중에 있었던 믿음과 죄의식, 소망과 두려움간의 갈등에 대해 회고를 하고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그리고 그 부르짖음은 헛되지 않았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즉 그의 환난중의 소리를 들으셨다. 그는 지금 얼마나 낮은 곳까지 떨어진 것인가(3절).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가운데 던지셨으므로. 실제로는 선원들이 그를 던졌으나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를 그곳으로 던지신 것으로 보았다. 그는 매우 두려운 상황에 떨어졌다. 큰 물이 나를 둘렀고. 바다의 해협과 물의 근원이 사방에서 그를 둘렀다. 즉 그에게 있어서 바다는 항상 만조였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이 말은 요나가 시편 42:7절을 인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원문에는 시편의 다윗의 간구와 문자적으로 같다. 요나의 경우처럼 어떤 사람의 처지가 유례없을만큼 기막힌 가운데 처하게될 경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조차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내 위에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될때 큰 위로가 된다. 우리가 걷는 환난의 길이 전인미답의 길은 아니다. 5절 말씀 역시 같은 의도로 기록된 것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이것도 또한 시편 69:1절의 다윗의 호소에서 인용해온 것이다.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그는 매우 단단히 붙잡혔다(6절).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즉 영원히 그를 막는것 같았다. 그는 절망가운데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물이 그를 영혼까지 둘렀을때, 그의 영혼이 그의 속에서 피곤케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못된다. 그 자신의 행위가 가져다준 환난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소망을 품을수 있겠는가? 그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말하였다.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처지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을 보지못할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불신앙에서 연유된 추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에서 회복하여 위로가 될만한 구원의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믿음은 두려움과 불신의 추측을 통제하며 바로잡아 준다. 죄의식과 믿음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으나 믿음이 마지막을 장식하였으며 승리자로 나타났다. 요나의 믿음은 그로하여금 '내가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리라'고 말하게 하였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회복에 대해서 확신하기를 원했을때 그는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뇨'(사 38:22)라고 물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유일한 이유인양 그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요나도 여기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시 성전을 보게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 요나는 매우 겸손하게 말하였다.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에 대해서 깨달은 자답게 그는 감히 하나님의 전에 거할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허락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은 고난가운데서 요나가 한 서원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서원한 것을 갚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9절). 하나님께서 그를 추적하신 죄명은 '여호와의 낯을 피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다시는 다시스를 바라보지 않을 것이며 다시금 성전을 바라보며 힘에 힘을 얻어 하나님앞에 나아갈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피곤할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생각할때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를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을 구하고 의지했을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총을 기억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은혜롭게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7절). 비록 그 기도는 가장 낮은 깊음속에서 한 것이지만 가장 높은 하늘에 상달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셨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절). 어떤이들은 그가 육지에 토해졌을때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즉 구덩이의 빗장에서부터 건지셨나이다."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그가 물고기 뱃속에 있을때 믿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추측할수도 있다. 즉 "주께서는 구덩이에서도 나를 살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는 구덩이에서 내 생명을 건지실수도 있으시며 또 건지실 것이니이다." 따라서 그는 마치 그것이 이미 되어진 일인양 굉장한 자신을 가지고 그 사실을 말하고있는 것이다. 주께서 내 생명을 건지셨나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이 되실 것이며 우리의 생명을 멸망에서, 즉 무덤의 권세에서 구속하실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것을 권고하고 있다(8절).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이방의 선원들이 했던 것처럼 구원과 위로를 기대하고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린' 자들이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복에 대해 등을 돌려대는 자들인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한 요나처럼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자들 역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자기의 직무를 제대로 행하기만 하면 받게될 은혜를 버린 자들이다.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면 그의 은혜의 하나님은 찬송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을 자신의 영혼으로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다(9절). 요나는 감사의 희생과 함께 여호와의 자비하심을 말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 영광을 돌림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반드시 자기의 서원한 것을 이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아마도 그의 서원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다면 비록 니느웨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시는 곳을 기꺼이 가겠노라는 것이었을듯 싶다. 그는 하나님을 그 백성의 구원자로 인정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시 3:8). 요나의 경험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도록 사람들을 격려하여줄 것이다.

 

Ⅱ.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 냄 2:10

 

요나가 갇힌 곳에서 풀려나고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은 고통가운데서 기도하는 불쌍한 참회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한 본보기로 간주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영원히 그와 다투지않으실 것이다. 그의 풀려남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표이자 상징인듯이 보인다. 그는 우리의 죄가 일으킨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자 죽으셨으며 장사지낸바 되셨다. 그리고 요나처럼 우리의 빚때문에 죄수가 되셔서 밤낮 사흘을 무덤에 계셨다. 그러나 그는 널리 이방인에게까지 회개와 죄의 사유를 선포하기 위하여 사흘만에 무덤에서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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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여호와의 명령과 요나의 도망 1:1-3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곳을 치는 예언을 하라고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요나에게 영예로운 것이었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를 뜻하는 것으로 비둘기처럼 순전해야할 뿐만아니라 그땅의 죄와 재난에 대해 슬피울어야 하는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적합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나의 진리"란 뜻의 '아밋대'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진리의 아들이어야 하기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제 명령이 내려졌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2절).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다(창 10:11). 이 성읍은 '저 큰 성읍'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거민의 수효에 있어서나 세력과 지배력에 있어서도 큰 성을 의미한다. 그 성읍은 한때는 세상의 군왕들을 다스렸던 곳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큰 성읍들 역시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다. 니느웨는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도 섬기지도 않는 이방 성읍이었다. 게다가 이 큰 성읍은 악한 성읍이었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그들은 강포함으로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요나는 '그것을 쳐서 외쳐야' 했다. 즉 그는 그들의 큰 악독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것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여야 했다. "주저하지 말고 크게 외치라." 그는 속삭이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거리 한복판에서 크게 공포하여야 했다. 즉 들을 귀있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악독한 성읍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해야 했다. 그는 니느웨로 가서 즉시 그곳의 악함을 쳐서 외쳐야 했다. 다른 선지자들은 인접한 나라들에 대해 메시지를 보내도록 지시받았으나 요나는 자신이 직접가서 메시지를 전하여야 했다. 요나는 가기를 거절함으로 하나님께 욕되게 행하였다(3절). 요나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일어나 다시스로,' 즉 바다로 '도망하였다.' 이는 어느 항구를 목적지로 삼아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혈과 육'을 따라 생각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특권을 잃지않으려고 그 사명을 거절하였다. 즉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 사명을 싫어한 것은 니느웨가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을 알았기때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욘 4:2). 이것이 오랫동안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치욕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찾기위해 이스라엘의 유명한 항구인 욥바로 갔다. 거기서 그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도망할 기회를 주는듯이 보였다. 길이 주어졌다고해서 항상 바른 길은 아니다.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으며 그곳으로 항해를 하게 되었다. 그는 배삯을 주고 선원들, 여행자들, 상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함께 다시스로 가는 자라면 누구든지 그는 개의치 않았다. 요나는 자신의 의무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통도 잊어버린채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Ⅱ. 폭풍을 만남 1:4-10

 

(1) 하나님께서는 추적자를 보내셨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4절). 이 바람의 결과로 바다가운데 폭풍이 일게 되었다. 그 폭풍은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될 정도로 불어닥쳤다. 이 바람은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기의 의무로 다시 돌이키게 하기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폭풍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우리가 곁길로 빠질때 다시 돌이키도록 하시는 것은 큰 자비라고 할 수 있다.

(2) 그 배에 탄 자들은 모두 이 폭풍으로인해 놀랐으나 요나만은 무관심하였다(5절). 선원들은 두려워하였다. 직업상 그들은 이런 류의 위험쯤은 가볍게 여기곤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중 가장 경험많고, 용기있는 자들조차 두려워 떨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 폭풍은 보통 폭풍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아주 갑자기 일어났으며 또 너무 사납게 불어왔던 것이다.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기 전에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신에게 도움을 청한뒤에 자기들이 할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비슷한 경우가 사도행전 27:18,19,38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요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분주했을 것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는 배밑층에 내려가서 거기 누워 깊이 잠이 들었다. 외부의 어떤 소음도 내면의 어떤 죄의식도 그를 깨우지 못했다.

(3) 배의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다(6절).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선장은 그에게 모욕을 주며 일어나 살려달라고 구하든지 죽을준비를 하든지 하라고 명하였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그 배의 선장을 칭찬하는 반면 이러한 책망을 들은 요나를 측은히 여기게 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지켰다면 그는 니느웨의 왕을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직무로부터 이탈하게 되자 그는 한 보잘것없는 선장에게서 도리어 책망을 듣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그로하여금 이렇게 합당한 책망을 받게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베드로를 깨우친 닭울음 소리처럼 회복의 첫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우리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의 신께 부르짖고 있는 이 마당에 너는 어찌하여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느냐?"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들이 부른 많은 신들은 그들에게 있어 단지 그들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간의 중재자로 여겨졌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선장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로부터 구원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4) 요나로인해 이 폭풍이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선원들은 이 폭풍이 매우 특이하며 범상치않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 폭풍이 배에 타고있는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을 삼키기위해 신이 보내신 공의의 사자이며, 그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참조. 행 28:4).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보자.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였으며 따라서 제비를 뽑아 그 사람을 찾기에까지 이르렀다. 즉 선원들은 그 배에서 마땅히 죽을 자가 누구인가를 알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그 한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게 함으로써 그 배 전체를 잃지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을 위해서 그들은 제비를 뽑았으며 그렇게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였다.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만일 그가 미리 양심껏 자신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했더라면 그들을 이러한 곤경에서 구할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배안에 요나보다 훨씬더 악한 죄인들이 많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이 추적한 대상은 바로 그였다. 폭풍은 요나를 좇도록 보냄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실 일이 있으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데려오도록 푹풍을 보내셨던 것이다. 요나는 선장과 선원들앞에서 심문을 받게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있어 낯선 자였다. 따라서 그들중 아무도 그를 고소할만한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로부터 자백을 얻어내어 그 입에 나오는 것으로 심판할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거칠게 공격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사정을 조사하였다. 범죄한 자가 발각되고 정죄받게될때 동정심이 발동되는 법이다. 이 재앙이 무슨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8절). "참으로 이 재앙이 너때문이냐? 너는 무슨 죄로 이와같은 기소를 당하고 있는 것이냐?" 그들은 그의 직업을 물었다.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답변하는 가운데 요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히브리사람'이라고 말하였다(9절).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더욱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히브리사람의 죄는 더욱더 큰 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였다. 이는 그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나는...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즉 "바다와 육지를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하늘의 하나님,' 또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내가 경배하는 하나님이시라." 그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즉 자신이 자신의 직무로부터 도망하여 이곳에 있고 그로인해서 폭풍이 자기를 데려가고자 불어닥친 것임을 인정하였다.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라고 경배한 자가 특정한 직무에서 이탈한 것으로인해 격노하신 것을 본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의 선지자가 한번의 범죄로인해 이처럼 혹독한 벌을 받고있는 것이라면 크고 악한 죄를 그토록 많이 저지른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너는 어찌하여 우리까지 이러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였느냐?"

 

Ⅲ. 요나를 바다에 던짐 1:11-17

 

무엇인가가 단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바다가 점점 흉용하여졌기' 때문이다(11절).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13절).

(1) 그들은 요나에게 그들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에 대해 물었다(11절). 그는 범죄자로 나타나지만 반면에 참회자로도 나타나고 있다. 만일 그가 배를 구할 방도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를 바다에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2) 요나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12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것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가 할수 있는 말이다. 진정회개하는 자는 자신의 죄나 어리석음으로인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요나는 즉시 모든 죄를 한몸에 짊어지며 참된 회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그 환난을 바라보았다. "만일 폭풍이 일어난 것이 나때문이라면 바다에 물건을 던져봐야 아무소용이 없으리라. 너희는 나를 던져야할지라." 양심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폭풍이 일어났을때 그 혼란을 야기시킨 죄와 결별하는 것외에 달리 그것을 잔잔케할 방도가 없다.

(3) 가련한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썼으나 결국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13절).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만일 그들이 요나와 필히 결별해야만 한다면 그를 안전하게 해안에 내려놓고자 하였던 것이다. 능히 못한지라.

(4) 그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때 그들이 먼저 하나님께 구한 것은 그의 피를 자기들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14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는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요나가 그들에게 알게해준 사실을 통해서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여...이 사람의 생명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5) 이와같이 간구하고나서 그들은 요나를 던졌다(15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만일 요나의 죄처럼 폭풍을 일으키는 죄가 있다면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빠뜨려야만 한다. 그렇지않으면 그것이 우리를 빠뜨릴 것이다.

(6)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마자 폭풍은 즉시 그쳤다. 만일 우리가 죄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의 노를 푸실 것이다.

(7) 이로써 선원들은 요나의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믿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16절). 그 증거로 그들은 이스라엘땅에 다시 이르게 되었을때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당장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겠노라는 서원을 하였다.

(8) 요나는 기적적으로 살게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중에서라도 자비를 기억하신다. 비록 그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보수하시는 손가운데 떨어진듯이 보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하실 일이 있으셨기에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17절). 그것은 가장 큰 종류의 고래로서 목구멍이 다른 물고기보다 더 크며 때때로 그 뱃속에서는 갑주를 입은 사람의 시체가 발견되곤 하였다. 요나가 죽지않은 것은 여호와의 자비의 결과였다. 요나가 보호받은 것은 다음 몇가지를 위해서였다.

1) 하나님의 자비의 기념물이 되기 위해서였다.

2) 니느웨에 성공적인 전파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3)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는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던 것이다(고전 5:14). 왜냐하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 12:40). 요나의 무덤이 낯선 무덤, 새 무덤이었는가? 그리스도의 무덤도 그러하였다. 즉 그의 무덤은 사람이 전에 장사되지 아니한 무덤이었다. 거기서 요나는 밤낮 사흘을 있었는가?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이는 둘다 다시 일어나 이방세계에 회개의 선포를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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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1절)
인류 구원을 바라시는 간절한 마음 - 요나는 니느웨 구원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조처에 불만을 품고 하나님과 쟁론을 벌이며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탄원하기까지 했다. 이에 하나님은 하찮은 '박 넝쿨'의 가치를 인식시킴으로 영혼 구원의 정당성을 주장하셨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이를 인식한 인격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에 대해 잠잠히 기다리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경륜을 찬미해야 할 것이다(시 37:7; 애 3:26).
[1절]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치 않고 용서해 주신 사실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분개하기까지 했다. 그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니느웨의 멸망을 바란 그의 편협한 성격 탓이었다. 그는 40일 후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는데(3:4) 그것이 거짓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의 체면과 자존심이 크게 실추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요나는 니느웨 성읍이 구원받은 기쁜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선지자적 위신만을 생각하며 극한 분노를 터뜨렸다.
[2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과 고난의 체험을 통해(1, 2장)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이해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처사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염두에 두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심의 발로였다. 여기서 참 신앙은 전인격으로 표출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약 2:26).
[4절]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죽여달라고 간청한 요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문적 답변이다. 즉 이 말속에는 니느웨가 용서받은 사실에 대해 그가 분개하는 것은 편협된 국수주의 또는 선민 의식에서 나온것으로 옳지 못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자비심이 결여된 기도(잠 21:13)나 정욕에 따라 구하는 기도(약 4:3)는 응답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
[5절]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니느웨가 멸망되기만을 학수 고대하였다. 이처럼 요나는 하나님의 책망마저 망각한 채 니느웨의 멸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을 자행했다. 이는 그의 완고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할 정도로 영적 지각력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그는 수만의 생명보다 자기 의지의 실현을 더 중시했던 이기적인 신앙인이었다.
[6절]
박 넝쿨. 하나님께서는 이 넝쿨 식물 위에 역사하셔서 요나가 뜨거운 햇빛을 받아 탈진하지 않도록 넝쿨을 무성하게 급성장시키셨다. 결국 요나가 소유한 평안과 휴식은 모두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박 넝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없이는 인간이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공의대로 인간을 다스리셨다면 니느웨 주민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요나가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11절)
박 넝쿨의 비유 -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다가 하루 만에 시들게 해버렸는데 그 이유는 요나가 더위를 피하게 해준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안락만을 기뻐했기 때문이며, 니느웨의 수많은 백성들과 육축들이 박 넝쿨보다 더욱 귀하다(11절)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8절]
뜨거운 동풍. 소위 쉬로코(Sirocco)라고 불리는 이 바람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서 일사병을 유발하는 매섭고도 타는 듯한 열기를 지니고 있다. 이 바람은 농작물에 극심한 피해를 준다.
[9절]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신 이유를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 항거하는 불손을 저지르고 있다. 즉 그는 박 넝쿨을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뜨거운 열기로 인한 고통에만 집착하여 불평을 쏟아 놓았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강퍅한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는 그의 마음이 온통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11절]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이는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나 영적으로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영적 미숙아를 지칭한다. 한편 평균적인 인구 비율를 감안해 볼 때 니느웨의 인구는 어린아이의 다섯 배 정도, 곧 60여 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나는 이렇게 많은 생명의 멸망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해설
박 넝쿨의 교훈 (6~11절)
전날 소명을 저버린 요나에게 하나님은 대자연을 동원하여 엄정한 재판장으로서 나타나셨다. 그러나 이제 종교적 편견에 빠져 불평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 넝쿨을 소재로 실물 교육을 시키는 자애로운 부모와 교사로서 나타나신다. 결국 이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사역의 보편성 및 우주성이 인간의 왜소한 편협심과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 핵심

1~11절

니느웨에 대한 편견과 미움을 가진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 넝쿨, 벌레, 태양과 동풍 등 자연적인 상황의 변화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베푸셨다.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그러한 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하신 것이다.

 

# 묵상

요나의 불평 (1~4절)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나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배타적이고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닌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박넝쿨의 교훈 (5~11절)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신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요나에게 박넝쿨로 중요한 교훈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귀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합당함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전 우주에 미치며,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교훈을 통해 만민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계시하시고, 인본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 자세를 꾸짖고 계십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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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0절)
순종하는 요나 - 하나님은 죄를 경멸하시지만 회개한 죄인에 대해서는 새로운 관계 형성과 은혜 베푸심을 주저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요나는 이방 선교의 사명을 재차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편협한 신앙과 사고의 틀에 얽매여 있던 그로서는 그 일을 기꺼이 수행할 수 없었다(1:3). 그래서 그는 니느웨 백성을 향하여 회개에 대한 촉구보다 심판의 임박성을 더 강조하였다(4절). 하지만 그의 심판 경고는 조건부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즉 그 심판의 실행 여부는 메시지를 접한 니느웨 백성들의 반응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이나 출신 지역에 따라 선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를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사는 자는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두기 위해서 본서가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소개함으로써 니느웨 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요나의 선포로 말미암아 니느웨에서는 회개 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니느웨는 비록 악과 불의가 난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성읍이었다(렘 25:9). 결국 하나님은 이들의 회개를 보시고 그들 위에 예비해 두셨던 재앙을 거두어 가셨다(10절). 이는 인간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강력히 나타내 보인 조처였다(눅 15:18~24).
[1절]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처음 요나에게 내렸던 명령(1:2)과 동일한 내용의 사명을 재차 부여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의 범죄로 당신의 계획이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4절]
사십 일.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흔히 위험을 상징하는 경우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창 7:4, 12; 마4:2)<계 서론,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상징적 의미>.
[5절]
하나님을 믿고. 요나가 선포한 회개의 촉구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곳에는 변화와 생명력 넘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살전 2:13). 금식과 굵은 베의 착용은 니느웨 사람들이 신실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회개했음을 나타낸다(왕상21:27; 욜 1:13, 14).
[6절]
재에 앉으니라. 겸손한 자세를 상징하는 행동으로서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욥 2:8; 미 1:10).
[7~8절]
거국적인 회개 운동을 다루고 있는 니느웨 왕의 조서에는 백성들 뿐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회개에 동참하라는 내용이 선포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동물들이 회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왕의 회개 의지가 강렬했음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 그런데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지극히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짐승들에게도 베옷을 입히고 먹이를 주지 않았던 풍습이 실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0절]
하나님이...뜻을 돌이키사.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며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다(요 12:47). 즉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해 심판보다는 회개를 통한 관계 회복을 더 원하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니느웨 성읍에 대한 멸망 계획을 완전히 취소하셨다.

# 해설
요나의 두 번째 사명 (1~2절)
회개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동일한 사명을 부여하신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개인 요나에 대한, 간접적으로는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확연히 드러내는 말씀이다(사 42:6; 사 49:6).
요나의 사역과 니느웨의 회개 (3~9절)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니느웨로 간 요나는 심판의 예언을 선포했고(3, 4절), 니느웨는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 준다(5~9절). 본문은 이방 선교의 가능성을 열어 줌과 아울러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데 반해 이스라엘 자신은 도무지 회개하지 않음을 비교, 대조시킨다(느 9:26, 30).
재앙 철회와 요나의 불평 (3:10~4:5)
1, 2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지시적으로만 알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방 니느웨에 대해 임박한 재앙 선포에 더 주목했던 것이다(4절). 즉,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것은 의무감 때문이었지 자발적 헌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편협한 국수주의를 버리지 못한 채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인본주의적 불평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에 비하여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 동기에서 행동하는지를 새삼 발견한다.

# 핵심
1~10절
영적으로 회복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니느웨 백성에게 전했으며,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의 회개를 들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셨다.

# 묵상
성도의자세 (1~4절)
요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다시 니느웨로 가서 그의 명령을 니느웨 백성들에게 선포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명하신바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도들은 즉각 순종해야 하고(삼상 3:10),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히 11:8~10). 또한 자신을 불러주심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골 3:15), 부르심을 받은 대로 행해야 하고(고전 7:17), 부르신 이에게 충성해야 합니다(고전 4:2).
요나의 선포에 대한 니느웨의 반응 (3~10절)

요나가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을 때 왕과 백성은 두려움에 떨었고 니느웨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역사는 아무리 강포하고 호전적인 사람들일지라도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이 회개와 구원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지적하고 복음의 우주성과 구원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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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절]
물고기 뱃속은 '음부'에 해당하는 스올의 뱃속에 비유될 정도로 절망과 고통의 장소였다. 즉 이같은 비유는 요나가 지옥이나 무덤 속같이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요나는 악조건 속에서도 절망치 않고 기도를 드렸는데, 이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징벌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고난의 원인을 아는 것이야말로 고난을 해결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4절]
주의 목전.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특히 그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한 것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중에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혜를 믿고 있다는 신앙적 절규이다(왕상 8:29; 시 42:2~5).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야말로 죽음과 고통 아래 거하는 자들에게 힘을 준다(사 40:31).
[5절]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물 속에 빠져 급기야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살아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이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즉시 물고기에게 삼켜진 것이 아니라 먼저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해조류에 엉켜 질식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지경에까지 버려 두신 것은 요나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무능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자들의 첫 관문이다(눅 5:8).
[6절]
셈족의 문화권에서 구덩이는 통상 죽은 자의 영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완전히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7절]
피곤할 때는 문자적으로 '덮였을 때', '압도되었을 때'(시 142:3; 시 143:4)라는 의미로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탈진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들은 '달음박질하여도...피곤치 아니할' 새 힘을 공급받게 되며(사 40:31), 영혼의 소생(시 23:3)과 함께 구원의 능력을 얻게 된다.
[8절]
거짓 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우상 숭배자를,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버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원이시며 지고(至高)의 선이시라는 진리를 거부한 채 우상을 섬기며 그것들로부터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해 헛되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렘 2:5, 13).
[9절]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10절]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동안 살아 있었던 일이나 물고기가 요나를 뭍으로 뱉어낸 사건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규명되지 않는 실로 초자연적인 이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현상이다. 결국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 핵심
1~10절
불순종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통해 헌신과 결단을 다짐하는 대목이다.

# 묵상
회개 기도를 통한 요나의 결단 (1~10절)
물고기 뱃속에서 그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며 소명을 감당할 것을 결단했습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결단을 통하여, 인간의 불순종과 실패까지도 선하게 사용하시어 자신이 계획하신 것을 결국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회개하게 되는 동기는 다양합니다. 우리는 요나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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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6절)
선지자의 사명 -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된 계시를 온전히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선지자의 인격은 하나님의 손에 전폭적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의 전 삶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선지자 요나는 이러한 선지자적 사명을 무시하고 이방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 선민 의식에 의해 이방을 배격하고 멸시했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요나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인류 전체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허물은 가리워질 수 없었다. 당신의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시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요나의 도피를 차단하셨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뜻을 포기하시지 않는다(롬 8:31~39).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편견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를 구원하기 원하신다(요 3:16). 인간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없으며 또한 하나님을 등진 자의 거처는 결코 안식처가 될 수 없다(시 139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신다(막 4:39~41). 모든 재난의 궁극적 해결 방법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시 73:28).
[1절]
여호와의 말씀이...임하니라. 이러한 표현은 선지들에 의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진 형식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 과정과 그들의 소명을 나타내 주고 있다(호 1:1; 욜 1:1; 미 1:1; 학 1:1; 슥 1:1).
[2절]
큰 성읍 니느웨. 앗수르의 수도(왕하 19:36).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니느웨에 우상 숭배를 비롯하여 궤휼, 강포, 늑탈(나 3:1), 극도의 이기심(습 2:15), 전쟁과 약탈, 냉정하고 비정한 인간성 등이 만연하여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죄악에도 깊이 관여하셔서 그들의 타락을 중지시키시고 범죄한 영혼들에게 당신의 살아 계심과 만유의 주 되심을 깨우치신다(창 6:11~13; 창 18:20, 21).
[3절]
다시스, 욥바. 지중해 연안의 도시(대하 9:21).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이는 요나의 잘못된 성령관을 단적으로 지적해 주는 말로서 그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이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갔던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낯'(히, 페네이 예호와)이란 하나님의 인격 내지는 임재 또는 그분이 임재하셔서 통치하는 장소 등을 의미하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창 4:14; 시 104:29). 이스라엘 내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핵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결국 이 말은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시적인 공간을 초월하실 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정신 세계에까지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고 계신다(시 139:7~16). 한편 하나님께서는 특정인에게 당신의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명과 더불어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공급하신다(수 3:7~17).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설사 감당키 어려운 사명을 주실지라도 결코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의 의사를 행동화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악한 생각은 반드시 그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으며(창 4:5~8) 그런 이유에서 인간이 품고 있는 내면의 죄는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 5:27~32). 한편 요나가 하나님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지 못한 것은 그 임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 이방인의 회개를 통해 초래하게 될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의 특권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매우 편협한 국수주의(Ultra-nationalism)와 그릇된 신앙관에 얽매인 행동이었다(4:2). 만약 요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데(벧전 2:9) 목적이 있음을 알았더라면 이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내에 현존하고 있는 분파 의식과 특권 의식은 바로 이같은 편협한 신앙관 때문에 조성된 경우가 허다하다(고전 3:3~9).
[4절]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시는데(시 19:1~6), 이를 가리켜 일반 계시라 한다. 대풍은 요나의 죄악을 꾸짖고 바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라 할 수 있다(시 135:7).
[5절]
배 밑층에...잠이 든지라. 죄를 지음으로써(3절)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요나는 육체적인 피로까지 겹쳐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죽음과 같은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그의 잠은 휴식이 아니라 절망과 고통으로 인한 허탈과 자기 포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영적인 무감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전인격적인 허탈과 곤고함을 느끼게 한다. 이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다(사 40:31).

[6절]

이방 선원들은 폭풍을 견디기 위해 동원한 온갖 수단이 모두 헛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의지해 보고자 했다. 이는 마치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찾는 것처럼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요 피조물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7절]

제비를 뽑으니<에 서론, 제비뽑기>.

[9절]

히브리 사람. 이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때 특별히 업신여기는 표현으로 상용한 호칭(창 39:14; 창 41:12; 출 1:16; 삼상 4:6)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했던 명칭(창 40:15; 출 2:7)이기도 하다<렘 34:14, 히브리, 히브리인>.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요나는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이시라고 소개하였다. 즉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자 그 존재들의 지지자이신 여호와야말로 이 땅에 존재하시는 유일한 참 신이라고 고백한 것이다(행 17:24, 25). 그가 이같이 하나님을 소개한 것은 자신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며 그를 피해 도피했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올바른 신 지식(神知識)은 자신과 자신의 허물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호 5:4).

[12절]

요나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 폭풍이 일게 되었음을 시인하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그가 회개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기꺼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눅 15:21)<눅 13:1~9, 회개>. 한편 요나의 희생적 태도는 자신의 유익보다는 이웃의 생명과 유익을 위하는 참 사랑의 증표이다(요 15:13).

[14절]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한 선원들의 말속에는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행동이 자기들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므로 그의 죽음에 대한 보응을 면케 해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5절]

이러한 사실은 폭풍의 원인이 전적으로 요나에게 있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진 책임을 선원들에게 전혀 묻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폭풍과 풍랑이 범람하는 듯한 이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죄악 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항상 영혼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요 14:27).

(1:17~2:10절)

불순종의 대가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되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한 요나를 바다로 던지셨지만 그에게 큰 물고기를 피신처로 제공하셨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고기의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면서 자신의 지난 과오를 철저히 반성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구원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고난을 통해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게 된다(시 51:1~3). 자신의 비뚤어진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설정할 수 있다(눅 15:21).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욥 42:2~6). 더욱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할 수 있다(약 1:2~4).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고난을 불평의 근거로 삼거나 절망의 순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편 요나의 3일간의 물고기 뱃속 생활과 토해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으로서(마 12:40; 마 16:4; 눅 11:29)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와 인류 구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17절]

큰 물고기. 바다 동물 중 가장 큰 부류에 속하는 고래나 상어로 추정되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물고기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로서 요나가 3일 동안 그 뱃속에서 체류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삼일 삼야. 온전한 3일, 즉 72시간을 뜻하지 않고 날수로 3일을 의미하는 히브리 문학적 표현이다. 이 기간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요나는 3일 동안 맑은 정신으로 상처 없이 지낼 수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범죄한 영혼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해설

요나의 사명 (1~2절)

1절은 간략하나마 앞으로 전개될 예언이 인간 요나의 말이 아닌 여호와 자신의 말임을 밝히는 표현으로서 전형적인 예언서의 서론 양식이다(호 1:1; 욜 1:1; 미 1:1). 그리고 2절은 요나서 전체 내용의 개괄적 예고이자 본서에 기재된 사건의 도입부이다. 요나서는 비록 짧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말로 된 예언과 동시에 거기 얽힌 사건 전개가 성경 전체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요나서의 예언 대상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아닌 이방 앗수르 제국으로서 이는 구약의 하나님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지방신으로 간주하는 종교사적 오해를 철저히 불식시킨다(창 1:1).

요나의 도피 (3절)

본서의 전개를 위한 상황 설정이 기록된 부분이다. 이방 땅 앗수르에 대한 선지자적 사명을 거부하고 도망한 요나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왜곡된 특권 의식과 편협한 국수주의적 신앙의 면모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초자연적 섭리와 요나의 좌절 (4~16절)

풍랑으로 인해 요나의 죄가 발각되고(4~10절) 죄의 대가로 바다에 던져지는 이 장면은 완결된 성경 계시가 없었던 시대에 있어서 역사에 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 행동을 증언한다.

요나의 회개 (1:17~2:10)

본문은 물고기에게 삼켜진 요나(1:17), 요나의 회개(2:1~9), 구원(2:10)으로 구분되며, 본서의 1부 즉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방 선교를 거역하던 요나의 도피 행각이 여기서 마감된다. 본문은 요나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한 후 다시 원래의 소명을 받은 위치로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진리를 시사한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롬 8:21~39).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범우주적이다(요 3:16).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시 139편).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과 변화를 주재하신다(막 4:39~41). 모든 재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다(시 73:28).

 

# 핵심

1~10절

이스라엘을 괴롭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에게, 하나님의 징계로 재난이 임했다.

요나 (1절)

'비둘기'란 뜻으로,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의 통치시대(B.C. 793-753)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요나는 구약의 선지자로서는 최초의 이방 선교사였다. 그는 갈릴리의 가드헤벨 출신이었고, 여로보암 2세에게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왕하 14:25). 본서 2장에 나오는 그의 회개와 결단의 기도문이 시편 형태였음을 볼 때, 성경에 정통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묵상

선지자 요나의 사명 (1~2절)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된 계시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는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기에 전폭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부여된 선지자적 사명을 무시한 채 이방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항상 외치고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나의 신앙 자세 (3~17절)

요나의 배타적이고 편협하며 의식적인 신앙 자세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 받은 소명을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결국 보편적인 만민 구원 사상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깨뜨리며, 하나님의 구원 대상에는 민족적, 지역적 제한이 없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 (17절)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요나를 위해 예비된 장소는 바다의 큰 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배타적인 특권의식을 깨뜨리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대자연을 직접 주장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요나는 현재 당하고 있는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임을 고백하고 자신이 받는 징계가 마땅함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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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넝쿨의 교훈

[요나 4장 1절~11절]
1절 -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절 -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절 -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절 -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절 -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절 -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절 -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절 -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절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주제별 목록 작성
회개하여 심판을 피한 니느웨를 본 요나의 마음
1절 : 매우 싫어하고 성냄
2절 : 하나님께 항변함
3절 : 죽기를 구함
박넝쿨의 교훈
6절 :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가 더위를 피하게 하심
7절 : 벌레가 갉아 먹어 시들어 버린 박넝쿨
8절 : 고통을 호소하며 죽기를 구하는 요나
9절 : 시든 박넝쿨로 인한 논쟁
10-11절 : 교훈하시는 하나님

* 도움말
1. 성내는 것(1절) : ‘싫어하고’는 가슴이 찢어지는 극심한 슬픔이나 근심이나 시기심을, ‘성내며’는 감정이 몹시 상하여 맹렬히 화를 내는 것을 가리킨다.
2. 성내는 것(4절) : 종교적 국수주의자였던 요나는 원수 나라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분노하였다.
3. 동풍(8절) : ‘시로코’로 팔레스틴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말한다.
4.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11절) : 선악이나 사리분별력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 말씀묵상
1. 본래의 감정이 드러난 요나
놀라운 역사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습니다. 멸망당하기를 학수고대했던 원수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의 특권이라고 여겼던 구원이 이방 민족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 박넝쿨의 교훈
하나님께서 교훈해야 하는 대상은 이제 니느웨가 아닌 요나가 되었습니다.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박넝쿨을 사용하셨습니다. 오고가는 대화와 질문 속에 요나의 거세고 높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도를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심으로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보고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인들과는 달리 전심으로 선지자의 말에 순종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자 요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박넝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주시려는 교훈은 무엇입니까?(10-11절)
* 깊은 묵상
1. 지금 당신의 삶과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있습니까?


제공:프리셉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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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돌이킨 철저한 회개

[요나 3장 1절~10절]
1절 -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절 -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절 -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절 -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절 -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절 -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절 -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절 -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절 -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절 -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주제별 목록 작성
요나의 두 번째 소명 수행
1절 :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함
3절 :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감
4절 : 여호와의 말씀대로 심판을 선포함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
5절 :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함 / 베옷을 입음
6절 : 왕의 회개
7-8절 : 조서가 내려짐(모든 의식있는 생명들의 회개 동참)
9절 : 하나님의 심판 철회를 기대함
10절 :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철회하심

* 도움말
1. 사흘 동안 걸을 만큼(3절) : 성인 남성이 3일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로, 대략 100km 정도이다.
2.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7절) : 생명을 내건 완전한 금식과 철저한 회개를 선포한 것이다.

* 말씀묵상
1. 두 번째 임한 여호와의 말씀
성경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다 결국 실패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 줍니다. 요나 또한 그렇습니다.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스올의 뱃속을 체험한 요나는 두 번째 임하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요나는 스올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진정한 선지자로서의 선포를 할 수 있었습니다.

2. 돌이키는 니느웨 백성들
요나의 선포는 니느웨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즉각 반응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며 금식했습니다. 또한 회개의 증표로 베옷을 입었습니다. 특히, 왕의 회개는 실로 이 회개가 거국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자신들의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것을 기대하며 간구하였습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요나는 하나님께 받은 두 번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10절)
* 깊은 묵상
1. 지금 당신의 삶은 악한 길에서 떠나 있습니까?


제공:프리셉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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