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믿음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스도는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셨다. 이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에 의지했던 율법이나 성막이나 제사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오직 믿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히브리서 한눈에 보기
본문
| 서문
|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 믿음으로 살라
|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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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 1:4~2장
| 3장~4:13
| 4:14~5:10
| 5:11~7장
| 8장
| 9~10장
| 11장
| 12장~13:19
| 1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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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 천사들보다 뛰어남
| 모세보다 위대함
| 아론보다 위대한 대제사장
| 멜기세덱의 반차
| 첫 언약보다 나은 새 언약
| 성전과 제사의 완성
| 믿음이 필요하다
| 예수님을 바라보라
| 축복과 끝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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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히브리서 저자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바울을 히브리서 저자로 여겨 왔지만 오늘날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이 아니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무엇보다 히브리서의 문체는 바울의 편지들과 확연히 다르다. 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2:3).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사도직의 징표였으므로, 바울이 저자라면 히브리서 저자처럼 구원 소식을 듣게 된 경로를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나바나 아볼로를 저자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히브리서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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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시기
| 60년대 후반쯤으로 추정되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저자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히브리서를 기록했다면, 성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사실을 빠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성전은 현재형으로 언급된다.
| 분류
| 서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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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다. 즉,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 그리스도인으로 지내며 고립되다 보니 유대교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유대교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 장엄한 성전, 화려한 제의(祭衣)를 입은 제사장이 있다. 그러나 신생 기독교에는 그런 것이 없다. 노예와 이방인, 과부와 고아들이 주요 계층이다. 너무나 볼품없어 보인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더 나은', '우월한' 진리다. 천사들, 선지자들, 아브라함, 멜기세덱, 아론, 모세, 여호수아 등은 자신들보다 우월하신 분,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예수님이 구약의 역사를 완성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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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히브리서'인가?
신약성경의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 사람들에게'이다. 서신서로서 수신자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러 견해가 있지만 로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히브리 사람들이라고는 했지만 수신자 공동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박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기독교 신앙을 철회하고 살아남거나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다 죽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통과한 유대교의 법과 체계로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율법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그분이 하신 일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시며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는 분이다. 이 예수님의 위로와 공감에 힘입어 박해받는 가운데서도 영적 평안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1:1~3)
예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히브리서의 기독론은 매우 강력하다. 오래전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이 아들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셨다. 이 권세는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사실로 확증된다(3절).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110편에 등장하는 보좌 형상을 사용해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한다. 유대교 전승은 가나안 왕들을 평정하고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같은 구절을 적용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아버지와 동일한 형상이다. 또 아버지께서 천사들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신 왕이다.
천사들보다 뛰어남 (1:4~2장)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뛰어나다고 이야기하며 구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한다. 첫째, 천사들도 예수님을 경배한다. 유대인 중에는 천사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천사들은 그저 영일 뿐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헬라어로 천사는 '전달자'(메신저)를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은 천사를 바람으로, 사역자를 불꽃으로 삼으신다. 시편 원문에는 조금 표현이 다르다.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 히브리서 저자가 어순을 바꾼 데는 아람어 성경의 영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람어 번역 성경 타르굼은 "천사를 바람처럼 빠르게, 사역자를 불꽃처럼 강하게 하신다"로 옮긴다. 셋째, 하나님은 천사들을 섬기는 영으로 보내셨고, 천사들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점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생애를 보내실 때 입증되었다(마 4:11). 넷째, 천사도 말씀을 전했지만(2:2)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심을 선포하는 데 쓰임받았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신 메시아다(시 45편). 놀랍게도 이토록 위대하신 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서 죽으셨다.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한 자리에 처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그분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은 혈과 육에 속한 사람과 같이 되셨기에 전적으로 사람을 이해하시며, 인류를 그의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모세보다 위대함 (3장~4:13)
모세는 유대인의 영웅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약속의 땅까지 인도했다. 무엇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었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충직한 종일 뿐이다. 주인의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한편 모세를 따라 나와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하나님을 배신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에게도 배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늘 조심해야 한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이 얻게 된 안식이란 사실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진정한 안식, 하나님이 말씀하신 안식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수백 년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자고 초대했다(시 95편).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을 통해서다. 우리의 참안식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론보다 위대한 대제사장 (4:14~5:10)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구약시대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죽었다. 그래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인 지성소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로, 아론과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을 위해 대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 아론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론 자손이 아닌 유다 자손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제사나 예물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완성하셨다.
멜기세덱의 반차 (5:11~7장)
멜기세덱이 누구며 그의 직분이 어디서 왔는지는 매우 난해한 문제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간곡히 당부한다. 어린아이들이 먹는 이유식처럼 초보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은 더 단단한 것을 씹을 수 있도록 더 심오한 가르침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땅이 비를 흡수해 채소를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면, 그에 합당한 신앙과 행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성도는 믿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떠내려갔다. 죄에 빠지지 말고 믿음에 붙어 있으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향해 달려 나아가는 것이 안전한 길이다. 이 약속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보다 크신 분이며,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어 놓은 휘장이 둘로 찢어지게 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지성소로 나아가셨고, 이제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심이 강조된다.
멜기세덱에 관해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그는 아브라함을 위해 복을 빌어 주었다. 사실 그 자리에는 살렘 왕 멜기세덱 외에도 소돔 왕이 나와 있었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게만 주의를 기울인다(창 4:17~20). 멜기세덱은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제사장이었지만 레위 지파는 아니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족보도, 시작과 끝도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기원도 신적이다. 게다가 율법으로 완성할 수 없었던 대제사장직은 하나님이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첫 언약보다 나은 새 언약 (8장)
예수님은 하늘 성소를 섬기는 대제사장이다. 땅에는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다. 땅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다. 즉, 성전과 제사 제도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보이신 임시적인 '본'일 뿐이다.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셔서 더 좋은 약속을 가져오셨다. 이 언약은 끊임없이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믿음과 사랑을 요구할 뿐이다. 구약시대에 예레미야도 백성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는 새로운 언약의 도래를 고대했다(렘 31:31~34). 이 새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성전과 제사의 완성 (9~10장)
첫 언약에서 핵심은 성막과 제사다. 언약이 주어졌을 때는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이므로 성전 대신 성막이 세워졌다. 성막 안에는 언약궤, 등잔대, 분향단, 진설병 상 등이 놓였다. 이것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었기에 차선으로 선택된 성령의 방법이었다. 인간은 오직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죄를 행결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쳐야 했다. 역설적으로 희생 제물은 언제나 인간의 죄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벽한 대제사장으로서 언제나 자유롭게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완벽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완벽한 제사로 우리가 영원히 정결해졌다. 성막과 기구들, 제사와 의식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비추는 그림자다. 이제 그림자 대신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모든 죄와 불법이 시험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죄를 위해 제사할 필요가 없다.
성도는 이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이 진리를 알고도 배교한다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고도 두세 증인이 있으면 죽을 수 있었는데, 그보다 위대한 언약을 저버린다면 더 큰 형벌이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성도들은 이미 많은 난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고난은 장차 올 더 좋은 것을 위한 약속이다. 여기까지 오고도 돌아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자초하는 일이다. 인내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야말로 영원한 구원의 상을 얻는 길이다.
| 옛 언약 (율법)
| 새 언약 (복음)
| 참고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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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 수행자
| 육체적 혈통(레위 지파)을 따라 세워진 대제사장(아론과 그 자손)으로 자신도 죄인이었다.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세워진 대제사장으로 죄가 없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7:11, 16, 26
|
장소
| 사람 손으로 만든 장막
| 참장막인 하늘 성소
| 8:2; 9:23~24
|
제물
| 짐승의 피(대리적 피)
| 그리스도 자신의 피
| 9:12~13
|
제사의 횟수
| 1년에 한 번씩, 반복적으로
| 단 한 번
| 9:25~26, 28
|
결과
| 불완전한 속죄
| 완전한 속죄
| 9:26; 10:1~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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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희생 제사의 비교)
믿음이 필요하다 (11장)
비교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긴 설명이 끝나고(1~10장),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천적인 행동 강령이 제시된다(11~13장).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나열된 구약의 많은 인물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살다 죽었다. 구약의 모든 영웅은 이를 보여 주기 위한 모델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같은 영웅들은 물론,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산 위인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매를 맞고 사슬에 묶여 채찍질을 당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이들이 위대한 것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아껴 두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믿음의 영웅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라 (12장~13:19)
믿음의 영웅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경기장의 관중처럼 우리를 지켜보며, 선 채로 우리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준다. 그들의 응원으로 우리는 이 경주를 마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경주를 잘 마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이 경주를 포기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고 배려하며, 배우자에 대해 정절을 지키고, 탐심을 버려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의 당부 끝에는 제단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13:10~14). 어쩌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제단에 바친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속죄일에 바친 희생 제물만은 먹을 수 없었다. 이날 바쳐지는 희생 동물은 진 밖에서 완전히 불살랐다. 영문 밖에서 완전히 불살라진 제물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다. 그 희생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다. 우리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 그분이 당한 수치를 나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리스도인은 율법이라는 '영문'밖으로 나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축복과 끝인사 (13:20~25)
히브리서 저자는 이 편지를 간단히 썼다고 말한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저자는 사설처럼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말하는데, 이 디모데가 바울과 동행한 바로 그 디모데인지는 알 수 없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은 이 편지가 이달리야(이탈리아)로 부치는 것이거나 이달리야에서 부쳐진 것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