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영원한 대제사장, 약점 없는 하나님 아들

[히브리서 7장 23절~28절]
23절 -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절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절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절 -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절 -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절 -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시므로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약점을 가진 인간 대제사장들은 자기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반복해서 제사드리나, 예수님은 단번에 흠 없는 자신을 드려 온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1. 많은 제사장 vs 한 제사장 (23~25절)
'다다익선'(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이라는 말이 모든 경우에 밎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많은'과 '하나'를 대조해 레위 제사장들과 예수님의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옛 제사장들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많은'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홀로' 그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영원히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이 항상 살아 계셔서 제사장으로서 중보의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대속을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날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홀로' 충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항상 살아 계셔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께 의지하고 맡길 일은 무엇인가요?

2. 예수님의 탁월한 인격과 사역 (26~28절)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십니다(26절).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악이 없다'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고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더러움이 없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부합하는 사람이 이 땅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약점 없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여러 번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한 번의 사건으로,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분은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드림으로써 우리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인격적 특징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닮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기도
영원하고도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연약하고 실수 많은 저를 위해 항상 간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날마다 새롭게 기억하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 죄 짐을 푸는 기도의 자리를 더욱 사모하며 찾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영원한 구원자, 사랑의 중보자

[히브리서 7장 23절~28절]
23절 -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절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절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절 -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절 -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절 -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배경 이해하기]
히브리서의 헬라어 성경 제목은 ‘히브리인들에게’ 입니다.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대교 전통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거듭된 핍박과 지연된 예수님의 재림은 일부 교인들로 하여금 다시 믿음의 초보로 돌아가 율법주의적 전통을 따르려는 유혹에 빠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소개하면서 율법의 전통을 따른 제사장 제도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제사장 제도가 어떻게 더 우월한지 논증합니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일에 온 힘을 쏟고도 인간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한계를 넘어설 뿐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곳곳에 하나님께 ‘나아가다’, ‘가까이 가다’, ‘이르다’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거룩함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과 거리와 관계의 깊이가 결정된다고 이해했던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제사 제도가 그러한 관계를 불완전하게 제공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이들을 ‘온전하게’ 구원할 수 있음을 논증합니다. 

[관찰과 묵상]
1. 구약시대에 제사장 수효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은 누구인가요?(23~25절)

구약시대 제사장은 죽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대체해야 했기에 그 수효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기에 그 제사장 직분을 대체할 필요가 없으며,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완전한 제사장이십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특히 아론의 자손 중에서 성별된 자만이 대제사장으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던 살렘 왕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십일조를 받음으로(창 14:17~20) 아브라함보다 더 우월한 존재임을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레위 지파가 아니었지만 아론의 후손들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멜기세덱의 계보를 이은 분이기에 더욱 높임을 받을 만한 분입니다.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며, 그들이 행하는 제의가 불완전함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많은 인원이 제사장으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레위인들의 숫자가 줄었을 때는 성전 봉사를 시작할 수 있는 연령을 낮추어 적절한 수의 레위인들을 확보하고자 애썼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셨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분이기에 다른 이에게 그 직분을 양도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그분께 나아가면 온전한 중재자 되시는 그의 대속적인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죄를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적용과 나눔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하며 최종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누어 보세요.

가톨릭에서는 성도가 죄를 지었을 때 신부에게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보속(補贖)으로 받은 기도문을 올려드림으로써 죄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를 행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사장들을 통해야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던 구약의 제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제사장직의 일시성과 달리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영원하고 완전하며 최종적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은 즉각 일어나는 부분이 있고, 서서히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그 신분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그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효과를 발휘하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신자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함을 보증(Guarantee)해 주십니다. 이렇게 얻은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닻과 같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 줍니다.   

2. 구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26~28절)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가 없으시고, 부활 승천해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며,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대속죄일(7월 10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날 대제사장은 자신과 권속을 위한 속죄제(레 16:11~14), 백성을 위한 속죄제(레 16:15~19), 그리고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속죄했습니다(레 16:23~24).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완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에봇이나 흉패, 에봇 받침 겉옷을 입지 않고 오직 성결을 상징하는 하얀 세마포 옷만을 입고 하루 총 네 번에 걸쳐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레 16:4). 문제는 속죄의 의식을 행해도 백성은 지성소에 뿌려진 피가 마르기도 전에 속히 죄짓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떠나 계신 분이기에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속하셨습니다. 인간 제사장은 율법에 근거해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신 맹세의 말씀에 근거해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인간은 약점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에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기에 죄인인 우리 모두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십니다.     
적용과 나눔
우리는 연약한 존재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약점을 뛰어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와 같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세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대속죄일 전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그 마음 상태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노예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부정한 사람을 만질 때 우리도 부정해지므로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정한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부정함이 정결하게 되고 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연약한 인간을 전혀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창조된 세계의 법칙 안에 갇혀 계시지 않고 그것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을 힘입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축복입니다.


* 예수님은 아론의 후손들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죄인 된 사람은 결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우리는 날마다 소망과 힘을 얻습니다.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하나님 능력에 힘입어 산다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예수님이 자신을 드려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 제 마음에 새깁니다. 십자가 은혜로 제 약점을 가려 주소서.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하셨으니, 그 자유로 힘써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

[히브리서 7장 11절~22절]
11절 -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절 -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절 -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절 -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절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절 -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절 -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절 -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절 -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절 -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절 -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절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완전할 수 있다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다 지파인 예수님은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맹세로 세우신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십니다.

1. 다른 한 제사장 (11~14절)
인간은 누구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통해서라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드린 제사는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여러 곳에서 언급한 '온전함'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의미합니다. 레위 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드린 제사는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인간에게 예정된 운명은 결국 심판으로 인한 멸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완전한 제사장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분은 멜기세덱처럼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죄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 완전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 레위 제사장들을 통해 온전함을 얻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셨나요? 예수님을 통해 해결받아야 하는 나의 죄는 무엇인가요?

2. 영원한 제사장 (15~22절)
예수님은 인간 제사장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입니다. 그분은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16절)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인간 제사장들은 직임을 맡은 기간에만 역할을 감당할 뿐이고, 세월이 지나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영원히 제사장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들과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확연히 구별되는 부분이 바로 '맹세'입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맹세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은 레위 제사장보다 우월하시며,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십니다.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출현으로 옛 제사장직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우리는 더 나은 소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된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기도
인간적 노력으로 자기 의를 쌓아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제가 어떤 사역을 했으며 계명을 얼마나 열심히 지켰는지 내세우지 않고, 오직 새롭고 산 길이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해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로 오늘을 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예수님을 미리 보여 준 의의 왕, 평강의 왕 멜기세덱

[히브리서 7장 1절~10절]
1절 -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절 -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절 -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절 -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절 -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절 -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절 -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절 -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절 -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절 -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살렘 왕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의와 평강의 왕인 그는 족보도, 생명의 시작과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제사장입니다. 그는 레위 족보에 들진 않았지만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십일조를 받을 만큼 높습니다.

1. 살렘 왕 멜기세덱 (1~3절)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미리 보여 주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멜기세덱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에 두 번 등장하는데(창 14:17~20; 시 110:4),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고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사장을 세우셨지만, 그들은 받은 바 거룩한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불의한 제사장들의 모습(삼상 2:12~36)은 의와 평강의 왕이요 진정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이 땅의 대제사장과 다른, 멜기세덱의 대제사장직에 의존합니다.
* 의의 왕,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은 누구를 연상시키나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완전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2. 아브라함과 레위보다 높은 멜기세덱 (4~10절)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존귀한 자로 그려집니다. 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공경을 표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이유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쳤다는 것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받은 것은 결국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가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들어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레위 제사장들보다 높다고 이야기합니다. 백성에게 십일조를 받는 레위 제사장들은 유한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우리의 죄를 담당하십니다.
* 멜기세덱이 레위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진정한 대제사장 예수님께 내가 받은 은혜는 무엇이며, 마땅히 드릴 감사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목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지존하신 주님께 경배하며 예물과 마음과 삶을 드릴 수 있음이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의와 평강의 왕이신 주님을 만나고 예배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인내의 그릇에 담기는 하나님의 약속

[히브리서 6장 13절~20절]
13절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절 -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절 -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절 -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절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절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절 -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절 -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과 자신을 두고 하신 맹세에 대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소망의 피난처를 찾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을 가진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따라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1. 아브라함의 인내 (13~16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은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복을 약속하셨고(창 12:2; 22:17), 그는 오래 인내함으로 그 약속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약속을 받은 자들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인가? 그분의 약속은 신뢰할 만한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들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과정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받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약속을 주신 분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약속 성취의 주인공이 됩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이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어떻게 받았나요? 내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기다려 온 하나님 약속은 무엇인가요?

2. 약속과 맹세 (17~20절)
약속에 맹세까지 추가되면 그 약속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하나님 약속은 맹세와 더불어 주어졌기에 변할 수 없고 반드시 이행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든든하며 우리를 하나님 임재로 인도합니다.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19절)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6장 17절에서 암시하는 맹세의 내용은 7장 21절에 가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 대제사장으로 세우셔서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예수님이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참된 위로요 소망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도우시는 분은 누구인가요? 내가 예수님 안에서 가지게 된 견고한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영원한 하늘 성소에 먼저 들어가신 그리스도를 좇아 저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지요! 삶을 뒤흔드는 세상 풍파 속에서도 견고한 닻과 같은 소망이 있음을 선포하며, 오래 참고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믿음의 초보에서 완전한 성숙을 향하여

[히브리서 6장 1절~12절]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절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절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절 -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절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절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절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절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절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절 -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절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절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우리는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에 참여했다 타락한 사람은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섬김을 기억해 주시기에, 끝까지 소망과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아야 합니다.

●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기본적 가르침 위에 심오한 가르침을 세우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배교의 위험에 처한 당시 성도들을 향해 타락의 길로 나아가면 다시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엄히 경고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림'으로써 얻을 복과 '타락함'의 결과로 받게 될 저주입니다. 그 중간은 없으며, 살 길은 오직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수많은 유혹에 넘어져 십자가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저버린 자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경고는 중히 여기고 격려는 감사함으로 받아 하나님 약속을 누리는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히브리서 기자는 배교의 결과가 무엇이라고 엄히 경고하나요? 믿음의 초보에 머물러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를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하늘과 땅에 다리를 놓은 영원한 구원의 근원

[히브리서 5장 1절~14절]
1절 -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절 -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절 -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절 -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절 -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절 -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절 -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절 -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절 -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절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11절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절 -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절 -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절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하나님께 부름받아 속죄제를 드리는 대제사장처럼, 그리스도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린아이 같고,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해야 장성한 사람입니다.

1. 완전한 대제사장 (1~10절)
제사장은 라틴어로 '다리 놓는 사람'(폰티펙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연결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의 후손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완전한 대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대제사장은 연약한 자신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려야 했으나 죄 없으신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직면하셨을 때에도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막 14:36). 고난 중에도 순종하심으로 온전하게 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인내와 순종은 무력함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이루는 능력이며, 구원의 길로 이끄는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나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와 순종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2. 듣는 것이 둔해지지 않도록 (11~14절)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 둔해지면 영적으로 퇴보합니다. 당시 성도들의 상황은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기간으로 보면 당연히 선생이 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초적인 말씀을 들어야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가 아니라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젖을 먹는 영적 미성숙 상태였습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의의 말씀'(13절)을 경험하는 것은 지식으로서의 말씀 이해가 아니라 삶에서의 순종을 의미합니다.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 자기를 부인해 나가야 합니다.
* 내가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 듣는 귀가 둔해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연약함과 고난을 친히 감당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읽고 머리로 묵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완전히 소화시켜 삶으로 옮기며, 장성한 분량까지 신앙이 성장하도록 저를 도우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연약한 인생이 달려갈 곳, 은혜의 보좌 앞

[히브리서 4장 12절~16절]
12절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절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절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절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예리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니 어떤 것도 그분 앞에서 숨길 수 없습니다.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우리는 긍휼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1.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은혜 (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12절)은 앞 단락과의 문맥을 고려할 때, 먼저 종말을 사는 백성에게 선포된 시편 95편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으로 성경 66권 전체에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에 비유되는데, 군사가 쓰는 전투용 칼이 아니라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는 데 사용하는 수술용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마치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처럼,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을 쪼개고 감찰하는 말씀이 들릴 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어떠하다고 설명하나요?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내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요?

2.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님 (14~16절)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신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기원전 3~4세기에 시작된 스토아 철학은 '부동심'(不動心, 아파테이아)을 강조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정으로부터 초월한 신을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이 지배하던 때에 기독교는 새로운 신관을 제시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과 단절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경험을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마음에 공감하십니다. 이는 엄청난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와 기도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는 길을 예수님을 통해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의지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러면 자비하신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도움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 주시나요? 나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나요?

오늘의 기도
생명과 능력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저 자신의 결심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와 긍휼을 간구합니다. 제 안의 탐심과 정욕을 제하시고, 거룩한 갈망을 일깨우는 말씀으로 저를 사로잡으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말씀을 듣고 믿어 안식을 누리는 삶

[히브리서 4장 1절~11절]
1절 -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절 -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절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절 -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절 -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절 -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절 -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절 -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절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절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절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어도 이르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받고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제칠일에 안식하신 것처럼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일을 쉽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기에 힘쓰고, 순종하지 않는 본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안식 (1~5절)
하나님이 성도에게 허락하신 안식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 위해 애써야 하는 안식은 가나안과 같이 보이는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안식하신, 그 평강과 기쁨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식은 우리가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복음을 들을 때, 단지 듣는 데서 끝내지 않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또한 믿고 난 뒤에도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약속을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현실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할지라도,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함께하시며 참된 평강과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 하나님 말씀이 유익하려면 듣는 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나로 하여금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 말씀은 무엇인가요?

2. 안식으로 들어가기에 힘쓰라 (6~11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안식으로의 초대는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7절. 참조 시 95:7~8)라는 다윗의 말을 통해 안식으로 초대하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또한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참된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우리는 자기 힘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먼저 들어가신 예수님으로 인해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의 쉼을 누리는 비결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안식으로의 초대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식으로의 초대에 순종하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짐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아직 남아 있는 약속, 마지막 날에 닿을 천국에 소망을 두고 힘써 오늘을 살겠습니다. 해묵은 땅처럼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성령으로 다스려 주소서. 그리하여 겸손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알리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오늘 영원한 안식을 선택하라

[히브리서 4장 1절~11절]
1절 -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절 -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절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절 -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절 -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절 -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절 -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절 -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절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절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절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배경 이해하기]
본 장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불순종의 죄악에 다시 빠지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을 권면합니다. ‘안식’(카타파우시스)에는 여러 차원이 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단어를 세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삶 속에서 평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 영원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율법이 주는 구원 약속만을 굳게 신뢰하며 선민사상을 가지고 구약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영도로 출애굽했던 백성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은 사건을 상기시키고, 또 여호수아가 백성을 인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참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을 볼 때, 아직도 들어가야 할 진정한 안식이 남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 지도자나 이 땅의 안식에 만족하지 말고, 모세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위의 것을 사모하도록 권면합니다. 

[관찰과 묵상]
1. 히브리서 기자는 처음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나요?(1~2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약속을 받았으나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해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당도하기 직전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에 백성은 절망과 원망으로 반응했고, 결국 2명을 제외하고 아무도 두 번째 의미의 안식(가나안 입성)에 들어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약속을 믿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약속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식’ 개념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는데(창 2:2~3),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노동이 너무 힘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인간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시려는 의도에서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단순히 놀고먹는 휴일과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7일째에 ‘안식’하셨다고 했지만, 그날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며 생명을 유지시키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요 5:17). 다만 그분이 바라는 것은 주님을 떠나 안식이 없는 인간들이 창조주와 참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입니다.  
적용과 나눔
몸과 마음에 안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후일 하나님이 주실 완전한 안식이 어떠할지 나누어 보세요.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리는 안식은 유한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곧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개인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맞을 때, 믿는 자들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피안의 세계라 부르며, 이 땅에서 고된 삶을 벗어나 영원히 무위도식하는 낙원과 같은 곳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은 천국이 죽음의 권세가 넘보지 못하는 곳으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게 된 인간이 일을 더 이상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진정한 자아실현의 기회로 여기며, 기쁨으로 일하면서 영원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맛보는 ‘안식’이 하늘나라의 예표(prefigure)에 불과하며, 하늘나라에서 온전히 맛보게 될 영원한 안식이야말로 본래 우리가 소망해야 할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히브리서 기자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해 오늘 하나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7~11절)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이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의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음성에 순종해 영원한 하늘나라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40년 광야 고난이 끝나고 마침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은 잠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나 히브리 기자는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후 500년이 흐른 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재차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누리는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이 얻게 된 안식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이었다면, 훗날 온 인류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예수(‘구원하다’ 여호수아의 헬라식 발음)를 통해 얻게 되는 안식은 ‘완벽하고 무한한 안식’이 될 것입니다. 두 안식은 일견 유사해 보이나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전자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조차도 징계를 받음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고, 심지어 들어간 백성도 늘 침략자들에게 위협받아 참다운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개인의 종말이 언제 찾아올지, 인류 역사의 종말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바로 ‘오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을 선택함으로써 영원한 평강과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적용과 나눔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기에 내가 오늘 순종할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며, 이겨 내야 할 세상 유혹은 무엇인가요?

마라톤 선수는 마지막 결승선이 어디쯤 있는지 잘 알기에 머릿속으로 그것을 염두에 두며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구간에 걸쳐 세심하게 체력을 안배하기에 끝이 가까워지고 체력이 떨어져 고통스런 시간이 찾아와도 결승선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수많은 관중의 환호, 그리고 상급을 바라보며 새 힘을 얻습니다. 결승선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달리기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처럼, 순례 여정을 가는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마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인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 우리에게 잠시 주어지는 이 땅의 안식에 만족하지 말고,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원형이 되는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11절).


* 성도는 이 땅에서 잠시 맛보는 편안함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하고도 완전한 안식을 소망해야 합니다. 개인의 종말이 언제 찾아올지, 인류 역사의 종말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바로 ‘오늘’, 믿음으로 구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안식을 선택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긴 영적 광야 생활의 시작입니다.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상실했던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말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생 광야 길에서 성화되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안식에만 집착하지 말고 하늘 본향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게 하소서. ‘오늘’ 주시는 주님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주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삶이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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