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있는 말씀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12절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절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장 2절]

2절 -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크리스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가 장로이든, 목사이든, 신학박사이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며 그런 교회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결코 부흥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지 않으면 교회에나 신앙생활에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4: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 성경의 신비
어떤 분이 성경책의 일곱 가지 신비를 말씀하며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말했습니다.
첫째, 형성의 신비입니다 - 성경 전체가 형성되고 집필되는데는 4,000년이 걸렸는데 이것은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 일치의 신비입니다 - 성경 66권의 책이 저자도 다르고 연대도 다르지만, 그 사상과 목표가 다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시대의 신비입니다 - 성경은 가장 오래된 고전문헌 중에 고전문헌인데도 지금까지 변함없이 모든 방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판매의 신비입니다 -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은 다른 책의 추종을 불허하는 베스트셀러입니다.
다섯째, 흥미의 신비입니다 -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읽는 책입니다.
여섯째, 언어의 신비입니다 - 가장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이면서 문학적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책입니다.
일곱째, 보존의 신비입니다 - 가장 많은 핍박과 반대를 받아왔지만, 성경은 여전히 잘 보존된 책입니다.
성경이 어째서 이런 신비의 책일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책이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까? 일본의 유명한 신학교 교장님은 처음 창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장엄한 말씀 한 절에 무릎을 끓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성경의 능력
첫째, 살아 역사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히 4:12, 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말씀 앞에 녹아지고 깨어지고 변화된 사람과 국가가 그 얼마인지 모릅니다.
둘째, 생명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책은 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이 없는 죽은 글이지만, 성경은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요 6: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또 요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지혜를 주는 말씀입니다. 능력을 받으려면 기도를 해야 하고 지혜를 얻으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은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지만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성경에서 얻은 지혜 때문입니다. 시 119:98-100절에서는 성경을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고… 스승보다 명철하게 하고 노인보다 명철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백성은 자연히 지혜로운 백성이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됩니다.
넷째, 축복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계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말씀을 지켜 행하면 나가도 들어와도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병고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으로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기도 합니다. 시 107:20절에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이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하셨고, 벧전 2: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한 말씀을 믿고 기도하여 병고침 받는 사람이 수백만, 수천만도 넘을 것입니다.
여섯째, 마귀를 이기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말씀을 듣는 동안, 병마가 물러가고,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의 병을 일으키는 마귀가 떠나가고 승리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마다 말씀으로 꾸짖어 물리쳤습니다. 계 12:11절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일곱째, 영원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합니다. 천지는 변해도 이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벧전 1:24, 25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3. 능력이 나타나기 위한 조건
성경은 그저 읽기만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몇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첫째, 믿음이 화합되어야 합니다.

밀가루가 아무리 좋아도 그대로는 우리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물과 합해서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 히 4:2절에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한 것처럼 말씀에 능력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말씀은 믿음으로 받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말씀을 주실 때 반항하고 거역하고 대적하면 도리어 진노와 무서운 징벌이 임합니다.
대하 36:15, 16절에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라고 한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한 백성을 갈대아 왕에게 부쳐서 성전에서 칼날로 청년을 죽이며, 남녀 청년과 노인과 백발 노인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성전을 불사르고 금은 보화를 다 빼앗가 가게 하셨습니다.
왜 이 비극을 당했습니까?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하며, 말씀을 전하는 종들을 비웃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역사극에 보면 왕의 말씀을 어명이라 해서 두루말이에 싸서 고귀한 그릇에 받쳐들고 가서 두손으로 벌벌 떨며 읽어 주는 모습을 봅니다. 하물며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참된 성도라면 두려운 마음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사 66:2절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 줄 알아야 합니다. 제멋대로 조롱하고, 제멋대로 가감하고 변경해서는 안됩니다. 요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명은 왕의 권위를 가진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순종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지키는 자에게 생명이 되고, 복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계 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계 22:7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백 번, 천 번 읽고 달달 외운다고 해도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실 때, 순종하기 싫었지만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낚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말씀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모험적으로 행동하라는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의 능력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넷째, 말씀을 위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막 4:16, 17절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으면 마귀가 시기하고 미워하며,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때에 어떤 희생이 있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 때문에 일어나는 환난과 핍박을 견디어내야 합니다.
도금을 했는지 진짜 금인지 알려면 불에 넣어보면 아는 것과 같이, 말씀을 참으로 믿고 순종하는 사림인지 아닌지는 불과 같은 시험과 환난을 통과해 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면, 그 지불한만큼 생명의 역사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 신자는 신학박사라도 생명 줄에서 끊어진 자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말씀 앞에 떨 줄 알고, 무슨 댓가를 지불해도 순종할 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능력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나 들을 때에는 먼저 기도하고 성령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절, 특별히 은혜되는 구절은 외우도록 힘쓰십시오. 말씀을 많이 암기해 두는 것은 돈을 많이 쌓아둔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주실 때 위급한 일을 당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암기해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니다.
-아 멘-


후진 금지

[히브리서 10장 32절~39절]
32절 -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절 -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절 -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절 -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절 -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절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절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절 -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동안 정신없고 분주하게 살아온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 지나간 시간들을 아쉬워하며 뒤만 돌아다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계속해서 남은 시간을 보다 더 잘 보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우리의 삶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해서 앞으로 진행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를 돌아다 보기 보다는 앞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매일 빛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은 반드시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미 앞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향해 나아가는 일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신앙을 차(car)에 비유한다면, 신앙의 차에는 후진기어가 없어야 합니다. 빠르건 늦건간에 앞으로만 가야하는 차가 신앙의 차입니다. 신앙은 앞에 있는 소망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며 그것만을 앙망하며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망설이거나 의심으로 인한 후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눅 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은 현재는 보이지 않으나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결코 뒤돌아 봄이 없이 계속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신앙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1.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십시오.
왜 신앙의 후진을 꿈꿀까요? 왜 스스로 신앙의 퇴보를 가져올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지금 누리는 세상의 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래의 산업보다 더 크고 멋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치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과도 같아서 재리(財利)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대신에 세상을 믿고 따릅니다(마 13:22). 결국 신앙인이 뒤를 돌아보고 세상으로 향함은 앞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가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았기에 어떤 고난과 비방 앞에서도 인내할 수 있었고 세상에서의 산업을 빼앗기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33, 34절).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구한 산업을 약속 받아 그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성도들 역시 잠시 잠깐 죄악의 낙을 누리고 현세에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으로 인해 영구한 산업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과 손해가 따르더라도 더 나은 영구한 산업만을 향해 나아갑시다. 너무도 확실하게 약속되어진 영구한 산업을 앞에 두고 후진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2. 담대하십시오.
암울하기만한 환난의 시대에는 믿음을 배반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눈앞에 닥친 위협과 고난의 고통 앞에서 믿음을 말하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믿음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악한 세력의 위협과 세상이 주는 고난 앞에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낙심한 채 뒤로 물러서는 연약한 신앙인의 모습은 암울한 환난의 시대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타나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악한 세력이 가득차 있고 그들은 알게 모르게 신앙인들을 위협하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 17:1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위협한다고 해도 믿음을 포기하고 낙심한 채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크신 능력으로 도우시는 권능의 주님을 바로 깨닫고 믿지 못하는 무지함과 불신앙의 소치이며, 현재의 고난 이후에 다가올 영원한 승리와 영광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부족한 데서 오는 담대함의 결여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세상을 이기시고 궁극적인 승리와 완전한 영광을 이루신 주님이 항상 우리를 도우사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시고 최종 승리를 보장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항상 담대해야 합니다.

3.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또한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주춤거리고 뒤로 후퇴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나아갈 길로 향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들과 세상적이고 불신앙적인 판단 기준으로 형편과 상황을 바라보며 신앙인이 향해야 할 신령한 목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인이 가야하는 믿음의 길은 지극히 제한적인 인간의 생각과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때 이해되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며 미련하게 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그 길은 실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길이며 생명과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고전 1: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분명한 신앙으로 그분이 약속하신 신령한 소망을 향해 그분이 제시하신 진리의 길을 가는 자들은 결코 지체하거나 후퇴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길을 베푸시고 친히 인도하시며 약속된 소망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적극적이고 계속적인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 3:13, 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제 오직 믿음으로 후퇴함 없이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감으로써 끝내 그 소망하는 신령하고 영원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에는 후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생명의 도를 따르는 신앙의 길에서의 후진은 곧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신앙의 길에 서 있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39절)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과 악한 세력의 계교는 우리를 신앙의 길에서 후진하도록 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십시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헛된 생각과 어리석은 판단과 의심을 물리치고 오직 믿음으로 신앙의 길을 달려가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에게는 신앙으로 달려갈 길을 마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면류관이 아름답게 씌워질 것입니다.
-아 멘-

우리를 살리는 것은 믿음 뿐이기에...

[히브리서 10장 38절]
38절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러 해 전에 대연각 호텔에 큰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고, 뛰어내리다가 죽고, 또 끝까지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에는 질식해서 죽는 대 참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때 큰 사다리나 줄이 연결되어서 그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보는 이들이 안타까워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수 많은 영혼들이 멸망에서 구원받는 길을 알지 못하고,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의 불못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의 길은 우리의 도덕이나 수양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며 고매한 성품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다리를 놓아 주신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사다리는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본문에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이 결코 우리의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중세기 암흑시대에 기독교가 심히 타락하여 면죄부를 팔아 먹을 때, 마틴 루터가 분연히 일어나 종교개혁을 일으킨 가장 큰 핵심이 바로 '오직 믿음으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고행이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도 없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로마서도 강조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롬 3:23,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4:5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5: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또 롬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롬 8:1,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 2: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엡 2: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한 이 말씀에서 '은혜'나 '믿음'이나 '선물'이란 말은 모두 우리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값 없이 받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나 공적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에라도 우리의 선행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의 죄를 보고 낙심하지도 말고 내 죄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감정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우리의 감정을 의지해선 안됩니다. 우리의 느낌이라는 것은 굴곡이 심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몹시 기쁘고 흥분되어서 산봉우리에 올라간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캄캄한 터널 속을 지나는 것 같이 감정이 침울하여 메마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느낌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따라 믿음이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태양은 항상 변함없이 떠오르지만 때로는 구름이 가리우고 안개가 가리울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느낌, 감정, 기분이라는 것은 바로 이 구름이나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나 성령을 받았을 때는 천지가 다 변한 것 같고, 춤출듯이 기쁘고 즐겁지만 얼마 지나면 그 감정이 식어지고 담담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은혜가 떨어졌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렸나,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고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그대로 있고 성령도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의 느낌이 변한 것 뿐입니다.
여러분, 처녀와 총각이 연애할 때나 약혼 시절에는 깨가 쏟아지듯이 즐겁고 기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감정이 고조되지만, 결혼하고 몇년이 지나 보십시오. 감정이 늘 그렇게 깨가 쏟아집니까? 시간이 흐르면 담담해 지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연애할 때나 약혼했을 때보다 결혼하고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 사이는 더 가깝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나 성령을 받았을 때의 그 느낌과 기쁨이 식어졌다고 신앙이 약해지거나 하나님과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순간의 감정, 기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을 항상 굳게 믿고 신뢰하며 살 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기도하거나, 기분이 좋을 때만 성경 읽거나, 교회에 가고 싶은 느낌이 올 때만 교회에 나온다면 그 신앙생활은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못됩니다. 기분, 감정은 육에서 나온 것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기분이나 감정에 젖어서 느낌이 좋을 때만 기도하고 성경을 보거나, 예배에 출석한다면 그 신자는 물거품 같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형편없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인간의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우리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숙한 신자가 되려면 감정에 의지하지 말고 의지적인 성령의 능력을 믿어야 됩니다. 가령 처음 성령의 불을 받을 때처럼 뜨끈 화끈할 때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그런 느낌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는다고 느끼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3. 인간의 보고 듣는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감정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보고 듣는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후 5: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고후 4: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지 보이는 것에 의존하면 잘못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데, 어떤 이들은 안믿는 사람들이 점장이를 찾아다니며 복채 내놓고 점을 치듯이 이곳 저곳으로 예언기도 받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우리의 궁금증이나 풀어주기 위해서, 혹은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예언해 준 일이 있습니까? 한 곳도 없습니다. 목회하면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 예언기도 받아 보고 무슨 일을 처리하는 사람치고 성숙한 신자로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거의 다 중도에 잘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데 남의 속에 있는 예수님께 물어보려고 합니까? 또는 환상같은 것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고, 환상이 보이거나 음성이 들리면 하나님 말씀보다 그것을 더 의지하려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를 원하십니다. 보거나 듣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결국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쉽고, 그런 것이 안보이면 은혜가 떨어진 것처럼 느낍니다.
설혹 환상이나 음성이 들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환상과 음성은 다만 참고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앞 날에 되어질 모든 일을 미리 알고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는 날을 미리 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미리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미혹하는 잘못된 신비주의자들은 미래 일을 예언하거나 점쳐 주고,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해서 발표하기도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10리나 100리를 비추는 등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하루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행위도, 감정도, 보고 듣는 것도 신앙 생활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서 간혹 기쁨을 빼앗아 가고 감정의 고갈과 쓰디쓴 맛을 보게 하면서까지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하게끔 이끌어 내십니다. 또한 자기의 선행이나 자기의 의를 믿는 사람에게는 큰 실수와 실패를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라도, 예수님의 피만을 의지하게 만들고 십자가만을 붙들게 하십니다.
초신자는 기도 응답을 잘 받다가도 성숙한 신자가 되었을 때에는 떡을 구했는데 반대로 돌이 나타나고, 생선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생선 대신에 독사가 나타나 덤벼들어서 시험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변치 않을 때 돌멩이가 변하여서 떡이 되게 하고, 독사가 변하여 생선이 되게도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의지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제목 : 십자가를 사랑하라 (피종진 목사님)

[히브리서 12장 1절~2절]
1절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절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할렐루야!
우리 기독교에서 사순절이란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감격에 따른 순간들의 과정이고 감사와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출발하실 때 40일 금식기도로 시작하셨고, 또 마지막 인류 구원의 마무리를 십자가에서 구속의 피를 흘리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기억하며 지키는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십자가를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사랑하고, 마음속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인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에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십자가를 사랑하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와 함께 두 종교를 포함하여 기독교, 불교, 유교를 3대 종교라고 말합니다. 각 종파마다 상징하는 표시가 있습니다. 유교는 ‘땅 위에 사람이 최고다.’라고 해서 삼각형을 표기하고, 불교는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 소를 못살게 굴면 죽어서 소가 된다고 하여 돌고 도는 윤회설로 원형으로 표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왜 사랑하고 자랑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첫째, 속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보석과 황금으로 성전크기만큼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귀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달리신 십자가는 비록 나무형틀의 보잘것없고 험악한 나무의 십자가이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여주시는 대속의 십자가, 속죄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량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하반절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무거운 것’이란 모든 죄악을 의미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 곧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 사함 받으므로 변하여 하나님 앞에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들의 대리(代理)나 고용인이 있어 대신 해 주기도 하지만 인간이 지은 죄는 고용이나 대리가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 그리고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구속해 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아멘.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몸으로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를 받으셨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 중심에는 오직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가문이나, 학력, 업적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만 전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순수한 복음은 바로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어떤 인위적은 방법이나 수단들은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붙잡고, 증거하고, 자랑한다면, 십자가 안에서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변화가 되고, 감사 속에 겸손하게 되고, 또 은혜를 깨달아 주님께서 바로 나의 구속자인 것을 입으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 아멘.
구약시대에는 속죄 제물인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려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린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킬 때 애굽의 장자사망이라는 마지막 재앙을 내려 선민(選民)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 집에는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하셨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과 주님의 능력으로 그 재앙을 넘어간 유월절 사건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심판의 재앙이 통과되고, 저주가 통과되고, 멸망이 통과되고, 지옥의 형벌이 통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 십자가의 은혜를 늘 감사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아멘.
이처럼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형틀입니다. 그런데 그 형틀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신 것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어느 나라할 것 없이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고,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십자가 지기를 싫어하고, 십자가의 찬송이나 십자가에 관한 설교도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사랑하고 감사하며 자랑해야 합니다.

둘째, 화목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인종과 문화와 모든 지역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성도와 가까워지고 모든 주의 백성들과 가까워진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왕의 십자가를 놓고 서로 분쟁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순간 시험이 들었거나, 사탄으로부터 미혹을 받았거나,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성령에 사로잡혀 있다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므로 우리는 평화와 십자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영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신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마 27:51) 이는 만민들이 모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에 우리는 만민의 제사장 축복을 받은 것이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들어와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가 화목하게 된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주시고,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주시고, 우리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죄악으로 막힌 담을 헐어주시고 인간관계의 막힌 담을 헐어주신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하나가 되었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우리는 아무 정죄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로 눈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안경을 쓰고 본다면 흉악한 강도도 예수님 안에서 속죄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영광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그 흉악하고 처참한 고통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수치와 부끄러움까지 참고 견디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치와 부끄러움도 참아야 하며 고난이 있어도 인내하면서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미국의 애플 아이폰을 만든 故스티브 잡스는 죽음을 앞에 두고 많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① 최고의 돈을 많이 벌어 부유한 자로 성공했다고 회고하면서 그렇지만, ②“이 세상에서 가장 기쁨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했고 ③ 그의 생애에 돈만 위해서 살았으니 “나는 뒤틀린 괴물이다.”고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故스티브 잡스는 예수님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길을 걷는 자입니다. 오늘의 부끄러움이나 고난과 오늘의 시련이나 의로운 눈물은 내일의 예수 안에서 기쁨이 되고, 또 미래의 천국에서 더 큰 영광이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된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를 끝까지 자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속죄의 십자가이고, 화목의 십자가이며 영광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복음을 위해서 날마다 전진하여 일평생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이 되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16절]
1절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절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절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절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절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절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절 -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절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절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절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절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절 -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절 -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절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으로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 진 것을 알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선진들은 믿음을 따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1.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1~6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허무한 기대가 아닙니다. 믿음의 근거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히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역사하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으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믿을수록 관계가 깊어집니다.
* 묵상 질문
본문이 정의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묵상해 보세요.
* 적용 질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2.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7~16절)
믿음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역동적인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거룩한 부르심에 충성했습니다. 노아는 먼 미래에 있을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세상의 조롱과 불신 속에서도 방주 짓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가정을 구원하고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리라 믿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에 궁극적인 가치와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인 우리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서 잠시 머물 뿐임을 항상 인식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본문에 언급된 인물들의 삶에서 어떤 특징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나요?
* 적용 질문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에 내가 보여야 할 믿음의 행동과 반응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새해 새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제게 영육의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붙잡는 한 해 되기 원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믿음의 생활 속에는...

[히브리서 11장 1절~12절]
1절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절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절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절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절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절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절 -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절 -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절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절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바르고 참된 생활에 실제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믿음으로 홍해를 갈라지게 했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할머니 사라가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잘 활용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우리의 생활속에 나타나게 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 12:3절에 보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고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또한 우리가 처한 형편과 처지에 따라 믿음 생활의 모습과 믿음의 역사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믿음을 가진 자들의 생활 속에 공통적으로 있어야 하고 나타나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은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분명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믿음의 생활 속에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기대와 소망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러한 기대와 소망이 있는 자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야곱과 같이 기대하며 소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는 것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있어야 그런 은사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빌 2: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믿음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에서 소원(Desire)과 바램(Hope)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겠다든지, 혹은 사업에 성공하겠다든지 하는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소원은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정해져야 믿음이 보다 확실해지고 기도도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도 막연히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1,000명 혹은 2,000명, 분명한 목표를 정해 놓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나아가는 것이 보다 확실한 믿음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가령 여러분이 백화점에 물건을 전화로 주문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크기는 얼마나 하는지, 모양은 어떠한지, 색은 무엇을 원하는지, 상표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의 생활 속에는 과연 어떤 분명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까?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분명한 꿈을 가졌습니다. 열 한 개의 별과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하고 열 하나의 곡식단이 자기 곡식단에게 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형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미움을 사서 그것으로 인해 종으로 팔려가고 옥에도 갇히고 갖은 환난과 시련을 겪었으나 그 꿈을 버리지 않고 나갔더니 훗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고 부모님과 열 한 형제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마침내 그 어렸을 때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분명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십시오!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십시오! 70인역 잠 29:18절에 보면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느니라(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고 했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예수 믿고 은혜받은 12살 때부터 여전도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아담한 농촌 교회의 여전도사가 되어 목회하시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부모님의 반대로 성경 학교에 입학까지 했다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그린 소망, 꽃밭에 둘러 싸인 아담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잊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항상 그 꿈을 그리며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목회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아버님을 이어서 60세가 되시던 해에 여전도사가 되어 그 옛날 처녀시절 마음속에 그렸던 소망대로 아담한 새 예배당에서 정원에 꽃밭을 가꾸며 목회를 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현재는 눈에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기대와 소망을 변치 않는 믿음의 생활을 계속할 때 믿음대로 되어지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2.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불타는 소원을 갖고 있는 자는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창조적인 역사를 이룩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자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불타는 소원으로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하기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불타는 소원을 갖고 기도하십시오. 분명히 응답하시리라 믿고 기도에 힘쓰십시오. 막 11: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렘 33:2절에도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을 받고 더욱 확실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자일 뿐만 아니라 믿음이 올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부르짖어 보고 응답을 받아보아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렘 19:12, 1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당연히 기도하게 되고, 또한 기도해야 믿음이 자라고 응답을 받아 보아야 확증이 더욱 굳어지는 것입니다.
시 50:15절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앞이 캄캄한 환난날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는 자의 생활 속에는 기도가 끊이지 않고, 그것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이 말씀을 믿는 자의 생활 속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믿음의 생활 속에서 분명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심으로써 성공적인 삶,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영원한 속죄가 이뤄지다

[히브리서 9장 11절~22절]
11절 -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절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절 -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절 -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절 -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절 -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절 -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절 -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절 -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절 -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절 -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룬 대제사장이십니다. 그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분은 첫 언약 때 범한 죄에서 사람들을 속량해,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십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1. 영원한 대속의 제사 (11~14절)
첫 언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백성은 죄가 기억날 때마다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첫 언약의 제사로는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을 믿는 사람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실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 묵상 질문
첫 언약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는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나요?
* 적용 질문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의 차이점을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할 수 있나요?

2. 새 언약의 중보자 (15~22절)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에게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언약이 성취되는 데에는 준엄한 기준이 따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취해 언약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첫 언약의 피는 불완전했습니다. 이와 달리 새 언약은 완전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중보자의 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고 피 흘리신 중보자 예수님께 감사하십시오.
* 묵상 질문
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셨을까요?
* 적용 질문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부터(롬 5:8) 나를 사랑하셔서 의인 삼아 주신 은혜에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나요?

오늘의 기도
어떤 노력과 행위로도 저를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죽은 제 양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주님! 참되고 온전한 속죄제를 드리신 주님의 공로에 힘입어 오늘도 하늘 은혜를 감사히 받아 누리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제목 : 믿음의 절정 (진재혁 목사님)

[히브리서 11장 33~38절]
33절 -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절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절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절 -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절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절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며 여러 사람의 믿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순종함으로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 모두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두 가지의 승리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세상을 이기는 믿음
33절은 "그들은 믿음으로"라고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가나안 여러 나라를 이기고 그 땅을 허락받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들 사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끈질기게 이어지는 사울의 칼날을 피하기도 했으며, 기드온과 300용사는 165000명의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경쟁의 틈에서 이겨나가야 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며, 사자 같은, 칼날 같은 위협을 견뎌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 고난을 이기는 믿음
앞서 언급된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승리입니다. 하지만 이어서 등장하는 내용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문을 받고,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는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승리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입니까? 요한일서 5:4절은 말씀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복음 16:33절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견뎌낼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영광, 고난을 견뎌내는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바로 믿음입니다. 더 큰 믿음을 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알고, 순종할 때에 그 믿음이 성장합니다.

Ⅰ. 몇가지 권고 (13:1-17절)
사도는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여러 가지 선한 의무들을 행할 것을 권고 한다.

1. 형제 사랑을 행할 것을 권고함(1)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다. 또한 믿음도 사랑에 의하여 역사한다. 진정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이웃사랑의 고리이다. 이런 형제의 사랑이 그 사랑을 가장 필요로하는 핍박의 때에 오히려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때나 항상 서로를 형제처럼 사랑해야 한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자랄수록 형제간의 사랑도 더욱 성장해야 할 것이다.

2. 나그네 대접하기를 권고함(2)
마지못해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 의무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다' 나그네들이 거처할 곳이 없음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기꺼이 우리의 마음과 집을 비워서 그들이 거기에 기거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의무를 행하는 동기는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후히 대접하는 종들에게는 그들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부지중의 일까지도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신다.

3. 동정심을 발휘할 것을 권함(3)
  1) 이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 :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갇혀 있거나 학대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마치 자신들도 그들과 같은 족쇠에 묶여있는 것처럼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런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이유 :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이는 그들과 또 같은 육신의 몸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신비한 몸, 즉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짐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몸에서 떠나는 것이 된다.

4. 순결하고 정숙할 것을 권함(4)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상기하여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사람이 혼인을 순결하고 정숙하게 유지하고 더럽히지 않을 때 그 혼인은 귀하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더럽힌 부정한 행위에 대한 심판은 두려운 것이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애정이나 연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음행과 간음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상응하는 책벌을 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시고 처벌하실 것이다.

5. 자족할 것을 권고함(5,6)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죄가 바로 탐욕이다. 우리는 이 죄를 자제하려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이 죄를 근본부터 척결하도록 해야 한다. 탐욕과 상반되는 것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기뻐하며 만족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날 그날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을 호전시켜 주셔도 그 환경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그 환경보다 더욱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비록 가진 것도 없고 천한 위치에 처해 있었지만 '어떠한 상태에 처하더라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말하였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심을 확인하게 된다(6절). 인간들은 하나님을 해하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해하려 하는 행위를 자기 백성의 유익으로 변경시킬 수 있으시다.

6.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사역자들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를 권고함(7-17)
죽은 사역자들과 아직 살아있는 사역자들 모두에게 행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 죽은 사역자 대한 의무(7절) 
    ①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전에 그들을 치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들이었다. 
    ② 이들에 대해서 행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저들을 기억하라' 그리고 '믿음을 본받으라' 즉 그들이 살아서나 죽을 때나 지키고 의지하던 믿음의 은혜를 본받도록 노력하라. 또한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 이제 사도는 전에 그들이 가르침받았던 그 진실한 믿음을 따라야 할 것을 그들에게 말하며 더 나아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언급하는 데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항상 살아계시며 항상 변함이 없으시다. 따라서 그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믿는 일에 흔들리지 말고 굳게서야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는 그들에게 빠져서는 않될 잘못된 교훈들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다(9절). 이것들은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교훈과는 전혀 다르며 그들 자체로서도 서로 모순되는 교훈이다. 
      ㉡ 이러한 잘못된 교훈들은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것이다. 
      ㉢ 이 잘못된 교훈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등 외적이고 사소하며 없어질 것들이다. 
      ㉣ 이 잘못된 교훈들은 어떠한 식으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신령하게도, 겸손하게도, 감사하게도 못할 뿐만 아니라 물론 하늘에 이르게도 못한다. 
      ㉤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제단의 특권을 박탈당한다(10절-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리스도 교회에는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물질적인 제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제단이며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인 동시에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다. 이 제단은 진정으로 믿는 자들에게 만찬을 제공해 준다. 주의 성만찬은 복음 시대의 유월절 만찬이시다. 구약의 장막이나 레위기 속의 율법을 고집하거나, 그리고 돌아가는 자는 이 그리스도의 제단의 특권에서 제외된다. 사도는 이 논지에 대한 주장을 먼저 증명한 후 더욱 발전시킨다. 
        ⅰ) 유대의 의식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것은 복음 시대의 제단의 특권을 받는데 장애가 된다. 복음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이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ⅱ) 그는 이 논지를 더욱 발전시킨다(13-15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31절).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능욕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같이 하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잠시 후 죽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이 세상이 우리에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착을 구하여야 한다(14절). 그러므로 이 일에 필요한 복음의 제단을 바르게 사용하자. 즉 우리의 희생 제물들을 이 제단에 가져오자(15,16절). 첫째,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바쳐야만 하는 찬미의 제물을 가져오자. 이 속에는 감사와 찬미와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우리 입술의 열매'들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자선과 사랑의 제물을 가져오자(16절). 우리는 단순히 입술로 즉 말로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선행의 제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2) 살아있는 사역자에 대한 의무(17절) : 이것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자들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하며 자기들이 아주 현명하고 선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망상을 버리고 겸손히 사역자들에게서 배우며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런 의무를 져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사역자들은 교인을 다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의 직분에는 그렇 수 있는 참된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② 사역자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인들을 해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한다. 또 교인들의 영혼을 하늘나라에 가게 하는 모든 기회를 선용하고자 애쓴다.

    ③ 사역자들은 교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지를 지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한 지도를 베풀기를 기뻐한다. 만일 사역자들이 교인들의 충성과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 슬픔에 빠진다면 그것은 사역자들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손실이 될 것이다.

Ⅱ. 결 론 (13:18-25절)

1. 사도는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신과 더불어 고난을 당하는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여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18절).
  1) 자기들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 중 하나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교인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교인들이 자기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할수록 교인들은 그들의 사역으로부터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2) 교인들이 자기들의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대한 정당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다.
    ①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 하노라(18절).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악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당함을 표명하고 있다. '우리가 확신 하노니'라는 말 대신 바울은 '우리가 아노니'라고 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나와 및 여러 그리스도의 일군들) 모든 일에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가 모든 일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하려 하노라."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신자의 모든 의무를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② 바울이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19절). 그것은 현재 그가 그들과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었으며 그들의 기도가 그것을 이루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평강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20절).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화해와 평강의 길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사역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낸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강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 붙여진 칭호는 양의 큰 목자시오 우리의 구세주며 통치자인 주 예수라는 명칭이다. 믿는 자들은 그의 목장의 양떼들이며 그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해하실 수 있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게 했던 수단과 방법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하여서' 였다. 이 피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언약을 성별하고 봉인하는 표시인 것이다.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다(21절). '모든 선한 일에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성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간구되고 있는 위대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즐거운 것을 항상 그들 속에 이루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온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하여 '아멘'하고 화답해야 한다.

3. 사도는 디모데와 더불어 히브리 교인들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23절).

4. 사도는 인사말과 비록 짧지만 엄숙한 축도로 본 서신을 맺고 있다(22절).
  1) 작별 인사를 모든 믿는 히브리인들과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자들에게 전하고 있으며 또한 이달리야에서 온 성도들에게도 문안하고 있다.
  2) 짧지만 엄숙한 축도를 하고 있다(25절).


Ⅰ. 우리의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 (12:1-3절)
여기서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큰 의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한다. 이 의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예비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1)
그것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육체와 현세의 생과 세상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사랑을 의미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우리의 처해있는 환경 우리의 관습, 그리고 우리의 교제들을 통하여 우리가 저지르는 죄를 말한다.

2. 완전해지기 위하여 수행해야 할 의무(1-3)
이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1) 기독교인에게는 달려야 하는 경주가 있다.
  2) 이 경주가 기독교인들 앞에 대기되어 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경주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의 본을 통하여 구획된 것이다.
  3) 이 경주는 인내와 끈기로서 달려야 한다. 믿음과 인내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두 가지를 신장시켜야 한다.
  4) 기독교인들에게는 앞에서 언급한(2절) 믿음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강하게 그들을 격려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어떠한 분이신가? 그는 믿는 이들의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일 뿐 아니라 주이시다. 그는 믿음의 규례를 반포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믿음의 근원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이시다. 그는 은혜의 완성자이시며 믿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능력으로써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또 그는 재판관이시오, 그들의 믿음을 보상하는 분이시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경주하실 때 어떤 고난을 만나셨을까? 그는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3절). 그는 죄인들의 모든 악한 태도를 큰 인내로서 참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참아내셨다. '그는 십자가도 참아내셨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난 고통을 참으시고 마침내 때가 이르자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에 못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굴의 인내와 의지로 이 모든 것을 참아내셨다. '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 그의 생전에 그리고 심지어 죽는 자리에서도 심한 욕설과 비난이 그에게 퍼부어졌으나 그는 이 모든 수욕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③ 이런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혼을 지지해 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의 앞에 놓인 즐거움이었다.' 그는 자기가 고통을 받으시므로써 하나님의 손상된 공의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이 이룩되며 또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을 보시고 즐거워하셨다. 
    ④ 그의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상하셨던가?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신다. 
    ⑤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분을 우리의 본보기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더 컸으며 그 분의 인내 또한 우리의 인내보다 훨씬 더 크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⑥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이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은 낙심치 않게 되고 피곤치 않게 되는 것이다(3절).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낙심케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낙심을 막는 최상의 방법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명상은 신선한 힘과 위로와 용기를 준다.

Ⅱ. 고난을 주는 이유 (12:4-17절)

1. 히브리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고난의 정도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다(4절). 사도는 그들이 죄를 대항하여 싸우느라 고통을 많이 당하였고 고난 또한 컸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더 큰 고난을 겪게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처음부터 극심한 시련 가운데로 불러내지 않으시며, 현재의 감당할만한 고난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훈련시킴으로써 장차 다가올 더 큰 고난을 대비케 하신다.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강건케 하신다는 바로 그 점에 그리스도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찌들리지 말고 그 고난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2. 사도는 이러한 고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서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즉 핍박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들 핍박자들까지도 모두 주관하신다. 이것이 그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당연한 주의였으며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5절).
  1) 사람편에서 볼 때 진정한 핍박이라 여겨지는 고난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아버지의 회초리요 책망이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핍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신자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강건해지도록 연단을 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고난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질책을 무시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된다. 고난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히 여기며 따라서 자기의 죄도 가볍게 여기는 자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질책을 받을 때 나약해져서는 안된다.
  3) 비록 하나님의 진노의 열매로 임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대한 부성적 사랑과 관심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6,7절).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바르게 고쳐야 할 잘못과 결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시정하실 것이다. 또한 그들의 죄를 시정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이다. 현명하고 좋은 아버지라면 남의 자식의 잘못을 눈감아 주듯이 자기 자식의 잘못을 묵인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징계를 받는 일 없이 죄가운데 빠져 허덕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슬픈 표시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생자이지 하나님의 친자가 아닌 것이다(7,8절).
  4)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하여 우리가 공경하는 자세로 감수해야 한다면 하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하여는 더욱 공경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9,10절). 자식들이 불순종하여 부모에게 징계를 받았을 때 그 징계에 복종하는 것이 자녀된 의무이다. 이와같이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을 시정하시고자 징계를 내리실 때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면을 살펴볼 수 있다.
    ① 이 땅의 아버지는 단지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에 불과하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의 몸, 즉 육신만을 주는데 도구 역할을 한 이 땅의 아버지께 우리가 존경을 드려야 한다면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는 당연히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② 우리의 세상의 아버지는 '자기들의 마음 내키는데 따라서' 자녀를 징계한다. 또 자녀들의 태도를 고치려고 징계하기 보다는 종종 감정에 치우쳐 벌을 주는 수가 있다. 이것은 육신의 아버지의 연약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견책은 마땅히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들로 가능한한 자신을 닮게 하려 하신다. 이런 목적하에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징계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만 그들을 징계하신다.
    ③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잠시동안, 즉 우리가 어렸을 때만 우리를 다스리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이 되면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부모님들을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는 인생 전부가 어린아이 시절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현재 우리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견책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

    ④ 하나님의 견책은 정죄나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견책을 하시는 이유는 그 자녀들의 영혼이 죽거나 멸망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고, 그래서 하나님을 닮게 되며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하기 위함인 것이다.
  5)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견책 대하여 현재의 입장으로 그것을 판단해서는 안되며 이성과 믿음과 신앙 경험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음미해야 한다(11절).
    ① 고난을 현재 느끼는 감각으로만 판단할 때 그 고난은 단지 괴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② 고난을 믿음으로 판단할 때는 그 고난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어짐을 생각하고 화평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의의 열매는 평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고난을 당할 때 갖는 가장 큰 관심은 어떻게 하면 그 고난을 잘 인내하여 보다 큰 거룩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인내와 거룩함에 대하여 좀더 살펴 보자.
      첫째,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인내로써 견뎌내야 한다(12절). 그리스도인들은 무거운 고난의 짐으로 어깨가 축 늘어지고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며, 낙담되고 실망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에 대항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더 나은 영적인 경주를 하게 될 것이다. 믿음과 인내, 그리고 거룩한 용기와 결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보다 꿋꿋하게 앞을 향하여 나가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하며 낙담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낙담시키기가 쉽다. 하늘 나라를 향하여 힘있게 전진하도록 서로 돕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둘째,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을 더 높은 차원의 거룩함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14절). 믿음과 인내는 그들로 화평과 거룩함을 얻게해야 한다. 고난은 영혼을 자극하고 감정을 날카롭게 하기가 쉬우나 그리스도인은 고난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유지해야 한다. 화평과 거룩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거룩함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고통이 하늘 아버지의 채찍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배교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15,16절).
    ① 배교에 대한 심각한 경고들
      첫째, 배교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신앙을 고백하나 참된 은혜가 영혼을 지배하지 못함을 의미하며, 이 세상 뿐만 아니라 내세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배교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쓴 뿌리가 자라날 것이며 부패가 솟아 올라와 뒤덮을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생활 원리를 부패시키며 다른 사람의 생활에도 쓴 열매를 맺도록 오염시킬 것이다. 즉 많은 자들이 더러움을 입게 되며, 이들의 악한 생활 원리에 감염되어 더러운 행실에 빠지게 될 것이다.
      둘째, 사도는 에서를 예로 들어서 배교의 두려운 본을 삼고 있다. 에서의 죄는 무엇이었던가?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을 경시하고 장자권과 그 권리에 따른 모든 축복을 팔아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배교하는 죄에 빠지고 말았다. 또 거기에 따른 형벌은 무엇이었던가? 에서는 자기의 죄와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경히 여겼던 그 축복이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에서는 마음속의 커다란 악함 때문에 축복을 싼값에 팔아 버렸으며 모든 판단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확인하시고 기정사실화 하셨던 것이다.
    ② 그리스도를 배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보다 육신의 영화를 더 좋아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이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과 유산을 멸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기는 날에는 그들은 더 이상 죄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거룩한 신앙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나라의 속성 (12:18-29절)

 1. 사도는 복음에 입각한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르며 복음 교회가 얼마나 우수한가를 말하고 있다(18-21절).

  1) 모세 시대의 교회는 전적으로 가시적인 것이었다. 시내산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이었다'(18절). 구약의 교회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외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시온산에 세워진 복음 교회는 보다 영적인 교회이다.

  2) 모세 시대의 교회는 어두운 섭리하에 있었다. 그러나 복음 교회는 보다 분명하고 밝은 곳에 있었다.

  3) 모세 시대의 교회는 무섭고 두려운 섭리하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 두려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19절). 그러므로 모세 자신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복음 교회는 부드럽고 온화하여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적합하다.

  4) 모세 시대의 교회는 제한된 섭리하에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산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복음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약 교회는 엄격하고 공정한 하나님의 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교회였다.

2. 사도는 복음 교회가 하늘 나라의 승리 교회를 얼마만큼 대표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복음 교회는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운다. 따라서 시온산인 복음 교회에 들어가는 신자들은 하늘 나라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자들인 것이다.
  1) 복음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뜻한다. 첫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감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교회를 당신의 자비의 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복음교회는 하늘나라의 상징인 것이다. 둘째,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감을 뜻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유로이 거하게 될 것이다.
  2) 복음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들어감을 뜻한다. 

    ① 그들은 '천만천사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복음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천사와 함께 거하게 되며 마침내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

    ② 그들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속하게 될 것이다. 즉 비록 흩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보편 교회에 속해있는 것이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에 들어가서 그들과 더불어 동일한 복된 소망 가운데서 사귐을 갖고 동일한 거룩한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이곳이 바로 장자들의 총회 곧 이전과 이후의 모든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 될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집에 이들의 이름이 있으며 마치 주민등록부에 주민들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듯이 이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③ 그들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동일한 법에 따라 재판하실 크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④ 그들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의인이라 함은 의에 의해서 으뜸가며 성품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그 영이 온전케 된 사람들을 말한다.

    ⑤ 그들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와 함께 거하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인내하도록 힘을 주는 큰 격려의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복음의 계약은 새로운 계약이며 행위 계약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 새 계약의 중보자시다. 셋째, 이 계약은 우리의 양심속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로써 확증되었다. 이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인간의 양심을 정화시킨다. 넷째, 그리스도의 피는 말하는 피며 그것도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다. 이 피는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한다. 그러나 아벨의 피처럼 복수를 탄원하지 않고 자비를 구한다. 또 이 피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죄사함을 전하여 주고 그들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 준다.

3. 사도는 복음 교회의 속성에 맞는 태도로 인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본장을 종결짓는다(25절). 그리스도는 전에는 땅에서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하늘에서 말씀하신다.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지금 인간들에게 가장 뛰어난 방법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높은 영광의 보좌, 즉 하늘에서 말씀하신다. 또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말씀하신다. 실로 전의 하나님의 목소리는 땅을 진동시켰으나 이제는 땅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킨다. 유대 나라를 산산조각내고 새로운 교회를 세운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보낸 복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듣지않는 사람들의 죄는 더욱 무거운 것이 된다(25절). 하나님께서 다시는 흔들려 파괴되지 않을 새 왕국을 복음의 나팔소리로 이 지상에 세우셨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단번의 변혁이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믿음의 수고는 헛 것이 되고 만다. 둘째, 만일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드리는 데에는 믿음과 아울러 거룩함도 필요하다. 셋째,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정당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한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나타나신 바와 똑같이 복음 아래에서도 공의롭고 정당하시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이시다. 즉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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