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믿음의 본질 (11:1-3절)

1. 믿음의 은혜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로 내리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믿음과 소망은 병행하며 우리의 믿음의 목표와 소망의 목표는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사실은 확신을 갖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육체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들의 실체를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영혼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주어지는 것이다.

2. 믿음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예를 설명한다(2절). 진정한 믿음은 오랜 역사를 지닌 은혜이다. 이것은 어제 오늘 생긴 것도 아니며 현대에 생긴 환상도 아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선진들과 가장 훌륭한 위인들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명예를 얻었고 또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명예롭게 하였다.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좋은 기록을 남길만한 일을 하게하는 동인이 되었다.

3. 여기에 믿음에 대한 첫 항목이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알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은 선재해있던 어떤 물질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3절). 믿음의 은혜는 장래에 대한 안목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통찰력도 가진다. 따라서 믿음으로 이 세상의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지를 알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믿음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려 주는가? 첫째, 이 세상은 영원한 것도 또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니며 누구에 의해서인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또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넷째, 이 세상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Ⅱ. 믿음의 선구자들-1 (11:4-31절)
사도는 이제 구약 시대에 믿음을 굳게 지켰던 사람들의 예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이름이 언급되고 동시에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의 역사도 기록된 사람들이 있다. 둘째, 이름만 언급되거나 이름도 거의 기록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의 사역만 일괄적으로 처리된 사람들이 있다.

1. 아벨의 믿음(4)
가장 먼저 나온 믿음의 예로서 아벨의 믿음을 들었다. 그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위하여 죽었기에 본받기에 적절한 모범을 아벨로부터 시작했다. 
  1) 그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손들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인간은 타락한 후에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가인이 장남이었으나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신 것은 아벨이었다. 사람을 진정으로 영광되게 하는 것은 태어난 순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다. 아벨은 속죄의 희생 제물을 양떼 중에 첫 새끼를 드림으로 바쳤다. 가인은 희생 제물을 알았지만 오직 감사제만을 '땅의 첫 소산'으로 바쳤다.
  2) 아벨이 그의 믿음을 통하여 얻은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아벨이 그의 믿음에 의해 특별한 유익을 얻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았다는 증거를 하심으로 아벨의 인격이 의로움을 증거하셨다. 저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는 후세에 길이 기억될만한 교훈을 남기는 영예를 얻었다. 그가 남긴 교훈의 내용은 무엇인가?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받지 않고 남은 자기 백성들을 해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의 고난에 대해 방관만 하시지 않으실 것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에녹의 믿음(5-6)
  1) 본문에서 그에 대해 기록된 사항 : 첫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둘째,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즉 지상 어느 곳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셋째, '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에녹은 자기 자신의 양심 가운데 그러한 증거를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심령에 증거하셨다. 
  2) 그의 믿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6절)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생한 믿음이 없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찾을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그를 '부지런히 찾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일단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용서를 얻게 된다면 하나님을 찾는데 바쳤던 노고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3. 노아의 믿음(7) 
  1) 노아의 믿음의 근거는 그가 아직 보지 못한 일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경고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치기 전에 경고를 하신다. 이때 그의 경고를 무시하여 경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한 벌을 내리신다. 
  2) 노아의 믿음의 행위 및 그의 마음과 행실에 끼친 믿음의 영향 :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경외함으로' 받았다. 믿음은 먼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다음에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 믿음은 어떤 문제에 대한 반응이 적절하게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마음에 작용한다. 만일 그것이 좋은 것을 심어주고 그것이 나쁜 것이라면 믿음은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킨다. 노아의 믿음은 그의 행실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두려움은 방주를 예비케 하였다.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일하게 하였다. 
  3) 노아의 믿음에 대한 보상 : 첫째, 그가 믿음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멸망을 당할 때 그와 그의 집은 구원을 얻었다. 둘째, 이 믿음으로 노아는 이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였다. 이 좋은 모범은 죄인들을 회개케 하거나 정죄한다. 이것은 믿음의 백성이 악한 사람을 정죄하는 가장 좋은 경우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을 정죄하는 데는 욕설이나 거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본이 되는 생활로 그들 스스로가 정죄를 받게 하는 것이다. 셋째, 노아는 믿음을 쫓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7절). 그는 참된 의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의의 후사가 되었다.

4. 아브라함의 믿음(8-9)
그는 하나님께 친구라 불리웠고 믿음의 조상이며 모든 히브리인이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사도는 다른 어떤 조상들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한 업적을 상술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중에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다. 첫째, 그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그는 자기 아비의 집의 우상 숭배로부터 거듭나게 되었다(창 12:1).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극악한 죄인에게도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이전에 우리에게 오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로 죄 뿐만 아니라 악한 친구들로부터도 떠나도록 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하신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유업으로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후사로 부르신다. 비록 그들은 이 유업을 즉시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 약속은 확실하다. 
  2)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행 :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곳으로 어디든지 이끄시기만을 바랬다. 순종케 하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저는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였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행위였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또한 그는 자기와 같은 약속의 후사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 이 약속은 신자와 그의 자녀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모와 자녀들이 하늘의 유업의 상속인으로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랬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늘나라의 도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성을 바랬다. 그는 이곳을 기다렸고 또한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 곳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온갖 고초 속에서도 그를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5. 사라의 믿음(11,12)
  1) 사라의 믿음의 시련 : 그녀는 잠시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웃었던 불신의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사실 매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2) 사라의 믿음의 행위 : 그녀의 불신앙은 사죄와 용서를 받았다. 그녀의 믿음은 장성해졌고 성경에 기록되게 되었다. 
  3) 그녀 믿음에 대한 보상 : '그녀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버린 태에 자식을 생산할 힘을 주시듯이, 죽어버린 영혼을 살려 열매 맺게 하실 수 있다. 사라는 약속의 아이를 얻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아이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얻었다.

6. 다른 족장들의 믿음(13-16) 
  1) 그들의 믿음의 시련 : 그들은 약속된 것을 아직 받지 못했다. 지상에 사는 성도들의 현재 상태에 불완전은 그들의 행복이 현세의 쾌락과 많은 재물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저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2) 그들의 믿음의 행동 : 그들은 그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① 그들은 약속된 것을 멀리서 보았다. 믿음은 정확한 시력을 지니고 있어서 매우 멀리서도 그 약속된 복을 바라볼 수 있다. 
    ② 그들은 그 약속이 참되며 반드시 성취되라는 것을 믿고 추구하였다. 
    ③ 그들은 그 언약을 붙들었다. 믿음은 긴 팔을 가지고 있어서 멀리서도 그 복된 것을 움켜 잡을 수 있다. 
    ④ 그들은 자신들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다.' 그들은 천국에 본향을 둔 나그네였다. 그들은 본향을 향하여 긴 여행을 하는 순례자와 같았다. 
    ⑤ 이로써 그들은 다른 나라, 즉 그들의 본향인 하늘 나라를 목표 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⑥ 그들은 자기들의 신실성을 충분히 증명하였다. 그들은 떠나온 나라에 대하여 그리워 하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과거의 죄된 상태를 마음에 두지도 않으며 그때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지도 않는 법이다. 그들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을 알고 있으며 그 일들을 소망하고 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가고자 도모하지 않으며 반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꾸준히 전진한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꾸준히 따름으로 우리의 믿음과 고백이 참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의 신실성은 두고온 나라로 돌아가지 않는데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즉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데에서 나타났다. 모든 진실된 신자들은 더 좋은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믿음이 더욱 강할수록 이러한 소망도 더욱 강렬해진다. 
    ⑦ 그들은 이 약속들을 믿으며 죽었다(13절). 그들은 마지막 죽는 날까지 믿음을 지켰다.
  3) 이들의 신앙에 대한 은혜로운 보상 :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6절).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워지셨으며,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도록 허락하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멸시를 당하든지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백성을 위하여 한 성을 마련하셨다. 이 성은 그가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는데 적합한 행복한 곳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지 못하거나 주시지 않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셨을 것이다.

7.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재언급(17-19)
사도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시험과 이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의 본보기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실이다(17절).
  1)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련 :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이 시련은 그 어느 것보다 큰 것이었다.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사라에게서 난 네 외동 아들 이삭을 바쳐라 곧 네게 웃음을 주며 네 기쁨과 즐거움인 네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다 두고 올 뿐만 아니라 번제로 바쳐라"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이 시험이 대단히 큰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몇가지 사실이 덧붙여진다. 그 첫째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후에 이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다(18절). 자기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손을 끊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한다는 선언으로 보였다. 이삭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외동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일한 자손이었다. 그는 이 아들에게 온갖 사랑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죽으면 자기도 죽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을 희생 제물로, 그것도 자기의 손으로 드려야 했다. 이 시험이야말로 아무리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시험이었다.
  2) 이렇게 큰 시험 중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 :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이기 직전까지 나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저지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아들을 죽였을 것이다. 
  3) 그의 믿음을 저지한 것(19절) :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시리라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죽은 자를, 곧 죽은 육과 영혼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4) 이 큰 시험을 이긴 그의 믿음에 대한 보상(19절) : 그는 자기 아들을 다시 돌려 받았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다시 돌려 받았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돌려 주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음에 내어 주었기 때문에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되돌려 받았다.

8. 이삭의 믿음(20) 
  1) 이삭의 믿음의 행위 :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믿음으로 자기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다. 야곱과 에서는 둘 다 이삭의 아들로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야곱이 장자권과 아울러 장자권에 속하는 축복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몫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은 더 좋은 세상의 복을 얻는다. 그 차이를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 이삭의 믿음이 갈등을 겪어야 했던 어려운 문제들 : 이삭은 그의 아들들이 출생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행하시고자 하는 뜻을 정하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창 25:23). 그래서 그는 그가 잘못하여 야곱에게 축복한 사실을 알고 '크게 떨었다'(창 27:33). 그리고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사실을 책망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야곱의 축복을 승인하였다. '내가 야곱을 위하여 축복을 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제 이러한 이삭의 믿음은 그의 불신앙을 극복하고 믿음을 더욱 성숙시켰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연약한 상태를 거쳐 이처럼 신실한 믿음을 지니게 된 것을 기뻐하셨다.

9. 야곱의 믿음(21)
야곱의 믿음에 대한 예는 대단히 많다. 그의 생은 믿음으로 점철된 생이었다. 
  1) 그의 믿음의 행위. 
    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 야곱은 마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자기의 아들들인양 그들로 각각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였다. 이삭이 전에 맏아들을 더 사랑한데 비해 야곱은 므낫세보다 그의 동생인 에브라임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오른손이 형인 므낫세에게 얹어질 수 있도록 그들을 앉혔으나 야곱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에게 얹었다. 
    ② '야곱은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금까지 베푸신 일과 또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행하실 축복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침상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이 허락하는 한, 자기의 정신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께 경배를 하려고 하였다.
  2) 야곱이 이러한 행위를 행한 때는 그의 임종시였다. 그는 믿음으로 살았으며 또한 믿음에 의해서 믿음 안에서 죽었다.

10. 요셉의 믿음(22)
  1) 그의 믿음으로 행한 내용들 : 요셉은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게 되는 구원의 시기가 오리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비록 그는 살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그러한 믿음 가운데서 죽었다. 그는 자기의 뼈를 애굽에 묻지 말고 보존하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는 비록 애굽 땅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지만 애굽인으로 살거나, 애굽인으로 죽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인의 정신을 지켰다. 그는 애굽에서의 장엄한 장례보다는 가나안에서 묻히는 그 깊은 의미를 택하였던 것이다.
  2) 요셉이 믿음으로 위와 같은 모습을 보였던 때는 그가 죽을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임종시에도 생생한 위로를 주신다.

11. 모세의 부모들의 믿음(23)
  1) 그들의 믿음의 행위 : 그들은 그들의 아들을 석달 씩이나 감추어 두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리스도도 태어나자마자 박해를 받고 그의 부모들은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 : 의심할 것 없이 본능적인 마음이 그런 행동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으나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 아이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범상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내리신 아름다움이었다. 간혹 인간의 용모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3) 두려움을 극복한 그들의 뛰어난 믿음 :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사실과 때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이같이 어떤 이들은 그런 일을 감당할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는 것도 감내해야 했다. 믿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로 오는 두려움을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12. 모세의 믿음(24-28) 
  1) 세계를 정복한 모세의 믿음. 
    ①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 공주는 모세를 양육하였고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뿌리쳤다니 얼마나 영광스런 믿음의 승리인가.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는 그가 모든 신자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진정한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또 그것이 자신의 이스라엘과의 관계와 신앙 태도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다. 만일 그가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명예를 용납하였다면 그는 자기 신앙을 버리고 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해야만 했을 것이다. 
    ② 모세는 비록 고난을 받더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과 운명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25절). 이같이 모세는 신앙적으로 행동했을 뿐 아니라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죄를 즐기는 자는 속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 속히 이를 것이다. 이 세상을 즐기는 것, 특히 이 세상의 궁궐을 사랑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죄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신자는 그런 쾌락을 경멸하고 멀리할 것이다. 또 죄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택할 것이다. 가장 큰 고통보다도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는 죄의 결과가 더 무서운 법이다. 
    ③ 모세는 이 둘을 저울질 하였다. 저울 한쪽에는 신앙을 가질 때 받아야 하는 극한 비참함, 즉 '그리스도를 위해 받아야 할 능욕'을 올려 놓고 또 다른 쪽에는 '이 세상의 가장 큰 영화' 즉 '애굽의 모든 보화'를 올려 놓았다(26절). 그런데 가장 큰 괴로움을 겪어야 할 신앙 쪽이 세상의 가장 큰 영화보다 무거웠다. 하나님의 교회를 능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나 지금이나 능욕을 받는 백성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받는 능욕을 자신이 받는 것으로 여기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 받는 능욕에 함께하시는 반면 그들은 부요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이런 사실을 분별해 낸다. 그리고 이런 분별에 따라서 행동을 취한다. 
  2) 모세가 그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던 시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24절). 그는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나이이며 경험도 쌓은 사십 세가 되었다. 모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왜 그 일을 하는지 판단할 수 있으며 또한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성숙한 때 이런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어린 미숙한 아이의 결정이 아니고 성숙한 사고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 주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경멸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것이다. 
  3) 모세의 이런 믿음을 지지하고 강화시켜 주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상 주심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이러한 보상에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관심은 천국으로 행하는 길을 제시하는 등대요, 마음을 이끄는 자석이며, 새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심제이다. 
  4) 모세의 신앙에 대한 또 다른 예가 있다. 
    ① 그의 신앙의 결단 : 그는 '애굽을 떠났다.' 모세는 두 번 애굽을 떠났다. 첫 번째 그가 애굽을 떠난 것은 어떤 애굽인을 죽이므로 애굽왕의 격노를 샀을 때이다. 그는 이때 범인의 누명을 쓰고 애굽을 떠났다. 두 번째 애굽을 떠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바로의 기세를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셨을 때였다. 이때 그는 이스라엘의 지휘관으로 떠났다. 
    ② 그의 믿음의 승리 : 그의 믿음은 왕의 진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하였다. 애굽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애굽인들의 격노를 예상해야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③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가능하게 한 동기 : 이에 대하여 성경은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실존과 우리와 더불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능력있는 현존을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믿는 자로 하여금 도중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목적을 향하여 인내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
  5) 모세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예가 수록되어 있다(28절). 유월절은 구약의 절기 가운데 가장 엄숙한 것이며 가장 의미 심장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놀라운 은총을 얻기 위하여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우슬초단에 묻혀서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야 했다. 그리스도는 이 양이시다. 그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다. 그의 피가 뿌려져야 했다. 그래서 그 피가 구원의 은혜를 입고자하는 모든 사람에게 효력을 발생해야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본래적인 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그의 의에 힘입어서이다. 이 보혈이 역사하는 곳에서 사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며 그에 힘입어 살 수 있게 된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모든 은사들은 우리로 이 세상의 속된 것을 일찌감치 버리게 하며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재촉하도록 독려한다.

13.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29)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도를 받으며 홍해를 건넜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와 그의 군대들을 피할 다른 방도가 없을 때 믿음으로 홍해를 안전하게 통과하였다. 당시 그들이 처한 위험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들의 구출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믿음의 은혜는 천국으로 가는 동안 도중에서 만나는 모든 위험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 
  2) 애굽인들의 파멸 : 그들이 경솔했던 만큼 그들의 파멸도 매우 비참하였다. 죄인들이 자기의 파멸을 스스로 자초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14.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30)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아 여리고 성벽 앞에서 보여준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건은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다(수 6:5이하).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사용하신 방법은 무엇이었던가? 하나님께서 내신 방법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큰 시험을 당하였다. 그 방법은 목적을 달성하기에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전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작고 하찮은 방법으로 큰 일을 행하시기를 즐기신다. 그들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으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여리고 성벽은 그들 앞에서 무너졌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반대 세력을 정한 시간에 따라 차례차례 무너뜨리실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요새를 무너뜨리심으로 신자들의 믿음을 강력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 때는 그 일을 통하여 그들에게 크고 튼튼한 믿음이 일어나게 하신다.

15. 라합의 믿음(31) 
  1) 라합은 어떤 여자였던가? 라합은 가나안 여자이며 '이스라엘의 분깃에 대하여서는 이방인'이었다. 따라서 신앙의 성장을 위한 도움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인이었다. 또 그녀는 기생이었으며 죄 가운데서 살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인 중에 괴수라도 용서하신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는 더욱 풍성한 것이다.' 
  2) 믿음으로 라합은 무슨 일을 하였는가? '라합은 정탐군을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적들로부터 그들을 숨겨 주었으며 그들에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참된 믿음은 선행으로 나타나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 속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선행을 한다. 그리고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의 언약에 들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그 백성과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서도 큰 열심을 품는다. 
  3) 라합은 믿음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그녀는 불신자들과 함께 망하는 것에서 구원을 받았다. 무너진 여리고 성내에는 사람과 짐승이 모두 멸절되는 철저한 파멸이 엎쳤다. 그러나 표식을 붙여놓으므로 라합의 집에는 구원이 임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라합과 그 집은 해치지 말도록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모든 세대가 불신하고, 신자를 핍박하는 상황에 한 명의 신자가 처해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억하시고 그 세대에 모두 멸망하는 자리에서도 그를 구원하신다.

Ⅲ. 믿음의 선구자들-2 (11:32-40절)
사도는 이제 다른 부류의 신앙인들을 요약하는 형태로 소개하므로 자신의 설명을 종결짓는다. 사도는 이 부분을 매우 훌륭하며 설득력있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32절). 우리는 구약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고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굳건했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음의 법도가 완전하고 확실하게 드러난 복음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비하여 믿는 자의 수효가 너무나 적고 믿음도 또한 연약함을 보고 슬프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1. 사도들은 몇몇의 믿음의 인물들을 요약의 형태로 언급하고 있다.
  1) 기드온 :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미디안의 모든 군대를 혼란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
  2) 바락 : 바락은 믿음으로 시스라의 모든 용사들을 물리치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3) 삼손 : 만일 삼손이 그의 강한 힘 못지 않은 강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그는 결코 그렇게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많은 실패를 수반할지라도 하나님께 열납된다. 믿음을 끝까지, 곧 죽기까지 지키면 죽음도 극복하며 죽이려 덤비는 모든 원수들도 제압할 수 있다. 신자의 가장 큰 승리는 죽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4) 입다 :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많은 새로운 적들이 출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퇴치할 여러 명의 새로운 구원자들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아주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세워서 위대한 일을 수행케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신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다.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서원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아 그 서원한 것을 지키게 한다. 즉 입다와 그 딸의 경우와 같이 서원한 내용이 그들에게 큰 슬픔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원을 지키게 해 주는 것이다.
  5) 다윗 :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다윗만큼 큰 시련을 당한 사람도 드물었고 아름다운 신앙을 지닌 사람도 드물었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믿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언제나 성공하고 승리하는 왕이 되게 하였으며, 비록 죄로 얼룩진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영광된 삶을 오랫동안 누린 후에 믿음 가운데서 죽었다. 또한 그는 자기가 당한 시련과 믿음이 행위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을 시편에 수록하여 후세에 전하므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
  6) 사무엘 : 그는 이스라엘의 치리자인 동시에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가 죽는 날까지 함께 하시며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7) 사도는 사무엘을 언급한 후에 '및 선지자들'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특이한 일을 맡기기 위하여 세우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하나님의 자비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죄를 책망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의 사건을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그 놀라운 사건이란 주로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선지자 같은 직분을 올바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되고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했다.

 

2. 다음에 사도는 이 사람들의 믿음으로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기 백성들의 믿음에 설득 당하시곤 하셨던 것이다.

  1) '이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였다'(33절) 세상 나라와 그 왕들이 추구하는 이익과 권세는 종종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대적하는 나라와 그 왕들을 쉽게 굴복시키실 수 있으시다.
  2) 그들은 '의를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이 믿음은 그들로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였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는 것이 훨씬 더 복된 일이다.
  3) 그들은 '약속을 받았다'. 이같은 믿음으로 우리는 약속을 기다리며 때가 되면 그 약속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4) 그들은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였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사나운 짐승이건 야만적인 인간이건 항상 이기도록 해주신다.
  5) 그들은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였다'(34절).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연약한 세 명의 소년들이었다. 아니 소년들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용사들이었다(단 3:17-27). 사실 이들 세 사람이 당한 믿음의 시련은 누구도 겪지 못했던 가장 혹심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 믿음 또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리신 믿음의 보상 또한 지극한 것이었다.
  6) 그들은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다'. 인간들의 검은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다. 믿음은 인간의 검을 쥐고 있는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과 같다.
  7) 그들은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였다'. 영적으로 연약해진 사람을 강건케 해주는 것도 믿음의 은혜이다.
  8) 그들은 '전쟁에 용맹하였다'. 참된 믿음은 참된 용기와 인내를 준다. 또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해 줌과 동시에 대적자들의 연약함을 간파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과 격려로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게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신실한 종들의 면전에서 파하여 물리치셨던 것이다.
  9)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다'(35절). 많은 나약한 여자들이 믿음으로 강건함을 얻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잃고 슬픔에 젖어있었던 여인들에게 그 자녀들을 소생시켜 주심으로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3. 사도는 이렇게 훌륭한 신앙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견딘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하였다'(35절). 그들은 모진 악형을 받으면서도 비굴한 석방을 원치 않았다.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소망이었다.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견뎌냈다'(36절). 그들은 조롱을 받아서 그들의 명성이 훼손당하는 핍박을 받았다. 이것은 순전한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채찍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노예에게 가해지는 형벌의 채찍을 맞았고 어떤 이들은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다'. 그들은 또한 아주 참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원수들은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죽였으나 그들은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견뎌냈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그런 삶을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그런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같이 그들의 원수들은 단지 그들의 비참함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남겨두었던 것이다(37,38). 그들은 믿음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었고 또 믿음으로 이런 고통을 견디어 냈다. 우리는 이런 무서운 핍박을 가하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견고케 하시고 또 그런 핍박 중에서도 믿음의 손상 입음이 없이 무사히 빠져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해야 할 것인가?

4. 그들은 믿음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첫째, '이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명예로운 칭찬'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즉 세상은 결코 그러한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공의를 수용할 자격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은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을 감당치 못한다고 선언하셨다. 둘째,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39절). 그들은 선한 모든 사람들과 진리 자체에 의해 증거를 받았다. 셋째, 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약속받은 좋은 것들을 받지 못했으나 약속에 대한 참여권은 부여받았다. 그들은 아직 본체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림자는 지니고 있었다. 이런 불확실한 섭리 아래서 그들은 그처럼 빛나고 고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그들의 신앙을 더욱 빛나는 것으로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고 말한다(40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더욱 선한 일을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사도는 말한다. 신약의 성도들의 믿음은 구약의 성도들의 믿음보다 더욱 완전해야 한다. 이는 복음으로 인하여 현재의 섭리는 구약의 섭리보다 더욱 명확하여지고 완전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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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불완전한 구약의 제사 (10:1-6절)
여기서 사도는 레위기에 기록된 계율을 낮게 평가한다.

1. 율법은 단지 장래에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좋은 일들은 장차 올 것이므로 아직은 분명하지 않았다. 그때 유대인들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좋은 일의 그림자만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 복음 아래 있는 우리는 그 실체를 접하고 있다.

2.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실체는 아니었고 단지 그림자였다. 율법은 하나님의 원대한 은혜의 계획을 대략적으로 그린 것이므로 지금의 우리는 그 일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다.

3. 매년 드려야 하는 율법의 희생 제사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단번에 온전케 할 수 없었다(1,2절). 그러나 복음으로 얻는 속죄는 온전하여 한 번 사죄를 받은 죄인은 그로써 영원한 죄사함을 받은 것이므로 오직 자신의 회개와 믿음을 새롭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4. 율법의 희생 제물은 드리는 자의 죄를 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불가능하다(4절). 속죄의 제물은 자신이 제물로 드려짐을 승낙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하며 자발적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바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존재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다.

5. 하나님께서 이러한 율법의 제물을 더 이상 받지 않으시며 또 이런 속죄물이 더 이상 죄인에게 효력이 없는 때가 있다고 정해 놓으셨다. 그런데 그때가 왔다. 이 레위인의 율법을 폐지 할 시기는 다윗에 의해 예언 되었다(시 40:6,7).

Ⅱ. 온전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 (10:7-18절)
사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참 대제사장이며 참 속죄 제물임을 알린다. 그는 이것을 다음 사실로 논증하고 있다.

1.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7절).

2. 그리스도를 위한 몸(즉 인성)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실을 들어서 설명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와 구속자로서 인정받으셨다.

3. 하나님께서 어떠한 제물도 받으시지 아니하실 때 그리스도께서 이 구원의 사업에 자진하여서 나선 사실을 들어서 설명한다(7-9절).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이 일을 담당하셨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9절).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경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된다.

4.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과 수행하실 계획을 들어서 논증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
  첫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제사장직을 폐하러 오셨다.
  둘째, 두 번째 제사장직을 세우러 오셨다. 즉 그것은 자신의 제사장 되심과 영원한 복음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세우신 위대한 계획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며 또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5. 그리스도는 제사장직의 온전한 효능의 사실을 들어서 설명한다(14절). 이것은 레위인의 제사장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온전한 위치에 오르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위치로 우리를 인도하실 권세가 있으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영접하여야 한다.

6. 우리, 즉 예수께서 현재 높임을 받으신 위치를 들어서 설명한다(12,13절).
  첫째, 그리스도께서 들림을 받은 명예로운 위치는 하나님의 우편, 즉 모든 것을 자의로 베풀고 받으며 행사할 수 있는 권세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장 명예로운 자리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위치에 오르게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자리를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며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이 자리를 잠시도 비우지 아니하실 것이다. 이 자리는 영원히 그리스도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에 있는 존재들 이외에는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적은 지상에도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적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적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기대하고 계시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정복될 때 모든 믿는 자들의 원수도 정복이 될 것이다.

7. 사도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신 성경의 증거를 들어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설명하였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15절). 이 구절은 예레미야 31:31절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그들 백성에게 내려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 속에 율법을 새겨 주시며 그들의 심령 속에 율법을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16절).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보시므로 더 이상 다른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18절). 이 점이 레위인의 제사장직과 희생 제물로는 도저히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의 임무 (10:19-39절)

1. 여기서 사도는 복음의 존엄성에 대하여 논한다. 복음으로 인한 특권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력을 얻는다. 믿는 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된 존전 앞에 나가도록 준비될 때까지 하나님께 훈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신 복되신 예수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며 또한 하늘에서 그들로 자신과 더불어 거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인 우리는 이 대제사장 없이는 어디서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


2. 기독교인들이 그런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이다.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좀 더 상술한다(20절).
  1)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
  2) 이것은 새로운 길이다. 또 이 길이야말로 항상 효력을 발휘하는 길이다.
  3) 이 길은 생명의 길이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길은 비록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신 구세주께서 내신 길이며 또 이 길에 들어서는 사람에게 생명과 삶의 소망을 주는 길이다.
  4)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이다.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곧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삶의 길인 것이다.

3. 이 특권을 위하여 지켜야 하는 의무를 보여 주고 있다(22,23절).
  1) 먼저 하나님께 바른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데에로 가까이 나아가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거하게 될 때까지 더욱더 가까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첫째, 진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 속을 감찰하시는 분이며 마음 속에서 진심이 우러나오는 것을 원하신다. 둘째, 믿음의 굳건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된 불신앙을 모두 없애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셋째, '우리의 마음에 뿌림을 받아서 양심의 악을 깨달음으로써'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죄책과 죄로 인해 인간의 양심이 범하기 쉬운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씻음을 받게 될 것이다. 넷째,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음으로써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의 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모든 불의까지도 제거해 주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힘입음으로써 우리의 몸을 깨끗게 하여야 한다.
  2) 모든 믿는 자들이 그들의 신앙 고백을 확고히 붙잡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다. 첫째,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우리에게서 빠져 나가도록 총력을 다할 것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둘째, 흔들리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견지해야 할 태도이다. 흔들리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넘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셋째, 이런 의무를 지켜야 하는 동기와 이유는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기 때문이다'(23절). 그는 조금도 거짓이 없으시므로 우리에게도 그렇게 대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약속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더욱 확고하게 의지해야 한다.

4. 사도는 우리의 충성심과 인내를 더욱 향상시키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24,25절).
  1)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한다(24절)'. 기독교인은 서로간에 관심과 사랑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은 가장 훌륭한 선행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된다.
  2)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아야 한다(25절).' 당시에도 모이기를 피하여 믿음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성도간의 교제는 서로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는 것이고 특권이며 또한 믿음의 꾸준함과 인내를 주는 좋은 방법이다.
  3) 서로간에 돌아보아 서로를 권고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 자신도 열심을 낼 뿐만 아니라 이웃도 경건한 열심을 내도록 권면하여야 한다. 이것이 아마 가장 훌륭한 선린이요 우정이 될 것이다.
  4) 우리는 시련의 때가 다가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시대의 징조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장차 다가올 시험의 때와 죽음의 시기가 있다. 우리는 이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경성하여 살펴볼 줄 알아야 하며, 그날이 다가올수록 더욱더 경계하고 의무를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다.

5. 사도는 자기의 권고를 더욱 강조한다(26,27절).
  1) 배교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므로 권고하고 있다. 그는 이 배교의 죄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범한 죄'라고 말한다. 여기서 언급된 죄는 최종적이며 전적인 배교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이 유일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2) 이러한 배교자들의 두려운 파멸을 말하므로 위에서 한 권면을 강조한다. 첫째, 이런 죄를 속하기 위한 또 다른 희생 제물은 없으며 이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실 또 다른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는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 복음의 시대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 준비된 또 다른 피난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단지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7절).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독한 악인에게는 무서운 파멸을 내리실 것이며 그들은 벌써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의 양심에 미리 두려움을 느끼고 이것을 피하지도 견디지도 못하리라는 절망감으로 몸부림칠 것이다.
  3) 모세의 율법을 모독한 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공의의 징계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두. 세 증인의 증언에 의하여 사형에 처형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자비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배교하는 사람들이 떨어지게 될 두려운 운명에 대하여 피력한다. 이들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은 자들'이다(29절). 이런 자들에게 임할 형벌보다 더 큰 형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들은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29절). 이 배교자들도 전에는 자신들을 이 피로 거룩함을 입어야 할 죄인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또 이들의 죄가 중한 것은 이들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령을 슬프게 하고 거역하였다. 이와 같은 행위는 가장 사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어떠한 가망성도 바라볼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져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4)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정의의 속성을 말하므로 권면을 강조하고 있다(30절). 주님의 진노에 대하여서는 계시를 통하여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익히 알려져 있다. 신명기 32:36절에는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이는 교회를 감찰하시고 심판하여 시온에서 죄인들을 심히 혹독하게 징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본문에 나와 있듯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웁도다'하는 말로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31절).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에서 오는 즐거움이 어떠한가를 아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복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5) 사도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에 고난을 당한 것을 상기시키고 끝까지 그 고난을 견디도록 격려한다. 그들은 전날에 복음의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을 당하였다. 자연의 상태는 어두움의 상태이다. 따라서 그 상태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는 세상과 사단의 훼방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은혜의 상태는 빛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어둠의 세력들이 대항하여 덤벼든다. 그들이 당한 고난에 대하여서는 본문에 '고난의 큰 싸움을 참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몸소 이런 고난을 체험하였다. 이들의 인격은 물론 이들의 이름과 평판에 무수한 비방이 쏟아졌다(33절). 기독교인은 그들에 대한 평판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신앙에 대한 평판이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또 형제들에게 쏟아지는 비방과 환란으로 고통을 당했다. 기독교의 정신은 동정할 줄 아는 정신이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몸이며 자기 백성들의 고난 가운데서 함께 고난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만약 한 지체가 고통을 받게 되면 나머지 지체들도 고통을 받게 된다. 사도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그들이 얼마나 심히 고통을 당하였던가를 특별히 상기시킨다(34절).
어떻게 그들이 고난을 견디었던가? 그들은 인내로 고통을 견뎠을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서는 그런 비방의 고통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로 고난을 견디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하늘나라에 더 좋은 그리고 영원한 재산이 준비되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늘나라에 준비되어 있는 성도들을 위한 축복은 실재적인 것이다. 여기 지상에서 받는 모든 축복은 다만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 땅에서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또 이 축복은 영원한 것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그들은 훨씬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이런 축복에 대한 확실한 인식은 이 세상에서 겪게 될 고난의 싸움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6) 사도는 끝까지 견딜 것을 촉구한다(35절). 그는 그들에게 확신을 버리지 말고, 그들의 고난의 원인이 되었던 그 신앙을 더욱 굳게 잡도록 권유한다. 그들의 거룩한 믿음과 확신에 대한 보상은 매우 클 것이다. 그것에 대한 현재의 보상으로는 기쁨과 거룩한 평안이며, 이후에는 더 큰, 말할 수 없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또 그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인내하는 은혜가 얼마나 큰 은사인지를 보여 준다(36절).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직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만큼 기운이 쇠진했을 때는 하나님께 새 힘을 바라는 종이 되어야 한다. 또 사도는 그들이 인내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오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확언한다. 그 정한 때가 있으며, 그 때에 그는 반드시 올 것이다.
  7) 사도는 인내가 그들의 축복이 될 것이며 배교는 욕이 될 뿐만 아니라 파멸에 이를 것이므로 인내할 것을 촉구한다(38,39절). 대 환란의 때에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의인들의 명예로운 특징이다. 믿음은 그들에게 생명과 활기를 준다. 그들은 이런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의지하며 산다. 믿음으로 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이후에 영생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 배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자의 표식이다. 또 배교는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의 원인이 된다. 사도는 자신과 유대인들에 대한 긍정적인 소망을 언급하면서 이 장의 결론을 맺고 있다(39절). 신앙을 고백한 사람은 거보를 앞으로 내딛을 수 있으며 혹은 뒤로도 물러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후퇴하는 자는 파멸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파멸의 구덩이는 더 가까워 지는 것이다. 과거에 큰 시련을 당하고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동안 그들이 전날에 받았던 것과 동일한 은혜가 그들을 항상 도와줄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고 믿음 안에서 죽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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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성막과 성막에서의 예배 (9:1-7절)

1. 사도는 여기서 성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안쪽 부분을 둘째 장막이라 하고 바깥쪽 부분을 첫째 장막이라고 불렀다. 사도는 또한 이 장막의 양쪽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1) 첫째 장막에 있는 것들(1-5절).
    ① 등대 : 결코 비어 있거나 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잔불이 항상 타오르며 밝혀져 있다. 또한 성막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에 이 등대의 빛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 빛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비춰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빛과 비교하여 볼 때 단지 등잔불에 불과하다.
    ② 상과 그 위에 차려져 있는 진설병 : 상은 등대 바로 맞은 편에 놓여져 있었다.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그의 상 앞에 다가갈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빛으로 주의 몸을 분간해야 한다. 그는 생명의 떡이시며, 아버지의 집에는 이 양식이 충분하고 또한 넘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신선한 떡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특히 매 주일에 더욱 그러하다.
  2) 사도는 둘째 장막 안의 성소 내부, 즉 지성소라고 불리는 곳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기명들을 살펴보자.
    ① 금향로 : 이 금향로는 향을 담아 두거나 향을 태우도록 만들어진 그릇이다.
    ② 사면을 순금으로 싼 언약궤(4절) : 언약궤의 안에는 무엇이 있으며 언약궤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첫째, 언약궤 내부에 들어있는 것들 : 먼저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이시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게 하고 또 이후에도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아론과 모세가 놀라운 일들을 행했던 하나님의 지팡이였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실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마지막으로 언약의 비석들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중요하게 보존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과 우리 역시 마땅히 그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언약궤의 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5절) 속죄판 : 이 속죄판이 언약궤를 덮고 있었다. 이것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고 언약의 비석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완전히 덮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 졌다.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와 그의 온전하신 의의 전형으로 그 의가 하나님의 율법을 감싸기에 충분하며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실 만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영광의 그룹, 이것은 속죄판을 덮고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을 의미한다.

2. 사도는 그 장소에서 시행되었던 예배와 의무를 언급한다(6절).
  1) 일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수행하기 위하여 첫 번째 장막에 들어간다. 이곳은 제사장 이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일반 제사장들은 첫 번째 성소에만 들어갈 수 있었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되었다.
  2) 두 번째 장막인 안쪽 장막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다(7절).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이외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이와 같이 천국에는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권리와 공로로 들어가실 수 있다. 대제사장은 피흘리는 제물이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도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하여서만이 이 세상에서나 혹은 이 다음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제물을 드려야 했다(7절).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신을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할 아무런 잘못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재할 때 그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써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율법시대의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도 백성들을 위하여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일을 계속하여야만 했다. 반면에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일을 잊지 않으신다. 즉 그는 이땅에 거하는 자기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대속의 공로에 의지하여 호소하고 계시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피-1 (9:8-14절)
사도는 장막에 대한 규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1.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지 않았었다(8절).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나오는 길을 완전히 활짝 열어 놓으셨다.

2.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었다(9절).

3. 어떤 예물과 제사도 드리는 자의 양심까지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9절).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를 벗겨주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들을 통하여 그는 그 당시의 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4.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개혁이 있을 때까지만 구약의 제도는 존속하는 것이다(10절). 구약의 규례는 영원히 지켜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약속되었던 더 좋은 것들이 실현될 때까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아래 있으므로 율법아래 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유익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나아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더욱 나빠질 것이다.

5. 사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하는만큼 당연히 그리스도가 율법의 대제사장들보다 한없이 높으심을 언급하고 있다(11,12절).
  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11절). 구약이 장래 나타날 것에 대한 그림자라면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다. 약속들이 성취될 때, 즉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제사장직에 의지할 때 장래의 모든 좋은 일들은 성취될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이란 곧 하늘나라의 상태로 되는 것으로 거기서는 구약과 신약이 모두 성취될 것이며 그때의 영광의 상태는 은혜의 상태를 온전케 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의 대제사장이시다(11절). 그의 몸, 곧 그의 인성은 복된 처녀에게 임하신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법, 즉 새로운 창조 질서인 것이다.
  3) 우리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소나 염소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자신의 피를 들고 하늘에 들어 가셨다.
  4) 우리의 대제사장은 단번에 천국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다.
  5) 성령께서는 구약의 희생 제물의 효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율법하에 희생 제물의 피의 효능은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13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훨씬 더 큰 것이다(14절).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다음의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흠도, 하나의 죄의 오염도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은 무엇인가? 이 피는 죽음에 이르는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이 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그 죄된 영혼과 양심에까지 효과를 미친다. 이 피는 우리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하며 성령의 은혜로운 감화력을 통하여 영혼을 거룩하게 하여 재생시킨다.

Ⅲ. 그리스도의 피-2 (9:15-22절)

1. 복음은 여기서 언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계약은 양자간 혹은 다수간에 자기들의 권리하에 있는 어떤 일에 대하여 체결한 합의이다. 이 합의는 그 합의서 내용에 밝혀둔 바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법으로 그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유언은 일방적으로 유언자의 자의에 의하여 선포되는 행위이다. 그 유산은 유언자가 정해 놓은 유산 상속인에게 수여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언자가 죽은 후에 그 효력을 발생한다. 그리스도는 새언약의 중보자이시다(15절). 그러므로 그는 율법 혹은 첫 언약을 범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기에 합당하도록 자격을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2. 이 새언약이 효력이 발생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죽는 것이 필요하였다. 사도는 이것을 두 가지로 증명하고 있다.
  1) 모든 유언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증명하고 있다(16절). 어떤 재산이나 권리도 유언자가 죽기전에는 상속이 집행될 수 없다.
  2) 피 없이는 세워지지 않았던 첫 언약에 따라 모세가 취했던 특별한 방법을 들어서 증명하고 있다(18,19절). 하나님께서는 소나 염소의 피를 용납하셨고 이러한 방법으로 은혜의 계약이 구약의 섭리하에서 유효하게 하시었다. 모세는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들에게 상세히 전하였다(19절). 그다음 모세는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들어 이 피를 뿌렸다. 모세는 이 피와 물을 우슬초와 붉은 양털에 묻혀 다음의 것들에게 뿌리었다.
    첫째, 율법과 언약의 책에 뿌리었다.
    둘째, 사람들에게 뿌렸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함을 의미한다. 모세는 또한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다'라고 말하였다.
    셋째, 장막과 모든 그릇에도 그 피를 뿌렸다. 이는 모든 희생 제물과 예배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서만 열납된다는 사실을 타나낸다.

Ⅳ.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 (9:23-28절)

1.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도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23절).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의 모형이며 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그의 백성에게 있어서 곧 지상에 있는 하늘 나라인 것이다.

2. 본래 원형은 모형보다 더 좋은 법이다. 그러므로 원형은 모형보다 더 좋은 제물을 드려서 거룩하게 구별하여야 한다. 이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은혜로 시작하여 영광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특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율법의 제물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희생 제물이 바쳐진 장소가 더 훌륭하다. 율법 아래에서 바쳐진 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이었다(24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자신이 직접 들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앞에 바치셨다.
  둘째, 희생의 제물 자체가 더 우월한 것이었다(26절). 율법 시대의 희생 제물은 각각 짐승의 생명과 피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피를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피야말로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셋째, 율법하의 희생제물은 반복해서 드려야 했다. 이것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온전하여서 한번만 드려지고 그것으로 모든 목적을 이루기에 충분하였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3절).
  넷째, 율법하의 제물은 효험이 없는데 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은 효험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월함을 알 수 있다. 율법의 제물은 제물 그 자체가 죄를 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은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제거하신다.

3. 사도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정하신 바를 말함으로써 이 논증을 예증한다(27,28절).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 면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잘 죽는다는 것과 한번만 죽는다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죽는 사악한 죄인에게는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죽은 후에 그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불변의 섭리이다. 인간은 죽어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
  2)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신 뜻 :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여 단번에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희생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상함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라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재림시에 오실 것이다. 일찍이 그는 죄된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이 땅에 오셨으나 재림시에는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재림은 그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때 그들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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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새언약의 대제사장 (8:1-5절)

1.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탁월성에 대하여 다시 요약한다(1,2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모시고 있다. 구약의 사람들은 누구도 그러한 대제사장을 모시지 못했으며 그 당시의 있었던 모든 제사장들은 이 대제사장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이 대제사장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1절). 이것은 그의 겸손에 대한 보상이다. 또한 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섬기는 성전은 어떤 것인가(2절). 성전의 외부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상징하는,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있다. 또한 휘장 안의 내부는 사역자께서 하늘에서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장막인 자신의 몸으로 속죄의 사역을 마치신 다음 하늘에 있는 참 장막이며 성소 중의 성소에서 사역하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자신의 위대한 통치권을 발휘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의 교회의 대제사장직으로서도 일하고 계시다.

2. 사도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속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히브리인들 앞에 제시한다(3,4절).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에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제물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강력한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곧 이 땅에서 희생의 사업을 마치셨으므로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드리고 인간을 위한 중보 사역을 하시기 위하여 그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셔야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4절). 그는 레위인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셨다. 만일 그가 계속 땅에 머물러야 할 분이었다면 그는 완전한 제사장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Ⅱ. 옛언약과 새언약 (8:6-13절)
사도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을 확증한다. 그의 사역은 그 자신이 훌륭한 언약의 중보자이므로 다른 제사장들의 사역보다 더 뛰어나다.

1. 사도는 여기서 구약에 대하여 설명한다.
  1) 이 옛 계약은 시내산에서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주신 것이다(9절).
  2) 이 계약은 흠없는 것이 아니었다(7,8절). 즉 그 언약 자체로 볼 때는 온전하였고 그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복음에 비하여 볼 때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3) 이 계약은 확실하지도 든든하지도 않았다(9절). 하나님께서는 이 계약을 지키는 사람은 돌아보시나 이 멍에를 회피하는 사람들은 버리실 것이다.
  4) 이 옛 계약은 낡고 쇠퇴하고 퇴색하였다(13절). 태양이 떠올랐을 때 촛불이 필요없이 되는 것과 같이 복음 시대가 도래했을 때 이 계약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이 되었다.

2. 이제 신약의 섭리에 대하여 설명한다.
  1) 신약은 구약보다 더 좋은 약속이다(6절). 이것은 흠이 없이 모든 것에 온전한 질서를 준다. 이것은 단지 이 은혜의 약속이 이행되는 것만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이 선하고 안전한 손 안에 놓여 있다.
  2) 이 계약은 더 좋은 약속 위에 그 터를 두고 있다.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의 의무를 도와 주리라는 약속과 그 의무 행위를 열납해 주리라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 은혜와 거룩함을 증진시키고 하늘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누리게 한다는 약속이 들어 있다.
  3) 이것은 새 언약이다. 이 계약은 그것을 붙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는 그런 영원하고 새로운 계약이다.
  4) 이 계약의 조항들은 세례와 주의 성례에 의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인쳐진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과 연기계약을 맺으셨다(10절).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돌판에 기록하여 주신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율법을 그들 가운데 기록하실 것이다.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율법의 돌판이 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신과 매우 밀접하고 명예로운 관계로 유지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고'하는 몇 마디 말씀이야말로 수 만권의 책에 풀어 써도 그 의미를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만사에 그를 순종하고 바라며 영화롭게 하고 사랑할 것이다. 이 일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신 사람이라면 반드시 행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 일들인 것이다. 또 이 일들을 하려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능력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이런 관계를 설정하신 분이 먼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적합하고 충분한 은혜로 채우시고 사랑으로 모든 의무를 수행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자신을 더욱더 잘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11절).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이웃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사적인 가르침이 구약 시대만큼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 즉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대되고 강화될 것이다. 아, 어쩌면 이런 약속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12절). 이 사죄함은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즉 사람의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죄는 어떤 죄에도 해당된다. 또 이 사죄는 확실한 것이며 그 용서는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 죄에 대하여 기억하시지 않으신다. 이 용서는 영원 전부터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함이며 그 자비는 영원히 효력을 지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의 섭리가 낡아 없어졌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 확고한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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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멜기세덱의 제사장직 (7:1-10절)
여기서 사도는 이전에 언급한 단단한 고기를 그들 앞에 놓는다.

1. 먼저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기록은 구약의 창세기 14:18과 시편 110편 4절이 전부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1) 멜기세덱에 대한 의견으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유명한 유대인 저자들과 랍비들은 그가 노아의 아들 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멜기세덱이 가나안의 왕이며 살렘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2)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가(1-3절).

    첫째, 멜기세덱도 왕이였고 우리 주 예수도 그러하다.

    둘째,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었다. 그의 이름은 의로운 왕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의롭고 의로운 왕이시다.

    셋째, 멜기세덱은 살렘왕, 즉 평화의 왕이었다. 첫째로는 의의 왕이고 그 다음에는 평화의 왕이다. 우리의 주 예수도 그러하시다.

    넷째, 멜기세덱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과 제사장'이었으며 주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다.

    다섯째, 성경에 그는 특별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족보도 없는 자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전형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계승한 것도 아니며 상속되지도 않은 것으로 그의 독점물이며 영원한 것이다.

    여섯째, 그는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이다. 그는 왕으로서 그리고 축복받은 제사장으로서 복을 빌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자기 백성을 만나서 그들의 원기를 불어넣고 그들을 강건케 하며 또 축복하신다.

    일곱째,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2절). 그러므로 우리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받은 모든 은혜를 위하여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여덟째,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자이다. 멜기세덱은 경건성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방불하였다. 그는 불멸의 제사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이 멜기세덱이 얼마나 위대하였으며, 또 아론의 제사장의 반차보다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살펴보자(4,5절). 이 멜기세덱의 뛰어남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던 사실에서 드러난다. 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그렇게 하였음으로 이를 본받아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9절). 레위는 멜기세덱을 자기보다 크고 높은 자로 여겨서 그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 멜기세덱이 크고 높은 자라는 사실은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는 점에서 명백히 나타난다(6,7절). 아브라함의 놀라운 특권은 그가 약속받은 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손수 축복하시고 그 축복을 보증해 준 사람이야말로 진정 부자이며 행복한 사람이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명예로운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특권을 가졌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는다' 하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Ⅱ. 멜기세덱과 같은 그리스도 (7:11-28절)
사도는 아론의 반차를 쫓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일어나야 할 제사장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한다(11,12절).

1. 온전함은 레위 족속의 제사장과 율법으로 나올 수 없다.

2. 그러므로 온전함을 줄 수 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다른 제사장이 일어나야 한다.

3. 제사장직이 변화되었으므로 율법도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4. 제사장직과 율법이 변화된다는 사실은 주장될 뿐 아니라 입증되고 있다(13,14절). 이제 하나의 섭리가 섰으며, 그 섭리에 의해 진정한 신자들은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1) 제사장이 계승되는 지파가 변했다(14절). 이 계승되는 지파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제사장직의 법이 실제로 변경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제사장을 세우는 순서와 형식이 변하였다.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신 법은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었다. 이 법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무한히 온전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상이신 대제사장은 영원한 생명의 내적 능력으로 자기 직분을 맡으며 그의 희생과 중보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전해 주시는 분이시다.
  3) 제사장직의 효능도 변화하였다(18,19절).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아무 것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더 좋은 희망을 주며 또한 하나님의 사죄와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 소망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용기를 얻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친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이 제사장직을 시행하는 방법을 바꾸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서약으로 제사장이 되신 것이다(21절).
  5) 계약의 내용이 바뀌었다. 복음의 섭리는 율법보다 더 충만하고 자유로우며 능력이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에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셨으며 그로써 화해의 보증이 되셨다. 또한 이러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영원한 언약의 끈으로 묶으셨다.
  6) 제사장의 수효에 있어서 현저한 변화가 있게 되었다. 아론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수효는 많았으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단 한분이시며 변함없이 동일하시다. '저희 제사장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잊지 못함이로되' 우리의 대제사장은 영원하시고, 그의 제사장직은 '갈리지 아니한다.' 이 제사장의 직분에는 공백이 없으며 그의 백성이 이 제사장이 없이 하나님께 영적인 관심을 구하는 일을 한 시간, 아니 한 순간도 없다. 이 영원하신 대제사장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25절).
  7) 이 제사장의 도덕적인 자격도 또한 괄목하게 변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26절). 죄인인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속죄해 주실 대제사장이 필요하다. 이 완전하시며 의로우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킬 적당하고 자격을 구비한 제사장은 없다. 주 예수야 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 대제사장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시고 절대적으로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하다는 기독교인에게도 죄가 있지만 그에게는 일점의 죄악도 없다. 그는 결점이 없으시며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대하여 일호의 잘못도 없으시다. 그는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졌지만 더럽혀지지 않았고, 그러한 사실이 그에게 어떤 오점도 묻힐 수가 없었다. 그는 죄인과는 완전히 분리된 분이시다. 비록 그가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나 기적적인 방법으로 수태됨으로써 다른 모든 인류와는 구별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올리심을 입었기 때문에 하늘 보다도 높으신 자이시다. 그는 자신의 제사장직을 온전히 수행하셨다. 27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과 정당성은 그 직분의 공정성은 비이기성에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다. 그는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으나 많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중보자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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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배교에 대한 경고 (6:1-8절)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성장하기 위하여 복음의 초보를 떠나야만 했다. 복음의 초보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 결코 그것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초보적인 도리를 망각해서도 경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항상 기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그 위에 건물을 세워야 한다. 비록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아직 연약하였지만 어떤 사람은 좀더 성장한 상태에 있었다. 성장한 사람에게는 그들에게 알맞는 것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사도는 그들이 더 자라서 아주 단단한 식물도 소화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1. 먼저 기초를 잘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워야 할 여러 가지 초보적인 원리들이 있다.
  1)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 : 다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다시 기초를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죽은 행실에서 돌이키는 가장 초보적인 원리이다. 비록 우리가 매일 새롭게 회개해야 할지라도 그 기초를 다시 놓을 필요는 없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 :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항상 함께 역사한다.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다른 한 쪽이 없이 한 쪽만 존재할 수는 없다.
  3) 세례에 관한 교훈 : 이 세례는 바르게 집행되어야 하는 초보적인 진리이다. 기독교인들은 매일 세례를 기억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이 세례를 되풀이해서 받을 필요는 없다.
  4) 안수 : 안수는 세례를 받은 시작 단계로부터 견실한 상태로 진지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또는 사람들을 사역자로 임명하는 수단으로 안수가 베풀어질 수 있다. 이 안수도 단 한번만 행해져야 한다.
  5) 죽은 자의 부활.
  6) 영원한 심판.
이상의 것들이 가장 중요한 초보적인 원리들이며 신자들은 이것들로부터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된다.

2. 사도는 히브리인들이 이러한 기초 위에 자신들을 세워나가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천명한다(3절).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은 정당한 것이다. 사역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야할 바를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앞장서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3. 영적인 성장은 믿음을 상실하는 것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1) 사도는 사람들이 얼마나 믿음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타락하여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4,5절).

    ① 그들은 빛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진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며 사실 기독교에 대하여 많이 알면서도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수가 있다.

    ② 그들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지도 않을 물건의 맛만 보듯이 하늘의 은사를 맛보기는 하지만 거기서 떠나 버린다.

    ③ 그들은 성령에 즉 성령의 비범하고 기적적인 은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사도 시대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은사가 내려졌던 것 같다.

    ④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그 말씀을 남들에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 말씀의 요구대로 살려고 하지는 않았다.

    ⑤ 그들은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의 위선은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으나 결국 변절하고 마는 것이다.
  2) 그들이 타락하게 되는 두려운 경우 : 배교 행위는 중한 죄이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6절). 배교를 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옳은 일이라고 인정하고 그들도 그 일을 다시 하여서 그리스도를 공공연하게 비방하고 멸시하려 한다. 배교자들은 몹시 비참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시 새롭게 될 회개의 가망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개시켜 새롭게 하실 능력이 있으나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사람으로서는 그들을 새롭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의 비참함이 적절하게 설명되었다(8절).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서는 좋은 땅과 나쁜 땅의 차이로 설명되었다.

    ① 좋은 땅에 대한 묘사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7절). 참 신자는 말씀의 맛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셔서 좋은 땅이 비를 흡수하고 좋은 채소를 내는 것 같이 결실하여 열매를 많이 얻는다. 이러한 열매를 내는 밭은 복은 받는다.

    ② 그러나 나쁜 땅의 예가 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8절). 이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좋지 못한 가시와 엉겅퀴를 무성하게 내는 것이다. 이런 땅은 버림을 받는다.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받는 것과는 정반대로 '저주함에 가깝다' 이것이 배교자의 비참한 종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은혜 가운데서 계속 성장하며 앞으로 전진하여야 한다. 비록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뒤로 물러서지는 말아야 한다.

Ⅱ. 하나님 약속의 확실성 (6:9-20절)
사도는 그들의 소망에 대하여 일러 준다.

1. 사도는 그들에 대하여 자신이 품고 있는 선한 소망을 밝힌다(9절). 구원에 가까운 것 곧 구원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사역자들은 때로 구원의 큰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 빠진다면 얼마나 실망이 클 것인가. 구원의 소망을 가진 자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2. 사도는 그들이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격려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사랑과 자비의 원리를 심어 주셨다(10절). 사랑에서 우러나와 하나님을 위하여 노고를 다하는 것은 칭찬을 받을만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 사랑의 노고에 대하여 귀한 상금을 바라는 사람은 자기에게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한 꾸준히 그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자기의 의무를 부지런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받을 상급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믿게 된다. 온전한 확신은 보다 높은 소망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들 확신과 소망은 본질상 같으며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온전한 확신은 큰 열심과 끝까지 견디는 인내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사도는 끝날까지 이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어떻게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과 경고를 준다. 이런 사람들이 되려면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편함만을 구하지 말아야 하며 주어진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12절). 확신을 통해 기업으로 얻은 사람들이 고수했던 방법은 믿음과 인내였다. 우리도 믿음과 인내로 그들의 뒤를 따라야 한다.

4. 사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장된 진리를 말한다(13절).
  1)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 확정된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복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복받는 데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 이 말씀보다 더 큰 보장은 없으며 또한 바랄 수도 없다. 아브라함은 끈질긴 인내로 마침내 유익한 결과를 얻었다.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 사이에는 항상 얼마간의 기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 기간은 믿는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는 사람은 종국에 이르러 아브라함과 같은 그 복된 약속을 얻게 된다(16절). 이것이 주께서 약속하신 그 맹세의 본질이며 예정이신 바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그 백성에게 맹세하셨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 맹세의 본질과 예정하신 바를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영원하신 가르침 가운데서 분명하게 터를 잡고 있다. 그의 이러한 뜻은 불변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약속을 변경시키지 않으신다.
  3) 하나님의 약속은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이러한 축복을 보장해 주신 대상은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이들은 그들 앞에 서있는 도피성을 찾아 도피한 사람들과 같다. 이 도피성은 이곳에 피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곳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것은 그들에게 큰 위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위로를 얻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위로는 신자들이 큰 환란 가운데서도 평안함을 얻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이 세상의 위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한없이 크고도 넓은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이 소망과 위로를 사용하는가(19절). 우리는 폭풍에 휩쓸려 떠 내려가게 될지도 모르는 배와 같이 이 세상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항해의 목표가 되는 항구이다. 우리는 우리를 확실하게 붙들어 줄 닻이 필요하다. 복음의 소망은 우리의 닻이 된다. 그 닻은 안전하고 견고하다. 또한 그것은 거미줄처럼 외관만 그럴듯한 소망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실한 사역의 결과이다. 이것은 목적에 부합할만큼 튼튼하고 확실하다. 이것은 모래 위에 내려진 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내려진 것이다. 곧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의 소망의 닻이 머무는 반석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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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5:1-9절)
일반적인 제사장직의 특성을 서술한다.

1. 대제사장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는가.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택함을 받아야 한다. 대제사장은 우리 중 한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죄인이 직접 단독으로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대제사장을 통하여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모든 대제사장은 사람을 위하여 임명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임명되는 것이다.

3. 어떤 목적으로 대제사장이 임명되는가.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1) 대제사장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예물과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자진해서 드리는 것이어야 하며 강요를 받아서 드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2) 대제사장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린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셨다. 우리의 선한 행동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지며 우리의 악한 행동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드려진 희생 제물을 통하여 사면을 받아야만 한다.

4. 이 대제사장은 어떻게 그 자격이 구비되는가(2절).
  1) 대제사장은 무식한 자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대제사장은 진심으로 무식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 대제사장은 '미혹한 자'를 용납하여 그들을 곁길 즉 잘못된 길에서 이끌어 내어 바른 길로 인도할 만한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에게는 큰 인내와 자비, 즉 하나님의 자비가 요구되는 것이다.
  2) 대제사장은 또한 연약에 싸여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더욱 동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도 하나님으로 그렇게 적합하게 되셨다.

5. 이 대제사장은 어떻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는가(4절). 제사장의 직분은 매우 명예로운 자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과 열납과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제사장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며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축복 대신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

6.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는가(5절). 비록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 영광된 일인 줄 아셨을지라도 그는 스스로 그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보냄을 받아서 오신 것이므로 스스로 제사장직을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제사장직을 취하려 하지 않으셨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마땅히 스스로 취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아론보다 앞선 것을 말한다.
  1)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의 부르심을 받은 방법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하신 적은 없다. 그리스도를 부르신 또 하나의 말씀이 6절에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아론의 계열보다 더 높은 계열의 제사장직에 임명하셨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이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영속적인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거룩하심 : 다른 제사장들은 타인들의 죄와 아울러 자기의 죄를 위하여 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속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8.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맡으신 것과 그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7-9절).
  1)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맡으심(7절).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셨다.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는 죽음 아래 계셨다. 그는 시험을 받으시고 피흘리며 죽으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 떨어지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쓴 잔을 거두시지 않고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쓴 잔을 마시지 않으셨다면 그 잔을 우리가 마셔야만 했다. 육체를 입고 계셨던 때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와 간구를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예는 성경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수난 중에 또 수난받기 이전에도 기도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올리신 기도와 간구는 눈물과 통곡의 것이었으며 이것은 우리의 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함이 없이 냉냉한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는가! 그리스도는 자신이 염려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래서 그는 고통가운데, 그리고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시는 가운데 즉각적인 응답을 받으셨으며,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하여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하셨다.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지 않고는 그것으로부터의 진정한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병에서 회복될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없다.
  2)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직을 맡으신 결과(8,9절).
    ① 이 고난을 통하여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8절). 입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불순종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까지, 즉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셔야 할 경우는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②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 대한 영원한 구원의 주재자가 되셨다. 이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를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져내신 구세주가 되신 동시에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추앙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단지 자기의 백성만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구원을 베푸시는 구주가 되실 것이다.

Ⅱ. 믿음의 진보에 대한 호소 (5:10-14절)

1. 사도는 멜기세덱이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인물에 대하여 그들에게 할 말이 많다고 전한다.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구속자와 그의 직분에는 커다란 신비가 있다. 기독교는 경건한 큰 비밀에 속한 것이다.

2. 그가 우리의 멜기세덱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귀가 둔하여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란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믿음이 다소 있는 사람 중에도 귀가 둔한 사람이 있다.

3. 귀가 둔한 것은 단지 본성의 연약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연약함 때문이다(12절).
  1) 이들은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런 수준에 올라 있어야 합당했다.
  2)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평이하며 꼭 알아 두어야 하는 초보적인 진리들이 들어 있으며 또한 깊고 장엄한 비밀도 들어 있다.

4.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가 있다(12-14절). 또 복음에는 젖과 같은 것도 있고 단단한 식물과 같은 것도 있다. 영적인 어린 아이가 되어서 말씀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젖과 같은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적 어린아이를 책망하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섭취하기에 적당한 음식물을 준비하신다. 또한 장성한 자를 위한 단단한 식물도 있다(14절). 기독교의 더 깊은 진리는 더 높은 수준의 신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풍부한 자양을 공급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로운 생명의 양식이요, 자양분이다. 본능적인 지각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지각도 있다. 영혼은 육신과 마찬가지로 지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지각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기도 하고 은혜로 회복되기도 한다. 이 영적 지각이 회복될 때 선과 진리의 달콤한 맛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또한 거짓과 악의 쓴 맛을 강력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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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 (4:1-10절)

1.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으로 인한 우리의 특권은 엄청난 것이며 또한 모세의 율법으로 인한 복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안식이 주어졌다. 이 영적 안식의 약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중한 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이며 그의 영원하신 뜻과 언약 가운데서 세우신 약속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그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인식하고 하늘나라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바랄 수 있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일뿐이다.

2. 우리도 유대인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큰 권한을 가졌다(2절). 실제로 동일한 복음이 신, 구약에서 증거되고 있다. 우리도 유대인의 조상들이 받았던 동질의 복음을 받았으며 오히려 그들이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명료한 것을 받았다.

3. 복음의 섭리 아래에서도 유대인의 조상들이 소수 밖에 유익을 얻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적은 탓이었다(2절). 이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그것으로 인하여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전해진 것이다. 이것은 지혜를 얻도록 우리 손에 쥐어진 보물이다. 그러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했다.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하는 자는 많은 것을 잃은 자이다. 말씀을 듣고도 유익을 얻지 못하는 근거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불신앙이다. 만일 복음을 들은 자가 말씀으로 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그 복음으로써 얻은 유익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말씀과 더불어 생겨나야 하며 일단 들은 다음에는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4. 복음을 듣고 기쁨을 얻은 사람은 항상 자신들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열심을 간직하여야 한다(1절). 그렇지 않으면 믿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구원이 불신으로 상실될 수 있다. 복음의 구원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심각한 두려움을 준다. 사실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거룩하고 경건한 두려움을 지녀야 한다. 교만이야말로 멸망으로 이르는 첩경이다.

5. 사도는 복음을 진실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내려질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1)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또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말이 진실됨을 확언한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3절).
  2) 사도는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서 확증하고 예증한다.

    ①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신 사실(3,4절) :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들의 사역을 끝마친 사람들을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실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안식일을 엄수할 것을 명하신 사실 : 여호수아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나가서 가나안에서 취한 안식보다 더 훌륭한 영적인 안식이 기독교인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6-9절). 신자는 장래 이 복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10절).

6. 사도는 또한 불신자들이 비참해질 것을 확언한다. 그들은 이 영적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안식은 오직 믿는 자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으며 믿지 않는 자는 버림받아 영원한 고통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다.

Ⅱ.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신 그리스도 (4:11-16절)

1. 사도의 진지한 권고(11)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다. 이것만이 안식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현재 믿음의 수고를 하지 않는 자는 장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열심히 노력을 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힘쓰도록 권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일하는 때이며, 우리의 안식은 남아 있는 것이다.

2. 이 권고를 효력있게 하기 위한 동기 (12-16) 
  1)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절). 우리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한 것을 보고 거기서 만일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우리도 죄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우리가 이런 안식을 얻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양심을 사로잡아 매우 생기있게 활동한다. 또한 죄인의 마음을 찌르며 영혼의 상처를 싸매 준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이 말씀은 강력하게 설득시키고 강력하게 회개시키고 강력하게 위안을 준다. 이 말씀은 사단의 왕국을 강력한 힘을 파하며 그 터 위에 강력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이것은 어떤 방향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으며 날카롭게 쪼개고 해부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자만심에 젖어 있던 영혼을 겸손하게 하며 사악한 영혼을 온화하고 순종할 수 있게 한다. 이 말씀의 검은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즉 인간의 가장 은밀한 내면까지도 들추어 내시고 잘라낸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이 말씀은 죄인의 마음을 들추어 내며 죄인 자신에게 자기의 마음 속 상태를 보여 준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①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특히 전지하심(13절) :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앞에서 피하여 숨을 수 없다. 우리의 머리와 마음의 어떤 움직임도 감출 수 없으며 그 앞에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난다. 이 그리스도의 전지하심은 우리로 항상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하도록 요구한다. 
    ② 그리스도의 직분, 특히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심. 
      ㉠ 그리스도는 어떤 대제사장이신가(14절). 첫째, 그는 큰 대제사장이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의 크심은 그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의 대제사장직의 일부를 수행하시고 또 하늘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또 다른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의 크심은 예수라는 그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즉 그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오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의사이시며 구세주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에게는 자비로우시고 동정심이 많으신 귀한 대제사장이시다(15절).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동정하신다. 셋째,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대제사장이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절). 우리는 더러 시험을 당하고 어떤 악에 빠지곤 한다. 우리는 굴복하지 않더라도 주춤거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큰 대제사장께서는 마귀와 직면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순결성을 잃지 않으신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에 대한 신앙 고백을 굳게 지켜야 한다(14절).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또 그리스도를 부인해서도 안된다. 기독교인은 처음에 잘 출발해야 하며 또 잡은 것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16절). 은혜의 보좌가 설치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엄격한 공의의 재판정을 여셨지만 동시에 은혜의 보좌도 설치하셨다. 이 보좌는 은혜가 자유와 능력과 관대함으로 다스리며 작용하는 보좌이다.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서 우리가 할 일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 것이다.' 자비와 은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즉 자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는 것이며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순결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는 실로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존경과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것은 공의의 재판정에 들어서는 것 같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자리에 초대받아 가는 사람처럼 점잖게 나아가야 한다. 이곳은 우리를 높이는 사랑이 넘치는 곳이며 은혜로 다스려지는 곳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확신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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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모세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 (3:1-6절)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관한 교리를 적용시킨다.

1. 사도는 교인들에게 이 대제사장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1) 이 서신을 받는 사람에게 명예로운 호칭이 붙여졌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1절). 형제라 함은 나의 형제가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 형제가 된다는 의미이다. 거룩한 형제들이라 한 이 거룩하다는 말은 단순한 칭호나 고백만이 아니라 심령과 생활에서 실제로 거룩하다는 말이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즉 은혜의 수단과 은혜의 성령에 참여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은혜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서 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다.
  2) 사도가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한 호칭 : 사도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도록 하였다.

    ① 우리는 신앙고백의 사도로서 즉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과 소망의 계시자로 여겨야 한다.

    ②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으로도 여겨야 한다. 그의 속죄와 중보로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용납되는 자들이 될 수 있다.

    ③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여겨야 한다.

    ④ 우리의 구원자, 치유자이신 예수로서 여겨야 한다.

2. 이런 높고 영예로운 명칭을 지니신 분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임무는 어떤 것인가. 우리의 믿음의 공급자요 완성자로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심지어 거룩한 형제들 혹은 하늘의 부름에 같이 참여한 자들이라도 그리스도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기 위하여 서로 서로 격려할 필요가 있다. 가장 훌륭하다는 신자들도 그리스도에 대해 좀처럼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너무 소홀히 생각한다.

3.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고백의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생각하게 하는 여러 가지 논증들.
  1) 먼저 그리스도의 충성심을 제시한다(2절). 그리스도는 모세가 온 집에서 한 것처럼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였다. 모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에게 맡겨진 직책을 신실하게 수행하였으며 그리스도는 신약에서 그와 같은 신실하심을 보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설득력있는 논증이다.
  2) 그리스도의 뛰어남과 영광이 모세보다 훨씬 크다(3-6절).

    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지은 분이며 모세가 지은 집은 그 일부에 해당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이 집의 설계를 그리시고 재료를 준비하시고 교회의 형태를 이루어 놓으셨다. 그리스도는 이 집을 통합하시고 하나님의 집에 진정한 영광이신 자신의 몸을 이곳에 두심으로써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영광되게 하셨다.

    ② 그리스도는 이 집의 건축자이실 뿐 아니라 이 집의 주인이시다(5,6절). 모세는 단지 이 집의 충실한 하인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이 교회의 통치자이시고 합법적인 주인이시다.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더 큰 관심과 존경을 받아야 한다. 이제 이어서 그 말씀을 사도 자신과 모든 진실된 신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우리가…그의 집이라(6절). 사도는 이 집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묘사한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사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즉 그리스도의 진리 위에서 잘 세워나가야 할 뿐 아니라 끝까지 견고히 견디어야 하는 것이다.

Ⅱ. 불신앙에 대한 경고 (3:7-19절)

여기서 사도는 그들에게 심각한 경고와 충고를 계속하면서 시편 95:7 등을 인용한다.

 

1. 사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하여 신속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충고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그가 말씀하시는대로 실천하라. 오늘 당장 그 일을 시작하라 내일이면 늦을 것이다."

 

2. 사도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충고에 귀를 기울이도록 그들의 완고한 심령에 대해 경고한다. 우리의 강팍한 마음은 모든 죄의 원천이 된다.

 

3. 사도는 광야에서 그들의 조상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태도를 예로 들어서 경고한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8절). 이 말씀은 출애굽기 17:2-7에서 인용한 것이다. 시험을 받을 때 종종 반발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가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조상의 죄와 심판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전철를 밟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세에게는 불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시고 또 광야에서도 지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것이다. 그들은 사십 년 간이나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했다. 이러한 범죄의 근원과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아 마음 속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 속에 품은 죄가 입술과 행동으로 옮겨져서 외부적인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아직도 행하셨어도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도 규례도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셨다. 그러나 사실은 오랫동안 그들에 대하여 크신 인내를 베푸셨다(10절). 어떠한 죄라도 하나님을 노하시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다. 만일 그들이 계속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계속 슬프시게 한다면 그들의 죄는 심판을 받든지 혹은 자비를 받아서 용서함을 받든지 간에 자신들의 영혼을 또한 슬프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하여 그들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오랫동안 계속 범죄하며 그 죄 가운데 머물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크게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평안이 없는 상태를 초래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 사도는 조상들의 무서운 종말을 예로 든다(12,13절).

  1)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돌이켜 보라'는 합당한 경고를 한다. "너희 주변을 돌아 보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적이 들어올까 경계하고 주의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파멸을 통해 그들이 걸려 넘어진 걸림돌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2) 사도는 이 일에 대한 적용 범위를 확대시킨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12절). 믿지 않는 마음은 악한 마음이다. 불신의 악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리하는 근원이 된다. 만일 하나님을 불신하면 곧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3) 이런 불신의 악한 마음은 치료하는 것임(13절) : 내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현재의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여야만 한다. 죄 안에는 많은 속임수가 있다. 죄는 많은 약속을 하지만 시행하는 것은 없다. 죄의 속임수는 영혼을 완고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 또 잦은 범죄는 습관이 되고 만다.

  4) 사도는 잘 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잘 하고 있고 또 끝까지 신앙을 지킬 사람들을 격려한다(14절). 성도가 누릴 특권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과 그가 하실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가 이런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행하여야 하는 조건은 믿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구원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향하여 전진하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길에 처음으로 들어설 때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전지해야 한다. 처음에는 굉장한 신념과 용기를 보이다가 나중에는 그 믿음을 상실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5) 사도는 앞에서 인용한 것을 다시 요약한다(15,16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다 하나님을 진노케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순종할 사람을 남기실 것이다.

  6) 사도는 앞서 언급한 사실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17-19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죄하고 또 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슬퍼한시다. 불신은 (그 결과인 반역과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 받을 죄이다. 이 죄는 하나님의 마음 문을 닫게 하고 또 이들에게는 하늘의 문조차 닫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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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구원의 확증 (2:1-4절)
사도는 이제 권면과 논증을 통하여 이 교리를 적용하고자 한다.

1. 권면의 방법으로(1절) :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항상 복음의 진리와 지시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진리와 지시를 마음에 항상 새겨야 하며 기억하여서 마침내 우리의 언행이 복음에 의하여 새롭게 되어야 한다.

2.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서 이 권면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1) 우리가 들은 복음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1절). 우리의 마음의 바탕과 기억력은 구멍 뚫린 그릇과 같아서 우리가 항상 큰 관심과 주의를 쏟지 않으면 거기에 담겨졌던 것이 모두 빠져 나가고 만다. 이렇게 해서 복음의 진리를 상실한 사람은 치명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다.
만일 복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랫동안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주의하여 듣지 않은 사람은 곧 말씀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
  2) 또 다른 주장은 만일 우리가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무서운 형벌을 당한다는 것이다(2,3절).

    ① 이 의무와 관련된 율법은 무엇인가. 그 율법은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견고히 되어(2절)' 즉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진 말씀으로 공고하게 된 것이다. 율법은 불변의 언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진리이며 신실한 것이다. 율법은 사람이 그 율법에 복종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사람에게 적용되며 또 그 효력을 발생한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하찮게 여길지라도 율법은 사람을 경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다. 순종하면 거기에 상응한 보답이 주어지듯 이 율법에 의한 심판도 지은 죄만큼 정당하게 내려질 것이다.

    ② 복음이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복음은 구원이되 위대한 구원이며 누구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고 또 그 위대성을 모두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복음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에서 또 얼마나 깊은 비참함 속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보여 주며 얼마나 큰 거룩함과 축복을 받았는지를 가르쳐 준다.

    ③ 복음에 대해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 이 죄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다. 또 이 죄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멸하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무시하는 사악한 죄인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④ 이런 죄인이 얼마나 비참하게 묘사되었는가. 이들에게 임하는 비참함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어찌 피하리요(3절). 이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은 이미 정죄를 받았다. 즉 이미 체포되어 심판의 손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정죄를 피할 길은 오직 복음에 나타난 구원을 받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 구원의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다. 그들에게 열려 있는 자비의 문은 없으며 단지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3) 또 다른 권면은 복음을 최초로 말씀하신 분, 즉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3절). 모든 사람이 이 주님을 존경하고 어떤 사람도 말하지 못했던 복음을 말씀하신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또한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했던 자들의 인격을 들어서 권면하고 있다(3,4절).

    ①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들은 전도자들과 사도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행 1:1). 이들 복음 증거자들의 사역에는 어떤 세상적인 목적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많이 잃으면서도 복음을 전하였으며 심지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의 희생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②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전도자들의 증거를 친히 보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을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전도자들의 증거를 보증하셨다(4절). 우리를 믿음 위에 확고히 서게 하고 우리의 소망을 굳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과 같이 복음을 증거하실 때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 복음의 섭리가 뛰어나고 놀라운 것임을 증거하셨다.

Ⅱ. 그리스도의 수난의 목적 (2:5-9절)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니라(5절).

1. 여기서 사도는 반어법을 사용하여 강력한 긍정적인 주장을 피력한다. 즉 오는 세상으로 불리우는 복음 교회의 상태는 천사들에게 복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통치하신다. 천사들은 이 임무를 맡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2. 복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시편 8:4-6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일반적인 모든 인간에게도 적용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 이 말씀이 일반적으로 인간 전체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친절과 관심에 감사와 감격을 금치 못한다.

    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항상 우리를 마음에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살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야만 우리의 영혼이 보호,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③ 인간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 삼으셨다.

    ④ 신령한 권세와 능력을 지닌 명예와 영광으로 인간에게 관을 씌어 주셨다.

    ⑤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권을 주셨다.
  2) 이 말씀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될 경우를 생각해 보자(8,9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모든 선의의 동기는 그의 은혜이다. 이 값없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인성에다 하나님의 온전한 거룩함 가운데 영광과 명예의 면류관을 씌우신 것이다. 즉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심으로써 그가 만족하시게 할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낮아지신 일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면류관을 받으셨다.

Ⅲ.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유 (2:10-13절)
사도는 이제 십자가에 대한 불명예를 벗기기 시작한다.

1. 그리스도를 고난받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10절).
  1) 하나님은 만물의 최종 목적이요, 원인이 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2)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통해 이 영광스런 성품대로 행하셨음이 선포되었다.
    ① 목적을 정하심 : 많은 자녀들을 영광에 들어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먼저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록 한 시대, 한 지역에서는 소수일지라도 종국에 그들이 모두 모아질 때는 많은 수가 될 것이다.
    ② 구원의 방법을 정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이 구원의 대상을 고난받게 하여 온전케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대장되신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면류관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성도들은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고 친밀한 사랑의 유대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1)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룸(11절) : 성화의 역사를 이끈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일체이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동일한 하늘의 아버지를 모셨고 또 동일한 지상의 아버지 아담의 자손이다. 또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동일한 인성을 가졌으며 동일한 성령을 소유하고 동일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다.
  2) 친밀한 사랑의 관계
    ① 여기서 이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밝힌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서로 형제 간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결코 부끄럽게 하시지 않는다.
    ② 여기서 성경 세 곳을 들어서 예증하고 있다.
      첫째, 시편 22:22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는 자진해서 그를 따르는 교회 또는 회중이 있다. 이들은 상호간에 형제가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도 형제가 되며 그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둘째, 그 다음은 시편 18:2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형제들도 역시 고통을 당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 또한 이사야 8:18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할 때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기뻐하시며 그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

Ⅳ. 그리스도의 성육신 (2:14-18절)

1.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강조되고 있다(16절).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을 지니고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므로 온전하고 진정한 인간이 되셨다. 그는 천사를 붙들어 주려 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셨다. 천사의 본성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을 치룰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회복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나셔서 죄로 고통 받아야 하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많은 죄인을 위한 소망과 도움이 오게 되었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이유와 계획이 선포되었다.
  1) 죄를 범한 인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 줄 수 있는 본성의 상태는 인간 이상도 인간 이하도 아니며 반드시 인간이어야 한다.
  2) 그리스도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은 율법적인 희생과 제물로 인간을 속해 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던 것이다.
  3) 마귀는 최초의 범죄자이고, 최초의 유혹자였으며 죄는 죽음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마귀는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여서 죽음으로 이끌었다. 이런 의미에서 마귀는 죽음의 권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죽음의 권세를 지닌 자를 철저하게 파멸시키셔서 누구도 영적 죽음의 권세에 떨어지지 않게 하실 수 있으시며 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4)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그들이 종종 굴복하는 가공할 사망의 노예상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사망이 정복된 원수일 뿐 아니라 화해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하심으로써, 어찌할 바 모르는 영혼들을 구원하셨다. 이제 죽음은 원수 마귀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 하에 있는 것이다. 
  5)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신실하시며 인간에게는 자비로우심에 틀림없다. 하나님 편에서 그가 감당하셔야 했던 일은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가 손상됨이 없이 범죄한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또 인간 편에서 감당하셔야 하는 일은 인간을 지지하고 위로하는 일이다(18절). 

    ① 그리스도의 수난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의 수난에는 그가 받은 시험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② 그리스도의 자비 :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는 슬픈 영혼을 도우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 영혼을 괴롭히는 시험이라는 질환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죄에 빠지시지는 않으셨다. 아무리 훌륭한 교인이라도 많은 시험을 당한다. 우리는 시험으로 인하여 때때로 고민과 유혹에 빠지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지지해 주실 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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