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서신을 기록해야만 했던 이유는(갈 1:6-10)?
유대주의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이신득의 진리를 부인하고 율법의 준수도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사도권 변증이 절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전하려는 바울의 뜨거운 선교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 현상은(갈 1:6-10)?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함.
다른 복음을 좇음.
위와 같은 배교 현상은 죄인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불완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릴때 생겨납니다(히6:1-8).

그리스도의 참된 종의 자세는 어떤 것인가(갈 1:10)?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선행되어야 하며 세상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는 자세입니다(마6:24).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기의 유익, 영웅성, 정치적 야망, 탄성, 성적 욕망 등을 버림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회심 경위는(갈 1:11-24)?
이스라엘의 으뜸가는 유대인 - 바리새인 - 행실에 있어서 교회의 박해자 - 하나님의 소명 받은 자 - 이방의 전도자.
바울은 먼저 이신득의 진리의 신적 기원(갈 11, 12절)과 이를 전하는 사도권의 신적 기원(갈 18-20절)을 내세우는데 이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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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례(Circumcision)
할례란 남자 아이가 태어난지 팔일만에 생식기의 껍데기를 끊어내는 의식이다.

1) 구약의 할례
① 의식 : 할례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창17:10-14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가정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 할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과 맺는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이 법을 힘써 지켰다. 심지어 안식일에 할례의 날짜가 해당되더라도 실행할 정도였다. 후기 유대 사회에서는 '모헬'이라는 공적인 직책을 가진 사람이 이 의식을 집행하였다.
② 의의 : 고대 근동 지방에서 할례를 실시한 민족이 이스라엘만은 아니었다. 이집트나 미디안, 암몬 등의 족속들 가운데서 할례는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방 민족의 할례는 단순히 입문식이나 성년식의 다양한 부분들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이방인들의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의 영적, 육체적인 계속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마음의 할례를 권고 하였다(신10:16). 또한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도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였다(렘4:4 ; 겔44:7).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한 이행을 강조한 것을 말한다.

2) 신약의 할례
신약에 와서 할례라는 단어는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함으로 안디옥에서 다툼이 일어났다(행15:2). 이 문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은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로 문제를 삼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갈5:2 ; 갈6:15).
둘째, 바울은 할례를 영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롬2:28,29). 육체적인 할례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준수가 없으면 효력이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롬2:25).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의 의가 할례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롬4:1-2).
셋째, 바울은 할례를 옛 언약으로써 묘사하며 장차 올 새 언약의 상징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2. 칭의(Justification)

1) 칭의사상
칭의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과 의를 얻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 율법의 행위를 포기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 복음이라고 가르쳤다. 인간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그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의를 객관적으로 주실 때 사람이 그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율법의 완성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하심과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의 생명에 의해 이루어진다.

2) 구약에 근거한 바울의 칭의사상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을 본질적으로 칭의사상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근거는 구약에서 찾았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아브라함의 모습은 주로 창15:6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신칭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기본적인 본문은 합2:4이다. 하박국에 나타나는 칭의의 개념은 개인적인 의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충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공의를 베푸심에 있어 의로운 판단을 하심으로써 의를 성취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시편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자주 인간의 의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중요한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백성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백성 안에서 의를 세우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3) 바울 이후의 사람들
이신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루터와 칼빈 등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근거가 되었다. 특히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은혜로'를 역설했던 루터의 주장과 선택에 관한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이런 개혁자들의 성향을 반대해서 이신칭의가 바울 신학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바울이 이것을 주장했듯이 율법과 관련해서 논의될 때에 비로소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난다.
칭의는 두 서신 모두에서 논의되고 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은 민족적인 혈통을 따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데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동등하다(롬3: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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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주체됨을 고백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자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자유는 무책임한 방종과는 구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종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자유이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갈5:1-15)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절제 없는 행동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 수고하던 율법 준수의 굴레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율법의 노예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면 율법의 노예로부터의 자유는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그리고 이 율법을 어떻게 정죄하는가? 그리고 율법을 대신하는 진정한 구원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 사랑의 믿음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은 율법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즉 율법을 준행하므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투쟁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갈3:13). 그리고 할례나 어떤 율법적 행위를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잃는 것이며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롬2:26-29 ; 골2:11).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누리게 될 삶 역시 어떤 일을 추구하고 완성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갈5:6). 다만 믿음을 좇아 그것을 기다릴 뿐이다. 마지막 하늘에서의 영화도 맨처음 칭의와 같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사이다.

2) 종으로서의 자유
바울의 '자유'의 선포는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법적이고 감정적인 행위가 득세하는 현실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서두에서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자'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용서와 화해하는 자녀 됨의 변화에서 느끼게 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육체의 탐닉을 위한 자유가 아니며, 이웃을 착취하는 것도 아니며 율법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이웃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자유이다.

2. 성령을 좇는 삶(갈5:16-26)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믿는 성도들도 자유를 남용하는 것을 절제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간에 갈등을 유발시키게 된다.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실제로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 그리스도인의 승리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성령을 따라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갈2:20 ; 갈5:24 ; 롬6:6). 이것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겨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고집과 자의적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즉 회개를 통해 옛 삶을 전적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좇아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는 삶이다. 이런 삶의 결실을 바울은 9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즉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고, 충성, 온유, 절제는 개인의 신실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개별적이지 않고 연합적이다.

2) 영성 훈련
우리는 매일 아침 성령을 좇아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하루를 마치는 저녁에 실패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성령은 "영적인 일에 전념하라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한다(롬8:6 ; 빌4:8 ; 골3:1,2). 이것은 우리의 전영역 - 가족, 직장, 친구, 교회 - 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하루의 순간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 성경의 묵상, 사랑의 실천, 교제와 예배라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성령께 복종시키는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3. 그리스도인의 윤리(갈6:1-18)
갈라디아서 6장은 믿는 자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그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삶 가운데 하나가 믿는 자들 상호간의 관계이다. 특히 성령의 열매를 종합하는 사랑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요13:34 ; 요15:12). 그러면 이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러면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가? 특히 믿는 자들의 관계 속에서 목회자와 교인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1) 상호 관계의 중요성
갈6:2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보편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홀로 지고 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은 그짐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자신이 성숙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인 삶이 아니라 금욕적인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짐진 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시55:22 ; 마11:28). 이처럼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시는 방법가운데 하나는 인간적 유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후7:56).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갈6:10). 특히 이런 관계성은 목회자와 교인들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목회자와 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세워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여 성도를 양육하고 성도는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여야 한다.

2) 심는 자의 삶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심는 것과 거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회중들의 마음에 심어야 하며, 성도들은 선한 생각과 행동을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의 생애 속에 심어야 한다. 이들이 심은 씨앗은 비록 토양은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분쟁과 시기로 공동체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종의 자세로 사랑을 비롯한 성령의 열매 맺는 삶으로 공동체 구성원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나의 변화된 모습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랑하는 자세가 아닌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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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법과 복음의 본질 비교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이 사역을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성취하셨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와 형벌을 다 치루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율법은 우리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고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에서 나온 심각한 오해이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반대되거나 상호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 발전되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아울러 바로 이 율법과 복음은 그 구약과 신약의 구체적 조건 또는 내용으로서 이것들이 결국 구약과 신약의 실체이므로 양자 또는 그 근본 목적에 있어서는 동일한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고, 또한 한 분 하나님이 둘 다 주신 것이다.

1) 율법의 본질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요1:17). 율법은 옛 언약이고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된 글로 전달된 율법은 우리를 속박한다. 율법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요, 한계가 있는 것이다.

2) 복음의 본질
복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새 언약이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준다. 율법이 글로서 기록되어 전달되어진데 반해서 복음은 영으로 전달되어 진다(고후3:6). 그리고 복음은 율법의 완성으로 주어졌다(마5:17). 믿음이 요구되는 복음은 돌비에 새긴 것(고후3:3)으로써 실체(히10:1)로 영원하다(히13:20).

2. 본 서에 나타난 율법과 은혜의 기능 비교
율법과 은혜는 서로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서로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율법과 은혜의 기능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율법은 행위를 요구하는(갈3:10) 반면에 은혜는 믿음을 요구한다(갈3:11,12). 율법은 죄인이 더 악한 죄에 빠지지 않게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나(갈4:2),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게 하도록 해준다(갈3:24). 그리고 율법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는 하나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갈3:24). 그러나 은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해준다(갈3:25,26). 율법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를 받게 하나(갈3:10),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을 누리게 해준다(갈4:5-7). 끝으로 율법은 죄인들을 구속하는 멍에가 되나(갈5:1).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자유를 누리게 해준다(갈4:30 ; 갈5:1).

3. 갈라디아인들의 영적인 어리석음(갈3:1-5)

1) 바울의 지적
바울은 갈라디아서 1,2장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타당성의 근거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론을 주로 언급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적극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인 어리석음에 대해 맹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2)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바울의 지적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소극적인 변론의 입장을 취해 왔으나 여기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 준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꼬임으로 또다시 율법에 의존하려는 영적인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이런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3) 항상 자기 반성이 필요함
우리는 본질적으로 연약하여 사단에게 걸려 넘어지기 쉽다.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자신들의 신앙이나 성령 체험의 역사도 바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율법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사단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자기 반성의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며, 말씀에 비추어서 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성령의 인도를 계속적으로 간구하는 태도를 지녀야 된다.

4. 바울의 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는 고백을 한다(갈4:19). 바울은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룸으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를 가져옴을 알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체험적인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를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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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복음을 본격적으로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인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아니라 못박히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선언이다. 이런 예수의 대속적 은혜는 언제까지나 생생하고도 정당하게 적응되는 것이다.

1. 율법과 그리스도(갈3장)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세가지 요소로 복음을 변호한다. 첫째는 갈라디아 교회의 경험과 구약성경의 경우들을 증거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설명한다(갈3:1-14). 둘째는 율법과 언약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갈3:15-22), 셋째는 율법의 기승을 설명하면서 믿음과 연관시켜 변호한다(갈3:23-29). 그러면 갈라디아와 같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무엇이며, 율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가?

1) 믿음인가? 행위인가?
유대주의 거짓 선생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갈3:3)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자손임을 역설하고 있다(갈3:6-9). 그래서 바울은 창12:3(창22:17 ; 행3:28)의 인용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는 육체의 계통이 아닌 영적인 후사임을 말하고 있다(갈3:7,9). 특히 창22:17의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그의 자손들이 넘쳐나리라는 약속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갈3:16). 그리고 이 약속의 땅의 축복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기업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준행 불능성을 통해 복음이 더욱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율법은 몽학 선생으로 우리의 행위들을 지적해 줌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든다.

2) 자유하는 신앙
우리는 '율법 아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만일 우리가 율법 아래로 돌아가려 한다면 우리의 삶은 율법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몽학 선생의 정죄와 훈계를 받고 있는한 자유하는 신앙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루 빨리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2. 종과 자녀(갈4:1-11)
이제 바울은 앞 장의 설명을 토대로 하여 율법에 거하는 모습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된 우리의 신분은 어떠하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인가?

1) 변화된 신분
바울은 율법을 초등 학문으로도 묘사하고 있다. 초등 학문은 stoiceia(스토이케이아), 즉 '원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초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래 거하는 사람들은 유년 또는 미성숙한 상속자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 맡겨져 있으며, 그들의 상속자가 인격과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이들은 사실상 주인의 신분이지만 자유가 없다. 그들은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갈4:2) 이 굴레에 묶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인하여 성숙된 아들의 신분을 갖게 하셨다.

2) 하나님의 자녀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갖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더욱이 그의 죽음은 속량뿐만 아니라 입양의 효력도 있다. 그리고 자녀된 증거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셨다(롬8:15,16 ; 갈4:6).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다시 미성숙한 상태, 즉 율법 아래 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신분(갈4:12-31)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를 대조하면서 언약의 자녀들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어떤 지식의 변론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애정과 열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풍유를 통해 바울이 말하는 언약의 백성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 백성이 당하는 핍박과 축복은 무엇인가?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 언약의 자녀와 목회자 바울
갈4:22부터 시작하는 풍유에는 영적인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두여인은 두계약으로 율법에 근거한 모세의 계약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피로 세운 새 언약인 것이다. 이들은 원래 상반된 관계가 아니며 모세의 계약인 율법은 새 언약의 복음을 안내하는 인도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의 의지와 공로대로 뜻을 성취하려 하던 하갈과 이스마엘과 같이 율법에 매여 더 발전적인 새 언약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약 백성은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같이 새 언약을 받아들임으로 되어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약속의 자녀들은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핍박과 조롱을 받았듯이 세상의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망 가운데 거하는 이들은 멀지 않아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모든 영광 가운데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2) 목회자의 신분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목회자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다스리면서 군림하는 왕의 신분이 아니다. 우리 교인들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의 관계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 이라고 부른다(갈4:12,28,31 ;갈6:1,18). 또한 그들을 '나의 자녀들' 이라고 칭하고 있다(갈4:19).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구성원 사이에 가족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는 복음에 합당한 말씀을 전할 때에만 그 권위, 즉 하나님의 전권 대사의 권위를 갖음을 늘 인식해야 한다.

구약의 약속의 진정한 성취는 영적인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마엘의 종교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 없이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위해 구축된 종교이다. 그러나 이삭의 종교는 은혜의 신앙이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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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장의 전체적인 내용

여러 서신들과 달리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부터 강력한 역설을 시작하였다. 권위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주장(갈1:1)과 칭찬의 말이 전혀 없는 것은 바울답지 않은 점이라 하겠다. 또한 바울은 점잖은 말을 골라서 하는 대신에 강경한 어조를 견지한다. 이렇게 바울이 강한 어조로 질책하는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렵게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비해 아주 쉽게 복음에서 떠난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동안 그들에게 전한 복음이 헛될까 염려되어진 마음으로 이렇게 강경한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린 이유는 율법을 의지한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비난을 퍼부었다(갈1:10). 또한 그들은 바울을 하나의 엉터리 사도라 불렀고, 그로 인해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갈1:11이하). 그같은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전파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사도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증거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자신의 간단한 약력의 요점이었다(갈1:13-24).

2. 2장의 전체적인 내용

갈라디아서 2장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행11:30에 언급된 방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방문의 기회를 이용해서 다른 사도들에게 그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걸맞지 않은 일처럼 보이나 바울은 결국 자진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자 노력하였다. 반면 사도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는 바울의 사역을 인정하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사역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갈2:7-9), 유대인으로서 베드로와 바울이 강조한 부분은 사람이 무릇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다(갈2:15, 16). 덧붙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은 그들이 어찌 다시 율법의 올무에 스스로 다시 빠져 들어가고자 하는가에 대해 바울은 강하게 자유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바울은 그들의 실제적인 죄가 음식에 관한 율법을 범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으로 돌아가는데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3. 복음과 율법의 상관관계

초대교회 무수한 사람들이 복음을 알기는 하지만 복음의 깊은 의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복음을 알기는 했지만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는 했지만 율법을 세움으로 복음의 진리를 폐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복음과 율법을 구별하는 방법은 복음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율법은 땅에 속한 것이므로 복음의 의와 율법의 의는 무한하고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문제가 믿음이나 양심과 관련되어 야기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율법을 철저히 배격하고 율법은 이땅에 속한 것이니 세상에 버려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속한 것이니 세상에 버려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사역을 수행할 때는 율법의 의의 등 불도 함께 켜야 한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반된 것이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양심의 잘못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복음과 율법은 궁극적으로 상반된다고 볼 수 없으며 우리의 신앙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 된다.

4. 그리스도인의 세가지 신비

갈2:20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선언 속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 속에서 실감한 바와 같이 세가지 신비가 내포되어 있다. ① 법적인 신비 혹은 그리스도인의 법적인 신분에 대한 신비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이었으나 우리의 대리인 역할을 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대신 사형의 집행을 받으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율법의 징계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살게된 것이다. ② 영적인 신비, 혹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삶의 신비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내면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부패한 옛 사람, 즉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이 파괴되고 거룩한 생명의 새로운 원리가 마음속에 심기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③ 실제적인 신비, 혹은 그리스도인의 외면적인 삶의 과정의 신비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지니고 이세상에 살고 있지만 실상은 육체와 세속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무한한 자유인으로 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법이며 그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사랑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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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그런데 독버섯과 같은 '유대주의'가 잠식하여 복음을 변질시키고 기독교를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자격에 의심을 가하였으며, 바울이 전한 복음에 다른 율법적인 행위를 첨가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정당성을 예수그리스도를 기초로 변론하고 있다.

1. 사도 바울의 권위(갈1:1-10)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얻게된 복된 소식이다. 이 메시지는 바울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런데 갈라디아로부터 온 편지는 이 복음이 위태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생략하고 바로 변론을 적어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그의 염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적들의 모습은?

1) 바울의 사도직과 거짓 선생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근거를 신적 권위에 두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 제자나 사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그분으로부터 직분을 임명받았다(행9:1-8 ; 고전9:1). 그는 그의 사도직이 사람의 선택이나 승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신적 임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한 것은 단지 자신의 사도직 박탈이 아니라 성도들이 떠나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지도자나 교회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갈1:3,6,15 ; 갈2:9,21 ; 갈5:4)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적들에 대한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거짓 선생들은 복음에 어떤 행위를 덧붙이려 한다. 그러나 인간 사역에 대한 시금석은 어떤 행위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성이다(사8:20 ; 딤전4장 ; 요일4:1-6).

2)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많은 고난이 뒤따를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거짓 선생들의 중상모략도 그를 좌절시킬 수 없었다. 만일 바울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면 그는 복음을 사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메시지를 전파할때 사람들의 욕구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복음전파자 바울(갈1:11-24)
바울은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자신의 과거지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삶에서 이젠 변화된 후에 사명자로서의 삶을 증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다메섹 후에 바울은 어떤 가치관의 변화를 갖게 되었는가? 그리고 바울이 변화 후에 아라비아로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 바울의 변화
바울은 처음에 유대주의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수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메섹 변화 후에는 그들에게 말씀을 수여하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이 체험은 바울의 신앙과 삶에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신관, 성서관, 구원관 및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가르침에 의한 각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돌변이었다. 이런 변화를 체험한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그 목적은 야만인을 전도하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정립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2) 영적 교제의 필요성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바울로 하여금 이전의 삶과 가치관을 포기하거나 변경하게 만들었다. 율법주의의 우월성과 모세의 모든 유전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과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도 그분 앞에서 나의 우월주의적 가치관을 버리고 있는가? 이런 포기가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의 참된 영적 교제를 통해 그분의 뜻을 바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신칭의(갈2장)
본 장에서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는 계속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전한 이신칭의 복음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인정하였음을 증거로 제시한다(갈2:1-10). 그리고 유대주의의 수장격인 베드로를 책망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증거한다(갈2:11-14).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예로 들은 이유는? 그리고 베드로에 대한 책망의 의미는? 이런 증거 후에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요약하고 있는가?

1) 복음의 변호
예루살렘은 원래 율법주의를 기초로 했던 유대교의 총 본산지였다. 그런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이신칭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이신칭의가 참된 복음임을 강력히 증거하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야고보, 베드로, 요한 이들 세명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성을 증거한다. 그리고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갈2:11-14). 그 때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 사도가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게 하는데 성공했다. 왜냐하면 이방 기독 신자들과 이미 함께 먹고 있던 베드로가 갑자기 그들로부터 물러나서 그 자신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은 '할례당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갈2:12).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가 율법적 행위에 실패한 것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에(행10:34-48) 비추어 이신칭의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율법에 의한 의는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게 된다(롬10:3).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일치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참된 의에 이르는 길은 자신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그리도만을 구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칭의는 오로지 믿음에 의한 것으로 세례나 어떤 특정한 방법이나 어떤 종파적·사회적 조건에 부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2)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다"(고후5:17).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이 단지 역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와 연합함으로 그 안에 그의 백성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이전의 악하고 추한 모습은 깨끗하게 씻음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났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안에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는 가능한 유순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 진리가 위험해지면 우리는 그 복음의 정당성을 강하게 변증해야 한다. 현대교회 안에도 말 많은 소수의 단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이 진리를 반대할때 그들을 반격하는 일을 망설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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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라디아 교회

1) 기원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의 결과로 세워졌다. 제1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마가를 데리고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 섬을 거쳐 밤빌리아의 버가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 중남부 지방의 유대인 회당을 발판으로 전도함으로써 갈라디아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행13:13).
그 이후 이고니온으로 자리를 옮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허다한 무리들을 개종시켰으나 유대인의 선동으로 인하여 목숨의 위협을 느껴 루스드라로 피하였다(행14:1-7).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의 위협을 또다시 느끼게 되자 바울일행은 더베로 갔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여행로의 역순인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돌아보며 환난을 이길 것을 권고하고 장로들을 세워 교회를 크게 하였다(행14:21-23).
결국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통해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인들을 개종시켰고 제2,3차 전도여행을 통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을 더욱 굳게 함으로써 갈라디아 교회로 하여금 더욱 성장케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2) 특징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고난 가운데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이다. 또한 바울은 1차 전도여행 귀환길과 2,3차 전도여행 중에도 이곳에 들려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도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예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직 성숙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개종한지 얼마되지 많은 초신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갈라디아 지역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바울의 선교시에도 방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떠난 후에도 율법 준수를 강요함으로써 신앙의 혼돈을 일으켰다.

3) 의의
갈라디아 지역의 복음하는 세계 복음화의 역동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한 이런 이방 지역의 복음화의 성공은 갈라디아 선교에 이어 A.D.4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리게 하는데 간접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럼으로써 이방 선교에 전기를 마련하게 해주었다(행15:1-35).
또한 이방 선교에 대한 관심과 사명감으로 인해 바울을 비롯한 여러 초대교회의 일꾼들이 각지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함으로 인하여 복음은 급속히 확장되며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로써 인류 구원에 새 장을 열게 된 것이다.

2. 갈라디아서 기록연대와 기록 장소

본 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본 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56년경 마케도냐 저작설을 지지하는 편이다. 그것은 본 서 갈4:13에 나오는 Tov provteron(토 프로테론 ; 내가 처음에)란 표현이 행13:14-14:23에 나오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을 반영한 표현이며, 또한 이는 2차 방문이 벌써 이루어진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라고 볼 때 2차 전도여행이 끝난 시점에 본 서가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아마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후 마게도냐로 옮겨 고린도후서를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위험성을 듣게 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게도냐에서 본 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3. 갈라디아서의 특징

첫째, 전투적인 서신이다. 율법주의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주장을 척결하기 위해 율법주의 거짓교사들의 그릇된 교리들을 질타하는 내용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서신서들보다 강경한 어조로 기록했다(갈1:1 ; 갈3:1 ; 갈6:17), 또한 본 서에 감사, 칭찬, 기도의 부탁이 없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둘째, 자서전적인 서신이다. 다른 서신서에 잘 나타나지 않는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이 본 서에는 많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일반적인 서신에는 교리편과 실천편이 나누어지는 반면 본 서는 복음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권을 변증하는 변론이 먼저 나오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와 초대교회 당시의 형편을 소상히 밝혔다(갈1:18-2:12).
셋째, 조직적인 서신이다. 본 서는 로마서와 동일한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논리적으로 다루고 있는 조직적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갈2:16 ;갈3:1 ; 갈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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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상황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를 개최하도록한 일련의 초대교회 사건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초반부(1-7장)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만 전파되고 있다. 그후 예루살렘 안에서의 박해로 인해 많은 복음 전도자들은 선교 영역을 이방 지역으로 넓혀가게 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교도의 상태에서 직접 개종했거나 혹은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후 시리아의 안디옥은 많은 희랍인들을 영입하게 되었다. 갑자기 불어난 이방인들의 신앙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는 급기야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년 동안 안디옥에서 주로 희랍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안디옥의 이방인 대량 유입은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신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이방인들이 초대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의 수를 압도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 일년 동안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의 후원으로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제1차 선교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이방인 개종자의 수는 엄청나게 불어났다(행13,14장).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신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고 강론하게 되었다. 이것이 급속히 퍼져 나가자 바울은 회람 서신을 통해 경계의 신호를 보내게 되었다.

2. 내용

율법을 준수하는데 대한 논쟁으로부터 나온 두번째 기록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야고보서가 윤리적 자유로 인한 방탕과 방종의 모습을 경고하는 유대인 신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라면 이에 반해서 갈라디아서는 윤리적 절제의 자세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이거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영적 해방의 대헌장이라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당시의 역사적 평론의 책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패에 대한 항의였다. 율법으로 보다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된 핵심적 진리가 유대인들의 율법 강조에 의해 혼미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자유로운 삶에 멍에를 씌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단호히 경고하고 있다. 이 책의 어조는 도전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불쾌감에서 오는 분노가 아닌 영적 원리로 인한 것이었다.

3. 야고보서와의 관계

야고보서와 갈라디아서는 비록 실제로는 상호 보완적이지만 처음부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독교 교리의 두가지 양상을 예시하고 있다. 야고보서에는 그리스도의 윤리에 대한 원고한 주장과 믿음은 그 열매로 증명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는 바울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개인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즉 그는 "그가 그 창조물 중에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갈라디아서는 윤리적 행동을 창출해 내는 복음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야고보 보다 윤리적인 면을 경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전의 양변과도 같이 기독교의 이 두가지 양상은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4. 갈라디아서 교회에 대한 이론

바울은 이 서신을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게"(갈1:2) 보내고 있다.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이곳이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터키 중앙북편을 지칭하며 또 다른 곳은 터키 남부를 지칭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해석이 옳은가를 놓고 논쟁하기보다는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때 세운 교회들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즉 갈라디아 교회는 터키 네 도시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도시들의 이름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이다(행13,14장). 이 입장을 확증해 주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갈4:14에서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했다고 말한다. '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a[ggelo"(앙겔로스)는 '사자'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번역은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때 루스드라에서 생긴 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희랍 신화 속에 한 전설이 있었다. 그 내용은 쓰스(제우스)와 그의 사자 헤메(헤르메스)가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쓰스와 헤메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 중 어느 가난한 부부만 그들을 환대하였고, 쓰스와 헤메는 나중에 그 행위에 대하여 크게 보답하였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루스드라 사람들은 쓰스와 헤메가 각각 바나바와 바울의 몸을 입고 재림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도 그런 것이 그들은 루스드라인들이 보는 앞에서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에 가서 바울은 "내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고백한다. 그는 루스드라의 독자들에게 제1차 선교 여행중 그 도시를 떠나기 전에 그에게 생겼던 일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 같다.

5. 갈라디아서의 특이성

갈라디아서의 서두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서신이 독특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울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사도 바울은…에 있는 교회에게…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내가 감사하노라",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몇 가지 다른 차이점들을 볼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도된 바울은'이라는 시작말 앞에 권위에 관한 설명이 돌연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어떤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직접 온 것임을 분명히 밝히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바울은 갈1:4에서 복음을 간략히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복음의 진리와 순수성 역시 도전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두가지 사실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 서신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말을 생략하고 있다. 그는 "내가 감사하노니"라는 말 대신에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1:6)를 사용하고 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제목 :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곽요셉 목사)

 

[갈라디아서 1장 6절~12절]

6절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절 -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절 -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절 -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절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그리스도의 본질성 중요성
1.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적 중요성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말씀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
2. 예수그리스도의 구원론의 중요성
  -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 승천을 통해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이 확증되는 것이다.
3. 본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중요성
  - 그리스도인의 대한 삶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4. 경배 대상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중요성
  - 경배, 예배의 대상이시다.
5. 선포 대상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중요성
  -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선포하여 증거해야 된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기뻐하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 자체가 복음이다)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뜻이다)


*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이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 예수님의 재림때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동역자로 세우셔서 부르신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지 사람이 이루는게 아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증거하시고, 몸소 보이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계신다.

 

마태복음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다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 다른 복음
1.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2. 회개 없는 용서
3. 중생 없는 구원
4. 지옥 없는 천국

 

※ 오직 그리스도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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