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와 배려로 덕을 세우는 공동체

[고린도전서 14장 26절~40절]
26절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절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절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절 -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절 -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절 -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절 -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절 -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절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절 -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절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절 -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절 -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절 -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절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성도가 모일 때 모든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해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방언은 통역이 있을 경우에만 두세 명이 차례대로 하고, 예언할 때는 다른 이들이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스스로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1. 차례를 따라 하고 (26~33절 상)
교회는 화평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각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목적은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예언 등 말과 관련된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배때 일부 성도가 자신의 허영과 자랑을 목적으로 질서 없이 은사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질서 있는 예배를 위해 '말'과 관련된 은사들을 '차례를 따라' 실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말하는 사람 외에는 누구라도 잠잠해야 하고, 듣는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해야 합니다. 절제와 배려가 없는 은사 사용으로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올바른 은사 사용은 교회의 화평과 질서를 세우는 기반이 됩니다.
* 방언과 통역, 예언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권면하나요? 깨달은 말씀을 나누는 나의 태도에는 배려와 절제가 얼마나 담겨 있나요?

2. 질서 있게 하라 (33절 하~40절)
영적 권위와 질서를 훼손하는 은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일반적 권면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의 특수 상황에서 주어진 권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브리스길라, 빌립의 네 딸 등 여성이 예언을 하거나 가르치기도 했습니다(행 18:26; 21:8~9 참조).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가 많았고, 여성들도 예배때 은사를 사용했습니다(11:5). 바울의 권면은 특히 예언과 관련해 일부 여성들이 지나친 행동으로 무질서를 초래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은사는 자랑하거나 오용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 모든 관계의 영적 질서를 지킬 때라야 은사가 교회의 유익이 됩니다.
* 교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문제를 바울이 특히 엄격하게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영적 질서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신령한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내가 하는 말만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영적 방종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말과 행동을 경우에 맞게 단정하게 함으로,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말씀의 감화력으로 세워져 가는 교회

[고린도전서 14장 13절~25절]
13절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절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절 -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절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절 -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절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절 -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절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절 -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절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절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절 -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절 -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방언을 하는 이는 통역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깨달은 마음으로 전하는 다섯 마디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습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책망을 듣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전파할 것입니다.

●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라
신비한 현상보다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이 덕을 세웁니다. 바울은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이가 예배 중에 방언으로 축복을 하는데 성도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감사의 응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전하는 몇 마디 말이 교회에 유익합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고,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언을 통해서는 책망받고 또한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기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지혜가 충만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믿음을 일으키는 말씀 사역이 가득합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때, 믿는 자들의 수가 더해집니다(골 3:16; 행 6:7 참조). 말씀을 깨닫기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 방언과 예언의 은사는 각각 어떤 대상에게 어떤 역할을 하나요? 모임에서 깨달은 말씀을 나눌 때, 나와 지체들에게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나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자기를 위한 방언, 교회를 위한 예언

[고린도전서 14장 1절~12절]
1절 -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절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절 -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절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절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절 -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절 -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절 -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절 -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절 -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절 -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절 -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히 예언하길 바라라고 권합니다. 뜻을 알 수 있는 예언은 사람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반면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통역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에게만 유익합니다.

1. 방언과 예언의 역할 (1~4절)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지만,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듣게 말해 유익을 준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예언의 의미를 미래에 관해 알려 주는 것으로만 오인하면 안 됩니다. 예언의 의미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사람들을 돕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사이자 하나님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는 은사입니다. 설교와 가르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이 징계와 경고가 포함된 권면의 말씀을 주신다 해도,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평안과 소망입니다(렘 29:11 참조). 성도는 은사를 구하되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은사를 더욱 구해야 합니다.
* 방언하는 사람과 예언하는 사람은 각각 어떤 대상에게 덕을 세우나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내게 어떤 은사를 더해 주시길 간구할까요?

2.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은사 (5~12절)
상대가 느낄 수 없는 사랑은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없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깨달음을 주지 못합니다. 바울은 영적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며 방언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예언을 더 강조하는 것은,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악기도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 소리를 인식할 수 없듯,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알 수 없는 외국 말과 같아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하고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성도는 은사를 사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교회의 덕이 되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구하는 은사를 하나님은 기꺼이 주실 것입니다.
*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방언보다 예언이 더 유익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방언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주의해야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을까요?

오늘의 기도
신령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특히 말씀과 관련된 은사를 제게 부어 주셔서 그 은사로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사랑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13절]
8절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절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온전한 것이 오면 예언, 방언, 지식 등 부분적으로 하던 것은 폐하게 됩니다. 이는 사람이 장성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듯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알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온전히 알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1. 영원한 사랑 (8~11절)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언, 방언, 지식의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며,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알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뿐입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사물이나 현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어린아이 때 행실을 버리듯,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온전하고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이나 방언 등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를 위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반면에 사랑은 재림 후에도 모든 변화된 성도에게 남아 있을 영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사도 바울은 사랑의 영원성과 다른 은사들의 유한성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을 오늘 나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2. 으뜸인 사랑 (12~13절)
율법과 믿음, 은사와 사랑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율법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 역할을 하지만, 율법으로는 우리가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갈 3:24 참조). 이처럼 은사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의 성숙을 돕는 역할을 하지만, 그날이 되면 은사는 폐하고 사랑만 영원히 남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 우리는 희미하던 것들의 실체를 '주님이 나를 아신 것같이' 선명히 보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인 것은 믿음과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에 새길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부분적으로 알 뿐이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교만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주님이 저를 아신 것같이, 제가 주님을 직접 대면하고 온전히 알게 될 그날을 기대하며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을 묵상함으로 제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날이 커져 가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사랑, 복음의 모든 것

[고린도전서 13장 1절~7절]
1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배경 이해하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은사가 많았지만 사랑이 없는 사역자들로 인해 혼란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12장에서 혼란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다양한 은사들과 직분에 대해 소개하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성도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진정으로 은사답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섬기며 세워 주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헬라의 문화적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섬기는 신들은 인간들의 애정에 따른 조건적인 시혜만을 베푸는 인위적인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도무지 온전한 사랑과 섬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에게도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신의 초월적인 사랑, 언약에 충실하신 사랑을 ‘헤쎄드’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다소 제한이 있지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3장은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관찰과 묵상]
1. 사랑 없이 은사를 행할 때 결과가 어떠한가요?(1~3절)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 없이 은사를 행하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12장 31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13장 ‘사랑장’이 시작되기에 많은 이들이 우리가 최고로 추구할 은사가 사랑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타 카리스마타’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어서 ‘여러분은 보다 중요한 은사들을 추구하십시오’라고 해석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은사가 곧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더 잘 섬길 수 있는 은사가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그것을 사모해야겠지만, 그 모든 은사가 진정으로 쓸모 있으려면 반드시 사랑에 기반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통역하기를 사모하고(14:13), 또 나아가 예언하기를 사모하라(14:5)고 권면하는 것에서 확인됩니다. 한편 당시 헬라의 디오니소스와 키벨레 신을 섬기는 자들은 그들의 제의 때 멜로디나 화음 없는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로 관객들을 흥분시키곤 했는데, 바울은 사랑 없이 은사를 행하며 이를 자랑 삼는 고린도 성도들의 무질서한 모습을 이에 비유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여러 방언에 능숙했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믿음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은사로 많은 이적을 행했지만, 이 은사들이 사랑 없이 행해진다면 심지어 예수님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헌신과 봉사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먹이고 입힐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연극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적용과 나눔
은사를 사용해 교회와 이웃을 섬길 때 나의 속마음은 어떠했는지(사랑, 의무감, 동정심, 명예욕, 기복 추구 등) 나누어 보세요.

교회에서 맡겨진 일들을 처음 감당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기쁨과 설렘이 있습니다. 섬기다 보면 그동안 내게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던 은사들이 하나둘씩 드러나 빛을 발하게 되고, 섬김에 많은 열매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칭찬이 뒤를 따릅니다. 그때 처음에 없던 다른 것들이 끼어들어 옵니다. 나의 섬김에 대해 대가를 바라게 되고, 영향력을 미치기 원하게 되며, 영광 받는 자리에 서고 싶어집니다. 어느새 사랑은 떠나 버리고 봉사의 기능만 기계적으로 감당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신으로 마친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으로 행하는 자는 다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자는 마지막이 아름답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본을 배우게 되고, 주변인들은 사랑의 사도의 말과 행동을 깊이 아로새깁니다.   

2.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특성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4~7절) ‘사랑’이란 단어에 자기 이름을 넣어 본문을 읽고 묵상해 보세요.
사랑은 오래 참으며,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딥니다.
‘오래 참음’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보복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참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성품입니다. ‘온유함’은 단순히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 사람을 더욱 적극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시기하지 않음’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거나 누리는 모습을 볼 때 비교하고 원망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음’은 작은 것을 고무풍선처럼 부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음’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음’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기의 것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포기합니다. ‘성내지 않음’은 누군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더라도 쉽게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은 누군가로부터 해악을 당했을 때 그것을 셈하여 그에게 다시 전가시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은 불의를 방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함’은 진리가 세상 속에 실현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은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해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게 가장 소중한 심장을 내어 줄 정도로 누군가를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딤’은 적의 공격을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적용과 나눔
사랑의 특성 가운데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요? 사랑을 실천했을 때 기대되는 가정과 교회와 일터의 변화는 어떤 것인가요?

바울이 말한 사랑은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헤쎄드’로서, 더 깊고 풍성한 의미를 포함하는 덕목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 중에도 인내하며 어떠한 비난 가운데에도 온유함을 잃지 않는 것, 높은 지위에서 큰 힘을 가지고도 겸손하며 다른 이의 성공을 볼 때도 축하하고 투기하지 않는 것, 무례하게 행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지만 불의를 볼 때 분노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마침내 진리가 온 땅에 편만히 임하는 것을 볼 때 기뻐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공유적 속성이지만 어느 누구도 노력하지 않고 그러한 성품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 자신이 더욱 사랑 많은 존재가 될 때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상을) 넉넉히” (롬 8:37) 이기게 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사랑의 팔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어떠한 능력도 지식도 믿음도 섬김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 없이 행한 모든 행위는 오히려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을 혼란에 빠져들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 없음은 마귀에게 공격할 틈을 주는 이적 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단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모든 은사는 사라지지만, ‘믿음·소망·사랑’은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사랑이 으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 자리에서 우리에게 질문하실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사역하다 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다 왔느냐?”일 것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많은 일로 분주한 마음에 늘 사랑이 있는지 점검하게 하시고, 어떤 오해나 핍박 속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지키도록 도와주소서. 사랑 없는 은사 때문에 시험 들지 않도록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을 보호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마치는 삶

[고린도전서 13장 1절~7절]
1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절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절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절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절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절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방언과 예언을 해도, 큰 믿음이 있어도, 힘써 구제하고 몸까지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딥니다.

1. 사랑이 없으면 (1~3절)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어떤 은사나 행위도 사랑과 분리되면 안 됩니다. 몸 위에 입는 옷이 그 사람의 특성(직업, 신분 등)을 나타내듯, 어떤 은사나 섬김도 사랑의 마음 위에 행해져야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능력으로 탁월한 은사를 행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자기 만족에 그칠 뿐 공동체에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에 기초한 은사나 행위라야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전달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모든 일의 동기이자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 눈에 드러나는 은사보다 내적 동기인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사랑의 동기를 회복하도록 성령께 도움을 구할 사역(일)은 무엇인가요?

2. 사랑의 속성 (4~7절)
자기중심적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대조됩니다. 자기에게서 비롯된 사랑은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고, 성내며,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합니다. 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딥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의지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요일 4:7). 하나님 사랑의 실체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입니다. 사랑은 도덕적 가치이기 전에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자기애를 부추기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묵묵히 이타적 사랑을 할 때, 하나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 참된 사랑은 어떤 것을 행하고, 어떤 것을 행하지 않나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내가 특히 적용해야 하는 사랑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행한 것들이 '자기 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참된 사랑을 할 능력이 없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는 죽고 제 안에 계신 예수님만 살아서, 다른 사람을 참아 주고 믿어 주며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섬기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서로 돌보며 교회를 세우는 성령 공동체

[고린도전서 12장 21절~31절]
21절 -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절 -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절 -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절 -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절 -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절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절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절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절 -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절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절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지체 중에는 쓸모없는 것이 없습니다.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요긴합니다. 덜 귀히 여겨지는 지체를 하나님이 더 귀하고 아름답게 입혀 주셔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몸의 지체이며, 지체는 고통도 영광도 함께 받습니다.

1. 한 몸 된 지체들 (21~27절)
이웃 사랑은 교회 안에 있는 작은 지체들이 지닌 존재 가치를 깨닫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더 약하게 보이는', '덜 귀히 여기는', '아름답지 못한', '부족한' 지체는 세상 관점으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공동체든 부족한 지체와 능력 있는 지체를 함께 두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돌아보며 한 몸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 존귀한 자도, 덜 존귀한 자도 없습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아 한 가족이 되었기에 아파하는 성도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성도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약한 지체들의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입니다.
* 하나님이 한 몸 안에 지체들 간의 차이를 두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돌보고 소중히 여겨야 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2. 더욱 큰 은사 (28~31절)
은사가 교회를 세워 가는 일과 무관하면 진정한 은사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 세우신 여러 직분을 열거합니다. 각종 은사가 모두 의미 있어 크고 작음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데, 바울은 더욱 큰 '은사들'(헬라어는 복수형)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에 덕이 되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을 크게 여겼으나 바울은 예언의 말씀이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14장).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은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13장). 은사를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교회를 세우려고 은사들을 구할 때 하나님은 구하는 대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은사 있는 자들'은 어떤 자세로 사역해야 할까요? 이 은사들 중에 내가 받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오늘의 기도
목회자든 교사든 찬양 사역자든 주방 봉사자든,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중요하지 않은 지체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드러나는 것을 좋아해 차별하는 세상과 달리, 연약한 지체에게 존귀와 사랑을 더하며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한 성령 안에서 온전한 한 몸, 다양한 지체

[고린도전서 12장 12절~20절]
12절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절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절 -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절 -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절 -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절 -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절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절 -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절 -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루며, 그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지체를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몸에 두셔서 각각의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1. 다 한 성령을 마심 (12~13절)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통일성을 가집니다. 교회가 '한 몸'인 것은 다양한 민족과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낸 차이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와 씻겨 나가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서 모두 '한 성령을 마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지체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그 구분이 사라집니다. 온전한 한 몸이 됩니다. 이제 성령을 마신 성도는 삶의 목마름이 영원히 해갈됩니다. 또한 그 샘물은 생수의 강이 되어 각 성도로부터 흘러나와(요 7:38 참조)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는 성도들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 민족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내 기준이 아닌 성령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 (14~20절)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다양성을 가집니다. 교회는 성령의 한 공동체지만 획일적인 연합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닙니다. 각 사람의 다양한 은사나 직분이나 역량을 무시하고 '한 기준'으로 모든 성도를 꿰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그분 뜻대로 한 몸 안에 다양한 지체를 두셨습니다. 결코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다를 뿐입니다. 오히려 그 차이점을 통해 내가 갖지 못한 부분을 다른 지체가 채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만 교제하거나 나와는 다른 성도를 배척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보완해 줄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생각이나 행동이 달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자라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도, 하는 일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모든 성도가 한 성령으로 하나 된 '한 몸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함께 예배하며 섬기길 기도합니다. 온 세상을 주님께로 이끄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마음으로 서로 격려하며 연합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공통분모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11절]
1절 -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절 -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절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 -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 -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절 -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절 -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절 -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절 -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해 알리며, 누구든 성령으로만 예수를 '주'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한 성령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 성령께서 하시는 일 (1~3절)
성령은 성도의 거듭남과 영적 은사, 그리고 변화와 성숙의 주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가 많았으나 '성령과 은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경우가 있었던 듯합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이 영적 은사를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라며, 모든 신령한 것의 원천이신 성령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우상에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에게 끌려다녔던 사람이(2절; 엡 2:2 참조)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성령께 이끌려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주인)'으로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 (4~11절)
영적 은사는 다양해도, 그것을 주신 이는 한 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주, 하나님이 '같다'고 합니다(4~6절). 이는 교회 안에 여러 은사와 직분, 사역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관되게 주관하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직분을 자기 자랑으로 내세우거나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해선 안 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게 하시려는(엡 4:12)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은사와 직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요?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을 남과 비교하거나 그것으로 나를 드러내진 않나요?

오늘의 기도
남과 비교하며 교만하거나 열등감 때문에 힘들어 했던 저를 돌아봅니다. 하나님 뜻대로 제게 딱 맞게 주신 은사를 겸손히 사용해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위에 믿지 않는 영혼들이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고 하나님 자녀가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약한 자의 마음을 살필 때 주의 만찬은 복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7절~34절]
27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절 -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절 -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절 -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절 -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절 -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절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절 -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가 자신을 살피고 난 후에 떡과 잔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는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만찬을 위해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 자신을 살피라
성도들이 성찬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한 몸에 속해 있다는 표시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주의 죽으심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고, 주의 만찬을 경홀히 여겨 자기만족과 이기심으로 행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지도, 성만찬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 죄(헬라어로 '심판')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한편 사회에서의 신분과 부를 내세워 교회 안에서 빈부 차이를 심화시키는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자기 배만 채우고 빈궁한 형제를 돌아보지 않는 태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죄와 허물이 있는지 스스로 살피며 회개하고, 주의 죽으심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성숙한 성도는 주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약자를 기다려 주는 미덕을 보입니다.

* 성만찬 때 당시 고린도 성도들의 어떤 태도가 문제 되었나요? 성찬식에 참여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볼 때, 무엇을 주의하거나 바꾸어야 할까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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