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②

교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고린도 교회는 성적 타락과 성도 간의 분쟁으로 어지러웠다. 이 때문에 결혼, 우상 숭배, 영적 은사의 문제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영적 권위와 권리보다 복음에 대한 사명과 순종을 앞세운다. 모두에게 권리가 있지만 연약한 자를 위해 그 권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문제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특정 시기에, 특정 교회에, 특정 문제에 대해 교훈하는 서신이다. 그래서 당시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화와 사회 관습은 변한다. 따라서 바울이 언급한 그 당시의 관습 문제를 지금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바울이 여성에게는 머리를 가리라고 하고 남성에게는 긴 머리가 수치스럽다고 했지만, 오늘날 이 같은 견해는 문제가 될 것이다. 독신에 관한 바울의 견해도 고린도의 악명 높은 성적 방종이라는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달하려는 복음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순전히 행하라는 것이다.

성도의 송사 문제 (6:1~20)
교회 안에서도 다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이런 다툼을 내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도, 구태여 불의한 세상 앞에 고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진다. 정통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법정에 소송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가진 율법의 우월성을 훼손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완전하기에 세상의 판단을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처럼 교회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쟁이 불가피하다 해도, 분쟁의 불씨를 없애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성도는 불의를 버리고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에는 성적 부도덕 외에도 도적질, 탐심, 술 취함, 비방과 속임 등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오직 주를 위하는 일만이 옳다. 이미 우리 몸은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과 한 영으로 합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몸과 영혼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문제 1, 결혼 (7:1~40)

고린도 교회의 성적 방종은 자연히 결혼 문제와 연결되었다. 예수님은 결혼과 관련해서 한 가지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셨는데, 이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고, 이혼은 상대방을 간음에 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막 10:9; 눅 16:18). 오직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배우자가 간음했을 때뿐이다(마 5:32; 19:9).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성적 방종으로 악명 높은 교회의 상황을 고려했음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결혼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쓴 문제' 중 하나였다(7:1). 즉,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결혼에 관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에 바울은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 결혼할 의사가 있는 자와 없는 자 등으로 대상을 나누어 답한다.

결혼한 자 (7:1~7)

바울은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아내나 남편을 두는 것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결혼했다면 아내와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각자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배우자이고, 이 점에서 부부는 상호적이며 동등하다. 기도 생활을 위해 분방하더라도 곧 다시 합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는 자와 과부 (7:8~9)

바울 자신처럼 그냥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

이혼 (7:10~16)

원칙은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경우가 존재한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 덕택에 구원받는다면 좋지만, 만약 믿지 않는 배우자가 헤어지고자 한다면 원칙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믿지 않는 자와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느니 이혼하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할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7:17~20)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과거에 할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면 된다.

종과 자유인 (7:21~24)

종과 자유인도 마찬가지다. 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긴 하지만, 자유인 또한 그리스도의 종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7:25~40)

예수님은 독신이셨지만 제자들에게 독신으로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이에 대해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아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환난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결혼하면 주님을 섬기는 게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의 독신 결단으로, 결혼을 약조한 상대방과 결혼하지 않더라도 죄짓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과부도 다시 결혼하면 좋지만 그냥 있는 것은 더 좋다.


고린도전서 7장의 구조

1~7절

8~9절

10~16절

17~20절

21~24절

25~40절

결혼한 자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

이혼

할례자와 무할례자

종과 자유인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했다면 의무를

다하라.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지만 정욕에

불타느니 결혼하라.

불신자와는 이혼해도 되지만 그의 구원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

그대로 지내라.

그대로 지내라.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문제 2, 우상 숭배 (8:1~10:33)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와 아시아 교회에서 시급한 현안이었다. 이방 신에게 제사한 고기는 축제와 잔치를 여는 데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 유통된 듯하다. 그러면 그 고기를 사거나 남은 고기를 집에 가져가는 것도 우상 숭배가 되지 않을까? 바울의 원칙은 지식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다(8:1).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려해서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지식이 있는 사람은 어떤 고기든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이 이를 보고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형제를 실족시키는 대신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는 편이 낫다.

바울 자신이 이런 사례의 훌륭한 모범이다(9:1). 바울은 자유인이며 사도라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우상과 관련해서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이 선 줄로 착각한 사람은 넘어질까 주의해야 한다(10:12). 이스라엘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위대한 민족이었지만, 대부분은 광야에서 멸망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으며, 음행하다 하루에 23,000명이 죽었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다가 멸망당했다. 결국 바울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짓는다(10:14).

우상 제물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이로써 그들이 구원받도록 도와야 한다. 불신자가 내놓은 음식은 음식의 출처를 묻지 말고 먹되, 누군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면 다른 이들을 위해 먹지 않는 게 낫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


고린도전서 8~10장의 구조

8장

9장

10:1~22

10:23~33

우상 제물을 대하는 원칙

사도 바울의 사례

우상 숭배에 대한 역사의 교훈

우상 제물을 대하는 자세

지식보다 사랑이 우선이다.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사도의 권리를 희생했다.

절대 조심하고 피하라.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말라.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 구원받게 하라.


예배에 관련된 문제점 (11:1~34)

바울은 예배와 관련해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문제고, 다른 하나는 성만찬을 할 때 드러난 오류들이다. 바울 당시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은 권위에 대한 복종의 표시였다. 여자들은 공공장소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머리를 가려야 했다. 반면 바울이 보기에 남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진리 여부와 상관없는 문화 현상이다.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남자가 '카파'를 쓰고 있다.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자기 성찰이다.

파당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는 성만찬 때 일부가 먼저 먹어 다른쪽 사람이 못 먹는 경우도 생겼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책망했다. 또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 됨을 강조하며,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임하는 것이 죄악임을 지적한다. 고린도 교회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죽은 자)가 많은 것은 주께 징계를 받은 결과니 자신을 살펴보고 모두가 모일 때까지 기다려 하나 됨을 이루라고 말한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문제 3, 영적 은사 (12:1~14:40)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가 많았다. 하지만 은사의 다양성 역시 분파의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고집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특히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거룩함과 성숙함의 표식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각 은사에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면서 그 예로 몸의 비유를 든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어느 지체도 쓸데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오히려 약한 지체를 더욱 귀하게 하셔서 몸을 고르게 해 분쟁이 없게 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는 지체들인 성도들이 여러 은사를 받아 행하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나 능력을 행하는 자나 병 고치는 자나 방언을 말하는 자나 통역하는 자일 수 없다. 다만 누구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13:13).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집착하는 방언 은사에 대해 특별히 지적한다. 뜻 없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해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것이다. 바울은 혹시라도 방언을 하지 못해 이런 소리를 한다는 오해를 살까 봐 자신이 누구보다 방언을 더 말하고 있음을 언급한다(14:18). 하지만 은사에는 차별된 중요도라는 게 없다. 각각의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원론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다시 교회에서 은사 사용하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방언을 할 때는 두세 사람만 차례대로 하고 통역이 따라야 한다. 통역이 없으면 잠잠해야 한다. 예언할 때는 두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이들이 분별해야 한다.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되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구조

12장

13장

14:1~25

14:26~40

한 성령이 주신 여러 은사

가장 큰 은사, 사랑

방언과 예언

은사 사용의 실례

몸이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라.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

방언과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을 금하지 말되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

12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 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치유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함의 은사, 여러 가지 방언 말함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부활 (15:1~58)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대로 전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절). 바울은 기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의 역사적인 전승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셨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증언하는 부활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바울이 설교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15절). 기독교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된다(17절). 이 때문에 바울은 잘 알려진 사건이나 실제 증인들에 집중한다.

한편, 성도는 부활 때에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 몸은 옛 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몸이다. 그 영원한 몸을 입고 다시는 썩거나 병들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 (15:29)

많은 논란이 있는 난해 구절이다. 아마도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죽은 성도를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가졌지만 죽기 전에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성도가 먼저 죽은 친구나 친지들과 재회할 기대감을 세례 받는 형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이미 죽은 세례자의 자리를 계승해서 세례를 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진 '죽은 자를 위해서 받는 세례'를 부활과 연결시켜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즉,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은 모순임을 지적해 부활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성도를 위한 연보 (16:1~12)

고린도 교회는 매주 첫날, 즉 일요일에 예언이나 가르침이 포함된 정기적인 예배를 드린 듯하다. 이때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으는 순서도 있었다. 바울은 이를 잘 모아 두었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하라고 한다. 자신도 할 수 있으면 함께 가겠다고 약속한다. 현재 에베소에 기대 이상으로 전도의 문이 크게 열렸지만 대적자가 워낙 많아 지금 당장은 고린도에 갈 수 없다고 하며 언젠가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에 들르겠다는 약속도 한다.


작별 인사 (16:13~24)

바울의 작별 인사는 이제까지 강조해 왔듯이 '사랑'을 주제로 한다. 고린도 성도에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당부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①

교회의 행실을 꾸짖는 사도
사도 바울은 아들처럼 아끼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한다. 이들에게는 칭찬보다 징계가 어울렸다. 교회는 그 도시의 풍토대로 성적 방종과 우상 숭배로 어지러웠고,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 등의 분파로 나뉘었다. 바울은 젖먹이처럼 아직 어린 교회를 위해 참고 인내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가르친다. 우선 이 도시의 고질적인 문제인 음행과 우상 숭배를 지적한다.

고린도전서 한눈에 보기

본문

1:1~9

1:10~4장

5장

6장

7장

8~10장

11장

12장

13장

14장

15장

16장

인사말

분열된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

예배와 영적 은사

마지막

당부

요점

서문

고린도

교회의

다툼

성적

부도덕

성도간의 송사

결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예배의

규율

성령과

지체

사랑

방언과

예언

죽음과

부활

연보와

당부

저자

      바울

연대

      주후 54~55년경.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던 마지막 무렵 (행 20:31)

배경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적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한 이방 도시의 영향을 받았고, 교회는 분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다. 거짓 가르침도 성행했다. 당시 국제적인 도시였던 고린도는 거대하고 부유한 무역의 중심지로서 타락의 대명사와도 같은 곳이었다. 도시의 성적 방종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고린도 사람처럼 굴다'라는 그리스어 동사가 성적 타락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쓰일 정도였다. 이런 도시 분위기가 교회까지 뚫고 들어갔다. 일부 형제들이 돈과 성에 오염되었다. 고린도 교회를 자식처럼 여기는 사도 바울은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강하게 꾸짖으며 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서문 (1:1~9)
바울은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편지 첫 부분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이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여받은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칭찬한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였다. 영적인 은사에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이런 은사들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다소 서툴렀다.

고린도 교회의 다툼 (1:10~4:21)
교회는 파벌로 나누어져 다투고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운 창립자이고, 아볼로는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설교자였으며, 게바(베드로)는 넘볼 수 없는 최고 권위의 사도였다. 이 모든 쟁쟁한 지도자가 고린도 교회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라 부르며 거만을 떠는 부류도 있었다(1:12). 당대 헬레니즘의 중심지로서 문화와 경제 등 각 방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고린도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의 지적 권위를 내세우는 데 골몰했다. 각 파벌은 나름의 철학과 신학으로 무장하고 세력을 확장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일이 부질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인간이 지혜가 있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이 미련하다고 부르는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십자가를 겸허하게 믿는 사람들을 지혜롭다 하신다(1:18~25).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라고 꾸짖으면서, 성숙하고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유치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3:1~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 자랑할 거리가 없다. 지도자들은 더욱 그렇다. 지도자의 미덕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역경과 난관을 견뎌 내는 데 있다. 사도들이 어리석고 미천함을 자인하는 데 반해 고린도의 형제들은 성숙함과 고상함을 자랑하는 지경이다. 바울은 이처럼 꾸짖고 나서 자신이 심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을 자녀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달랜다(4:14).
바울은 왜 오지 않는가?(4:18)
바울이 받은 오해 중 가장 억울한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비방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비난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해 놓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오기 두려워서 다른 사람을 보낸다는 억측이 돌고 있었다(고후 1:17).

성적 부도덕과 음행 (5:1~13)
고린도 교회 형제들은 성적으로 매우 관대했다. 근친상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단언한다. '사탄에게 넘긴다'라는 말은 교회에서 쫓아내는 출교 조치를 이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들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 절대 어울리지 말라고 강조한다.

고린도전서 ②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가 되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삶, 예배, 믿음에 관한 분쟁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 분쟁이 발생한 이유는 말씀에 기초한 신앙의 뿌리가 얕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섬기는 일에 연약한 형제들을 세우는데 그 사랑을 사용하라고 가르쳤다. 또 부활 신앙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한다. '깨어라', '강건하라', '사랑으로 행하라'라는 권면은 모든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


네 가지 상황 보고 및 답변

네 가지 주요 질문 및 답변

본문

1:10~6:20

7:1~40

8:1~11:1

11:2~14:40

15:1~58

내용

당파싸움

성적 부도덕

무분별한 법정 다툼

성적 방종

결혼의 문제

(결혼, 이혼, 독신에

대한 태도)

자유의 문제

(우상 제물에 대한

태도)

예배의 문제

(머릿수건, 주의 만찬,

영적 은사에 대한 태도)

부활의 문제

(부활한 모습과

확신 문제)

문제형태

분쟁

논쟁

논쟁

무질서

불신

문제범위

전체적(사적+공적)

사적

사적

공적

공적


교회 안의 추문 (6장)
무분별한 법정 다툼 (6:1~11)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분쟁에 관한 소송을 세상의 재판관에게 의뢰한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여기서 분쟁은 경제적 이해 관계로 빚어진 재산 소송인 것 같다. 그는 질문의 형태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도록 꾸짖는다. 바울은 성도 간의 문제라면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손해를 보거나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7절).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거룩함과 의로움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11절).
고린도 성도들의 성적 방종 (12~20절)
바울은 음행을 다시 경고하며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방종과 방탕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절제와 봉사를 통해 성도의 육체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권면한다. 결국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고린도 성도들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 (7~15장)
첫 번재 주제 : 그리스도인의 결혼 생활 (7장)

결혼에 대한 질문들

답변

그리스도인은 결혼한 후에 성적 생활을 금해야 하는가?

부부로서 성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라.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독신은 성생활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자에 한하며, 성적 욕구를 이길 수 없다면 결혼하라.

이혼할 수 있는가?

이혼하지 말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배우자가 먼저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무리하게 합치지 않아도 된다.

처녀나 과부는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가?

종말론적 시각에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려면 독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 결혼 생활과 독신 생활에 관한 바울의 권면

1

결혼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다. 모든 사람은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음행을 피할 책임이 있다.

2

그리스도인이 되더라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그 책임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3

현실의 가치관과 사회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큰 변화 앞에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주님을 향한 관심이 다른 것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4

결혼 생활을 성실히 해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결혼 생활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려는 굳은 결단이 필요하다.

5

각 사람은 결혼할 것인지, 독신으로 지낼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6

바울은 독신 생활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섬김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독신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몫으로 남겨 둬야 한다.


두 번째 주제 :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주는 특권과 책임 (8:1~11:1)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던진 두 번째 질문은 '우상의 제물로 사용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질문에서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더 넓은 주제를 다룬다.

지식, 자유, 권리에 대한 올바른 태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용과 오용의 경우에

상처, 멸망, 실족이 발생함


조심하는 가운데 절제와

인내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가 모델이 됨


주님과 연약한 형제, 복음과

교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사랑, 세움, 섬김이 중요함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하는 바울의 논증

8장

중심내용 :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형제의 믿음에 걸림돌이 된다면 포기해야 한다.

9장

실례 1 : 자유를 제한한 바울의 삶

사도의 직분을 가진 바울이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권리를 포기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0:1~11:1

실례 2 :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우상을 숭배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을 섬기는 축제나 우상숭배로 보일 수 있는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주님과 함께 행하는 예식인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제 : 예배에서의 예법 (11:2~14:40)

앞서 두 가지 주제가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면, 이제 공적 차원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여자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11:2~16), 주의 만찬을 나누는 문제(11:17~34), 영적 은사의 문제(12:1~14:40) 등 교회 예배와 관련된 것들이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11:2~16)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풍습은 당시 주변 나라에서는 정숙, 예의 바름, 품위 있는 처신의 상징이었다. 이런 풍습은 유대인들에게도 있었는데, 여자는 공 예배에서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당시 고린도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았고, 또한 고린도 교회의 헬라 여자들도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의 문화적 관례를 존중해 여자는 머리를 가리고 예배에 참석할 것을 권면한다(13~16절). 그는 이 문제를 남녀 사이에 우월이나 열등의 차원으로 다루지 않았다(11~12절). 어디까지나 관례를 존중하고 예배가 올바르게 이뤄지는 데에 관심을 뒀다.

주의 만찬에서의 문제 (11:17~34)

초대 교회에서는 공동의 저녁 식사와 예식인 성찬이 하나의 순서로 묶여 있었다. 고린도 교회는 다수의 부유한 성도와 소수의 가난한 성도로 구성돼 있었다. 부유한 성도들은 여유가 있어 일찍 교회에 올 수 있었지만, 가난한 성도들은 늦은 시간에야 교회에 올 수 있었다. 문제는 일찍 온 부유한 성도들이 늦게 오는 가난한 성도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늦게 온 가난한 성도들은 공동 저녁 식사에서 소외되었고, 남은 음식을 먹게 되면서 불만을 갖게 되었다. 물론 공동 식사 후에 있었던 성찬 예식은 함께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주의 만찬에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또한 자신의 살과 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성만찬 말씀을 전한다(23~26절). 주의 만찬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일상의 식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헌신의 기초 위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방언과 예언과 같은 영적 은사의 문제 (12:1~14:40)

고린도 교회에는 영적 은사들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논쟁의 쟁점은 각 은사들의 목적과 용도이며, 특히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중단하지 말고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14:1, 39). 하지만 이런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주신 것이기에, 교회 안에서 '사랑'과 '공익'과 '덕 세움'을 목적으로 행하라고 촉구한다.

주제

내용

의미

은사의 근원

성령 (12:4~6)

단일성

은사의 다양성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

다양성

은사의 다양성을 묶는 끈

가장 큰 은사인 사랑

일치

은사의 사용 규칙

교회의 유익 (12:7)

사랑 (13장, 14:1)

덕 세움 (14:3~5, 12)

교회의 참된 연함

(단일성 가운데 다양성,

다양성 가운데 일치함)


※ 영적 은사

은사의 정의

헬라어 복수 명사 '카리스마타'(Charismata)를 번역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함

은사의 근거

구약성경 (욜 2:28)과 그리스도 (요 14:15~31, 15:26)에 의해 약속됨

은사의 성취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성취됨 (행 2장)

은사의 목적

교회를 세우는 데 유익하게 사용됨 (고전 12:4 이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거듭나게 함 (고전 14:21~22)

은사의 목록

성경 전체 중 네 곳에 은사 목록이 나오며 그 내용은 조금씩 다름

(롬 12:6~8, 고전 12:8~10, 28~31, 엡 4:11)


1) 교회를 위한 영적 은사 (12장)

고린도 교회는 영성을 추구하다가 공동체 정신을 잃어버린 채 지극히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교회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안에 많은 지체가 있으며,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일들을 위해 각종 영적 은사들이 주어졌으며, 그 은사들은 공동의 유익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 12:8~10절에 나타난 은사의 종류

계시의 은사

권능의 은사

말함의 은사

지혜의 은사

믿음의 은사

예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

병 고침의 은사

방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2) 가장 큰 은사는 사랑 (13장)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많은 질문에 대해 핵심 처방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우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랑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특성은 고린도 교회에서 생긴 분열, 다툼, 업신여김, 시기, 질투 등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완전한 답을 제시한다.

3) 영적 은사인 방언과 예언의 사용 (14장)

바울은 12장에서 시작한 영적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14장에서도 계속한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의 은사가 더 소중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 중요한가보다 예배의 규칙을 정해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친다(26~40절). 이것은 방언과 예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네 번째 주제 : 부활에 대한 믿음 (15장)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모든 성도의 부활 소망에 대한 고백을 다룸으로써 내용의 절정을 이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몇몇 성도가 미래에 있을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 확신이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다시 가르친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믿음은 구원을 위한 필수이기 때문이다(2절).

※ 육의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

육의 몸

부활의 몸

성경 말씀

썩을 것

썩지 않을 것

15:42

욕된 것

영광스러운 것

15:43

약한 것

강한 것

15:43

흙에 속한 자의 형상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15:49


고린도 교회를 넘어서서 (16장)

이제 바울은 관심의 지평을 고린도 교회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전체 교회로 향한다. 흩어진 세계 교회, 형제들의 아픔, 자신의 동역자들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관심을 부탁한다. 당시에 교회들이 갖고 있던 재정 문제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역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촉구한다.

바울의 마지막 권면 (16:13~14)

깨어라

  그릇된 종말관에 빠져 있지 말고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주님과 사도들로부터 받은 복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영적으로 강건하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갈등을 해결한 열쇠는 사랑의 실천이다.


고린도전서 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를 따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바울, 아볼로, 베드로 등과 같은 지도자를 숭배함으로 분열과 거짓된 자랑거리가 생겨났다.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은 지도자들의 지혜나 총명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며, 복음의 진리는 영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당파 문제는 영적 미성숙을 나타낸다. 바울은 자랑거리를 인간 지도자들에게서 찾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고린도, 신약성경의 라스베이거스
고린도는 1세기 남부 헬라의 유명한 상업 도시였다. 지중해 전역의 상인들과 선원들이 몰려들었던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고린도 언덕 위에 세워진 해발 550미터 높이의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다. 그곳은 신전 소속 창녀인 히에로둘리(Hieroduli)가 1,000여 명씩 상주하며 매춘과 도박이 성행하던 타락의 중심지였다. 고린도를 신약성경의 라스베이거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린도 사람처럼 행하다'(korinthiazomai)라는 말은 '방탕하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했다. 이런 고린도에 바울이 찾아온 것은 2차 전도 여행의 말미였다(행 18:1~17). 그 당시 교회를 세우기가 가장 어려워 보이던 곳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당파

바울 그룹

자랑하는 사람들

바울에게 속해 복음이 가져다준 자유를 자랑함

아볼로 그룹

지적인 면을 선호하는 사람들

아볼로의 인격과 총명에 끌림

게바 그룹

베드로를 따르는 사람들

베드로를 사도들 중에 최고 권위자로 여김

그리스도 그룹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식으로 '그리스도'를 이용함


분쟁에 대한 답변 (1~4장)
고린도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세계에 미칠 종교적 영향력도 갖고 있었다. 그곳에 역사한 복음의 능력은 고린도 교회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린도의 이교도적 생활 태도는 부패한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고 고린도 교회는 도덕, 윤리, 교리 문제들에 시달렸다. 그래서 바울은 특히 분쟁과 음행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에 대해 영적 아버지로서(4:14~15) 답변하고 있다. 바울의 어조는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가득했고, 그들에게 매로 나아가지 않게 되기를 당부했다(4:21).
참된 지혜
참된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신령한 것을 알 수 없다(2:11~12).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라는 말은 쉽게 '성경은 성경으로'라는 뜻이다.
참된 사역
사역자를 건축자라고 할 때 그리스도는 교회의 터다. 각각의 재료들로 그 위에 집을 세우나 하나님은 공력에 따라 상을 주신다(3:12~15). 불이 모든 사람의 공력을 시험할 때 금, 은, 보석은 남게 되지만 나무, 풀, 짚은 타서 없어지게 된다. 곧 신령한 것들로 지으면 남게 되지만, 자신의 영광이나 자기 만족으로 지으면 불타 없어질 것이다. 여기서 상이란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것으로서 주님께 봉사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을 잃는다는 것이 구원을 잃는다는 뜻은 아니다.
참된 일꾼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다. 그들은 겸손과 믿음으로 본이 돼야 하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4:1~2).

교회 안에서 일어난 추문 (5장)
고린도 교회 안에 계모와의 근친상간 곧 음행의 악이 있었는데 교회가 그것을 묵인했다. 바울은 그가 회개할 때까지 교제에 동참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한다(5:1~2, 11). 이것은 죄성을 멸하기 위해서다. 또한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명령한 것은 죄악을 제거하기 위함이다(5:7).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고린도전서 10장 23절~33절]
23절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절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절 -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절 -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절 -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절 -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절 -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절 -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절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절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절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오늘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두 기업인의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K라고 하는 사장은 모교회 장로로서 그의 생활 가운데 물질을 쓰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을 말했는데, 하나는 모든 수입에서 1/10은 하나님께 바치고 또 1/10은 하나님의 사업과 구제 사업을 위해서 떼어놓고 또 1/10은 자기 노후 대책으로 저축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외 나머지는 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 주님의 뜻대로 쓰고 있다는 간증을 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도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불고기 한번 안 먹어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더 복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증을 하는가 하면 또 한 분의 사장님은 모교회 권사의 직분을 가진 분으로 간증하기를 작년에 많은 손해를 봤는데 갑자기 부도가 나고 또 무슨 수출 사업을 하면 이상하게 안되어 망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부인까지 죽을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부흥회에 참석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귀신을 내어쫓아 병이 낫는 것을 보고 그때 자기도 불을 받아 방언도 하고 은혜도 받았답니다. 그러면서 그가 망하게 된 이유를 다하는데 첫째로 자기는 십일조의 액수가 너무 많고 계산도 할 수 없고해서 안 바쳤답니다. 또 주일도 안 지켰고 돈을 벌고 사장노릇하면서 다방을 자주 출입하다가 급기야 탈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런 사업도 망하고 저런 사업도 망하고 그리고 부인까지 죽게 되었는데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다가 그때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기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간증이 어찌나 대조적이었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은 사업을 해도 돈을 벌어도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까하여 노력하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자기 향락과 자기 쾌락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탈선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건강을 준다면 그 사람은 보나마다 더욱 더 악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죄짓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빼앗아 가는 것이 축복이요 건강을 주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건강을 빼앗아 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남보기에는 거룩하게 성경 찬송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행여나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식구들도 속이고 주의 종을 속이면서 은밀한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까? 죄짓는 순간 겨우 몇 시간 몇 분 동안은 즐겁겠지만 그 죄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 명심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세우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여야 축복도 받고 삶의 보람도 느낀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무리 벌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권세를 부린다고 할지라도 그 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것은 불행이요 보람도 가치도 없는 삶인 것입니다.
요 5:30절에 보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도 한 시간도 한 가지 일도 자기의 뜻대로 무엇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요 6:38절에도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고 피흘리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참다운 행복과 보람있는 삶을 살려면 내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고 그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때는 쓰고 또 괴로운 것 같아도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즐거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는 쾌락과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하고 몇 십배 몇 백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치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의 초점을 그 실체에 잘 맞추어야 분명하게 잘나오는 것처럼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잘 맞추어야 그 삶이 명확하고 보람있고 행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내 뜻을 정해놓고 내 욕심을 정해놓고 하나님이 뜻을 여기에 맞추어 주시옵소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고로 우리가 가장 보람있고 만족한 삶을 사는 비결은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다 맞추는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J.Smith) 목사님은 30세 생일날 특별 제목을 하나 정해놓고 기도를 했는데 그것은 유명한 목사가 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큰 부흥사가 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큰 목회 목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목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목표를 정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캐나다 토론토의 유명한 피플처치(People Church)라고 하는 수천 명이 모이고 선교사를 400-500명이나 보내는 큰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몇째 안가는 부흥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해 전에 그 분이 쓴 책을 읽다가 저도 부족하지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뜻에 꼭 맞는 종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하고 목표를 정하고 살아오고 있는데 내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그외에도 모든 면에 축복해 주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사람만 되면 그 이상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했지만 그러나 조금 후에 기도할 때에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하고 기도를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나라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모두 멸망할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돈벌고 사업하는 모든 것도 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지옥갈 내가 예수 믿고 천국에 가게 됐으니 이제는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 멸망할 죄인들을 어떻게 하면 구원해 볼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번 돈을 천국 사업에 쓰든지 아니면 전도를 하든지 혹은 기도로 돕든지 하여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해 보겠다고 하는 거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의 목표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요 5:34절에 보면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요 6: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했겠지만 멸망받을 죄인들을 위해 얼마만큼 기도해 봤으며 몇 사람이나 주님의 앞으로 인도했고 구령 산업을 위해 헌금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벧후 3:9절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오래 오래 심판을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것도 사업하는 것도, 돈버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다 최종 목표는 구령 사업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돈 모으고 사업하는 것도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뚜렷한 생의 목표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우리가 그저 먹고 입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벌고 잘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시계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은 저 혼자 돌아가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것처럼 인생의 근본이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본문 말씀, 고전 10:31절에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내 교회 하나 커져서 유명해지고 내 이름이나 내기 위해서 전도 사업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 상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 5:44절에 보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려고 할 때 그 사람도 영광을 얻게 해 주시고 그의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십니다. 마 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업이나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가리우냐를 생각해 보면 압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마 5:16절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어느 땐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내 이익을 차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께 욕돌리는 것이 싫어서 억지로라도 참고 주의 영광을 위해 손해 보면 하나님께서도 갚아 주십니다.

3.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유익하게 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좀더 유익하게 할까 하는 동기로 무엇이든지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 고전 10:32절에 보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도 구원을 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0:23절에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한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될 수 있는 것이면 안하는 그것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은 죄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은 선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영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 참 행복과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제목 : 살아온 삶에 감사합니다 (공재영 목사님)

[고린도전서 15장 10절]
10절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어느 심리학자에게 한 어머니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우리 아이를 언제부터 훈련을 시키면 좋을까요?” 그러자 심리학자가 그 어머니에게 “아이가 지금 몇 살이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다섯 살인데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심리학자가 어머니에게 “부인, 빨리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벌써 5년을 놓치셨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대화에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부모의 자리는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귀한 자리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정말 가슴 아픈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님은 계시는데 그 부모님의 역할이 닫혀진 채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복되게 세워주시려고 하나님은 성경에 요셉과 모세의 자리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신의 환경 때문에 자신의 삶 속에서 붙잡아야 하는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의 삶을 성경이 증거하기를「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11:26)」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본문에서 살아온 삶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자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 나답게 사는 복을 알고 삶을 열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를 확인해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자리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라고 하신 것입니다. 관심의 자리에 세우게 하는 우리 몸의 지체가 눈입니다. 이 눈에 형제에게 있는 티는 보여지고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보여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티는 톱밥 중의 한 알이라면 들보는 널빤지나 기둥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있는 널빤지나 기둥은 보이지 않고 톱밥 한 알이 묻어 있는 다른 사람의 모습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리가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열려지지 못하므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리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자리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맹인의 자리에서 눈이 열려진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나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존귀하게 하고 아름답게 세우는 지혜는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알고 열어가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알게 하려고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을 거절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13:7)」고 했습니다. 사람의 자리에서 가장 위로를 받는 자리는 내가 나 되는 자리에 세워진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이런 위로의 자리를 사도 바울이 증거하기를「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8)」라고 했습니다. 나답게 살아가는 자리는 어느 특정인의 은사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세워지는 은혜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삶에 감사하는 자리는 모든 사람이 세워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나답게 살아가는 자리에 세워주시고 계십니다.

2. 자기 공로로만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 속에 활동력 있게 세우는 기간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누구도 예외없이 삶의 모습이 점점 보여지지 아니하다가 소리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립니다. 인생의 자리를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정거장에서 어디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해보겠다고 결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자리는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다양한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은 어린시절에 누리며 살았던 놀이 문화 중에 땅따먹기 소꿉장난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놀 것이 없었던 그 때에는 저녁 늦게까지 골목 모퉁이에서 큰 원을 그려놓고 작은 돌멩이 하나를 튕겨서 자기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자기 땅도 아닌데 그 땅을 차지하려고 전심으로 달려듭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그 땅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얼마나 그 땅을 차지했느냐에 따라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아웅다웅하던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고 집으로 가듯이 내가 이루어 놓은 성공의 땅을 내려놓고 떠나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이 인생의 정거장에서 무엇으로 자신을 세워야 자신이 살아온 삶에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조그만 정거장에 나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살아온 자리에서 나 자신과 함께 있어 준 은혜의 자리가 있다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우리 모두가 생각없이 살았던 자리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온 인생 길을 살아오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세워진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고 나의 곁에 함께 있어 준 은혜의 자리를 잊어버린 채 자신의 공로로만 삶을 세운 것처럼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누구보다도 크게 받은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자리를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바울은 크게 외친 것입니다. 내 공로로 세운 자리에는 용서할 수 없는 자리가 있지만 내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는 모든 것을 세우게 되면서 감사하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처음 받은 은혜를 끊임없이 회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공로로 세운 자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세운 자리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게 되는 인간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경쟁자로만 보이게 되고 한 번 실패가 패배자가 된다는 위기감 속에 삶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리를 세워주는 열쇠가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사람의 자리에는 이 은혜의 자리가 너무나 불완전하므로 쉽게 닫혀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자리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의 자리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삶을 강하게 붙잡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자로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감사의 열매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유혹에서 벗어난 사도 바울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며 자신의 자리에 남다르게 찾아주신 예수님의 손길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일컬어「처음 받은 은혜 곧 처음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자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세워지는 자리가 남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자신이 받고 사는 은혜의 자리보다 자신의 업적을 최우선적으로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족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워진 자리에서 고백하기를「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결코 세워질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찾아주셨고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셨음을 믿고 깨달으면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살아온 삶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받은 처음의 은혜를 끊임없이 회복할 수 있을 때에 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잘못된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성도의 자리에는 좋은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처음에 가진 좋은 은혜의 자리를 끊임없이 회복하며 살아가는 성도로 세우게 될 때에 살아온 삶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모든 자리에는 힘들이지 않고 세워진 자리는 없습니다. 이는 감사할 수 있는 자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끊임없이 회복하는 지혜는 첫째 나답게 사는 복을 알고 삶을 열어가야 합니다. 둘째 자기 공로로만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처음에 받은 은혜를 끊임없이 회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자리에 세우게 하려고 우리를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이 있으므로 더 좋은 일을 해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제목 : 흔들리지 않는 믿음 (피종진 목사님)

[고린도전서 15장 57절~58절]
57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할렐루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합니다. 이는 미국 강대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까지 많은 환난이 찾아오고 정치인들의 격돌이 심하며 또 산업전선 모든 곳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한 가지 우리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100% 보장해 주시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승리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흔들린다.’란 ‘샬로스’(헬)로 「요동함을 받는다. 넘어짐을 받는다. 밀침을 받는다.」로 타인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외부에서 오는 유혹, 시험, 핍박과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몰려와도 견고히 서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반석 위에 세우고 파손되지 않는 그런 믿음을 가지면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것에 다 승리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받는 일이나 핍박받는 일이나 또는 우리 안에서 생기는 근심으로 인하여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 닥쳐와도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면 어디서 무엇을 해도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말씀을 통해 상고하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첫째, 악한 일에 개입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고전 15:3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간혹 외부에서부터 속이고 행실을 더럽히고 악한 일에 동참하게 만들어 대열에 서서 추종하게끔 하는 악한 동무들의 꾀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일들이 덮쳐 오고 꾀이려 해도 절대로 그런 것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려운 시국에 있습니다. 이 틈을 타는 사탄의 역사를 우리는 기도로 동참하여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도 바른 믿음의 신앙에 서기 위해서 악한 일에 개입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악한 일을 행한 사람과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의 생활 자세와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욥 11:14)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 국가에 불의가 있으면 안됩니다. 오직 말씀의 진리와 의만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①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욥 11:17)
②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욥 11:18)
③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욥 11: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푯대가 분명한 믿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바로 푯대이고 본질이며 기초이고 반석이 되어 항상 우리에게 이김을 주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도 없고 생명의 부활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는 인생은 죽은 송장과 같고 마른 해골 떼들이요, 생명 없는 마네킹이요, 향기 없는 꽃과 같습니다. 예수 없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는 사람은 절대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또 피할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고 푯대를 분명히 정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에 길이 보이고 역사가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푯대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 주님의 일 이 세 가지가 일치되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전진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세계는 뒤로 물러나면 내가 저를 기뻐하지 않느니라(히10:38)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전진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마라의 쓴 물도 통과해서 엘림의 단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에는 전쟁의 시험이 있었지만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할 때 요단강이 또 갈라지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진하는 자에게는 길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축복으로 무엇이든지 가능성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려가는 것은 앞으로 향해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푯대가 분명할 때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시고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은 ‘앞으로 전진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신. 구약의 성경을 보면 전진만 있고 후퇴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희망과 소망과 꿈을 가지게 하셨고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가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지만 아브라함은 절망 중에도 앞을 향해 나아가 다시 길이 열려서 동서남북의 보이는 땅을 다 주셨고 발을 딛고 서는 곳이 다 네 땅이 되게 해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후손을 바다 모래와 같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3:14~18)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오늘날 영적으로는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생활에 있어 푯대가 분명하고 앞으로 전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어떤 사명에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힘써야 할 기본이 있습니다. 바른 방향 설정입니다. 올바를 방향을 설정하고 속도를 내야 합니다.
① 기도하는 일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 1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오로지’라고 표현한 것은 다른 어떠한 것을 개입하지 말고 오직 기도에 힘썼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이 임했고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제자들이 늘어나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항상 우리의 기본이요, 본질이요, 모든 것에 출발점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지 않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아멘. 여기에 ‘계속’하라고 말씀하셨고 ‘깨어있으라’라고 강조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② 우리는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전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에 분부하신 말씀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잘 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2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육성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아멘. 복음 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③ 봉사와 헌신에 힘써야 합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믿음이 견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은 악한 일에 개입되지 않는 믿음, 푯대가 분명한 믿음,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믿음으로 주의 사명에 더욱 전진하여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신앙

[고린도전서 15장 9절~10절]
9절 -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절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5)


저 자신이 오늘날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또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중요한 진리 중 한 가지는 내 신앙이 어릴 때는 무엇이나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차츰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신앙이 성숙하여 질수록 전에는 '내 것'이라 생각하던 것이 이제는 날이 갈수록 '내 것이 아니라'는 자각으로 점점 더 변해 간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설교를 잘 해도 '내가' 잘한 줄 알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도 '내가' 잘한 줄 알았는데 이제는 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전에는 물질도 내 것, 자식들도 내 것, 교회와 교인들도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욱 많이 받을수록 그것을 모두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가장 깊은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냐 하면 자기의 권세와 능력과 영예와 물질,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 2: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안에서 사는 것이라"

1. 수고와 봉사도 내 것이 아닙니다.
본문 고전 15:9,10절에 사도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신약 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했고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존재할 수 있었겠느냐고 까지 말하는 학자가 있을 만큼 위대한 대 사도였지만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고 칭함을 받기조차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는 겸손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것이 있다면 약함과 무능함과 부족함만이 보이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크게 보여야 믿음이 정상으로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벧전 4: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힘 주셔서 한 것이니 내것이라고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없이 수고하고 봉사하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공치사나 불평이 나오게 되고 알아주고 칭찬해 주면 교만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눅 17: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2. 권세와 능력도 내 것이 아닙니다.
처음 은혜받고, 기도해서 병자가 낫든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면, 괜히 가슴이 붕뜬 것 같고 모두 내가 한 것 같아서 우쭐하고 교만해지곤 했습니다.
지금 깨닫고 보니 은사와 능력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병자가 낫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창피할 것도 없습니다.
마 10:1절에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눅 9:1절에도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능력과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한 것은 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라 우주만물이 질서있게 운행되듯이 인간 세계도 질서있게 살기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로서의 권위,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주시고, 교회에서도 목사, 장로, 권사 등 각각 권위를 주셨고 국가에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각각 다스릴만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롬 13: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어떤 권세도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교만하거나 우쭐할 수도 없고 그 권위를 남용할 수도 없고, 타인을 멸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될 때 가정에서나 교회에선 사회생활에서 힘들지 않게 내 윗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고라와 다단 일당이 모세를 거역하고 반항하다가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켜버린 심판이 있은 뒤 열두 지파 족장들의 지팡이를 가져다가 증거 앞에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꺼내어 보니까 제사장 어른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이로써 제사장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명백히 증명했습니다.
이 지팡이가 싹이 나고 꽃이 핀 것은 아론이 훌륭해서도 아니요, 나무가 좋아서도 아닙니다. 그 나무는 다른 지팡이와 똑같은 나무요, 아래 위를 잘라서 만든 지팡이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권세와 능력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깨닫고 겸손할 때 하나님은 그를 들여 큰 권위자로 삼으십니다.

3. 명예와 칭찬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24장로가 주님이 주신 면류관을 다시 벗어 보좌 앞에 던지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주신 면류관이지만 마땅히 다시 벗어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주님만이 받으셔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떤 칭찬과 명예를 받게 되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마땅히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에게 어떤 사람이 묻기를 당신의 그 능력있는 믿음의 비결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간청하니까 뮬러가 조심조심 겸손히 말하기를 '나는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은 날이 있습니다. 그것이 큰 믿음의 비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칭찬과 명예가 돌아와도 결코 자만하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칭찬 들을 때 교만하지 말고 남이 칭찬 들을 때 시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고후 3: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대상 20:10절이하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주의 것이로서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4. 자식도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7편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는 말씀 같이 자식이 내가 낳았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기업입니다.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벌었다고 내 것인 줄 알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명기 8:17절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재물도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이지, 내가 벌었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써 두면 그때에 영원히 내것이 됩니다.
우리 성도에게 이 청지기 신앙을 가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에 대하여 '내 것이 아니라'는 신앙으로 살게 되면,
첫째, 항상 적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둘째,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고
셋째, 성공한 뒤에도 교만하여 마귀의 밥이 되지 않으며,
넷째, 축복을 영원히 간직할 수가 있고,
다섯째, 마음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 참으로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아 멘 -

절제하는 생활

[고린도전서 9장 24절~27절]
24절 -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절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절 -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절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절제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통제(self control)를 잘하고 절제를 잘하는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 사도 바울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고 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솔직한 자기의 신앙생활을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도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하면서 날마다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박태선이나 문선명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통하여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절제가 없이는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상받고 칭찬받는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은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말세지만 말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죄악된 것으로 꽉 차 있는 세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절제가 없으면 어느 순간에 실패할런지 모르는 것입니다. 절제는 총의 안전장치와 같아서 이것이 없으면 언제 오발을 해서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일는지 모릅니다.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아서 이것이 없으면 언제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지 모릅니다.
어느분이 몇 해 전에 산상집회에 가다가 타고 가던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금강으로 추락할 뻔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차에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보다 더 위험한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절제할 줄 모르는 성도인 것입니다.
모든 언행심사에 억제하고 구별하고 적당히 해서 승리하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는 무엇을 절제해야 되겠습니까?

1. 생각을 절제해야 합니다.
모든 죄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살인, 도적질, 간음 등 모든 죄가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절제해야 죄를 이깁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 속에 침투해서 못된 생각, 더러운 생각, 악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요 13: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못된 생각, 잘못된 생각, 더러운 생각이 침투해 올 때 그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는 것을 깨닫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고 예수님처럼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4: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항상 기뻐하고 관용하고 감사와 기도의 생활을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을 통하여 들어는 마귀의 역사를 물리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하고 사는 게 말인데 이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역시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약 1: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약 3: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감정나는 대로 말하면 안됩니다. 생각나는 대로 입을 놀려서는 안됩니다. 마음에 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벧전 3:10절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 보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보는 것으로부터 죄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대개의 경우 눈으로 보고 생각을 일으켜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밟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도 마귀의 유혹을 받아 먹지는 못해도 보기나 하자 하는 마음이 들어 선악과를 보니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그 다음에 손을 내밀어 따먹었습니다.
다윗 왕도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왕이었으나 어느 날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정욕이 불같이 타올라 간음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 죄 때문에 여인의 남편도 죽게 하고 권력 남용의 죄, 거짓의 죄 등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 짓 때문에 평생 다윗의 집에 살인, 음란, 가정 불화의 칼이 떠나지 않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욥 31:1절에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했고 마 5: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4. 우리는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능 중에 먹는 본능, 식욕이 제일 강한 줄 압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 했고, 에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고 비참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왕이 주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나 우상의 제물과 술을 먹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술이나 담배나 아편 등 몸을 해롭히는 것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 합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절제해야지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사치스럽게 먹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5. 육신의 정욕을 절제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 죄가 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본능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정욕, 특히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언제 마귀의 밥이 될지 모르며 자신과 가정을 파탄시킬지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는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입니다. 이성 본능에 브레이크 장치를 잘해서 절제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도 회개한 다음부터는 전에 짓던 죄가 생각나고 정욕이 일어날 때마다 자기의 팔을 물어뜯으며 절제하고 극기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려고 추운 겨울날에도 맨 바닥에 누워 자고 가시덩굴에 뒹굴면서 피가 나도록 극기하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정욕으로 범죄치 않도록 절제하시기를 바랍니다,

6.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혈기와 분노, 시기와 질투의 감정 등 모든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잠 14: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으며 또 잠 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마음이나 우쭐하는 마음이 들 때는 '나는 비천한 죄인이다' 하는 생각으로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Rebert Schuller) 목사님이 어디가서 설교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광장히 칭찬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슐러 목사님은 속으로 회개 기도를 드렸답니다.
'하나님, 나는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지나치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 칭찬받는 소리가 듣기 싫지가 않고 듣기가 좋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어떤 때는 변변치도 못한 제가 하나님 축복으로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 저는 사실 비천한 죄인입니다'하고 속으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여러분! 어쩌다 돈이 생기고 명예가 올라가도 감정을 잘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절제하는 생활입니다. 끝까지 우리 성도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또한 어디에서든지 절제 생활을 잘하여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좋은 목표를 세우자

[고린도전서 10장 31절~33절]
31절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절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절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사람의 사망률이 결혼식이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 전날에는 훨씬 감소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앞에 어떤 꿈과 목표를 가졌을 때는 비상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없는 사람은 키 없는 배와 같아서 이리저리 떠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er)는 '사람이 목표를 가질 때 잠재능력을 일깨워 주며 극대화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표를 설정하지 않은 사람이 목적지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필립스 브룩스(Philips Brooks) 목사는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달성하지 못하고 실망할까봐 목표를 안세우는 사람이 많은데 실상 가장 큰 실패는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목표를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어머니도, 사업가도, 세일즈맨도, 학생도, 노동자도, 장사하는 사람도 다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고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먼저 목표로 정해 놓고 방법을 연구하여 나아갔지,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어떻게 재우며 어떻게 입힐 것인가 하는 것은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목표를 정하고 진행하면서 하나 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간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N. V Peale) 박사는 사람은 평생목표, 년도별 목표, 주별목표, 일별 목표를 세워야 하고 자기가 4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겠는가를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표+희생=성공이라고 성공의 공식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목표는 크면 클수록 좋고 또한 좋은 목표일수록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꿈과 목표라야 축복하시지 좋지 못한 목표에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목표란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에 보면 가장 선한 인생의 3대 목표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
본문 31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업을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자에 대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목적론(Teleology) 적으로 말할 때 모든 것은 다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도, 꽃도, 시계도 모두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무슨 목적으로 만드셨겠습니까? 그저 먹고 자고 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식낳고 살다가 죽으라고 만드셨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이 목표를 위해 살 때 진정한 행복과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진을 찍는 사람이 사진기의 초점을 잘 맞추어야 사진이 선명하게 잘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돈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인도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우리 나라에도 왔다 갔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녀요 노벨상을 타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다르지링이라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테레사야, 너는 5만명의 거지와 2만명의 문둥병자가 우굴거리는 칼커타로 가라. 그들은 길거리에서 나서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는다. 너는 그들에게 살았을 때에 잠자리를 주고 죽을 때는 무덤을 만들어 주어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2년동안 준비하다가 마침내 1948년 8월 8일 찬송가 하나, 성경책 하나, 수녀복 한 벌만 입고 칼커타로 떠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한 벌의 옷이 헤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알지 못하나이다. 오늘밤 나는 어디서 잠을 잘지 알지 못하나이다. 내일 아침 어디서 먹을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1946년 9월 10일 당신의 부르심을 듣고 이제 떠나나이다. 내 일생을 당신께서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후 30년동안 그녀는 100여 곳에 고아원을 세웠고, 1979년에 세계 노벨 평화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웠던 것입니다.
마 6:33절에 참 좋은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목표를 세우면 그 다음의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를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이웃의 유익을 위한 목표
본문 33절에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뉴욕 전화국에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많이 쓰는가 조사해 보았더니 '나'라는 말을 제일 많이 쓰더라고 합니다. 5000번의 대화 중에서 3999번이 다 '나'에 대한 이야기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보았자 짐승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도 없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참으로 성공한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남을 가장 사랑하는 길이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길입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에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첫째 가장 값싼 차, 둘째 가장 편안한 차, 셋째 가장 안전한 차를 만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결코 돈 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남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 사업의 목표였습니다.
강철왕 카네기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묻기를 '당신은 재산이 다 없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또 다시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유익한 물건을 만들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웃의 유익을 위한 목표를 세울 때 참으로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할 때 참으로 내가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서로 대조되는 노벨평화상을 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쳐와 알베르 꺄뮤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쳐는 박사학위를 4, 5개나 가진 실력가이지만 아프리카의 적도 람바네라에 가서 과거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학대한 것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그 토인들을 치료해 주고 문둥병을 싸매 주는 일을 하다가 노벨상을 탄 사람입니다. 그는 거액의 상금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짓고 약을 사다가 치료해 주는 일에 썼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를 20세기의 태양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한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알베르 까뮤는 노벨상 탄 돈으로 교외에 고급 별장을 짓고 자신의 쾌락만 좇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별장으로 신나게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유명한 그리스도인 작가 '빙점'의 저자 삼포능자 여사가 있습니다. 그는 구멍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너무 너무 잘 되서 물건을 매일 트럭으로 떼와야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서 '여보, 우리 가게가 너무 잘되어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생활이오'라고 말하는데 자극을 받고 그 다음부터 일부러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주곤 했답니다. 인간으로서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 나는대로 틈틈히 소설 '빙점'을 써서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전 10:24절에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1923년에 시카고에 있는 에드거워터 비치 호텔에서 세계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부호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강철회사 사장, 공익회사 사장, 가스회사 사장, 곡물업자 사장, 뉴욕 증권거래소 소장, 국무위원, 월가의 거물, 전매회사 사장, 국제 안전 은행의 행장, 이상 9명입니다.
그런데 25년후에 한 기관에서 그들의 행방을 알아보니까 강철회사 사장은 망해서 빚더미 위에 있고, 공익회사 사장은 외국망명 생활을 하다가 무일푼으로 객사했고, 가스회사 사장은 미쳐 버렸고, 곡물업자 사장은 외국에서 고독하게 죽었고, 뉴욕 중권거래소 소장은 형무소에 있었고, 국무위원은 형무소에서 출감후 곧 사망했고, 월가의 거물은 자살했고, 전매회사 사장도 자살했고, 국제 안전 은행장도 마찬가지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목표가 아니면 이와 같이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쓴 것은 어떤 것이든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아무것도 못가져 가지만 미리 하늘 나라에 우리의 선한 것은 보내 둘 수 있습니다.

3. 영혼 구원을 위한 목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사업을 하든지 늘 지향해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다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 영혼을 구해야 하겠다는 목표입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도 구령 사업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이보다 더 보람있는 일은 없습니다. 시간을 바쳐서 몸으로 전도하든지 물질로 전도하든지 하여간 우리 자신이 숨질 때까지 지향해야 할 목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코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목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요 6:38-40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가장 좋은 삶의 목표는 지옥불에 떨어진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축복하여 성공할 것입니다. 고전 9:16절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가 화자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인생의 가장 선한 3가지 목표를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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