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②
교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고린도 교회는 성적 타락과 성도 간의 분쟁으로 어지러웠다. 이 때문에 결혼, 우상 숭배, 영적 은사의 문제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영적 권위와 권리보다 복음에 대한 사명과 순종을 앞세운다. 모두에게 권리가 있지만 연약한 자를 위해 그 권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문제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특정 시기에, 특정 교회에, 특정 문제에 대해 교훈하는 서신이다. 그래서 당시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화와 사회 관습은 변한다. 따라서 바울이 언급한 그 당시의 관습 문제를 지금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바울이 여성에게는 머리를 가리라고 하고 남성에게는 긴 머리가 수치스럽다고 했지만, 오늘날 이 같은 견해는 문제가 될 것이다. 독신에 관한 바울의 견해도 고린도의 악명 높은 성적 방종이라는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달하려는 복음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순전히 행하라는 것이다.
성도의 송사 문제 (6:1~20)
교회 안에서도 다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이런 다툼을 내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도, 구태여 불의한 세상 앞에 고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진다. 정통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법정에 소송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가진 율법의 우월성을 훼손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완전하기에 세상의 판단을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처럼 교회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쟁이 불가피하다 해도, 분쟁의 불씨를 없애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성도는 불의를 버리고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에는 성적 부도덕 외에도 도적질, 탐심, 술 취함, 비방과 속임 등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오직 주를 위하는 일만이 옳다. 이미 우리 몸은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과 한 영으로 합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몸과 영혼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문제 1, 결혼 (7:1~40)
고린도 교회의 성적 방종은 자연히 결혼 문제와 연결되었다. 예수님은 결혼과 관련해서 한 가지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셨는데, 이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고, 이혼은 상대방을 간음에 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막 10:9; 눅 16:18). 오직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배우자가 간음했을 때뿐이다(마 5:32; 19:9).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성적 방종으로 악명 높은 교회의 상황을 고려했음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결혼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쓴 문제' 중 하나였다(7:1). 즉,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결혼에 관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에 바울은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 결혼할 의사가 있는 자와 없는 자 등으로 대상을 나누어 답한다.
결혼한 자 (7:1~7)
바울은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아내나 남편을 두는 것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결혼했다면 아내와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각자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배우자이고, 이 점에서 부부는 상호적이며 동등하다. 기도 생활을 위해 분방하더라도 곧 다시 합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는 자와 과부 (7:8~9)
바울 자신처럼 그냥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
이혼 (7:10~16)
원칙은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경우가 존재한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 덕택에 구원받는다면 좋지만, 만약 믿지 않는 배우자가 헤어지고자 한다면 원칙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믿지 않는 자와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느니 이혼하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할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7:17~20)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과거에 할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면 된다.
종과 자유인 (7:21~24)
종과 자유인도 마찬가지다. 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긴 하지만, 자유인 또한 그리스도의 종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7:25~40)
예수님은 독신이셨지만 제자들에게 독신으로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이에 대해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아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환난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결혼하면 주님을 섬기는 게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의 독신 결단으로, 결혼을 약조한 상대방과 결혼하지 않더라도 죄짓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과부도 다시 결혼하면 좋지만 그냥 있는 것은 더 좋다.
고린도전서 7장의 구조
1~7절 | 8~9절 | 10~16절 | 17~20절 | 21~24절 | 25~40절 |
결혼한 자 |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 | 이혼 | 할례자와 무할례자 | 종과 자유인 |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했다면 의무를 다하라. |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지만 정욕에 불타느니 결혼하라. | 불신자와는 이혼해도 되지만 그의 구원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 | 그대로 지내라. | 그대로 지내라. |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문제 2, 우상 숭배 (8:1~10:33)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와 아시아 교회에서 시급한 현안이었다. 이방 신에게 제사한 고기는 축제와 잔치를 여는 데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 유통된 듯하다. 그러면 그 고기를 사거나 남은 고기를 집에 가져가는 것도 우상 숭배가 되지 않을까? 바울의 원칙은 지식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다(8:1).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려해서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지식이 있는 사람은 어떤 고기든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이 이를 보고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형제를 실족시키는 대신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는 편이 낫다.
바울 자신이 이런 사례의 훌륭한 모범이다(9:1). 바울은 자유인이며 사도라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제하고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우상과 관련해서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 자신이 선 줄로 착각한 사람은 넘어질까 주의해야 한다(10:12). 이스라엘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위대한 민족이었지만, 대부분은 광야에서 멸망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으며, 음행하다 하루에 23,000명이 죽었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다가 멸망당했다. 결국 바울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짓는다(10:14).
우상 제물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이로써 그들이 구원받도록 도와야 한다. 불신자가 내놓은 음식은 음식의 출처를 묻지 말고 먹되, 누군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면 다른 이들을 위해 먹지 않는 게 낫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
고린도전서 8~10장의 구조
8장 | 9장 | 10:1~22 | 10:23~33 |
우상 제물을 대하는 원칙 | 사도 바울의 사례 | 우상 숭배에 대한 역사의 교훈 | 우상 제물을 대하는 자세 |
지식보다 사랑이 우선이다. |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사도의 권리를 희생했다. | 절대 조심하고 피하라.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말라. |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 구원받게 하라. |
예배에 관련된 문제점 (11:1~34)
바울은 예배와 관련해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문제고, 다른 하나는 성만찬을 할 때 드러난 오류들이다. 바울 당시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은 권위에 대한 복종의 표시였다. 여자들은 공공장소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머리를 가려야 했다. 반면 바울이 보기에 남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진리 여부와 상관없는 문화 현상이다.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남자가 '카파'를 쓰고 있다.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자기 성찰이다.
파당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는 성만찬 때 일부가 먼저 먹어 다른쪽 사람이 못 먹는 경우도 생겼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책망했다. 또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 됨을 강조하며,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임하는 것이 죄악임을 지적한다. 고린도 교회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죽은 자)가 많은 것은 주께 징계를 받은 결과니 자신을 살펴보고 모두가 모일 때까지 기다려 하나 됨을 이루라고 말한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문제 3, 영적 은사 (12:1~14:40)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가 많았다. 하지만 은사의 다양성 역시 분파의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고집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특히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거룩함과 성숙함의 표식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각 은사에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면서 그 예로 몸의 비유를 든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어느 지체도 쓸데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오히려 약한 지체를 더욱 귀하게 하셔서 몸을 고르게 해 분쟁이 없게 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는 지체들인 성도들이 여러 은사를 받아 행하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나 능력을 행하는 자나 병 고치는 자나 방언을 말하는 자나 통역하는 자일 수 없다. 다만 누구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13:13).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집착하는 방언 은사에 대해 특별히 지적한다. 뜻 없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해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것이다. 바울은 혹시라도 방언을 하지 못해 이런 소리를 한다는 오해를 살까 봐 자신이 누구보다 방언을 더 말하고 있음을 언급한다(14:18). 하지만 은사에는 차별된 중요도라는 게 없다. 각각의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원론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다시 교회에서 은사 사용하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방언을 할 때는 두세 사람만 차례대로 하고 통역이 따라야 한다. 통역이 없으면 잠잠해야 한다. 예언할 때는 두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이들이 분별해야 한다.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되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구조
12장 | 13장 | 14:1~25 | 14:26~40 |
한 성령이 주신 여러 은사 | 가장 큰 은사, 사랑 | 방언과 예언 | 은사 사용의 실례 |
몸이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라. |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 | 방언과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을 금하지 말되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 |
12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 은사 |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치유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함의 은사, 여러 가지 방언 말함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
부활 (15:1~58)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대로 전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절). 바울은 기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의 역사적인 전승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셨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증언하는 부활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바울이 설교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15절). 기독교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된다(17절). 이 때문에 바울은 잘 알려진 사건이나 실제 증인들에 집중한다.
한편, 성도는 부활 때에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 몸은 옛 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몸이다. 그 영원한 몸을 입고 다시는 썩거나 병들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 (15:29)
많은 논란이 있는 난해 구절이다. 아마도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죽은 성도를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가졌지만 죽기 전에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성도가 먼저 죽은 친구나 친지들과 재회할 기대감을 세례 받는 형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이미 죽은 세례자의 자리를 계승해서 세례를 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진 '죽은 자를 위해서 받는 세례'를 부활과 연결시켜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즉,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은 모순임을 지적해 부활의 확실성을 강조한다.
성도를 위한 연보 (16:1~12)
고린도 교회는 매주 첫날, 즉 일요일에 예언이나 가르침이 포함된 정기적인 예배를 드린 듯하다. 이때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으는 순서도 있었다. 바울은 이를 잘 모아 두었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하라고 한다. 자신도 할 수 있으면 함께 가겠다고 약속한다. 현재 에베소에 기대 이상으로 전도의 문이 크게 열렸지만 대적자가 워낙 많아 지금 당장은 고린도에 갈 수 없다고 하며 언젠가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에 들르겠다는 약속도 한다.
작별 인사 (16:13~24)
바울의 작별 인사는 이제까지 강조해 왔듯이 '사랑'을 주제로 한다. 고린도 성도에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당부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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