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1장 27절~30절]
27절 -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절 -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절 -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절 -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1장 19절~26절]
19절 -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절 -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절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절 -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절 -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절 -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절 -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절 -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치유

[사도행전 9장 32절~35절]
32절 -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절 -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4절 -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절 -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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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파의 의무

[사도행전 9장 19절~31절]
19절 -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절 -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절 -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절 -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절 -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절 -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절 -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절 -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절 -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절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절 -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절 -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절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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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두려워하세요?

[사도행전 5장 17절~26절]
17절 -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절 -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절 -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절 -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절 -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절 -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절 -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절 -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절 -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절 -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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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멜리데 섬에서의 여정 28:1-10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곳을 전전했으며,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알수 있다. 그는 항성이 아닌 유성과도 같이 떠돌아다녔다. 거센 바람은 사실 누구에게도 반가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거센 바람은 멜리데 섬에 유익함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 바람은 가는곳마다 축복을 전해주던 바울을 그 섬 주민들에게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다.

1. 이 섬 거류민들의 친절한 영접(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2절).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의 일행들을 계속 돌보시고 계셨다. 우리가 인간의 손에 의해 도움을 받을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원수지간도 화평케 하실수 있는 분이시기에 낯선 사람도 친구가 되게 하실수 있으며, 꼭 필요하고 진실한 친구로 만드실수도 있다.

(1)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이 바울의 일행들에게 베푼 친절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그들은 야만인(본문에서 '토인'으로 언급됨)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와 관습이 그리이스와 로마인들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은 자신들이외의 모든 사람을 야만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과 같은 수준의 문명인들도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들보다 더욱 문명화된 사람들도 있었다.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인간애로 가득차 있었다. 본문에는 그들이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결코 이 난파선을 약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였다. 본문은 우리가 재난이나 불행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며 힘닿는 데까지 그들을 구제하고 원조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 본보기로써 기록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섭리에 의해 우리의 지정된 거주 영역안에서 난처한 지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주 자선을 베풀기회를 얻게 된다면, 우리는 그곳을 불운한 장소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러한 기회들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2) 본문은 토인들이 베푼 친절의 한 특별한 예를 '그들이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고 기록한다(2절). 즉 그들은 바울의 일행을 위해 불을 쬐일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기꺼이 그들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심한 폭풍우로 온몸이 흠뻑 젖은데다가 그 비는 매우 차가운 비였기 때문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옷을 말려줄 불을 가장 필요로 하였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만큼 필요한 것이다.

2. 독사에게 손을 물림으로써 위험에 처하게 된 바울(3,4)

(1) 모닥불을 더 크게 피우고 있었을때,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분주히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는 근면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해야할 일이 있을때에는 어떤 일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실행에 옮겼다. 심지어 그는 불을 지피기위해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으는 일조차도 기쁘게 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볼수 있듯이, 우리도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비천한 일이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불을 쬐는 혜택을 입은 자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며 장작을 나르는 일이라도 거들어야 한다.

(2) 불을 지피고 있던 나뭇가지들 속에 우연히 한마리의 독사가 들어있었다. 그 독사는 열을 받기까지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열을 받자 튀어나와 무심코 나뭇가지를 불속에 던져넣고 있던 바울의 손을 물었다. 뱀이란 풀밭 밑에 숨어있기도 하지만 간혹 마른 잎새들속에 숨어있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도처에 얼마나 많이 널려있는지 모르며, 동물로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고 기대했던 곳에서 해를 입게 되는 경우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다가 해를 당하기도 한다.

(3) 토인들은 이 독사가 하나님의 공의로써 파견되어 피의 복수자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 짐승이 그의 손에 달림을 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4절).

1) 자연의 모습을 통한 발견 : 그들은 비록 야만인이었지만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죄악이 죄인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선한 일이 있고, 그가 벌하실 악한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인이 극악무도한 죄이며, 이러한 죄는 머지않아 형벌을 받게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악을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 야만인들의 입을 통해서 심판받게될 것이다. 설혹 범죄자들이 바다의 보복을 피할수는 있다해도,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를 앞지를수 없음을 이들에게서 배워야할 것이다.

2) 자연의 모습을 통한 오해의 측면 : 그들의 지식은 다음의 두가지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모든 악인들이 이생의 삶속에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보응의 날은 이후에 반드시 오고야 만다. 비록 일부 악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벌을 받기도 하지만, 수많은 악인들은 도래할 심판을 알리기 위해 처벌받지 않은채로 남아있게 된다.

둘째, 이땅의 삶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땅의 문제에 대해 하나의 참되신 조명을 제시한다. 즉 모든 일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과 인내의 연단을 위해 이땅의 삶속에서 호된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4) 바울이 그 독사를 손에서 떨쳐 버렸을때, 그들은 그가 몸이 부어올라 죽든지, 아니면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줄로 알았다. 인간이란 일단 어떤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가?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반드시 확증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3. 독사로부터의 위험(5,6)

바울은 이러한 일로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비명을 지르거나 펄쩍 뛰지도 않았다. 그의 이같은 놀랄만한 침착성은 이처럼 긴박한 사건을 당한 그 누구도 지닐수 없는 침착성을 근거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도움에 의해 그러한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사를 불속에 떨쳐버렸다. 이처럼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의 능력을 힘입어 사단의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우리는 떳떳한 양심을 간직했으므로 우리가 사람들의 비난과 질책을 무시하게 될때,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독사를 불속에 떨쳐버렸듯이 그것을 떨쳐버려야 한다. 사람들의 비난과 질책은 우리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한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나쁜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으므로 그가 곧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이상이 없음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고자 하셨다. 이제 그들은 조금전에 바울을 비방하던것 이상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6절). 이것은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이 독사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물렸음에도 상태가 전혀 악화되지 않았던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중의 견해의 불확실성을 살펴보라. 얼마나 그것은 바람에 따라 좌우하며, 양극단에 치우치기 쉬운가?

4. 한 노인이 바울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받음(7-9)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는 자가 조난당한 이 낯선 사람들에게 베푼 환대는 다음과 같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였다(7절).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주신 자들에게 너그러운 마음도 아울러 주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섬의 우두머리이며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던 보블리오 역시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사람이었다. 이 보블리오 부친의 질병은 열병과 이질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해 바로 이때 그를 앓게 하셨고, 바울로하여금 보블리오가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치유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바울이 행한 치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는 그 환자의 상태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의술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내과의사는 아니었지만, 기적을 통해 그를 치료하는 사도의 자격으로 그의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환자의 치유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그에게 안수를 베풀었다. 그러자 그 환자는 즉시 쾌유되었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비록 연세가 많은 노인이었으나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도 치유하였다. 만일 그가 질병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치유할수 있었다면, 곧 많은 환자들이 그에게 몰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환자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그 섬에 우연히 당도하였고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곧 떠날 이방인이기에 그들의 청을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결단코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냄을 받은 어느 곳에서든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나그네를 영접하게 하는 좋은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이로써 어떤이는 부지중에 천사나 사도들을 대접하게도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그의 백성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에 대해 보답하시기를 지연시키지 않으신다. 멜리데 섬의 주민들은 그들의 해변에 난파되어 조난당한 자들이 그들에게 베푼 친절만큼 값진 것을 받아본 적은 결코 없었다.

5. 바울이 베푼 친절에 대하여 사의를 표명함(10)

그래서 그들은 후한 예로 바울의 일행을 대접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일행에게 최상의 존경심을 표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일행에게 그러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행동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떠날때에 우리 쓸것을 배에 올리더라(10절). 그들은 바울의 일행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배에 실어주었다. 바울은 멜리데의 선한 주민들이 베푼 친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것을 그의 치료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바울은 이 치유의 능력을 거저 받았으므로 거져준 것이다) 바울 자신과 또한 그와 함께있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구호물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Ⅱ. 로마에 도착한 바울 28:11-16

여기서 우리는 로마로 향한 바울의 여행과정과 마침내 그가 로마에 도착한 사실을 보게 된다. 푹풍이 지나면 고요함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바울의 후반부 여행은 평온하고 순탄하였다.

1. 멜리데 섬을 떠나는 바울의 일행(1)

그들은 원기를 회복한후에 다시 바다로 떠나야만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곤경과 좌절감을 겪는다고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출발시기는 겨울철 3개월이 경과한후, 즉 석달 후였다. 이 계절에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므로 계속 항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성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나았다. 바울은 겨울철에 바다로 항해하려는 선원들에게 경고하였으나, 그들은 그의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할 필요가 없었다. 자고로 경험은 어리석은 자들을 지도한다고 말하여진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깨달으므로써 비로소 배우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날때 승선한 배는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보냈으므로 안전했다. 여기에 알렉산드리아 배가 두척 있었으나, 한척은 난파되었고 다른 한척은 구조되었다. 이처럼 사태가 변화무쌍하므로 우리는 궁핍한 상황과 풍요로운 상황속에서 대처할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배에 적힌 디오스구로란 기호가 그 배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러한 이름을 가진 배를 타고 이전의 항해보다 훨씬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자 기대했다.

2. 이탈리아 상륙과 로마로 향하는 계속적인 여행(12-14)

그들은 시실리 섬의 주요 도시인 수라구사에 처음으로 상륙했다. 거기서 그들은 사흘간 머물렀다. 그리고 그들은 수라구사를 출발하여 이달리야의 한 도시인 레기온으로 왔다. 거기서 그들이 하루를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해안에 정박한 것이 아니라 항로 도중에 닻을 내렸던것 같다. 또한 그들은 레기온을 출발하여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아니한 작은 항구인 보디올로 갔다. 이 알렉산드리아 배의 행선 목적지는 보디올 항구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여행하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하여 나머지 여행을 육로로 했다. 이 보디올에서 바울의 일행은 형제들을 만났다. 이곳에 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복음의 감화력은 여기서도 매우 놀라웁게 역사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소에까지 그를 섬기고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을 머물게 하신다. 비록 보디올에 극소수의 형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바울은 그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함께 모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형제들은 이국땅에서 동포들을 찾듯이 서로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을 것을 원하는데, 이것은 적어도 주일 예배를 드릴때까지 만이라도 그들과 함께 머물러주기를 간청한 것이리라. 그래서 바울은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또한 백부장도 그곳에 일주일간 머무는 것에 동의했으며, 바울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보디올을 출발하여 로마로 향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3.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면회를 신청함(15,16)

(1)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대단히 경의를 표하였다. 그들은 그의 명성과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는 사실을 익히 전해 들었다. 또한 그들은 그가 당한 고난과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중에서 보호해 주신 사실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만나 그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얼마전에 그들에게 긴편지를 보냈으므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그에게 이러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그를 맞으러 갔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비록 죄수였지만 예의를 갖추어 그를 모셔왔다. 그들중에는 로마에서 51마일 떨어진 압비오 저자까지 바울을 맞으러 간 사람들도 있었고, 삼관(로마에서 33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소임-역주)까지 그를 맞으러 간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죄수인 바울을 만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이유로 그에게 두배의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2) 이러한 일로인하여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는 로마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그가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과 그 상소의 결과에 대한 착찹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떠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지 예측할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에서 온 이 선한 사람들과 만나기 전까지 이러한 착찹한 생각때문에 침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바울이 그들을 보았을때(15절), 그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고백하였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만일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그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을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놀라운 열매를 거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가 이 세상의 어느 낯선 곳에 가든지 거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형제들을 만나게 될때,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반면 훌륭한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둘째, 그는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비록 죄수였지만 전에 자유롭게 예루살렘에 들어갔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로마에 입성하였다. 그는 거기서 자기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동료 여행자들을 만나는 것이 하나의 용기를 가져다준다. 우리가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진지한 집회를 보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뿐 아니라 용기를 가지게 된다.

4. 로마의 감옥에 구금된 바울(16)

이제 바울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그는 여전히 죄수의 신분이었다. 그는 로마를 구경하기 원했으나 도착하자마자 간수장에게 인도되어 그곳을 구경할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왕관을 쓰고 승리의 개가를 울리면서 로마에 입성했던가!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그 세대의 악질 염병과도 같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 한 선한 사람이 불쌍한 포로로서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 입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자만심을 이 세상과 더불어 영원히 떨쳐버릴수 있는 충분한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그러나 바울은 몇가지 혜택을 받았다. 그는 죄수였으나 감옥에 감금된 죄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기거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리고 한 군사가 바울의 경비자로 배정되었는데, 그는 죄수로서 누릴수 있는 모든 자유를 바울에게 허용한것 같다. 하나님께서 호송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갇힌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그들을 평안하게 하신다면, 그들은 감사해야할 이유를 갖게 된다.

 

Ⅲ. 로마 법정에서의 바울의 자기 변론 28:17-22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해야만 했다. 본문에서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우두머리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유대교에 대해 가장 박식한 자들이었다. 바울이 그들을 청한 것은 자신과 그들 사이의 우호적인 이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1. 바울이 그들에게 행한 신상 발언(17-20)

(1) 그는 자신의 결백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즉 나는 유대민족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우리 조상들의 규모를 배척한 일도 없다(17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조상의 유전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전들은 결코 이방인들을 위해 작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 유전들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유전을 지켰던것 또한 사실이다.

(2)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서 내어준바 되었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17절). 만일 그가 이 문제에 대한 진상을 완전히 폭로했다면, 유대인들은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이 바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죽여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대인들은 총독인 벨릭스앞에서 바울을 죄인으로 고소했으며, 사실상 그를 죄수로서 로마인들의 손에 넘겼다.

(3) 바울은 자신에 관한 로마총독들의 판결에 대해 설명하였다(18절). 그들은 바울을 심문하고 심리했었다. 천부장이 그를 심문했었고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모두가 그를 심문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바울에게 사형을 당할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바울을 석방시켰던 것이다. 바울을 신중하게 심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무죄로 선고했으며,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를 정죄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진술을 듣지못한 자만이 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4) 바울은 그가 로마에 상고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상고는 반소(反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방위에서 나온 것이었다(19절). 유대인들이 반대하므로 바울은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상고하게된 목적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족을 비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혐의를 벗기위해 상고했던 것이다. 고소 사건 중에서 특히 동족을 고소한다는 것은 불미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중간 입장에 서있었을 뿐, 결코 그들과의 적대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그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민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로마황제를 격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추호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상의 유익을 끼치려고 힘썼고, 사태를 더이상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5) 바울은 진정한 입장에서 그가 당한 고난을 설명하였다(20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청한 것은 너희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동족으로서 만나 더불어 대화하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 소망을 인하여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수감자의 표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한 그는 그를 감시하는 병사의 보호아래 있었던것 같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메시야가 도래하였음을 전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시야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바로 이 메시야를 전했으며, 그가 도래하신 사실을 증거하였다. 나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그분 안에서 기쁨을 나누자고 전파하였다." 또한 바울은 죽은 자가 부활하게 될 것을 전파하였다. 이 사실 또한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 민족을 로마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번영하는 민족으로 만들 메시야를 여전히 기대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그러한 일시적인 메시야의 왕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참되고도 진정한 소망인 메시야의 왕국으로 인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왕국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지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이 보증되고 예비되는 거룩함과 사랑의 영적 왕국인 것이다."

2.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답변(21,22)

그들은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시인한다.

(1) 그들은 바울에 대해 특별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문서나 구두로 아무런 지시도 받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중 누가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21절). 바울이 가는곳마다 쫓아다녔던 유대인들의 끊일줄 모르는 분노가 로마까지 따라오지 아니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그들이 거짓을 전했으며 바울을 기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차마 그것을 시인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비로소 바울은 그가 황제에게 호소했으므로 유대의 유대인들이 감히 로마의 법정에까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2) 그들은 바울이 전파한 종교에 대해 상세히 알기 원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토록 엄청난 반대 세력에 맞서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다.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22절). 비록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 달리 아는바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이 종파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은 이 종파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악평하고 그것을 헐뜯으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간주했는데,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었다. 진정한 기독교란 모든 일류의 공통 관심사 위에서 세워진 것이며, 흔히 일반 종파에서 유래되는 것처럼 편협한 견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영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인류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려는 하나의 명백한 경향성을 지닌다. 그들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너무도 자명한 진리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는 항상 비방의 대상이 되어왔다.

 

Ⅳ. 로마에서 행한 바울의 강론 28:23-29

여기서는 바울이 로마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에 관하여 장시간 협의했다는 사실이 짧게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기꺼이 경청했으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보다 더욱 진지하였다.

1. 로마의 유대인들과의 협의(23)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 협의를 어떻게 진행시켰는지를 알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임의 시간과 날짜를 정했다(23절). 그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확신을 갖게된 것 같았으나, 그들 모두가 그 말을 믿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1)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울은 비록 죄수였으나, 그들은 기꺼이 그의 거처로 모였다. 또한 그가 처해있는 현재의 감금상태는 그들이 그의 가르침에 대해 편견을 갖게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들에게 그 가르침을 확신시켰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갇힘은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고통당함을 가치있게 생각한다는 한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교훈을 듣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만나보기 위해 그의 감옥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2) 바울이 유대인들과 나눈 강론은 매우 만족스러운 내용이었으며, 그는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본질을 설명했다. 즉 그것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이며, 외적인 장대함이 아닌 마음과 삶의 청결함을 통하여 빛나는 것이다. 일단 그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고 참 모습을 밝혀 주기만 한다면 그들은 그 말씀에 복종하게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설명했을뿐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였다. 다시말해서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분명히 선포했으며 확고한 증거로써 그것을 확증하였다. 또한 바울은 은혜의 나라가 특별한 능력으로 수립되었다는 것과 자연계가 기적으로 확립되었음을 증언하였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힘입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고 증거했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나라를 받아들일 것을 간절하게 권유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호감을 살수 있는 생생한 방법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에 관하여 그들에게 권유하였다. 그가 행한 전체 강론의 의도와 취지는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는데에 있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일들을'(23절) 권면하였으며, 이 모든 예언들이 예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러한 증거들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였다.

(3) 바울의 설교는 매우 길었다. 그의 강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흥미있는 것이었고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확신에 찬 자세로 매우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회가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의 강론을 온종일 계속하였다.

2. 이 강론의 효과(24,25)

그렇게 훌륭한 동기와 바울의 능숙한 화술로 청중들이 하루 종일 경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어떤이에게는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 되며, 어떤이에게는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이에게는 지침돌이 되시며, 또 다른이에게는 머릿돌이 되신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25절). 청중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의 의미와 증거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24절)라고 기록되었다. 어떤이들은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았으며, 다른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졌다. 그러므로 어떤이들은 빛을 받아들였고 다른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청중들중에는 그를 믿는 자들도 있었고 그를 모독하는 자들도 있었다.

3. 바울이 헤어질때 그들에게 전한 경고(25-28)

바울은 그들이 투덜대는 소리를 듣고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여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라 너희가 돌아가기 전에 할말이 있다. 너희의 완악한 불신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그리고 그 결과로 너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1) 또한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의해서 불신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사 6:9,10)으로 돌아가 거기에 기록된 상황이 너희의 경우가 되지않도록 염려하라." 구약성경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취될 복음의 약속이 있는 반면, 모든 불신자들에게 임할 영적 심판에 대한 복음적 경고가 담겨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5절). 이사야에게 말씀된 내용이 백성들에게는 상당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고 이사야에게는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었지만, 본문에는 그 말씀이 지당한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될 것이다'(막 16:16)라는 것은 복음의 말씀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될 것이다'(막 16:16)라는 의미를 지닌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26절). 이 말씀은 다음의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하나님을 거역한 너희 조상들의 중죄는 너희의 것이다. 너희가 눈을 감았도다(27절). 즉 너희 조상들은 하나님이 그 손을 높이 들어 그들을 심판하려고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제 너희도 하나님이 복음의 은혜안에서 너희를 향하여 펼치시는 구원의 손길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는 보지않으려는 그들의 결심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보지않으려고 하는 자들은 정말로 어리석은 장님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평화에 속한 위대한 사실들을 보지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 또한 그들은 귀로 듣지않기 위해서 이 진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했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여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해서이다(27절). 그래서 그들은 암흑이나 끊임없는 혼란과 소요속에 그들의 마음을 놓아둔다. 하나님의 방법은 일단 사람들을 불러모아 보고 듣게하며, 그들의 마음에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그들의 의지를 굴복시키시고 그들을 치유하신다. 이것이 이성적인 인간을 다루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고 이해를 어둡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의 회개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죄인이 사단과 연합하여 자신의 눈을 가리게 될때 매우 서글픈 상황이 벌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둘째, 이 죄를 범한 너희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너희에게도 임할 것이다. 즉 너희는 소경이 될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26절). 왜냐하면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 말을 이해할 힘과 은총을 너희에게 베풀지않았기 때문이다.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빛에 반역했으므로 하나님은 그의 은총과 빛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버리셨다. 또한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강한 미혹에 넘겨주고 거짓을 믿게하셨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27절). 그들을 수술할수 있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병은 불치의 병이 되었다. 이제 치료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자들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는가? 또한 자기의 병이나 그 병에 대한 치료에 대해 확신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돌이킬수 있겠는가? 그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린 자들이 어떻게 확신을 얻을수 있겠는가? 이처럼 그들이 일단 완악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들은 이미 지옥문앞에 와 있게되는 것이다.

(2) 계속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을 보내실 것이다(28절). 그러므로 너희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총을 멀리하고 거룩한 진리와 사랑의 능력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따라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것이며 복음 안에서 복을 누릴 것이다. "바울이 말씀을 전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에 대한 그들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함으로써 그의 이방인들에게로의 복음전파에 대한 그들의 불평을 막기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구원에 대해 받아들일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그렇게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에 임했을때, 맨처음으로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맨처음 그들에게 베풀어진 혼인잔치에의 초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손님들이 초대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한다.

둘째, 이방인들에게 은총의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쾌감을 자극시켜 그들로하여금 그들의 죄에서 벗어나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했으나, 아직 그것을 돌이켜 참회할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남아있었다. 즉 그들은 포도원 비유에서의 둘째 아들처럼(마 21:29) 단호히 거절했으나 뉘우쳐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할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가? 그렇다면 더 늦기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복음의 말씀을 듣지못하도록 작정된 그들이 말씀을 들으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서 언제나 그분을 부를수 있는 특권을 지닌 우리가 그 말씀을 듣지 않겠는가? 이처럼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한 사실을 통해 유대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신앙안에서 수치심을 갖도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감화를 받지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저주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4. 집회의 해산

이 집회는 약간의 소요속에서 끝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서 등을 돌렸다. 그들이 충분히 알아들을수 있도록 바울이 이 말을 전했을때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설교의 후반부에서 강조한 무서운 말씀에 대해 둔감했으며, 그 강론의 앞부분에서 전한 모든 위로의 말씀에 대하여 목석처럼 무감각하였다.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 커다란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단 바울에게서 떠난다는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떠나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 사이에 커다란 격론만이 남았던 것이다. 올바른 논리가 결여된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격론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한,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격론도 그들을 확신시켜줄수 없는 것이다.

 

Ⅴ. 로마에서 행한 바울의 복음전도 28:30,31

여기서 우리는 축복받은 바울의 역사에 대한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에 나타난 모든 특별한 상황을 주의 깊게 주시해야 한다.

(1)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감금된 상태로 사건이 종결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다. 이 선한 사람은 이 셋집에서 만 2년 동안 감금된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바울은 자신의 감금 상태로부터의 조속한 석방을 위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수로 남아있었다. 그가 말했듯이(빌 1:13) 그리스도안에서의 그의 매임이 가이사의 법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2년간의 투옥기간 중 그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2년간 죄수로 복역했다는 사실이외에 그가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석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석방된후에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크레타로 향했고 그후 디모데와 함께 유대로 갔다고 전한다. 그후 그는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고 마지막에 다시 로마를 방문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곳 로마에서 네로의 통치말년에 참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울처럼 유능한 인물이 그렇게 오랫동안 구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 아닐수 없다. 바울은 벨릭스의 통치아래서 2년 동안 감금되었으며(행 2:27), 네로의 통치아래서도 2년 이상을 죄수로 보냈다. 만일 바울에게 자유가 허락되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교회들을 세웠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가장 유익한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일을 수행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역자들의 섬김이 없이도, 또한 그들의 고난을 통해서도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실 것이다. 심지어 바울의 속박마저도 복음의 진보가 되었던 것이다(빌 1:12-14). 그러나 어느면에서는 바울의 투옥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유익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해 볼때, 바울이 셋집에서 유했던 2년 동안에 이전보다 더욱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잠시동안의 은둔생활은 온종일 사방으로 순회하면서 활동하던 사람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제 그는 같은 집에서 2년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을 감옥으로 오게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부르시고 잠시 쉬게하신 것(막 6:31)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자유의 몸이었을 당시에는 유대인들 간계(행 20:19)로 인하여 항상 위협을 받았으나 이제 감옥은 그의 저택이 되었다.

(2) 비록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사실로 본서가 종결되고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작별할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를 가져다준다. 그가 투옥된 감옥은 그에게 하나의 성전이요 교회요 궁전이었다. 그의 입이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신실하고 열심있는 사역자에게 있어서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더큰 고역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비록 갇혔으나 주님의 말씀은 갇히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중 몇사람을 만나보고(15절)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들과 만나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그의 기쁨은 절반으로 감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바울의 설교 대상자 : 누구든지 바울의 집에 와서 설교를 들을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그는 그들을 환영하였다. 사역자들의 집대문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자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섬길수 없을때, 우리는 할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였다(30절). 또한 그는 가장 권력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가장 비천한 자들에 대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바울은 조속한 시일내에 상황이 호전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어떤 선한 일이 행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2) 바울의 설교내용 : 그는 하나님의 대사였으므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였다. 그는 인간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관해서 참견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겨두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였다. 그가 공개토론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했던(23절)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공적설교에 주력하였다. 또한 우리에게 최대의 유익과 최상의 지혜를 안겨 주는 것이 바로 그의 설교의 목적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였으므로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을 가르쳤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전역사와 신성의 신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여전히 그의 원칙―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사건 이외에는 알거나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을 고수하였다.

3) 그는 어떠한 자유를 갖고 설교하였는가. 거룩한 은혜가 바울에게 심령의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설교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가 바울에게 설교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31절)고 기록되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늘 방해하던 유대인들은 여기서는 그럴 권위가 없었다. 또한 로마정부는 아직도 기독교의 포교행위를 위법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바울의 투옥을 통하여 박해자들의 분노를 잠잠케 하셨다. 이 당시 로마에는 기독교를 증오하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수인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묵인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권한으로 바울의 설교를 금지시킬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가르치는 것을 아무도 금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핍박받는 자들에게 위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살펴보자. 바울앞에 열린 문이 비록 넓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항상 열려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하여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가이사의 집안에도 몇명의 성도들이 있게 되었다(빌 4:22).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도시가 언제든지 조용히 거주할 수 있는 우리의 거처가 되었을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찌르는 가시와 고통이 전혀없는 성산을 갈망해야할 것이다.

 

# 해설

로마에서의 전도 사역 ( 28 )

풍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일행은 멜리데 섬에 상륙을 했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난파당한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바울이 죽지않은 일과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치고, 병자를 고치는 일로인해 그 섬을 떠날때까지 좋은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안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1. 멜리데에서의 바울

1) 독사에 물린 바울

베니게(페니키아) 말로 멜리데란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옛날 두로와 시돈의 선원들이 그 항구와 서부 지중해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면서 그 땅이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사실이 고마워서 붙인 이름입니다. 멜리데인들은 무척 인심이 좋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난파당한 일행에게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하게할 불을 피워주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때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땔감을 계속 넣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마도 추위로 꼼짝않고 있는 뱀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들어올렸을 것입니다. 토인들은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뱀을 떨어버렸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자, 이번에는 그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a.사람의 동정(히13:3)

b.야만인(롬1:14)

2) 보블리오의 영접

바울은 일행들과 함께 그 섬에서 석달을 머물면서 멜리데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보블리오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을 여러날 동안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 집에 머물면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병자들이 몰려왔고 바울은 그들도 고쳐주었습니다. 그들은 파선당한 사람들이 석달후 항해를 떠나기까지 후하게 대접했고 일행들이 떠날때에 쓸 것의 모든 것들을 감사의 표시로 주었습니다.

a.치유의 능력(마8:16)

b.사람을 향한 감사(룻2:10)

 

2. 로마에 도착한 바울

1) 보디올에서의 형제들과의 만남

선원들과 승객들이 10월이나 11월에 그레데를 떠나 폭풍의 두주간 이후에 멜리데에서 3개월 동안 머물러 겨울을 지나고, 항해가 가능한 2월이나 3월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그 섬에 정박한 다른 배를 만났습니다. 그 배가 알렉산드리아 배였음으로 보아 항해하기가 위험한 겨울 석달을 멜리데 섬에서 보낸 애굽에서 온 곡물선이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이 배는 멜리데를 출발하여 시실리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수라구사에서 이틀을 머문후에 메시나 해변을 통과해서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레기온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또 이틀후에 보디올에 이르렀는데, 보디올은 동지중해권 무역을 위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습니다. 보디올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이 이미 로마로부터 이 이탈리아 항구까지 퍼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무척 큽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의 초청을 받아 그들과 함께 한주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a.영적 형제(롬8:29)

b.형제의 사랑(요13:35)

2) 압비오 저자와 삼관에서의 형제들의 마중

바울이 보디올에 머무는 동안 바울의 도착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7일후에 바울은 로마를 향해 떠났습니다. 도중에 바울의 도착 소식을 듣고 로마에서 마중나온 형제들은 로마로부터 각각 69km, 53km 떨어진 압비오 저자와 삼관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문안하고 로마까지 남은 길을 인도하기위해 그렇게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로마의 교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고 용기를 얻어 담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믿음의 동료들의 환영은 그의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압비오 도로를 따라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신임받는 죄수였으므로,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지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a.하나님께 감사함(롬1:8)

b.성도의 교제(빌1:5)

 

3. 로마에서의 복음 전도

1) 바울의 변명

바울은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을 청했습니다. 이는 그가 회당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을 청해서 바울은 몇가지 요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유대의 관습에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에 있는 로마 권력자들은 바울이 무죄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공정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기때문에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송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무죄 방면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지도자들을 부른 우선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의 변명을 들은 지도자들의 반응은 상반되었습니다.

a.무치(눅23:4)

b.영원한 소망(골1:5)

2) 바울의 강론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두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복음에 대해 좀더 확실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고, 토론도 길었습니다. 하루 종일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증거했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나뉘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도자들이 복음에 순종치 않음을 보고 이사야의 말을 적용해서 최종적으로 두려운 선언을 합니다. 누가는 이러한 유대인의 불신앙이라는 소주제와 대비해서 최종적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는다는 사도행전의 대주제를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후 이년 동안 아무런 방해없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사로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때뿐 아니라 부활하신 뒤에도 그분의 설교 중심 주제였습니다. 바울은 이 주제를 로마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가르쳤습니다.

a.영적 귀머거리(딤후4:4)

b.이방인의 개종(롬9:24)

 

결론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신한 복음의 대사로 드디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으로인해 교회가 설립되고 이방선교는 성공했으며 교회는 초창기 유대주의의 탈을 벗고 급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서신을 통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 핵심

28:1-15

멜리데에서 겨울을 난후 여행을 재개하여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바울 일행이 그곳 성도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 묵상

토인들의 대접 ( 28:2 )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난파당한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어를 말하지않는 사람은 모두 야만인으로 여기며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원주민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편안히 해주고자 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나뭇가지를 던지자 독사가 튀어나와 바울에게 달려들어 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뱀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를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보블리오의 집에서의 바울 ( 28:8-10 )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었는데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그를 낫게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바울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블리오의 부친뿐 아니라 멜리데 섬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대접받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에서의 바울의 처우 ( 28:16 )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한 군사의 감시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수 있었으며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준 편안한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 ( 28:21 )

바울의 말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우리가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공연한 일에 끼어들어 황제의 분노를 사거나 백성의 원망을 듣게 될까봐 이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이방인 ( 28:28 )

이스라엘 민족은 택함받은 민족이고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영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따라서 이 귀한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겨지게 되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전파 ( 28:30, 31 )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지만 2년동안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사도행전은 바울이 2년동안 아무 제재도 없이 복음을 전할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역사가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짐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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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이달리야 여행 27:1-11

1. 바울이 이달리야로 행선하게 된 경위(1,2)

바울이 로마로 가는데에는 긴 항해 이외의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는 가이사에게 호소했었으므로 가이사에게 가야만 했다. 우리가 배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1절). 바울이 로마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베스도와 협의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로마 여행은 하나님이 그를 거기로 데려가서 시키실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호송 책임자는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이었다. 그는 수하에 군대를 거느리고 바울을 감시하였다. 그가 승선한 선박은 아프리카의 항구에 정박중이던 아드라뭇데노 배였다(2절). 그리고 그의 항해에 동행한 사람들은 죄수 몇명과 백부장과 같이 호송 임무를 담당한 군인들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될때 강도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바울도 이 죄수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이 항해동안 운명을 같이 하지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우리는 뒤에서 바울이 그들때문에 죽임을 당할뻔했었음에 반해 그들은 그가 위험에 처했을때 자신의 몸만 보존했음을 보게 된다(42절). 그러나 바울은 특히 누가와 같은 친근한 동료들과도 동행했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는 이달리야로 항해했다 라든가 '우리가 올라 행선 할때'등을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2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는 여기서 그의 동료로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 이런 지루한 여행에 몇몇 동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바울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긴 항해를 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속에 있는 사악한 무리들을 교화시켜 선을 이루거나 그렇지 못하면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사악함에 물들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2. 그들의 항로와 정박(3-9)

그들은 이튿날 시돈에 정박했다. 백부장 율리오는 의외로 바울에 대해 호의적으로 행동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때 아마도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송사에 대해 듣고 그 결과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성중의 높은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 같다(행 25:23). 그는 바울을 죄수로 호송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구로서 그리고 교양과 인격을 갖춘 훌륭한 사람으로 대우했다. 바울은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여기서 율리오는 권력자들에게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존경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기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격려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혀 기대도 하지않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호의를 베풀게 하실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같은 백부장의 호의는 바울의 신실함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바울은 결코 탈출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부장이 바울을 친절하게 대한만큼 바울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데 바르고 정직하였다. 그들은 그후에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여 행선하였다'(4절). 만약 순풍이 불었더라면 그들은 구브로 섬의 우측을 향해했겠지만 바람이 순조롭지 못했기때문에 그들은 측면의 바람을 의지하여 구브로 섬의 왼편을 돌아 항해해야만 했다. 선원들은 그들이 바람으로 인해 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목적지가 어디이든간에 그 바람이 최적의 상태가 되었을때 이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대양을 건너가는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바울의 일행은 무라 항구에서 배를 갈아탔다. 거기서 그들은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했다(5,6절).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입항할때, 급히 돛을 내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그들에게 베풀어진 특별한 호의 때문이었다. 바울의 일행은 그곳을 떠나 간신히 그레데 섬의 한 항구인 미항에 이르렀다(7,8절). 그들은 천천히 여러날 동안 항해했다. 그들이 니도에 이르는데에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며, 전에 구브로에서처럼 그레데 섬을 의지하여 행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레데 섬의 동해안에 돌출해 있는 살모네곶 앞을 지나는데 숱한 난관을 겪어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그들의 행선에서 심한 폭풍우는 없었더라도 그것은 매우 지겨운 항해였다. 이와같이 불운에 빠졌으나 자신의 일을 포기할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앞으로 진척시킬만한 행운도 얻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만 서서히 인생 항로를 항해해 갈 뿐이다. 또한 행운의 섭리가 작용한다고해서 빨리 나아갈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그들이 안착한 곳은 미항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현재도 그렇게 불리고 있으며, 그 이름은 그곳의 경치와 전망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곳은 그들의 행선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 항구는 아름답기는 했으나 그들이 거할 곳은 못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겨울을 날만한 항구'가 못되었기 때문이다(12절). 아름다운 항구라해서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다. 가장 즐거운 곳이 가장 위험스러운 장소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3. 바울의 충고 내용(10,11)

그것은 일행의 안전한 월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역풍과 싸우는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따라서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는 이제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금식일은 이른바 속죄의 날로 유대인들의 유명한 연례 절기였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7월 10일에 준수됐으며 양력으로는 9월 20일이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성서 전반을 통해 이 절기를 준수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여기의 언급에서 알수 있는바는 그것이 오직 계절을 구분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선원들은 미가엘 제일(祭日)을 다른 어떤 때보다도 바다에서 행선하기에 좋지않은 날로 간주하고 있다(미가엘 제일은 9월 20일로 영국의 사게 지불일 중 하나임-역주). 이런 연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일행들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10절). 그 배안에는 약간의 선한 사람과 그보다 더많은 악인이 타고 있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운명에 처해지게 되는 법이다. 만약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그 양자가 함께 배를 타고 있었다면, 당연히 위험도 그 양자에게 똑같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충고를 묵살했다(11절). 그들은 그가 이러한 문제에 주제넘게 말참견한다는 것을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 일의 결정권을 쥐고있었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자신의 권한으로 취소시켰다. 백부장은 바울의 견해보다는 그의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본래 그의 직업에 의해 신용을 받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바울을 매우 예의바르게 대했으나(3절), 그의 충고에 좌우되지는 않았다.

 

Ⅱ. 풍랑을 만난 바울의 일행 27:12-20

(1) 그 배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 처음에는 순조로운 바람에 따라 항해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때문에 그 미항을 떠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그 항구에서는 과동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종종 그렇듯이 그들도 불편함을 덜기위해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배의 선원들중 몇몇은 거기에 계속 머물자고 주장했다. 풍랑이 거센 바다로 나가 목숨을 잃느니 오히려 좀 불편하더라도 안전한 것이 훨씬 낫지 않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협의결과 떠나자는 편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떠나더라도 멀리는 가지말고 이 섬의 다른 항구로 옮기자는 의견이 관철되었다. 그곳은 본문에 언급된 뵈닉스였다. 본문에서는 이 항구가 한편으로는 동북을, 한편으로는 동남을 향하여 위치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아마 그 항구는 두개의 돌출부(곶)사이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며, 그중 하나의 돌출부가 동북을, 다른 하나의 돌출부가 동남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두개의 곶은 동풍의 방벽 역할을 했던것 같다. 만일 이와같이 우리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천연의 항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항해를 위해 마련된 바다라는 자연은 전혀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처음 항해를 결행하도록 용기를 주었는가? 그들은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 순풍에 따라 출발했으며 자신들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레데 섬의 해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였다. 그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갔으므로 자신들이 이때껏 접해보지 못한 폭풍을 만나 극도의 위험속에 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 그 배는 즉시 엄청난 폭풍에 휩쓸렸다. 그들은 현재 남풍이 순하게 불고 있었으므로 계속 순조로운 항해가 될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확신하에 바다로 내달았으나, 곧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부드러운 바람을 더 신용하였던 것이다.

1) 그들에게 닥친 위험과 재난 : 그들에게 광풍이 대작하였다(14절). 이 바람은 선원들이 유라굴로라고 부르는 북동풍인데, 일단 이 바람이 바다에 몰아치면 모든 선박들은 재난과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18절). 그 배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로 휩쓸렸던 것이다. 그 배는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돛을 걷어내렸다. 그러한 폭풍우속에서는 어떠한 노력도 위험을 자초하므로 배를 가는대로 내버려 둘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 폭풍을 만난 곳은 뵈닉스 근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들은 곧 안락한 항구에 닿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갑자기 이러한 역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선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의 사용법이 개발되지 않았으므로(따라서 그들이 태양이나 별을 볼 수 없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방향을 지시해 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도 영적인 이유때문에 간혹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같은 상황이 이들에게 엄습할 수 있으나, 언제나 그들에게는 서광이 비치고 있다. 바울과 그들은 그 심한 폭풍우뿐만 아니라 겨울의 혹독한 기후속에 있었다. 그들은 혹독한 비바람속에서 추위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다. 그러한 상황은 몇날이고 계속됐다. 바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역경이외에 종종 겪는 곤경이 어떠한 것인가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 모든 일을 견디어 내고있는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있게한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의 한 예이다. 그러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항해에 종사하는 사람들중에서 사역자를 택하셨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역경을 극복하는데 익숙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사용한 방법들 :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그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판단한 나머지 배를 표류하게 내버려두었다. 싸워서 득이 없을 경우에는 항복하는 편이 지혜로운 것이지만 그들은 현재의 위험스러운 상황을 피해가기 위하여 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그들의 배가 가우다로 불리는 작은 섬을 지나게 되자, 그들은 배가 성에 부딪혀 난파될까봐 조심하면서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여 그 섬아래로 빠져나갔다(16절). 또한 배가 난파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므로 그들은 거룻배를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재빨리 손을 썼다. 그들은 '간신히 거루를 잡아'(16절) 그것을 마침내 끌어올렸다(17절). 이처럼 그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줄을 지고 선체로 둘러감기도 하였다(17절). 그들은 가장 심한 폭풍우속에서도 그 배를 지키기 위해 강한 밧줄로 선체를 동여맸다. 또한 그들은 배가 모래바닥에 걸릴까봐 염려하여 돛을 내린 다음 배가 가는대로 방치해 두었다. 비록 배를 조정하기에 넉넉한 해면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푹풍이 몰아치는 그런 악천후속에서 배가 살아나온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다(그들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튿날 그들은 배의 짐을 덜기위해 싣고 있던 상품들과 물건들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세상의 재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여기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세상의 재물이 하나의 짐으로 여겨질때가 올 것이다. 그 짐은 너무도 무거워서 재산 그 자체의 안전도 보장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닌 사람까지 익사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의 어린이들과도 같은 유치한 어리석음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위해서는 재물을 아낌없이 내어던지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건과 자비의 사업이나 그리스도 위해 고난받는 일에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재물보다 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버리기보다는 믿음과 선한 양심을 버리려고 한다.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은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렸다.

3) 그들에게 닥친 최후의 절망(20절) :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절). 푹풍우는 계속되었고 그것이 조정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한 방법들은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들에게는 이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들은 선상에 풍부한 양의 식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나(38절), 죽음의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혀 목숨을 부지할 기력조차 없었다.

 

Ⅲ.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역경과 구원 27:21-44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겪은 역경과 그 결말을 보게 된다. 그들 모두는 마침내 생명을 보존하였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 배에 승선한 인원이 이백칠십육명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7절). 물론 바울도 그중의 일원으로 누구보다도 가치있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절망에 빠져 행선을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울은 요나처럼 폭풍을 불러들인 자가 아니라 그 폭풍속에서 나머지 선원들에게 위안을 가져다준 사람이었다.

1. 바울의 격려(21-26)

여기서 바울은 그들 모두가 구원받게될 것이라는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결코 죽지않을 것이라는 점과 이 역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충분히 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먼저 그들을 절망의 상태에서 구원하였다.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21절). 이제까지의 역경속에서 바울은 그 무리의 일원으로 행동하면서 기구를 내버리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19절). 그러나 이제 그는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상담자이자 위안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 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한 것에 대한 바울의 훈계 :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21절). 바울이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했을때, 그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바울은 기꺼이 그들에게 위안과 안도의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불행에 빠진다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정을 베푸신다. 바울은 위로의 말을 하기전에 자신의 경고를 경청하지 않은 죄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했다. 그들이 책망당한 이유는 그들이 안전한 그레데를 떠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나은 충고를 거부함으로써 언제가 좋은 때인지를 알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바울의 구원에 대한 확신 : 바울은 그들에게 비록 배는 잃을지라도 목숨만은 결코 잃지않는다는 점을 확신시키고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현재의 그들의 상태가 비참하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저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22절). 따라서 우리도 죄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우리말을 듣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으리라. 그러나 지금도 우리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우리가 하지말라고 말했을때 너희는 우리의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제 책망하지 말라는 우리의 충고는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들은 더이상 아무런 방도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20절). 이제 바울은 그들의 분말을 촉구하였다. 만약 그들이 활기를 되찾는다면, 그들은 생명을 건질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배의 손실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들의 배는 난파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다'(22절). 바울의 이러한 위로의 말은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사경에 처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

(3) 바울의 확신 근거 : 한밤중에 바울에게 한천사가 나타나 그와 그의 모든 동료들이 온전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23-25절). 그들은 섭리에 의해서뿐만이 아니라 바울에게 베풀어진 특별한 호의로 인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경건한 신앙고백 : 그는 하나님을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23절)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의 의로운 주인으로, 그리고 누구도 그분과 겨룰수 없는 최고의 지배자로, 또한 자기의 통치자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은 '나의 속한바' 되신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하나님은 그의 절대적인 통치자이자 주인이시므로 그에게 법을 수여할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따라서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다(23절). 우리도 역시 그의 소유이므로 마땅히 그분을 섬겨야만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속한바 곧 우리의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23절). 그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알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바울 자신이 목격한 환상에 대한 설명 :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내 곁에 서서'라고 말했다(23절). 비록 바울이 먼 바다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결코 방해할 수는 없었다(시 65:5).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사자를 파견할 수 있으셨다. 배가 풍랑에 흔들렸지만 그 사자는 그 배안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어떠한 폭풍이나 풍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은총의 베푸심을 결코 방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즉시 도움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수인 바울이 그 배의 전용 객실이 아니라 감옥(그는 그곳이 아무리 불결하고 어두운 곳일지라도 나머지 죄수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겼을 것이다)에 수감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는 그의 곁에 있었다. 초라함이나 빈곤함이 하나님과 그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요인은 결코 아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바로 어젯밤에 보았다. 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안전까지도 확신시켜 주는 이 새로운 환상을 바로 지난밤에 보았던 것이다.

셋째, 바울은 자기에게 임한 환상속에서 격려받았다(24절).

①그는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그의 주변사람들이 모두 어찌할바를 모르고 절망중에 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바울아 두려워말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24절). 성도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일지언정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만군의 주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②바울은 로마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라고 말한 사실에서 알고 있다(24절). 가장 풍랑이 거센 바다라할지라도 하나님의 증인들이 그 증언을 완수할때까지는 결코 그 증언의 길을 막지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난과 역경에 처한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계속해서 수행하시는한 그들의 생명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③하나님의 사자는 바울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행인 모두를 구원하겠다고 말했다.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4절). 하나님은 세상에 유익한 인간에게는 커다란 축복이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바울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방도를 취하셨다. 바울은 여기서 거의 삼백명에 달하는 배의 승객 전부를 구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간혹 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사악한 사람들을 용서하신다. 선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인양 증오와 박해를 받지만, 실제로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선한 사람들 때문이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원을 받게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매우 커다란 은총이었으며, 바울도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바울에게 그들을 다 네게 주셨다고 전한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공공의 일에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큰만족이 없을 것이다.

(4) 바울의 위안의 말 :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했다(25절). 그는 결코 자신이 믿지않는 것을 그대로 하여금 믿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바를 경건하게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그 말씀은 그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언행이 일치하는데 어떻게 우리의 믿음과 기쁨이 일치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5)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고있다. 그는 그들에게 이 폭풍우속의 항해에서 빚어질 어떤 특별한 경과에 대해 이야기한다(26절). 즉 그는 그들에게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그곳에서 배는 난파되지만 승객들은 구원되리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은 편히 쉬게될 한 섬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2. 그들이 마침내 미지의 한 해변에 정박하게 됨(27-29)

그들은 계속 사경을 헤매면서 꼬박 두주일간을 폭풍우속에서 보냈다. 본문은 이 상황을 '열나흘째 되는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라고 기록한다. 아드리아해는 지중해의 일부로 아프리카 연안까지 뻗어있었다. 또한 그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중쯤 되어 사도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줄을 짐작하였다(27절). 그들은 그것이 육지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기위해 물의 깊이를 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해변에 접근함에 따라 물의 깊이는 얕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이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었다(28절). 이것은 그들이 어떤 해변에 근접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육지에 근접해 있음을 깨닫고 해안의 주변에 널린 암초가 두려워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였다(29절). 그들이 볼수 있었던 낮에는 그들의 시야에 섬의 그림자조차도 없었으나, 이제 그들이 아무것도 볼수 없게된 밤에는 어떤 해변에 가까이 와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날이 새기만을 고대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빛도 없는 어둠속을 걸어가게 될때 선원들이 했던 것처럼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고대하면서, 반드시 여명이 동트리라는 확신을 가져왔다.

3. 선원들의 배를 포기하려는 시도와 좌절(30-32)

(1) 사공들의 배반 계획은 침몰하려는 배를 버리고 떠나려는 것이었다. 사공들이 배에서 도망하고자(30절). 그들은 위험에 처한 다른 모든사람들을 내버려둔채 자신들의 목숨만 건지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런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체 하면서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바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육지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보다도 자신들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거짓된 속임수를 더 신뢰하였다.

(2) 바울이 배반자들의 행위를 발견하였다(31절). 바울은 그것을 보고 백부장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31절). 이제 그들앞에는 이제까지의 모든 고난중 가장 큰 역경이 닥쳐왔다. 왜냐하면 육지에 접근할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배를 육지에 댈수 있는 사공들의 기술이므로 그때는 이전보다 더욱 사공의 존재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가 할수 없는 일을 행하고 계실때 우리 역시 그의 능력속에서 온힘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결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방법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 사공들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게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일을 주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나 우리도 우리의 행할바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할수 있는 적절한 방법들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않고 시험하게 되는 것이다.

(3) 군인들에 의해 선원들의 탈출시도가 좌절되었다(32절). 군인들은 그 사건을 놓고 사공들과 논쟁을 벌일 시간도 없으므로 즉각적으로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렸다. 이제 그 사공들은 그 배에 머물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의 안전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배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 바울이 동행인들에게 불어넣어준 새로운 활력(33-38)

그러한 무리속에 바울과 같은 인물이 함께 타고 있었다니 그들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은 그들에게 얼마간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때 바울은 무리들을 소집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있는 점을 책망하였다. 그는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33절). 사실 그들은 거의 먹지않았거나 끼니를 거르기를 예사로 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너희가 계속해서 주렸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너희는 식욕을 잃었다. 즉 너희는 음식을 먹을 의욕도 식욕도 모두 잃고만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음식을 먹으라 권하노니(34절). 즉 우리가 험난한 투쟁에 직면해서 굶주려 몸이 약해진다면 어떻게 자구책을 강구할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들을 먹여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그들은 거센 파도에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약간의 양분이라도 섭취할 것을 간절히 권한다. 그것은 너희 건강과 너희 구원과 그리고 지금의 너희 안전을 위해서 음식을 먹게함으로 자기 생명을 구할 힘도 얻게하기 위해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처럼, 일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의혹과 공포에 굴복하여 나약하게 떠는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만찬을 금하고 하나님의 위안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영적 사업을 계속할수 없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만찬을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면, 그들은 힘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너희중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먹을수 없다면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분명히 생명을 건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먹으라."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들을 위해 손수 식탁을 마련하였고 떡을 가져왔다. 그들에게는 절약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풍부한 식량이 있었다. 그러나 식욕이 없는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맛있게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먹을 식욕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한다. 바울은 그 배에서 목사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할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떡을 가져와 '모든 사람앞에서 축사하였다'(35절). 이 일이 있기전에 그가 그 배안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는가는 불확실하다. 이제 그가 모든 사람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은 그들이 생존해 있고, 또한 그들이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양식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그 음식위에 축복이 함께 임하기를 간구하였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받을때 더욱 간절한 심정으로 감사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모든 사람앞에서 축사한 것'은 그가 떳떳하게 자기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함일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의 섬김속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음식위에 축복을 간구한다면, 그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그것에 대해 감사드린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권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얻게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축사한후에 떡을 떼어(이 떡은 바닷물에 절은 것이었다)먹기 시작했다. 그들이 삶에 대해 용기를 얻었는지의 여부는 알수 없으나, 바울 자신은 그러한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설교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러한 모범은 그들 모두에게 선한 영향을 미쳤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36절). 그들은 바울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바울 자신이 확신하고 있음을 파악한후에 그 메시지를 믿으려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는 전도자들이 스스로 그렇게 모범을 보일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려는 용기를 얻게 된다. 본문에서는 그 배에 승선한 사람들의 수가 이백 칠십 육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본보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영향을 미쳤는가 보라! 본문에 기록된대로 그들은 배부르게 먹었다(38절). 또한 그들은 배의 중량을 더욱 가볍게 하기위해 밀을 바다에 버렸다. 그들이 전에는 짐과 기구를 배밖으로 내던졌지만, 지금은 밀을 내던졌다. 양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침몰되기보다는 그들이 양식을 침몰시켜 버리는 것이 더나았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역시 자신의 생명을 위해 보관하고 비축해 두었던 양식을 똑같은 이유로 던져버려야될 상황에 직면할수도 있다.

5. 그들의 해안 상륙과 파선(39-41)

그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것은 날이 완전히 밝은 다음이었다.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39절). 그들은 자신들의 지금 도착한 이 해안이 어느나라의 해안인지도 알수 없었다. 그 배의 사공들은 어쩌면 가끔 이 항로를 항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경사진 항만으로 된 해안이 눈에 띄었으므로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하였다(39절). 그들은 그곳이 어느나라인지도 몰랐고, 그곳의 주민이 문명인인지 야만인인지도 몰랐으나, 모든 것을 그곳 주민들의 처분에 맡기기로 했다. 그곳은 물이었으며 따라서 그토록 오랫동안 바다에서 지냈던 그들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해안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을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해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간혹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귀중한 생명을 구조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때 그들은 인명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해안으로 직행하였다. 닻을 끊어(40절). 그들은 바다에 자신들을 맡겼다. 그리고는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 배를 좀더 견고하게 유지키위해 고정시켜 놓았던 킷줄을 늦추었다. 이제 그들은 항구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조타수가 좀더 자유롭게 배를 몰기위해 킷줄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으로 향하여 들어갔다. 그들이 해안을 보았을때, 그들은 서둘러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배를 몰았다. 그 속도는 아마도 정상속도를 훨씬 상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거센 풍랑과 오랫동안 싸워온 한 가련한 영혼이 그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의 안식속으로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고픈 심정과도 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 영혼은 성령의 바람에다 신앙의 큰돛을 띄워 가득찬 소망을 가지고 해안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두 물살이 합치는 곳을 만나 배가 좌초되었으므로 일단 모래바닥으로 보이는 지협같은 곳에 배를 정착시켰다. 그곳은 양쪽에서 바닷물이 몰아치는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이물이 부딪혔다. 이제 고물은 큰파도에 곧 파산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배를 조종할수 있는 공간이 넓었던 망망한 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났던 배가 이제는 암초에 걸려 파선하고 만 것이다. 이와같이 만약 우리의 마음도 이 세상에 매여 꼼짝하지 못하면, 곧 파멸하고 말 것이다. 사단에 유혹이 마음을 치면, 마음은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마음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는한, 근심과 소요로 흔들릴지라도 거기에는 소망이 있다. 그들은 해안을 목전에 두고도 그곳에서 난파당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디서든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6. 바울과 나머지 죄인들이 당한 특별한 위험(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하였으나(42절). 사실 죄수들이 도망갈 정도의 큰위험은 없었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허약하고 지쳐있었으므로 멀리 도망가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군사들의 감시속에서 그들이 탈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의 기적이 없이는 자신도 생명을 부지할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군사들이 유린하고자 했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백부장은 바울을 구하기위해 이러한 제안을 일축했다. 백부장은 자신의 죄수인 바울에 대해 호감을 갖고있었다. 율리오는 전에 바울의 충고를 거절한 적이 있었지만(11절), 이제는 바울을 구하기위해 그 무자비한 살육계획을 저지시켰다. 하나님이 바울로인하여 그 배의 모든 승객들을 구원하셨듯이, 여기서 백부장도 바울로인해 모든 죄수를 구원하였다. 여기에서도 한사람의 선함으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유익이 돌아가게 되었다.

7. 그 배의 전원이 구원받음(43)

몇몇 사람들은 헤엄쳐서 살아났다. 그것은 백부장이 헤엄칠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했기때문이다(43절). 백부장이 그렇게 한것은 죄수들의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많은 수고끝에 해안으로 기어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널조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배의 파편들을 의지하여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확신했으므로 더욱 열심히 서둘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무서운 바다로부터 구원되었고, 소원하던 항구로 들어갔다. 비록 약속된 구원의 과정에서 큰 고난은 있었지만, 구원의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난파선 파편들조차도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공헌하였으며,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였으나 모든 것이 안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심지어 널조각이나 부서진 뱃조각마저도 그들의 구원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 해설

로마로 향하는 바울 ( 27 )

마침내 바울은 이달리야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군인들의 호송하에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사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의 항해는 처음부터 수월하지가 않았습니다.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이에게 소망이 없어졌고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합니다. 마침 배는 육지에 이르게 되어 바울의 말과 같아졌습니다.

 

1. 이달리야로 향하는 바울

1) 동행인들

바울이 로마로 갈때 같이간 다른 죄수들은 누구였으며 몇명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로마로 옮겨지고 있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이 사건의 중심 인물로서 특정 군대에게 부여되는 명예 칭호인, 아구스도대에 속한 자로 기록합니다. 아구스도는 '존경하는'을 의미하는 세바스테스로 번역됩니다. 이 백부장은 100명의 군사를 거느렸습니다. '우리'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누가는 이 여행에서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조력자로서 동행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로마에 감금된 기간에도 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a.죄수(사49:9)

b.아리스다고(행19:29)

2) 미항에 도착

그 배의 취항지인 아드라뭇데노는 소아시아 북동부에 있는 드로아의 동남쪽에 위치했습니다. 그 배는 폭풍이는 겨울 항해철이 접어들기 전에 이 취항지를 향해서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첫 기항지인 시론에 도착했을때 그곳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백부장의 친절은 또다른 백 부장의 친절만큼이나 잊지못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중해 동부에서 서부로 항해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울을 태운 배는 바람을 거슬리며 항해를 했기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이 배는 276명을 태울만큼 큰 곡물 운반선이었습니다. 애굽은 로마의 곡물 공급지였습니다. 바울이 탄 이 두번째 배의 항로는 무라에서 출발하여 니노에 이른 다음 그레데의 남서 해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a.바울의 친구들(행24:23)

b.정중한 환대(창12:16)

3) 바울의 말을 믿지않는 백부장

9월 중순이후로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고, 11월 중순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누가는 그때의 계절을 '금식일', 즉 대속죄일이 지났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 해의 속죄일은 10월 5일이었습니다. 이때는 강한 북서풍때문에 항해하기가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레데 섬의 남쪽 해안을 따라 행선했던 까닭에 바람의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배가 이 해안의 미항이란 항구에 도착한뒤 선상회의가 열려 이곳에서 겨울을 나느냐 아니면 서쪽으로 더 떨어진 뵈닉스에서 나느냐의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바울도 여행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자문 역할을 했으나 미항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그의 의견은 뵈닉스에 가자는 의견에 밀려 거부되었습니다.

a.금식(민29:7)

b.속죄일(레23:27)

 

2. 유라굴로 태풍

1) 광풍을 만남

바울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료 여행자들은 그들이 미항을 떠날때 잠깐동안 불었던 순한 남풍에 속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못되어 이윽고 그레데 섬 중심에 있는 이데 산으로부터 갑자기 불어닥친 유라굴로 광풍때문에 배는 정기 항로를 이탈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레데 섬의 남쪽에 있는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 이르러 그 섬을 바람막이로 하여 지날 짧은 순간에 배위로 돛없는 작은 배, 거루를 끌어올리고 선체를 둘러 감았습니다. 만일 연장을 내리고 배의 방향을 서북서 방향으로 고정시킴으로써 항로를 제대로 잡지못했다면 광풍에 밀려 리비아 해안의 모래 수렁 스르디스로 떠내려 갔을 것입니다.

a.광풍(막4:37)

b.주목할만한 배(창7:17)

2) 구원의 소망이 없어짐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풍랑으로인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가능한 한 배를 가볍게 해야 했기때문에 먼저 곡물들을 바다에 던지고 또 움직이기 쉬운 짐과 모든 여분의 기구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날 동안을 폭풍과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들에 가려서 방향을 잡아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살수 있다는 구원의 소망은 사라져만 갔습니다.

a.짐을 바다에 버림(욘1:5)

b.소망이 없는 절망(렘2:25)

3) 바울의 위로

이때 바울은 그레데에서 한 조언을 상기시킨 다음,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임한 첫번째 환상은 아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환상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바울의 길이 평탄하지는 않겠으나 결국은 무사히 로마에 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게된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동료들에게 거듭 안심하라고 위로했습니다.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알리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a.천사의 사역(히1:14)

b.믿음의 승리(롬4:20)

 

3. 아드리아 바다에서

1) 바울의 지혜로운 권면

아드리아 바다는 아드리아 해와는 다른 지중해의 중앙을 일컫는 곳을 말합니다. 그레데로부터 떠밀려 간지 2주일후 그들은 멜리데 섬 근방에 이르렀습니다. 사공들은 물의 깊이를 재며 육지에 가까이 옴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공들이 도망하려하자 바울이 이를 지혜롭게 저지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에 탄 모두를 안전히 지키시리라던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그들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빵을 조금 떼어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안심하고 받아먹었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의 수는 276명이었습니다.

a.지혜로운 모사(잠11:14)

b.하나님께 축사함(마15:36)

2) 육지에 오른 사람들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보이자 그들은 배를 곶에 대기로 했습니다.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배는 사공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래톱에 부딪쳤습니다. 배의 이물은 모래에 부딪쳐 움직일수 없게 되었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갔습니다. 백부장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죄수들, 그리고 헤엄을 치며, 배의 파편을 타고 모든 사람들이 육지에 상륙했습니다.

a.파선(고후11:25)

b.구출의 약속(딤후4:18)

 

결론

드디어 로마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가이사 앞에 서게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때론 죽음의 위험을 지나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 핵심

27:1-26

로마로 향한 바울의 항해여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수 있었음은 주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배(27:6)

나일강 삼각주의 곡창 지대에서 수확한 곡식을 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무역선. 이 배의 항해기간은 역풍으로 인해 대개 두달 남짓 걸렸다. 그러나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의 항해는 순풍으로 인해 2주 정도면 가능했다.

 

# 묵상

미항에서의 바울 ( 27:9-11 )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를 향한 바울은 미항에 이르자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라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뿐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금식하는 절기는 티쉬리(9-10월) 10일에 지키는 속죄일을 의미하는데, 이때는 우기이므로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을 지내고나서 항해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에게 친절하기는 했지만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부장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면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연장을 내린 선원들 ( 27:17-22 )

이는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스르디스는 그레데 섬 서쪽에 있는 얕은 바다로, 이 바다에는 유동하는 모래가 깔려있어 줄로 선체를 둘러감고 연장을 내린 것입니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풍랑을 만난 사흘째는 배의 기구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은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고 배만 상할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긴 했지만 위로자가 되어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사명을 다할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그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소망이 다 끊어진때에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절망에서 끌어내고 소망중에 안심하게 하였습니다.

난파된 배위의 상황 ( 27:27-44 )

난파선에서의 바울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용기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던 바울은 먼저 열나흘 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때문에 폭풍과 파도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가 깨어짐으로인해 바울에게는 커다란 위기였지만 백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구하고 죄수들도 살해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오차가 있을수 없습니다.

군사들의 계획 ( 27:42, 43 )

군사들은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갈지 모르니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백부장에게 제의를 했습니다. 로마법에서는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를 지키는 군사가 대신 벌을 받게되어 있었기때문에 그들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이렇게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위해 그러한 위험도 무릅쓰고 죄인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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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자기 변명 26:1-11

아그립바는 그 법정에서 왕의 칭호를 받은 가장 명예로운 인물이었다. 여기서 그는 비록 뛰어나지는 못했다해도 베스도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따라서 베스도가 그 법정을 개최했으나, 바울에게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자는 아그립바였다(1절). 유대인들이 그에게 변론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가 그에게 그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서 변론에 임하는 바울의 자세를 주목해 보기로 하자. 그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처럼 그의 손을 앞으로 뻗쳤다.

(1)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매우 각별한 경의를 표하면서 말을 시작했다(2,3절). 그는 벨릭스 앞에서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러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행 24:10). 그러나 아그립바에 대한 그의 자세는 그 이상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당하여 많은 비난을 받아왔으므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아그립바왕 앞에서 하게되었으므로 그것을 기쁘게 여겼다. 왜냐하면 아그립바는 스스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며, 따라서 로마의 다른 어떤 총독들보다도 그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시니이다'라고 말하였다(3절). 이것으로 보아 아그립바는 유대 종교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그러한 관습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익숙해 있었다. 아그립바는 구약 성경에 통달해 있었으므로 메시야로 취급되고 있는 예수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 전도자에게 있어서 총명하여 사물의 다른 이치를 잘 식별할수 있는 청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그는 그에게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바울은 장시간의 변론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립바가 싫증을 느끼지 않고 계속 경청할 것을 간청하였다. 또한 그는 솔직한 변론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화를 내지 말고 너그러이 들어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설교할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해 주기를 기대해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바울은 비록 배교자로 낙인 찍혔으나 자신은 이때까지 처음에 훈련받은대로 모든 선을 행하면서 살아왔노라고 고백한다.

1) 여기서 바울의 청년 시절의 종교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젊었을때의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4,5절). 바울은 사실상 유대에서 출생하지는 않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양육되었다. 그의 교육은 외국의 것도, 애매모호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자기 민족과 함께 교육받았다.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과 가장 엄한 종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불리워졌을뿐만 아니라 한사람의 바리새인답게 살았다. 또한 그는 바리새파들 중 뛰어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힐렉학파에서 가장 걸출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울이 한사람의 바리새인으로서 바리새인적인 삶을 영위했다면, 그는 박식한 학자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율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훌륭히 해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이 전혀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고 어부였다는 사실은 그들에 가해진 하나의 조소거리였다(행 4:13). 그러나 여기 이 사도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의 문하생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도덕주의자였으며,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지, 난봉군이거나 나태하고 방탕한 젊은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율법안에서 의를 행하는 흠잡을데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유대교를 알지 못하여 그것을 버렸다고 생각할 수 없듯이(왜냐하면 그는 박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유대교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것을 거부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이렇듯 그는 정통 신앙의 소유자였고, 건전한 신앙을 간직한 자였다. 그는 사두개파에 반대하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므로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울이 신성한 계시에 합당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를 버렸다고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항상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숭배했던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를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들을 통해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이 조성될 수 있으리라는점 역시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아그립바가 인정했듯이 그것들을 그가 유대인들이 그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아그립바에게 증명하는 증거들이 되었다. 그는 그것들을 버림으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단순한 손실로서 간주했었다. 그러나 이때는 그 사실들을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때였으므로 여기에서 그것들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2) 바울의 현재의 신앙 : 바울은 그가 젊은 시절에 하였던 것처럼 형식적인 율법에 그렇게 열심을 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중요한 근본 원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열성적이었다.

첫째, 그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 위에 기초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바탕을 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 은혜는 약속에 의해 명백해지며 전해진다. 하나님의 약속은 바울의 신앙의 안내자이며 터전인 것이다. 그 약속은 조상들에게 주신 것이며, 의식적 율법보다 더욱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하늘나라는 복음의 두가지 중요한 가르침으로서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으며 이 생명은 독생자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신앙은 이러한 약속에 대한 소망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처럼 먹고 마시는데에 소망을 두지 않고 언약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에 소망을 두었다. 그는 약속된 씨인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받기를 원했다. 그는 하늘나라를 소망하였다. 바울은 육신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던 것이다.

셋째, 이처럼 그는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7절).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지금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와 관한 약속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메시야가 도래하실 것을 바라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오신 메시야에 소망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같이 똑같이 약속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기대하는데 이것은 나의 기대와 일치한다. 나는 이 기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들 유대인들과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데, 나를 유대 교회의 신앙과 예배를 떠난 배교자로 간주하려는가? 나는 그들이 소망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하늘나라가 마침내 임할 것을 바라고 있다. 만일 우리가 마지막 때에 즐겁게 만날 것을 기대한다면, 왜 도중에 유감스럽게 다투어야 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과 복음을 통하여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반면 열두 지파는 그들의 대리인들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에 의해 하나님을 받들어 섬긴다. 그러나 바울이나 유대인들은 똑같은 약속에 소망을 두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비록 예배 형식과 의식의 차이는 있어도 같은 예수 안에서 같은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더욱더 거룩한 사랑가운데에 함께 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고 충실한 사람들만이 영생을 바라볼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영생에 대한 기대는 우리를 모든 신앙적인 일들에 부지런하고 충실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설사 우리와 견해를 달리하더라도 밤낮으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섬기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관대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넷째, 바울이 현재 박해를 받은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그는 '내가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라고 말한다(6절). 바울이 의식법에 반대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한 반면, 그의 박해자들은 약속에 반대하고 의식법을 강조했다. 형식적인 신앙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간직한 신앙의 능력을 증오하고 핍박한다. 바울의 소망은 '저희의 기다리는 바'였다(행24:15).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그 소망에 따라 실행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했다.

다섯째, 바울은 그의 말을 경청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간곡히 설득하고 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절). 그는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부활과 영생에 대한 약속임을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조상들이 바라던 그 부활의 언약이며 증거이신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기때문에 자신이 정당함을 증명하였다. 이때 바울의 청중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방인이었으며, 특히 베스도가 그러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바울에게서 들었을때, 아마도 그들은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한 것은 아니다. 봄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자연속에서 부활의 실례를 볼 수 있지 않은가? 태양도 죽은 식물들을 소생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죽은 시체들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은 왜 믿을 수 없단 말인가?

(3) 바울은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었을때 기독교와 그리스인에게 철천지 원수였으며 본인도 그러한 입장을 고수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전도자가 된 것은 이전부터 그 도(道)에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기독교를 믿게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극도의 편견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뚜렷한 확신을 얻게 됨으로써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렇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회심한 것은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케 하는 증거가 된다. 아마도 바울은 그의 박해자들에게 변명하기 위해 이 말을 하였던 것 같다. 바울 자신도 이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핍박할때 당연히 해야할 것을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제 그는 박해자들이 무익하게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너그럽게 생각한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첫째, 바울은 이전의 자신의 생각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고백한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9절). 바울은 기독교의 견해가 메시아의 왕국에 대한 자신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대적하기 위해 온갖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같이 명백히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 법이다.

둘째, 그는 매우 포악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음을 고백한다(10,11절). 이 세상에서 비뚤어진 양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바울은 그가 저질렀던 일에 대하여 설명하며, 그것을 참으로 참회하는 사람답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폭로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감옥을 채웠다.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으며. 그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행 8:3). 그는 대제사장들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자신이 대제사장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10절) 박해의 임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인 것을 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일에 가편 투표를 하였으며, 특히 스데반을 죽일때에 사울로 불리었던 그는 그것을 마땅히 여겼다(행 8:1). 그는 그들을 회당에 끌어다가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는데 그 회당에서 그들은 회당의 규례를 어긴 자로서 채찍질을 당하였다. 바울은 신앙의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형벌을 가했을뿐 아니라, 그들을 고문하여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즉 그는 '그들에게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다'(11절). 핍박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에 대한 노여움이 너무나 극심해진 나머지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는 활동 무대가 좁다고 생각하였다.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11절). 그는 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핍박할수록 그들의 수가 더욱 증가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는 심히 격분하였고 그 노여움의 불길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다. 박해자들은 미치광이들이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심히 격분하여 날뛰었던 것이다. 증오-특히 그것이 결백한 것으로 착각될때-처럼 무모한 것은 없다. 이것이 젊은 시절의 바울의 성격이요, 생활 양식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외적인 상황들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는 상반되는 것들이었다.


Ⅱ. 바울의 간증 26:12-23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저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문에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그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직접적인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1) 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즉 그는 하늘의 섭리와 신성하고도 영적인 힘 그리고 위로부터 내려온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갑자기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바울이 죄가 가득한 상태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발생하였다. 또한 그가 그의 친구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과감하게 박해를 단행한 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핍박하는 '권세와 위임을 대제사장들로부터' 충분히 받아놓았기 때문이었다(12절). 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두가지는 하늘로부터의 환상과 음성이었다.

1) 바울이 하늘로부터의 환상을 봄 : 그것은 분명히 신의 현현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오는 굉장한 빛을 보았다.' 어떠한 기술로도 정오에 그렇게 밝은 빛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 일은 그를 놀리기 위해 조작될 수도 있는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방이 탁트인 길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으며, 바울 자신의 환상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빛은 '그의 동행들을 둘러 비추었기' 때문이다(13절). 그들이 보기에 햇빛은 그 빛에 비하면 오히려 무색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 빛을 보고 모두 땅에 엎드러졌다. 그 빛은 그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세상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창조에 있어서도 맨처음 창조된 것은 빛이었다(고후 4:6).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즉 바울에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나의 뜻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16절). 비록 바울의 동행자들은 그 빛만을 보았을 뿐이나 그리스도는 이 빛가운데 계셨다.

2) 바울은 하늘로부터 그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14절). 본문에 보면 그것은 그의 모국어인 히브리어 방언으로 들려왔다.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계속 되풀이하며 부르셨다. 사울아 사울아 그리스도는 그의 죄, 즉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죄를 깨닫게 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의 고난에 관여하셨다. 즉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고(14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다(15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짓밟았던 자신의 행위가 하늘나라의 지극히 영화로우신 분을 모독하는 짓이 된다고는 생각조차 못하였다. 주님은 회심한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의식적인 방해를 저지하셨다. 즉 '가시채를 뒷받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다(14절).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셨다. 바울이 '주여 뉘시이니까'라고 묻자 주님은 '나는 네가 멸시하고 미워하는 예수다'라고 대답하셨다(15절). 바울은 예수께서 땅에 묻히신 줄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비록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 묻혔으리라 생각했었다.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하늘로부터 주의 음성을 듣고 또한 그분이 이런 모든 영광에 둘러쌓이신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일은 바울로 하여금 예수의 가르침이 신적인 것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거기에 대항해서는 안되며, 충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바울을 즉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2)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사역자가 되었다. 그 영광스러운 빛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그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그에게 명령하셨다(17절). 그런데 본문에서 자신에게 사도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바울이 말한 까닭은 그가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을 곧바로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사실을 묶어 하나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는 일어서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그를 알 수 있겠는가?

1) 바울에게 위임된 직분 :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증인으로서 그를 위해 활동할 사역자로 피택되었다. 그리스도는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람들앞에 서게 하시려고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2) 바울이 전할 내용 : 그는 '그가 본 것에 관하여' 세상에 이야기를 해야 한다. 바울이 이 모든 일들을 보게된 것은 그것들을 선포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그래서 그는 본문과 22장에서처럼 기회있을 때마다 그 본 것들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날 일에 대해서 증거해야 했다. 처음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 좀더 충분한 가르침을 주시기까지는 복음의 개념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받은 것이었다(갈1:12).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점차적으로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계속 그를 가르치셨다.

3) 바울이 받았던 영적인 보호 : 주님은 그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17절). 즉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얼마나 해를 받아야할 것인가'를 보이셨으나(행 9:16), 그를 '사람들에게서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17절). 수많은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약속과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자기 백성을 핍박자들의 손에 내어주는 것은 그들을 핍박자들로부터 구원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인 것이다.

4) 이방인들에게로 가라는 특별한 사명이 바울에게 부여됨 : 바울이 회심한후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첫째,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할 큰일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일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했다. 어둠속에 있는 세상은 마땅히 밝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기위하여 보냄을 받았다(18절). 바울은 이전에 빛에 대하여 닫혀있던 그들의 눈을 뜨게할 것이며, 그들은 기꺼이 깨닫게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눈을 뜨게하심으로 마음문을 여시며, 사람들의 눈을 가린채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자기들의 길을 볼수 있도록 해주신다. 바울은 그들의 눈을 당장에만 뜨게하려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즉 거짓되고 눈먼 인도자를 따르던 것으로부터 분명한 하나님의 게시와 진리를 따르게 하기위하여 그들을 계속 눈뜬 상태로 있도록 하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그들의 돌아섬은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돌아섬이요, 어두움의 길에서 광명의 길로의 돌아섬이었다. 복음의 위대한 목적은 죄가운데 있는 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고 참빛을 보게하며 그속에 거하도록 하는데에 있다. 사악함으로 뒤덮힌 세상은 개혁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눈을 뜨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져야만 한다. 사단은 어두움의 권세로 다스리며, 하나님은 빛에 대한 확신에 찬 증거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죄인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 회개의 은혜는 그들을 사단의 지배아래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복종케 한다. 은혜의 역사가 심령속에 강하게 작용할때(마치 이전에 더럽고 죄로 가득한 성품이 그랬었듯이), 그 심령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

둘째, 이 일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크나큰 복을 주시려는 계획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죄사함과 거룩하게 된 무리가운데서 기업을 얻게하시려는' 계획이 있는 것이다(18절). 그들은 사단의 종노릇에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었던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 즉 죄사함을 받게된 것이다. 그들은 죄사함의 은혜를 입을수 있도록 하나님께 복종하여 다시 충성할 것을 권유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속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가운데서 기업을 얻게될 것이다(18절). 하늘나라는 기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상속되는 길이다. 왜냐하면 '만일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그들로 권리를 얻게하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권리는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닌, 순전히 은혜에 의한 권리인 것이다. 실제로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온 모든 사람들은 용서받을뿐만 아니라 권리도 얻는다. 내세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현재에도 성별되어 있다. 거룩하게 되지 않으면 아무도 복을 받을수 없다. 먼저 이 땅에서 성도가 되지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결코 성도가 될수 없다. 우리는 성별된 사람들가운데서 우리의 분깃을 얻으면 그들이 사는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맛볼수 없다. 성화된 사람들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 이 말을 어떤 학자들은 앞에 나온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마음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은 그 말을 '죄사함과 기업이 함께 주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모두 하나로 볼수 있다. 즉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성화되며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나를 믿는 그 믿음으로써'라는 표현은 믿음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즉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중재를 고수하는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의지하며 그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3)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와 보호 아래 그의 사역을 수행하였다.

1)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소명에 응할수 있는 마음을 주심 : 그러므로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19절). 만일 바울이 혈육과 의논하고 세속적인 욕심에 흔들렸다면 요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즉 이 사명을 맡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그 사명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행하는데에 전념하였다.

2) 비록 그의 사역을 통하여 그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단히 많은 일을 수행할 능력을 허락하셨다(20절). 그는 온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바울은 그가 회심한 장소인 다메섹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교육을 받았던 예루살렘에 와서도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매우 극렬한 무리들을 만났었다. 그는 '유대 온 땅에' 전도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신대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강퍅스럽게 복음을 배척할때까지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그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3) 바울의 설교는 모두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다음의 것들을 사람들에게 권면하였다.

첫째, 그는 '그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 곧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그 죄와 상반되는 계약안에 들어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습관을 고쳐야 했다.

둘째, '하나님께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를 미워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사랑과 애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고 순종해야 한다. 또한, 세상과 육적인 것에서 돌이켜야 한다.

셋째,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첫번째 복음 전도자인 세례요한이 설교했던 내용이었다(마 3:8). 회개를 고백한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해야 하며 회개에 합당한 삶은 살아야만 한다. 죄를 뉘우치는 말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말에 합당한 일을 행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설교에 어떤 잘못이 있을 수 있겠는가?

4) 유대인들은 이같은 이유, 즉 바울이 사람들에게 신앙을 지키라고 설득했던 것과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옴으로써 하나님께 이르게 했다는 것외에는 그와 다툴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죽이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없었노라'고 주장하였다(21절). 또한 이러한 일들을 죽임을 당하거나 사로잡힐만한 죄로 판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바울을 붙잡았다. 그리고 마치 좋은 장소이기에 좋은 일을 한다는듯이 그를 해치려 하였다.

5) 바울은 하늘로부터의 도움외에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즉 바울은 '오늘까지 나는 내가 말한 것을 고수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를 지지해 주었는가? 그것은 바울 자신의 어떠한 결단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없이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지속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인함이 분명하다. 복음 전도자들은 만약 그들이 하늘로부터의 직접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결코 그들이 해온 것처럼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6) 바울은 구약성서와 일치하는 것외에는 어떤 가르침도 전하지 않았다. 그는 '높고 낮은 사람앞에서 증거하였다'(22절). 복음이 미천한 자들에게 증거되고, 가난한 자들이 복음의 지식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복음의 은혜에 대한 증거이다. 또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복음이 명백한 진리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외의 어떤 것을 전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외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전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바울과 쟁론했던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전에도 말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알리는 것보다 선지자들에게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같이 그들이 예언했고 바울이 전했던 것은 아래의 세가지 사실이었던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메시야가 고난자라는 사실이다. 그의 수치스러운 죽음은 그의 사명과 일치할뿐 아니라, 그 사명을 준행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전하면서 자신이 구약의 예언들의 성취를 전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둘째,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부활한 자들의 머리가 되기때문인 것이다. 그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더이상 죽지않은 분이 되셨다.

셋째, 그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나타나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유대 백성들에게 그분 자신을 통해 빛을 보여 주셨으며, 그 다음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셨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의 사명, 즉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언급한다(18절).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또한 이것은 '이방에 거하는 자들이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에서 유대인들이 불쾌하게 여길만한 정당한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유가 있을수 없는 것이다.

 

Ⅲ.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함 26:24-32

우리는 바울이 더욱 할 말이 많았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하여 막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를 이 주제에 대해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그는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진장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중단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라는 허락을 받았지만, 그가 작정했던 모든 것을 말하도록 허락받지는 않았던 것이다.

(1) 로마의 총독 베스도는 그 불쌍한 사람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바울은 가엾지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베스도는 그를 죄수로 정죄하거나 전도자로 믿는 것으로부터 피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그를 정죄하거나 그를 신뢰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1) 베스도가 바울에게 말한 내용(24절) : 그는 바울의 이야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으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청중들이 주의를 돌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즉 너는 학문때문에 머리가 돌았구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화를 내면서라기보다는 경멸과 모욕적인 언사로 말하였다. 그는 바울이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바울의 말이 전혀 풀수 없는 수수께끼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스도는 그의 말을 모두 과열된 상상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는 바울을 학자와 지식인으로 인정했다. 어부였던 사도들은 학식이 없었기때문에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최고 학부를 나온 바울은 지나치게 많은 학식을 가진것 때문에 멸시를 당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 대한 적대자들은 무슨 이유로든지 사역자들을 항상 비난할 것이다. 베스도는 바울을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는 귀신들린 사람 또는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이런 부당한 말을 했지만, 베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것 같다.

2) 바울이 이런 부당한 오명을 씻기위해 취한 방법 : 그는 자기가 그렇게 불리워질 근거나 구실이 없다고 항의함으로써 베스도의 말을 부인한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25절). 그는 베스도에게 할수 있는 모든 경의를 표했으며 베스도 각하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그에게 찬사의 말을 보냈다. 이것은 우리가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우리에게 경멸의 언사를 퍼붓는 자들에게조차 정중히 대할 것을 가르친다.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에 관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한다. 왕은 이 일을 아시므로. 바울은 왕앞에서 담대히 말하였다. 왕은 그 일에 관하여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알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왕이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말한다(26절). 즉 나라 전역에 이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바울은 자신이 이 모든 말을 했다고해서, 더우기 너무나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한다고해서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아그립바가 그것을 모를리 없었으며, 베스도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은 베스도 자신에게 수치가 될만한 일이었다.

(2) 아그립바는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이것보다도 더 조리있게 말하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1) 바울은 아그립바의 양심에 호소한다. 그는 그를 이해하는 사람들, 또는 그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일만한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렇기때문에 그는 여전히 아그립바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27절).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그립바를 격려하는 뜻에서 그가 믿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믿으시는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아그립바가 유대교를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아그립바는 선지자의 글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내용을 믿었던 것이다. 성경을 알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 용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아그립바는 바울이 말한 것에 상당한 근거가 있음을 인정한다(28절). 그러므로 그는 '네가 나를 권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도다'(흠정역)이라고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비꼬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한글개역성경)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게 여긴다해도 바울이 매우 조리있게 말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간주한다. 벨릭스가 두려워하였을때 죄를 떠나게 될뻔했던 것처럼, 아그립바도 그리스도를 거의 믿게 되었다. 믿으라는 말에 완전히 설복되지는 않았으나 거의 설복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강한 확신을 갖고있으나 아직 어떤 외적인 요인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므로 그 확신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3) 바울은 모든 청중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경건한 소망을 담은 기도의 말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라(29절). 바울은 그의 신앙을 고수하겠다는 결의를 고백한다. 그들이 모두 그와 같이 알게 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통하여 사실상 바울은 예전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그들과 타협하는 것이 아무리 많은 세속적인 이익을 얻을수 있다 할지라도-과는 다르게 살 것을 선언한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주는 은혜와 이익에 대해서도 만족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라도 충실하고 열렬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서 권하였을 것이다. 그는 아그립바가 그리스도인이 거의 되려다가-이것만으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더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우려와 관심을 표명한다. 바울은 그들 모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때 그 각각의 사람들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의 수효가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사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은혜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 모두에 대해 갖고있는 진심 어린 호의를 보여 준다.

첫째, 그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원할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기원한다.

둘째, 바울은 외면적인 상황에 있어서는 그들이 현재 자기가 처한 형편보다 낫기를 기원한다. 그는 그들 모두가 자기처럼 위로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기처럼 핍박당하는 그리스도인은 되지않기를 기원한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매인 바 되기를 바라지만, 결코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금되지는 말기를 원한다. 이보다 더 다정하고 은혜스러운 말은 없을 것이다.

(3) 그들은 모두 바울이 죄가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법정은 좀 서둘러 산회되었다(30절). 바울이 말하고 있었던 때에도 왕은 그가 더 감동적인 말을 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왕 자신은 자기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하는 것을 알았으며, 감히 더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벨릭스처럼 이 시기에 바울을 물러나게 하였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모두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31절). 배심원들은 퇴정하여 서로 말하되 모두 의견을 같이하여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바울은 아직 그의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떳떳함을 인정받았으며, '바울을 없애라 그를 살려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외치던 격렬한 유대인들의 소동은 이 법정의 적절한 판결로 무색해지고 말았다. 아그립바는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다면 놓을수 있을뻔 하였으나' 그 호소때문에 자승자박하게 된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32절). 이것은 아그립바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뻔했을 정도로 권고받았지만, 전혀 설득받지 않았을때보다 더나아진것이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을 후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수 없지만, 이제 그는 자기의 석방에 대한 유일한 장애가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한 것이 가끔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하며, 그렇게 앞날을 내다볼줄 모르는 피조물이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어쨋든 바울은 자기가 행한 일에 만족하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으며 종국에는 좋게 결말이 나게될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바울은 환상속에서 그가 로마에서 증거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행 23:11).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죄수로 그곳에 가든지 자유의 몸으로 그곳에 가든지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 해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 26 )

바울의 자기 변명은 본장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그립바 왕과 많은 무리들 앞에서 바울은 생명을 건 변호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특별한 사람에게 걸맞는 방식으로 자기가 여기까지 서게된 경위를 말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아그립바의 개인적인 믿음을 촉구하기로 했습니다. 바울의 무죄는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울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는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의 다섯번째 자기 변명

1) 아그립바의 허락과 바울의 변호

아그립바의 허락을 받은 바울은 손을 들어 예의를 표하고 자기의 일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가 실제로 유대의 모든 관습과 논쟁에 익숙하였으며, 게다가 실제적으로 유대인임을 알았기때문에 정직한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인사말을 마치고 바울은 이제 그의 변호를 시작합니다. 이 연설의 목적은 아그립바가 이 일에 대해서 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a.유대인(요4:9)

b.존경받는 통치자(삼상10:24)

2) 바울의 배경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조상들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헌신적이었던, 개인적인 진술을 통해서 자신의 배경을 알립니다. 그의 젊을때의 생활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음을 말하고 그가 엄격한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한 소망을 바라는 까닭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부활을 그의 메시지의 중심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가능케 하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은 죽은 자의 부활로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첫열매로 예수께서 살아나셨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참조, 고전15:30).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이 부활의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a.부활의 근거와 약속(시49:15)

3) 바울의 박해

바울은 유대교에 소속한 것외에도 기독교 박해에도 열정적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일때 찬성하였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가 투표를 했다는 것은 바울이 산헤드린 회원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산헤드린의 조치에 동의했음을 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면 강제로 주 예수의 믿음을 부인하고 모욕하도록 했습니다.

a.유대교(갈1:13)

b.성도의 투옥(행5:18)

 

2. 바울의 회심과 소명

1)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자기의 회심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정오의 해보다 더 밝은 빛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과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일은 다메섹 도상에서 동시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본문은 다메섹 도상의 사건 기사 중 그때 주님이 쓰신 용어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예입니다. 또한 그때 주님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속담을 인용하신 것으로 전하는 유일한 예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가시채란 그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방향과 정반대 쪽으로 몰아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a.그리스도의 영화(계1:13)

b.그리스도의 음성(계1:15)

2) 바울의 소명

바울은 자신의 증인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아그립바 왕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방 선교에 대해서 대단히 간략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것은 바로 그 이방 선교 문제이었음을 지적합니다. 대적의 눈으로 볼때, 바울의 근본적인 범죄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유대교의 규례들 등 마땅한 요구를 하지 않은채 유대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복음을 전한데 있었습니다. 그들로서는 바울의 이런 행위가 할례나 다른 규례들을 업신여긴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기가 회개한 이래 전해온 복음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와 같이하고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 그리고 이 일로인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포하게 되리라는 것이 증거의 요약이었던 것입니다.

a.하나님의 도우심(고후1:10)

b.회개에 합당한 일(마3:8)

 

3. 아그립바를 향한 질문

1) 바울의 권고

베스도는 유대인의 종교를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미친 사람의 소리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다만 바울의 많은 학문때문에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제 정신임을 분명히 밝힌 다음 다시 한번 아그립바를 향했습니다. 이 일은 아그립바의 관심밖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잘 배웠고, 기록한 내용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줄 아나이다'라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아그립바는 궁지에 몰리자 바울의 말을 농담조로 받아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에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기꺼이 그 기회를 붙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자기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결박된 것외에는 자기와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대답함으로 변호를 끝맺었습니다.

a.미쳤다 함(요10:20)

b.영혼을 위한 열심(롬9:3)

2) 바울의 무죄 인정

바울의 변명을 들은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물러갔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무죄를 말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일이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놓을수 있을 뻔하였다고 말했습니다.

a.절대적인 무죄(고후5:21)

 

결론

바울의 생명을 건 변호는 이것으로 마쳐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가이사 앞에 서야하는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복음을 전하고 또한 전도 대상자에게 필요한 수준에 맞춰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도 살필 수 있습니다.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야하는 바울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를 느낄수 있습니다.

 

# 핵심

26:1-23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이 자신에 대한 변론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다.

베스도(26:24)

네로 황제 당시, 벨릭스를 이어 유대 총독으로 재직(A.D. 60-62)한 자이다(24:27). 전임자의 실정으로 인해 부임 초기에는 고전했지만 마침내 반란을 진압하고 안정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유능하며 비교적 선정을 베푼 총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출세욕때문에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했다(25:9).

 

# 묵상

자신의 회심 과정을 설명하는 바울 ( 26:14-16 )

아그립바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시채는 뾰족한 쇠나 동물의 뼈가 박힌 채찍으로, 밭가는 소가 말을 듣지않을때 사용하는데 이때 소가 반항하며 뒷발질을 하면 더욱 채찍을 가하게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대적하면 할수록 바울 자신이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으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사환은 심부름하는 종을 뜻하는데 예수님은 바울을 복음전하는 종으로 삼으시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해 바울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박해에서 승리하는 바울 ( 26:21, 22 )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지되었고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승리가 자신의 결단이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우리도 범사에 이와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바울의 변명에 대한 베스도의 반응 ( 26:24 )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에 대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권위있는 설교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서 뚜렷한 죄를 찾지도 못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선언하고 일단은 심문을 마치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울 ( 26:29-32 )

바울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에서 바울의 당당함과 복음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떳떳함을 인정받았습니다. 애매히 고난받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인내하는 바울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삶을 통한 제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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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가이사에게 상소한 바울 25:1-12

우리는 흔히 주인이 바뀌면 법도 바뀌고 관습도 바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곳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한 후에도 여전히 바울은 그로부터 전임 총독에게서 받은 것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베스도 역시 벨릭스와 마찬가지로 바울을 석방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다.

1. 바울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대제사장과 다른 유대인들의 강청(1-3)

이제 그들이 얼마나 신속하게 베스도에서 청원하였는지를 살펴보자. 베스도가 도임한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1절). 대제사장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삼일동안 머물렀으며, 그곳은 전에 바울이 죄수로 감금되었던 장소였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마자 대제사장들은 서둘러 그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 그들이 얼마나 악감을 품고 그를 고소했는가를 살펴보자. 그들은 공정한 재판이 개정되기도 전에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2절). 그리하여 그들은 이 사건의 재판관이 될 총독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자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책략은 그들이 충분히 생각하여 꾸민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치밀하게 심사숙고된 또다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총독이 친히 바울을 재판하기 전에 바울을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구실이 얼마나 허울 좋은가! 이제 그들은 총독인 그가 예루살렘에 있으니 바울을 그곳으로 옮겨와 거기서 재판할 것을 제안하였다(3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죄로 기소되었으며, 범죄자들은 그 범죄가 저질러진 곳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바울을 호송하는 도중에 그를 습격하여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베스도의 호의를 얻고자 하였다(3절). 기소자들의 사명은 범죄자로 추정된 자에 대하여 법의 공정한 판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수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재판관의 호의를 사려고 한 것은 결코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다. 재판관의 호의는 죄수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그들은 바울을 없애기 위해 총독의 호의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2.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재판받게 하려는 총독의 결심(4,5)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이 일을 적대자들의 손아귀로부터 바울을 보호하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예전처럼 그들의 음모를 발각되게 하지 않으셨지만, 총독의 마음을 움직여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지 않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음모를 무산시키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한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총독은 만일 그들이 가아사랴로 와서 바울을 고소할 경우, 그들의 고소 내용을 듣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베스도는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이 사람을 송사하라. 또한 증인들도 함께 가서 그들의 증거를 제시하도록 하라'고 말한다(5절). 베스도는 바울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기까지는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만일 바울에게 유죄사실이 있다면, 그들은 그의 유죄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3. 바울에 대한 베스도의 재판(6-8)

베스도는 열흘동안 예루살렘에 체류한 후에 가아사랴로 내려갔다(6절). 대제사장들이 기소에 너무 열을 올렸으므로 베스도는 이 사건에 우선권을 두어 이튿날 그 재판을 신속히 처리하려 하였다.

(1) 개정되자 죄수인 바울이 법정에 출두하였다. 베스도는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였다(6절).

(2) 기소자들이 죄수에 대하여 고소한 기소 내용(7절) : 본문에 '유대인들이 둘러서서'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숫자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둘러선 것은 가능한한 판관을 놀라게 하여 그들의 사악한 음모를 관철시키기 위함이었으며, 적어도 죄수인 바울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기는커녕 아주 정당하고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둘러서서 여러가지로 중대한 죄목을 들어 고발하였다. 그들은 꾀와 악의를 총동원하여 모함할 수 있는한 바울이 불순하고 가증한 자라고 법정에 고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진술한 내용을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모두 거짓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온갖 거짓된 중상모략을 당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못된다. 그들은 심지어 재판자리에서까지 중상모략을 한다.

(3) 바울의 자기 변론(8절) : 그는 자신의 무죄를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즉 그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율법을 세웠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려는 것은 전혀 율법에 어긋난 것이 아니다. 성전을 모독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가이사에 대해서나 그의 정부에 대해서도 거역하지 않았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때, 유대인들은 그를 고소하면서 그가 현재의 고위권력층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는 몇몇 실례를 증거로 제시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이러한 고소는 바울로 하여금 그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도록 만들었다.

4.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한 바울(9-11)

그의 호소로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바울에게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행 23:11).

(1) 베스도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도록 제의함(9절) :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베스도는 죄수인 바울보다는 오히려 기소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베스도는 바울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에게 넘겨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고 물었을 뿐이다(9절). 총독은 바울에게 그곳으로 가도록 명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의 동의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2) 베스도의 제의에 대한 바울의 거절과 그 이유

첫째,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그가 가이사랴에 위치한 로마인들만을 다루는 법정에서 재판받는 것이 가장 합법적이었다. 내가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10절). 법정은 가이사의 명의와 그의 권위 및 위임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대리 직무자 앞에 서는 것을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 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바울의 진술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시민권에 대한 사법적 조치로부터 면제 받을수 없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즉 그 사역자들이 견책을 당할수 밖에 없는 죄를 범한 현행범일 경우에 그들은 마땅히 재판을 받아야하며, 비록 그들이 결백하다 할지라도 법정의 심문에 순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유대 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던 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라고 말했다(10절). 무죄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셋째, 바울은 기꺼이 율법의 규례를 준수하였으며 율법에 저촉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11절). 만일 그가 사형당할만한 어떤 중죄를 범했다면, 그는 결코 재판을 회피하지도, 법정 투쟁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라(11절). 만일 재판에 회부된 피고가 무죄하다면, 그는 바울처럼 이렇게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11절). 아니 "내게 혐의가 없는한 나를 총독 자신에게도 넘길 수는 없나이다. 왜냐하면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만큼 무죄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총독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보호를 주장하였다.

(3) 바울이 법정에 호소함 :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계속적인 위협을 받았으며, 그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음모 또한 잇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공정한 판결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11절).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길바에는 차라리 네로 황제에게 넘겨주시오." 아브라함의 한자손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피하기 위해 네로에게 호소할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예루살렘보다는 로마가 오히려 안전한 장소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베스도의 최종 판결(12)

바울의 적들이 그의 죽음으로 이 사건이 마무리 되기를 원했던 반면에 바울의 친구들은 바울의 석방으로 사건이 종결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건이 미결로 남게 되자, 그들 양쪽 모두는 실망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때로 서서히 진행된다는 하나의 실례이다. 우리는 종종 성급함때문에 우리의 소망과 두려움으로 인한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 재판장은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그 배석자들은 유대인의 회의단이 아닌 베스도 자신의 상임고문단이었다. 베스도는 바울을 로마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최고의 법정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베스도는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고 말하였다(12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때 율법에 의거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자들은 그들이 호소한 율법에 의하여 정죄받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으로써 복음에 호소하는 자들은 그들이 호소한 복음에 의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 아그립바의 베스도 방문 25:13-27

(1) 여기서 우리는아그립바왕 앞에서 바울의 사건에 대한 또다른 청문회가 개최되었음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단지 아그립바의 호기심을 만족시킨다(13절).

1) 방문객들

첫째, 아그립바왕이 있었다. 그는 사도 야고보를 처형시킨 헤롯(별칭은 아그립바-역주)의 아들로 충을 먹고 죽은 자였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당시에 통치했던 헤롯 대왕의 증손자였다.

둘째, 버니게가 아그립바 왕과 동행하였다. 그녀는 아그립바의 여동생으로 그의 삼촌 헤롯의 미망인이었다. 남편이 죽은후에 그녀는 자기 오빠인 아그립바와 함께 살았다. 후에 그녀는 길리기아의 왕 플레몬과 재혼하였으나 곧 그와 이혼하고 오빠인 아그립바왕에게로 돌아왔다.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그후 그녀와 티투스 베스파시안 황제사이에 있었던 불륜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는 그의 또다른 여동생이었다. 당시 상류 계층의 사람들은 이처럼 음란한 무리들이었다!

2) 이 방문의 의도 : 그들은 베스도의 총독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 베스도에게 인사차 들렀다. 그들이 베스도를 방문한 목적은 오직 그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한껏 기분을 내고, 그의 궁전에서 벌어지는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리라.

(2) 베스도는 아그립바왕에게 바울과 그의 사건에 관해 설명하였다.

1) 아그립바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 : 아그립바가 베스도의 설명을 쾌히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재판관으로서 충분히 파악해야할 율법과 관습의 문제가 이 사건속에 있었기 때문이며, 유대인인 그가 알아야할 종교적인 문제들이 또한 이 사건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아그립바의 자문을 얻기 위한 목적 : 베스도는 신임 재판관으로서 오랫동안 경륜과 연륜을 쌓은 자들의 자문을 쾌히 받아들였다. 그가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에 관한 문제를 보고한 내용은 14-21절에 수록되어 있다.

첫째, 베스도가 이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했을때, 바울은 죄수의 상태로 수감되어 있었다. 벨릭스가 한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14절). 그러므로 설사 바울을 구류시킨 것에 어떤 잘못이 있었다 해도, 베스도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둘째, 유대의 산헤드린은 바울에 대한 극도의 악감을 품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은 위험 인물이므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하더이다"

셋째, 베스도는 죄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로마의 법을 주장했으며, 죄수의 증언을 듣지않고는 구형하지 않으려 했다(14절). 무릇 피고가 원고들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사람의 법이 아니라(16절).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상대방의 진술을 듣는 것이 하나의 통례였다. 상대방이 말하는 자기 변호의 진술을 끝까지 듣기전에는 그들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거나 그들의 말과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될 일이다.

넷째, 베스도는 법정의 의무에 준하여 바울을 재판하였다(17절). 베스도는 그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였다. 그는 그들이 그와 함께 여기 왔을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바울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는 가장 엄숙한 의식에 따라 바울을 재판하였으며 또한 바울에 대한 소송 사건을 최종적으로 종결시킬 목적으로 대법정을 소집하였다.

다섯째, 베스도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에 대해 실망하였다.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였던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18절). 총독이 바뀔때마다 기소자들이 이 사건을 의뢰하였으므로 그는 바울이 그들의 사유 재산이나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굉장한 위험 인물로써 고소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핵의 외침이 지나치게 크고 격렬하였으므로 그 때문에 주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악한 무리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악한 자들로 몰아세우기 위하여 그들은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 구세주에 대한 그들의 소요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울을 고소한 그들이 로마 법정에서 인정할만한 어떤 증거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마치 갈리오가 기대했듯이(행 18:14), 총독이 정당한 판결을 내릴수 있는 증거를 그들이 제시하도록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바울이 범한 죄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바울의 주장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적 신앙에 대한 문제만을 제기했다. 이 점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는 유대인의 종교를 미신적 신앙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그들의 법에 따라 보호했을 뿐 그들의 미신을 보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커다란 문제가 된 것은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였던것 같다(19절). 이 로마인이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문제, 그리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쟁점으로 대두된 다음의 몇가지 문제들에 관해 얼마나 하찮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 문제들은 그리스도가 약속된 메시야인가 아닌가에 관한 문제와 그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증 및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의 부활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예수가 살아계시다라는 바울의 확언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만일 그의 확언이 진실되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헛수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 베스도는 이러한 사건을 가장 잘 다룰수 있는 유대인의 법정에 이 소송을 이송할 것을 바울에게 제안하였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했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20절).

일곱째, 바울은 자신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보다는 로마에 이송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고 말했다(21절).

(3) 베스도는 아그립바앞에 바울을 데려왔다.

1) 그 왕은 바울과 대면하기를 원했다.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22절). 아그립바는 바울에 대하여 이미 들은바가 있었으므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베스도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듣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아그립바의 기대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설교를 듣기위해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결코 없었으며, 이 점은 헤롯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예수와 바울을 그들 앞에 출두시켰다.

2) 베스도는 아그립바왕의 바울과의 대면 신청을 승락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일 들으시리이다'라고 말했다(22절). 우리는 여기서 체포되어 생매장된 것 같았고, 또한 선을 행할 모든 기회를 빼앗긴 것 같았던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이로써 바울은 수많은 상류 계층의 회중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벨릭스는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바울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나 아그립바와 베스도는 공개적으로 그의 설교를 듣기로 합의를 보았다.

3) 심문을 하기 위한 엄청난 준비(23절) : 이튿날 공청회의 장소에는 대단한 위풍이 서렸다.

①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이번 기회로 자신들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들은 크게 위의를 베풀었다(23절). 그들은 말 그대로 매우 황홀한 옷차림으로 나왔다. 엄청난 화려함은 엄청난 장식을 뜻한다. 이 엄청난 장식은 그 대신에 실질적인 탁월함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하며, 진정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그것은 단지 허영심만을 유발하게 한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전시에 불과하며, 꿈과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갖춘 외모의 화려함에서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들의 화려함 이면에는 음탕한 그들의 성격이 숨어있고 그 외관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들의 더러움을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아는 모든 덕망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장식을 꾸민 그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그들의 화려한 모습이 법정에 선 초라한 죄수 바울의 진정한 영광의 광채로 무색해졌다는 사실이다. 선한 일을 위한 그의 매임은 그들의 금사슬보다 더욱 영광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간악한 사람은 세상적인 위의로 자신을 감춘 반면, 선한 사람은 오히려 초라한 모습을 지닌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누가 세상적인 위의를 좋아하겠는가?

②천부장들과 그 도시의 고위계층 사람들은 이 기회에 참석하여 베스도와 그의 내빈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아마도 죄수로서 법정에 출두할 바울이 이 회견에 대해 염려한 것보다, 위의를 갖추고 법정에 참석한 자들이 자신들의 옷에 대한 걱정때문에 더욱 당혹해 했을 것이다.

(4) 베스도는 이 사건의 전모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는 군중들에게 정중히 경의를 표하고 연설하였다. 그는 '아그립바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라는 말로 서두를 꺼냈다. 그는 고의적으로 버니게를 무시하는 말투로 '모든 신사 여러분'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남자들로부터 여자들을 따돌리는 것을 의미할때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버니게가 이런 모임에 뭣하러 참석했느냐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는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대단히 원한을 사고있는 죄수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예루살렘과 이곳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그는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24절). 베스도는 바울의 무죄를 천명하였다.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25절). 그 사건의 전모를 듣고나서 재판관인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볼때, 그는 바울에게 죄가 없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스도가 바울을 석방해야할 것을 알면서도 왜 그를 석방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울을 증오했으므로 만일 그가 바울을 석방하였다면, 그 원성이 자신에게로 돌아올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양심을 가진 인간이 양심에 따라 행동할 용기가 없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베스도는 이 사건의 현재상황, 즉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한 사실과 그 호소를 베스도 자신이 허락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를 보내기로 작정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25절). 이로써 이 사건의 소송은 본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베스도는 그 사건이 조용하고 공평하게 심문되도록 그들의 협조를 요망했다. 다시말해서 그는 이 자리를 빌어 그가 황제에게 보고할만한 자료를 얻을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26,27절). 베스도는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줄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7절). 왜냐하면 그 죄목이 제시되어야 황제가 신속한 판결을 내릴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죄목을 발견할 것이 없었다. 즉 바울을 송사하는 제보들이 너무나 혼잡했으며 그것들 중에서 베스도가 죄목으로 적용시킬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베스도는 바울을 공개적으로 심문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죄목에 적용할 제보를 얻을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던 것이다.

 

# 해설

후임 총독 베스도 앞에 선 바울 ( 25 )

벨릭스의 뒤를 이은 베스도는 도임한지 삼일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에 대한 고소의 내용을 듣고 가이사랴로 내려와 바울을 재판자리에 세웁니다. 이때 바울은 베스도에게 가이사의 재판자리에 세워줄 것을 요청합니다. 얼마가 지나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그때 베스도는 바울의 일을 의논하므로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 서게 됩니다.

 

1. 베스도의 재판

1)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고소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함을 알면서도 감옥에 가둬두었으나 종국에는 그 지위를 잃어버리고, 그 뒤를 이어 유대 총독으로 베스도가 부임을 했습니다. 가이사랴로 부임한 베스도는 삼일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높은 자들이 그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이때를 바울을 살해할 호기로 생각한 듯합니다. 이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재판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때를 기회로 매복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들에게 가이사랴로 내려와 자신의 법정에서 바울에 대한 고소 내용을 진술하라고 명했습니다.

a.재판관의 공의(신16:18)

b.악한 행실(약3:16)

2) 베스도의 재판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장로들이 총독의 명령대로 했을때, 바울은 그들이 고소한 죄목 하나하나에 대해 2년전 벨릭스 앞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직접적인 반론으로 대응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죄함을 힘있게 변명했습니다. 그러자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의 주재하에 열리는 심문에 응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산헤드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시 죽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이 재판을 유대 통치자의 하급 법정에서 로마의 최고 법정으로 옮길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 권리를 사용해서 가이사에게 호소했던 것입니다.

a.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함(막15:15)

b.가이사에게 호소함(행26:32)

3) 가이사에게 호소

바울은 베스도가 이런 종류의 종교적인 고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있음을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의 위험을 생각하여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했습니다. 한때 이 권리는 로마의 주권을 가진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형태를 띠었었으나 나중에는 시민들의 주권이 황제에게 위임되었습니다. 황제는 직접 그 사건을 심리하거나 국가의 고위 관리에게 그의 법적 권리를 위임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의 법정에서는 베스도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 지역적인 압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가이사에게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가 여러 속주들을 다니며 로마법의 공명정대함을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을수도 있다는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가이사앞에 선다면 제국 권력의 심장부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스도는 이제 이 문제를 가이사에게로 가져갈수 있었기에 조금은 안심을 할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로마로 가야했던 것입니다.

a.복음 전파(고후4:5)

b.평판을 좇는 인간(엡6:6)

 

2.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와 버니게

1) 아그립바와 베스도

베스도가 바울을 심문한 직후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그의 여동생 버니게가 베스도를 방문하여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것을 축하했습니다. 여기에 나온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의 장손입니다. 당시 그는 약 30세의 나이로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팔레스타인 북동부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배경에는 바울을 심문할 특별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종교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사건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문이 있었으나 마침 도움이 될 사람이 찾아와서 그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인사를 나눈후 베스도는 아그립바 같은 유대교 전문가야말로 이 소송을 이해할수 있을뿐 아니라 보고서를 작성할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서 바울에 관한 문제를 그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아그립바는 즉시 흥미를 느끼고 직접 바울을 만날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베스도는 기꺼이 동의했고, 심문을 공개 질의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아그립바앞의 바울(행9:15)

b.호기심(눅9:9)

2) 베스도의 개정연설

다음날 총독과 그의 손님들은 군대의 고위 장교들과 가이사랴의 지도자들이 배석한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왕 아그립바와 그의 누이 버니게는 이 사건을 자기들의 지위와 의복과 의식을 전시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누가는 아그립바와 버니게 그리고 고위 관리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회견실에 있는 비천한 죄수 바울을 대조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바울이 그들앞으로 불려왔습니다. 총독은 바울을 소개하고 그의 소송건을 요약하면서 말문을 열었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유대인들이 바울 죽이기를 주장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이미 바울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그랬던 것과 같이 베스도도 바울은 죽을 죄를 범한 일이 없음을 발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베스도에게 고민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바울을 고소할만한 확실한 내용이 없이 가이사에게 보내는 일이 베스도에게는 좋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잘 아는 아그립바 왕과 의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스도는 이번 심문을 통해서 가이사에게 보낼 자료를 수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특히 아그립바앞에 세워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a.심문(마27:2)

b.과시(사39:2)

 

결론

바울에게 죽음의 위협은 끊임이 없는 듯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에게 죄가 없음이 발견되어졌고 바울 자신도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힘있게 선포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 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소망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바울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 핵심

25:1-12

베스도가 새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재개된 재판에서도 바울을 처형할 죄목이 입증되지 못했다. 이때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고했다.

항소권(25:11,12)

당시 로마 시민권자들은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즉 로마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의 하급 재판정에서 받은 재판에 이의가 있을경우 그 판결에 굴복해 황제가 주재하는 로마 대법정에 항소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항소권은 로마 공화정이 수립된(B.C. 6세기경) 이래 계속 보장되었다고 한다.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은 미결수의 신분으로나마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권리를 사용했다.

  

# 묵상

베스도의 역할 ( 25:4, 5 )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만난 대제사장과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다시 고소하며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청하자,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곧 떠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가서 그에게 옳지 않은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고 했습니다. 베스도는 아마도 전에 모의했던 그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거나 바울을 호송하기가 번거로워서 청을 무산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베스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당신의 종인 바울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베스도의 제의와 바울의 답변 ( 25:9-12 )

베스도는 부임 초기부터 유대인들의 인심을 잃을까봐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겠느냐’는 제의를 하게 됩니다. 이 제의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목표는 로마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시민은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것을 로마행의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위의를 베푼 아그립바와 버니게 ( 25:23 )

여기서 위의는 화려한 행렬이나 과시를 뜻하는 말로, 그들은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해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당당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의상속에는 음탕하고 추한 그들의 본성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옷은 바울의 용기와 진실에 비하면 배설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 25:26-26:3 )

베스도는 황제에게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후 상소할 재료를 얻고자해서 바울을 아그립바왕 앞에 세웠습니다. 베스도는 이미 바울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로마 황제의 신하로서 공공 질서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보고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을 잘 아는 아그립바 앞에서 한번더 심문함으로써 상소할 재료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그립바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풍속과 규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문제에 관해 대치하고 있는 유대인과 바울의 싸움을 잘 판단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증거할 기회를 얻은 것이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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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더둘로의 송사 24:1-9

우리는 천부장 루시아가 대제사장들에게 바울을 따라 가이사랴로 갈 것과 거기에서 그들의 고소를 들어줄 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에 대한 고소의 진행 경위를 대하게 된다. 재판은 지체없이 곧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고소인들이 5일만에 재판에 필요한 준비를 끝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문에서(11절)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간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또한 성전에서 결례하는데 칠일을 소비하였다고 말하였다. 바울의 재판자였던 자들이 본문에서는 바울의 기소자로 나타난다. 즉 대제사장인 아나니아 자신이 바울을 기소하려고 일어서고 있다. 이와 같이 아나니아가 자신을 욕되게 하고 그의 지위의 신성함을 망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직접 자기 자신을 밝히며 바울을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자신이 바울에 대해 서원한 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아나니아를 지지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와 함께 가이사랴로 왔다. 이렇게 약한 자들도 악을 도모하는데에 수고하며 지칠줄 모르는데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데에 무관심하고, 냉담해서 되겠는가.

(2)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송사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기소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더둘로라고 불리는 어떤 변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로마인이므로 로마 총독앞에서 송사하는데에는 적임자였다. 그는 총독으로부터 최상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악의로 가득차 있었지만 날카로운 어투로 조리있게 말할 수 없었다. 바울은 법정에서 총독 벨릭스 앞에 앉았다. 그는 소환되어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2절). 더둘로의 임무는 기소자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반박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의 변론은 아첨과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1) 여기에서는 가장 악한 인간 중의 하나가 단지 그가 재판관이라는 사실때문에 가장 훌륭한 후원자로 치하되고 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뿐만 아니라 로마 역사가들은 베릭스를 매우 사악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벨릭스는 온갖 죄악을 자행하였으며, 매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폭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더둘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이름으로 벨릭스를 찬양하고, 마치 그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가장 훌륭한 행정 장관인 것처럼 그를 추켜세웠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벨릭스를 이용한 것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적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벨릭스가 역대 총독들 중 그들의 교회와 민족을 위해 공헌한 가장 훌륭한 총독이었다고 아부했다.

①그들은 벨릭스에 대한 이러한 찬사를 주저없이 인정하고자 한다(2절). 천부장이 앞에서 말했듯이, 벨릭스도 한때는 애굽인의 폭동을 진압함으로써 유대인에게 공헌한 적이 있기는 했다(행 21:38). 그러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결점이 결코 정확히 지적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로인해 그들은 무감각해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자행하게 된다. 그들은 아첨하는 관리들과 같은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그릇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점점더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이다.

②그들은 벨릭스의 은덕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겠다고 약속한다(3절). 그들은 더둘로를 통해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당신의 은덕에 감사무지 하옵나이다'(3절)라고 말한다. 그가 진실로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총독이었다면 당연히 그들은 이같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선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가 정부로부터 은덕을 입은 경우, 특히 현명하고 선량한 통치자의 행정에 의하여 은덕을 입었을 경우에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에게 감사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③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송사에 대한 벨릭스의 호의를 기대하고 있다(4절). 그들은 벨릭스의 시간을 뺏지 않으려고 대단히 조심하는체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쭈옵나니 관용하려 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다(4절).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의식적으로 적의를 가진 것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교묘히 벨릭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벨릭스를 미워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없애려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에게 온갖 아첨을 다하였다.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칭찬에 의해 자신이 그들로부터 항상 호의를 받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아첨과 진실한 충성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 가장 선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는 가장 나쁜 악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더둘로는 갖은 미사여구로 아첨을 한후, 그의 용무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그의 지나친 아첨으로 치를 떨었지만, 이번의 그의 발언에서 보이는 지나친 야유는 우리로 하여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기지가 넘치고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말을 팔아먹고 산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로 하여금 이러한 말을 내뱉게 한 위엄있는 사람들인 대제사장의 무리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본문에서 더둘로는 다음의 두가지 점을 벨릭스에게 고소한다.

①바울이 그 나라의 평화를 교란시켰다고 고소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짐승과 같은 나쁜 사람들로 누명을 씌우지 않고서는 그들을 괴롭힐 수 없었다. 순수함이라든가 탁월함, 혹은 유익함은 비방에 대한 방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통치자들과 군중들은 곧잘 비방하는 말에 현혹되어 미쳐 날뛰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비록 부당한 사실일지라도 엄숙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정당한 것처럼 주장하면, 본문에서처럼 그것은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기양양하게 "우리는 그가 위험 인물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말이 진심인양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은 마치 바울이 반역자이고 이미 그의 반역이 확정된 것처럼 말했다. 바울은 유익한 사람으로 그 나라에 커다란 축복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법정에서 염병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5절). 즉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당시의 전염병보다 더 큰 해로움을 자기들에게 준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바울이 끼친 해로움이 널리퍼져 남까지 감염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그를 염병처럼 두려워하고 경계해야할 인물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또한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그를 온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로서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를 증오하였다. 벨릭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이 그들을 소요케 선동하는 자라고 믿도록 벨릭스를 속이려 하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모든 곳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그리고는 모든 책임을 부당하게 바울에게 씌웠다. 그러나 바울은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 의해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고소당했다. 이제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활동적이며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나타냈다.

그러나 첫째, 바울이 전한 종교가 이단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바리새인 종파와 같은 종류의 종파로 편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된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되게 한다. 만약 기독교가 인간들의 마음에 정당한 영향력을 행사할때 그것은 인간들을 평화롭게 서로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무질서의 씨를 심고 분열을 야기하는 교파와는 거리가 멀다. 참된 기독교는 세상적인 이익이나 편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전혀 교파로 불리울 수 없는 것이다. 교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귀중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들을 드러낸다.

둘째, 그들은 바울의 종교를 부당하게 나사렛 이단으로 불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나사렛 출신, 즉 선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던 나사렛 출신이라고 야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예언된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셋째, 바울을 이 종파의 창시자요 주동자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전을 숭배하였으며, 최근에도 경건하게 성전에서 봉헌을 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그들은 바울을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고 고소하였다(6절).

②그들은 바울에 대한 정당한 재판 진행이 천부장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고 고소했다. 그들은 '바울을 데려가 그들의 율법에 의하여 재판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바울을 율법에 따라 재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때려죽이거나 찢어 죽이려고 하였고, 숨어서 기다리는 악당들의 손에 그를 넘겨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은 천부장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그것은 그들이 '천부장 루시아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손으로부터 바울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7절). 박해자들이 실망에 봉착해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데 대하여 감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잔인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하려는 계획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천부장을 오히려 그들의 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문제를 벨릭스에게 알리고, 천부장이 자신들로 하여금 벨릭스에게 고소하도록 강요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천부장이 그의 피고인을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매 당신이 고소의 내용을 듣게끔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신에게 바울을 심문하도록 하였고, 당신이 그를 제거하는 수고를 하도록 하였습니다"(8절)라고 말하였다.

(3) 더둘로가 제기한 고소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승인하고 있다. 유대인들도 이제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9절).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이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고소의 정당성을 맹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말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가 말한 사실을 동조하였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말주변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말로써 신앙을 공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행악의 책임을 자신들이 떠맡는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변호할만큼 충분한 지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위해 표를 던지기에 충분한 사악함은 지니고 있다.

 

Ⅱ. 벨릭스 앞에서 변명하는 바울 24:10-21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왕과 통치자들 앞에 설때, 그들에게 말할바를 알려 주겠노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더둘로가 바울을 분노하게 하는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바울은 그의 말을 막지 않았고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둘로가 말을 마쳤을때에도 재판장이 자기에게 말할 것을 허락할때까지 기다렸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10절). 바울은 더둘로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더둘로를 고용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변론을 전개했다.

(1) 바울은 총독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바울의 증언에는 더둘로가 총독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한 것과 같은 아첨의 말이 전혀 없었다. 바울은 총독을 공정한 재판관으로 대우하면서 그의 면전에서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결백에 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떨면서 서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편파적이지 않으며 자신과 무관한 재판관에게 재판받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재판관을 보고 '당신이 여러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라고 말했다(10절). 이 말은 매우 진실한 것이었다. 총독 자신은 이전에 바울에 대한 어떠한 기소도 제기된 일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지금까지 결코 총독앞에 끌려간 적이 없었다. 따라서 바울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위험스러운 죄인은 아니었다. 총독은 그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을 배격하는 맹렬한 열성가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총독은 바울의 재판에 이 사실을 참작하였다. 비록 그는 바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았지만, 그를 기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바울이 어떤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은 하고 있었다.

(2) 바울은 자기에 대해 고소했던 내용의 근거를 부인했다. 소요를 선동하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 바울이 기소된 죄목이었고, 기소자들은 이러한 죄목이 로마 총독이 심문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설사 총독이 그 죄목에 대하여 심문하지 않더라도 그 죄목으로 불공평하게 기소된 자신을 총독이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제 바울은 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1) 바울은 평화와 경건함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과 계속 친교를 나누려고 그곳에 간 것이지 그들을 모욕하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2)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 있은지는 단지 열이틀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중 6일은 그는 죄수로 있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짧은 시간에 그들이 고소한 그러한 잘못을 그가 저지를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3)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매우 조용하고 평화롭게 행동하였다고 말한다. 만일 바울이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서 소요를 일으킨 주모자라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파당을 지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있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이 낭독되고 강연되는 회당에 있었다. 바울은 그 성에 거주하는 자기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유대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힌다는 어떤 증거를 제시하여 바울을 고소할 수 없었다.

①바울은 소요의 주동자들이 지닌 투쟁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바울이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을 결코 본적이 없었다. 바울은 어느 누가 자기의 소망의 근거를 요청한다면 자기의 소망의 근거를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종교에 대하여 결코 어느 누구와도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②바울은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결코 내가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킨 것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랑과 온유함을 지니고 행동했고 또한 로마 당국에 복종하였다. 바울은 육적인 것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무기로 삼고자 생각하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한적도 없었다.

4) 그들이 바울을 기소한 다른 내용, 즉 그가 다른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켰다는 내용에 대해 그 자신은 전적으로 무죄라는 것과 그들이 그 기소를 자신들에게 이롭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13절). 그러므로 그는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라고 말하였다(13절). 바울은 자기의 무죄를 계속해서 주장한다. 바울은 결코 공공의 평화의 적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재난, 즉 그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떠한 반대 증언도 할 수 없는 일들로 기소되었음을 개탄하였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이같은 해를 당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또한 그들이 전혀 행한 적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일로 그들이 비난받게 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다. 바울은 자기의 박해자들의 불법행위, 즉 그들이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부당성을 제시한다. 또한 그들의 허위 기소는 바울의 명예와 자유와 생명을 훼손하였을뿐만 아니라 재판관을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쓸데없는 일로 재판을 열게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총독에게 재판의 공정성을 호소하고 있다. 재판은 반드시 진술뿐만 아니라 증거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3)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공정하고도 정직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고 있다.

1) 바울은 자신이 그들이 이단으로 간주하는 자임을 인정한다. 천부장이 그랬듯이 총독은 바울의 기소자들이 충분한 증거도 없이 그에 대하여 이상할 정도로 격노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동으로 볼때, 무언가 바울에게 죄가 있고 또 바울이 아주 나쁜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고 추측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의 기소 이유를 해명한다. 그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도를 쫓아 나는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14절). 하나님을 숭배하는 올바른 길이 이단이라고 불리운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명을 쓴다고해서 어떤 옳은 길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2)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한다. 그들은 바울을 이단이라고 부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

①바울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 그는 옳았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그들에게 계약을 맺도록 이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바울은 그 계약을 고수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다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모든 조상들이 숭배했던 하나님을 나는 숭배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오랜 전통을 찬양했고, 그 신앙의 고백자들이 끊임없이 계승되는데 대하여 긍지를 느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그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

②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니'라고 말했다(14절). 그러므로 그의 예배하는 방법 또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성경을 완전히 받아들이되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바울은 어떤 다른 믿음의 방법이나 실행에 기초를 두지 않고, 단지 성경에만 의존하였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그 계시에 따라 살다가 죽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③바울은 미래의 세계를 그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의 예배의 목표 또한 올바른 것이다. 이단을 추종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지만, 바울은 천국을 그의 신앙의 목표로 삼았고, 거기에서 더이상 치우침이 없었다(15절).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다. 나의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이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권능에 의지하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말한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사람들의 죽은 몸은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생명이 끝날때 또다른 생명을 얻게될뿐 아니라 또 다른 세계까지도 향유할 것이다. 그때에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게 될 것이다. 거룩한 자나 거룩하지 못한 자가 다같이 부활할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악을 행한 자에게는 저주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때의 부활을 의미한다. 의로운 자는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부활하게 될 것이고, 불의한 자는 그들의 심판관으로 서시는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주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졌으며, 하나님 안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은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죽은 자의 부활은 그것이 유대 교회의 기본적인 조항이 된다. 그들 역시 부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에 의해서 더욱 명확하게 계시되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그때에 받을 보상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안된다.

④바울은 헌신적인 교제로 일관했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6절). 바울의 이같은 주장은 전에 그가 대제사장 앞에서 행했던 것과 똑같은 취지의 내용이었다(행 23:1). 그는 그때에도 '나는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말했다(행 23:1).

㉠바울의 목적과 소망 : 그것은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죄를 범하지 않는 양심 : 즉 나에게 악을 가르쳐 주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지 나를 그릇 인도하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자 애써왔다는 뜻이다.

둘째,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양심 : 이 말은 내가 결백한 양심을 지닐 것을 소망한다는 의미이다. 즉 "나는 내가 늘 사귀는 친구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애쓴 것처럼 나도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주의했다"라는 뜻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바울의 신중함과 노력 : 나는 힘쓰노라. 즉 나는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을 내 평생의 과제로 삼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고행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또한 그는 "나는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울의 애씀의 정도 : 그는 항상 힘썼다.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16절). 바울은 자신이 아직 완전함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사실과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의지의 박약에서 비롯되는 죄들의 염치 불구한 건방진 죄를 오염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양심을 침범할지라도 양심에 머무르지는 못하도록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는 모든 일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썼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썼다. 바울의 양심적인 배려는 그의 의무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바울은 하나님과 자기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이러한 애씀의 동기 : 이것으로 인하여.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죽은 자의 부활과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생명을 믿기때문에' 이와 같이 힘쓰노라.

(4)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후, 자신의 처지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솔직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유죄를 증명할 증거를 제시하라고 그들에게 도전하였다.

1) 성전 안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하여 : 그들은 여기서 바울을 자기들의 나라와 성전에 대한 적으로 맹렬히 몰아세웠다(행 21:28).

①바울을 그들의 민족에 대한 적으로 기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민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즉 예루살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어떠한 악의도 품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선한 일들을 행하고자 했을뿐이었다.

②성전을 모독한 죄였다는 이유로 바울을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바울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행 21:24).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율법에 따라(18절)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조용히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적들인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그가 대중을 선동하여 소동을 야기시켰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을 위해 전혀 군중을 선동하지도,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기소 내용을 증명하라고 반박한다(19절). 그래서 그는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앞에 와서 송사할 것이요'라고 반문하고 있다.

2) 법정에서의 그의 태도에 대하여 : 바울은 여기서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앞에 섰을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라고 반문하고 있다(20절). 그는 또 그가 공회에 섰을때 말했던 것은 오직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앞에 심문을 받는다'(21절)는 말 한마디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두개인들외에는 어느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스로 이단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유대 교회가 신앙하는 것을 나 역시 따랐기 때문이다."

 

Ⅲ. 가이사랴의 감옥에 갇힌 바울 24:22-27

(1) 벨릭스는 이 소송을 연기했다(22절). 벨릭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유대인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기소자들의 기소를 연기하였다.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의 일을 처결하리라(22절). 즉 "나는 그를 통하여 진실을 알아보아야겠다. 과연 바울이 소란을 일으킨데 대한 벌을 받아야할 것인지, 아니면 너희가 소란을 일으키고 바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인지 내가 그의 말을 들어보고 너희 사이를 판단하리라."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이 정죄되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재판권이 넘어오지도 않은 점에 대해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의 분노를 백성들과 친숙한 자들을 통하지 않고 그들에게 전혀 낯선 사람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제지시킨다. 벨릭스가 바울을 석방시키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벨릭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인간을 존중할 줄도 모르는 재판관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에게서 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 벨릭스는 죄수 바울을 수감하여 억류하였다.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과 같은 활동적인 인물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점을 참작하여 바울이 친구들과 만나는 것과 그들이 바울을 위해 수종드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바울을 계속해서 죄수로 가두어 지키라고 명령하였지만(23절) 그를 자유로운 죄인으로 취급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을 지키는 자는 그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그의 구류 생활이 가능한한 편하도록 조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에게 생활의 자유가 허용된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벨릭스는 그에게 얼마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바울의 친구들 중 아무나 바울에게 오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감옥에서도 친구들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다면, 인간의 감옥도 집과 마찬가지로 편안할 것이다.

(3) 공개 재판후, 벨릭스는 종종 바울과 사담을 나누었다(24,25절).

1)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낸 목적 : 벨릭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관하여 바울과 다소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있었다. 즉 벨릭스는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에 관하여 자신이 공개법정에서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자유롭게 바울과 이야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헤롯 아그립바의 딸로서 유대인이었던 그의 아내 드루실라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유대의 종교적 풍토속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에 관하여 더욱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종교에 속해있건 그것은 그녀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종교가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그 종교에 저촉되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대 여인이면서도 간음을 행하였으며, 무례한 여자로 유명했다. 종교에 대한 새로운 견해나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일수록 종교의 권능과 영향력에 순종하기를 꺼려했다.

2) 바울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벨릭스에게 설명해준 내용 : 벨릭스는 신비로 가득한 신성문제를 논함으로써 즐거움을 얻고자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신의 모습을 대함으로서 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강론을 요청 받았을때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강론하였다. 즉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에 대하여 분명하면서도 부드럽게 강론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사람들에게 의와 절제에 대한 위대한 법을 지키도록 촉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의와 절제는 이교도 도덕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덕목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한 가르침이 의와 절제의 의무에서 벨릭스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그 가르침을 포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는 의와 절제의 의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신성한 법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의와 절제를 강조한 것은 벨릭스에게 그의 불의와 무절제를 확신시키려 한 것이다. 벨릭스는 자기의 죄의 추악함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진노를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일 결심으로 그리스도 신앙에 관해서 물어보았어야 옳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 도래할 심판에 대해 알고 있다. 벨릭스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들의 것인양 활보하고 싶지만, 곧 하나님의 날이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강론의 요점에 관한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바울은 설교중에 듣는 사람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염두에 두었다.

②바울은 설교중에 인간의 양심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볼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③바울은 자신의 안전보다는 영혼들의 구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우선적으로 내세웠다.

④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다가 직면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였고, 선을 행할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조차도 놓치지 않았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아주 뻔뻔스러운 죄인들이었으므로 바울의 설교에 의해서 회개한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 대해 단념하지 않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파수꾼이 그들이 지키는 영혼의 구원에 실패했더라도, 마땅히 그 영혼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만이라도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3) 바울의 설교가 지위는 높지만 사악한 벨릭스에게 끼친 영향 : 벨릭스가 두려워하여(25절). 벨릭스는 깜짝 놀랐다. 바울은 벨릭스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벨릭스는 바울앞에서 두려워하였다. 드루실라도 역시 똑같은 죄인이었지만, 본문에는 그녀도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①하나님 말씀의 권능 :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구석구석을 들추어 내고 깜짝 놀라게 하며, 가장 거만하고 대담한 죄인의 마음까지도 공포로 떨게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②자연적인 양심의 작용 : 양심이 자극을 받아 각성될때, 그 양심은 영혼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도래하는 심판을 예상케하는 것은 가장 완강한 마음이라도 떨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4) 바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벨릭스 : 벨릭스는 바울을 기소한 자들에 대해 재판을 연기하였듯이, 바울의 말을 나중에 듣기로 결정하고 미루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절). 그는 두려워 벌벌 떨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지만, 그것에 의해 효과적으로 변화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죄의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죄와 동맹하여 죄를 사랑하기를 계속한다. 벨릭스는 바울의 확신에 대적하여 싸우지 않았다. 벨릭스는 바울의 경고를 다른때로 연기함으로써 그의 확신에 찬 말을 고의적으로 회피하였다. 그는 빚을 못갚은 채무자처럼 다른 날로 연기해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 바울 자신도 말을 하느라 힘이 빠져있었고, 또 그의 말이 벨릭스와 그의 아내를 피곤케 했으므로 벨릭스는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그들이 확실히 만족해할 모든 유익을 잃고 만다. 벨릭스 역시 그때의 바울의 설득에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써 그가 얻게될 모든 유익과 함께 그 자신마저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연기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흔히 우리는 그 문제를 좀더 적당한 때에 생각하자고 미루게 된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식어져서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벨릭스는 이 문제를 좀더 적당한 때로 연기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그때보다 더좋은 기회가 온것을 보지 못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적절한 때인 것이다.

(4) 벨릭스는 바울을 죄수로 억류한채 이년후 자기가 총독직에서 파직될 때까지 구류하여 두었다(26,27절). 벨릭스는 바울이 죽임을 당하거나 결박당할 아무런 죄가 없음을 자신의 양심으로 확신하면서도 그를 석방할만한 용기를 지니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본문에서 벨릭스가 무슨 목적으로 바울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는가를 간파하게 된다.

①그는 바울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였다.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은 것은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의 자유를 사기위하여 마침내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벨릭스는 재판으로 돈을 벌수 없다면 재판관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행할 마음이 없었다.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26절). 벨릭스는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바울을 죄수로 구금하였으며, 또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였다. 벨릭스는 바울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바울에게 자주 사람을 보내었으며 바울이 그것을 기회로 자신의 석방을 위해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가 물어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벨릭스가 전에 다른 적절한 때에 좀더 듣겠노라고 바울과 자신에게 약속했던 말을 상기한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울에 의해 돈을 버는 것이었을 뿐이다. 벨릭스는 바울이 가난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의 안전을 바라는 사람중에 돈으로 그를 도울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울이 자신의 석방을 위해 벨릭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친구들이 그를 석방하기 위해 돈을 쓰려하지 않은 것이 합당한 처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해서 부정한 일을 위해 사람을 매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의당해 주어야할 공의로운 일인데도 돈을 받지않고는 해주지 않으려 한다면, 내가 그에게 돈을 주어서 그 일을 이루려 한다고해서 잘못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마땅히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바울이 지금 갇혀있는 가이사랴의 기독교인들은 그가 감옥으로 끌려가려 할때 눈물로 만류하였던 자들이었다(행 21:13). 그런 사람들이 바울의 석방을 돕기위해 자신들의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벨릭스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뇌물을 받아야 옳은 일을 하는 재판관은 의심할 여지없이 뇌물만 주면 나쁜일도 행할 사람인 것이다.

②벨릭스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다. 벨릭스는 이 일이 있은지 약 이년후에 정부로부터 소환당했다. 그대신 보르기오 베스도가 그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벨릭스는 바울을 가두어둔 채로 떠났다. 그 이유는 유대인을 기쁘게 하기위해서였다. 그는 더이상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위해 계속해서 바울을 죄수로 억류해 놓았으며, 또한 자기가 유대인들의 뜻을 반대하여 저지른 많은 잘못을 보상하려는 의도에서 그를 계속 가두어 두었다. 이와 같이 어떤 비열한 짓을 행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은폐시키기 위하여 더 나쁜 짓을 하게 된다. 그러나 벨릭스가 그러한 조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그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황제에게 고소하였다.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목표로 삼는 것을 얻을수 있지만, 악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을 기쁘게 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자들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 해설

벨릭스 총독앞에 선 바울 ( 24 )

바울은 이제 가이사랴에서 로마 병정들의 보호아래 유대인들의 폭행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간의 감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는 존경을 받고 방문객을 맞을 수 있었으며 그의 복음 전도의 소명을 감당할만큼 자유를 누리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했고 말씀의 성취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1. 유대인들의 송사

1)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고소

산헤드린은 정식으로 바울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의 고소 내용은 바울이 신성한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장로들과 함께 이 고소 내용을 보다 잘 진술하려고 변사인 더둘로를 고용하기까지 했습니다.

a.아나니아(행23:2)

b.유대인의 장로(막15:1)

2) 더둘로의 송사

더둘로는 벨릭스에 대한 아첨으로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벨릭스는 백성들을 억압하여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데만 열중하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둘로의 진술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시작했으나 그 내용은 무능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에 대한 고소의 내용은 엄격하게 말하면 유대 총독의 소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유대인을 소요케 하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며 성전을 모독했노라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소 내용은 후에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될 일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를 듣고 유대인들은 이 송사의 내용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후에 바울은 답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a.거짓말의 정의(요일2:21)

b.거짓 증인(잠25:18)

 

2. 바울의 세번째 자기 변명

1) 소요에 대한 변명

바울의 서론은 간단하고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벨릭스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만큼 유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 대한 고소 내용을 차례 차례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호에 몇 가지 요점을 두었습니다. 첫째, 그는 소요를 일으킬만큼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머무는 목적중 하나는 예배 즉, 오순절을 지키려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조차도 그가 그 도시에서 소요를 일으켰음을 예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거짓 진술을 말하고 성전에서 소요를 일으킨,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 고소자들이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서 그들의 고소가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를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소동을 일으킨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산헤드린 공회원들 사이에 불화를 조성한 것뿐이었습니다.

a.예배의 자세(요4:24)

b.하나님의 전(출25:8)

2) 바울의 신앙고백

바울은 더둘로가 '나사렛'이라고 지칭한 것을 이단이 아니라 '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 도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믿음을 조금도 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소망을 성취시켰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었고 그 글들이 복음을 명백히 증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인의 정통 신앙에서 빗나간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바울은 구약의 예언과 신앙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이전에 산헤드린 앞에서 그랬듯이 벨릭스 앞에서도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항상 양심에 거리낌없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구제와 헌금에 대한 언급은 매우 관심을 끄는데, 이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2년간 준비한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헌금을 전달하는 목적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a.믿음(롬4:18)

b.영원한 소망(골1:5)

 

3. 바울과 벨릭스

1) 소송의 연기

총독 벨릭스는 기독교 신앙과 바울이 기독교 운동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약간 알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상들을 고려해 볼때, 그가 그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았다는 것은 의외의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에 대한 한 가지 가능성은 그가 그의 아내인 드루실라로부터 이 지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일단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이 소송을 연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감금하여 두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석방을 유보시켰던 것입니다. 벨리스는 바울이 구제 헌금을 갖고 왔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뇌물을 써서 석방되기를 원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년의 기간 동안 자유를 누리며 친구들의 방문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 사건에 대한 결정을 연기하다 결국 자신은 로마로 소환을 받게 되고 바울은 그의 후계자에게 맡겨집니다.

a.구제 헌금(고후8:2)

b.뇌물을 좋아하는 자(시26:10)

2) 벨릭스와 바울의 강론

가이사랴의 감옥생활이 바울에게는 자유로웠습니다. 친구들의 방문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의 생활에 종종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두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의와 절제와 장차올 심판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바울과 이런 대화를 나눈 벨릭스는 바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뇌물을 바라고 바울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연기하다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총독직에서 파면되어 로마로 소환되어 갔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이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분쟁을 과잉 진압함으로써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a.의를 행함(고전15:34)

b.죄의 자각(행2:37)

 

결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임금들과 많은 사람들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소망마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에서 바울의 담대함의 비결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복음을 따라 살았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그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 핵심

24:1-9

유대교 지도자들이 변사 더둘로를 내세워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정식 고소하는 장면이다.

 

# 묵상

총독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 ( 24:1-9 )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어떤 장로들과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내려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염병에 걸린 자요,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법과 로마어에 능통한 로마인으로, 바울을 기소한 자들에게 삯을 받고 대신 송사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정의는 내동댕이친채 악을 선의 자리에, 선을 악의 자리에 놓으며 총독에게 아첨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바울의 이같은 죄목은 유대 경건주의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입장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에 지혜롭게 복음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바울에 대한 더둘로의 증언 ( 24:5 )

더둘로는 바울을 염병에 걸린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은 바울이 위험 인물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말들입니다. 이단의 괴수라고 한 것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좇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쫓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바울 ( 24:14-22 )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고소에 반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의연한 자세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면서, 이것이 종교적 문제일뿐 법정에 설 일이 아님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이들의 송사를 천부장 루시아가 처리하도록 연기했습니다. 벨릭스는 천부장의 편지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잘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임기동안 큰 일을 치르고 싶지 않은 안일한 태도와 뇌물에 대한 욕심때문에 판결을 연기하였던 것입니다.

벨릭스와 바울 ( 24:24-27 )

벨릭스가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를 나눈 배후에는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법은 죄수에게서 금품을 받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부패한 관리들은 기회가 있는대로 금품을 받았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으므로 바울에게 돈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17절). 그로부터 2년후 베스도가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자주 충돌하는 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유대인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등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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