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멜리데 섬에서의 여정 28:1-10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곳을 전전했으며,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알수 있다. 그는 항성이 아닌 유성과도 같이 떠돌아다녔다. 거센 바람은 사실 누구에게도 반가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거센 바람은 멜리데 섬에 유익함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 바람은 가는곳마다 축복을 전해주던 바울을 그 섬 주민들에게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다.
1. 이 섬 거류민들의 친절한 영접(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2절).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의 일행들을 계속 돌보시고 계셨다. 우리가 인간의 손에 의해 도움을 받을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원수지간도 화평케 하실수 있는 분이시기에 낯선 사람도 친구가 되게 하실수 있으며, 꼭 필요하고 진실한 친구로 만드실수도 있다.
(1)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이 바울의 일행들에게 베푼 친절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그들은 야만인(본문에서 '토인'으로 언급됨)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와 관습이 그리이스와 로마인들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은 자신들이외의 모든 사람을 야만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과 같은 수준의 문명인들도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들보다 더욱 문명화된 사람들도 있었다.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인간애로 가득차 있었다. 본문에는 그들이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결코 이 난파선을 약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였다. 본문은 우리가 재난이나 불행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며 힘닿는 데까지 그들을 구제하고 원조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 본보기로써 기록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섭리에 의해 우리의 지정된 거주 영역안에서 난처한 지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주 자선을 베풀기회를 얻게 된다면, 우리는 그곳을 불운한 장소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러한 기회들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2) 본문은 토인들이 베푼 친절의 한 특별한 예를 '그들이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고 기록한다(2절). 즉 그들은 바울의 일행을 위해 불을 쬐일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기꺼이 그들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심한 폭풍우로 온몸이 흠뻑 젖은데다가 그 비는 매우 차가운 비였기 때문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옷을 말려줄 불을 가장 필요로 하였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만큼 필요한 것이다.
2. 독사에게 손을 물림으로써 위험에 처하게 된 바울(3,4)
(1) 모닥불을 더 크게 피우고 있었을때,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분주히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는 근면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해야할 일이 있을때에는 어떤 일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실행에 옮겼다. 심지어 그는 불을 지피기위해 나뭇가지들을 긁어모으는 일조차도 기쁘게 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볼수 있듯이, 우리도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비천한 일이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불을 쬐는 혜택을 입은 자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며 장작을 나르는 일이라도 거들어야 한다.
(2) 불을 지피고 있던 나뭇가지들 속에 우연히 한마리의 독사가 들어있었다. 그 독사는 열을 받기까지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열을 받자 튀어나와 무심코 나뭇가지를 불속에 던져넣고 있던 바울의 손을 물었다. 뱀이란 풀밭 밑에 숨어있기도 하지만 간혹 마른 잎새들속에 숨어있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도처에 얼마나 많이 널려있는지 모르며, 동물로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고 기대했던 곳에서 해를 입게 되는 경우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다가 해를 당하기도 한다.
(3) 토인들은 이 독사가 하나님의 공의로써 파견되어 피의 복수자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 짐승이 그의 손에 달림을 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4절).
1) 자연의 모습을 통한 발견 : 그들은 비록 야만인이었지만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죄악이 죄인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선한 일이 있고, 그가 벌하실 악한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인이 극악무도한 죄이며, 이러한 죄는 머지않아 형벌을 받게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악을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 야만인들의 입을 통해서 심판받게될 것이다. 설혹 범죄자들이 바다의 보복을 피할수는 있다해도,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를 앞지를수 없음을 이들에게서 배워야할 것이다.
2) 자연의 모습을 통한 오해의 측면 : 그들의 지식은 다음의 두가지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모든 악인들이 이생의 삶속에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보응의 날은 이후에 반드시 오고야 만다. 비록 일부 악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벌을 받기도 하지만, 수많은 악인들은 도래할 심판을 알리기 위해 처벌받지 않은채로 남아있게 된다.
둘째, 이땅의 삶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땅의 문제에 대해 하나의 참되신 조명을 제시한다. 즉 모든 일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과 인내의 연단을 위해 이땅의 삶속에서 호된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4) 바울이 그 독사를 손에서 떨쳐 버렸을때, 그들은 그가 몸이 부어올라 죽든지, 아니면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줄로 알았다. 인간이란 일단 어떤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가?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반드시 확증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3. 독사로부터의 위험(5,6)
바울은 이러한 일로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비명을 지르거나 펄쩍 뛰지도 않았다. 그의 이같은 놀랄만한 침착성은 이처럼 긴박한 사건을 당한 그 누구도 지닐수 없는 침착성을 근거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도움에 의해 그러한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사를 불속에 떨쳐버렸다. 이처럼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의 능력을 힘입어 사단의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우리는 떳떳한 양심을 간직했으므로 우리가 사람들의 비난과 질책을 무시하게 될때,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독사를 불속에 떨쳐버렸듯이 그것을 떨쳐버려야 한다. 사람들의 비난과 질책은 우리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한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나쁜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으므로 그가 곧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이상이 없음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고자 하셨다. 이제 그들은 조금전에 바울을 비방하던것 이상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6절). 이것은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이 독사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물렸음에도 상태가 전혀 악화되지 않았던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중의 견해의 불확실성을 살펴보라. 얼마나 그것은 바람에 따라 좌우하며, 양극단에 치우치기 쉬운가?
4. 한 노인이 바울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받음(7-9)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는 자가 조난당한 이 낯선 사람들에게 베푼 환대는 다음과 같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였다(7절).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주신 자들에게 너그러운 마음도 아울러 주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섬의 우두머리이며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던 보블리오 역시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사람이었다. 이 보블리오 부친의 질병은 열병과 이질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해 바로 이때 그를 앓게 하셨고, 바울로하여금 보블리오가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치유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바울이 행한 치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는 그 환자의 상태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의술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내과의사는 아니었지만, 기적을 통해 그를 치료하는 사도의 자격으로 그의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환자의 치유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그에게 안수를 베풀었다. 그러자 그 환자는 즉시 쾌유되었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비록 연세가 많은 노인이었으나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도 치유하였다. 만일 그가 질병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치유할수 있었다면, 곧 많은 환자들이 그에게 몰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환자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그 섬에 우연히 당도하였고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곧 떠날 이방인이기에 그들의 청을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결단코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냄을 받은 어느 곳에서든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나그네를 영접하게 하는 좋은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이로써 어떤이는 부지중에 천사나 사도들을 대접하게도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그의 백성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에 대해 보답하시기를 지연시키지 않으신다. 멜리데 섬의 주민들은 그들의 해변에 난파되어 조난당한 자들이 그들에게 베푼 친절만큼 값진 것을 받아본 적은 결코 없었다.
5. 바울이 베푼 친절에 대하여 사의를 표명함(10)
그래서 그들은 후한 예로 바울의 일행을 대접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일행에게 최상의 존경심을 표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일행에게 그러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행동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떠날때에 우리 쓸것을 배에 올리더라(10절). 그들은 바울의 일행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배에 실어주었다. 바울은 멜리데의 선한 주민들이 베푼 친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것을 그의 치료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바울은 이 치유의 능력을 거저 받았으므로 거져준 것이다) 바울 자신과 또한 그와 함께있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구호물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Ⅱ. 로마에 도착한 바울 28:11-16
여기서 우리는 로마로 향한 바울의 여행과정과 마침내 그가 로마에 도착한 사실을 보게 된다. 푹풍이 지나면 고요함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바울의 후반부 여행은 평온하고 순탄하였다.
1. 멜리데 섬을 떠나는 바울의 일행(1)
그들은 원기를 회복한후에 다시 바다로 떠나야만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곤경과 좌절감을 겪는다고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출발시기는 겨울철 3개월이 경과한후, 즉 석달 후였다. 이 계절에 항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므로 계속 항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성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나았다. 바울은 겨울철에 바다로 항해하려는 선원들에게 경고하였으나, 그들은 그의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할 필요가 없었다. 자고로 경험은 어리석은 자들을 지도한다고 말하여진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깨달으므로써 비로소 배우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날때 승선한 배는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보냈으므로 안전했다. 여기에 알렉산드리아 배가 두척 있었으나, 한척은 난파되었고 다른 한척은 구조되었다. 이처럼 사태가 변화무쌍하므로 우리는 궁핍한 상황과 풍요로운 상황속에서 대처할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배에 적힌 디오스구로란 기호가 그 배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러한 이름을 가진 배를 타고 이전의 항해보다 훨씬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자 기대했다.
2. 이탈리아 상륙과 로마로 향하는 계속적인 여행(12-14)
그들은 시실리 섬의 주요 도시인 수라구사에 처음으로 상륙했다. 거기서 그들은 사흘간 머물렀다. 그리고 그들은 수라구사를 출발하여 이달리야의 한 도시인 레기온으로 왔다. 거기서 그들이 하루를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해안에 정박한 것이 아니라 항로 도중에 닻을 내렸던것 같다. 또한 그들은 레기온을 출발하여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아니한 작은 항구인 보디올로 갔다. 이 알렉산드리아 배의 행선 목적지는 보디올 항구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여행하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하여 나머지 여행을 육로로 했다. 이 보디올에서 바울의 일행은 형제들을 만났다. 이곳에 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복음의 감화력은 여기서도 매우 놀라웁게 역사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소에까지 그를 섬기고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을 머물게 하신다. 비록 보디올에 극소수의 형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바울은 그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함께 모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형제들은 이국땅에서 동포들을 찾듯이 서로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을 것을 원하는데, 이것은 적어도 주일 예배를 드릴때까지 만이라도 그들과 함께 머물러주기를 간청한 것이리라. 그래서 바울은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또한 백부장도 그곳에 일주일간 머무는 것에 동의했으며, 바울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보디올을 출발하여 로마로 향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3.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면회를 신청함(15,16)
(1)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대단히 경의를 표하였다. 그들은 그의 명성과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는 사실을 익히 전해 들었다. 또한 그들은 그가 당한 고난과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중에서 보호해 주신 사실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만나 그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얼마전에 그들에게 긴편지를 보냈으므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그에게 이러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그를 맞으러 갔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비록 죄수였지만 예의를 갖추어 그를 모셔왔다. 그들중에는 로마에서 51마일 떨어진 압비오 저자까지 바울을 맞으러 간 사람들도 있었고, 삼관(로마에서 33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소임-역주)까지 그를 맞으러 간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죄수인 바울을 만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이유로 그에게 두배의 경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2) 이러한 일로인하여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는 로마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그가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과 그 상소의 결과에 대한 착찹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떠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지 예측할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에서 온 이 선한 사람들과 만나기 전까지 이러한 착찹한 생각때문에 침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바울이 그들을 보았을때(15절), 그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고백하였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만일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그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을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놀라운 열매를 거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가 이 세상의 어느 낯선 곳에 가든지 거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형제들을 만나게 될때,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반면 훌륭한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둘째, 그는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비록 죄수였지만 전에 자유롭게 예루살렘에 들어갔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로마에 입성하였다. 그는 거기서 자기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동료 여행자들을 만나는 것이 하나의 용기를 가져다준다. 우리가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진지한 집회를 보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뿐 아니라 용기를 가지게 된다.
4. 로마의 감옥에 구금된 바울(16)
이제 바울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그는 여전히 죄수의 신분이었다. 그는 로마를 구경하기 원했으나 도착하자마자 간수장에게 인도되어 그곳을 구경할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왕관을 쓰고 승리의 개가를 울리면서 로마에 입성했던가!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그 세대의 악질 염병과도 같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 한 선한 사람이 불쌍한 포로로서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 입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자만심을 이 세상과 더불어 영원히 떨쳐버릴수 있는 충분한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그러나 바울은 몇가지 혜택을 받았다. 그는 죄수였으나 감옥에 감금된 죄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기거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리고 한 군사가 바울의 경비자로 배정되었는데, 그는 죄수로서 누릴수 있는 모든 자유를 바울에게 허용한것 같다. 하나님께서 호송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갇힌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그들을 평안하게 하신다면, 그들은 감사해야할 이유를 갖게 된다.
Ⅲ. 로마 법정에서의 바울의 자기 변론 28:17-22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해야만 했다. 본문에서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우두머리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유대교에 대해 가장 박식한 자들이었다. 바울이 그들을 청한 것은 자신과 그들 사이의 우호적인 이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1. 바울이 그들에게 행한 신상 발언(17-20)
(1) 그는 자신의 결백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즉 나는 유대민족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우리 조상들의 규모를 배척한 일도 없다(17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조상의 유전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전들은 결코 이방인들을 위해 작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 유전들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유전을 지켰던것 또한 사실이다.
(2)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서 내어준바 되었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17절). 만일 그가 이 문제에 대한 진상을 완전히 폭로했다면, 유대인들은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이 바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죽여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대인들은 총독인 벨릭스앞에서 바울을 죄인으로 고소했으며, 사실상 그를 죄수로서 로마인들의 손에 넘겼다.
(3) 바울은 자신에 관한 로마총독들의 판결에 대해 설명하였다(18절). 그들은 바울을 심문하고 심리했었다. 천부장이 그를 심문했었고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모두가 그를 심문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바울에게 사형을 당할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바울을 석방시켰던 것이다. 바울을 신중하게 심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무죄로 선고했으며,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를 정죄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진술을 듣지못한 자만이 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4) 바울은 그가 로마에 상고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상고는 반소(反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방위에서 나온 것이었다(19절). 유대인들이 반대하므로 바울은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상고하게된 목적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족을 비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혐의를 벗기위해 상고했던 것이다. 고소 사건 중에서 특히 동족을 고소한다는 것은 불미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중간 입장에 서있었을 뿐, 결코 그들과의 적대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그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민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로마황제를 격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추호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상의 유익을 끼치려고 힘썼고, 사태를 더이상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5) 바울은 진정한 입장에서 그가 당한 고난을 설명하였다(20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청한 것은 너희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동족으로서 만나 더불어 대화하고자 함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 소망을 인하여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수감자의 표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한 그는 그를 감시하는 병사의 보호아래 있었던것 같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메시야가 도래하였음을 전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시야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바로 이 메시야를 전했으며, 그가 도래하신 사실을 증거하였다. 나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그분 안에서 기쁨을 나누자고 전파하였다." 또한 바울은 죽은 자가 부활하게 될 것을 전파하였다. 이 사실 또한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 민족을 로마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번영하는 민족으로 만들 메시야를 여전히 기대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그러한 일시적인 메시야의 왕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참되고도 진정한 소망인 메시야의 왕국으로 인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왕국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지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이 보증되고 예비되는 거룩함과 사랑의 영적 왕국인 것이다."
2.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답변(21,22)
그들은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시인한다.
(1) 그들은 바울에 대해 특별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문서나 구두로 아무런 지시도 받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중 누가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21절). 바울이 가는곳마다 쫓아다녔던 유대인들의 끊일줄 모르는 분노가 로마까지 따라오지 아니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그들이 거짓을 전했으며 바울을 기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차마 그것을 시인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비로소 바울은 그가 황제에게 호소했으므로 유대의 유대인들이 감히 로마의 법정에까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게 된다.
(2) 그들은 바울이 전파한 종교에 대해 상세히 알기 원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토록 엄청난 반대 세력에 맞서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다.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22절). 비록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 달리 아는바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이 종파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은 이 종파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악평하고 그것을 헐뜯으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간주했는데,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었다. 진정한 기독교란 모든 일류의 공통 관심사 위에서 세워진 것이며, 흔히 일반 종파에서 유래되는 것처럼 편협한 견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영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인류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려는 하나의 명백한 경향성을 지닌다. 그들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너무도 자명한 진리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는 항상 비방의 대상이 되어왔다.
Ⅳ. 로마에서 행한 바울의 강론 28:23-29
여기서는 바울이 로마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에 관하여 장시간 협의했다는 사실이 짧게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기꺼이 경청했으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보다 더욱 진지하였다.
1. 로마의 유대인들과의 협의(23)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 협의를 어떻게 진행시켰는지를 알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임의 시간과 날짜를 정했다(23절). 그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확신을 갖게된 것 같았으나, 그들 모두가 그 말을 믿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1)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울은 비록 죄수였으나, 그들은 기꺼이 그의 거처로 모였다. 또한 그가 처해있는 현재의 감금상태는 그들이 그의 가르침에 대해 편견을 갖게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들에게 그 가르침을 확신시켰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갇힘은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고통당함을 가치있게 생각한다는 한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교훈을 듣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만나보기 위해 그의 감옥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2) 바울이 유대인들과 나눈 강론은 매우 만족스러운 내용이었으며, 그는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본질을 설명했다. 즉 그것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이며, 외적인 장대함이 아닌 마음과 삶의 청결함을 통하여 빛나는 것이다. 일단 그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고 참 모습을 밝혀 주기만 한다면 그들은 그 말씀에 복종하게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설명했을뿐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였다. 다시말해서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분명히 선포했으며 확고한 증거로써 그것을 확증하였다. 또한 바울은 은혜의 나라가 특별한 능력으로 수립되었다는 것과 자연계가 기적으로 확립되었음을 증언하였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힘입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고 증거했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나라를 받아들일 것을 간절하게 권유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호감을 살수 있는 생생한 방법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에 관하여 그들에게 권유하였다. 그가 행한 전체 강론의 의도와 취지는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는데에 있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일들을'(23절) 권면하였으며, 이 모든 예언들이 예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러한 증거들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였다.
(3) 바울의 설교는 매우 길었다. 그의 강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흥미있는 것이었고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확신에 찬 자세로 매우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회가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의 강론을 온종일 계속하였다.
2. 이 강론의 효과(24,25)
그렇게 훌륭한 동기와 바울의 능숙한 화술로 청중들이 하루 종일 경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어떤이에게는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 되며, 어떤이에게는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이에게는 지침돌이 되시며, 또 다른이에게는 머릿돌이 되신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25절). 청중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의 의미와 증거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24절)라고 기록되었다. 어떤이들은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았으며, 다른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졌다. 그러므로 어떤이들은 빛을 받아들였고 다른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청중들중에는 그를 믿는 자들도 있었고 그를 모독하는 자들도 있었다.
3. 바울이 헤어질때 그들에게 전한 경고(25-28)
바울은 그들이 투덜대는 소리를 듣고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여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라 너희가 돌아가기 전에 할말이 있다. 너희의 완악한 불신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그리고 그 결과로 너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1) 또한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의해서 불신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사 6:9,10)으로 돌아가 거기에 기록된 상황이 너희의 경우가 되지않도록 염려하라." 구약성경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취될 복음의 약속이 있는 반면, 모든 불신자들에게 임할 영적 심판에 대한 복음적 경고가 담겨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5절). 이사야에게 말씀된 내용이 백성들에게는 상당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고 이사야에게는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었지만, 본문에는 그 말씀이 지당한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될 것이다'(막 16:16)라는 것은 복음의 말씀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될 것이다'(막 16:16)라는 의미를 지닌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26절). 이 말씀은 다음의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하나님을 거역한 너희 조상들의 중죄는 너희의 것이다. 너희가 눈을 감았도다(27절). 즉 너희 조상들은 하나님이 그 손을 높이 들어 그들을 심판하려고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제 너희도 하나님이 복음의 은혜안에서 너희를 향하여 펼치시는 구원의 손길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는 보지않으려는 그들의 결심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보지않으려고 하는 자들은 정말로 어리석은 장님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평화에 속한 위대한 사실들을 보지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 또한 그들은 귀로 듣지않기 위해서 이 진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했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여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해서이다(27절). 그래서 그들은 암흑이나 끊임없는 혼란과 소요속에 그들의 마음을 놓아둔다. 하나님의 방법은 일단 사람들을 불러모아 보고 듣게하며, 그들의 마음에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그들의 의지를 굴복시키시고 그들을 치유하신다. 이것이 이성적인 인간을 다루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고 이해를 어둡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의 회개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죄인이 사단과 연합하여 자신의 눈을 가리게 될때 매우 서글픈 상황이 벌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둘째, 이 죄를 범한 너희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너희에게도 임할 것이다. 즉 너희는 소경이 될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26절). 왜냐하면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 말을 이해할 힘과 은총을 너희에게 베풀지않았기 때문이다.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빛에 반역했으므로 하나님은 그의 은총과 빛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버리셨다. 또한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강한 미혹에 넘겨주고 거짓을 믿게하셨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27절). 그들을 수술할수 있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병은 불치의 병이 되었다. 이제 치료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자들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는가? 또한 자기의 병이나 그 병에 대한 치료에 대해 확신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돌이킬수 있겠는가? 그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린 자들이 어떻게 확신을 얻을수 있겠는가? 이처럼 그들이 일단 완악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들은 이미 지옥문앞에 와 있게되는 것이다.
(2) 계속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을 보내실 것이다(28절). 그러므로 너희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총을 멀리하고 거룩한 진리와 사랑의 능력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따라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것이며 복음 안에서 복을 누릴 것이다. "바울이 말씀을 전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에 대한 그들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함으로써 그의 이방인들에게로의 복음전파에 대한 그들의 불평을 막기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구원에 대해 받아들일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그렇게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에 임했을때, 맨처음으로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맨처음 그들에게 베풀어진 혼인잔치에의 초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손님들이 초대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한다.
둘째, 이방인들에게 은총의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쾌감을 자극시켜 그들로하여금 그들의 죄에서 벗어나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했으나, 아직 그것을 돌이켜 참회할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남아있었다. 즉 그들은 포도원 비유에서의 둘째 아들처럼(마 21:29) 단호히 거절했으나 뉘우쳐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할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가? 그렇다면 더 늦기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복음의 말씀을 듣지못하도록 작정된 그들이 말씀을 들으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서 언제나 그분을 부를수 있는 특권을 지닌 우리가 그 말씀을 듣지 않겠는가? 이처럼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한 사실을 통해 유대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신앙안에서 수치심을 갖도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감화를 받지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저주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4. 집회의 해산
이 집회는 약간의 소요속에서 끝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서 등을 돌렸다. 그들이 충분히 알아들을수 있도록 바울이 이 말을 전했을때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설교의 후반부에서 강조한 무서운 말씀에 대해 둔감했으며, 그 강론의 앞부분에서 전한 모든 위로의 말씀에 대하여 목석처럼 무감각하였다.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 커다란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단 바울에게서 떠난다는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떠나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 사이에 커다란 격론만이 남았던 것이다. 올바른 논리가 결여된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격론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한,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격론도 그들을 확신시켜줄수 없는 것이다.
Ⅴ. 로마에서 행한 바울의 복음전도 28:30,31
여기서 우리는 축복받은 바울의 역사에 대한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에 나타난 모든 특별한 상황을 주의 깊게 주시해야 한다.
(1)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감금된 상태로 사건이 종결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다. 이 선한 사람은 이 셋집에서 만 2년 동안 감금된 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바울은 자신의 감금 상태로부터의 조속한 석방을 위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수로 남아있었다. 그가 말했듯이(빌 1:13) 그리스도안에서의 그의 매임이 가이사의 법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2년간의 투옥기간 중 그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2년간 죄수로 복역했다는 사실이외에 그가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석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석방된후에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크레타로 향했고 그후 디모데와 함께 유대로 갔다고 전한다. 그후 그는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고 마지막에 다시 로마를 방문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곳 로마에서 네로의 통치말년에 참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울처럼 유능한 인물이 그렇게 오랫동안 구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 아닐수 없다. 바울은 벨릭스의 통치아래서 2년 동안 감금되었으며(행 2:27), 네로의 통치아래서도 2년 이상을 죄수로 보냈다. 만일 바울에게 자유가 허락되었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교회들을 세웠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가장 유익한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일을 수행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역자들의 섬김이 없이도, 또한 그들의 고난을 통해서도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실 것이다. 심지어 바울의 속박마저도 복음의 진보가 되었던 것이다(빌 1:12-14). 그러나 어느면에서는 바울의 투옥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유익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해 볼때, 바울이 셋집에서 유했던 2년 동안에 이전보다 더욱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잠시동안의 은둔생활은 온종일 사방으로 순회하면서 활동하던 사람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제 그는 같은 집에서 2년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을 감옥으로 오게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부르시고 잠시 쉬게하신 것(막 6:31)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자유의 몸이었을 당시에는 유대인들 간계(행 20:19)로 인하여 항상 위협을 받았으나 이제 감옥은 그의 저택이 되었다.
(2) 비록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사실로 본서가 종결되고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작별할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를 가져다준다. 그가 투옥된 감옥은 그에게 하나의 성전이요 교회요 궁전이었다. 그의 입이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신실하고 열심있는 사역자에게 있어서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더큰 고역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비록 갇혔으나 주님의 말씀은 갇히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중 몇사람을 만나보고(15절)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들과 만나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그의 기쁨은 절반으로 감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바울의 설교 대상자 : 누구든지 바울의 집에 와서 설교를 들을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었으며, 그는 그들을 환영하였다. 사역자들의 집대문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자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섬길수 없을때, 우리는 할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였다(30절). 또한 그는 가장 권력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가장 비천한 자들에 대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바울은 조속한 시일내에 상황이 호전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어떤 선한 일이 행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2) 바울의 설교내용 : 그는 하나님의 대사였으므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였다. 그는 인간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관해서 참견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겨두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였다. 그가 공개토론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했던(23절)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공적설교에 주력하였다. 또한 우리에게 최대의 유익과 최상의 지혜를 안겨 주는 것이 바로 그의 설교의 목적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였으므로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을 가르쳤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전역사와 신성의 신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여전히 그의 원칙―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사건 이외에는 알거나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을 고수하였다.
3) 그는 어떠한 자유를 갖고 설교하였는가. 거룩한 은혜가 바울에게 심령의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설교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가 바울에게 설교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31절)고 기록되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늘 방해하던 유대인들은 여기서는 그럴 권위가 없었다. 또한 로마정부는 아직도 기독교의 포교행위를 위법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바울의 투옥을 통하여 박해자들의 분노를 잠잠케 하셨다. 이 당시 로마에는 기독교를 증오하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수인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묵인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권한으로 바울의 설교를 금지시킬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가르치는 것을 아무도 금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핍박받는 자들에게 위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살펴보자. 바울앞에 열린 문이 비록 넓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항상 열려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하여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 가이사의 집안에도 몇명의 성도들이 있게 되었다(빌 4:22).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도시가 언제든지 조용히 거주할 수 있는 우리의 거처가 되었을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찌르는 가시와 고통이 전혀없는 성산을 갈망해야할 것이다.
# 해설
로마에서의 전도 사역 ( 28 )
풍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일행은 멜리데 섬에 상륙을 했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난파당한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바울이 죽지않은 일과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치고, 병자를 고치는 일로인해 그 섬을 떠날때까지 좋은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안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1. 멜리데에서의 바울
1) 독사에 물린 바울
베니게(페니키아) 말로 멜리데란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옛날 두로와 시돈의 선원들이 그 항구와 서부 지중해 사이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면서 그 땅이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사실이 고마워서 붙인 이름입니다. 멜리데인들은 무척 인심이 좋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난파당한 일행에게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하게할 불을 피워주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때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땔감을 계속 넣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마도 추위로 꼼짝않고 있는 뱀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들어올렸을 것입니다. 토인들은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뱀을 떨어버렸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자, 이번에는 그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a.사람의 동정(히13:3)
b.야만인(롬1:14)
2) 보블리오의 영접
바울은 일행들과 함께 그 섬에서 석달을 머물면서 멜리데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보블리오는 바울과 다른 사람들을 여러날 동안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 집에 머물면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병자들이 몰려왔고 바울은 그들도 고쳐주었습니다. 그들은 파선당한 사람들이 석달후 항해를 떠나기까지 후하게 대접했고 일행들이 떠날때에 쓸 것의 모든 것들을 감사의 표시로 주었습니다.
a.치유의 능력(마8:16)
b.사람을 향한 감사(룻2:10)
2. 로마에 도착한 바울
1) 보디올에서의 형제들과의 만남
선원들과 승객들이 10월이나 11월에 그레데를 떠나 폭풍의 두주간 이후에 멜리데에서 3개월 동안 머물러 겨울을 지나고, 항해가 가능한 2월이나 3월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그 섬에 정박한 다른 배를 만났습니다. 그 배가 알렉산드리아 배였음으로 보아 항해하기가 위험한 겨울 석달을 멜리데 섬에서 보낸 애굽에서 온 곡물선이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이 배는 멜리데를 출발하여 시실리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수라구사에서 이틀을 머문후에 메시나 해변을 통과해서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레기온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또 이틀후에 보디올에 이르렀는데, 보디올은 동지중해권 무역을 위한 이탈리아의 주요 항구였습니다. 보디올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이 이미 로마로부터 이 이탈리아 항구까지 퍼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무척 큽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의 초청을 받아 그들과 함께 한주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a.영적 형제(롬8:29)
b.형제의 사랑(요13:35)
2) 압비오 저자와 삼관에서의 형제들의 마중
바울이 보디올에 머무는 동안 바울의 도착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7일후에 바울은 로마를 향해 떠났습니다. 도중에 바울의 도착 소식을 듣고 로마에서 마중나온 형제들은 로마로부터 각각 69km, 53km 떨어진 압비오 저자와 삼관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문안하고 로마까지 남은 길을 인도하기위해 그렇게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로마의 교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고 용기를 얻어 담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믿음의 동료들의 환영은 그의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압비오 도로를 따라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신임받는 죄수였으므로,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지내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a.하나님께 감사함(롬1:8)
b.성도의 교제(빌1:5)
3. 로마에서의 복음 전도
1) 바울의 변명
바울은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을 청했습니다. 이는 그가 회당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을 청해서 바울은 몇가지 요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유대의 관습에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에 있는 로마 권력자들은 바울이 무죄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공정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기때문에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송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무죄 방면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지도자들을 부른 우선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의 변명을 들은 지도자들의 반응은 상반되었습니다.
a.무치(눅23:4)
b.영원한 소망(골1:5)
2) 바울의 강론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두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복음에 대해 좀더 확실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고, 토론도 길었습니다. 하루 종일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증거했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나뉘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도자들이 복음에 순종치 않음을 보고 이사야의 말을 적용해서 최종적으로 두려운 선언을 합니다. 누가는 이러한 유대인의 불신앙이라는 소주제와 대비해서 최종적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는다는 사도행전의 대주제를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후 이년 동안 아무런 방해없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사로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때뿐 아니라 부활하신 뒤에도 그분의 설교 중심 주제였습니다. 바울은 이 주제를 로마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가르쳤습니다.
a.영적 귀머거리(딤후4:4)
b.이방인의 개종(롬9:24)
결론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신한 복음의 대사로 드디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으로인해 교회가 설립되고 이방선교는 성공했으며 교회는 초창기 유대주의의 탈을 벗고 급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서신을 통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 핵심
28:1-15
멜리데에서 겨울을 난후 여행을 재개하여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바울 일행이 그곳 성도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는 장면이다.
# 묵상
토인들의 대접 ( 28:2 )
멜리데 섬의 토인들은 난파당한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어를 말하지않는 사람은 모두 야만인으로 여기며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원주민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편안히 해주고자 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나뭇가지를 던지자 독사가 튀어나와 바울에게 달려들어 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뱀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를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보블리오의 집에서의 바울 ( 28:8-10 )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었는데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그를 낫게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바울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블리오의 부친뿐 아니라 멜리데 섬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대접받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에서의 바울의 처우 ( 28:16 )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한 군사의 감시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수 있었으며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준 편안한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 ( 28:21 )
바울의 말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우리가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공연한 일에 끼어들어 황제의 분노를 사거나 백성의 원망을 듣게 될까봐 이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이방인 ( 28:28 )
이스라엘 민족은 택함받은 민족이고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영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따라서 이 귀한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겨지게 되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전파 ( 28:30, 31 )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지만 2년동안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사도행전은 바울이 2년동안 아무 제재도 없이 복음을 전할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역사가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짐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