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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13:1-3

우리는 본문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인의 복음전도에 대해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실을 보게 된다.

(1)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현재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 안디옥 교회는 훌륭한 사역자들로 잘 구비되어 있다. 그 교회에는 '몇몇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1절), 이들은 뛰어난 은사와 은혜를 받고 훌륭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아가보는 교사가 아니라 선지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선지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은 교사들이었다. 안디옥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대도시였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많은 교사들이 필요하였다. 본문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먼저 명기되고 바울의 이름은 나중에 수록되지만, 후에는 이 순서가 뒤바뀐다. 본문에는 또 세명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중 한사람은 시므온 혹은 시몬 즉 검둥이 시몬으로 불리워졌다. 다른 한사람은 구레네 사람 루기오였으며, 마지막 한사람은 마나엔이란 자이다. 마나엔은 어떤 특정 신분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는 분봉왕 헤롯과 함께 양육된 자로서 그와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궁중의 고관으로 발탁될 수 있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분봉왕과 함께 동료 핍박자가 되기보다는 성도와 함께 수난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나았다.

2) 그들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2절).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2절). 근면하고 신실한 교사들은 주님을 진실되게 섬긴다.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섬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주님을 섬기는 일은 교회와 교회의 교사들의 정해진 임무임에 분명하다. 경건한 금식은 우리가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유용한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신랑되시는 주님과 함께있던 동안에는 많이 금식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가 떠나버린 이후로는 많은 금식을 행하였다.

(2) 성령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울 것을 명령하신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절). 성령께서는 그들의 임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바나바와 바울은 이전의 부르심을 통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 문제는 이 일이 있기에 앞서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간에 결정된 일이었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할례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맡았듯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으로 가도록 결정되었다. 성령의 명령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을 통해 자신의 사역자들을 임명하신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선별하시는 몇명의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을 "선별하라"는 성령의 지시는 그 지시를 적절하게 판단할 능력을 구비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법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와 성령을 위해 선별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를 위하여 그들을 따로 세우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선별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선별된다. 그리스도는 결코 종들을 태만하게 방치해 두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안정을 얻기위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기 위해 선별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부름받은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감당하던 바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3) 사역자로서의 일반적 사명이 아닌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안수받는다. 본문에는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3절)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기도했다. 선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고자 떠나려할때, 그들을 위해서 엄숙하고도 특별한 기도가 행해져야 한다. 그들은 주께서 분부하신 다른 일을 수행할때와 마찬가지로 금식 기도를 드렸다(3절).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안수를 베풀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기쁜 마음으로 떳떳하게 떠나갈뿐만 아니라 명예롭고도 훌륭한 평판을 가지고 떠나는 것은 인정하면서 안디옥 교회에서 현재 그들이 맡고있는 직무를 해제시켜 주었다. 그들은 그 두사람이 현재 짊어진 사명 위에 축복이 임할 것을 기원했으며, 또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그들이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그들보다 먼저 영예롭게 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기꺼이 그 임무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개간해야할 묵은 땅이 있는 지방들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그들을 파송하였다.

 

Ⅱ. 소경이 된 엘루마 13:4-13

1. 바나바와 바울이 유명한 섬 구브로에 이르게 된 경위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4,5)

구브로는 바나바의 출신 지방이었다(행4:36). 따라서 그는 이 지방에서의 그의 수고의 첫열매를 그들이 거두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그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크게 격려하는 것이었다(4절). 그들은 실루기아로 가서 거기서 바다를 건너 구브로로 향했다. 그들이 최초로 도착한 도시는 살라미였다(5절). 그리고 그때 그들은 그곳에 선한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거기서부터 바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온 섬 가운데로 지나며(6절)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5절). 이처럼 그들은 스스로 자만하는 유대인들마저도 배척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은밀하게 행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교리에 대해 유대 회당의 지도자들이 공공연히 비난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들이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5절). 요한은 잡일을 돌보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들 돕는 그들의 조력자였다. 요한과 같은 사람은 특히 낯선 지방에서 여러모로 그들에게 기여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2. 그들과 박수 엘루마와의 대면에 관한 특별한 설명(6-12)

(1) 바보에는 서기오 바울이라 하는 이방인 총독이 있었는데, 그는 사도들을 격려하였다. 그는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는 이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감정이나 편견 따위로 사로잡히지 않고 이성에 따르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총명함은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이 세상의 어리석음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현명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면 그들은 마땅히 이 총독에게 그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2) 그곳에는 유대인 박수 엘루마가 있었는데, 그는 바나바와 바울을 반대했다. 이 엘루마는 예언의 은사를 사칭하는 박수요 거짓 예언자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성직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여호수아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예수였다. 이 이름은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리아어로 이 이름은 바쇼마인데, 그 의미는 교만의 아들 혹은 과장의 아들이다. 그는 그 지방의 총독과 함께 있음으로써 왕실과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총독으로 하여금 그들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8절). 즉 그는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특히 사단은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력자들이 경건하게 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그들의 본보기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여기서 처음으로 바울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은 거룩한 분노로서 자신을 적대하는 엘루마를 공박하였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9절). 사울이란 이름은 그가 히브리인이었을 당시 이름이었고, 바울이란 이름은 그가 로마 시민이 되었을 당시의 불린 이름이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가장 정통적인 유대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이방 가운데로 파송되었을 이때부터 그는 로마식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이 사건에 봉착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즉 그는 엘루마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퍼부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어떤 개인적인 원한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영에 임한 성령의 강한 감화력에서 온 것이다. 그는 엘루마의 사악한 뻔뻔스러움에 대적하여 그를 주목하였다. 본문에서 바울은 엘루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10절). 바울은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10절).

첫째, 그는 마귀의 대리자이다. 이 엘루마는 비록 그가 바예수, 즉 예수의 아들로 불리웠지만 실제로는 마귀의 자식이었다. 그는 두가지 점에서 마귀와 닮았다. 하나는 간교하다는 점이다. 엘루마에게서 참된 지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는 모든 궤계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다른 하나는 악하다는 점이다. 그는 악행이 가득한 자로 악의에 찬 심술궂은 인간이었다. 한 인간이 간교와 악행으로 가득차게 되면 정녕 마귀의 자식이 되기 마련이다.

둘째,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적대자이다. 만약 그가 마귀의 자식이라면 그가 모든 이의 원수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바울은 엘루마의 현재의 죄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10절). 주의 길은 항상 바르다. 오직 그 길만이 천국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길들에서 벗어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이 길에서 벗어나 방황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여 이 길에 반대되는 불의한 편견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주의 길을 굽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주의 바른 길을 그릇되게 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너무도 완악하여져서 그 일을 중단하지 못한다. 바울은 엘루마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그가 당장 소경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11절). 엘루마는 복음의 빛을 보지않기 위해 자신의 눈, 즉 마음의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즉시 그의 육안도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감겨져 버렸다. 그는 총독의 눈을 멀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자신의 눈이 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것은 관대한 처벌이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잠시동안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의 시력은 회복될 것이다. 아니, 그가 회개하지 않아도 시력을 회복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심판은 즉각적으로 실행되었다. 본문에는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절). 이제 그는 벌을 받아 소경이 됨으로써 자신을 더이상 총독의 양심의 안내자로 가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였다(11절). 이제 거기서 그의 노련한 모든 마술도 종말을 고했다.

(3)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는 엘루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가 이렇게 된데에는 바울의 기적이 기여하는 바가 컸다. 총독은 매우 지각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기적의 신적인 근거에서 암시되는 어떤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들은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속에는 기이한 것이 매우 많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자주 논할수록 그속에서 더욱 기이하고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총독은 이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본문은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12절)라고 전한다. 본문에는 그가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가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 바울과 그 일행들이 구브로 섬을 떠남(13)

바울과 그의 일행들은 그 지방을 떠나 버가로 갔다. 거기서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의 승낙도 얻지 않은채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그의 실수였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서 그의 그와 같은 실수를 거듭 발견한다.

 

Ⅲ.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 13:14-41

밤빌리아에 위치한 버가는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본문에는 '저희가 버가에 이르니'(13절), '버가로부터 지나'(14절)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들이 간 다음 장소는 또다른 안디옥, 즉 그들이 파송된 장소인 시리아의 안디옥과 구별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이라 불리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는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때 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들에게 행한 바울의 설교는 14절 이하에서 볼 수 있다.

1.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감(14)

그들이 안디옥에 왔을때, 그들은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을 먼저 예방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이들 유대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좋은 증거가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그들의 예배 시간으로 준수하였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주(週)의 첫날이 안식일로 준수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대인들과 만나게 될때에는 반드시 제 칠일을 안식일로 준수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인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만났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낯선 사람들이었다. 이와같이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들을 찾아다녀야 하며 그들의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낯선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당에 들어와서 좌정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우리는 공중의 예배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는 점에 주의하자.

2. 그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주어짐(15)

본문의 그 회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반적인 예배의식을 전하고 있다(15절).

(1) 그들은 그날에 해당하는 교훈이 수록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었다'

(2)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후 회당장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를 요청하였다(15절). 회당장들은 그들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전했다. 비록 그들이 복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적어도 바울의 설교를 들어보려는 호기심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울에게 백성에게 권고할 말을 들려 주기를 간청했다. 공공의 예배 집회에서 겨우 성경만 읽는다는 것은 만족할만한 일이 못된다. 그곳에서는 반드시 성경이 해설되어져야 하고 또한 백성들은 거기서 권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공공의 예배집회를 주관하고 관장하는 자들은 항상 권고의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간혹 낯선 사역자로부터의 권고의 말씀은 백성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볼때 본문의 회당장들은 다른 일반적인 회당장들보다 더 고결하고 관대한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바울의 설교(16-41)

바울은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을때 이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본문은 당시의 상황을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16절)라고 전한다. 그는 그들로부터 호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열성을 보여주기 위해 연사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곧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16절)고 말했다. 바울의 이 설교속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납득시키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약속받은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용납하도록 그들을 설득시키는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1) 그는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으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 백성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큰 일들을 행하셨다.

첫째, 온땅의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 곧 '이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둘째, 하나님은 이 백성의 조상들을 자신의 친구로 선택하셨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불리워졌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곧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이유는 그가 예전에 그들의 조상들을 택한 그 선택에 충실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은 그 백성을 높이셨으며 그들로 한민족을 이루도록 하셨고 그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있을때 그들을 그 보잘것없는 곳에서 일으키셨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있어서 결코 빚진 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한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행하시는 그 이상의 어떠한 사건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하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 백성의 압제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셨던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셨다(18절). 하나님은 사십 년간의 그들의 광야생활을 위해 엄청난 양의 식량을 마련하셨다. 그는 기적들을 통해 그들을 매일 먹이셨다. 또한 그는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으며, 모세의 기도와 중재를 통해 수없이 돌이키심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셨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사는한 하나님을 관대하신 사랑의 아버지와 용서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였지만, 그는 결코 그것에 싫증을 내지 않으셨다.

여섯째,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19절). 본문에는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곱째,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을 일으키셨다(20, 21절). 먼저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반역의 백성이었을지라도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구원자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그들을 통치하셨다.

그후, 그들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은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며 마침내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셨다(22절).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저들의 왕으로 세우사 그와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충성의 언약을 맺으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증거를 인용하고 있다. 바울이 인용한 증거 중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은 거룩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내가 다윗을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찾는다는 것은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위해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을 샅샅이 뒤지셨다. 그렇게해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두 번째 증거는 다윗이 하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자라는 의미이자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이란 의미이다. 세 번째로는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를 바라고 노력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행할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권 교체는 그 국가가 완전하지 못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정권은 메시야의 영적인 왕국으로 반드시 이양되어야 하며, 이제 그 왕국이 비로소 수립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전도에 대해 전혀 시기할 필요가 없었다.

(2) 바울은 우리 주 예수에 관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설명했으며 바로 이 예수가 다윗의 약속된 후손임을 증거 한다(23절). 이 사람의 씨에서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을 위해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그가 곧 예수이시다. 예수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야 주신다.

1)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가장 사악한 적인 죄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구세주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을때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소식이 그들에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이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것으로서 얼마나 환영하여야 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세주를 세우셨다. 이렇게 볼때 복음은 이스라엘을 거부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으기 위해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한 찬양을 받던 옛 왕가인 다윗의 씨 중에서 구세주를 일으키셨다. 또한 그는 다윗과 맺은 그의 약속에 따라 구세주를 일으키셨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해들었을때 그토록 그것을 냉대했는가?

2) 바울은 예수에 대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예수의 선구자는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로 인정할 위대한 인물인 세례 요한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오시는 앞에서 전파했던'(24절) 세례 요한의 경고를 충분히 주지하였으므로 결코 메시야의 도래를 돌발적인 사태로 언급할 수 없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으로써 그가 들어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었으며 회개할 것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메시야가 곧 오시리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주지시켰다.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25절). 그는 "이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내가 너희가 기대하는 메시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나는 결코 그가 아니다. 바로 그는 지금 문밖에 서 계신다. 보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니 너희는 오실 그가 어떤 분이신지 감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② 그를 마땅히 환영해야할 유대의 관원들과 백성들은 그의 핍박자요 살해자들이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전파했을때, 그들은 결코 의의 치욕적인 죽음을 은폐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전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들 곧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과 그들의 관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27절). 그들의 죄는 '그들이 그를 죽일 죄를 전혀 찾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에게 그를 죽여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28절). 그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실상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할 의향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들은 그에게서 최소한의 죄도 입증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선고했다. 이렇듯 메시야를 학대했으므로 그들은 마땅히 메시야로부터의 모든 은사를 받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은사를 받았다. 즉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도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는 그들이 그를 알지 못했기(27절)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이 범한 죄의 정상을 참작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저들이 그 하는 바를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베드로도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도다'(행 3:17)라고 말했다. 또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매주 안식일마다 선지자의 말씀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서를 읽지만 정작 그들은 선지자들이 말했던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귀로 듣기는 하나 그 의미를 머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해 관원들과 백성들을 주관하셨다. 그리하여 본문에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27)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들을 어길 경우라도 이들을 통하여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될 수 있었다. 메시야의 고난에 관해 예언된 모든 말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29절). 즉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장사될 것에 관한 예언까지도 모두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를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다'. 이 사건을 본문에서 언급한 것은 그의 부활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를 무덤에 내려놓고 그를 단단히 묶어 두었다고 생각했다.

③ 그는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 이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전하지 않으면 안될 위대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야말로 복음의 주축으로서 복음의 전 구조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일어나셨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30절). 그의 원수들은 그를 무덤에 내려놓음으로써 그가 항상 거기에 매여있기를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렇게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 그의 부활에 관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 그가 여러날 보이셨으니(31절).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 되었다.' 그 증인들은 비록 그와 같이 죽을지라도 그 일을 수차례 증거하였으며 항상 그 일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울이 직접 그리스도를 목격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환상 중에 보았기 때문이다. 이 환상은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것보다 더욱 확실한 것이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의 성취였다. 그것은 참된 소식이었을뿐만 아니라 복된 소식이었다. 바울은 "우리가 이를 전파하되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파하는도다(32,33절). 너희 유대인들은 각별한 태도로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상상할 수 없는 최상의 보상을 얻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너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너희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구약 성경의 위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실 메시야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모든 민족들 앞에 일으켜지신바 된 것은 그 모든 민족들에게 공평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모든 민족들 앞에 일으켜지신바 된 것은 그 모든 민족들에게 공평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33절). 즉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일으키셨다. 이것은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사셨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곧 메시야를 보내실 것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이 사람이 오시리라고 하신 바로 그분이다. 비록 너희가 바라던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너희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너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그분이 성취하심을 보게 되리라." 바울은 이 약속이 성취된 유대인들 속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즉 그는 우리가 그들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해서 불평을 토로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파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메시야를 통해 축복 받게 되리라는 약속 그 자체는 그러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달리 성취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시편 2편의 기록을 확증하는 훌륭한 증거였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또 그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 그가 처음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에 관해서 하늘로부터 음성을 발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마3:17)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시편 2편의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때 선포되었던 모든 사실들이 이제 그의 부활을 통해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부활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 그는 삼일만에 썩지 않고 부활하셨다. 그는 그 삼일 동안 썩어버릴 인간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천국의 생명을 입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약속된 메시야임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그는 부활하사 더이상 죽지 않으셨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올때 수의를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옷을 다시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수의를 다시 착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버려두고 나오셨다. 실제로 그가 더이상 죽지 않기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참으로 확실한 은총을 가져다준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어서 다시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가 부활하셨더라도 다시 죽을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확실한 은총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적어도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죽은후 곧 부활하셨으므로 육신이 썩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의 미쁜 은사' 중의 하나였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35절).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기'(36절) 때문에 이 약속이 다윗에게서는 성취될 수 없었지만 이는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조상 다윗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장례에 관한 간략한 설명과 그가 계속해서 사망의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생애는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다윗은 유능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세상에서 선한 일을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섬기듯이 자신의 세대를 섬겼다. 그는 사람들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섬겼으나 사람들의 뜻에 따라 섬기지는 않았다. 다윗은 그의 세대에 커다란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세대를 위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세대에는 저주와 재앙과 멍에가 많았다.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공동체에 봉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다윗과 그리스도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의 차이점은 다윗이 오직 자신의 세대만을 섬겼던 것에 반해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를 섬기셨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해와 달이 존재하는 한 모든 세대들을 섬기며 그들을 통치하시기 위해 영원히 사실 것이다. 본문은 다윗의 죽음을 '그가 잠들었다'라고 전한다. 살아있을 동안 하나님과의 자신의 세대를 섬기기 위해 애쓴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이자 평온한 안식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신 목적을 모두 이룰 때까지 결코 잠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증인들은 그들의 증언을 완전히 마치기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을 완전히 성취한 후에 올 애쓴 자들의 잠은 달콤한 것이다. 본문은 다윗의 장례에 대해 '그가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 무덤에 머물러 '썩음을 당하였다'. 우리는 그가 다시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그는 썩음을 당하였으므로 썩지 않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 예수를 통해 성취하셨다. 본문은 '하나님이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느니'(37절)라고 전한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오직 예수만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결코 이해되지 못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주 예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후에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시키고 있다.

첫째, 바울은 설교 도중 청중들에게 이 모든 일이 그들과 관련이 있음을 전했다(26절). 즉 바울은 "이 구원의 말씀은 너희에게 전해진 것이다. 만약 너희에게 전해진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희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그는 그들에게 친절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들을 여러분 형제들이여 라고 불렀다. 여기서 바울이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바울 자신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유대인들, 즉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그들에게 이 구원의 말씀이 전해졌다. 그보다는 그들의 죄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려고 그들에게 이 구원의 말씀이 보내진 것이다. 훌륭한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구원이 반드시 경건한 부모들의 자녀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의 말씀만은 그들에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들 중 또 한부류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었다.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보내셨거늘. 이제 너희는 그 계시 종교에 대해서 더욱 탐구하고 그것이 지시하는대로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유익함을 확실히 얻도록 하라.

둘째, 바울은 설교를 마치면서 그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한 것을 청취자들에게 적용시킨다. 이제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 구원의 말씀을 믿는다면,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우리는 이것을 너희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너희는 그 말씀을 주목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는 단순히 그들 앞에 설교하기 위해 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섰다. 그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의 동족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기 위함이었다. 복음전도자들이 청중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도자들은 그들의 행복과 번영에 진지한 관심을 표명하며,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청중들도 동등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야할 두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의 자손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사면 행위라는 사실이다. 이 은총의 행위가 보증되고 선포된 것은 곧 그리스도의 중보의 댓가로 인한 것이다.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노라(38절). "여러분의 죄는 사해질 수 있을 것이다. 죄사함은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죄사함은 그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너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우리를 위해 대행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너희가 알 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못하던 모든 일에도'(39절) 그리스도만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복음을 영접하고 따라야 하며 그것에 반대되는 율법을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죄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마땅히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용납되는 것이어야 한다. 진실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의 모든 죄를 면제받는다. 죄인이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의로 인치심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나 그의 지배에 서로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극도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40,41절). 바울은 "그런즉 주의하라. 너희는 선지자들이 말한 축복과 은혜에 미치지 못할까 주의하라. 곧 너희는 선지자들에게 말씀된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고 말했다(40절). 이러한 위협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일들이 닥치지 않도록 하기위해 우리를 주의시키고 일깨우는 경고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70인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를 멸시하고 무시하며 그것에 머리 숙이기를 꺼려하는 자들은 멸망하게 마련이다.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너희에게 임하는 심판이 되지않도록 주의하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경이로움을 표하지 않고 구원받으려는 자들은 놀라고 멸망할 것이다. 교회의 특권을 향유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욱 견딜 수 없을정도로 정죄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할때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불신앙의 유대인들이 기대할 것이라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하실 것이며 그 일은 사람이 그들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못할 일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말씀은 그들의 죄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의 죄는 그들이 도무지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 즉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믿지않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진지하게 그 사실을 밝힌다해도 그들은 도무지 믿지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당대에 하나님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볼 수 있는 영예와 특혜를 누렸지만 실상 그것을 믿는 은총을 누리지 못했다. 또한 이 말씀은 그들의 파멸에 대한 예견일 수 있다. 즉 그들이 얼마나 천국의 사랑을 받은 민족인가를 생각할때, 그러한 파멸이 그들에게 임하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행악자, 특히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자에게는 낯선 재앙이 임하게 마련이다.

 

Ⅳ.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 13:42-52

본문의 내용은 사도들 특히 바울의 변명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에 대해 신중하고도 주의 깊게 변호하고 있음은 관찰할 수 없다.

(1)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의 복음전도에 대해 격앙하는 자들이 몇명 있었다. 그들은 복음을 계속 듣는 것을 참지 못하여 회당 밖으로 나가버렸다(42절).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시사한다.

첫째, 그들의 공공연한 불신앙 :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경멸을 공개적으로 공언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편견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둘째, 그들의 완고한 불신 :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믿지않는다는 사실과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회당을 나가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진하여 복음에서 떠났을 때, 복음이 그들을 지나쳐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를 떠나지 않는한 결코 먼저 인간에게서 떠나시는 법이 없으시다.

(2)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지않으려고 나가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기꺼이 그 복음을 경청하려 했다.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42절).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이 자신들에게도 전파될 수 있기를 간청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버리고 짐스러워하는 것들을 오히려 동경하였다. 이제 바울은 그들의 초청을 받았으므로 떳떳하게 복음을 전도할 수 있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먹을 것을 구하는 자에게 생명의 떡을 나눠주기를 어찌 거절할 수 있으며, 식탁에서 자녀들이 먹는 떡이라 할지라도 문밖에서 구걸하는 그들에게 어찌 나눠주기를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었더라도 단번에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 가르침을 거듭 돌려주기를 간청했다. 우리는 한번 들었던 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기 위해 그리고 움직이는 못을 단단히 고정시키듯이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붙잡아 두기위해 거듭해서 듣기를 간구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다시 듣기를 원치 않던 것을 이방인들이 재차 듣기 원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사악한 성격은 더욱 악화되었다.

(3) 유대인들과 개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전도에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43절).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복종하였고 복음이 주는 유익과 위안을 받았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제자, 더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은 그의 사역자들과도 연합해야 하며 또한 그들을 추종해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 중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기꺼이 환영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고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권고하고 격려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 안에 항상 거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끊임이 없을 것이다.

(4) 다음 안식일 날(44절) :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하여 모이니(44절).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전도의 결과로 안식일 날에 많은 무리가 회당에 모였다. 혹자는 호기심으로 왔고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한가를 보기위해서 모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한번 더 듣기위해 모였다. 그들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온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로써 이방인들에게 떳떳하게 전도할 수 있었으며, 그들 중 가장 열성적인 청중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5) 유대인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격노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보고서도 분함을 참지 못하였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그득하여(45절). 그들은 사도들이 무리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에게 품었던 심정과 동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섬뜩했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을 반대하였다. 그들이 바울이 말한 모든 것에 트집을 잡아 '그가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였다.' 그들은 반박을 위한 반박을 했으며, 바울을 반박할 아무런 근거도 찾아내지 못하자 그리스도의 그의 복음에 대해 악담을 퍼부으면서 모독을 했다. 일반적으로 비난으로 시작한 사람들은 신성모독으로 끝맺기 마련이다.

(6) 이처럼 유대인들이 복음을 반대하였으므로 사도들은 그들에 대한 전도의 책임을 벗게 되었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로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데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선언함에 있어서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였다'(46절). 복음 전도자들은 때에 따라서 사자와 같은 담대함과 비둘기 같은 온순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도전을 개시할 때, 그리스도의 대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소심해져서는 안 된다. 복음의 적들의 몰지각한 행동은 그리스도의 동료들을 위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더욱 담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를 증거해야 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에게 은총의 복음을 전한 것이 정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도 정당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1)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전파의 혜택이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라고 말했다. 즉 그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던 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도 먼저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고 인정하셨던 것이다.

2)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들은 '너희가 스스로 버렸다'고 단정했다. 만약 인간들이 스스로 복음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마땅히 그들로부터 복음을 빼앗아버리실 것이다. 본문에서 그들은 유대인들을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들"로 규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릴 자격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그것을 누려야 한다고 자부할만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너희가 영생을 누리지 못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너희가 너희 자신에 대해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즉 너희 입으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이 주어지는데 너희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너희의 운명은 결코 영생을 얻지못할 것이다" 는 의미이다.

3)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전하는 근거로 삼는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절). 이 말은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4)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하나님의 보증에 의한 것으로 정당화시킨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47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것을 따르는 것이다. 메시야가 유대의 불신을 예상하고 '내게 헛되이 수고하였도다'라고 말하려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듣는다. 즉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는다하여도 그는 영광을 받으리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47절)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우심을 받으셨다. 그래서 그는 이해력을 깨우쳐주시며 영혼을 구원하신다. 그는 땅끝까지 이르러 이방의 빛과 구원이 되신다. 모든 나라가 결국 그의 왕국이 우리 나라에도 세워짐으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7) 유대인들이 경멸하여 거절한 복음을 이방인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48,49절).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이러한 행운의 기회가 오게 된 것을 얼마나 기뻐했던가?

1) 그들은 복음의 위로를 받아들였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48절). 복음은 그들에게 복된 소식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기꺼이 메시야 왕국의 은혜를 환영하였으며, 또한 유대인들이 받은 약속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이방인들은 단지 그들에게 은총이 주어졌다는 소리만 듣고도 기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할 때, 그들이 과연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함으로써 괴로워한다.

2)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즉 그들은 주의 말씀 곧 복음을 영화롭게 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것에 대해 감복하였다. 이 복음에는 얼마나 놀라운 빛과 능력과 보배가 따르는가! 이제 복음은 널리 확산되어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은 퍼져나갈수록 더욱 빛나며, 그것은 촛불과 같지 않고 태양과도 같아서 멀리가지도 그 강렬한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이제 그 복음의 지식은 그들에게까지 이르렀다. 주의 권능에 복종하고 그의 인자하심으로 위로를 받는 자들은 주의 말씀에 대해 최고의 영광을 돌린다.

3) 이방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충심으로 순종하였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믿게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신 자들이며 성령께서 그들을 복음으로 부른 것을 성령께서 효력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 이 믿는 은혜를 모두 주셨다. 또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 함은 자신들의 영원한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영생을 확신하려는 목표를 지닌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 안에 이러한 영생을 향한 목적 의식을 심어주신 것도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였다.

4) 그들은 복음을 믿게되자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전파함에 있어서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9절). 이 초심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입은 충만한 은사를 기꺼이 전파하려 하였다. 그리스도를 알게된 자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를 알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크고 부유한 도시들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 복음을 독점하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아야할 영혼을 간직한 평민들이 거주하는 지방으로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할 것이다.

(8)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교회의 씨앗들을 뿌린 후에 다른 곳에서도 그와 같은 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그곳에서 자신들이 가르침을 확신시키기 위해 기적을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하나님은 흔히 확신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기적을 사용하시지만, 그곳에서는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를 통하여 믿음이 생기는 것 자체가 그 일을 겪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기적이었다.

1) 불신앙의 유대인들이 그 지방에서 사도들을 추방하게 된 경위 :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하였다(50절).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은 복음 전도자들이 성공적으로 일한다고 판단하게 될때 가장 격노한다. 세상의 가장 선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선한 일을 행할 때, 해를 당하는 것은 다반사이다.

첫째,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괴롭히기 위해 사용한 수법 : 사도들을 대적하기 위해 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을 선동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가치아래 있던 자들이 본문에 언급된대로 그리스도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도대체 여성 핍박가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여성 고유의 상냥함과 연민도 잊었단 말인가! 더구나 이들이 귀부인이라니! 어떻게 이런 여성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삼척동자라도 이들을 경건한 여성으로 결코 보지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을 살해하려고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까? 유대인들은 이 경건한 귀부인들뿐 아니라 그 성읍의 상관과 통치자들 즉 성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사도들과 대적시켰다.

둘째,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그 지경에서 쫓아낼 때까지 계속해서 핍박하였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을 추방하고 말았다. 사도들이 퇴각한 것은 두려움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들의 폭력 때문이었다. 하나님께는 이러한 핍박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들에게 더욱 온정을 쏟게 하셨다. 왜냐하면 핍박받는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더욱 돕고자 하는 심정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경으로부터 사도들을 추방시킨 것은 그들이 경내에서 행한 일을 묵인하는 것보다 더많은 지지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사도들이 불신앙의 유대인들을 포기하고 거절한 방법(51절) : 본문은 '두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라고 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들은 더이상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믿기만 하면 동등하게 하나님께 용납되고 선한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똑같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들은 그들에게 도전하였고, 그들과 그들의 악행에 대한 자신들의 경멸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들에게 복음의 은총을 공정하게 전해 주었다는 증거를 남겼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제자들에게 발마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명하신 것이다(마 10:14:, 눅 9:5). '사도들이 그들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간 것'은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에게 부과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3) 그들이 안다옥을 떠날때 초심자들의 상태(52절) : 제자들은 사도들의 일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혹자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지경에서 추방당할때 제자들이 비통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추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틀린 생각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의 확신에 찬 기쁨은 그들의 모든 두려움을 삼켜버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붙잡고자 하는 확고한 결의로 가득차 용기백배하였다. 우리가 경건의 능력을 통하여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직면하게 되는 곤경에 대해 경건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더욱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

 

# 해설

구브로에서의 전도사역 ( 13 )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이 시작됩니다. 본장을 통해서 알게되는 것은 전도 및 선교의 사역을 성령께서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움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사의 여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택함 받은 그릇으로서의 삶을 바울은 그의 사역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파송

1) 선교의 전진 기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거쳐 마침내 안디옥까지 전해졌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는 매우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 그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지시는 틀림없이 교회의 여러 선지자 중 한사람을 통해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 한사람이 금식하며 기도할때에 성령의 분명한 메시지를 받은 것입니다. 즉, 바나바와 사울을 더 먼지역의 사역을 위해 안디옥 교회에서 따로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동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분명한 뜻으로 인정하고, 그 두사람을 파송하기에 앞서 안수함으로써 그 뜻을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디옥의 온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사역에 동참했습니다.

a.교회의 선지자(엡4:11)

b.성령의 사역(행16:6)

2) 구브로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

그후 바나바와 사울은 오른테스 강 하구에 있는 안디옥 항구 실루기아 피에리아로 내려가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향했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습니다. 당연히 바나바의 마음을 더욱 끌었음은 분명합니다. 구브로의 살라미에 도착하여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섬 전체를 횡단여행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구브로 섬은 그 길이가 약 224km이며 그 폭은 약 96km가 됩니다. 당시 구브로 섬은 인구가 조밀한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선교사 일행은 구브로 섬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선교사 일행이 구브로 섬의 서쪽 끝에 있는 바보에 도착했을때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납니다. 그 총독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유대주의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었고, 엘루마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 박수 바예수의 영향을 받았었습니다. 바예수가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자 바울은 그의 악행을 책망하고 바예수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서기오 바울이 회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보에서 사울이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난 후부터 사울은 계속 바울로 불립니다.

a.거짓 선지자(마7:15)

b.악의 관영(롬1:29)

 

2.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1) 요한 마가의 이탈

이 선교사들의 안디옥 출발때에는 요한 마가를 수종자로 둔 바나바와 사울로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브로를 떠날때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됩니다. 라나바의 위대성은 그가 기꺼이 바울을 지도자로 내세움으로써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갑니다. 그러나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경우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 삼촌이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난 상태에서 계속 여행을 하고 싶은 심정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며, 바울과 바나바가 버가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들어가기로 결정하자 처음 따라 나설때의 예상보다 기간도 길어지고 고생도 예상되므로 포기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이유로 일행을 떠났든간에, 바울은 그것을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a.수종자(딤후1:18).

b.사역자의 임무(고전1:17)

2) 안식일의 첫 설교

비시디아 안디옥은 로마의 통상 요충지로 해발 900m나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행정상으로는 로마의 속주 갈라디아에 속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갈라디아의 여러 도시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행대로 도착후 첫 안식일 아침에 그곳의 회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개회 기도와 성경 낭독이 있은후, 회당장이 이 두방문객에게 혹시 예배자들에게 권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청했습니다. 바울은 그 부탁에 응했습니다. 바울은 이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행하신 권능의 역사를 토대로, 최근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권능의 역자들을 선언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의 구원이 이날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참석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값없이 제공되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a.하나님의 은혜(고전3:10)

 

3. 안식일의 두번째 설교

1) 유대인들의 시기와 논쟁

바울의 설교는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중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이때 참석했던 이방인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이방인들의 큰 무리가 회당에 나왔습니다. 회당의 정회원 중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시기했고 바울이 설교를 시작하려고 하자 공박하고 비방하며 나섰고, 자연히 집회는 무질서하게 되었습니다.

a.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시31:19)

b.비방함(벧후2:12)

2) 제자들의 기쁨과 성령충만

복음전파의 놀랄만한 성공은 유대인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심지어는 핍박을 계속하여 성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선교활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선포합니다. 이방선교를 위한 새로운 출발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언의 성취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쫓겨난 사도들은 성령과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사역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a.이방의 빛(눅2:32)

 

결론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열렬히 받으려고 하는 반면 유대인 공동체의 대다수는 복음을 배척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인해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사49:6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회복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또한 이방인에게 빛이 되라는 사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복음사역에 참여케 하신 이유를 알게 합니다.

 

# 핵심

13:1-12

본장과 14장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 기사이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 일행의 첫 사역지는 구브로였다.

안수(13:3)

머리에 손을 얹고서 그 사람에게 영육간의 복이 임하기를 비는 행위이다. 직분자를 세울때 직임을 수여하는 상징적 표시로서 안수하기도 한다(신 34:9). 구약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전가하는 의미로 희생제물에게 안수하기도 했다(레 16:21).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실 때와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안수하셨다(막 6:5). 그리고 바울과 사도들도 안수 기도하여 병을 고치거나 성령이 임하시도록 했다(8:17; 28:8).

 

# 묵상

안디옥 교회의 파송 ( 13:2, 3 )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로 하여금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명하셨는데, 이는 주를 섬겨 금식할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는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바예수 ( 13:6 )

바나바와 사울은 바보에서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기오 바울이 구브로 총독으로 있을때 수행원이었는데, 총독이 복음듣는 것을 방해하다가 바울의 저주를 받아 소경이 되었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 ( 13:7 )

바나바와 사울을 부른 서기오 바울은 지혜있는 사람이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바울이 한 일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는 적절한 기회를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제도 ( 13:20-22 )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때까지는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인도하였고, 그후 사무엘때까지 사사가 다스렸으며, 사무엘 이후에는 백성이 왕을 요구하여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거부한 행위입니다. 결국 사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하여 선택한 왕이었고,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선택된 왕입니다. 또한 사울은 사십년 후 폐위되었으나, 다윗은 그의 씨에서 구주가 탄생하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 ( 13:24 )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은 존경하면서도 그가 증거하는 예수님은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유대인들의 잘못과 편견을 깨우쳐 주고자 한 것입니다.

메시야에 관한 구약예언의 성취 ( 13:27-30 )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 구약의 말씀이 다 응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대속주이신 예수님 ( 13:38, 39 )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못하나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 복음의 진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한데,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대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율법은 다만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 사람만이 영원한 복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이방선교의 근거 ( 13:46, 47 )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유대인에게 먼저 전하지 못함은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자신들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적 교만에 빠져있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스스로 내다버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선교의 근거로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교만한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게 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주인이요, 구원자이십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 ( 13:51 )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는 상징적인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밟은후 발을 깨끗이 하고 돌아오는 관습이 있었는데, 바울과 바나바도 그들과 더이상 관계가 없다는 뜻으로 이러한 행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심판날에 그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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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야고보의 순교 12:1-4

바울이 회심한후 제사장들의 하수인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핍박했다는 말을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전혀 다른 측면에서 폭풍이 일고 있다. 국가 권력만으로 핍박이 진행된 것이다. 헤롯은 본래 에돔 사람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것처럼 보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모세가 전해준 의식에 열성적이었고 그 의식에 대한 철저한 신봉가였다고 한다. 그는 헤롯 안디바가 그랬던 것처럼 갈릴리의 본봉왕이자 글라우디오 황제의 위임을 받은 유대 총독이었다. 그는 대부분 예루살렘에서 거주했으며 이 일이 발생한 때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가 다음 세가지 행동을 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가 손을 들어 교회 중 몇사람을 해하려 하였다(1절). 헤롯이 교인 중 몇사람을 해치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단계적으로 이일을 추진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그 교회 중 몇사람에게 손을 댔다. 그는 처음에는 그들을 성가시게 하고 괴롭히기만 했지만 종내에는 아주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2)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2절). 여기서 몇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1) 순교를 당한 사람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였다. 그를 이렇게 부른 것은 요셉의 형제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쓴 야고보는 예수께서 아끼시던 세 제자중 한사람이었다. 또 그는 그리스도께서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제자들 중 하나이다. 그는 세례 요한이 이전의 다른 헤롯을 공박하였던 것처럼 헤롯을 강력한 경고의 설교와 심하게 질책했던 것 같다. 또 그는 예수께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은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으리라(마 20,23)고 말씀하신 세베대의 두아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졌다. 이 사도가 순교함으로 남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무슨 각오를 가져야만 할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2) 그가 어떤 죽음을 당했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칼로 처형을 당했다. 이것은 도끼로 목이 잘리는 것보다 더 수치스런 처형법이라고 여겨졌었다. 이 위대한 사도의 순교에 대하여 스데반의 경우처럼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짤막한 기사로도 초대의 복음전도자들이 자기들의 피로써 진리를 보증하려 했음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다.

(3) 그는 베드로를 투옥시켰다. 그는 야고보를 처형한 다음에 한 걸음 더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다(3절). 피에 굶주린 자는 피를 보면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되어 핍박의 수법도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갈수록 악랄해진다. 누구나 일단 그속에 빠져들면 계속할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죄의 길에 무모한 걸음을 한발자국 내딛는 사람은 사단으로 하여금 그사람이 또다른 발자국을 내딛도록 유혹할 수 있는 호조건을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죄는 처음부터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이일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였다. 유대인들은 야고보가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므로 야고보의 피를 흘리게 한 죄를 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핍박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핍박자와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핍박을 하지 않아서 유대인들이 언짢아해도 그것을 그가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제 그는 적극적으로 핍박을 해서 그들을 즐겁도록 하려했으며 이런 일을 통하여 그들의 불유쾌함을 무마하려 하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하는 사람들은 쉽게 사단의 먹이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는 무교절이었다. 즉 유월절 기간이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각처로부터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악감정을 서로서로 부추겨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본문에 베드로의 투옥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4절). 헤롯은 베드로를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 베드로는 넷씩인 네패의 군사에게 즉 16명의 군사에게 넘겨졌다. 그 군사들은 한번에 네명씩 교대로 베드로를 감시했다. 이렇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베드로를 단단히 붙잡아 두었다고 생각했다. 헤롯의 계획은 그를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구경거리로 삼고자 하였다. 헤롯은 결박당한 베드로를 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고 그들의 눈을 기쁘게 해주려 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기쁘게 할 수 있게된 것을 만족히 여겼다. 그는 이 일을 유월절후에 즉 부활절후에 행하려 했었다. 그런데 본문은 유월절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뜻을 지닌 동일한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절기의 분주함이 지나가고 성이 한산해질때, 그는 베드로를 공개 재판을 통해 처형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헤롯과 백성들은 이 야만적인 구경거리를 즐기려고 절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Ⅱ. 베드로의 기적적인 출옥 12:5-19

이 단락에서는 베드로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1) 그것은 뚜렷한 기도의 응답이었다(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5절). 왜냐하면 기도와 눈물은 교회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적들과 싸울 때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싸울 때에도 기도와 눈물로써 대항해야 한다. 베드로의 처형이 연기되므로 그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제공되었다. 야고보는 그들이 신앙을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려져야만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과 계속 함께 있어야만 했고 그러므로 그를 위한 기도가 불붙었으며 헤롯이 그의 처형을 연기하므로 그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으며 이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헤롯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야고보의 죽음이 그들에게 경고가 되어서 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매우 열심히 기도하였다. 비록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죽음과 고난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에 크게 보탬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하여도 이들의 생명과 자유와 평안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다. 그들은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이 기도는 쉬지않고 간절히 하는 기도를 말한다. 고난과 위험이 공공연하게 임할 때는 교회가 모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몰론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이런 때 특별히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2) 그가 구출되던 때를 살펴보자(6절).

1) 그때는 헤롯이 그를 끌어내기로 예정되었던 날의 전날밤이었다.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피할 수 있도록 옥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극한 상황에서는 도우신다.

2) 이때는 그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있을 때였다. 이것 이외에도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파숫꾼들이 문밖에서 옥을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를 구출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구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도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할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인간들에게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다.

3) 이때에 그가 '군사들 틈에서 누워 자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닥쳐올 위험에 떨지도 않았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도 그는 평안히 누워서 잤다. 그것도 적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잤다. 감옥의 군사들 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잠을 주셨다. 그는 구출될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깨어서 안절부절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구출을 받았을때 정말 깜짝 놀랐다.

(3) 그를 구하려고 하늘에서 천사가 왔다(7절).

1) '홀연히 주의 사자가' 그에게 와서 '곁에 섰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린바 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견고한 옥문과 간수들은 그를 그의 모든 친구들로부터는 격리시킬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천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길은 열려있었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중간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옥중에 광채가 빛났다(7절). 비록 그곳은 어두운 곳이고 또 밤중이었지만 베드로는 그가 갈 길을 환하게 볼 수 있었다.

3)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다. 그가 잠을 깰 수 있도록 부드럽게 건드렸다. 선한 백성들이 위험의 시기에 잠이 들어 있을 때 옆구리를 걷어차일 각오를 해야 한다. 계속 곯아 떨어져 있는 것보다 그렇게라도 일어나는 것이 낫다. 베드로를 치면서 한 말은 '급히 일어나라'는 말이었다.

4)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7절). 그들은 베드로의 손에 수갑을 채워 도망가지 못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했던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푸시고 그 손을 자유케 하셨다.

5) 그는 즉시 옷을 입고 천사를 따르라는 지시를 받고 그 말에 순종을 하였다(8,9절).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나 어찌할 줄 몰랐으나 천사가 지시한대로만 따랐다. 그는 허리띠를 띠어야 했다. 그는 걸어 갈 수 있도록 신을 신어야 했다. 또 그는 천사를 따라갈 수 있도록 겉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온 사자가 그를 지켜주고 안내해 주었으므로 큰 용기와 기쁨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는 나와서 따라갔다. 영적인 감금 상태에서 구출된 사람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의 구원자만 따라가야 한다.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오직 자기들을 인도하는 이만 따라 갔었다. 베드로가 천사를 따라갈때 그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였다. 그는 너무나 좋아서 그것이 참인 줄 믿을 수가 없었다.

6) 그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무사히 위험을 벗어났다(10절). 파숫꾼들이 통로마다 겹겹이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아무런 제지도 받지않고 또 들키지도 않고 그 길로 빠져나왔다. 천사와 베드로는 '첫째와 둘째 파수를' 무사히 지났으나 그들 앞에는 아직도 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쇠문 앞에 이르자 그 문이 열렸다. 그들이 그 쇠문에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저절로 열렸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때 그 앞길에 극복하기 힘든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쇠문조차도 저절로 열리게 하셨다. 이 쇠문은 그 성을 빠져 나오는 통로로 이곳을 통과하자 그들은 거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베드로의 구원은 종종 죄인이었던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즉 이 구원은 포로에서 주어진 자유의 선포일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구출해준 것과 같다.

7) 이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천사는 곧 떠나고 그만 홀로 거기에 남게 되었다. 그는 이제 그의 원수들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므로 더이상 안내자가 필요없게 되었다. 그는 이제 안내자가 없이도 자기가 어디에 서있는가 자기 친구의 집이 어딘가 등도 스스로 알아서 찾아갈 수가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때는 특별한 기적은 불필요해지는 것이다.

(4) 그의 구출이 찬양할만한 것임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 사실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1) 베드로가 제정신을 되찾아 스스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11절). 잠에서 금방 깨어난 사람에게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면 그는 당장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드디어 베드로가 정신이 나자 그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알겠노라(11절). 즉 내가 이제야 이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임을 알았다.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절).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봄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는 너무도 기뻐서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깨닫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진리는 체험하여도 그것에 대한 증거는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보혜사가 임하시면 그는 그들에게 얼마나 복된 변화가 역사하였는가를 확실히 알게 하신다.

2) 베드로는 그의 교우들에게 찾아가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들에게 알린다.

①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전후 사정을 깨달았다(12절). 즉 그는 얼마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그에게 임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분별력을 활용할 여지를 남겨놓고 섭리하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수행하셔서 완성시킬지라도 우리가 그 일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② 베드로는 곧 바로 한 교우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요한 마가의 어머니요 바나바의 자매인 마리아의 집이었다. 그 가정 교회에서 작은 예배 모임을 갖고 있었다.

③ 거기서 그는 많은 사람을 모아 함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모두 곤하게 잠이든 야심한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첫째, 그들은 그들의 간절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계속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한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하여야 한다.

둘째, 이제 사태가 더욱 급박해져서 다음날이면 문제가 결판나게 되었음으로 그들은 전보다 더욱 기도에 힘썼던것 같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위한 기도 운동을 벌이도록 이끄신 것은 그를 구원하신다는 좋은 징조이기도 하였다.

셋째,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였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할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격려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것은 기도를 통하여 힘을 합하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노력이었다.

넷째, 이 기도회에 모인 사람의 수효가 많았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기도를 인도할줄 아는 평신도들이 있어서 적절하게 기도를 인도하였고 또 계속해서 오랫동안 기도할수도 있었다.

다섯째, 이렇게 그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때 베드로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베드로가 너희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구나, 자 그가 여기 있다"하고 말씀하신것 같았다.

④ 베드로가 대문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이기까지는 약간의 소동이 일어났다(13-16절).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13절).

첫째, 한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밖에 누가 무슨 용무로 왔는지 확인될때까지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하여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소녀같이 보인다.

둘째, 그녀는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그를 추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 못하였다. 즉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때때로 너무 친구를 사랑하기때문에 경황 중에 그에게 불친절을 안겨줄 때가 있다.

셋째, 그녀가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밖에 섰더라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였다. 그럴리가 없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에 대하여는 오히려 믿지않으려 할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속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틀림없는 베드로라고 말하니 그때 그들은 그렇다면 그의 천사다라고 말했다(15절).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보낸 사자가 그의 이름을 빌어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즉 그 계집아이가 그를 베드로라고 믿은 것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밖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베드로라고 칭했기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베드로가 심부름을 보내서 온 자인데 네가 그를 마치 베드로인 것처럼 착각하였다. 그는 그의 수호 천사다"라고 말했다. 어떤 학자는 그들이 베드로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불길한 전조로서 천사가 나타난 것으로 상상했다고 생각한다. 그 베드로의 수호천사가 이것으로 족한줄 알라 베드로는 죽어야만 한다'고 말하러 온 것처럼 생각했다. 또 어떤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리려 하늘에서 천사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⑤ 드디어 그들은 베드로를 집안으로 맞아들였다(16절). 베드로는 문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고 마침내 그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쇠문은 저절로 열려졌었다. 그러나 그를 반갑게 맞이해야할 그의 친구집의 문은 저절로 열려지지 않았고 그는 오랫동안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지금까지 그로인하여 슬픔과 염려속에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만큼이나 그들의 기쁨과 놀라움도 컸다.

⑥ 베드로는 자기가 구출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가 그들앞에 나타나자 그가 구출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 주변에 여러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소란을 떨었으므로 그는 자기가 구출된 경위를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였다(17절).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일에 대하여 그들과 함께 엄숙히 감사를 드린 다음 거기를 떠난것 같다. 기도를 하여 응답을 받으면 반드시 찬양을 드려야 한다.

⑦ 베드로는 다른 교우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도록 사람을 보냈다. 가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17절). 그는 자기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야고보와 그의 형제들에게 자기의 구출됨을 알리도록 하였던것 같다. 비록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살해했지만 거기에는 또다른 야고보가 있었다. 그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거하면서 집회처에서 거기에 있는 형제들을 통솔하였다.

⑧ 베드로는 현재로서는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그는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17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법칙때문에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자연의 법칙이 손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그 길로 피하여야 한다.

(5) 베드로가 구출됨으로 교우들이 승리감에 쌓여있었던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그일로 인하여 발생한 원수들의 혼란상을 살펴보자. 이일로 인하여 가장 큰 곤혹을 겪었던 것은 파숫꾼들이었다(18절).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않게 소동하니(18절). 그들은 지난밤까지만 해도 가능한 한 가장 단단하게 그를 단속했는데 그건 지난밤 일이고 이제는 새처럼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은 분이나서 다른 곳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들은 도망간 죄인을 찾으려 가택들을 수색했으나 허사였다(19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했다(19절). 하나님께서 숨겨둔 사람을 누가 찾을 수 있겠는가?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세상은 이들을 찾아내는데 무력할 뿐이다. 간수들이 그의 탈출을 묵인한 것으로 간주하여 헤롯은 파숫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하였다(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도 이일에 대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19절). 그는 마치 먹이를 놓친 사자처럼 마음이 상했다. 더군다나 그는 베드로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겠다고 그들을 기대에 부풀게 해놓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거만을 떨려던 그의 얼굴은 수치로 먹칠하게 되었고 위신을 회복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그의 거만한 기질에 수치를 안겨주었으므로 그는 더이상 유대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가이사랴로 떠났다.

 

Ⅲ. 헤롯의 죽음 12:20-25

1. 헤롯의 죽음(20-23)

하나님께서 그의 수한을 정하셨다. 그는 야고보를 죽였을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죽이려 하였다. 죄인은 그들이 범한 악행과 그들이 범하려고 하는 악행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

(1) 그의 불법의 정도가 극에 달했다. 그는 자만심때문에 그런 불법을 행했다. 여기에 그가 자만으로 인하여 범죄했던 예가 잘 드러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거만한 자를 벌하시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 두로와 시돈의 주민들이 헤롯을 매우 화나게 했다. 매우 사소한 문제라도 헤롯처럼 거만한 사람에게는 큰 분노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로 인하여 매우 불쾌해 있었다.

2) 그를 거슬렸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그에게 아첨했다. 그들은 그에게 굴종하고 어떤 조건하에서라도 그와 화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 그들이 이와같이 화친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 이유는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기' 때문이었다. 두로와 시돈은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곡물들을 항상 가나안 땅에서 조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헤롯이 화가 나서 두로와 시돈의 곡물수출 금지법이라도 제정하면 그들은 끝장이 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화평하여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그들이 헤롯과의 불화를 막으려고 취한 방법은 '왕의 침소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구로 삼은 것이었다. 블라스도는 헤롯의 귀의 역할을 하는 자로 그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완을 가진 자였다. 이제 그의 중재로 두로와 시돈의 대표들이 헤롯에게 와서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그의 관대한 용서를 빌고 또다시는 그를 거슬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할 시간을 정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자만심을 충족시키고 그의 격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3) 헤롯은 온갖 위엄을 갖추고 거만하게 나타났다(21절). 그는 왕복을 입고 나타나 위에 앉았다. 미련한 자들은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그들을 평가한다. 이런 사람들은 헤롯이 했듯이 스스로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헤롯은 왕복을 입고 위에 앉으므로 왕다운 포용성있는 마음이 결여된 것을 메꾸어 보려고 하였다.

4)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되 그들이 더욱 놀라고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연설을 하기 전까지 그들의 운명이 자기 손아귀에 있음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 했을 것이다.

5) 백성들은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22절). 물론 이것은 그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온 것도 아니며 그들이 그를 고귀하고 선하게 생각한데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그의 환심을 얻고 그와 그들간의 화평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같이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아첨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즐겨하면 쉽게 그들의 밥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아첨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거만을 떨게 해서 결국 악마의 매수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6) 헤롯은 이렇게 부당한 찬양을 취하였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죄가 되었다. 결정적인 그의 잘못은 자기 아첨자들을 꾸짖지도 않고 또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고 잠잠했다는 것이다(23절). 오히려 그는 자기를 신으로 생각하여 자기에게 신적인 영예가 주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2) 그가 이러한 불법을 행함으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23절).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야고보를 죽였으며 베드로를 투옥시키고 그외 많은 잘못을 저지른 죄과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를 죽이라는 명을 받아 그를 친 것은 '주의 사자'였다. 이 주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나 자비를 베푸는 일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는 또 그러한 때 그들에게 일시키기를 기뻐하신다. 천사는 백성들의 갈채에 의기양양해 하며 자기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를 악질로 쳤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가 그를 친 것이었다. 헤롯을 죽이는데는 그리 미미한 존재인 충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그는 충에게 먹혔다. 즉 그는 충의 밥이 되었다. 그는 충에게 먹히어 살이 썩었고 마침내 썩은 나무토막과 같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육체가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자랑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 급급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충의 먹이에 불과하며 따라서 육체를 위한 온갖 치장도 결국은 충을 위한 것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보잘것 없는 미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꺾으시기를 기뻐하실뿐만 아니라 아주 굴욕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꺾으심으로 그들을 경멸하신다. 헤롯은 망하되 충에게 당하므로 그의 기고만장했던 영광에 먹칠을 당하게 되었다.

2. 이후의 복음전파(24,25)

(1)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절). 순교자들의 용기와 위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신 사실은 기독교에 닥친 고난을 능가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더욱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헤롯이 죽은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렸다.

(2)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25절). 비록 예루살렘에는 위대한 교우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었겠지만 아직 그들의 할 일이 안디옥에 남아있었으므로 그들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이같이 우리도 우리의 할 일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으로 돌아올때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왔다. 바로 이 마가의 모친의 집이 베드로의 구출을 위한 기도 모임이 있었던 곳이다(12절). 마가의 모친은 바나바의 누이였다. 바나바가 사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을때 그의 집에서 투숙했었던것 같다. 따라서 그 가족과 친해졌으므로 그들이 돌아올때 마가를 그들 밑에서 훈련시키도록 부탁했었던것 같다. 젊은이를 교육시켜 주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장성한 교역자가 담당해야할 매우 훌륭한 사업이다.

 

# 해설

교회를 핍박하는 헤롯 ( 12 )

교회에 주어지는 시련들은 또다른 예기치 못했던 좋은 결과들을 낳았습니다. 가르침을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감과 더불어 시련은 닥쳐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이 바로 그것입니나. 그러나 이러한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핍박이 다음 장들에 나타나는 선교 사업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야고보의 순교

1) 헤롯 왕의 음모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그 중요성을 더해 갔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성도에 대한 안디옥 교회의 사랑을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헤롯과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대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헤롯은 아그립바 2세로서 하스몬 가에 속한, 부분적으로는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통치자였습니다. 그의 왕국은 그의 조부 대헤롯의 왕국과 같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했으며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a.예루살렘 교회(행2:42)

2) 야고보의 죽음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했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하는 일을 일종의 정치적인 방편으로 사용했습니다. 야고보를 죽인 일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 짓이었음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일로 인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핍박이 닥쳤음을 알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율법에 엄격한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일로인해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a.순교(히11:37)

 

2. 베드로의 투옥과 석방

1) 옥중의 베드로

헤롯은 사도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야고보를 처형한 뒤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렸습니다. 반응이 호의적인 것을 보자, 그는 베드로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는 유대인들의 무교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베드로를 처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헤롯은 유월절후에 베드로를 재판하려고 했습니다. 헤롯은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베드로의 감옥을 든든히 지키게 했습니다. 전에 베드로의 탈출을 기억하고 있는 헤롯은 철저하게 베드로를 지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네 패가 각각 여섯 시간씩 보초를 섰던것 같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간절히 베드로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a.성도의 투옥(눅21:12)

b.간절한 기도(약5:16)

2) 베드로의 탈출

그 무교절 주간 마지막날, 곧 처형당하기 전날밤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주의 천사 혹은 사자가 베드로를 깨워서 겉옷을 입고 자기를 따라 감옥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 손에서 쇠사슬을 벗기시고, 옥지기를 잠자게 하시고 철문을 여셨습니다. 베드로는 거리에 나와서 정신이 나자, 그를 헤롯과 유대인에게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환상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곧 마가의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영접한 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고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a.하나님이 구출하심(시33:19)

b.의심(약1:6)

3) 헤롯 궁의 소동

베드로의 탈출로인해 헤롯 궁에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던 성도들보다도 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탈출을 조사한후, 헤롯은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잔인하게도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헤롯은 죄수들을 도망가게 한 파수꾼들을 무책임하고 신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처럼 잔인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그일로 인해 헤롯은 16명의 파수꾼을 잃었고, 그런 다음 헤롯은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잠시동안 머물렀습니다.

a.파수꾼의 자결 매수(행16:27).

 

3. 헤롯의 죽음

1) 헤롯의 죽음

누가는 헤롯의 타락과 허영 그리고 그가 받은 심판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헤롯이 왕복을 차려입고 거만을 부렸으며 백성들은 그의 웅변술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백성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즉시 심판하셨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그를 곧 쳐서 충이 먹어 죽게 하셨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A.D.44년 가이사랴에서 열린 글라우디오 황제를 축하하는 대중 축하때 갑자기 병에 걸려 닷새 후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핍박했던 박해자는 죽음을 당했고 헤롯을 계승하여 벨릭스와 베스도가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a.주의 사자가 침(왕하19:35)

b.어리석은 자의 교만(마23:12)

2) 하나님의 말씀의 흥왕

박해자는 죽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반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교회사역을 발전 시키셨습니다. 누가는 이 성장 기록으로 그의 작품의 각 부분을 결론짓고 있습니다(참조, 행2:47, 행6:7, 행9:31, 행12:24, 행16:5, 행19:20, 행28:30-31). 복음의 메시지는 안디옥에서 이제 소아시아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기근으로 인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맡긴후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요한 마가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a.하나님 말씀의 흥왕(골1:6)

b.요한 마가(골4:10)

 

결론

야고보는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고, 베드로는 투옥되었다가 도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인하여, 교회사의 시초부터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는 히브리서의 진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첫걸음을 내디딜때부터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핍박의 결과는 오히려 그 풍랑으로 인해 더빨리 복음이 전파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그러했고,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에 대한 박해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 핵심

12:1-19

복음확산에 따라 핍박도 극심해졌음을 보여주는 헤롯의 교회탄압 기사이다.

 

# 묵상

교회의 역할 ( 12:5 )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세상 권력에 대한 소극적 대응 이상의 의미로,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영적 투쟁이며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옥에서 구원받은 베드로 ( 12:6-17 )

천사가 베드로를 깨워 손의 사슬을 풀어지게 했기때문에 베드로는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줍니다. 또한 이와같은 기적은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편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왔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전하는 계집아이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으면서도 막상 베드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의 믿음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헤롯의 죽음 ( 12:23 )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인해 주의 사자가 쳐서 충이 먹어 죽게 되었습니다. 헤롯은 백성의 아첨을 듣고도 그들의 불경건을 나무라지 않고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교만하여서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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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베드로의 변명 11:1-18

이것은 믿지않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받아들인 경위는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1) 예루살렘과 그 인근 교회들에게 이 소식이 즉시 전달되었다. 사도가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전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는다함을 들었다(1절). 즉 지금까지는 대화만 하는 것도 불법으로 여김받았던 바로 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는 기대했던 것 이상의 명예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오만과 완고한 편견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도 거스린다.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이 말씀에 복종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기대한 이상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유순해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다가 너무 쉽게 좌절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2) 유대인 신자들은 이와같이 잘못된 편견을 품는 과오를 범하였다(2,3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2,3절). 그러므로 그의 사도권을 박탈하지 않는다면 사도직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교회가 주는 은총을 독점하여 다른 사람들을 그 은혜에 참여치 못하게 함은 대단히 불상사이며 손실이 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노골적인 대적자들이나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한 일이 떳떳하다면 우리의 형제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베드로처럼 동요됨이 없이 그 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열성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사려 깊은 것 같으나 실상은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도량이 넓고 관대하며 자애로운 정신을 지닌 사람도 편협한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3) 베드로는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오해를 풀기에 충분하도록 이 문제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였다(4절).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4절).

1) 베드로는 그들이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했다면 자기와 논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비난하기에 앞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을 잘 살펴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베드로는 기꺼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 그는 하나님 안에서 이방인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설명하면서 어떻게 하여 이전의 생각(이방인들의 현재 생각)을 버렸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환상을 통하여 더이상 의식법을 구별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여기서 우리가 앞서 10:9절이하에서 살펴보았던 그 환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5,6절). 10장에서는 보자기가 '땅에 드리웠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내 앞에까지 드리웠다'고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모든 자기 계시를 심지어 우리에게까지도 보여주심으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적용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보자기가 그의 앞까지 이르자 '이것을 주목하여 보았다'(6절). 우리가 신령한 일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면 우리는 그 일에 마음을 다 쏟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베드로는 양심에 걸려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에게 모든 종류의 고기를 구별하지 말고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7절).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그도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피하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거부하였노라고 변명한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8절). 그러나 전에는 더러웠던 사람들과 짐승들이라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질적으로 변화시켰으므로 베드로가 이것들에 대한 과거의 관념을 바꾼 사실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이 일에 대하여 그가 세번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다는 사실에서 볼때 그가 단순한 망상에 빠진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10절).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환상이었음을 그에게 더욱 확신시켜 준 사실은 그것들이 공중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자를 따라가라는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그는 고넬료의 사자들이 그에게 온 시간이 그가 환상을 본 직후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며, 또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할 것 같아서 성령께서 '아무 의심말고' 그들과 '함께가라'고 명령했었음을 알린다(11,12절). 그는 주저함없이 그들을 따라나서야만 했다. 그는 할례받은 신자들도 몇명 데리고 갔다는데 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 일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고 조언을 받아들이며 성급하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고넬료 역시 한 환상을 보았다(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13절). 베드로는 고넬료가 본 자기에 관한 환상과 자기가 본 고넬료에 관한 환상 이 두가지로 그 일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10장에 나온 천사가 고넬료에게 한 말에 또다른 내용이 추가되고 있다. 10장에는 '베드로를 청하라'(흠정역 성경에는 '그러면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하리라가 첨가되었음-역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고 되어있다(14절). 복음의 말씀은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구원을 얻게하며 단순히 듣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가족까지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이는 성경에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너의 집안 모든 사람들이 너 자신처럼 구원의 유익에 동참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너희 집안의 가장 천한 종에게까지 이를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도 임하게 되었다.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만든 사건은 청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일이었다. 이 사실은 명백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시작할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되어진 사실을 입증하셨고 그것을 시인하셨음을 선포하셨다.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상기하였다. 요한은 물로 세례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16절).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요 그의 약속의 성취며 결과이다. 그 크신 약속은 그가 하늘나라에 가실 때 그들에게 남기신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이 은사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그의 입으로 약속되었고 이제 그의 손으로 성취되었다. 성령의 은사는 일종의 세례이다. 그때 말씀하신 약속과 지금 내려진 이 은사를 비교함으로써 그는 그 문제가 그리스도 자신이 결정하신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17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즉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베푸신 자들에게 물로 세례주는 것을 내가 거절하겠느냐?" 반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교통하시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공동체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그 문제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비난하던 사람들 중에는 그들의 비난이 부당하고 근거가 없다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고집을 꺾지않는 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있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한 말을 듣고 평안을 되찾았으며 베드로가 행한 일에 대하여 더이상 공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품었던 화를 풀고 평안을 얻었을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자비를 하나님께서 불쌍한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주심을 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18절)하며 감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회개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로인하여 슬퍼하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발견케하사 그에게서 참 기쁨을 얻게 하신다. 진실한 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한다. 회개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 된다. 그 회개의 순간만 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렇게 살기 시작하여 영원한 삶에 이를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것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며 또 우리 안에서 회개케 하는 것도 그의 강력한 은사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려고 작정하는 곳에서 항상 회개를 먼저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사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행 5:31)하셨을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그런 은혜를 주셨다.

 

Ⅱ. 안디옥에서 교회가 섬 11:19-26

우리는 여기서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 성장하는 모습을 대하게 된다. 안디옥은 이 당시 시리아의 수도였으며 전 로마 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었다. 안디옥에서는 복음전도의 성공이 상술되었던 점으로 봐서 이 책의 저자인 누가와 이 책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는 데오빌로가 안디옥 출신이라는 사실을 추정하기도 한다.

(1) 제일 처음으로 이곳에 복음을 전한 이들은 스데반의 순교시에 일어났던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흩어진 사람들이었다(19절).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교회가 당한 아픔으로 선한 사업이 이루어졌다. 원수들은 그들을 흩어지게 하여 소멸시키려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흩어지게 하여 쓰시고자 작정하셨다.

1)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은 자기들의 사명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복음전파자들을 핍박하던 자들은 이방인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원했지만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그일을 촉진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 도시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도시로 도망을 다녔을망정 그들은 신앙만큼은 가지고 다녔다.

2) 그들은 복음전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한후 그들은 다시 베니게와 구브로 섬과 수리아까지 더 나아갔다. 비록 그렇게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적들에게 자신이 노출되지만 그들은 여행을 계속하였다. "좀더 멀리"하는 것이 그들의 표어였다.

3) 그들은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아직 이방인들이 같은 상속자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들이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로 그냥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4) 그들은 특별히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이라 불리우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여기의 복음전파자들 중 대부분은 유대와 예루살렘의 출신이었지만 바나바(행 4:36)와 시몬(막 15:21)같은 이들은 구브로와 구레네 태생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헬라파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들과 입장이 같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안디옥 사람들에게 복음전하기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그들에게 주 예수에 대하여 전했다. 주 예수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전도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이밖에 그 누구를 전하겠는가?

5) 그들은 복음전파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21절). 그들의 전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였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21절). 그들은 단지 듣는 이들의 귓전까지만 그 말씀을 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까지 파고 들게 하셨다. 이들은 사도가 아닌 평범한 사역자들에 지나지 않지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니 놀라운 일을 행했다. 이로써 풍성한 선한 열매를 맺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절). 그들은 믿게 되었다. 즉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 믿음의 증거는 주께 돌아온 사실로 들어났다. 그들은 율법의 의를 얻으려 하는데서 돌아와 믿음으로 얻는 의인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데로 나아왔다. 그들은 주 예수께 돌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이 되셨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또 잘 믿는체 하여도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복음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2) 안디옥에서 시작된 이 선한 사업은 사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통해 속행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 예루살렘 교회가 거기에 바나바를 파송했다. 예루살렘의 교인들은 안디옥에서도 복음이 받아들여졌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22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22절).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에게 바나바를 파송한다. 그들은 그를 사절로서 안디옥에 보냈으며, 바나바는 멀리 안디옥까지 가야 한다. 바나바는 이런 사역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일에 대한 재능이 바나바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일을 맡는 것이 가장 적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바나바는 복음이 정착된 것과 자기와 같은 고향 사람들인 구브로 사람들이 복음전파의 도구로 수고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23절). 그는 그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했다. 어떠한 일에든지 선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볼 때에 기뻐해야 하며 더구나 전혀 예기치 않던 곳에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더욱 기뻐할줄 알아야 한다. 바나바는 믿고 나온 사람들의 믿음을 가능한 한 굳게 다지는 일을 하였다. 그는 그들을 권하였다. 바나바는 '권고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름에 부합하는 일을 하였다. 즉 그는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달리 해석하면 '위로의 아들'이 되는데 그는 거기서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위로하며) 권하였다(어떤 영역본에는 위로하며라는 말이 삽입된 성경도 있음-역주). 바나바는 그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으며 그래서 더욱 진지하게 그들과 모든 것을 견디어 나갔다. 주께 붙어 있다는 것은 그를 좇는 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이며 그를 따르다가 낙심하거나 기진하지 않는 것이다. 그를 꼭 붙잡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에게 꼭 붙들려 있어야 한다. 또 전심으로 모든 이해력을 다 발휘하여 굳건하고 신중한 결심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 그의 훌륭한 성품이 언급되어 있다.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24절). 그는 의로운 사람일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 즉 착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의 사역자들은 자신과 그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칭송을 얻는다. 그는 착한 사람, 즉 구제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행 4:37). 그는 성령의 은혜와 은사들을 풍성히 받았다. 그가 만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성품을 타고났다 하여도 이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믿음의 은혜가 충만하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였다. 바나바는 교회내에 있는 사람들을 잘 가르쳐 튼튼하게 함과 동시에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선한 일을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니라(24절).

2) 바나바는 사울을 데려오려고 다소로 갔다. 바나바는 다소까지 가서 사울을 만나 안디옥에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사역하기를 간청했다(25,26). 여기서 바나바가 착한 사람인 것이 두가지 사실로 잘 나타나고 있다.

첫째, 그는 숨겨진 유능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의 재주를 발휘하도록 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사울을 발굴하여 대중 앞에 끌어 낸 이가 바로 바나바였다. 발아래 있는 등불을 가져다가 등경위로 올려 멀리까지 골고루 비치게 하는 것도 훌륭한 선행이다.

둘째,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와서 설교자(행 14:12)로 삼았다. 이는 그가 돋보이기 때문에 자기의 명성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기꺼이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왔다.

3) 우리는 여기서 좀더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봉사했던 일들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일년 내내 거기서 그들을 위하여 신앙을 위한 집회를 열며 복음을 가르쳤다(26절). 무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역자들이 담당해야할 임무의 하나이다. 그들은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교인들의 대언자가 되어야할뿐 아니라 성경을 펴서 교인들에게 주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야 한다. 교역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때, 즉 고기 떼가 몰려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질 기회를 얻을때, 매우 큰 용기를 얻는다. 설교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내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편이다. 안디옥 교회에 주어진 명예는 무엇이었는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절). 바울이나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사도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그곳의 그리스도 교회는 사람들이 제일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리켜 제자들, 생도들, 학자들이라 하였는데 이후부터는 일괄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졌다.

첫째, 이 이름이 생김으로써 적그리스도인들이 붙였던 악의에 찬 호칭이 이 이름으로 대체되었던 것 같다. 이적들은 그리스도인을 나사렛단(행 24:5) 즉 이단이라하여 정당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렇게해서 그들은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에 적대적인 편견을 갖도록 조장했다. 이러한 편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적들도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호칭을 스스로 정하였는데 이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둘째, 이렇게해서 개종전에 유대인 또는 이방인이라는 명칭때문에 서로 구별되던 사람들도 개종후에는 동일한 한가지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나는 유대인이었다" 혹은 "나는 이방인이었다" 고 말하지 않고 둘 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동일한 명칭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셋째, 그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그 명칭을 "예수란 이름에서 따오지 않고 그의 직분을 나타내는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호칭을 취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호칭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적들은 이 이름을 통하여 그들을 경멸하여 죄인들로 매도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의미로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넷째, 이렇게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게 되었다.

다섯째, 이렇게해서 그들은 그들 자신과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름을 고백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도록 하는 강력하고 영속적인 책임이 부과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들을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러면 우리는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맞도록 행동하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임을 고려하여 그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라는 이름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도록 처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Ⅲ. 안디옥 교회의 헌금 11:27-30

우리 주 예수께서는 승천하시자 사람들에게 은사를 부어주셨다. 예수는 사도나 전도자에게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게도 은사를 내려주셨다.

(1) 이 선지자들 중 몇명이 안디옥을 방문하였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27절).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것이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잡아죽이고 농락함으로 악명이 높았으므로 이제는 이들 선지자들까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이들은 안디옥에 왔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왔고 그들이 그 교훈을 잘 받아들이자 '장차 되어질 일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지자로 보냄 받았다.

(2) 이 선자자들 중 하나인 아가보라는 사람이 기근이 다가온다는 특별한 예언을 하였다. 아가보는 이 다음에 바울이 옥에 갇힐 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음을 우리는 다시 대하게 될 것이다(행 21:10,11). 여기서 그는 일어나 예언을 하였다(28절). 이는 그가 예언하였던 것을 암시하는듯 하다.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28절). 그가 예언한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천하에 흉년이 크게 들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흉년은 어떤 특별한 한 나라만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 즉 로마 제국에 걸쳐서 닥칠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으나 아가보는 이제 목전에 임한 특별한 기근에 대하여 예언을 했다. 이 기근의 도래는 어떠했던가. 그 기근은 그의 즉위 2년부터 시작하여 적으로 4년까지 계속되었다. 요세푸스등 많은 로마의 역사가들이 이 기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3) 그들은 이 예언을 선용하였다. 그들은 기근이 목전에 임했다는 예언을 들었을때 자기들의 곡식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선 기금을 위해 내놓았다.

1) 그들이 이 일에 대하여 결정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29절). 그들이 구제하기로 정한 사람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었다. 비록 우리가 기회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해야하지만 우리는 권속들에 대하여 항상 특별한 배려를 해야한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중의 가난한 사람은 더욱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 성도의 교제가 이런 일에까지 연장되어서, 안디옥에 있는 교인도 유대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형제라 불렀으며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호품들을 준비하였다. 우리는 이 지역의 기독교 개종자들 중 거의 대다수가 가난한 사람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기근이 온다면 그들은 곤경을 격게 될 것이며 만일 그들 중에 아사자라도 생기는 날에는 기독교인들에게 큰 욕이 돌아갈 것이다. 제자들이 이 일에 대하여 결정한 합의사항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힘대로 이 선한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상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에 물품을 보내 수송효과로 이윤을 올리듯이 우리도 구제를 필요로 하는 먼데 있는 사람들에게 구제품을 보내어 그 효과를 높여야 한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이러한 요청을 받을때 우리는 더욱 앞장서 이를 감당해야 한다. '자기 힘대로'라고 말할때 그 기준은 자기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심사숙고 해야 한다.

2) 그들은 자기들이 결정한대로 실행하였다(30절). 그들이 '이를 실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하여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된 사항을 실천에 옮겼다. 이런 유의 많은 선한 사업들이 계획되고 추진되지만 실행되기는 어렵고 따라서 무의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연보는 모였고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에 보낼만큼 충분한 양의 물품이 모아졌다. 그들은 그것을 유대의 교회에 있는 장로들에게 보내서 자기들이 힘대로 모았듯이 받는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도록 부탁하였다. 바나바와 사울이 이것을 수송하였다. 복음의 사역자가 교회 구제품을 전달하는 일을 맡는 것은 늘 있는 일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경우이다.

 

# 해설

안디옥 교회의 설립 ( 11 )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할 것이 많이 있듯이, 사도들의 의식에 있어서, 또한 안디옥 교회의 준비에 있어서도 동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장에서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비난을 받은 일로인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로 그들을 깨우치자 저희가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흩어진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안디옥 교회를 세우려는 예루살렘 교회의 노력과 그 일로인해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변명

1) 할례자들의 비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행한 일은 예상할 수 있는대로 베드로보다 먼저 소문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엄격한 유대인 신자들에게 '왜 거룩한 규례들을 어겼느냐'는 질문 공세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한 일이 불신자 유대인의 귀에 들어가면 베드로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까지도 당혹한 지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유대에는 이방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유대인들을 민족의 반역자로 비난하는 투쟁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때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과 친교를 갖는 것뿐 아니라 점령군의 일원인 로마 군인들과도 친교를 갖는 행위였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여러가지였습니다. 할례받은 신자들이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아직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는 그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먹음은 그를 받아들이고 교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a.할례와 무할례(갈6:15)

b.편협한 태도(막9:38)

2) 베드로의 변명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할례받은 신자들에게 그가 본 환상과 그것의 성취,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갔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답게 자기가 이전에 갖고 있던 편견을 하나님이 어떻게 깨우쳐 주셨는지 그 경위를 담담히 증거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택한 백성을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베드로의 증언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한대로 고넬료와 그의 식구들이 베드로가 설교하는 동안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조차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a.환상(사21:2)

b.생명을 얻는 회개(고후7:10)

3) 무죄 선고

베드로의 변명은 자신이 행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시지 않으셨음을 알고, 자신 또한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와 성도들은 이방인의 개종을 하나님이 주도하셨으며 또한 이 일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두가지 중대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그리스도 공동체로 보전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 시대의 신자들과 성전 예배자들 사이에 커다란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호의적으로 보았으나 이일 후로는 유대인들이 교회를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a.하나님의 공평(롬10:12)

b.유대인의 핍박(살전2:15)

 

2.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

1) 환난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

처음으로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개종시켰습니다. 누가는 다시금 스데반의 순교를 이야기하면서 그 일이 준 또다른 결과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은 사마리아 전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이 더 열렬하게 교회를 핍박하도록 자극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를 개종시켰습니다. 세번째 결과는 복음이 이방인의 땅으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누가는 환난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이 할례없는 헬라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첫발을 내딛게 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a.스데반의 순교 결과(행8:1,4)

b.헬라인에게 복음전파(요7:35)

2) 안디옥에서의 복음전파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은 오른테스 강 하구에서 상류 쪽으로 24km 가량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B.C.300년에 세워졌고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여러개로 분할되었을 때 그중 한나라의 수도였습니다.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 내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였고 명실공히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월이 갈수록 인종이나 종교의 차이가 그 중요성을 잃어 갔습니다. 이 안디옥이라는 도시에 박해를 피해 유대를 빠져나온 신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안디옥에서 먼저 유대인 공동체에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보다 진취적인 사람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이방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열렬히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계속해서 현저한 이방인 교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a.이방인의 개종(엡3:6)

b.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갈3:28)

3) 바울과 바나바

예기치 않은 이 복음의 확산 소식이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위로의 아들' 바나바를 안디옥에 대표자로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몹시 기뻐하면서 그곳에 머물며 이 역동적인 안디옥 교회의 진행에 필요한 일을 감독하고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역이 그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알고, 그는 옛친구 사울을 데리러 다소에 가서 안디옥으로 데려가 일년 동안 함께 사역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a.견실한 생활(고전15:58)

b.권면(살전2:4)

4) 안디옥 교회의 선교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로마 전체가 크게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고, 실제로 기근이 닥쳤습니다. 이때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헌금을 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이방인들로 주종을 이룬 안디옥 교회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도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처음 불린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a.그리스도인이라 불림(벧전4:16)

b.부조를 보냄(롬15:26)

 

결론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용어가 세번 나오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붙여진 이름과 행26:28절 그리고 벧전4:16절 입니다. 각 경우 모두 직설적이든 암시적이든 불신자들의 입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 그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신자가 신자다워질 때에, 그 이름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교회들이 될 것입니다.

 

# 핵심

11:1-18

보수적인 유대인 신자들이 고넬료 사건에 대해 반발하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적극 변론했다. 그 결과, 그들도 이방 선교의 당위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령 세례(11:16)

성령께서 죄인의 심령에 임하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하시는 중생 사역을 뜻한다. 이는 개인의 일생 동안 단한번 일어나는 단회적 사건이다. 아담의 타락이래 모든 인간의 심령이 부패해졌으므로 성령세례 없이는 아무도 영적으로 거듭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자이다.

 

# 묵상

베드로와 할례자들 ( 11:2, 3 )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해서 베드로를 힐난했습니다. 이와같이 유대의 할례자들은 아직까지도 주께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민족적 독선과 우월감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명하심대로 행한 베드로 ( 11:12 )

성령의 명에 따라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가까이할 수 없는 속된 존재로 생각했지만 성령이 명하실 때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의 작은 지혜로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밝히 알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명후의 반응 ( 11:18 )

베드로가 욥바에서 받았던 환상과 성령의 명에 따른 고넬료 방문을 설명하자, 유대의 사도들과 형제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은 모두 존귀히 여김을 받을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구원을 얻기위한 전제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의 안디옥 사역 ( 11:20 )

이들은 헬라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에 와서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 11:22-26 )

이 교회에 파송을 받은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인정하였던 신실한 자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곳도 이곳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지칭할때 쓰던 단순한 호칭으로 경멸의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 호칭을 2세기경에 정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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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고넬료에게 일어난 사건 10:1-8

이 위대한 사업이 시작될 때의 모든 상황에 관심을 갖고 세심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셨다는 경건의 비밀'(딤전 3:16)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아직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의도적으로 전해지지는 않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세례받은 이가 없었다. 전도되고 세례받기는 고넬료가 처음이었다.

1. 고넬료에 대한 설명(1,2)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게된 사람이다. 본문에 보면 그는 지체있고 선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두가지 성격이 한사람에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성품이 만나게 되면 그것은 서로를 빛나게 해준다. 선함은 지체있음을 더 가치있게 해주며 지체가 있으면 선한 일을 더많이 할 수 있다.

(1) 고넬료는 군대의 장교였다(1절). 본문에는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가 나오는데 그들이 모두 순수한 로마인 즉, 이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고넬료는 이 군대의 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상당한 지위의 장교 즉, 백부장이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 대단한 칭찬을 받은 백부장을 기억하고 있다(마 8:10).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처음으로 받아들인 한 이방인 군인이었다. 그는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소개받았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열히 환영하였다. 군인이나 장교라고 해서 신앙이 없어도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이 교회에 가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첫 개종자가 로마 군대의 장교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2) 그는 본래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2절). 그는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군인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2절).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선한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도 선해지도록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그는 매우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 또한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구제와 경건의 역사가 일어난다.

2. 하늘의 명령을 받음(3-6)

베드로를 청하는 사람을 보내라는 명령이 하늘로부터 고넬료에게 내려졌다.

(1) 이 명령이 내려진 경위 : 그는 환상을 보았고 환상 중에 천사가 그에게 이 명령을 전하였다. 그때는 '제9시쯤'이었다. 그때는 성전에서 저녁 희생을 드리는 때였으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이때를 기도의 시간으로 삼았다. 고넬료는 그때 기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30절에서 고넬료가 직접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왔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밝히 보았다. 꿈속에 상상한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환상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천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지신 특별한 관심을 암시하기 위하여 고넬료야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은 고넬료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4절).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뜻에 따를 준비가 되어 이는 사람처럼 말했다.

(2) 메시지의 내용

1) 고넬료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4절).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4절). 기도와 구제는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구제로 뒷받침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으로 구제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깨끗하여 진다(눅 11:14). 또 우리의 구제는 기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은혜스럽게 받아들이실 것이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드리듯이 진실하게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였다. 그리하여 본문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기억된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도와 구제는 우리의 영적인 제사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인정하시고 기쁘게 받으신다.

2) 고넬료는 더많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알게 되리라고 약속받았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5,6절). (그가 와서 마땅히 어떻게 행하여야할 것을 너에게 보이리라-흠정역). 본문에는 놀라운 사실이 두가지 있다.

첫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며 구제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과 온 가족이 신앙 안에서 살았다. 그가 해야할 것이 더 있었다. 즉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것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다. 그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믿었으므로 이제 그 약속의 성취도 믿어야 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나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

둘째, 고넬료는 하늘에서 온 천사가 그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으며 단지 "베드로를 부르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말해 주리라"고만 하였다. 베드로가 천사도 허락받지 못한 것을 전해야 했다는 사실이 그 사도에게 영예가 되었지만 그에게 가도록 명령하기 위해서 천사가 보내졌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 큰 영예가 되었다. 신실한 사역자와 순종하는 백성을 결합시키는 것이 천사가 하는 가치있는 일이다.

3. 고넬료의 복종(7,8)

그는 그 명령에 즉시 복종했다(7,8절). 그는 신속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했다. 그는 말했던 천사가 떠나자마자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서둘렀다. 우리의 영혼이 관계되어 있는 일에는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다. 누구를 보냈는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7절) 보냈다. 경건한 백부장에게는 경건한 군인들이 있었다. 적은 신앙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군인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된다. 그러나 지휘관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군인들에게는 더 큰 감화를 줄 것이다. 이 백부장이 군인 몇 명을 뽑아서 그를 수종들며 항상 곁에 있게 한것은 그들이 자기 신앙의 본을 받게하려 한 것이다. 이 일을 다 고하고(8절). 고넬료는 베드로가 있는 곳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그를 청해야 하는 이유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종졸들이 베드로를 간청하여서라도 데려올 수 있게 하였다.

 

Ⅱ. 베드로가 본 환상 10:9-18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명령을 하늘에서 직접 받았다. 그러나 또 한가지 난제가 남아 있었다. 그 문제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과연 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며 할례도 받지 않았다. 베드로는 자기 동족들의 옹졸하고 편견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넬료에게 가는 것을 부끄러워할지도 몰랐다. 이제 그 난관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에게도 환상이 나타나 그를 청하러 오는 자들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켰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을 가르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도 자신도 본문에서처럼 환상으로 계시되기 전까지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1. 환상이 나타났을 때의 상황(9,10)

(1) 그때는 고넬료의 사자들이 성에 가까이 갔을 때였다(9절). 베드로는 그들이 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들도 그의 기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베드로나 그들 모두를 아시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이 만남을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그것이 사용될 기회가 왔을때 그들에게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신다.

(2) 그때는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간' 때였다. 베드로는 기도를 많이 하였다. 그는 '아침과 저녁' 뿐만이 아니라 '정오'에도 즉 제6시에도 기도하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식사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지낼 수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그는 그가 간구한 직후에 이 환상을 보았다. 기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준비이다.

(3) 또한 그때는 그가 매우 시장한 때였다(10절). 그래서 그는 먹고자 하였다. 이 배고픔이 식사에 관한 환상을 유발시켰다. 그리스도께서도 광야에서 시장하실 때에 돌로 떡을 만들라는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었다.

2. 환상의 내용(11-16)

그는 비몽사몽간에 빠졌다. 그는 이 세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우리가 세상에 초연할수록 하늘과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로써 그는 고넬료에게 가라는 지시가 하늘에서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메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이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있는데(12절). 땅에 짐승뿐만이 아니라 공중의 새와 기는 것들이 있었다. 바다의 고기는 없었는데 그들 중에는 특별히 부정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가득찬 보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이 교회에는 헬라인 혹은 유대인의 구별이 없는 모든 나라가 소속되어 있다. 복음의 그물은 나쁜 것이나 좋은 것이나 정한 것이나 부정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를 포용한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생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늘에서 내려온 이 생물들을 봄으로써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 각약각색의 짐승을 먹으라는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13절). 이방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금지해왔던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무척 시장하였으나 그의 원칙을 고수하였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동요하지 않았다.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14절). 굶주린 사람은 돌담이라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돌담보다도 더 강한 울타리이다.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는 유혹은 귀를 기울일 필요없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베드로가 제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18절). "나는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순수성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킬 것입니다." 그의 양심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금지된 음식을 먹지 않았음을 자부했다. 하나님께서는 두번째 음성을 통하여 율법의 이 부분이 폐기되었음을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율법을 만드신 그분은 원하신다면 율법을 바꾸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분은 금하셨던 것을 파기하셨고 전에는 우리를 부정케 하던 것을 깨끗케 하셨다. 우리는 이 무한한 긍휼을 환영해야만 한다. 우리가 돼지고기나 산토끼, 집토끼 또 우리 몸을 위한 맛있고 영양많은 음식을 먹게 되어서가 아니라 양심이 이런 자연에 대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세번 있었다(16절). 세번 다 먹으라고 요구하였고 세번 다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관해 우리에게 부여된 지시는 아주 반복될 필요가 있다. 그 그릇이 하늘로 올리워가니라(16절). 이 그릇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교회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그릇이 올라가는 것은 이방인이 교회와 하늘나라에 가입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깨끗케하신 그런 무리들이다.

3. 이 환상에 대한 섭리(17,18)

마침 이 환상을 설명해 주던 섭리가 일어났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17절). 그는 환상의 진실성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관해서 의심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점진적으로 게시하시며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잠시동안 의심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뜻을 밝히시기 전에 그 문제로 우리 마음을 여러가지로 갈등하게 하신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즉시 알게 하셨다. 왜냐하면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17,18절). 그들의 심부름을 통하여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고 나서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의 의미를 더 잘 알게 된다.

 

Ⅲ.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감 10:19-33

본문에서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게 된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베드로는 할례받은 자의 사도로 계획되었지만 이방인의 첫열매를 거두는 것은 베드로가 맡도록 명령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사도에 의해 개종된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일 때 신앙있는 유대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1.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를 받음(19,20)

베드로는 고넬료의 사자를 따라가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19,20절). 이제 수수께끼가 풀렸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 생각할 때에', 즉 그 문제를 음미하고 있는 동안에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가르침 받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1) 베드로에게 지시를 내린 자 : 성령께서 그가 해야할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천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성령에 의해서 내려졌다.

(2) 지시의 내용 : 성령께서 아래층에 세사람이 와서 그와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19절). 그래서 베드로는 명상에서 깨어나 그들에게로 갔다(20절). 하나님의 말씀과 전능자의 환상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는 항상 사색에 잠겨있거나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때때로 그 의미를 찾아나서야 한다. 베드로는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이 그의 의무였기 때문에 그가 갈 것인지 가지 말아야할 것인지, 가야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 어느 것도 의심치 않았다.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20절). 우리가 어떤 일에 부름받았다고 확실하게 느껴졌을때는 일에 대한 의심과 주저로, 또는 인간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2. 베드로의 포용(21-23)

그는 사자들과 사자들의 전달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베드로가 내려갔다(21절).

(1) 그는 기꺼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락했다. 먼저 그는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물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21절). 그들이 대답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22절). 이 말은 베드로가 확신있게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이었다(행 11:14).

(2) 베드로는 사자들을 친절하게 영접하였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23절). 베드로를 위하여 준비된 것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10절). 베드로는 식사에 그들을 초청할때 그들이 어떤 친구가 될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베드로는 그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환상의 의도를 얼마나 잘 지키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거했다. 그들 중에 둘은 하인이고 다른 하나는 군병이었지만 베드로는 그들을 집에 들어오게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3.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감(23,24)

베드로는 저희와 함께 고넬료에게 갔다. 베드로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데리고 갔다(23절). 11:12절에 보면 그들 중의 6명을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초대교인들이 그들의 사역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었다. 사도들은 여행할때 교인들을 동반했다. 대화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 홀로 여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베드로와 그 일행이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 그들은 베드로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고넬료는 그들을 기다렸다. 베드로와 같은 손님은 기다릴만하다. 초조하게 기다렸다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2) 많은 사람이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에게 더욱 용기를 주었다. 베드로가 영적인 선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몇몇 사람을 데리고 온 것처럼 고넬료도 가족뿐만 아니라 일가와 친구까지 불러모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영적인 음식을 홀로 먹으려고 탐해서는 안된다. 신앙적인 행사에 우리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참여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하는 것을 권하는 사람은 친절로 권해야 하며 또 권유를 받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25,26)

본문에서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첫번째 면담이 기록되어 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커다란 존경심과 찬사를 표했다. 베드로가 들어올때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절). 그가 인간을 경배한 것은 참으로 책망받을 일이지만 그가 몰랐다는 점이 고려된다면 용서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모든 사실을 잘 알게될 때까지는 베드로가 천사를 통해 하늘이 보내주시겠다고 한 그분으로 생각하고 경배했다하여도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주어진 명예를 정중하게 사양했다.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절). 교회의 선한 사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를 조금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은 숭앙받기보다는 소욕받는 편을 택해야 한다. 베드로는 자기도 사람임을 알게 하였고 보물은 질그릇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있다는 것과 고넬료가 그 보물 자체를 귀하게 여겨야할 것을 알게 하였다.

5. 베드로와 고넬료의 대화 내용(27-33)

베드로와 고넬료는 서로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하늘에 섭리로 그들이 함께하게 되었음을 설명해 주었다.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27절).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선을 행할 기회뿐만 아니라 엄숙함도 더하여졌다.

(1)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지시하셨음을 밝혔다(28,29절). 그들이 이 집회가 유대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유대인이 다른 민족, 즉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사귀는 것은 불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율법학자에 의해 제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상점에서나 거리에서 이방인과 거래상 얘기하거나 교환하는 것 정도는 금하지 않았으나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금하였다. 그들은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였으며, 이방인 또한 유대인들을 경멸하는데 뒤지지 않았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28절)라고 집회를 가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고 가르쳤던 베드로가 이제 경건한 이방인들과 교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는 최선을 다해 선한 사명을 모두 행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이제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러 온 것이다.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노라(29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물었다.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29절).

(2)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드로를 청하라고 지시하신 것을 밝힌다.

1) 먼저 고넬료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과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라는 지시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환상을 보게된 경위를 설명한다. 나흘 전 이맘 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30절). 그는 회당에 간 것이 아니라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제 9시, 즉 오후 3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중이거나 장사를 하거나 들에서 일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놀이를 하거나 점심후 낮잠을 즐기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때 고넬료는 기도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신앙을 그의 본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천사에 대해서 설명했다. 홀연히 한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30절). 그는 그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우리가 보았던 바대로(4-6절) 반복해서 설명했다(31,32절). 본문에는 다만 '네 기도를 들으시고'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기도의 응답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있게 되고, 구원의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2)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친구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린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33절). 신실한 사역자들은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청을 받아가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사명을 띠고 우리에게 왔고 우리는 여기 모여 소명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우리가 여기 다 있나이다." 이 말은 진심을 더하여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몸은 가르침 받으려고 나오면서도 흐리멍텅한 눈으로 마음은 딴데 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것을 모두 듣고자하여 여기에 모여 있나이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설교했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명하신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신이 전하도록 위탁받은 것이 이전의 우리 생각과 상반되고 현재의 세속적인 관심과 관계가 없다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남김없이 들려주소서."

 

Ⅳ. 베드로의 설교 10:34-43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다. 베드로는 엄숙하고 정중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풍부한 내용을 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34절). 그것은 새로운 설교였다.

1. 설교를 듣는 이방인에 관하여(35)

그의 설교가 새롭게 들려진 까닭은 그가 전한 대상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계가 있음을 베드로는 보여준다. 또한 그는 그들이 유대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복음의 유익을 얻어야할 자들임을 보증하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불변의 원칙으로 확립시켰다(34절). 하나님은 인간의 내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먼 외적인 아름다움때문에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35절).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게 살다가 죽은 사악한 유대인들을 의롭다 하지도 않으시고 구원하지도 않으셨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그들의 특권과 고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해주는 대신 그들의 죄와 저주를 가중시킬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의를 행하는 자 곧 그가 가진 빛에 따라 사는 이러한 정직한 이방인을 거절하지도 않으셨고 부인하지도 않으셨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던지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지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국가나 조상에 의해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를 찾으시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것은 병행되어야 한다. 이것들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것들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경외하지 못한 자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것이다. 고넬료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곳에서는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베드로가 인식하기 전부터 언제나 진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심판날에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묻지 않으시고 그가 한 일을 물으신다. 이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고넬료가 본 환상과 자신이 본 환상을 비교함으로써 이 사실을 인식하였다.

2. 이방인에게 전함(37,38)

그들도 이스라엘 땅이라고 하는 한정된 지역의 한 곳에서 거주하는 이방인들이었으므로 우리 주 예수에 관한 것에 대해 알 수밖에 없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그들에게 전한다. 왜냐하면 이 사실들은 이미 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37절).

(1) 일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알고 있었다(37절).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말하는 것은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한 것이다. 비록 이방인들에게도 그 말씀을 듣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듣지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나안 전역에 전파되었음을 보았다. 그것은 '너희도 알거니와' 능력과 은총의 말씀이었다.

1) 말씀의 목적 :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36절). 전쟁을 선포하시는 것이 마땅했을 하나님 자신이 평화를 선포하신 것이다.

2) 말씀을 보내신 곳 : 먼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였다.

(2) 이 복음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것과 관련된 몇가지 사실이 있음을 그들은 알았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방법으로써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요한이 비범한 인물이며 그의 가르침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임도 알았다. 또한 그들은 요한의 세례후에 즉시 그리스도의 복음, 곧 평화의 말씀이 온 유대 땅에서 전파되었고 이 복음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두루 좋은 일을 행하셨음'도 알았다. 그들은 그가 그 민족에게 얼마나 많은 선을 베푸셨는가도 알았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셨다. 그는 게으르지 않고 계속 일하셨으며 선을 행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가리지 않고 찾아가셨다. 이로써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그가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음'을 알았다. 그는 마귀의 역사를 멸절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는 마귀를 정복하시고 많은 승리를 획득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를 죽인 것도 알았다.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39절). 그들은 누구를 죽였는가. 그는 유대인에게 선을 행하시고자 하셨으며 또한 행하셨던 분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사실들을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지도 않도록 하기위해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도들의 이름으로 이 사실들을 증거하였다(39절).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39절).

(3)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가 하셨던대로 가르치고 행하실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 예수가 바로 '만민의 주가 되신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모든 축복을 영구히 넘치게 하실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의 손에 갖고 계시며 모든 심판을 위임받으신 분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38절). 그는 그리스도라 불리워졌는데 그것은 메시야 즉 기름부음 받은 자를 지칭한다. 그는 능력이 충만하사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셨다. 기적은 거룩한 사명에 대한 표적이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38절).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받은 자들과 함께하실 것이다.

3. 예수에 관한 증거(40)

그들이 이 예수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기때문에 베드로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그 증거를 밝혔다. 혹시 그들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가이사랴에서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소문은 유대인들이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내었으므로 곧 잠잠해졌다.

(1) 그를 일으키신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신적인 것이다(40절).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40절). 그는 탈옥하신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자유로와지셨다. 즉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이다.

(2) 그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를 보이셨음으로 그가 부활하신 사실은 더욱 명백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모두에게 보이시지는 않았으나 분명하게 보이셨다.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41절).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증거에 항거하였으므로 이 위대한 일의 목격자가 되는 은총을 상실하였다. 시체를 도난당했다고 사실을 날조하고 거짓말을 유포시켰던 자들이 나중에 주의 부활을 믿게되는 강한 미혹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부활하신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인원이 그를 보았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충분한 인원 앞에서 증명되었다. 그들은 우연히 증인이 된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기위하여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또는 일시적으로 그를 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와 자유롭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었다'(41절).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를 보았다. 그는 그들과 아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셨으며 또한 그들은 그와 더불어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4. 결론(42,43)

이 모든 사실을 말한 후에 그는 그들 모두가 이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보냄받아 전할 것은 그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였고 이것이 바로 그 해답이었던 것이다. 곧 그에게 결여된 것 한가지는 바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를 믿어야하는 이유 : 기독교 신앙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사도들에 의한 기초 :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백성에게 전도하되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셨다고 말했다. 그들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이다.

구약의 선지자에 의한 기초 :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43절). 이 두 무리들의 입을 통하여 이 말씀이 세워졌다.

(2) 예수에 관하여 믿어야할 것 :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재판장으로 믿어야 한다. 이 예수는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이다'(42절). 구원의 조건을 규정하는 권능이 그에게 주어졌으므로 그가 정하신 법에 따라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행 17:13) 바로 이 사실을 확실케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최대 관심사는 그를 우리의 친구로 삼는 일이다. 우리가 그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43절). 선지자들은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했다.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하는 전부이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죄사함은 다른 모든 은혜와 축복의 초석이 된다. 죄가 용서되면 만사가 형통하게 되며 영원히 형통할 것이다.

 

Ⅴ. 설교의 효과 10:44-48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설교의 결과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다.

1. 성령이 함께하심(44-46)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그의 말을 인정하셨다(44절).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절). 베드로가 11:15절에서 말하고 있는바와 같이 그것은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와 같았다.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는 도중에 성령이 임했다. 이렇게하여 하나님은 베드로가 말한 것을 증거해 주셨고 신적인 능력으로 함께 하셨다. 유대인 개종자의 경우는 그들이 세례를 받은후 그들의 확신을 위하여 성령이 임했는데 이방인들에게는 세례받기 전에 성령이 임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시며 외적인 증표에 얽매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성령이 임한 사실이 어떻게 나타났는가(46절).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46절). 그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베드로가 설교했던 그리스도와 구속의 은혜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든지 우리는 그것으로 특히 말하는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며 그 은사를 더욱 활용해야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신앙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45절). 베드로와 함께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45절). 그들이 구약 성서를 이해한다면 이 일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음(47,48)

베드로는 성령받은 자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했다. 그들이 비록 성령을 받긴했지만 세례를 받은 일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제도화된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를 줌을 금하리요(47절). 논쟁은 끝났다.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증표를 주는 일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교제의 대상으로 삼으신 자들과 교제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이제 왜 그들이 세례받기 전에 먼저 성령이 임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자진해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이례적인 조취가 취해졌다. 하나님의 선한 은총이 선한자들의 구제 이상으로 우리에게 널리 미쳐온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베드로는 직접 세례주지 않고 명하여 세례주게 하였다(48절). 사도들은 '가서 세례를 주어 모든 민족을 내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전념하는 일은 기도와 말씀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세례주는 일은 대체로 하위의 사역자들이 수행했다.

3. 이방인들의 요청(48)

그들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더받아 발전하기를 원하였다.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더 유하기를 청하니라(48절). 그들은 베드로가 즉시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은 베드로가 며칠더 머물기를 요청하고 더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그리스도를 알게된 자는 더욱더 그를 알고자 한다. 또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씀의 가르침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 해설

고넬료 가정에 임한 구원 ( 10 )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는 이 일을 세번이나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요성은 지리적인 확장 또한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의식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음전파에 일보를 내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와 유대인 베드로의 환상을 통한 주님의 뜻을 찾을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백부장 고넬료

1) 환상을 봄

고넬료는 이달리아 연대에서 100명의 군사를 책임맡은 로마의 관원인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오순절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들은 첫 이방인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오후 3시가 되면 고넬료는 기도했고 그 기도시간에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a.이방인 신자(눅23:47)

2) 베드로를 부름

고넬료의 경건은 그의 기도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대한 구제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는 시몬이라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지시했습니다.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세명의 경건한 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하고 욥바로 보냈습니다. 세사람은 고넬료의 설명을 듣고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33마일 떨어진 욥바로 갔습니다.

a.천사의 나타남(마28:2)

b.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됨(계8:4)

 

2. 베드로의 환상

1) 환상을 봄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들의 예를 따라서 하루에 세번 기도의 시간을 갖은듯 합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기도하러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혼자있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픈 중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온갖 짐승과 파충류와 조류를 담은 그릇을 내려보내시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짐승들을 먹으라고 명하셨을 때, 그의 대답은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율법을 통하여 부정한 짐승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환상은 세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는 이 환상이 주는 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a.속되고 더러운 것은 먹지 아니함(겔4:14)

b.하나님이 깨끗케 하심(롬14:14)

2) 사자들의 방문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고민하던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로 세사람의 사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이 세사람의 도착에 대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자들은 고넬료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베드로에게 자기들이 온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맞아들여 유숙하게 했습니다. 그는 환상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a.성령께서 말씀하심(행8:29)

 

3.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1) 가이사랴를 향해 출발

이튿날 그들은 가이사랴를 향해 북쪽으로 출발했습니다. 베드로는 지혜롭게 욥바 출신의 다른 신자들 몇 명을 동행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파격적인 행위를 설명하도록 요구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때 이 증인들이 한몫 하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가이사랴에는 고넬료가 그의 일가와 친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들어오자, 고넬료는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겨 극진한 공손을 표했습니다. 들어가서 베드로와 고넬료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자기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만나게 된 경위를 피차 설명했습니다.

a.공손을 표함(마8:2)

b.하나님 앞의 선행(살전1:3)

2)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시는 분임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혁신적이었으며, 유대인의 편견과 사상을 깨끗이 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은 분명히 구약 시대부터 알려진 것이었습니다(참조, 창12:3). 구약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그의 약속과 계시의 특별한 수령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교회를 통하여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베드로는 만유의 주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신 내력을 대강 이야기했습니다. 이 내용은 마가복음의 내용과 평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요한의 세례로 시작하여 갈릴리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전파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 부활, 그리고 지상명령에 이르기까지 주 예수의 사역을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의 하신 모든 일의 직접적인 목격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그 주님은 부활하셨고, 사도들은 바로 부활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심판 아니면 구원이 됨을 분명히 했습니다. 구원의 핵심은 믿음,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메시야를 믿는 믿음을 통한 죄의 용서의 메시지는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말해졌습니다.

a.그리스도의 모든 일에 증인(눅24:48)

3) 성령을 통한 입증

베드로의 메시지는 예수에 대한 그의 메시지를 듣고있는 모든 사람들 위에 내려오신 성령의 부음으로 갑자기 끝났습니다. 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하게 이방인들이 받는 이 증거를 보고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표적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방언을 말함으로 물세례를 주고, 그들과 여러날을 머물렀습니다.

a.성령이 임하심(살전1:5)

b.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풂(행8:38)

 

결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받으신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과 기쁨을 표시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 사실 즉, 이방인의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와 똑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 핵심

10:1-16

본장은 본격적인 이방선교의 디딤돌이 된 고넬료 집안의 회심 기사이다. 본문은 그 발단으로서, 고넬료와 베드로가 본 환상이다.

구제(10:2)

구약 율법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15:7-11). 이스라엘 백성은 매 3년마다 구제를 위한 십일조를 해야 했다(신 14:28,29). 유대인들은 구제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 행위로 여겼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이웃을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면서 제자들과 함께 구제를 행하셨다(요 13:29). 예루살렘 초대교회도 전담자를 두면서까지 구제에 힘썼다(6:1-6). 구제는 예배, 전도, 친교와 더불어 교회가 힘써야할 기본적인 의무 중 하나이다.

방언(10:44-48)

영적은사인 방언은 복음이 이방에 급속도로 전파되던 초대교회 당시에 현저하게 일어났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성령의 감동에 의해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현상이 있었다(고전 14장).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때의 방언은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한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2:1-13). 방언이 신비한 현상이긴 하지만, 바울은 사랑을 더욱 사모하라고 권했다(고전 12:31). 방언이란 회개에 반드시 뒤따르는 표적은 아니다. 따라서 성도면 누구나 방언을 체험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 묵상

고넬료 ( 10:1, 2 )

이 사람은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으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달리야 군대는 로마의 군대인데, 고넬료는 일반적인 백부장들과는 달리 예의가 바르고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께 상달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 ( 10:10-16 )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고, 한 소리가 말하기를 베드로에게 이것을 잡아먹으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유대인들의 사고를 깨뜨리는 말씀으로, 형식과 고정 관념에 집착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으며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베드로는 보자기에 든 짐승들을 속되고 깨끗치 아니한 것으로 여겼고, 이것은 모세와 아론에게 주신 규정(레11장)에 근거한 것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있는 짐승은 더러운 것으로 여겨 먹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환대한 고넬료 ( 10:24, 25 )

그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베드로를 기다리다가 그가 들어오자 그 발앞에 엎드리어 절했습니다. 이는 베드로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표시이며,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고넬료의 부름에 응한 베드로 ( 10:28 )

베드로가 고넬료의 부름에 응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생각은 유대인의 독선적인 전통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깨달은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 10:38-48 )

38절의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을수 있는 세 직분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모두 감당하시는 분으로 이것은 사61:1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설교할때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을 연상케하는 이 사건은 ‘이방인들의 오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십니다(고후13:5). 그리고 성령을 받은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으로 그들을 거듭나게 하셨으므로 공식적인 징표로 세례를 베풀지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않고 같이 온 몇몇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이름을 낮추려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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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다메섹 도상의 사울 9:1-9

우리는 스데반 이야기에서 이미 사울에 관하여 두세 번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사울, 즉 "구한다"라는 뜻이며 로마식 이름으로는 바울, 즉 "작다"는 뜻이다. 그는 로마의 자유시 갈릴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그 자신은 그 도시의 자유민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토박이 유대인이어서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불렀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 그는 먼저 다소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에덴에서도 잠깐 배웠다. 그리고나서 그는 신학과 유대 율법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의 선생은 가말리엘이었다. 바울은 비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수공업(천막 짜는 기술)도 배웠는데 그것은 학자가 되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1. 그의 악행(1,2)

그는 회심하기 전까지는 매우 사악하였으며 기독교와는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다. 다른 점에 있어서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즉 도덕적으로는 결함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핍박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1)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적개심과 분노(1절) :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1절). 핍박받은 사람들은 주의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주의 제자들이라는 그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던 것이다. 핍박이란 위협하고 죽이는 것이다. 위협으로 핍박할 때 그 위협은 영혼을 파괴하고 공포에 떨게 한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으며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당연하게 여겼다. 독을 지닌 짐승이 독을 뿜어대는 것처럼 그가 내뿜는 숨결은 기독교인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에게 죽음의 입김을 내뿜었다.

(2) 그는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에 대해서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평안히 지낸다는 것을 알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방해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1절) 다메섹으로 가도록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2절). 대제사장은 이렇게 열렬히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젊은 핍박자는 그 노인보다 더 열성적으로 핍박하는 것 같았다. 이 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교화된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도 7배나 더한 지옥의 자녀가 됨이 증명되었다. 대제사장들은 다메섹 회당에서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있는지, 이 이단에 동조하는 자가 있는지 심문할 권리를 그에게 주었다. 만일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즉각 예루살렘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할 것이었다. 본문에서 기독교인은 그 도를 좇는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2절). 그리스도가 길이시므로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종교 문제에 관한 그들의 권위에 있어서 모든 회당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사울은 사면을 받거나 최소한 동정이라도 받아야할 여성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죄인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모두 압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울이 핍박을 시작하려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은 그에게서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셨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시키어 새롭게 하시며, 아무리 큰 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심치 말자. 왜냐하면 바울 같은 사람도 은총을 얻었기 때문이다.

2. 갑작스런 변화(3-9)

갑작스럽고 놀라운 변화가 그에게서 일어났다.

(1) 그 시간과 장소 :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3절).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1) 그는 여행 중이었으므로 노상에 있었다. 회심의 역사는 교회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노상에서 홀로 여행하던 중에 새롭게 된다. 성령의 바람은 임의로 불기때문에 우리는 어디서든 성령과 만날 수 있다.

2) 그는 여행 목적지인 다메섹 가까이에 있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될 그는 이방인의 나라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3) 그는 다메섹의 기독교인을 핍박하려는 계획을 속행하기 위해 사악한 길을 가고 있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은총은 죄인들이 가장 악해졌을 때 역사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이 더욱 영광 받으시게 된다.

4) 그의 잔인한 포고령이 집행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

첫째, 아나니아가 말한 것처럼(13,14절) 그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다메섹의 가련한 성도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신실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때로는 핍박자들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둘째, 그것은 또한 사울 자신에게도 대단한 은총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행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을 막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본문에는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7절에 보면 즉 예수께서 이 빛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이 빛은 홀연히 그를 비추었다.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영혼에게 자신을 표명하실 때는 대개 갑작스럽고 경이로운 때가 많다. 그리고 그는 무한한 축복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영접하신다. 그 빛은 하늘에서 온 빛이었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는 달랐다(행 26:13). 왜냐하면 그것은 대낮에도 볼 수 있는 빛이었기 때문이다.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사방에서 비추었다. 악은 어둠 속에서 영혼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빛 가운데서 영혼을 찾아오신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창조될 때에 그러했듯이 이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도 맨 처음 오는 것은 빛이었다.

(3) 주께서 사울을 사로잡으심 :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4절). 그와 마찬가지로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땅에 엎드렸으나(26:14) 섭리는 그에게만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빛이 그를 둘러싼 것에서 사울에 대한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영혼에게 겸손하게 자기를 내보이셨다. 그러므로 그들 또한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를 위한 한 단계이다. 그리스도께서 명예롭게 하시고자 하는 자는 보통 처음에는 낮은 자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들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

(4) 사울에 대한 책망 : 그는 그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그만이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있던 자들은 소리는 들었으나(7절)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행 22:9).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4절).

1) 사울은 하늘로부터 빛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음성도 들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말없이 모습만 나타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모든 이름보다 그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며, 나타난바 된 것은 그가 말씀하실 것을 위한 준비로써 계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은 음성을 들었다. 믿음은 듣는 것을 통해 생긴다. 그가 들은 음성은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들을 때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 음성 외에는 마음 깊이 도달한 음성이 없다.

2) 그가 들은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① 그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사울아 사울아' 하고 두번씩이나 들렸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죄를 자각하도록 함이며 이 말씀을 한 분에게 항거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말씀하실 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것처럼 그 교훈과 약속 가운데 우리 이름을 삽입시키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하고 반복한 것은 복되신 예수께서 그와 그의 회심에 온유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절박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부르듯이 그를 부르셨다.

② 사울에 대한 책망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사울은 성도가 되기 전에 그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했다. 이제 그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 자신 속에 있는 악을 보게 되었다. 죄에 대한 겸손한 인식은 죄에서 구원받은 첫걸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정당화했던 특별한 죄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가 지은 죄는 핍박이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것은 애정이 넘치는 충고였다.

첫째, 죄를 지은 자 : "그것은 바로 너다. 너는 훌륭한 학문과 교양을 갖추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으므로 충분히 생각한다면 핍박의 어리석음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보다도 네가 더 나쁘다."

둘째, 그가 죄를 지은 대상 : "그것은 나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너로 인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는가?"

셋째, 죄의 종류와 그 실행 : 그것은 핍박이었으며 바로 이 때도 그는 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악을 계획하는 것은 악을 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넷째, 그에게 주어진 질문 : "왜 너는 그 일을 하는가?"

㉠ 그것은 호소하실 때도 그의 제자들이 핍박당할 때처럼 그렇게 호소하지 않으셨다. 죄인들의 죄는 주 예수께 대단히 근심스러운 짐이 된다.

㉡ 그것은 확신에 찬 어조였다. "왜 그렇게 했느냐?"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에게 왜 그렇게 했는가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죄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자신이 가난하고 힘없고 어리석은 사람들만 핍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계속 모욕해왔던 대상이 바로 하늘에 계신 분임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며 성도들에 대적하여 행한 것도 그리스도 자신을 대적하여 행한 것과 같다.

(5) 사울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5절)

1)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질문한다. 주여, 뉘시오니이까(5절).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신다면 우리는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 죄에 대한 자각은 죄가 양심에 비추어질 때 모든 변명과 자기 정당화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심판관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했던 그가 그리스도를 그의 주라고 말하고 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하는 질문은 적절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고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이 시작될 때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대답하셨다.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자신을 은혜롭게 계시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 예수의 이름은 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을 기꺼이 망각 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 이름을 하늘로부터 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나는 구세주 예수라', 또는 '나는 나사렛 예수라'(행 22:8). 사울은 그를 모독하고자 할 때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영혼을 깨우치고 겸손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울에 대하여 주님은 부드럽게 책망하셨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없음) 가시채를 걷어찬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막대기로 얻어 맞을 때 더욱더 반항하는 사람은 가시채를 걷어 차는 사람인 것이다.

(6) 결국 사울은 자신을 주 예수께 드렸다(6절)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오셨을 때의 그의 상태 : 그는 떨었다. 복되신 성령으로 인해 되찾게 된 강한 확신은 각성한 영혼을 떨게 만든다. 그는 새 세계를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놀랐다.

2)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답변 : '주여,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한글개역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없음).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진지한 요청이다. "당신은 나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게 용서와 평화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영혼 속에서 시작되고 있는 선한 역사의 증거이다.

둘째, 주 예수의 통치와 지시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한 은혜스런 말이었다. 이로써 그의 영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커다란 변화가 그의 의지 속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 의지를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신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 이 말씀은 그에게 더많은 교훈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첫째, 그는 아직 그 교훈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하면서 행한 일을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그가 해야할 일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하늘에서 음성이 드린 것으로 보아 그는 지금까지 행한 것처럼 행할 수는 없었다. 그가 수행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그 자신과 같은 사람에 의해서 그가 할 일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의 수준에 맞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

(7) 그의 동료 여행자들은 이 일에 전혀 감화 받지 못하였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말을 못하고 섰더라(7절). 그들은 당황한 사람들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7절). 그들도 빛을 보았으며 그 빛에 깜짝 놀랐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회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없이는 어떠한 외적 수단이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영혼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바울이 한 것처럼 "주여 뉘시오니이까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소리는 들었으나 그가 누구와 말하는지, 그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도우러 온 사람들은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 증인이 되었다.

(8) 이 사건 후의 사울의 상태(8,9절) :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명령하셨을 때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번쩍이던 빛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해 가려던 그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죄인이 되어 다메섹으로 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음식을 전폐하였다'(9절). 그는 암흑 속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영혼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마음 편히 먹고 마실 수가 없었다.

 

Ⅱ.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보내심 받음 9:10-22

사울이 그리스도의 발아래 인도되어 '주여, 내가 어찌하오리까' 하고 고백한 후 놀라운 역사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앞에 인도된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이를 확신하는 자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1. 아나니아에게 내리신 명령(10-12)

본문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그를 돌보아 주라는 명령을 받는다.

(1)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인 아나니아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쫓겨온 사람이 아니라 다메섹 태생의 제자였다. 22:12절에 보면 그에 대하여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2) 그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은 이러이러한 집에 가서 '다소의 사울'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의 이름을 부르셨다(10절). 그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10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11절)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받고 있는 그의 백성을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는지를 매우 잘 아신다. 그는 그들에게는 하늘의 친구가 되시며 그들이 어느 거리에 있는지 어느 집에 있는지, 심지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잘 알고 계신다.

(3) 아나니아가 가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

1) 사울이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는 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따라서

첫째, 13, 14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나니아는 사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한글개역 성경에는 '보라'가 생략됨)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는 진심으로 회개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라'는 그것의 확실성을 입증한다. 또한 그것은 그것이 뜻밖의 사건임을 의미한다. "보라,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사울이 기도한 일이 정말 이상한 일인가? 그는 바리새인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전에 하던 방식과는 다르게 기도하고 있다. 그때는 기도문을 외우는데 불과했으나 지금은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 사람이 숨쉬지 않고 살 수가 없다. 숨쉬지 않는다면 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은총도 없다.

둘째, 아나니아는 지체없이 그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가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사울은 죄를 자각하고 있었다. 죄에 대한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그가 해야할 일을 더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6절). 그러므로 사울은 자기를 지도해 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2) 사울이 환상 중에 그런 사람이 그에게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니아가 그에게 가는 것은 그의 환상에 대한 응답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였기 때문이다(12절).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2절). 이제 바울이 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으며 기도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또 환상은 그의 기대를 고무시켰고 그로 인해 아나니아가 더 환영받을 수 있었다. 영적인 의사와 그의 환자가 동석하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를 위하여 본문에는 두번의 환상이 나타난다.

2. 아나니아의 거절(13-16)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기를 거절했다.

(1) 아나니아는 사울이 악명 높은 핍박자라는 것을 호소한다(13, 14절).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13절). "사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나이다. 그가 다메섹에 온 것은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위함이니이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한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4절). 여기서 아나니아는 왜 거부하였는가?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또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는 것은 과연 안전할까? 아나니아 자신이 스스로 이런 고난을 자초한다면 그는 무분별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에게 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

(2) 그리스도께서는 아나니아를 설득하신다(15,16절). "그는 택한 나의 그릇이니 즉시 가라. 너는 그를 겁낼 필요가 없다." 그는 복음이란 보물을 담아둘 그릇이었다. 그는 질그릇에 불과했으나(고후 4:7) 선택받은 그릇이었다.

1) 그는 탁월한 봉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 앞에 전해야 한다." 사울은 기수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왕들 앞에 그리고 그 아그립바와 가이사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 또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2) 그는 특별한 고난을 받기 위해 택해졌다(16절).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절). 핍박자였던 그가 이제 핍박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그를 위하여 극도의 고난을 받게 된다. 그것은 담대하고 용감한 정신을 가진 병사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는 즉시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받아야 하는가를 그에게 알려준다고 해서 그리 용기가 꺾이는 것은 아니다.

3. 아나니아가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사울에게 감(17,18)

그는 처음에는 사울에게 가는 것을 거절했으나 자기 주장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어려움이 제거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고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꺾고 착수하는 것이다.

(1)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다(17절).

1) 아나니아가…그에게 안수하여(17절).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에게 폭력의 손길을 뻗치려 왔으나 오히려 바로 그 제자가 사울에게 치료의 손을 내밀게 되었다.

2)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다. 사울이 비록 하나님의 모독자이며 그 자녀의 핍박자이긴 하나 아나니아가 그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아들로 형제로 받아들이심을 의미한다.

3) 아나니아는 사울의 보증인이 되었다.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그 상처받으신 손으로 치료하신다. 그 빛이 너를 눈멀게 하였으나 주께서는 나를 보내어 너를 다시 보게 하셨다." 징벌은 이제 끝나고 주님께서는 그를 치료하신다.

4)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가 시력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보증했다.

(2) 아나니아는 자기의 임무가 좋은 열매를 맺은 것을 알았다.

1)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울에게 좋은 결과가 이루어졌다. 아나니아의 말이 떨어지자 사울은 시력을 회복함으로써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사울은 회복됨으로써 구속의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18절).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 치유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기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그의 회복을 의미했다. 즉

첫째, 회개치 않은 상태의 어둠에서의 회복이었다. 그리스도는 종종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눈이 멀어서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이제 복음을 깨달음으로써 바리새인적인 소경에서 구원받았다. 회개케 하는 은총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이방인 가운데 보내져 해야할 일이며 그전에 우선 자기 자신이 그것을 체험해야 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현재의 어둠의 공포에서 회복되었다. 이제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정의의 태양이 그의 영혼 위에 떠올랐다.

2) 사울은 그리스도께 복종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의 은총에 자신을 맡기었다. 사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핍박을 중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전적으로 봉사에 헌신하였다.

4. 사울에게서 맺은 열매(19-22)

사울 안에서 시작된 선한 역사가 놀랍게 속행되었다.

(1) 그는 건강을 회복하였다(19절). 그는 계속 3일을 금식하여서 그로 인해 매우 허약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회복되었다.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여 지니라(19절). 주님은 육체를 귀히 여기시므로 육체의 건강을 지키시어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업에 쓰시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돌보신다.

(2) 그는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는 얼마전 까지도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나 이제는 사랑과 우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섬겨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3)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절). 그는 그리스도로 충만하였으며 그의 안에 있는 성령이 그를 강권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전했던 곳은 유대인의 회당이었다. 그곳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교리를 전하고 그의 제자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그들이 가장 애호하던 회당에서 사울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자기가 기독교인임을 고백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는 전도자가 된 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기쁘심을 입은 자요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하였다. 사울의 전도로 사람들은 어떤 감화를 받았는가(21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21절). 누가 감히 그가 그리스도를 전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기적은 사람의 육체에 일어나는 기적을 무색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처럼 변화된 마음을 주는 것은 그에게 방언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다.

(4) 사울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반대하던 자들을 당황하고 놀라게 만들었다(22절). 그는 더욱 능력있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경건함도 더욱 강해졌다. 그는 복음을 수호하는데 더욱 담대해졌고 결의가 굳어졌다. 그를 낙담케 하는 비난들, 즉 이전에 그가 핍박자였음을 비난하는 새친구들의 비난과 그를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이제의 옛친구들의 비난들이 많았지만, 그는 힘을 더 얻었다(21절).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22절). 그는 그들을 침묵하게 했고 수치를 느끼게 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회심시키기 위한 도구였으며 다메섹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도구였다. 그런데 본래 그는 복음을 궤멸시키려고 그곳에 갔던 것이다.

 

Ⅲ. 사도들이 사울을 인정함 9:23-31

누구나 본문에서 바울의 아라비아 여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그 일이 그의 회심 직후에 있었노라고 그 자신이 우리에게 말해준다.(갈 1:16,17).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노라'(갈 1:16,17). 그는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회심 후의 3년을 지냈는데 그때 본문에 기록된 일이 일어났다.

1. 바울이 곤경에 처함(23-25)

다메섹에서 바울은 곤경에 빠졌으며 겨우 죽음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였다.

(1) 위험의 정도(23절) :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바울은 매우 주목할만한 이탈자였으며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불리한 증거가 되었다. 24절에는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그리스도는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할 것인가'를 바울에게 보여 주셨다(16절). 사울은 기독교인이 되자마자 전도자가 되었고 전도자가 되자마자 수난자가 되었다. 보통 하나님의 은총이 큰 곳에는 그와 함께 시련도 강하게 역사한다.

(2) 그의 탈출 경위 :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 계고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24절). 제자들은 밤에 그를 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25절). 이 사실을 바울 자신이 고린도후서 11:33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2. 예루살렘에서의 곤경(26-30)

바울은 달아나서 처음 도착한 예루살렘에서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26절). 이때 예루살렘으로 간것이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18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 예루살렘 여행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쌔'(갈 1:18). 그러나 나는 이 여행이 바울이 말하는 그 여행 이전에 행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28,29절의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말하며 변론하니'라는 구절로 보아 15일간의 체류만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여행일 수도 있다.

(1)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두려워 했다(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26절). 그는 가는 곳마다 그 자신을 멸시받고 핍박받는 백성의 하나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낯선 이로 대하였고 그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 바울을 두려워했다. 유대인들은 그를 포기하고 핍박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부하고 꺼려했다.

1) 그러한 의심의 원인 :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26절). 그들은 그가 단지 제자인 체할 뿐 사실은 간첩이나 첩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과 교제하고자 하는 자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의심이나 지나친 신뢰를 피하기 위해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다 실수하는 것이 의심하다가 실수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이다.

2) 사태의 진전(27절) :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27절). 본문에는 바나바가 어떻게 그 일들을 알고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떻든 바나바는 바울을 신뢰하였고 사도들에게도 그를 신뢰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2) 사울의 적들은 사울을 아주 경계했다.

1) 그는 제자들과의 교제를 허락받았다.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울이 그리스도의 승리의 기념품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사실은 몹시 화가 치미는 일이었다(28절).

2) 그는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이 일은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시켰다(29절).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29절). 헬라화한 유대인, 혹은 헬라파 유대인은 그를 가장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전에는 바울이 이들의 한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그와 변론을 벌였으나 당연히 사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를 열렬한 신앙의 핍박자로 만들었던 타고난 민첩함과 열성적인 정신이 그를 불굴의 신앙 수호자로 만들었다.

3) 이것이 그를 생명의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죽이려고 힘쓰거늘(29절). 그러나 이 모의도 사전에 알려졌고 이일로 승리자를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인 배려가 취해졌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라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30절). 예루살렘에서 피하여 간 그의 고향 다소에서 그는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그곳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하늘로부터의 지시이기도 했다.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갈 22:17,18)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15절).

3. 교회의 상태(31)

교회에는 이제 자유와 평화의 서광이 비취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 평안하여(31절). 사울이 회개하자 그가 선동하던 자들도 조용하게 되었다. 교회가 평안하였다. 폭풍우 후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것은 그들이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고 다음 핍박에 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 축복된 휴식시간을 선용하였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가장 거룩한 신앙을 확립했다. 그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했으므로 모든 사람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신앙 안에서 신실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살았다. 그들은 주님의 길만 걸으며 노래 부르며 나아갔다. 그들은 고통과 환난의 때뿐만 아니라 휴식과 번영의 때에도 성령의 위로에 의지하며 그것에 근거하여 살았다. 그들이 '주를 경외함으로' 걸을 때에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였다. 조심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유쾌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어 그들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수가 더 많아지니라. 때때로 교회는 환난 중에 더 증가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다면 지존자의 성도들은 지쳐서 더이상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때의 교회의 평안이 또한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Ⅳ. 애니아의 병을 고침 9:32-35

1. 베드로의 방문(32)

베드로는 새로 설립된 교회들을 방문하였다(32절).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행하였다. 한 사람의 사도로서 그는 한 교회에 안주하는 목회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주님처럼 언제나 돌아다녔으며 선을 행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활동의 거점은 예루살렘성이었으며 거기서 그는 투옥 당하기도 했다(행 12:4). 그는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모두 성도라고 불리운다.

2. 베드로가 애니아의 병을 고침(33,34)

애니아의 상태는 아주 비참했다. 그가 중풍병으로 상위에 누워지낼 정도로 극심하였고 8년이나 누워있던 것으로 보아 고질적인 병이었다. 병자 자신이나 주위의 사람들 모두 그에 대하여 포기한 것 같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환자를 택하신다. 이 불쌍한 사람처럼 우리가 연약해졌을 때 그는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 주신다. 그의 치료는 아주 놀라웠다(34절). 베드로는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의지하였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34절). 베드로는 치유가 그리스도의 행위와 업적임을 선언하며 그가 즉시 나을 것을 장담한다. 즉 "그가 너를 낫게 하시리라"가 아니고 "그가 너를 낫게 하시니"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치료였다. 즉 "너를 편케 하리라"가 아니라 "너를 온전케 하리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스스로 노력하라고 명하였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절).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므로 우리에게는 일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전해졌으니 우리는 일어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써야만 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너의 자리는 이제 병상의 자리가 아니라 휴식의 자리이다."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다. 그는 즉시 일어났던 것이다.

3. 이 사건의 영향(35)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35절). 그들은 모두 기적의 진실을 확인하였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기적적인 치료임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주께로 돌아갔다. 즉 주 예수께로 돌아왔다. 그들은 자청해서 그의 다스림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구원을 얻게 되었다.

 

Ⅴ. 다비다의 소생 9:36-43

본문에는 베드로가 행한 다른 기적, 즉 다비다가 소생하게 된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1. 다비다의 성격과 생사(36,37)

그녀는 욥바에서 살았다. 이름은 히브리어로 다비다였으며 헬라어로는 도르가였다. 둘 다 암사슴을 의미했다. 그녀는 자선 사업에 뛰어난 제자였다. 그녀는 그녀의 신앙을 선한 행실로 입증하였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절). 그녀는 열매가 가득 달린 나무와 같았다. 말로만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다비다는 실천가였지 수다장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선행에 뛰어났는데 경견한 일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에게 흘러나오는 자비롭고 유익한 일을 행함에도 역시 뛰어났다. 그녀는 그녀가 낸 구제금 뿐만 아니라 그녀가 행한 자선으로 칭찬받을 만했다. 재산이 없어서 자선금을 낼 수 없는 사람도 그들의 손이나 발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선을 행할 수 있다. 반면에 부자이면서도 자선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그 자선이 선한 척을 해도 결코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는 그녀가 선행을 행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녀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했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범적인 제자의 생활이며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이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유익한 삶도 끝나게 되었다.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37절). 그녀의 친구와 친척들이 관습에 따라 '시체를 씻어' 수의를 입혀서 '다락에 뉘었다.'

2. 친구들이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냄(38)

그녀의 기독교인 친구들은 베드로에게 즉시 그들에게 와달라고 사람을 보냈다(38절). 욥바에 있던 제자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있으며 거기서 그동안 앓고 있던 애니아를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했다(38절). 그들은 의사를 불러오기에도 너무 늦었으나 베드로를 불러오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3. 베드로의 태도(39)

베드로는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갔다(39절). 이 위대한 사도는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신실한 사역자는 모든 사람의 요구에 응하는 일에 싫증을 내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시체가 다락에 눕혀져 있고 과부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1) 죽은 자에게 경의를 표할 때는 엄숙하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다비다에 대한 칭찬은 그녀 자신의 덕목처럼 말이 아닌 행실로 나타났다.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절). 주인의 등뒤에서 그들에게 옷 입혀준 사람을 욕할지도 모를 게으른 마부들에게 화려한 제복을 입히는 것보다는 노쇠한 과부들에게 필요한 옷을 입히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선은 진실로 위대한 것이며 곧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비다는 어떤 방법으로 구제를 하였는가? 그녀는 가난한 과부들을 위하여 직접 속옷과 겉옷을 지었다.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사 58:7)이 참으로 훌륭한 자선이다. '네 몸을 덥게 하라'(약 2:15,16)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녀의 친절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인 감사의 표시 : 그들이 '속옷을 다 내어 보였다'(39절). 그들이 받은 친절을 공개함으로써 그 친절을 최소한으로라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몰염치한 사람이다. 구제를 받은 사람은 구제를 행한 사람들처럼 구제받은 사실을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겉옷과 속옷을 보여줌으로써 도로가는 그녀의 구제뿐만 아니라 그녀의 근면도 칭찬 받게 되었다.

(2) 본문에서 과부들은 그녀와의 사별을 몹시 슬퍼하였다. 과부들은 울면서 베드로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하여 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의 수고와 일에서 이제 쉼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위하여 그처럼 훌륭한 부인을 다시 얻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운 것이었다. 그들은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녀가 행한 선행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들을 떠나갔고 그것이 그들의 슬픔이었다. 과부들이 베드로 옆에 서서 운 것은 베드로가 그들을 동정하여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곤 했던 그 죽은 자를 회복시켜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병들었을 때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병들어 죽게된 사람이라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4. 그녀가 소생하게 된 경위(40,41)

(1) 먼저 이 일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40절). 그리하여 베드로는 허영이나 허례가 될만한 것은 모두 물리쳤다.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왔으나 베드로는 구경시키지 않았다.

(2)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애니아를 치료할때는 암시적인 기도를 했지만 이 위대한 역사에는 그가 직접 하나님께 종이 복종하듯이 무릎을 꿇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

(3) 말씀을 통하여, 곧 소생케 하는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기도한 후에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주의 이름으로 말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타났고 그녀는 생명을 얻어 죽음으로 닫혀졌던 눈을 떴다. 그녀는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40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녀의 소생을 환영하며 그녀에게 그녀가 지금까지 제외되어 있었던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 다시 속하게 됨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였다(41절).

5. 이 기적의 영향(42,43)

(1)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42절).

(2) 이 기적의 사실을 온 욥바 사람이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이 일을 염두에 두지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로 말미암아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계획된 기적이었다.

(3) 베드로는 이곳 욥바에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42절). 그곳에서 그에게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을 알았으므로 다른 곳으로 보냄을 받을 때까지 그는 여러날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 머물렀다. 비록 베드로가 바닷가에 있는 가난한 피장의 집에 이름없이 묻혀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고귀한 임무를 맡기셨던 것이다.

 

# 해설

개종된 바울 ( 9 )

어떤 사람들은 사울의 개종을 오순절 이후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믿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어, 이 일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택한 그릇,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1. 사울의 회심

1) 핍박자 사울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멀리 전파되고 있는 동안 사울은 교회에 계속해서 가혹한 핍박을 행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울의 증오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으로 당연히 스데반을 산헤드린 앞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도 지도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의 성도들을 열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약 일년간 계속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개종 후 선교를 위해 열심을 내는 것처럼 개종 전에는 그의 열심있는 성격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a.성도를 미워하는 이유(요15:19)

b.잘못된 열심(빌3:6)

2) 예수님을 만난 사울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회개하였습니다. 다메섹에는 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회당도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메섹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고 이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가는 그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땅에 엎드려졌고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질문에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는 응답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사울은 자기가 핍박해 온 예수가 지금 하늘에서 자기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심히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성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시고 행할 것을 알릴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일어났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길을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도하면서 사흘 동안을 금식했습니다.

a.그리스도의 음성(계1:15)

b.바울을 부르심(갈1:1)

 

2. 사울을 찾은 아나니아

1) 아나니아의 문안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온 사람이 아니라, 원래 다메섹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왜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사울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 그에게 메시지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지시받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건넨 '형제 사울아'라는 첫마디는 이전에는 박해자였던 그를 이제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사귐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사울은 다시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울은 곧 세례를 받고 사흘만의 금식을 끝냈습니다.

a.아나니아(행22:12)

b.영적 형제(히2:11)

2) 이방인의 사도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왕들을 포함한 무할례자들을 위한 사도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도 사역하였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의 증거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 예언의 부분적인 성취가 바울의 고난의 열거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참조, 고후11:23-27).

a.선택된 사람(고전1:27)

b.의인의 고난(롬8:17)

 

3.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사울

1) 다메섹에서의 전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울은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각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일은 사울의 선교 여행상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20절에서는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배운 첫번째 교훈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주 예수가 메시야라는 진리를 전하는데 있어서 그의 신학적인 훈련을 매우 유리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힘있게 예수님을 전했고, 다메섹의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a.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함(딤전1:15)

b.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함(행22:22)

2) 제자들과의 사귐

사울은 원래 다메섹의 교회를 핍박하려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믿는 자들과 연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이 복음 사역에 가담했으나, 믿는 자들은 그를 신뢰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다메섹에서는 아나니아가 필요하듯, 예루살렘에서 그는 바나바가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바나바를 통하여 사울의 회심을 확신했고, 사울을 자기들와 함께 머물도록 허락했습니다. 거기에서도 사울은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그의 고향 다소로 보냈습니다.

a.바나바(행4:36-37)

b.성도의 교제(요일1:7)

 

4. 베드로의 기적

베드로는 유다 근방의 순회 선교에 참여하여 룻다로 갔습니다. 룻다에서 그는 8년이나 침상에 누워있던 중풍병자 애니아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기적적인 치유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욥바에서는 다비다라는 한 사랑스러운 여제자를 죽음에서 살렸습니다. 이 다비다는 가난한 자의 구제로 유명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도착하자, 울고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도르가 즉 다비다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기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었음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는 또한 다음 사역의 준비를 위해서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a.그리스도의 능력(마9:6)

b.죽은 자를 살림(막5:41-42)

 

결론

한사람이 주께 헌신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짐을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됩니다. 사울의 회심이 그러합니다. 그 자신이 유대교에서 훈련받았던 많은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선교를 준비시켰고, 그가 철저하게 주님을 대적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를 맞아들인 공동체의 결단과 열려있는 모습입니다. 사울이 소중하듯이, 그 공동체도 더욱 귀한 것입니다.

 

# 핵심

9:1-18

주님이 이방인의 사도로 삼기 위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불러 회심시키신 기사이다.

성령 충만(9:17)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인해 큰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과 연관된 것이므로 상대적이며 반복되는 사건이지 누구에게나 영구히 지속되는 상태는 아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나태해 있는 동안에는 성령충만을 체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한 첫째 비결이 성령충만이므로,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 묵상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울 ( 9:1, 2 )

그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남녀를 무론하고 잡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사울 편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거짓 선생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기위해 예루살렘 동북쪽에 있는 다메섹을 택했는데, 다메섹은 유대인의 이동이 많아 회당이 세워진 곳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을 피해 도망한 그리스도인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사울을 회개시키고 부르심 ( 9:1-9 )

예수 그리스도는 헬라 학문과 문화에 익숙한 사울을 부르시어 회개케 하심으로 이방 선교에 문을 여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울을 은혜로 부르시어 만나주셨습니다. 이는 순교자 스데반이 증인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부르심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되 직접 부르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도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15) 당시 세계는 알렉산더의 식민지로 헬라의 식민지였습니다. 순수한 유대주의적 사고로는 헬라의 문화권을 선교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에게 사명을 주신 예수님 ( 9:15 )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사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 9:17 )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의 눈을 낫게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써 사울의 눈은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사울은 자신이 박해하던 사람들과 동역자가 되었으며, 아나니아는 바울의 회심에 대한 훌륭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에서의 사울 ( 9:22 )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인 박해자로 소문난 사울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는 그의 변화된 모습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어려움 ( 9:23, 24 )

유대인들은 갑자기 돌변한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후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즉, 사울의 전도는 유대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기회를 장차올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호기로 삼았습니다.

바나바의 사역 ( 9:26, 27 )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과 그가 복음 전한 일을 증거했습니다. 바나바는 관대하고 포용적인 사람이었으나 후에는 마가에 대한 문제로 인해 생긴 바울과의 의견 대립으로 전도여행 중에 결별하기도 했습니다.

욥바에서의 베드로의 사역 ( 9:36-40 )

욥바에서 베드로 사도는 도르가라 불리는 여제자 다비다를 죽음에서 살려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후 시체에게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게 기도함으로써 다비다를 살린 것입니다. 다비다는 특별히 선행과 구제의 생활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신실한 제자였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께 겸손히 간구하면 주님께서 그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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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교회의 임한 핍박 8:1-3

1. 스데반과 그의 죽음으로 인한 결과(2)

(1) 스데반의 죽음을 특별히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울이었는데 그는 후에 바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절). 우리는 바울이 자기 자신에게는 수치가 되지만 하나님의 은총에게는 영광을 돌리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 기록하도록 누가에게 지시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한편 다른 사람들 즉 경건한 사람들에게 스데반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다(2절). 교회의 몇몇 사람들은 그 매맞고 짓밟혀진 가엾은 스데반의 유해를 거두어 엄숙하게 매장하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였다. 스데반처럼 훌륭한 사람이 죽었는데도 마음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이 당한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인자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스데반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인 그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예롭게 하신 스데반을 그들도 명예롭게 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2. 교회핍박에 대한 설명(1-3)

교회에 대한 핍박은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시작된다. 스데반이 죽으면서 드린 기도와 그가 누렸던 평화가 적들의 마음을 녹여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실제 그렇게 된 것 같지는 않다. 핍박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강퍅해진 것 같았고 그들은 멋대로 행했다.

(1) 핍박의 대상 :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였다(1절).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언하신 바 있다. 그것은 이 성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명 받은 자들을 돌로 치는 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2) 핍박의 주동자 : 젊은 바리새인 사울만큼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핍박자는 없었다(3절).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는 자로서 교회를 파괴하고 근절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멸절시키고자 하였다. 사울은 학자요, 신사가 되도록 교육받았으나 자신이 가장 사악한 일을 하고 있음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갔다. 아무리 견고한 성안이라도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조차 안전할 수 없었다. 그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거리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들을 감옥에 쳐 넣어 고문하고 마침내는 처형했다.

(3) 핍박의 결과 : 그들은 흩어졌다(1절). 그들은 주님의 명령(그들이 너희를 핍박하면 다른 곳으로 가라)을 기억하면서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의 임무는 예루살렘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이제 다른 곳에서 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핍박이 아무리 심해도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버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다른 곳에서 일하도록 우리를 보내는 수단이 된다. 전도자들은 사도 외에는 다 흩어졌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지만 빙벽을 깨뜨리도록 보냄을 받은 전도자들의 원조요청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Ⅱ. 빌립의 행적 8:4-13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불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핍박자들은 그 불을 다루는 자들을 흩어놓음으로써 불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불은 꺼지는 대신에 오히려 확산되었다.

1. 전도자들의 일반적인 행적(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쌔(4절). 그들은 갈릴리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곳은 전에는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들은 안일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에게 그 지방들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지방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이미 활동했던 지역들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거기에 자기들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2. 빌립의 행적(5-13)

여기에 나오는 빌립은 사도 빌립이 아니라 집사였던 빌립이다. 같은 집사였던 스데반은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고 빌립은 전도자의 반열에 들어간 것이다.

(1) 빌립의 설교와 영향

1) 그가 설교한 곳은 사마리아의 중심지였다. 어떤 이들은 이곳이 도시 세겜이나 수가(요 4:5)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기를 싫어했으나 그리스도는 모든 증오를 없애기 위해 그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2) 빌립이 가르친 내용은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5절). 사마리아인들은 요한복음 4:25절에 나타난대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빌립은 그가 오셨으니 사마리아인들은 그를 영접하라고 가르쳤다.

3) 빌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서 기적을 행하였다(6절). 그 기적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일으킨 기적을 보았고 또 전해들었다. 그는 사단의 권세를 쳐부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증표로서 그가 더러운 영들을 향하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 영들은 그들이 거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나왔다(7절).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순종하는 곳에는 악령이 거할 수 없다. 이것이 사람의 몸에서 더러운 영이 떠나간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때 그것들은 '크게 소리지르며' 나갔다. 그들은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강제로 본의 아니게 내쫓기는 것이다. 또 빌립은 혼란한 세상을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 증표로서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 즉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4)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말을 경청하였다. 무리가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6절). 그들은 처음에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적에 이끌렸으나 점차 복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일반 대중은 빌립에게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들은 제 각기가 아닌 일심으로 뭉친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5) 그들은 빌립의 가르침을 듣고 만족하였다. 또 복음은 그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절). 그래서 저희가 믿고 남녀가 세례를 받았다(12절).

첫째, 빌립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그 왕국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설교했다.

둘째, 사람들은 그의 말에 관심을 가질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고 그것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셋째, 그들은 믿고 세례 받았다. 유대교회에서는 오직 남자들만이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세례의식은 여자들에게도 허용되었다. 왜냐하면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에 가입되기 때문이다.

넷째, 이것은 대단한 기쁨을 가져왔다. 어떤 곳이든지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대단한 기쁨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만든다. 왜냐하면 복음은 만백성에게 전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눅 2:10).

(2) 이 사마리아의 도시에서 복음이 그토록 놀랍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1) 마술사 시몬은 그곳에서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으로 사람들에게서 상당한 관심을 얻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악에서 떠나는 것이 선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은 최근에 마술사(마구스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시몬의 뒤를 좇게 되었는데 그는 이들을 대단히 놀라게 했다.

첫째, 사단의 기만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 성에서 마술을 행하여 왔다.' 시몬은 자신을 굉장한 인물로 생각하였다. 자칭 큰 자라 하니(9절). 그는 백성의 삶을 교정해 줄 의도가 전혀 없었고 단지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믿도록 만들었다. 교만과 야망 그리고 허세는 세상이나 교회에 있어서 무수한 실책의 원인이 되어 왔다. 사람들은 그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그를 존경하였다(10, 11절). 그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였다. 무지하고 경솔한 사람이 마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인 양 사단의 권세로 행한 잘못을 살펴보자. 사단의 권세가 그의 마술로 인해 그들에게 보여졌다. 그는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였고'(9절), 그들은 '마술에 놀랐다'(11절). 마술로 그는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했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 사람들이 시몬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것을 알지 못할 때는 그 마술에 영향을 받았지만 빌립의 참된 기적에 접하게 되었을 때는 어느 것이 참된 것이며 어느 것이 가짜인지 분명하게 알았다. 그들이 시몬과 빌립의 차이를 알게 되자 시몬을 떠났다.

둘째,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은 더욱 크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은총으로 사단에 사로잡힌바 되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복종하게 되었다. 최악의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자. 마술사 시몬에게 현혹되었던 사람들조차 믿게 되기 때문이다.

2) 더욱 놀라운 일이 한가지 더 있다. 시몬도 믿고(13절). 그는 빌립이 참된 가르침을 전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자신이 기만적인 기적의 농간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빌립의 가르침이 참된 기적에 의해 확고해졌음을 알았다. 그는 확신이 깊어지자 '세례를 받았다.' 빌립이 실수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탕자였던 자가 다시 탕자가 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일단 집에 돌아왔을 때는 기쁘게 맞아들여야만 한다.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만의 특권이다. 교회와 그 사역자는 자비의 판단만 내려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한 최상의 것을 바라야만 한다. 그가 얻은 확신은 빌립과 함께 있는 동안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한때는 스스로 큰 자라고 내세우던 그가 이제는 복음 전도자의 발아래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아무리 사악한 자라해도 종종 아주 선해질 수 있는 법이다. 그 확신은 기적에 의해 생기고 유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의 진리의 증거를 보고 놀라지만 그 진리의 힘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Ⅲ.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책망함 8:14-25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이 함께 있었는데(1절) 그곳으로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4절)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14절). 열두 사도들은 빌립에게 용기를 주고 그의 손에 힘을 주기 위해 탁월한 두 사도를 사마리아로 파견했다.

1. 사도들의 바른 인도(16)

사도들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인도했다.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16절). 그 비범한 능력은 성령의 임재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었다. 그 안에서 그들은 기쁨과 만족을 얻었다(8절). 진실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거룩하게 만드는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사람은 그들을 빛나게 해줄 장신구가 없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사도들은 현재의 섭리를 완전케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들이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니(15절). 성령은 우리 자신에게도 내리지만 (눅 11:13),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임재한다. 우리는 그들의 영적인 생활이 풍부해지기를 간구하는 사람들, 즉 우리의 자녀들이나 친구나 목회자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새롭게 하는 성령의 은사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러한 모범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였다. 이 상징적인 행위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옛부터 안수는 축복을 기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사도들도 이들을 축복했다.

2. 마술사 시몬을 버림(18-25)

(1) 시몬의 사악한 음모는 그의 위선으로 인해 들통났다(18,19절).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18절). 그는 기독교란 고차원적인 마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도들과 같은 명예만 탐했을뿐 기독교 정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능력을 바랐다. 그는 사도들에게 대단한 모욕을 주었다. 그는 사도들이 돈을 좋아하여 돈만 주면 무엇이든지 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를 대단히 모욕하였다. 그는 마치 기적이 마술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가 예언의 대가를 목적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스스로 한껏 자만에 빠져 있음도 드러났다.

(2) 그의 제안이 거절됨(20-23절)

1) 베드로는 그에게 그의 죄를 지적해 주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20절). 그는 이 세상의 재물을 과대 평가하여 그것으로 죄사함과 성령의 은사와 영생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반대로 그는 성령의 은사를 과소평가 하였다. 그는 사도들의 권능도 의사나 법률가의 조언처럼 돈을 많이 지불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 베드로는 그에게 자신의 죄로 인해 형성된 그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 베드로는 명료하게 지적해 주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21절). 우리는 우리의 마음 먹은대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옳지 못하면 우리도 잘못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열려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판단하시며 이를 통하여 우리를 판단하신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의 고결함이 하나님 앞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영예를 목적하지 않고 그것을 그 자신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했다.

둘째,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3절). 이것은 솔직한 표현이다. 우리가 영혼과 영원에 과하여 다룰 때는 솔직하게 취급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보니"라고 베드로는 말했다. 위선자의 위장은 여러 번 밝혀진다. 늑대의 본성은 양의 가죽을 쓴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제 시몬이 보여준 성격은 진실로 모든 사악한 자들의 본성이다. 그들에게는 악독이 가득하다. 그들은 불의에 매어 있다. 그들은 죄의 책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에 매어 있고 죄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지배에 매어 있다.

3) 베드로는 그의 운명에 대하여 두 가지로 예언한다.

첫째, 그는 세상의 재물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절). 베드로는 경멸과 분노의 심정으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네 은과 함께 사라져라. 우리는 너와 상관할 것이 없다." 우리는 돈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도록 유혹 받을 때, 돈이란 썩어질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그가 그런 마음을 계속 품는다면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한다. "너의 돈은 멸절된 것이며 너는 그 돈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그가 과소 평가했던 영적 축복을 그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21절). 너는 성령의 은사를 절대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네가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 생각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에게 선의의 충고를 한다(22절). 그는 시몬에게 화는 내었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① 충고 내용 : 그는 회개해야만 한다. 그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렇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회개는 특별해야만 한다.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22절). 그는 실수라든가 잘못된 열성 때문이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사악한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말이나 행동으로 실수한 사람은 될 수 있는한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잘못을 행하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에게 회개하게 하시고 그 회개로 인해 용서해 주십사고 기도해야 한다. 회개자는 기도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마술사 시몬은 다른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회개와 기도를 통해서만 이 사도들의 영적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② 베드로가 시몬을 격려함 :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22절). 우리는 마음의 생각으로 많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바로 그것을 회개해야 하며 같은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생각은 비록 악하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베드로가 '혹'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은 회개의 진실성을 의심한 것이지 그의 회개가 참되었을 때의 용서를 의심한 것이 아니다.

③ 시몬이 사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함 :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24절).

첫째로, 베드로의 말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둘째로, 그러나 아직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는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이 임무를 마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기사가 본문에 나온다. 사마리아의 성에서 그들은 설교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증거하였으며, 또한 다른 사역자들이 전한 말씀을 확고히 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상에서도 사도들은 순회전도자가 되었다. 곧 그들은 사마리아의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주 작은 촌락의 주민에게도 관심을 가지신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Ⅳ. 빌립과 에디오피아인 8:26-40

본문에는 어느 에디오피아인 내시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 빌립이 에디오피아인을 만남(26,27)

전도자 빌립은 지시 받은 길로 가다가 이 에디오피아인을 만나게 되었다(26절).

(1) 천사가 빌립의 갈 길을 지시하였다.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가라(26절). 사역자들이 이동하거나 거주하는데 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진실로 그를 따르는 자에게 길을 지시하신다. 빌립은 유대사막을 지나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야만 했다. 그는 사막을 지나가야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거기서 무슨 일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보냄을 받았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뜻밖의 곳에서 기회를 얻게 하신다.

(2) 빌립은 그 지시에 복종하였다(27절). 그는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일어나 갔다.

2. 내시에 대한 설명(27)

그는 외국인, 즉 에디오피아 사람이었다. 에디오피아인들은 비천한 민족이라고 경멸을 당했으며 자연이 그들을 저주하기나 한 것처럼 검은 피부를 가졌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에게도 전해졌고 하나님의 은총은 그들에게도 나타났다. 그 내시는 자기 나라에서는 능력있고 권세있는 자였다. 내시란 직위는 왕궁의 수상이나 재산관리인을 의미한다. 그는 '큰 권세가 있는' 자였으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권세를 누렸다. 그는 그녀의 모든 국고를 맡아 보고 있었으며 여왕은 그를 굉장히 신임하고 있었다. 많은 자가 권세있다 존귀하다 불리우지 아니하며 그렇게 불리우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개종자였다. 이로 미루어 시바 여왕 시대 이후 이 나라에도 진실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3. 빌립이 내시와 동행함(28-31)

빌립은 내시와 동행하면서 그가 사막으로 보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1) 빌립은 이 여행자와 동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여행자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었는데 그곳에서는 사도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그를 설득하였으며, 사막에서 그를 사로잡아 감동시키셨다. 빌립은 그의 귀에 속삭이시는 성령에 의해 이 명령을 받았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29절). 우리는 노상에서 우연히 알게된 사람에게도 좋은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감화를 줄 수 있는 이방인에게 너무 소극적이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2) 빌립은 그가 병거에 앉아서 성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 빌립이 달려가서 글 읽는 것을 듣고(30절). 그 내시는 성경, 즉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여행의 지루함을 잊고 시간을 귀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도 경건의 훈련에 힘써야 한다. 그러한 모범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임무를 위하여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즉 매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성경연구에 힘쓰는 자들은 지식을 향상시키는 올바른 길을 알고 있다.

(3) 빌립은 그에게 적합한 질문을 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30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성경을 이해하지 않는한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4) 도움이 필요했던 내시는 빌립에게 동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31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는 친절하게 질문을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하고 대답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가르침을 받아야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가르침을 매우 열망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지도해 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내던져 버리지 말고 쉬운 것부터 이해하도록 힘써야 한다. 지식과 은총은 점진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다. 그는 빌립에게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하고 청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필수적으로 지도자가 필요하다. 좋은 서적도 있고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야 한다.

4. 내시가 읽은 성경 말씀(32-35)

내시가 인용한 성경 말씀과 빌립이 설명해준 내용은 이러하다.

(1) 그가 읽은 곳은 이사야서 53장으로 본문에는 두 절이 인용되어 있다(32,33절). 그들은 70인역으로 읽었는데 히브리어 원서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다. 히브리 원문과 큰 차이가 있는 곳은 다음 구절이다. 즉 히브리 원문에는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왔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에는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다. 즉 그는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할만큼 그들의 눈에 비천하고 보잘것없이 보였다. 그들은 그가 결백하다고 선언했으나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그는 철저히 낮아지셨으며 굴복 당하였다. 그래서 낮은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메시야에 관해서 예언한 것이었다.

1) 그는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서' 죽으리라는 것이다.

2) 그는 부당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며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고' 생명을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3) 그는 인내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이다. '털깍는 자 앞에 선 양'처럼 잠잠하였고 도살꾼 앞에 선 것처럼 '그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주 예수처럼 인내한 예는 절대로 볼 수 없다. 고소 당하고 핍박당한 때도 그는 침묵하셨다.

4) 그러나 그는 영원히 살 것이며 그 연수는 셀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는 말을 "그는 하늘에서 셀 수 없는 세월을 영원히 사실 것이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 내시는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하고 물었다(34절). 이 질문은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다. "이 예언자가 자기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오해를 받을 것을 예견하고 자기에 대해서 한 말인가? 아니면 타인을 말한 것인가?" 그는 빌립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 질문을 던졌다.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3) 빌립은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관한 복음의 신비를 그에게 전했다.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절). 이것이 빌립의 설교 내용의 전부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든지 길을 행할 때에든지' 좋은 목적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는 일례를 볼 수 있다.

5. 내시가 세례를 받음(36-38)

(1) 내시는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정중히 청하였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38절). 내시는 그 물을 보고 세례 받을 것을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연하게 보이는 섭리를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켜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생각지 못할 것이다. 내시는 얼마동안 빌립이 합당하게 여긴다면 지금과 같은 적절한 때에 세례를 받고자 하였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그는 세례 받겠다고 강요하지 않았고 "여기 물이 있으니 세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우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빌립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세례받기를 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엄숙히 봉헌하고 헌신하고자 할 때에는 서둘러야 하며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내시는 그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훌륭한 감화력이 식거나 감퇴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즉시 그의 영혼이 주님과 연합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2) 빌립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한글개역 성경에는 37절이 빠져있고 난외주에 삽입되어 있다-역주) 그는 마음을 다하여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리로 복음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동의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조건에 대해 의지적으로 동의함으로써 마음으로 믿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마음으로 수락해야 되기 때문이다. "네가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너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고 세례 받음으로써 교회에 가입할 수 있다."

(3) 내시의 신앙고백 : 그것은 짧았으나 포괄적이고 매우 적절하였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줄 믿노라(난외주에 삽입된 37절). 그는 참 하나님의 예배자 앞에 서있었고 그래서 이제 그와 해야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약속된 참 메시야라는 것을 믿었다. 또 그리스도가 예수 즉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믿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닌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4) 내시가 세례를 받음 :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38절). 그곳은 그가 여행 중에 만난 가장 훌륭한 휴식처였다. 둘 다 물에 내려가(38절). 그들은 관습에 따라 맨발로 발목이나 정강이부분까지 물을 이르도록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빌립은 그에게 물을 뿌렸다. 빌립은 마술사 시몬에게 속은 적이 있었지만 이 내시가 즉석에서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세례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설혹 위선자들이 교회에 몰려와서 후에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말썽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상으로 그를 받아들이는데 엄격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변절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이기 때문이다.

6. 빌립과 내시가 헤어짐(39,40)

빌립과 내시는 즉시 헤어지게 되었고 이것은 이 이야기의 다른 부분처럼 놀라운 것이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가자마자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갔다. 그것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간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39절). 빌립에게 내린 이기적인 역사는 그의 가르침을 확실히 해주었고 그가 기적을 행한 것만큼 효과가 있었다. 그가 이끌어 가므로 내시는 그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시는 그의 사역자를 잃었지만 다시 성경 읽는 일로 되돌아갔다.

(1) 내시는 혼연히 자기의 길을 계속 갔다. 고향에는 그가 해야할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는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하는 일은 기독교와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자신의 세상사에 연관시킬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기뻐하였다. 그의 삶 속에서 이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뻐했다.

1) 그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이다.

2) 그 좋은 소식을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로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한편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40절). 그러나 빌립은 어느 곳에 있든지 게으르지 않았다.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40절). 그리고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가이사랴에 그의 집이 있음을 알 수 있다(21:8).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회 전도사로서 신실하게 이행했던 그는 마침내 정착할 곳을 얻은 것이다.

 

# 해설

흩어진 교회의 복음 전파 ( 8 )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의 교훈과 행위가 유대주의로부터 확실하게 구분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점이 지적된 것입니다. 본장에서는 기독교에 큰 핍박이 임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큰 시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1. 교회에 임한 핍박

1) 흩어진 성도들

스데반의 죽음으로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그를 장사했습니다. 공회는 기독교를 해로운 종파로 선포했고, 이것을 근거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핍박자는 공회의 임명을 받고 그 명령을 시행하던 사울이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여러 도시로 피신해 갔습니다. 대부분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신했고 어떤 이는 다메섹과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a.여러 형태의 핍박(히11:36)

b.제자들의 흩어짐(마10:23)

2) 사마리아 성의 기쁨

그 흩어진 성도들은 두루다니면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는 특별히 빌립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이방 도시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가 이방 선교를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본받아 행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선교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서로 적대시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마리아 성에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a.표적(요2:23)

b.영적인 기쁨(요16:22)

3) 마술사 시몬

사마리아 성에는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마술을 행하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자칭 하나님의 대변자 혹은 대리자라고 하여 사람들을 미혹케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라 그를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로 믿게되자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능력에 놀랐습니다.

a.예수를 믿고 세례 받음(막16:16)

 

2. 베드로를 만난 시몬

1) 사마리아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

사마리아에서의 빌립의 성공이 예루살렘에 알려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을 알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으로 보내서 선교 사역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사마리아 교회에 새로운 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게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아직 한사람도 성령을 받은 일이 없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만을 받은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는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 빌립의 사역을 확증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해묵은 반목이 이제 그리스도의 새 질서 안에서 깨끗이 사라졌음을 특별히 확증하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안수할 때 임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날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와 같은 방식으로 곧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a.성령받기를 기도함(행2:38)

2) 성령에 대한 시몬의 오해

성령의 능력으로 이전에 원수였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빌립의 기적은 시몬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사도들이 안수할 때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때, 그 현상은 볼 수 있고 또한 들을 수 있게 나타났으므로 시몬이 주목해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사도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마술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시몬이 가진 신앙의 진실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그의 세속적인 야망을 책망했습니다.

a.돈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사55:1)

b.바르지 못한 마음(시78:37)

 

3.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1) 천사의 지시와 빌립의 순종

사마리아에서의 대대적인 전도를 성공리에 마친 빌립은 주님의 지시로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나있는 가사 길로 향했습니다. 그 길은 광야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그는 한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디오피아는 지금의 누비아(Nubia), 즉 나일강 첫번째 폭포와 수단의 수도 카드툼 사이에 있는 나일 계곡입니다. 본문의 에디오피아인은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재무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의 신앙과 생활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대순례 절기들 가운데 한 절기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구했고, 돌아가는 길에 그것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빌립이 이 내시를 만났습니다. 읽는 부분은 이사야 53장의 글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인으로서는 그 글이 이해가 안 되었고, 고난 당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a.바른 예배(시96:8)

b.성령의 인도하심(삿6:12)

2) 내시의 세례 받음

그때 빌립이 다가온 것입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본문의 말씀을 설명해 줄 것을 간청했고, 빌립은 예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인은 성령의 깨우침을 받고 흐르는 물을 보자 빌립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에디오피아인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빌립은 북쪽으로 돌이켜 지중해 연안을 따라가면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마침내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a.영적인 가르침(눅24:27)

 

결론

빌립은 영혼 구원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에게는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 성령의 지도아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마리아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 핵심

8:1-13

스데반의 순교이후 핍박에 직면한 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흩어졌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방 선교를 가능케 했는데 그 전(前) 단계가 바로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이다.

복음 전도(8:4)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복음이며, 자신의 사명은 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20:21,24). 베드로도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다고 밝혔다(15:7).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 역시 복음 전도이다(마 28:18-20). 성경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대사명이 전도임을 일러준다. 따라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전도에 힘쓰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딤후 4:2).

 

# 묵상

스데반의 순교 영향과 빌립의 전도 ( 8:4-8 )

남은 사람들이 두루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흩어졌으나 성령의 충만을 받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입니다. 한편 사마리아 성에 내려간 빌립은 더러운 귀신을 쫓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등 수많은 이적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빌립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사마리아 온 성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 ( 8:25 )

이 두 사도는 사마리아 여러 촌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사마리아 성이었지만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인근 마을까지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 ( 8:26-39 )

주의 사자는 빌립에게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 지역 선교에 있어 가사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그곳이 광야임에도 불구하고 빌립이 명령에 따른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도 주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은 가사로 가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었고, 병거 안에서도 이사야의 글을 읽을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신을 애타게 찾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시는 빌립의 가르침을 받은 후 세례받기를 원했습니다. 세례는 물로 몸을 정결히 씻는다는 형식적인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모든 생애를 온전히 바치겠다는 각오를 의미합니다. 즉 내시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면서 세례를 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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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스데반의 변명(1) 7:1-16

1. 대제사장의 질문(1)

대제사장은 그에게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1절). "너는 너를 고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냐? 유죄냐 무죄냐?"

2. 그의 답변(2-16)

그의 답변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아주 길었다.

(1) 이 답변으로 보아서 그는 성경에 정통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성령은 그에게 새로운 사실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내용을 기억시켜주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가르쳐 주시는 성령이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스데반처럼 성경에도 해박하게 된다.

(2) 그는 70인역에 따라서 성경을 인용했는데 이로 보아 그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것 같다. 답변의 서문, 즉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2절). 이것은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들은 그를 유대교회의 배교자로, 그들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그를 그렇게 보더라도 자신을 그들 중의 하나로 보이게 하고 싶어서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들으소서'라고 말했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전과 율법이 세워지기 오래 전에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이 그들의 시대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구약교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부터 언급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의 땅으로서 메소포타미아(2절) 곧 갈대아 사람의 땅이었다(4절).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를 불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를 갈대아 땅에서 하란으로 부르시어 아버지가 죽기까지 5년간 있게 했다. 그 아비가 죽으며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4절). 이 부르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생활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의 섭리에 따라서 한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다.

둘째,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은 세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라도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초월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자들은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을 가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부를 권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경배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례 받았음을 자랑하였다. 그래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안내를 받고 그와 교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거룩한 땅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땅은 가나안 땅 전체를 의미했다.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그것을 지랑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너희는 원래 갈대아 우르 출신이다. 너희는 이 땅의 원주민이 아니다. 너희 초기의 비천함을 생각해보라. 너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이므로 영원히 오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오기 전에 메소포다미아에서 영광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이 땅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 받은 후에 오랫동안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방랑의 상태에 있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5절). 그러나 첫째, 그후 오랫동안 그는 여전히 사라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둘째, 그는 그 땅의 이방인이요 방랑자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런데도 그는 낯선 땅에서 살았다. 셋째, 그의 후손도 오랫동안 그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다. 사백년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7절). 넷째,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기 전에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곤욕을 치루며 노예 생활을 하여야 했었다.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아브라함이 유업도 없고 자손도 없었던 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둘 다 주시리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더디 이루어질지라도 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곧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착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일시적으로는 곤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다스리신다. 그러면 이 같은 사실이 스데반의 설교 목적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첫째, 유대나라는 그 초기에 매우 보잘것없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그들 종족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났던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끌어내신 이가 그들을 애굽으로 다시 데려가실 수 있다. 또한 그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둘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를 향하여 천천히 나아감은 그것이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말해 주며 약속에 의하여 전해진 더 좋은 땅 즉 하늘나라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곳을 헐고"라고 한 것은 모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그가 우리를 천상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의 가계가 형성됨.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증표로 그와 그의 남자 자손들이 할례 받을 것을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 그에 따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었을 때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했다(8절). 그들은 번식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삭을 낳아…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둘째, 그의 아버지 집에서 귀염둥이요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그의 꿈 때문에 그를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다.

셋째,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의 곤경에서 돌아보시고 성령으로 마음에 위로를 주시고 요셉과 관계된 자들의 마음을 또한 주장하심으로써 그를 그들의 눈에 들게 하셨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환난에서 건져내셨던 것이다.

넷째,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을 정도로(11절) 극심한 곤경을 초래한 심한 기근이 들어 야곱은 애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의 지혜로 말미암아 저장된) 곡식이 애굽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우리 조상들을 보내어 곡식을 구해 오게 했던 것이다(12절). 그들이 재차 갔을 때 요셉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렸고 바로에게도 그들이 요셉의 혈족인 것을 알렸다(13절). 여기서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다(14절).

다섯째,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죽었으나(15절) 가나안으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16절).

그러면 이 말씀을 한 스데반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유대민족의 보잘것없는 출발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일으킴을 받은 것은 은총의 기적이었다. 그들이 불려 세워진 취지를 망각한다면 그들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솔히 여기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는 이점을 상기 시켰던 것이다.

둘째, 그는 자기 형제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 버린 족장들의 사악함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그와 똑같은 정신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들 속에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거룩한 땅은 그들의 조상도 오랫동안 소유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죄로 물들었던 이 땅이 결국 멸망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Ⅱ. 스데반의 변명(2) 7:17-29

1. 민족의 증대(17)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놀랄만큼 증가하였다. 짧은 시간에 그들이 한 가족에서 한 국가로 발전한 것은 놀라운 섭리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그 때는 바로 그들이 민족을 형성해 가던 때였다. 섭리는 그 핵심에 가까워지면 종종 그 역사가 신속해진다. 하나님은 늦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에 구원하실 방법을 알고 계신다. 구속의 때가 가까웠을 때 그는 하루에 갑절의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들이 압제받은 곳은 애굽이었다. 고난의 시기는 때로 교회 성장의 시기가 되기도 하다.

2. 그들이 당한 고통(18,19)

거기서 그들은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스데반은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한다.

(1) 애굽인들의 배은망덕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18절). 그들은 압제하였다. 선한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은 매우 배은망덕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 선한 백성들이야말로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의 악랄한 정책과 수단 :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19절).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라고 말하며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을 안전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의 형제를 궤계로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3) 그들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잔악함 :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할쌔(19절). 지금 그들이 초창기의 기독교 교회에 대하여 행한 것은 애굽인들이 초창기의 유대교에 대하여 행한 바처럼 무익하고 뜻없는 것이다. "너희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증가하고 번성할 것이다."

3. 모세를 세우심(20-22)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세우셨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이 가장 극심한 때 태어났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20절). 그러나 그는 피의 법령에 희생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갈 길이 어둡고 그 고통이 가장 깊을 때 그들을 위하여 구속을 준비하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별되었고 이것이 그를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는 젖먹이 때 먼저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고 훌륭하게 양육되었다. 그리고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21절).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특별하게 보호하신다. 그는 위대한 학자가 되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22절). 그는 그 말과 행사가 능한 사람으로 애굽의 수상이 되었다. 그는 비록 의사 표현에 미숙하고 더듬거렸지만 매우 분별력 있게 말했으므로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수긍을 얻었다. 이것으로 스데반은 자신도 유대인들처럼 모세에 대하여 고귀한 사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4. 모세의 사도(23-2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을 스데반은 대단히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모세 이야기의 핵심 곧 그가 소명받은 그 공적 임무의 예정된 출발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23절). 하나님이 넣어 주신 생각이다. 또한 그는 그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 그는 이스라엘의 구세주로 처신하고자 했다. 그는 압제받는 이스라엘인의 복수를 해줌으로써 그 본을 보였다. 즉 이스라엘인을 해하려는 애굽인을 죽였던 것이다.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매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24절). 그들이 시대의 증표만 이해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이 사건을 구속의 날이 밝아오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2) 이스라엘의 심판관이 되고자 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26절). 그들의 싸움을 보고(모든 분쟁이 그러하듯이) 그는 양편에 잘못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양보하고 겸손해야 했다. 그러나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7절). 그리고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관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라고 그를 무시했다. 교만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책망과 권고를 참지 못한다. 악행자는 그의 책망에 격분하여 애굽인을 죽여 자기 민족을 돕고자 했던 모세를 비난하였다.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 하느냐(28절). 그의 행동은 애굽인에 대한 도전이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해방의 행위였으나 그들은 그것을 범죄로 몰았다. 이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미디안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29절). 그러면 스데반이 이 말을 한 취지는 무엇인가?

1) 그들은 스데반을 모세 모독자로 고소했으므로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는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 행한 냉대를 들어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중에 누가 더 모세에 대하여 열심인가를 놓고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2)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변증한다는 이유로 그를 박해했다. 그들은 모세와 그의 율법을 내세워 스데반을 공박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그는 말했다.

①"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왕과 구세주로 세우신 분을 거역하지 말라.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애굽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극심한 노예상태에서 너희를 해방하실 것이다."

②"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과 같은 것을 하지 말라.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인에게 전파될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Ⅲ. 스데반의 변명(3) 7:30-41

스데반의 모세 이야기는 계속된다.

1. 모세가 본 광경(30,31)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40년이 차매(30절). 즉 80살이 되었을 때, 출생 때의 명예로운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곳은 시내산 광야였다(30절). 거기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곳은 거룩한 곳이 되었다(33절). 스데반은 이 사실을 지적하여 그들이 자기들이 있는 성전 외에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는 교만에 빠져 있음을 환기시키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제한된 장소에만 계신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기만에 빠졌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끌어내시어 거기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는데 그 불꽃 가운데서도 그 덤불은 타지 않았다. 이 사실이 모세에게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31절). 처음에는 호기심이 생겼다.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그러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는 더욱 놀라게 되었다.

(2)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이는 그것이 주의 천사라는 것을 그가 즉시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를 무서워 떨게 만들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32,33)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다.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32절).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전에 있었던 바와 같이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그 언약은 효력이 충분하다. 나는 전과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근거해 있다.

(2) "나는 지금과 같이 영원히 있을 하나님이다"

1) 그는 지금 몸에서 분리되어 있는 영혼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는 이 사실을 들어 미래의 상태를 입증하신다(마 23:31,32). 아브라함은 죽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빛으로 밝혀진 생명과 불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수호하는 사람들은 모세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명예로운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2) 그는 그들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자신이 그를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자손에게 친절을 베푸신다. 그들은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이제 복음 전도자들은 이 언약, 즉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행 26:6,7)을 전파해야 한다. 거룩한 것과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그리고 그 거룩한 곳 즉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을 어기겠는가? 하나님은 율법이 아니라 약속에 의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 하신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은 스스로 그 약속을 모독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3. 사명의 위탁(3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1) 모세에게 경건한 자세를 취하라고 하셨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거칠고 급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되며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2) 모세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다. 그는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줄 것을 요구하라고 명령받았다(34절). 이로써 우리는 다음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①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난과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34절). 그들의 해방은 하나님의 연민에서 시작된다.

②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으로 그들을 구하시려고 작정하셨다.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모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다면 그가 성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4. 모세의 역할(35,36)

(1) 하나님은 그들이 멸시한 모세를 영예롭게 하셨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935절). 사도들이 얼마전에 유대인들에게 말했듯이(행 5:30.31) 그 유대인들이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는 말로써 배척한 이 예수로 하나님께서 임금과 구주를 삼으신 것과, 그가 건축자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행 4:11)을 스데반은 이제 이 예로써 공호에 알리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마땅히 그들에게 그의 도움을 거절하실 수도 있었으나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으셨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36절). 스데반이 모세를 하나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존경한 것은 모독이 아니었다. 또한 모세는 그릇에 불과하고 이 예수를 통하여 재조명된다고 스데반이 말했다고 해서 그의 정당한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 해방되었다.

5.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에 대한 모세의 예언(37)

모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37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 큰 영광 중의 하나였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위대한 예언자가 이 세상에 올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관습적인 의식법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요 5:46)라고 하셨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중에서, 그 민족 중에서 한 예언자가 일어날 것인데 그는 더 나은 계약의 중보자로서 자기가 준 관습을 바꿀 권위를 가졌고 더 좋은 소망을 가져다 줄 권위를 가진 자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그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그들을 촉구했다. "이것이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던 모세와 그의 율법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가 될 것이다."

6. 모세의 공헌(38)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데에 쓰인 후 계속해서 그들에게 탁월한 공헌을 했다(38절). 모세의 명예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광야 교회'에 있었다. 그는 40년 동안 그 교회의 일을 주재하였다. 만일 모세가 그곳에 있으면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그 교회는 여러 번 해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욱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한 인도자이며 주재자이시다. 그리고 모세가 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 교회의 생명과 영으로 그 안에 계신다.

(2)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있었다. 모세는 광야에 있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함께였다. 그 천사가 그를 인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천사이며 따라서 모세를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셨다.

(3)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였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다른 계명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로 인해 모순이 해결되는 확실하고 오류가 없는 도이다. 그것은 생명의 도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생명이며 영이다. 모세의 율법은 생명의 길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았으며 그가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전하였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관습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수를 통해 그 관습을 변경하시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이전에 모세가 받았던 것보다 더욱 분명한 생명의 도를 받으셨다.

7. 백성들의 반응(39-41)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를 경멸하였다. 스데반이 모세를 거역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그들 조상의 전철을 밟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절). 모세의 인도하에서 맛보았던 만나나 가나안에서 맛보게 될 젖과 꿀보다 애굽의 양파와 마늘을 더 좋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도 마음은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준 관습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면 그리스도가 그 관습을 바꾸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41절). 그들은 모세를 경멸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40절) 하는 생각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금송아지가 모세의 자리를 대신 채워줄 것이며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는데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41절). 이 사실로써 율법이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율법은 더나은 손길을 통하여 완전해야 될 필요가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담당하셨다고 말한 스데반이 모세를 모독한 것은 아니다.

 

Ⅳ. 스데반의 변명(4) 7:42-50

1. 우상 숭배를 비난함(42,43)

스데반은 그들 선조들의 우상숭배를 들어 그들을 비난했는데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상실한 마음을 주신 것, 이것이 가장 슬픈 처벌이었다.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었으니(42절). 이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는 아모스서 5:25절을 인용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들의 성격과 운명을 말해줌으로써 그들을 덜 불쾌하게 하려 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을 비난했다.

(1)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드리지 않았다. 40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42절). 아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중단되었었다. 2년 후에는 유월절도 지키지 않았다. 그 관습들이 전해진 후 40년 동안이나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 사실 또한 모세가 전해준 관습을 신봉하는 그들의 열심을 억제케 하며, 그 모세의 관습이 예수에 의해 변경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염려를 억제케하는 이유가 되었다.

(2)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다른 신을 섬겼다. 몰록의 장막을 받들었음이여(43절). 몰록은 암몬 자손의 우상이었는데 그들은 야만스럽게도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이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을 때 그들은 이 비이성적인 우상숭배에까지 이른 것이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43절). 어떤 이는 그것을 토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리아어로는 그 항성을 레판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70인역은 그것을 기윤(Chiun)으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아데미의 은감실처럼 별을 상징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그것을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라고 하였다. 이제 내가 너희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는 경고가 내려진다. 그러므로 그곳을 파괴하겠다는 말을 구약성경의 선지자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2. 성전에 관한 답변(44-50)

스데반은 그가 성전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점에 대하여 특별히 대답하고 있다(40-50). 그는 예수가 이곳을 멸하리라고 했다고 해서 기소되었다. "내가 무슨 못할 말을 했는가? 이곳이 먼저가 되어야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변함없이 보존될 것이다." 그 이유는,

(1) 우리 조상이 광야로 갈 때까지는 고정된 예배처가 없었다. 최초의 가장 순수한 구약 교회 시대에 성전 없이 예배를 받으셨던 것은 이 거룩한 곳이 파괴되었을 때도 예배를 받으실 수 있으며 또한 받으실 것이다.

(2) 초기에 성전은 보잘것없고 누추하고 이동식이었으며 임시적인 장막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 성전이 그처럼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3) 그 장막은 증거의 장막 혹은 증언의 장막이었다. 장막과 성전이 증거를 위해 세워졌다는 이 사실은 영광된 것이었다.

(4) 그 장막은 '광야에서 모세가 본 양식대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장차 올 좋은 것들을 암시하였다. 그러므로 손으로 지어진 이 성전은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른 장막을 세우기 위하여 파괴될 것이라고 해서 그 영광을 감소시키는 것이 전혀 아니다.

(5) 그 장막은 처음에 광야에 세워졌다. 그것은 이 땅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가지고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소유였던 그 땅에 그의 영적인 성전을 세우실 수 없겠는가? 그 장막은 예수 즉 여호수아와 함께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신약의 여호수아는 이방인의 땅에 참된 장막을 가져올 것이다.

(6) 이 장막은 성전이 건축되기 전, 다윗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45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은' 다윗은 하나님께 계속 정착된 장막, 계속 거하실 장막을 지어드리고자 더욱 그 은혜를 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그의 왕국을 위하여 앞장서게 된다.

(7)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할 때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을 금하셨다. 성전을 지은 사람은 여러 해 후에 다윗이 아닌 솔로몬이었다.

(8) 하나님께서는 종종 손으로 지은 성전은 그의 기쁨이 되지 못한다고 선포하셨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함'을 알았다. 온 세상이 그의 성전이며 그는 어디나 계신다. 또한 이 세상에는 그의 영광이 가득차 있다. 하나님께서 무슨 까닭으로 성전을 필요로 하시겠는가? 유일하고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장막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늘이 그의 보좌이며 그가 안식하시는 곳이며 땅은 그의 발등상이니 그가 다스리시는 곳이기 때문이다(49절).

그러하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내가 안식하거나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나에게 집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50절). 따라서 그가 선포되는 이 세상이 그의 성전인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려질 성전은 이 세상인 것이다. 그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땅은 그에 대한 찬양과 이것이 그의 성전이라는 말씀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성전을 멸하고 모든 민족들이 무릎 꿇게 될 다른 성전을 세우실 것이다'(행 15:16,17)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거룩한 곳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Ⅴ. 스데반의 변명(5) 7:51-53

스데반은 성전과 마찬가지로 성전 예배 의식도 끝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설교를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이 그 말을 참지못할 것을 감지하였다. 그들은 들으려 조차하지 않았다. 그는 설교를 중단하고 그에게 충만했던 지혜와 용기와 권능의 성령으로 자신의 핍박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들이 스스로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복음은 그들에 대항하는 증언이 될 것이다.

1. 그들의 완고성(51)

그들은 그 조상들과 같이 완고하고 고집이 세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화하고 개심시키기 위해 취하셨던 어떠한 방법으로도 돌아서려 하지 않았다.

(1) 그들은 목이 곧고(51절). 하나님 나라의 가볍고 메기 쉬운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지도 않았다.

(2) 그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 "이름과 외관상으로는 너희가 할례받은 유대인이나 마음과 귀로는 아직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다. 너희는 이방인이나 하는 것만큼 너희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2. 성령을 거스림(5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방법에 감화를 받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 방법들에 대해 격노하고 분을 품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1) 그들은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에 항거하였다. 너희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52절). 그들의 조상은 선지자 안에 계시는 성령에 항거하였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사역자 안에 계시는 성령에 항거하였다.

(2) 그들은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그들과 싸우시는 성령에 항거하였다. 우리의 죄된 마음속에는 언제나 성령에 항거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마음속에는 이 항거가 극복되고, 싸움 후에는 그리스도의 면류관이 그 영혼에 씌워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은총은 '거역할 수 없는 은총'이라기보다 '승리로 이끄는 은총'이라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3. 하나님의 사람을 죽임(52)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1) 그들의 조상은 잔인하며, 끊임없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52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 하였느냐.' 많건 적건, 어느 때든지 그들은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선지자들을 핍박한 죄가 더욱 악한 것은 그들의 의인이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었으며 또한 메시야를 그들 가운데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관대한 뜻에 대해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자들은 환영받고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나 그들은 가장 가혹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2)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3:14,15;5:30)그들은 그 외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도록 유다를 꾀었고 예수를 비난하도록 빌라도에게 강요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의 배반자요 살인자라는 죄가 돌아간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그 당시에 살았더라도,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든 선지자들의 피에 대한 죄값이 그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존중하지 않은 그들이 선지자들을 존경하겠는가?

4.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함(53)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경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에게 헛되이 율법을 주신 것처럼 그들에게 헛되이 복음을 주셨다.

(1) 그들의 조상은 율법을 받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53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의 위대한 모습을 보여 주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낯설고 이상한 것으로 여겼다. 그 율법은 천사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천둥 번개와 나팔소리를 동반한 장엄한 율법 수여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을 받은 자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으며 금송아지를 만듦으로써 그 첫 계명을 즉시 깨버렸다.

(2) 이제 그들은 천사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복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이나 복음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Ⅵ. 스데반의 순교 7:54-60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의 죽음을 보게 된다. 불과 어두움의 지옥, 그리고 빛과 밝음의 천국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들은 서로서로 돋보이게 한다. 본문에는 공회에서 그의 사건을 놓고 투표했다는 말이 없다. 그는 군중에 의해 유죄로 결정되었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죽게된 것이 군중의 폭력에 의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관례적인 사형집행의식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성밖으로 끌려나와 먼저 증인들이 그에게 손을 얹었다.

1. 핍박자들의 모습(54)

핍박자들의 타락한 모습을 살펴보자.

(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절). 디에프리온토(찔리다)는 히브리서 11:37절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톱으로 켜는 것과 같다고 번역되어 있다. 그들은 순교자들이 육체에 당하는 고통만큼 마음의 고통을 당하였다. 그들은 2:37절의 사람들과 같이 슬픔으로 마음이 찔린 것이 아니라 5:33절의 사람과 같이 노와 분으로 마음이 찔렸다.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은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지만 믿음과 사랑은 마음을 치료한다. 그들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보이던 그가 설교를 끝낼 때는 천사처럼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고소가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고 절망하였으나 그들은 굽히지 않았다.

(2)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절). 이것은 스데반에 대한 악랄한 적의와 분노를 나타낸다. 그들은 개들이 자기를 해치려는 자에게 하듯 이를 갈았다. 성도에게 적의를 품으면 사나운 짐승같은 사람이 된다. 또 이것은 깊은 분노를 나타낸다. 그들은 스데반에게서 하나님의 권능이 선포되는 것 같아서 초조하였다. 이를 간다는 것은 때로 저주받는 자의 공포나 고통을 표현해 준다. 이같이 지옥의 악의를 품고 있는 자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함께할 수밖에 없다.

(3)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57절). 스데반이 내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노라 하고 말했을때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 정당한 동기를 소음과 아우성으로 헐뜯으려 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다. 이성이 결여될 때는 소요만이 발생할 뿐이다.

(4) 그들은 그의 모욕을 더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어서 그들의 귀를 막았다. 그들은 그가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노라'하고 말하자 귀를 막았다. 그들의 귀막음은 그들의 고집스러운 교만의 명백한 실례였다. 그들은 듣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셨다는 법적인 가혹함의 치명적인 징조였다. 그들은 그들의 귀를 막았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에 따라서 그들의 귀를 막으셨다.

(5) 그들이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짐승이 먹이에게 달려들듯이 그를 덮쳤다. 그들은 그를 당황하게 하려고 일심으로 달려들었으며 그의 마음의 평정과 위로를 시기하였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6)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를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레24:16)고 한즉 그들은 그를 성밖으로 내쳤다. 그들은 그를 쓰레기처럼 취급하였다. 그에 대적하는 증인이 율법대로 형 집행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그들의 증언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8절).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이름을 처음 대하게 된다. 우리는 그 이름이 바울로 바뀌었을 때 그 이름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게 된다. 그는 후에 스데반의 죽음의 증인이 되었던 작은 사건을 후회하였다.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20:21).

2. 스데반에게 나타난 역사(55-60)

스데반에게 나타난 은총의 힘을 살펴보자. 그의 핍박자들이 사단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그는 성령충만 했다. 그가 공직에 뽑혔을때 그는 성령충만한 자로 묘사되었었다(6:5).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같은 특성을 지닌 순교자로 불리우고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거나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거나 어느 일에든지 적합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해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는가?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감소되겠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스데반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총 :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이를 갈 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다.

1)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 했다(55절). 따라서 그는 핍박자들의 권세나 분노를 샀다. 그들은 악의와 잔인함으로 가득하여 스데반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 전혀 개의치 않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에서 그의 도움이 오고 그곳으로 길이 끊임없이 열렸다. 그들은 스데반이 하늘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에 맡겼다. 말하자면 그는 그 고난을 하늘에 호소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를 기꺼이 하나님께 드린 사람처럼 하늘을 응시하고 드릴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와 은총을 간구하면서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그의 영혼을 고양시켰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고난받게 하시려고 부르신 종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만 같이 하신다. 이같이 그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숨쉬기를 바랬다. 그는 핍박자들의 분노가 곧 그를 그곳으로 보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죽어가는 성도가 하늘을 응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행할 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의 성령충만함을 나타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의 마음이 거기 있기 때문에 하늘만 바라본다. 만일 우리가 하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하늘을 주목하여 바라보아야만 한다.

2)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55절). 왜냐하면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56절). 하늘이 열리고 그가 곧 가게 될 나라의 복된 모습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고 위대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응시하면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하여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그 광경은 고난과 죽음의 모든 공포를 극복하게 해줄 것이다.

3)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즉 '인자가 서신 것'을 보았다(56절).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는 천사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여기에서는 스데반의 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귀하심이 증거 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를 보았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부터 받으시며, 우리에게 관하여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바로 예수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오른손이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그가 거기에 서 계심을 본다. 주님은 스데반을 영접하시고 그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서 계신다. 잠시 후면 맛보게 될 기쁨을 보여주기 위해 그 앞에 서 계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를 위하여 계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누가 그에게 대적한다 해도 문제가 없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고난 중에 계실 때는 천사가 나타났었으나 스데반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나타나셨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를 보는 것처럼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없다. 믿음으로 우리는 거기 계신 주님을 볼 것이다.

4) 스데반은 자신이 본 것을 그들에게 말했다.(56절) 보라 내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노라(56절).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선포하여 그것을 듣고 그들이 기뻐하기를 바랬다. 그것을 듣고 화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를 생각하고 그를 믿게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데반의 경건한 태도 :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59절). 그가 하나님을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그를 돌로 쳤다. 또 그들이 계속 돌로 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불렀다.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핍박받고 미움받는 사람에게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본문에서처럼(57절) 인간은 귀 막았으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스데반은 성밖으로 내쳐졌으나 하나님은 그를 내치지 않으신다. 이제 그는 이 세상을 떠나려 하면서 하나님을 부른다. 기도하면서 죽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죽는 순간에 두마디의 짧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1) 그 자신을 위한 기도 :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셨다.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를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영혼은 곧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큰 관심사인 삶과 죽음은 우리 영혼에 관한 것임에 틀림없다. "주여 내 영혼을 안전하게 하소서." 내 초라한 영혼을 받아 주소서"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 주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에게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구하고 위로를 얻는다. 본문에서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기도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의 인도없이는 저 세상으로 갈 수 없고 그가 주시지 않으면 죽는 순간에 생생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임종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받으심은 그로인해 우리가 위로를 얻게 되는 중대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죽을 때에 위로가 될 것이다.

2) 핍박자들을 위한 기도 : 이 기도의 정황은 매우 주목할만하다(60절).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기도에 임하는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크게 불렀다. 그것은 그의 끈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적을 위한 기도를 함에 있어서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매우 요구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타락한 본성에 강하게 대항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 내용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받을 모든 제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 기도는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그의 기도는 그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첫째, 그들이 저지른 바가 아주 큰 죄라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악의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이 이성을 회복했을 때 확실히 그들은 그들을 그렇게 쉽게 용서한 그를 죽여버렸던 그들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죄는 비록 극악한 것이었건만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다.

(3) 그의 죽음 :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 선한 사람에게 죽음은 잠에 불과하다. 스데반은 보통 사람처럼 바로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잠이 들었다. 그는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그 기도를 하지 않고는 평화롭게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가 잠이 들었다면 그는 편안히 잘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다시 깨어날 것이다.

 

# 해설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 7 )

스데반의 설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단히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이 처음에는 당대의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했으나 나중에 가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보내신 구원자들이었음이 드러났다고 지적했습니다. 요셉이 그러했고,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러했음을 스데반은 힘있게 증거합니다.

 

1. 영광의 하나님

1) 아브라함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란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임을 약속하셨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셔서 이삭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시고,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메소포다미아에서 친히 나타나셨고 그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나그네 된 사백년 동안에도 그들을 붙드셨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의 씨이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a.영광의 하나님(시29:3)

b.하나님의 지시(창12:1)

2) 요셉의 하나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언약 후손을 특별히 인도하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유대인 조상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도자들을 배척한 사실을 공회 앞에 천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배척한 것은 먼저 야곱의 아들들이 형제 요셉에게 행한 적대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셔서 요셉을 애굽과 바로 온 집의 치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었고 요셉으로 인해 야곱의 온 친족이 흉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죽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되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번성케 하셨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협박했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a.요셉을 시기한 형제들(창37:11)

b.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감(창45:9)

3) 모세의 하나님

이때에 모세가 태어났음을 스데반은 말합니다. 석달 동안 위험속에서 모세는 숨겨 키워졌고 강가에 버려진 후 바로의 딸의 아들로 키워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학술을 배워 말과 행사가 뛰어났습니다. 모세가 나이 40이 되매 이스라엘을 돌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족의 아픔을 보고 압제하는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해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으나 저희는 모세를 배척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동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지시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a.모세의 태어남(히11:23)

b.바로의 딸의 자녀가 됨(출2:10)

 

2. 증거의 장막

1) 시내산 광야에서

모세도 요셉처럼 처음 동족들 앞에 나섰을 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불 붙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을 뵙고, 애굽으로 돌아가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두번째 그들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어디든 원하시는 곳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a.시내산 광야(출3:1)

b.백성들의 거절(출2:14)

2) 증거의 장막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력히 개입하셔서 나타내신 온갖 표적과 전능의 보호하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던 바로 그 사람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생명의 도'를 내리셨습니다. 그곳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증거의 장막'이 있었고 또한 모세도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자신이 예언한 더 위대한 선지자의 그림자였습니다. 바로 그 위대한 선지자가 스데반이 이 법정에 서기 불과 몇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a.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히11:38)

b.하나님의 선지자(스5:2)

3)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과 그의 종 모세를 반역하고 돌이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까지 우상숭배를 계속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해 하나님을 영구히 소유하고 있는듯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스데반도 똑같이 헤롯에 의해 증축된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다시 선언했으며, 그 결과 대적자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을 거스르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가 없는 자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a.성령을 훼방함(엡4:30)

b.우상 숭배(신9:16)

 

3.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1) 하나님 우편에 서신 자

이 시점에서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인자를 보았습니다. 공회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스데반을 영접하시려고 친히 서신 것입니다.

a.하나님의 영광(고후3:18)

b.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심(시110:1)

2) 스데반의 순교

이때에 위엄을 과시하던 공회는 폭도로 변하여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죽였습니다. 로마의 총독은 산헤드린에 성전 모독죄에 대한 사형 집행귄을 허락했습니다.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형벌은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법적으로 형벌을 받게된 것입니다. 첫 순교자는 세상을 떠나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때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a.돌로 침(히11:37)

b.원수를 위한 기도(마5:44)

 

결론

스데반의 변증으로 인해 새로운 요소가 교회의 메시지에 포함되어졌습니다. 스데반은 유대 백성의 전체 역사의 목적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숙고하는 가운데 스데반은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목적이 많은 반대에 부딪힌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참다운 영적 백성들은 신앙을 잊어버리고 죽은 형식과 구조에만 매달려 있는 교권 제도의 반대를 받게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핵심

7:1-19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 산헤드린에 선 스데반이 변론한 내용이다. 이 변론은 53절까지 계속된다.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시사한다.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수(7:14)

창 46:26,27절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일가가 7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75명이었다고 하는 본절의 기록과는 5명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70인역(LXX)의 출 1:5절에는 ‘그러나 요셉은 애굽에 있었다. 그리고 야곱의 모든 사람들은 일흔다섯 명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75명은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일가 70명에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애굽에서 낳은 자식들을 더한 수로 추정된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이 70인역의 기록에 의거해 75명이라고 언급했음이 분명하다.

 

# 묵상

스데반의 설교 서두 ( 7:2 )

스데반의 설교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율법보다 이전에 있었던 언약과 믿음을 강조하고 형식적인 율법 조항에 젖어 있던 유대인의 불신을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 7:5-8 )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지 않으시고 다만 그와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 땅에서 400년 동안 나그네로 있으면서 종살이를 하며 학대받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 나라를 심판하시겠고 그 뒤에 그들을 돌아오게 하여 가나안 땅에서 예배하도록 만드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약속의 증표로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요셉을 언급한 스데반 ( 7:9-16 )

이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요셉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성취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언약은 택한 백성에게 주신 복의 표현입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는 ‘임마누엘’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복의 완성자이십니다. 또한 형제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렸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영화롭게 된 요셉처럼,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음을 암시합니다.

모세의 생애를 통한 스데반의 강조점 ( 7:20-36 )

여기서 스데반이 강조하려는 바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모세를 통해 구원하셨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언제나 지켜 보시며 인도하여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동족을 돌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희생하며 이웃을 돕고 있는지, 여전히 도움과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에게 명하신 하나님 ( 7:33 )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당시의 근동 지역은 무덥고 건조하여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신이 쉽게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따라서 신을 벗는 것은 인간의 죄와 더러움을 버리고 정결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함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 7:39 )

이들은 과거 어렵고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애굽의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며 이전에 세상에서 즐기던 것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 ( 7:40-42 )

이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송아지는 애굽인들이 섬겼던 황소의 신 ‘아피스’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앞에서 기뻐함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의 백성들을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습니다. 이는 하늘에 있는 해, 달, 별을 숭배한다는 말로써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을 미워하셔서 더 깊은 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의미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던 장소 ( 7:44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징표로 장막을 설치했습니다(출27:21). 그리고 이 장막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과 만나를 넣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두었습니다. 성막은 성전처럼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순수하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스데반 ( 7:55 )

스데반은 설교 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순교하는 스데반에게 미리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 ( 7:57-60 )

돌로 치는 것은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들이 흔히 당하는 형벌입니다. 성경은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을 ‘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죽으면 흔히 ‘잔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평화로운 죽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성도들의 죽음은 잠에 불과하며 일생 동안의 수고로부터의 휴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편 스데반의 순교시 증인들의 옷을 지켰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 계획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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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일곱 집사의 선택 6:1-7

1. 사인들 간의 분쟁(1)

몇몇 교인들 간에 일어난 불행한 분쟁은 적절하게 때맞춰 처리되었다(1절).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원망하는 자가 생겼다.

(1) '제자가 더 많아졌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당황하였다. 복음 전파에 대한 제지가 오히려 복음 전파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전도자들은 매맞고 위협당하고 치욕을 당했으나 백성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이 고난 중에도 놀랍게 인내하고 기뻐함을 보고 그들을 찾아왔다.

(2) 그러나 제자의 증가가 원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이 증가하자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망한데. 그 원망은 노골적인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가슴을 태우는 것이었다.

1) 불평자들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와 다른 여러 곳에 흩어져 살다가 절기를 당하여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본토 유대인인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하여 불평했다. 이 양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개종전에 서로서로 가졌던 그 사소한 시기심들을 개종한 후에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똑같이 그리스도께 영접을 받으므로 그를 위하여 서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2)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은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회의 최초의 논쟁은 금전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구제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모았으나 그런 경우에 그 분배에 있어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란 어려운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사도들은 불공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들은 자기들의 과부가 빠진다고 불공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 불평은 근거가 없고 부당한 것인 것 같다. 불리한 입장에 선 사람들은 실제와는 달리(헬라파 유대인이 히브리파 유대인과 비교해 보고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무시받고 있다고 시기하기 쉽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결점인데 그들은 시비를 잘 걸고 소란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더 많이 주지 않는다고 흠을 잡곤 한다. 시기심과 탐심을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불평의 원인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국가의 관리들이 특별법으로 과부들을 손해에서 보호한 것처럼 구제를 맡은 사람들은 특별히 과부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에서도 잘못된 일, 부당한 처사, 최소한의 불평거리가 있는 것이다. 최상의 것일수록 단점은 최소가 될 뿐이다.

2.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책(2-6)

지금까지는 사도들이 모든 문제를 처리해왔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보다도 그 문제를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일을 맡겼다.

(1) 사도들이 제안한 방법 :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열두 사도는 어떤 문제도 다른 제자들을 빼고 결정하지 않았다. 사도들보다는 이런 세상사에 더 정통한 그들이 가장 나은 조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 사도들은 그들의 막중한 사명 앞에서 분열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2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이 일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교회생활에 관여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는 것이 된다. 그들이 등에 채찍을 맞았다고 해서 이 사명을 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발 앞에 놓인 돈 때문에 복음전도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복음전도는 사역자의 임무 중 최선의 임무이다. 그는 세상사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의 집의 외적인 일에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

2)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생활을 관장할 일곱 집사를 선택하고자 했다(2절). 이 일은 이제까지 사도들이 해왔던 것보다 더욱 배려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적당한 사람을 택해야 했다. 그리하여 매사가 적절하고 질서 있게 처리되어야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무시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들은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이들을 뽑아서 사도들이 안수하여야 했다.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들은 정직해야 했다. 즉 비방 거리가 없고, 이웃에게서 성실하다고 인정받으며 신뢰받을 만하고 매사에 공정하다고 인정받아야 했다. 그들은 성령충만해야 했다. 그들은 정직해야 할뿐 아니라 능력과 용기가 있어야 했고, 그로 인하여 성령충만하게 보여야 했다. 그들은 지혜가 충만해야 했다. 즉 정직하고 선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서 그 일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지혜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금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충만해야 될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검소해야 한다. 제자들이 지명해야만 했다. 너희 가운데서…일곱을 택하라. 그것은 사도들보다는 그들이 그들 내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더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봉직을 위하여 안수할 것이었고 그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권위를 부여할 것이었다.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낭비와 부족함이 없도록 돌아보자 한다."

3) 사도들은 이 말썽 많은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사역자로서의 임무에만 열중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4절). 첫째, 복음의 이대(二大) 강령은 말씀과 기도이다. 이것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은 발전되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둘째, 복음 사역자의 가장 큰 임무는 계속 기도하고 말씀을 먹이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는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하고, 기도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입이 되어야 한다. 죄인들을 회개시켜 믿게 하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사역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 또한 사역자들은 단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사역자들의 설교 없이도 역사할 수 있지만 사역자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역사할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이들 사역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들이며, 끊임없이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힘써야 한다.

(2) 이 제안은 제자들과 어떻게 합의되었는가. 그 제안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단지 제안되었을 뿐이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5절).

1) 그들은 마땅한 사람을 고르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표가 본문에 명기된 사람에게 모아졌다. 나머지 다른 후보자 유권자들도 이에 순응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은 신자들의 손으로 뽑혔다. 그러나 그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 하신다. 본문에 일곱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에 관해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첫째, 그들은 그들의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공동재산으로 내놓은 사람들일 것이다. 가장 관대하게 자기 재산을 내놓는 사람이 그것을 분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일 것이다.

둘째, 일곱 사람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희랍식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헬라파의 불평을 막는데 제일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유대교로 개종했었던 니골라도 분명히 그들 중의 한사람으로 뽑혔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안디옥 출신의 개종자였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사람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용기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성령 즉 은사와 은총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범한 사람이었고 모든 선한 일에 있어서 특출했다. 그의 이름은 면류관을 의미했다. 두번째로 기록되고 있는 빌립은 후에 전도자의 직무를 안수 받고 사도들의 동료이자 조력자가 된 사람으로서 특별히 21:8절에 보면 전도자라 불리우고 있다. 설교와 세례를 베푼 그의 사역은 (8:12절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확실히 집사로서가 아니라 전도자의 역할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니골라는 (유다처럼 일곱 사람 중에서) 제명되어 계시록 2:6,15절에서 보면 되는 바와 같이 니골라당의 설립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그가 싫어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몇 명 초대 교부들은 그에게서 누명을 벗겨 내었으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비록 그 악하고 불순한 이단이 자신들의 당을 그의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하라고 주장했을 뿐인데 그들이 사악하게 아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공동으로 아내를 소유해야 한다고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터툴리안이 소유공동체에 대하여 말할 때 아내에 대하여서만은 제외하여 "우리들 가운데 모든 것은 공동으로 소유하나 아내만은 제외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2) 사도들은 그들을 당면한 문제인 공궤하는 일에 임명했다(6절). 사도들은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교회의 봉직을 맡은 사람은 교회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들은 기도로써 그들에게 축복하시기를 간구하였으며, 안수로써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수여되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또한 이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그들은 그 직무를 실행할 권위를 부여받았다.

3. 이로 인한 교회의 발전(7)

교회에서의 문제가 질서 있게 처리되자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사도들은 전보다도 더욱 말씀 전하기에 힘썼기 때문에 복음은 널리 퍼져 나갔다. 사역자들은 세속적인 일에서 떠나 그들의 임무에만 몰두함으로써 복음이 흥왕하는데 더욱더 공헌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수가 많아졌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그의 사역이 예루살렘에서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도시에서 많은 개종자가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가장 악한 곳에도 자기 백성을 남겨 놓으신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복음을 반대했거나 반대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 믿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온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신뢰하며 격려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리스도 앞에 그들의 이름을 버리고 개종하기로 동의했던 것이다. 허다한 무리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의 편견을 극복하고 이 도에 복종하였다. 그들은 복음의 도리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힘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복음의 명령과 교훈에 기꺼이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그들의 신앙의 성실함을 보여 주었다.

 

Ⅱ. 스데반에 대한 참소 6:8-15

스데반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직무를 성실하고 신실하게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 직무를 맡게 되었을 때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일에도 충성하여 더욱 신뢰를 받게 되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가 아주 명예로운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였다(8절).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믿음이 강한 자는 권능도 충만하게 되는데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기 때문이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이 일들을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행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기적은 사람들의 가장 엄밀한 검사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과 기독교에 대해 변론하였다(9,10절). 그는 고지에 선 논쟁자로서 기독교에 봉사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포도원지기나 농사꾼으로서 기독교에 봉사했던 것이다.

1)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의 적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9절). 그들은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실행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계속 방문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과 수고가 필요했다. 이런 사실들이 그들로 하여금 값싸고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보다 유대교에 더 철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리버디노인 사람의 회당이라는 회당에서 온 자들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리버티 혹은 리버티니(자유라는 뜻)라고 불렀는데 로마에 귀의한 사람들 또는 노예로 태어났으나 자유인이 된 사람들을 지칭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리버디 노인들을, 바울처럼(27,28장)로마 시민권을 얻은 유대인들로 생각한다. 한편 구레네인, 알렉산드라인의 회당에 속한 자들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생계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거주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각 나라마다 그들의 회당이 있었는데 마치 그것은 런던에 프랑스인 교회, 독일인 교회, 덴마크인 교회가 있는 것과 같다. 이제 각 회당에 속한 자들은 기독교의 목적의 선함이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스스로 잘 운영되어 나가자 논변의 힘으로 기독교를 붕괴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며, 어떤 종교든 논쟁을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스데반과 논쟁했는가? 왜 사도들과 논쟁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사도들은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이라고 경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학자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명예롭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이 사도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공격적인 도전을 했던 것 같으며 이때 스데반이 사도들의 대변자로 지명된 듯하다. 스데반은 교회의 집사였고 매우 영리하고 명쾌한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데반과 논쟁한 것은 그가 그들과 열성적으로 논쟁하였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려했기 때문인 듯하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이었다.

2) 본문에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논쟁했는가를 알 수 있다(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주장하지도 답변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앙을 갖게 되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스데반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당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단지 스데반과 논쟁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와 함께 하시는 그들이 경쟁할 수 없는 상대인 하나님의 영과 논쟁하였던 것이다.

(3) 분개한 그들은 스데반을 체포하였다(12-14절). 결국 그는 그의 피로서 자신의 변론을 확신시켜야 했다. 논쟁으로 그에게 대답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그를 죄인으로 고소하여 거짓 증언자를 세우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위증을 시켰다. 즉 그들이 해야할 말을 지시하고 맹세하게 했다.

1) 그들은 정부와 군중이 다같이 그에게 대적하도록 충동질하였다(12절). 그들은 백성을 충동했다. 산헤드린이라면 그를 가만히 놔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를 대중 폭동으로 쓰러뜨리려고 했다. 또한 그들은 장로와 서기관을 충동질하여 그에게 대적케 하려 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그를 보호한다면 그들의 권위로 그를 제압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양면 공격을 통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2) 그들은 그를 법정으로 데리고 갔다.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그들은 먹이를 덮치는 사자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사로잡았다.

3) 그들은 그를 모함할 준비를 갖추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니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11절). 이 거룩한 곳에 율법을 거스려(13절).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성전과 관습에 대하여 행하겠다고 하신 바를 그에게서 들었기 때문에(14절) 위와 같은 이유를 댄 것이었다. 그를 모함하여 맹세한 사람들은 거짓 증언자라고 불리우는데 그것은 그들의 증언에 진실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를 잘못 적용하고 곡해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일반적인 고소는 그가 모독적인 언사를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독적인 언사를 그치지 않는다"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말은 그가 관명을 항거하고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경고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 스데반의 핍박자들은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하나님의 명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고소했다. 그러나 스데반이 모세를 모독했는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전도자들은 모세를 모독하는 듯한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데반이 모세 모독죄로 고소된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이 고소가 어떻게 지지 받고 입증되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않는도다'(13절)라고 하였지만 증거가 욕되자 그 고소는 점차 위축되었다. 또한 스데반은 이 거룩한 곳을 모독하였다고 고소당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있던 때에조차 성전의 명예를 훼손케 하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이유로 모독자로 비난받으셨다. 그는 율법을 모독했다고 기소되었다. 이 고소도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고 고소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이나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소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이곳을 헐 것이다. 즉 성전을 헐 것이다. 예루살렘을 헐 것이다."고 말했다. 그가 어떻게 말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거룩한 곳이 영속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이 무슨 모독인가? 나사렛 예수께서 그들의 처소와 국가를 파괴하실 것이라고 전한 그가 모독자인가? 오히려 그들이 그에게 감사해야 되지 않을까? 그는 '이 나사렛 예수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시리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성시키러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규례를 고치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좋게 발전시키고 확립시키기 위함이었다.

(4) 스데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나타난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소개되어 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재판관이 죄수의 안색을 살펴보고 때때로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제 그가 순교의 면류관 앞에 섰을 때 그의 생애에 이때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동요되지 않은 고요함과 담대한 용기가 서려 있었으며 온화함과 장엄함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신비한 광채와 밝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실한 증언자를 명예를 높이시고 그의 핍박자와 심판관들을 당황하게 하신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들은 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혜와 거룩함은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 그것이 가혹한 멸시 속에서 인간을 건져내지는 못한다.

 

# 해설

집사의 임명 ( 6 )

본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집사직이 생겨나고 일곱 집사들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성공적인 확장이 있을 때 교회 내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뒤따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교회는 더욱 왕성하여지고 증인의 삶을 더욱 힘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1. 택함받은 일곱 집사들

1) 갈등

본문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의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게 되는 예루살렘 교회는 두 그룹의 교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즉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타인 본토 출신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바나바처럼 대부분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 출신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공동 기금을 가지고 매일 가난한 교인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배분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교인 중에는 자연히 과부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헬라파 교인들은 히브리파 과부들과는 달리 자기의 과부들이 구제 대상에서 빠지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배경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느꼈습니다. 이로 인해 갈등이 표면화되었던 것입니다.

a.교회의 분쟁(고후12:20)

b.구제(눅12:33)

2) 일곱 집사

이 불평이 사도들의 귀에 들리자, 그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무제를 관장할 정직한 사람 일곱을 세울 것을 지시했습니다. 사도들로서는 전념해야 할 복음 전파라는 일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온 무리가 사도들의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였습니다. 곧,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이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사직의 시작이며, 집사직은 필요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집사의 직무는 디아코니아 즉 공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집사들의 직무가 말씀의 선포보다는 실제적인 사랑을 베푸는 직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a.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눅1:15)

b.기도하고 안수함(딤후1:6)

3) 교회에서의 사도들의 의무

집사를 세움으로 인해서 사도들은 말씀의 사역자로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말한대로 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의 전도와 교훈의 목적은 청중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게 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의 수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또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깜짝 놀랄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이 열심히 사역한 증거도 됩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대제사장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훨씬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외 없이 복음을 배척했지만, 일반 제사장들 중 많은 사람들은 겸손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어서 교회에 많은 수가 가입을 했던 것입니다.

a.하나님의 말씀(골1:5)

b.말씀에 복종함(롬1:5)

 

2. 스데반의 사역

1) 스데반 집사

누가는 특별히 일곱 집사 중 스데반 집사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스데반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그리고 권능으로 충만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들은 과부를 위해 애쓰는 스데반에게 능력을 더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뛰어난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a.순교하는 스데반(행7:59)

2) 회당에서의 변론

스데반은 또한 놀라운 변론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능히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 모여서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했습니다. 회당의 구성원들은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길리기아에서 온 자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몰아내려고 회당의 사람들은 은근히 사람들을 시켜 그를 비난하게 했습니다. 주 예수에 반대하여 불만을 품은 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스데반을 신성 모독죄로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체포해서 산헤드린 공회에 그를 넘겼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으로 상징되는 옛 체제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새 체제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한 스데반의 주장은 자연히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스데반을 고소한 내용은 스데반이 유대의 관습들을 그리스도가 철폐했다고 주장함으로 모세를 모독했고, 또한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성전을 헐라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도 논리적으로 확고히 파악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a.거짓 증인들(막14:56)

b.성전을 헐음(마26:61)

3) 스데반의 얼굴

모든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대답을 들으려고 스데반을 주의해서 쳐다 보았습니다. 그때 그들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고소한 거짓 증인들과 그를 죽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a.성도의 생애(빌2:15)

b.빛나는 얼굴(고후3:7)

 

결론

현대 교회들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며 제도적인 교회에서 은사적인 교회로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닌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핵심

6:1-15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봉사 사역 전담자들이 필요하여 일곱 집사가 선출되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스데반이다.

집사(deacon, 6:1-6)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 ‘종’을 가리킨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교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분자가 ‘집사’이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성장하면서 사도들의 직무가 과중해지자 역할 분담을 위해 세운 일곱 직분자들이 집사의 효시이다. 바울은 딤전 3:8-13절에서 집사가 갖추어야 할 신앙과 인격에 대해 교훈하였다.

 

# 묵상

초대 교회의 일곱 명의 사역자 ( 6:2-5 )

초대 교회는 사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일곱명의 사역자들을 더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의 문제는 초대 교회처럼 성도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은혜로운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세움받은 이들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세우는 기준이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부가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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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5:1-11

본장은 우울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든 교회는 최상의 상태에서 예외를 갖게된다. 제자들은 모두 대단히 선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가운데 위선자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집단에도 선과 악이 혼합되어 있다. 가라지는 추수때까지 알곡과 함께 자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바와 같은 일을 완전하게 행하였다. 그들은 갖고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속에도 위선의 껍데기가 있음을 드러났다. 지금까지 사도들이 보여준 표적과 기적은 자비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두려운 분이심을 심판을 통해 나타내실 것이다.

1.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죄(2)

(1) 그들은 진실로 진정한 제자가 될수 없는데도 탁월한 제자가 되고자하는 야망을 가졌었다. 소유를 팔아 … 사도들의 발앞에 두니(2,3절). 그들은 신자들의 지도자 뒤에 가리운 것처럼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위선자들은 한가지 일에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나 그것으로 다른 일에서는 자신에게 봉사하고자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으로 겉으로는 훌륭한 연기를 연출하였으나 그들은 신앙고백만으로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으로는 믿지못하면서 겉으로만 화려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종종 치명적인 결과에 이르게 한다.

(2) 그들은 세상의 재물을 탐하였고 하나님과 그의 섭리는 불신하였다. 소유를 팔아(2절). 솟아오르는 열정으로 판값을 모두 경건한 용도에 봉헌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돈이 수중에 들어오자 마음이 변했다. 그래서 그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2절).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쓸것을 언제나 준비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지않고 돈의 일부를 감추는 현명한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재난에 대비하려 했다. 마치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풍족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들이 철저히 세상적이었다면 그들의 소유를 팔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철저한 기독교인이었다면 돈의 일부를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3) 그들은 사도들을 속일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이 판값의 전부를 가져온 것처럼 믿게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앞에 두었다.

2. 아나니아에 대한 정죄(3,4)

아나니아에 대한 정죄는 이 죄에 대한 저주이며 동시에 형의 집행이었다. 그가 그 돈을 베드로에게 가져왔을때 베드로는 그를 책망하였다. 그는 단호하게 죄에 대한 책임추궁을 하였고 그 죄의 본색을 보여주었다(3,4절). 베드로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은 사실을 밝혀냈을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의 마음 밑바닥에 있던 불신앙의 본질도 밝혀내었던 것이다. 그것이 갑작스런 유혹에 의한 연약함의 죄라면 베드로는 그를 집으로 보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게 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다음의 4가지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1) 죄의 근원 : 사단이 네마음에 가득하여. 사단은 아나니아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고 머리속에 주입했을뿐만 아니라 죄악을 행하도록 이끌었다.

(2) 죄 자체 :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단이 그의 마음에 가득차지 않았다면 그러한 죄는 저지르지 않았을 그런 가증적 죄였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란 구절은 4절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되풀이 설명되고 있다. 아나니아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을 팔았으며, 이것이 그 판돈이라고 베드로에게 말했다. 그는 재산전부를 바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인정을 받고 싶어했고 그렇게 한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사업에 있어 교만한 마음과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유혹되어 비열한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들은 결코 하지도 않을 일을 약속한다. 또는 아나니아와 같이 거짓말하는 죄처럼 실제보다 선행을 과장한다. 그는 성령께 이러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 돈은 사도들에게라기보다는 그들안에 성령에게 가져간 것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4절).

(3) 가중된 죄 : 땅이 그대로 있을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후에도 네 임의로 할수가 없더냐(4절).

첫째, "너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출 유혹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 땅은 팔기전에도 네 것이었고 그것을 팔았을때에도 너의 임의대로 그 돈을 처분할수 있었다."

둘째, "너는 네 땅을 팔 필요도 없었고 그 돈을 사도들의 발아래 가져올 필요도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너는 돈으로 가지고 있든지 땅으로 가지고 있든지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 맹세하고나서 지키지 않는 것보다 맹세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반쪽 선행을 하기보다는 선행을 하는 척하지 않는 것이 낫다. "땅을 팔았을때 너의 임의대로 할수 있다. 그러나 맹세된 것은 마음대로 할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림에 있어 일부만 드린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 사단은 가짜 어미처럼 어린애를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한 전체를 받으시든지 아니면 하나도 갖지 않으신다.

(4) 이 모든 죄는 그에게 책임이 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4절).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마음속에서 죄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마귀에게 전가시킨다고해서 우리의 죄가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귀는 유혹할뿐 강요하지는 못한다. 철저한 책임성이 강조되어 있으나 그것은 정당한 것이다.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이려 한다면 결국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운명에 놓이게될 것이다.

3. 아나니아의 죽음과 장례(5,6)

(1)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아무 변명도 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5절).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라. 복음이 이롭다 인정하는 삶이 있는가 하면 복음의 저주를 받는 사람이 있다. 아나니아에 대한 처벌이 가혹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정당했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아나니아는 마치 성령을 속일수 있는양, 성령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같은 짓을 못하게 막기위한 방책이었다. 그 자신도 주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가 이 일을 행한 것은 베드로 자신에게 한 잘못에 분노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왜냐면 자기에게 한 죄라면 능히 용서하였을 것이고, 이 범죄자로 회개하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안에 계신 성령이 하신 일이었다. 왜냐면 성령이 모욕을 당하신 것이었으므로 성령께서 직접 처벌하신 것이다.

(2) 유대 관습에 따라 그는 즉시 장례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나가 장사하더라(6절).

4. 아나니아의 처 삽바리가 받은 처벌(7-11)

세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못하고 들어오니(7절).

(1) 베드로는 그녀에게 '그 땅 판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8절)고 질문함으로써 그녀도 그녀 남편의 죄를 함께 나누어 가졌음을 밝혔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돈 전부입니다. 더이상은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그의 처는 미리 같은얘기를 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비밀이 지켜질줄로 알았고 그래서 신용을 얻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서로 친한 사람들이 서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2) 그녀도 그녀 남편의 운명에 처해지리라는 선고가 내려졌다(9절).

첫째, 그녀의 죄가 밝혀졌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베드로는 그녀에게 선고를 내리기전에 그녀의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성령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을 알고있었으나 영을 분별하는 은사는 받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죄를 짓고도 방심하여 벌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성령을 시험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함께하기로 공모하였다. 선한 일에 대립되고 악행에 일치되는 경우가 부부간에 있게될때가 더 나쁜지, 다른 인간관계에서 일치될때가 더 나쁜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둘째, 그녀의 운명이 선고되었다.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3) 선고는 곧 집행되었다. 곧 베드로의 발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간지라(10절). 하나님은 어떤 죄인은 오래참고 어떤 죄인은 단번에 결판을 내신다. 의심할바 없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지 않는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어떤 비열한 죄에 대한 처벌이라고는 볼수 없는 갑작스런 죽음이 있다. 갑작스럽게 죽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상 가는 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갑자기 죽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죽음은 분명히 심판의 결과였다. 어떤 사람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후의 상태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리고 육의 파괴를 '주 예수의 날에 영혼이 구원받게 하심'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우리에게 속해있지 않다. 곧 베드로의 발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가져온 돈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들이 가져온 돈은 가져온 사람들로인해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춘 돈은 그것을 감춘 사람들로인해 더럽혀졌다.

5. 이 일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11)

이것은 이 이야기 중간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절). 또한 그것이 반복해서 언급된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교회에 가입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거룩한 기쁨을 억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떨리는 기쁨으로 진지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Ⅱ. 복음의 전파 5:12-16

1. 기적에 대한 설명(12)

본문에는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12절). 하나님은 벌하시기위해 그의 자비의 자리를 떠나셨으나 곧 그 자리로 되돌아가셨다. 그들이 행한 기적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을 입증하였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명확히 드러내는 징표였다.

2. 기적의 효과(12-16)

우리는 본문에서 이러한 기적들의 효과를 알수 있다.

(1) 교회가 서로 연합되었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절). 그들은 성전의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다. 성전에서 사고파는 것도 허락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전도자나 병고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공중예배에서 만났다. 그들은 거기서 한마음이 되었다. 심판으로 위선자를 가려냄으로써 신실한 신도들은 서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2) 사도들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3절). 비록 제사장들이 백성들로하여금 업신여기게 했을지라도 그들에 대한 칭송을 막지는 못했다. 사도들은 칭송을 받으려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그들을 칭송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겸손한 자들은 높임을 받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영예롭게하는 자들은 명예를 받는다.

(3) 교인 수가 증가했다(14절). 믿고 주께로 오는 자가 더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를 보고 단념하지 않고 그러한 엄격한 규율이 지켜지는 사회에 자진해 나아왔으나 주님과 연합할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아직도 많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회개하였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동안 그를 따랐던 사람들가운데에서 처럼 그가 하늘로 승천하신후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가운데에도 선한 여인들이 있었음은 아주 주목할만한 일이다.

(4) 사도들은 병자들을 많이 치료하였으며 그들 모두를 치료해 줌으로써 상당한 명성을 얻게되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남녀의 큰 무리더라 병든 사람들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때에 혹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13-16절). 그리고 그림자가 스쳤을때에는 그리스도의 옷깃만을 만지고도 치유받은 여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보다 더 큰일을 행할수 있으니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기적이 베드로의 그림자에 의해서 일어났다면 바울의 몸에서 나온 손수건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났던 것처럼(행 19:12), 다른 사도들에 의해서도 기적이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할(수 있겠다. 농촌에서는 예루살렘 부근에 허다한 사람들이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다(16절). 그리하여 그 병든 몸과 마음이 모두 온전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치유의 활동을 통하여 사도들은 그들이 가르친 교리의 기원이 하늘에 있음을 백성들에게 확신시키고 그들의 가르침을 더욱 신봉하게 만드는 기회를 얻게되었던 것이다.

 

Ⅲ. 천사의 도움으로 사도들이 풀려남 5:17-25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오히려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사도들이 아무런 제지도 당하지않고 복음전도와 치유를 계속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 선한 임무를 방해하는 지옥의 악한 세력과 그것을 격려해주는 하늘의 은총의 힘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1. 사도들이 옥에 갇힘(17,18)

제사장들은 사도들에 대하여 격분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17,18절).

(1) 사도들의 적과 핍박자는 누구인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주모자였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솔선하여 합세한 사람들은 사두개파였다. 그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있었는데 복음은 그들이 부인했던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사도들에게 악랄한 태도를 취하여 극도로 격분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며 병을 치료하고 또한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병자를 데리고와서 치료받는 것을 보고 마음에 독기가 가득하여 참지못하고 흥분하여 일어났다.

(3) 그들이 사도들에게 어떻게 대적했는가(18절).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가장 흉악한 범인들을 가두는 옥에 가두었다.

첫째, 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즉 그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둠으로써 사도들이 임무를 계속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던 것이다.

둘째, 사도들을 폭력으로 위협하여 그들의 일을 그만두게 하기위함이었다. 지난번에는 사도들을 그들앞에 불러 세워놓고 단지 위협만 하였다(4:21).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을 옥에 가두어 겁먹게 하려하였다.

셋째, 사도들이 치욕을 당하게 하기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2. 천사를 보내심(19,20)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주셨다. 어둠의 세력이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지만 빛의 아버지는 그들을 위하여 싸우신다. 주님은 그의 증인들과 옹호자들을 결코 버리지않으시고 반드시 그들곁에 계실 것이다.

(1) 사도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19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주의 사자는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죄인들을 도망시켰다(23절). 그 옥이 아무리 어둡고 견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안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내실수 있으며 그들을 이끌어내실수도 있다.

(2)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계속할 책임을 가졌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절)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기적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을때 그들은 더욱더 담대하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질병에서 회복되고 고통에서 벗어남은 우리가 우리 삶의 위로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봉사로 명예롭게 되셔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성전에 서서 말하라고 명령받았다. 사람들은 한적한 곳에서 말씀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다. "성전에서 전하라. 왜냐하면 그곳이 집회처이며 너희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중집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가질수 있는한 그리스도 복음의 전도자는 구석으로 물러나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령받았다. 그들은 배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영혼은 위대한 자의 영혼만큼이나 그리스도에게 귀중한 것이다. 말씀을 전할때에는 가서 서서 말하라. 이런 방법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말해야할뿐만 아니라 담대하고 결단력있게 전해야 된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받았다.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것과 동일한 위로의 말씀을 세상에 가서 전하라.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도 같은 위로를 받게하라. 또한 현세적인 지상의 생명이 그 이름을 황폐케하지 못하는 하늘의 생명, 신적인 생명을 특히 강조하라. 복음은 생명과 죽음에 관계된 것이며 따라서 목회자는 그것을 설교해야만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들어야만 한다. 그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말해야만 하며 조금도 감추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모두 진리를 말할 것을 서원해야 한다.

3. 임무를 계속 수행함(21)

저희가 듣고 새벽에…들어가서 가르치더니(21절). 이러한 생생한 명령은 그들에게 대단한 만족을 주었다. 천사가 그들에게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했으므로 그들의 길은 분명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모험을 강행하였으며, 성전으로 들어갔을 그때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조금도 없었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임무에 만족할수 있다면 우리가 할일은 이에 전력하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기쁘게 안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게 된다. 그들은 즉시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을 해칠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복음의 모든 보화가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이 이제 침묵한다면 복음의 샘은 막혀버리고 모든 임무는 땅에 떨어져 중지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할 기회를 주셨을때 비록 인간권세의 공포와 위협속에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기회를 잃지말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한다.

4. 계속되는 기소(21-25)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기소를 계속했다(21절). 그들은 대규모의 긴급 공회를 소집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소집하기 위해서였다.

(1)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다 모으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전도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지난번에 그들은 제자들을 구금하고 대제사장의 일가앞에서 그들을 심문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든 원로들을 다 불러모았다. 따라서 이러한 섭리로써 하나님은 그 적대자들의 혼란과 그들에 대적하는 사도들의 증언이 더욱 공개되고, 그 법정에서가 아니면 복음을 듣지않으려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수 있도록 정하셨던 것이다.

(2) 그들은 낙담했고 얼굴은 수치로 일그러졌다. 관원들은 죄인들이 감옥에 없다고 즉시 보고했다.

첫째, 관원들이 와서 감옥에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22,23절). 관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안에는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천사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이끌어냈는지는 알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모르지만 주님은 경건한 자들을 어떻게 시험에서 건지며 갇힌 자들을 어떻게 석방시켜야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본문에서와 같이 그가 필요로하실때 그는 행하신다(24절). 성전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의혹에 빠졌다. 그리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들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살아오는 동안 이처럼 낙심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를 막고 방해하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와같이 된다.

둘째, 부분적으로 그들의 의혹은 풀러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근심은 다른 보고자로인해 더욱 커졌다. 그는 바로 그 죄수들이 성전에서 설교하고 있더라고 전했던 것이다.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치더이다(25절). 무엇보다도 이것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보통 죄수들은 감옥을 탈출할수는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이 탈출하고나서 그것을 공언할 용기를 가진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Ⅳ. 사도들에 대한 심문 5:26-42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들과 공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설교했을때보다도 더 강한 하나님의 능력과 위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 사도들이 두번째 체포당함(27)

사도들은 두번째로 체포되었다.

(1) 이때에는 폭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성전에 대한 존경심과 그들이 사도들을 때린다면 아나니아처럼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폭력의 억제요인은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백성들은 사도들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도들을 함부로 다룬다면 돌에 맞아 죽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2)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을 핍박하려는 자들에게 사도들을 데려왔다(27절). 그들은 저희를 끌어다 공회앞에 세웠다. 이 사실은 악한 일과 악한 자에게 폭력을 행해야 되는 권력이 선한 자에게도 폭력을 행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 그들의 심문(28)

대제사장은 그들이 체포된 이유를 설명하였다(28절).

(1) 그들은 당국의 명령을 거역했다(28절).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명령을 지키지 않았도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명령했었다.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는 그들의 명령보다 우위에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따라야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2) 그들은 거짓교리를 백성들에게 유포시켰다. "너희가 너희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공공의 안녕을 파괴시켰다"

(3)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앞에 정부를 가증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으므로 이는 그들이 정부에 대해 악의를 품은 것이다. "너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앞에서는 죄가 되고 사람앞에서는 수치가 되도록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우리는 그렇게 뻔뻔스럽게 악한 일을 하고자한 자들이 나중에는 그것에 대해서 듣는 것조차 회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리스도를 핍박할때에는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하고 대담하게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기고 있다.

3. 사도들의 항변(29)

그들이 문책에 대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은 모두 똑같이 대답하였다. 그들은 한분이신 성령이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할지 알려준대로 말했던 것이다.

(1) 사도들은 그들의 명령 불복종에 대하여 그들의 옳음을 변호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었고 따라서 비록 대제사장이 금한다하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자기들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를 처벌하는 통치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2)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한것에 대해 자신들의 옳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로인해 그들이 대제사장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감사하였을 것이다.

1) 사도들은 대제사장들이 예수께 행하였던 일들을 정면에서 폭로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죽인 예수를(30절). 사람들이 자기 잘못에 대해 책망 받기를 싫어하더라도 신실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밝혀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죄를 책망하는 것을 회피하는 일상적인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를 책망해야할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해서는 안된다.

2) 사도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 예수를 어떻게 명예롭게 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핍박하는 것과 그것을 가르치는 것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한 것을 종용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칭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어떻게 명예롭게 하셨는지 살펴보자.

①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 "너희는 그를 죽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과 너희가 이 예수에 관하여 다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마땅하겠느냐?"

②하나님은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셨다. "너희는 그에게 치욕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 명예의 왕관을 씌어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명예롭게 하신 분을 우리가 명예롭게 하지 않을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다.

③하나님께서는 그를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 우리가 그를 우리의 임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수 없다. 우리가 그의 통치를 받지않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의 구원과 치료를 기대할수 없다. 신앙은 죄에 빠진 상태 그대로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위해 오시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④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원칙적이고 우선적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통치자들은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용서의 그 큰축복을 주러 오신 분에게 반대하는가? 그러나 죄의 회개와 용서는 그들이 그 가치를 인정치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던 축복이었다. 회개와 죄사함은 동시적인 것이다. 회개가 있는 곳에 예외없이 죄사함이 따른다. 한편 회개없이는 죄사함도 없다.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에게 회개가 주어졌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회개를 주시는 분으로 정하셨다. 변화된 새마음은 그의 업적이며, 그의 희생으로 상한 심령이 회복된다. 그가 회개는 주시고 죄사함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⑤이 모든 것이 잘 지켜졌다.

첫째, 사도들 자신에 의해서였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너희가 우리에게 요구하듯이 우리가 침묵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배신자가 될 것이다." 소송을 심리할때는 증인들이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되는데 그 소송의 결과가 그 증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였다. 성령도 그러하니라. 이는 하늘로부터 온 증인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이 성령의 역사를 우리 마음대로 누를수 없다.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복종하게 하고 그 안에서 그들을 유능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실한 성도들에게 임재하시는 성령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심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그에 복종하신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그에게 대적하여 너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판단해 보라고 그들은 외칠수 있었던 것이다.

4. 법정에 미친 영향(30-33)

사도들의 자기변호가 법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확실히 그들이 제시한 정당한 이유는 죄인들을 결백케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격분하였다.

(1) 그들은 분노로 충만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그들앞에서 차근차근 폭로되는 것을 보고 화가나서 크게 노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와같이 변증되는 것에 대해 광분하였다. 같은 목적에서 이러한 설교를 백성들에게 하였다면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자책과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행 2:37). 그런데 핍박자들은 분노로 마음이 찔렸던 것이다.

(2) 그들은 사도들에게 악의를 품었다. 사도들의 숨을 끊어 놓기전에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기때문에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하였다.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전과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를 계속하는 반면에, 그들의 핍박자는 끊임없는 혼란과 마음의 동요속에서 스스로 괴로와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를 계속했다.

5. 가말리엘의 충고(34-39)

이때에 가말리엘이 일어나 충고하였다. 이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의 학자이며 직책은 교법사였다. 바울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행 12:3).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온건한 사람이었으며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온건하고 자애로운 사람은 마땅히 존경을 받게되는데 이는 세상에 불을 지르는 선동자를 제지하기 때문이다.

(1) 그의 경고(35절) : 그는 공회에 필요한 경고를 하였다. 공회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34,35절). 그는 이 경고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그들을 불렀다. "너희는 이성으로 판단하는 자들이다. 너희는 계시로써 판단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너희 자신을 조심하라"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사례를 인용함(36절) : 그는 무리를 지어 선동하다가 결국 실패한 사람들의 경우를 두가지 제시하였다. 이 사람들이 그같은 사람들이라면 제풀에 꺾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 드다라는 자가 있어 스스로 자랑하였다. 36절에 드다에 관하여 그가 관찰한바에 따르면 사람이 약 4백이나 따랐으나 그의 자랑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죽임을 당하매 쫓던 사람이 다흩어져 없어졌다. "이제 이 경우와 비교해 보자. 너희는 이 무리의 주모자인 예수를 죽였다. 그가 만약 사기꾼이요, 위선자라면, 그의 죽음은 그의 목적의 소멸이 될 것이다."

2) '갈릴리의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37절).

첫째, 그가 일어난 것은 그후라고 되어있는데 '그외에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언제 일어났는지 단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그 사건들은 아주 최근에 일어났으므로 그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던것 같다.

둘째, 본문에 보면 그의 시도도 실패하였다. 그도 망한즉 쫓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38,39절).

1) 그들이 사도들을 핍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38절). 그가 이 말을 정책적으로 말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어쨌든 사도들은 외적인 무력으로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을 대적하는데 있어 왜 외적인 무력이 사용되겠는가? 혹은 그것은 온유하고 사려깊은 정신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혹은 하나님께서 그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 말속에 그리스도의 종을 명예롭게 석방하시려는 초월적인 섭리가 들어있음을 확신한다.

2) 그들에게 이 문제를 섭리에 맡기자고 하였다. 결과를 기다려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수 없겠고(38,39절). 사악하고 부도덕한 것은 분명히 탄압되어야 하지만 선한 것처럼 보여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것인지 인간에게서 난것인지 의심스러울때에는 내버려두고 운명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스도는 칼이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첫째,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난것이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그것이 어리석고 우매한 자들의 소행이라면 그들은 스스로 기진할 것이며 스스로 조롱거리가 될것이다. 만일 이 사상과 소행이 간사하고 모사꾼인 인간의 것이라면 잠시만 내버려두면 그들의 속임수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다. 섭리는 그것을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것은 무너질 것이요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그것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무너뜨릴 필요가 없다. 권력의 불필요한 사용은 권력의 남용이다.

둘째, 이 사상과 소행이 하나님께로만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핍박할수 있겠느냐? 너희가 그들을 없이하고자 할수 있겠느냐? 너희는 그들과 대적하여 무익한 결과만 얻게 된다."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수 없겠고. 아무리 핍박을 받는다할지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은 궁극적으로 전혀 정복당하지 않기때문에 하나님 편에 신실하게 선 자들은 그것으로 위안을 받을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흥할 것이며 쇠해질수는 없다. "너희 자신에게 위험한 시도가 될 것이다. 내버려두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하노라."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을 학대하고 증오하는 자들,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를 억압하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가말리엘의 충고였다. 우리는 이 말이 양심의 거리낌때문에 핍박하는 자들에게 충분히 고려되기를 바란다.

6. 전반 문제에 대한 공회의 결정사항(40)

그리하여 그들이 가말리엘의 충고에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을 죽이려던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고는 참을수가 없었다. 저희가 사도들을 채찍질하여. 그들을 악인처럼 매질하였고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였다(41절).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사도들의 복음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백성들도 복음듣기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40절).

7. 사도들의 태도(41,42)

사도들은 놀라운 용기와 지조를 보였다. 저희가 … 공회앞에 떠나니라. 그리고 그들은 한마디도 법정을 비난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가말리엘이 언급했던대로 '하나님께 그들의 사정을 의탁하였다.'

(1) 고통을 기쁨으로 견딤(41절) : 사도들은 그들의 고난을 무한한 기쁨으로 견뎌냈다. 그러므로 공회앞을 떠날때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악행을 저지를 사람들이 아니었기때문에 그들이 겪은 수치를 인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실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그러하듯이 분개하기보다는 오히려 비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수치를 당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으로 여겼고 그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널리 전파시키는데 공헌을 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능욕받은 일에 합당하게 여기진 것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명예스럽게 되는 명예를 얻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치욕을 당하는 것이 진정한 승진이다. 그들은 그들이 첫번째 전도여행을 떠날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수치당함을 기뻐하였다(마 5:11,12).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함을 기뻐하였다. 만일 우리가 선한 일에 치욕을 당하고도 잘 견뎌낼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수 있게 해주신 은총을 기뻐해야 한다.

(2) 사명을 계속 수행함(42절) : 그들은 지치지 않고 근면하게 그들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였다(42절). 그들은 말하지 말라고 명령받았다. 그러나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설교하였다. 그들은 공적으로는 성전에서, 사적으로는 각자의 집에서 말씀을 전했다. 비록 대적자들의 감시를 받는 성전이었지만 그들은 자기 집에만 머무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으로 갔다. 또한 그들은 성전을 사용할 자유가 있었지만 오두막집이라도 각 가정에서 설교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설교주제는 무엇이었는가? 예수는 그리스도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였다. 이것은 제사장들에 대한 가장 큰 공박이 되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설교주제를 바꿀수 없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영광받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전도자들의 영원한 임무가 되어야 한다.

 

# 해설

시련 향하는 교회 ( 5 )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속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과 그 사건으로 인한 두려움은 다시금 교회를 긴장케합니다.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만큼이나 시련도 더해감을 본장은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실이 믿으며, 증인으로의 삶을 기뻐했던 사도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었습니다.

 

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속임

바나바와 대조를 이루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는 한날의 큰 슬픔으로 막을 내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그들의 소유를 매각한 수익금을 남겨두고 전부를 드렸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책망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거짓말을 성령에 대한 속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은후, 그의 아내 삽비라는 남편의 급사를 알지못하고 그들의 땅값으로 받은 금액을 속입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아나니아와 같이 주의 영을 시험하려한다고 책망했습니다. 삽비라 역시 베드로의 발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삽비라를 남편옆에 장사했습니다. 온교회와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에게 깊은 경각심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부부처럼 경솔한 자세로 새 공동체에 가입했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미 교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진지한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a.거짓말(렘9:5)

b.속임으로 받는 결과(시55:23)

2)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사람들가운데 많은 표적과 기사를 베푸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본문의 표현으로 보아 제자들은 군중들에게 증거하기 위한 장소를 보통 솔로몬 행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몇몇 교인별로 각자의 집에서 사귐을 가질수도 있었지만 한교회로써의 연합된 일을 하기위해 모일때는 넓은 장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전의 바깥뜰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모인 무리들은 구별된 사람들이었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데려왔고, 많은 병자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그림자에 마술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병자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병든 사람들과 귀신들려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와서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a.능력의 은사(고전12:10)

b.믿음(요1:12)

 

2. 계속되는 시련과 승리

1) 시기하는 사람들

관원들은 번져가는 운동을 막기위해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 주체는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모두 연행해서 밤새 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법정에 세울 작정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으며 베드로와 요한에게 놓았던 올무를 씌우려는 생각들이었습니다.

a.시기(약3:14)

b.옥에 가둠(눅21:12)

2) 옥문을 연 천사

사도들이 옥에 갇혀있는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풀어주시고 이 생명의 모든 말씀을 다 백성에게 계속 전하라고 천사를 통해 명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a.천사의 사역(히1:14)

b.생명의 말씀(빌2:16)

3) 굳게 닫힌 옥문

옥문을 지키는 자들은 텅빈 감옥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최고 권력자들은 죄인없는 재판을 위해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더욱 당혹한 일은 옥문을 지키던 관원들의 보고를 받은 후였습니다. 옥문은 굳게 닫혀있고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지도자들이 법정에 있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논의하고 있는동안, 그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a.악인의 올무(잠26:27)

 

3. 사도들에 대한 심문

1) 공회앞에 선 사도들

백성들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한 성전맡은 자와 관속들은 조심스럽게 사도들을 다시 체포하여 심문하려고 산헤드린 공회앞으로 데려왔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하여 '이'라는 대명사를 두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들이 금지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심문하였고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답변합니다. 베드로는 전에 선포한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고 그들이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예수께 돌이킴으로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a.심문(마27:2)

b.성령의 열매(갈5:22)

2) 가말리엘의 설득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에 대해 분노했고 그들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며 교법사인 존경받는 가말리엘은 산헤드린에게 사도들을 대적하지 말자고 설득합니다. 가말리엘은 두가지 가능성을 지적했습니다. '이 새로운 운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결국 없어지고 말겠지만,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일수도 있다. 후자보다 전자의 가능성이 훨씬 크지만, 만일 산헤드린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말을 마친뒤, 사도들은 법정모독죄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뒤 사도들은 공회의 명령을 재차듣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했습니다.

a.예수의 이름으로인한 능욕(마10:22)

 

결론

사도들은 시련을 당했으나 그 능욕받음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는 계속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도들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이긴 이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세상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련속에서 승리를 경험했으며 더욱 힘있게 예수의 주되심을 증거했습니다.

 

# 핵심

5:1-16

아나니아 부부 사건은 내부적으로 교회를 위기에 빠뜨릴수 있는 일이었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무난히 수습되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5:1-11)

성경은 용서를 강조하고 있다(마 18:21,22). 그런데도 단지 재물에 집착하여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 부부가 즉각적으로 죽은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와 관련하여 유의할 사항은 이들이 단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조차 속일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뿐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거짓과 탐욕으로 오염시킬수도 있는 죄를 범했다. 특히 성도간에 모든 것을 유무상통해야 했던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들의 죄가 더욱 심각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5:42)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그리스도’이다. 이는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과 같은 특별한 직임자를 기름부어 세운데서 유래한 말이다(출 40:13; 왕상 19:16). 그러나 이들의 직분은 유한했음에 반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눅 4:18)의 직분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즉 주님은 성부의 뜻을 완전히 계시한 선지자이시며, 자신을 영원한 대속제물로 내어주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과 함께 온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 묵상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 ( 5:1-11 )

이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판값 중 일부를 취한 결과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잉태하여 거짓말이란 죄를 낳게 되었습니다. 재산을 헌납하여 존귀하게된 바나바와 같이 되려는 허영과 명예욕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소유를 팔게한 것이며, 또한 재물에 대한 욕심이 그값 얼마를 감추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짓을 회개시키기 위한 베드로의 질문에도 끝까지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성령을 거스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음의 벌을 받게된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온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은 다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되었고 자신들의 신앙을 재점검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시대의 교회 ( 5:11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후에 온교회는 크게 두려워하여 전진하며 능력을 베푸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교회들은 참된 경외심을 가지고 교회안의 거짓된 것을 척결했습니다(13). 또한 사도들의 손으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사역함으로 교회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사도들에게 명한 주의 천사 ( 5:20 )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 의해 다시 투옥된 사도들앞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사도들에게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복음전파는 성도들의 존재 이유이자 사명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일로인해 주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해야합니다.

복음 대적자들에 대한 사도들의 답변 ( 5:29 )

사도들은 복음을 막는 자들에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상반되는 상황에서 사도들은 인간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분명히 밝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도가 본받아야할 모습입니다.

가말리엘 ( 5:34 )

바리새인에 속한 교법사로 유대인에게 존경을 받았고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를 중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랍비 힐렐의 손자로서 진보주의적 견해를 가진 공회원이 되었는데 관용으로 인하여 만인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많은 청년들을 가르쳤는데 사도 바울이 그 문하에서 배우기도 했습니다(행22:3).

공회에서 능욕받은 사도들 ( 5:41 )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주를 위해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과연 나는 그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사도들의 복음전파 ( 5:42 )

이들은 공회에서 풀려나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 복음전파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삶의 중심이고 전부였습니다. 오늘의 성도에게도 바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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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힘 4:1-4

본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지지하려고 맞서는 악의 세력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종들이 매우 담대해질수록 사단의 대리자들은 더욱 사악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단의 대리자들이 매우 사악해질수록 그리스도의 종들은 더욱더 담대해져야만 한다.

1. 사도들의 활동(1-4)

사도들, 곧 베드로와 요한은 계속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 복음전도자들은 신실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때에(1절).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쳤다. 즉 아직 믿지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기위해, 또 믿는 이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기위해 가르쳤다. 그들은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 죽은 자의 부활 교리는 예수를 통해 확증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 근거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쳤다. 부활의 교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믿는 이에게 보장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그만을 통해서 이것을 얻을수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여러 일에 관여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하늘나라를 그들의 목표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길로 가르쳤다.

(2) 말씀을 듣는 이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절). 전도자들은 핍박을 받았지만, 말씀은 널리 전파되었다. 때때로 교회의 고난의 시기가 교회의 성장의 시기가 되곤 하는데 특히 교회의 초창기가 그러했다.

2. 제사장들의 음모(2,3)

제사장들과 그들의 무리는 사도들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손을 묶어둘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1) 사도들을 대적한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제사장들이었다. 거기에 성전맡은 자가 합세했는데 그들은 성전을 지키기 위한 로마의 관리였다.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동조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영혼의 존재와 내세를 부인'했는데 그들도 열렬하게 사도들을 반대했다.

(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어떻게 대적하였는가.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바를 싫어하였다(2절). 그들은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도 싫었고, 백성들이 그 말씀에 모여드는 것도 싫었다. 그들은 복음이 사라지기는커녕 단단한 기반을 갖게되는 것을 보고 애가 탔다.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이 고통이 되는 그들은 참으로 비참하다. 또한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함을 싫어하였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교리가 전파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들은 그 교리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제사장들도 그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파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예수를 통해 입증되고 선포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중요한 교리를 포기하려고 하였다.

(3) 그들이 사도들을 어느 정도 핍박하였는가.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3절). 이를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종들이 고난을 감당할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즉 그들은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힌 정도이지만 앞으로는 피를 흘리게될 것이다.

 

Ⅱ.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 받음 4:5-14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교 법정의 재판관들 앞에서 심문받는 기사이다.

1. 재판 광경(5,6)

본문에는 재판 광경이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한 특별 재판이었던것 같다.

(1) 재판이 열린 때는 이튿날 아침이었다(5절). 그들은 지체없이 사도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기때문에 단지 이튿날 아침으로 연기하였을 뿐이다.

(2) 재판이 열린 곳은 예루살렘이었다(6절).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속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막상 구속이 도래한 후에는 그것을 구속으로 여기지 않았다.

(3) 법정의 재판관들은 다음과 같은 자들이었다.

①그들의 일반적인 신분은 5절에 기록된바대로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이었다. 서기관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관원과 장로들은 권세있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의 학식있는 자와 권세있는 자들의 반대를 받았던 것이다.

②그들 중의 몇사람은 유력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에는 핍박의 주모자였던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안나스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으며 가야바는 대제사장(본문에는 안나스도 그렇게 불리우고 있지만)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다같이 대적하였다. 또 대제사장의 문중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의존하여 그가 말하는바는 모두 지지하였다. 옳지않은 일에는 아무도 지위가 높은 친척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2. 죄수들이 법정에 끌려나옴(7)

재판관들은 사도들을 가운데로 세웠는데 당시 산헤드린은 원형으로 앉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즉 누가 너희에게 이같은 교리를 가르치라고 명하였느냐? 누가 너희에게 이와같은 기적을 행하도록 권능을 주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에 대해서 가르쳤다는 것을 아주 잘알고 있었다(2절).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죄의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질문하고 희롱하고 심문하였다.

3. 사도들의 항변(8-12)

그들의 항변은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1) 이 항변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성령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 사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마땅히 할말을 그때에 그들에게 가르치시리라는 약속을 이행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변호자들은 결코 어떠한 지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막 13:11).

(2) 누구에게 이 말씀이 주어졌는가. 베드로 자신이 백성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장로들인 법정의 재판관들에게 말하였다. 그는 권세가진 자들의 사악함을 지적하여 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 한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있는 권세를 재고하게 하여 그들에게서 사악함을 제거하고자 했다.

(3) 무엇을 항변했는가.

1)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법정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이 착한 일에 대하여 그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앞에 섰느니라"(9,10절).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가 앉은뱅이를 고친 일을 정당화시킨다. 그것은 착한 일이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로인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고난받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 선한 행위에서 비롯된 찬양과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렸다. "이 사람이 병고침을 받은 것은 주님의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때문이 아니다.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을지어다.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도다." 베드로는 재판관들이 예수의 살인자였다고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분이시다." 그는 그들의 죄가운데서 가장 양심을 찌르는 죄인 그리스도를 죽게한 죄를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다. 베드로는 그들로 깨닫게 할수 있는 것은 한가지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또 자신의 핍박자에 대항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증거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셨다. 그들은 그의 생명을 빼앗았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다. 그는 방청객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즉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때 이 이름은 주문으로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향하신 은총과 선한 의지에 대한 신의 계시로써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 이러한 예수의 이름은 그것으로만 우리가 구원받을수 있는 이름이다. 사람들이 이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안에서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것을 행하여야 한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너희들은 바로 백성의 통치자이며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며 마땅히 교회의 건축자가 되어야할 자들이다. 여기에 너희에게 머릿돌이 주어졌으나 너희는 그것을 거절하고 내던져 쓸모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돌이 이제 머릿돌이 되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이 인용문을 택한 것은 바로 얼마전에 그리스도 자신이 이를 사용하셨기 때문인것 같다(마 21:42). 우리의 영적인 투쟁에 있어 성경은 믿을수 있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충실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성경에 몰두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을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12절). 다른 이름으로 병든 육체를 치료할수 없는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는 죄많은 영혼을 구원할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을 파괴할뿐이지 우리 자신을 구원할수는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명예로써 오직 이 이름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선택하셨다. 그것은 하늘아래로 주어졌다. 그는 하늘과 지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그것은 구원이 필요한 인간 가운데 주어졌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서 그 자신들의 지식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과연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랑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며 오직 그를 위하여서인데 이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기'때문이다.

4. 법정의 반응(13,14)

(1) 그들은 앉은뱅이에 대한 치료가 선한 일인 동시에 기적이라는 것을 부인할수 없었다. 그들은 힐난할 말이 없었다(14절).

(2)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굴복시킬수 없었다. 이것은 앉은뱅이에 대한 치료 못지않게 기적이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았다(13절). 그들은 통치자들을 겁내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도리어 통치자들을 두렵게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언자들의 용기는 종종 그들의 잔인한 핍박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1)그들의 놀람이 커졌다. 그들은 사도들을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 그들은 사도들을 심문하여 그들이 갈릴리 태생으로 나면서부터 어부인, 학식이 전혀없는 사람들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도들이, 그들에게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질문하면 아주 적절하고 유창하게 성경을 인용하였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있던 학식이 풍부한 재판관도 그들에게 대답할수 없었다. 그들은 범인들이었다. 즉 그들은 공적인 활동이나 관직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롭게 처신하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랐던 것이다.

2)그들은 대단히 놀라서 사도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전에 예수와 함께있던 줄도 알고(13절). 심문자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있던 줄을 깨닫게 되자 그들의 담대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되었다. 예수와 함께있던 자들은 매사에 스스로 행동하므로 그들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있었던 줄을 알게된다. 즉 우리는 그들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봄으로써 그들이 변화산에 머물렀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Ⅲ. 재판의 결과 4:15-22

본문에는 재판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1. 배심원들의 논의와 결정(15-18)

(1) 그들은 죄인들에게 나가있으라고 명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15절). 사도들이 그들의 양심을 너무 괴롭혔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빨리 피하고 싶었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은 그들의 계획을 하나님께 감추려는듯이 은밀히 추진하였다.

(2) 이 일로 논쟁이 제기되었다.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16절). 그들이 설득력있는 진리와 압도적인 힘에 승복하였다면 이 사람들에게 해야할 일을 말하기가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않음으로써 때때로 무엇을 해야할지 말로 당황하게 된다.

(3) 마침내 그들은 두가지 해결책을 강구했다.

1)사도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하였다.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 베드로와 요한을 함부로 처벌할수 없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하는 것이 불의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두려워서 자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하는 것을 위험한 일로 생각했으며 백성들을 두려워했기때문에 사도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①백성들은 기적의 진실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목할만한 기적 즉 '유명한 기적'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예증이었고 그의 가르침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들이 가르쳤던 교리를 확증시켰던 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였다. 그들은 그들의 재능과 술책을 모두 동원하여도 그것이 참된 기적이었음을 부인할수 없었다. 그들이 부인한다면 모든 백성들이 틀림없이 조롱할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은 쉽게 속일수 있었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②모든 사람들이 이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일로 인하여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못하던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찬양할수밖에 없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래를 위하여 사도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17,18절). 그들의 최대 관심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치유 사실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을 막아야만 했다. 이 교리를 더이상 퍼지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첫째, 사도들이 더이상 가르치지 못하도록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계하였다(18절). "너희는 이 교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치지 말라. 또한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즉 어떠한 특정인에게도 사사로이 말하지 말라"(17절). 신실한 목회자가 침묵하고 세상의 빛을 감추는 것만큼 마귀의 왕국에 봉사하는 일은 없다. 둘째, 그들은 사도들에게 입을 다물지않으면 목숨을 잃게되리라고 위협한다. 그리스도는 그들더러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와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약속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의 위협을 무시할수 있다.

2. 사도들의 결단(19,20)

본문에서는 사도들이 그들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대답했다. 하나님앞에서 너희 말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수 없다(19,20절). 뱀과 같은 신중함은 그들이 침묵하도록 명할지도 모르지만 사자와 같은 담대함은 그들의 핍박자에게 항거하라고 명한다. 사도들은 두가지 점을 들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시다. "너희는 우리가 복음전하는 것을 막을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이제 우리가 누구의 명령에 복종하겠는가? 하나님인가 너희인가?"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하나님보다 연약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의 말을 경청할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아무도 자명하고 확실한 경우이기때문에 우리는 너희 자신에게 판단을 맡기는 모험을 행할 것이다.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하나님앞에서 옳은 것이라고 너희는 생각할수 있느냐?

(2) 그것은 그들의 양심의 확신이었다.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첫째, 그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복음의 영향력을 느꼈다. 얼마나 축복된 변화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세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한다.

둘째, 그들은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상한 영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영원한 파멸에서 탈출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 믿음을 갖게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주장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므로 우리 자신이 확신에 차있다. 그것은 오직 우리만이 보고 들은 것인데 우리가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느냐? 누가 할수 있겠느냐?"

3. 사도들이 석방됨(21)

그들은 사도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사도들을 석방시킬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그 된일을 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백성들을 반박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임명된 통치자들이 사악한 백성들을 겁주고 처벌하듯이 때때로 백성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사악한 통치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행동을 억제케 한다.

(2) 그들은 기적을 부정할수 없었기때문이었다. 이 표적으로 병나은 사람은 사십여세나 되었더라(22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행 3:2)에게 이 기적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오랫동안 악에 젖어있던 사람은 선에 대한 그들의 영적무기력을 고침받는다면 그로인해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은 더욱더 증대될 것이다. 기적의 진실성은 더확실히 입증될수 있었다. 왜냐하면 병나은 사람이 사십여세가 되었으므로, 그 사건에 대해 질문받았을때, 자신이 경험한 그 기적을 스스로 설명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Ⅳ. 사도들의 증언 4:23-31

이제 대제사장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볼수 없고 다만 두가지 증언만 기록되어 있다.

1. 귀환(23)

그들은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23절). 그들은 자유롭게 되자마자 그들의 옛 동료에게로 갔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명예를 높이시고 그를 증거하도록 그들을 부르셨지만 그들은 우쭐거리지 않고 그 동료에게 갔다. 우리가 은사를 많이 받고 유능하다고해서 성도의 모임에서 더많은 특권이나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2) 그들의 적들이 그들을 단단히 협박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동료에게 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동료 가운데에서 주어진바를 최선을 다해 행한다.

2. 경위 설명(23)

그들은 그들이 겪은바를 동료들에게 설명해주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23절). 그들은 동료들에게 그것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동료들은

(1) 사람에게 기대할 것과 하나님께 기대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 인간에게는 공포밖에 기대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용기를 주신다.

(2) 그것을 기록해둠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에 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할수 있게 하였다. 이 사도들은 제사장들앞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증언하였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부인할만한 확신이 서지않았으므로 가장 어리석고 비굴한 방법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사도들에게 명했던 것이다.

(3) 사도들은 기도와 찬송으로 연합할수 있게 되었다."

3. 감사기도를 드림(24-30)

이 사실로인하여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24절). 여러사람을 대신하여 한사람이 하나님께 소리를 높였고, 남은 사람들은(단어가 의미하는바대로) '일심으로' 연합하였다. 그들의 마음이 모두 그를 따랐으므로 한사람이 기도했지만 모두가 기도한 것과 같았다.

(1) 그들은 세계의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그들은 가로되(단어가 의미하는바대로)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이시요(24절). 이방인들은 자신이 만든 신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기때문에 사도신경에서와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말을 시작한다. 기독교는 자연종교의 진리와 교훈을 소멸시키지 않고 분명하게 하며 향상시키려 한다. 만유를 지으셨으며, 고난을 당할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종에게는 용기가 된다.

(2)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현재 나타나고 있는 섭리에 자신들을 복종시킨다(25,26절).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말씀하셨다. '성경은 이루어져야할 것'이므로 그들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시편 2:1,2절에 다음과 같이 예언되고 있다.

첫째,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해 노할 것이다.

둘째, 족속들은 그것에 대적할수 있는 것은 모두 생각해낼 것이다.

셋째, 특별히 세상의 군왕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반대하게될 것이다.

넷째, 관원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적할 것이다. 많은 통치자와 의회와 원로원의 권세가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들은 기독교와 싸우고 대적하였지만, 기독교는 번영하였던 것이다.

(3) 그러한 예언이 27,28절에서 성취됨을 볼수 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27절).

첫째, 하나님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세우신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이 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그를 종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몇몇 영역본들에서는 어린예수라고 부르고 있다(흠정역 참조). 그 말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아들과 종이라는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구속사업에 있어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종으로서 행동하셨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사람은 바로 그분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주님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26절). 그리스도에게 기름부으셨던 하나님은 그가 해야할 일을 결정하셨다. 그는 구세주가 되기위해 기름부음을 받았고 속죄를 위해 희생되도록 결정되었다. 그는 죽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현명하게 그가 누구 손에 죽어야하는지도 결정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야 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그렇게 정했다(28절). 그의 권능과 뜻은 언제나 일치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행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 계획을 달성함에 있어 사악하고 불경한 도구가 이용된다. 서로 불화하던 헤롯과 빌라도,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연합하였다. 하나님이 선한 일에 쓰신다고해서 죄는 그 악함이 덜하여지지 않지만 이 일로 그리스도는 더욱 영광을 받게 된다.

(4)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간구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적들의 죄를 기억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29절). '주여 이제도'라는 말속에서 '이제도'에 강조를 둔다. 원수의 세력이 극심하고 위협을 하는 이때가 바로 그의 백성을 위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때이다. 그들은 무엇을 해달라고 하나님께 지시하지않고 단지 솔직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뢸뿐이다. "당신께 간구하오니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손을 결박하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려주소서." 우리가 부당하게 위협받을때 주님앞에 호소하여 위협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으로 그들의 영혼을 지켜주실 것을 기도했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하여 주옵시며(29절). "주여 저들의 위협을 하감하옵시고 그들을 놀라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저들의 위협을 하감하옵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또 그들은 "주여, 이제 위험이 다가오고 있사오니 우리의 임무에서 은퇴할수 있는 명예로운 기회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수 있는 은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이나 그 말로써 입증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담대히 그들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능력있는 자를 찾으신다. 적들의 위협은 우리를 분발시켜 더욱더 용기를 갖도록 해줄 것이다. 감히 그들이 그리스도와 대적하여 싸울수 있겠는가? 부끄러움때문에, 그를 위하여 싸우는 일을 회피하지 말자.

셋째, 그들이 전한 교훈을 확고하게 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힘을 주실 것을 기도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30절). 신실한 사역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표적보다 더큰 힘은 없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30절).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적들을 꺾을수 있게 하소서."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간구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이다.

4. 하나님의 응답(31)

하나님께서는 은총의 응답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표적을 그들에게 주셨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31절). 이 진동은 그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이키며 진실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적인 표적을 그들에게 주기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줌으로써 이때부터 그들은 사람들을 더욱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 장소는 흔들렸지만 그들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지고 깨지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이 더욱 충만하게 하셨다. 의심할 나위없이 그들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으며 응답되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겁냄이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성령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되는가 하는 것까지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법정에서도 성령이 충만하였고, 이제 강단에서도 성령이 충만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하신 말씀의 성취를 보게되는데 그것은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게 됨이 기도의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풍성한 은사의 실례를 보게되는데 이는 우리가 은사를 받고 그것을 쓰면 쓸수록 은사가 더욱 풍성해진다는 의미이다. 저들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절). 재능은 이용해야 되며 묻어두어서는 안된다.

 

Ⅴ. 초대교회 공동체 4:32-37

1. 서로 사랑함(32)

제자들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32절).

(1)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루살렘에서만 회심하는 자가 어떤 날은 삼천명이나 되었고 또 어떤 날은 오천명도 되었다. 이외에도 날마다 믿는 이가 더하였다. 교인의 증가는 교회의 영광이다.

(2) 그들은 '한마음과 한뜻'이었다. 그들은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환경도 달랐지만 그리스도의 믿음안에서 일치하였고 주께 연합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룩한 사랑안에서 서로서로 연합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남기신 교훈의 축복된 열매이며,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 그 기도의 축복된 열매이었다. 그들은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서로 사랑한것 같이 지금도 서로 사랑할수 있을 것이다.

2. 권능의 사역(33)

사역자들은 큰 권능으로 그들의 사명을 계속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3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올바르게 이해할때 위대한 신앙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사도들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받은 권능은 커다란 힘, 정신, 용기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 진리를 부드럽고 소심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 생기있고 단호하게 전하였다. 또는 그 권능은 그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해주는 기적을 의미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기적의 역사속에서 또한 증거하셨다.

3. 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33)

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그들에게서 빛났다.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33절). 비범하고도 장엄한 은혜가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속에 이 은혜의 명백한 열매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들속에서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보았고 그들을 존경하였다.

4. 가난한 자에 대한 너그러움(32-37)

(1) 그들은 소유권을 포기하였는데 실제로 소유권이란 어린아이조차 갖고자 열망하는 것이며 세상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고자 하는 것이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으로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그들은 이미 서로 나누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재물을 모으기위해 염려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나누어주고자 한 사람들은 형제를 돕기위하여 스스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내 것과 네 것을 가를때 분쟁이 생긴다. 인간이 자기 재물을 갖고 그것을 더욱 긁어모으려고 할때 전쟁과 분쟁이 일어난다.

(2) 그들은 구제를 많이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32절). 그리하여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34절).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중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으나 그들을 부양할수 있는 부자들도 몇사람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그렇게 하게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든 물건을 통용하였는데 그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재산을 약탈하도록 한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한것이었다.

(3) 그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진 것을 팔아 그들의 기금으로 내놓았다.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34절). 본문에는 그들이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앞에 두매(34절). 이것은 사도들이 합당하게 여기는대로 사용할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저희가 각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35절). 공공 구제기금을 사용하는데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만 한다. 즉 그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결핍이 채워져야 되는 사람들이 돌봄과 구제를 받았다. 한개인에 대한 편애나 존경심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졌다. 본문에는 특별한 사람의 이름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레위족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구브로 출신이었다. 그가 사도들과 함께한 뒤에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었음을 주목하자. 그는 사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표시로 그에게 바나바란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로 그는 유쾌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마음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함에 있어 늘 관대하였으며 또 주의 백성을 위로하는데 있어 탁월했다. 이와같이 그는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사도들 가운데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 불리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위로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있었다.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사람이 상처를 찾아내면 다른 사람이 치료하고 싸매주었다. 둘째, 본문에서는 그의 무한한 관대함이 설명되어 있다. 후에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그의 봉사가 뛰어났기때문에 이 사실은 특별히 주목의 대상이 되고있다. 또는 그것이 타인의 모범이 되고 지도적인 지침이 되기때문에 언급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앞에 두니라(37절). 이와같은 그의 행위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고 하신 성령의 말씀대로 그가 사실상 사도들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던 사실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사도들을 사도로서 존중하였기때문에 그 보상으로 그는 사도로서의 대접을 받게되었던 것이다.

 

# 해설

박해당하는 사도들 ( 4 )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그들이 공회에 넘겨지고 관장들과 임금들앞에 서서 고난을 받게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있게되면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참조, 막13:9-11). 주님은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공회앞에 증거했습니다. 핍박속에서 그들은 더욱 담대했고 교회는 힘을 더해 갔습니다.

 

1. 심문받는 사도들

1) 갇힌 사도들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던 사도들은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다수가 사두개파 소속이던 성전 관원들이 좋아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전맡은 자는 성전 경비의 책임자로서 성전내의 질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 직위는 대제사장 가문들에서 추천되었고, 서열은 대제사장 다음이었습니다. 이들은 밤새 두사도를 가두어 놓았습니다.

a.성전맡은 자(느11:11)

b.사두개인(마22:23)

2)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튿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고, 참석자들 중에는 당시 산헤드린의 두드러진 인물들이 포함되어 었었습니다.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권위로 판결을 좌우하곤 했습니다. 그의 장인 안나스는 가야바 이전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심문할 죄를 발견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권위를 잃지않기 위해 '무슨 권위와 뉘 이름으로 그런 혼란을 일으켰느냐'라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a.공회(마5:22)

b.대제사장(마26:59)

3) 모퉁이 돌

베드로는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라는 공회의 물음을 일축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건축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결국에는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돌이 예수님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자들은 곧 유대 지도자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한건물의 머릿돌이 되게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기적 또한 그들의 힘이 아니고 비할데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a.고난받는 인자(막9:12)

b.버림받은 모퉁이 돌(시118:22)

 

2. 공회에서의 담대함

1) 범인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고 평범한 사람들인줄 알았다가 그들의 담대한 증거에 무척 놀랐습니다. 막힘이 없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도들의 담대함을 그들은 보았던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사도행전의 또다른 독특한 주제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있던 자들임은 물론 병나은 사람까지 그들과 함께있는 것을 보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공회원들을 당혹하게 했을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책잡을 것을 발견치 못했던 것입니다.

a.담대함(엡3:12)

b.악인들의 침묵(딛2:8)

2) 힘없는 위협

공회원들은 은밀히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들로서는 눈에 바로 보이는 사실을 부인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금지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공회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거한다면, 그때는 법정모독죄를 적용할 셈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두사도를 불러서 더이상 그 일을 하지말도록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이 산헤드린의 명령보다 더높은 하나님의 말씀아래 있음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그들을 힘없이 위협하고 놓아줄수밖에 없었으며 그 일로인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a.핍박의 원인(갈6:12)

b.보고 들은 것을 말함(요일1:1)

 

3. 놓인 사도들

놓인 사도들은 그 즉시로 동료들에게 가서 겪은 모든 일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 한마음이 되어 찬미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관원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칠수 있는 능력을 더욱 베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찬미는 창조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의 회당 예배시에 쓰이던 예배의 형식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에서 보게되는 중요한 특징은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 적용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메시야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 시편은 먼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분에 대해 말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그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시편이 가리키는 왕으로서의 메시야임을 의심할여지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또한 예수님을 '거룩한 종'으로 표현함으로써 이사야서에서 묘사되는 '여호와의 종'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관원들의 위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주님의 권능과 표적들이 더많이 나타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믿고, 성령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a.기름부음 받은 거룩한 종(사61:1)

b.하나님의 손(잠31:20)

 

4. 유무상통

본문의 말씀에서 누가는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누가가 밝히듯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의 이름에서 보듯,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연합이 되었습니다. 즉, 물건을 나누는 것은 자발적이었고 분배는 필요에 따랐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도록 담대함을 주었습니다. 4장의 교회의 모습과 다음에 나오는 5장의 내용은 대조를 이루는데 이 또한 누가의 의도를 엿볼수 있게 합니다.

a.한마음과 한뜻(빌1:27)

b.바나바(행9:27)

 

결론

본장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확신에 찬 사도들의 증거가 인상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지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한정됨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와 교제를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 핵심

4:1-22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으로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껴 저지하려 들었다.

구원(salvation, 4:12)

스스로 헤어날수 없는 큰 위험이나 극심한 괴로움으로부터 제3자가 건져내어 주는 것,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대적의 위협과 재난에서 건져내시는 것(삿 10:11), 혹은 예수님이 각종 병자를 치유해 주신 것(막 5:34) 등이 구원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궁극적 의미에서의 구원이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와 사망권세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리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은 장차 천국에서 누리는 것일뿐 아니라 주님안에서 천국 백성임을 자각하며 사는 자가 현재의 이 세상에서도 향유하는 것이다.

 

# 묵상

최초의 교회에 대한 박해 ( 4:1-3 )

교회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제사장들과 성전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전 경내에서 백성을 가르치는것 자체는 위법적인 행위가 아니었기때문에 누구에게나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던 사두개파 사람들과 패역한 제사장, 성전 관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복음은 더욱더 확산되었습니다.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령충만 ( 4:8-12 )

베드로가 성령충만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박해하여 복음전파를 막으려했으나 베드로는 오히려 이것을 복음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들도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말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비유 ( 4:11 )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건축자의 버린돌이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마21:42; 벧전2:7). 집모퉁이의 머릿돌은 승리하신 예수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사도들을 위협한 관원과 장로들 ( 4:18-20 )

그들은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공회원들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사도들의 답변에 반박할 수 없으므로 사도들을 부당하게 위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위협으로 막아보려는 생각은 어리석을뿐만 아니라 실패할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옳다고 말하였으며, 또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 법률을 단호하게 거부한 베드로의 태도는 초대교회 이후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견지(堅持)되어야할 황금률이 되고 있습니다.

박해받는 교회가 한 일 ( 4:24-31 )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기도가, 당면한 박해의 세력만을 제거하려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박해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게 해달라는 적극적인 기도였다는데 우리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기도에 전념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충만을 체험하게 하시고 땅이 진동하는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성령충만은 복음을 더욱 담대히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생활 ( 4:32 )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은혜받은 성도는 모든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나의 소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위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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