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앉은뱅이를 고침 3:1-11
이 당시에는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2:43). 본문에는 한가지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1. 기적을 행한 베드로와 요한(1)
베드로와 요한은 각자 12제자들 가운데 자기 형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 서로가 자기 형제 이상으로 친밀한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우정에 의한 유대가 혈연보다 더 강할수 있기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후 전보다 더욱 친해진 듯하다. 그것은 베드로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셨다는 좋은 증거가 되며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가 베드로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2. 사건의 시간과 장소(1)
기적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성전에서였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올라갈 때였다. 복음의 그물이 쳐지고 많은 고기들이 낚여졌다. 공중 예배에 참가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성전에 함께 올라가는 것은 위안이 된다. 최상의 사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회이다. 그때는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공중예배와 함께 기도하는 처소와 시간이 정해져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강제성을 갖지않더라도 자기의 기도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3. 기적의 대상(2,3)
기적적인 치료를 받은 환자가 2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성전 문앞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앉은뱅이였다.
(1) 그는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자였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자였다. 이 비참한 경우는 우리에게 우리가 처해있는 본질적인 영적상태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 즉 능력이 임하지 않고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우리는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일할수도 걸을수도 없다.
(2) 그는 거지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할수 없으므로 구걸을 해야만 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2절). 필요한 것은 많으나 일할수 없는 사람은 구걸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기도와 자선행위는 함께 행해져야 한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때 자선의 대상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성전 문앞에서 불쌍한 거지들이 자선이 부족하다고 낙심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중에는 고려되어야할 장점이 확실히 있으며 열마리의 수벌(게으른 자), 또는 말벌(싸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한마리의 꿀벌(부지런한 자)를 굶주리게 내버려두는 것보다 낫다. 그 거지가 누워있던 성전문은 본문에서 미문이라고 불리워진다. 가난한 사람이 그 밑에서 구걸한다고해서 이 문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었다.
(3)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며 자선을 구하였다(3절). 이것이 그가 요구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동냥을 주기를 바랬지만 치유를 받았다.
4. 치유방법(4-7)
본문에서 치유방법이 나타나 있다.
(1) 베드로가 그를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주목했기 때문에 그 거지는 기대감에 부풀었다(4절). 요한도 마찬가지여서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말하였다. 이 일은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하고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거지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5절).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응답받기를 기대해야 한다.
(2) 동냥을 얻으려는 거지의 기대는 곧 좌절되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제자들이 이세상에서 부귀를 누리는 예는 흔치않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은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생계비였다. 자신들은 겨우 생계나 유지할 정도였던 것이다. 공적 신용은 엄격하고 성실하게 지켜져야 된다. 또한 자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능력이 없는 반면에, 필요한 자금은 있으나 마음이 허락치않는 사람들도 있다.
(3) 그의 기대는 기대이상으로 이루어졌다. 베드로에게는 동냥을 줄 돈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좋은 것, 즉 거지의 질병을 치료해줄수 있는 하늘로부터 받은 능력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영적은사로 매우 부유하게 될수 있다. 그는 거지에게 더좋은 것, 즉 질병의 치료를 주었다. 이제 그는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갈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동냥을 구하던 사람들에게 줄수 있게될 것이다. 그에게 줄 은과 금은 없었지만 베드로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고 말했다. 은과 금은 없는 사람이라도 손발과 감각은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장님과 앉은뱅이와 병자들을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할수 없다면 은과 금이 있다해도 역시 줄수 없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치유가 되었는가 살펴보자.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걸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전제하지 않았다면 그를 희롱하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일어나서 걸으려고 시도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한다면 그는 걸을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걸음으로써 그 능력이 그에게 임했다고 증거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가 위로를 받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라. 베드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도와주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7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의 계명대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실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게 하신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을 스스로 하려고 노력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수 없는 것까지 할수 있게하는 그의 은총을 약속하신다.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7절). 그는 자신이 할일을 했고 베드로 자신도 할일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에게 힘을 주신 이는 바로 그분이시다.
5. 환자의 태도(8)
본문은 이 치유가 환자에게 준 영향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그는 말씀에 복종하여 뛰어 일어나 걸었다. 그는 잠을 자서 몸이 회복된 사람처럼, 자기에게 힘이 있는가 의심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힘이 생겼으므로, 그가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은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힘차게 걸었고 똑바로 움직였다. 이것이 치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경험한 사람은 그들이 경험한 것을 증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결연히 서고 그와 더불어 즐겁게 걸어가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11절). 그가 왜 그들의 손을 붙잡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나는 그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기뻐서 그들을 포옹하였다. 이렇게 그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그는 그들을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고쳐주실때 도구를 사용하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계속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너무도 강렬하였지만 그들을 성전밖에 머물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가기로 작정했는데 그들이 성전으로 들어갔기때문에 그도 따라 들어갔다. 요한복음 5:1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고치신 혈기마른 자와 같이 그도 곧 성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신 힘은 그를 찬양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뛸수 있게 되자마자 하나님안에서 즐거이 뛰며 그를 찬양했다. 진정한 회심자들은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젊은 회심자들은 더욱 힘차게 뛰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6. 이 기적의 영향(9-11)
이 기적의 목격자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1) 그들은 기적의 진실성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자인줄 알았다(10절).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볼 정도로 거기에 오래 앉아있었다. 그들은 이제 그가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다(9절). 그는 그가 전에 구걸하던 때처럼 마음껏 소리질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이 성화될때 자비는 완전해진다.
(2) 그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며(10절) 크게 놀랐다(11절).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 기적은 이루어졌다고 보여졌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치료해 주신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보다 사도들이 행한 이 기적으로 더욱 감화를 받게되었다.
(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주변에 모였다. 모든 백성들이 달려나아가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 위대한 광경을 보기위해 모였다.
Ⅱ. 솔로몬의 행각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 3:12-26
앉은뱅이를 고친후 베드로는 본문과 같이 설교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12절). 베드로는 떼지어 몰려드는 백성들을 보자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베드로는 기적에 감동된 백성들을 보았을때,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밭에 복음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베드로는 백성들이 자신과 요한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그러한 숭배심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1) 그는 기적이 가져오는 명예를 겸손하게 포기했다(12절). 그는 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람들은 율법과 약속뿐만이 아니라 복음과 성취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두가지를 질문하였다.
1) 왜 그들이 기적을 보고 놀라는가.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12절). 사실 그것이 놀랄만한 일이긴 하지만 이미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나사로를 일으키셨는데 어째서 이 일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에게는 아무 이상도 없는듯이, 그들에게 가장 친숙해야할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불과 며칠전에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는데 그들은 왜 이 일에는 놀라지 않는가?
2) 왜 그들은 기적의 도구에 불과한 사도들을 지나치게 찬양하는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그들이 이 사람을 걷게한 것은 확실하나 그로인해 사도들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을뿐만 아니라 세상에 축복을 주기위하여 보내졌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 자신과 권능과 경건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행한 능력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주실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경건으로인해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 사람들이 그들의 권능과 경건을 찬양했던 것은 그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우상화되어서는 안된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 찬양할 점은 기적을 행한 것에 대한 명예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지않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그리스도께 돌렸다는 것이다. 유능한 사람들을 볼때 우리는 그들이 매우 겸손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2)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13-16절).
1) 그는 그리스도를 조상들에게 약속된 참메시야라고 전했다(13절).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시다. 그는 하나님께는 아들로서 사랑받고 우리에게는 구세주 예수로서 사랑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올리심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족장과 맺은 약속에 따라 그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에 대한 계시였다.
2) 그는 단호하고 명백하게 그들을 예수의 살인자로 규정한다.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13절). "너희는 그를 마치 공공연한 불평꾼인양 그를 비난하는 아우성을 치는 소리에 넘어갔다. 그가 화려함과 권능으로 오지않았기 때문에 너희는 그를 부인하고 의절하며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았다" 너희가 앞에서 부인하고(13절). "너희는 빌라도보다도 악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너희가 그의 판결에 따르기만 한다면 저를 놓아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했다." 주 예수의 결백보다도 더한 어떤 것, 즉 그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그를 죽인 자들의 죄를 더하게 했던 것이다. "너희가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너희는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14절). 저희는 생명의 파괴자인 살인자는 살려주고 생명의 주이신 구세주는 죽였다. 너희는 생명의 주를 죽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자비심을 버렸을뿐만 아니라 그것에 역행했다.
3) 그는 앞서 2:32절에서 한바대로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 "너희는 생명의 주가 그의 생명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로다."
4) 그는 이 무능한 사람에 대한 치료를 그리스도의 권능때문이라고 한다. 그이름을 믿으므로 그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16절). 그는 재차 반복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첫째, 그는 이 기적의 진실성에 관해서 그들에게 호소한다.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은 바로 '너희가 보고 아는' 그 사람이다. 그 적은 공공연하게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곧 성전문에서 일어났다. 치유는 완전했다. 그것은 완전히 나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가 걷고 뛰는 것을 볼수 있다.
둘째, 그는 병고침의 능력에 대하여 알려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의 명령은 비록 하급관리가 집행하였더라도 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것처럼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그의 명령은 수행된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그이름을 믿음으로 임하게 되며 그들이 영광을 받게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서이다. 믿음으로 이런 기적을 행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능력을 받았으므로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이 세상에 전해야할 위대한 복음의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권능과 영광의 초석이시고 위대한 치유자이시며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확증했으며, 또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유일한 길로써 그를 믿는 위대한 복음의 의무를 권고하였다.
(3) 그는 그들도 은총을 구할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 그들을 격려했다(17, 18절). 그는 그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또한 그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1) 그는 그들의 죄가 그들의 무지때문이었다고 솔직히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덜어준다. 그는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엄중한 책임을 완화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죄악에 있어 그 자신도 그들의 형제가 되기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도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그를 알지못한다고 맹세했던 적이 있었다. 너희가 알지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줄 아노라(17절). 이것은 베드로의 사랑에서 나온 말이며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자기의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들이 하는바를 알지못했던 사람들을 변호해 주었던 그의 선생은 베드로에게 모범이 되었다. 통치자들이나 백성들 중에는 악의를 품고 그렇게 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대세에 따라 무지하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2) 그는 죄인의 결과를 가볍게 해준다. 그것은 성경에 쓰여진대로 한 것이었다(18절). 그래서 그는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는 고난받으실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너희가 그 성경말씀을 이루었으나 너희는 그것을 알지못하였다. 그러나 너희를 도구로 쓰심으로써 하나님은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하신 것을 이와같이 이루셨느니라." 이것이 그의 계획이었으나, 너희의 독선으로 너희 모두는 이 계획을 알지못하였다. 하나님은 너희가 너희 자신의 열정을 만족시키고 있는동안 성경을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핍박하고 미워한 그들의 죄는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없지만 그 죄는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은총을 갈망하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제 그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용기를 주었던 은총을 나타내는 근거가 되었다.
(4) 베드로는 그들 모두에게 그리스도인이 될것을 권고한다(19-26절).
1) 그는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된 씨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25절). 육체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를 인하여, 이스라엘 족속뿐만 아니라 땅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형제가운데서 세우실 것을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다(22절). 그리스도는 선지자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세와 같이 그의 백성들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인도자이시다. 모세는 종으로서,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신실하였다. 모세가 온유와 인내의 전형이었듯이 예수도 그러하다. 모세만한 선지자가 없었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크신 이가 여기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이시다. 그는 맨 먼저 이스라엘에서 세움 받으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첫번째 수혜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가운데 세움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신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를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구약의 교회는 '사무엘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들'(24절)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 종들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능욕당했으므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들은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앞으로부터 이를 것'(19절)과 그날이 '만유를 회복하실때(21절)임을 믿어야만 한다. 주님의 부재는 많은 죄인들을 안전하게 해주고 성도들을 불신받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임재는 서둘러 진행되고 있으며 죄인과 성도 모두를 영원히 잠잠하게 만들 것이다. 주의 임재는 다음의 두가지를 가리킨다.
① 만유의 회복(21절). 즉 모든 피조물의 혁신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의 마지막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이르러 전보다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난다.
② 이와 함께 더위에 지친 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같이 유쾌하게 되는 날(19절)이 올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고생과 수고가 끝난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겨진 휴식을 갈망한다. 그때 주앞으로부터 오는 유쾌함은 주앞에서 영원한 것이다.
2) 그는 그들이 꼭 해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그들은 회개해야만 한다. 곧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베드로도, 그 자신이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회개했으므로 그들에게도 그렇게하기를 요구한다. 그들은 돌이켜야 하며,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죄로부터 돌이켜야 하며 다시는 죄에게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위대한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예언자들이 들었던 것처럼 거룩한 믿음을 가지고 들어라. 무엇이든지 들어라. 그의 법이 너의 모든 행위를 다스리게 하라. 그가 네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환영하라. " 만일 우리가 주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멸망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아니하는 자는 백성중에서 멸망받으리라(23절). 구세주의 충고를 듣지않으려는 자는 파괴자의 수중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3) 그는 그들이 무엇을 바라야할 것인가를 가르쳐준다.
① 그들은 죄사함받아야 한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19절). 죄의 용서는 죄를 없애버린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서지 않는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수 없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도 없다.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희망은 우리를 회개하도록 하는 강력한 유인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은 가장 우선적이고 중대한 선포이다. 죄를 용서받음으로 우리가 얻는 위로의 열매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때'이다. 수고와 싸움의 시기 동안에는 안으로는 의심과 공포, 밖으로는 고통과 위험의 시기인데, 죄사함으로 인한 만족한 열매를 얻을수 없다. 그러나 유쾌하게 되는날이 오면 모든 눈물은 마르게될 것이다.
②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위로를 가져야 한다(20, 21절).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20절).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우리는 언제나 그와 함께있을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를 만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 우리와 함께 육체를 가지고 계실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눈앞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하늘이 종말까지 그를 받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지않는 것들의 증거'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킨 모든이에게 그가 보내어질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20절). 그의 영적인 임재를 구하라. 세상에 보내진 그는 바로 너희를 위하여 보내진 것이니 너희는 그의 오심으로 위로를 받으라.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너희에게 축복이 되리라. " 이것은 21절의 그때까지 하늘이 그를 받아둘 것이라는 구절과 관계된것 같다.
(5) 그는 그들이 돌이켰을때 이러한 것들을 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한다.
1)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언약의 자손이라(25절). 이 말씀속에는 두가지 특권이 언급되어 있다.
① 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었다. 그들가운데서 선지자가 일어났고 그들에게 선지자가 보내졌다. 예언이 중지된 시대의 사람들도 선지자들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적합한데 그들도 매 안식일마다 그들의 회당에서 읽혀지는 선지자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다(13:27).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속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바대로 예언자들과 예언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헛되이 받아들이지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② 그들은 자손들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의 상속자들이었다. "메시야의 약속이 너희에게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그 약속이 너희에게 유익하게 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땅위의 모든 족속이 그리스도안에서 축복을 받는다면, 육에 따른 아브라함의 혈연은 더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2) 이스라엘 민족은 신약의 은총을 맨처음 받았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구속자가 보내지셨는데, 이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아직도 그들의 위로를 위하여 그가 보내지리라고 소망할수 있는 용기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20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너희에게 먼저 보내셨기 때문이다(26절). 즉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특히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는' 큰축복을 주셨던 것이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언제 사명을 받으셨는지 알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세워 그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그를 보내셨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구하기위해 그를 보내셨다. 어떤 학자들은 "그의 부활은 그를 높이시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시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복음과 성령안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시 보내진 것이다.
② 그는 '먼저 너희에게 즉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인 너희에게' 보내지셨다.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목회는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었었다. 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위하여' 오셨으므로 제자들에게 다른 지방으로 가지말라고 명령하셨다. 부활하신후에 그는 실로 만방에 전파될 것이었으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만 했다(눅 24:47). 그리고 그들이 다른 나라에 갔을때 그들은 먼저 유대인을 찾아 그들에게 전도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자 제일 먼저 그들에게로 가셨던 것이다.
③ 그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주시려고 먼저 너희에게 보내사. 그는 너희가 당연히 받아야할 비난을 하시기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의롭게 하시기위해 오셨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때도 그 축복을 남겨놓으셨다. 그는 '제자들을 축복하신후 그들을 떠나셨다'(눅 24:51).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며 우리도 오직 그를 통해서만 축복받기를 간구할수 있다. 가장 큰축복은 우리가 다른 모든 축복을 받을수 있도록 우리를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죄에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고 죄에 대항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를 버릴뿐만 아니라 그것을 미워할수도 있게된다. "그러므로 너희의 임무를 행하라. 즉 회개하고 돌이켜라.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시며 너희를 축복하려하시기 때문이다."
# 해설
베드로의 능력 ( 3 )
전장의 끝부분은 예루살렘 교회의 진정한 공동체로써의 탄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적과 함께 주의 은혜가 넘침으로 믿는 자의 수가 더해 갔습니다. 본장에서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갖은 시련속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증거하는 공동체로써의 온전함을 갖추기 위한 많은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1. 고침받은 앉은뱅이
1)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정한 시간에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때의 시간은 제구시 즉, 오후 3시였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메어와서는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40년이상을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서 소외된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미문 곁에 자리를 잡고앉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는 유대인들이 늘 그곳을 지나다녔기 때문입니다. 미문은 이방인의 뜰을 지나 여인들의 뜰로 들어갈때 통과하게 되는 문이었던것 같습니다.
a.성전(눅18:10)
2) 나사렛 예수의 이름
사도들은 유대인 남자들이었던 까닭에, 성전 바깥뜰(이방인의 뜰)을 지나 계단을 올라 여인의 뜰(성전내부의 첫뜰)로 들어갔고, 다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갔습니다. 제사 의식은 좀더 들어가 성전 가장 안쪽뜰(제사장의 뜰)에서 행해졌습니다. 일반 유대인들은 보통 그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조금더 걸으면 바깥뜰과 안뜰을 나누는 성전벽이 있습니다. 이 성전벽에는 이방인이 들어가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헬라어와 라틴어로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이 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만난 것입니다. 실상 사도들은 그 사람이 구하는 유의 도움을 줄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나은 것을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는 걸을수 있게된 것입니다.
a.그리스도의 이름(사9:6)
b.치유의 능력(막16:17)
3) 나타난 이적
누가는 이적을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행2:43절에는 교회내에서 여러가지 기사와 표적이 발생한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은 많은 이적을 행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고치는 이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사와 표적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게됩니다. 이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건한 두려움을 주었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경외심을 갖도록 했으며 사도들의 교훈과 사도직을 확증해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적들로인해 사도들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더욱 신빙성있게 되었고 능력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표적중의 하나를 선별해서 기록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성전미문에 앉아 있던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아보고는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습니다.
a.찬양으로 감사함(계5:12)
b.이적으로 인한 놀람(마15:31)
2. 베드로의 설교
1) 솔로몬 행각
앉은뱅이의 일로 놀란 무리들은 모두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성전 바깥뜰 동편 끝에 있는 행각이었고 이방인들의 뜰 동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부속 건물이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 잔뜩 관심을 가지고 그곳에 모여든 군중들이 날때부터 앉은뱅이였으나 이제 생전 처음으로 건강한 두다리를 갖게된 그사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설교할 자연스런 기회를 갖게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요한이 그 앉은뱅이를 걷게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의 능력도, 경건도 아니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를 고친 것은 예수님의 권능의 이름이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a.솔로몬 행각(요10:23)
b.인간이 행한 일이 아님(요3:27)
2) 부활의 증인
베드로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적을 보게된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치료의 능력은 예수께로 말미암았음을 베드로는 힘있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믿음을 찾으셨고 아무리 미미한 형태라도 믿음이 있으면 고치셨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것도 바로 믿음에 의해서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불과 몇달전 예수님은 성의 북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었습니다. 그분의 시체가 십자가에서 내리우고 장사되었을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그분의 종말인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하고 로마 관원들에게 넘겨져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이 일의 증인이었던 것입니다.
a.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히12:2)
b.그리스도의 증인(요15:27)
3) 하나님의 종
베드로는 모인 무리를 향해 예수를 소개하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가리켜 '거룩하고 의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입은 사람에게 쓰는 고유명사였습니다. 그분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분'이셨습니다(참조, 사52:13). 누가는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말한 종이기도 하시지만, 모세가 예언한 대선지자이기도 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사 그의 백성을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서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안에서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후손이기도 하시다는 것입니다.
a.죄사함(시51:1)
결론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사도들이 행한 많은 기사와 표적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가는 속에서 이 표적은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능력으로 보여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에 의한 것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예언들의 성취와 함께 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시대는 회개를 통해 얻을수 있는 것임을 베드로의 메시지는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 핵심
3:1-10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치유한 것은 구약에 예언된바 메시아 시대에 임할 축복의 성취였다.
사도 요한(3:1)
세베대의 아들이자 사도 야고보의 동생이다(마 4:21). 어부였던 그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듣고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요 1:35). 성격이 급했던 그는 “보아너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막 3:17) 주의 일에도 뜨거운 열성을 보였다. 시몬 베드로, 형 야고보와 더불어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그는(마 17:1)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때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 묵상
초대 교인들의 정해진 기도생활 ( 3:1 )
당시 유대인들은 3시(오전 9시), 6시(정오), 9시(오후 3시)로 시간을 정하여 하루 세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규칙적이고 성실한 신앙생활은 우리를 점점 성숙하고 능력있는 신앙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받은 앉은뱅이 ( 3:2-16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간때도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성전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했습니다. 베드로의 치유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능력은 사람이 감당치 못합니다. 이때 치유받은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앉은뱅이는 배후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보다 도구로 사용된 인간 베드로에게 더 감사할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한 것과 그 사실을 믿은 앉은뱅이의 믿음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능력의 과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만족했습니다. 이처럼 치유의 목적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돌리는데 있습니다.
‘나 같은 선지자 하나’ ( 3:18-22 )
본문 22절의 ‘나’는 모세를 가리키고 ‘나 같은 선지자’는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충성했습니다(히3:5). 그러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8)로 오신 예수는 그의 집 맡으신 아들로 충성했습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 3:19 )
유쾌한 날이 되기위해서는 회개하고 돌이켜 죄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도 볼수 있듯이 인간의 비참함은 회개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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