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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바울의 담대한 자기 변론 23:1-5

아마도 천부장은 만약 그가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개최되는 산헤드린 회의 앞에 데려가면, 그들이 그 일을 다소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1. 자신의 무죄에 대한 바울의 항변(1)

바울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모습들을 드러내 보였다.

(1) 바울은 담대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러한 위엄있는 회의 앞에 소환되었을 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지하게 그 공회를 주목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소환되었을 때, 그들은 그를 위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거룩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이 그들 앞에 섰을때에는 오히려 그가 그들을 위압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도 뻔뻔스러운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선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신앙대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는 항상 도덕적인 선과 악을 구별해서 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않는 교활한 사람이 결코 아닌 제 분수에 맞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을 때에도, 그는 그것을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비록 그의 양심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양심의 지시하는 바에 따라 행동했다. 바울은 자신이 회심한 이후의 시기, 즉 그가 그들의 불만을 사게 된 이후부터의 시기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하였다(1절).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같은 한 정직한 인간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산다. 비록 그가 실수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떳떳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행동한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양심적으로 살아간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코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항상 떳떳하게 살아가며, 그런 양심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지 간에 그는 한결같이 양심을 지켜나가는 자인 것이다.

2.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난폭한 행위(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대제사장은 바울에 대해 대단히 격노하였다. 자신의 결백에 대한 바울의 항변은 그를 비방하려고 하였던 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바울이 무죄임을 주장하자, 대제사장은 그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죄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대제사장은 분노하여 바울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마치 바울의 입술에 죄가 있는 양, 혹은 그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표시로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욕이 행해지는 것을 보더라도, 혹은 선을 행하고 선한 말을 했다고 하여 우리에게 그러한 모욕이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입을 구타당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맞춤'(아 1:2)으로 보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3. 대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탄핵(3)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바울은 어떤 죄악된 격분이나 열정을 이기지 못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권력 남용을 진타하는 거룩한 열성에서 이 말을 한 것이었다. 그에게 보복의 정신은 추호도 없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대제사장의 진면목을 '회칠한 담이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말은 '너는 위선자다'라는 말이다. 즉, 네 속에는 쓰레기와 온갖 더러운 잡동사니가 들어있으나, 그것을 너는 회칠하거나 하얀 벽돌 담으로 가리는 위선자이다라는 말이다. 수양이 덜된 사람들일수록 자신을 깨끗하고 산뜻하게 보이기 위하여 회칠을 한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다음과 같이 그의 파멸을 예고한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즉 하나님이 너에게 쓰디쓴 심판을, 특히 영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파멸에 합당한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는 "네가 최고법정의 우두머리로 앉아서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한다고 하고서 내 죄가 입증되기도 전에 나를 치라고 명령하느냐? 이것이 율법에 어긋난 일이 아니냐?"라고 말하였다. 피고가 자기를 변호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피고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정죄하는 것은 인간의 법이나 신의 법이나 또한 자연법이나 실정법에 있어서 모두 위배되는 것이다. 율법에 따라 재판하도록 모두 위배되는 것이다. 율법에 따라 재판하도록 임명된 대제사장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4. 바울의 이 대담한 발언에 대한 공격(4)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그들과 얼마나 어려운 승부를 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된다. 대제사장과 그 동료들은 그의 곁에서 그를 매도하고 있었고, 시시각각으로 그의 처신에서 결점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공평하게 대하고자 했던 바울도 이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5. 바울의 변명(5)

바울이 자신의 한말에 대해 변명한 것은 믿음이 약해 망설이는 형제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대제사장의 잘못에 대해 예의 없이 마음대로 말했었지만 자신의 말이 형제들에게 화를 입힌 것을 알았을때 바울은 '내가 잘못했노라'라고 떳떳히 사과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의 말이 맘 약한 형제들에게 화를 입히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그것을 말할때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가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즉 이 말은 '나는 그때 그의 지위의 존엄성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더 존경스럽게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가 대제사장인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통치자에 대해 아무나 마음대로 얘기할 수 없지만, 선지자들에게는 그들에 대해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러한 선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말했던 것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율법의 의무를 약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율법에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행정직에 있는 사람들의 명예를 옹호해 주지 않거나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불찰을 묵인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고관들이 자신들의 잘못이나 또한 올바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공공연한 불만들을 듣지 않을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고관들에게 특별한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하므로 권위를 가진 자들의 명예를 위해서 각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권위를 가진 자들의 명예를 위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그들에게 각별한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Ⅱ.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분쟁 23:6-11

바울은 자기를 구해준 하나님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을 구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군중들의 소동에서 구원받은 그가 여기서는 장로들의 소동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1. 바울이 신중하고 현명하게 피신함(6-9)

바울이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스스로가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다른 명예들을 활용할 기회를 가졌다. 앞장에서는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천부장에 의해 채찍을 맞는 것으로부터 그를 구해 주었고, 여기에서는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이 산헤드린에 의해서 정죄받는 것으로부터 그를 구해주었다. 우리가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듯이 그러한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방책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재판자들을 분열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한 부류가 그를 더욱 증오하면 할수록 그 반대 부류는 그를 더욱 위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1) 공회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6절).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들인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들 상호간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으나 재판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비교적 그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완고한 고집쟁이들이었고, 의식을 신봉하는 열성파들이었으며 동시에 영혼의 세계와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도래할 세상의 삶을 믿는 유대교회 신앙이나 신의 계시를 무시하는 자연신교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책들마저도 훌륭한 역사서나 율법서 정도로 받아들였으며, 다른 구약 성경의 책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보상과 심판도 부정하였다. 그들은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물질이외는 어떠한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도 육체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구약 성경에서 천사들에 대해 읽었을때, 그들은 그것외에도 그 천사들이 보냄을 받았던 자들의 환상속에서만 존재하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천사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해 오던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영혼들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였으며, 또한 인간과 짐승의 영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 사상자들이라고 자처하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사상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사악한 이론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훌륭한 산헤드린에서 일을 보게 되었는지도 도대체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두개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재능과 자산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직을 얻었고 그것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처럼 신을 모독하는 사람들이 유대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니 그 교회의 타락상은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의 의견 차이에 대해서 바울은 사두개인들을 거역하고, 바리새인들 편에 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 바리새인들이 올바른 한,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자처하였다. 바울은 바리새파와 기독교가 대치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바리새파를 반대하지만, 여기서처럼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대립하게 될 경우에는 바리새파를 고수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진리에 대해서도 결코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에 의한 판단은 타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핍박을 받은 진정한 이유는 그가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후에 그가 주장하였던대로(행 24:15;26:6,7), 그가 죽은 자의 부활의 소망에 대한 증거를 요구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3)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말은 법정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다(7절). 왜냐하면 이러한 바울의 말로 말미암아 사두개인들은 더욱 흥분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침착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본문은 이 상황을 '무리가 나누이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무리들은 바울에게 대적하여 외쳐댔지만, 지금은 서로를 대적하여 큰 소리를 질러댔다(9절). 그곳은 온통 수라장이 되고 말았는데, 그들은 이러한 소란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이 믿는 중요한 원칙들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설득은 공정한 논리로써 가능한 것이지 고함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4) 이러한 연유로 바리새인들은 바울의 편을 들었다(누가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9절)라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훌륭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 종교의 중요한 원칙들에 있어서도 자신이 정통파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게서 그를 죽이거나 구속할 어떤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뇨. 그러니 최소한 우리가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도록 그를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일찌기 그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던 가말리엘도 이와 같이 주장하였다(행 5:39).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명예가 복음의 적대자들에 의해서도 증언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복음의 순수함뿐만 아니라 복음의 우수함에 대한 고백은 진리의 전능에 의하여 때때로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에게도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라도는 비록 그리스도를 처형했을지라도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여기서도 바래새인들은 혹 바울이 천사로부터 천국의 사명을 띠고 파송된 자일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후에 대제사장들과 합세하여 바울을 기소하였다(행 24:1).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을뿐 아니라 때때로 복종하기도 했던 그러한 견해에 죄를 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리새인들 중에 적어도 몇 명은 바울에 대해 전에 그들이 가졌던 것보다는 나은 견해를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좀 더 호의적으로 대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될 것이다. 또한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그들의 열성이 바울로 인하여 보다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에 대한 열성으로 비약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더 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바울이 진심으로 사두개인들을 반대하는 자기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고수한다면,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빛을 따라 살아가는 자라고 관대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을 박해하기는 커녕 그를 변호하고 보호하려고 했을 것이다.

2.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함(10)

천부장의 배려와 처사는 바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불화의 원인을 던졌을 때, 그는 그들과 더 가까워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들의 밀고 밀리는 과정속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부장은 그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병사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구하였다(행 21:32;22:24).

바울이 처한 위험 : 바울은 자신의 옹호자들과 적대자들 사이에서 찢김을 당할뻔 했다. 한편은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려고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죽음으로 밀어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구원 : 본문은 이 상황을 '천부장은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10절)라고 전하고 있다.

3. 하나님의 보호하심(11)

천부장은 잔인한 사람들의 손으로 부터 바울을 구해냈다. 그러나 여전히 천부장은 바울을 가두고 있었다. 성은 진실로 위험으로부터 바울을 보호해 주었으나 동시에 그를 감금하는 곳이기도 했다. 즉, 성은 지금 죽음으로부터 바울을 보호하고 있으나, 동시에 바울이 더 큰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해물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날밤 바울은 자신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이며, 자신의 현재 처한 역경들이 무엇인가,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과 근심들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그때 주 예수께서 바울을 친히 방문하셨다. 본문은 그 모습을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11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가 누구이든지 주께서 우리 곁에 계셔준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고 명하신다. 그는 바울아 담대하라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충실한 그의 종들이 항상 용기백백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행위를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바울을 안심시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논법으로 바울을 격려하신다. 즉, 그는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11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이 단지 관행적인 위로의 말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을 격려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의도된 위로의 말씀이었다. 바울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역경속에서도 오로지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써 그리스도를 섬겨왔다. 바울은 여전히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울은 아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마치지 못했으므로 그는 그를 더 잘 섬기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와 인간의 영혼에 유익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만큼 바울을 낙담시키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특별한 환상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로마 여행을 갈망했고, 또한 그것을 계획해 왔다(행 19:21). 그래서 그는 '내가 거기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라고 말했다. 이제 감옥에 갇힌 바울은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결국 로마를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로마에 가게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셨다.

 

Ⅲ.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 23:12-35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의 살해 음모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된다.

1. 살해 음모의 계획 동기(12-15)

유대인들은 대중적인 소란이나 법적인 절차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이라는 야만적인 수단에 의지하기로 하였다.

(1) 바울의 암살을 도모한 자들 : 그들은 어떤 유대인들이었다(12절). 그리고 그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사십여 명이었다(13절).

(2) 바울의 암살 음모가 행해진 시기 : 그때는 낮이었다. 왜냐하면, 밤에는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새자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사십여 명의 무리가 바울을 암살하려는 흉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앞지를 수는 없었다.

(3) 암살 음모의 구체적 내용 : 이 사람들은 동맹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살해하기 위해 서로 지지하고 힘을 합했으며 도움을 나누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기에 그를 해치려는 이러한 극악무도한 음모를 세우기까지 되었는가! 그러나 진리와 정의의 법도는 너무도 신성하고 강하기 때문에 결코 악의와 편협함이 그것을 뚫고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4) 음모에 임하는 그들의 확고한 결의 : 그들은 바울을 살해하지 못할 경우 자신들에게 가장 무서운 저주를 내려달라고 빌면서 저주 아래에 그들 자신을 결속하였다. 또한 그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맹세했다. 우리는 그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본문에서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친 적이 없는 선한 사람을 죽이려고 계획하는 것은 가인의 길을 따르는 행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이 마치 사소한 일인 것처럼 간단히 처리해 버리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악행을 품고 있거나, 그 악행을 실행하고자 하는 것도 사악한 것이지만, 악행을 저지르기로 약속하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일뿐 아니라 회개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서로 결속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에 대하여 저주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자신들의 일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의 영혼까지 저주받게 하였다. 그들은 이 일을 순식간에 해치우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모독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우리는 내일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주께서 원하신다면 이라는 단서를 반드시 부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금한 사항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 저주스러운 올무에 얼마나 자신들을 얽어매고 있는가! 만일 그들이 이 일을 계속 진행시켰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그 일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 저주를 원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이 그런 일을 하든 못하든 하나님에게 저주 받기를 원하고 악마가 데려가기를 구하는 저들의 말은 바로 지옥의 언어 그것이다. 그들은 이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열성을 다 보였다.

(5) 바울을 살해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사용한 방법 : 그들은 바울이 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울을 좀더 상세히 조사하려고 하니 그를 공회로 데려가 달라고 총독에게 요청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에서 공회로 가는 길목에 잠복하고 있다가 그를 죽임으로써 바울에 대한 모든 논쟁을 종결 짓고자 하였다(14,15절). 그래서 그들은 산헤드린의 주요 회원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 악한 계획이 허락되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커다란 저주 아래에 그들 스스로를 결속하여 바울을 죽일때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14절)고 맹세하였음을 부끄러움 없이 말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고, 그들의 도구가 되어줄 것이며 또한 대제사장들이 천부장에게 '바울에 관해서 좀더 확실히 알고 싶은 것이 있다'라고 말해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대제사장에게 요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대제사장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그 계획을 받아들였다. 대제사장은 악한 음모를 꾸민 그들을 꾸짖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제안을 지지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 음모가 자기들이 미워하는 바울을 죽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 음모가 탄로난 경위(16-22)

하나님께서는 그 음모가 밝히 드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도록 섭리하고 계셨다.

(1) 그 음모가 바울에게 발각된 경위(16절) : 그 음모를 바울에게 전해준 사람은 그의 생질인 한 젊은이였다. 그는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그가 들은 것을 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법으로 또 어떤 연유에서 그 얘기를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속에 숨겨진 일들을 밝히시고 드러내시는 방법들을 많이 알고 계신다.

(2) 그 음모가 천부장에게 발각된 경위 : 바울은 그의 온유한 품행으로 말미암아 그를 주시하고 있던 관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다. 따라서 바울은 백부장을 청하는데 무리가 없었으며, 백부장 또한 그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였다(17절). 바울은 백부장에게 이 젊은이를 천부장에게 소개해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게 해 달라고 쾌히 요청하였다. 백부장은 바울의 청을 쾌히 승낙하였다(18절). 그래서 백부장이 친히 천부장에게 그를 데리고 가서 이 젊은이가 그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천부장에게 '죄수 바울이(이것은 당시 바울의 칭호였다.)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말이 있다 하며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라고 말하였다. 가련한 죄수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은 그들에게 물질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선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내가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너는 나를 위해 심부름을 해 주었다라는 말은 내가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너는 내게 와 위로해 주었다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친숙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때, 그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이 백부장은 이와 같은 작은 성의로써 바울이 생명을 구하는데 공헌하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없는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좋은 말을 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천부장은 아주 겸손한 태도로 그 정보를 들었다. 천부장은 청년을 격려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19절). 그것은 그가 당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의 말을 잘 경청한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였다. 본문에 천부장이 청년의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비천한 사람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시키기 위해서이다.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의 조카에게 베푼 이 친절은 본문에 기록되어 그의 명예가 되었다. 천부장이 겸손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그의 인격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부장은 조용히 바울의 조카에게 다가가서 '네가 나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었다(19절). 그래서 그 청년은 그에게 그가 전해줄 내용에 대해 신속하게 답변했다.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쫓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20,21절). 천부장은 청년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여 보냈다. 그는 '네가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하였다(22절). 서로 의논한 일에 대하여 책임질 수 없는 자들은 함께 일하는데 적합한 자들이 못된다.

3. 음모의 좌절 경위(23-35)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는 사악한 음모가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가를 깨닫고, 또한 그들이 바울에게 해를 가하려는 계획에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 일에 휘말려들어 그들의 동조자가 될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닫고는 곧 그들의 손이 미치기 전에 신속히 바울을 멀리 피신시키고자 결정하였다. 천부장은 만일 그가 바울을 그의 성 안에 그대로 머물게 한다면, 그들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시키지 않을까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천부장은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바울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바울은 그러한 대우를 받을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이 이 암살 음모를 알았을때, 그들이 그 일을 지지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우울한 사실인가. 그러나 로마의 천부장이 암살 음모에 대해 들었을때, 그의 정의와 인간애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감정에서 전적으로 이 계획을 막고자 하였다.

(1) 천부장은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로마 군인들을 상당수 동원하여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신속히 데려가라고 명령하였다. 생각해 볼때 천부장은 바울을 석방하여 그 나름대로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을 떠나도록 조처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바울을 한 가지도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29절). 그러므로 그는 바울의 생명을 보호할때 보여주었던 그의 친절함을 바울의 자유를 위해서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바울을 대단히 증오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백부장 둘을 불러(23,24절), 바울을 호송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가이사랴로 가기 위해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 그리고 창병 이백 명을 대기시켰다.

1) 이렇게 함으로써 천부장은 제멋대로 구는 무질서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엄중한 행렬에 두려움을 느끼게 할 계획이었다. 천부장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바울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호위를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충족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위는 오로지 천부장의 염려에 의한 것이었다. 천부장은 그를 중요한 인물로 대우해서 신중하게 호송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매인 바 된 사실이 오히려 각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빌 1:13). 그러므로 그 위대한 전도자는 비록 죄수의 신분에 처하더라도 그 위대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적들이 그를 미워하고,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로마의 한 천부장이 그를 보살펴 주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두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①바울에게 일신상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는 바울의 편의를 위해 그가 타고 갈 짐승을 준비하라고 명하였다. 만일 유대의 박해자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라고 명령하였다면, 그들은 바울을 걷게 하거나 그곳까지 마차로 가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부장은 바울을 신사처럼 대우하여 그를 좋은 말에 태워 가라고 명령한다.

②그는 바울의 안전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였다. 천부장은 로마 병사들에게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무사히 데리고 가라는 엄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의 최고 실권자는 천부장이었지만, 유대인들에 관한 모든 민사적인 일에 있어서는 벨릭스가 최고 실권자였다. 로마 역사가들은 벨릭스에 대하여 많은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그는 자수성가 하여 유대의 총독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 가련한 바울은 벨릭스의 재판을 받도록 넘겨졌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손아귀에서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2) 천부장은 '밤 세시' 즉 해가 진후 세 시간이 지나서 바울을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그것은 서늘한 밤에 행군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리라고 생각된다.

(3) 천부장은 이 지방의 총독인 벨릭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에 대한 모든 문제를 벨릭스에게 이전했다.

1) 천부장의 총독에 대한 문안인사(26절) : 그는 벨릭스를 총독 벨릭스 각하라고 불렀는데, 이 칭호는 그에 대한 최대의 존칭이었다. 그 다음 천부장은 그에게 인사말을 보낸다.

2) 천부장이 바울의 사건에 대하여 총독에게 전한 정당하고 공정한 설명

①그는 바울을 유대인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자라고 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가 죽이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벨릭스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미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27절).

②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인이므로 보호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할때,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로마 시민을 위하여 한 자신의 행동을 로마 총독에게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③그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미워하는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 원인을 알아내고자 적절한 방법을 취했는데, 그것은 그가 바울을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28절). 즉, 거기서 그는 바울을 좀 더 조사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거기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6절)에 관한 저들의 율법의 문제로 고발당하였음을(29절) 알았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그들 나름의 종교를 믿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결코 로마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공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종교적 이유로 분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④천부장이 지금까지의 사건을 조사해 본 바로는 바울을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다(29절).

3) 천부장이 바울의 사건을 벨릭스에게 넘긴 이유(30절)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죽이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곧 이 사람을 당신께 보냅니다. 공소자들도 이 사람을 뒤따라 가 그들이 왜 그를 대적하는가를 당신 앞에서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내가 재판관이 되기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께 의뢰하니 선처를 바랍니다."(30절)

(4) 바울은 이렇게 해서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 병사들은 한밤중에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안전하게 빼내어 그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한 음모자들을 따돌렸다. 만약 그들이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사악한 맹세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제라도 자신들의 경솔함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자가 굶어 죽는다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동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안디바드리에 도착했다. 그곳은 가이사랴로 향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31절). 그곳에서 이백 명의 보병과 이백 명의 창병은 성에 있는 그들의 막사로 되돌아갔다(32절). 왜냐하면 위험 지대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강한 호위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병만은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계속 호송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울을 아주 신속하게 호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5) 바울은 벨릭스의 손에 넘어갔다(33절). 관원들은 편지와 함께 바울을 벨릭스에게 양도했다. 바울은 결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사귀거나 친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난을 통해 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총독은 그 죄수에게 어느 영지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 물음을 통해 바울이 길리기아 태생의 사람임을 알았다(34절). 총독은 바울에게 신속한 재판을 약속했다(35절). 그래서 그는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고 말했다(35절). 그런 연후에 총독은 바울을 감금하라고 명령했다. 즉 그는 그 죄수를 헤롯궁의 재판소에 있는 감옥에 수감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 해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모함 ( 23 )

공회앞에 선 바울은 담대하였습니다. 그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기때문에 더욱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바울을 향한 음모는 한층더 살기를 더해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을 지어 결의하고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천부장은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로 철저한 경비를 갖춰 보내게 됩니다. 이 일로 바울은 헤롯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1. 바울의 두번째 변명

1) 산헤드린 공회앞에 선 바울

산헤드린 앞에 끌려나온 바울은 진술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매우 진솔하게 공회앞에 진술했습니다. 바울은 회개하기 전이든, 회개한 후이든 자기가 알고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때로는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큰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셨기때문에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의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변명이 못마땅한지 공정한 재판을 무시하고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대제사장을 향해서 '회칠한 담'이라고 부르며 항의했습니다. 곁에 섰던 사람들은 대제사장을 향한 바울의 말에 충격을 받은듯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항의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회칠한 담'이란 겔13:10-1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여기에서, 회칠은 담의 무너지려는 취약한 상태를 가릴 수는 있지만, 폭풍 등과 같은 강풍에는 조금도 힘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의 말에 대해 율법을 따라 사과했습니다.

a.양심(롬2:15)

b.존경받는 통치자(롬13:1)

2)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분쟁

바울은 잠시 끊겼던 진술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공회원들의 태도로 보아 자신의 진술이 편견없이 공정하게 거론될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바울은, 자기가 기소된 이유가 부활신앙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공회원들을 양분시켰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산헤드린내의 소수파이기는 하지만 영향력이 컸던 바리새인들은 부활의 교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상한 경험을 겪었다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분쟁이 시작되었고 어떤 결정이 내려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을때 천부장은 다투고 있는 두 파에서 바울을 빼내어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갔습니다.

a.바리새인(마15:6)

3) 주님의 위로

바울은 일이 어떻게 진행이 될지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고린도에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셨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그를 지키실뿐 아니라 로마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곁에 서신 주님은 바울에게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a.격려(사41:13)

b.증거(시66:16)

 

2. 바울의 살해 음모

1) 유대인 40인의 동맹

다음날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기 위해 당을 지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노라고 결의하며 맹세했습니다. 그들의 동맹에 가담한 자가 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바울을 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거짓 공회를 열게할 것을 음모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열성당원들은 바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서 산헤드린 공회와 연합하여 바울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다음, 천부장에게 그를 알아본다는 구실로 로마인들의 요새밖으로 유인해내어 습격하여 살해하려 했던 것입니다.

a.악한 맹세(막6:23)

b.핍박(마5:11)

2) 바울의 생질과 천부장

이 과격파 유대인들의 음모는 바울의 생질에 의해 탄로가 났습니다. 바울의 생질은 이 사실을 바울에게 알렸습니다. 또한 바울을 통해 이 사실이 천부장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천부장은 신속히 행동했습니다. 바울이 안토니오 요새에 남아있는한 이 로마 시민의 안전을 자기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다고 느낀 그는 그의 총사령관이자 유대의 로마 총독인 벨릭스에게 이 책임을 넘겨야 했습니다. 벨리스는 나이사랴에 머물러 있있는데, 바울에게는 이 예루살렘보다 그곳이 더 안전하리라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그날밤 470명의 무장 군인들에 의해 약 102km 떨어진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습니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송사당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또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기 때문에 총독에게 보낸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냈습니다.

a.총독(눅20:20)

b.보호하시는 섭리(시57:1)

3) 총독 벨릭스

벨릭스는 A.D.52-59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또한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궁은 당시 총독의 본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벨릭스는 원래 비천한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그와 형제 팔라스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모친인 안토니오 사저의 노예였는데, 안토니오가 죽은 후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이후 팔라스는 로마 제국의 행정부의 장관으로서 강력한 권력과 부의 지위로 부상했고, 이 형제의 영향력 아래 벨릭스는 대개 로마의 기사 계급에만 주어졌던 총독의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튿날 바울은 루시아의 편지와 함께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총독이 편지를 읽고 그의 영지를 물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태생임을 안 벨릭스는 송사한 사람들이 오면 바울의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그를 헤롯궁에 머물게 하고 그를 지키게 했습니다.

a.송사(고전6:7)

b.헤롯궁(마27:27)

 

결론

바울은 동족의 몰인정과 복음에 대한 배타, 육체적 피곤, 그리고 기독인들의 냉담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울을 격려해 주셨고 로마행을 권고하셨습니다. 그후에도 유대인의 음모와 여러 위험들이 있었지만 바울은 평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밤에 가이사랴로 향하는 노중에서 그는 평안의 잠을 즐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 핵심

23:1-11

산헤드린에서 변론하게 된 바울은 초반부터 공회원들의 노여움을 샀다. 이때 그는 부활 논쟁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벨릭스(23:24)

본래 노예 신분이었으나 글라우디오 황제때 자유민이 되었으며, 황제의 총애 덕분에 제10대 유대 총독으로 재임(A.D. 52-60년경)한 자이다. 아그립바 1세의 딸 드루실라(24:24)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내로 취한 부도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가이사랴에 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발생했던 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잉 진압한 탓에 네로 황제 당시 로마로 송환되어 처벌받았다고 한다.

 

# 묵상

바울이 들은 음성 ( 23:11 )

바울은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로마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고난받는 바울을 더욱 강하게 무장시켜 주시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 ( 23:12-15 )

유대인들은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과 육체를 스스로 멸시하고 말았습니다. 즉 합법적이지도 않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 계획을 세우고 자신들의 몸을 저주의 올가미에 얽어 놓은 것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내어달라고 천부장에게 청하여 데리고 내려오면 바울이 가까이 오기전에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바울은 영문안에 있어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와같은 비열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들이 이처럼 치사한 방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유대인들의 제안을 그들이 들어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대제사장이 만만하고 정의롭지 못한 존재로 여겨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음모의 실패 ( 23:16-21 )

바울의 생질이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듣고 바울에게 알리자, 바울은 이를 천부장에게 알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천부장은 사태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보낼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주둔한 600명의 군사 중 300명을 동원하여 바울을 이송한 것으로 보아 천부장이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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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변론 22:1,2

바울은 탄복할만한 침착성을 가지고 설교에 임했다. 그는 공포에 위압당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평온했으며 침착했다. 그는 어떤 격정도 표출하지 않았고 어떠한 욕설도 퍼붓지 않았다.

1. 바울의 정중한 경칭(1)

부형들아…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바울은 그들에게 '부형들아'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그의 변명을 듣고 그것에 따라줄 것을 기대했으며 그들에게 인도적인 정신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일반인들을 향하여는 형제라는 칭호를 제사장들을 향하여는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그들을 이같이 칭함으로써 자신이 그들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아부해서는 안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하며,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거스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이 말은 충분히 타당하고 근거있는 요구였다. 왜냐하면 고소당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변론한 권리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2.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청중들(2)

그는 히브리 방언으로 말했다. 히브리의 방언은 유대인들의 대중 언어였다. 당시의 히브리어는 순수한 구약 시대의 히브리어만이 아닌 시리아어의 히브리 방언이었다. 바울이 히브리 방언을 사용한 것은 동족인 유대인에 대한 그의 한결같은 경의의 표현이었으며 이로써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바울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의 히브리어 진술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다. 저희가 그 히브리어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2절).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는데(행 21:37), 이제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히브리어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로써 천부장과 유대인들 모두는 그에 대하여 낫게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현자와 선량한 사람들은 단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멸시를 당하곤 한다.

 

Ⅱ. 회개하기 전의 자신의 행적에 대한 바울의 진술 22:3-21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천부장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러한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가 그들의 율법과 성전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있다.

1. 바울의 혈통과 교육(3)

바울은 유대민족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즉 나는 너희 민족의 한 사람이며 너희 민족과 한 동족이다.

(1) 그는 유명한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그 도시의 자유민으로서 출생하였다. 이러한 진술은 한낱 사소한 자랑거리에 불과하나 당시 바울을 무자비하게 유린한 사람들에게는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2) 그는 지식교육과 진보적인 교육을 받은 자였다.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 학문의 중심지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양육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관해 무지할 수 없었으며,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업신여기는 자로 간주될 수도 없었다.

(3) 그는 젊었을때 매우 진취적이고 유망한 유대종교 교사였다.

첫째, 그는 유대교에 박식한 교사였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학문의 도를 닦았으며 거기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율법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개념상의 혼동이나 어떤 실수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고사(故事)와 전통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또한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 중 유대교에 대해 바울이상으로 잘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둘째, 바울은 유대의 행동적인 교사였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3절). 유대교 교리에 해박한 사람들 중 대부분 종교 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기를 원했으나, 바울은 한 랍비로써 상당한 열성주의자였다. 여기서 바울은 그의 청중들을 다음과 같이 칭찬한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이러한 바울의 칭찬이 결코 유대인들의 분노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기도하셨듯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희의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2.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박해를 설명함(4,5)

바울은 초기에 지독하게 사나운 박해자였다. 바울이 이 사실을 말한 이유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변화가 매우 자명한 것임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즉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였을때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그 갑작스런 변화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지녔었다. 바울이 이같은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을 권유하여 격려함으로써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신성 모독자인 동시에 박해자였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박해자였을 당시의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1) 바울은 극도의 적의를 품고 기독교를 증오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4절). 또한 그는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살기가 등등하였으며(행 9:1), 죽일 때에 가편 투표를 하기도 하였다(행 26:10). '바울이 이 도를 핍박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말은 그가 목숨을 내걸고 기독교를 반대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수호하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2) 바울은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김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해산시키며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이 결박당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투옥시킨 자신의 죄과를 규탄하고 있으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투옥시켰던 사실에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표했다.

(3) 바울은 산헤드린과 대제사장, 그리고 고위층 장로들로부터 이 새 종파를 탄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었다(5절). 다메섹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그들은 그 유대인들을 탄압하기로 결정했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에 바울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공문과 함께 바울을 파견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메섹의 유대인들을 형제라고 부른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는 일에 바울을 협조하도록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그리스도인들은 형벌을 당함으로써 기독교로부터의 탈당이 강요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공포심을 조장할 목적으로 처형당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현재의 당신들처럼 처음에는 그러한 일에 종사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박해자의 심정을 알고 있으므로 당신들을 동정한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나를 변화시켰듯이 당신들에게도 개종자의 심정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3. 바울이 개종하게 된 경위(6-11)

바울의 개종은 어떤 자연적이거나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었으며, 그 일이 되어진 상황은 그의 변화를 충분히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변화를 비난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행9장) 자신의 개종이 온전히 하나님의 행위였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1)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를 사로잡으시기 직전까지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여행을 하여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까지만해도(6절) 오직 그에게 부여된 잔혹한 임무의 집행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2) 무엇보다도 바울을 놀라게 한 것은 하늘로부터의 빛이었다. 그 위대한 빛은 갑자기 바울을 둘러 비추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과 한낮의 햇빛 같은 그러한 밝은 빛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만이 나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빛은 정오 노상에서 바울을 비추었는데, 그 빛이 너무 밝았으므로 바울은 땅에 엎드러졌으며(7절),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엎드러졌다(행 26:14).

(3) 무엇보다도 바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두렵게 여기도록 한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들려왔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8절)는 대답이 들렸다.

(4)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의가 제가된다. 즉 이 빛과 음성이 어떠한 방법으로 임하였기에 바울에게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그와 함께 여행한 자들에게는 일으키지 못하였는가? 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동료 여행자들도 참으로 그 빛을 보았고 두려워했다고 밝힌다. 비록 그 빛이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해도, 그들은 바울에게 전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겨난다. 따라서 그 변화는 말씀을 직접 들은 자에게 임했을뿐 그 빛을 보기만 했던 자들에게는 임하지 않았다.

(5) 바울은 그가 이처럼 놀란 후에 자신을 온전히 성령의 인도에 의탁하였음을 그들에게 확증한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하늘에서 들여온 같은 음성이 나를 그릇된 길에서 멈추게 하시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그리고 그는 곧장 다메섹으로 가서 지시를 받았다.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10절).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는 환상이나 하나님의 음성, 또는 천사의 출현과 같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것은 단지 성서와 현장 목회자들을 통한 일반적인 계시를 소개하거나 확증할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여기서 그 음성은 바울에게 그가 행할 일을 말하지 않고 다만 다메섹으로 향할 것을 명한다. 거기서 그에게 지시가 주어질 것이다.

(6) 바울은 자신에게 비추인 그 빛의 위대함을 증거함으로써 그의 눈에 미친 순간적인 영향에 관하여 그들에게 전한다. 나는 그 빛의 광채로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다.(11절). 그 빛은 순간적으로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정죄받은 죄인들은 어둠의 권세에 의해 눈이 멀어 영원한 장님이 된다. 그러나 자각하는 죄인들은 본문의 바울처럼 어둠이 아닌 빛에 의해 눈이 멀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처럼 실명하지 않았으므로 바울을 손에 이끌고 도시로 인도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그의 영안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장님인가?(요 9:40)라고 말했다. 바울은 육체의 눈이 멀게 되자 자신의 영적 실명상태를 인식하게 되었다.

4. 바울이 자신의 변화를 확신하여 아나니아로부터 지시 받음(12-16)

(1) 본문에 제시된 아나니아란 인물 : 그는 유대 민족이나 유대교에 대해 전혀 편견을 갖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진일보한 자였다. 그는 다메섹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바울이 친구로서 교제를 나눈 최초의 신자가 바로 이 아나니아였다.

(2) 바울의 눈을 즉시 치유한 아나니아(13절).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와서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그에게 왔음을 납득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바울의 곁에 서서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고 말했다. 이 말과 함께 능력이 나옴으로써 바울은 즉시 시력을 회복하여 아나니아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가 전하는 지시를 받을 수 있었다.

(3)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주 예수께서 그 누구보다 월등하게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첫째, 바울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현현(14절) :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신 이 능력있는 부르심은 특별한 선택의 결과이다. 여기서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음을 암시한다.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그의 뜻을 알게 하고 또한 그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즉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뜻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알게 되었음을 뜻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그분을 지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은총이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나, 바울은 그 자신의 오른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스데반이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저 의인으로 칭해졌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기 위해 선택하신 자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이해하며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해 바울을 선택하신 하나님(15절) :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즉 유대인과 이방인들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본문과 26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개종 경위를 이처럼 상술한 것으로 보아 그가 다른 사람들의 개종을 권유하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자주 반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것에 관해 말했으며,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 행하실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4)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로써 주 예수와 결합될 것을 권한다(16절). 본문에는 '일어나 세례를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야 한다.

첫째,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증되는 위대한 복음의 특권은 죄의 사면이다.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당신의 죄에 대한 용서의 위로를 받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입으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의롭게 되고 성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둘째,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여되는 위대한 복음의 의무는 주의 이름 곧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즉 이 말은 그분을 우리 주님과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범한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서둘러 세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맺는 계약은 필요한 일이며, 결코 지연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을 지금 실행하지 않고 뒤로 미루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5.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전파의 소명을 받음(17-21)

이 사실은 그들이 바울에게 심히 노하게 된 커다란 이유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명이 신성한 근거로부터 나온 것임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1) 바울이 자신의 나아갈 방향과 자신의 임무를 지정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을때, 그는 이방인의 전도 임무를 수행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일컬어진 성전에서 기도하였다. 그곳은 만민의 기도처였을 뿐만 아니라, 만민을 위한 기도처였다. 성전에서 드린 바울의 기도는 그가 성전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음을 증명한다. 바울은 후에 이러한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그 사명을 기도중에 받았다는 사실을 회상할 때 크나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2) 바울은 환상가운데서 그 사명을 받았다. 비몽사몽 간에(17절). 그는 이런 몽환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18절). 그는 이 상황을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전하고 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이방으로 가라는 사명을 주시기 전에,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어떤 선한 일을 하려는 생각은 전혀 헛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만약 바울이 이방으로 파송된다면, 그에 대해 힐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문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에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18절).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일 자들이 누구인지 미리 아시는 것처럼 그것을 거부할 자들이 누구인가도 미리 아신다.

(4) 바울은 예루살렘에 남아있기를 거듭 간구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자신의 회심전의 행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변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바울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을 위해서나, 주님을 위해서나 모두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19,20절). 그러므로 바울은 "주여 내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가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또 사람들을 가두고 또한 각 회당에서 때린 것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특히 스데반의 경우를 들자면, 그가 돌에 맞을때 내가 그 곁에 서서 그의 죽음을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들 사이에 나타나 스데반이 전파하고 그 때문에 박해받은 그 가르침을 전한다면 분명히 그들은 증언을 받아들일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그들이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를 변절자로 낙인 찍어 더욱 격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5) 이런 근거로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바울의 청은 기각되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1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를 통해 간구하는 바로 그것으로가 아니라 더 나은 어떤 것으로 그들의 기도에 은혜로운 응답을 주신다.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사역의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며, 설령 그 지시가 사역자들 자신의 생각과 어긋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예루살렘에서 전도자가 되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포부였으므로,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더 크게 쓰시려고 계획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들을 위해 좋은 일을 도모하신다. 바울이 내가 너를 보내리라는 하나님의 사연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이방인들 사이에 복음을 전파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내신다면, 그의 성령이 바울과 함께하심으로, 바울이 행하는 사역의 성과를 바울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바울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 파송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바울의 행동에 대해 분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며 바울은 하늘로부터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의해 이방인들 사이에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Ⅲ. 바울의 변론에 대한 군중들의 분노와 공회에 넘겨진 바울 22:22-30

바울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론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에는 개의치 않고, 그가 더이상 말을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이제까지, 그들은 바울의 변론을 인내심을 가진 상태로 정중하게 경청했었다. 그러나 그가 이방인에게 파송된 사실을 말하자, 그들은 더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말을 듣자 인내심을 상실하고 모든 예의범절과 공정성을 망각하고 말았다.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이방인들도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그에게 대항하고 있는 무리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분노를 사고 있는지 보게 된다.

(1) 그들은 바울의 말을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소동을 피웠다. 성난 사람은 조금만 비위가 상해도 화를 내게 마련이며,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전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2) 그들은 바울을 살려 둘 가치가 없는 자라고 떠들며 소란을 피웠다. 그들은 격양된 목소리로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이와 같이 그 세대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의 짐으로써뿐 아니라 그 세대에서 저주받은 사람들로 간주되어 왔었다. 여기서 사악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살려둘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바울을 제거함으로써만 세상의 짐을 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그들은 바울과 천부장에게 대항하여 미쳐 날뛰었다(23절). 그들은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자들처럼 옷을 벗어던지며 악을 쓰며 외쳐댔다. 이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자들이 자신의 옷을 벗어던졌던 것과 같이(20절), 그들도 바울을 돌로 칠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바울이 신에 대해 모독적인 발언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옷을 찢었고, 바울의 변론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 그들의 이런 모든 행동은 자신들이 바울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분노하고 격분하는지를 천부장에게 시위하고자 함이었다.

(4) 천부장은 바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를 성으로 데려가도록 명령하였다(24절). 감옥은 때로 성난 군중들로부터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아직 바울이 죽을 때가 아니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보호할 사람을 세우셨다.

(5) 천부장은 바울에게 태형을 명하였다.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여 심문하라 한 대(24절). 이러한 천부장의 처사는 공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불평분자들 중 몇 명을 가려내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정당한 변론을 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그들이 뒤집어 씌우려던 죄가 무엇인지 심문했어야 했다. 즉 그는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는지를 바울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소동을 피운 그들에게 물어야 옳은 일이었다. 비록 죄를 범한 자라 하더라도 자백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그가 결백할때, 자백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친 듯이 날뛰는 폭도들이 바울에게 대항하여 고함만 질러댈 뿐, 그들이 왜, 혹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조차 말하지 못하는데 바울을 채찍질하는 것이 정당하고 타당한 일이겠는가?

(6)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그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종류의 모든 처벌과 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사들이 가죽 줄로 바울을 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백한 사람에 대한 그들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고함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로마 시민인 자신에 대하여 그들의 처사가 위법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25절). 바울의 이런 말투는 자신이 처한 위기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부당함 속에서도 전혀 분노와 공포의 기색이 없이 오히려 마음의 거룩한 평정과 안온함을 향유하는 선량한 그의 면모를 여지없이 나타내 주고 있다.

(7) 천부장은 이 사실을 듣고 놀랐으며, 겁에 질렸다. 그는 바울을 방랑중인 애굽인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하고 고결한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멸시를 당하고 있는가! 천부장은 자신을 수행하는 부하장교인 백부장을 거느리고 있었는데(행 21:32), 그들 중 한 명이 바울이 로마인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보고했다(26절). 어찌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그들 모두가 로마시민의 특권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부장은 직접 바울의 입을 통해 그가 로마인이라는 사실의 진위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는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27절). 즉 네가 과연 로마시민의 특권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바울은 '그러하다'라고 대답했다. 천부장은 이 문제에 대해 바울과 의견을 교환했고, 이를 통해 로마시민으로서 바울이 갖는 특권이 천부장 자신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천부장의 시민권은 돈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그가 나도 로마의 시민이지만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말하자(28절), 이에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로다'라고 응답했다. 바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당한 수단과 방법을 다 해야하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의 고문은 즉시 중지되었다. 곧 채찍질로 그를 심문하도록 지시받은 자들이 그에게서 물러갔다(29절). 천부장은 그가 바울을 결박하고 그를 때리도록 지시했었기 때문에, 그가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자신들의 악행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인간을 두려워하며 인간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악행을 그만두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법과 재판관이 베푸는 은덕과 그것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것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일반적으로 공평하고 공정한 관례로 유지시켜 줌으로써 사악한 인간들의 분노를 억제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권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은덕을 마땅히 그들에게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날 천부장은 바울을 산헤드린 회의 앞으로 데리고 갔다(30절). 천부장은 먼저 그의 결박을 풀었다. 그런후 그는 바울의 문제가 종교적인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모든 회원들을 동시에 소집했다. 군인이었던 이 로마인은 바울을 폭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금시켜 놓았다가 공회에 재판을 청구했다. 우리는 천부장이 생각하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라면 바울을 공의로 대하고 그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오직 그의 안전을 고려하여 그를 공회로 넘겼다는 소망에 찬 상상을 해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법정은 공의의 원칙에 의해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천부장이 바울을 공회에 넘긴 것은 단순히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본문은 이것을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30절).

  

# 해설

바울의 능력있는 변론 ( 22 )

본장은 바울이 폭도들 앞에서 행한 변명과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유대인으로 출생한 사실, 그의 배경,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사실, 율법에 대한 자신의 열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도를 핍박한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일어난 자신의 회개 경험을 자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에게로 가야할 자임도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자기 변명

1) 바울의 열심

바울은 히브리 방언으로 모인 무리를 향하여 자기 변명을 시작했습니다. 회중은 순간 조용하여 바울의 말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낳고 그 성에서 자랐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율법에 열심인 사람처럼 오늘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자였습니다. 바울의 열심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믿는 자를 결박하여 누구든지 옥에 넘겼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그는 율법에 완전히 결속되어 있었으며 기독교 박멸에 매우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a.기독교를 핍박함(행8:3)

2) 다메섹에서의 회심

바울의 열심은 대제사장들과 모든 장로들이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부터 공문을 받아가지고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형벌을 받게 하려고 다메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바울을 비취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이었습니다. 바울은 두려움 속에서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물었고 그는 그 음성이 자신이 그렇게도 열심히 핍박했던 예수의 음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자들에게는 음성이 아닌 빛으로만 그 사건을 경험케 했습니다. 그 일로인해 바울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함께하는 자들에게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a.그리스도의 음성(계3:20)

b.빛의 광채(히1:3)

3) 아나니아의 방문

바울은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에게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듯이 조용히 주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을 부르신 주님은 또다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주님은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에게 임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울을 찾아왔고 형제 바울에게 안수하여 그를 다시 보게 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바울의 부르심과 사명을 알게하는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a.순종(롬12:2)

 

2.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음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모든 사람앞에서 증거해야 하는 증인임도 알았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은 이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보았던 환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바울이 회심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의 유대인들이 그가 박해했던 일과 스데반을 처형할때 그가 했던 일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겪은 일과 그의 증언에 대단한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었을때, 주님은 그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바울의 증언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사명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a.환상(행16:9)

b.이방인의 개종(시22:27)

 

3. 로마 시민인 바울

1) 유대인의 소동

성전 바깥뜰에 운집해 있던 무리들은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그의 사명을 말하기 전까지는 대단히 흥미를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명에 대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반감과 분노가 되살아난 것입니다. 더이상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자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던지며 티끌을 공중에 날리고 고함과 흥분된 몸짓을 나타냈습니다.

a.시기(막15:10)

b.분노(전7:9)

2) 목숨이 위급함

상황이 갑자기 악화되자 천부장은 당황해서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게 했습니다. 그는 바울에 대항해서 일어난 그 분노에 대해 무언가 알 필요가 있었지만 군중들의 일관성 없는 고함소리로는 아무 사실도 알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자 천부장은 바울을 심문하기로 결정하고 채찍질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증인을 고문하는 것이 로마의 오랜 정책이기는 했지만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고문을 시작하는 방법은 로마 시민에게는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채찍질을 당하기 위해 매어 달렸을때 백부장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이라고 밝히며 항의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채찍질은 살인적인 고문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문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a.채찍질(갈6:17)

3) 로마 시민권

백부장이 바울의 말을 전하자 천부장이 즉시 나섰습니다. 바울은 난폭한 취급을 받은 이후라서 로마 시민처럼 보이지 않았고, 더구나 천부장은 경험상 로마 시민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지를 알았던 까닭에 바울의 말에 의아해 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때는 로마 시민권의 매입이 가능했습니다. 정부 관리들은 이 특권을 팔아서 받은 뇌물로 사복을 채웠던 것입니다. 천부장과는 달리 바울은 부모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이에 천부장은 자기가 지나쳤음을 깨닫고 이후로는 적절한 예우로 바울을 대했습니다. 이제 그는 엄정한 법의 절차를 따라 처리해야 했기때문에 그 다음날 유대 산헤드린 공회를 명하고 바울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a.로마 시민권(행16:37)

 

결론

바울의 소명과 회개,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의 택함은 그를 담대히 유대인들에게 증거케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사역에서 이 소명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죽음의 채찍질 앞에서도 담대하며 지혜로운 바울의 모습에서 한 전도자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 핵심

22:1-21

체포당한 바울이 군중앞에서 행한 변론이다. 그는 자신이 이방 전도 여행에 나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로마 시민권(22:25-29)

로마법에 의하면 적법한 절차없이 로마 시민권자를 체포, 구속, 매질하거나 수갑이나 차꼬를 채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그외에도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는 많은 혜택을 누렸다. 당시,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 첫째, 날 때부터 세습받는 경우로서 바울이 이에 해당했다. 둘째, 본문의 천부장처럼 돈을 주고 사는 경우이다. 셋째, 로마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경우이다.

 

# 묵상

박해자였던 바울 ( 22:4 )

바울은 원래 그리스도의 도를 핍박하여 그 도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 될만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정작 회심하였을때는 누구보다 큰 일을 감당하는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만난 예수님 ( 22:7-11 )

다메섹 도상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핍박받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핍박받은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홀로 세상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함께 겪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 22:12,13 )

아나니아는 바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박해자 바울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피하려 했으나 환상을 본후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었음을 알고 바울이 눈을 뜰 수 있도록 안수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지시 ( 22:18-21 )

하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않을 것을 아시고 바울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단순한 이유외에도 바울을 지키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본문 말씀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불리워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에게 항의한 바울 ( 22:25 )

바울은 자신을 신문하려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중대한 위기에 처했을때에는 이 권리를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은 재판을 받지 아니하고는 절대 채찍으로 때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채찍은 가죽에 짐승의 뼈를 박았기 때문에 살이 찢기고 심하면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공회앞에 세워진 바울 ( 22:30 )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안 천부장은 결박을 풀고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과 온 공회란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키는데, 천부장은 이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이므로 유대교 최고 사법 기관이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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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가이사랴 방문 21:1-7

1. 바울이 에베소를 떠남(1)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때 얼마나 소란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라는 이 장의 첫마디에서 잘 알 수 있다. 바울은 그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했고 그들 역시 바울과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으나 상황이 그럴수밖에 없었다.

2. 목적지까지의 순조로운 항해(1-3)

그들은 직행하여 고스에 도착했고 이튿날 로도에 이르렀으며 그 다음에는 유명한 항구이며 루기아의 수도인 바다라에 당도하였다(1절). 여기서 그들은 다행히도 그들의 행선지인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났다(2절). 만사가 이처럼 잘 풀린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베니게, 즉 두로로 향하는 이 배편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항해하였다. 항해 도중에 그들은 구브로 섬을 바라보았다. 이 섬은 바나바의 출생지로 현재 그가 돌보고 있는 활동지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 배가 구브로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 상륙한 것은 거기서 그 배의 짐을 하역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3절).

3. 두로에 잠시 머문 바울(4-6)

(1) 두로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찾았다. 바울은 어디로 가든지간에 제자들이 거기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묻고 그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우리는 유유상종이라는 속담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때, 그가 때로 두로 연안에 간 적은 있으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곳에 간 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가 확대된 이후 그리스도가 두로에까지 전파되었고, 그곳에 제자들이 파송되었다.

(2)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렀고(행 20:6), 이곳 두로에서도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 장기체류는 주일을 그들과 함께 보내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3)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았다. 성령이 각 성에서 증거하여(행 20:23). 하나님께서 사전에 많은 예언을 행하는 편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그의 백성들의 신앙이 상처를 받지 않고 견고해질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바울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게 '성령을 통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실수였다. 왜냐하면 바울이 당하는 시련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전파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4) 두로에 있는 제자들은 비록 그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은 개종자들은 아니었지만 바울에게 대단한 경의를 표하였다. 비록 그들이 바울을 알게된 것은 불과 일주일밖에 안되었지만 그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동반하여 바울을 정중하게 전송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며 기회가 주어질때마다 그리스도의 모든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경의와 우리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 훌륭한 사람과 목회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가운데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스도가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받아들였듯이, 한 사도를 존경했던 두로의 제자들의 자녀들은 축복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고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다 줄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바울의 여행을 따라간 것은 그의 일행과 잠시라도 더 오랫동안 동행하고 그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5) 그들은 바울과 에베소의 장로들이 그랬던 것처럼(행 20:36)기도로써 작별하였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5절). 바울은 기도하는 시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반면, 기도의 능력도 받았다. 바다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기도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그분의 보호아래 자신을 맡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육지 여행을 떠나려는 자들도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었다. 비록 그곳이 돌이나 오물로 뒤덮혔을망정 거기서 기도를 드렸다. 바울은 기도할때 무릎을 꿇었다.

(6) 드디어 그들은 작별했다. 서로 작별한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6절). 바울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떠났고 그곳에 남아있는 자들은 바다로 떠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4. 그들이 돌레마이에 도착함(7)

돌레마이에 이르러. 바울이 그곳에 상륙하기를 간청한 것은 형제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형제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지나쳐 버릴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루를 그들과 함께 보냈다. 이 짧은 체류는 방문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Ⅱ. 아가보의 예언 21:8-14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친구들이 마침내 가이사랴에 도착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곳은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전파되어 그들에게 성령이 내린 장소이기도 했다(행 10:1,44).

1. 가이사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영접한 친구와 다른 사람들(8,9)

바울은 좀처럼 공회당에는 가지 않았으나 그가 가는 곳마다 친구와 다른 사람들의 영접을 받았다. "바울의 동료인 우리는 그가 가는 곳을 따라 다녔으며, 가이사랴까지 왔다." 이 세상을 두루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서로 작별하게 될 것이다. 그때 누가 바울의 동료였는지 아닌지 판가름이 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전도자 빌립의 영접을 받았다. 빌립은 이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고(행 8:40), 수년 전에 가이사랴에 체류했었다. 이제 여기서 그가 다시 언급되어 나온다. 빌립은 본래 집사였다(행 6:5). 그러나 현재 빌립은 장기간 봉사해온 복음 전도사였다. 그의 집은 가이사랴에 있었으며,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였다(8절).

(2) 이 빌립은 예언하는 딸 넷을 데리고 있었다(9절). 그 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예언하였거나 그에게 위안과 격려의 말을 예언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유명한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바울의 고난(10,11)

(1)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가이사랴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가이사랴에 체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여기서나 다른 곳에서도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체류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2) 아가보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왔다. 아가보는 우리가 전에 읽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와서 천하가 크게 흉년들 것을 예언한 사람이었다(행 11:27,28).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양한 은사를 베푸시는지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바울에게 지혜의 말씀과 지식을 주셨으며, 병고침의 은사도 주셨다. 또한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에게는 바울에게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통하여 예언의 능력을 주셨다. 구약 시대에 가장 탁월한 은사였던 예언의 능력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다른 은사들에 의해 차선의 은사로 퇴보하였다. 어쨌든 아가보가 가이사랴에 온 목적은 이러한 예언의 정보를 바울에게 제공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온 것으로 추정된다.

(3) 아가보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속박될 것을 예언하였다. 아가보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의 상징으로써 바울의 속박을 예언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 띠로 먼저 그의 손을 묶고 그 다음 발을 묶었다. 흔히 듣기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직접 보는 것이 더 강한 인상을 주는 법이다. 아가보는 그 상징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즉,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 바울은 이 긴박한 경고를 그의 고난의 상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고난에 대처할 수 있었다.

3.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에 대한 친구들의 만류(12)

그곳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울의 동료인 우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도록 눈물로 간청했다. 본문에 바울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때로 지나치게 활동적인 위대한 사람들에게 과로하지 말 것을 조언해야 하며,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무모하게 드러내지 말 것을 충고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이 성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의 동료들이 그를 만류한데에는 얼마간의 잘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잘못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을수 있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우리는 누구나 고난이 임박해 있지 않을때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막상 고난이 닥치면 몸을 도사리고 주춤거리기 마련이다.

4. 자신의 결심을 고수하는 바울의 용기(13)

(1) 바울은 그를 단념시키려는 자들을 나무랐다. 본문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애정때문에 야기되는 그들 사이의 다툼을 보게 된다. 그들은 바울을 진정으로 사랑했기때문에 바울을 단념시키려고 했고, 바울도 역시 그들을 깊이 사랑했기때문에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그들을 꾸짖었다.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그들을 나무랐다. 바울에 대한 근심으로 흘리는 그들의 눈물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것은 바울의 결심을 흔들어 놓는 하나의 유혹이었다. "나는 내가 고난받도록 선택되어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런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의 눈물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는 자신이 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당신들은 내게 나의 십자가를 피하라는 것인가?" 바울은 자신을 간곡하게 만류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본심과 다른 말을 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설득할수 없는 실정을 괴로워했다. 바울은 그 자신이 눈물 많은 사람이었기때문에 동료들이 흘리는 눈물을 꾸짖어야만 하는 이때에 그들의 눈물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바울을 만류하려고 애쓰는 그들의 애정은 그를 괴롭혔다. 만약 우리의 친구들이 고난으로의 부름을 받았을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비탄에 잠기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격려함으로써 우리의 애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이사랴의 기독교인들이 그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바울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토록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자 그는 곧 지금의 가이사랴로 다시 보내졌고(행 23:33). 그는 그곳에서 적어도 2년을 지냈기 때문이다(행 24:27). 그는 24:23절에서 보듯이 매우 자유로운 죄수였다. 그로인해 가이사랴 교회는 바울과 훨씬더 돈독해졌고 그가 자유로웠을때보다 투옥되었을때 더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 간다고해서 우리가 반대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2) 바울은 거듭 예루살렘 여행을 강조한다. 그는 단호히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나는 나에게 정해진 그 어떤 고난에 대해서도 이미 각오가 되어있다. 내가 고난당하는 것을 기꺼워하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고난받으려는 것을 슬퍼하느냐 나는 나의 고난에 대해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나는 내가 해를 얼마나 받아야할 것인지를 맨 처음 들었다'(행 9:16)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고난을 각오하고 있고, 그것을 기꺼이 환영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단지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수도 있다"고 말한다.

1) 그의 결심이 얼마나 극단적인데까지 각오가 되어 있는지 보기로 하자. 그는 '나는 결박 받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최악의 사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에 적절히 대비해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2)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였다. 인간은 그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과 섬김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고자 했다.

5. 바울의 결심에 승복한 동료들(14)

(1) 그들은 훌륭한 사람의 지혜에 승복했다. 저가 권함을 받지아니하므로 우리가 우리의 끈질긴 요구를 그쳤노라(14절).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그일을 그가 하고자 하는대로 맡기기로 하였다. 바울에게는 분명히 자신의 결심을 고수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일을 통해 자신을 굳건하게 세우시려는 은혜로운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에 관해 설득당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지나친 강요는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따랐다. 우리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7절). 그들은 바울의 결심을 고집으로 여기지 않고,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기꺼워하는 가운데 그가 그일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① 바울의 확고부동한 자세, 바울은 의연했다. 그런 바울의 태도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뜻을 간파하였다.

② 고난에 대한 바울의 도전. 설사 아무런 구제 방법이 없다하더라도 주 예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일을 하나님께 그리고 그리스도께 일임하였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할 뿐이다. 하나님은 지혜가 풍성하시며 일이 잘 성사되게 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며 거기에는 추호의 예외도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곧 그의 지혜로움에서 연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올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시련이 다가올때, 우리가 그것을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Ⅲ.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21:15-26

1.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과 수행 동료들(16)

그들은 자신들의 가방과 짐을 마차에 실었다. 그들은 마치 방랑자나 병사들처럼 자신들의 가방과 짐을 그들의 마차에 실었고 자신들이 운반했다. 만약 그들이 어떤 다른 길로 가도록 바울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좀더 유쾌한 심정으로 바울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려한다고 해서 "그러면 당신이나 가시오"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 대신 "우리 모두가 가서 바울과 함께 죽자"고 외쳤다. 이처럼 바울의 확고한 결심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이사랴에 있는 제자 몇명이 바울의 일행과 동행하였는데 그들은 바울이 자유로운 동안 그와의 대화에 모든 시간을 바치기에 애썼다. 그들은 성실한 노신사 한분과 동반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자기 집에 바울의 일행을 영접하고자 했다.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16절). 바울의 일행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당시 여관은 상류사회 사람들이 손님들을 위해 내어놓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손님으로 영접하려고 했다. 결국 그들은 나손의 집에 유하게 되었다. 나손은 바울을 영접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고난이 닥친다하더라도 그들을 기꺼이 영접했다. 나손은 오랜 제자, 곧 처음부터 제자로 불리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기독교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랜 제자가 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앙인으로서의 임무를 꾸준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영예로운 일이다. 오랜 제자들의 연륜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기때문에 우리는 즐겨 그들과 함께 기거해야 할 것이다.

2. 예루살렘에서의 바울 환영(17,18)

(1) 그곳의 많은 형제들이 '그를 기꺼이 영접하였다'(17절). 여기서 그들이 사도를 환영했다는 말은 곧 사도들의 가르침을 환영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행 2:41). 즉 그들은 기꺼이 그의 말을 받아 들였다. 우리는 바울이 만약 우리들 가운데 있었다면,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을때,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지는 의문이다.

(2)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과 야고보를 내방하였다(18절). 본문에는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18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고보는 그 당시 예루살렘에 체류한 유일한 사도였던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은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드는 번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속에 한명의 사도 정도는 상주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당시에는 야고보가 거기에 상주하고 있었고, 마침 장로들도 모두 그곳에 집결해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문안했다. 이 문안의 적절한 의미는 "당신에게 구원이 있기를 원하노라"라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상호간의 문안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자, 하나님에 대한 일치된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지녀야하는 예의이다.

3. 바울의 전도에 관한 설명과 예루살렘 교인들의 만족감(19,20)

바울은 그가 전도하러 다녔던 여러 지방에서 거둔 복음의 성과에 대해 그들에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19절). 바울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도활동을 통해 성취하신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그일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일에 관해 상세히 진술했다. 그것은 그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려 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20절). 바울은 모든 성공의 공훈을 하나님께 돌렸고 그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확장시킨 하나님의 은총에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바울을 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질투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이 곧 바울의 기쁨이었다.

4. 야고보와 장로들의 바울에 대한 요청(20-25)

그들은 바울이 공개적으로 성전에서 재물을 바치거나 의식법에 순종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믿는 유대인들을 만족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비록 의식법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강요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준수하는 환경속에서 자라났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죄될 것은 없었다. 율법은 이미 죽었으나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다. 즉 죽긴 죽었으나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1) 그들은 바울에게 그곳에 있는 대단히 많은 수의 유대인 개종자들을 고려해 달라고 간청한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20절). 그들은 바울을 형제로 불렀다. 비록 그들이 율법의 신봉자들이었고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서로 형제지간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신도의 수는 120여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수만 명에 달했다. 누구든지 처음에 얼마 가지도 못한 초라한 때를 업신여기지 말도록 하라. 왜냐하면 비록 출발은 적을지라도 하나님은 종국에 엄청나게 불려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해준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가 그들을 기쁘게 했듯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을 더할나위 없이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그들이 구원받을수 있도록 해 주소서'라고 진정으로 간청하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약점에 관하여 의논한다. 율법에 열심있는 자라(20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진정한 메시야로 믿고 있으면서도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과 율법을 준수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실체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그림자에 연연해하는 것이 큰 약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교육의 힘과 오랜 관습, 특히 의식법의 관습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관대하게 수용하는데 있어서 이런 점들을 반드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성은 사랑이 그 안에 내포된 선한 의도로 간주할 여지가 있으며, 그것은 관대하게 포용되어질만한 성질의 것이다.

(3) 그들은 율법에 열성적인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불만을 품을 수도 있음을 그에게 말한다.(21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족들 모두로부터 칭송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 일에 대해 본문은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함을 저희가 들었도다'라고 전한다. 바울이 모세 율법의 폐지를 선언하고 그것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모세 율법을 배반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가르침의 참뜻은 율법을 파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것을 완성시키려는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유대인들조차도 바울이 모세의 적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바울에 대하여 격분했다. 그곳에 배석해있던 장로들은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그를 형제라고 불렀지만, 그들이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총명하지 못한 자들이 가장 비판적이며, 저능한 자들이 쉽게 흥분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4) 그들은 바울에 대한 비난이 그릇된 것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을 바울에게 간청한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유대인들의 관습을 준수함으로써 유대인 교회의 관습을 피하도록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었다.

1) 그들은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그대가 온 사실을 그들이 알면 당신에게 들을 것을 기대하고 틀림없이 함께 몰려올 것이다. 이제 바울은 사람들에게 모세를 배반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변명하기 위해 그들을 만족시켜 주는 어떤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 즉 그가 받은 오해를 풀기위해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훌륭한 사람에 대한 신자들의 끊임없는 편견을 제거하고 그로부터 바울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이 해야할 의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비난이 돌려지지 않도록 하기위해 그런 대응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 그들은 바울 자신의 오명을 씻을 좋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이 네 사람은 믿는 유대인들로서 서원한 사람들, 곧 일정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들인데 이제 그들의 서원기간은 끝났다(23절). 그들은 율법에 준하여 자신들의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그때 그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번제물로 어린 수양 한마리와 속죄물로 어린 암양 한마리, 그리고 화목제물로 수양 한마리를 바치게 되어 있다. 당시의 바울은 그 자신이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겐그레아에서 그의 머리를 깎음으로써 그 서원의 만기를 상징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까지 율법을 준수해왔다(행 18:18). 그들은 바울에게 조금만 양보하여 나실인의 제물을 바치는데 네 사람과 함께 참석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와 함께 신성한 제의를 위해 제물을 사는 비용을 부담하고 저희와 함께 제의에 참석하라고 간청한다. 그들은 이 방안이 가장 효과적으로 비난을 막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뿐 아니라 바울 자신이 율법을 준수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5) 이런 행위가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한 교령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25절).

본문은 그들이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단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는 것외에는 그 어떠한 일도 지키지 말도록 결의하고 편지를 보냈다고 전한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 개종자들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결의를 지켜나갈 것을 명확히 서약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제안은 신중을 기한 것이었다.

5. 그들의 제안에 따르는 바울(26)

바울은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권유는 뿌리쳤으나,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그들과 같이 행동을 취해달라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26절). 본문은 이를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스스로를 변론한 것처럼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행 24:18)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에게 결례가 만기된 것을 고하였다. 이제 이와같은 일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시한 제안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바울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정말 잘한 일인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몇몇 사람들은 바울의 그 임기응변적 처사가 율법을 고수하려는 유대인들의 아집을 더욱 부채질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위에 확고하게 서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을 자각시키고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애쓰는 것이 더나은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들이 바울을 설득해서 율법을 따르게 한 것과 그것을 본보기로 해서 그들에게도 율법을 따르도록 조장한 결과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제안이 신중하고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이것이 바울의 기본방침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 믿음을 해치는 자는 배척당해야 하지만 믿음이 나약한 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제의법에 대한 순종이 그에게 좋지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그의 행위를 비난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바울은 적절하게 처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 행위로 인해 비난을 면치 못했다. 비열한 순종보다는 결백과 정의가 우리를 더 잘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닥칠 엄청난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그에게 조언을 한 것이 오히려 그를 궁지속으로 몰아넣었던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사와 반대되는 어떠한 일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Ⅳ.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고난 21:27-40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체포된 후의 결말을 확실히 볼 수 없다. 우리가 고난에 처음 봉착할때, 그 고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이며, 또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1. 바울의 체포(27-29)

(1) 바울은 성전에서 체포당했다. 그날은 그의 결례의 날로써 거기서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27절). 그는 이레가 찰때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은 성역이기 때문에 그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성전에서, 그가 바치는 제물에 그의 피가 섞이기를 원하던 자들에 의해 난폭하게 체포당했다. 성전은 이처럼 그들 자신에 의해 난폭하게 체포당했다.

(2) 바울을 밀고한 사람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시아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 바울을 가장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자진해서 예배드리러 오는 일이 좀처럼 드물었고, 그럼에도 성전에 대해서는 가장 열성을 보였다. 그들은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평소의 등한함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3) 그들은 군중들을 어떻게 선동하였는가. 그들은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27절). 이성을 잃고 충동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기독교도에 대항하는데 악용당하기 쉬운 자들이다.

(4) 그들이 바울에게 대항하도록 사람들을 충동질한 말은 퍽 그럴듯 했으나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며 부당한 말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고 외쳤다. 그리스도와 기독교도의 적들은 기독교가 사악하다는 것을 아무리 입증하려고 해도 불가능할 경우에는 끊임없이 기독교에 대해 악평을 하고 폭행과 고함으로 그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한다. 정의가 밀려날때에는 소요만이 발생하는 법이다.

(5) 그들은 바울이 거짓 교리와 그릇된 예배 의식을 유포한다고 고발했다.

1) 거짓 교리를 유포한다고 고발했다. 바울은 비록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다른 곳, 아니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말하자면 바울은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일종의 순회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는 전력을 다해 저주받아야 마땅할 이단적 교리를 퍼뜨리고 다녔다'는 이유로 그를 고발했다. 그들은 바울이 다음의 세가지의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① 유대 사람들에 대한 반감 : 그들은 바울이 할례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가르친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이 배척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유대인들(따라서 이들은 믿음을 가진 유대인과 그 회당으로부터 소외당해 있었다)에게 대항해서 한 말이었다. 흔히 교회의 명예를 위해 가장 열성적인 체하는 사람들이 실상은 교회에 이름만 걸고 다니는 속이 빈 자들이다.

② 율법에 대한 거부 : 바울을 핍박하는 자들은 복음을 믿는 것이 곧 율법의 목적이자 완성이라는 그의 교리를 율법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③ 성전에 대한 적대감 : 그들은 바울이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라고 가르친 사실을 들어 그를 성전의 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전에 바울이 스데반을 핍박했을때, 그는 스데반이 "이 거룩한 장소를 적대한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가 같은 이유로 고발을 당한 것이다. 당시에 스데반을 정죄한 주동자였던 바울은 이제는 유대인들의 분노와 적의의 대상이 된 것이다.

2) 그들은 바울을 사악한 예배의식을 유포한 죄로 고발했다. 그들은 바울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다고 비난했다. 사실 바울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성전뜰로 이방인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대인의 성전안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예배드리고 있을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몇사람을 보고, 그들 중 한명이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과연 그들이 그곳에서 드로비모를 보았겠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성내에서 바울과 같이 있는 드로비모를 본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안으로 들어갔으리라고 추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결백함만으로는 중상모략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바울에게 하듯이, 악인은 흉계를 꾸며낼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들의 무고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기 마련이다. 사악한 인간들은 불의와 터무니없는 추측으로 가장 야비한 불법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성전에 가는 행위로 그들의 호감을 살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트집잡아 바울을 비난했다. 만일 바울이 그들로부터 먼 곳에 있었다면 그렇게 심한 핍박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2. 혼돈속에 체포되어 위기에 처한 바울(30-32)

그들이 바울을 고발했을때와 마찬가지로 형의 집행도 불의와 불법속에서 자행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을 즉결 처형할 것을 결정했다.

(1) 예루살렘 성은 혼란에 빠졌다(30절). 성전으로부터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그들이 성으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는 고함소리를 들었을때는 온 성이 들끓었다. 바울이 전에 아데미 신전의 적으로 밀고당했을때 에베소인들이 아데미 신전을 위해 보였던 열성을 유대인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나타냈다(19:29). 즉, 온 성이 소동하였다(30절).

(2) 그들은 바울을 성전밖으로 끌어내고 성전문을 폐쇄했다. 그들이 성전밖으로 바울을 거칠게 끌어냈을때 그들은 바울을 같은 유대 민족의 한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듯이 심한 증오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들은 성전을 숭배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전에 바울이 성전으로부터 사람들을 내쫓고 있다고 비난했었는데, 이제 바울이 성전안에서 헌신적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니까 그를 성전밖으로 쫓아내고 말았다. 성전 관리인은 성전의 문을 폐쇄했는데, 그것은 성전안으로 밀고 들어가 접근하려는 군중들과 그들의 분노로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3) 폭도들은 바울을 살해하려고 하였다(31절). 그들은 바울을 때려죽일 작정으로 몹시 구타했다(32절). 지금의 바울은 사자 우리에 던져진 새끼양 꼴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나는 단순히 속박 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말했을때와 다름없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3. 로마의 군단에 의해 유대인들로부터 구출되는 바울(33-35)

폭동의 소식이 군대의 천부장에까지 들렸다. 누군가 바울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이 소식을 그 지휘관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 지휘관은 항상 이런 난폭한 유대인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했으며, 자연히 그는 바울의 친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을때, 바울의 목숨을 구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호민과 혹은 천부장은 그의 모든 군대를 가능한 한 신속하게 집결시켜 폭동을 진압하러 달려갔다. 그는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갔다. 그가 급히 군대를 모아 달려 내려간 것은 그런 급박한 순간에 지체한다는 것이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로마 군인들의 광경은 바울을 때리고 있던 자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제지되어야 할일이 로마 군대의 힘으로 중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애정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도록 하신다. 목자는 자신의 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개라도 서슴치 않고 사용한다. 그 천부장은 바울을 수감했다. 그는 바울을 염려해서 구해낸 것이 아니라 바울이 재판없이 사형에 처해져선 안된다는 공의를 지키기 위해 바울을 구해낸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폭도들의 손에서 바울을 구해 법의 보호아래 두었다(33절). 본문은 이 상황을 '이에 천부장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냐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33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천부장이 군중들로부터 바울을 강제로 빼앗아오자, 그들은 그 천부장을 범법자로 고발하였다. 즉 그들은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행 24:7)라고 말하였다.

4. 천부장이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제공함(34-40)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러한 폭도들과 같은 질풍노도의 상황에 처해서도 좋은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물론 바울도 그런 폭도들 사이에서 마침내 변론할 자유를 얻게된 것이다.

(1) 천부장이 바울에 괸해 폭도들에게 물었을때, 그들은 당황하여 무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고만 있었다. 천부장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그들의 심중을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그들 자신조차도 자신의 마음이나 혹은 그들 중에 끼여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지도 못했다. 무리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귀를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그속에서는 확실한 그 무엇도 전혀 알아낼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사람들의 분노와 열광은 진정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이 영문은 안토니아 탑으로 로마 군인들의 요새였다. 그 탑은 성전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마 병사들은 군중들이 난폭했기 때문에 바울을 영문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느라 진땀을 뺐다(35절). 성으로 가기위해 바울이 층계에 이를때에 병사들은 할 수만 있다면 바울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는 광포한 무리들로부터 그를 무사히 호송하기 위해 그들의 팔로 바울을 떠받쳐 옮기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군중들의 포악한 손길이 바울에게 미칠 수 없게 되자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갔다'(36절). '산 자의 땅에서 그를 추방하자'(고대인들은 그를 없이 하자는 말을 이렇게 풀이했다)는 말은 그를 세상에서 추방하자는 의미이다.

(3) 마침내 바울은 천부장에게 변론할 기회를 청했다. 바울을 데리고 영문안으로 들어가려 할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37절). 이 얼마나 겸손한 태도인가! 바울은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부장에게 자신의 변론 기회를 매우 공손하게 간청했다.

(4) 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고 묻는데서 바울에 대한 그의 의중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는 나라 곳곳에서 애굽인들이 주동이 된 폭동이 발발하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네가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자가 아니냐'. 이 폭동은 글라우디오 통치 13년, 곧 천부장이 바울에게 질문하던 그때보다 3년전에 발생했던 폭동이었다. 당시 이 폭동의 주모자는 도주했는데, 천부장은 바울을 그 애굽인과 동일인으로 추론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량한 사람이 오해로 인해 얼마나 사악한 악인으로 취급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5) 바울은 그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천부장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는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라'고 말했다. 이때 바울이 자신이 다소 성의 시민임을 의미한 것인지 아니면 로마인임을 의미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소 성이나 로마는 모두 도시였고 바울은 두 곳 모두에서 자유인이었다. 비록 천부장이 바울에게 터무니없는 흉악한 혐의를 씌었지만, 바울은 불평을 위한 불평을 하지 않고, 오직 겸손하게 혐의를 부인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했다.

(6) 바울은 군중에게 변론할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공손하게 청했다. 그는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해 주시면'고맙겠다는 식으로 변론의 기회를 간청했다. 천부장이 바울을 구출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공정한 청문의 기회를 그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즉시 자신을 위해 변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빨리 진실을 밝히는 것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7) 마태복음 10:20절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바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지시해 주셨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위해 어떤 변호인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은 스스로 자신의 의사를 밝힐 기회를 얻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40절). 바울은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부여받았다. 바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자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경청하였다.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그곳은 보잘것 없는 연단이었으나, 설교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바울은 백성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히 하도록 청했고, 좌중은 마침내 잠잠해졌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해 변론할 기회가 주어졌을때, 우리는 그곳을 조용하게 만들어야 하고 또한 좀더 진지하고, 모든 사소한 일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바울은 변론하기 시작했다. 즉 그는 그들의 통용어인 히브리 방언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바울은 히브리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그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한결같은 경의를 나타낸 것이다.

 

# 해설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한 바울 ( 21 )

눈물의 이별을 시작으로 바울의 예루살렘행은 진행되어졌습니다. 곳곳에서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걸음을 멈추게 하려 했습니다. 염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형제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형제들 또한 바울에 대한 염려는 끝이 없었습니다. 예고한대로 바울에게 수난이 닥쳐왔습니다.

 

1. 바울의 가이사랴 도착

1) 두로에 도착

바울과 그 일행은 밀레도로부터 항해를 계속하여 고스와 로도 섬을 거쳐 소아시아 남서부의 한 항구인 바다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타고온 배는 소아시아 남부 해안을 따라 계속 항해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들 일행은 배를 갈아타기 위해 바다라에 내린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동지중해를 가로질러 곧장 베니게까지 가는 배로 갈아탔습니다. 이 배는 제일 먼저 두로에서 정박했는데, 배의 짐을 내려야 했기때문에 7일간 머물렀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 일행은 두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이후 유대로부터 흩어진 신자들의 복음증거로 교회가 생겼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두로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위험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기때문에 그 위험으로부터 바울을 보호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닷가에서의 못내 아쉬운 작별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같은 신앙안에서 얼마나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a.형제의 사랑(롬16:4)

2) 가이사랴의 전도자 빌립

바울과 그 일행이 타고온 배의 종착지는 돌레마이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가이사랴까지 여행했습니다. 유월절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 아직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여러날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숙소는 전도자 빌립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과부들을 돕는 일곱 집사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가이사랴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로마적인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거의 20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결혼하지 않은 딸 넷이 있었습니다.

a.전도자의 의무(엡4:11)

b.영적 은사(눅11:13)

3) 아가보의 예언

선지자 아가보는 예루살렘이 고향이었으며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왔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묶일 것인지를 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사용하여 자기의 손발을 묶으면서 바울이 결박당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을 각오했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a.아가보(행11:28)

b.바울의 자기 희생(고전8:13)

 

2. 예루살렘 방문

1) 형제들의 영접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나손의 집에 머문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울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기쁨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바울일행은 야고보와 교회의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감사로 바울일행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복음전도에 대한 긴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 보고를 듣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a.선교 보고(행14:27)

2) 야고보와 장로들의 염려

야고보와 장로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까봐 염려한 듯합니다. 물론 유대인 불신자들은 바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때문에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을 예측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게 모세의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서원한 다른 네사람과 함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라고 권했습니다.

a.서원(신23:23)

 

3. 예루살렘에서의 폭동

1) 바울의 수난

교회 지도자들의 권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하고 바울은 다른 네사람과 함께 서원하고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결례의 기간은 7일이었습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백성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폭동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갔다는 거짓 비난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었던 것을 본 것외에는 다른 근거가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밖으로 끌고나가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게될 상황에서 때마침 출동한 로마군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바울을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아 어깨 높이의 층계참으로 데려갔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3년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인이라 생각하고 결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 사람임을 밝히고 군중에게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a.무고(렘37:13)

b.천부장(신1:15)

2) 백성앞에 선 바울

폭도가 아닌 것을 확인하자 천부장은 바울에게 군중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백성들을 조용하게 한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사용했던 '히브리 방언'은 당시 대부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였습니다.

a.바울의 변명(행22:1)

b.히브리 방언(요19:13)

 

결론

바울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형제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기쁨도 잠깐 그는 유대인들로 인해 수난을 겪게 됩니다. 바울의 수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끌려가고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는 것은 이유없이 고난을 당할때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지혜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 핵심

21:1-16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당할 것을 안 성도들은 그를 극구 만류했다. 그럼에도 그가 굽히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안위보다 주님의 뜻과 영광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왜 결례를 행했나?(21:20-26)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장하면서 구습철폐를 부르짖은 사람이다(롬 3:28; 7:6). 그가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결례를 행한 것은 자가당착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의 행위는 율법주의자들의 위협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전도를 위해서는 유대인처럼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는 이방인처럼 행동한 자신의 신념에 입각한 것이다(고전 9:19-23). 즉 그는 유대인 성도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기독교의 근본 진리와 상치되지 않는 결례를 기꺼이 행한 것이다.

 

# 묵상

두로의 제자들 ( 21:4 )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어려움을 당할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안 제자들이 바울을 염려하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셨듯이, 바울 또한 고난받을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말합니다.

가이사랴에서의 바울 일행 ( 21:8 )

이곳에서 바울 일행은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머물렀는데, 당시 빌립은 바울의 모든 일행을 대접할만큼 넓은 공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무려 보름동안을 머물렀는데 이는 아마도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권면 ( 21:13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앞으로 당하게 될 일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거룩한 용기로 맞설 것을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갈길을 막는 사람들을 꾸짖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만류가 오히려 바울에게 유혹이 되고 괴로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대한 소문 ( 21:21 )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자신의 전도사역을 보고하자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 관한 소문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 소문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관습를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은 바울을 미워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억지 주장일뿐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에 얽매여 종노릇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 ( 21:23, 24 )

이들은 바울이 유대인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한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서원한 네 사람에게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의 이러한 제안은 바울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들은 결례를 행하고 기한이 차면 머리를 깎고 희생 제물을 드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일행은 유대의 전통 규례를 행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했던 것입니다.

소동을 진압하는 천부장 ( 21:32 )

바울을 죽이려는 소동을 들은 천부장은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성전밖으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천부장은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는데, 그는 원래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현장으로 급히 간 것으로, 하나님은 이처럼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를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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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드로아 도착 20:1-6

1. 바울의 에베소 출발(1)

그는 그가 활동했던 다른 어떤 장소보다 이곳 에베소에서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제 그가 장소를 옮겨야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른 도시들에서도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에베소를 떠난 이후 다시 새로운 활동 무대를 개척한 사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 장(章)의 끝부분에서 그가 죄수의 입장에 처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이 책의 끝에서도 그가 계속 그러한 상태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소요 사태가 종식된 직후 에베소를 떠났다(1절). 그의 이동은 적대자들의 분노를 다소 진정시켰을뿐 아니라, 그곳의 신자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준 것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에베소를 출발하기 이전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번째 서신을 썼다고 주장하며, 에베소에 언급된 바울과 에베소의 맹수들과의 싸움이 이 소요 사태의 비유적 설명이었음을 주장한다. 제자들과 작별하던 바울의 모습은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엄숙한 것이었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1절, 참조, 시리아 사본에는 '사랑의 입맞춤으로'란 구절이 첨가됨). 사랑하는 친구들은 서로 헤어지기 전에는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헤어질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가 얼마나 가깝게 마음을 주고받았는지를 알게 된다.

2. 바울의 헬라 교회들에 대한 방문(2)

그는 헬라 교회들을 개척했으며, 이 교회들에 대한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가 먼저 마게도냐로 떠난 것은(1절) 소요 사태의 발발 이전에 그가 마음먹었던 것이었다(행 19:21). 거기서 그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들을 방문했으며 그들에게 많은 권면을 하였다(2절). 그는 그들에게 많은 말씀을 전했으며, 그들과 함께 시간 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아가야 지방 즉 헬라에서 석달 동안 머물렀던 반면(2,3절), 고린도와 그 부근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기로 작정하였다(행 19:21).

3. 바울의 여행 일정 변경(3)

바울은 수리아로 항해하여 안디옥에 갈 계획이었으나 생각을 바꾸어 그가 왔던 길, 즉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바울이 예전에 다녔던 길로 올 것을 예측한 유대인들이 그곳에 매복하여 그를 죽이려고 공보했기 때문이었다.

4. 바울의 아시아 여행에 동반한 그의 동료들(4)

그들의 이름은 4절에서 언급된다. 베뢰아 사람 소바더는 로마서 16:21절에 언급된 소시바더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디모데란 이름이 그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었지만, 그는 곧 바울을 뒤쫓아 이 명단에 나온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과 동행하였다. 이제 바울이 이 모든 훌륭한 인물들과 함께 동행한 사실이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의 두가지 교훈을 가져다준다.

(1) 그들이 바울의 복음 전파와 그가 가르치는 일에 눈부신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가는 곳마다 물이 요동했으며, 거기에는 불구자들을 도울 많은 손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2) 그들이 바울에게 훈련을 받음으로써 미래의 사역에 적합한 인물로 발탁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5. 바울의 드로아 도착(5,6)

바울의 동역자들은 먼저 드로아에 당도하여 바울을 기다렸다(5절). 우리는 어떤 여행길에서 훌륭한 동료를 잠시 기다리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드로아 여행은 순탄하였다. 이제 누가도 바울과 함께 동행하였다. 왜냐하면 누가가 '우리는 빌립보에서 배로 떠났다'(6절)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누가가 바울과 처음 동행한 장소가 이곳 드로아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행 16:11). 무교절이란 말은 단지 그 시기를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었다. 바울은 배를 타고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물렀다. 바울은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선한 사업에 나선 자들과 이곳저곳으로 여행하느라 엄청난 시간만 허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손실만을 탓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바울은 비록 드로아에서 이레 동안 체류할 기회밖에 얻지 못했으나, 그는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숙박한 닷새의 기간을 매우 값진 것으로 생각했다.

 

Ⅱ. 유두고의 소생 20:7-12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드로아에서 체류한 이레의 마지막 날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의 기사를 보게된다.

1. 그곳에서 있었던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엄숙한 종교 집회(7)

(1) 제자들이 모였다(7절). 그들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와 찬송을 부르고 각자 따로 떨어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 예배를 드리고 서로간의 친교를 나누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함께 모일 시간이 정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비록 그들 모두가 한장소에 모일 수는 없었으나 가능한 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2) 그들은 주의 날(계1:10)인 안식후 첫날에 함께 모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든 교회에서 함께 모인 날이 바로 그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일주일의 첫날을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날은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의 징표가 된다.

(3) 그들은 윗 다락에 함께 모였다(8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실을 갖고있지 않았으므로 가정집이나 다락방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교인의 숫자도 적었으므로 그렇게 넓은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커다란 집회 장소를 건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비좁고 불편한 장소에 함께 모였다. 그들의 집회 장소가 현재 우리의 예배당처럼 예배드리기에 알맞고 넓은 장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가 예배에 불참하는 것은 아무런 변명도 있을 수 없다.

(4) 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었다'는 말은 주의 만찬의식을 베풀었음을 의미한다. 떡을 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떼어줌으로써 우리의 죄사함을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과 잔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매주일 엄숙한 집회 장소에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베풀고 같은 신앙과 예배로써 그들의 일치를 확인하는 것이 수많은 교회들의 관례였다.

2. 바울이 이 집회 장소에서 행한 긴 고별 설교(8)

(1) 바울은 그들에게 강론하였다. 복음전파는 필히 성례전을 수반해야 한다.

(2) 그 설교는 그가 '바울이 떠나기로 작정했으므로' 고별 설교였다. 바울이 떠나게 되면, 그들은 비록 그가 가르쳤던 수준으로는 아니더라도 그가 전한 것과 똑같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할 수 있는한 많은 것을 그에게서 배워야 했다.

(3) 그의 설교는 너무나 길었다. 그는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말할 것도 많았으며, 또한 또다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그에게 언제 주어질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역자들은 기회가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수시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청중을 피곤하게 만드는 장황한 설교자였다고 비난한 어떤 사람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바울은 청중의 진지한 모습을 목격했으므로 그의 강론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긴 설교의 주제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지만, 다만 그의 서신들과 동일한 본질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뿐이다. 그 집회가 밤중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촛대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8절). 이것은 그들이 밤중에 모여 악한 일을 꾸민다고 비방하는 적대자들의 비난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3. 죽었다가 살아난 유두고(9-12)

그의 이름은 행운을 지닌 자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그것이 자기 이름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1) 그의 나약한 의지 : 그는 유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창문에 앉아 있었다. 만일 그가 마루 위에 앉았었더라면, 그는 안전했을 것이다. 그는 졸았다기보다는 바울이 설교를 행하고 있었을 때 깊은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바울의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우리는 그가 잠에 취한 사실을 각별히 주시함으로써 나머지 청중 모두는 졸음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 비록 시간상으로 보아 취침시간이었고 만찬을 베푼 이후였지만-을 알 수 있다.

(2) 사고를 당한 유두고 : 그는 삼층 누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어떤 학자들은 사탄의 손이 개입하여 이 집회를 방해하고 바울을 비방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그들이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을때 모든 사람들에게 졸음을 경계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나쁜 징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졸음을 억제해야 하며, 우리가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감화를 받게 될때 그 졸음을 멀리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기적의 은총이 임함으로써 다시 살아남(10절) : 이 사건은 바울의 설교를 확증시킨 계기가 되었음을 입증하였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다'는 말은 이 청년에 대한 극진한 동정심과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바울처럼 유순한 심령을 간직한 자들은 이같은 불행한 사고를 당한 자들에게 동정심을 아끼지 않으며, 그러한 사고를 당한 자들을 책망하거나 심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건은 하나의 징표로서 죽은 자의 몸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음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생명이 다시 소생했다는 것은 동시에 그가 신앙을 갖고 내적으로 진지하게 기도드렸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청년이 다시 소생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증하였다. 이 불행한 사고가 발생함으로써 회중속에서는 구구한 억측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는 말로써 결론을 맺었다. 바울은 도중에 발생한 이 사건을 매듭지은 다음 즉시 자신의 임무로 돌아갔다(11절). '그는 그 집회 장소로 다시 올라갔다.' 거기서 그들은 애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떼었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11절). 바울은 이전처럼 계속되는 담화를 중단하고 그와 그의 친구들만의 자유로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바울의 동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설교시간을 최대한 이용했으며 그러한 목적으로 밤잠을 새웠다. 바울의 일행이 떠나기 전에 사람들은 살아난 아이를 회중에게로 데려왔으며 적지않은 위로를 받았다(12절).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물론이고 이 아이의 친척과 전체 시회에 있어서도 커다란 기쁨이 되었다.

  

Ⅲ.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의 바울의 순회 방문 20:13-16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하였다. 드로아를 방문했던 바울이 이제는 일종의 연안 항해를 시도하였다. 이 시도는 그가 모든 장소를 편리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 것임에 분명하다.

(1) 바울은 그의 동료들을 배에 태워 앗소로 보냈으나, 자신은 도보로 가려고 마음먹었다(13절). 그는 도보로 앗소까지 걸어가기를 원했다. 만일 바울이 택한 길이 지름길이었다면 그 길은 옛날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험한 길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육로를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도로의 주변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방문할 목적.

2) 혹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황량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목적.

3) 아니면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고 자신의 안일함을 탈피하려는 의도.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신들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2) 바울은 앗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행선한다. 거기서 그들은 '바울을 태우기 위해 그리로 행선하였다'.

(3) 바울은 그의 예루살렘 방문 길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바울을 태운 배는 기오를 경유하여(15절) 사모에 도착하였다. 바울의 일행은 사모 다음 항구인 트로길리움에 잠시 체류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그들은 에베소 다음 항구인 밀레도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여행 일정을 잡은 이유는 바울이 이 시기에 에베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16절) 가능한 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대략 4-5년 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행 18:21,22) 이제 그가 다시 그곳을 방문하는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그의 계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로 작정한 이유는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순절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특별히 잘 알려진 명절이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시간을 정해놓고 그것을 변경함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잘 지키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은 기쁜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때문에 우리의 본분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때 그는 아시아에서-비록 아시아에는 친절한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Ⅳ.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 20:17-35

바울이 밀레도에 갔을 때, 그는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올 동안 바닷가에서 체류하였다. 그 이유는 만일 바울이 에베소에 일단 들어간다면, 그가 그곳에서 전혀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사람들을 보낸 목적은 그들이 당면한 과업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육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남긴 담화는 매우 감동적이고도 실제적인 것으로서 바울 자신의 뛰어난 정신이 담긴 내용이었다.

(1) 바울은 그 장로들에게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가 이때까지 에베소에 대해 관심을 품어왔음을 호소한다(18절). 그들 모두는 바울이 결코 자기 본위적인 사람이 아닌, 진지하고 자상하며 천상의 영혼을 간직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사역과 고통속에서 침착성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 그 엄청난 과업을 결코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사상적 기질과 설교 및 대화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을 분명히 입증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더욱이 그는 자기를 본받으려는 그들에게 일종의 훈시로서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18절). 이와같이 내가 간 후에, 너희는 너희의 책임을 떠맡은 자들과 함께 거하라"

1) 바울의 정신과 그의 대화는 뛰어나고 모범적인 것이었다.

첫째, 그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현재까지 줄곧 잘 처신해 왔다. 그들은 바울이 출현한 첫날부터 그가 현명하게 행동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기로 작정한 사람임을 알았다. 바울은 언행이 일치한 사람이었다. 즉, 그는 바람에 흔들리거나 어떠한 기후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주님을 섬기고 자신을 인간의 종으로 만들지도 않았으며, 기회주의자도 아니었다.

셋째, 그는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다만 그는 가장 비천한 자들과 더불어 그들과의 동등한 입장에서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기꺼이 자기를 낮추었다.

넷째, 그는 항상 그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애정이 깃든 동정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섬겼다. 이로써 바울은 그의 주인이신 주님을 닮았으며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듭 말하기 전에 행한 그의 설교에서 울기까지 하였다(빌 3:18). 그들은 애정이 넘칠 정도로 바울과 매우 가깝게 마음을 주고받았으므로 바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다섯째, 바울은 그들 앞에 놓인 많은 어려움을 갖고서 고민하였다. 그는 엄청난 반대와 유혹과 시련을 무릅쓰고 인내와 용기로써 자신의 과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여전히 바울을 헤치거나 다른 보복 조치를 강구하려고 음모를 꾸민 유대인들이 매복해 있었다. 고통과 위험속에서도 계속 주님을 섬기며 어떠한 원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을 인정하면서 그분을 친구로 삼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다.

2) 바울의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20,21절).

첫째, 그는 평범한 설교자였다. 그러므로 전달된 그의 메시지는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이 메시지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였고, 너희를 가르쳤다'는 두마디 말로써 선포되었다. 그는 흥미위주의 잡담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지도 않았으며, 고상한 개념이나 표현으로 그들이 갈피를 못 잡아 어리둥절하도록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둘째, 그는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한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서약자로서 설교하였다. 그는 행상인이 거리에서 소식을 외치듯(그 말의 진위 여부는 그 사람외에 아무도 모른다)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양심적인 증인이 법정에서 증거를 제시하듯 복음을 선포하였다.

셋째, 그는 유익한 설교자였다. 그는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했으며, 그들이 날마다 더욱 현명하고 훌륭해질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과 삶이 개조되기를 원했다. 그는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열과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주는 설교는 가급적 피하고 유익을 가져다주는 설교를 전해야 한다. 바울은 단지 유익을 주기 위해 호감을 얻으려고 하였다.

넷째, 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설교자였다. 그는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공중 앞에서 복음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유대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질 때에 개인적으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사역자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는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그들이 공중 앞에서 가르친 사실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특히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진리를 자신들과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다섯째, 그는 신실한 설교자였다. 그는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전했으며, 억제한 것은 전혀 없었다. 설사 유행에 뒤떨어지고 다소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해도 그가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설교하였다. 또한 그는 책망할 필요가 있을때 범죄의 무서움에 대하여 과감히 책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장애물이 되며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억제하지 않았다.

여섯째, 그는 보편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증거하였다. 비록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나 양육받고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속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을 유대인에 한정하지도 않았으며 이방인들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편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를 철천지 원수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악한 자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역자들은 편견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주적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그는 참된 기독교인인 복음전도자였다. 그는 철학적 개념이나 정치학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회개만을 설교하였다. 그가 모든 경우에 강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 대한 회개 : 바울은 회개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는 하나님의 위대한 명령(행 27:30)임을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하였다(행 5:31).

②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회개는 충분한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따라서 아버지께 죄를 회개한 탕자로서가 아니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2) 바울은 현재 예루살렘 여행길에서 당하게 될 고통과 역경에 대한 그의 예상을 이야기 한다(22-24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노라'(22절)는 바울의 진술은 다음의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장차 다가올 고난을 예견한다는 의미 : 그는 고난받게 될 것을 분명히 예상했으며, 자신의 일상 업무를 그것에 대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2) 강한 충동으로 인해 이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의미 : 즉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전진하기로 결심을 굳혔으므로 나의 어떤 기분이나 계획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갈 것이며, 그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나는 그를 따라갈 것이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들이 자신에게 닥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일들을 바울에게 계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고대하고 그를 열망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사건들에 관한 한 무지의 상태속에 그냥 놔두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닥칠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이 낮인지 밤인지 아니면 몇 시에 닥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하며, 그분을 우리와 함께 관련을 맺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의 눈에 선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폭풍이 닥칠 것을 대략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통과한 모든 성의 예언자들이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그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용감한 영웅적 결의로써 그의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침울한 울림소리가 각 성으로부터 그에게 들려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신의 활동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 모든 것들도 결단코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도 바울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다음의 세가지 모본을 보여주었다.

① 거룩한 용기와 결단 : 바울은 그 결박과 환난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도 결단코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으며, 다만 그리스도와 하늘나라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 결박과 환난은 바울 자신의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비틀거리면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단호히 계속 진행하였다. 그것들은 바울에게서 마음의 평온함을 빼앗지 못하였다.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태연하였다. 천국에서 대화를 나눈 자들은 이 세상의 일상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격노와 지옥 자체의 악의에 대해서도 경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자신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생명에 대한 거룩한 경멸 :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생명은 감미로운 것이며 본래 우리에게 귀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때 생명은 상대적으로 비열한 것이다. 즉 생명은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즐거운 마음으로 포기될 수 있는 것이다.

③ 생명의 사역을 완성할만한 거룩한 관심 : 이 생명의 사역은 삶의 형식적인 즐거움이나 외형적인 삶을 확보하기보다는 보다 큰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선한 사람인 바울에게서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가지를 확보하는 자는 삶속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두가지는 다음과 같다.

㉠ 바울에게서 신실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주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세상으로 또는 교회로 파송됨으로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사역을 불완전하게 수행해서는 안되었다. 사도직은 그리스도나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하나의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로서 부름받은 자들은 사도직의 존엄성이나 지배권보다는 사도로서의 사역에보다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 사역은 주 예수를 통하여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사역자들에게 위임하셨고 그들은 그분에게서 자신들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의 이름과 힘에 의지하여 그분을 위한 사역을 수행해야한다. 이 사역의 활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호의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선한 활동의 수단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가 은혜로운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를 은혜롭게 성장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단지 이 복음 지식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사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 바울이 자신의 임무를 잘 마쳤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죽게될 것인가에 대하여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길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길 또는 경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지정된 수고와 한계성을 보냄받은 것은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통과하도록, 아니 세상을 헤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세상의 여정은 곧 끝나게 된다. 바울은 그의 여정이 끝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날이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가 명예를 얻든지 불명예를 얻든지 간에 경주의 종착점이다. 바울은 그 경주를 잘 마치는데에 전적으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아무리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망정 그것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그는 기쁨으로 그 일을 잘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우리의 생애의 사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걱정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환희에 찬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3) 바울은 이번 기회를 그들과의 마지막 만남의 기회로 간주하고 자신의 고결함을 그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1) 바울은 이제 그들과의 마지막 이별을 선포한다(25절).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더이상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있게 선포한다. 우리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 사실을 그처럼 미심쩍게 선포한 바울이(22절 참조) 성령의 특별한 보증없이 자신있게 이 말을 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재회의 불가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보라 내가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고 엄숙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있는 자들이 조만간에 사라지게 될 것과 더이상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과 우리와의 상면은 일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있는 동안 그들과의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들의 얼굴을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심판의 날에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상면할 것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수행하였음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피력한다(26절).

①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언제나 신실했었음을 선언한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 즉 영혼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또한 당신들은 내가 경고한 것외에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 누구의 피도 책임질 수 없다. 만일 어떤 사역자가 자신의 신실함을 입증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내가 깨끗하니'란 말을 기쁨으로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② 그러므로 그는 파멸을 자초한 자들의 피를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중한 경고를 받고도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③ 그는 이 사역자들에게 그가 행했던 것처럼 관심을 갖고 수고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때로 하늘과 땅을 두고 호소하듯 여기서는 이 날이 이별의 날로 증거될 것이다.

3) 바울은 다음의 진술로써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한다(27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그는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권고만을 전했으며 자신이 꾸며낸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로 그것만이 순수한 복음이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권고이다. 이 하나님의 권고는 계시된 것으로서 선포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사명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순수하고도 온전한 것으로 전파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권고의 어떤 부분을 선포하는 것을 고의적으로나 계획적으로 회피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복음의 가장 난해한 부분과 가장 평이하고 쉬운 부분에 대한 설교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들을 과감하게 전파함으로써 기독교를 경계하는 대적자들의 감정을 유발하거나 기독교에 무관심한 교사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로써 바울 자신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순결함을 간직했던 것이다.

(4) 바울은 그들이 사역자로서의 임무를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이행할 것을 당부한다.

1)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돌볼 임무를 그들에게 위임한다. 그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들은 한 장소에 모일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한 떼로 지칭된 것은 그들이 하나의 신앙으로 일치되었을뿐 아니라 수많은 경우에 그들이 상호간의 친교를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 교회의 치리를 장로들에게 위임하면서 그들을 감독자 즉, 양떼의 감독으로 삼으신 분은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심을 전하였다. 그는 "너희 장로들은 성령께서 택하신 감독자들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그들은 깃털을 달았으므로 스스로 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바울없이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행 19:6).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자격을 부여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부름받아 임명된 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응답속에서 이 사역을 행하도록 지시하셨다.

2) 바울은 그들이 소명 받았던 사역을 상기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의무에는 존엄성이 뒤따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께서 그들을 양떼의 감독으로 삼으셨다면 그들은 진정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

첫째, 그들은 처음 장소에서 자중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눈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어떤이들은 당신을 본받기 원하지만, 다른 이들은 당신과의 싸움을 원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중해야한다." 자기 소유의 포도원조차도 돌보지 않는 자들은 유능하고 충실한 타인의 포도원 관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해야 한다(28절).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돌볼뿐만 아니라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자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지녀야 한다.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구절은 양떼 중 한마리도 우리밖으로 이탈하거나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고 한마리도 잊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한 말이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육성시키고 그리스도의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하며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모든 가르침으로 그들을 양육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영생을 얻는데에 필요한 양식을 충분히 공급했는가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모으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증대시킴으로써 그 교회를 육성시킬 목회자들이 필요하다.

넷째, 마치 목자가 밤마다 자기 양떼를 감시하듯 그들은 경계해야만 한다(31절). 따라서 그들은 양떼를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하며, 양떼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도 지켜보아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이 맡은바 사역의 사명을 명심해야 할 몇가지 이유들을 그들에게 제시한다.

첫째,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인이신 주님의 관심과 양떼에 대한 바울 자신의 관심을 참작토록 하였다(28절).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당신은 그를 위해 교회를 돌볼 그의 종에 불과하다. 만일 당신이 맡은바 사역을 게을리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는 것이므로 당신의 무관심과 반역의 죄는 실로 막중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하나님은 당신이 그의 양떼와 어린양을 양육함으로써 당신의 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셨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 귀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도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최상의 길은 그의 양떼와 어린양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교회는 그가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양육하라는 말이 중요함은 그 교회를 위해 아주 비싼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는데, 하물며 그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양육하는데에 관심과 수고를 아껴서야 되겠는가?

둘째, 그들로 하여금 양떼가 대적자들의 먹이로 넘겨질 위기에 대해 고려하도록 하였다(29,30절).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들을 돌봄과 동시에 양떼들도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들과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28절). 왜냐하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리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29절).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올 것을…내가 아노니'(29,30절)라고 말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상황을 핍박의 상황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을때의 유대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한 반면, 그가 그 지방을 떠났을때에는 유대인들이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내가 떠난후에도 정녕코 핍박의 영이 여전히 활동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역자들은 핍박의 시기에 양떼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유혹자들과 거짓 교사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바울은 의식법을 전한 할례받은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흉악한 이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던 동안에 그들이 바울을 멀리한 것은 감히 그를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버렸을때, 그들은 양떼속으로 들어갔다.

②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28절). 그 이유는 일부 목자들이 변절할 것이기 때문이었다(30절). '너희 자신들에 대해서도 삼가라,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28,30절). 그들은 복음에 대해 왜곡된 말을 유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합리화 시킬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란 구절에서 자기라는 말은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자들을 뜻하며, 그들이 다른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끌어내어 자기를 따르도록 종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비록 에베소 교회에 몇몇 그러한 유혹자들이 있었다해도, 그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볼때 그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들처럼 엄청난 수의 거짓 교사들로 가득차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에베소 교회의 평화와 순결은 장로들의 수고와 경계의 덕택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보존되었다.

셋째, 그들로 하여금 바울이 이 교회를 개척할때 투자한 엄청난 수고를 참작케 하였다(31절).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충성스런 파숫꾼처럼 그들을 경고했으며, 경고로써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즉, 그는 설교시에 행한 공적인 경고외에도 경고가 요구되는 그들의 상황을 목격했을때 자신을 특정 인물들에 적용시켰다. 그는 끊임없이 경고를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경고하였다. 그래서 그의 일과 시간은 그의 활동으로 가득 찼다. 그는 지칠줄 모르고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경고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의로부터 떠나지 말 것을 경고했으며, 그들이 사악해졌을때 그 사악함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상당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러기에 그는 눈물로 훈계했던 것이다. 그가 주님을 섬겼듯이 그는 많은 눈물로써(19절) 그들을 섬겼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수고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과업을 수행하는 일에 자신들의 수고를 아껴야 한단 말인가?

(5)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시와 감화를 받도록 권면한다(32절). 그는 "형제여 이제 내가 그대를 하나님께 부탁하노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지시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은총의 눈으로 보살펴 주실 것을 간구한다.

1) 여기서 바울이 그들을 누구에게 부탁하였는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맡기도록 그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한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든지 간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모든 것에 풍족하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너희의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와 이별한다해도 항상 하나님을 우리 곁에 모시고 있다. 바울은 주의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부탁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주의 은혜의 말씀을 그리스도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요 1:1).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칭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충만함을 통하여 넘치는 은혜를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과 그의 섭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부탁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의 은혜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상당히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즉, 여러분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능동적인 신앙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얻게될 것이지만, 복음의 약속을 의지하는 능동적인 신앙을 통해서는 더욱 많은 위로를 얻게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소망과 기쁨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삶의 규범이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그들을 부탁한다. "나는 너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에 너희를 부탁하노라. 이 말씀의 교훈을 음미하고 그 말씀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을 영위하기 바라노라."

2) 여기서 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에 부탁한 이유를 살펴보자.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받았고 그것을 전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제 바울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권고한 것은 그들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32절). 이미 아무리 훌륭한 은사를 받았다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그 은사에 대한 더욱 정통한 지식을 습득하며 많은 감명을 받아야 한다. 사역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함양을 추구해야만 한다. 가장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성장할 수 있다.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는 말은 그들의 영광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기업을 주실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지식과 약속도 함께 주신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진다(행 10:44). 천국은 모든 상속인들에게 파기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한 하나의 기업이다. 이 기업은 오직 거룩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님으로 환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천국은 결코 그들의 것이 될 수 없다. 전능한 권세와 영원한 진리만이 존재하는 천국은 다만 중생하여 거룩함을 입은 모든 자들만의 소유가 될 것이다. 우리가 현세에 거룩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 서있지 못한다면, 결코 내세에 영광을 입은 자들 가운데 서 있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6)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이세상과 무관한 본보기로서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에게 최상의 축복인 영적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간구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들을 위한 양식을 간구 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들에 관한 한 내가 행했듯이 행하라고 말한다.

1) 바울은 결코 세속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 에베소에는 부자와 잘 차려입은 자들이 많았다. 바울에게는 그들과 같은 삶을 영위하려는 야심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엄청난 금과 은을 소유할 욕심이 전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들을 비난하거나 시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엄청난 생계비가 없이도 편안하고 유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는 궁핍함과 굴욕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로부터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원한 적이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는 탐욕을 제거하려고 항상 간구하였다. 그는 "내가 누구에게 짐을 떠맡겼는가?"라고 말했다.

2) 바울은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일했고 빵을 얻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였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당하여(34절). 때로 바울은 생활을 유지하는데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줄여 나갔다. 바울과 같은 인물을 그토록 가난하게 살도록 방치한 이 세상이야말로 얼마나 무심하고 불친절하며 배은망덕한가! 그는 최소한의 생필품을 공급받기를 원했다. 빵을 얻어야만 했을때 바울은 수공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두뇌와 언변을 구비하였으나 그가 말한대로 자신의 생필품을 조달한 것은 그의 두 손이었다. 그는 장로들(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나태한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작은 용기를 얻게될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일했다. 이 일은 사실상 고된 것이었다. 바울을 위해서 그들이 일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이 그러하였다. 따라서 힘든 일을 기꺼이 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마땅히 하는 자들을 그들 주위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바울은 그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일하면서도 남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절약하였다. 본문에서 그는 이 일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35절)고 당부한다. 우리는 이 말을 병든 자, 가난한 자, 실업자의 생계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바울의 권면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4:28). 우리는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남에게 줄 수 있는 정직한 직업을 갖고 수고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말 뒤에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말씀인 동시에 그 속에는 역설적인 어떤 것이 담겨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축복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하게 되어 받는 손(모든 사람이 이에 속할 것이다)보다는 부자가 되어 주는 손길 위에 더 큰 축복이 임할 것이다. 또한 재산이 많든지 적든지간에 그 소유를 더 불리고 증식시키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갖고 선행을 베푸는 자에게 더 큰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자녀들의 느낌은 이와 대조적이다. 즉 그들은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항상 받기만을 희망한다. 깨끗하게 벌어들인 수입은 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로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이리하여 우리는 선행에 힘쓰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수고의 대가를 받기보다는 수고를 제공하는 것이 더 복된 일이다. 또한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일은 무척 기쁜 일이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일은 더더욱 영광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우리의 급료 지불 책임자로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Ⅴ. 바울과 장로들 사이의 작별 20:36-38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후에 작별의 기도와 석별의 눈물을 보게 된다.

(1) 바울과 장로들은 기도로써 작별했다(36절). 이 말을 한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이 기도는 합동으로 드린 기도였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했을뿐만 아니라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라는 본문의 기록대로 함께 기도드렸다. 공개적인 기도회는 우리 자신의 은밀한 기도 형식을 바꾸어 오히려 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하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그 기도회 는 겸허하고 경건하였다. 이 기도회에서 그들이 취한 자세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즉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36절)라는 말은 찬양과 간구, 특히 죄의 용서를 비는 간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설교후에 행한 기도였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 교회를 돌볼 것을 당부한 후에 이러한 중책을 위임받은 그들이 충성스럽게 맡은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또한 그는 양떼들을 위하여 양떼를 지키는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실 것과 그들이 흉악한 이리의 먹이가 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전도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하였다. 이것은 작별의 기도였다. 바울과 장로들이 작별할때 서로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로써 작별의 정을 나누었듯이, 친구들간에 서로 작별할때에도 작별의 기도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 그리스도 역시 제자들과 헤어질때 그들에게 설교하고 난후에 그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요 17:1).

(2)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눈물과 사랑에 넘치는 격정적인 포옹으로 작별을 고했다(37,38절). '그들은 모두 크게 울었다'(37절). 그들과 함께 있던 동안에도 간혹 눈물을 흘린 바울은(19,31절) 작별시에도 역시 많은 눈물을 흘렸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다. 즉 그들은 모두 크게 울었다. 그들 중에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사랑과 상호간의 친애의 눈물이었다. 본문에 '바울이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37절)라고 기록되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사랑을 받게 마련이다. 친구를 가장 소중히 아끼고 사랑했던 바울에게는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한 친구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8절)는 바울의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과 현재 바울과 주고받는 이 인사가 마지막 작별이란 말을 들었을때 커다란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우리는 친구들이 죽어서 우리의 곁을 떠날때 바울의 이 말을 회상하게 된다. 그 친구들의 얼굴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슬픔을 한층 격양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이 사실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지만, 더나은 세상에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과 그곳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해야 한다.

(3) 그들은 바울을 배에까지 전송하였다. 왜냐하면 그와 잠시라도 같이 있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작별 인사를 나눌때까지도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별은 바울과 에베소 교인들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떠나는 바울과 머물러 있는 그들 모두에게 임재하셨기 때문이었다.

  

# 해설

마게도냐에 재방문한 바울 ( 20 )

누가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을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오랜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곳 뿐만 아니라 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석 달을 머물면서 로마서를 쓰기도 했습니나. 드로아와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바울의 전도자로서의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1. 바울의 에베소 작별

1) 마게도냐와 그리스

바울은 여러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마게도냐에서의 바울의 모습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어려움과 안팎으로 당하는 많은 환난과 다툼으로 인해 많은 두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기 전에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계속 여행해서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염려한대로 많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편으로 보냈습니다. 디도가 고린도후서를 가지고 고린도로 떠난후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에서 그해 가을과 겨울을 지낸 것 같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후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거기서 석달을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장래 계획에 대한 약간의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로마에서 복음 전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는 또한 서바나로 가는 그의 장기적인 복음전도 계획의 전진 기지로 로마를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고 막혀 있었습니다.

a.바울의 고난(딤후3:11)

2) 유대인들의 음모

애당초 바울의 계획은 분명히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대로 항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명을 노리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서, 그와 누가는 이 항로를 취소하고 다른 항구에서 항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동료들은 겐그레아에서 드로아를 향해 출항해서 거기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a.음모의 원인(마27:18)

3) 바울의 동행인들

누가는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을 일곱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교회의 대표들로서 바울이 늘 관심을 두었던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운반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동행에서 세사람은 마게도냐에서 왔고(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넷은 소아미아에서 왔습니다(가이오, 두기고, 디모데, 드로비모). 이들은 바울과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곳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누가는 육로로 북쪽을 향해 빌립보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드로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바울은 닷새 만에 드로아에 이르러서 동료들과 함께 만나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a.소시바더(롬16:21)

b.드로비모(딤후4:20)

 

2. 드로아에서의 설교

1) 드로아의 교회

드로아에는 교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본문의 청중들이 바울과 함께 항해할 일행들이었다면, 그처럼 깊은 밤까지 강론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로아 교회는 아마도 사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고후2:12). 드로아에 갔을 당시 바울은 심령이 편치 못한 일이 있었지만, 잠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후 다시 그곳에 갔을때 거기서 만난 제자들을 보고서 이전 그의 전도의 열매가 나타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a.말씀 전파(눅9:2)

2) 바울의 설교와 유두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지체하며 유대로 갈 적당한 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드로아에 머물렀던 마지막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동행들은 그날 저녁 드로아의 교인들과 함께 떡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아마 마지막으로 바울과 지내게 될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긴 강론을 경청했습니다. 그때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음때문에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몸을 끌어안자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음은 물론입니다.

a.주일(고전16:2)

b.떡을 뗌(행2:42)

 

3.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고별 설교

1) 앗소에서 밀레도로

분명히 바울은 원래 계획보다 드로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연됨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나머지 일행들을 미리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통해 앗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앗소에서 미둘레네, 기오 그리고 밀레도로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바울은 가능하면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를 거치지 않고 밀레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그곳으로 오게 했습니다.

a.오순절(민28:26)

b.장로(딤전4:14)

2) 밀레도에서의 바울

바울의 전갈을 받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바울을 보고 싶은 간절한 일념으로 밀레도로 달려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권고를 했습니다. 바울의 설교 처음부분은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자기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사역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책임은 바울에게서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가 가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환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주신 사명을 마쳐야 한다는 단호한 결심을 보이게 됩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를 본받아서 계속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해야함을 권고했습니다. 바울은 장차 교회밖에서 원수들의 공격과 교회안에서 거짓 교사들의 해악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그들의 지혜와 정성이 필요함을 상기시키며 그들과 교회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a.사명 전수(딤전5:21)

 

결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이 새 신자들에게 쏟던 관심과 그가 교회를 위해 일했던 정신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전파,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음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그가 하나님 앞에 드렸던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과연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게 합니다.

 

# 핵심

20:1-12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둘러본 후 예루살렘으로 가려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에 처한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 드로아에 이르렀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 기간(20:31)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했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19:8-10절에는 2년 3개월간 사역한 것으로 나와있다. 따라서 양자는 모순된 듯이 보인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사역하기까지는 몇개월의 준비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즉 그 기간 동안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호감을 샀기때문에 장기간의 본격적인 전도사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 기간과 본격 사역 기간을 합하면 도합 3년간 에베소에서 지냈다는 결론이 나온다.

 

# 묵상

바울의 선교 방향 전환 ( 20:3 )

바울은 수리아로 가려다가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바울이 로마인임을 자처하며 복음을 전하였기에 유대인의 눈에는 바울이 로마와 합작한 민족적, 종교적 반역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일정을 서두른 바울 ( 20:16 )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지체하지 않으려 서둘렀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주지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청한 사람들 ( 20:17 )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의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청받은 이들은 에베소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바울은 그들에게 고별 설교와 권면을 하기위해 그들을 청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전도 자세 ( 20:20 )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신변의 위협을 받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자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자신에게 위협이 다가옴을 알았지만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한은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끝까지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의 권면 ( 20:28-30 )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권면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많은 신자들이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기때문에 장로들 스스로가 언어와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은 신자들이 세상이나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잘 돌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안에 흉악한 이리가 나타나 양떼를 아끼지 않으며,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는 복음에 상반되는 말을 하거나 복음을 왜곡시켜 자기들이 존경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근심하며 바울을 전송한 에베소 장로들 ( 20:38 )

이들이 근심하며 바울을 전송한 이유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장로들은 바울의 섬기는 모습, 집회를 주재하는 모습, 따뜻한 충고와 위로를 주는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근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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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 19:1-7

에베소는 아시아에서 상당히 알려진 도시 중의 하나로 그곳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인 다이아나 여신(Diana, 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으로 성경에는 아데미 여신으로 나옴-역주)의 신전이 세워진 것으로 유명하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에베소에 왔다(1절).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물을 주고 있는 동안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보다 즐겁고 만족스럽게 새로운 임무에 정진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볼로같은 유능한 사역자가 고린도에서 훌륭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둘러본 후에 상부 연안 지역을 경유하여 에베소에 도착하였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전에 남겨두고 떠났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다. 또한 바울은 그곳에서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진정한 메시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안내자였던 세례요한의 지도를 받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지식만을 지닌 상태였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12명이었다(7절).

1.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교리문답(2-5)

(1)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질문했다. 즉 그들이 성령의 계시를 알고 있는지 또한 그것을 인정하는지에 대하여 그들에게 물었다. 또한 성령의 특별한 은사가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부여되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말은 너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신했는가'라는 말이다. 모든 진실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가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잘못 알고,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위로를 받은 것으로 가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갖게된 후로 성령을 받았는지에 관하여 자신들을 엄격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2)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였다. 성령의 존재에 관한 문제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한다. 우리는 성령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구약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으며 그 약속이 적절한 시기에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성령이 참으로 주어졌는지에 관하여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복음의 빛은 아침 햇살처럼 서서히 비치는 것이며 점점더 분명하게 점점더 먼 곳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3) 바울은 그들이 성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세례를 받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절). 그들이 성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답변은 있을 수 없다. 성령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무지만큼이나 기독교의 진정한 고백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받은 세례에 관해 숙고함으로써 세례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음을 시인한다. 즉 그들은 요한의 몇몇 제자들에 의해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요한이란 이름으로 한 당파의 당수로 고수할만큼 무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표현되었듯이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5) 바울은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도와 의미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이들이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았듯이, 교육의 혜택을 얻지 못하여 무지의 상태에 있거나 잘못을 범하고 있는 자들은 사려깊게 지도되어야 하며 더욱 세심하게 배려되어야 한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회개의 세례였다는 견지에서 매우 훌륭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였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4절). 그러나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요한 이후에 오실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따라서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는 단지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외쳤던 그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비한 선구자에 불과했다. 요한의 세례는 여러분이 지나가야 할 현관에 불과할뿐 안식할 방이 아니었다.

(6)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깨닫고 이 새로운 사실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5절). 그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기를 원했으며 또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자들이 이전에 결코 그와 같은 세례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 바울이 그들에게 베푼 성령의 은사(6,7)

바울은 엄숙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들에게 안수를 베풀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7절). 그들은 예언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방언의 은사를 받음으로써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 그 나라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이들에게 이처럼 놀라운 변화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령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도 못한 자들이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Ⅱ. 바울의 에베소 활동 19:8-12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매우 분주했음을 알 수 있다.

1. 유대인 회당에서의 활동(8)

(1) 그가 복음을 전파한 장소는 그들의 회당이었다(8절). 그곳에는 아직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장소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유대인들의 집회소를 자주 출입하였다. 그가 회당에 들어간 또다른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으므로 그들을 올바로 인도하고자 기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내용 : 그는 인간에게 일어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지배하실뿐 아니라 사랑하고 계시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위대한 사실을 전한다. 더욱 특기할 것은 메시야 왕국에 관한 사실들이었다. 그는 이 왕국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3) 바울이 그들에게 전도한 방법 : 그는 논증적으로 변론과 이의에 대한 답변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했으며, 그들에게 믿어야할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는 감동적인 설교를 통하여 그들을 설득시켰다. 바울은 감동적인 설교자였으며 설득력의 대가였다. 그는 불굴의 용기와 거룩한 결단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즉 그는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

(4) 바울의 복음전도 기간 : 석달동안의 가간은 그들이 바울의 설교 내용을 숙고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5) 바울이 전한 복음전파의 성과 : 바울의 설득으로 그리스도를 믿게된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신앙을 고수했으며 기독교에 반대하는 그들의 편견은 확고했다. 이제 바울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의 말로써 그들의 양심을 자극하게 되자 그들은 곧 바울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지울 수 없는 반감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이 굳어져 믿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복음에 반대하도록 선동하는 일에 앞장섰다.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9절). 그들은 무리들에게 이 도에 반대하는 편견을 심어주었다. 설사 그들이 어떤 악행을 자행하지는 않았다해도,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온갖 악담을 퍼부었던 것이다.

2. 회당을 떠남(9,10)

바울은 가능한한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그 문제를 다루려고 했으나 사정상 그 회당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들을 전하는 것에 대해 야유를 퍼부음으로써 그를 쫓아냈다. 즉 그들은 개혁되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로부터 떠나게 되었다.

(1) 바울이 유대인들에게서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제자들을 데려다가 따로 세웠다. 바울은 그러한 모독자들의 독기서린 혀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그의 제자들을 격리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는 신자들을 그들과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을 그리스도 교회의 초석으로 삼기 원했다. 바울이 그곳을 떠났을 때, 제자들을 더이상 격리시킬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들은 그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 바울은 회당을 떠난 후에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다. 그는 회당을 떠남으로써 이중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1) 그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자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회당에서는 그가 매주 안식일에만 복음을 전했으나, 이제는 매일 강론할 수 있게 되었다(행13:43).

2)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개방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의 회당에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개종자들 밖에 없었으며 이방인들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집회를 가졌을 때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모두가 그곳에 참석할 수 있었다(10절). 일부 학자들은 이 두란노 서원이 유대인들의 신학교로써 대도시에 있는 회당의 별관과 같은 곳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곳을 벧미드라쉬(Bethmidrash) 즉 사문회장(査問會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곳이 한 두란노 서원에 부속된 이방인들의 철학 강의실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매우 편리한 장소로써 바울과 그의 제자들이 무료로 또는 사용료를 지불하고 사용했던 곳이다.

(3) 여기서 바울은 2년간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은 그가 회당에서 보낸 '3개월간' 이후부터 계산된 것이다(8절).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말했듯이(행20:31) 그 기간을 만 3년으로 계산한 것이다.

(4) 이로써 복음은 원근 각처로 전파되었다. 아시아에 사는 자는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0절). 에베소의 모든 거주민뿐만 아니라 아시아로 불리우는 광할한 지역의 모든 거주민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중심 도시였으므로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이러한 여건은 바울이 그 지방의 모든 촌락과 마을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 각처의 도시와 지방에서 온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호감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에 의하여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3. 하나님의 확증(11,12)

(1)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 등지에서 기적을 행하지 아니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 그가 기적을 행했다해도 왜 그러한 사실들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기적들을 에베소에서 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그 기적들은 특별한 기적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일상적인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 권능을 행사하였다. 또한 이 기적들은(모든 기적이 그러하듯)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기적들을 행한 자는 바울이 아니라, 바울의 손으로 그 기적을 행하게 만드신 하나님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3) 바울은 그에게 실려오거나 나아온 병자들을 치유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몸에서 취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치유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병자 곁에 이르렀을 때 그의 입은 옷자락을 만짐으로써 그 병자가 치유되었다는 기사를 알고 있다. 그때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이 빠져나갔음을 감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병자들은 바울이 입었던 옷자락에 의해서도 치유 받았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마 10:1). 또한 바울이 구원을 전했던 사람들도 그와 같은 기적의 능력을 지녔다.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2절).

 

Ⅲ. 유대인 마술사들의 망신 19:13-20

이 구절에서 우리는 사단의 정복에 관한 두가지 괄목할만한 예들, 즉 사단에게 강제로 사로잡힌 자들과 그에게 자진하여 굴종하는 자들을 보게 된다.

1. 사단의 종으로서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자들의 당혹(13-17)

그들은 '무당들'로서 그들의 악마적인 마술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1) 이와 같은 경거망동의 죄를 범하는 자들의 일반적인 특징 : 그들은 유대인이었으나 떠돌이 유대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운명을 점쳤고 마술과 주문을 통해 그들의 병을 고치며 우울증 환자나 정신병자를 치유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이 미신적인 유대인들은 그 마술적 술수들의 평판을 높이기 위해 그것들이 솔로몬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고 악랄하게 조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에 빗대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마 12:27)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2) 이러한 삶의 길로 접어든 에베소의 몇몇 사람들에 관한 특별한 설명 : 그들은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었다(14절). 그들의 조상은 대제사장으로 24반열중 한 반열의 우두머리였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대제사장의 아들들은 성전에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으며 자기 발전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그들의 불경죄 : 어떤 유대인들이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1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마를 축출했으면서도 그의 제자들을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 관한 기사를 보았었다(눅 9:49).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를 존중하며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사악한 일을 성취시키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고 말했다(13절). 이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다는 말이 아니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는 말이다. 그 말은 그 이름이 어떠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4) 불경건한 행위를 통하여 자초한 그들의 당혹 : 악령은 그 마술사들에게 날카롭게 반문하였다.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절). 너희들은 무슨 권한으로 그의 이름을 빌어 우리에게 명령하며,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그러한 권세를 주었느냐? 너희가 예수의 가르침을 증오하면서 어떻게 그의 능력을 선포할 수 있단 말이냐?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을 환호하면서 그 두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겼다. 그래서 그들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악에서 떠나지 않는 자들 모두에 대한 경고이다. 그들을 유혹으로 정복한 마귀가 그들을 또한 위협으로 정복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마귀와 대항한다면, 그 마귀는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름만 부르고 주문이나 마술을 사용함으로써 마귀를 물리치겠다고 생각한다면, 마귀는 우리를 이길 것이다.

(5) 이러한 사실이 널리 퍼짐(17절) :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17절). 이 사실은 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 즉 두려움이 그들 모두에게 임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이 섬긴 마귀의 간악함과 그들이 반대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목격하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으며, 주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이름이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 다른 사단의 종들의 회심 내용(18,19)

(1) 악행의 죄를 범한 자들의 자복(18절) :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죄를 고백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바울에게 와서 과거의 악한 생활과 은밀하게 범했던 많은 죄를 고백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자백하였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으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죄를 뉘우칠 때에만 우리가 실족케 한 사람과 하나님께 대하여 솔직하게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2) 마술사들이 그들의 마술책을 소각함(19절) : 술수를 부렸던 수많은 사람들은 마술과 점술을 연구한 자들이었다. 이 마술사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책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태워버렸다. 에베소는 이러한 마술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마술이 그토록 유행하던 장소에서 그러한 마술들을 반대하는 고귀한 증언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과거에 범한 죄악에 대하여 의분을 나타냈던 것이다. 즐거움이 이제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되어버렸다. 이로써 그들은 두번 다시 그러한 마술을 부리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러한 굳은 결의의 표시로써 마술책들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미련을 남길 수 있는 유혹을 제거했다. 진정으로 죄를 참회한 자들은 가능한 한 그와 같은 유혹의 기회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칠 소지를 미연에 방지했다. 또한 모든 책들을 불태워버리는 것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죄에서 돌이킨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 죄를 범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더우기 그들은 모든 마술책을 태워버림으로써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이 소각된 책들의 가격은 은 오만으로 추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그러나 그 책들이 악마의 서적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것들을 다시 판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이처럼 사악한 행위로부터 회심하게 된 기쁨을 공개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 회심자들은 함께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책들을 불태워버렸다. 그들은 대로의 교차 지점에서 모두 함께 책들을 태워버리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가 그들에게 넘치도록 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3. 복음전파의 진전과 그 성과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20)

이와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절).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는 것을 보는 것은 축복된 광경이다. 또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게 됨으로써 복음이 흥성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복된 일이다. 복음을 통하여 더욱 많은 변화가 이루어질 때, 복음은 성장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을 가장 완고하게 반대한 자들이 복음에 복종하게 될때, 그 복음이 흥왕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음을 보게 된다. 극심한 타락이 근절되고 장기간 지속된 악습이 타파되며 쾌락과 탐욕과 유행을 추구하는 죄들이 사라지게 될 때, 복음은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러한 복음을 통하여 계속 승리해 나아간다.

 

Ⅳ. 에베소의 소요 사건 19:21-41

(1) 바울은 그가 다른 곳으로 가려던 때에 이곳 에베소에서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된다.

1) 장소를 옮기려 했던 바울의 의도(21,22절) : 그는 하나님을 전파하기 위한 방대한 계획을 세웠으며, 가능한 한 세력권을 확장함으로써 복음을 널리 전하려 하였다.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의 교회들에 대한 방문 계획을 세웠다.(21절). 그는 그곳에 교회들을 설립했으며, 이제 그곳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 생각으로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안내해 주는 성령의 지시에 따르건 간에 성령안에서 계획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사업이 그곳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가서 보고자 하였다. 다음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의 형제들을 방문한 다음, 로마로 가서 그곳을 보겠다는 말은 구경하겠다는 표현으로 당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겠다는 것이었으므로 이 말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둘러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로마의 선한 사람들은 바울이 보기 원했던 그 도시의 영광이었다. 또한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파송한 것은 그의 마게도냐 방문 계획을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는 아시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그가 에베소에서 장기간 직면했던 곤경이 그의 목적을 관철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가 그곳에 그처럼 오랫동안 머무르면서도 조용히 보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곤경에 처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서신에서 '에베소의 맹수와 더불어 싸운'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5:32). 그리고 그는 에베소 근접한 아시아에서 당한 고통에 대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후 1:8,9)는 표현을 쓰고 있다.

(3)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고난속에서 그는 부상을 입었다기 보다는 위협을 당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적지 않은 소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23절).

1) 이 사건은 아데미(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 신을 알테미스로 부른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아데미'로 표기-역주) 숭배자들을 이끌어냈다는 이유와 그 신전에서 종사한 은장색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비롯된 바울에 대한 커다란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대표적인 불만자는 은장색이었던 데메드리오였다. 그의 업종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드는 일이었다(24절). 어떤 학자들은 이 은감실이 아데미의 초상이 새겨진 기념패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순금으로 만든 그 신전의 조상(彫像)으로서 그 안에는 아데미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베소 신전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이 신전 또는 성소가 새겨진 소형 기념패를 구입하여 집에 가져갔다. 직공들과 장인들이 사람들의 미신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이익을 취했는가를 보라.

둘째, 데메드리오가 호소한 대상자들은 행정관들이 아니라 군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이 사람들에게 바울을 대적할 것을 충동하였다.

셋째, 데메드리오의 불평과 항의는 매우 노골적인 것이다. 그는 은감실을 만드는 것이 아데미 숭배자들에게 매우 필요하며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업에 있는데(25절). 사람에게 있어서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직업을 선망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불법적인 직업과 그 직업들을 통해 획득한 엄청난 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를 단념시킨 바울을 고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6절). 기술자가 그것을 만들었으므로 그것은 신이 아니라는 말 이상 분명하고도 자명한 진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진리는 이교적이며 무신론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사상을 고수한 바울은 범인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결과는 비단 에베소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전(全)아시아 지방에서도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데미 숭배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서도록 권면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법 테두리 안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는한, 아무리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것일망정 그것을 위해 다투려는 자들이 있다. 데메드리오는 그들의 장사가 몰락하게 될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만일 이 가르침이 신망을 얻게 된다면, 우리 모두는 파멸할 것이며 동시에 상점도 문을 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에 대하여 강렬한 열정을 간직한 것처럼 가장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이 영업만 위험할 뿐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여기에서 그의 궁극적 관심이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을 받지 않고 그의 위엄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그 여신의 명예가 추락되는 광경을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아데미 신이 그토록 숭배될 수 있었는가? 그 신전의 측면은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그것의 장엄함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또한 그 신전의 사면에는 엄청난 수효의 조상(彫像)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온 아시아와 천하가 그 여신을 숭배하였다.' 따라서 숭배의 기강 확립은 반드시 필요했으며 바울의 우상 숭배의 발언은 저지되어야 했던 것이다.

2) 이러한 불평으로 야기된 대중의 분노 :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과 복음 전도자들에 대한 극심한 불만이 있었다. 저희가 이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28절). 그 기술자들은 그들의 사업과 우상이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발끈하였다.

둘째, 그들이 섬기는 여신의 명예에 대한 엄중한 경계가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28절). "바울로 하여금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신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대해 납득할만한 증거를 제시하게 하라.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우리는 그 곁에서 살리라. 우리는 우리 고장의 종교를 지키고 또한 지켜야만 한다."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은 그들보다 더욱 열심을 품어야 할 것이다.

셋째, 그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혼란이 일어났다(29절). 이렇게 온 성이 요란하게 된 것은 거짓 종교에 대한 무절제한 열정의 자연적이고도 공통적인 결과였다.

3) 이러한 분노로 흥분해 있던 군중의 소요는 다음의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그들은 바울의 몇몇 동료들을 잡아가지고 급히 연극장으로 들어갔다(29절). 그들에게 끌려간 자들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였다. 가이오는 더베 사람이었다(행 20:4). 아리스다고는 행 20:4절에서도 언급되었으며 골 4:10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마게도냐에서 바울과 함께 왔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의 동료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때문에 그들은 끌려갔던 것이다.

둘째, 그들로부터 도피해 있었던 바울은 그를 대신하여 그의 친구들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 가운데로 들어가기 원했다.' 이것은 관대한 정신의 증거로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했던 것이다.

셋째, 그의 친구들은 바울이 그렇게 행하는 것을 간곡히 만류했다. 바울의 다른 친구들은 그가 스스로 위험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31절). 그들은 아시아의 관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었는지 혹은 바울을 진실하고 선한 자로 간주한 지지자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바울의 친구들로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들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위에 보다 많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친구의 입장이다. 그의 친구들은 바울에게 자기 보존의 법칙에 복종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또한 이 사실은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한 위험을 피해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는 생명을 내놓아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으나 생명을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넷째, 군중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32절).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였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와 같은 경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올 것이다. 따라서 무리의 수효는 외치는 자와 군중들로 인하여 눈덩이처럼 커졌으며 더욱 많이 불어나게 되었다.

다섯째, 유대인들은 이 폭동에 개입하고자 했을 것이다. 당시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폭동을 주동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폭동이 발발되었을 때, 그들은 그 폭동속에 개입할만한 충분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33절). 그들은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이끌어내어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반대하는 유대인의 입장을 표명해 줄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다. 그 요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데메드리오와 은장색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적으로서 바울의 일행을 공격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 당신은 우리 대신 나아가 바울이 우리의 종교적인 대적임을 말하라." 이것을 말하도록 유대인들은 알렉산더를 앞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알렉산더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대변하도록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바울의 적이듯 이곳의 유대인 자신들도 바울의 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였다. 알렉산더가 손짓한 것은 군중들로 하여금 바울을 반박하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킬 목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단행되는 곳에 유대인들이 없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면 유대인들은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알렉산더가 본래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유대교로 전향한 배교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을 고소할 수 있는 적합한 인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바울에게 엄청난 악행을 범한 '구리장색 알렉산더'로서(딤후 4:14) '사탄에게 내어 준'자였다(딤전 1:20).

여섯째, 이 기회에 기소자들은 바울의 친구들에 대한 기소를 내버려 두고나서 그들의 여신을 찬양하는 함성을 질렀다(34절). 그들이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아데미 숭배를 반대한 적인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함성을 질렀다. "위대하신 에베소의 아데미여! 우리의 여신을 모독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이든 간에 모두 필요 없다. 우리는 그 여신을 찬양할 것이다." 이 함성은 두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충분히 논박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신성한 진리들이 종종 소음이나 아우성 또는 대중의 분노 따위의 하찮은 것들에 의해 비방되기도 한다.

(4) 서기장의 사려 깊은 경계에 의해 이 폭도들이 진압되고 해산되었다. 그 소요를 진정시키려는 그의 엄청난 노력 끝에 사태는 무마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화해의 연설을 행했다.

첫째, 그는 아데미 신이 에베소 사람들의 존경받는 여신임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춘다(35절). 그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그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 그렇게 고함을 지르거나 분투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에베소 도시가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상을 숭배하는 도시였음을 알고 있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매우 호화스럽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 신전 안에 있는 아데미 신상은 신전보다 더 귀중히 여겨졌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신상을 쓰스(쥬피터)가 보낸 것으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 어떤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전했기 때문이었다. 아데미 신상은 기억조차 하기 힘든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상을 쓰스가 보낸 것으로 믿도록 선전했던 것이다. 서기장은 "이 도시가 아데미를 숭배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매우 정중히 말한다. 또한 그는 "이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므로 여러분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둘째, 그는 그들의 종교가 요구하지 않는 모든 폭력과 소요 사태에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홀히 아니하여야 하리라(36절). 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에 있어서 항상 일의 진행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또한 항상 조급하고 경솔하게 행동을 취하지 말고 여유를 갖고서 생각할 줄 알며 사태를 진정시키고 수습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서둘러서 결정한다면, 생각할 여유가 있을 때 후회할 것이다.

셋째, 그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게 가해졌던 오명을 씻어주었다(27절). 그 서기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이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왔다. 너희는 그들의 범죄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하는가? 그들은 교회에 침입한 도둑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데미 신전이나 그곳의 보물을 파손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너희의 여신에 대한 신성모독자들도 아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비록 마음에 맞지 않는다해서 너희에게 지독한 욕설을 퍼붓지도 아니한 그들을 이처럼 폭력으로 학대하려느냐?" 그들이 변론과 논증으로 모든 힘을 다하여 대항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었다. 만일 그들이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신전에 있는 우상은 자연히 파괴될 수 있을 것이다. 우상 숭배적인 교회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그들에 대한 지나친 폭언을 삼가면서 온순한 가르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며 진리로 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무절제한 열심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서기장은 그들로 하여금 법률에 정해진 정식 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다. 공안이 잘 유지되고 공의가 실천되며 모든 잘못이 시정될 수 있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나라도 어느 다른 백성들처럼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사적인 침해를 받았다면 그들은 그 문제를 재판관들과 법정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만일 데메드리오와 은장색 업자들이 억울한 손해를 입었다면, 그들은 법적 절차를 밟아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행동을 취해야 했을 것이다. 법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대리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대리자들의 임무는 양편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대중의 마음에 들도록 판결하는 경우가 없어져야 한다. 만일 불평이 대중의 억울함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폭도들의 소요 사태를 통해 해결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대표자 회의를 통하여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39절). '만일 그 외의 무엇을 원하거든 민회에서 정식으로 결단할지라'는 말은 당국자들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라는 것이었다. 개인들은 공적인 문제에 주제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서기장은 그들이 이러한 폭동으로 인하여 빠져들게 될 위험성에 관하여 인식시킨다(40절). "오늘 일어난 이 소요 사태가 문제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해 보고할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정도를 벗어난 것이므로 그 사건을 더이상 진전시키지 말도록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보다 인간의 심판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소요들을 하늘과 땅의 심판자에게 즉시 맡겨야 한다는 이유를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무절제한 욕구와 열정의 혼란 사태들을 진정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퍽 다행스런 일일 것이다.

여섯째, 서기장은 그들의 폭동적인 집회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조속히 해산할 것을 충고한다.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41절). 여기서 공공의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가 역사하신다는 사실과 그가 인간의 영혼들을 무한한 권능으로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따라서 이 세상의 질서가 어느 정도 유지됨으로써 인간은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바다 물고기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막상 폭동이 발발하면 폭도들은 다스리거나 길들일 수 없는 야생동물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를 항상 그와 같은 포악한 상황속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할 근거를 우리는 찾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가를 살펴 보라. 이 서기장은 바울과 전혀 친분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분별력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 해설

에베소에서의 전도 사역 ( 19 )

본장에서는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살펴보게 됩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불완전한 믿음을 온전케 하며, 제자들을 따로 세워 말씀으로 가르치며 훈련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어 갔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험난한 난관속에서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을 붙드셨고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1. 에베소에 돌아온 바울

1)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은 안디옥을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거쳐 가면서 제자들을 굳게 했습니다. 바울의 3차전도 여행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아볼로와 그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에 대해 아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과 그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의 뜻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므로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a.약속된 성령(요14:16)

2) 온전한 그리스도인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초기 기독교회 내에서 발생한 변칙적인 것을 교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에베소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아볼로가 구약 성경에는 능통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를 좀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줌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들로 세우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a.성령 세례(고전12:13)

b.말씀 선포(딤후4:2)

 

2. 예수의 이름

1) 두란노 서원

바울은 오랜기간 동안 에베소에서 일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에베소에 이른 바울은 이제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회당에서 복음을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믿지 아니하고 그 도를 비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약 2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도 방법은 다른 도시에서의 것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바울은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고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당시 바울을 돕는 사람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고 디모데와 에라스도가 함께 있었습니다.

a.불신앙(마13:58)

b.하나님 나라의 전파(막1:14)

2)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 몇가지 중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중에 바울을 통해 나타난 것은 병고치는 이적이었습니다. 이때에는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닿은 병든 사람의 병과 악귀가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희한한 능력이었습니다.

a.악귀가 떠남(막16:17)

3) 유대인 마술사들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적 행한 것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바울을 모방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악령은 그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이김으로 그들이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많은 마술사들이 죄를 고백하고 마술을 버리고 그들의 책을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왕했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더많은 사람이 주께 나아왔고 큰 세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a.귀신들의 분별력(막1:24)

b.귀신들의 증거(눅4:41)

 

3. 연극장에서의 소동

1)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데메드리오

앞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바울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에 미리 보낸 후에 에베소에서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것은 은장색 데메드리오로 인한 위기였습니다.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당을 은으로 만들어 많은 수입을 올렸는데 바울의 복음전파로 사람들이 우상을 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에 데메드리오는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아 난동을 부렸습니다. 아데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먼 옛날부터 숭배해 오던 모신에게 에베소인들이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더욱이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신전은 오래된 아데미의 상이 새겨져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거대한 건물이었습니다. 연극장에 모인 무리들은 수입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대중들에게까지 번져 수많은 군중이 시위하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동행하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연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a.우상의 제작(롬1:23)

b.인간의 분노(약1:20)

2) 서기장의 소요 진압

이 거대한 야외 연극장은 2만 4천명 정도를 수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시민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중들의 모임은 정규적인 모임이 아니라 로마의 처벌을 초래할만한 불법 집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의 서기장이 우려하면서 군중들을 진정시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군중들은 그곳에 왜 모였는지도 모르면서 두 시간 동안이나 구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관원들이 연극장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말림으로 이 소동으로 인해 큰 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당시 복음의 위력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a.지혜로운 모사(행5:35)

b.경솔함에 대한 경책(전7:9)

 

결론

복음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희한할 정도의 큰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였기에 후에 힘있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모방하려 했던 마술사들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를 보이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경건은 모양이 아닌 능력임을 분명히 교훈하고 있는 바울의 사역을 분명히 엿볼 수 있습니다.

 

# 핵심

19:1-20

3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인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에 관한 기사이다.

 

# 묵상

에베소의 제자들과 바울 ( 19:2, 3 )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세례는 이전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겠다는 뜻을 서약하는 의미로, 온 생애를 드려 주님께 헌신할 것을 결단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받았던 요한의 세례는 성령 세례를 예비하는 것일 뿐 구원을 이루기에는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안수와 성령 강림 ( 19:6 )

바울이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은사를 주시도록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 기적은 에베소에 복음이 잘 전파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로써 에베소의 제자는 전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의 바울 ( 19:8, 9 )

에베소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했기 때문에 바울은 장소를 옮겨 말씀을 강론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두란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완악함에 물들지 않도록 제자들을 따로 세웠으며 두란노 서원으로 옮김으로써 오히려 더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된 계기 ( 19:11-20 )

당시 에베소에서 바울이 악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자 여러 마술사들이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그러한 행위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들가운데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악귀들린 사람이 예수님과 바울은 인정하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의 마술을 제어하고 이김으로써, 에베소 사람 사이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백성은 두려움에 떨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은 마술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은 오만이나되는 가치의 책을 모아서 불살랐습니다.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염려 ( 19:24-27 )

그가 염려한 것은 자기들의 직업이 천해지는 것과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을 받게 되고 그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겉으로는 아데미를 섬기는 열정으로 바울을 대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데미가 우상으로 여겨져 버림을 받으면 자신의 돈벌이에 지장이 있을까봐 염려한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주로 섬기던 신은 아데미입니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아데미는 달의 신입니다. 이는 그 모습이 유방을 많이 가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생식을 주관하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많은 여행자들이 원근 각지에서 몰려듭니다.

서기장 ( 19:35 )

에베소의 소동하는 무리들을 진정시킨 사람은 서기장이었습니다. 서기장은 시의 집회를 관리하고 그 결과를 총독에게 보고하는 책임을 맡았던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방의 서기장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아 우리는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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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고린도 방문 18:1-6

우리는 바울이 아덴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거나 어떤 학대로 인해 그곳에서부터 도피해 갔다는 사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는 거기서 냉대를 받았으며 선을 행할 수 있는 전망이 거의 없었다. 이제 그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였다.

1. 바울의 생업 활동(2,3)

(1) 비록 그는 학자였으나 수공업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는 천막 제조업자였다. 유대인들은 그 자손들에게 지식과 재산을 물려주기도 했지만,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직업 교육을 시키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빵을 얻기 위한 정직한 직업은 결코 천시될 수 없는 것이다. 청년기에 천막 제조 기술을 습득한 바울은 비록 활용하지는 않았어도 그 기술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2) 그는 그가 개척했던 교회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수도 있었으나 자립 목회를 지향하여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하였다. 이것은 바울이 재정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해서 그를 돕지 아니한 교회들보다, 지원을 요청하지 아니한 바울 자신의 뛰어난 점이다. 바울이 얼마나 겸손했고 얼마나 근면했는가를 보라. 그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일을 행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바울이 그의 사역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보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짐(고후 11:7)이 되지않도록 하기위해 손수 노동을 했던 것이다.

(3) 바울은 그 직업의 대가였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날품팔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직업을 가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일했다. 그래서 그는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당을 받았다.

(4) 바울 자신이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노동에 종사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26절).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동역자들로 정하였다(롬16:3).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을 선택하여 그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아굴라는 유대인이었으나 본도 태생이었다(2절). 그는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고린도로 온 사람이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떠난 이유는 로마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킨다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의 칙령 때문이었다. 유대인도 기독교인을 박해했는데, 이방인이 기독교인과 유대인 모두를 박해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2. 본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함(4,5)

(1)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였다. 사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했는가 보라. 그들은 힘이나 폭력이 아닌 정당한 논증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은 합리적이면서도 성경에 입각한 설교자였다.

(2)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 이 말은 그의 설교의 절박감을 나타낸다. 바울은 그들에게 구원이 없음을 말하지 않고 다정스런 설득 형식으로 자신의 논증을 전개시켰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장점이다. 그가 그들을 설득시켰다는 말은 그들을 설득하여 굴복시켰음을 뜻한다. 그들 중의 일부는 바울의 조리있는 강론에 설복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3)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이 그에게 왔을때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진지하게 전했다(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오매 그들은 이곳 고린도에서 바울을 지원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전파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이처럼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였다.

3. 복음을 대적한 유대인들과의 결별(6)

(1)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반대를 고집하였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였다'(6절)라는 말은 상징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복음에 반대하여 전투대형으로 정렬했다란 의미이다. 그들은 복음에 논증으로써 대항할 수 없었으므로 구실을 내세워 욕설하며 훼방하였다.

(2) 이로써 바울은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들이 불신앙속에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증거했던 바울이(5절) 이제는 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6절). 그래서 그는 의복을 흔들어 먼지를 털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절대로 말씀을 증거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이로써 바울은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을 완수했고 그들의 영혼의 피에 대해서는 깨끗하였다. 그는 충성된 파수꾼처럼 그들에게 경고했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불신앙으로 멸망한다해도 바울에게는 그들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다. 어떤 사역자가 죄인들을 경고하는데에 신명을 바쳤다고 양심에 증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인에게 큰 위로가 된다. 만일 그 유대인들이 계속 불신앙을 고집한다면, 그들 모두는 저주를 받게될 것이며 분명히 멸망하게될 것이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6절). 비록 어떤 일로 해서 그들이 복음에 굴복하였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 바울은 비록 그들과 결별했으나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6절). 최초로 초대받았던 손님들은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길가에서라도 손님을 초청해야할 상황이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타락은 이방인들의 풍요로움을 가져왔다.

 

Ⅱ. 바울의 고린도 활동 18:7-11

(1) 바울은 그의 숙소로 옮겼다. 그는 회당에서 쫓겨나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다(7절). 이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함께 거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이 이 사람의 집에 간 것은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 정직한 사람은 바울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회당에서 설교할 자유를 얻지 못했으므로 어떤 개인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1)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우상 숭배자는 아니었다.

2) 그 집은 회당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바울이 회당의 유대인들과 가능한 한 가깝게 지내려 했음과 그들이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경우 그들에게 되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한 것은 그의 사랑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2) 그러나 바울은 곧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대인으로 한 저명 인사였던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8절).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즉 유대인들의 회당장이 복음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유대인들은 복음에 반대하고 훼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당장의 경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까지도 복음을 믿게 되었다. 이방인이었던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말씀을 듣고 믿으며 세례를 받았다. 혹 어떤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갔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호기심에 이끌려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은 들음으로 믿었고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3) 바울은 환상을 통하여 고린도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9절).

1) 주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파해야할 그의 의무와 책임을 새롭게 인식시켰다. "유대인들을 두려워말라. 즉 그 성의 상관들도 두려워말라. 네가 복음을 전하고 담대히 행동해야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졸장부처럼 소심하게 외치지 말고 분명하고도 용기있게 외쳐라. 크게 외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2) 바울은 주님이 그와 함께 임재하심을 확신하고 넘치는 생기와 활기를 부여받았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너로 하여금 어려움을 견디어 내게 하고 너의 모든 두려움에서부터 너를 이끌어 낼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일할 것이며 기적을 통하여 너의 말을 확증하리라."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은 두려워하거나 위축될 필요가 없다.

3)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보호를 보증하셨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할 자가 없을 것이니(10절). 그리스도는 바울이 어느 누구의 공격도 받지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12절에서 바울이 공격을 받고 재판 자리로 소환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다만 그리스도는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4) 주님은 바울에게 성공의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그러므로 그 일에 즐거움을 갖고 용기있게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이 성에 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감화를 받고 부름에 응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장래에 그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알고 계셨다. 설사 그들이 그리스도를 모른다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그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은 그의 백성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 중 단한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 성이 매우 불경스럽고 악하며 이곳의 비너스 신전때문에 더욱 악이 넘쳐있다 해도, 모두가 쭉정이처럼 보이는 이 무더기속에서도 알곡이 있는 법이다. 즉 온통 불순물로 뒤섞인 것 같은 이 광석속에도 금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지방 같은 곳에서조차도 수많은 백성들을 소유하셨다는 점을 인식할때, 우리는 어떤 장소에 있든지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

(4) 바울은 주님의 이러한 격려에 힘입어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11절). 바울이 이처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복음밖에 있던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가 고린도에서 택하신 백성들은 점진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비록 그들의 일이 한꺼번에 성취되지 않는다해도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할 것이다.

2) 복음안에 거하는 자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개종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할 필요가 있었다. 좋은 씨가 들에 뿌려지자 곧 적이 와서 가라지를 뿌리듯이 거짓 사도들이 나타났으므로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가라지와 같은 거짓 사도들을 그토록 비난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자마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신을 썼고 뒤이어 두번째 서신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사역자들은 훌륭한 설교로써뿐만 아니라 훌륭한 서신을 씀으로써도 그리스도를 섬겨야할 것이다.

 

Ⅲ. 갈리오 총독 앞에 선 바울18:12-17

여기서 우리는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어도 약간의 권리를 침해당한 바울의 기사를 보게 된다.

(1)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소로 로마의 총독 갈리오 앞에 소환되었다(12,13). 이 총독은 아가야 지방의 통치대행자 갈리오였다. 그는 저 유명한 세네카의 형으로 매우 관대하고 청렴하며 고결한 기품을 소유한 자였다. 그래서 그는 선량한 갈리오로 불리웠을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갈리오 앞에 소환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12절).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한 주모자들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분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만장일치로 바울을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분노와 폭력으로 그렇게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바울을 재판의 자리로 급히 끌고 갔다. 그들은 갈리오 앞에서 바울에게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긋나게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13절). 그들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혀 공경하지 말 것을 권했다는 죄목으로 고소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어긋나게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권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고소했다. 그러나 그 고소는 부당한 것이었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성전 봉사에 관한 율법을 준수할 수 없었으며, 바울은 그들의 회당예배에 대해 전혀 반박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바울이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쳤을 때, 그들은 마치 그가 율법에 어긋나게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친양 그와 싸우려고 했던 것이다.

(2) 갈리오는 그 기소를 기각하고 그 문제를 심리(審理)하려 하지도 않았다(14,15). 바울은 피고로서 답변하려 했으나, 재판관은 이 기소 사건에 대해 어떠한 언도도 내릴 수 없다고 단정하여 그 문제를 심의하지도 않았다.

1)갈리오는 심리의 대상으로 판단된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을 집행할 태세가 갖추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 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권리를 옹호해 주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리는 것이 행정장관의 임무이다. 또한 비록 고소자들이 마땅한 모든 격식을 갖추지 않는다해도, 행정장관은 그들의 고소 내용을 청문해야 한다.

2)갈리오는 자신의 사법권밖에 있는 어떤 사건으로 자기에게 소송을 제가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15절). 그래서 그는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었다'(16). 갈리오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정당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재판을 거부한 그의 태도는 칭찬4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련된 사건에 관한 한, 이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었고, 자신이 그들의 악의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꺼려하였다. 갈리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율법과 종교에 대해 경솔하게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임을 알아야 했다. 갈리오는 마치 성경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에게 수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모르는듯 말한다.

(3) 헬라인들이 소스데네에게 능욕을 가했으며 이에 대해 갈리오는 무관심을 표명했다(17절). 무리들은 법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소스데네를 잡아다가 재판석 앞에서 때렸다.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억측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는 소스데네와 그를 능욕한 헬라인들의 정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소스데네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이 가장 그럴듯 하다. 바울의 친구이자 고린도의 저명 인사로서 소스데네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그를 형제라 불렀으며 그와 연명으로 편지를 띄웠다(고전1:1). 그는 회당장으로 전해진다. 그를 능욕한 헬라인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복음을 반대한 유대인들과 합세한 자들이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4,6절).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너무나 분개한 나머지 소스데네를 때렸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재판 자리 앞에서 그를 때린 행위는 갈리오에 대한 반발의 표시였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갈리오를 무시하고 있으며 그가 그들의 집행자로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가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그들의 의지를 그에게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은 물론 재판관들도 그 사건을 비난하였으며 백성들 또한 그리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 일에 상관하지 아니하였다'(17절). 만일 그의 이러한 태도가 악한 자들의 도전을 무시한다는 의미에서 취해진 것이었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선량한 사람이 능욕당하는 광경을 보고도 무관심했던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의 냉담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갈리오는 재판관으로서 소스데네를 보호해야만 했으며, 그를 폭행한 헬라인들을 규제하고 처벌해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보거나 듣고도 그들에게 동정이나 관심조차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종교에 대한 그들의 관심의 여부를 떠나서 선한 사람이 자신의 면전에서 능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 일에 관계치 아니한 갈리오와 똑같은 인간들이었다.

 

Ⅳ. 에베소와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 18:18-23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도 매우 분주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 바울의 고린도 작별(18)

(1) 그는 고린도에서 어려움을 당한후에도 당분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박해의 폭풍이 일어나자마자 떠났었다. 고린도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고린도에서 일어나는 박해의 폭풍은 일어나자마자 곧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11절). 그는 자신의 노고가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고 더욱 정진하였다.

(2) 바울은 그들을 떠날때 진지하고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과 작별했다.

(3) 바울이 떠날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갔다. 그들은 떠나려는 의사를 품고 있었던 것 같으며, 또한 한장소에 장기간 체류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한 의도에서 나온 생각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선한 의도를 의심은 할지라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4)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떠난 자들이 기항하는 항구인 겐그레아에서 바울 혹은 아굴라(원문에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가 나실인의 서약을 실행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18절). 유대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경우에 그 일을 성전 안에서 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장소에서도 행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바울이 유대인들과 유대를 나누기 위해 그 서원을 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유대인을 얻기위해 유대인이 되었던 것이다(고전 9:20).

2. 바울이 소아시아의 대도시였던 에베소를 방문함(19.20)

(1)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에베소에 남겨두었다. 그들은 에베소에서의 복음전파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거기서 당분간 머물 예정이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그들에게 돌아오면 그를 극진히 영접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2) 거기서 그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청중이 아닌 설교자의 신분으로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하였다. 비록 바울이 고린도의 유대인들을 포기해 버렸지만, 그는 다른 지역의 유대인 회당들을 회피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들을 복음선포의 첫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우리는 어떤 단체의 일부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고해서 그 전체 집단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3)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기를 간청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있기를 청하되(20절). 이 유대인들은 고린도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기품이 있고 잘 교육받은 자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아주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두셨다는 증거였다.

(4) 당시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작별하여,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지키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그 절기가 어떤 절기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5) 바울은 이 여행을 마친후에 에베소에서 당분간 시간을 보내겠다는 그의 뜻을 밝혔다. 한가지 선한 일을 끝낸후 다른 일을 모색함에 있어서 기회를 마련해 놓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에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이란 단서를 삽입했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것을 성취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약속을 하나님의 뜻에 의뢰하여 정해야 한다.

3.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21,22)

방문 일정은 짧았다. 그는 바다를 건너 예루살렘 근처의 항구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라에서 상륙하여 올라가(21,22절). 그는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다. 필자는 여기서 언급된 교회가 분명 예루살렘 교회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예루살렘 방문은 친선 방문으로 그들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선의를 순수하게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친구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옛친구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전에 맺은 우의를 다짐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쁨이 된다. 그는 그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으려고 애썼으며, 그들이 서로 위로하고 서로의 성공을 기원하며 축하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의 방문에 불과했다. 그는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으며 그들과 함께 머무르지는 않았다. 이 여행은 단지 일시적인 방문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흩어져 분산되어 있다. 그러나 때로 서로 만나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4. 바울이 이전에 복음을 전파한 지방들을 경유하여 돌아옴(23)

그는 안디옥에 내려가 당분간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최초로 파송된 장소였다(행13:1). 그는 안디옥으로 내려가 그곳의 사역자들을 봄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고자 했다. 신실한 사역자가 그의 동역자들과 어울려 잠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기분전환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것이다.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23절). 바울은 이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했으며 교회들을 세웠다. 바울이 이 시골 교회들(갈 1:2, 이 교회들이 갈라디아의 어느 도시에 위치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을 차례로 방문한 목적은 그가 심고자 노력한 교회들에게 물을 주고 모든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 보인 바울의 호의는 그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강건케 하는 설교도 전했다. 제자들은 용기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사역자들은 기진맥진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강건케 해야 한다.

 

Ⅴ. 아볼로의 등장 18:24-28

이 거룩한 역사는 바울의 여행 기사와 그가 에베소에 가서 아볼로를 만난 기사를 전해준다.

1. 아볼로의 인물 소개(24)

(1) 그의 양친은 모두 유대인이었으나 그는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2) 그는 공적인 봉사활동에 매우 적합한 자였다. 또한 그는 구변이 좋은 자로서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 그는 상당한 어학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성경에 능통한 자로서 에베소에 왔으며 성경 해석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펼치지 않고도 즉석에서 본문을 인용할 수 있으며, 그것을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 인용하였는가까지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 그는 성경 본문의 뜻과 의미를 이해하였고 그것들의 사용법과 적용법을 알고 있었으며, 성경을 근거로 강력한 변론을 전개할 수도 있었다.

(3) 그는 '주의 도를 배웠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당히 알고 있었으며,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 기독교의 근본 원리도 습득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한 구원의 길에 대해서도 얼마간 가르침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할 사람들은 우선 자신들이 주의 말씀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것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우리의 입으로 주의 말씀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오직 우리는 주님이 가셨던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4)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 따름이었다. 그는 주의 길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주의 길에 대한 준비단계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뿐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

2. 에베소에서의 아볼로의 활동(25,26)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재능이 에베소에서 사용되고 증진된 사실을 보게 된다.

(1)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자신의 재능을 공개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쓰임받는 것을 기뻐하였다.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가르치나(25절). 비록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받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받은 은사를 활용하였다. 우리는 아볼로가 훌륭한 두뇌와 언변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즉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성경에 능한 자였다. 이제 그가 무엇을 통해서 설교자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갖추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생명력 있고 열정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빛과 열로 충만한자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부름을 받았을 때의 그의 솔선과 설교시의 그의 열정에 나타났다. 그는 진지한 자로서 설교했으며 자기 일에 충성했다. 열정적인 사람들은 지식이 약하며,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들은 생명력과 열심이 없다. 그러나 아볼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충만한 성숙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근면한 노력형의 전도자였다. 그는 부지런히 말하고 가르쳤다. 그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하나님이나 회당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한 그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사전에 면밀히 검토한 후에 말씀을 전했다. 그는 복음적인 전도자였다. 비록 그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초였다. 또한 그는 복음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 즉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내용에 관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용감한 전도자였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26절). 이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묘사된다. 그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권력자들도 참석해 있는 회당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을 증거했다.

(2)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26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가 회당에서 설교하는 내용을 들었다. 그들은 그 모임에 부지런히 그리고 빠짐없이 참석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격려해 주었다. 이처럼 장래가 유망한 젊은 사역자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아볼로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그를 깔보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헐뜯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그를 애숭이 전도자라고 칭하거나 강단에 설 자격이 없는 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에 대한 그들의 소견을 밝히고 이전에 그가 지녔던 혼동된 개념에 대해 명확하고도 조직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애를 보게 된다. 아굴라가 회당에서 말하기를 꺼려한 이유는 아볼로처럼 대중 앞에서 활동할 수 있는 그러한 재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볼로를 철저히 교육시켜 그의 설득력있는 말로 그의 지식을 전하도록 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젊은 사역자들을 사적인 대화로써 훈육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봉사에 속한다. 우리는 아볼로에게서 탁월한 겸손의 예를 보게 된다. 그는 매우 총명한 젊은이로서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고 학식을 겸비한 자였다. 따라서 그는 능력있게 외쳤으며 주님의 뒤를 따랐다.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비록 기술자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지적, 경험적으로 충분히 말할 수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훈육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신의 결점과 잘못을 그들앞에서 기꺼이 인정했던 것이다. 젊은 법학도들이 오랜 경험을 쌓아 개업한 변호사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듯이, 젊은 신학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믿었던 신자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서 많은 것을 얻게될 것이다. 아볼로는 그가 비록 주의 도를 배웠지만 전에 획득한 지식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더욱 많은 것을 알려고 애써야 한다.

3. 아볼로의 고린도 교회 봉사(27,28)

이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를 섬기는 일에 박탈된다. 바울은 복음 전도의 수레를 고린도 지방에 고정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그들은 확신을 얻는 것이 필요했다. 바울이 떠난 지금 아볼로가 남아 이 공백을 메꾸는 것이 온당했다. 그는 심는 것보다 물을 주는 일에 더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에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일을 하고자 원했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27절). 아볼로는 거기서 어떤 임무가 자신에게 부과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그 길로 인도하셨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가는 것을 격려했다. 또한 그들은 그에게 추천서를 써 주었다. 에베소의 사역자들은 아볼로가 나감으로써 많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가야 사역자들의 유익을 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가야 사람들의 그들에 대한 관심을 이용하여 아볼로를 소개했던 것이다. 아볼로는 이 직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신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27절).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바로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믿음은 '그들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인 것이다. 은혜를 통하여 믿게된 자들도 여전히 도움이 필요하다. 신실한 사역자들은 은혜로써 믿게된 자들을 여러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을 돕는 일이 그 사역자들의 임무이다. 불신자들은 매우 분통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반대 의견은 충분히 답변되었으므로 그들은 입을 다물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은 수치로 가득차게 되었다(28절).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8절). 그는 진지하게 그리고 고통을 무릅쓰고 그 일을 수행하였다. 그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기만 했다면, 아볼로가 하는 말이 참되다는 것을 율법에서 발견하였을 것이다. 사역자들의 본분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아볼로가 그들에게 확신감을 심어준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였다. 이로써 그는 그의 논증을 펴나갔던 것이다. 사역자들은 진리를 전할뿐 아니라, 그 진리를 증명하고 방어할 수 있어야 하며, 유연하면서도 강력하게 반대자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해설

고린도에서의 전도사역과 3차 전도여행 준비 ( 18 )

바울이 아덴에서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18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본장에서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얼마후에 다시금 3차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덴에서의 전도경험을 통해 바울은 자신을 다시 점검해보며 고린도에서의 새로운 전기를 갖습니다.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당하며 바울은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1. 바울의 고린도 방문

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본도 출신 유대인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누가는 상황 설명없이 아덴에서 떠난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덴과 고린도는 그리 멀지않은 거리였지만 두 도시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아덴은 문화와 지식을 대표하는 장소였으며, 고린도는 상업과 방탕의 도시였습니다. 해상무역이 동서로 교류되고 육상무역은 고린도를 통하여 남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상업과 여행자들로 유지되는 도시가 그러하듯이, 고린도는 방탕하고 음탕한 생활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이 도시는 사랑의 여신이며 종교의 이름으로 부도덕을 촉진시킨 아프로디테를 예배하는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글라우디오가 내린 칙령으로 인해 로마에서 옮겨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장막을 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장막을 만드는 자들이었으므로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a.아굴라(롬16:3)

b.장막 만드는 업(고전4:12)

2) 실라와 디모데의 도착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와 바울과 합류했습니다. 이 일로인해 바울은 전도에 전념할 수가 있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의 도착은 바울에게 큰 위안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로부터의 경제적인 원조를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로인해 그는 더이상 장막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고 복음사역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식이 바울에게 힘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료의식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며 그의 복음사역을 훼방했습니다. 다시 한번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로인해 바울은 옷의 먼지를 털고 이방인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 회당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가서 그곳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장소로 삼았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물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가족이 믿었습니다. 그리스보의 개종은 많은 고린도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데 큰 힘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a.옷을 털음(느5:13)

b.회당장 그리스보(고전1:14)

3) 바울의 두려움

바울은 여러 도시에서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몇가지 위협적인 환경들로인해 주께로부터 환상이 바울에게 임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고린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며 그에게는 아무해도 받지않을 것임을 확신케 하셨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린도에서 1년반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a.환상(고후12:1)

b.두려워말라(렘1:8)

 

2. 총독 갈리오의 판결

1) 유대인의 소송과 갈리오의 기각판결

믿지않는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을 배척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단결하여 바울을 재판의 자리로까지 데려갔습니다. 바울에 대한 이번 공격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났던 다른 어떤 공격보다 더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갈리오의 판결은 법적인 전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리오는 로마의 아가야 총독으로 매우 영향력 있고 뛰어난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리오의 취임직후, 바울은 로마법이 허용하지 않은 어떤 종교를 퍼뜨리고 다닌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고발된 것입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소송을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문제는 갈리오 자신이 처리할 성질이 아니었고 또 판결을 내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리오는 유대지도자들이 총독의 법정에서 회당장을 잡아때리는 것도 상관치 않았습니다.

a.무고(벧전3:16)

2) 제2차 선교여행을 마침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을 사역한 다음 자기를 파송한 교회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기 전에 서원한 일이 있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나실인의 서원기간이 지나고 나서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기스길라는 에베소까지 동행했습니다.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들러 안디옥으로 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2차 선교여행은 마치게 된 것입니다.

a.머리털을 미는 경우(민6:18)

 

3.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학식있는 아볼로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에 관한 그의 지식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세례를 알지 못한 듯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알았으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지냄과 부활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령세례는 몰랐던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이 새로운 설명을 듣고 아가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경말씀으로 예수는 메시야라고 증거하여 유대인들을 설복시켰습니다.

a.아볼로(딛3:13)

b.영적 지혜(약1:5)

 

결론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두려움과 불안가운데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분명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유익하게 바꾸어 주셨고 약속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볼로와 같은 경우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준비될때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로 쓰임받게 된다는 사실로 위로와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핵심

18:1-17

2차 전도여행에 나선 바울의 최종 사역지는 고린도였다. 그곳에서 18개월간 사역했다.

  

# 묵상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 ( 18:1-3 )

고린도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사역을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들과 함께 일을 하였다는데서 육체노동을 천대하지 않는 바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학자이면서도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자신이 설립한 교회나 전도한 사람들에게 생계를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직업을 갖고 손수 일함으로써 겸손한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훼방자들에 대한 바울의 반응 ( 18:6 )

바울은 훼방자들을 향하여 옷을 털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자신의 복음전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이, 불신앙속에서 멸망하도록 그들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옷을 터는 것은 엄숙한 맹세를 할 때 사용되던 행위입니다.

환상가운데 들은 말씀 ( 18:9, 10 )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환상가운데 들려온 격려의 말씀으로 바울은 용기를 얻고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을 거절한 갈리오 ( 18:15 )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가 그들이 신봉하는 교리나 명칭, 율법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때문에 발생하였으며 바울이 전하고 있는 내용도 유대교 분파의 하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이 자기가 재판해야할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바울에 대한 재판을 거절했습니다. 이와같이 갈리오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 정책이었던 정교분리를 확실하게 수행한 것입니다.

겐그레아에서의 바울 ( 18:18 )

바울은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나실인의 머리는 그의 구별됨이 더럽혀졌을때 깎아야 했고 또 서원한 기일이 찼을때도 머리를 밀었는데 아마도 바울의 경우는 후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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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활동 17:1-9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두통의 편지는 그 교회의 화려한 특성을 말해주고 있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최초의 설립에 대한 설명을 대하게 됨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1. 바울의 데살로니가 도착(1)

(1) 바울은 빌립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그가 겪은 부당한 대우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살전 2:2). 그러나 그가 당한 반대와 핍박은 그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가 하늘에서 온 권능의 성령에 의하여 용기를 얻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상황을 견뎌내거나 그의 활동을 계속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여기에서는 단지 바울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다녀갔다'라고만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단지 그 도시들을 경유하기만 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그 도시들에 복음을 선포하고 또한 그곳들에 다른 사역자들이 들어와 활동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어느 정도 긴 기간을 그 도시들에서 체류하였을 것이다.

2.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2,3)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 회당을 발견했다(1절). 그는 그곳에 들어갔다. 유대인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언제나 그의 방식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초심자들을 기쁜 마음으로 포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복음을 환영하는 자들에게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만나는 시간과 장소인 안식일날 회당에서 그들을 만났다. 주일날 주님의 집에 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와 바울이 그렇게 하였으며, 모든 성도들도 그렇게 하였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2절). 그들이 바울과 일치된 사상을 가지고 있는한, 그들은 그의 성경 강론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받아들였지만 그 성경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바울도 성경을 받아들이고 그 성경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포용해야할 커다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과 논쟁함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결론이 옳고 그들의 결론이 틀렸음을 확증시키는 것이 바울에게는 급선무였다. 복음적 설교는 반드시 성경적인 것이면서도 이성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도 성경을 근거로하여 강론을 하였다. 우리도 또한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의 논리를 전개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성은 결코 성경과 양립될 수 없으며 반드시 성경말씀을 설명하고 적용함에 사용되어져야 한다. 바울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 강론을 계속하였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품꾼들이 다 제 일시(一時)에 포도원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모든 사람이 다 간수처럼 갑자기 부름에 응하지도 않는 것이다. 바울의 논증의 취지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였으며 바로 이것이 그가 밝히고 주장했던 내용이었다(3절). 바울은 먼저 그의 논증이 주제를 설명하고 그것의 개념을 밝혔으며, 사실을 진술한 다음 그것을 정리하였다.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메시야가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다가 부활해야 했던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사실이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증하였다. 즉 그는 고통을 받았을지라도 메시야이며, 또한 메시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고난받지 않고서도 온전케 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반드시 부활하셔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데에는 이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메시야이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3절). 그는 재림하실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성경과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예수를 전파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이 전하는 설교의 주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에 관하여 설교해야 하는 그것은 바로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3.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바울의 성공적인 설교(4)

몇몇 유대인들은 복음을 믿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의 신실한 사역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연합해야 한다.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의 대다수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이방인들가운데서 예배하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마치 미국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된 원주민들을 기도하는 인디언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헬라인들 중에서 큰 무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한 적지않은 수의 귀부인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특별히 이 사건을 주시해야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숙녀들과 귀부인들에게 모범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앙의 주권에 복종하도록 장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심은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이방인 우상숭배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곳의 교인들에게 우상에게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라고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살전 1:9).

4.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통(5-9)

(1) 그들을 박해한 장본인들 : 그들은 '사도들을 시기하고 그리스도를 믿지않는 유대인들'이었다(5절). 일부 유대인들은 복음을 믿었으며, 복음을 믿지않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반면에 믿지않는 유대인들은 믿는 자들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였다.

(2) 박해의 도구로 쓰여진 자들 : 유대인들은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이용했다. 그곳의 모든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들은 사도들을 존경하였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사도들은 그 성의 불량배들에 의해서 핍박당하였다. 어떤 종교를 증오하는 자들이 대체로 '저자의 괴악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그 종교가 올바르다는 신용장이 될 수가 있다.

(3) 사도들을 박해한 수단과 방법

첫째, 그들은 '성을 소동케 하였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군중들이 곧바로 합세했다. 마귀가 그의 계획을 수행하는 방법을 살펴보라. 마귀는 온 도시를 들끓게 하고 영혼을 혼미하게 만들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꾀했다.

둘째, 그들은 사도들에게 반감을 품은 '백성들 앞에 사도들을 끌어내려고' 그들이 숙박했던 '야손의 집을 습격했다.' 이 전 과정은 모두 불법적인 것이었다. 만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과를 조사하고 재판할 치안 판사가 임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불량배들로 재판을 하게 하고 형을 집행하려고 한 것은 진리를 땅에 팽개쳐 버리는 짓이요, 공정을 몰아내고 광분을 권좌에 앉히는 것이다.

셋째, 그들이 사도들을 붙잡지 못하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으로 야손이란 이름을 가진 한 선량한 시민을 덮쳤으며 그와 그의 몇명의 형제들을 그 성의 읍장들 앞으로 끌고 갔다.

넷째, 그들은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읍장들에게 고소했으며, 그들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야손에게 덮어씌운 죄목은 그가 사도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은신시켰다는 것이었다(7절). 여기에서 그들은 다음 두가지 음흉한 죄목을 사도들에게 덮어씌웠다. 먼저는 사도들이 공안(公安)을 파괴하는 적으로,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무질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6절). 사실상 어떤 측면에서는 이 말이 옳았다. 어떤 장소나 어느 영혼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 뿌리채 뽑혀지고 세상적인 방법이 삶 속에서 부인됨으로써 세상은 떠들썩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전파자들을 가는 곳마다 악행을 일삼는 그러한 자들로 간주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상 복음전파자들은 백성들을 설득하여 우상숭배에서 살아계신 진리의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시기와 모함으로부터 사랑과 평화의 삶으로 전향시키려고 노력했다. 사도들은 오직 세상에 있는 악마의 왕국만 전복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소란케 만들었다는 누명을 쓰고 고소당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을 소동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설사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모함으로 왜곡된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처럼 박해를 당한 바울과 실라보다 더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소자들은 "그들이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분발하여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다음엔 사도들이 현 정부에 반대하는 적이라는 것이었다(7절). 고소자들은 사도들이 모두 가이사의 명을 거역했다고 말한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7절). 사실 로마 정부는 그들의 지배아래 있는 어느 지방 총독이 왕이라 자칭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실제로 예수가 왕이라고 말했으나, 그는 지상의 왕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속에는 통치자들을 축출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이사와 그의 정부를 증오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유대인들이 양심을 속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현세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대망했으며, 그가 현재의 왕권을 전복시킬 것으로 기대했었으나, 당시의 예수가 그러한 모습을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므로 유대인들은 우리 주님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4)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성안에 조성된 심각한 불안 :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8절). 무리와 읍장들은 사도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전혀 나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이 가이사의 적으로서 기소되어 있는한, 그들은 사도들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한 사람들을 어쩔수 없이 억압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5) 소란스럽던 사건의 종결 : 상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기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사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들은 도망하여 이미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손과 그의 친구들을 보석이란 명목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으니라(9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자들 중에는 미치광이나 야수같이 난폭한 자들도 있었지만, 이처럼 사려깊고 관대한 자들도 있었다. 온건함은 곧 미덕이다.

 

Ⅱ. 베뢰아에서의 복음활동 17:10-15

1.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로 옮겨가서 복음을 전파함(10)

그들은 멀리 데살로니가에까지 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폭동이 발발하자 그곳에서 철수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도시에서 너희들을 박해하거든 저 도시로 피하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의 안전만을 위해 "다른 곳으로 달아나 그곳에 숨어라"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라는 뜻으로 "다른 곳으로 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신 것이다. 마귀는 자기가 쏜 화살에 맞았다. 마귀는 사도들을 박해함으로써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더 멀리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 바울과 실라에 대한 형제들의 배려 : 형제들은 '밤에 즉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그들은 마치 악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그 일을 수행하였다.

(2) 바울과 실라의 지속적인 전도활동 : 설사 그들이 데살로니가로부터 도피하여 왔다해도,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부터 도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베뢰아에 도달했을때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갔다. 사도들은 그들이 당했던 피해를 보복하지도, 그러한 피해를 다시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담담한 태도로 유대인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설혹 상대방이 우리에게 예우를 갖추지 않는다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2. 베뢰아 지방 유대인들의 훌륭한 인격(11)

(1) 그들은 비록 이전의 생각과 상반된다해도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것이면 받아들이는 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들이 더 신사적인 것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2) 그들은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을 지녔을뿐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이러한 성품이 더욱 신사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11절). 그들은 기꺼이 복음을 경청했으며 빛을 피해서 눈을 감아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논쟁이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에게서 어떤 약점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말씀을 환영할 따름이었다. 이것이 정말 신사적인 태도였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본문에는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자들이 그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교양있게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었다. 필자의 입장에서도 가장 고상하고 가장 신사다운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은 아무것이나 믿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그가 말한 내용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에게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근거를 제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상고하여 바울을 논증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한후 그에 따르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떤 세밀한 검토를 꺼려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신약성경을 받아들여야 하는 충분한 근거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성취되었음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받아들인 자들은 반드시 성경을 상고하고(요 5:39) 탐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경이 담고 있는 모든 진리를 발견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상고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말씀을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로 또한 자신들의 삶의 지표로 삼는 자들은 참으로 고상한 자들이며, 더욱 바른 길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공부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들은 고결한 사상으로 무장한 자들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었다.

3. 베뢰아에서의 복음전파가 거둔 좋은 성과(12)

그곳에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단지 '그들 가운데 몇명만이 믿었으나'(4절), 베뢰아에서는 편견없이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을 쏟는 자들과, 특히 성경의 말씀을 상고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내리신다. 헬라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되었다. 그들은 헬라의 귀부인들과 적지않은 수효의 남자들이었다. 이 남자들도 귀부인들과 함께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볼때 상류계층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 같다. 먼저 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 남편들을 권유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4. 베뢰아에서의 바울과 실라에 대한 박해(13-15)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에서도 악행을 범하였다. 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베뢰아에서 전파되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곳 베뢰아에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했으며 복음전파자들에 대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인간의 영혼구원과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반대하는 사단의 대리자들이 얼마나 날뛰는지 보라!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은 아덴으로 떠나게 되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그곳에서의 복음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많은 형제들과 지각있으며 활동적인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런 증거는 그들이 바울을 보살펴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14절). 그들은 사도들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부터 온 것을 눈치챘으므로 다가올 사태를 염려하여 지체함이 없이 즉시 바울을 피신시켰다. 한편 그들은 바울이 없어도 충분히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내어보내어 바다까지 가도록 하였다. 바울은 바다로 통한 길을 지나 베뢰아를 빠져나가 육로를 통해 아덴으로 갔다.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15절). 하나님의 성령은 바울을 그 유명한 학문의 도시-옛날에는 힘과 지배력으로 명성을 떨쳤던-로 가도록 명하셨다. 학문을 연구하기 원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거기서 그것을 과시하러 오기 때문이었다. 아덴은 하나의 거대한 대학이었다. 바울은 그곳에 보냄을 받았으나 아덴의 철학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그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바울은 아덴에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밝은 전망이 보이자 '실라와 디모데에게 아덴으로 오도록' 명했다. 또다른 이유는 바울이 이곳 아덴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없이는 고독하고 쓸쓸했기 때문이다.

 

Ⅲ. 아덴에서의 복음전파 활동 17:16-21

고대인들의 학문을 사랑하는 철학자라면 자신이 바울처럼 아덴에 머물게 될때 가장 행복하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신이 훌륭한 학자였으나 이러한 학문연구로 아덴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에 다른 활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의 용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우상숭배로부터 돌아서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1. 아덴 사람들의 미신에 대한 바울의 인상(16)

(1) 그 도시에 대한 본문의 설명 : 그곳은 우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것은 이방인 작가들의 아덴에 대한 설명과 일치하며, 아덴에는 헬라의 다른 모든 지방에 있는 우상들보다 더많은 우상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낯선 신이 전파되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 신을 위해 사원과 제단을 쌓도록 허용하였다. 인간의 지식이 가장 발달하여 꽃을 피웠던 이곳 아덴에서 우상숭배가 번창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고전 1:21). 가장 이성적인 체하는 사람들이 우상에 대한 최고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믿음과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2) 이러한 광경이 바울을 격분시킴 : 바울이 마음에 분하여(16절).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영광이 우상에게 돌리워지는 것을 목격하고 사단에 예속된 사람들의 영혼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

2. 진리로 인도하는 바울의 노력(17)

그는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들어갔다. 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와는 적대관계로 있었지만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바울에게 대하여 변론할 기회를 주었다(17절). 바울은 유대인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그들에게 메시야를 대망하면서도 예수를 받아들이려 하지않는 이유를 물었다. 거기서 바울은 우상을 버린 경건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교회의 입구에 불과한 유대인의 회당에서 기독교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바울은 신앙의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17). 바울은 이방인들이나 결코 유대인 회당에 가지않는 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질때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3. 몇명의 철학자들이 던진 질문(17-21)

(1) 바울과 토론을 나누었던 자들 :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17절).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가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라고 생각하였다. 이 철학자들 중에서

첫째,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간주한 쾌락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거나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모두 믿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부인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모든 감각적 쾌락에 몰두했으며, 그 쾌락 속에서 행복을 추구했다.

둘째, 자신들 모두를 하나님처럼 선한 존재로 간주한 스토아학파들이 있었다. 그들은 덕망있는 사람이 하나님에 비해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 자만심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최상으로 섬겨야 한다고 가르친 기독교 신앙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2) 그들이 바울에 대해 품었던 여러 견해(18절)

첫째,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지칭하여 말장이 즉 쓸데없는 말을 마구 지껄이는 수다장이라고 불렀다. 수다장이라는 말은 씨앗을 줍는 사람이란 뜻을 지니며, 길가나 밭에 흙으로 덮히지 않은 씨앗을 쪼아먹기 위해 여기저기로 다니는 작은 새에게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들은 바울을 보잘것 없고 경멸스런 자로 간주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곡식을 주워먹는 새처럼 한두푼 벌기 위해 배회하면서 지식을 팔아먹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이방신을 전하는 자로 간주했다. 설사 그가 이방신을 전하려 했다고해도 아덴보다 더 적당한 장소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바울을 그런 인물로 간주한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부활을 전파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예수와 그의 부활을 신격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이 그것들을 신격화하려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새로운 남신(男神)으로, 그의 부활을 새로운 여신(女神)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예수와 그의 부활을 믿는 것 같았으나 실상은 새로운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3) 바울에게 공청회의 기회를 마련해 주자는 그들의 제안(19,20) : 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극히 단편적으로 들었기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 좀더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되기를 희망했다.

첫째, 그들은 그 교리를 신기하고 놀라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가르침이다.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20절).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모세의 책과 예언서들을 갖고있지 않았거나 그러한 책들을 경시했던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그 책이 그들에게는 알려진바 없는 유일한 책이었다.

둘째, 그들은 그 가르침이 새롭고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관해 좀더 알기를 원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19절). 즉 그들은 "우리는 기꺼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그들은 그 가르침에 관한 설명을 듣기까지 공정을 기이하고 아무런 비난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을 마르스의 언덕이란 뜻으로 번역되는 아레오바고로 데려갔다(22절). 그곳은 마을 회관이었거나 그 도시의 집회소였다. 그곳에서 행정 장관들은 공무상의 만남을 가졌으며, 학자들은 각자의 학설을 교환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다. 또한 여기서 개최되는 재판은 공정하기로 유명했다. 그들은 바울을 죄인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후보자로서 이곳에 데려오고자 했다.

(4) 그 도시 사람들의 보편적 성격 : 모든 아덴 사람…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음이더라(21절).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진 것은 그의 가르침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그들은 모두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훌륭한 교제는 인간사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며, 학문의 기초를 닦는 사람을 세련되게 만든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대화를 통하여 얻어진 지식은 매우 순간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둘째, 그들은 신기한 것을 좋아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하여 듣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새로운 유행과 사상을 따르기 좋아했다.

셋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쓸데없이 참견했으나 자신들의 일은 결코 돌아보지도 않았다. 수다장이들은 항상 바쁜 몸이다.

넷째, 그들은 오직 그 일에만 시간을 소비했다. 시간은 소중한 것이며 순식간에 영원의 공간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엄청난 시간이 쓸데없는 잡담으로 소비되고 있다. 수다장이들을 위하여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무가치한 것을 얻기위하여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Ⅳ.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17:22-31

우리는 여기서 아덴에서 행한 사도바울의 설교를 보게 된다. 우리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이나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했던 이방인들에게 선포했던 다양한 설교들을 알고 있다. 사도들이 이들에게 전한 모든 설교속에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이 명백히 주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거짓신들을 경배하는 이방인들에게 향한 설교를 대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사도들의 설교는 전자의 설교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에 그들의 임무는 예언과 기적을 통해 구속자에 대한 지식과 그를 믿는 신앙으로 청중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그들의 임무는 보편적인 섭리의 사역을 밝힘으로써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그를 숭배해야 할 의무에 대하여 청중들을 일깨워야 하는 것이었다.

(1) 여기에서 바울의 설교목적은 유일하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종교의 제일 원리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들이 숭배하고 있던 신들을 반대하는 설교를 한것은 그들을 무신론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참된 신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선포는 어떤 새로운 신을 소개하려 한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려는 것이었다.

1) 그들이 스스로 창조한 거짓신들을 숭배하는 것은 그들을 창조하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절). 바울이 그들에게 지적한 죄는 그들이 우상속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정령과 귀신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숭배했다는 점이었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알게 될 시기가 왔다. 너희는 종교의 색체를 지닌 것이면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를 더욱 타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희가 그러지 말아야함을 일어주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신을 소개한다는 이유로 바울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천만의 말씀이오. 당신들은 이미 너무 많은 잡신들을 소지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러한 신들을 더 보태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했다.

2)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세움으로서 오직 한분이신 참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포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들 스스로 가져왔다고 말한다. 진리의 본고장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아덴에서 유일하며 참되신 하나님이 알려지지도 않은, 알지 못하는 신으로 변해버린 것은 서글픈 일이다. 우리가 부족하고 결함있는 인간임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알지 못하는 신에게 봉헌된 제단에 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영광이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너무나 존귀하여 그의 이름을 말할수도 없던 그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특별한 명칭없이 단순히 신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 신을 이제 당신들에게 선포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가 불행한' 이런 의미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아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둘째,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해 얼마나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라. 바울은 그들의 종교적 헌신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종교행사는 공개적인 것이어서 바울이 그 광경을 목격하는데에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바울이 이 모든 것을 살폈고 그 목격한 사실을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연설에 얼마나 적절히 활용했는가를 관찰하라. 바울은 그가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이 이미 그들이 숭배해 온 바로 그분이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들이 막연히 숭배해 왔던 바로 그분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당신들의 그 수치를 씻어 주고자 내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분을 이해하면서 예배하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들의 맹목적인 헌신은 명백히 이성적인 예배로 바뀌어야 할 것이며 당신들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예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를 선포함으로써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예배드려야 함을 명하는 그 하나님은 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대체로 이방인들, 특히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심에 있어서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인들과 그들이 꾸며낸 허구에 영향을 받았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유일하시며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며, 나아가 우상숭배의 삶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여기에서 바울 자신이 섬기고 있으며 아덴 사람들도 섬길 것을 요구했던 하나님을 그가 얼마나 거룩한 존재로 묘사했는가를 보라.

1) 그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즉 전능의 아버지이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시다(행 17:24).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권능과 지혜의 섭리로써 태초에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자"이시다. 만일 그가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는 그가 창조한 그 만물을 주관하고 또 그것들에게 법칙을 부여할 명백한 권리를 갖고 계신다.

3) 하나님은 독특한 방식으로 모든 인간의 창조주가 되신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26절).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을 창조하였고, 지금까지 모든 인간을 창조하고 계시다. 또한 그는 모든 민족과 국가를 창조하셨다. 그는 국가의 창시자로서 그들을 공동체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그들을 모두 한 혈통과 같은 민족으로 만드사 그들이 동료 즉 피조물이며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고 돕도록 하셨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한곳에 모여 살지 못하게 하시고 온 땅에 두루 퍼져 살도록 하였다.

4) 하나님은 모든 창조에 위대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만물과 호흡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25절). 그는 다만 첫사람에게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고 계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혼을 만들어 주셨으며, 생명과 호흡을 인간의 모든 자손들에게 부여하셨다. 따라서 아무리 천한 인간의 자손들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삶을 영위하며, 아무리 고귀하고 지혜로운 철학자나 권력층에 속한 자들이라해도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살 수 없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주신다. 즉 모든 인간의 자손뿐 아니라 짐승과 비천한 피조물에게도 주신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호흡을 부여받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삶을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5)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사건들을 처리하는 절대적 통치자이시다.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26절).

첫째,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적 처분권 : 그는 모든 사건을 이미 결정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처분권은 반론되거나 논쟁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로운 처분 :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정된 것을 결정하셨다. 영원한 정신인 하나님의 결정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예정된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기간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생은 그의 손에 달렸다. 따라서 번영을 누리든지 재난을 당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의 경계를 결정하시고 또한 지정하셨다. 이 세상을 인간의 자손들의 주거지로 정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거주지역의 경계도 결정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몫으로 할당된 특별한 거주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이므로 우리는 현재의 거주지에 만족하고 이것을 최선의 것으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6)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57절).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그는 무한한 영이시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운 곳에 계시다. 그는 우리의 충성을 받으심, 설사 우리가 성전이나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해도 우리가 간구하는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우리가 있는 곳이 궁궐이든 초막이든, 도시든 사막이든, 깊은 바닷속이든, 바다 위의 먼 곳이든 간에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28절). 우리는 시냇물이 샘에서 나오고 빛줄기가 태양에서부터 발원되듯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필요로하며 그것에 의지한다.

첫째,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산다. 죄로 물들은 연약한 우리의 삶이 단정되지 않고 연장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인내의 덕택만이 아니라 그의 부정적인 돌보심에 기인한다. 만일 그가 선하신 적극적인 행동을 보류하신다면, 우리는 스스로 죽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를 힘입어 기동한다.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제일 원인인 동시에 원동자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그분 안에 존재한다. 최근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존재를 부여받았다고 현재로 하나님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짐승처럼 무의미한 삶으로 전락하거나 마귀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되어서도 안 된다.

8) 우리는 만물 중에서 하나님의 소생으로 선택받은 자들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같은 고향 사람인 길리기아 태생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Aratus)가 이방신인 '쥬피터'를 최고신으로 묘사하면서 '우리 모두는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한 것을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로써 바울 자신이 학자였다는 사실은 물론 인간의 지식이 복음전도자에게 있어서, 특히 복음밖에 있는 사람들을 확신시킴에 있어서 훌륭한 도구로서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복음전도자로 하여금 청중들을 진압시켜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베는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가 진리의 대적자들에 대해 전혀 아는바가 없다면, 어떻게 그들의 아성을 쳐부술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는한,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움직이는 한, 우리는 그분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끝으로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우리의 전 존재를 그분께 바쳐야 한다.

(3) 바울은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진리에 근거하여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논박한다.

1)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이라면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그분은 영혼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인간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형상과 똑같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29절).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의 영혼을 지으심으로 인간을 존중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육체의 모양을 따라 하나님을 만든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2)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24절). 성전은 하나님을 우리들 사이에 더 오랫동안 머무르시도록 할 수도 없으며 우리 곁에 더 가까이 계시게 할 수도 없다. 성전은 단지 우리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편리한 장소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휴식을 취하거나 거할 어떤 장소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3)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25절).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봉사로도 유익을 끼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과 우리의 선(善)의 무가치함을 전제할때, 그는 우리의 어떠한 봉사도 필요치 않을 것이며 그 봉사가 그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도 못할 것이 아닌가?

4) 이것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27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아 발견케하려 하심이로다(27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계시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풍성히 허락하시고 계시다는 분명한 징조를 봄으로써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확신함에 있어서 본성, 특히 우리 영혼의 숭고한 힘과 능력이상의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방법과 비교해 볼때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못한 자들은 막연하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발견할 뿐이다. 그들의 이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가능성은 매우 불확실한 것이다. 설혹 발견한다해도 그것은 우연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혼잡한 개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장님이나 어둠속에 있는 사람처럼 막연히 느낄뿐이다. 우리가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매우 혼잡스러운 지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을 막연히 인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거울속에 비춰보듯 분명히 바라볼 수 있게됨을 감사해야 한다.

(4) 바울이 우상숭배를 참회하도록 그들 모두에게 종용함(30,31절).

이것은 학문의 도시인 아덴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의 요지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하고(23절),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할 것을 역설했다. 바울은 잡신을 숭배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설득시켰다.

1)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의 이방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 알지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30절). 당시는 무지의 시대였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몰랐고, 어렴풋이 하나님을 예배했거나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었다. 결국 우상숭배는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무지의 시대를 묵인하여 주셨다. 그들의 무지를 묵인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지도 않으셨으며 다만 섭리의 은사를 베푸셨다(행 14:16,17).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급하거나 냉혹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래참으신 것이다.

2)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분부 :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30절). 이 말씀은 그들의 생각과 방법을 바꾸라는 내용이다. 모든 죄악으로부터 위선과 슬픔을 떨쳐버리고 즐겁고 확신에 찬 마음으로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시고 우리의 의무를 우리의 특권으로 만드셨다. 그것은 각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신 그의 명령이시다. 모든 인간은 회개해야만 하며 또한 회개해야할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회개할 것을 권고받으며 회개함으로써 은혜를 받게될 것이다. 이제 죄사함의 길이 이전보다 더 넓어졌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한층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회개를 기대하고 계신다.

3) 이러한 명령에 복종해야할 중대한 이유 :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신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31절).

첫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통하여 신실한 형제에게는 상급을 내리실 것이며, 반역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실 것이다.

둘째, 인간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을 통괄적으로 심판받게 될 약속된 날이 있다. 그날은 모든 것이 결정되는 날이며, 보상의 날인 동시에 종말의 날이기도 하다.

셋째, 세상은 공의로써 심판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사람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바로 주 예수로서 모든 심판권을 위임받은 자이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그를 산자와 죽은 자들의 심판자로 예정하고 임명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날이 도래할 것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판자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하는 충분한 근거를 주셨으며 모든 사람에게 확증을 주셨다. 하나님은모든 적들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떨게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성도들은 그분 안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이다.

여섯째, 다가올 심판과 심판날에 행하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일을 생각할때, 우리 모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Ⅴ. 아덴에서 바울이 행한 설교의 성과 17:32-34

여기서 우리는 아덴에서 바울이 행한 설교의 성과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된다.

1. 복음을 무시한 대부분의 사람들(32,33)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아덴에서도 복음의 성과는 거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바울과 그의 설교를 조소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할때까지는 참을성있게 들었지만 그 말을 듣고는 그를 기롱했다(32절). 만일 바울이 말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영웅이 죽으면 그를 신으로 추앙했으나, 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이 위대한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이 성스러운 진리가 신성모독자들의 웃음거리로 멸시된다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이 생각해 볼만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네 말을 다시 듣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즉시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기독교의 실제적인 가르침을 논쟁의 함정속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은혜를 잃게되는 사례가 많다. 그 순간 바울의 말에 확신을 갖지못한 자들은 그 논쟁의 결말을 다음기회로 미루었다. 이처럼 마귀는 현재의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모든 시간을 빼앗으려 한다. 이에 바울이 저희가운데서 떠나매(33절). 바울은 그들이 그 문제에 관하여 숙고할 수 있도록 즉시 그들을 떠났다.

2. 믿음을 갖게된 소수의 사람들(34)

바울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믿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서 떠나려 했을때, 그들은 작별하기를 원치않았다. 그들 중에 특히 두사람이 언급되는데, 그중 하나는 저명 인사로서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 였다. 그는 아레오바고에 위치한 법원의 재판관들 중 한사람으로 언젠가 바울이 소환당하였을때 그사람 앞에 출두한 적이 있었다. 결국 바울의 재판관이 바울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된 셈이었다. 다른 한사람은 '다마리'라 이름하는 여자였다. 바울이 아덴에서 커다란 수확을 거두지 못했고 그의 가르침에 감화받은 사람이 극소수였다고해서 그가 헛수고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해설

아덴에서의 전도사역 ( 17 )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에서 그리고 아덴에서 선교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계속해서 성력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시기와 핍박마저 선하게 사용하심을 알게 됩니다. 본장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이어지는 여행을 통해 바울의 증거를 살펴보게 됩니다.

 

1.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

1) 회당에서의 가르침

바울의 선교전략 중의 하나는 회당을 복음증거의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회당에서 메시야의 오심과 사역에 관한 구약 예언이 읽혀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당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먼저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의 복음선포는 성경을 강론하며 뜻을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구약성경을 자세히 풀어 가르치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성취하셨고, 따라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강론은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적지않은 귀부인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몇몇 유대인들도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세 안식일후 회당측은 바울에 대해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a.데살로니가(빌4:16)

b.그리스도의 부활(롬1:4)

2) 야손과 그의 형제들

마침내 전도자들에 대한 과격한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전도자들이 머물던 야손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야손의 집을 습격하여 전도자들을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들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읍장들에게 끌고가서 그들을 바울 일행을 숨겨준 죄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지도자들은 당황하기는 했으나, 이성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야손과 그의 형제들에게서 바울 일행이 도시를 즉각 떠날 것과 행동을 주의할 것을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a.야손의 집(롬16:21)

b.다른 임금(눅23:2)

 

2. 베뢰아에서의 바울

1) 베뢰아 사람들

바울과 실라는 밤을 이용해서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고 데살로니가를 나와 베뢰아에서 일행과 만났습니다. 베뢰아에서는 바울 일행이 환영을 받았는데 유대인들까지 바울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의 말을 듣고, 돌아가서 그 설교가 과연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를 상고했습니다. 그 결과 적지않은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a.성경을 상고함(사34:16)

b.매일의 의무(히3:13)

2) 유대인들의 소동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그가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와 군중들을 선동하여 소동케 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며칠더 머물면서 베뢰아 교회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 형제들의 도움으로 해안으로 빠져나와 아덴으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베뢰아의 형제들은 바울이 아덴에 안전히 도착할때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고 동행했습니다. 아덴에 안전하게 도착하자 바울은 자기를 호송한 사람들에게 베뢰아에 돌아가면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아덴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a.복음의 방해(마18:7)

b.아덴(살전3:1)

 

3. 아덴에서의 바울

1) 아덴

아덴은 페리클레스 시대(B.C. 5세기)의 지중해권 지역을 이끌던 정치적인 주도권을 상실했지만, 그 영광스런 과거때문에 여전히 큰 명성을 누리고 있는 도시입니다. 아덴에는 아크로폴리스 성채뿐 아니라 시 도처에 신전들과 신상들이 있어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주된 신은 아덴의 수호 여신 팔라스 아테네(Pallas Attene)로, 아덴인들은 그녀에 대한 존경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지어 헌납했습니다.

a.우상이 가득함(사2:8)

b.신전(삼상5:2)

2) 아덴 사람들

바울은 상당 기간동안 아덴에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시간을 선용하여 아덴 도시를 관찰했습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은 그 도시의 철학자들과 변론하게 되었습니다. 아덴에도 유대인 회당이 있어 그는 거기에 가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더불어 변론했습니다. 이 회당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아덴 사람들의 타종교에 대한 피상적인 관용 정신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a.호기심(요12:9)

3) 알지 못하는 신

아덴에는 아레오바고 법정이라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기관이 있었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그곳으로 데려가 그의 가르침을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바울의 전도방법을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비명을 보고 전도의 접촉점을 찾았습니다. 그는 아덴 사람들이 신에 대한 관심과 경건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참신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주의 창조자요, 주재자로서 참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상충된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a.하나님에 대한 무지(딤후3:7)

 

결론

본장에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던 바울의 마음자세를 대할 수 있습니다. 그의 복음선포의 방법에서 현대의 선교전략이 지혜를 얻어야 참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당하는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찾았음을 보게 됩니다. 

 

# 핵심

17:1-15

바울 일행이 핍박에도 불구하고 전도했음을 보여주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사역 기사.

실라(17:4)

로마 시민권자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사항을 전달하러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었던 인물(15:22,32). 그후 바울의 택함을 받아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다(15:40). 베뢰아에서 디모데와 동역한 그는 베드로의 대필자로 봉사한 ‘실루아노’(고후 1:19)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바울과 함께 빌립보 옥중에서도 낙망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한 점(16:25)으로 보아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아레오바고 관원(17:34)

‘아레오바고’(Areopagus)는 본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자리한 조그마한 석회암 언덕이다. 이곳에선 각종 모임과 회의, 재판, 철학 강론 등이 행해졌다. 그러나 본장에서 말하는 ‘아레오바고’(17:19,22)는 이곳에서 열린 의회를 의미한다. 디오누시오가 아레오바고 관원이었다함은 이 의회의 의원이었음을 뜻한다.

 

# 묵상

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사역 ( 17:2 )

바울은 이곳에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만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의 시기나 목숨의 위협도 바울의 전도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복음전도의 열정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시기한 유대인들 ( 17:5, 6 )

바울의 복음전파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은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야손의 집으로 가 바울과 실라를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자 야손 형제를 읍장들에게 끌고가 소란을 피웠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야손은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으로 바울과 실라가 묵었던 집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읍장은 데살로니가 지방의 관장들을 부르던 명칭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자세 ( 17:11, 12 )

이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믿는 사람이 많고, 그중에는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순수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말쟁이로 불린 바울 ( 17:16-18 )

바울은 아덴 온성에 우상이 가득했기때문에 격분했습니다. 당시 아덴은 문화와 예술과 학문이 고도로 발달한 도시로서 신상이 매우 많았으며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곳입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바울을 향해 말쟁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말쟁이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말을 떠벌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설교 ( 17:18-22 )

이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끌고 갔습니다. 이곳은 행정 장관들이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 모이는 곳으로 학자들이 모여 학설을 논하거나 재판이 열리기도 하였는데, 아레오바고의 재판은 공정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말은 아덴 사람들이 이웃나라 사람들보다 많은 신들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함을 지적한 것으로, 그들이 오히려 종교를 더욱 부패시킨 것을 가리킵니다.

아덴 사람들 ( 17:32-34 )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더러는 비웃고 더러는 다시 듣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덴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삶의 교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데 그쳤습니다. 바울의 아덴선교는 다른 지역보다 성과가 적었으나 바울의 설교를 듣고 아덴의 감독이 될 디오누시오 같은 사람이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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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울의 디모데 선택 16:1-5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영적인 아들로서 디모데를 선택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점에서 바울은 현명하고 인자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1. 바울이 디모데를 교육하고 친밀하게 대함(1-3)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디모데는 그리스도에 속해있는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를 택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양육시켰다.

(2) 디모데의 모친은 본래 유대인이었으나 나중에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니게였고 디모데의 외조모의 이름은 로이스였다. 바울은 두사람 모두를 매우 존경하고 칭찬했으며, 특히 그들의 거짓없는 믿음(딤후 1:5)을 칭찬했다.

(3) 그의 부친은 헬라인으로 이방인이었다. 그의 부친이 헬라인이었으므로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부친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할례받기를 원치않는 한 그에게는 할례에 대한 의무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그의 모친이 디모데가 어릴 때에 할례받게 그에게 설득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모친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교육시켰다. 그러므로 비록 디모데가 그 계약의 징표를 받기 원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사실이 표면화되는 것을 원치않았을 것이다.

(4) 디모데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사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선한 사람들과 더불어 훌륭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5) 바울은 디모데가 앞으로 그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을 원했다. 바울은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6)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그것은 의식법을 지키도록 그에게 강요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의 사역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불결한 사람으로 낙인찍어 배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바울은 구원을 받기위해서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그가 할례를 베푼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 즉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의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설사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않았다 해도, 바울이 그를 자신의 동반자로 삼는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어줌으로써 유대인들의 비위를 만족시켰다.

2.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의 믿음을 돈독하게 함(4,5)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말씀을 전파했던 모든 도시들을 통과하였다.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회의의 훈령이 적힌 사본들을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모든 교회는 그 훈령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므로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훈령은 그들에게 매우 흡족함을 안겨주었다.

(1) 교회들은 이 훈령을 통해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5절). 교회들은 특히 이방인들에게 의식법을 강요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들과 장로들은 물론 성령께서도 그것을 반대하신다는 증거를 보았을 때, 교회들은 확고하게 되었다. 진실에 대한 증언은 비록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확신케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는 자들을 확고하게 하는데에는 매우 유용한 것일 수 있다. 더구나 이 편지에 나타난 겸손의 정신은 사도와 장로들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2) 이방인 개종자들은 날마다 그 수가 증가했다. 그들에게 의식법의 멍에를 강요하는 것은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율법의 노예로서 전락할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들은 쾌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증가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증가를 보게 되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자들에게 기쁨이 된다.

 

Ⅱ. 바울의 마게도냐 전도여행 16:6-15

1. 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여행(6-8)

(1) 바울과 그의 동료인 실라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통과하였다.

(2) 당시에 그들이 아시아 지방(그 지방이 그렇게 불리우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 당시 그리스도는 새로운 활동의 일환으로 바울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즉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제까지 복음을 전한 이방인들은 헬라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특히 다른 이방인들보다도 유대인들에 의해 미움을 받았다. 그들의 설교를 금지한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사역자들의 이동은 성령의 인도와 지시아래 특별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약 성경 시대에 활동했던 이 사역자들은 한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반면에 그들을 더욱 필요로 하는 다른 곳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3) 그들은 비두니아로 옮기기 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7절).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로 갔다. 애당초 그들의 판단과 계획은 비두니아로 향하려는 것이었지마는,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시도하려는 것을 저지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하며 그것이 최선의 길임을 믿어야 한다. 예수의 영은 그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고대 사본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주 예수의 종들은 항상 주 예수의 영의 지시와 안내를 받아야 한다.

(4)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갔다. 우리는 그들이 지나가면서 좋은 씨를 뿌렸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후 그들은 트로이(Troy)의 도시인 드로아에 당도하였다. 여기에 한 교회가 세워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 20:6,7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드로아에서 누가는 뜻밖에 바울을 만나 그의 동료들과 합세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바울의 전도여행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누가는 바울의 수행원들 속에 자신을 포함시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0절).

2. 바울을 마게도냐로 특별히 부르심(9,10)

그는 21절에 나타난대로 주로 로마인들이 거주하는 빌립보 지방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1) 바울이 본 환상(9절) : 한 천사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그가 마게도냐로 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임을 알려주었다. 비록 애당초 작정했던 곳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할 일을 지시하신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바울이 목격했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의 곁에는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가도록 지시하셨다. 그것은 사도들이 평소에 경험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使者)가 바울을 그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에서 온 사자가 그를 그곳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바울은 한 마게도냐 사람에 의해 그곳으로 오도록 초대를 받았고, 이 마게도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변하여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바울을 초대한 마게도냐 사람은 그 나라의 행정장관도 승려도 아닌 그곳에 거주하는 평민이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을 억지로 끌고 가려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매우 진지한 태도로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 다음은 그들이 바울을 초대한 사실을 살펴보자. 바울을 초대한 이 정직한 마게도냐 사람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한다. 이말은 와서 우리를 위해 복음을 전파해달라는 것이다. "와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해 주시오. 당신은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불쌍한 영혼들을 보살피는 것은 당신의 일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니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우리 모두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속히 우리에게 와 주시오. 당신이 기도로만 우리를 도우려 하지는 마시오. 당신이 직접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를 초대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2) 그 환상에 대한 해석(10절) : 그들은 하나님이 거기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들을 부르신 줄을 확신하게 되었다. 때로 사람의 요청은 하나님의 요청이 될 수도 있다. 비록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하더라도, 바울은 이것을 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3. 바울의 마게도냐 항해(11,12)

바울은 하늘의 환상에 복종하였다. 즉 그는 자신의 어떤 계획과 의향대로 추진해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랐다. 그곳을 향해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10절). 그래서 바울은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그들 모두가 마게도냐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랐듯이 그의 모든 동료들은 바울을 따랐으며, 더나아가 그들은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즉각적으로 응해야 한다. 여러분은 오늘 이 순간 그의 부르심에 따름으로써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은 즉시 마게도냐로 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즉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설사 우리가 곧장 실행의 단계로 접어들어 갈 수는 없다해도, 실행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있어야 하겠다. 이제 바울은 그곳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들은 드로아로 내려갔다. 그들은 직행하여 사모드라게로 올 때까지 순조롭게 항해하였으며, 다음날 네압볼리에 도착했고 마침내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구 첫성(12절) 혹은 첫째 가는 성(the first city)이었다. 그들이 '첫째가는 성'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복음이 그곳에서 전파될 경우 그 나라의 모든 곳으로 복음이 보다 쉽게 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식민지였으며 로마의 수비대가 있었고 로마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4.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빌립보에서 받은 냉혹한 대접(13)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거기서 환영을 받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전력을 다해 바울을 그곳으로 오도록 간청했던 그 마게도냐 사람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왜 그는 사람들을 충동하여 가서 바울을 만나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바울 일행의 마게도냐 도착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후였다. 이는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12절 후반)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그곳에 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서둘렀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 왔지만, 그들은 전에 있었던 장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탁월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그같이 무시되고 천시받는 세계 속에서 살기에는 부적합하다. 사역자들은 어떤 장소에 와 달라는 간곡한 초청을 받아 그곳에 막상 갔을 때 소홀이 여김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설교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13절).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다. 그들은 선한 여인들의 작은 집회처를 발견했다. 이 모임의 장소는 그 도시의 외곽 지역이었다. 그곳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장소였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그곳에 모였다. 그들은 헤어져 있을 때에도 매일 기도했다. 이외에도 그들은 안식일날 함께 모였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으며 도시인들의 재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엄숙한 예배의 모임을 안식일에 가졌다. 우리는 격식을 갖추어 모임을 가질 수 없을지라도 가능한 한 예배의 모임을 가져야 한다. 설사 회당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정집에서라도 예배를 드려야 하며 그렇게나마 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해야 한다. 이 장소는 강가로 전해지며, 묵상을 하기 위하여 택하여 진 듯싶다. 바울과 실라와 누가는 그곳에 가서 앉았다. 그들은 그곳에 모이는 여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였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르쳤다.

5. 루이다의 회심(14,15)

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기록된 장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사실과 특정 인물들의 회심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대단히 귀중한 것이므로 한사람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일은 대단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처럼 기적을 통해 감명받고 개종한 자들과 본문의 루디아처럼 평범한 은사를 받고 개종한 자들을 보게 된다.

(1) 이 회심한 여인은 누구였나? 다음의 네가지 사실들이 그녀에 관하여 기록되었다.

첫째, 그녀의 이름은 루디아였다. 그녀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영예로운 일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성경책에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여신다면, 우리는 생명의 책에 쓰여진 우리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둘째, 그녀의 직업은 자주 옷 장사였다. 역사가 누가는 그녀가 정직한 직업을 가졌다고 언급하면서 그녀를 높이 평가한다. 그 직업은 초라한 것이었다. 그녀는 몇 차례 언급된 자주빛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자주 옷 장사였다. 그녀는 신경을 써야할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가진 특정한 직업들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잘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점을 잘 관리하고 장사에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돌보는 일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셋째, 그녀의 거주지는 두아디라성으로 그곳은 빌립보에서 시작되는 국도상에 위치하였다. 하나님의 섭리가 루디아를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빌립보로 데려왔으며, 거기서 그녀는 복음을 접하고 따르게 되었다.

넷째,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신앙이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전에 알고 있던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경건한 여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회심 이전에 매우 사악하고 야비했던 사람들에게 임하기도 하며, 때로는 좋은 성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서 만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도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기도가 드려졌던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빛의 언도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더 밝은 빛을 추구해야 한다.

(2) 그녀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 :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14절). 이 역사의 주재자는 곧 주님이셨다.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일을 계획하시고 또 그 일을 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구원받은 자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음이 분명하다. 이 역사(役事)의 자리 즉, 변화가 일어난 장소는 마음속이다. 즉 회심의 역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 역사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즉 그녀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영혼은 닫혀져서 그리스도와 적대관계에 있게 된다. 영혼을 다루시는 그리스도는 닫혀진 문을 두드리신다(계 3:20). 그러므로 죄인이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때, 영광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3) 이 역사가 그녀의 마음에 미친 영향 :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단한 주의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바울이 전한 사실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문을 열었다. 또한 그녀는 바울이 전한 사실들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그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바쳤다. 그녀는 세례를 받았으며 그녀의 식구들도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사역자들을 극진히 대접했으며 그들의 더욱 많은 가르침을 받기 원했다.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15절). 이처럼 그녀는 자신에게 이 축복된 변화를 가져다 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였던 그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원했다. 그녀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렸을 때, 그녀의 가정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역자들을 받아들였다. 사역자들은 그녀의 집에서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간청하여 그들을 그녀의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15절)는 말씀이 본문에 수록되어 있다. 이 말은 바울이 그녀의 집에 가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루디아는 끝내 자기 고집을 고수하였다. 그녀는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원했다. 루디아는 자기 집에서 그들로부터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질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과 함께 매일 기도하며 그녀의 가족을 위해 축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Ⅲ. 악령 추방 16:16-24

이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1) 그들은 점치는 한 여종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1) 이 여종에 대해 소개된 내용 : 그녀는 '신들린'자로서 델포스 신전에서 아폴로 신의 신탁을 받아 전달하였던 처녀였다. 그러한 무지와 우상숭배의 시대에는 악령이 사람들을 자신의 뜻의 포로로 속박시켰다. 그러므로 만일 악령이 그들에게 신탁을 주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다면, 악령은 그들로부터 받아왔던 그러한 숭배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여종은 점으로 자기 주인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이 무녀의 점을 들으러 왔고, 신탁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였던 것이다.

2) 이 여종이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한 증언 : 그들이 기도하러 가던 도중에 그녀를 길에서 만났다(16절).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곳을 갔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다. 우리가 어떤 경건의 훈련을 쌓으려 할 때, 사단은 우리를 혼란시킬 기회를 포착하려고 교활한 꾀를 부린다. 또한 우리가 안정되기를 원할 때, 사단은 우리를 격분시킬 기회를 포착하려고 교활한 꾀를 부린다. 또한 우리가 안정되기를 원할 때, 사단은 우리를 격분시킬 기회를 포착하는 데에도 간교한 수작을 부린다. 그녀가 그들을 만났을 대, 그녀는 그들을 따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절).

① 이 증언은 진실이었다.

첫째, 그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종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러 왔다. 이방인들이 숭배하는 신들은 보다 낮은 존재들이며 따라서 사실상 신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다. 그들은 그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모욕한다면, 우리는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둘째, 그들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방인들도 인간의 비참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으며, 구원의 필요성도 인식한다. 그녀는 이제 이 사람들은 우리가 헛된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라고 말했다.

② 어떻게 점치는 영혼을 소유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이 증언이 나오게 되었는가? 사단이 스스로 분열을 일으켜 자신과 대적했단 말인가? 우리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첫째, 그녀에게 이러한 고백이 강요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사단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라고 고백한 경우와 같다.

둘째, 진리는 때로 진리의 적대자들의 고백에 의해서 확대되기도 한다. 그러한 고백은 적대자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이다. 반대로 이것은 복음을 손상시키기 위하여 악령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이러한 점치는 영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으므로 이 증언에 의해 복음에 대하여도 편견을 갖게될 수 있다.

(2) 그녀는 '여러 날을' 계속해서 이같이 소란을 피웠다(18절). 바울은 그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침해를 주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곧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악마를 추방시킴으로써 그녀를 잠잠케 했다.

1) 바울은 괴로워했다. 그처럼 신을 모독하는 사람에게서 신성한 진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에게 괴로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어떤 선한 진리가 거리에서 위선적인 말로 외쳐지고 있는 것을 들을 때 선한 사람의 마음이 괴롭듯이, 바울도 당연히 슬퍼했다.

2) 바울은 악령이 그녀에게서 나올 것을 명령했다. 즉 '돌이켜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였다. 이로써 바울은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침묵은 그녀가 말하는 것보다 더욱 그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권능의 말씀 앞에서 사단은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귀신은 즉시 그녀에게서 나오게 되었다.

(3) 그 여종이 무능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주인들은 사도들을 관원들 앞으로 끌고가서 기소하였다.

1) 주인들을 격분시킨 것은 그녀의 주인들이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19절)이었다. 여기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임을 인식하라. 사단의 마수에서 그녀를 구출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크신 사랑은 그로인해 돈을 잃어야 함을 인식한 그 주인들에게 아무런 감명도 주지 못했다.

2) 그 주인들이 바울의 일행을 상관들 앞에 끌고가서 소란을 피운 과정은 아래와 같다. 그들은 바울의 일행을 붙잡아 저자로 끌고 갔으며 거기에서 공개재판이 집행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치안 책임자이며 통치자들인 관원들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둘러서 그들을 관원들로부터 그 성의 감독들인 상관 앞으로 데려갔다.

3) 그들이 사도들을 고소한 내용은 사도들이 그 지역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20절). 그들은 사도들을 유대인으로 간주하였다. 사도들을 고발한 일반적인 내용은 그들이 그 성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불화를 일으키고 공공의 평화를 해쳤다는 것이다. 만일 사도들이 그 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면, 그것은 천사가 벳새다 연못의 물을 치유를 위해 요동하게 한 것처럼 소요를 일으킨 것에 불과했다. 이 고소의 증언은 그들의 가르침이 로마의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부적합한 풍습이었다는 것이었다(21절). 로마인들은 항상 종교의 개혁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 종교가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그들은 조상들이 전통으로 물려준 것은 그대로 고수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신이나 신흥 종교의 신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4) 사도들은 상관들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 상관들은 그들에 대한 핍박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을 타도하는 군중의 시위를 선동하였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22절).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백성들을 제도를 파기하고 관습을 변화시키는 위험 인물이라 주장함으로써 그들을 몰아붙인 것은 사단의 획책이었다.

2) 더나아가 그들은 사도들은 가장 악한 죄인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사도들의 옷을 찢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의 관례에 의해 채찍을 맞은 세차례 사건 중 하나였다. 이 로마법에는 채찍 수가 마흔번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유대법의 규정이 무시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수없이 많은 채찍을 맞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23절). 우리는 이 정도면 그들의 잔인성이 충족되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다. 즉, 바울의 일행은 채찍질을 당했으므로 분명히 석방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반대로 사도들은 감옥에 투옥되고 만 것이다. 재판관들은 그들이 위임받은 일들을 매우 가혹하게 처리하였다. 그들은 간수에게 그들을 든든히 지킬 것을 분부했다. 즉 그들은 사도들이 감옥을 부수고 탈출을 감행하거나 혹은 외부에 패거리가 있어 그들로부터 구출될 소지라도 있는 위험인물들인양 그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하달했던 것이다. 간수는 사도들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24절). 상관들이 잔인할 때 그들 밑에 있는 관리들도 역시 잔인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사도들을 깊은 감옥에 가두었다. 그곳은 일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악질범들을 가두는 지하 감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은 양 간수는 그들의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다. 그들의 발에 착고를 채운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처음의 경우가 아니었다. 이전 시대에나 후대에도 얼마나 많은 곤경을 그들은 당했던가!

 

Ⅳ. 바울과 실라의 투옥 16:25-34

우리는 바울과 실라에 대한 박해자들의 계획이 좌절되고 무산되는 경우를 본문에서 보게 된다.

(1) 박해자들은 복음전파자들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복음전파에 대해 더욱 열심을 내게 됨을 보게 된다.

1)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용기를 내었다. 그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집정관들이 때린 채찍으로 인하여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따라서 그들은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 뿐 아니라, 다음에 그들은 참수형을 두려워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깊은 감옥에서 착고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밤중에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감싸주고 위로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투옥과 채찍질이 복음전파의 계기가 될 것을 기도했으며, 박해자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과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이때는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한밤중이었다. 또한 그곳은 기도의 집이 아니라 지하 감옥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기도하기도 적합했으며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고통과 슬픔도 우리의 기도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미하는 마음이 없다면, 찬미할 조건조차도 없을 것이다. 지하 감옥과 두발에 채여진 착고들도 그들이 찬양하는 것을 막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 어떤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찬양심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로 그를 찬양했다. 고통 중에서도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규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 중에서 기도했던 것이다. 또한 기쁨을 맞이한 자들이 찬미해야 한다는 것 역시 신자들의 규례이므로 그들은 고통 중에서도 기쁨으로 찬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 주위의 죄수들이 그것을 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설사 죄수들이 그들의 기도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찬송하는 것은 들었을 것이다. 비록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 갇혀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차게 찬양했다. 우리는 마음을 다 바쳐 찬양해야 한다. 사도들은 다른 죄수들이 그들의 찬양을 들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주님을 믿는 떳떳한 자리로서 큰소리로 찬양하였다. 저속한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남들은 아랑곳없이 고성방가로 노래하고 있는데 반해, 신자들의 가정이 남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의무를 생략한다면 그것은 변명될 수 있겠는가? 죄수들은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감옥 문이 열리게 되는 기적적인 은총을 볼 수 있었다.

2)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징표를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을 놀랍게 격려하셨다(24절). 갑자기 커다란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26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행한 무례함에 대해 분노의 표시로서 이러한 지진을 일으키셨다. 감옥문은 열려졌고 죄수들의 착고가 풀어졌다.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26절). 후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와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주셨듯이'(행 27:24)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감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 허락하셨다.

(2) 박해자들은 복음전파를 중단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감옥 속에서의 개종 사건과, 복음의 승리가 그곳에서 일어나 간수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음을 목격하게 된다.

1) 간수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처형당할까봐 두려워했으나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그를 안심시켰다(27,28절).

첫째, 간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지진의 충격과 어둠속에서 자신들의 결박이 풀려진 것을 본 죄수들의 기쁨과 놀라움의 탄성들이 그를 깨운 것 같다. 간수는 죄수들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쉽게 깨어날 수 있었다.

둘째, 그는 감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갔을 것으로 단정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될까? 그는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로마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셋째, 깜짝 놀란 그는 자신의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했다. 그것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미리 방지하고 자기가 감시한 죄수가 도주한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살을 허락했다. 이 간수는 자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명 자체가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입증하고 우리에게 창조의 법을 준수하도록 명하여 우리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이 은혜앞에서 기쁨을 누릴 것과 타락하지 않고 용기있게 살아갈 것을 말한다.

넷째, 바울은 간수의 자살행위를 중지시켰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28절).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경고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성향을 지닌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즉 너의 몸을 해치지 말라. 그러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죄를 짓지 말라. 그러면 아무것도 너를 해칠 수 없다는 뜻이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친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소환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감옥문도 열려지고 그들의 결박도 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발을 풀어주시는 만큼이나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으시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2) 간수는 목숨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 했으나, 바울은 그를 안심시킨다. 하나의 관심이 그 간수를 보다 엄청난 또하나의 관심으로 이끌었다. 그는 죽음이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또한 죽음 저편에서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① 이유야 어쨌든 간에 그는 상당히 당황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자신이 위로자이심을 그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그를 공포에 몰아넣으셨다. 그는 등불을 갖고 감옥으로 뛰어들어와 떨면서 바울과 실라에게로 왔다. 이 간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자, 자신의 사정을 호소할 사람은 바울 밖에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한때 간수의 경우와 동일한 경험을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즉 바울은 한때 선한 자들의 박해자로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을 그 간수에게 더욱 친밀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② 이러한 당혹함속에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사도들에게 매우 공손하고 존경하는 태도로 다음과 같이 행했다. 그는 등불을 요청했으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였다. 아마 그는 귀신들린 여종이 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이며 구원의 길을 제시한 자들이다라고 말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행했던 무례함을 사죄받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그들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존경의 칭호로 사도들을 선생님, 주님이라고 불렀다. 이때까지 사도들은 부랑자와 악한자로 취급되어 왔으나, 이제는 그 간수의 주인이 되었다. 회개의 은총은 사람들의 말투를 변화시킨다. 간수는 매우 심각하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첫째, 이전까지 그의 생각이 가장 외부에 놓여 있었던 자신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이제는 당면한 문제로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둘째,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 관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바로 자신의 귀중한 영혼이었다.

셋째,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해야 함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넷째, 그는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선생님,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아무리 좁고 가시밭 길이며 어려운 길일지라도 나는 그곳으로 나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철저히 인정하고 진정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어떠한 요구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다섯째,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으며, 그것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얼굴을 시온산의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그 길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그의 사역자들에게 명하사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과 약속하신다.

여섯째, 간수는 사도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는 지하감옥에서 사도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는 지하감옥에서 사도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그들이 훨씬더 나쁜 곳으로부터 자기를 끌어내 주기를 원했다.

③ 사도들은 간수에게 그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곧바로 가르쳤다(31절). 비록 춥고 아프고 졸음이 왔지만, 그들은 보다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찾기 위하여 지체하지 않았다. 쇠가 달아올랐을 때 두들기듯이, 그들은 간수가 선한 마음을 가진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확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동역자인 그들 또한 일을 시작할 때인 것이다. 그들은 그 간수를 절친한 친구로 대하고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하늘로 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한 것과 똑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지시를 그에게 하였다. 본문에서 은총의 계약인 모든 복음의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몇마디 말로 요약되어 있다. 행복에 대한 약속은 다음과 같다. 즉 "네가 구원을 얻을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축복으로 인도될 것이다. 설사 박해자일지라도 당신의 완고하고 억센 마음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부드럽고 유쾌하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한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중보자를 통해서 자신과 세상을 화해시키려는 방법을 인정해야 하며 우리에게 보냄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인 것이다. 이 말씀이 그의 가족에게까지 확대되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아무리 그들의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들은 모두 구원받을 것이다.

④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2절). 본문에 나타난대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이며 그를 왜 믿어야 하는지를 그에게 알려주는 것이 절실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했다. 한 가정의 가장은 가족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은총을 받게 되는 길에 참여하도록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지도록 보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비천한 종들의 영혼들도 그들 주인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고귀하며 똑같은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⑤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즉시 세례를 받았다. 본문에는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즉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은혜의 성령이 갑작스럽게 그들속에서 그렇게 강한 신앙으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논의가 필요없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임했음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⑥ 이로써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그날 밤 즉시 그들을 데리고 나와' 그들을 단 일분도 감옥 안에 있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채찍맞은 부위를 씻어 주었고 상처가 아물도록 냉찜질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환대하였다. 전에 그들을 가혹하게 대했던 그 간수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극진한 대접도 만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었고' 그들은 식탁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그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그들로부터 영적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떤 식탁을 대하든 간에 그것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⑦ 구원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음성이 간수의 집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이전에 이처럼 즐거운 저녁을 맞이한 적이 없었다.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24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간수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지시한다. 그의 신앙은 기쁨을 창출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자들은 많은 기뻐할만한 이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즐거움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기쁨을 맛본 신자는 많은 사람들을 기쁨으로 인도해야 한다.

 

Ⅴ. 바울과 실라의 석방 16:35-40

1. 바울과 실라에 대한 석방 명령이 내려짐(35,36)

전날 사도들을 매우 학대했던 상관들은 날이 새자마자 그들이 방면을 탄원하기도 전에 즉시 명령을 내려 서둘러 그들을 석방시켰다. 상관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던 자들, 즉 아전들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석방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간수는 그 소식을 그들에게 가져왔다(36절). 상관들이 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36절). 이 말은 간수가 사도들을 그의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죄수들로서 떠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집에서 여전히 환영받을 것이지만, 간수는 사도들이 착고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기뻐했다.

2. 상관들이 자신의 특권을 침해한 죄를 범한 것에 대한 바울의 주장(37)

바울은 아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우리가 아무런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도 마구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행위는 불법이 아닌가? 이제 와서는 우리를 몰래 석방시키려 하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이 직접 우리에게 와서 데리고 나가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했음을 시인하게 하라.

(1) 바울이 매를 맞기 이전에 이와 같이 탄원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기가 전한 진리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고난속에서 자신을 자유케 할 수 있는 이러한 특권보다 더욱 고귀한 것을 소유하였다.

(2) 바울은 모든 모욕을 당한 후에 탄원을 제기했다. 그것은 그가 고통당한 이유를 명예롭게 하고 복음전파자들이 후한 대접을 받아야 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울의 이러한 항변은 빌립보 교회의 교우들에 대한 상관들의 강경한 태도를 경감시키는 것과 그곳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취해진 것이었다.

첫째,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범법행위를 자행하였는가를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의 일행을 구타하였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로마 시민들에게 무례하게 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치권을 빼앗긴 도시들의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바울의 일행이 그리스도의 사자들인 자신들을 구타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신들을 학대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분노보다 로마의 황제의 분노가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관들은 유죄판결조차 내림이 없이 사도들을 구타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에 대한 고소장을 심의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발언권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제기된 소송에 대해 공정한 재판만 했었더라도,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러한 학대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한 것은 굴욕적인 처사였다. 그들은 처벌 이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도들을 비밀리에 내어보내려고 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고수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할만한 솔직함도 없었다.

둘째, 바울은 그 상관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공개석상에서 사도들의 무죄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그리고 우리가 채찍질을 당하거나 결박될 아무 일도 범하지 않았음을 증언하라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바울의 완강한 주장은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개인보다는 자신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3. 바울과 실라에 대한 판결의 보복(38,39)

상관들은 바울이 로마시민이란 사실을 알았을때 깜짝 놀랐다. 박해자들의 소송은 종종 국가법의 차원에서 비합법적이고 자연법에 어긋나는 비인간적인 처사였으며,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악한 것이었다. 상관들은 사도들에게 와서 그들에 대한 법적 소송을 취하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사도들이 투옥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왔으며, 사도들이 조용히 그 도시를 떠나가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만일 이 상관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였다면, 그들은 사도들이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며 계속 그 도시에 남아 구원의 길을 자신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간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 상관들은 마지못해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존경했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기위해 나아가질 않았다.

4.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출발함(40)

사도들은 법적으로 석방되어 감옥을 나왔다. 사도들은 친구들과 작별했다. 사도들은 루리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그들을 위로했다. 초심자들은 많은 위로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떠나갔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로 향하도록 특별한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도달했을때 노력의 결과가 거의 없음을 깨달았고 즉시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쓸데없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후에 그 교회는 빌립보서(참조, 행 1:1,4:15)에 나타났듯이 매우 유명해졌으며,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큰 관용을 바울에게 베풀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수고한 노력의 결과를 당장 찾아볼 수 없다해도 결코 실망해서는 안 된다. 뿌려진 씨앗은 흙속에 파묻혀진 것으로 보일지라도, 때가 되면 싹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 해설

빌립보에서의 전도사역 ( 16 )

바나바와의 불화로 인해 그와 헤어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 2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1차 여행때 세워진 교회들을 방문하여 믿음을 굳게 하고 또한 새로운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사역에서 많은 동역자들을 만나며 증인으로서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빌립보에 이른 바울은 그곳에서도 많은 이들을 주께로 돌이킵니다.

 

1. 디모데를 택한 바울

바울은 실라와 함께 주의 은혜를 위하여 형제들에게 부탁함을 받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다시금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여행때에 믿게 된 제자였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좋은 평판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를 그의 수종자로 여행에 데려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디모데가 유대계 어머니는 두었지만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안을 꺼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여정으로 다녀가면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규례를 지키게 했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더했음을 누가는 기록합니다. 누가는 또하나의 성장 기록과 함께 사역의 한부분을 매듭짓고 있는 것입니다.

a.디모데(롬16:21)

b.교회의 권위(히13:17)

 

2. 마게도냐로 부르심

성령께서는 바울의 선교단을 인도하셨습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은 2년전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시가 있는 지역입니다. 바울의 계획은 아시아를 통해 서쪽으로 여행을 계속해서 에게해 연안의 에베소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미 에베소가 그 주변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한 기지로서 지니고 있는 전략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성령께서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아시아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발길을 돌려 북쪽 산맥을 넘어갔습니다. 소아시아 서북부는 로마의 속주 지루니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계획을 실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영이 즉 성령이 그 계획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길은 해안으로 가는 길뿐입니다.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이르자 비로소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은 밤에 꿈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그리로 건너와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동료들에게 그 일을 전했습니다. 이때 '우리'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으로 보아 누가도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성령의 사역(롬8:14)

b.순종의 실례(행26:19)

 

3.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1) 루디아의 개종

빌립보에는 회당을 유지할만큼 큰 유대인 공동체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울과 그의 친구들은 도시의 서쪽 외곽에 있는 갠기트 강가에 비정규적인 기도 모임 장소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유대인 여자 몇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여자들 몇이 기도하기 위해 매안식일마다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중 루아디라에서 온 자주 옷 장사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가 마게도냐의 첫 개종자가 되어 전도자들을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온 집이 세례를 받고 그들을 집에 유하도록 했습니다.

a.기도(엡6:18)

2) 점장이 여자 노예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자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원치도 않는 증거를 하며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더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주인들은 수입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주인들은 재산상의 손해를 당하게 되자 격분하여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a.귀신들림(눅13:11)

b.악령 추방(마17:18)

3) 간수의 개종

관원들의 상관들은 두 전도자에게 매를 때리게 하고 그들을 넘겨주어 밤새 가두어 지키게 했습니다. 바울은 아마 후에 '세번 태장을 맞은' 일로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무 차꼬에 채워져 꼼짝할 수 없는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벽이 흔들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줄이 다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잠이 깬 간수는 급히 달려왔으나 바깥쪽에서 캄캄한 옥만을 보았기 때문에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수들이 다 도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칼에 엎드러져 자결하려는 순간 급히 소리쳐 멈추게 했습니다. 진정 이 간수에게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듣고 온 가족과 함께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튿날 상관들은 이 달갑지 않은 손님들을 내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들이 법에 어긋나는 처벌을 받았다고 항의했습니다. 로마 시민으로서 바울은 그의 권리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두 상관은 직접 감옥으로 달려와 그들을 호위하면서 빌립보를 떠나주기를 간청했습니다.

a.찬송의 때(계5:9)

b.구원의 간구(요6:28-29)

 

결론

복음의 능력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든지 미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느 누구든지 복음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디아, 귀신들린 여종, 그리고 간수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소식은 전해져야 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 핵심

16:1-10

2차 전도여행에 나선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마게도냐로 향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유럽 전도의 문이 열렸다.

강가의 기도처(16:13)

유대인들의 기도처는 통상적으로 회당이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거나 유대인 남자가 10명 미만이어서 회당을 건립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들판이나 강가에 모여 예배하며 기도하곤 했다(스 8:15). 특히 강가는 물이 있어 정결례를 행하기 용이하며, 시원한 휴식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어 모임 장소로 요긴했다(시 137:1).

 

# 묵상

디모데를 만난 바울 ( 16:1, 2 )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모친인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가르침으로 디모데는 늘 성경을 가까이하였으며(딤후1:5),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때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개종후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가기전에 먼저 할례를 행했는데, 이는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할례도 받지않은 헬라인의 아들이라고 디모데를 배척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할례를 절대시하지 않지만 무시하지도 않는 바울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루디아의 회심 ( 16:15 )

루디아는 바울의 말을 청종하고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유하게 했습니다. 루디아는 원래 두아디라에 사는 사람인데 장사때문에 빌립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루디아의 회심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루디아의 집은 선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관원에게 넘겨짐 ( 16:19 )

여종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넘긴 이유는 여종을 통해 얻던 이익과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불의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에 화가 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이기에 잡아갔고 그들과 동행인 누가와 디모데는 헬라인이었기에 잡아가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옥중에서의 바울과 실라 ( 16:25, 26 )

바울과 실라는 심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어려운 상황에도 낙심하거나 복음전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기도와 찬송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할때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졌습니다.

바울의 로마 시민권 ( 16:38 )

상관들이 아전들의 보고를 듣고 두려워한 이유는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로마 시민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의 법률에 의해서만 재판을 받게 되어있는데 상관들은 자세한 죄도 알지 못하고 그들을 옷벗기고 매를 때리고 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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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이방인들의 할례에 대한 논쟁 15:1-5

비록 하는 일들이 순풍에 돛 단듯 기분좋게 진행된다해도 안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혀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지상에 천국이 존재했었다면, 그곳은 분명 그 당시의 안디옥 교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조차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뛰어난 사역자들간의 평화가 파괴되었고 분열이 초래되었음을 보게 된다.

(1) 그들 사이에서 발생한 하나의 새로운 교리는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할례와 의식법에 복종할 것을 의무화한 것이다(1절).

1) 이 교리를 강요한 자들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안디옥을 방문한 이유는 그곳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사령부인 동시에 이방인 개종자들의 총집결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그들이 거기서 세력을 확보할 수만 있었다면, 모든 이방인 교회들을 점거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한가지 결점이 있다고 하면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또다시 무지해지거나 그릇된 교육을 받지않도록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2) 그들의 기본 입장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였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품고 있었다.(21:20). 그들은 그 율법의 권위 속에서 양육받아 왔기때문에 그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것의 권위가 신성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교육을 통한 편견은 일순간에 극복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묵인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그 율법에 얽매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방인 개종자들도 동일한 의무를 지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칙과 법칙으로 가르침으로써 자신의 행동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든 행동을 나쁜 것으로 결론지으려는 괴퍅스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었던 그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졌던 메시야관 즉, 그가 유대민족의 편에서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들의 기대가 전혀 어긋나자 그들은 실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방인들 사이에 받아들여져서 그들 가운데에 그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실현되어 비록 다른 방법으로서이긴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강대한 유대인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설사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 그릇된 사상을 지닌 자들이 그 왕국을 확장시킨다는 명목으로 악한 수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이 할례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즉 만일 너희가 우리의 생각과 방식대로 따르지 아니한다면, 너희는 정녕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지옥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무리 선량한 신자라도 구원을 얻지못하면, 구원 자체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

(2) 바울과 바나바는 이 종파 분열적인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2절). 그들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교리에 결코 승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서 그의 진리가 배척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가 의식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세례를 위주로 삼았을때,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적인 어버이로서 그들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찌기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이 위험천만한 그릇된 사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치가 취하여졌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및 그들과 함께한 몇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3절).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예루살렘에 의뢰한 것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친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왔으며 또한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그곳 교회로부터 그러한 지시를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사람을 파송하는 것이 매우 적절한 조치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은(24절) 사실이었으나, 그곳의 사도들로부터 그러한 지시를 받은 사실은 결코 없었다. 또한 이 사건을 예루살렘에 의뢰한 또다른 이유는 이러한 교리를 교육받은 자들이 '예루살렘의 장로와 사도가' 그같은 교리에 반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경우, 그 유대인들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밖의 이유는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는 하나의 쟁점에 관해 자문 받는데에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가장 적합한 상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결정이 그 논쟁을 종결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4) 이러한 사명을 띠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3절). 이처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입장에 선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들은 그들의 여정에서도 선한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또한 그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면서 모든 형제들에게 기쁨을 안겨다준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해 선포하였다. 복음의 전파는 커다란 기쁨의 사건이며, 또한 기쁨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족에 속한 모든 형제들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가족으로 들어오게 될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족을 그 자녀의 수가 증가된다고해서 결코 가난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천국에는 그 가족 모두에게 충분한 양식 재물이 있다.

(5)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4절). 그들의 친구들이 그들에게 베푼 성대한 환영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극진한 사랑과 우정을 표하면서 그들을 영접했다. 그들도 예루살렘의 친구들이 베푼 극진한 환대에 보답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했으며 이방인 세계에서 수행한 목회활동의 성공담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오가면서 심고 물을 주었다. 그러나 이 모두에서 그들은 자라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꺼이 고백할 수 있었다.

(6) 여기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할례 주장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이 일어나 말하되(5절). 그 반대 입장에 선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복음에 대하여 지나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복음에 의해 얽매여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에는 통치자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그를 믿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를 믿게 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신실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일순간에 완전히 제거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후에 신자가 된 바리새인들도 지난날의 타성에 어느 정도 젖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아닌 일부의 사람들이 그러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Ⅱ. 이방인 복음 전도에 대한 회의 소집 15:6-21

우리는 여기서 이 사건에 관하여 소집된 회의 장면을 보게 된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6절). 그들은 이 문제를 경솔하게 판결하지 아니하고 심사숙고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이 문제의 내막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며 또한 반대파의 진술을 청문할 기회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이 교회에 발생했을 때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이 함께 참석한 중대한 회의에서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 설정이 내려졌음을 보게 된다. 즉, 거기서 그들은 서로의 사상을 이해하고 상호간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베드로의 연설(6-11)

그는 이 회의의 신실한 일원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신상 발언을 피력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찬반 논쟁이 야기되었으며, 그러한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연설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양측의 연설을 들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섰다.

(1) 베드로는 오래 전에 이방인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이 위임받은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사도들 중에 한사람을 택하셨는데 내가 그 택함을 받은 장본인이다. 이는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음이라(7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참된 삶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을 기뻐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참조.행 11:18) 그런데 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들은 이방인들이 강제로 할례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2) 베드로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11:15-17절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선물받은 자들이 곧 그의 백성들임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된 징표로서의 성령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나 우리를 분간치 아니하셨도다(9절). 즉, 비록 그들이 이방인들일지라도 우리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보좌로 환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형제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정하셨던 조건 이외에 그 어떤 조건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이제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이 믿음을 통하여 정결해졌으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데 합당한 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방인들이 우리의 정결 의식법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9절). 모든 성도들의 신앙은 똑같이 고귀한 것이며, 값진 효과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들간에 신앙적인 차이가 있다해도 서로를 결속된 공동체로 생각해야 한다.

(3) 베드로는 모세 율법의 의무에 이방인들을 복종시키려는 선생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절). 여기서 베드로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다 확실한 성령의 은사에 의해 이미 정해진 일들을 문제삼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다음의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계시는가? 혹은 하나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정하지 아니한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며, 그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그 제자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오셔서 속박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해방시킨 사람들을 다시 노예로 삼으려 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이제 이 교사들이 유대인들에게서조차 벗겨주신 멍에를 다시 이방인들의 목에 씌우려고 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위법행위였다.

(4) 유대인 사도들은 할례가 구원받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시사한다(11절).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10절). 할례받은 우리나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 모두 구원을 받게 된다.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유대인들의 구원받는 방법과 이방인들의 구원받는 방법이 각각 별개의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모세의 율법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가? 또한 왜 우리는 우리와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빼앗고 그것만을 강요하는가?

2. 바나바와 바울이 발언한 내용(12)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12절). 그들의 이 발언은 전에 안디옥 교회에서도 행한 것으로(14:27) 이곳 예루살렘 회의에서 제차 행해졌다. 그리고 이 발언이 여기서 행해진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하나님께서 율법 없이도 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시인하셨음을 보여주셨다.

(1) 그들이 설명한 내용 :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설명했으며, 자연계의 기적들을 통해 그들의 설교가 확증된 것과 은혜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들의 복음전파가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입장을 옹호해 주셨는데 그들에게 그 이상의 무슨 변호가 필요했단 말인가?

(2) 그들의 말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 : 온 무리가 조용히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기된 모든 논쟁들 중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더 주의 깊게 경청했던 것 같다. 자연 철학과 의학에서 실험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서도 은혜의 말씀에 대한 최고의 해설은 은혜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관한 설명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사실을 선포한 자들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야 할 것이다.

3. 회의에서 행한 야고보의 연설(13-21)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일어났다. 여러 사역자들의 말을 청문하는 것은 진실의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다.

(1) 야고보는 참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13절). 즉 우리 모두는 형제요, 이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신자들을 괴롭혀서는 안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2)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에 관한 베드로의 진술을 언급한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14절) 그 이방인들 중의 첫 열매가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소견을 밝혔다. 즉, 이방인의 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며, 이방인들을 방문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교는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방문하여 구원하셨을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까지도 방문하여 구원하셨던 것이다. 이방인들의 개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셨듯이 오늘날에는 이방인들을 택하신다.

(3) 야고보는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확증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예고되었으므로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15절).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예언자들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관하여 다소간 언급하였다. 메시야가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어야 한다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피하고 보다 불명료해 보이는 하나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것은 아모스 9:11,12절에 기록된 예언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메시야 왕국의 건설(16절) :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 장막은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수세대 동안 다윗 가문의 왕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그 장막을 재건하시어 그 폐허된 잿더미속에서 하나의 불사조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야 비로소 이 예언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윗 가문에서 탄생하심으로써 뒤늦게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윗의 장막으로 불리워 질 수 있다. 이 장막은 때때로 매우 비천하고 황폐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건되어 활기를 되찾고 살아날 것이다.

2) 이 일으킴의 결과로써 이방인을 오게함(17절). 이는 그 남은 사람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가시적 교회밖에 남아있던 남은 자들에게도 주를 찾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주를 찾기 위해 오게 될 것이다.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이 말은 야고보가 첨가한 것이다)찾게 하려 함이라. 주의 이름이 그들에게 선포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도 그들을 그의 백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들의 일치된 관점에서 '그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들'이라고 본문에 기록되었다. 이제 이 약속은 성취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행하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언행은 일치하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결합하는 것과 이를 위해 행해진 모든 일들은 다음의 두가지 사실에 기초한다.

첫째, 이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모든 도구들을 사용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매우 흡족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이다.

(4) 야고보는 그 문제를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에 귀결시킨다(18절).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말씀하셨으며, 그의 영원하신 경륜속에서 그것을 예정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행하시든 간에 미리 계획하고 정하신다. 그는 자신이 정한 것은 무엇이나 행하실 뿐만 아니라(그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월등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목표나 방책은 좌절되거나 무산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자신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이미 결정된 것이다. 우리의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신다. 우리는 근시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가련한 피조물들이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들이라해도, 그들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사소한 부분적인 것이며 그것마저도 전혀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지속에 분명한 확실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5)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19절). '내 의견에는'이란 말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권위적 입장에서가 아닌 조언자의 입장에서 말함을 뜻한다. 그의 견해는 이러하다.

1)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의식법 준수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야고보 자신은 이방인을 극진한 친절로써 대할 것이며 그들을 괴롭히거나 동요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그들을 결코 강요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야고보 자신은 이방인을 극진한 친절로써 대할 것이며 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불확실한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초심자들을 실망시키거나 동요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먼저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깊이 느끼게 할 때, 그들은 만족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2) 유대인들을 가장 불쾌하게 하는 몇가지 문제들에 관해서는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낫다. 야고보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다음의 두가지 사항만 절제한다면 유대인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소한 것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유대인들의 감정을 격분시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야고보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이 두가지는 나쁜 것으로 항상 금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하도록 신중하게 경고했으며, 그들이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하지 말 것과 특히 그들의 제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또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이 죄악에 대한 바울의 경고는 얼마나 맹렬하고도 강압적인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개종후에도 그들 사이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된다고 지적했으며, 더욱이 이방인의 사도들이 그러한 사실을 묵인하고 있음을 공박하였다. 이제 야고보는 유대인들이 이러한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방인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에 대하여 공적으로 경고 받아야 할 것을 충고하였다.

둘째,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경고했다. 이 두가지 경고는 모세율법 이전부터 금지된 것이다.

(6) 야고보는 자신이 경고하게 된 이유를 제시한다. 즉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의식법의 거룩한 명령에 길들여져 왔으므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러한 제의적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21절). 모세는 그들에게 계속 설교되었고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도록 요청되었다.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들은 '회당에서 안식일날' 읽혀졌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세의 율법에 따라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예로부터 행하여져 오던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에 대한 존경심을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다. 이러한 관습이 모든 성에서 행하여져 왔으므로 이같은 율법의 요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설사 그들이 그러한 율법의 요구에 거부감을 느낀다해도, 그들을 비난한다거나 그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무시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하며 그들과 절충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처럼 사도 야고보는 양자 모두를 기쁘게 하며 격분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절충하는 중재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Ⅲ.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 내용 15:22-35

우리는 여기서 회의 내용의 결과를 보게 된다. 야고보의 조언은 공동의 재가를 얻게 되었다. 이방인 개종자들의 편에 선 사역자들을 통해 편지가 발송되었으며, 이 서신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항거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파송될 대표자의 선택(22)

(1) 그들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22절) 이 결정은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합의를 본 것이다. 그들이 자매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대해 관심을 표시한 것은 그 교회의 처한 상황을 분명히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대표 사절단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동반시킨 것은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귀향을 보다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이러한 조치는 그들이 전달하는 서신의 공신력을 더할뿐 아니라, 일부의 반대가 예상되었으므로 그 메시지가 지닌 공신력을 더욱 강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었다. 또한 이 조치는 성도들의 교제를 유지하고 수효는 많아도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취해졌다.

(2) 그들이 파송한 사람들은 우편배달이나 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로서 형제들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 사절들은 바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였다.

2. 예루살렘 회의의 견해를 통보하는 서신의 작성(23-29)

(1) 이 서신의 서문은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작성되었다(23절). 이 서문에는 사도들의 겸손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그들이 장로와 형제들과 일치하여 이번 문제에 대해 조언했던 자들에게 위임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했음을 알 수 있다(마 23:8). 그들이 보여준 존경심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먼저 문안 인사를 보냈으며 그들을 '이방인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그들에게 친교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러분은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형제입니다." 이제 이방인들은 같은 지체에 속한 동료 상속권자들로서 격려를 받고 형제로 불리워져야 한다.

(2) 유대주의적인 교사들에게는 냉정하고도 가혹한 비난을 하고 있다(24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그들이 우리의 추천을 받고왔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에게 모세의 법을 강요하게 하는 그러한 명령을 결코 그들에게 내리지 않았다. 그 거짓 교사들은 "너희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신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전하는 자들을 신뢰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세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자들때문에 여러분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쓸데도 없는 하찮은 말로써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교회는 자기 말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해 왔던가! 그들의 말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의 영혼을 파괴했고 혼돈시켰으며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것을 허물어뜨렸다.

(3) 이 서신의 전달자들에게 대한 영예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첫째,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증언 : 그 유대주의적인 교사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일을 망쳐놓았다고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개종자들을 유대교로 전향시키지 않고 기독교로만 개종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바울과 바나바'이다. 때로 고위층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칭찬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자들이었다(26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였다. 이처럼 신실한 고백자들을 불신실한 설교자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둘째, 유다와 실라에 대한 추천 :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25절)로서 회의에 참석하여 모든 논쟁을 청문한 사람들이며 '그 일을 말로 전할 자들'(27절)이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글과 말로써 동시에 전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4)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금지 사항을 지시하고 있다.

1) 이 금지 사항의 내용은 야고보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우상의 제물도 먹어서는 안되며 그것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해야만 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금지령은 익히 알려져 있다. 또한 그들은 피를 마셔도 안되었으며 목매어 죽은 것이나 혹은 피를 완전히 제거치 않은 것도 먹어서는 안되었다. 그들은 음행의 죄를 범한 사람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행위이므로 이런 문제로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2) 이 지시를 전함에 있어서 그들은 권위있게 자신들의 결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이 성령과 우리에게 가한 줄 알았노니'란 말은 그 지시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우리에게 적절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어떤 점이 자신들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성령께서 보시기에 좋았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렇게 지시했던 것이다. 그들은 넘치는 온유함과 부성애적인 관심으로 그 결의 내용을 전달한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부담을 안겨다 주기를 꺼려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너희에게 더이상의 아무런 짐도 부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삶을 시작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과중한 짐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이 실망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외에는 어떠한 짐도 부과하지 않는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무로 정하신 필요한 의무만을 부과해야 한다. 그들은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낼 권한을 갖지 못하며, 다만 그리스도의 법이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살펴야할 따름이다. 그들은 그 지시를 위반할 경우에 있을 저주를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지킬 경우에 주어질 좋은 결과를 말함으로써 그들의 지시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29절). 이 말은 매우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적절한 유머였다. 진실된 사도들의 태도는 거짓 교사들의 태도와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거짓 교사들이 의식법을 강요한 태도는 단호하고도 명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권했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온유하고 정중하게 말한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즉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예와 평화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3. 서신의 전달(30-35)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가. 그들은 용무를 마치자 더이상 예루살렘에 체류하지 않고 곧장 돌아왔다. 그들은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달하였다(30,31절). 그러므로 그 모인 무리들은 자신들에게 금지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다(31절).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의식법의 멍에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할례의 강요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로써 이방인 개종자들은 용기를 얻어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었다. 이제 교회의 평화는 회복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파송된 생소한 사역자들 즉 유다와 실라를 맞아들여 그들의 설교를 전해 들었다(32절).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32절). 바울과 바나바의 연속 설교를 듣던 사람들도 유다와 실라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사역자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는 교회에 유익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형제들에 대한 사역자들의 임무가 무엇인가를 관찰해 보자.

첫째, 그들을 확신시키는 일이다. 즉,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결의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을 인내하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즉, 그들을 깨우쳐 선한 일을 하게 하며 그렇게 살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형제들을 위로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로가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기쁨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감명을 얻을 수 있는 말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들이 전해야만 하는 말은 몇마디 말로써 요약될 수 있지만, 그들이 많은 말을 사용한 것은 교회의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나서 예루살렘 사역자들은 돌아갔다(33절). 그들은 안디옥에 얼마동안 머물러 있다가 그곳 형제들로부터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돌아갔다. 실라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실라는 안디옥에 머물러 있기로 택했던 것이다(34절). 그가 왜 안디옥에 머물러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과 바나바는-이방인의 전도가 그들의 주된 임무였지만- 당분간 안디옥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은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안디옥은 모든 지역에서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중심 도시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안디옥에서의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들의 주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곳에는 같은 일을 위해 수고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그 많은 일꾼들을 볼때 안이하게 쉴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일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열정적인 유익한 활동을 통해서 자극 받아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Ⅳ.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 15:36-41

우리는 여기서 두 사역자 즉 바울과 바나바와의 개인적인 다툼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잘 마무리되었다.

(1) 여기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가서 이방인들에게 행한 그들의 사역을 재정비하고 그것을 새롭게 진행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제 안디옥은 그들에게 안전하고 조용한 항구가 되었다. 바울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재정비하고 회복하고자 그곳에 입항하였음을 상기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바다로 여행을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임무가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상기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하였다. 본문의 '수일 후에'라는 말은 그의 활동적인 정신이 자신의 임무를 떠난 상태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그의 담대하고도 용감한 정신 역시 위험을 떠나서는 오랫동안 있을 수 없었다.

1) 바울은 오랜 친구이자 동역자인 바나바에게 이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간에 도울 수 있는 길이 많다. 그러므로 솔선수범하여 도움을 주고받아야 할 것이다. 군인은 혼자서 출전할 수 없는 법이다.

2) 누구를 위하여 방문이 계획되었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씨뿌린 들판을 가서 보자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절)는 것이었다. 바울은 모든 신자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는 모든 성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그 뿌려진 복음의 씨앗에 물을 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방문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드린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듯이, 우리의 복음전파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3) 어떠한 목적으로 이 방문이 계획되었는가?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절). 바울은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볼 목적으로 그들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회복기의 환자를 방문하여 그 병의 쾌유와 재발을 막는데 적절한 조치를 내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들의 방문 목적을 살펴보자.

첫째, 그들이 어떤 정신상태로 살고있으며 어떤 영향을 받고있는지,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둘째,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이 기뻐하면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 그들이 울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울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2) 조력자 문제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일치하지 못했다.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그의 조카 요한을 그들과 함께 데려가기를 원했다(37절). 그가 요한을 데려가기 원한 이유는 그의 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편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 반성해야 하며, 친척에 대한 편애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바울은 바나바의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다(38절). 바울이 요한을 부적격자로 단정한 것은 전에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그들을 떠나 그들과 함께 사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행 13:13). 그는 그들의 임무를 착수하려는 순간,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두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성실하게 약속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러한 사람에게 영예로운 과업을 맡기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최소한 요한이 더이상의 수련을 받기까지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한번 속이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3) 이 불일치는 분열로까지 확대되었다. 결국 그들은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간의 흥분이 과열되어 그들은 피차 갈라서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팽팽한 대결로 맞섰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한심하고도 교훈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1)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자신들 역시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이 두 훌륭한 인물들의 고백(행 14:15)은 이제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필자는 그 논쟁에 있어서(이러한 경우에 흔히 그렇듯이) 양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논쟁으로 치열하게 대립한 것과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서로 양보하지 아니한 것도 양자의 잘못이었다. 제 삼자가 그 논쟁에 개입하여 그 과열된 분위기를 중재하지 못했다는 것이 유감스런 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결점을 핑계 삼아 자신의 혈기와 열정을 변명하는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비난을 자제하는 것과 그들을 중재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회개는 우리들 자신이 엄격히 반성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자비는 우리가 타인에 대해 공정한 입장을 지녀야 함을 가르친다. 이 모든 일에 흠없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므로 우리는 그 분을 본받아야 한다.

2) 비록 선량하고 현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화가 야기된다 해도,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같은 예수 안에서 결합되고, 같은 성령 안에서 성결된 자들조차도 견해와 주장이 다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도래할때야 비로소 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3) 이러한 의견 충돌은 종종 분열의 파국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믿지않는 유대인들의 박해나 믿는 유대인들의 속임수에 의해서도 결코 분열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 사이의 의견 충돌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다.

(4) 그러나 이 불미스런 사건은 좋은 결과로 맺어졌다. 사도들이 당한 고난과(빌 1:12) 심지어 그들간의 분쟁 사건이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더욱 촉진시켰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하나님은 만일 그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모르신다면 그러한 불행한 일들을 허락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1) 이로써 그들은 더많은 장소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바나바는 다른 장소 즉, 구브로로 항해 하였는데(39절), 그곳은 그들이 전도활동을 시작한 장소였으며(행 13:4) 그의 고향이었다(행 4:36). 반면에 바울은 다른 방향을 택하여 그의 고향인 길리기아로 떠났다(행 21:39). 그들은 각각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셨다.

2) 이로써 이방인 복음전파에 더많은 일손들이 동원되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은 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당했었으나, 후에는 매우 유능하고 성공적인 일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실라가 새로운 일꾼으로 채용되었다.

(5) 그밖에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입장을 지지했던 것 같다. 바나바가 조카와 함께 구브로로 항해하였는데, 그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그곳을 떠날 때, 그는 주님의 은총을 비는 형제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바울 자신과 그의 전도여행의 성공을 위하여 공적으로 기도를 드렸다. 또한 그들은 그의 모든 활동 중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였다. 항상 훌륭한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2) 그러나 후에 바울은 더많은 시련을 통하여 성숙한 마가에 대해 좋은 견해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낼 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책망해야 할 사람조차도 적당히 책망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후에 좋은 평판을 얻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망받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절제함으로써, 그들의 신실성이 증명될 때 우리는 그들의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책망받아야 할 자들이라도 후에 더욱 신실한 자로 입증된다면 우리도 그들의 과거를 잊고 그들을 기쁘게 받아들여 용서하며 그들을 호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바울이 기꺼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41절). 사역자들은 믿지않는 자들을 개종시키는 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을 확신시키는 일에도 고용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해설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 ( 15 )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과 믿는 자의 수가 더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이 전하여지고, 복음으로 이룬 공동체가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지며, 그로 인하여 믿는 자들이 많아지는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관심을 끈 것은 교회에 나타나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교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1. 안디옥에서의 논쟁

1)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듣고 기쁨이 가득했던 안디옥 교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갈등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갈등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는 교회들이 유대적 기원을 갖고 있었고, 또 예루살렘 교회 자체도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번져 나가는 일을 감독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 전도는 미처 예상치 못한 규모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사실만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윤리적 수준을 지키는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하듯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였을 것입니다.

a.모세의 법(레12:3)

b.그릇된 할례관(갈6:13)

2) 예루살렘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들과 심한 변론을 했지만, 결국 이 문제는 교회의 최고 책임자들 수준에서 해결할 문제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두사람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흩어진 교인들이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곳 교인들은 이방인 선교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바리새인 중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a.교회의 분쟁(고후12:20)

b.변론(딤후2:23)

 

2. 예루살렘 회의

1) 베드로의 의견

본문의 회의는 '예루살렘 공회'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방인 신자들도 교회의 같은 지체로 인정해야 할지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모임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증인으로 초청되어 참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그들과 똑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밝힌 후,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참석자들에게 이방인들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고넬료의 집에서 최초로 복음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으셨고, 유대인들에게 내리신 성령을 똑같이 내리셨으므로 하나님이 지우시지 않은 짐을 이방인에게 지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마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최근의 전도여행을 말하며 베드로의 의견을 지지했습니다.

a.하나님의 공평(롬2:11)

b.하나님을 시험함(시106:14)

2) 야고보의 결론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다른 유대인의 관습을 부과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금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울러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질지도 모르는 불안과 불만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양심상 거리낌 없이 새로 가입한 이방인 신자들을 맞이할 조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이유로 해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의 고기나, 피를 완전히 빼지않은 고기 등 유대인들이 꺼리는 특정 음식을 삼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에 관한 율법의 규정에 순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판단을 구약 성경 암9:11-12절을 인용함으로써 뒷받침했습니다. 야고보가 인용하는 성경은 그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a.우상의 제물(겔4:14)

b.음행(고전10:8)

 

3. 사도들의 편지

예루살렘 공회의 동의를 얻은 야고보의 결론은 그가 제안한 몇 가지 대안들과 함께 편지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를 선출해 편지의 내용을 확증하고 설명하여 전달토록 했습니다. 이 편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서 유대에 내려와서 할례를 주장하던 자들에게 그런 일을 할 권한을 준 일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성령의 뜻에 따른 것으로 확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그 내용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낌 없는 사귐을 갖게 했고, 이 문제가 해결되자 그들은 새로운 각오로 봉사와 증거의 사역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a.짐을 지우지 아니함(계2:24)

 

4. 바울과 바나바의 불화

수일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얼마 전에 세워진 구브로와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했고, 바울은 마가가 지난번 버가에서 돌아갔던 일을 기억하면서 그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두사람은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도여행이 두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가 자기와 관점을 같이할만한 사람임을 발견하고 새로운 여행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a.'예' 라(고후1:19)

 

결론

본장은 교회가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려 할 때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을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 핵심

15:1-21

이방인 신자들의 할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예루살렘 공의회에 관한 기록이다.

예루살렘 공의회(15:1-29)

‘예루살렘 총회’라고도 한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 회의로서 이방인 신자들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 신자가 꺼려하는 제사 음식과 음란한 행위만은 삼가도록 권하기로 결의했다. 그러고 나서 이방인 교회에 대표자들을 파송해 총회의 결의 사항을 공식 통보했다.

 

 # 묵상

유대인들의 구원관 ( 15:1 )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원관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던 이 행위는 언약 공동체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하나의 징표일 뿐인데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할례 문제로 인한 논란 해결 ( 15:2-11 )

당시 안디옥 교회에서는 할례 문제로 많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의 핵심을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 얻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과 변론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변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 초대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베드로의 단호한 설명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역설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거져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이 은혜에 동참하는 자만이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할례는 복음의 핵심을 이끌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야고보의 권면 ( 15:15-20 )

야고보가 제시한 말씀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고, 남은 사람들과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암9:11, 12). 이는 장차 메시야가 다스리는 세상이 도래할 것과, 그날에 유대인과 구원받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참예하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뜻하며 음행은 성적 부도덕이나 부정한 결혼을 뜻하고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은 피가 흥건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며 단지 유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타협책일 뿐입니다.

바울의 제안 ( 15:36 )

바울은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말씀전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가 제1차 전도여행 때 전도했던 사람들을 다시 방문하여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 더불어 말씀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제의는 지도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늘 진솔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지도자야말로 이 세대가 필요로하는 진정한 사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 15:37, 38 )

이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낙오한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이들은 갈라지게 됩니다. 마가는 바울의 제1차 여행시에 낙오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신뢰할 수 없었으나, 바나바는 개인적으로 마가와 가까웠고 그를 믿었기에 한번의 실수를 용서하기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결별은 더많은 전도자들을 파송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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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이고니온에서의 바울의 전도 14:1-7

1. 이고니온에서의 복음전도(1)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듯이 신앙고백자들의 추방은 그 씨앗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두 사도는 비록 안디옥의 유대인들로부터 가혹한 대접을 받았지만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는 일에 기분이 저하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때문에 전체를 정죄하는 일은 삼가야 하며 또한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사람이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사도가 서로 협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단합심과 상호간의 애정을 입증하기 위해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

2. 그곳에서 거둔 사도들의 복음전도의 성공(1)

두 사도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1절). 이 헬라인들은 물론 이방인들이다. 복음은 이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앞 장(13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복음이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에게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뒤로 처질만큼 그들의 우선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며 다만 이방인들이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으므로 이들 양자는 아무런 차별없이 함께 교회로 들어오도록 용납된 것이다. 그곳에서 행한 사도들의 전도방식 속에는 매우 특출한 어떤 요소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은 '그들이 말하니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전한다(1절). 이것은 사도들이 매우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그리고 온화하고 애정이 넘치는 자세로 전도했음을 입증한다. 그들이 말한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그대로 청중들의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담대히 말하였으므로 청중들은 '하나님이 진리로써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그곳에서 직면한 사도들의 복음전도에 대한 반대(2)

불신앙의 유대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최초의 화근거리였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2절).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미친 복음의 감화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영접이 몇몇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거룩한 질투를 유발시켰듯이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자극이 사악한 질투를 유발시켰다.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자극에 의해 복음의 감화를 받지못한 이방인들은 사도들을 괴롭히는 도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말로써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종시키려는 자들과 개종한 자들에 대해 심술궂고 악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선한 사람들에게 악감을 품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험담을 퍼붓고 해로움을 끼치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그들의 악의(惡意)에서 기인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들이 이방인의 마음을 '성가시게 굴었다'고 해석한다. 즉 이 말은 그들이 이방인들을 계속 치근거렸다는 의미이다. 박해자들의 도구로 쓰이는 자들의 생리는 계속 치근대는 개 같은 것이다.

4. 그곳에서의 사도들의 계속적인 임무 수행과 하나님의 돌보심(3)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1)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했다. 이방인들이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대해 악감을 품고 있었으므로' 혹자는 그들이 추방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오래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 사도들은 초심자들에 대한 악의를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들의 일을 수행하는데에 정진하였다. 그들은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하였다. 여기서 무엇이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추호도 자신을 의존하지 않았으며 주안에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

(2)그리스도는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대로 사도들과 함께 일하신다. 그는 반드시 자신의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제시하신다. 복음은 은혜의 말씀이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신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 은혜의 말씀의 증거가 되신다. 그는 우리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시키셨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들에 관하여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3절). 하나님의 신성한 은혜의 능력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더 큰 기적을 행하셨듯이, 그들은 자연계의 기적을 행하였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하는 동안 주님도 그들과 함께하셨다.

5.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성내 무리의 분열(4)

본문은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라고 전한다(4절). 이 복음전도 사업은 매우 널리 알려졌으므로 성내의 무리들 각자는 그것에 대한 찬반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립을 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노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예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눅 12:51-23).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여 그의 조처에 응했더라면, 모두가 합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일단 일치점을 찾지 못하면 그 간격은 바다처럼 넓어지게 된다. 온 성이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는 일부분이나마 천국으로 가는 편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복음의 전도가 분열을 야기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파멸로 이르는 물결에 자신을 맡겨 떠내려가는 것보다 그 흐름을 역류하여 헤엄치는 분리자가 되어 백해를 받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6. 사도들에 대한 적들의 공격(5)

사도들에 대한 적들의 적대감은 마침내 폭력적인 불법행위로 돌발하였다. 그 음모자들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원들이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상호 원수지간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대적하는데에는 연합하였다. 이와같이 만약 교회의 적들이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해 연합한다면, 교우들도 역시 교회의 보존을 위해 연합해야 하지 않을까?

그 음모의 내용 : 그들의 계획은 두 사도를 능욕하여 망신시키며 그 다음에 그들을 돌로 치려는 것이었다.

7. 사도들의 구원(6,7)

사도들은 자신들에 대한 그들의 음모를 눈치채고 도피하였다. 그들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불명예스런 도피가 아니라) 명예로운 퇴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폭풍우속에서도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안식처를 마련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도 해야할 일을 발견하였으며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은 애써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성읍들로 가서 그곳과 그 근방에 복음을 전하였다. 사역자들이 박해를 당할때에 장소를 포기해야할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Ⅱ. 두 사도들의 루스드라에서의 복음전도 14:8-18

(1)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기적을 통하여 날때부터 불구였던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였다.

1) 그 가난한 앉은뱅이의 가련한 처지(8절) : 그는 발이 허약하여(말 그대로) 발을 쓰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그렇게 되어 이제까지 한번도 걸어 보거나 서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2) 치유에 대한 그의 기대(9절) : 그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대단한 감화를 받았다. 바울은 그의 영적분별력에 의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앉은뱅이의 인상에서 그의 치유에 대한 기대를 목격했을 것이다. 본문은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절)라고 전한다.

3) 그의 완치(10절) : 치료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본 바울은 말씀으로 그를 치유하였다. 바울은 주위의 사람들을 주목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치유의 기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 앉은뱅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본문에 '그가 앉았다'(8절)고 언급된 것은 그가 구걸하기 위해 앉아있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네 스스로 힘을 내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이 말을 얼마나 고맙게 받아들였겠는가하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본문에는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10절)고 전한다. 즉 그는 똑바로 설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리저리 걸어다닐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영적 불구상태를 치유받은 자들은 반드시 거룩한 환희로 가득차서 뛰어다니고 거룩한 대화를 나누기위해 걸어다님으로써 자신들이 치유받은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2) 이 치유가 백성들에게 끼친 감명 : 그들은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비록 그리스도는 숱한 기적을 행하시고도 유대인들의 가장 극심한 경멸로부터 피할 수 없으셨지만, 여기서 사도들은 이 한가지 기적의 역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실로 위대하고 영예로운 인물들로 부각되었다. 백성들은 사도들을 신으로 여겼다. 그들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절)라고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신들이 이 지상세계를 방문했다는 그들의 황당무계한 설명과 충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들이 자신들을 방문할만큼 자신들이 충분히 자랑스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생각을 곧장 실천에 옮겨 자신들의 신들에게 붙이는 호칭을 사도들에게 적용했다(12절).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 즉 쥬피터로 칭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신으로 여기려 한다면 그를 자신들의 신들 중 제일인자로 삼는 것이 용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허매, 즉 머큐리라고 칭했다. 머큐리는 신들의 사자였다. 그들이 바울을 그렇게 부른 이유는 그가 '그중에 말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제사장은 곧 그들에게 제사할 준비를 하였다(13절). 쥬피터 사원은 그 성의 수호자이자 보호자로서 정문6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 사원의 제사장은 백성들의 이러한 외침을 듣고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쥬피터가 몸소 그들 중에 나타났다면, 제사장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영예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제물을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한가지 기적의 역사를 통해 즉시 신격화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제물로 바칠 소를 가져왔고 또 그 제물을 장식하기 위하여 화환을 가져왔다.

(3)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간신히 모면하였다. 수많은 이방 세계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며, 신적 영예를 누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영예가 부여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알고 거룩한 분노를 발하였다.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듣고 옷을 찢고(14절). 우리는 사도들이 백성들로부터 비방을 당할때 자신들의 옷을 찢었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동요됨이 없이 그 비방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들을 신격화하여 그들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때, 그들은 그것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사도들은 그 일을 저지하려고 애썼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도로 선택하심으로써 그들을 충분히 영예롭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제왕의 영예나 신들의 영예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제사를 어떻게 저지하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들은 그러한 말을 듣자 곧장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 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영예를 기대하면서 가만히 서있지 않고 오히려 그 무리들 속에 뛰어들어감으로써 그 제사에 대한 거부의 의사를 명백히 표명하였다. 사도들은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어찌하여 여러분이 우리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느냐'고 외치면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1)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가 우리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영예를 돌린다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 영예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불과할뿐만 아니라 그것도 죄많고 고통에 가득찬 인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신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2) 우리의 가르침도 그와는 정반대이다. 너희가 섬기는 신들을 멸해야할 우리가 어떻게 그 신들 중의 하나가 되겠는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15절).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을때에는 그들과 상관없는 숭배를 반박할 설교를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만을 전파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할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자연 종교가 가지는 오류를 시정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이방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숭배한 신들과 그 신들에 관한 그들의 모든 예배의식은 헛된 일 즉 쓸모없고 불합리하고 무익한 짓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했다.

둘째, 그들이 돌이켜 섬겨야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생명이 없는 형상들을 숭배했었다. 그 형상들은 전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숭배할 것을 권고받고 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셋째, 이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요 모든 존재의 권능의 원천이시라는 점이다. 그는 천지와 바다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셨다. 우리는 너희와 모든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곧 참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너희에게 명한다.

넷째, 세상은 하나님의 인내의 은혜를 입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우상숭배를 보시고도 오래참으사 그들을 멸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16절). 그 신들에 대한 너희의 섬김은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세상에 보내셨으므로 만약 너희가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분은 결코 이전처럼 너희를 참으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알려질 한 계시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 너희는 더이상 우상숭배와 같은 헛된 일로 용서를 받지못하며 반드시 그들로부터 돌아서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으신 것은 우리가 건방져지도록 방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회개케하려 하심이었다. 우리가 무지할때 저지른 잘못은 우리가 좀더 깨우쳤을 때의 잘못을 결코 감싸주지 못한다.

다섯째,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시정을 직접 받지 않았을때에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형편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17절).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17절). 즉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증거외에도 그들의 주변에 널린 일반적인 섭리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죄의 일부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모든 변명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관한 다른 증거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증거하지 않은채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안내자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으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으셨다. 일반적인 섭리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한다. 비와 결실의 계절은 결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모든 힘들은 우리에게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한다. 하늘이 우리에게 비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유익함을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통하여 반드시 자신을 증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함을 증거하시는 것보다 그의 선하신 사례들을 베푸시는 것이 그의 칭호에 대한 우리의 존경을 일으키게하는 보다 풍부하고 유력한 증거들이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이 곧 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섭리의 선하심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사례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용할 양식이므로 사도들은 이 사실을 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신가를 보여주고 있다.

①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주심으로써 선을 행하신다. 우리는 비로인하여 마실 물을 얻고 또 그 비는 대지를 적신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는 비를 마시듯이 우리가 먹는 음식도 비를 필요로 한다. 그는 우리에게 비를 주심으로써 또는 결실기를 주신다. 하나님의 모든 일반적인 섭리가운데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는 최선의 방법은 뇌성과 같이 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하늘로부터 비를 주시고 또 결실기를 주시는 선하신 분으로 생각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게 대하게하려 함이었다.

②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신다.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인일뿐만 아니라 관대하신 분이시다. 그는 음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되 단순히 필요한만큼만이 아니라 풍족하고도 맛있는 다양한 종류로 채워주신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도 살던 이방인들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셨다. 그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까지 먹는 것으로 가득찼다. 이러한 것들로는 영혼을 채울 수 없으며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해야만 한다. 음식으로 우리는 살 수 있고 기쁨으로 우리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음식과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음식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또한 우리는 사랑과 감사로 충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백성들의 행동을 만류하는데 성공하였다(18절).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18절). 그들은 간신히 백성들의 그러한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자 백성들은 그들을 신격화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할 것은 이러한 영예를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이러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Ⅲ.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당한 고통 14:19-28

1.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던 경위(19,20)

그들은 주 연사인 바울이 바나바보다 그들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성나게 했으므로 바나바는 제쳐두고 바울에게 덤벼들었다. 백성들이 바울에 대해 격노한 경위를 살펴보자. 유대인들이 안디옥에서 왔다(19절).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사도들에게 대하여 격노하도록 조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얼마나 지속적이었는가를 살펴보자. 그들은 복음이 어떠한 곳에서든 발붙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백성들의 분노가 이 야만스러운 유대인들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달했는가를 살펴보자. 폭도로 돌변한 그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그런 후에 그가 죽은 줄로 알고 그를 성밖에 끌어내쳤다. 인간들의 악을 제어하기란 무척 힘든 반면, 인간들의 악을 부추기는 것은 매우 용이한 일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세속적인가를 살펴보라. 한 때는 사도들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대우하던 자들이 이제는 그들을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오늘 호산나라고 찬양하고서 내일은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자들과 같다. 즉 오늘은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이 내일은 그들을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란 바람과 같이 돌변하기 쉽다. 바울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된 경위를 살펴보자. 그가 성밖으로 던져졌을때 제자들이 그를 둘러섰다(20절). 그곳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루스드라에서 제자가 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초심자들은 바울이 쓰러질때에도 그에게 순종할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을 지키려는듯 그를 둘러섰으며 또한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곁에 둘러 서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비록 그들이 죽음의 목전까지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는한 결코 죽지않을 것이다.

2. 사도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 경위(20-25)

백성들이 아무리 바울에게 돌을 던진다해도 그를 그의 사명에서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를 성밖으로 내쳤지만(19절) 그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그들에 대한 박해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유익한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으라는 하나의 암시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루스드라를 떠났다.

(1) 그들은 더베에서 새 땅을 일구었다. 다음날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을 떠나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21절). 더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언급이 없다.

(2) 그들은 돌아가면서 전에 복음을 전했던 곳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즉 그들은 더베에서 충분히 거한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다시 되돌아갔다(21절).

첫째,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초심자들은 동요하기 쉽고 조그만 일에도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사도들은 초심자들에게 와서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은총이니 그 안에 굳게 거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초심자들이 이 은총 안에 거할때 그리스도를 놓칠 위험성이 전혀 없으며 그를 붙잡음으로 얻는 것과 같은 유익을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초심자들이 어떠한 시련에 봉착하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그리스도께서 주신다는 사실과 그들이 어떠한 손해를 당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풍성히 보상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이 말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초심자들의 마음속에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이 일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심어진 나무는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의 임무는 죄인들을 일깨우는 것과 성도들을 일깨우는 것과 성도들을 튼튼하게 세우는 일이다. 참된 확신은 영혼의 확신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총뿐이다.

둘째, 사도들은 초심자들이 계속 믿음 안에 거할 것을 권고하였다. 곧 그들은 초심자들을 격려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인내는 그들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주지시켰다. 믿음 안에 계속 거하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또한 필히 그들은 종종 그렇게 하도록 권고를 받아야 한다.

셋째,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사실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 거하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혹자는 그러한 환난이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과 염려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본문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환난에 직면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일은 이미 예정되어진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할 박해를 감수해야만 하며 그것을 모면할 길은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모든 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이름을 내맡겼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기는 비용을 계산했을 때 올바로만 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환난은 그리스도 군대의 지휘관들의 운명이다. 너희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가 섬기신 이상 섬김을 요구하시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평신도들에게 그들 이상의 섬김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가 많은 환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환난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견뎌내야 할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 나라 안에서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하여 나아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해 면류관을 얻게되는 것도 사실이다.

넷째, 사도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사도들은 두번째 방문시에 그들을 고정된 사역자의 지도아래에 둠으로써 하나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므로 개교회는 치리자들과 당회장을 세우게 되었다. 교회를 관장하기 위해 개교회들은 필수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한두 명 정도 세워야 한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준수하고 준행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활동한 자들이었으며 사역의 사명을 위해 엄숙하게 따로 세움을 받았다. 이 장로들이 봉사의 직책을 맡게 된 것은 선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 믿음 안에서 세워져야할 필요가 있으며 그 속에서 장로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다섯째, 사도들은 금식 기도로써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였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때라도 그들에 대한 사역자들의 관심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그들의 신앙에서 결핍된 것을 완전케 할 필요가 있다. 믿는 자들은 극진히 돌보는 사역자들을 필연적으로 그들을 주님께 의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반드시 자신을 주의 보호에 의탁해야 하며, 그들의 사역자들도 그들을 주의 보호에 맡겨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을 주께 의탁하게 된다. '그들이 믿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그분께 의탁하는 자들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의 기도의 능력을 배가하기 위해 금식기도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친구들과 작별할 때의 가장 훌륭한 인사는 그를 주님께 부탁하고 그들이 주님과 함께 거하도록 당부하는 것이다.

(3) 사도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다. 안디옥을 출발한 그들은 비시디아를 경유한 밤빌리아 지방에 도착했다. 그 지방의 중심지는 그들이 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 버가였다(행 13:13절). 이제 그들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곳에 다시 도착했다(25절).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출발하여 밤빌리아의 한 성읍인 앗달리아로 내려갔다. 그들은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으나 가는 곳마다 후에 설립될 교회의 기초를 놓기 위해,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면 엄청나게 증가할 씨앗들을 심어놓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3.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26-28)

그들은 마침내 처음 파송을 명령받았던 장소인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였다. 그들은 앗달리아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안디옥에 이르렀다(26절)

(1) 그들이 안디옥에 오게된 이유는 그곳이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안디옥의 형제들은 그들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룬 일에 대해 마땅히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이 형제들의 기도를 통해 도움을 받았듯이 그들의 칭찬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사도들은 안디옥의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여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27절) 그들은 교회을 함께 모았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보고했다.

첫째, 사도들은 자신들의 노고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보고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고하고(27절).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만 전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계획하고 행하실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공하도록 역사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사역자들의 설교없이도 무엇이든지 이루실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은총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둘째,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거둔 그들의 노고의 열매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문을 통하지 않고도 결코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믿음의 문을 여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에 대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이로써 복음은 널리 전파되었고 더욱 그 광채를 발했다. 하나님께서 여신 이 문을 닫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3) 당시 그곳에서의 처신 : 거기서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8절). 그들이 이곳에 오래 체류한 이유는 적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곳의 동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 해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의 전도 사역 ( 14 )

바울과 바나바의 여행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보이셨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케 했습니다.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했고, 성도들을 믿음에 온전히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해 증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안디옥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1. 이고니온에서의 바울

1) 두 사도의 증거

이고니온에 온 두 사도는 여전히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설교가 너무나 영향력이 있어서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두 사도는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며 표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힘있게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안디옥에서처럼 성공적인 사역이 계속되었습니다.

a.유대인의 회당(약2:2)

b.은혜의 말씀(고전1:23-25)

2) 두 사도의 피신

그러나 성공적인 사역가운데도 다시 반대의 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악감을 품은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있는 사실은 원어에 나오는 3절의 접속사 '그러므로'입니다. 이것은 2절의 반대가 복음 전파를 위해 좀더 나은 기회를 제공했음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의미로는 그 반대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되어서 더나은 복음 전파로 이끌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후자가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 성내에는 무리가 두 부류로 나뉘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을 좇는 자와 두 사도를 좇는 자들이었습니다. 관원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로 피신했습니다.

a.순종치 아니하는 자들(롬15:31)

b.피신(마10:23)

 

2.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1) 쓰스와 허메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으로부터 약 29km 떨어진 동남방에 위치한 로마의 식민지요, 군사의 요충지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이 이적으로 인해 그 도시의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Hermes), 바나바를 쓰스(Zeus)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쓰스 신전의 제사장들은 그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오해를 해명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그 신들 중 위엄있는 통치의 신 제우스로 여기고, 바울은 그 신의 대변자 헤르메스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a.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행3:2)

b.바울을 신으로 봄(행28:6)

2) 바울의 설교

루스드라 사람들로서는 만일 그들이 신이라면 마땅히 희생 제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예배를 위한 준비는 이 선교사들이 말리기 전까지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알아듣지 못하는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곧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그 일을 막았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행동을 말리면서 자기들도 유한한 사람이며,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하시는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의 사자일 뿐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들에게 적절한 메시지로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그 주민들에게 그들이 살고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땅을 기름지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를 하나님이 주시며 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식물도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선교활동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함으로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a.인간에게 제사함(단2:46)

b.살아계신 하나님(살전1:9)

 

3.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바울

1) 바울이 당한 환난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신으로 숭배하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을 돌로쳐서 죽은 줄로 알고 끌어다가 성밖에 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않았고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를 향해 선교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남동쪽으로 96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더베는 로마 속주 갈라디아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였고, 두 사람은 이때 여기까지밖에 여행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나서 방향을 북서쪽으로 바꾸었습니다. 더베에서 바울은 그들이 왔던 길을 되밟아 가며 최근에 방문했던 도시들을 지나가면서 어린 교회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그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되돌아가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a.돌로 침(고후11:24-6)

b.의인의 환난(벧전2:24)

2) 안디옥을 향하여

바울의 고향 다소는 더베에서 불과 16여 마일 떨어졌으나, 두 사도는 최근에 세운 교회들을 견고히 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권면과 약속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권면의 내용은 많은 고난에 대한 예언이었고, 약속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후자는 분명히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교회뿐 아니라 조직에 있어서도 지도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서 자기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이 장로들은 회당에서 온 성경에 정통한 유대인이었습니다. 회당의 장로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왔던 길로 돌아가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차례로 방문했고, 안디옥에서 버가를 거쳐 항구도시 앗달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안디옥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일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셨음을 보고했습니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갔고 하나님께서 문을 여사 그들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a.장로들을 택하여 세움(딛1:5-6)

b.믿음의 문을 여심(골4:3)

 

결론

이렇게 해서, 그들은 몇달 전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 떠났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램시(Ramsay)는 이 1차 여행이 2년 4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감격케 했을 것은 이방인 교회로서 모교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 핵심

14:1-18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일대에서 전도한 기사이다. 루스드라에선 앉은뱅이 치유 사건과 관련해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숭배하려한 소동이 있었다.

 

# 묵상

루스드라에서의 바울 사역 ( 14:8-10 )

바울은 그곳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걷게 하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신앙적 자세 ( 14:11-18 )

바울의 이적을 본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고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허메라 부르며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에게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고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악을 두려워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처럼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안디옥 사역 ( 14:27, 28 )

안디옥에 온 바나바와 바울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주신 것을 알리고 제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와 바울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자기들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셨음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은 두 사도의 모습은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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