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1절~6절]
1절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절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절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절 -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절 -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절 -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배경 이해하기]
역사서가 역사적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과 달리 시편에는 역사적 설명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시편은 예언서가 죄를 지적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런 시편 안에는 인생의 경륜과 체험을 통해 얻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삶의 현장에서 찾아낸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과 같습니다. 150편에 달하는 시편 전체가 어떤 내용인지 알려 주는 도입부입니다. 이는 시편 1편을 시작하는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절의 첫 단어인 ‘아쉬레’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음인 ‘알렢’(a)으로 시작하고, 6절의 마지막 단어인 ‘토베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자음 ‘타우’(t)로 시작합니다. 1절 첫 단어인 ‘아쉬레’(복되도다)는 감탄사입니다. 복수형으로 쓰인 이 단어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복덩어리들이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6절의 마지막 단어 ‘망하리로다’는 망하는 인생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시편 기자는 인생에 대조적인 두 종류의 인생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바로 복된 인생과 망하는 인생입니다.
[관찰과 묵상]
1. 복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나요? 그에게 약속된 복은 무엇인가요? (1~3절)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그는 열매 맺는 복과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처럼 모든 일이 형통케 되는 복을 얻습니다.
1절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히, 아쉬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통해 복 있는 사람의 삶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보여 줍니다. 1절에 나오는 세 개의 병행 구문은 복 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것을 알려 줍니다.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불신함에서 나오는 얄팍한 꾀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믿음이 없는 생각들입니다.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길은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굳어진 곳입니다. 악인들의 꾀가 반복되면 죄인들의 길이 됩니다. 생각으로 존재하던 꾀가 반복될 때, 길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 죄의 시작은 작은 생각(꾀)입니다. 그러한 악인들의 꾀가 반복되어 죄인들의 길이 됩니다. 그리고 점차 넓고 편한 자리가 되어 눌러앉게 됩니다. 이처럼 죄는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잠식시켜, 죄가 삶이 되게 합니다. 2절은 복 있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 같은 형통함의 복을 받습니다.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 형통함의 길입니다.
적용과 나눔
내가 피할 악한 생각, 죄의 길, 오만한 자리는 무엇인가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기 위해 결단할 삶의 습관은 무엇인가요?
취미로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수십 킬로미터를 뛰어가면서 그 자체를 즐거워하며 즐깁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저렇게 고생하는데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저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인들은 달리는 그 과정을 통해 즐거움을 발견하고,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 완주의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주님이 주신 말씀,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믿음의 마라톤을 하는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가 말씀을 따라 사는 모습이 힘들어 보이고 순탄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악인들은 자신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사명의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2. 시편 기자는 악인들의 행로를 어떻게 묘사하나요? 반면 의인들의 길은 어떻게 된다고 말하나요?(4~6절)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해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1편 전반부는 악인들의 꾀와 그들의 길과 앉아 있는 자리를 통해 악인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외견상 그들의 모임과 자리는 높이 쌓아 올린 겨의 더미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후반부(4~6절)에 가면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악인과 의인의 자리가 뒤바뀌는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농부들은 추수할 때가 되면 곡물의 알곡만 골라내고, 겨는 불에 태우거나 바람에 날려 버립니다. 성경은 타작마당에서 키질과 갈퀴질을 하며 쓸모없는 겨와 껍질을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통해 악인들의 결국을 보여 줍니다(4절). 1절에서 그렇게 당당해 보였던 악인들의 모습이 4절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어지는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절)라는 말씀은 의인들의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악인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에 대한 최종 판결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라고 했습니다. 불의의 길을 걷는 자들이 맞이하는 최후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자의 결국은 여호와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적용과 나눔
내 인생에 찾아오는 수많은 선택과 갈등의 순간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들의 길로 어떻게 행할 수 있을지 나누어 보세요.
성경은 복을 단순하게 재물의 축적이나 부와 연관 지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건강이나 관계가 원활한 것으로 제한하지도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과의 관계를 단호하게 잘라 버리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복 있는 사람이 의인이며, 의인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성경은 악인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성도는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 받는 자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며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길을 선택한다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복 받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 의인을 상징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악인을 상징하는 ‘바람에 나는 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지만, 겨는 사방팔방으로 날려다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해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양분을 얻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결국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따라 구분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는 사람은 복을 누리지만, 말씀을 떠나 죄악의 길로 행하는 사람의 종말은 멸망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말씀을 사모하며 주야로 묵상함으로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악한 꾀와 죄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